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45fCvCnN5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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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9T8HThQwe0
고형렬 시인 기고문
“근현대문학의 최고 시인…지금 읽어도 새롭고 경이로운 시편들”
“민족 언어를 시로 이어주고 조합…내재적 저항과 서정의 절정”
2025년 12월은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때다.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등은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시이자 김소월의 대표작이다. 김소월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할 정도로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담아낸 시를 써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진달래꽃> 간행 100년을 맞아 김소월을 추모하는 고형렬(71) 시인의 특별 기고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005
출처 : 월간중앙(https://www.m-joongang.com)
한국 시사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을 소유한 시인 - 월간중앙
2025년 12월은 김소월의 시집 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때다.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등은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시이자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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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은 생전에 남긴 사진도 한두 장뿐이었다. 김소월 사진과 1925년 12월 간행된 '진달래꽃' 시집 초판본 표지.
[사진 국제소월협회]
소월 김정식(素月 金廷湜, 1902~1934)은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금산리에서 공주김씨 김성도(金性燾, 1863~?)와 장경숙(張景淑, 1882~?)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나이 차이가 열아홉 살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이나 장손으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기대를 짊어져 ‘잣놈’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소월은 두 살 때 부친이 곽산과 정주를 연결하는 철도의 일본 노동자들에게 당한 폭행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사망하자 광산업을 하는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자랐다. 할아버지는 소월이 5살 때 독서당을 만들어 훈장을 초빙해서 한문을 공부시켰다. 어려서 소월은 모친 장경숙보다 숙모 계희영을 더 따랐으며 그녀로부터 민담 등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숙모는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옷도 한 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라며 어린 시절의 소월을 기억했다.
소월은 14세 때(1916년) 구산의 평지동(坪地洞) 사람 홍시옥(洪時玉)의 딸 홍단실(洪丹實, 본명 홍상(洪尙))과 결혼했다. 소월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나눈 취중의 언약으로 정혼을 시켰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할아버지가 손자를 빨리 결혼시킨 것으로 보인다. 소월과 홍단실은 슬하에 4남 2녀(장녀 구생, 차녀 구원, 장남 준호, 차남 은호, 삼남 정호, 사남 낙호)를 두었다. 그중 삼남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자 다시 자진 입대해 병장으로 전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월은 14세 때 남산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오산학교에 들어간다. 오산학교(五山學校)는 1907년 1월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운동의 인재와 국민교육의 사표(師表)를 양성할 목적으로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학교다. 소월은 수리에 밝고 언어적 정서가 예민하고 직관이 빠른 학생이었다. 주산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다. 소월의 사상적 스승은 소월이 13세 되던 1915년 5월, 33세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던 조만식(그는 백석 시인의 모친이 하던 하숙집에서 기거했다)이었고, 문학의 스승은 그의 시를 발굴한 정주 출신의 오산학교 영어 교사 김억이었다. 소월은 김억의 추천으로 결혼한 지 4년이 되던 18세(1920) 때 <창조>(5호)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한다. 같은 해 7월에는 <학생계> 창간호에 ‘먼 후일(後日)’을, 20세가 되던 1922년 1월에 명시 ‘금잔디’와 ‘엄마야 누나야’를, 다시 7월에 이 땅의 최고 명시로 꼽히는 ‘진달래꽃’을 <개벽>(25호에)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3년 5월에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를 <개벽>(35호)에 발표한다. 소월은 이어 1924년에 ‘산유화’(동인지 <영대> 3호)를 발표한다. <창조>의 후신으로 1924년에 김동인이 창간하고 이듬해에 폐간된 이 잡지가 없었다면 아마도 ‘산유화’는 유실됐을 것이다. 이처럼 1920~1924년은 우리 시사에 다시 없을 불멸의 시가 탄생하는 경이로운 시기였다. 그 후 한국 시사에 그처럼 아름답고 슬픈 시와 천재 시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인 김소월. 소월은 섬세하고 강했으며 결코 나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부서지고 갈라진 이 땅의 면면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향한 정신 속에서 쉼 없이 피어나는 민족의 꽃이다. [중앙포토]
오산학교 조만식과 김억이 소월의 스승
소월이 생전에 남긴 사진도 한두 장뿐이었다. 자기를 드러내거나 증명하는 것을 꺼려서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오직 언어로만 세계와 자신을 표현하길 바랐다. 소월은 향가와 민요 가락을 현대적 형식으로 계승한 탁월한 시인이었지만 20세기 초중반의 세계사적 격변, 일제 탄압과 수탈, 태평양전쟁과 8·15 광복, 한국전쟁 등의 격랑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생전에 그의 고도한 시 정신과 치열한 삶이 제대로 해석되고 그것을 누릴 기회와 여유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오산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이었던 소월은 삼천리를 휩쓴 3·1운동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가슴에 전단 한 뭉치를 감추고 선두에 섰다가 정주 경찰대가 급거 출동했을 때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일 년 뒤 그는 ‘먼 후일(後日)’을 발표하는데, 이 시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범속한 작품이 아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폐교된 모교를 찾았을 때, 오산학교는 일본 헌병들에 의해 이미 불태워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일경(日警)이 매일 집을 찾아와 가족을 괴롭혔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군국주의의 정신적 폭력과 식민화를 강화하는 공포와 회유, 배신이 난무하는 광기와 과속의 시대였다. 경성보다 더 촘촘한 감시망이 설치되어 있었을 지역에서 요시찰 인물이 된 소월은 일경과 관련된 요로 기관에 낙인찍힌 젊은이로서 일정한 직업과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 무렵 그에게는 영혼의 대화를 나눌 만한 문우와 동지도 없었다. 격랑의 시대에 비망록도 문인들과의 교우도 없었던 그는 은폐의 시인이 된다. 10년 연하로서 소월을 흠모했을 오산학교 후배 백석(1912~1996)도 그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없다. 1925년에 백석은 오산학교 2학년이었다. 백석은 소월과 같은 나이인 18세에 등단했고, 그해 소월은 청산 같은 28세였다. 소월은 이처럼 지역 사회와 조선 문단에서 기이한 단독자가 되어 바다 한가운데에서 풍파를 맞은 돛처럼 어디론가 밀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그가 발표하는 시편들은 모두 탈취당한 자연과 마음을 향한 희생과 이별의 아픔, 사랑과 기다림을 약속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소월은 자신의 의식을 선한 사람의 마음에 얹고 민요 정신의 모시옷을 걸치고 매우 강력하고 섬세한 내적 저항의 은유를 표출했다.
소월이 태어난 와인리. 소월은 1902년 9월 7일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와인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구성 왼쪽의 상석동 아래에 와인리가 보인다.
1925년 12월에 시집 <진달래꽃> 출간
선택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그는 겨우 자신을 고향에 붙들어두었다. 아무 보호막이 없이 그가 혼자 ‘그곳’에서 견뎠다는 것은 그의 생애를 실존적으로 조명해야 할 중대한 어둠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소월의 그 닫혀 있는 조리개를 열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지녔던 시적 고독과 언어의 표상은 매우 가파르고 숨 막히며 슬프고 높고 멀고 아득하다. 이런 연유로 그는 비극적인 이 땅의 시와 시인들의 “산산이 부서진 (우리들) 이름”의 민족 공동체 자화상이 되었을 것이다. 한결같이 ‘마음 거울’에 비춰보았을 그 내면의 초상과 언어들 속엔 사람과 자연이 순연한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곳이 그의 시이고 언어이고 조국이었다.
일본 유학파로 알려진 조부는 그런 소월을 보다 못해 집안 재산의 절반을 정리하여 1923년에 도쿄 신주쿠(新宿)의 먼 서쪽에 있는 도쿄상대(현재의 히토쓰바시(一僑)대학, 일본 최초의 국립 상대)로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그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고 캠퍼스가 괴멸되자 소월은 급히 귀국했다. 그가 ‘진달래꽃’의 시인이라는 것은 친척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친척들은 그를 복을 주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소월은 관서 지역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자기 삶을 어떻게라도 개선하고자 했다. 소월은 한때 경성에서 4개월 동안 일자리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가까이 지내면서 <영대>의 형식적인 동인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인 1925년 12월에 시집 <진달래꽃>(매문사)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모두가 자비로 100부 정도의 시집을 출간했으나 소월에겐 그런 출판 비용이 없었다. 김억(김억의 부인이 소월의 육촌 누이란 설이 있음)이 사비를 들이지 않았다면 시집 <진달래꽃>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 있다.
제국의 식민지 경성은 그에게 생존 가능한 물적 토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곳에 취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산학교 출신이므로 지방에서의 취직은 더 어려웠다. 한 지역이란 한 다리 건너 모두가 친척이지만 그만큼 감시가 심한 곳이기도 했다. 그의 생은 마치 생계를 위한 취직을 거부한 것처럼 전개되어갔다. 성취된 일은 시집 한 권뿐이었다. 그로부터 9년이란 세월이 새벽 유리창의 희붐한 빛의 시간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소월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견고한 의지를 가진 시적 인간이고,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자의 거취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그러나 분명하지 않은 불운의 기운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에게 생활의 방편을 주지 않은 것은 자연이 준 운명이 아니라 체제가 그를 식민지 사회 조직의 일원에서 제외하거나 소외시켜 쓸모없는 존재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단풍으로 물든 영변 약산동대의 절경. 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배경이다.
1934년 12월, 서른둘에 의문투성이 죽음
밤의 검은 시간은 그의 육신을 속절없이 죽음 쪽으로 데리고 갔다. 문득문득 시골의 밤 골목에서 소월은 그 마수(魔手)와 자주 마주쳐 스쳐 지나갔다. 사업과 문학,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소월은 죽는 순간까지 경제적 자립을 위해 고투했다. 구성 지역에 고구마와 유자를 처음 도입하여 직접 가꾸고 길렀다. 나중엔 처가가 있는 구성군 남시(南市)에 동아일보 구성지국(당시의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은 방응모)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길도 그에게 경제적 자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속받은 전답을 사업 실패로 모두 잃은 소월은 일곱 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지만 다망가진 불구의 몸이 되어 있었다. 이 강산의 그 어느 한 곳도 일경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월의 가족과 친척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월의 시 정신을 죽이려는 음모는 저 먼 정주(定州)와 구성(龜城) 일대의 저잣거리와 요로에서 첩보되고 결국 소월이 수년 전부터 관절통에 시달려 아편을 복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관에 고발도 하지 않고 버려두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 고통을 참고 이겨왔다. 나뭇가지에 남은 잎조차 빼앗아가는 삭풍이 불어대는 썰렁한 그 날, 소월은 이미 다 망가진 몸을 아내에게 의탁하고 장에 나가서 아편을 구했다. 서른둘이라는 생의 마지막 달포가 남아 있던 1934년 12월 23일이었다. 산간의 12월 저녁은 금세 캄캄한 혹한이 되었고 능선 위의 별들은 반짝였다. 그날 밤, 한 오백 년은 더 살아야만 하는 부부는 함께 만취했으며 그다음 날 아침에 소월은 죽어 있었다. 아내는 아편을 먹지 않았는지, 같이 먹었는데 살아남았는지, 소월이 아편을 먹는 것을 허용하고 가는 길을 지켜보았는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선일보>는 소월이 죽은 지 사흘이 지난 1934년 12월 27일 자에 소월이 뇌일혈로 죽었다고 보도했다. 김윤식 교수는 소월이 저다병(楮多病, 각기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일제 탄압에 의한 물적 토대가 불가능한 생활과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압박과 불안, 우울 그리고 언어적 장애와 정신적 피해가 그 생사 저변에 깔렸음을 의심하고 구체적으로 심층 거론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죽음은 의문투성이가 되었다. 소월이 일본 경찰의 감시와 호출·조사·멸시를 받고 나서 만주로의 망명과 자살을 언급한 적이 있었듯이, 그가 고향을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새로운 해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소월은 강와 유혹, 분노를 떨쳐내면서 동남쪽으로 내리뻗은 낭림산맥에서 서남으로 갈라지는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 사이의, 서해를 남쪽에 둔 피와 뼈 같은 구성과 정주를 떠나지 않았다. 주변과 친척의 냉대와 멸시, 일제 관료들의 손가락질과 싸구려 동정을 받으면서 탈향도 망명도 허용하지 않고 고향인 정주에 자신을 감금시켰다.
소월은 오직 부서진 육신 속에 남아 있고 기다리고 있는 마음의 언어를 찾았다. 그의 묵수(墨守)의 진심은 자기 언어를 아끼고 다듬는 일이었다. 피나는 절차탁마가 어찌 그 천재 시인에게 없었겠는가. 손에 피도 묻히지 않고 그런 명편을 쓸 순 없는 일이다. 그는 온몸이 망가지고 찢어지고 부서지도록 가난과 시의 가래를 이끌었던 우리 언어의 고행자이자 우리 시의 순교자가 되었다. 자아와 친척, 이웃 그리고 지역과 민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려 고투했던 그가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소월이다. 완전한 소외는 곧 그다운 저항이고 자립이었다. 그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그것이 ‘산유화’이고 ‘진달래꽃’이었다. 그 이십 대의 경이로운 시업(詩業)은 먼저 고향에서 강탈당하는 우리의 것과 마음을 맘껏 퍼 올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매우 전략적인 창작법이고 생존법이었다. 일제 탄압과 지식인의 동화와 이탈은 그에게 정신적 피신을 요청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자발적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선택했다. 젊은 시인은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언어의 대리 고통으로 환치시키면서 더 살아갈 수 없음을 직시했을 것이다. 태양도 홀로 머리 위를 지나가기만 하는 구랍이 가까운 오지에서 그는 한없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생을 마감해야 했다.
소월이 스스로 생을 끊게 만든 것은 분명코 일제의 어두운 기운이었다.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이 윤동주를 ‘직접 살해’했다면, 그 11년 전에 평북의 한 평범한 마을에서 제국의 마수가 소월을 ‘간접 살해’했다. 소월이 꽃다운 서른둘에 죽음을 얻어 한(恨)의 밑바닥을 떠받치고 견뎠기에 이 땅에 시혼(詩魂)의 존립이 가능했다. 소월은 사상적 투쟁과 언어적 저항의 측면에서 그만한 자의식의 깊이를 충분히 마련하고 내재적 근거를 시로 형상화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압박과 약탈의 정면에서 꽃으로 피워 밝혔으며, 가없는 정신적 투쟁과 육신의 고통을 바친 죽음을 이 땅에 넘겼다. 소월 없이는 그 시대의 시적 형상화에 대한 재해석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고통받더라도 무엇을 깨닫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소월은 그것을 해낸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내면적 자살이 아니고 먼 외부로부터 온 강압의 은밀한 타살이었다. 자객과 작은 단체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일본 제국이 교사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살해였다. 그 한가운데에 소월의 죽음이 누워 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은 민족의 정서를 형상화하는 천재 시인 소월이었을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들끓는 민중적 자생의 읊조림을 가진 소월의 시편은 그들에게는 어떤 분노와 총칼보다 더 두려웠을 것이다. 제국에서 그처럼 두려운 것이 없겠기에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소월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소월이 아편을 먹고 사망한 곳은 구성군(龜城郡) 서산면(西山面) 평지동(坪地洞)이다. 일설에는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남시리(지금의 평양시 방현동)라고 하는데 읍·면·동의 통폐합에 의해 평양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민중적 자생의 읊조림을 가진 소월의 시편들
1934년 12월 23일. 동지를 지난 그 무렵의 심야는 소월의 죽음을 통하여 근현대 시사에서 일어난 최초의 이중적 죽음을 탄생시켰으며 그 의미를 부여했다. 초월적 의미와 저항적 스밈은 그야말로 삶과 시의 밑바닥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아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메타포(은유)를 완성하는 비극과 이별이 함께하는 것을 경험케 하는 깊은 겨울밤이었다. 소월은 서른두 해 동안 헤아릴 길 없는, 시로도 다 쓰지 못한 극한에 다다랐다가 벗어났다. 식민지 시대의 거대한 감옥 속에서 하나의 질병을 방편 삼아 자신을 희생시켰다. 이 시제(詩祭)의 제단을 보지 않고선 그의 죽음과 시, 생애가 오롯이 수면 위로 일출할 수가 없으며 제대로 해석될 수가 없다. 평지동이라는 마을의 자연 한가운데서 실행된 자기 결정의 죽음은 9년 전 <진달래꽃>에 실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의 다름 아닌 자기 예시였다. 산산이 부서져서만 영원할 수 있었다. 아편을 먹은 시인은 검은 죽음의 의상을 완성했으며, 1934년의 조선은 저 먼 곳 소월의 죽음으로 저물어갔다.
이제 자살과 타살을 넘어선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어둠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 돌아오는 아침이 되어야 한다. 소월은 모든 이 땅의 이즘과 형식, 체제, 이상을 이미 초월하여 죽음 이쪽에 있는 우리의 영육 속에 붉고도 희고 푸르게 흐르고 외치고 있는 무상(無上)의 민족시인이다. 그러니 소월에게 약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거나 인정해서 조용한 시인으로만 읽지 말아야 한다. 그 고요조차도 반소월적 이데올로기의 잔재이며 강요일 수 있다. 과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소월의 시는 사람이 부른 노래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시의 영이 와서 그에게 짧은 생애를 허락하면서 그 놀라운 시편들을 다 부르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시를 대가로 소월이 시의 면류관을 받은 것이 아닐까.
소월의 언어 자체는 쉬운 말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내용이 사람의 마음과 민족의 애환과 꿈을 다루고 있는 까닭에 매우 난해하다. 아직도 온전히 해석되지 않은 ‘진달래꽃’은 미래의 우리 마음속에 울리게 하려는 자신을 향했던 진혼(鎭魂)의 예시였다. 놀라운 시편의 성배를 마시고 다시 9년 동안 독배를 마신 소월, 그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소월에게 있는 기쁨보다는 인간의 본연에서 왔을 슬픔과 불가피를 더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껴안게 된다.
2020년 시인 김소월 등단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시·그림전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에 전시된 작품. [사진 교보문고]
우리 가슴속에 영원의 흰 그늘을 남겨준 소월
소월이야말로 생명감 넘치는, 진실로 사람과 자연, 자기 삶을 사랑하고 살고 싶게 하는 노래의 시인이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미래에도 소월의 노래는 지금을 늘 뛰어넘는 힘이 될 것이다. 소월은 섬세하고 강했으며 결코 나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부서지고 갈라진 이 땅의 면면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향한 정신 속에서 쉼 없이 피어나는 민족의 꽃이다.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에서 피는 ‘진달래꽃’을 보라, 내재적 저항과 서정의 절정에 오른 시인이 소월이었다.
소월은 서울의 시인도 아니고 세계의 시인도 아니다. 그는 오직 약산의 ‘진달래꽃’ 시인이다. 이보다 깊은 추모와 높은 이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여전히 정묘한 민족 언어를 시로 이어주고 조합하고 성립시킨 최고의 시인으로 식민지와 분단의 양 시대를 가로질러 있는 시인이다. 소월의 시는 더 젊어지고 더 빨라지고 더 높아지며 더 멀어져야 한다. 그것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찾아오는 길이 된다.
<진달래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같이 내다보는 환한 창이다. <진달래꽃>은 우리 모두의 처녀 시집이고 소년의 시집이며 청년의 시집이고 노년의 시집이다. 그러니 우리의 푸른 마음속과 하늘을 건너가는 흰 달(素月)을 들여다보고 눈을 들어 올려 쳐다본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꿈의 언어를 간직한 소월의 시가 우리 가슴속에 영원의 흰 그늘을 남겨주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우리는 소월처럼 소년일 수가 없고, 소월보다 더 젊을 수가 없으며, 소월의 언어일 수가 없을 것이다.
출처 : 월간중앙(https://www.m-joongang.com)
https://namu.wiki/w/%EC%A7%84%EB%8B%AC%EB%9E%98%EA%BD%83
진달래꽃
대한민국 의 시인 김소월 이 지은 시. 이별의 정한을 감수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목소리가 특징이다. 시 "진달내ᄭᅩ
namu.wiki
대한민국의 시인 김소월이 지은 시. 이별의 정한을 감수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목소리가 특징이다.
시 "진달내ᄭᅩᆺ"(진달래꽃)은 1922년 7월 잡지 《개벽》25호에 처음 실렸다. 같은 이름의 시집 《진달내꽃》을 1925년 12월 26일 발간하였는데 이 시집에도 당연히 이 시가 실려 있다. 시집 《진달내꽃》의 초판본은 2011년에 등록문화재로도 등록되었다.
2.1. 원문
ㅡ金素月
가실ᄯᅢ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藥山
진달내ᄭᅩᆺ
아름ᄯᅡ다 가실길에 ᄲᅮ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ᄭᅩᆺ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ᄯᅢ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12/24/S7NCJMZ7S5GU5KXPOHPZO7VTNY/
“조선말 자유자재 구사” 김소월… 손녀는 “국민적 사랑? 소용 없다”
조선말 자유자재 구사 김소월 손녀는 국민적 사랑 소용 없다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34년 12월 24일 32세
www.chosun.com
‘청년 민요 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
시인 김소월(1902~1934) 부음 기사는 1934년 12월 27일 조선일보에 1단 기사로 실렸다.
“일즉이 진달내꼿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야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든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씨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든 바 지난 이십사일 아츰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야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얏다.”(1934년 12월 27일자 2면)
한 달 후인 1935년 1월 28일 오후 5시 주요 문인들이 추도회를 마련했다. 장소는 경성 시내 관철동에 있는 양식당 백합원(百合園)이었다. 추도회 발기인으로 김소월이 다닌 정주 오산학교 스승 김억을 비롯해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이 이름을 올렸다.(1935년 1월 27일자 4면)

소설가 김동인은 당초 김소월이 김억을 ‘숭내(흉내)’내는 것으로 여기고 ‘경멸’ ‘무시’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 10일부터 12일까지 3회 연재한 ‘내가 본 시인 김소월 군을 논함’이란 글에서 김동인은 김소월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음을 밝힌다.
“어떤 날 잡지 ‘개벽’을 뒤적이던 나는 거기서 소월의 ‘삭주구성(朔州龜城)’을 보았다. 그리고 재독삼독을 한 뒤에 책을 내어던지고 탄식하얏다- 사람은 속단(速斷)이라는 것을 삼갈 것이라고.”(1929년 12월 10일 자 4면)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젖어 오노랍니다
(‘삭주구성’ 일부)
[‘삭주구성’ 전문]
삭주구성(朔州龜城)
ㅡ 김소월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 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육천 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 리
가다 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임을 둔 곳이기에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 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육천 리
- 《개벽》(1923) 수록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67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82%AD%EC%A3%BC%EA%B5%B0
삭주군(朔州郡)은 평안북도 북서부 압록강 중류에 있는 군이다.
지리
서북쪽의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다. 남서쪽은 의주군, 남쪽은 천마군, 동남쪽은 대관군, 동북쪽은 창성군에 접한다.
동남쪽으로 강남산맥이 있으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046m의 문산이다. 경작지는 전체 군 면적의 13퍼센트에 불과하며, 거친 삼림 지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8.1°C이고, 1월 평균 기온은 -10.1°C, 8월 평균 기온은 23.4°C이다.
삭주군현황국가총인구읍리
삭주군의 위치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 159,707[1] 명 (2008) | |
| 1개 | |
| 18개 | |
김동인은 김소월의 시 ‘삭주구성’을 비롯해 ‘꿈’ ‘생과 사’ ‘무심’ ‘진달래꽃’ 등 여러 편을 인용하면서 “조선에 난 시인으로서 나는 아직것 소월만치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중략) 그는 마치 조선말을 자기가 발명한 듯이 기탄없이 자유자재로 썼다”(1929년 12월 11일 자 4면)고 평가했다. 마지막 3회에서는 최상의 극찬으로 글을 맺었다.
“(김소월은) 조선 정조(情調)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조선 민중과 시구를 접근시킬 가장 큰 인물이다.”(12월 12일 자 4면)
김소월의 생애에 대해서는 1960년 시인 김영삼이 쓴 ‘소월정전’, 1962년 영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가 나왔다. 1965년 조선일보 기사에서 영화는 “사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고, ‘소월정전’은 “소월 전기물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만한”(1965년 9월 26일 자 5면) 것으로 평가됐다.

더 자세한 김소월 스토리는 숙모 계희영(당시 75세)씨가 쓴 수기(手記)다. 조선일보가 입수해 1965년 9월 26일부터 10월 10일까지 3회 연재했다. 어린 시절(1회), 여인 관계(2회), 번민의 시절(3회)로 이어졌다. 기사는 “현재 서울에는 소월의 3남 정호(33·강생회)씨와 소월의 사촌 및 그 가족들이 산다”고 했다.
기사에 나온 셋째 아들 김정호씨는 2002년 시 전문 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과 인터뷰에서 시인 서정주(1914~2000)가 자신의 취직 자리와 딸의 학비를 대주며 생계를 보살폈다고 밝혔다. 김정호씨는 소월의 4남 2녀 자녀 중 유일하게 남쪽에 정착했다.
“소월 나이 서른에 태어난 김정호씨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9세 되던 해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남하했으나 곧 포로가 되어 잡혔다. 포로 교환 때 그는 반공 포로로 남한 잔류를 선택했고, 석방 후에는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하지만 제대 후 특별한 취직을 할 수 없었고, 결혼하고 반년도 못 돼 친척들이 근근이 마련해 준 결혼반지까지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1960년대 호구지책으로 ‘가요 60년사’라는 음반을 외판하던 김씨는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미당을 찾아갔다. 미당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인의 아들’을 소개했고, 생계를 보살폈다.”(2002년 8월 27일 자 A19면)
김정호씨 딸이자 소월의 손녀 김은숙씨는 2010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소월에 대한 국민적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소월의 자손이란 걸 감추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 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2010년 6월 26일 자 B4면)
https://kydong77.tistory.com/20599
김소월, 진달래꽃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고려산 진달래꽃밭
· www.youtube.com/watch?v=eWdDSpaZmhU kydong77.tistory.com/18251 김소월의 시세계 *[운영자 생각] 김소월의 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제에게 말살당한 민족혼을 일깨우고 주권회복의 염원을 토로한
kydong77.tistory.com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ㅡ 김소월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갈.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벽>, 1923
아래 사진은 강화군 고려산 일대의 진달래축제 때 운영자가 찍은 것임.








www.youtube.com/watch?v=-tL7P6FL3eU
https://www.youtube.com/watch?v=Czhhcs7GA8I
https://www.youtube.com/watch?v=xpTSf62AfTQ
https://www.youtube.com/watch?v=8KnCJ-N_MFg
https://www.youtube.com/watch?v=BWz9sYEbZio
https://www.youtube.com/watch?v=-eACo3S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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