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고 김수환 추기경

【서울=뉴시스】

◇너무 기뻐서 아버지가 살아서 왔어요?!

어느 수도회의 서품식이 있는 날이었다. 엄숙한 서품예절이 끝나고, 그 날도 역시 영성체후에 추기경님께서 갓 서품을 받은 새 신부들에게 부모님들을 모시고 제대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새신부들이 조심스럽게 부모들을 모시고 제대 위로 올라왔다. 수없이 많은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에 부모들 역시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서품식이 있을 때마다 늘 있는 풍경이다.

추기경님은 신자들에게 아들을 교회에 봉헌한 부모님들에게 박수를 쳐달라고 부탁하시며, 신자들에게 ‘여러분들 부러우시지요?’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신자들은 우렁차게 ‘예’라고 대답을 한다. 추기경님은 ‘그렇게 부러우시면 여러분들도 봉헌하세요’하고 답하시면서 신부님들의 가족사항을 간단히 소개하신다.

이때가 추기경님의 숨겨진 카리스마가 나타나는 순간이다. 신자들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나도 저 자리에 섰으면’ 하는 부러움이 느껴지게 만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지루하지 않으면서 저토록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주교님을 아직까지 뵙지 못하였다.

보통의 날에도 그토록 즐거웠는데, 이 날은 하나의 보너스가 있었다. 누구의 실수였는지는 모르지만, 한 신부님의 가족사항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추기경님께서는 수도회 측에서 준비한 내용대로 ‘이 신부님은 어릴 적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라고 소개를 하시다가 제대 아래쪽을 보니,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성이 새 신부의 어머니와 같이 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드셨는지, 추기경님께서 ‘새 신부님의 삼촌이세요?’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단에 서 있던 남성이 ‘아버지입니다’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강론대에서 마이크로 대중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떡하니 서 있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신자석에서도 제대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추기경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신자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 때 추기경님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서품식이 너무 기뻐서 부활하여 오셨습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바람에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참말과 거짓말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이 제법 있다. 그들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계신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다. 어느 날 궁금증이 일어, ‘추기경님께서 몇 개 국어를 하시는지’ 주교관 식당에서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추기경님께서 ‘당신은 두 개의 언어를 잘하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라’고 하셨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국장 신부들이 저마다 추론하여 대답을 했다. 어느 신부님은 ‘추기경님께서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으니 독일어를 잘하실 것이고, 일제강점기를 사셨으니 일본어를 잘하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추기경님께서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다.

다른 신부님이 ‘추기경님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뵈었으니 영어와 독일어가 아니겠느냐’고 추론하였지만 추기경님은 ‘아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다.

스무고개를 하듯이 ‘영어와 일어’, ‘우리말과 영어’, ‘독어와 우리말’, 심지어는 ‘라틴어를 소신학교때부터 배우셨으니 라틴어와 우리말’이라고까지 하였는데 ‘전부 틀렸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의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 같아서 ‘도대체 잘하시는 말이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웃으시면서 ‘나는 두 가지 말을 잘하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참말이야’라고 대답하셨다. 모두가 공감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명답이었다. 사람 누구나가 참말과 거짓말을 하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가난한 마음이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

어느 날, 주교관에서 추기경님과 단 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중에 추기경님이 “최 신부, 가난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하고 물으셨다. 당시에 가난에 대한 나의 시선은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고, 사회구조적인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추기경님께서는 부족한 젊은 신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시고 나서, 우선 공감을 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물론 자네의 말에 공감을 하네. 하지만 물질적인 차원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 가난하다고 할 때 재물의 많고 적음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부유하다고 해서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네. 소유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 결국 많이 가진 사람이건, 적게 가진 사람이건, 누구나 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고민을 한다네.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좋은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하루를 성실히 노력하여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지.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에게 불확실하게 주어져 있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내가 계획한 모습으로 만들도록 투자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더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도 있겠지. 하지만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아. 재물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가난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어”

“예수님 말씀처럼 오늘 일은 오늘하고 내일은 내일 걱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지.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가 점점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젊은 신부의 입장에서 어떨지 몰라도 성직자들만이라도 아까 이야기한 대로 가난한 마음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 성직자들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야 보잘것 없지만, 그래도 죽을 때 묻힐 무덤자리까지 교회가 마련해 놓고 있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재물이 많거나 적거나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악착같이 살고 있다면, ‘너희는 거저 받았느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성직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관점에서 주로 가난을 이야기 해. 나 역시 그러한 측면에 동의를 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난의 문제를 풀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져. 저 사람 정도면 충분히 성공했다고 할 만한 사람들조차도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말하지만,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세상 사람에 비하여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야. 심지어 언제 죽더라도 묻힐 묘지와 기도해 줄 신자들까지 있잖아. 그런데 그토록 부유한 사람들인 성직자들이 세속사람들처럼 물질을 좋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가난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

1990년대 김수환 추기경의 차는 소나타였다. 차가 사람의 품격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은근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날 추기경님이 식사 초대를 받아서 서울 모처에 가시게 되었다. 물론 소나타를 타고 가셨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서도 음식점을 찾지 못하였다. 추기경님을 맞이하려고 나와있었던 사람들이 ‘설마 추기경이 소나타를 타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해프닝이지만, 한국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기적을 만드는 리더십

김수환 추기경은 결정할 때는 신중을 기하고, 일단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그에 따른 책임을 충실히 지는 편이다. 넓은 귀로 여러 이야기를 듣지만, 들리는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결정된 바에 따라 아래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리더쉽을 가지신 분이다. 양업시스템이라는 천주교 전산화 프로그램을 만들 때의 일이다.

효율적인 사목행정을 위하여 전산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대교구가 2007년 재무제표를 발표할 수 있었던 토대 중의 하나도 서울대교구 사목행정이 전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전산화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참으로 부족하였던 시기였다. 1997년 양업시스템을 시작하기 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날이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되면 보통 소등을 하기 마련이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내용들을 보다 선명하게 보고,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 또는 자신과 관련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면, 잡념을 하거나 조금은 졸수도 있는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회의실에 불이 켜졌다. 추기경님도 조금 졸으신 것 같았다. 추기경님께서 “나는 지금 최신부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네. 한국말을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통 못 알아들었네...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말이지?”하고 물으셨다. “예”라고 대답을 하자 추기경님이 비슷한 논조로 진짜로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일인지 재차 물으셨고….

나는 교회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효율화하기 위해서는 이제 교회도 전산화 되어야 하고, 특히 미래 세대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다. 추기경님은 다시금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일인지 물으셨고.. 세 번째 추기경님의 질문에 역시 ‘예’라고 대답하였다.

추기경님께서는 “나도 컴맹이라 최신부가 이야기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는 내용들을 생각해보고 교회 현실을 바라볼 때,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중에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도 있겠지만,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서울대교구의 전산화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이 결정 후에 교회의 전산화 사업 추진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반응이 있었지만, 양업시스템의 든든한 후원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기에 가톨릭인터넷 굿뉴스가 탄생하였고, 본당 양업시스템, 교구 양업시스템이 개발될 수 있었다. 물론 전세계 최초로 교구와 본당, 기관간의 네트워크도 구성되었고, 서울대교구가 그룹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양업시스템을 개통하던 날 ‘기적’이라고 추기경님이 말씀하셨다.

이 ‘기적’속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이 있었다. 신중하게 결정하고, 결정된 내용이 차질없이 추진되도록 배려해 준다면 아래 사람이 마음놓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십에 대하여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리더십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목표 성취를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은 그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왕 컴퓨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추기경님의 컴퓨터 실력을 이야기할 까 한다. 서울대교구가 전산화가 되기 전이었다. 추기경님 방에 컴퓨터가 한 대 있었는데, 주로 바둑을 두는 용도로 사용하신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추기경님이 급하게 나를 찾으셨다.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하시기에, 예측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CD들과 도구들을 챙겨서 추기경님 방에 들어섰다. 추기경님께 ‘어느 부분이 문제냐’고 여쭈었더니…, 추기경님 말씀이 ‘평상시처럼 컴퓨터 스위치를 켜고, 항상 하던 순서대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눌러서 바둑 게임을 하려고 하였는데, 엉뚱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컴퓨터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조금은 어이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혹시 자신이 잘못 만져서 망가질까봐 조심조심 기계를 다루시는 어른 세대의 전형적인 고장신고 유형이었다. 단 1분만에 추기경님의 컴퓨터 문제를 해결해 드렸고, 그 덕에 나는 순식간에 컴퓨터 천재가 되어 버렸다. 추기경님의 이어지는 칭찬이 민망하기도 하였지만, 컴퓨터 바둑게임에서부터 추기경님의 컴퓨터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 연세에 새로운 도전을 하신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 노력하시는 추기경님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사용하시는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1999년 무렵에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은퇴 후에 추기경님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에 일일이 답글을 달아줄 정도가 되셨다. 오타도 가끔 있고 하였지만, 그러한 것이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비서를 시켜서 입력하셔도 될텐데, 직접 당신이 입력하시다가 손목에 무리가 올 정도로 열심히 하셨다. 결국 담당의사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하셨다니 대단하시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등병 김수환 추기경

남자들이 사는 곳에서 군대이야기가 빠질 수 있을까? 주교관 본관에서도 군대 이야기가 가끔씩 나온다. 당시 주교관에는 군종장교 출신 신부도 있었고, 3년 만기 사병으로 전역한 병장 출신도 있었다. 유일한 예비군인 내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군대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곤 한다.

대위로 전역한 군종장교 출신 신부들이 ‘주교관도 군 계급순으로 앉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시작하면 추기경님은 ‘그럼 나는 맨 꼴찌에 앉아야 되겠네’하고 웃으신다. 추기경님은 이등병 출신이시기 때문이다. 추기경님은 일제 강점기 말엽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던 중 종전이 선포되어 제대하였기 때문이다. 주교관 본관에는 이등병 제대 한분, 일등병 제대 한분 그리고 대다수의 병장들과 소수의 대위출신이 있었다. 군에 대하여 아들 같기도 하고 손자 같기도 한 신부들이 농을 하여도 즐겁게 받아주신다. 같이 산다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등병 출신인 김수환 추기경이지만, 서울대교구 사제들이 신학생 시절에 일반사병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다. 물론 과거에 군종후보생과 동기 신학생간의 서품 차이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사목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부들이 본당에서 만나는 남성 교우들의 대부분이 군 사병 생활을 하였고, 혹 군종신부로 재차 군에 입대한다고 해도 그들이 사목하게 될 주된 대상이 일반사병이기 때문이었다. 사목자가 될 신학생들이 일반 사병생활을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보신 것이다.

물론 천주교에서 군종후보생 제도를 시행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주교 스스로 군종후보생 제도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 덕분인 것 같다. 어떤 특혜를 바라기 보다는 일반사람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또 다른 리더십이다. 그 때문에 꿈에서 조차 보기 싫다는 군대를 두 번씩이나 가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군종신부들이 유일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친화력

대중과의 친화력에 있어서 노래만큼 좋은 것은 없다. 추기경님 스스로는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시지만 노래를 불러야 할 자리가 되면 언제든지 흔쾌히 부르신다. 그런데 부르시는 노래가 늘 상황에 적합하여,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선곡을 하시냐고 사람들이 재차 놀라곤 한다. 물론 교구청의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지만 ‘(가칭) 김수환 추기경님이 부르실 노래 선곡 위원장(?)’이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노래가 선정되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추기경님을 뵙다보면 언제 연습을 하시는지, 그 노력이 대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바쁜 공식 일정 중에 언제 가사를 외우셨을까 싶어서 하는 이야기이다. 한 때 김수환 추기경님의 애창곡은 정지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였다. 젊은 사람들도 가사를 다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긴 노래였지만, 이 노래마저도 소화해 내셨다. 교구청 어느 부서의 국장신부가 추천한 노래였는데, 내심 ‘과연 노래를 소화하실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단다. 하지만 밤새 노래 가사를 외우셨는지 그 다음 날 행사에서 향수를 부르셨다고 한다. 대단한 노력이지만 대중과 함께 하려는 친화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그 행사에서 ‘가톨릭 성가’를 부르셨다면 어떠했을까? 사람들은 그래도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감동도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김수환 추기경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대중 친화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더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님이 부른 노래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노래는 가수 김수희의 ‘애모’일 것이다. KBS의 열린음악회에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추기경님은 ‘만남’, ‘사랑으로’ 등의 노래를 부르셨다. 이토록 추기경님의 대중친화적인 모습은 가끔씩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추기경님이 방문하는 본당마다 노래를 해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다. 교구장으로서 본당을 방문했는데도, 중간에는 어김없이 ‘콘써트 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의만 놓고 본다면 어른을 초청해 놓고 어른에게 재롱을 떨라고 하는 모양새이니,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인데, 추기경님은 부르라고 신자들이 요청을 하면 불러 주신다. 어떤 때는 앵콜도 하신다. 내심 불쾌하신 경우도 있었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대중들은 참으로 집요하게 추기경님의 노래를 듣고싶어 했고, 추기경님도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혹시 ‘가톨릭 성가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전례’안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에는 말이다.

◇공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만큼 일거수 일투족 신중해야 한다

주교관 본관에 사는 식구들은 1년에 한번이나 두 번 휴가를 같이 간다. 1997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는 추자도를 가게 되었다. 물론, 추기경님 때문에 그렇게 일정이 잡힌 것이다. 제주도를 가는 비용과 당시 동남아 여행을 가는 비용을 계산 해 볼 때, 동남아를 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였다. 그래서 추기경님께 동남아 여행을 말씀드렸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추기경님은 아직 우리나라 형편에서 해외여행은 사치라고 판단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부들이 해외 여행하는 것을 그리 좋게 보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사제들이 해외여행을 하게 될 경우 교구청에 보고하도록 되어져 있었다. 물론 가끔씩 어기고 다녀오는 분들도 있었다.

추자도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주요인물이자 황사영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들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기경님과 함께 움직이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제주도 행 비행기에 추기경님이 타자,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오늘 우리 비행기에 영광스럽게도 김수환 추기경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 순간 비행기가 출렁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중들의 관심이 쏠렸다. 추자도로 향하는 배에서는 더 심하게 느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우리 배에 승선하셨습니다.’ 하는 선장의 안내방송이 나오자 마자 배가 한쪽으로 침몰할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한라산 등반을 할 때는 등반 온 모든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라산에 등반온 사람들이 추기경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추기경이 아닌 척 하셨지만, 결국에는 인사를 받으셨고, 급기야 사람들 때문에 등정을 포기하시고 하산하시게 되었다. 추기경님은 하산 하셨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정상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등반 온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김수환 추기경이 한라산에 오셨다는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있었다. ‘온 산이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산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님이 오셨다는데 보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추기경님이 오셨어요? 왠일이래요.’라고 대답하였지만, 사람들은 우리 뒤에 도착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대단한 관심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는데, 그저 경비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동남아여행을 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어른이 정확하게 판단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일 수록 일거수 일투족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추기경님이 잘 기억하는 사람

김수환 추기경의 기억력은 참으로 놀랍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실 뿐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 하실 때도 많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의 부분도 있으니 그것은 연예인들의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하신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1998년 당시에 추기경님은 조영남씨와 조용필씨를 구분하지 못하셨다. 한번은 추기경님이 영화 시사회에 가신 적이 있으셨다. 고건씨가 서울시장이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한국 최고의 여배우인 A(구체적인 이름을 거명하면 결례가 될 것 같아서)씨가 시사회의 사회를 보았다. 고건시장과 추기경님께 인사를 드린 여배우는 당연히 두 분이 자신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사회자석으로 갔지만, 추기경님은 그 어여쁜 처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계셨다. 그 여배우가 사회자석으로 나가자 추기경님이 물으셨단다. ‘저 아가씨가 누구예요?’

당시 나는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교관 식당에서 연예인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씩 다른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거들 수 있었다. 추기경님은 관심은 조금 있으신 듯 하시나 통 관련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추기경님도 격려가 필요한 연예인은 잘 기억하신다. 특히 가수 ‘인순이’씨를 딸처럼 생각해주셨던 것 같다. 그 당시 가장 인기있는 예쁜 여배우는 기억하지 못하셔도 인순이씨가 살아왔던 삶의 아픔에 대해서만큼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람들의 가십거리보다 사람 자체를 만나려고 하고, 그 사람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본 명당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중의 하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올라오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이야기를 하던 모습이었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늘 데모대의 텐트가 있었고, 그 중의 한 분이 추기경님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명동 성당 고개에 달이 비치고 명동성당 시계탑은 몽환적인 불빛을 발하고 그 길에 서 있는 추기경과 하소연하는 사람의 모습! 다정한 눈 빛과 진지한 경청의 자세! 그 모습이 추기경의 모습이다.

◇작은 것도 부풀려서 홍보하는 시대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리더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가 소년한국일보 등에 연재된 적이 있다. 추기경님은 지면에 소개된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나 거룩하고 착하고 위대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셨다. 작고하신 정채봉 시인이 추기경님의 위인전을 내고 싶다고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자라나는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추기경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추기경님은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 이야기속의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주교관 식구들은 여러 측면에서 다시금 고려해주시기를 바랬지만, 단호히 거절하셨다. 당신은 위인전에 나올 만큼 아름답게 살지 않았다고 하셨다.

작은 것도 부풀려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이 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낮추는 모습이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듯해도 뵐수록 친근하고 든든한 리더십-자상함

김수환 추기경은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신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주셨다. 예전에는 카드도 직접 쓰셨다고 하는데, 그만큼은 못하셨고 98년 무렵에는 전화를 주로 하셨다. 설마 추기경님이 전화를 하셨으랴 싶어, 전화를 받는 신부 중에는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라고 전화를 끊었다가 앞서 온 전화가 진짜 추기경님의 전화라는 사실을 알고는 곤혹스러워 했다는 이야기도 제법 들었다.

김수환 추기경을 가까이에서 보면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담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기경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어려운듯하지만, 뵐수록 친근하고 솔직하신 분이다. 그러한 모습은 보내온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하시는 자상한 모습에서 더욱 느낄 수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도 추기경님은 일일이 답장을 써주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 역시도 추기경님으로부터 감동적인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1998년 6월 27일 밤에 받은 편지인데, 그 날은 당신이 정들었던 명동성당을 떠나서 혜화동 주교관으로 숙소를 옮기기 전 날이었다. 그 바쁜 시간에 교구청 가족들에게 친히 편지를 써주신 것이다. ‘아무쪼록 은총속에 건강하기를 비네. 1998.6.27. 김수환’이라고 끝맺음을 한 편지 속에서 자상한 배려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자상함은 아래 사람에게 감동이 되고 기쁨이 된다.

최성우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