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의 시인(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젊어서 여러 나라에 만유(漫遊)하고, 뒤에 출사(出仕)하였으나 안녹산의 난으로 유배되는 등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칠언 절구에 특히 뛰어났으며, 이별과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牧丹宴)에서 취중에 <청평조(淸平調)> 3수를 지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에 대하여 시선(詩仙)으로 칭하여진다.

시문집에 ≪이태백시집≫ 30권이 있다.

 

백거이, 비파행 (琵琶行) - 늙은 창부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RQtO5eZwm04 

 

https://kydong77.tistory.com/15461

 

082 이백(李白), 行路難 -살아가기 어려워라 1/3

082 행로난삼수지일(行路難三首之一) (세상살이 어려워라) ㅡ 이백(李白;701-762) 金樽淸酒斗十千, (금준청주두십천),금항아리 맑은 술, 한 말 값이 만량이요 玉盤珍羞値萬錢. (옥반진수치만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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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이백(李白),行路難 -살아가기 어려워라 2/3

083 행로난 삼수지이(行路難三首之二) -세상살이 어려워라 ㅡ 이백(李白;701-762) 大道如靑天, (대도여청천),큰 길은 푸른 하늘과 같은데 我獨不得出. (아독부득출).나만이 나아갈 수가 없구나 羞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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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이백(李白),行路難 살아가기 어려워라 3/3

로난삼수지삼(行路難三首之三)-이백(李白;701-762) ㅡ세상살이 어려워라 有耳莫洗穎川水, (유이막세영천수), 귀가 있어도 영천의 물에 씻지 말고 有口莫食首陽蕨. (유구막식수양궐). 입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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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wings81&logNo=220858628605 

 

청평조 삼수(淸平調三首:당현종과 양귀비)-이백(李白)[당시삼백수]

당시삼백수     청평조 삼수(淸平調三首)-이백(李白;701-762) '청평조(淸平調)'는 본래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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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白, 淸平調三首之一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구름 같은 저고리와 치마,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로화농, 봄바람이 난간에 스치고 이슬방울 짙어진다 

若非群玉山頭見   

야비군옥산두견, 만약 군옥산(群玉山) 꼭대기에서 보지 못한다면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요대(瑤臺) 달빛 아래에서 만나리라

 

李白 淸平調三首之二 

一枝紅豔露凝香   

일지홍염로응향, 한 가지 붉은 꽃, 이슬에 향기 어려 있는데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무산의 운우지정에 공연히 애만 끊었구나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나라 궁실엔 누가 이와 같을까

可憐飛燕倚新妝  

련비연의신장, 아름다운 비연(趙飛燕)도 새 단장 해야 하리

 

李白,  淸平調 三首之三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량상환) 모란과 경국지색(傾國之色), 둘이 서로 기뻐하니

常得君王帶笑看

(상득군왕대소간) 항상 군왕은 웃음 지으며 바라본다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봄바람의 무한한 한을 풀어버리고

沈香亭北倚闌干

(침향정북의난간)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있다

 

[참고]

https://www.cm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401430 

 

중국의 4대 미인과 미인에 대한 중국의 인식 - 중국망

중국역사상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옥환(楊玉環)이란 4대 미녀가 있다는 건 동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4대 미녀는 수 천년에 이어져 온 동양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오늘날

www.cmnews.kr

 

서시(西施)

춘추시대말기에월(越)나라에 도화(桃花)처럼 예쁜 얼굴을 타고난 서시는 지나가는 물고기도 그녀의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아 침어(浸魚)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당시서시는 심장병으로 인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 쥐고 얼굴을 찌푸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를 동네 여자들이 많이 흉내 내었다고 한다. 여기서‘서시가 가슴을 쓸어내리다’는 ‘서시봉심西施捧心’과 ‘서시가 눈살을 찌푸리다’는 ‘서시빈목西施嚬目’이란 사자성어가 따라 나왔다.

​또한, 서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이기도 하다. 당시 서시의 조국인 월나라는 오(吳)나라에 패망한 상태였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왕소군(王昭君)

어느가을의화창한날, 변경을 나서 흉노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은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해 비파를 연주했는데, 이 비장한 이별의 곡에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졌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두고 ‘낙안(落雁)’이라 했다.

왕소군은중국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절세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추하게 그려진 왕소군은 끝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 보내졌다. 흉노와의 화친(和親)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초선(貂蟬)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어느날 초선은 뒤 뜰화원에서 달을 쳐다보니 달이 그 미모에 움츠려져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폐월(閉月)’이란 표현으로 그녀의 미모를 형언했다.

​초선은『삼국지연의』에나온인물로, 왕윤 부중(府中)의 가기(家妓·궁중 또는 관청이 아닌 개인 사가의 기녀)였는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고 한다. 포악한 동탁 때문에 한나라 황실이 위태로워지자 왕윤(王允)은 초선에게 연환계(連環計)를 사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도록 했다. 여포가 동탁을 죽인 뒤 초선을 첩으로 삼았지만, 조조(曹操)가 여포를 사로잡아 죽이고 초선을 허도(許都)로 보냈다고 한다. 야사(野史)에는 조조가 관우(關羽)에게 준 후 관우는 홍안화수(紅顔禍水, 예쁜 여자는 화를 초래한다)란 이유로 초선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양귀비(楊玉環)

양귀비의 본래이름은 양옥환으로 17세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 이모와 혼인을 하였다. 양귀비가 막궁에 들어갔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원에서 꽃을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만발하는 꽃들에게 신세한 탄을 하면서 손으로 꽃을 만지니 갑자기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고하여‘수화(羞花)’의 미모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 즉,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현종의 눈에 들게 되어 귀비로 책봉되고 현대에 익숙한 이름은 양귀비가 되었다. 비록 신분은 비(妃)였지만 당시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양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인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출처 : 중국망(http://www.cmnews.kr)

 

https://www.youtube.com/watch?v=5oB5Ru8y_eE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 빼어난 미녀 3천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3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고

(중략)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제형개렬토,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

수련천하부모심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그러나 현종과 양귀비로 인해 특권을 얻은 세 자매와 양씨 일족은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당나라를 좀먹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특히 그중에서 끝판왕은 양국충으로 양귀비의 뒷배만 믿고 각종의 국정 농단을 저질렀으며, 양귀비와 현종의 눈에 든 절도사 안녹산과 권력을 놓고 서로 반목하여 당나라를 파국으로 몰았다.

결국 천보 14재(755, 37세)에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세워 동북 변방의 번장 안녹산(安祿山)이 대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천보 15재(756, 38세)에는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장안(長安)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왔고, 귀비와 황제 일행은 사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장안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진현례(陳玄禮)와 호위 병사들의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간신 양국충과 그 자매를 포함한 양씨 일족을 학살한 후, 모든 사단의 원흉인 양귀비를 처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항의를 했다(마외병변).

물론 현종은 양귀비는 죄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변호했지만 워낙 병사들의 기세가 드세어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양귀비는 고력사의 도움을 받아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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