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9E%80%EC%9D%B4_%ED%94%BC%EA%B8%B0%EA%B9%8C%EC%A7%80%EB%8A%94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시인 김영랑이 쓴 시이다.

1934년 4월, 《문학》3호에 발표되었으며 이듬해 시문학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집》에 재수록되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시인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https://www.youtube.com/watch?v=coHQwfNiQ6k

 

https://www.youtube.com/watch?v=c9n9ivBcnMw

 

 

 

 
 
성명
오재영(吳哉泳)
생몰
사망지
매장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 생애

오재영은 1897년 5월 24일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9월 의열단 단원인 박재혁이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입항하여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을 때 박재혁이 가지고 온 폭탄 한개를 맡아두었다. 이후 박재혁이 9월 14일 거사를 결행했을 때 폭탄을 내줘 그가 부산경찰서장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 도움을 줬다.

이 일로 체포된 오재영은 1921년 8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8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오재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대향이중섭화백묘비

 

https://www.youtube.com/watch?v=6PWmA_-Bws4&t=322s

 

https://namu.wiki/w/%EC%9D%B4%EC%A4%91%EC%84%AD

 

이중섭

대한민국 의 화가 .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특히 소 를 많이 그려 한국적인 미를 탁월

namu.wiki


출생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現 평안남도 숙천군 송덕리)[2]
사망
1956년 9월 6일 23시 45분 (향년 39세)
본관
학력
직업
가족
형 이중석(1904년 ~ 1946년)
누나 이중숙(1914년 ~ 불명)
배우자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李南德)[6](1921년 ~ 2022년)
장남[7](1946년 ~ 1946년)
차남 이태현(1947년 ~ 2016년)
삼남 이태성(1949년~)
데뷔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수상
1937년 자유미술협회전 태양8상
훈장
1978년 은관 문화훈장
종교
대향(大鄕)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2.2. 유학 시절2.3. 전쟁 말기2.4. 공산 치하2.5. 한국 전쟁2.6. 가족과의 이별2.7. 애절한 그리움2.8. 외로운 죽음
3. 사후
3.1. 1960년대3.2. 1970년대3.3. 1980년대3.4. 1990년대3.5. 2000년대3.6. 2010년대3.7. 2020년대
4. 가족5. 기타6.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 화가.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특히 를 많이 그려 한국적인 미를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릴 적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8]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 소가 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다만 고흐가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빈궁하게 살아온 것과 달리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에 돈이 많이 드는 일본 유학[9]을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북한 정부가 수립된 후로도 연좌제에 걸리지 않아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활동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다만 6.25 전쟁기에 무일푼으로 월남하여 궁핍하게 말년을 보내야 했고, 전후기라서 그림도 잘 안팔렸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박혀 있을 뿐이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지인들에 의해 사후에 회고전이 열리고 점차 인지도가 높아졌다. 1970년대 집중 발굴되어 1990년대 이후에는 박수근과 함께 대한민국의 확고한 '국민화가'로서 인식되고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現 숙천군 송덕리)에서 아버지 이희주(李熙周)와 어머니 안악 이씨(安岳 李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이중섭의 부친은 부농이자 지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또한 출생지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는 외가의 집성촌이면서 외가 역시 상당한 부잣집이였다. 외조부 이진태(李鎭泰)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평양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할 정도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상당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1920년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엄청난 부자여서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다.

1923년, 평양 외가로 이주한 뒤 평양 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10]

1925년, 동기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의 작업실을 출입하며 각종 화구와 '더 스튜디오(The Studio)' 같은 유명 미술서적을 접하고 큰 자극을 받았다.

1930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931년,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 임파(任波) 임용련(任用璉, 1901 ~ ?)에게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파로, 그의 "조선인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멋지고 훌륭한 연설에 이중섭은 깊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한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라는 평이 많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잘 보면 한켠에 'ㄷㅐㅎㅑㅇ(대향)', 'ㅈㅜㅇㅅㅓㅂ(중섭)'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가 많다.

1932년,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당해 친형 이중석이 사업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원산으로 이주한다. 이중석은 원산 최초의 백화점 겸 문방구인 '백두상점'을 열어 부를 일구었다. 이중섭이 시인 구상과 절친하게 된 것도, 구상 또한 어렸을 적에 가톨릭 신부이던 형을 따라 원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

1933년, <제4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1935년, <제6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다만 논란거리가 하나 생겨난 해이기도 한데, 졸업 앨범에 넣을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는 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단순히 화가의 세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하도 논란이 되어서 결국 졸업앨범에 반영하기로 했던 것은 전격 취소되었다.

2.2. 유학 시절

이중섭 젊은 시절

1936년 2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4월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있던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 분카가쿠인)에 입학한다. 이 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11]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한다.

1939년,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 2022)를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 리)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3명이나 있어[12] 서로 구분할 겸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ゆび君)'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전에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쳐서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이다. 우연히도 둘 다 발가락과 관련되어 있다.

처가도 그녀의 아버지가 미쓰이창고 주식회사[13]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역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다. 이 해 성탄절부터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발송하기 시작한다.

1941년 3월,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이쾌대와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창설한 뒤 도쿄(3월)와 경성(5월)에서 창립전을 열고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한다. 4월엔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입선하고 협회 회우 자격을 얻었다.

2.3. 전쟁 말기

1942년,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한신태양사에서 '제4회 태양상(조선예술상 개칭)'을 수여한다. 이 해 전람회 준비를 위해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14]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온다. 당시 태평양 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 이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총후 화가[15]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 이중석[16]이 일부러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둘의 결혼식 사진[17][18]
 
 

2.4. 공산 치하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사상적으로 표면적 압박을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19]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8월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에 가입해 연합군 환영을 위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국가 원수 대형 초상화와 국기를 그리는 일에 참여했다. 9월엔 김영주와 원산미술협회를 결성했다. 11월에 미도파백화점의 지하실 벽화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이쾌대가 신미술가협회를 확대시킨 독립미술협회에 가입했다. 3월엔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해 봄에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 비통함을 승화시켜 8월 광복절 기념 평양에서 열린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날으는 어린이'를 출품한다.

1947년,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평양)에 출품했다.

1947년,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년,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근처의 송도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 등을 많이 했다.

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20]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21]

그렇게 부산광역시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수 있을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나 친구나 선후배가 없었던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본래 이중섭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 출신이라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산 적이 없다 보니 자연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신세를 진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고 어쩌다 신세를 져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하고 고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22]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 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특별자치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본인은 그거 외에는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시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1.4평 짜리 집 곁방 한 칸을[23]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비교적 평화롭고 한적한 곳이었지만[24] 눈이 많이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등 부산에 비해 날씨가 더 험했다. 게다가 먹을 것이 없을 때가 많아 수시로 해안가에 나가 게를 잡고 해초를 따다가 먹는 등 후일 이중섭이 이남덕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 거주 당시의 스스로를 '돼지'에 비유할 정도로 생활 형편 또한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이중섭은 제주도와 부산을 오가며 10월엔 대한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콩지팟지'의 무대장치와 소품제작에 참여하는 소일거리를 얻기도 한다.

이 당시 이중섭이 기거하던 정방동의 송태주·김순복 부부의 집과 방은 '이중섭거주지'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으며[25], 그 뒤에는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개관했다.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2.6. 가족과의 이별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상을 당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였고,[26] 장인이 사망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당시 한국에는 한국인 배우자를 따라 남아 있다가, 배우자가 전사/행방불명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반대로 일본에는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해야 할 한국인들이 제법 있었다. 이들을 맞귀국시키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송환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사코는 우선 부산 초량동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7월 경에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이중섭까지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 하였으나, 당시에는 해방 후 한일간 국교 단절이 이어져 정상적인 인적 교류가 매우 어려웠기에[27]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 때부터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해 7월엔 친구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를 정기적으로 제작했다. 12월엔 <제1회 기조전>에 출품했다.

1953년 5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했다.[28]

하지만 이렇게 재회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부는 치명적인 사기에 휘말리게 된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로 마영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9], 이 마영일이 일본에 있던 마사코를 찾아와서는 일본서적 무역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여전히 낙후된 한국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서적을 한국에 들여와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마영일은 마사코가 일본에서 책을 사서 본인에게 부쳐주면, 본인이 그걸 한국에서 팔아 구입 원금은 마사코에게 부쳐주고 이익금의 일부는 한국에 있던 이중섭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솔깃한 마사코는 마영일의 말대로 도쿄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던 친구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5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이때는 마영일이 약속대로 원금은 마사코에서 보내주고, 이익금 일부를 이중섭에게 나눠줬다. 안심한 마사코는 그 다음에는 무려 27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영일이 원금도, 이익금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마영일로부터 8만엔 정도를 돌려받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20만엔 가량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도 20년 이상을 삯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이중섭의 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친분이 있던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해 주었다고 하며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렇게 이중섭은 히로시마에서 가족과 상봉한 뒤 이남덕과 아이들이 살고 있던 도쿄 세타가야구의 집으로 올라와 일주일을 함께 지낸 후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

2.7. 애절한 그리움

주요 작품
 
 

그렇게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다시 재회해서 다시금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며 홀로 부두의 막노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그림들을 쏟아내며 여전히 화가로써의 삶을 이어나갔다.
  • 1953년 11월, 공예가 유강렬의 초청으로 통영의 나전칠기기술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 1954년 5월, 유강렬, 장윤성과 <3인전>(통영 호심다방)을, 강신석,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과 <6인전>(마산 비원다방)을, 박생광과 <이중섭 개인전>(진주 카나리아다방)을 차례로 개최한다.
  • 1954년 6월,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경복궁미술관)에 출품했다.
  • 1954년 7월, <현대미술작가전>(천일백화점)에 출품했다.
  • 1954년 9월, 책 <저격능선>, <황금충> 등의 표지화를 제작했다.
  • 1955년 1월, <이중섭 작품전>(미도파백화점)을 개최했다.
  • 1955년 4월, <이중섭 작품전>(대구 미국공보원)을 개최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 마지막 전시회였다.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엽서엔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담겨 있다. 예컨대 신혼 초에 잃은 첫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30]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성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던 시대에 작가 루이스 캐럴 같은 양반이 때때로 페도필리아로 비난받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다. 또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그린 그림들에는 주로 복숭아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들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또한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뒷얘기가 있다.

부두 막노동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 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들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31] 은지화 중 3점은 대구에서 미국공보원장을 지냈던 아서 맥타가트가 입수하여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였고, 이중섭 사후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계속해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던 이중섭을 불쌍하게 여기던 한 친구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신문사 문화부장에게 이중섭을 추천하기도 했다. 이중섭에게 소설 삽화라도 맡겨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문화부장은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신바람이 난 그는 이중섭을 찾은 뒤 삽화만 그리면 이제 부두 막노동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고 본업인 그림만 마음껏 그릴 수 있다면서 권했지만, 이중섭은 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왜 이중섭이 거절했는지를 바로 깨달았는데, 삽화를 그려 아무리 돈을 먹고 살 만큼 벌 수 있다고 한들 삽화는 진정한 그림이 아니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2.8. 외로운 죽음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데다 개인전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을 내자[32] 상심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33] 자학 증세[34],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인한 우울증 등 여러 병들을 얻어 친구 구상[35]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36]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37]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38] 여기에서마저도 그는 식사를 거부하며 밥을 잘 먹지 않았고,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손톱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화가다'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간염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사흘 후 문병 온 이중섭의 선배이자 소설가 김이석이 사망 소식을 처음 알고 친구와 유족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중섭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에 병원에서 입원비로 18만원을 청구했는데, 김광균이 5만원[39] 기타 인물들의 조의금으로 4만원을 내고 나머지는 병원측에서 삭감해주었다.[40] 시신은 9월 11일 홍제동 장재장에서 화장되어 봉원사 납골당에 잠시 머물다가 11월 18일 입관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41]

 

 

 

'20년 5월 3일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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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룡운, 박인환, 이중섭, 방정환/ 망우역사문화공원

한룡운, 나룻배와 행인, 조선독립의 書/ 十玄談 - 김시습,요해 & 한룡운,주해 https://www.youtube.com/watch?v=KrKt9VlekUU https://www.youtube.com/watch?v=T7Lo2S6ZPHs https://www.youtube.com/watch?v=vUjF_ST0V5g https://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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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역사문화공원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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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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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은자주]장아함경을 보니 한용운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나룻배와 행인>의 의미가 명료해져 여기에 함께 싣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뱃사공이라했는데 만해 선생은 자신이 나룻배라 했습니다. 시인은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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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69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나루ㅅ배와行人

나는 나루ㅅ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나는 당신을안ㅅ고 물을건너감니다
나는 당신을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여을이나 건너감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쐬고 눈비를마지며 밤에서낫가지 당신을기다리고 잇슴니다
당신은 물만건느면 나를 도러보지도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기다리면서 날마다々々々 낡어감니다

나는 나루ㅅ배
당신은 行人

현대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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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세월이 가면 · 목마와 숙녀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9D%B8%ED%99%98_(%EC%8B%9C%EC%9D%B8) 박인환 (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https://www.youtub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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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馬 淑女

ㅡ박인환

盞(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생애)

木馬(목마)를 타고 떠난 淑女(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목마) 主人(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甁(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면 暫時(잠시) 내가 알던 少女(소녀)

庭園(정원) 草木(초목)옆에서 자라고

文學(문학)이 죽고 人生(인생)이 죽고

사랑의 眞理(진리)마저 愛憎(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歲月(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고립) 避(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作別(작별)하여야 한다

(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台(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미래) 爲(위)하여

우리는 凄凉(처량) 木馬(목마)소리를 記憶(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稀微(희미) 意識(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個(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盞(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잡지) 表紙(표지)처럼 通俗(통속)하거늘

恨嘆(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uLlg5_7h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14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namu.wiki/w/%EB%B0%95%EC%9D%B8%ED%99%98(%EC%8B%9C%EC%9D%B8)

 

박인환(시인)

대한민국 의 시인 . 본관은 밀양 (密陽).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와 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 생애 19

namu.wiki

박인환
朴寅煥 | Park In-hwan
 
출생
사망
1956년 3월 20일 (향년 2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 자택
본관
국적
직업
시인
학력
인제공립보통학교 (전학)
경성덕수공립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중퇴)
명신중학교 (졸업)
평양의학전문학교 (중퇴)
배우자
이정숙(李丁淑)[3]
신장
약 180cm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

2. 생애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現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에서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부친과 함께 상경하여 경성덕수공립소학교(現 서울덕수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어 경기공립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재학 중에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중퇴하였다. 이후 한성학교 야간부를 다니다가, 황해도 재령군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강요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 광복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뒤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절친이자 선배 시인 오장환[4]의 낙원동 남만서점을 해방 후에 물려받은 것이다. 여기서 아내도 만난다.

마리서사에서 많은 문학인들과 교류했는데, 박인환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반말하듯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무례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후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출간했고, 이듬해인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 간 폭음한 탓에 결국 그해 3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 자택에서 급성 알콜중독성 심장마비 요절했다. 향년 29세.[5]

박인환은 이상의 기일 날 그를 기리는 시 '죽은 아폴론'을 쓴다. 그 시에는 이상의 기일이 3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상의 기일은 4월 17일이다. 이것이 박인환의 실수인지, 3일 후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일부러 틀리게 적은 것인지는 작가 본인만 알 일이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일화가 있다.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에서 극작가인 이진섭,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한 나애심이 같이 술을 마시던 가운데, 시를 쓰던 박인환의 종이를 들고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바로 불렀다. 나애심이 먼저 술자리에서 나가자,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받아들고서 다시 노래를 불렀고, 주위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려와 노래를 감상했다고 한다. 참고로 은성의 사장은 최불암의 모친이었다. 참고로 여기 극작가 이진섭의 장례식 때 가수 최양숙 씨가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고 한다. 이진섭 씨는 극작가이고 알토인 여동생을 포함해 음악가 집안이라고 한다.[6]

'목마와 숙녀'의 경우 연배가 있는 사람 중에는 박인희의 노래만 알고 원작의 존재를 모르는 분들도 왕왕 있다. 노래에 묘사된 가사까지만 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애틋한 감상도 들 법하지만 원작의 경우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은 구절을 비롯해 노래에서 생략된 후반 부분이 온전히 더해져 한층 더 탄식과 체념의 정서가 짙다.
 
 
 
 

 

https://www.youtube.com/watch?v=onQdf3kBQRQ

 

https://www.youtube.com/watch?v=f8o4bjfalmI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69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논어 論語》 〈헌문 憲問〉편

子路問成人。子曰:「若臧武仲之知,公綽之不欲,卞莊子之勇,冉求之藝,文之以禮樂,亦可以為成人矣。」曰:「今之成人者何必然?見利思義見危授命,久要不忘平生之言,亦可以為成人矣。」

자로가 성인(成人)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무중의 지혜와 맹공작의 무욕과 변장자의 용기와 염구의 재주를 예악(禮樂)으로 꾸민다면 역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말씀하시길 "오늘날 성인이 어찌 꼭 그러해야 하겠느냐?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놓으며, 오랜 약속이 평생 했던 말[1]을 잊지 않는다면,
역시 성인(成人)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https://www.youtube.com/watch?v=WNaP4WuQEdA

 

https://www.youtube.com/watch?v=MHQWSfnGn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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