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독락당 앞 뜨락 구석지의 향나무는 독락당 입구에서도 보이는 고목이다. 흔히 짧은 인생을 빗대어 인생 백년이라 표현하는데 그 세월은 훌쩍 뛰어넘은 풍상을 겪은 연륜임에 틀림없다.































'국내여행 > 경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0) 2009.03.15
용추 & 세심대  (3) 2009.03.15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2  (4) 2009.03.13
사자를 공격하는 겁없는 멧돼지새끼  (0) 2009.03.13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1  (1) 2009.03.13

[은자주] 옥사서원과 독락당, 계정, 그리고 안강에서 포항쪽으로 나가다 있는 양동민속마을은건축학자들이 많이 찾는다. 민속마을에는 'ㅁ'자 집까지 있어 3대 이상의 대가족이 한 집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보여주고 양반집과 상민들의 집구조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흥미롭다. 용인민속마을처럼 재구한 것이 아니라 두 언덕 안에다 구겨넣은 자연적 취락구조도 관심을 끈다. 문제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여 인공을 가미했다는 점이다.

 

계정은 집안 뜨락에 엉덩짝만 걸친 채 아예 몸집 전체가 담장 밖 계곡에 나앉아 금방이라도 계곡물에 발을 담글 형국이다. 담장의 살창이나 계곡으로 난 쪽문 말고도 정자의 열린 공간으로 끌어들인 자연은 독락당을 인공에서 한 발 비켜서게 만든다. 더구나 한석봉 글씨의 '溪亭' 현판을 달고 있는 계정의 시냇가 암반에 바투 박은 건물의 기둥은 그 길이가 각각이다. 요즘 같았으면 평토의 지반조성부터 하는 것이 상례지만 조선 중기 유학자들은 정자를 계곡에최대한 접근시키면서도 계곡의 암반을 훼손하지 않고기둥을 받치는 암반이 높으면 기둥을 짧게 하고 암반이 낮으면 기둥의 길이를 늘린 것이 예술의 경지이다.

 

앞의 포스트에서 담장 살창을 통하여 자연친화를 극대화시킨 것처럼 기둥하나를 박는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옥사서원의 경우에는 계곡물을 담장 아래다 개울을 만들어 무변루 앞으로 흘러가게 했다. 외부공간과의 통로인 역락문(亦樂門)을 닫아두어도 쉬임없이 흘러가는 개울물을 통하여 자연과의 교감은 끊이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이해한 사람들답게 그들이 얼마나 자연을 존중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林居十五詠> 중의 <관물>을 보면 뜨락의 정자 난간에 앉아 유영하는 물고기를 완상하는 회재 선생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조정에서 내친 사람을 누가 상대하려 할 것인가? 억지춘양으로 시작한 자연과의 교감이지만한자문화권에는 스타일 구기지 않고 자연 친화사상으로 승화시키는 행복한 삶의 양식이 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면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요, 자연에 물러나면 자연의 영원성 속에서자아를 찾아나서는 것이 유학자들의 삶이다.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일진대 콘크리트 벽에 갇혀버린 현대인들의 삶이 불쌍하기 그지없다.

 

담장 아래 계곡 가에 축대를 쌓기 전의 사진도 몇 장 퍼다 실었다. 신록이 마악 돋아나기 시작한 계정 풍경 사진은 20년도 더된 사진이다.

 

 

 

<林居十五詠> 중에서

-이 언 적(李彦迪)

 

계정(溪亭)

喜聞幽鳥傍林啼(희문유조방림제)

 

新構茅簷壓小溪(신구모첨압소계)

 

獨酌只邀明月伴(독작지요명월반)

 

一間聊共白雲棲(일간료공백운서)

 

숲 가에서 그윽한 새소리 즐겨 듣노니

새로 만든 초가집이 작은 개울가에 솟았네.

혼자 술을 따르며 밝은 달 맞아 벗하자니

잠깐새 다만 흰구름만 찾아와 깃드누나.

 

 

觀物 관물

 

唐虞事業巍千古(당우사업위천고)

 

一點浮雲過太虛(일점부운과태허)

 

蕭灑小軒臨碧澗(소쇄소헌임벽간)

 

澄心竟日玩游魚 (징심경일완유어)

 

옛 성현의 업적이 천년에 빛나건만

한점 뜬구름 같은 인생 허무 속을 헤맨다.

맑은 개울가에끼끗한 정자 앉혀 두고

맑은 마음으로 종일토록 노니는 물고기만 완상하네.

 

 

 

 

박인로의 <독락당> 가사 작품도 있다.

http://blog.naver.com/swwyang/100007912844

 

[소실점]독락당 III

[김영택 - 독락당 계정] 독락당(獨樂堂) 박인로 자욱한 명승지에 독락당이 소쇄함을 들은지 오래로되 이 몸...

blog.naver.com

 

 독락당(獨樂堂)

ㅡ박인로

 

          자욱한 명승지에 독락당이 소쇄함을 들은지 오래로되

          이 몸이 무부로서 해변사가 공극거늘

          일편단심 분의를 못내하여

          금창철마로 여가없이 분주타가

          중심 경양이 백수에 더욱 깊어                

          죽장망혜로 오늘사 찾아오니

          봉만은 수려하여 무이산이 되어있고

          유수는 반회하여 후이천이 되었나다

 

          이러한 명구에 임자 여이 없돗던고

          일쳔년 신라와 오백재 고려에

          현인 군자들이 많이도 지냈마는

          천간지비하여 야선생께 기치도다

          물각유주이여든 다툴 이 있을소냐

 

          정라를 헤혀 들어 독락당을 열어 내니

          유한 경치는 견할 데 뇌야 없네

          천간 수죽은 벽계 좇아 둘러 있고

          만권서책은 사벽에 쌓였으니

          안증이 재좌하고 유하는 재우할 듯

          상우천고하며 음영을 일을 삼아

          한중정리에 잠사자득 하여 혼자 즐겨 하시었다

          독락 이 이름 칭정한 줄 긔 뉘 알리

          사마온공 독락원이 아무려 좋다 한들

          그간 진락이야 이 독락에 더로손가

 

          심진을 못내 하여 양진암에 놀아 들어

          임풍정간하니 내 뜻도 형연하다

          퇴계선생 수필이 진득인줄 알리로다

          관어대 나려 오니 깔온 듯한 반석에 장구흔이 보이는 듯

          수재장송은 옛 빛을 띠었으니

          의연이 물색이 긔 더욱 반가울사

          신청기상하여 지란실에 든 듯하다

 

          다소 고적을 보며 문득 생각하니

          층간절벽은 운모병이 절로 되어

          용면 묘수로 그린 듯이 별여 있고

          백척 증담에 천광 운영이 어리어 잠겼으니

          광풍제월이 부는 듯 바새는 듯

          연비어약을 말 없은 벗을 삼아

          침잔완색하여 성현 사업 하시덧다

          청계를 비끼 건너 조기도 완연할사

          묻노라 백구들아 옛일을 아니산다

          엄자릉이 어느 해에 한실로 가단말고

          태심기상에 모연만 잠겼어라

 

          춘복을 새로 입고 영귀대에 올라 오니

          여경은 고금 없어 청홍만 절로하니

          풍호영이귀를 오늘 다시 본 듯하다

          대하 연당에 세우 잠간 지나가니

          벽옥 같은 넓은 잎에 흩채나니 명주로다

          이러한 청경을 보암 즉도 하다마는

          염계 가신 후에 몇몇해를 지낸게오

          의구청향이 다만 혼자 남았고야

          자연이 비낀 아래 폭포를 멀리 보니

          단애 높은 끝에 긴 내히 걸렸는듯

          향로봉 긔 어디오 여산이 예로던가

          징심대 구어보니 비린턴 흉금이 새로온 닷하다마는

          적막공대에 외로이 앉았으니

          풍청경면에 산영만 잠겨 있고

          녹수음중에 왼갓 새 슬피 운다

          배회사억하며 진적을 다 찾으니

          탁영대 연천은 고금 없이 맑다마는

          말로흥진에 사람마다 분경커든

          이리 조한 청담에 탁영한 줄 긔 뉘 알리

 

          사자암 높이 올라 도덕산을 바라보니

          옥온함휘는 어제론 듯 하다마는

          봉거산공하니 두견만 나죄 운다

          도화동 나린 물이 불사주야하여 낙화조차 흘러오니

          천태인가 무릉인가 이 땅이 어딘게오

          선종이 아득하니 아무덴 줄 몰라로다

          인자도 아닌 몸이 무슨 이들 알리마는

          요산망귀하여 기암을 다시 비겨

          천원 원근에 경치를 살펴보니

          만자천홍은 비단 빛이 되어 있고

          중훼군방은 곡풍에 날려 오고

          산사 종성은 구름 밖에 들리나다

          이러한 형승을 범회문의 문필인들 다 써내기 쉬울런가

          만안풍경이 객흥을 도우는 듯

          임의 소요하여 짐즉 더디 돌아오니

          거목서잠에 석양이 거의로다

 

          독락당 고쳐 올라 좌우들 살펴보니

          선생 풍채들 친히 만나 뵈옵는 듯

          갱장에 엄연하여 부앙 탄식하며

          당시 하시던 일 다시금 사상하니

          명창정궤에 세려를 잊으시고

          성현서에 착의하여 공효들 일워내어

          계황개래하여 오도를 밝히시니

          오동방 악지군자는 다만 인가 여기로다

          하물려 효제를 본을 삼고 충성을 벱허내어

          성조에 나아 들러 직설의 몸이되어

          당우성시를 이룰까 바라더가

          시운이 불행하여 충현을 원척하니

          듯는 이 보는 이 심산궁곡엔들 뉘 아니 비감하리

          칠년 장사에 불견천일하고

          페문심성하사 도덕만 닦으시니

          사불승정이라 공론도 절로 일어

          존숭도덕을 사람마다 할 줄 알아

          강계는 적소로대 교화를 못내 잊어

          궁항절역에 사우조차 서워시니

          사림추앙이야 더욱 일러 무삼하리

          자옥 천석 위에 서원을 지어 두고

          제제청금이 현송성을 이었으니

          염락군현이 이 따에 뫼왔는 듯

 

          구인당 돌아 올라 체인묘도 엄숙할사

          천추혈식이 우연아닌 일이로다

          추숭존경을 할수록 못내 하여

          문묘종향이 긔 더욱 성사로다

          오동방 문헌이 한당송에 비기로세

          자양 운곡도 어즈버 여기로다

          세심대 나린 물에 덕택이 이어 흘러

          용추 깊은 곳에 신물조차 잠겼으니

          천공조화가 긔 더욱 기이코야

 

          무변진경을 다 찾기 어려울 새

          낙이망반하여 순월을 엄류하며

          고루한 이 몸에 성경을 널리하여

          선생 문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천언만어 다 성현의 말씀이라

          도맥공정이 일월같이 밝았으니

          어두운 밤길에 명촉 잡고 옌 듯하다

 

          진실로 이 유훈을 강자리에 가득 담아

          성의정심하여 수성을 넓게 하면

          언충행독하여 사람마다 어질로다

          선생 유화 지극함이 어떠하뇨

          차재 후생들아 추앙을 더욱 높여

          만세 천추에 산두 같이 바래사라

          천고지후도 유시진 하려니와

          독락당 청풍은 가없을까 하노라

[출처] [소실점]독락당 III|작성자 찌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956

 

독락당(獨樂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계집(蘆溪集)』권3에 실려 있다. 3음보 혹은 4음보를 1행으로 헤아려 총 123행으로, 박인로가 지은 가사 가운데 최장편이다. 주제는 작자가 이언적(李彦迪)의 유적인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encykorea.aks.ac.kr

 

 

 











































'국내여행 > 경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추 & 세심대  (3) 2009.03.15
독락당 04  (0) 2009.03.15
사자를 공격하는 겁없는 멧돼지새끼  (0) 2009.03.13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1  (1) 2009.03.13
독락당 02  (3) 2009.03.13



[Gee 연속1위 대기록]







'국내여행 > 경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락당 04  (0) 2009.03.15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2  (4) 2009.03.13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1  (1) 2009.03.13
독락당 02  (3) 2009.03.13
독락당 01  (0) 2009.03.13

[은자주]계정은 내 마음의 고향 1번지가 된 지 오래다. 그 이유는 계곡에서 바라본 외관을 설명할

때 설명하고자 한다. 아래 계정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다, 옥산서원 내부 현판 글씨는 이산해

선생의 글씨고, 옥산서원 바깥쪽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인데,이번에는 안쪽 글씨는 확인하지

못했었다.

여기 '옥산정사'와계곡의 바위 쓴 '세심대' 등의 글씨는 퇴계 이황 선생의 필적이다.

회재 선생의 이(理) 우위론적 태극이론에 대해 퇴계 선생이 그 독창성을 인정하고 공감함으로써

그는 퇴계 선생의 사숙(私淑)을 받았다.여기서는 사전에서 회재 선생을 찾아 옮긴다.

이언적 [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그의 기보다 이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일강십목소〉는

그 정치사상을 대표한다.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

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 아래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

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

(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

(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

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국내여행 > 경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의 고향, 계정! 02  (4) 2009.03.13
사자를 공격하는 겁없는 멧돼지새끼  (0) 2009.03.13
독락당 02  (3) 2009.03.13
독락당 01  (0) 2009.03.13
독락당을 찾아서  (0) 2009.03.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