聞喜慶瑞/ 한자 가로쓰기는 새재 안내소 현판처럼 左에서 右측 방향이 원칙임.

문경(聞慶)이란 지명은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聞'과 '慶'을 취한 말.

(직역)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소식을 듣고 기뻐하다.

과거시험 합격, 이보다 더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소식이 세상 또 어디 있겠는가?

벼슬길(출세길)이 열리는데.

 

[흔한 유머]

조령 이남 사람들은 새들이나 날아다니는 험한 이 길을 과거보러 가는 한양가는 길로 선택했는가?

죽령과 추풍령도 있는데.

죽령길로 갔다간 죽죽 미끄러질까 겁나고,

추풍령길을 선택하면 추풍낙엽될까 두려워서.

 

http://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29575

 

(26)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 문경(聞慶), 지명 이야기

이만유의 문경사랑 26

kukak21.com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398

 

문경새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오래전부터 알려온 천연의 험로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까지의 험준한 길이 소백산맥의 줄기 주흘산(主屹山, 1,106m)ㆍ조령산(鳥嶺山, 1,017m)ㆍ부봉(釜峰, 915m) 등에 겹겹이 쌓여 있다. 새재는 이들 고개 가운데서도 가장 지름길이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동쪽 산곡에는 조령천을 따라 영남로의 옛길에 조선시대에 축성한 세 개의 관문 가운데 제1관문인 주흘관(主吃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을 1977년에 말끔하게 단장하여 옛 모습을 되찾아 놓았다.

지금의 포장도로인 이화령(梨花嶺)은 일제강점기 때 새로이 개설한 것이며, 옛길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겨진 사적지로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 길이 청소년 국토순례코스 및 극기훈련장으로 개발이 되었다.

문경새재는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다

 

문경새재 -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聞慶, 문희경서(聞喜慶瑞)

 

문경새재 -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聞慶, 문희경서(聞喜慶瑞)

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A%B2%BD_%EC%A1%B0%EB%A0%B9_%EA%B4%80%EB%AC%B8 문경 조령 관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경 조령 관문(聞慶 鳥嶺 關門)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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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8556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문경새재아리랑, 길쌈

http://blog.daum.net/kieury/11302851 문경새재 주막(酒幕) 문경새재 주막(酒幕) 새재(鳥嶺)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 길로 오르던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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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아리랑(2018)

https://www.youtube.com/watch?v=6lBqbit8sPc

 

문경새재 덕무푸레 / 말채 쇠채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 북바듸 집으로 다나간다.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자루로 다 나간다.] -(누락됨)

*"물박달나무"이나 음절수를 맞추기 위해 첫음절인 '물'을 생략하기도 함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면 / 큰 애기 손질에 다 녹는다.

뒷동산에 박달나무 / 길마까지로 다 나간다. *길마까지는 '길마'길마가지'의 잘못 .

* 길맛가지 길마는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하는, 사투리로는 "질매"

화개연곡(구례군) 큰애기는 / 알밤 주시로 다나가고

동구(함양)마천 큰 애기는 / 꼬감 접으로 다나간다.

대장부 쓸만한 건 / 징용징병으로 다나간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고나

[가사출처] http://mgarirang.or.kr/doc/mgsj03.html

 

문경새재아리랑(2015)

https://www.youtube.com/watch?v=bIPpyGwlQWk

* "삼베 질쌈(길쌈) 못한다고 날가라네." 가사와 "요망한 년"을 돼뇌며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모습의 재현이 코믹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왕년의 현실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상하질서가 뚜렸한 세상이었으니까요.

 

제1관문 주흘관

https://www.youtube.com/watch?v=Dl9cB7xLEII 

 

2관문 조곡관

www.youtube.com/watch?v=bdIfI2TTXhg

 

3관문 조령관

https://kydong77.tistory.com/18880?category=1024434

 

문경새재 조령관/ 제3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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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2o5zFlKFYIQ

 

 

https://www.youtube.com/watch?v=MIUaUG_5oj4

 

 

https://www.youtube.com/watch?v=Lcd0D9q78lE

 

 

진입로  좌측이 조령산, 우측이 주흘산 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zPGWwpyOUg

 

https://kydong77.tistory.com/18905

 

문경새재를 잊지 못하는 선비들/ 이이, 류성룡, 신경림

https://www.youtube.com/watch?v=wR4xUz_ls10 시각 진행바 5:00 이후의 문경 사람들의 멋진 유머가 돋보이네요. "낙동강 칠백리에 홍수가 다 났네." 라는 이처럼 재담의 스케일이 큰 것은 아마도 주흘산과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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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길의 명소 교귀정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1753&sc_serial_code=SRN317

 

[정자] 22. 문경 교귀정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문경새재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계절은 바야흐로 성하로 치닫고 있다. 녹음은 짙푸르러 눈이 시린데 먼지 폴폴 나는 길은 길게 이어진다.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는 진도아리랑 가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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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년)에 길이 열렸다. 그전 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이 유일한 길이었다. 길은 험했지만 사회 문화 경제 국방의 요충지였다. '택리지'는 '조선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됐다'고 했는데 그 선비들은 새재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들은' 케이스다.

새재에 있는 세 개의 관문은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산성을 만들고 관문을 설치하자고 주장해 이뤄졌다. 첫 번째 관문은 주흘관으로 숙종 34년(1708년) 설치 됐다. 2관문인 조곡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27년(1594년)에 세워졌다. 3관문은 조령관으로 새재 꼭대기에 있다.

교귀정은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 출장 중인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조령원터가 나오고 조금더 올라가면 길건너편에 선비들이 새재를 넘어가면서 술 밥을 해결하던 문경주막터가 나온다. 주막터를 지나면 교귀정이 보인다. 1470년 경에 문경현감 신승명이 건립했다.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타 없어졌다가 1999년 6월 복원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https://kydong77.tistory.com/19605

 

문경새재 단풍길

문경새재아리랑 (1915) https://www.youtube.com/watch?v=wR4xUz_ls10 문경새재아리랑 (1915) https://www.youtube.com/watch?v=wR4xUz_ls10 시각 진행바 5:00 이후의 문경 사람들의 멋진 유머가 돋보이네요. 낙동강 칠백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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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30710_0002369852#_PA

 

문경시, 하늘재 옛길 복원…"삼국사기에 기록된 첫 고갯길"

김진호 기자 = 경북 문경시는 하늘재 옛길을 복원했다고 10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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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관산현, 고려시대 때는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경(聞慶)으로 불리어왔다. 문희, 문경은 들을 문(聞), 기쁠 희(喜), 경사 경(慶) 자로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기분 좋은 지명이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바라며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나 전국의 보부상들이 대박을 꿈꾸며 팔도를 다닐 때 주로 이용했던 고갯길이 문경새재다. 한양으로 가는 대표적인 큰길로 추풍령, 문경새재(조령), 죽령이 있었지만, 속설에 의하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 쓴다거나 죽 미끄러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으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인지 예로부터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뜻으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문경에는 “문경삼관(聞慶三關) 대한삼경(大韓三慶)”이란 말이 있다. 선견지명이 있는 옛사람들이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 풍토와 지형, 천문지리를 관찰하여 미래를 미리 짐작하여 숨은 뜻을 지명(地名)을 통하여 전한다는데 그래서일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관문 3개 있고, 그 문경에서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큰 경사 소식을 3번 듣는다는 예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번째가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몽진하여 인근을 순행 중 문경 주흘산 어류동(御留洞)에 머물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 제1경이며, 두 번째는 주역학의 종장(宗長) 야산(也山) 이달 선생이 지리산에 계실 때 멀리 문경 쪽에서 서기가 비치므로 천기를 받아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임을 알고 1945년 8월 14일 전국의 제자들을 문경으로 모이게 해서 꼬끼오! 꼬끼오! 하며 닭춤을 추었는데 이를 보고 제자들이 영문을 몰라 했으나 그다음 날 광복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 다시 말해 꼬끼오! 닭이 울어 새날이 밝았다는 신호를 보낸 조국광복의 제2경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나라의 경사 제3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처럼 남북통일이 될 것인데 그 소식도 문경에서 제일 먼저 듣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때부터 하늘재는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하늘재를 통해 신라에 불교가 전파됐고, 하늘재를 두고 삼국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특히 고구려 온달 장군은 목숨을 걸고 하늘재를 탈환하고 싶어 했다.

하늘재는 문경 도자기의 판로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초 문경새재길이 공식화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반드시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이 역사적인 길이 지금까지 충주 구간에만 남아 있었다.

문경시가 이번에 하늘재 옛길을 복원함으로써 문경과 충주를 잇는 하늘재 옛길이 완성됐다.

하늘재 옛길 복원사업은 하늘재 관광 자원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19년부터 시작됐다.

하늘재 정상에서 포암산을 지나 관음1리 마을로 이어지는 2.48㎞의 옛길을 복원하고, 마을 특산품 판매 및 하늘재 홍보를 위한 마을 공동구판장도 건립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오랜 역사의 현장이며,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하늘재가 2000여 년 만에 다시 열린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힐링할 수 있는 명품 옛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http://www.mgnews.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251&idx=58519

 

[문경시민신문]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 문경(聞慶), 지명 이야기

문경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관산현, 고려시대 때는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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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관산현, 고려시대 때는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경(聞慶)으로 불리어왔다. 문희, 문경은 들을 문(聞), 기쁠 희(喜), 경사 경(慶) 자로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기분 좋은 지명이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바라며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나 전국의 보부상들이 대박을 꿈꾸며 팔도를 다닐 때 주로 이용했던 고갯길이 문경새재다. 한양으로 가는 대표적인 큰길로 추풍령, 문경새재(조령), 죽령이 있었지만, 속설에 의하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 쓴다거나 죽 미끄러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으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인지 예로부터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뜻으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문경에는 “문경삼관(聞慶三關) 대한삼경(大韓三慶)”이란 말이 있다. 선견지명이 있는 옛사람들이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 풍토와 지형, 천문지리를 관찰하여 미래를 미리 짐작하여 숨은 뜻을 지명(地名)을 통하여 전한다는데 그래서일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관문 3개 있고, 그 문경에서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큰 경사 소식을 3번 듣는다는 예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번째가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몽진하여 인근을 순행 중 문경 주흘산 어류동(御留洞)에 머물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 제1경이며, 두 번째는 주역학의 종장(宗長) 야산(也山) 이달 선생이 지리산에 계실 때 멀리 문경 쪽에서 서기가 비치므로 천기를 받아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임을 알고 1945년 8월 14일 전국의 제자들을 문경으로 모이게 해서 꼬끼오! 꼬끼오! 하며 닭춤을 추었는데 이를 보고 제자들이 영문을 몰라 했으나 그다음 날 광복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 다시 말해 꼬끼오! 닭이 울어 새날이 밝았다는 신호를 보낸 조국광복의 제2경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나라의 경사 제3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처럼 남북통일이 될 것인데 그 소식도 문경에서 제일 먼저 듣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문경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 선사시대(先史時代)
신석기시대부터 집단마을을 형성하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특히 산양 금천 주변 등 청동기시대 유물인 성혈과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진한·변한 중에 변(弁), 진(辰)의 읍락국가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진한계 근기국(勤耆國)은 산양 지역이고, 진한계 호로국(戶路國)은 점촌과 호계지역이며,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은 상주 함창지방이고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은 함창 또는 용궁지역이나 우리 시의 일부가 포함된다.

○ 삼국시대(三國時代)
서기 505년(지증왕 6년)에 신라 지방제도 확정으로 관문현(冠文縣)・관현(冠縣)・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 불렀으며 현재의 문경・마성지역이다. 가해현(加害縣)은 가은・농암지역이며 호측현(虎側縣) 혹은 배산성(拜山城)은 점촌시・호계면 지역이고, 근품현(近品縣)은 현재의 산양・산북지역이다. 고동람군(古冬攬郡) 혹은 고능군(古陵郡)은 상주시 함창읍(咸昌邑) 지역이며 점촌과 영순면의 일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된다. 축산현(竺山縣) 혹은 원산(圓山)은 예천군 용궁지역으로 영순면의 일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되며 난산현(蘭山縣)은 동로・산북면 일부가 포함된다.

○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서기 757년(경덕왕 16년)에 신라 지방제도가 9주 5소경, 117군, 293현으로 개편되면서 관산현(冠山縣)이 되었는데 현재 문경・마성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 : 현 함창)의 영현이다. 가선현(嘉善縣)은 가은・농암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이다. 호계현(虎溪縣)은 점촌과 호계면의 일부 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이다. 가유현(嘉猷縣)은 산양・산북지역으로 예천군(醴泉郡)의 영현이다. 안인현(安仁縣)은 예천군 영현으로 동로면 일원과 옛 화장면 일원이다.

○ 고려시대(高麗時代)
신라 경덕왕이 관산현(冠山縣)이라 한 것을 940년(고려 태조 23)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개칭하고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문희군(聞喜郡)과 가은현(加恩縣), 호계현(虎溪縣), 산양현(山陽縣), 영순현(永順懸)은 상주목의 속현이 되고 안인현(동로면과 옛 화장면)은 예천군에 폐합되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문경군(聞慶郡)으로 고쳤다. 공양왕 2년(1390)에 문경군(聞慶郡)에 감무를 두었으며 가은현(加恩懸)은 상주의 속읍에서 문경의 속읍이 되었다.

○ 조선시대(朝鮮時代)
서기 1414년(태종 14년)에 8도 체제를 완비하였는데 문경현의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고 호계현을 합병하였다. 가은현은 문경현의 속현으로, 산양과 영순현은 상주의 속현으로 있었으며 1892년(고종 29년)에 문경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에 8도 체제가 23부로 개편되고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군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단일화하였다. 이때 문경이 상주, 용궁, 예천 등 이웃 군에 할양되어 문경군이 행정 편제상 없어졌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에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고 문경군이 환원되었다. 1906년 1월 19일에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1906년 9월 24일 상주군의 산서, 산남, 산동, 산북, 영순면을 편입하였다.

○ 근․현대시대(近․現代時代)
서기 1914년 4월 1일에 용궁군의 서면과 함창읍의 동면 일부를 편입 현재의 시계(市界)를 형성(11면, 129리)하였고 1933년(경상북도령 33호)에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10면, 129리)되었고 1949년 3월 10일에 문경군청이 문경읍 상리에서 호서남면 점촌리 232로 이전하였다. 1956년 7월 8일에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법률 제393호)되었고 1963년 1월 1일 농암면 삼송리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68년 9월 3일 군 청사를 모전리 59-2번지로 신축 이전, 1973년 7월 1일 호계면 봉정리를 산양면으로 편입(대통령령 3789호)하였고 문경, 가은(이안면 저음리를 가은읍에 편입)이 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6543호)되었다.

그리고 1986년 1월 1일 점촌읍이 호계면 별암 2리를 편입하여 점촌시로 승격(법률 제3798호)되었고 1989년 1월 1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점촌시에 편입, 1995년 1월 1일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하여(법률 제4774호) 문경시가 되었다. 1999년 1월 1일 신기. 대성. 공평동을 통합하여 신평동을 설치하였고 2004년 1월 1일 점촌동, 중앙동, 신흥동, 신평동, 모전동을 점촌1·2·3·4·5동으로 동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 5개 동과 2개 읍, 7개 면이 있다.

그런데 문경의 지명 변천 과정을 보면서 눈여겨볼 흥미롭고 특별한 것은 “1895년(고종 35년) 5월 26일에 8도 체제가 23부로 개편되고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군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단일화하였다. 이때 문경이 상주, 용궁, 예천 등 이웃 군에 할양되어 ”문경군”이 행정 편제상 없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 문경이 우리나라 역사상 1년여간 증발, 존재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896년(建陽 元年) 8월 4일에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될 때 문경군이 환원되었으니 망정이지 우리의 삶의 터전인 문경이 대한민국에서 사라질뻔한 아찔한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문경(聞慶)이란 지명이 문경현지(聞慶縣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 보면 “恭愍王聞捷報於本縣仍改今名” 이란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년∼1374년)이 원나라 말 농민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해 복주(福州:현 安東)으로 파천(播遷)했다가 지역 순방 중 주흘산(主屹山)에 머물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송경(松京: 現 開城)을 수복했다는 승전보 듣게 된 곳이라 하여 “들을 聞, 경사 慶” 자를 써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으로 문경(聞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삼국사기 권 34 잡지3에 “冠山縣 本冠縣 一云冠門縣 景德王改名 今聞慶縣”-“관산현은 본래 관현 또는 관문현이라 한다.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문경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今聞慶縣”를 주목해 보면 위의 공민왕 때 문경이란 지명을 처음 불리게 되었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17대-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것인데 그때 이미 문경이라 지명을 사용하였으니 편찬 그 이전부터 문경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1361년 11월 19일에 홍건적이 침략, 몽진길에 올라 동년 12월 15일에 안동에 도착, 1362년 2월 신축일에 환도했다면 1362년 공민왕 환도 연도와 1145년 삼국사기 편찬 연도와의 차이는 217년이다. 정리하면 공민왕이 문경 땅에 머문 시기보다 217년 전에 이미 문경이란 지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문경군(聞慶郡)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으로 비교해도 127년의 시차가 있다. 정사와 설화로 이해해야 할지? 규명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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