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ELIOT 의 '황무지' 읽기 12

 3.The Fire Sermon 불의 설교 01제 III 부의 제목은   The Fire Sermon [불의 설교]이다. # '불의 설교'는 인간과 인간의 재생을 파괴시키는 모든 탐욕과  감정의 불길들을 멀리하라는 부처님의 설교를 말한다.
[# The Fire Sermon was preached by the Buddha against the fires of lust and other passions that destroy people and prevent their regeneration. ]# 깨달음을 얻으시고 몇 달이 지나 부처께서는 불을 숭배하는 천 여명의 고행자들에게 이 설법을 하셨다. 부처께서는 청중들의 가슴 속을 곧바로 꿰뚫고 들어가는 당신의 명료하기 그지없는 방식을 사용하셨으니, 그것은 '불'을 비유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모든 청중들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The Fire Sermon   (Translated by Bhikkhu Thanissaro)Several months after his Awakening, the Buddha delivers this sermon to an audience of 1,000 fire-worshipping ascetics. In his characteristically brilliant teaching style, the Buddha uses a metaphor that quickly penetrates to the heart of the audience -- in this case, the metaphor of fire. Upon hearing this sermon, the entire audience attains full Awakening (arahatta). --------------------------------------------------------------------# 그 복되신 분은 한때 가야산에 1,000명의 수도승들과 머무시면서 이렇게 설법을 펼치셨다. 
I have heard that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staying in Gaya, at Gaya Head, with 1,000 monks. There he addressed the monks: 
#  '수도승들이여, 모든 것은 불길이로다. 어째서 모두 불길이냐고 묻는가? 눈은 불길이오. 형상들도불길이오. 눈으로 자각하는 것도 불길이오. 눈과 마주치는 것도 불길이로다. 눈과 마주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 그것이 쾌락의 경험이든, 고통의 기억이든, 혹은 쾌락도 고통도 아닌 것이든 모두 다 불길이로다. 무슨 불길이냐고 묻는가? 열정의 불, 혐오의 불, 미혹의 불들이 내뿜는 불길이로다. 내가 말하거니와, 불길은 태어나서 늙어가며 죽는 것, 슬픔과 탄식, 고통과 고난 그리고절망들에 따라다니노라.
'Monks, the All is aflame. What All is aflame? The eye is aflame. Forms are aflame. Consciousness at the eye is aflame. Contact at the eye is aflame. And whatever there is that arises in dependence on contact at the eye -- experienced as pleasure, pain or neither-pleasure-nor-pain -- that too is aflame. Aflame with what? Aflame with the fire of passion, the fire of aversion, the fire of delusion. Aflame, I tell you, with birth, aging and death, with sorrows, lamentations, pains, distresses, and despairs. ........................................................................................The complete text of the Buddha's Fire Sermon (which corresponds in importance to the Sermon on the Mount) from which these words are taken, will be found translated in the late Henry Clarke Warren's Buddhism in Translation (Harvard Oriental Series). Mr. Warren was one of the great pioneers of Buddhist studies in the Occident.In the sermon, the Buddha instructs his priests that all things 'are on fire. . . The eye. . . is on fire; forms are on fire; eye-consciousness is on fire; impressions received by the eye are on fire; and whatever sensation, pleasant, unpleasant, or indifferent, originates in dependence on impressions received by the eye, that also is on fire. And with what are these on fire? With the fire of passion, say I, with the fire of hatred, with the fire of infatuation.' 
# '황무지'는 이러한 주제를 받아들이고 생명이 지속하고 진행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성적 능력과 생산성(the fertility and sexual potency) 이 파괴된 죽은 땅을 그리고 있다. 재생에 필요한 요소들이 고갈된 땅. 생명을 부여하는 네 가지 요소들은  땅, 공기, 불, 물로서 이들은 이 '황무지'시 전체를 통하여 꾸준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생명을 방해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로서도 작용하는 것이다. 땅은 그 스스로는 생산해내지 못하고, 공기는 황갈색 안개로 바뀌기도 하며, 불은 태워버리고, 물은 익사시킨다. 성적인 상상들[sexual imageries]도 비생산적이다. SEX는 욕정을 방출하는 기능적 도구로만 존재할뿐 생산이라는 필요성을 도외시한다. 미신들은 사회에 의해 Tarot cards점과 같은 방식으로 해답을 구하며, 종교는 성경 구절들을주제삼아 추론하며 해답에 이르는 끈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황무지는 어느 문명, 어느 언어 환경도 가리지 않고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The Waste Land takes these themes and portrays a dead land that lacks the fertility and sexual potency needed to sustain and progress life. A land devoid of what is needed for re-birth. The four life-giving elements: Earth, Air, Fire, Water, feature throughout the poem but as life-preventing or life-threatening factors as well as aids to life: Earth is sterile; Air is turned to 'brown fog'; Fire burns; Water drowns. The sexual imageries are unproductive: sex is present as a lustful functional device but devoid of the necessary fertility. Superstitions are turned to by the society in search of the answer in the form of Tarot cards and religion is a constant thread as evidenced by the recurring Biblical references and themes. The waste land also knows no barriers to culture or language - it is ubiquitous with motifs present from various cultures and languages of the world. # 엘리엇은 유럽을 휩쓸고 간 제 1차 세계대전에 영향을 받아 전후의 복구와 재생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모든 것들이 과거의 것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듯 '시' 또한 이미사라져버린 문명과 문화로부터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Eliot was inspired by the effects of World War I on Europe and considered its potential for regeneration and rebirth after the war. As all future generations procreate from the old ones the poem emphasises rebirth from civilisations and cultures that have gone before. **From Buddhist Philosophy: Fire Sermon:    불의 설교;   불교 철학에서 발췌A key feature of Bramanical philosophy was the worship of fire as part of the Vedic rituals. Fire was the voice of the god Agni personified by man, water personified by woman: 
'베다(?)'경 예식의 한 부분으로써 불을 숭배하는 것은 '브라만(?)' 철학의 특징이다.불은 남성신이 된 '아그니'신의 목소리이며, 물은 여성신의 목소리이다.(?)불은 남자들에의해 의인화 된 '아그니(?)'신의 목소리이며, 물은 여자들에 의해 의인화된 것이다.(?)'Then The Blessed One, having dwelt in Uruvela as long as he wished, proceeded on his wanderings in the direction of Gaya Head, accompanied by a great congregation of priests, a thousand in number, who had all of them aforetime been monks with matted hair. And there in Gaya, on Gaya Head, the Blessed One dwelt, together with the thousand priests. And there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priests: 
' 그때 'Uruvela'에 마음껏 머무시던  그 복된 뿐께서는  일천 명의 사제들과 한데 뭉쳐 Gaya 산꼭대기를 향해 움직이셨으니, 그들은 모두 예전에 털가죽들 깔고 고행했던 수도승들이었다. 그  Gaya산에 그 복된 분께서  일천 명의 사제들과 함께 머무시며 설법하셨다, 'All things, O priests, are on fire. And what, O priests, are all these things which are on fire?'
오, 수도승들이여, 만물은 불 위에 있노라. 무슨 불 위에 있느냐고 그대들은 묻는 것인가?  
'The eye, O priests, is on fire; forms are on fire; eye-consciousness is on fire; impressions received by the eye are on fire; and whatever sensation, pleasant, unpleasant, or indifferent, originates in dependence on impressions received by the eye, that also is on fire.' 
수도승들이여, 눈은 불 위에 있노라; 형상들도 불 위에 있노라; 눈으로 자각하는 것도 불 위에 있으며,  눈으로 느끼는 것도 불길 위에 있노라. 그리고 유쾌하든 불쾌하든 또는 무관하든, 눈에서 받는 느낌으로 비롯된 모든 감각들 또한 불 위에 있노라. 눈과 마주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 그것이 쾌락의 경험이든, 고통의 기억이든, 혹은 쾌락도 고통도 아닌 것이든 모두 다 불길이로다. 무슨 불길이냐구? 열정의 불, 혐오의 불, 미혹의 불들이 내뿜는 불길이로다. 내가 말하거니와, 불길은 태어나서 늙어가며 죽는 것, 슬픔과 탄식, 고통과 고난 그리고 절망들에 따라다니노라.'And with what are these on fire?'     무슨 불 위에 있느냐고 묻는 것인가?'With the fire of passion, say I, with the fire of hatred, with the fire of infatuation; with birth, old age, death, sorrow, lamentation, misery, grief, and despair are they on fire.' 
열정의 불, 혐오의 불, 미혹의 불들이라고 말하겠노라, 태어나서 늙어가며 죽는 것, 슬픔과 탄식, 고통과 고난 그리고 절망들에 따라다니는 불이라고 말하겠노라.   - 이하 생략 -# 불의 의미는 욕정을 상징하는 불과, 이를 정화하는 불, 두 가지 의미를 갖고있다고 합니다.불의 설교에 대해서 그리고 본인의 번역 글, 특히 베다 경 - 에 대해 유현을 비롯한 친구들의 설명을, 다른 의견이 있다면 그런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불의 설교' 맨 마지막 구절을 먼저 읽어봅니다.;;;;;;;;;;;;;;;;;;;;;;;;;;;;;;;;;;;;;;;;;;;;;;;;;;;;;;;;;;;;;;;;;;;;        To Carthage then I came 307                   카르타고에 나는 왔노라 	Burning burning burning burning 308           탄다 탄다 탄다 탄다	O Lord Thou pluckest me out 309               오 주여 그대 나를 건지시이다  	O Lord Thou pluckest                          오 주여 그대 나를 건지시이다 	burning                                                       탄다 --------------------------------------------------------------------307. 성 오거스틴의 「고백록」 3부 1장 .  V. St. Augustine's Confessions
(카르타고로 그 때 나는 왔다. 한 가마의 사악한 사랑이 내 귓전에서 온통 끓어대는 곳으로.) 
'to Carthage then I came, where a cauldron of unholy loves sang all about mine ears'. 308  엘리엇의 원주에 의하면 부처의 ‘불의 설교’에 근거한 것이다. ‘불의 설교’는 그 중요성에 있어 ‘마태복음’ 5장 7절에 나오는 예수의 산상 수훈에 맞먹는 것으로 헨리 클락의 「번역된 불교」(하버드동양총서)의 ‘불의 설교’ 부분은, “모든 것은 불탄다. 형태도 타고 눈으로 받은 인상도 탄다. 즐겁고 불쾌한 혹은 무관한 어떤 감각도 눈으로 받은 인상에 의해서 생기며 그것 또한 탄다”309. 엘리엇이 직접 붙인 주석에 따르면,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라는 구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는 부처의 ‘불의 설교’에서 가져온 것이다. 엘리엇은 동서양을 대표하는 금욕주의자의 말을 이 대목에서 고의적으로 나린히 배치시켰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적 의미가 창출되거나 강화되리라고 본 듯하다(곧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를 통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무지』 전체에 걸쳐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된 이 병치 기법이, 의미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산시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의 무질서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질서를 도출해 낼 수 없으며, 그 무질서 자체가 이 시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5부로 구성된 『황무지』는 각 부의 인과성이나 연결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아예 시작과 끝을 바꾸어도 상관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 앞에 놓인 『황무지』는 ‘이야기’가 없는 시다. 이야기의 파편들만 있을 뿐, 전체를 통합해 주는 ‘이야기’가 부재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작품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세계의 황폐함과 정신적 불모 상태를 묘사하면서 소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이해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시각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각각 모더니즘적 이해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이해이다. 전자는 『황무지』의 파편성과 다양성, 무질서가 어떤 통합적 질서로 수렴된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황무지』에서 읽는 것은 ‘통합되지 않는 다양성’뿐이라고 말한다. 또 『황무지』를 모더니즘 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창작의 기원으로서 시인의 우월한 권위를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작품을 창조하고 의미를 주재하는 시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작품 해석에서 모더니즘은 시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독자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이필한 의사 [서울사대부고19회 사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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