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형으로 수염이 없음

 

https://kydong77.tistory.com/2154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https://kydong77.tistory.com/19458?category=48609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의 자서전 kydong77.tistory.com/4241 를 "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kydong77.tistory.c..

kydong77.tistory.com

列傳 

  61. 伯夷列傳
  62. 管晏列傳
  63. 老子韓非列傳
  64. 司馬穰苴列傳
  65. 孫子吳起列傳
  66. 伍子胥列傳
  67. 仲尼弟子列傳
  68. 商君列傳
  69. 蘇秦列傳
  70. 張儀列傳
  71. 樗里子甘茂列傳
  72. 穰侯列傳
  73. 白起王翦列傳
  74. 孟子荀卿列傳
  75. 孟嘗君列傳
  76. 平原君虞卿列傳
  77. 魏公子列傳
  78. 春申君列傳
  79. 范睢蔡澤列傳
  80. 樂毅列傳
  81. 廉頗藺相如列傳
  82. 田單列傳
  83. 魯仲連鄒陽列傳
  84. 屈原賈生列傳
  85. 呂不韋列傳
  86. 刺客列傳
  87. 李斯列傳
  88. 蒙恬列傳
  89. 張耳陳餘列傳
  90. 魏豹彭越列傳
  91. 黥布列傳
  92. 淮陰侯列傳
  93. 韓信盧綰列傳
  94. 田儋列傳
  95. 樊酈滕灌列傳
  96. 張丞相列傳
  97. 酈生陸賈列傳
  98. 傅靳蒯成列傳
  99. 劉敬叔孫通列傳
  100. 季布欒布列傳
  101. 袁盎鼂錯列傳
  102. 張釋之馮唐列傳
  103. 萬石張叔列傳
  104. 田叔列傳
  105. 扁鵲倉公列傳
  106. 吳王濞列傳
  107. 魏其武安侯列傳
  108. 韓長孺列傳
  109. 李將軍列傳
  110. 匈奴列傳
  111. 衛將軍驃騎列傳
  112. 平津侯主父列傳
  113. 南越列傳
  114. 東越列傳
  115. 朝鮮列傳
  116. 西南夷列傳
  117. 司馬相如列傳
  118. 淮南衡山列傳
  119. 循吏列傳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955 

 

 

https://kydong77.tistory.com/19458?category=48609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의 자서전

kydong77.tistory.com/4241 를 "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kydong77.tistory.com/4241" data-og-url="https://kydong77.tistory.com/4241" data-og-image="https://scra..

kydong77.tistory.com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A7%88%EC%B2%9C

 

사마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마 천(중국어 간체자: 司马迁, 정체자: 司馬遷, 병음: Sīmǎ Qiān 쓰마첸[*], 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다. 산시 성 용문

ko.wikipedia.org

 

사마 천(중국어 간체자: 司马迁, 정체자: 司馬遷, 병음: Sīmǎ Qiān 쓰마첸[*], BC 145년경 - BC  86년)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다. 산시 성 용문(龍門)(현재 위남시 한청시)에서 태어났다. 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1]

학문

주나라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태사령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태초력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릉 변호와 궁형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이릉을 질투한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2]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사실 이는 한 무제가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게 아니라 이광리가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이광리의 여동생이 한 무제의 후궁이었다.

중서령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무제의 신임을 얻는 과정에서 사마천에게는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이후 이광리는 무제를 폐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무제의 서자인 창읍왕 유박을 천자에 제위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무제에게 진압당했으며 이 때문에 무제가 이광리의 구족을 멸했다. 단순히 이런 일 때문에 무제는 사마천을 위로하고 다시 중용했다.

업적

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kydong77.tistory.com/4241

 

사마천-태사공자서 01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주]사마천은 사기 열전 70권 중 마지막 권을 자서전으로 채웠다. 사마천의 문학정신 곧 발분의 정신[현실비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된 <太史公自序>를

kydong77.tistory.com

 

 위 전서체 글씨, 아래 적색 글씨는 인쇄용 한자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206.所托者形也

       (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체다. ........

214.神者生之本也

     (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

     (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 <太史公自序>

위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붓글씨 이전의 글씨체이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A%B8%B0_(%EC%97%AD%EC%82%AC%EC%84%9C) 

 

사기 (역사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왕조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ko.wikipedia.org

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왕조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립 과정

편찬 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을 짓는 일을 완수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외손자 양운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사상적 배경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傳)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 사이의 권력 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구태의연한 영웅 중심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동평사왕 유우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1]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2]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많은 지식인이 《사기》와 《한서》를 비교하고 분석하기도 했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https://kydong77.tistory.com/8066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사기열전 제70 자서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

kydong77.tistory.com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史記’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
         (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
         (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

         (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

         (진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

         (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

         (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

         (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

         (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         

         (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

         (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

         (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

         (<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 盖公言黃老

         (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

         (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

         (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

         (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

         (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

         (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왈 : "어희)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

         (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

         (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

         (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

         (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

         (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

         (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

         (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

         (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

         (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

         (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

         (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

         (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

         (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

         (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

         (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

         (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

         (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

         (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

         (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

         (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

         (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

         (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

         (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

         (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

         (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 通變

         (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

         (작팔서).
         <서(書)> 8편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

         (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1433. 三十輻共一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

         (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

         (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

         (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

         (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

         (작삼십세가).
         세가 30편을 지었다.

1439. 扶義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

         (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

         (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

         (작칠십열전).
         열전 70편을 지었다.

1443. 凡百三十篇

         (범백삼입편),
         모두 130편

1444. 五十二萬六千五百字

         (오십이만육천오백자),
         52만6천5백자


1445. 爲<太史公書>

         (위<태사공서>.)
         <태사공서>라 이름 짓는다.


1446. 序略以拾遺補藝

         (서략이습유보예),
         이 서문은 개략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하여

1447. 成一家之言

         (성일가지언),
         일가의 말을 이루어

1448. 厥協<六經>異傳

         (궐협<육경>이전),
         육경 외에 전하여지는 것을 보충하여

1449. 整齊百家雜語

         (정제백가잡어),
         백가와 잡어를 정리한 것이다.

1450. 藏之名山

         (장지명산),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1451. 副在京師

         (부재경사),
         부본은 서울에 두어

1452. 俟后世聖人君子 第七十

         (의후세성인군자 제칠십)..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기로 했다. 열전 제70.

         [은자주] 열전 제70은 ‘태사공 자서’이다.

1453. 太史公曰

         (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1454. 余述曆黃帝以來至太初而訖

         (여술력황제이래지태초이흘),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여

1455. 百三十篇

         (백삼십편)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太史公自序 大尾]

 

https://kydong77.tistory.com/8068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4.htm [주] 사마천은 어떤 인물들을 입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알기 위해 열전 70편의 서문을 통해 입전동기 및 그들 삶의 특징을 살펴본다.

kydong77.tistory.com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4.htm

[주] 사마천은 어떤 인물들을 입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알기 위해 열전 70편의 서문을 통해 입전동기 및 그들 삶의 특징을 살펴본다. 앞에서 밝혔듯이 ‘오제본기(五帝本紀)’ 이하에서는 130편에 달하는 각편의 집필동기 및 그 내용을 밝혔으나 너무 번잡하여 본 블로그에서는 열전 70편에 대한 것만 수록하기로 한다.

1049. 末世爭利
         (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
         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
         (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
         (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

         (작<백이열전>제일)
         이에 <백이열전>제1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
         (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
         (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
         (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
         (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

         (작<관안열전)제이)
         이에 <관안열전>제2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
         (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 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
         (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 事情
         (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 循勢理
         (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

(작<노자한비열전>제삼)
이에 <노자한비열전>제3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 能申明之
         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 )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 列傳>第四

         (작<사마양저열전>제사)
이에 <사마양저열전>제4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
         (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
         (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
         (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
         (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

         (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

         (작<손자오기열전>제오).
         이에 <손자오기열전>제5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
         (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
         (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
         (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
         (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

         (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6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
         (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
         (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
         (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 義
         (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

         (작<중지제자열전>제칠)
         이에 <중니제자열전>제7을 지었다.


1083. 去衛適秦
         (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
         (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
         (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
         (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

         (작<상군열전>제팔)
         이에 <상군열전>제8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


         (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
         (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

         (작<소진열전>제구)
         이에 <소진열전>제9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
         (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
         (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
         (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

         (작<장의열전>제십)
         이에 <장의열전>제10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
         (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
         (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

         (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이에 <저리감무열전>제11을 지었다.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5.htm

1099. 苞河山
         (포하산),
         하수와 화산을 차지하고

1100. 圍大梁
         (위대량),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1101. 使諸侯斂手而事秦者
         (사제후렴수이사진자),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비비며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1102. 魏염之功

         (위염지공).
         위염(魏염)의 공이다.

1103. 作<穰侯列傳>第十二

         (작<양후열전>제십이)
         이에 <양후열전>제12를 지었다.


1104. 南拔언령
         (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呈+우부방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최長平
         (북최[손수+崔]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
         (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1107. 武安爲率
         (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08. 破荊滅趙
         (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1109. 王 之計
         (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前+羽]列傳>第十三.

         (작<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13을 지었다.


1111. 獵儒墨之遺文
         (렵유묵지유문),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남긴 글을 섭렵한 맹자는

1112. 明禮義之統紀
         (명례의지통기),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1113. 絶惠王利端
         (절혜왕리단),
         양혜왕(梁惠王)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1114. 列往世興衰
         (열왕세흥쇠).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1115.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
         (작<맹자순경열전>제십사
         이에 <맹자순경열전>제14를 지었다.


1116. 好客喜士

         (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
         (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 위치했던 제나라 성읍으로 맹상군(孟嘗君)의 봉읍이었다.

1118. 爲齊 楚魏
         (위제한초위).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이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

         (작<맹상군열전>제십오)
         이에 <맹상군열전>제15를 지었다.


1120. 爭馮亭以權
         (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
         (여초이구한단지위),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1122. 使其君復稱于諸侯
         (가기군복칭우제후).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1124.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작<평원군우경열전>제십육
         그래서 <평원군우경열전> 제16을 지었다.


1125. 能以富貴下貧賤
         (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1126. 賢能 于不肖
         (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1127. 唯信陵君爲能行之
         (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1128. 作<魏公子列傳>第十七
         (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17을 지었다.


1129. 以身徇君
         (이신순군),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1130. 遂脫强秦
         (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1131.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
         (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1132. 黃歇之義
         (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1133. 作<春信君列傳>第十八
         (작<춘신군열전>제십팔)
         이에 <춘신군열전>제18을 짓는다


1134. 能忍 于魏齊
         (능인구우위제),
         능히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굴육을 참아내고

1135. 而信威于强秦
         (이신위우강진);
         강포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다.

1136. 推賢讓位
         (추현양위),
         이어서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니


         (이자유지).


1138. 作<范 蔡澤列傳>第十九
         (작<범수채택열전>제십구)
         그래서 <범수채택열전>제19를 지었다.


1139. 率行其謀
         (솔행기모),
         군사를 일으켜 계책에 따라 행하였으며

1140. 連五國兵
         (연오국병),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1141. 爲弱燕報强齊之仇
         (위약연보강진지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1142. 雪其先君之恥
         (설기선군지치).
          모시선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1143. 作<樂毅列傳>第二十
         (작<악의열전>제이십)
         그래서 <악의열전>제20을 지었다.


1144. 能信意强秦
         (능신의강진),
         강포한 진나라 왕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고

1145. 而屈體廉子
         (이굴체염자),
         또한 염파에게는 능히 몸을 굽혀

1146. 用徇其君
         (용순기군),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1147. 俱重于諸侯
         (구중우제후).
         이윽고 그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1148.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
         (작<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
         이에<염파인상여열전>제21을 지었다.


1149.  王旣失臨淄而奔去齊
         (민왕기실임치이분거제),
         민왕이 이미 나라 임치성을 빼앗기고 거( ) 땅으로 도망쳤다.

1150. 唯田單用卽墨破走騎劫
         (유전단용즉묵파주기겁),
         그러나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1151. 遂存社稷
         (수존사직).
         결국은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1152. 作<田單列傳>第二十二
         (작<전단열전>제이십이)
         이에<전단열전>제22를 지었다.


1153. 能說詭說解患于圍城
         (능설궤설해환우위성),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1154. 輕爵祿
         (경작록),
         작위에 봉록도 개의치 않았으며

1155. 樂肆志
         (악사지).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성취한것 만을 즐거워하였다.

1156.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작<노중련추양열전>제이십삼)
         이에 <노중련추양열전> 제23을 지었다.


1157. 作辭以諷諫
         (이사이풍간),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1158. 連類以爭義
         (연류이쟁의),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주장했다.

1159. <離騷>有之
         (<이소>유지).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1160.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작<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
         그래서 <굴원가생열전>제24를 지었다.


1161. 結子楚親
         (결자초친),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가까워져 지내더니

1162. 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
         (사제후지사비연쟁입사진).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에 들어가 모시도록 했다.

1163.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
         (작<여불위열전>제이십오)
         <여불위열전>제25를 지었다.


1164. 曹子匕首
         (조자비수),
         조말(曺沫)은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1165. 魯獲其田
         (노획기전),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1166. 齊明其信
         (제명기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1167. 禮讓義不爲二心
         (예양의불위이심).
         예양은 의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168. <刺客列傳>第二十六
         (작<자객열전>제이십육)
         이에 <자객열전>제26을 지었다.


1169. 能明其畵
         (능명기화),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1170. 因時推秦
         (인시추진),
         시의에 맞게 시행하였다.

1171. 遂得意于海內
         (수득의우해내),
         결국은 그는 해내에서 뜻을 얻은

1172. 斯爲謀首
         (사위모수).
         진나라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73. 作<李斯列傳>第二十七
         (작<이사열전>제이십칠)
         <이사열전>제27을 지었다.


1174. 爲秦開地益衆
         (위진개지익중),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의 수효를 증가시켰고

1175. 北靡匈奴
         (북미흉노),
         북으로는 흉노를 막았으며

1176. 据河爲塞
         (거하위색),
         하수에 의지해서는 요새를 쌓았다.

1177. 因山爲固
         (인산위고),
         견고한 산악의 험지를 이용하여

1178. 建楡中
         (건유중).
         유중을 건설했다.

         ▶유중(楡中)/고대의 지명.

1179. 作<蒙恬列傳>第二十八

         (작<몽염열전>제이십팔)
         <몽염열전>제28을 지었다.


1180. 塡趙塞常山以廣河內

         (전조색상한이광하내),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河內郡)까지 넓혀

         ▶상산(常山)/ 한나라 초기에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하(唐河) 이남과 내구(內丘) 이북......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181. 弱楚權

         (약초권),
         이윽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1182. 明漢王之信于天下

         (명한왕지신우천하).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1183.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작<장이진여열전>제이십구).
         <장이진여열전> 제29를 지었다.


1184. 收西河

         (수서하),
         위표(魏豹)는 서하(西河)와

1185. 上黨之兵

         (상당지병),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1186. 衆至彭城

         (중지팽성);
         팽성으로 달려가 한왕(漢王)을 도왔다.

1187. 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

         (월지침략양지이고항우).
         팽월(彭越)은 양(梁)을 공격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1188.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

         (작<위표팽월열전>제삼십)
         이에 <위표팽월열전> 제30을 지었다.

 

https://kydong77.tistory.com/20955

 

사마천, 史記130권, 목록과 구성

목차 1. 사기-본기 편 -12권 2. 사기-표 편 -10권 3. 사기-서 편 -8권 4. 사기-세가 편 -30권〉 5. 사기-열전 편 -70권 사기는 총 130권의 책으로, 〈본기-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154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https://kydong77.tistory.com/19458?category=48609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의 자서전 kydong77.tistory.com/4241 를 "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kydong77.tistory.c..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0670

 

사마천 사기열전 번역분 재정리

[참고] 발분의 명저인 사마천 사기열전를 읽고자 하는 분들을 위하여 필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한문을 국문으로 대역하여  탑재한 사마천 사기열전 번역분을 재정리해 보았습니다. [

kydong77.tistory.com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79464&ref=y&cid=62144&categoryId=62251 

 

권130. 태사공자서

昔在顓頊, 命南正重以司天, 北正黎以司地. 唐虞之際, 紹重黎之後, 使複典之, 至於夏商, 故重黎氏世序天地. 其在周, 程伯休甫其後也. 當周宣王時, 失其守而為司馬氏. 司馬氏世典周史. 恵襄之閒,

terms.naver.com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74935&cid=49619&categoryId=55606 

 

『사기』 130권 목록과 구성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619&categoryId=55606&docId=1974935

terms.naver.com

 

사기는 총 130권의 책으로, 〈본기-12권〉, 〈-10권〉, 〈-8권〉, 〈세가-30권〉, 〈열전-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사기-본기 편

권1 「오제본기()」
권2 「하본기()」
권3 「은본기()」
권4 「주본기()」
권5 「진본기()」
권6 「진시황본기()」
권7 「항우본기()」
권8 「고조본기()」
권9 「여태후본기()」
권10 「효문본기()」
권11 「효경본기()」
권12 「효무본기()」

2. 사기-표 편

권13 「삼대세표()」
권14 「십이제후연표()」
권15 「육국연표()」
권16 「진초지제월표()」
권17 「한흥이래제후연표()」
권18 「고조공신후연표()」
권19 「혜경간후자연표()」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
권21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권22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3. 사기-서 편

권23 「예서()」
권24 「악서()」
권25 「율서()」
권26 「역서()」
권27 「천관서()」
권28 「봉선서()」
권29 「하거서()」
권30 「평준서()」

4. 사기-세가 편

권31 「오태백세가()」
권32 「제태공세가()」
권33 「노주공세가()」
권34 「연소공세가()」
권35 「관채세가()」
권36 「진기세가()」
권37 「위강숙세가()」
권38 「송미자세가()」
권39 「진세가()」
권40 「초세가()」
권41 「월왕구천세가()」
권42 「정세가()」
권43 「조세가()」
권44 「위세가()」
권45 「한세가()」
권46 「전경중완세가()」
권47 「공자세가()」
권48 「진섭세가()」
권49 「외척세가()」
권50 「초원왕세가()」
권51 「형연세가()」
권52 「제도혜왕세가()」
권53 「소상국세가()」
권54 「조상국세가()」
권55 「유후세가()」
권56 「진승상세가()」
권57 「강후주발세가()」
권58 「양효왕세가()」
권59 「오종세가()」
권60 「삼왕세가()」

5. 사기-열전 편

권61 「백이열전()」
권62 「관안열전()」
권63 「노자한비열전()」
권64 「사마양저열전()」
권65 「손자오기열전()」
권66 「오자서열전()」
권67 「중니제자열전()」
권68 「상군열전()」
권69 「소진열전()」
권70 「장의열전()」
권71 「저리자감무열전()」
권72 「양후열전()」
권73 「백기왕전열전()」
권74 「맹자순경열전()」
권75 「맹상군열전()」
권76 「평원군우경열전()」
권77 「위공자열전()」
권78 「춘신군열전()」
권79 「범수채택열전()」
권80 「악의열전()」
권81 「염파인상여열전()」
권82 「전단열전()」
권83 「노중련추양열전()」
권84 「굴원가생열전()」
권85 「여불위열전()」
권86 「자객열전()」
권87 「이사열전()」
권88 「몽염열전()」
권89 「장이진여열전()」
권90 「위표팽월열전()」
권91 「경포열전()」
권92 「회음후열전()」
권93 「한신노관열전()」
권94 「전담열전()」
권95 「번역등관열전()」
권96 「장승상열전()」
권97 「역생육고열전()」
권98 「부근괴성열전()」
권99 「유경숙손통열전()」
권100 「계포난포열전()」
권101 「원앙조조열전()」
권102 「장석지풍당열전()」
권103 「만석장숙열전()」
권104 「전숙열전()」
권105 「편작창공열전()」
권106 「오왕비열전()」
권107 「위기무안후열전()」
권108 「한장유열전()」
권109 「이장군열전()」
권110 「흉노열전()」
권111 「위장군표기열전()」
권112 「평진후주보열전()」
권113 「남월열전()」
권114 「동월열전()」
권115 「조선열전()」
권116 「서남이열전(西)」
권117 「사마상여열전()」
권118 「회남형산열전()」
권119 「순리열전()」
권120 「급정열전()」
권121 「유림열전()」
권122 「혹리열전()」
권123 「대원열전()」
권124 「유협열전()」
권125 「영행열전()」
권126 「골계열전()」
권127 「일자열전()」
권128 「귀책열전()」
권129 「화식열전()」
권130 「태사공자서()」

 

 

 

https://kydong77.tistory.com/21581

 

사마천, 사기열전 太史公 自序 -열전 제70편 국역/swings81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편액 아래의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붓글씨 이전의 글씨체이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9458?category=486097 

 

史記列傳 제70권, 사마천의 자서전

kydong77.tistory.com/4241 를 "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kydong77.tistory.com/4241" data-og-url="https://kydong77.tistory.com/4241" data-og-image="https://scra..

kydong77.tistory.com

 

 

kydong77.tistory.com/4241

 

사마천-태사공자서 01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주]사마천은 사기 열전 70권 중 마지막 권을 자서전으로 채웠다. 사마천의 문학정신 곧 발분의 정신[현실비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된 <太史公自序>를

kydong77.tistory.com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206.所托者形也

       (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체다. ........

214.神者生之本也

     (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

     (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 <太史公自序>

위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해서체로 바꾸면 적색 글씨가 됩니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https://kydong77.tistory.com/8066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사기열전 제70 자서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

kydong77.tistory.com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

         (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

         (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

         (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

         (진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

         (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

         (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

         (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

         (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         

         (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

         (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

         (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

         (<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 盖公言黃老

         (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

         (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

         (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

         (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

         (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

         (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왈 : "어희)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

         (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

         (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

         (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

         (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

         (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

         (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

         (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

         (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

         (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

         (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

         (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

         (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

         (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

         (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

         (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

         (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

         (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

         (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

         (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

         (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

         (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

         (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

         (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

         (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

         (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 通變

         (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

         (작팔서).
         <서(書)> 8편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

         (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1433. 三十輻共一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

         (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

         (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

         (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

         (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

         (작삼십세가).
         세가 30편을 지었다.

1439. 扶義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

         (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

         (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

         (작칠십열전).
         열전 70편을 지었다.

1443. 凡百三十篇

         (범백삼입편),
         모두 130편

1444. 五十二萬六千五百字

         (오십이만육천오백자),
         52만6천5백자


1445. 爲<太史公書>

         (위<태사공서>.)
         <태사공서>라 이름 짓는다.


1446. 序略以拾遺補藝

         (서략이습유보예),
         이 서문은 개략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하여

1447. 成一家之言

         (성일가지언),
         일가의 말을 이루어

1448. 厥協<六經>異傳

         (궐협<육경>이전),
         육경 외에 전하여지는 것을 보충하여

1449. 整齊百家雜語

         (정제백가잡어),
         백가와 잡어를 정리한 것이다.

1450. 藏之名山

         (장지명산),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1451. 副在京師

         (부재경사),
         부본은 서울에 두어

1452. 俟后世聖人君子 第七十

         (의후세성인군자 제칠십)..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기로 했다. 열전 제70.

         [은자주] 열전 제70은 ‘태사공 자서’이다.

1453. 太史公曰

         (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1454. 余述曆黃帝以來至太初而訖

         (여술력황제이래지태초이흘),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여

1455. 百三十篇

         (백삼십편)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太史公自序 大尾]

 

https://kydong77.tistory.com/8068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4.htm [주] 사마천은 어떤 인물들을 입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알기 위해 열전 70편의 서문을 통해 입전동기 및 그들 삶의 특징을 살펴본다.

kydong77.tistory.com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4.htm

[주] 사마천은 어떤 인물들을 입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알기 위해 열전 70편의 서문을 통해 입전동기 및 그들 삶의 특징을 살펴본다. 앞에서 밝혔듯이 ‘오제본기(五帝本紀)’ 이하에서는 130편에 달하는 각편의 집필동기 및 그 내용을 밝혔으나 너무 번잡하여 본 블로그에서는 열전 70편에 대한 것만 수록하기로 한다.

1049. 末世爭利

         (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

         (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

         (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

         (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

         (작<백이열전>제일)
         이에 <백이열전>제1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

         (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

         (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

         (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

         (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

         (작<관안열전)제이)
         이에 <관안열전>제2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

         (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

         (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 事情

         (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 循勢理

         (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

(작<노자한비열전>제삼)
이에 <노자한비열전>제3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 能申明之(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 )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 列傳>第四

         (작<사마양저열전>제사)
이에 <사마양저열전>제4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

         (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

         (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

         (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

         (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

         (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

         (작<손자오기열전>제오).
         이에 <손자오기열전>제5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

         (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

         (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

         (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

         (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

         (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6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

         (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

         (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

         (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 義

         (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

         (작<중지제자열전>제칠)
         이에 <중니제자열전>제7을 지었다.


1083. 去衛適秦

         (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

         (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

         (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

         (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

         (작<상군열전>제팔)
         이에 <상군열전>제8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

         (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

         (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

         (작<소진열전>제구)
         이에 <소진열전>제9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

         (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

         (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

         (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

         (작<장의열전>제십)
         이에 <장의열전>제10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

         (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

         (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

         (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이에 <저리감무열전>제11을 지었다.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5.htm

1099. 苞河山

         (포하산),
         하수와 화산을 차지하고

1100. 圍大梁

         (위대량),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1101. 使諸侯斂手而事秦者

         (사제후렴수이사진자),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비비며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1102. 魏염之功

         (위염지공).
         위염(魏염)의 공이다.

1103. 作<穰侯列傳>第十二

         (작<양후열전>제십이)
         이에 <양후열전>제12를 지었다.


1104. 南拔언령

         (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呈+우부방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최長平

         (북최[손수+崔]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

         (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1107. 武安爲率

         (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08. 破荊滅趙

         (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1109. 王 之計

         (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前+羽]列傳>第十三.

         (작<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13을 지었다.


1111. 獵儒墨之遺文

         (엽유묵지유문),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남긴 글을 섭렵한 맹자는

1112. 明禮義之統紀

         (명례의지통기),
         예의를 행하는 데 필요한 기강을 밝혔고

1113. 絶惠王利端

         (절혜왕리단),
         양혜왕(梁惠王)의 이익에만 집착한 마음을 끊게 만들어

1114. 列往世興衰

         (열왕세흥쇠).
         지난 옛날의 흥망성쇠를 열거했다.

1115.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

         (작<맹자순경열전>제십사
         이에 <맹자순경열전>제14를 지었다.


1116. 好客喜士

         (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

         (사귀우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설(薛) 땅으로 모여들었다.

         ▶설(薛)/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 위치했던 제나라 성읍으로 맹상군(孟嘗君)의 봉읍이었다.

1118. 爲齊 楚魏

         (위제한초위).
         그는 그 선비들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이었다.

1119. 作<孟嘗君列傳>第十五

         (작<맹상군열전>제십오)
         이에 <맹상군열전>제15를 지었다.


1120. 爭馮亭以權

         (쟁풍정이권),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1121. 如楚以救邯鄲之圍

         (여초이구한단지위),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얻어 한단의 포위를 풀고,

1122. 使其君復稱于諸侯

         (가기군복칭우제후).
         그 군주로 하여금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드높이게 했다.

1124.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작<평원군우경열전>제십육
         그래서 <평원군우경열전> 제16을 지었다.


1125. 能以富貴下貧賤

         (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1126. 賢能 于不肖

         (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1127. 唯信陵君爲能行之

         (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1128. 作<魏公子列傳>第十七

         (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17을 지었다.


1129. 以身徇君

         (이신순군),
         그 모시던 군주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

1130. 遂脫强秦

         (수탈강진),
         결국은 강포한 진나라로부터 고열왕을 빼내었고

1131. 使馳說之士南鄕走楚者

         (사치설지사만향초자),
         유세하던 선비들을 남쪽의 초나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1132. 黃歇之義

         (황헐지의).
         황헐의 의로운 마음에서 였다.

1133. 作<春信君列傳>第十八

         (작<춘신군열전>제십팔)
         이에 <춘신군열전>제18을 짓는다


1134. 能忍 于魏齊

         (능인구우위제),
         능히 위제(魏齊)로부터 당한 굴육을 참아내고

1135. 而信威于强秦

         (이신위우강진);
         강포한 진나라에서 신임을 받아 위엄을 떨쳤다.

1136. 推賢讓位

         (추현양위),
         이어서 물러날 때가 되자 어진 사람을 대신 추천하고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니

1137. 二子有之

         (이자유지).


1138. 作<范 蔡澤列傳>第十九

         (작<범수채택열전>제십구)
         그래서 <범수채택열전>제19를 지었다.


1139. 率行其謀

         (솔행기모),
         군사를 일으켜 계책에 따라 행하였으며

1140. 連五國兵

         (연오국병),
         이웃 다섯 나라의 군사들과 연계하여

1141. 爲弱燕報强齊之仇

         (위약연보강진지구),
         국력이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성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1142. 雪其先君之恥

         (설기선군지치).
          모시선 군주의 치욕을 씻었다.

1143. 作<樂毅列傳>第二十

         (작<악의열전>제이십)
         그래서 <악의열전>제20을 지었다.


1144. 能信意强秦

         (능신의강진),
         강포한 진나라 왕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고

1145. 而屈體廉子

         (이굴체염자),
         또한 염파에게는 능히 몸을 굽혀

1146. 用徇其君

         (용순기군),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게끔 하였다.

1147. 俱重于諸侯

         (구중우제후).
         이윽고 그 두 사람은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중시되었다.

1148.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

         (작<염파인상여열전>제이십일)
         이에<염파인상여열전>제21을 지었다.


1149.  王旣失臨淄而奔去齊

         (민왕기실임치이분거제),
         민왕이 이미 나라 임치성을 빼앗기고 거( ) 땅으로 도망쳤다.

1150. 唯田單用卽墨破走騎劫

         (유전단용즉묵파주기겁),
         그러나 전단만이 즉묵을 굳게 지키다가 연나라 장수 기겁(騎劫)을 격파하여

1151. 遂存社稷

         (수존사직).
         결국은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1152. 作<田單列傳>第二十二

         (작<전단열전>제이십이)
         이에<전단열전>제22를 지었다.


1153. 能說詭說解患于圍城

         (능설궤설해환우위성),
         달변과 궤변으로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성의 포위망을 풀고

1154. 輕爵祿

         (경작록),
         작위에 봉록도 개의치 않았으며

1155. 樂肆志

         (악사지).
         단지 자기들의 뜻한 바를 성취한것 만을 즐거워하였다.

1156.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작<노중련추양열전>제이십삼)
         이에 <노중련추양열전> 제23을 지었다.


1157. 作辭以諷諫

         (이사이풍간),
         초사(楚辭)라는 시부를 창조하여 정치를 풍자하여 간하고

1158. 連類以爭義

         (연류이쟁의),
         그와 비슷한 것들을 비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주장했다.

1159. <離騷>有之

         (<이소>유지).
         그가 지은 <이소>라는 시가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1160.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작<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
         그래서 <굴원가생열전>제24를 지었다.


1161. 結子楚親

         (결자초친),
         조나라의 포로가 된 자초(子楚)와 가까워져 지내더니

1162. 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

         (사제후지사비연쟁입사진).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진나라에 들어가 모시도록 했다.

1163.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

         (작<여불위열전>제이십오)
         <여불위열전>제25를 지었다.


1164. 曹子匕首

         (조자비수),
         조말(曺沫)은 비수를 가슴에 품고 회맹장에 들어가

1165. 魯獲其田

         (노획기전),
         제환공을 위협하여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고

1166. 齊明其信

         (제명기신);
         제환공으로 하여금 그 말을 지켜 신의라는 것을 밝히게 했으며

1167. 禮讓義不爲二心

         (예양의불위이심).
         예양은 의를 지켜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168. <刺客列傳>第二十六

         (작<자객열전>제이십육)
         이에 <자객열전>제26을 지었다.


1169. 能明其畵

         (능명기화),
         진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듯 그 계책을 명확히 세웠고

1170. 因時推秦

         (인시추진),
         시의에 맞게 시행하였다.

1171. 遂得意于海內

         (수득의우해내),
         결국은 그는 해내에서 뜻을 얻은

1172. 斯爲謀首

         (사위모수).
         진나라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73. 作<李斯列傳>第二十七

         (작<이사열전>제이십칠)
         <이사열전>제27을 지었다.


1174. 爲秦開地益衆

         (위진개지익중),
         진나라를 위해 영토를 더욱 넓혀 백성들의 수효를 증가시켰고

1175. 北靡匈奴

         (북미흉노),
         북으로는 흉노를 막았으며

1176. 据河爲塞

         (거하위색),
         하수에 의지해서는 요새를 쌓았다.

1177. 因山爲固

         (인산위고),
         견고한 산악의 험지를 이용하여

1178. 建楡中

         (건유중).
         유중을 건설했다.

         ▶유중(楡中)/고대의 지명.

1179. 作<蒙恬列傳>第二十八

         (작<몽염열전>제이십팔)
         <몽염열전>제28을 지었다.


1180. 塡趙塞常山以廣河內

         (전조색상한이광하내),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윽고 그 세력을 하내군(河內郡)까지 넓혀

         ▶상산(常山)/ 한나라 초기에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하(唐河) 이남과 내구(內丘) 이북......

         ▶하내군(河內郡)/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과 급현(汲縣) 서쪽의 땅으로 한(漢)과 초(楚)가 다툴 때 중립지역을 두기 위해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1181. 弱楚權

         (약초권),
         이윽고 초나라의 세력을 약화시켜

1182. 明漢王之信于天下

         (명한왕지신우천하).
         한왕(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1183.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작<장이진여열전>제이십구).
         <장이진여열전> 제29를 지었다.


1184. 收西河

         (수서하),
         위표(魏豹)는 서하(西河)와

1185. 上黨之兵

         (상당지병),
         상당의 병사들을 이끌고

1186. 衆至彭城

         (중지팽성);
         팽성으로 달려가 한왕(漢王)을 도왔다.

1187. 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

         (월지침략양지이고항우).
         팽월(彭越)은 양(梁)을 공격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1188.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

         (작<위표팽월열전>제삼십)
         이에 <위표팽월열전> 제30을 지었다.

 

https://kydong77.tistory.com/20955

 

사마천, 史記130권, 목록과 구성

목차 1. 사기-본기 편 -12권 2. 사기-표 편 -10권 3. 사기-서 편 -8권 4. 사기-세가 편 -30권〉 5. 사기-열전 편 -70권 사기는 총 130권의 책으로, 〈본기-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kydong77.tistory.com

 

 

 

 

https://ko.wikipedia.org/wiki/%EC%86%90%EC%9E%90%EB%B3%91%EB%B2%95

 

손자병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드라마에 대해서는 TV 손자병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손자병법》(중국어: 孫子兵法, 병음: Sūn Zǐ Bīng Fǎ 또는 Sun Tzu 's Art of War,The Art of War)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이다. 원

ko.wikipedia.org

 

원본

현존하는 판본인 손자병법 즉 위무주손자는 13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중국 은작산에서 죽간손자병법의 발굴로 죽간손자병법이 전통적으로 전래오는 다른 판본과 다르게 손무가 생존시에 저술한 손자병법 원본과 가깝게 여겨진 판본으로 생각되었다. 또 「죽간손자병법」과 다른 전래되어 전해진 판본에는 용간편과 화공편이 순서가 틀리게 구성되었다.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82편과 그림 9권등 내용이 더 있다고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없다.

손무의 손자로서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전략가 손빈(孫臏)이 저자라는 설도 있었으나 1972년 4월, 은작산 한나라 무덤에서 엄청난 양의 죽간이 발견되어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의 연구결과, 손무의 기록이 손자병법의 원본이고, 손빈의 것은 제나라의 손빈 병법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주류 학계의 추정이다. 한편 손무(孫武)가 지었으나 그의 후손인 손빈(孫殯)에 이르러 완성했다는 설도 있다.

구성

손자병법은 다음과 같이 총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시계편(始計篇) On assessment : 전쟁에 앞서 승산을 파악하고 기본 계획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략(또는 전력)의 다섯가지 요소(오사)와 서로의 전략 요소를 비교하는 일곱 가지 기준(칠계),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적을 속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작전편(作戰篇) On waging battle :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의 경제성에 대해 논한다. 전쟁의 속전속결을 강조하며,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적의 것을 빼앗아 사용하는 등의 방식을 언급한다.

3.모공편(謀攻篇) Planning the attack : 손실이 없는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그리고 지피지기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4군형편(軍形篇) Strategic positions : 군의 형세를 보고 승패를 논함. 먼저 승리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전쟁을 추구하는 만전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5.병세편(兵勢篇) Strategic Advantages : 공격과 방어, 세의 활용을 논함. 용벙에서 정병과 기병의 원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6.허실편(虛實篇) The weak points and the strong points : 주도권과 집중을 논함. 적의 강점을 피하고 허점을 강조하고 있다.

7.군쟁편(軍爭篇) Armed contest : 실제 전투의 방법을 서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문제(군쟁)와 이를 위한 우회기동(우직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8.구변편(九變篇) Adapting to the Nine Contingencies : 변칙에 대한 임기응변(구변), 승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오리), 장수가 경계해야 할 위험(오위) 및 만전의 대비태세를 강조하고 있다.

9.행군편(行軍篇) Deploying the army : 행군과 주둔시 유의해야 할 사항, 정보 수집을 위한 각종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0.지형편(地形篇) The terrain : 지형의 이해 득실과 장수의 책임을 논하고 있다.

11.구지편(九地篇) The nine terrains : 지형의 이용, 적의 취약점 조성과 주도권 쟁취, 기동의 신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12.화공편(火攻篇) Attack by Fire : 화공의 원칙과 방법을 설명하고 전쟁과 전투를 신중히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3.용간편(用間篇) Use of espionage : 정보의 중요성과 그를 위해 간첩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내용

전체적 특징

  • 비호전적 - 전쟁을 간단하게 일으키는 것이나, 장기전에 의한 국력 소모를 경고한다. 이 점에 대해 도가 사상의 연관성을 있다고 하여서 그 점에 대한 연구도 있다.(모공편)
  • 현실주의 - 치밀하게 관찰한 모습에 근거하여, 전쟁의 여러 가지 양상을 구별하여, 그 상황에 대응한 전술을 시행하였다.(모공편)
  • 주도권의 중시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허실편)
  • 부전승 사상 - 실질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고 정치, 외교 차원에서 적을 이기거나 적 군사력을 와해시키므로서 승리하는 것을 최상으로 보았다. 벌모, 벌교, 벌병, 벌성이라 하였는데, 벌모는 적의 전략을 와해시키는 것이고 벌교는 적의 동맹관계, 벌병은 적의 군사력, 그리고 벌성은 적의 성을 공략하는 것이다. (모공편)
  • 정보의 중요성 - 용간편에서 강조되듯 정보는 대전략 차원에서든 전술차원에서든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 환경을 강조 - 시계편에서부터 전체적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명한 내용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오는 말로 자신과 상대방의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부분의 원문은 

知彼知己 百戰不殆

지피지기 백전불태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울 것이 없으나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승과 패를 각각 주고받을 것이며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 - 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나조차도 모르면 싸움에서 반드시 위태롭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史記卷六十五 孫子吳起列傳第五5-1. 孫武列傳(손무열전)

 

孫子武者,齊人也。〔一〕以兵法見於吳王闔廬。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一〕正義魏武帝云:「孫子者,齊人。事於吳王闔閭,為吳將,作兵法十三篇。」 

 

闔廬曰:「子之十三篇,〔二〕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

합려가 말했다.

" 그대가 지은 병법 13편을 내가 모두 읽어 봤오. 한 번 시험삼아 적은 군사로 시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二〕正義七錄云孫子兵法三卷。案:十三篇為上卷,又有中下二卷。

 

對曰:「可。」

손자 "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闔廬曰:「可試以婦人乎?」

합려 " 그러면 부녀자라도 가능하겠습니까?"

 

曰:「可。」

손자 " 가능합니다."

 

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三〕皆令持戟。令之曰

:그의 용병술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하여 합려는 손무에게 궁중의 미녀 중 모두 180명을 주었다.

손자는 궁녀들을 2대로 나눈 다음에, 합려가 사랑하는 총희(寵姬) 2명에게 그 각대의 대장으로 삼았다.

손자는 모든 궁녀들에게 극(戟)을 들게 하고 군령을 내렸다.

   〔三〕索隱上音徒對反。下音竹兩反。

 

「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

" 너희들은 가슴,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등을 알고 있는가?"

 

婦人曰:「知之。」

궁녀들이 대답했다.“압니다.”

 

孫子曰

:손자가 다시 령을 내렸다.

 

「前,則視心;左,視左手;右,視右手;後,即視背。」

" '앞으로' 하면 너희들은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우로' 하면 오른손을,

'뒤로'하면 등을 본다. "

 

婦人曰:「諾。」

궁녀들이 대답했다." 잘 알았습니다."

 

約束既布,乃設鈇鉞,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婦人大笑。

손자가 자기의 말을 군령으로 선포하고 대오의 좌우에 부월(鈇鉞)을 설치했다.

손자는 자기의 군령에 대하여 여러 차례에 설명했다.

이윽고 북소리를 울리며 '우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크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

손자가 궁녀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 군령이 불분명하여 군사들이 구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그 장수의 잘못이다."

 

復三令五申而鼓之左,婦人復大笑。

손자가 다시 군령에 대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한 후에 북소리를 울리며 '좌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여전히 크게 웃기만 할뿐이었다.

 

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

손자가 다시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 군령이 확실치 않고 군사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다. 그러나 군령이 이미 확실해 졌음에도 구령에 따르지 않은 것은 군리(軍吏)와 군사들의 잘못이다."

 

乃欲斬左古隊長。吳王從臺上觀,見且斬愛姬,大駭。趣使使〔四〕下令曰

:손자는 오왕의 총희인 두 대장을 끌어내어 참수하려고 했다. 오왕은 높은 대에 올라 참관하다가 두 총희가 참수 당하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사자를 손자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四〕索隱趣音促,謂急也。下「使」音色吏反。

 

「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

" 과인은 이미 장군이 능히 용병을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과인에게 두 총희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참수형을 면케 해주기 바랍니다."

 

孫子曰:「臣既已受命為將,將在軍,君命有所不受。」

손자 " 저는 이미 대왕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된 자가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임금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遂斬隊長二人以徇。用其次為隊長,於是復鼓之。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於是孫子使使報王曰

:드디어 오왕의 두 회첩을 참수형에 처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군사들에게 보였다. 이어서 두 희첩 대신에 다른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은 후에 북소리를 울리고 구령을 발했다. 궁녀들은 모두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등의 구령이나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모두 규율을 지켜 호령대로 움직여, 감히 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궁녀들이 구령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손자가 사자를 오왕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

" 군사들이 이미 정비되었으니 대왕께서는 내려오셔서 한번 시험삼아 호령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왕께서 그들을 부리고 싶다면 물 속이건, 불구덩이 속이건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吳王曰:「將軍罷休就舍,寡人不願下觀。」

오왕이 말했다.

 " 장군은 이제 조련을 파하시고 숙사에 돌아가 쉬시기 바랍니다. 과인은 내려가 군사를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

손자가 말했다.

 " 대왕께서는 단지 저의 병법의 이론만을 좋아하실 뿐이고, 그 실제적인 것은 쓰실 줄 모르고 계십니다."

 

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西破彊楚,入郢,北威齊晉,顯名諸侯,孫子與有力焉。

그러자 합려는 손무의 용병 능력을 인정하고 결국은 그를 대장으로 삼았다. 후에 오왕 합려가 서쪽의 강대국인 초나라의 군사들을 파하고 그 서울인 영도(郢都)를 점령하여, 북쪽의 제(齊)와 당진(唐晉)에 위세를 떨치고,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크게 드러낸 것은 모두 이에 참여한 손자의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孫武既死,〔一〕後百餘歲有孫臏。

손무가 이미 죽고 백 년쯤 지나 손빈이 나타났다.

 

臏生阿鄄之閒,臏亦孫武之後世子孫也。孫臏嘗與龐涓〔二〕俱學兵法。

손빈은 아·견이라는 두 고을 사이에서 태어났다. 손빈은 손무의 후손이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龐涓既事魏,得為惠王將軍,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위나라를 섬겨 혜왕의 장군이 되었다.

 

而自以為能不及孫臏,乃陰使召孫臏。臏至,龐涓恐其賢於己,疾之,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가만히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러들였다. 손빈이 찾아오자 방연은 그의 재능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미워했다.

 

則以法刑 斷其兩足而黥之,欲隱勿見。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두 다리를 끊고 이마에 묵형을 가하였다. 그렇게 되면 손빈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齊使者如梁,〔一〕孫臏以刑徒陰見,說齊使。

그 뒤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 서울 대량을 방문하였다. 손빈은 형을 당한 상태로 비밀리에 그를 만나 제나라 사신을 설득했다.

 

齊使以為奇,竊載與之齊。齊將田忌善而客待之。

제 나라 사신은 손빈의 기인이라 여기고 몰래 자기의 수레에 숨겨 제 나라로 데리고 갔다. 제 나라에 간 손빈은 곧 장군 전기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으로 머물렀다.

 

忌數與齊諸公子 馳逐重射。孫子見其馬足不甚相遠,馬有上、中、下、輩。

전기는 때마침 도박에 빠져 공자들과 기마와 활쏘기를 즐겼다. 손빈은 그 내기를 구경하다가 그 기마의 발길이 심히 먼 것을 간파하였다. 당시의 말에는 상중하의 등급이 있었다.

 

於是孫子謂田忌曰:「君弟重射,〔二〕臣能令君勝。」

이에 손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

“임금의 아우가 활쏘기를 중히 여기니 내가 장군을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

 

田忌信然之,與王及諸公子逐射千金。〔三〕及臨質,〔四〕

전기는 그를 그러하리라 믿고 왕과 공자들에게 다시 천 금을 건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상대하여 활쏘기를 하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四〕索隱按:質猶對也。將欲對射之時也。一云質謂堋,非也。

 

孫子曰:「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取君上駟與彼中駟,取君中駟與彼下駟。」

孫子曰(손자왈) : 손빈이 말했다.“지금 당군의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라고

 

既馳三輩畢,而田忌一不勝而再勝,卒得王千金。

달리기 경기가 3차례 끝나자 전기는 2승 1패의 결과로 결국 내기에 이겨 왕은 천금을 얻었다.

 

於是忌進孫子於威王。威王問兵法,遂以為師。

이 일로 전기는 손자를 위왕에게 그를 천거했다. 위왕 역시 손빈과 병법에 관한 문답을 가진 뒤로 마침내 스승로 삼았다.

 

  〔一〕正義今汴州。   〔二〕索隱弟,但也。重射謂好射也。   〔三〕正義射音石。隨逐而射賭千金。  〔四〕索隱按:質猶對也。將欲對射之時也。一云質謂堋,非也。

 

其後魏伐趙,趙急,請救於齊。齊威王欲將孫臏,臏辭謝曰:「刑餘之人不可。」

그 후에 위 나라가 조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는 위급해져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 나라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아 조 나라를 구원하려 했으나 손빈은 사양하여 말했다. “죄를 진 사람이므로 불가 합니다.”

 

於是乃以田忌為將,而孫子為師,居輜車中,坐為計謀。

이에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되 손빈은 군사로서 치차 속에 들어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田忌欲引兵之趙,孫子曰

:전기가 군대를 이끌고 조 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이 말했다.

 

「夫解雜亂紛糾者〔一〕不控捲,〔二〕救鬪者不搏撠,〔三〕批亢擣虛,〔四〕形格勢禁,則自為解耳。〔五〕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 놓고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막을 것이 아니라 허점을 칠 때 모양이 바로 잡히고 세력이 그쳐 싸움은 자연히 풀립니다.

 

今梁趙相攻,輕兵銳卒必竭於外,老弱罷於內。

지금 위 나라와 조 나라가 서로 싸우기 때문에 정예부대는 반드시 바깥 방어에 주력할 것입니다.위 나라에 남은 자는 다만 노약자에 불과합니다.

 

君不若引兵疾走大梁,據其街路,衝其方虛,彼必釋趙而自救。

이제 장군께선 군사를 이끌고 위 나라 서울 대량으로 달려가 신속히 그 길을 점령하고 그 허점을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위 나라 군사는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자기네의 도성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是我一舉解趙之圍 而收獘於魏也。」〔六〕

이야말로 저의 한 번 움직여 조 나라의 포위를 풀고 동시에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田忌從之,魏果去邯鄲,與齊戰於桂陵,大破梁軍。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랐다. 위나라 군사는 과연 조나라 서울 한단에서 철수했다. 계릉에서 제나라와 싸워 크게 양군을 격파했다. [위나라 군대가 크게 졌다.]

 

  〔一〕索隱按:謂事之雜亂紛糾擊挐也。   〔二〕索隱按:謂解雜亂紛糾者,當善以手解之,不可控捲而擊之。捲即拳也。劉氏云「控,綜;捲,縮」,非也。   〔三〕索隱博戟二音。按:謂救鬥者當善撝解之,無以手助相搏撠,則其怒益熾矣。按:撠,以手撠刺人。   〔四〕索隱批音白結反。亢音苦浪反。按:批者,相排批也。音白滅反。亢者,敵人相亢拒也。擣者,擊也,衝也。虛者,空也。按:謂前人相亢,必須批之。彼兵若虛,則衝擣之。欲令擊梁之虛也。此當是古語,故孫子以言之也。   〔五〕索隱謂若批其相亢,擊擣彼虛,則是事形相格而其勢自禁止,則彼自為解兵也。   〔六〕索隱謂齊今引兵據大梁之衝,是衝其方虛之時,梁必釋趙而自救,是一舉釋趙而斃魏。

 

後十三歲,〔一〕魏與趙攻韓,韓告急於齊。

그로부터 13년 뒤 위 나라는 조 나라와 더불어 한 나라를 공격했다. 한 나라는 위급한 사정을 제 나라에 고했다.

 

齊使田忌將而往,直走大梁。魏將龐涓聞之,去韓而歸,齊軍既已過而西矣。

제나라는 전기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가서 구하게 했다. 전기는 또다시 곧장 대량을 향해 달려갔다. 위나라 대장 방연은 급보를 받자 즉시 한나라를 버려두고 귀로에 올랐으나 이미 국경을 넘어선 제나라 군사는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孫子謂田忌曰:「彼三晉之兵 素悍勇 而輕齊,齊號為怯,善戰者因其勢而利導之。

이때 손빈은 전기에게 이르기를 “저들 3진의 군사는 원래 사납고 용맹스럽습니다. 제나라를 경멸하여 제나라 군사를 겁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주어진 형세를 잘 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나갑니다.

 

兵法,百里而趣利者蹶上將,〔二〕五十里而趣利者軍半至。

병법에는 ‘승리에 취해 백 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그 상장군을 꺾이게 되고 50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반밖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使齊軍入魏地為十萬灶,明日為五萬灶,又明日為三萬灶。」우리 제나라 군대로 하여금 위나라 땅에 들어가 10만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내일은 5만 개로 만들고 모래는 3만개로 만들어 줄여 나가는 것입니다.”고 했다.

 

龐涓行三日,大喜,曰:「我固知齊軍怯,入吾地三日,士卒亡者過半矣。」

한나라에서 되돌아온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기 사흘째에 이르자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땅을 침입한 3일만에 사졸 중에서 도망한 자가 절반을 넘었다.”고 했다.

 

乃棄其步軍,與其輕銳 倍日并行逐之。孫子度其行,暮當至馬陵。

그리고 곧 보병은 따로 떼어놓은 채로 기병 등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로 단축시켜 급히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손빈이 위나라 군사의 속도를 계산해 본 결과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馬陵道陝,而旁多阻隘,可伏兵,乃斫大樹白而書之曰「龐涓死于此樹之下」。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지형이 많아 복병을 두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손빈은 길 옆에 있는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기고 그 흰 부분에다 글씨를 쓰기를,“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고 했다.

 

於是令齊軍善射者萬弩,夾道而伏,期曰「暮見火舉而俱發」。

이에 제나라 군사들 가운데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무수한 쇠뇌를 가지고 길 양쪽에 숨어 있도록 한 다음 기약하기를, ‘날이 저물어 이곳에 불이 밝혀지는 즉시 일제히 쏘아라.’고 명령해 두었다.

 

龐涓果夜至斫木下,見白書,乃鑽火燭之。讀其書未畢,齊軍萬弩俱發,魏軍大亂相失。

방연은 과연 날이 저문 뒤에야 그 나무 밑에 이르렀고 흰 부분에 씌어진 글씨를 보기 위해 불을 일으켜 그것을 밝혔다. 방연이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복병의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위나라 군사는 크게 어지러워져 서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다.

 

龐涓自知智窮兵敗,乃自剄,曰:「遂成豎子之名!」〔三〕

방연은 더 이상 지혜를 써 볼 수도 없이 싸움에 패했음을 알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이르기를,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했다.

 

齊因乘勝盡破其軍,虜魏太子申以歸。孫臏以此名顯天下,世傳其兵法。

제나라 군사는 승세를 몰아 위나라 군사를 전멸하다시피 하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이 승리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세상에 그의 병법이 전해졌다.

 

注[一]索隱王劭*[按]*:紀年云「梁惠王十七年,齊田忌敗梁于桂陵,至二十七年十二月,齊田敗梁於馬陵」,計相去無十三歲。注[二]集解魏武帝曰:「蹶猶挫也。」索隱蹶音巨月反。劉氏云:「蹶猶斃也。」注[三]索隱豎子謂孫臏。

 

[이하의 논평은 아래 오기열전 끝부분에서 손무 논평을 가져옴.]

太史公曰:태사공은 말한다.

 

世俗所稱師旅,皆道孫子十三篇,吳起兵法,世多有,

“세상에서 군사를 논하는 사람은 모두 손자 13편에 대해서 말하고 오기의 병법도 세상에 많이 유포되어 있다.

 

故弗論,論其行事所施設者。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사적과 시책에 대해서만 논했다.

 

語曰:「能行之者未必能言,能言之者未必能行。」

옛말에 이르기를 ‘능히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말하는 것은 아니며

능히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孫子籌策龐涓明矣,然不能蚤救患於被刑。

손빈은 방연을 치는 데에는 그렇게 밝았지만

그에 앞서 그에게 형벌을 당하는 화를 방지하지 못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SJYFraAN8k 

 

 

https://www.youtube.com/watch?v=7vOp6i5cbbk 

 

 

https://www.youtube.com/watch?v=qAROwx36hvM 

 

 

'고전을 읽다', 손자병법 - 3편

 

https://www.youtube.com/watch?v=meGWPpsZ-2o&t=89s 

 

 

https://www.youtube.com/watch?v=XO7SsVa8ZBg 

 
 

https://www.youtube.com/watch?v=SSOVPj22mF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