겨울강

ㅡ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젖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장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죽음에 관하여

ㅡ 오탁번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기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시집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에서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벙어리장갑

ㅡ오탁번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시집 :벙어리 장갑 (문학사상사.2002.10)

 

시집(詩集)보내다 

ㅡ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 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오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난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 줬나?

줄잡아 몇 만평도 넘을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는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헌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 『유심』(2011년 1,2월호)

 

 

https://m.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2151730001#c2b

 

오탁번 시인 별세···‘정지용 연구’ ‘신춘문예 3관왕’으로 널리 알려져

국문학자이자 시인인 오탁번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오후 9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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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1967년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중앙일보, 1969년 소설 ‘처형의 땅’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뽑혔다.

1971년 2월 낸 석사 논문이 ‘지용시 연구: 그 환경과 특성을 중심으로’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 때로 월북 문인 연구는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정지용과 백석 등 월북 문인 책은 금서로 묶였다가 1988년 해금됐다.

 

https://blog.naver.com/nsunday/221827484741

 

오탁번 시 35편 모음 (시집보내다.버스승강장,마늘밭, 봄날,그냥 外)

오탁번 시 35편 모음 (시집보내다.버스승강장,마늘밭, 봄날,그냥 外) 오탁번 시인은 영문학, 국문학을 공부...

blog.naver.com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좃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

[​시향 /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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