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한문 금속활자의 여러 크기인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 특소자가 모두 확인됐다. 유물 자문에 참여한 백두현 경북대 교수(국문학)는 본지와 통화에서 “15세기, 특히 1460년대 활자로 보이는 것들이 대규모로 나왔다”면서 “아버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세조가 펴냈던 불경 언해본 『능엄경언해』(1461)와 일치하는 활자들이 다수”라고 말했다.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한 을해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란 얘기다. 을해자는 현재 전해지는 조선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이전까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한글 소자(小字) 30여자가 전부였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에 의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그 심성이 자정(自淨)함을 깨닫고 늘 자수(自修)·자행(自行)하면 곧 불성(佛性)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며, 자기 마음이 바로 불심이 된다는 요지이다.[2]
명칭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간략 서명은 ‘불조직지심체’(佛祖直指心體)이다. 판심제(版心題)는 직지(直指) 또는 심요(心要)이다.[2] 간단히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직지(直指)'로 불리며, 영어권에도 'Jikji'로 통용된다.
흔히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도 불리는데, 불서(佛書) 중 직지는 경(經)이 아니라 요절(要節)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5]
금속활자본
(1)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다. 상·하 2권을 간행했으나, 현전하는 것은 하권 1책(첫 장 결락) 뿐이며, 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행 후 500여 년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직지의 존재가 다시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 의해서이다.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플랑시는 고서적 수집에 열중했는데, 땅을 파던 중 직지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플랑시가 입수했을 때 직지는 이미 상권은 없고 하권도 첫 번째 쪽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플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유출된 직지는 1911년 경매에 부쳐져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에게 180프랑에 낙찰되었다. 1950년 베베르의 유족이 이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1972년박병선 박사에 의해 현전하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혀졌고, 그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박람회에 공개되었다.[5]2001년9월 4일에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6][7] 현재로선 직지를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와는 달리 직지는 플랑시가 합법적으로 수집해 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5]
목판본
1378년(우왕 4) 6월에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서 제자 법린(法麟) 등이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금속활자본의 성사달(成士達)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앞부분에 이색(李穡)이 쓴 서문을 추가하였다.
닥종이에 찍은 2권 1책으로, 크기는 세로 21.4cm, 가로 15.8cm이다.[1]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간행한 이유는 지방 사찰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미숙하여 인출 부수에 제한을 받아 많이 찍어 널리 퍼뜨릴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판본이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은 편이고 두 개의 서문이 붙어있어 완전한 형태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은 1992년4월 20일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다.[9]
諸惡莫作 衆善奉行 제악막작 중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敎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한 일들은 짓지 말고 선한 일들은 받들어 행하라. 자기 마음을 깨끗이 맑히는 것 (선정을 통하여 진리에 정진할 뿐 헛된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음)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불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諸惡莫作 衆善奉行自淨其意"로 요약된다.
나머지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장식이거나 군더더기이다.
복을 비느라 역대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깜박했거나 보조수단인 장식물에 가려진 탓이다.
모든 종교는 선악(善惡)을 분변하여 善한 마음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종교만이 복(福)을 받는다며 기복신앙만을 강조하는위장종교를 사이비종교라 칭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사후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제하면 종교는 1차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을 중시하는 사마천은 육체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 했는데.....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업의 성공이나 부유하게 사는 일의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1차적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남을 헐뜯고 욕하는 마음은 개인 스스로도 생리적 측면에서 신체적 순환장애를 유발하므로 실상은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 흥덕사(興德寺)[1]에서 만들어진 인쇄물로,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름이 길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로 축약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직지심경'이라 부르기도 하나, 직지는 불경이 아닌 요절이므로 엄밀히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2]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승려 백운 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요절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1234년 인종 시기의'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1239년고종 시기의'남명천화상송증도가[3]' 같은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에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직지이다.
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는 물건이었으나 결국 실종되어 현재는 그 행방이 묘연하다. 단, 이는 최초본의 상권이 실종되었다는 뜻으로, 직지라는 책의 텍스트 자체는 인쇄물의 특성상 오늘날에도 잘 남아 있다. 이후 간행된목판본 직지는 완본이 제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주도 하에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서 상권 내용의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후 실물활자를 전통방식 그대로 다시 만들어 상권을 복원할 계획이다.
창세기(創世記, 히브리어: סֵפֶר בְּרֵאשִׁית세페르 베레쉬트, 그리스어: Γένεσις게네시스[*], 영어: Book of Genesis)는 천지 창조와 아담과 하와(이브)의 에덴 동산 추방, 노아의 방주와 홍수, 바벨탑 그리고 유대 민족 탄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책이며, 구약으로는 모세오경 첫 번째 책에 해당한다.[1]
타나크에서는 이 책을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책으로 놓고 있다.[1] 원본은 소실되어 없으며, 현재 여러 필사본들이 남아있어, 이를 기반으로 많은 언어의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이 책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시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이름인 '베레쉬트'(בראשית)는 히브리어로 쓰인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에 해당하며, 이 단어가 그대로 이 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단어는 ‘처음에, 시작으로, 우선’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2] 이 책을 포함하는 모세오경의 5권은 전부 각각의 처음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를 따서 책 이름이 정해졌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관념과 성립에 관한 역사적 가정과 근본 이야기를 제시하며, 이스라엘 역사, 법, 관습에 관한 소개 글 역할을 한다. 창세기는 모세오경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지만, 본문에 창세기 저자에 관한 언급이 없다. 성서학 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3]종교 지도자 등 불명의 저자들이 그전부터 내려오던 이스라엘 민족과 종교에 관한 서로 다른 문헌과 견해를 그들의 신학에 따라 묶은 것으로 생각한다.[4] 이 작업에는 적어도 4가지 다른 전승을 포함하고 있으며,[5] 창세기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집된 시기를 대략 기원전 450-400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6]
1508년 바티칸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가 성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1529년독일카를 5세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성을 쌓았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카를 5세는 성을 쌓아서 자신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시스티나 경당 대벽화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레산드로와 사이가 나빠져,1534년고향인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같이 일한노동자들에게 자신의작품을 팔아서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하고 떠났다 한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것은 추기경님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주었다 한다.
1550년성구실인바티칸바오로 경당의 벽화바오로의 회심(그림은 다음 블로그에서 확인,1549년)과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그림.카라바조가 그린 그림도 있다.)를 완성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두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2]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40개의 조각을 만들어야하는 방대한 양의 작업이 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교황의 후원을 받긴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업들이 있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 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같은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 (1508~1512).콘디비 설명에 의하면,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해주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인류의 타락/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한 그리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성당의 대부분의 교리를 표현하는 그림의 일부이다.
작품은 500 평방미터의 천장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는 창세기에 나오는 9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지구창조; 하느님의 인간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추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12명의 인간이 그려져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7명과 고전세계에 나오는 5명의 무녀. 천정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메의 시뷜라이다
1508년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집트의 총리 였던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즉위하자 파라오는 당시 고센 땅에서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인구가 왕권을 위태하게 할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생들을 혹독하게 부렸다. 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과 밭일 등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한편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줄지 않자 히브리 산파(한 사람은 시브라였고 또 한 사람은 부아였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사타구니를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파라오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고, 파라오가 그들을 꾸짖으면 '히브리 여인은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며 둘러댔다.
그러자 파라오는 이집트의 군대에게"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라고 명령했다.[16]
40세가 된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심한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죽였다. 이 후 이집트와 가나안의 중간 지대인 미디안으로 피신한다. 망명자가 된 그는 미디안 종교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한다.[17] 저절로 불이 타오르는 초자연현상(엘모의 불)을 계기로 야훼를 만난 그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따른다.[18][19] 파라오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모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일으켜 굴복시킨다. 야훼의 도움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은 갈대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다.[20]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불평불만이 심한 백성들과 논쟁을 벌이며,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그때마다 야훼는 만나 등을 내려주며 야훼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율법을 익히게 하였다.[21]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나안 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입성은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루어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사막을 여행했으며, 십계명을 야훼로부터 받았다. 물론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처음부터 열 가지 계명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기독교 교파마다 계명의 분류가 다르다.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1계명과 2계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성공회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분리되어 있다.
모세의 저작
모세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22]것 등을 이유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신명기 1장 1절[23]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혀 주는 암시가 있다. 문서설에 따르면 신명기의 원저자는 모세이나,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기사를 모세의 후손들이 첨가했다고 본다.
모세의 모친이 모세를 임신한 차에 이집트 곳곳에 히브리인 아들들을 죽이라는 명이 내려졌다. 모세의 모친은 그런 위기속에서 모세를 살리기 위해서 작은 상자에 그를 담아 나일 강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이집트 공주를 만나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된다.
2.모세의 성장(40년)과 도피, 아라비안 생활(미디안) 40년
왕실의 한 왕자로서 살아가는 모세는 어느날 노예된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이집트 감독관을 살해하게 된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 땅으로 탈출하게 된다.
아라비아인으로서의 생활
미디안 땅에서부터 모세는 아라비아 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장인 이드로의 양치는 목자가 되어, 십보라와 결혼했다가 아이도 낳게 된다.
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하다. 출애급 40년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80세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여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데려오라고 명하신다.
이집트로 복귀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다.
이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하나님의 명을 이집트 왕 파라오(바로)에게 전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열가지 재앙을 맞게 된다. 이 중 마지막 재앙으로 말미암아 바로는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게 된다.
[ 이집트 파라오의 역사 도표│전체 도표는 하단 첨부 파일 "이집트 왕조의 역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