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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장영희 교수는 우리도 그의 번역 소설을 한 편 정도는 읽은 저명한 영문학자 고 장왕록
교수의 따님이십니다. 1급장애자인 그녀는 척추암 선고를 받고서도 살아있는 날들의 행복을
감사하며 틈만 나면 남을 도우려 애쓰시던 분이셨습니다.
신문에서 그 분의 부음을 접하던 날 나도존재의 무상함이 서러워서 혼자서 믾이 울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건강하고 멀쩡한 몸으로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들을 감동시킵니다.
목발을 팽개치고 두 다리의 힘만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면 뭐라고 신에게 감사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형 아닌 천혜(天惠)의 삶 살다간 장영희 교수
원문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2619&pt=nv
단발머리에 소녀 같은 미소, 명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였던 장영희 서강대학교(영어어문
·영미문학과) 교수가 지난 5월 9일 낮 12시 50분 눈을 감았다. 생애 대부분을 목발에 의지했
고 삶을 집어삼킬 것 같은 세 번의 암을 겪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한 글자 한 글자 온 힘을 다해 희망을 전하던 불멸의 소녀
로 영면했다.
ⓒ한영희
고통과 시련 위에 피워낸 꽃 같은 삶
장영희 교수(57)의 죽음이 세상에 전해진 5월 11일, 사람들은 울었다. 가족과 친구와 하늘이
울고 있을 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에서 사진 속
그녀는 시종일관 웃음으로 조문객을 맞이했다. 죽음조차 언제나 다독이고 미소로 말을 걸었던
청량한 그녀의 삶과 닮았다.
한국 번역문학의 태두, 영문학자 장왕록의 1남 5녀 중 셋째였던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문학자 겸 번역가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펄 벅의 「살아 있는 갈대」를 아버지
와 공동 번역하고 「슬픈 카페의 노래」, 「이름 없는 너에게」,「큰 물고기」, 「피터팬」
등을 번역한 동시에 폭넓고 섬세한 영문학 해설로 영문학을 대중 가까이에 끌어당겼다. 각종
칼럼과 에세이를 통해 따뜻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온 그녀는 차고 넘치는 사랑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놀라움으로도 가득한 삶이었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 판정을 받은 그녀는 다섯 살 때까지 제대로 앉지도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급 장애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녀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찾았다.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어머니는 나를 업었다…”라고 전하는 그녀지만 그렇게라도 학교에 갔다는 것이 중요했다.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장애우라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는 학교에 애원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녀는 ‘육체 기능이 떨어지니 머리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발 대신 공부로 이 세상에 발붙일 근거를 마련한 그녀는 서강대를 거쳐 뉴욕주립대
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취임한다.
장영회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소녀 같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반짝이는 눈, 미소를 담은 얼굴,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기분 좋게 뿜어내던
에너지는 그녀의 글에서도 맑고 건강하게 투영됐다. 그녀의 저서 중 「생일」과 「축복」은
사랑과 희망을 주제로 한 영미시 모음집. 여러 칼럼과 에세이 연재를 통해 전해지는 씩씩한
삶의 의지는 그녀 스스로는 물론, 사람들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발을 지웠다.
그런 그녀에게 2001년 병마가 찾아왔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칠 무렵, 그동안 미국에서 낸
의료보험료가 아까워 ‘밑천을 뽑기 위해’ 받은 건강진단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1년 만에 완쾌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는다. 꿋꿋한 의지로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봄, 학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강단에 복귀했지만 지난해 암이 간으로 전이되며
다시 목발을 짚지 못했다. 2004년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했을 때 그녀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는다”라고 썼다. 고통스러운 투병생활 속에서
도 열정을 다해 쓴 두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눈 감기 하루 전
혼수상태에서 완성된 책을 품에 안은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열정이라는 기적을 낳고
눈을 감았다.
[참고]이하의 내용은 원문의 주소창을 클릭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은자주]잘 알려진 일본 작가 쿠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과 고 장영희 교수의 칼럼을 발췌해 싣는다. 사실 여부 논란도 있었지만 작품의 반전으로 보면 픽션이 명료하다. 장 교수는 사실 차원에서 칼럼을 썼다.
[고 장영희 교수 칼럼]
분명 경성고등학교 앞 골목 안에 있었는데 골목 상인들의 업종이 많이 바뀌
기는 했지만, 명훈이네는 가게 자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작은 구멍가게 한쪽을 빌려 떡볶이와 오뎅을 팔던 명훈이 엄마는 그나나 경쟁
이 심해지고 장사가 잘 안돼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가끔 퇴근길에
들르면 오뎅 국물에 우동을 말아 주던 명훈이 엄마. 몇 년 전 남편이 교통사고
로 죽고 열 살짜리 명훈이와 여섯 살짜리 명식이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늘 비좁
은 엄마 가게 한 귀퉁이 쪽마루에서 앉은뱅이 상을 놓고 숙제를 하던 명훈이
모습도 떠오른다.
우동 한 그릇
섣달 그믐말 ‘북해정’이라는 작은 우동 전문점이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아주
남루한 차림새의 세 모자母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안주인이 인사를 하자 여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우동을 1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그녀의 등 뒤로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년과 동생인 듯한 소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물론이죠. 이리 오세요.”
안주인이 그들을 2번 테이블로 안내하고 “우동 1인분이요!”하고 소리치자 부
엌에서 세 모자를 본 주인은 재빨리 끓는 물에 우동 1.5인분을 넣었다. 우동
한 그릇을 맛있게 나눠 먹은 세 모자는 150엔을 지불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
고 나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인 부부가 뒤에 대고 소리쳤다.
다시 한 해가 흘러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문을 닫을 때쯤 한 여자가 두 소년
과 함께 들어왔다. ‘북해정’의 안주인은 곧 그녀의 체크무늬 재킷을 알아보
았다.
“우동을 1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이리 오세요.” 안주인은 다시 2번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하고
곧 부엌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말했다.
“3인분을 넣읍시다.”
“아니야. 그럼 알아차리고 민망해 할 거야.”
남편이 다시 우동 1.5인분을 끓는 물에 넣으며 말했다.
우동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형처럼 보이는 소년이 말했다.
“엄마, 올해도 ‘북해정’ 우동을 먹을 수 있어 참 좋지요?” “그래, 내년에
도 올 수 있다면 좋겠는데...” 소년들의 엄마가 답했다.
다시 한 해가 흘렀고, 밤 10시경, 주인 부부는 메뉴판을 고쳐놓기에 바빴다.
올해 그들은 우동 한 그릇 값을 200엔으로 올렸으나 다시 150엔으로 바꾸어 놓
는 것이었다. 주인장은 아홉 시 반부터 ‘예약석’이라는 종이 푯말을 2번 테
이블에 올려놓았고, 안주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10시 30분경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세 모자가 들어왔다. 두 아이는 몰라보게
커서 큰 소년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
퍼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우동을 2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자 이리 오세요.”
부인은 ‘예약석’이라는 종이 푯말을 치우고 2번 탁자로 안내했다.
“우동 2인분이요!” 부인이 부엌 쪽에 대고 외치자 주인은 재빨리 3인분을 집
어넣었다. 그리고 부부는 부엌에서 올해의 마지막 손님인 이 세 모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아, 그리고 준아.”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에게 고맙구나. 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졌던 빚을 이제 다
갚았단다. 현이 네가 신문 배달을 해서 도와주었고, 준이가 살림을 도맡아 해
서 내가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었지.”
“엄마 너무 다행이에요. 그리고 저도 엄마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지난 주 준이
가 쓴 글이 상을 받았어요. 제목은 ‘우동 한 그릇’이에요. 준이는 우리 가족
에 대해 썼어요. 12월 31일에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먹는 우동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고, 그리고 주인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새해 복 많이 받으
세요.’하는 소리는 꼭 ‘힘내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들렸다구요.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손님에게 힘을 주는 음식점 주인이 되고 싶다구요.”
부엌에서 주인 부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음 해에도 북해정 2번 탁자 위에는 ‘예약석’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그러나 세 모자는 오지 않았고, 다음 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
다. 그동안 북해정은 나날이 번창해서 내부 수리를 하면서 테이블도 모두 바꾸
었으나 주인은 2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두었다. 새 테이블들 사이에 있는 낡은
테이블은 곧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고, 주인은 그 탁자의 역사를 설명하며 언젠
가 그 세 모자가 다시 오면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곧 2번 탁자는 ‘행운의 탁자’로 불리웠고, 젊은 연인들은 일부러 멀리
서 찾아와서 그 탁자에서 식사했다.
십수 년이 흐르고 다시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그날 인근 주변 상가의 상인들
이 북해정에서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2번 탁자는 그대로 빈 채였다. 10시 30
분 경, 문이 열리고 정장을 한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주인장이 “죄송합니다만...”이라고 말하려는데 젊은이들 뒤에서 나이든 아주
머니가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우동 3인분을 시킬 수 있을까요?”
주인장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오래 전 남루한 차림의 세 모자의 얼굴이 그들
위로 겹쳤다.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14년 전 저희는 우동 1인분을 시켜 먹기 위해 여기 왔었지요. 1년의 마지막
날 먹는 맛있는 우동 한 그릇은 우리 가족에게 큰 희망과 행복이었습니다. 그
이후 외갓짓 동네로 이사를 가서 한동안 못 왔습니다. 지난해 저는 의사 시험
에 합격했고 동생은 은행에서 일하고 있지요. 올해 저희 세 식구는 저희 일생
에 가장 사치스러운 일을 하기로 했죠. 북해정에서 우동 3인분을 시키는 일 말
입니다.”
주인장과 안주인이 눈물을 닦자, 주변의 사람들이 말했다.
“뭘 하고 있나? 저 테이블은 이 분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는 거잖아.”
안주인이 “이리 오세요. 우동 3인분이요!”
하고 소리치자 주인장은, '
“우동 3인분이요!”
하고 답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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