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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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206.所托者形也

       (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체다. ........

214.神者生之本也

     (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

     (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 <太史公自序>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58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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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열전 太史公 自序 -열전 제70편 국역/swings81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편액 아래의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붓글씨 이전의 글씨체이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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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사기열전 제70 자서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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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제70 자서

[사마천 자서의 변]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은자주)‘사기(史記)’의 처음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남북조시대부터 ‘사기’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384. 維我漢繼五帝末流(유아한계오제말류),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으며

1385. 接三代(統)(絶)業(접삼대(통)(절)업).
삼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1386. 周道廢(주도폐),
주나라의 도가 폐하게 되니

1387. 秦拔去古文(주발거고문),
진나라가 서서 옛날의 고적들을 없애고

1388. 焚滅<詩><書>(분멸<시><서>),
<시(詩)>와 <서(書)>를 불살랐다.

1389. 故明堂石室金櫃玉版圖籍散亂(고명당석실금궤옥판도적산란).
그 결과 명당(明堂)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금궤와 옥판의 지도와 서적들이 모두 흩어져 엉망이 되어버렸다.

1390. 于是漢興(우시한흥),
이어서 한나라가 흥기하자

1391. 蕭何次律令(소하차율령),
소하가 율령을 차례로 발하고

1392. 韓信申軍法(한신신군법),
한신(韓信)은 군법을 밝혔으며

1393. 張蒼爲章程(장창위장정),
장창은 법규를,

1394. 叔孫通定禮儀(숙손통정예의),
그리고 숙손통은 예의를 정했다.

1395. 則文學彬彬稍進(즉문학빈빈초진),
이로써 한나라는 문학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고

1396. <詩><書>往往間出矣(<시><서>왕왕간출의).
<시(詩)>와 <서(書)>가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1397. 自曹參 盖公言黃老(자조참천개공언황노).
조참은 개공을 무제에게 천거하여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398. 而賈生(이가생),
또한 가생과

1399. 晁錯明申, 商(조착명신, 상),
조착은 신자와 상군의 법가사상을 밝혔다.

1400. 公孫弘以儒顯(공손홍이유현),
공손홍은 유학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고

1401. 百年之間(백년지간),
그 백년 동안의

1402.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천하유문고사미불필집태사공).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전적들이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1403.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태사공잉부자상속찬기직.
태사공의 직책에는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가 계속해서 임명되었다.

1404. 曰: "於戱! (왈 : "어희)
사마천이 말했다. " 아아!

1405. 余維先人嘗掌斯事(여유선인상장사사),
우리들 선조들께서 이 이일을 일찍이 맡아하여

1406. 顯于唐虞(현우당우),
우임금 때 벌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1407. 至于周(지우주),
주조에 이르러

1408. 復典之(복전지),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1409. 故司馬氏世主天官(고사마씨세주천관).
이런 연고로 사마씨는 대를 이어 천관을 맡아하다가

1410. 至于余乎(지우여호),
이윽고 나에게까지 이른 것인가?

1411. 欽念哉!(흠념재)"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12. 罔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이미 없어진 구문들을 천하에서 모아서

1413. 王迹所興(왕적소흥),
왕들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흥함의 처음을 찾고

1414. 原始察終(원시찰종),
끝을 살펴서

1415. 見盛觀衰(견성관쇠),
흥망성쇠를 보고자 하였으며

1416. 論考之行事(논고지행사),
그 일의 진행을 사실적으로 고찰하여

1417. 略推三代(략추삼대),
삼대의 일을 간략히 추정하였으며,

1418. 錄秦漢(록진한),
진한시대의 기록에 유추하여

1419. 上記軒轅(상기헌원),
위로는 황제부터 기록하여

1420. 下至于玆(하지우자),
지금의 금상폐하에 이르기까지

1421. 著十二本紀(저십이본기),
모두

12본기

를 지은 것은


1422. 旣科條之矣(기과조지의).
모두 조례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423. 幷時異世(병시지세),
시대가 같기도 하고, 세대가 다르기도 하여

1424. 年差不明(연차불명),
그 연차가 확실하지 않아

1425. 作十表(작십표).
모두 10개의 연표를 만들었다.

1426. 禮樂損益(예악손익),
예와 악은 없어지고 혹은 더하여지기도 하였으며

1427. 律歷改易(율력개이),
율력은 새로 바뀌어 졌다.

1428. 兵權, 山川, 鬼神(병권, 산천, 귀신),
또한 병사와 권모의 일, 지방제도, 제사에 관한 일

1429. 天人之際(천인지제),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1430. 承 通變(승폐통변),
그 폐단을 밝혀 변화에 응하게하고자

1431. 作八書(작팔서).
<서(書)> 8편을 지었다.

1432. 二十八宿環北辰(이십팔수환북신),
28팔 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있고

1433. 三十輻共一 (삼십복공일곡),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한 개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으나

1434. 運行無窮(운행무궁)
그 운행의 법측은 무궁하듯이

1435. 輔拂股肱之臣配焉(보불고굉지신배언),
왕들을 보필하던 고굉지신들을 이것에 빗대어

1436. 忠信行道(충신행도),
충신들이 도를 행하고

1437. 以奉主上(이봉주상),
그 임금을 받든 사람들에 관하여

1438. 作三十世家(작삼십세가).
세가 30편을 지었다.

1439. 扶義  (부의숙당),
의를 부양하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억눌리지 않으며

1440. 不令己失時(불령기실시),
세상에 처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1441. 入功名于天下(입공명우천하),
공명을 세상에 세운

1442. 作七十列傳(작칠십열전).
열전 70편을 지었다.

1443. 凡百三十篇(범백삼입편),
모두 130편에



1444. 五十二萬六千五百字(오십이만육천오백자),
52만6천5백자



1445. 爲<太史公書>(위<태사공서>.)
<태사공서>라 이름 짓는다.


1446. 序略以拾遺補藝(서략이습유보예),
이 서문은 개략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하여

1447.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일가의 말을 이루어

1448. 厥協<六經>異傳(궐협<육경>이전),
육경 외에 전하여지는 것을 보충하여

1449. 整齊百家雜語(정제백가잡어),
백가와 잡어를 정리한 것이다.

1450. 藏之名山(장지명산),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1451. 副在京師(부재경사),
부본은 서울에 두어

1452. 俟后世聖人君子 第七十

(의후세성인군자 제칠십)..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기로 했다. 열전 제70.

[은자주] 열전 제70은 ‘태사공 자서’이다.

1453. 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1454. 余述曆黃帝以來至太初而訖(여술력황제이래지태초이흘),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여

1455. 百三十篇(백삼십편)
130편의 역사서를 지었다."

[太史公自序 大尾]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06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ydong77.tistory.com/4241?category=486097 

 

사마천-태사공자서 01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주]사마천은 사기 열전 70권 중 마지막 권을 자서전으로 채웠다. 사마천의 문학정신 곧 발분의 정신[현실비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된 <太史公自序>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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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凡人所生者神也(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정신[의식]이며

206.所托者形也(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신이다.

207.神大用則竭(신대용즉갈),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쇠갈(衰竭) 하고

208.形大勞則幣(형대노즉폐),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피로해진다.

209.形神離則死(형신리즉사).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210.死者不可復生(사자불가복생),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211.離者不可復反(이자불가복반),
육체를 떠난 정신은 다시 돌아와 결합할 수 없다.

212.故聖人重之(고성인중지).
고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다.

213.由是觀之(유시관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214.神者生之本也(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천재는 요절하는 것인가?

원문 번호는 구절 순서 표시임. 빠진 번호는 발췌에서 누락된 구절로 보면 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073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ydong77.tistory.com/8072

 

태사공자서 2 -사마천의 주유천하

태사공자서 2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218.太史公旣掌天官(태사공기장천관),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219.不治民(불치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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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70권의 창작 동기  /열전70

  • 노자한비열전 /사기열전 3

 4.사마양저열전

/열전4

 번쾌열전 01 /刺客列傳 第26

번쾌열전 02

 번쾌열전 03  /열전6

 

 

 굴원열전 01 /열전24

굴원열전 02 /屈原賈生列傳 제24

 

굴원열전 02

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1.굴원열전 02 屈平既絀, 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一〕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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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원열전 03/ 어부사

굴원열전 04/ 회사부   /열전24

 

   가의열전 03/ 服賦`

 

 오자서 열전 03

 

상군열전(商君列傳) 02, 史記 卷68 商君列傳 제8

史記卷六十八 商君列傳第八사기 권68 상군열전 제8-2 孝公既用衛鞅,鞅欲變法,恐天下議己。 효공기용위앙,앙욕변법,공천하의기。 효공이 위앙을 쓴 후에 위앙은 나라의 법을 고치자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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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열전 제9-7

 

소진 열전 제9-7

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第九 사기 권69 소진 열전 제9-7 久之,秦召燕王,燕王欲往, 蘇代約燕王曰: 그 뒤에 오랜만에 진나라가 연왕을 초대하였다. 연왕은 거기에 가려고 하였는데 소대는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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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순자

사마천, 사기열전 제66 滑稽(골계)  

열전66. 滑稽(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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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66. 滑稽(골계)

사마천, 사기열전 제66 滑稽(골계) 序 1 淳于髡(순우곤) 2 優孟우맹/4 3 優旃(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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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淳于髡(순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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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우곤(淳于髡) /골계

1 순우곤(淳于髡) <淳于髡>者, <齊>之贅壻也. 長不滿七尺, 滑稽多辯, 數使諸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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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優孟우맹/4

http://kydong47.blog.me/40199894013

 

2 우맹(優孟) /골계

2 우맹(優孟) <優孟>, 故<楚>之樂人也. 長八尺, 多辯, 常以談笑諷諫. [그리고 백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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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優旃(우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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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전(優旃) /골계

3 우전(優旃) 其後二百餘年. <秦>有<優旃>. 그 후 2백여 년 후에 진(秦)나라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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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三傳은 사마천 작]

 

[이하는 저소손(褚少孫)이 보충한 부분이다.]  

4.곽사인(郭舍人)/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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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곽사인(郭舍人) /골계

[이하 六傳은 저소손(褚少孫)이 보충한 부분이다.] 4.곽사인(郭舍人)/10 5. 동방삭(東方朔)/11 6.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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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방삭(東方朔)/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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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방삭(東方朔) /골계

5 동방삭(東方朔) <武帝>時, <齊>人有, 東方生>名<朔>, 무제 때 제나라 사람 성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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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곽선생(東郭先生)/17

http://kydong47.blog.me/40200015091

 

6 동곽선생(東郭先生) /골계

6 동곽선생(東郭先生) <武帝>時, 大將軍<衛靑>者, <衛后>兄也, 封爲<長平侯>.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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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우곤2/19

http://kydong47.blog.me/40200015340

 

7 순우곤 2nd /골계

7 순우곤 2nd 昔者, <齊王>使<淳于髡>獻鵠於<楚>. 옛날 제왕이 순우곤을 사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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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왕생(王生)/ 20

http://kydong47.blog.me/40200016009

 

8 왕생(王生) /골계

8 왕생(王生) <武帝>時, 徵<北海>太守詣行在所. 有文學卒史<王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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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문표(西門豹)/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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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열전 太史公 自序 -열전 제70편 국역/swings81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편액 아래의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붓글씨 이전의 글씨체이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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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第十四

맹자순경열전 제14

14-6. 순자(荀子)

  荀卿,趙人。〔一〕年五十始來游學於齊。

순경(荀卿)은 조나라 사람이다. 그의 나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와서 학설을 유세했다.

騶衍之術迂大而閎辯;奭也文具難施;

추연의 학술은 굽고 크게 과장되어 웅변적이었다.

추석 역시 문장은 좋으나 시행되기가 어려웠다.

淳于髡久與處,時有得善言。

순우곤과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때때로 유익한 말을 얻을 수 있었다.

故齊人頌曰:

「談天衍,雕龍奭,

炙轂〔二〕過髡。」〔三〕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이 세 사람을 각각 칭송하여 말했다.

" 하늘을 말하는 자는 추연이고,

문장에 용을 새기는 자는 추석이며,

지혜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사람은 순우곤이다."

田駢之屬皆已死 齊襄王時,〔四〕

而荀卿最為老師。

제양왕(齊襄王) 때에

전병과 그 무리들은 모두 죽고

순경이 가장 지위가 높은 스승이었다.

齊尚脩列大夫之缺,

而荀卿三為祭酒焉〔五〕。

제나라에서는 여전히 열대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3차례나 직하의 좨주(祭酒)가 되었다.

齊人或讒荀卿,荀卿乃適楚,

而春申君以為蘭陵令。〔六〕

어떤 제나라 사람의 모함을 받은 순경이 초나라로 가자

춘신군(春申君)은 그를 난릉령(蘭陵令)으로 삼았다.

春申君死而荀卿廢,因家蘭陵。

춘신군이 죽자 순경의 관직은 면직되었으나

그는 계속 난릉에 머물러 살았다.

李斯嘗為弟子,已而相秦。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던 이사(李斯)는

후에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荀卿嫉濁世之政,亡國亂君相屬,

不遂大道而營於巫祝,信禨祥,

순경은 세상에 혼탁한 정치가 행해지는 것과

나라를 망치는 혼미한 군주가 계속 왕위에 올라

대도를 따르지 않고 무당의 기원(祈願)에 미혹되고

길흉의 징조를 믿는 것과,

鄙儒小拘,

如莊周等又猾稽亂俗,

저속한 유자들이 작은 일에 연연해하는 것과,

더불어 장주(莊周)와 같은 무리들이 언변에 능하여

세속을 어지럽히는 것 등을 싫어하여

於是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

序列著數萬言而卒。因葬蘭陵。

유가, 묵가, 도가(道家)가 행한 성취와 실패를 고찰한 후

그것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수만 자의 글자로 된 저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는 난릉에 묻혔다.

  〔一〕索隱名況。卿者,時人相尊而號為卿也。仕齊為祭酒,仕楚為蘭陵令。後亦謂之孫卿子者,避漢宣帝諱改也。

  〔二〕集解徐廣曰:「一作「亂」。」

  〔三〕集解劉向別錄曰:「騶衍之所言五德終始,天地廣大,盡言天事,故曰「談天」。騶奭脩衍之文,飾若雕鏤龍文,故曰「雕龍」。」別錄曰「過」字作「輠」。輠者,車之盛膏器也。炙之雖盡,猶有餘流者。言淳于髡智不盡如炙輠也。左思齊都賦注曰「言其多智難盡,如炙膏過之有潤澤也」。索隱按:劉向別錄「過」字作「輠」。輠,車之盛膏器也。炙之雖盡,猶有餘津,言髡智不盡如炙輠也。按:劉氏云「轂,衍字也」。今按:文稱「炙轂過」,則過是器名,音如字讀,謂盛脂之器名過。「過」與「鍋」字相近,蓋即脂器也。轂即車轂,過為潤轂之物,則「轂」非衍字矣。

  〔四〕索隱按襄王名法章,湣王子,莒人所立者。

  〔五〕索隱按:禮食必祭先,飲酒亦然,必以席中之尊者一人當祭耳,後因以為官名,故吳王濞為劉氏祭酒是也。而卿三為祭酒者,謂荀卿出入前後三度處列大夫康莊之位,而皆為其所尊,故云「三為祭酒」也。

  〔六〕正義蘭陵,縣,屬東海郡,今沂州承縣有蘭陵山。

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第十四

맹자순경열전 제14


14-3. 순우곤(荀于髡)

  淳于髡,齊人也。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博聞彊記,學無所主。

그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학문에 주된 견해가 없었다.

其諫說,慕晏嬰之為人也,然而承意觀色為務。

그의 풍간(風諫)과 유세는 안영(晏嬰)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그

러나 상대방의 뜻을 이어받고 안색을 살피는 데에만 힘썼다.

客有見髡於梁惠王,

惠王屏左右,獨坐而再見之,終無言也。

어느 식객이 순우곤에게 양혜왕의 접견을 주선해주었다.

혜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앉아 두 번이나 그를 보았지만

순우곤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惠王怪之,以讓客曰:

혜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소개한 식객을 꾸짖으며 말했다.

「子之稱淳于先生,管、晏不及,

及見寡人,寡人未有得也。

" 그대가 순우곤 선생은 관중(管仲)과 안영도 미치지 못한다고 칭찬하여

과인이 그의 접견을 허락했지만 그에게서 얻은 것이 없었다.

豈寡人不足為言邪?何故哉?」

그를 상대하여 말하기에 과인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인가?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客以謂髡。髡曰:

식객이 혜왕의 말을 전하자 순우곤이 설명했다.

「固也。吾前見王,王志在驅逐;

後復見王,王志在音聲:吾是以默然。」

"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왕을 뵈었을 때 왕의 뜻은 달리는 말에 있었습니다.

뒤에 다시 왕을 뵈오니 왕의 뜻은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客具以報王,王大駭,曰:

식객이 왕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하자 혜왕이 매우 놀라 말했다.

「嗟乎,淳于先生誠聖人也!

前淳于先生之來,人有獻善馬者,

寡人未及視,會先生至。

" 아! 진실로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로다!

전에 순우곤 선생이 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바쳤는데,

마침 과인이 그 말을 보기도 전에 선생이 도착했소.

後先生之來,人有獻謳者,

未及試,亦會先生來。

뒤에 다시 선생이 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노래 잘하는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마침 그를 시험해보기도 전에 역시 선생이 도착했었소.

寡人雖屏人,

然私心在彼,有之。」〔一〕

과인이 비록 사람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그것들에 있었으니, 바로 그런 일로 인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소. "

後淳于髡見,壹語連三日三夜無倦。

뒤에 순우곤이 왕을 뵙고 한 번 이야기하니

3일 밤낮을 계속해도 혜왕은 결코 싫어하거나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惠王欲以卿相位待之,髡因謝去。

혜왕이 경상(卿相) 지위로 그를 대우하려고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양하고 물러갔다.

於是送以安車駕駟,

束帛加璧,黃金百鎰。

終身不仕。

그래서 순우곤을 혜왕이 전송하면서 4마리의 말이 끄는,

호화로운 휘장이 쳐진 수레에 그를 태우고 비단과 벽옥 및 황금 100일(鎰)을 하사했다.

순우곤은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一〕索隱謂私心實在彼馬與謳也。有之,謂我實有此二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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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第十四

맹자순경열전 제14

 14-2. 추연(騶衍) 

 齊有三騶子。其前騶忌,

제나라에는 세 명의 추자(騶子)가 있다. 맨 먼저 사람은 추기(騶忌)다.

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제위왕(齊威王)에게 거문고에 빗대어 간언을 올려 국정에 참가하게 된 그는

성후(成侯)에 봉해지고 상국(相國)의 인장을 받았다.

  其次騶衍,後孟子。

그 다음은 추연(騶衍)으로 맹자보다 후대 사람이다.

騶衍睹有國者益淫侈,不能尚德,

若大雅整之於身,施及黎庶矣。

나라를 가진 자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음란하고 사치해지는 것을 목도한 추연은

그들에게서는 결코 도덕이 숭상될 수 없음을 알고,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서 말한 것처럼 먼저 자신의 몸가짐을 단정하게 추스른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덕이 밑의 백성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乃深觀陰陽消息而作怪迂之變,

終始、大聖之篇十餘萬言。

그래서 그는 음양의 소멸과 성장을 깊이 관찰하고,

황당무계하고 현실과 거리가 먼 변화와 환상의 일을 주제로

종시(終始), 대성(大聖) 편 등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其語閎大不經,

必先驗小物,推而大之,至於無垠。

그 말들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종잡을 수 없으나,

먼저 작은 사물을 검증하고 난 후에

그것을 근거로 추론하여 큰 것에 적용해 나가

결국 무한한 곳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先序今以上至黃帝,

學者所共術,大並世盛衰,〔一〕

우선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먼 상고시대의 황제(黃帝)까지 서술했는데

이는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것으로 대체로 시대의 흥함과 쇠함을 따랐다.

因載其禨祥度制,推而遠之,

至天地未生,窈冥不可考而原也。

또한 신에게 길흉화복을 구하는 제도를 기재한 후에

그것을 근거로 짐작하여 먼 곳까지 이르렀는데,

천지가 생기기 전의 아련하게 깊고 먼 신비한 세상을 생각하여

그 시초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先列中國名山大川,通谷禽獸,

水土所殖,物類所珍,

그는 먼저 중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 심산계곡에 살고 있는

날짐승과 들짐승, 수중이나 뭍에서 번식하는 각종 생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진기한 물건들을 서술하고

因而推之,及海外人之所不能睹。

그것들로 다른 것을 유추하여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요원한 이역(異域)의 산물까지 논했다.

稱引天地剖判以來,五德轉移,

治各有宜,而符應若茲。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오행(五行)이 상생상극(相生相克)하고 순환왕복(循環往復)하여

시대는 저마다 오행에 상응하는 정치제도를 취하고

천명(天命)과 인사(人事)가 상호 감응했음을 밝혔다.

以為儒者所謂中國者,

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二〕

中國名曰赤縣神州。

유가에서 말하는 중국은,

천하를 81개로 나누었을 때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여긴 추연은

해당하는 이름은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지었다.

赤縣神州內自有九州,

禹之序九州是也,不得為州數。

적현신주 안에는 9개의 주(州)가 있는데

하우(夏禹)가 정리한 9주(九州)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는 대주(大州)와 같이 논할만한 것이 못 된다

中國外如赤縣神州者九,

乃所謂九州也。於是有裨海環之,〔三〕

중국 이외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대주가 9개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9개의 대주(大州)다.

각각의 대주는 작은 바다가 두르고 있는데,

人民禽獸莫能相通者,

如一區中者,乃為一州。

각 주에 사는 백성들과 짐승들은 서로 통하지 않고

각각의 대주는 중국과 같이 9개의 주(州)로 나뉘고

그 한 구역 안에 있는 것을 1주(一州)라고 했다.

如此者九,乃有大瀛海環其外,

天地之際焉。其術皆此類也。

9개의 대주로 이루어진 세상은 큰 바다가 그 밖을 두르고 있는데,

그것이 하늘과 땅의 끝이다.

추연이 기술한 학설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다.

然要其歸,必止乎仁義節儉,

君臣上下六親之施,始也濫耳。〔四〕

그러나 그 요점은 반드시 인의와 절약, 근검,

그리고 군신, 상하, 육친(六親) 사이의 일에 귀착되는데,

그 처음은 넘쳐흐른다.

王公大人初見其術,懼然顧化,〔五〕

其後不能行之。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이 그의 학설을 처음 들으면

깜짝 놀라 그의 설에 감화되지만,

그러나 후에는 결코 실행할 수 없었다.

  〔一〕集解並,蒲浪反。索隱言其大體隨代盛衰,觀時而說事。

  〔二〕索隱桓寬、王充並以衍之所言迂怪虛妄,干惑六國之君,因納其異說,所謂「匹夫而營惑諸侯」者是也。

  〔三〕索隱裨音脾。裨海,小海也。九州之外,更有大瀛海,故知此裨是小海也。且將有裨將,裨是小義也。

  〔四〕索隱濫即濫觴,是江源之初始,故此文意以濫為初也。謂衍之術言君臣上下六親之際,行事之所施所始,皆可為後代之宗本,故云濫耳。

  〔五〕索隱懼音劬。謂衍之術皆動人心,見者莫不懼然駐想,又內心留顧而已化之,謂欲從其術也。按:化者,是易常聞而貴異術也。

  是以騶子重於齊。

이것으로 추연은 제(齊)나라에서 존중함을 받게 되었다.

適梁,

惠王郊迎,執賓主之禮。

그가 양나라에 갔을 때,

양혜왕이 교외에까지 나와 영접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대우했다.

適趙,平原君側行撇席。〔一〕

그리고 조(趙)나라에 갔을 때

평원군(平原君)은 옆으로 걸어가면서 옷자락이 자리를 쓸 정도로 경의를 표시하였다.

如燕,昭王擁彗先驅,〔二〕

請列弟子之座而受業,

築碣石宮,〔三〕身親往師之。

作主運。〔四〕

연(燕)나라에 가니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면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제자의 신분으로 자리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더니

결국 갈석궁(碣石宮)을 건축하여 그를 머무르게 하면서

몸소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이때 '주운(主運)'을 저술했다.

其游諸侯見尊禮如此,

豈與仲尼菜色陳蔡,

孟軻困於齊梁同乎哉!〔五〕

그가 천하를 유세하려 다닐 때 제후들에게 받은 존경과 예우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옛날 공자가 진채(陳蔡) 지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맹자가 제량(齊梁) 지간에서 당한 곤궁한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故武王以仁義伐紂而王,伯夷餓不食周粟;

衛靈公問陳,而孔子不答;

그러므로주무왕이 인의로써 은주(殷紂)를 정벌하여 천자가 되었으나,

이를 반대한 백이(伯夷)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고,

위영공(衛靈公)이 진법에 대해 묻자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梁惠王謀欲攻趙,孟軻稱大王去邠。〔六〕

양혜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그 계책을 묻자

맹자는 옛날 주나라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난 것을 칭송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此豈有意阿世俗苟合而已哉!

持方枘欲內圜鑿,其能入乎?〔七〕

이러한 일들이 어찌 세속에 아첨하며

구차하게 다른 사람의 뜻에 영합하려고 해서였겠는가?

네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넣으려고 하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或曰,伊尹負鼎而勉湯以王,

百里奚飯牛車下而繆公用霸,

作先合,然後引之大道。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솥을 짊어지고 탕(湯)임금을 격려하여 왕이 되도록 했으며,

백리해(百里奚)는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다가 진목공(秦穆公)에게 등용되어 그를 패자로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먼저 상대방의 뜻에 영합한 이후에

그를 대도(大道)로 인도한 것이라고 했다.

騶衍其言雖不軌,儻亦有牛鼎之意乎?〔八〕

추연의 말은 비록 일반적인 상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품고 있는 뜻 역시 백리해가 소를 먹인 것이나 이윤이 솥을 짊어진 것과 같지 않았겠는가!

  〔一〕索隱按:字林曰「襒音疋結反」。韋昭曰「敷蔑反」。張揖三蒼訓詁云「襒,拂也。謂側而行,以衣襒席為敬,不敢正坐當賓主之禮也」。

  〔二〕索隱按:彗,帚也。謂為之埽地,以衣袂擁帚而卻行,恐塵埃之及長者,所以為敬也。

  〔三〕正義碣石宮在幽州薊縣西三十里寧臺之東。

  〔四〕索隱按:劉向別錄云鄒子書有主運篇。

  〔五〕索隱按:仲尼、孟子法先王之道,行仁義之化,且菜色困窮;而鄒衍執詭怪營惑諸侯,其見禮重如此,可為長太息哉。

  〔六〕索隱今按:孟子「太王去邠」是軻對滕文公語,今云梁惠王謀攻趙,與孟子不同。

  〔七〕索隱按:方枘是筍也,圜鑿是孔也。謂工人斲木,以方筍而內之圜孔,不可入也。故楚詞云「以方枘而內圜鑿,吾固知其齟齬而不入」是也。謂戰國之時,仲尼、孟軻以仁義干世主,猶方枘圜鑿然。

  〔八〕索隱按:呂氏春秋云「函牛之鼎不可以烹雞」,是牛鼎言衍之術迂大,儻若大用之,是有牛鼎之意。而譙周亦云「觀太史公此論,是其愛奇之甚」。

  自騶衍與齊之稷下先生,〔一〕

如淳于髡、慎到、環淵、〔二〕接子、〔三〕田駢、〔四〕騶奭之徒,〔五〕

各著書言治亂之事,以干世主,豈可勝道哉!

추연을 비롯하여 제나라의 직하(稷下)에 모여 살았던 학자들,

즉 순우곤(淳于髡) 신도(愼到), 환연(環淵), 접자(接子), 전병(田騈), 추석(騶奭)과 같은 무리가

각자 글을 지어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는 일들을 논술하여

이로써 당시의 군주들에게 읽혀지기를 간구하였으니,

그것들을 어찌 이루 다 언급할 수 있겠는가?

  〔一〕索隱稷下,齊之城門也。或云稷下,山名。謂齊之學士集於稷門之下。

  〔二〕索隱按:劉向別錄「環」作姓也。

  〔三〕索隱古著書人之稱號。

  〔四〕索隱步堅、步經反二音。

  〔五〕正義慎子十卷,在法家,則戰國時處士。接子二篇。田子二十五篇,齊人,游稷下,號「天口」。接、田二人,道家。騶奭十二篇,陰陽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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