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의 집이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스님을]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 그 골짜기, 즉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해산을 했다.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속에 누워 해산했다[寢處其中].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보통 나무와 달리 특이하여 지금도 그것은 사라율(娑羅栗)이라 불리고 있다. 옛부터 전하기를, 옛적 어떤 주지[主寺者]가 그 사노(寺奴)들에게 하룻저녁의 저녁밥거리[一夕饌]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알씩 나누어 주곤 했다. 사노들이 불만을 품고서 관가에 고소를 했다. 관리가 이상스러워 그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더니, 밤 한 개가 발우(鉢盂) 하나에 가득 찼다. 그러자 그 관리는 도리어 사노 한 사람에게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 밤나무가 있는 산골짜기를 율곡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娑羅
원효스님은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태어났던 그 밤나무 곁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娑羅寺)라고 했다.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원효스님의 행장(行狀: 전기)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조부의 본거지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사람이라고 했다. 살펴보건대[按] 당 고종 16년[麟德 2年] - 즉 문무왕 즉위 5년(A.D. 665) 중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 일부를 떼어서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했으니, 하주는 바로 오늘날의 창녕군에 해당하고,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소속된 고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또한 상주(湘州)라고도 쓴다.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원효스님이 태어난]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한 구역이다.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원효스님의 아명은 서당(誓幢)이요, 제명(第名)은 신당[新幢: <당>은 세속에선 털(毛)이라고 한다]이다. 당초 그 어머니는 별똥[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에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스님의 탄생은 진평왕 즉위 39년, 수나라 양제 대업(大業) 13년(丁丑年: A.D. 617)에 있었다.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기가 남달라서[穎異]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배웠다. 그가 수도를 위해 사방으로 구름 가는 듯한 행적[遊方]의 시말과 불교의 홍통(弘通)에 남긴 그의 성대한 업적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고, 단지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일만을 기록하겠다.
師嘗一日風顚唱街云
어느 날, 스님은 춘의(春意)가 발동하여[風顚]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자루 없는 도끼[沒柯斧]를 주려나,
하늘 받칠 기둥[支天柱]을 찍어내련다.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다만 그때 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말했다.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이익이 그보다 클 수가 없지!"
時瑤石宮(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그때 요석궁[지금의 학원(學院)이 그곳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무열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스님을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牟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궁리가 왕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 다니다가,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사천>이니, 속담에는 <모천> 또는 <문천>이라 하고, 다리 이름은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일부러[佯] 물에 빠져서 함빡 옷을 적셨다. 궁리는 스님을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옷을 끌러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스님은 그 요석궁에 유숙하게 되었다.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요석공주는 과연 임신을 하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천생(天生)의 자질이 영민했다. 널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으니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방음[方音: 우리나라 말. 여기서는 <이두>를 가리킴]으로 중국과 우리나라[華夷]의 풍속과 사물 이름에 통회(通會)하고 육경(六經)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이 땅의 경서 수업자[業明經者]들이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원효스님은 이미 파계하여 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사기에는 <小性居士>로 되어 있음]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優人]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형상이 진기했다. 스님은 광대의 그 박의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一切無碍人一道[一乘]出生死>에 의거하여 무애(無碍)란 이름으로 그 도구를 명명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노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스님은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고 널리 교화를 펼치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저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桑樞瓮牖玃猴상추옹유확후]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 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했으니, 원효스님의 교화는 참으로 크기도 하다.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爾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이라 이름하고, 그의 집을 희사하여 만든 절을 초개사라 이름하고, 그리고 또 자칭 원효(元曉)라고 한 것들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원효라는 말도 또한 우리나라 말[方言]에서 뜻이 취해진 것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鄕言]로써 [원효스님을]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
曾住芬皇寺 纂華嚴䟽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그만 붓을 그쳤다.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또 언젠가는 공적인 일[公]로 인해서 몸을 일백 소나무[百松]에 나누었으므로 모두들 위계(位階)의 초지(初地: 환희지)라고 일렀다.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疏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스님은 또한 바다용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저술했다. 그것을 저술할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각승이란 또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대안(大安)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경의 차례를 매김]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받은 것[知音唱和]이다.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스님이 입적하자 아들 총은 그 유해를 가루내어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해 두고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스님의 소상(塑像) 곁에서 배례했더니, 소상이 홀연 돌아다 보았다. 지금도 소상은 여전히 돌아다 보는 모습 그대로 있다.
자연석 성곽으로조선 단종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했다고도 하고,숙종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백제 때 고창 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모양성[*모량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나주진관의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주) *모량성이 맞는 표기.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손괴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22동 중 14동(동헌·객사·풍화루·공북루·진서루·등양루·성황사·관청·작청·내아·향청·서청·장청·옥)이 복원되었고 앞으로 8동의 관아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다.
한 번은 오래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모친이 한겨울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맹종은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죽순이 있을 리 없어, 죽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감동해 맹종의 눈물이 떨어진 그곳에 눈이 녹고 죽순이 돋아나 맹종이 그것을 끓여 모친에게 대접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종읍죽과 맹종설순이라고 불리는 고사로 24효나 효제문자도에도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12폭 짜리 이불을 만들어 어진 선비를 불러서 함께 덮게 했는데, 아들이 군자의 말씀을 듣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남양의 이숙으로부터 배워 그에게서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으며, 처음에는 주거 휘하의 군리를 지내면서 어머니를 군영으로 모셨고, 밤에 비 때문에 물이 새자 울면서 어머니에게 사죄하자 어머니는 노력할 뿐이고 어찌 눈물 흘릴 일이냐고 위로했다. 주거가 맹종을 알아보면서 염지사마에 임명되었으며, 맹종은 그물을 엮고 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젓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어머니는 어업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어 생선젓을 만들어 부치는 것은 혐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돌려보냈고, 이후 오현의 현령으로 임명된다.
당시에 집을 옮길 수 있는 관직을 얻지 못해 절기에 맞는 물건을 맞으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보내 항상 먼저 먹지 않았으며, 237년 오나라 호종과 고옹이 효와 충은 병행할 수 없다고 해 손권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든다. 하지만 맹종은 모친이 죽자 법을 앎에도 불구하고 바로 달려나가 상을 치룬 후 스스로 무창에 돌아와 감옥에 갇혀 형 받기를 청했는데, 육손이 평소 그의 행실과 효성에 대해 비호하자 손권도 결국 그의 직위를 한 단계 강등시키는 선에 그쳤다.
258년에 광록훈을 지내 손침이 손량을 폐위하기 전에 종묘에 고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손침이 손휴에게 무창에 주둔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맹종을 통해 행해졌다. 262년 10월에 어사대부로 승진했으며, 267년 12월에는 수승상의 직위로 관료와 중군의 보병, 기병 2천 명을 준비해 임금의 시신을 태우는 수레를 끌고가, 동쪽 명릉에서 손화의 영혼을 맞이했다.[1]
신재효 3개 언어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도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재효 (申在孝, 1812년 ~ 1884년 )는 조선국 가선대부 등을 지낸 조선 말의 판소리 연구가인 동시에 판소리 작가이자 문신이다. 가선대부, 오위장 등을 지냈다.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동리(桐里)·호장(戶長)이고 본관은 평산 (平山)이며 조선 전라도 고창현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 출생이다. 생애 [ 편집 ]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군 (지금의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 출생으로 한성부 (지금의 대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그림으로, 국보 제207호이다. 가로 75cm, 세로 53cm, 두께는 약 6mm로 1973년 경주 황남동고분 155호분 (천마총)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이다. 5~6세기 경에 그려졌으며,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신라시대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