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bhjang3/140040428609

朱熹의 淫詩論

李 再 薰*

<목 차>

1. 서론

2. '變<風>止乎禮義'說 否定

3. 淫詩의 作者

4. 詩敎로서의 思無邪論

5. 결론

1. 서 론

宋代 性理學의 집대성자 朱熹(1130-1200)의 ≪詩集傳≫은 南宋 이후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詩經≫ 주석서이다. ≪詩集傳≫은 漢唐의 전통 詩經論에 의심을 품어 <詩序>說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詩經≫ 시편의 내용을 이해하려 하였던 宋代 新詩經論의 '集大成 著作'이며, 중국 ≪詩經≫ 硏究史에 있어서 鄭玄의 ≪毛詩傳箋≫과 孔穎達의 ≪毛詩正義≫의 뒤를 이어 세번째 이정표를 세운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 ≪詩經≫ 연구에 이정표가 되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詩集傳≫에 반영되어 있는 朱熹의 詩經論은 크게 <詩序>說 비판, ≪詩經≫ 六義에 대한 새로운 견해, 淫詩論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 詩經論 가운데 淫詩論은 앞의 두 가지 詩經論과 朱熹의 性情論 및 道德觀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朱熹 詩經論의 要諦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淫詩論은 禮敎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지배하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當時의 학자는 물론 ≪詩集傳≫의 설이 국가 공인의 定說로 인정되던 元明淸代 학자들까지도 朱熹의 淫詩論을 주된 논의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筆者는 이처럼 역대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朱熹의 淫詩論이 어떠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淫詩論의 득실에 대한 검토작업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2. '變<風>止乎禮義'說 否定

朱熹는 古代 시가의 총집인 ≪詩經≫에는 당시 정치 사회의 현상을 논한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에 觸動되는 바가 있어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읊은 시도 있으므로 三百篇의 시가 반드시 다 시인의 올바른 性情으로부터 나와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大序>의 '變<風>止乎禮義'라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里巷의 가요가 주종을 이루는 變<風>의 시편 중에는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男女情思之詞', 즉 음탕한 시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淫詩論의 첫번째 근거로 삼았다.

그는 <詩集傳序>에서 ≪禮記·樂記≫篇의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라는 말을 인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性情論을 가미하여 시의 기원과 본질을 설명함으로써 <大序>의 '變<風>止乎禮義'說에 대한 반론 전개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한 것은 하늘이 부여한 性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性의 욕구이다. 무릇 욕구하는 바가 있으매 생각이 없을 수 없고 생각이 있으매 말이 없을 수 없다. 이마 말이 있으되 말로써 다 나타낼 수가 없어서 탄식과 영탄으로 나타난 나머지 반드시 자연의 음향과 節奏를 갖게 되어 그칠 수 없으니, 이것이 시가 지어진 까닭이다.……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말로써 표현된 나머지이다. 마음이 감응한 바에는 비뚤고 바름이 있으므로 말로써 표현된 것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된다.

朱熹의 性情論에 의하면 性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心의 본체로서 純善한 것이며 '性之欲', 즉 情은 性이 사물에 감응하여 일어나는 心의 작용으로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理와 氣, 즉 天命之性과 氣質之性을 겸비하고 있는 인간은 그 氣稟 즉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氣質之性에 淸濁의 相異함이 있기 때문에, 氣의 주재자인 心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게 된다. 이에 따라 '性之欲'이며 心의 작용인 情 역시 선과 악이 있게 된다. 시는 '性之欲'이며 心의 작용인 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情의 선과 악에 따라 시의 내용 역시 선한 것과 악한 것, 즉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朱熹는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詩經≫ <國風>의 경우 正<風>인 <周南>·<召南> 시편의 시인은 文王의 德化를 입어서 그 性情이 올바르기 때문에 그 詩의 내용 역시 禮義의 기준에 부합하지만, 變<風>인 < 風> 이하의 시편의 시인은 文王의 德化가 쇠퇴한 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 性情이 바른 자가 있는가 하면 바르지 않은 자도 있으며 따라서 그 시의 내용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있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다만 <周南>·<召南>은 친히 文王의 敎化를 입어 덕을 이루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 性情의 바름을 얻었기 때문에 그 말로 나온 것이 즐겁되 지나치게 음란하지 않으며 슬퍼도 傷함에 이르지 않으므로 二篇만이 <風>詩의 正經이 되었다. < > 이하부터는 그 나라의 治亂이 같지 않고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이 또한 달라 그 느껴서 (말로) 發出된 바에 비뚤고 바르고·옳고 그르고가 고르지 않음이 있어 이른바 先王의 <風>이 이에 변했다.

그래서 朱熹는 <大序>의 '變<風>은 情에서 나와 예의에서 머물렀다(變<風>發乎情, 止乎禮義)'라는 말 중의 '예의에 머물렀다'라는 견해가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情이라는 것은 性의 움직임이고 예의라는 것은 性의 덕이다. 움직이되 그 덕을 잃지 않음은 先王의 혜택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이 깊어 이에 이르렀어도 아직 잊지 않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그것이 대체로 이와 같다는 것으로 그 放逸하여 예의에 머물지 않은 것이 본래 매우 많다.

<大序> 또한 미진함이 있다. 예컨대 '情에서 나와 예의에서 머물렀다'는 또 단지 正詩를 말할 뿐으로 變<風>이 어찌 일찍이 예의에서 머물렀던가? 變<風>의 <柏舟> 등 시는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일컬어도 되지만 <桑中> 諸篇은 예의에 머물렀다고 하면 안된다. 대체로 大綱에 있어서 예의에서 머문 것이 있다는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變<風>의 시편은 135편 전체로 보아서는 純善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情으로부터 나온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별적으로 본다면 사악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情으로부터 나와 예의에서 벗어난 것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대부분이 里巷 歌謠의 作으로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變<風> 시편중에 이와 같이 예의에서 벗어난 放逸한 시, 즉 음란한 시가 많다고 주장하였다. 變<風>의 경우 또 음란한 시가 많다. 때문에 班固는 남녀가 서로 노래하여 그 마음 아픔을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옳은 말이다.

朱熹는 시는 시인의 情志를 표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고 음악은 시를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시와 음악 즉 聲音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禮記·樂記≫의 이른바 亂世의 音인 鄭·衛의 音이 바로 < 風>·< 風>·<衛風>의 三衛詩와 <鄭風>의 시이고 그 시들은 예의에서 벗어나 사악하고 음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전부터 보건대 ≪詩≫中의 鄭詩와  · ·衛詩가 바로 鄭·衛의 音으로 그 시가 대단히 사음하다. 시와 음악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朱熹의 견해에 의한다면, 鄭詩 즉 <鄭風>의 시가 대부분 남녀의 淫奔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 음악도 마찬가지로 음란하다. 그렇다면 孔子가 ≪論語·衛靈公≫ 篇에서 '鄭聲淫'이라고 한 까닭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孔子가 '鄭聲淫'이라고 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聖人이 鄭聲이 음탕하다고 한 것은 대체로 鄭나라 사람들의 시는 대부분 당시 풍속에 남녀가 淫奔한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朱熹는 三衛詩와 鄭詩가 다른 變<風>의 시에 비해 예의에서 벗어난 음란한 시가 많은데, 이 양자의 차이를 자세히 고찰하여 비교한 결과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다. 첫째, 三衛詩가 총 39편중의 4분의 1이 淫詩인 데 비해 鄭詩가 총 21편중의 7분의 5가 淫詩이다. 둘째, 三衛詩가 남자가 여자를 희롱한 것이 대부분인 데 비해 鄭詩는 여자가 남자를 희롱한 것이 대부분이다. 朱熹는 孔子가 三衛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鄭詩에 대해서만 "鄭聲은 음탕하다"·"鄭聲을 몰아내야 한다(放鄭聲)" (≪論語·衛靈公≫篇)라고 비판한 까닭이 바로 鄭詩가 三衛詩보다 수량면의 비율과 내용면의 사악함에 있어서 훨씬 심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鄭과 衛의 樂은 모두 음탕한 聲이다. 그러나 시로써 상고하여 보면 衛詩는 39편인데 淫奔詩가 겨우 4분의 1이지만 鄭詩는 21편인데 淫奔詩가 7분의 5만이 아니다. 衛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말인데 鄭은 다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말이다. 衛나라 사람은 오히려 풍자하고 나무라며 징계하는 뜻이 많은데 鄭나라 사람은 거의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며 후회하고 깨닫는 징후가 전혀 없다. 이는 鄭聲의 음탕함이 衛보다 심한 것이다.

때문에 孔子가 顔淵과 나라 다스리는 것을 논하면서 유독 鄭聲으로써 경계를 삼되 衛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체로 비중이 큰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니 원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른바 <序>라는 것은 대부분이 世儒의 말로 시인의 本意를 이해하지 못한 곳이 매우 많다. 예컨대 '예의에서 머물렀다' 하였는데 과연 예의에서 머무른다 할 수 있겠는가? <桑中>詩는 예의가 어느 곳에 있는가?" 王德修가 말하기를 "그것은 경계를 남기려고 한 것입니다." "이 (<桑中>篇) 正文中에는 경계의 의미가 없으니 단지 그 음란한 일을 직접 진술한 것일 뿐이다. 예컨대 < 之奔奔>과 <相鼠> 등의 시는 오히려 꾸짖고 욕을 하여 경계로 삼을 만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제 鄭詩를 보건대 <叔于田> 등의 시 외에 예컨대 <狡童>과 <子衿> 등의 시편은 모두 음란한 시들인데, ≪詩≫를 말하는 자들이 그릇되게도 昭公을 풍자한 것이라느니 학교가 폐해짐을 풍자한 것이라느니 하였다. 衛詩는 그래도 可해서 아직은 남자가 부인을 희롱한 것이나, 鄭詩는 그렇지 않아 부인이 남자를 희롱한 것이 많다. 이러한 까닭에 聖人이 鄭聲을 더욱 싫어하신 것이다.

孔子는 일찍이 鄭聲이 음탕하므로 鄭聲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고 또 "鄭聲이 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鄭聲之亂雅樂也)"(≪論語·陽貨≫篇)고 하여 鄭聲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晩年에 "내가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온 후에 음악이 바로잡혔고 <雅>와 <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論語·子罕≫篇)라고 하여 음악과 ≪詩經≫을 정리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孔子의 말로 인하여 漢代에 孔子 刪詩說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詩≫三百'은 춘추전국시대의 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漢 司馬遷이 ≪史記≫에서 古詩 三千餘篇을 孔子가 중복된 것을 제거하고 예의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취하여 305편으로 정하였다고 하여 최초로 孔子 刪詩說을 제기하였다. 後漢의 王充은 ≪論衡≫에서 정식으로 '刪'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孔子가 ≪詩≫·≪書≫를 刪定하였다.(孔子刪定≪詩≫,≪書≫)" (<知實>篇)·"≪詩經≫은 옛날에는 또한 수천편이었는데 孔子가 중복된 것을 刪去하고 바로잡아서 三百篇을 보존시켰다.(≪詩經≫舊時亦數千篇, 孔子刪去複重, 正而存三百篇.)"(<正說>篇)라고 하여 司馬遷의 설을 뒷받침하였다.

전통 漢唐學者이자 朱熹의 知友인 呂祖謙은 이와 같은 孔子의 刪詩說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학자였다. 그는 孔子가 ≪詩經≫을 刪定함으로 인해 鄭·衛의 음란한 시와 음악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詩≫ 三百篇 모두가 제사와 朝聘에 사용할 수 있는 中和한 聲에 머무르는 雅樂이며 그 내용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詩≫는 雅樂으로 제사와 朝聘에 쓰이는 바이며 桑間· 上의 音은 鄭·衛의 樂으로 세속에서 쓰는 바이다. 雅와 鄭이 部를 같이 하지 않음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전국시대에 魏 文侯가 子夏와 古樂과 新樂을 이야기하였고 齊 宣王과 孟子가 古樂과 今樂을 이야기하였는데 대체로 모두 구별을 하여서 말하였던 것이다. 비록 今世에도 太上과 敎坊에 각기 司局이 있어 처음부터 서로 뒤얽혀 있지 않은데 하물며 위로 춘추시대에 어찌 鄭·衛의 악곡을 雅에 편입할 리가 있겠는가?

<桑中>·<溱洧> 제편은 周나라 도가 쇠하였을 때 지어져서 그것이 비록 이미 煩促함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中和한 聲에서 머물러 荀子이 아직도 이를 알 수 있었으며, 그 말이 비록 하나를 풍자하고 백을 권면하는 것에 가깝지만 여전히 예의에서 머물러 <大序>가 홀로 이를 알 수 있었으니 孔子가 이를 經에 수록한 것은 世變의 시초에 신중하였던 바이다. 가령 孔子 이전에 雅와 鄭이 과연 일찍이 뒤섞였었다면 衛나라로부터 魯나라로 돌아와 樂을 바로잡을 때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이것보다 큰 것이 없다. 唐 明皇이 胡部와 鄭·衛의 聲을 합주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俗樂을 말하는 자들조차도 이를 그르다고 하였는데 孔子가 오히려 雅와 鄭을 합주하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論語≫에서 顔子의 물음에 답한 것은 孔子의 천하를 다스리는 大綱으로 鄭聲에 대해서 시급히 몰아내고자 하였는데 어찌 ≪詩≫를 刪定하여 萬代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鄭聲을 거두어서 六藝에 갖추었겠는가?

呂祖謙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가 '鄭聲이 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雅와 鄭은 비교적 넓고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雅는 <小雅>·<大雅>의 雅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체 雅正하고 中和한 聲의 총칭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사 <鄭風>·<衛風>이라 하여도 中和한 聲에 합치되고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기만 하면 또한 雅에 속하며, 鄭은 일체 속악의 총칭으로 ≪禮記·樂記≫의 이른바 亡國之音인 桑間· 上之音과 같은 음란한 鄭·衛의 俗樂이 이에 속한다.

雅樂인 雅와 속악인 鄭은 본래 서로 부류가 달라서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지만, 춘추 말기에 예악이 붕괴함에 따라 雅와 鄭이 뒤섞이게 되었다. 이에 孔子가 晩年에 이를 바로잡아 鄭을 雅로부터 제거하여 ≪詩經≫을 中和한 聲에 합치되고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西周 말년의 작인 < 風·桑中>篇이나 <鄭風·溱洧>篇 등의 경우 비록 그 音이 煩促하여 속악인 鄭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남녀간의 음란한 일을 읊어 풍자하되 諷一勸百하는 혐의가 짙으므로 淫詩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시편들이 ≪詩經≫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鄭이 아니라 雅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까닭에 荀子가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는 바이다.(≪詩≫者, 中聲之所止也.)'(≪荀子·勸學≫篇)라고 여겼고 <大序>에서 '예의에서 머물렀다'라고 한 것이다. 聲과 시는 동질성을 띠고 있어 일치하므로 '放鄭聲'이 바로 刪詩를 의미하는 것인즉, 孔子가 刪詩를 할 때 鄭聲을 제거하여 수록하지 않았을 것이니 ≪詩≫ 三百篇中에는 음란한 시가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禮記·樂記≫의 이른바 鄭·衛의 音이나 桑間은 ≪詩經≫의 <鄭風>과 < 風>·< 風>·<衛風>이나 < 風>의 <桑中>篇이 아니므로, ≪詩經≫중에는 淫詩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呂祖謙의 견해는 ≪詩經≫에 淫詩가 있다는 朱熹의 주장에 대한 전통 漢唐詩經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朱熹는 <讀呂氏詩記桑中高>와 ≪詩序辨說≫에서 長文으로써 呂祖謙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대저 雅·鄭·衛 같은 것은 여러 편에서 구하면 본래 각기 그 명목이 있다. 雅는 <大雅>와 <小雅> 약간 편이 그것이고 鄭은 <鄭風> 약간 편이 그것이며 衛는  · ·衛<風> 약간 편이 그것이다. 이것은 孔子가 衛나라로부터 魯나라로 돌아온 이래로 바뀌지 않았으며 <風>과 <雅>의 시편은 말하는 자들에게 또 正·變의 구별이 있다.

<桑中>의 <小序> "정사가 산란해지고 백성들이 유리하되 제지할 수 없었다"라는 글은 <樂記>와 부합한즉 이 詩가 桑間이 됨은 또한 근거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반드시 三百篇이 모두 雅여서 <大雅>와 <小雅>만이 홀로 雅가 아니고 <鄭風>이 鄭이 아니며·衛의 <風>이 衛가 아니고 <桑中>이 桑間 亡國의 音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篇帙이 혼란해지고 비뚤고 바름이 뒤섞여져 더 이상 옛 孔子 때의 것이 되지 않는다.

대저 二<南>正<風>은 房中之樂이며 鄕樂이고 二<雅>의 正은 조정의 음악이며 商·周의 <頌>은 종묘의 음악이다.……變<雅>에 이르러서는 원래 이미 일에 무용하고 變<風>은 또한 단지 里巷의 가요일 뿐으로 그것이 악관에 領屬된 까닭은 시대의 변화를 알고 토속을 살필 수 있고 사방 오랑캐의 음악보다 훌륭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지금 기어코 三百篇이 모두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桑中>篇과 <溱洧>篇 같은 것은 응당 어떠한 귀신에게 올리고 어떠한 손님을 맞아야 할지 모르겠다.……그러나 그것이 先王 <雅>·<頌>의 正篇과는 篇帙이 같지 않고 쓰임 또한 다름이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으니 본래 뒤섞이는 것에 꺼릴 바가 없다.

지금 鄭과 衛의 실질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뒤섞인다는 명분에 대해 또한 너무 심하게 두려워하여 오히려 들뜨고 放逸한 鄙詞를 이끌어다가 풍자라는 아름다운 설로 문식하여 반드시 억지로 先王의 <雅>·<頌>의 반열에 놓으려고 하는데, 이는 오히려 뒤섞임이 심하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대저 胡部와 鄭·衛를 합주하는 것조차도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더군다나 억지로 <桑中>과 <溱洧>를 雅樂으로 삼고 또 <鹿鳴>·<文王>·<淸廟>의 篇什에 합쳐서 종묘 안과 조정 위에서 연주하려고 하다니! 두 시가 中和한 聲에서 머물렀다고 여긴 것과 司馬遷이 孔子가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그 오류 또 이와 같다.……또 백을 권면하고 하나를 풍자하는 것에 가깝지만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여긴 것은 또 <大序>의 잘못을 믿은 것이다.……<桑中>과 <溱洧> 같은 것은 나는 그것이 어떤 말로 풍자하였으며 무슨 예의에서 머물렀는지를 모르겠다.

雅라는 것은 二<雅>가 그것이고 鄭이라는 것은 <緇衣> 이하 21篇이 그것이며 衛라는 것은  · ·衛 39편이 그것이고 桑間은 衛의 1편으로 <桑中>詩가 그것이다. 二<南>·<雅>·<頌>은 제사와 朝聘에 사용하는 것이고 鄭·衛·桑· 은 狎妓들이 노래하는 것이다.……지금 이것을 살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 鄭·衛·桑· 의 실질을 기피하고 雅樂의 이름으로써 문식하려 하고 또 그래 가지고서는 종묘 안과 조정 위에서 연주하려고 하니 장차 어떠한 귀신에게 올리고 어떠한 손님에게 사용할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聖人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또한 어찌 겉으로는 지키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 또한 틀렸다.……묻기를: "荀子의 이른바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르는 바이다'라고 한 것과 司馬遷 또한 三百篇은 孔子가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荀子의 말은 본래 正經에 대해서 한 것이고 司馬遷의 설은 근거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어찌 음란한 音의 曲이 억지로 <韶>와 <武>의 音에 합할 수 있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朱熹는 孔子가 이미 '放鄭聲'하여 俗樂인 鄭·衛의 邪淫한 音을 ≪詩經≫으로부터 刪去하였으므로 現傳 ≪詩經≫의 모든 시편이 다 내용이 雅正하고 聲이 中和한 雅라는 呂祖謙의 주장이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하여 극력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가 晩年에 '正樂', 즉 殘缺되고 차례가 뒤바뀌어 버린 ≪詩≫·≪樂≫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여 <風>·<雅>·<頌>과 正·變의 차례를 원래대로 바로잡아 제자리에 두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한 이후로 어느 누구도 이를 바꾼 적이 없다. 또 ≪詩經≫ 중에 雅와 鄭 그리고 衛라는 명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雅가 바로 <小雅>와 <大雅>이고 鄭이 바로 <鄭風>이며 衛가 바로 三衛詩인 < 風>·< 風>·<衛風>이고 <樂記>의 이른바 桑間이 바로 < 風·桑中>篇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風>을 正 또는 變 막론하고 모두 다 雅 즉 雅樂이라고 여기고 또 <鄭風> 밖에서 따로 鄭聲 즉 속악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呂祖謙은 ≪詩經≫ 시편이 모두 聲이 中和한 雅樂이므로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鄭·衛의 變<風>詩 역시 제사와 朝聘에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儀禮≫의 <鄕飮酒禮>·<鄕射禮>·<燕禮>篇과 ≪周禮·春官≫篇 및 ≪禮記≫의 <祭統>·<仲尼燕居>·<射義>篇의 기록을 보면 呂祖謙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典籍의 기록에 의하면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樂章들은 모두 房中之樂이며 鄕樂인 二<南> 正<風>·조정의 음악인 正<雅>·종묘의 음악인 <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變<風>·變<雅>의 시편이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變詩中에서도 妓房에서나 노래할 수 있을 정도로 특히 음악이 淫 하고 내용이 음란한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시는 幽王· 王·   같이 邪淫한 인물의 제사나 齊 襄公·陳 靈公 같이 음란한 賓客의 燕饗에 사용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만약 이를 훌륭한 조상의 祭祀나 佳賓의 燕饗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귀신을 모독하고 賓客에게 不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朱熹는 荀子의 '≪詩≫者, 中聲之所止也.'라는 말은 단지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雅樂인 正<風>·正<雅>·<頌>의 경우만을 지칭한 것일 뿐으며, 내용이 경박하고 음란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시가 적지 않은 變<風>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林武子가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는 바이다'에 대하여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것은 단지 正<風>·<雅>·<頌>만이 中和한 聲이고 그 變<風>은 아니라는 말이다. 呂祖謙은 굳이 억지로 끌어 붙여서 變<風> 역시 그렇다고 말하였지만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단지 읽어보기만 해도 그 경박한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예컨대 韓愈가 몇 句는 '그 소리가 들뜨고 음탕한' 部類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렇다.

朱熹는 초기에는 <詩序>說을 따르고 孔子의 刪詩說을 믿었다. 그러나 후에 鄭樵의 영향을 받아 <詩序>說을 폐기하면서부터 ≪論語≫에서 孔子가 鄭聲은 淫蕩하다고 비판하였지만 刪詩를 하였다고는 말한 기록이 없는 사실에 의거하여 孔子가 ≪詩≫를 刪去하지 않고 刊定하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孔子가 ≪詩≫를 刪去하였다고 하는데 보기에 단지 많은 시를 채집하였을 뿐으로 孔子는 일찍이 刪去하지 않고 왕왕 단지 刊定하였을 따름이다.

刪詩에 대하여 물었다. 말하기를: "어디 聖人이 집필하여 저것을 刪去하고 이것을 보존하였다고 보이는가! 또한 단지 전해져 오는 것에 의거하여 해설하였을 뿐이다.

朱熹는 孔子가 刪詩를 하지는 않았지만 '放鄭聲'한 것은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는 孔子가 '그 소리가 들뜨고 음탕하여(其聲浮且淫)' 제사와 朝聘에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變<風>의 악장은 그 음악만을 제거하고 시는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變<風>中에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淫詩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몰아낸다는 것은 그 聲을 몰아내어 교묘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은 것일 따름으로 그 詩는 본래부터 존재하였다.

그래서 朱熹는 孔子가 ≪詩經≫ 三百篇을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는 司馬遷의 말은 잘못된 것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고 여겼다. 또 <大序>說을 신봉한 呂祖謙이 비록 '諷一勸百'의 혐의가 있지만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여긴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鄭·衛 變<風>詩는 사실상 풍자의 의도가 전혀 내포되지 않아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淫詩임에 분명하다고 여겼다.

3. 淫詩의 作者

朱熹는 淫詩가 民間閭巷 小人輩들의 作이라는 주장을 하여 淫詩論 근거의 하나로 삼았다. 變<風> 등과 같은 시에는 좋지 않은 것이 대단히 많다. 대체로 좋은 시들은 대부의 작이며 그 좋지 않은 시들은 단지 閭巷 소인의 작이다. 선배들은 대부분 (思無邪가) 시를 짓는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그 중에는 淫奔하는 좋지 않은 시가 많이 있어서 역시 사악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民間閭巷의 소인배들은 신분이 미천하고 도덕적 소양이 결여되어 시가로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노래함에 있어서 소양이 깊은 사대부들처럼 美刺를 염두에 두어 溫柔敦厚하고 완곡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 느낀 바를 아무 거리낌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變<風>中에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자신들의 애정 행각을 아무 부끄럼 없이 노래한 시 즉 淫詩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詩序>의 美刺說을 篤信한 呂祖謙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邪惡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孔子의 말을 시인이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짓고 독자 역시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읽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桑中>篇이나 <溱洧>篇처럼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鄭·衛의 시편들이 비록 음란한 일을 권면하는 혐의가 있지만, 사실은 음란한 일을 풍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桑中>·<溱洧> 諸篇은 (음란한 일을) 권면함에 가까운데 孔子가 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하기를: "≪詩≫의 體는 같지 않아 그 직설적으로 풍자하는 것이 있으니 <新臺>의 類가 그것이고, 완곡하게 풍자하는 것이 있으니 <君子偕老>의 類가 그것이며, 그 일을 펴 진술하여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이와 같은 類가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후세 狎妓의 樂府는 이 시의 <序>를 冒頭에 둔다면 어찌 불가하겠는가?" 말하기를: 孔子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시인이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짓고 배우는 자 또한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보면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은연중에 저절로 言外에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呂祖謙은 시인과 독자 모두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시를 짓고 읽는 것이라고 하여 <桑中>篇과 <溱洧>篇 등을 풍자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朱熹는 이러한 呂祖謙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思無邪'라는 한 마디 말은 좋은 것이지만 ≪詩經≫ 모두가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이 시편들은 음란한 자의 자작일 뿐이지 시인이 음란한 자를 풍자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풍자시의 體에는 원래 그 일을 펴 진술하여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저절로 言外에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類가 그것이다. 어찌 반드시 꾸짖고 책망을 한 다음에야 풍자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설은 그렇지 않다. 대저 ≪詩≫의 풍자에는 본래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淸人>·< 嗟>의 類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그것들을 玩味하여 보니 그것들을 읊은 사람은 여전히 읊은 바의 밖에 있고 말뜻의 사이에는 여전히 客과 主의 구분이 있다.

어찌 장차 남의 악한 것을 풍자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가 그 사람의 말을 하여 자신을 풍자하는 가운데에 빠뜨리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겠는가?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더군다나 이러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것에 편안해 하였으므로 그들이 이러한 시들에 대해서 그들의 평상시의 언행을 헤아리면 본래부터 이미 그 입으로부터 발설하면서도 부끄러워함이 없었을 것이니, 또 어찌 내가 펴 진술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한 바가 이와 같음을 알겠으며 또 어찌 내가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문뜩 징계하는 마음을 갖겠는가? 이것을 풍자라고 여긴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고무하여 오히려 그 악을 권면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시편의 文辭에 의거하여 보면 <鄭風·淸人>篇이나 <齊風· 嗟>篇같은 풍자시는 시의 작자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풍자하고 있어 그것이 다른 사람을 풍자한 것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淫詩는 시편 안에 작자가 직접 등장하고 있으므로 음란한 일을 다른 사람이 풍자한 것이 아니라, 예의도덕 의식이 결여된 작자가 자신의 음란한 애정 행각을 아무 부끄럼 없이 스스로 노래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시는 점잖은 사람들도 입에 담기 거북해 하는 바이다. 만약 呂祖謙의 주장대로 이 시편들이 음란한 일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작자가 음란한 자의 입장에 서서 그 음란한 행각을 대신 노래해 주는 것이 된다. 결국 음란한 자를 警戒하여 개과천선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邪淫한 일을 하도록 고무하고 권면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朱熹는 만약 鄕里에 시를 지어 오로지 남을 풍자하는 것만을 일삼는 자가 있다면 鄕里 사람들에게 분란을 조장하는 性情이 올바르지 못하고 경박한 악인으로 간주되어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情意가 溫柔寬和한(情意溫柔寬和)' 옛날의 賢人들이 음란을 풍자한 시를 지어 남에게 비난받을 행위를 결코 할 리가 없다고 하여 ≪詩經≫ 三百篇이 모두 賢人들의 작이라는 呂祖謙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呂祖謙은 ≪詩≫가 모두 賢人들이 지은 바라고 하였는데,……이는 매우 그렇지 않으니 예컨대 <國風>중에도 또한 邪淫한 것들이 많이 있다.……만약 모두 賢人들이 지은 바라고 한다면 賢人들은 결코 이렇게 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한 鄕里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 오로지 이러한 원망과 풍자를 일삼는다면 아마도 역시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朱熹는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내어 시로써 풍자하는 옳지 못한 행위는 옛날의 賢人들이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풍자설을 주장한 呂祖謙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呂祖謙의 풍자설을 반박함으로써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淫詩가 음란한 자의 자작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음을 강조하였다.

만약 시인이 지어서 淫奔을 꾸짖고 풍자한 것이라면,  州의 사람이 만약 淫奔한 일이 있다면 呂祖謙은 어째서 시를 하나 지어 풍자하지 않는가?……만약 다른 사람에게 은밀한 일이 있기만 하면 시를 지어 그 단점을 들추어내어 꾸짖고 풍자한다면 이것은 지금의 경박한 자가 戱謔하는 말을 지어서 鄕里에서 비웃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온 고을이 질시하는 바이다. 시인은 溫柔하고 醇厚하므로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呂祖謙과 이것에 대하여 논하여 <桑中> 따위의 시를 만약 풍자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내어 시에 나타내는 내는 것이니 賢人들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呂祖謙이 "단지 곧이곧대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기에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있음을 본다면 시를 지어 곧이곧대로 말하려 들겠습니까? 당신이 평소에 시를 짓는 것 또한 그렇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컨대 朱熹는 變<風>중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내용을 담은 시편들의 대부분이 篇中에 一人稱代詞 '我'字 또는 '予'字를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시편들이 예의도덕 의식이 결여되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음란한 民間閭巷의 소인배들이 자작한 음시이지 결코 양식이 있는 사대부·賢人들이 남의 淫亂을 풍자한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4. 詩敎로서의 '思無邪'論

<詩序>의 美刺說을 篤信한 呂祖謙 같은 학자는 孔子가 일찍이 鄭聲이 음탕하므로 鄭聲을 몰아내야 한다는 한 말에 의거하여 孔子가 "鄭聲을 몰아냈으니, 그 시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放鄭聲矣, 則其詩必不存)"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鄭·衛 및 기타 諸國의 음악과 시 가운데 邪淫한 것들이 모두 刪去되었으므로 ≪詩經≫ 305篇中에는 淫詩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淫詩를 모두 풍자시로 해설하였다. 朱熹는 '放鄭聲'을 글자의 액면적 의미 그대로 이해하여 呂祖謙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孔子가 變<風>中의 鄭·衛 등의 음탕한 聲을 ≪樂經≫으로부터 제거하여 교묘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되 그 음란한 시는 그대로 ≪詩經≫에 존속시켜 後世 사람들에게 警戒로 삼도록 하였으니, 이는 ≪春秋≫를 지으면서 상당히 많은 亂臣賊子의 일을 기록한 깊은 뜻과 상통한다고 주장하였다.

孔子가 鄭과 衛에 대해서 대체로 그 聲을 ≪樂≫으로부터 깊이 禁絶하여 법으로 삼고 그 말을 ≪詩≫에 엄정하게 세워 警戒로 삼았으니 聖人이 본래 亂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春秋≫에 기록된 것이 亂臣賊子의 일이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당시의 풍속과 사변의 실질을 보여 후세에 鑒戒를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존속시킨 것이니 이른바 도가 함께 행해지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는 鄭·衛 등의 음란한 시를 삭제하지 않고 ≪詩經≫에 그대로 존속시켜 당시 풍속의 美惡을 보여줌으로써 후세에 ≪詩經≫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警戒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이 많아야 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이 적어서도 안된다. 그래서 朱熹는 ≪詩經≫에 음란한 시가 적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聖人의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선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경계하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난다.……단지 聖人이 권면하고 경계함을 후세에 남겨 보여준 뜻을 玩味하여 얻는다면 ≪詩≫의 쓰임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鄭·衛의 시가 篇篇이 이와 같으니 그 풍속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한 두 篇만을 실었다면 사람들이 우연히 그러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만약 雅正한 시가 ≪詩經≫ 시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邪淫한 시가 한 두 편에 불과하다면 ≪詩經≫의 교화 효용에 있어서 선을 권면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으나 악을 경계하는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孔子가 鄭·衛의 음란한 시를 삭제하였을 리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朱熹는 "≪論語≫에서 顔子의 물음에 답한 것은 孔子의 天下를 다스리는 大綱으로 鄭聲에 대해서 시급히 몰아내고자 하였는데, 어찌 ≪詩≫를 刪定하여 萬代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鄭聲을 거두어서 六藝에 갖추었겠는가?"라는 呂祖謙의 힐문에 대하여 직접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것은 曾鞏이 ≪戰國策≫에서 劉安世가 <三不足之論>에서 일찍이 말하였으니, 또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다음에야 분명해지겠는가?"라는 말로써 반문하였다. 曾鞏은 <戰國策目錄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君子가 邪說을 금함에 있어 본래 그 설을 천하에 밝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설이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도록 한 다음에 금하면 가지런해지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설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도록 한 다음에 경계하면 분명해지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 典籍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가? 몰아내어 禁絶하는 것으로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曾鞏은 위의 글에서 모든 사람이 邪說의 옳지 못함을 절감하도록 하여 그것을 따르고 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 邪說의 유행을 禁絶하는 최선의 방법이므로 邪說이 들어 있는 典籍은 없앨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존시켜 경계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朱熹는 曾鞏이 말한 바가 바로 孔子가 ≪詩經≫에서 淫詩를 처리한 방식이라고 여겼는데, 이는 孔子가 鄭·衛 등의 음란한 시를 ≪詩經≫에서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킨 이유에 대하여 불후의 常道를 말한 '經'의 효용 측면보다는 역사사실을 아무런 여과나 취사선택없이 美惡을 아울러 기록한 '史'의 효용 측면으로부터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朱熹의 ≪詩經≫의 變<風> 淫詩 존재 주장은, 그가 孔子의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말을 ≪詩經≫ 교화론 즉 詩敎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朱熹는 <詩集傳序>에서 詩敎, 즉 ≪詩經≫의 교화적 효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말로써 표현된 나머지이다. 마음이 감응한 바에는 비뚤고 바름이 있으므로 말로써 표현된 것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된다. 오직 聖人만이 위에 있어서 그 느낀 바에 바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 말이 다 족히 가르침이 된다. (그렇지 못한 凡人은) 간혹 그 느낀 바가 잡되어서 發한 바에 가릴 만한 것이 없을 수 없으니 윗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돌이킬 바를 생각하여 이로써 권면하고 징계하면 이 또한 가르침이 되는 바이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朱熹는 ≪詩經≫의 교화적 효용을 권선징악을 통한 性情 도야의 기능으로 보았다. 朱熹는 오직 聖人만이 그 느낀 바에 바르지 않음이 없고 보통 사람들의 情은 그 자체로서 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여 일정한 도덕적 선택과 여과를 거쳐야 비로소 가르침의 재료가 된다고 보았다. 그는 善과 惡이 섞여 있는 ≪詩經≫이야말로 이러한 가르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교재가 된다고 생각하여 '興·觀·群·怨' 가운데에서 특히 興과 觀의 기능을 중시하였다. 이에 그는 興과 觀의 문자적 의미를 "志意를 感發한다(感發志意)"·"得失을 상고하여 본다(考見得失)"라고 풀이하고 그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른바 '≪詩≫는 興起시킬 수 있다'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興起하여 感發하는 바가 있고 징계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고, '볼 수 있다'라는 것은 한 때의 습속이 이와 같음을 보고 聖人이 그것들을 존속시켜 다 刪去하지 않은 까닭이 당시 풍속의 美惡을 다 보아 모두가 賢人이 지은 것은 아니라는 알게 한 것이다.

朱熹는 '思無邪'의 의미 역시 이상과 같은 ≪詩經≫의 교화론적 효능 즉 詩敎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즉 그는 "聖人이 ≪詩≫의 가르침을 말한 것은 단지 사람들이 思無邪하게 하려 한 것일 뿐으로" 사람들이 "≪詩≫를 읽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에 사악함이 없도록 하는 하는 것이니, 이는 ≪詩≫의 효용이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思無邪'가 바로 詩敎인 동시에 그 효용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朱熹는 詩敎인 '思無邪'의 궁극적인 경지는 人欲이 橫流하는 악을 없애고 天理가 流行하는 선을 길러 '性情의 바름'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무릇 ≪詩≫의 말은 선한 것은 사람의 선한 마음을 感發케 할 수 있으며 악한 것은 放逸한 뜻을 징계할 수 있으니, 그 효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情性의 바름을 얻도록 하는데 귀착할 따름이다."

孔子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말하였으니, 대체로 ≪詩≫의 말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같지 않아 혹은 권면하고 혹은 징계하여 다 사람들로 하여금 性情의 바름을 얻게 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고 간단 절실하여 上下에 통하는 것이 이 말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칭하여 三百篇의 뜻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 그 요지가 이것을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들이 진실로 능히 그 말을 깊이 玩味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살펴서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바름으로 나가지 아니함이 없게 하면 매일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天理가 流行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朱熹가 보기에 선과 악이 섞여 있는 ≪詩經≫을 도덕적 판단에 의거하여 수용함으로써 후천적 氣稟과 外物의 작용에 따라 악해질 수도 있는 情을 다스려 본원적 性의 純善함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誠意正心'하여 '存心養性'하고 '存天理, 滅人欲'함으로써 '性情의 바름'을 얻어 자아 인격의 完善함을 이루는 것이 詩敎인 '思無邪'의 결과론적 효능이요 궁극적인 경지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思無邪'는 ≪詩經≫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효용이고 또 性情論으로 보아 시인들이 모두 '思無邪'할 수가 없으므로 '思無邪'의 대상은 당연히 독자이지 결코 시인이 될 수는 없다.

시를 지은 사람이 '思無邪'하다는 말이 아니다.……그것을 읽는 자가 '思無邪'할 따름이다. 지은 자가 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思無邪'할 수 있겠는가? 단지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朱熹는 呂祖謙이 ≪詩經≫의 효용이 단지 '可以怨'일 뿐이고 모든 시인이 다 溫柔敦厚한 性情을 가졌다고 함으로써 '詩眼'을 멀게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고, '思無邪'를 시인과 독자 양자 모두 '思無邪'한 것이라고 한 呂祖謙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孔子가 '思無邪'라고 칭한 것은 ≪詩≫ 三百篇이 권선징악하여 비록 그 요지가 바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말처럼 간략하면서도 곡진한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지 시를 지은 사람들이 생각한 바가 모두 사악함이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지금 반드시 그가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 음란한 일을 펴 진술하여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저절로 言外에 나타난다고 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가 비록 사악함이 있는 생각으로 지었지만 내가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 읽는다면 그가 자신의 추악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내가 두려워하고 징계하는 자료가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물며 왜곡되게 해설하여 그 사악함이 없음을 그에게서 찾는 것은 돌이켜서 나에게서 얻는 것만큼 쉽지 않고 교묘하게 이것저것 변설하여 그 사악함이 없음을 그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돌이켜서 나에게서 추구하는 것만큼 절실하지 못함에 있어서랴.

여기서 朱熹는 우선 孔子가 말한 '思無邪'가 시를 읽는 사람의 '思無邪', 즉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시를 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시를 지은 사람들이 모두 순정무사한 생각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서 실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詩經≫의 교화적 효용은 그 획득의 가능성과 정도가 매우 많고 높음을 강조하여, 詩 특히 사악한 음시를 풍자설로써 왜곡 해설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朱熹는 이상과 같은 '思無邪'에 대한 해석에 입각하여 孔子가 '思無邪'라는 詩敎로써 후세의 독자들을 가르쳐 '性情의 바름'을 얻도록 하려는 깊은 뜻을 가지고 ≪詩經≫에 聖賢의 훌륭한 사적을 노래한 시를 존속시켰을 뿐 아니라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자신들의 음란한 일을 自述한 시까지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켰다고 여겼다. 따라서 現傳 ≪詩經≫에 淫詩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詩≫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어 종류가 가장 많지만 오로지 '思無邪' 한 마디가 족히 포괄할 수 있다. 위로는 聖人까지 아래로는 淫奔한 일까지 聖人이 존속시킨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권면하는 바를 알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思無邪'라고 말한 것은 사악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朱熹는 ≪詩經≫의 시편이 時君과 국정, 즉 현실 정치를 찬미하거나 풍자하는 효용을 갖는다는 전통 <詩序>說을 부정하는 대신 순수한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思無邪' 詩敎論을 전개하여 시를 性情을 도야하는 재료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종래에 풍자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던 상당수의 變<風>詩를 달리 이해하여 淫詩로 규정하였다.

5. 결 론

朱熹는 인간의 性은 善하나 情은 善할 수도 있고 惡할 수도 있다는 性情論과 孔子의 '鄭聲淫'이라는 말에 의거하여, 變<風> 시편중에 性情이 바르지 못한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지은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음탕한 '男女相悅之詞'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또 孔子의 '放鄭聲'이라는 말의 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인 說을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가하였다. 즉 孔子가 淫蕩한 聲을 ≪樂經≫으로부터 제거하여 郊廟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되 그 음란한 시는 그대로 ≪詩經≫에 존속시켜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도록 하였다고 하여 刪詩說을 부정하였다.

朱熹는 孔子의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말 역시 새로이 ≪詩經≫의 효용적 측면, 즉 詩敎의 측면에서 해석하였는데, 이는 그의 淫詩論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思無邪論은 '誠意正心'하여 '存心養性'하고 '存天理, 滅人欲'함으로써 '性情의 바름'을 얻어 자아 인격의 完善을 얻고자 하는 修養論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思無邪'란 시를 지은 자의 생각이 無邪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자가 선악이 섞여 있는 ≪詩經≫을 도덕적 판단에 의거하여 수용함으로써 후천적 기품과 외물의 작용에 따라 악해질 수도 있는 情을 다스려 思無邪한 본원적 性의 純善함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사실, ≪詩經≫은 古代 시가의 總集으로 전쟁, 노역, 남녀간의 애정, 통치계급에 대한 비판과 찬미 등 다양한 내용의 시편들이 실려있다. ≪詩經≫의 시편 중에는 그 내용이 孔子가 주장하고 추구하였던 정치적·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思無邪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思有邪것들도 있다. ≪詩經≫에 대한 이해가 남달리 깊었고 ≪詩經≫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던 孔子가 이 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思無邪는 朱熹의 해석을 따라 ≪詩經≫을 읽는 자의 思無邪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詩經≫中에 '男女相悅之詞'가 있다는 朱熹 주장은 '≪詩≫可以怨'을 중시하는 <詩序>의 美刺觀, 즉 정치·사회관의 굴레로부터 탈피한 것이다. 朱熹는 '≪詩≫可以興, 可以觀'을 중시하여 '詩人之意'를 찾을 것을 주장함으로써 ≪詩經≫을 經學의 영역으로부터 文學의 영역으로 회귀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道學者의 입장에서 '聖人之意'를 추구하여 순수한 남녀의 애정시를 자신의 도덕적 평가 기준에 의거하여 '淫(奔)'字로써 폄하함으로써 그 문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朱熹의 淫詩論은 三傳弟子 王柏에게 영향을 주어 이른바 淫詩 31篇을 ≪詩經≫으로부터 삭제할 것을 주장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후인으로부터 ≪詩經≫의 지위를 經에서 '誨淫之書'로 격하시킨 名敎의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요컨대 朱熹가 순수한 男女의 애정시를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의거하여 淫詩라고 칭한 것은 시대적 한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실이 있다고 하여 그가 ≪詩經≫을 다소나마 文學의 궤도로 다시 올려놓은 공을 부정할 수는 없다.

<參考 文獻>

朱熹, ≪詩集傳≫, 臺北: 學生書局, 1970.

____, ≪詩序辨說≫, 臺北: 藝文印書館, ≪學津討源≫本, 1965.

____, ≪楚辭集注≫, 臺北: 河洛圖書出版社, 1980.

____, ≪朱文公文集≫, 臺北: 商務印書館, 1980.

____, ≪論語集註≫, 서울: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經書≫本, 1965.

毛公 傳, 鄭玄 箋, 孔穎達 疏, ≪毛詩正義≫, 臺北: 藝文印書館, ≪十三經注疏≫本, 1972.

鄭玄 注, 孔穎達 疏, ≪禮記正義≫, 臺北: 藝文印書館, ≪十三經注疏≫本, 1972.

鄭玄 注, 賈公彦 疏, ≪儀禮注疏≫, 臺北: 藝文印書館, ≪十三經注疏≫本, 1972.

鄭玄 注, 賈公彦 疏, ≪周禮注疏≫, 臺北: 藝文印書館, ≪十三經注疏≫本, 1972.

何晏 注, 邢昺 疏, ≪論語注疏≫, 臺北: 藝文印書館, ≪十三經注疏≫本, 1972.

鄭樵, ≪六經奧論≫, 臺北: 漢京文化事業公司, ≪通志堂經解≫本, 1979.

鄭樵 著, 顧 剛 輯, ≪詩辨妄≫, 北京: 景山社, 1930.

周孚, ≪非詩辨妄≫, 臺北: 藝文印書館, ≪涉聞梓舊叢書≫本, 1968

呂祖謙, ≪呂氏家塾讀詩記≫, 臺北: 商務印書館, 1981.

朱鑑, ≪詩傳遺說≫, 臺北: 漢京文化事業公司, 1979.

王柏, ≪詩疑≫, 臺北: 漢京文化事業公司, ≪通志堂經解≫本, 1979.

劉瑾, ≪詩傳通釋≫, 臺北: 商務印書館,≪四庫全書珍本≫ 3集本, 1971.

胡廣, ≪詩傳大全≫, 서울: 二以會, 1982.

程川 編, ≪朱子五經語類≫, 臺灣: 商務印書館, ≪四庫全書珍本≫ 3集本, 1971

馬瑞辰, ≪毛詩傳箋通釋≫, 臺北: 復興書局, ≪皇淸經解續編≫本, 1972

陳啓源, ≪毛詩稽古編≫, 臺北: 復興書局, ≪皇淸經解≫本, 1972.

姚際恒, ≪詩經通論≫, 北投: 育民出版社, 1979.

王鴻緖, ≪欽定詩經傳說彙纂≫, 臺北: 維新書局, 1978

司馬遷, ≪史記≫, 臺北: 鼎文書局, 1978.

荀卿 著, 王先謙 集解, ≪荀子集解≫, 臺北: 世界書局, 1978.

王充 著, ≪論衡≫, 臺北: 世界書局, 1978.

曾鞏, ≪曾南 文集≫, 臺北: 河洛圖書出版社, ≪曾鞏全集≫本, 1978.

劉安世, ≪元城語錄≫, 臺北: 藝文印書館, ≪惜陰軒叢書≫本, 1965

黎靖德 類編, ≪朱子語類≫, 臺北: 正中書局, 1962.

王懋 , ≪朱子年譜≫, 臺北: 世界書局, 1973.

大濱浩, ≪朱子の哲學≫,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83

李家樹, ≪詩經的歷史公案≫, 臺北: 大安出版社, 1990

林耀潾, ≪先秦儒家詩敎硏究≫, 板橋: 天工書局, 1990

汪惠敏, ≪宋代經學之硏究≫, 臺北: 師大書苑有限公司, 1989

錢穆, ≪中國學術思想史論叢(四)≫, 臺北: 東大圖書公司, 1978

____, ≪朱子新學案≫, 臺北: 著者出版, 1980

程元敏, ≪王柏之詩經學≫, 臺北: 嘉新水泥公司文化基金會, 1968.

朱子赤, ≪詩經關鍵問題異議的求徵≫, 臺北: 文史哲出版社, 1984

夏傳才, ≪詩經硏究史槪要≫, 中州書畵社, 1982.

黃忠愼, ≪南宋三家詩經學≫, 臺北: 商務印書館, 1988

屈萬里, <先秦說詩的風尙和漢儒以詩敎說詩的迂曲>, ≪中國文學史論文選集≫, 臺北: 學生書局, 1978

賴炎元, <朱熹的詩經學>, ≪中國學術年刊≫ 2期, 1978. 6

______, <呂祖謙的詩經學>, ≪中國學術年刊≫, 6期, 1984. 6

李勤印, <古代情詩的詩敎,理學的反叛>,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8年 12期

毛毓松, <關於孔子詩學觀的評價>,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2年 4期

方延明, <"鄭聲"非詩經鄭風辨>, ≪文獻≫, 1985年 5期

謝謙, <論朱熹詩說與毛鄭之學的異同及歷史意義>, ≪四川師院學報≫, 1985年 3期

____, <關於朱熹詩說的兩條考辨>, ≪四川師大學報≫, 1986年 5期

____, <朱熹"淫詩"之說平議>,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7年 6期

____, <試論朱熹的"美刺"之辨>, ≪西南師範大學學報≫, 1987年 第1期

____, <論朱熹的"思無邪"說 - 朱熹美學思想批判之一>, ≪四川師範大學學報≫, 1988年 1期

石文英, <論漢儒美刺言詩>,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5年 15期

______, <宋代學風變古中的詩經硏究>,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6年 1期

申美子, <詩經의 淫詩에 對하여>, ≪閒堂車柱環博士頌壽論文集≫, 1981. 8

辛筠, <"鄭聲淫"辨>, ≪中州學刊≫, 1984. 5

梁宗華, <朱熹詩集傳對詩經硏究的貢獻>,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90年 12期

楊凌羽, <簡論鄭風>,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2年 13期

王春謀, <朱熹詩集傳淫詩說之硏究>, 臺北: 國立政治大學 中文硏究所 碩士學位論文, 1979

于承武, <釋"思無邪">, ≪信陽師範學院學報≫(哲社), 1986年 4期

陸永品, <略談對詩經中愛情 婚姻詩評價的演變>,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1年 13期

李家樹, <宋朱熹,呂祖謙的論爭 --- 孔子"思無邪"一語在詩學上的 響>, ≪東方文化≫ 24卷 2期, 1986

李再薰, <朱子詩經學要義通證>, 臺北: 國立臺灣大學 中文硏究所 碩士學位論文, 1982. 6

______, <鄭樵의 詩經學>, ≪中國學論叢≫ 第2輯, 서울: 高麗大學校 中國學硏究會, 1985

______, <朱子詩經學硏究>, 서울: 서울대학교 博士學位論文, 1994. 2

林葉連, <中國歷代詩經學>, 臺北: 中國文化大學 中國文學硏究所 博士學位論文, 1990. 6

林惠勝, <朱呂詩說比較硏究>, 臺北: 臺灣大學 中文硏究所 碩士論文, 1983

張啓成, <試論鄭風的情歌>, ≪文學評論≫ 1982年 6期,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82. 12

張宏生, <朱熹詩集傳的特色及貢獻>, ≪連城師專學報≫, 1987年 2期

蔣勵材, <國風淫詩公案述評>, ≪東方雜誌復刊≫ 10卷 11 12期, 1977. 5 6

錢鍾書, <詩可以怨>, ≪文學評論≫ 1981年 1期,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81. 2

程繼紅, <苦悶的象徵 --- 朱熹詩集傳硏究>, ≪上饒師專學報≫, 1986年 3期 增刊

程元敏, <朱子所定國風中言情詩硏述>, ≪孔孟學報≫ 第26期, 1973. 9

______, <國風私情詩宋人說探源>, ≪中國古典文學論叢 冊一: 詩歌之部≫, 臺北: 中外文學月刊社, 1976

鄭澤黎, <"鄭衛淫聲"與"南朝艶曲">,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9年 4期

趙敏利, <論詩經 鄭風的産生及其評價問題>,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7年 8期

趙沛霖, <建國以來詩經情詩硏究槪說>,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7年 3期

______, <關於"鄭聲淫"古今各家之說辨正>,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社, 1989年 9期

左松超, <朱熹論詩主張及所著詩集傳>, ≪孔孟學報≫ 55期, 1988. 4

曾伯藩, <論朱熹對詩經硏究的功過>, ≪江西師範學院南昌分院學報≫ 1983年 2期

陳紹棠, <詩序和淫詩>, ≪中國學人≫ 1期, 1970. 3

蔡根祥, <朱熹詩集傳淫詩說平議>, ≪孔孟月刊≫ 25卷 1期, 1986. 9

馮寶志, <宋代詩經學槪論>, ≪古籍整理與硏究≫ 1號,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6. 10

許英龍, <朱子詩集傳硏究>, 臺中: 東海大學 中文硏究所 碩士學位論文, 1985

黃忠愼, <宋代之詩經學>, 臺北: 國立政治大學 中文硏究所 博士學位論文, 1984

 

 

[참고]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작품부터 읽어 봅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5489

 

001 관저 /주남

은자주]시경 주자주 원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숙님의 아래 주소창에서 이전해 덧붙인다. http://www.tae11.org/>고전강의>시경 원문 http://blog.naver.com/bhjang3/140035480672 001 國風(국풍)周南(주..

kydong77.tistory.com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sy1851&logNo=221691011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 <관저(관저)>장(장)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시...

blog.naver.com

 

[췌언] 문장의 호흡이 길어 읽기 편하게 운영자가 행 바꾸기를 한 점 양해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bhjang3/140034950338

다산정약용의 시경(詩經)론 및 詩意識

- <관저(關雎)>장(章)을 중심으로 -

ㅡ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 茶山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의 詩觀 또한 연구의 대상이 되는데는 이상할 것도 없다.

전경원의 "茶山의 詩"의 학술연구의 한 논문을 발췌하여 옮겨본다

시(詩)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과거 선인들에게 시(詩)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런 이유로 과거 많은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철저한 자세로 고증(考證)하고 훈고(訓)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산은 우리에게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기에 문학 분야에서의 조명은

여타의 분야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한산한 편이다.

특히 다산은 정조 임금 당시에 행해졌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그의 시론(詩論)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경론(詩經論)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가 남긴 2,487수의 시작품만을 중심으로 연구성과가 일정 정도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시경론(詩經論)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흥규와 심경호, 이병찬 등의 연구성과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흥규의 논의는 최초이자 본격적으로 다산의『시경강의(詩經講義)』와 일련의 저서에 주목하면서,

시론과 시세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다산 시경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연구방향이 통시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경론의 사적 고찰은 가능했지만

다산만의 시경론과 시작품 사이의 관련성을 심도있게 서술하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심경호의 논의는 다산의 "시경강의"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청나라의 "모기령"의 학설과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여 그 영향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산의 시경론과 그의 시세계의 상관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병찬의 연구는 최근까지 진행된 우리나라 시경론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국 시경론의 사적 개관을 통해서 시경론의 쟁점이 되어 온

"시서설(詩序說)"과 "음시설(淫詩說)"의 문제,

국풍(國風)의 체재(體裁)와 차서론(次序論)

그리고 국풍의 해석과 부비흥(賦比興)의 문제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도 역시 다산의 시경론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집중적인 논의는 이루어지 못했고, 아울러 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다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다산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한 연구성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선행연구를 통해 마련된 한국 시경론의 사적 전개 과정을 토대로 하되,

그 가운데에서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만이 갖고 있는 시사적 위치와 의의를 고찰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와 시경론(詩經論)과의 관련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다산(茶山)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

다산 시경론(詩經論)의 핵심은 <관저(關雎)>편의 해설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관저>를 "후비(后妃)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반면에

다산은 <관저(關雎)>를 풍자시로 파악한다.

다산의 견해가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지점이다.

이는 시경 전체의 해석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미자설(美刺說)"이 제기된 지점이다.

과연 <관저>편을 찬미시(讚美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풍자시(諷刺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째서 당대의 보편적이자 타당하다는 견해였던 "미시설(美詩說)"을 인정하지 않고,

"풍자설(諷刺說)"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이는 『시경(詩經)』을 포함하여 경학을 인식하는 다산의 관점과

시경 관련 기사의 수용 및 인식 과정을 통해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시경(詩經)을 포함한 경학(經學) 연구에서 일정한 태도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십삼경(十三經)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있는 풀무요, 문예(文藝)가 실려 있는 깊은 못이요, 큰 바다이다.

그 전수(傳受)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십삼경(十三經)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자 다음과 같이 답을 개진해 올린다.

다신은 대답합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천백년 이상의 것을 초월하여 능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中略...

무릇 한(漢)나라 때의 선비들이 위(魏)·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隨)·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 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원근(遠近)과 사승(師承)의 친소(親疎)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시경』,『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로 자신의 의사로써 초월하여 입증하고 주소(注疏)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싸워 이겨서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주자의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으니,

이는 참으로 유학(儒學)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상의 교화에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하생략)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기본 자세는 경전의 근본에 충실함으로써

경전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위(魏)·진(晉)시대보다는

한(漢)나라 때의 논의가 실상과 부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의 관점을 통해,

이른 시기에 전해진 기록들이 더욱 신빙성 있음을 제시하면서,

주자가 정리한 "칠서(七書)"에만 집착하는 경학 연구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설득력 있는 견해로서 다산의 경학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인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산의 경학 연구자세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하되,

주자의 논리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논리 가운데도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다양한 문헌을 널리 참고해서 철저하게 고증하는 과정을 통해 주자가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대의 주자 존숭의 맹목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점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을 토대로 분석하되,

많은 부분에서 한(漢)대 삼가시(魯詩, 齊詩, 韓詩) 계열의 논의와

십삼경(十三經) 가운데 시경과 관련된 언급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다산이 반주자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도식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학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대의 시경론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산은 맹자의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라는 언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 언급은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기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시경(詩經)』을 대신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인식이다.

이같은 언급은 다산의 시경론 형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춘추(春秋)』는 "포폄( 貶)"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시경 역시 "포폄( 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칭송하고 높일만한 것은 높이는 것이 "포( )"이고, 떨어뜨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폄(貶)"이다.

『시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대에는 "포폄( 貶)"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공자가『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이는 당대의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의 개념과는

그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질적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1809년에 작성한 글에서

"건륭 신해년(1791년) 가을 구월에 내원(內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했는데,

내가 명중하지 못하여 벌로 북영(北營)에서 숙직하였다.

얼마 후에 정조께서 시경조문 800여장을 내려주시며

나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되, 40일 이내에 올리도록 하였다.

나는 기한을 20일 더 늘려달라고 빌어서 임금님께 윤허를 받았다.

조문을 완성하여 개진해 올렸더니 임금님의 평이 찬란하게 빛났다.

임금님의 격려가 융성하고 무거웠으며 조문마다 품평해 주심이 모두 나의 분수를 지나쳤다."

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소개했다.

1809년 기사년에 작성된『시경강의(詩經講義)』원고는

처음 작성한 1791년의 원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문의 수가 800여장이라 했으나 500장을 조금 넘는 수의 조문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정조가 내린 시경조문은 800여장이었는데,

이를 다산이 다시 첨삭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신해년 겨울에 작성한 『시경강의(詩經講義)』서문(序文)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詁)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 )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의 서문(序文)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다산은 한 글자 한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훈고(訓考)해 내는 것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서(小序)를 불신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그 말은 기세가 꺽이는 법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은 사리가 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돕는 이가 적은 말"이란 "소서(小序)"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이란『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자의 설명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경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일관된 경서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개진하여 올릴 적에는

이같은 방법으로 13경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여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시경 관련 언급들을

모조리 고증하여 기록하였고,

이를 토대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일단 훈고(訓考)를 통해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지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다산이 경학을 연구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다산의 경학 연구 방식이 <관저(關雎)>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

<관저(關雎)>편은 『시경(詩經)』「국풍(國風)」《주남(周南)》의 첫머리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關關雎鳩 관관(關關)하고 우는 저구(雎鳩)새

在河之洲 하수(河水)의 모래섬에 있도다

窈窕淑女 요조(窈窕)한 숙녀(淑女)

君子好逑 군자(君子)의 좋은 짝이로다.

 

<2>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流之 좌우로 물길따라 취하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寤寐求之 자나깨나 구하도다

求之不得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지라

寤寐思服 자나깨나 생각하고 그리워하니

悠哉悠哉 아득하고 아득해라

輾轉反側 전전하며 반측하노라.

 

<3>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采之 좌우로 취하여 가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琴瑟友之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芼之 좌우로 삶아올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鍾鼓樂之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

다산이 인식했던 <관저(關雎)>편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저>가 실려있는 "국풍(國風)"의 "풍(風)"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 정조의 물음에 조문별로 대답을 하였는데,

훗날 다시 시경을 정리할 기회가 생기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나의 「시경강의(詩經講義)」12권이 이미 차례가 정해지고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의의 체제는 오직 물음에 대답할 뿐이어서

물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감히 서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논한 것은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해 조금 알고 있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경오년(1810년) 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에 학유(學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청이 곁에 있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때때로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못다 한 내용을 이청에게 받아쓰게 하였다.

내가 중풍이 들고 몸이 피곤하여 정신이 맑지 않았는데도 이 일을 그치지 않은 것은

선성(先聖)·선왕(先王)의 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되고 망령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조의 조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미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방식은 임금의 물음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야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은 감히 답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산은 그 정도를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통해

『시경(詩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의 "국풍(國風)" 조(條) 부분을 보면 "풍(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風)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 음이 있으니

의미하는 바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풍으로써 교화하는 것은 풍교(風敎)·풍화(風化)·풍속(風俗)이니 그 음은 평성(平聲)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은 풍간(風諫)·풍자(風刺)·풍유(風喩)이니 그 음이 거성(去聲)이다.

어떻게 하나의 "풍(風)" 자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음을 지녔는가?

「주역(周易)」에 "풍행지상(風行之上)이 관(觀)이니

선왕이 이 관괘(觀卦)로서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관찰한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들이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교(風敎)의 퍼져나감으로 국풍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충신에게는 다섯 가지의 간(諫)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 풍간을 따르리라"고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 "그 일을 보고 드러나기 전에 풍(風)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자에 인한 감동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다.

「시서(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서는 풍자를 제거하고 풍화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풍자의 뜻을 여기에서 강론할 수가 있다. ...

 

다산은 훈고(訓 )와 고증(考證)을 통해 "풍(風)"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같은 "풍(風)"자 안에도 평성일 경우와 거성일 경우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풍교(風敎)", "풍화(風化)", "풍속(風俗)"을 말할 때는 평성(平聲)으로 읽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간(風諫)", "풍자(風刺)", "풍유(風諭)"할 때는 거성(去聲)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용례를 『주역(周易)』과 『맹자(孟子)』, 『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는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했었으나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이르러 "풍자"의 의미를 제거하고, "풍화"로 남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이 외에도 다산은 시경에서 중요한 개념인 "육의(六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시경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공영달의 소(疏)에 이르기를,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기능이요,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형식이다."라고 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아·송을 일컬어 세 가지 날줄(三經)이라하고 부·비·흥을 세 가지 씨줄(三緯)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주례(周禮)」춘관(春官) <태사(太師)> 본문에

부(賦)·비(比)·흥(興)이 아(雅)·송(頌)보다 앞서 있음은 대개 풍시(風詩)에만 부·비·흥이 있고,

아·송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雅)는 모두 바르게 하는 말이고, 송(頌)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글이 은미(隱微)한 뜻에 힘쓰지 않는데, 어떻게 부·비·흥의 구별이 있겠는가?

풍(風)은 풍간(諷)으로, 더러는 의미를 펴고 베풀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賦),

더러는 물건의 비슷한 것에 견주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比),

더러는 깊고 먼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알게 하니(興),

이것은 모두 풍시(風詩)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풍(風)·부(賦)·비(比)·흥(興)은 본래 육의(六義)의 네 부분이나

-「주례」에 이르기를, "태사가 여섯 시를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합쳐져서 풍(風)이 된 것이다.

소아(小雅)에는 비록 비(比)·흥(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는 같지 않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풍아송(風雅頌)은 삼경(三經)으로 시의 형식이 되고,

부비흥(賦比興)은 삼위(三緯)로서 시의 표현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의 차례가

풍(風)·부(賦)·비(比)·흥(興) 그리고 아(雅)·송(頌)의 차례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본래는 오직 "풍(風)"에 부(賦)·비(比)·흥(興)이 속해 있는 것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부(賦)·비(比)·흥(興)이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아(雅)"는 모두가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송(頌)"은 오직 "찬미(贊美)"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문장은 "국풍(國風)"의 부비흥(賦比興)과 같이 "은미함(隱微)"에 힘쓰는 글이 아닌데,

어째서 부비흥(賦比興)의 구별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반면에 "풍(風)"은 "풍자(諷刺)"를 의미하므로

문장의 성격 자체가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은미함"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논리대로라면 "부비흥(賦比興)"을 통해 "풍시(風詩)"를 구현하게 되는 셈이다.

 

논의의 초점을 다시 <관저(關雎)> 편에 맞춰보면,

당대에 <관저(關雎)>를 해석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던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관저>에 대한 평이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던 사실에 주목해서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관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산은 철저한 고증(考證)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낸다.

 

...보충해서 말한다. 서(序)에 쓰인 "애상(哀傷)" 두 자(字)는 "슬픔에 응하되 상심하지 않는다" 하니 한마디로 비루하고 졸렬함의 극치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은 <권이(卷耳)>를 이름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목숙(穆叔)이 진나라에 가니, 진나라 제후가 그를 대접했는데(양공4년), 악공이 <문왕(文王)>의 삼장(三章)을 노래하고, 또 <녹명(鹿鳴)>의 삼장(三章)을 노래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 편의 시는 첫 편의 제목을 나란히 덮어쓰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시(詩)를 칭하던 법례(法例)였다....

 

<관저(關雎)>라고 이르는 것은 <관저(關雎)>가 머리편이 되고

<갈담(葛覃)>, <권이(卷耳)>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관저(關雎)>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갈담(葛覃)>은 "부지런하되 원망하지 않고(勤而不怨)",

<권이(卷耳)>는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라고 하였으니,

계자(季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합쳐서 살펴보면 곧 그 뜻이 명료해진다.

<권이(卷耳)>의 시에 이르기를,

"오래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오래 상심하지 않으리라(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라고 했으니

이른바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시악(詩樂)은 반드시 세 편을 취했기 때문에

향음(鄕飮)이나 연례(燕禮) 등에서 주남(周南)이라면

<관저(關雎)>, <갈담(葛覃)>, <권이(卷耳)>를 취했고,

소남(召南)이라면 <작소(鵲巢)>, <채번(采 )>, <채빈(采 )>을 취했음은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는 본디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공의 학설이니, 나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저(關雎)>장에 대한 논의는

다산의 저서인『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관저(關雎)>라고 할 때는 <관저(關雎)>를 포함해서 <갈담(葛覃)>, <권이(卷耳)>까지를 포함한 3장을 말한다.

<관저>는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로 하되 그 공경함을 잊지 않으니 즐겁되 음란하지 않은 것이고,

"척고(陟高)"하고 "승리(乘羸)"하되 오래 상심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哀而不傷)"이다.

정리해보면, 공자가『논어(論語)』에서 언급한 <관저(關雎)>편에 대한 언급은

<관저>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갈담(葛覃)>과 <권이(卷耳)>를 포함하여

세 작품의 총칭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으로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작품 해석과 관련하여 정조가 내린 조문과 이에 다산이 답해 올린 답안을 통해

당대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관저>편과 관련된 정조 임금의 물음과 다산의 답안을 살펴보겠다.

 

군자(君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군자라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니,

<은기뢰(殷其雷)>편(篇)의 "진진군자(振振君子)"와

<여분(汝墳)>편(篇)의 "기견군자(旣見君子)"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태사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문왕(文王)을 군자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록(旱麓)>편(篇)의 개제군자(豈弟君子)를 인용하면서

이것은 인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문왕이 태사와 결혼한 것은 그가 세자(世子)였을 때였다.

그러니 어떻게 대번에 인군에 대한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기(戴記)』를 보면 "문왕은 97세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서는 "문왕은 50년 간 왕위에 있었다."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왕은 48세에야 즉위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문왕이 13세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낳았으니,

태사와 결혼한 것은 10여 세 때에 해당된다.

옛날에 과연 세자를 군자라고 일컬은 글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만약 문왕이 즉위한 뒤에 전에 혼인하던 때를 돌이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대지(大旨)에서 말한 "궁중(宮中)에 있는 사람이 그가 처음 이르렀을 때

유한정정(幽閑貞靜)한 덕이 있음을 보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고 한 것은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문왕(文王)이 세자인데도 군자(君子)라고 이름은

"덕(德)"으로 말한다면 세자도 역시 (德이 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만일 반드시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뜻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실로 그와 같다면) 문왕은 왕계를 아버지로 모시고,

나이 10여세에 갑자기 스스로 배필을 구하여 자나깨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자가 비록 어진 배우자를 얻었다고 할 지라도

"금슬종고(琴瑟鐘鼓)"로 "이우이락(以友以樂)"함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제시(齊詩)와 노시(魯詩) 두 계열(二家)의 풍자(諷刺)설은

비록 요점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예(禮)와 의(義)의 시를 베풀어 설명했습니다.

제1장은 오직 숙녀인 뒤에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제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취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고,

제3장은 이미 얻었기에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태사가 처음 이르렀던 초기에 궁인이 지은 것이라면 곧 의미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임금님께서 하문(下問)하심과 같습니다."...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행해진 정조와 다산의 문답이다.

정조는 "군자(君子)"라는 시어(詩語)에 주목하여 예리한 시각을 보인다.

곧 <관저(關雎)>에 등장하는 "군자(君子)"가 문왕(文王)을 지칭하는 것인데

문왕이 배필을 구한 시점은 세자 때일 것이고,

"군자"라는 말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경우에 쓰이거나

<한록(旱麓)>편에 사용된 용례에서처럼 인군(人君)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문왕이 세자 신분이었는데, 어찌 시인이 문왕에게 "군자(君子)"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문왕이 결혼할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해석 상의 무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군자(君子)"란 말은 "덕을 이룬 사람의 명칭(德者, 成德之名)"이니,

세자 신분이라도 덕(德)을 갖추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다고 답함으로써

"군자(君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낸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태사"나 "궁인"의 작품일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정조의 의문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이 작품을 문왕의 비인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지적한다.

인용문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문왕이 지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다산이 인식한 <관저>편은

제1장에서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했고,

제2장에서는 정숙한 숙녀를 얻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함부로 아무나 취할 수 없음을 언급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배우자를 이미 얻은 상황이므로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저(關雎) 새는 다른 강의 물가에 있지 않고, 황하(黃河)의 물가에 있으니

<관저(關雎)>는 황하(黃河) 주변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지,

빈( )이나 기(岐)의 풍(豊), 호(鎬) 지역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데,

문왕의 궁인이 어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소(周召) 영락(營洛)의 후에 이락(伊洛) 삼하(三河)의 땅이 마침내 경연(京輦)이 되고서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서로 왕래교유 했는데,

<관저(關雎)>의 시는 그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 제시(齊詩)와 노시(魯詩)의 설명을 모조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양웅(揚雄)은 이르기를,

"주나라 강왕(康王) 때에 <관저(關雎)>가 비로소 지어졌다."고 하였고,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이지러짐에 잠자리( 席)를 근본으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2제후년표)"고 하였고,

두흠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이 아침 늦게 울림에 <관저(關雎)>로 탄식하였다(전한서)"고 하였으며,

명제(明帝)의 조칙에 "응문(應門)이 파수를 잘못하여 <관저(關雎)>로 풍자하였다"고 하였고,

범엽의 사론(史論)에 "강왕(康王)이 조회에 늦게 나오자 <관저>를 지어 풍자하였다.(皇后記)"고 하였습니다.

 

주자는「소서변설(小序辨說)」에서 이 설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법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주자의 말인데 하필이면「변설(辨說)」의 견해를 버리고「집전(集傳)」의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관저>를 성대하게 칭송하였는데 이제 자시(刺詩)라고 이름하면 혹 사체(事體)에 미안한 것 같지만, 이것이 성현을 높이는 인사들이 문왕의 설을 고수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관저>는 성인의 시입니다. 강후(康后)가 실덕(失德)한 것이 어찌 <관저(關雎)>에 오점이겠습니까?

 

시인의 뜻은 대개 배필은 가려뽑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두흠이 이르기를, "숙녀가 배필을 갈구하되 위로는 충효가 돈독하고 인후(仁厚)함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공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슬종고(琴瑟鐘鼓)"는 즐기면 즐거운 것입니다만 음란함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물(事物)에 의탁하여 흥(興)을 일으킴이니 먼저 "저구(雎鳩)"를 사용한 것입니다.

 

"저구(雎鳩)"는 사나운 새입니다. "관관(關關)"은 화합하는 울음입니다. 화합하면서도 사나울 수 있고, 즐거우면서도 분별이 있으니, 제비나 참새, 원왕새의 등속과는 같지 않습니다. "닐닐설설(    )"은 음탕하고 무람한 뜻이 있습니다. "하주(河洲)"는 깊고 빽빽한 땅으로 대하(大河)의 가운데에 이 작은 섬이 있는데,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오호라! 화(和)·낙(樂)·귀(貴)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한 것입니다. "요조(窈窕)"는 깊고도 깊음(深邃)이니 부인의 뜻입니다. "규방의 문(규달閨 )"은 깊게 하고자 함이고, "문지방(곤역  )"은 엄히 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박(薄)"은 엄밀하고자 함이니, 말하자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요조(窈窕)"가 "숙녀" 되는 조건입니다.

 

뜻은 강왕(康王)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드러난 곳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풍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지취(志趣)는 신하와 자식이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 의미는 세상에서 배필(配匹)과 합함이요, 그 덕은 온화함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그 소리는 우렁차서 귀에 가득함이니, 그 어떻습니까? 「시경(詩經)」삼백 편의 으뜸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궁인(宮人)은 여어(女御)입니다. 저 궁녀의 충성(忠誠)스런 마음으로 신부를 아름답다고 일컬으며, 아첨하고 아부하여 신부가 된 초기에 그녀를 높이고서야 성경(聖經)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주자가 노시(魯詩) 학설(學說)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

 

다산은 인용문에서처럼 "관저(關雎)"가 황하(黃河) 물가에 있는 것임을 통해, 문왕(文王) 시대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양웅, 사마천, 두흠, 범엽, 명제(明帝)의 조칙 심지어 주자의 『소서변설(小序辨說)』등 여러 문헌에서의 고증(考證)을 통해 <관저(關雎)>의 작자가 문왕(文王) 당시의 궁인(宮人)이 아니며, <관저(關雎)> 시는 풍자시(諷刺詩)임을 논증하고 있다. <관저(關雎)>의 작자 문제에 대해서는 주자 자신도 분명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자는『소설변설(小序辨說)』에서 <관저>를 풍자시로 본 견해에 이치가 있다며 수긍했는데,『시집전(詩集傳)』에서는 "궁인(宮人)"의 작품이라고 상호 모순되는 시각을 드러내놓았다. 다산은 이렇게 주자가 <관저>를 풍자시로 본 노시(魯詩)의 설명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다산의 지적과 같이 <관저>의 작자라고 생각하는 궁인(宮人)들이 태사가 처음에 문왕의 신부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가리켜 칭송하며 아름답다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이라면, 그같은 내용으로 어떻게 "경전(經典)"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결국, 다산은 다양한 문헌을 두루 고증하여 <관저>가 시기적으로는 강왕 때의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고, 풍자의 대상은 밑줄 친 바와 같이 강왕 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공개된 곳에서도 절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저>를 통하여 은근하게 풍자(諷刺)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조선조의 유학자들의 <관저>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자료를 검색했는데 서하(西河) 김인후의 문집에 <관저(關雎)편을 읽고서-原題는 讀關雎>라는 작품이 있어 잠깐 소개해 본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경의 주석만도 수 천번을 읽었다고 할만큼 시경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대부였다.

 

綿綿王業起岐山 면면한 왕업이 기산(岐山)에서 일어나

至于文王德如天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덕(德)이 하늘과도 같구나

天生聖女洽之陽 하늘이 낳으신 성녀(聖女)는 임금의 짝으로 적합하니

窈窕婦德曾無前 요조한 후비의 덕은 일찍이 전에 없었다네

造舟爲梁嬪于周 배를 만들고 들보를 지어 주나라로 향하니

國人爭詠關雎篇 백성들은 다투어 <관저편(關雎篇)>을 읊조리네

由來夫婦居人倫 예부터 부부가 인륜에 거처함은

陰比乎坤陽比乾 음은 땅에 비유되고, 양은 하늘에 비유되었네

文王旣聖 又聖 문왕은 이미 성인이시고 태사 또한 성인이시니

同明 德家道全 함께 밝고 나란한 덕이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네

赫赫盛化流乾坤 혁혁하고 성대한 문화가 천지에 넘쳐 흐르고

汝漢陋俗皆相悛 여(汝)수와 한(漢)수 지역 비루한 풍속을 서로 고쳐서

天下歸心大命集 천하에 귀일하는 마음이 천명으로 운집되어서는

子孫相傳八百年 자손에게 서로 전하여 8백년을 이어왔도다

吾觀興廢由婦人 내 보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부인(婦人)으로 말미암으니

喜己入宮邦國顚 "하나라 말희와 은나라 달기"가 입궁했기에 나라가 엎어졌네

不有懿德徒淫荒 아름다운 덕은 있지 않고 다만 음란하고 황폐해졌으니

明眸皓齒空嬋姸 아름다운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는 부질없이 고왔구나

如何後王不能承祖武 어찌하여 후대의 왕은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

僞烽一擧兵戎連 거짓 봉화가 한 번 오름에 난리만 계속되었는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관저편(關雎篇)>을 읽은 서하 김인후 역시 문왕(文王)과 후비 태사의 덕(德)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는 "말달(  )의 고사를 빌어 후비를 함부로 뽑을 수 없음을 경계하기도 하면서 약간의 자시적(刺詩的) 측면으로 읽히는 면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산이 <관저>편 3장을 해석한 내용과 그 맥락이 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다산은 <관저>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1장은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함부로 취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시의 후반부 역시 이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산의 시경론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산은 시경의 "풍(風)"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밝혀내면서,

주자 이후로 "풍자(風刺)"의 의미가 사라지고, "풍교(風敎)"의 의미만 남게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육의(六義)"의 문제에서는 풍(風)·부(賦)·비(比)·흥(興)·아(雅)·송(頌) 의 순서와 갈래의 특징에 주목한 결과, 풍아송(風雅頌)은 시의 형식이고, 부비흥(賦比興)은 "풍(風)"에만 해당되는 개념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해당되지 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아(雅)"와 "송(頌)"의 경우는 그 갈래가 요구하는 갈래의 속성 자체가 부(賦)·비(比)·흥(興)과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기에 "아(雅)"와 "송(頌)"에서는 변별되어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주자(朱子)는 다산과 달리 그것을 구별하여 구분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자의 자의적인 구분이지 본래의 의미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관저>에 대한 해석은 강왕(康王)과 후비(后妃)의 행락(行樂)을 <관저(關雎)>를 통해 은미(隱微)하게 간(諫)한 작품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끝으로 다산은 <경의시(經義詩)>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칠언절구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시경(詩經)"도 물론 다섯 수로 구분되어 포함되어 있다. 다산이 시경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핵심적인 측면이 드러나기에 참고할 수 있게 소개한다.

 

<1>

古人百計格君心/ 誦工歌被素琴/

全把國風兼二雅/直須看作諫書林

 

(옛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임금 마음을 바로잡아/

장님이 외고 악관이 외어 소금에 올렸는데/

국풍과 소아 대아까지 모조리 가져다가/

곧장 임금 간하는 글로 간주하였네)

 

<2>

風賦比興都是風/正言體栽不相同/

六詩平列無經緯/納五言時未頌功

 

(풍과 부와 비와 흥이 모두가 풍인데/

바른 말 하는 체재가 서로 같지 않더라/

육시를 평등하게 열거하여 조리가 없고/

오언을 바칠 때는 공을 칭송하지 않도다.)

 

<3>

鼎 紀惡尙堪憎/于誦于絃豈不懲/

樂器未遷詩道喪/春秋袞鉞乃相承

(정이에 악을 기록해 둔 것도 미움직한데/

읊고 거문고 타고 함에도 왜 징계하지 않는고/

악기는 그대로 있으나 시도가 없어졌기에/

춘추의 포폄이 이에 서로 이어졌다오)

 

<4>

狹邪淫冶本無歌/設有謳 采奈何/

虞帝巡方無此法/獻詩誰到太山阿

(화류가의 음란한 풍은 본디 노래도 없지만/

설령 노래가 있다 해도 채집하면 무엇하랴/

순임금이 지방 순수할 땐 이 법이 없었으니/

누가 태산 모퉁이까지 시를 갖다 바치리오)

 

<5>

小序傳流大小毛/衛宏潤色總摸撈/

紫陽劈破眞豪快/垂二千年隻眼高

(소서가 대모 소모에게 전해 내려왔는데/

위굉이 윤색한 건 다 더듬어 찾은 거로세/

자양이 벽파한 것은 참으로 호쾌하여라/

공자 이후 이천 년간에 견식이 가장 높았네)

 

3. 시의식(詩意識)과 작품 세계의 관련성

앞에서는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앞장의 논의를 토대로 하되,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는 시의식(詩意識)과 다산(茶山)의 한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들어간다고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여 이로써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바라면서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나의 지식을 넓히고, 여러 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를 가슴 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事物)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나의 마음 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으로 남겨보고 싶은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이네.

 

.위의 인용문은 다산 자신의 문장관(文章觀)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산은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 예컨대, 외적으로는 효우(孝友)와 같은 행실로 본성(本性)을 연마하여 공경을 몸에 지니고 성실함으로 일관됨을 유지하는 자세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그리고 역사서와 고금의 저서들을 통해 지식을 체득해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 뒤라면, 특정한 상황이나 경우에 처했을 때, 마음 속에 쌓아놓았던 것이 파도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문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음으로써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절로 우러나야 참된 문장이라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다산이 시(詩)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하게 하면 된다.

 

다산이 인식하고 있는 시(詩)의 본질을 언급하는 인용문이다. 이처럼 다산의 시의식(詩意識) 역시 앞에서 살펴본 문장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뜻이 낮거나 추잡하면 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뜻이 낮거나 비루해지면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뜻을 헤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리고 아들이기에 다른 양식의 글에서보다 더욱 진솔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시의식(詩意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번에 성수(惺 ) 이학규(李學逵)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가 너의 시를 논평한 것은 잘못을 잘 지적하였으니 너는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 그의 자작시 중에는 꽤 좋은 것이 있기는 하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더라. 오늘날 시는 마땅히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 가운데 두보(杜甫)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시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 ... 中略...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징비록(懲毖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16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도 책으로 간행해서 즐겨 읽던 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사즐(東史櫛)』은 본디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대연(大淵)이가 너에게 빌려줄 턱이 없으니, 우선 중국의 17사(史)에 있는 동이전(東夷傳) 가운데서 이름난 자취를 뽑아놓았다가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인용문과 같이 다산은 두보(杜甫)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시 세계가 다산이 지향하고자 했던 시 세계와 가장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용사(用事)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주목할만한 다산의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다산은 한시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데 대개의 경우가 중국(中國)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 시(詩)를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넉자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다산의 시의식(詩意識)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지적과 같이 다산은 자신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네 글자로 된 시만큼 효율적인 형식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시경(詩經)』의 정신을 형식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출처 - 사림서당.


시경-모기령의 주자비판/ 中國文化

2007/03/08 09:29

http://blog.naver.com/joeblue/40035176514

http://blog.empas.com/sacheon/16710967-주자 및 정약용의 시경연구

조선후기의 경학연구법 분화와 毛奇齡 비판

沈 慶 昊*

Ⅰ. 머리말

Ⅱ. 모기령의 생애와 경학설

Ⅲ. 正祖의 모기령 비판

Ⅳ. 북학파 학자의 모기령 경학설

수용

Ⅴ. 소론계 학자의 漢字수용과

모기령경학설 참고 Ⅵ. 노론계 학자의 宋字 재해석과

모기령 비판

Ⅶ. 丁若鏞의 모기령 경학연구법

참조와 신 경학방법론 수립

Ⅷ. 마무리

Ⅰ. 머 리 말

조선후기 18,9세기의 학문 경향은 조선 성리학의 논리체계와 자생적인 문헌학적 연구방법의 기초 위에 청조의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향과, 양명학적 사유와 漢學의 방법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청조의 여러 학설이 직,간접으로 참조되었는데, 朱熹 비판의 학자 毛奇齡의 경학설은 내용면에서나 방법면에서 특히 爭點으로 부각되었다.

毛奇齡(1623~1713)은 淸初 浙東學派의 한사람이다. 그는 程朱理學을 철저히 부정하고 청조의 고증적 학풍을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후기 문인-학자들은 대체로 그를 立異와 務勝을 일삼은 인물로 지목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희 비판은 조선 문인-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주희 비판의 방식은 주자학을 재평가하고 宋學의 기초 위에 漢學을 도입할 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고증학이 일어나 모기령의 경학설이 참고로 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모기령에 대한 비판이 일본보다 더 극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중․일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거나 극복하면서 근세 실증적 학문이 발흥하는 과정을 비교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있을 듯하다.

- 38 -

모기령은 자가 大可․齊于 등이고 浙江 蕭山人인데, 郡望을 따라 西河라고 자호하였다. 李德懋가 󰡔盎葉記󰡕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는 字가 많기로 유명하다.1) 또 凌延堪의 󰡔校禮堂文集󰡕에는 固陵毛氏라 되어 있어서, 秋史 金正喜는 그를 ‘固陵’이라 불렀다.2) 문학적으로는 騈散에 두루 뛰어났으며, 詩詞에도 능하여 󰡔西河詩話󰡕 8권, 󰡔詞話󰡕 2권을 남겼다. 이덕무는 모기령의 시문이 고상하고 화려하면서도 시원시원하다[高華逸宕]고 평가하고, 󰡔淸脾錄󰡕에 佳句들을 뽑아두었다.3)

모기령은 문학적 재능도 있었지만, 경학면에서 주희를 비판하는 상당한 양의 저술을 남겨 저명하다.4) 門人 蔣樞가 遺集을 經集 50종, 文集 234권(실제는 179권)으로 분류해서 판각한 󰡔西河全集󰡕이 行世하였다.5) 그의 아들 毛遠宗이 편찬하고 문인 王錫이 서문을 붙인 󰡔四書索解󰡕 4권,6) 문인 盛唐․王錫․章大來와 아들 모원종이 편찬한 󰡔四書謄言󰡕 4권․補2권7), 문생과 자제들이 초하여 엮은 󰡔四書正事󰡕 8권이 別行되었다. 모기령은 86세 때 󰡔四書正事󰡕를 토대로 增損移易하여 󰡔四書改錯󰡕 22권을 간행하였다. 󰡔서하전집󰡕은 뒤에 다시 侄孫들에 의해 重輯되어, 蕭山 陸凝堂藏板本으로 나왔다. 이 중집본은 表題가 ‘毛西河先生全集’이고, “凡經集五函合五十一種共二百三十六卷, 文集五函合六十六種共二百五十七卷”이라 되어 있다.8)권수제는 ‘西河合集’이다. 한편 󰡔四書改錯󰡕은 嘉慶 辛未에 甌山 金孝柏이 목판 간행한 것이 별도로 행하였다.9)

錢穆의 󰡔中國近三百年學術史󰡕는, 모기령의 經說이 한대 이후 사람들을 모두 다 비판하였으되, 가장 切齒한 것은 송대인이며, 송인 가운데서도 가장 절치한 사람은 주자라고 하였다. 전신이 모두 가시가 돋힌 蝟公[고슴도치]라는 별명이 있었으니, 그의 ‘負氣求勝’은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경학설 가운데는 참고로 할 만한 내용도 많다.

- 39 -

① 󰡔大學󰡕에 今文과 古文의 차이가 없고 經文에 石經本과 注疏本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② 「河圖」와 「洛書」는 道家의 太乙九宮之法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太極圖說遺議󰡕에서, 今本 太極圖가 주희에 의하여 개정되었으며, 朱震이 수록한 도식이 주희 태극도의 참 모습에 가까운 빠른 시기의 것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그는 󰡔송사󰡕 실록의 기록에 의거하여, 태극도설의 첫구인 “無極而太極”은 “自無極而爲太極”이어야 한다고 하였다.10)

③ 명대에 나온 󰡔子夏詩傳󰡕과 󰡔申培詩說󰡕이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조선 정조의 詩經講義 條問에서도 그 설이 채택되었다.

④ 󰡔周禮󰡕가 주공이 지은 책은 아니지만 僞書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으로 보인다고 하여 周公著作說을 비판하였다.11)

⑤ 󰡔四書謄言󰡕 권3에서 王復禮(호 草堂)가 子思 및 孟子의 생졸년을 고증한 설을 인용해, 맹자가 子思에게서 친히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12)

모기령은 이밖에도 경문의 훈고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淸儒學案󰡕 「西河學案」에서는 “명 이래로 漢儒의 학을 거듭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空言으로 經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진실로 西河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제자 李天馥은 모기령에게 남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 셋 있다고 하였다.13) 서책을 끼고 있지 않아도 천만권이라도 써 내려갈 기세인 것이 그 하나. 명말의 도피시기에 怔忪疾을 얻었으나 발병하더라도 글을 구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배를 쓱쓱 문지르고 하나도 착오 없이 경각에 써 주는 것이 둘. 독서를 깊이 하지 않았는데도 경전과 제자 및 자잘한 사실까지 모두 알아 논지를 전개하면 漢宋의 유학자들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 그 셋이라는 것이다. - 40 -

하지만 모기령의 경학은 논박을 위한 논박으로 시종한 면이 있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潛邱 閻若璩(1636~1704)가 󰡔尙書古文疏證󰡕을 발표하자 두달 만에 󰡔古文尙書寃詞󰡕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논리가 황당하였다. 즉 염약거는 󰡔疏證󰡕에서 梅賾本이 僞古文이라는 斷案을 내리자, 모기령은 매색본 25편의 義理가 좋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이 진고문이라고 강변하였다.

謝山 全祖望((1705~1755)은 󰡔蕭山毛檢討別傳󰡕를 지어, 모기령의 經義說 가운데는 채택할 것이 없지 않지만 잘못이 더 많아서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얻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全祖望의 아버지 全書는 아예 󰡔蕭山毛氏糾謬󰡕 10권을 엮어, 모기령의 억설과 경솔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14) 모기령은 自撰墓誌銘 末尾에 陳子龍․何曾․徐緘․姜黃門․李師 등의 찬사를 늘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모기령의 才學이 두보․한유․공영달․육덕명․이선․구양수․소식의 재능을 합한 수준이라고 허랑하게 찬미한 것도 있다. 또한 그는 黃宗羲(1610~1695)․顧炎武(1613~1682)․王夫之(1619~1692) 등과 달리 遺民을 자처하지도 않았다. 梁啓超는 󰡔淸代學術槪論󰡕에서 “毛氏가 계몽기에 살았다면 용감한 장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도덕에는 결함이 있으니, 後儒들이 그를 높이 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모기령은 중국학술사에서 인격적 결함과 학술적 오류 때문에 지탄받아 왔지만, 趙紀彬(1905~1982)은 󰡔論語新探󰡕에서 그를 긍정시하였다. 조기빈은 󰡔논어󰡕의 신 해석에 전통적 훈고학을 채용하였는데, 그 방법론은 모기령에게로 소급한다. 조기빈은 克己에 대한 해석에서, 모기령이 心學 일파이지만 그가 程朱學을 비판한 내용은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많다고 특별히 언급하였다.15)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모기령의 경학설은 주자학=송학을 비판하려 할 때에 직.간접으로 참고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는 사실 청초 학술계에 樸學의 기풍을 일으켜 程朱學의 기반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平湖人 陸邦烈, 山陰人 盛唐, 遂昌人 王錫, 會稽人 章大來, 餘姚人 邵廷采, 蠡縣人 李塨 등이 그 제자라고 언급된다. 육방렬(자 又超)은 모기령의 경설을 초록하여 󰡔聖門釋非錄󰡕 5권을 엮었다. 만일 명말청초의 ‘經世致用學’의 계보를, ① 記誦이나 性理의 학문이 아니라 실천과 수양을 강조한 實踐派 ② 天文曆算․農業水利․兵學火器 등의 기술적 측면의 실용에 주목한 技術派 ③ 性理의 空談을 부정하고 경학․사학의 연구를 통하여 정치 및 사회 문제 해결에 응용하고자 한 經學史學派로 분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모기령은 엄연히 ‘경학사학파’의 한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16)

조선에서도 18세기 후반, 19세기 초의 진보적 학자들은 모기령의 ‘好勝之心’을 냉혹하게 비판하면서도, 漢學과 宋學을 절충하거나 주자학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할 때 모기령의 경학설을 많이 참고로 하였다. 본고에서는 그 실상을 개괄하고자 한다.

Ⅱ. 모기령의 생애와 경학설

- 41 -

모기령의 생애에 관하여는 문인 唐盛이 지은 「西河先生傳」에 자세하며,17) 그것을 토대로 逸名氏의 󰡔淸史列傳󰡕은 「儒林傳․下」 권68에 그를 立傳하였다.18)

모기령은 折江省 蕭山 출생인데, 毛秉鏡과 張氏夫人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중형 毛錫齡은 그의 易學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스무살 이전에 鄕試에 뽑혀 杭州府 學宮에서 공부하던 중에 明이 멸망하자 항주 南山에 몸을 숨겼고, 족친 毛有倫이 지휘하는 西陵軍에 투신하였다. 그런데 모유륜이 方國安․馬士英의 方馬軍과 제휴하려는 것을 반대하였으므로, 方馬軍은 朱橋에서 淸軍에게 대패한 뒤 그의 생명을 노렸다. 그 뒤 삭발하고 절의 토굴속에 숨어 지냈으며, 淸兵에게 잡혔으나 머리를 깎은 덕분에 목숨을 구하였다.19)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崇山으로 가서 도사의 土室에 숨어 지내면서 毛甡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 42 -

마흔 이후에 淸 정부의 사면을 받고, 56세 때인 1679년(강희 18, 기미)에 廩監生으로 博學鴻儒科(制科)에 천거되어 二等으로 합격, 翰林院檢討에 임명되고 明史館纂修官에 충당되었다. 그는 「辨忠臣不徒死文」을 지어 자기의 변절을 간접적으로 변명하였으며, 吳三桂의 아들 吳世璠이 죽어 三藩이 평정되자 「平滇頌」을 강희 황제에게 바쳤다. 그는 또 성운학을 좋아하는 강희제의 호감을 사려고 󰡔古今通韻󰡕 12권을 지었다. 1685년(강희 24)에는 會試同考官에 충당되었다. 얼마 뒤 휴가를 얻어 항주에 돌아가 있다가 痺疾을 얻었다. 1699년(강희 38)에 강희제가 南巡하자 嘉興에서 알현하고 󰡔聖諭樂本解說󰡕을 올렸고, 강희제의 三巡 때 절강으로 가서 알현하였다. 1713년(강희 52)에 91세로 몰하였다.

모기령은 스스로, 일찍부터 諸經의 문제점을 辨定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全祖望이 지은 「蕭山毛檢討別傳」이나 모기령의 제자 盛唐이 지은 「西河先生傳」에는 그가 마흔 이후에야 경학에 관한 저술을 시작하였다고 되어 있다. 河秋濤(1824~1862)도 모기령이 염약거를 만난 이후에야 경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歸田 뒤에 경학에 관해 저술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모기령은 정주학을 극력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四庫館臣이 지적하듯 門戶之見에 의한 것이었을 혐의가 짙다. 그는 毛甡이란 이름으로 도피할 때 賀凌臺의 제자라는 승려를 만나 하릉대의 古本大學說을 전해듣고 깨우침이 있었다고 했다.20) 그렇지만 그의 정주학 비판은 같은 浙東學派에 속하는 선배 蕺山 劉宗周(1578~1645)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다. 유종주는 명말의 양명학자로 陳確(1604~1677), 黃宗羲(1610~1695)의 스승이다. 모기령은 史館에 있을 때 󰡔明史󰡕에 「道學傳」을 두려는 여론에 반대하는 황종희의 논조에 동조해서, 그 계획을 취소시켰다. 또한 「辨聖學非道學」을 지어 양명학을 옹호하였으며, 󰡔王文成集傳本󰡕을 지어 󰡔明史󰡕 「王守仁傳󰡕의 초고로 삼았다.21) 질병으로 벼슬을 그만 둔 뒤에는 주희의 사서학을 공격하는 󰡔四書索引󰡕․󰡔論語稽求篇󰡕․󰡔大學證文󰡕․󰡔大學知本圖說󰡕․󰡔中庸說󰡕․󰡔四書謄言󰡕․󰡔四書謄言補󰡕․󰡔聖門釋非錄󰡕 등을 저술하였다. 86세 때에는 이 저작들의 요지를 󰡔四書改錯󰡕으로 묶어 강희제에게 헌정하려다가, 강희제가 주자의 문묘배향을 결정하자 일단 刻版을 없애 버렸다.

모기령이 훈고에 탐닉한 것은 청대 文字獄의 영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강희 2년 莊廷鑨의 󰡔明史󰡕 사건으로 지식인들이 희생 당한 이후,22) 경세사상을 고취하던 황종희・고염무 등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聲韻․文字․訓詁를 위주로 하는 考證學이 성행하였다. 당시 마흔 남짓의 모기령은 점차 청조의 정책에 휘둘려서 고증학적 기풍에 젖기 시작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 43 -

모기령은 명말에 토실에서 󰡔毛詩續傳󰡕 38권을 저술하였으나 江淮에 피난하던 때에 원고를 잃어버리고, 󰡔國風省篇󰡕 1권, 󰡔詩箚(詩札)󰡕 1권, 󰡔毛詩寫官記󰡕 4권을 새로 저술하였다. 그리고 江西參議道 施閏章(1618~1683)이 湖廣人 楊洪才를 吉安 白鷺洲書院에 山長으로 초청하고 모기령도 부르자, 모기령은 그곳에서 양홍재와 淫詩 및 笙詩에 관하여 논하였다. 양홍재가 주희의 설을 따라 鄭風淫詩說과 笙詩無詞說을 주장한 데 비하여, 모기령은 정풍에는 음시가 없고 생시는 本詞가 없어졌다는 주장을 하였다. 모기령은 한림이 된 뒤 󰡔白鷺洲主客說詩󰡕 1권을 엮었다. 그리고 명 嘉靖 연간에 鄞人 豐坊이 위작한 󰡔子貢詩傳󰡕과 󰡔申培詩說󰡕이 行世하는 것을 보고는, 󰡔詩傳詩說駁議󰡕 5권을 저술하였다.

청조에 들어와 史館에 있을 때 모기령은 󰡔古今通韻󰡕 12권을 강희제에게 헌정하였다. 杭州에 僦居할 때는 󰡔仲氏易󰡕 30권을 저술하였고, 다시 󰡔推易始末󰡕 4권, 󰡔春秋占筮書󰡕 3권, 󰡔易小帖󰡕 5권, 󰡔易韻󰡕 4권, 󰡔河圖洛書原舛編󰡕 1권, 󰡔太極圖說遺議󰡕 1권을 저술하였다.23)

그는 會試同考官일 때 春秋房卷을 보고 故傳의 偏僻됨에 불만을 느꼈는데, 歸田 뒤 󰡔春秋毛詩傳󰡕 36권, 󰡔春秋簡書刊誤󰡕 2권, 󰡔春秋屬辭比事記󰡕 4권을 지었다.

그리고 禮經을 全著하고자 하였으나 衰病으로 여의치 않자, 昏禮․喪禮․祭禮․宗法․廟制․郊社․禘祫․明堂․學校에 관하여 차례로 저술하였다. 論語(󰡔逸講箋󰡕 3권 등)․大學(󰡔逸講箋󰡕 3권, 󰡔大學問󰡕 1권 등)․中庸(󰡔中庸說󰡕 5권 등)․孟子(󰡔逸講箋󰡕 3권 등)에 대하여도 고증하였다. 󰡔大學證文󰡕과 󰡔孝經問󰡕에서는 後儒의 改經이 잘못임을 변증하였다.

평소 음률에 밝았던 그는 史館에 있을 때, 명대 宗藩이 전한 唐樂笛色譜에 의거하여 󰡔竟山樂錄󰡕 4권을 저술하였다.24) 또 在籍時에 강희제가 음악을 논하여 羣臣에게 ‘徑一圍三隔八常相生之法’을 勅諭하자, 그것을 근거로 󰡔聖諭樂本解說󰡕 2권, 󰡔皇言定聲錄󰡕 8권을 저술하였다.25) 강희 38년의 남순 때는 嘉興에서 迎駕하고 󰡔聖諭樂本解說󰡕을 헌정하였다.

- 44 -

모기령의 경학 저술 가운데 염약거의 󰡔疏證󰡕을 압도하려고 저술한 󰡔古文尙書寃詞󰡕 8권과 그것을 산절한 󰡔尙書廣德錄󰡕 5권은 오류가 가장 많다. 󰡔經問󰡕을 저술하여 󰡔周禮󰡕․󰡔儀禮󰡕가 전국시대의 서적이라고 논하되, 錢丙蔡氏의 이름은 감추고 顧炎武․閻若璩․胡渭을 거론해서 공격한 것은 ‘心術不正’의 예로 꼽힌다.

모기령은 󰡔詩話󰡕 8권과 󰡔詞話󰡕 2권을 지어 문예관을 피로하였다. 그 가운데 󰡔詩話󰡕는 自作詩와 동시인의 唱和詩를 싣고 尊唐抑宋說을 논하였다. 단 송시의 득실을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당시의 藩籬에도 이르지 못하였다는 四庫館臣의 평이 있다.26) 주희의 󰡔楚辭集註󰡕를 비판하고 疏證하여 󰡔天問補註󰡕 1권을 저술한 것도 억측의 언사가 많다.27)

모기령은 小學 방면의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그는 顧炎武의 󰡔音學五書󰡕를 배척하고자 󰡔古今通韻󰡕 12권을 저술해서 五部三聲兩界兩合의 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古音이 역사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수많은 條例를 만들어 포괄하려 하였으니, 조례가 많아질수록 모순이 더욱 심해졌다.28)

모기령의 경학설 가운데 후인들에게 주목받는 사항을 몇가지 알아보기로 한다.

(1) 모기령은 王守仁의 설을 추종하여 󰡔大學知本圖說󰡕 1권을 저술해서 古本大學의 설을 내세워 주희의 格物傳을 공격하였다.29) 이 책은 知本圖說과 知本圖로 이루어져 있는데, 知本圖는 大學有本․格物知本․格物以修身爲本․修身以誠意爲本의 4도이며 附錄을 두었다. 그리고 後圖가 있어, 大學知本과 中庸立本을 병렬시켜 두 그림을 節次相配하였다. 그는 知行竝用과 博約兼資의 문제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혹 偏擧하였지만 이치상 編廢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經文에 이미 格物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으므로, 偏傳을 두지 않은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格物을 量度의 뜻으로 보고, 知本을 誠意라고 보았다. 知本을 直指한 것은 王守仁의 良知說을 따른 것이고, 誠意를 위주로 한 것은 劉宗周의 愼獨說을 취한 것이다

(2) 모기령은 󰡔주역󰡕에 一家를 이루었음을 자부하였고 후세 학자들의 認可를 얻었다. 顧炎武의 󰡔易本音󰡕이 考據易學의 선하를 열고 黃宗羲 형제의 󰡔易學象數論󰡕․󰡔圖書辨惑󰡕이 圖書僞作說을 논한 뒤, 모기령은 󰡔仲氏易󰡕 30권, 󰡔推易始末󰡕 4권, 󰡔春秋占筮書󰡕 3권, 󰡔易小帖󰡕 5권, 󰡔易韻󰡕 4권, 󰡔河圖洛書原舛編󰡕 1권, 󰡔太極圖說遺議󰡕 1권을 저술해서, 荀爽․虞翻․干寶․侯嬴의 설과 卦變․卦綜의 법을 발명하고 圖書를 변증하여 宋易을 공격하였다. 四庫館臣은 “명 이후 漢儒의 역학을 신명하여 유가로 하여금 공리공담으로 經을 논설하지 못하게 한 것은 사실은 모기령이 그 첫 길을 열었다”고 평하였다.

- 45 -

모기령의 역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仲氏易󰡕이다.30) 그는 易에 變易․交易(둘은 복희의 󰡔역󰡕), 反易․對易․移易(셋은 문왕과 주공의 󰡔역󰡕)의 다섯가지 뜻이 있다고 논하였다. 變易은 양이 음으로 변하고 음이 양으로 변함이다. 交易은 음이 양과 교호하고 양이 음과 교호함이다. 劃卦는 변역을 이용하고 重卦는 교역을 이용하므로 복희의 󰡔역󰡕이라고 하였다. 反易은 順逆을 살피고 向背를 심리하여 반대로 보는 것이다. 對易은 剛柔를 엮어서 짝을 살피는 것이다. 移易은 나뉨과 모임을 심리하고 오고 감을 계산하여 추이하여 상괘․하괘로 하는 것이다. 反易․對易․移易을 강론한 것이 漢魏 이래의 易學과 구별되는 모기령의 역학이다.31) 移易은 荀爽의 升降이다. 이를테면 泰卦는 음효와 양효가 유별로 모여 있는 괘인데, 그 제3효가 상효로 옮아가서 양이 가고 음이 오면 損卦가 된다. 또 否卦도 음효와 양효가 유별로 모여 있는 괘인데, 그 제4효가 초효로 옮아가서 양이 오고 음이 가면 益卦가 된다. 對易은 우번의 旁通과 가깝다. 이를테면 上經의 需卦․訟卦는 下經의 晉卦․明夷卦와 짝을 이루어서, 땅이 하늘과 짝이 되고 불이 물과 짝이 된다. 상경의 同人卦․大有卦가 하경의 夬卦․姤卦와 상대하여, 5양이 5양과 마주하고 1음이 1음과 마주하는 것도 그 예이다. 모기령이 말한 反易은 虞翻의 反對이다. 屯卦가 반전하면 蒙卦이고, 咸卦가 반전하면 恒卦이다. 對易은 기존의 正變占對와 차이가 있다. 정변점대는 需卦가 訟卦와 상대하고, 同人卦가 大有卦와 상대함을 말한다. 하지만 모기령은 需卦․訟卦의 둘이 晉卦․明夷卦의 둘과 상대하고 同人卦․大有卦가 夬卦․姤卦와 상대한다고 말한다. 그의 移易說도 10벽괘 및 주희의 괘변설과 다르다. 다른 괘변설은 모두 두 괘가 번갈아 변하여 順逆이 서로 이어 접함을 취하여, 변점을 취하지, 推演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기령은 먼저의 효사를 부연하였고, 변한 뒤의 상수를 점하지 않는다.

모기령은 송학을 극도로 천시하여, 「辨道學」을 지었다. 그에 따르면, 북송에 이르러 陳摶이 華山道士․种放․李漑와 함께 자신의 역학을 부풀리고서, 도가서 󰡔無極尊經󰡕 및 張角의 󰡔九宮󰡕을 찾아내어, 太極․河洛의 설을 창도하여 󰡔道學綱宗󰡕을 지었다. 이후에 주돈이․소옹․정호 형제가 그를 사사하여 도교를 유가의 서적 속에 찬입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주희는 史官 洪邁에게 애걸하여 진단을 名臣 大傳에 입전하게 하고 주돈이․정이를 위해 󰡔宋史󰡕에 道學總傳을 두게 하였다고 모기령은 통박하였다. 이미 黃宗炎은 「태극도」가 󰡔道藏󰡕의 「太極先天之圖」에서 기원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는데, 모기령은 󰡔태극도설유의󰡕에서 더 나아가 朱震 헌정의 「태극도」가 주돈이의 작품임을 증명하였다.32) 또한 그는 󰡔하도낙서원천편󰡕을 지어, 진단이 만든 「하도」가 “大衍之數 五十有五”에 대한 鄭玄 注를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鄭玄은 결코 대연지수가 「하도」라 하지는 않았고, 「하도」에 9篇이 있고 「낙서」에 6편이 있다고 하였으니, 정현이 말한 「하도」․「낙서」는 55點․45點의 易圖가 아니었다. 송인의 「하도」는 大衍圖․天地生成圖․五行生成圖라 이름하여야 하지, 「하도」라 할 수는 없다고 모기령은 논하였다.33) 뒷날 胡渭는 모기령의 설을 부연하였다.

(3) 󰡔周禮問󰡕34)에서 모기령은 󰡔주례󰡕가 周公의 작이 아니라 전국시대에 성립하였음을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漢書󰡕 「藝文志」의 기록을 보면 당시 󰡔주관경󰡕 6편과 󰡔주관전󰡕 4편이 저록되어 있고, 󰡔주례󰡕의 내용에는 전국시대의 事迹이 많다. 이미 東漢의 何休는 전국시대 成書說을 제기한 바 있는데, 모기령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皮錫瑞의 󰡔經學通論󰡕도 모기령의 설을 지지하였다. 康有爲와 廖平은 劉歆이 󰡔주례󰡕를 僞撰했다는 설을 견지하였으나, 유흠 위찬설은 모기령에 의하여 이미 부정되었다.

- 46 -

(4) 모기령은 주희의 鄭詩淫詩說을 부정하였다. 그는 󰡔尙書󰡕 「堯典」편(偉古文에서는 「舜典」)의 ‘詩言志, 歌永言, 聲依永’에 의거하여 ‘聲’과 ‘詩’는 별개의 것이므로 鄭聲이 淫亂하다고 해서 鄭詩가 다 淫亂한 것은 아니며, 만약 주희의 주장대로 鄭詩가 淫亂하다면 공자가 ‘放鄭聲’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35) 이것은 明의 郝敬36)의 설을 계승한 것인 듯하다.

(5) 모기령은 주희의 四書學을 근저에서 전복하려고 하였다. 嘉慶本 󰡔四書改錯󰡕은 32門部 451條로 되어 있는데, 門部目만 보면, 人錯․天類錯․地類錯․物類錯․官師錯․朝廟錯․邑里錯․宮室錯․器用錯․衣服錯․飮食錯․井田錯․學校錯․郊社錯․禘嘗錯․禮樂錯․喪祭錯․故事錯(上)․故事錯(下)․典制錯․刑政錯․記述錯․章節錯․句讀錯․引書錯․據書錯․改經錯․改註錯․自造典禮錯․抄變詞例錯․添補經文錯․小詁大詁錯(上)․小詁大詁錯(下)․貶抑聖門錯(上)․貶抑聖門錯(下) 등이다. 물명 고증과 자구 훈석의 문제에서부터 改經과 聖門貶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희의 四書學을 철저히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모기령의 󰡔사서개착󰡕이 나온 이후로는 비록 주자학을 옹호하려는 태도라고 하여도, 󰡔사서개착󰡕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 비록 모기령의 경학론은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으나, 治經과 관련한 주장은 실증적 樸學에 참고할 만한 것이 있었다. 즉 그는 ‘說經勿杜撰’ ‘勿武斷’ ‘勿誤作解說’ ‘勿誤章句’ ‘勿誤訛人倫序’ ‘勿因經誤以誤經’ ‘勿自誤誤經’ ‘勿因人之誤以誤經’ ‘勿改經以誤經’ ‘勿誣經’ ‘勿借經’ ‘勿自造經’ ‘勿以誤解經之故而復回護以害經’ ‘勿依違附經’ ‘勿自執一理以繩經’ ‘勿說一經礙一經’을 治經 요령으로 제시하였다.37) 그가 실제로 이러한 요령을 실천하였는지 여부는 재론하여야 하겠으나, 이 주장이 경학 연구에서 실증적 태도를 제고하는데 일정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Ⅲ. 正祖의 모기령 비판

- 47 -

정조는 재위 15년(1791)에 招啓文臣 親試 및 泮儒 應製에서 「俗學」이란 제목의 책문을 내걸고, 陽明 좌우파와 毛奇齡을 포함한 僞經害經의 무리인 豊坊孫鑛之派, 고증학에 치우친 일파인 楊愼季本之派, 蟲刻鷄距의 操觚家인 七子五子之派의 세 유파를 비판하고 諸生의 의견을 물었다.38) 모기령에 대해서는 특히 󰡔經說󰡕을 속학의 서적이라고 거론하였다. 정조는 王守仁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고 顧炎武의 ‘淹博’을 인정하였으며, 모기령에 대하여도 考證博洽의 거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명청의 학문은 끝내 순정하지 못하며, 주자학을 정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의지였다.

정조는 󰡔시경󰡕에 관한 논의에서 朱熹의 說을 수정 비판한 詩論이나 三家詩說을 검토하면서 오히려 주희 설의 정통성과 우위성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신축년 이래 4․5차에 걸쳐 󰡔시경󰡕에 관련된 조문을 頒給하고 條對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詩經講義󰡕 9권(寫本)이 엮어졌다. 즉 條問辛丑選 2권과 條問癸卯選 1권, 條問甲辰選 1권, 條問己酉庚戌選 5권이다.

條問辛丑選 2권과 條問癸卯選 1권은 이미 1783년(계묘)부터 교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毛詩講義󰡕를 교정하였던 李德懋는 모기령의 주희 비판이 儒林의 公案을 어지렵혔다고 비판하였다. 즉 李德懋는 「내각에 비치된 모시강의를 교정하다(校內閣毛詩講義)」39)의 제10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련하다 彤管[즉 靜女篇]과 靑衿[즉 子衿篇]을

小序는 어찌하여 刺淫詩라 아니했나.

朱門의 공안을 감히 무너뜨려

毛甡과 李紱이 유림을 어지렵혔네.

可憐彤管與靑衿, 小序如何不刺淫.

敢壞朱門公案了, 毛甡李紱鬧儒林.

- 48 -

己酉․庚戌選 抄啓文臣을 대상으로 한 辛亥頒給條問의 詩經講義 寫本의 標記에서 정조는, 毛詩序 從違의 定論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근대의 유학자들이 공공연하게 前賢을 비난하고 별도로 新義을 창안하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 변론할 것도 못된다”고 하고 󰡔시경󰡕을 논하는 자들이 好夸競奇의 풍조가 있는 것을 징계하려 한다고 밝혔다.40) 신해반급 조문의 第一問인 ‘總論’은, 주희의 󰡔詩集傳󰡕이 訓釋을 구비하는데도 불구하고 詩篇 분석이 어려운 것은 小序 美刺說에 관한 정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처럼 小序의 신빙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 직접적 원인은 ‘근대유자’의 이설 때문이었다.41) 그 ‘근대유자’란 곧 모기령이다. 정조는 모기령의 󰡔白鷺洲主客說詩󰡕을 간접 인용하여 小序의 작자에 대한 이설을 거론하였다. 모기령은 小序 작자에 관한 문제는 從序派와 攻序派의 입장에 따라 이설이 많다. 모기령은 從序派의 극단론자는 아니어서, 小序의 刺詩說은 부정하였다. 그는 다만 주희의 淫詩說을 부정하고자 小序를 부분 인정하였다. 그는 󰡔詩札󰡕에서는 毛亨作序說을 强辯하였지, 荀子子夏淵源說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정조는 신축년 毛詩講義 때부터 모기령의 󰡔시집전󰡕 비판을 검토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자연히 名物字句 考證의 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정조는󰡔子貢詩傳󰡕(余嘉錫의 󰡔四庫提要辯證󰡕에 의하면 豊坊의 僞作임42))과󰡔申培詩說󰡕(余嘉錫에 의하면 王文祿의 僞作임)도 검토케 하였는데, 그것도 모기령의 󰡔詩傳詩說駁議󰡕를 의식해서였다. 신해년 반급의 조문 가운데는 ① 字句 분석에서 모기령 설에 따라 󰡔시집전󰡕에 대한 의문을 표한 것이 있고, ② 物名 고찰에서 모기령의 설을 검토한 예가 있으며, ③ 詩篇 제작의 동기나 본의를 검출할 때에도 모기령의 설을 직접 검토한 예가 있다. 모기령은 ‘口氣가 輕薄’(정약용의 지적)할 정도로 󰡔시집전󰡕을 매도하고, 󰡔시집전󰡕 注가 체제를 잃었다고 통박하였는데, 정조도 󰡔시집전󰡕 훈석의 일관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모기령은 󰡔시집전󰡕의 淫詩說을 비판하여, 男女相悅之詞는 모두 君臣朋友의 사이를 남녀에 가탁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조는 주희의 淫詩說을 준수하고 託詞說을 따르지 않았다.43)

- 49 -

한편 정조는 󰡔주역강의󰡕에서도 모기령의 설을 참조하였다. 정조는 1783년(계묘)에 그 해 선발의 초계문신에게 󰡔주역󰡕에 관한 조문 183개조를 반급하였고, 1784년 갑진 선발의 초계문신에게도 33개조의 조문을 반급하였다.44) 󰡔군서표기󰡕에서 정조는, “伊川(程頤)의 易은 한결같이 躬行에서 나와 거의 觀彖過半(彖을 보고 생각이 過半함)의 易인데 비하여 紫陽(朱熹)의 易은 理數를 겸하여 우뚝히 辭變象占의 역을 이루었으니, 배우는 사람은 󰡔程傳󰡕과 󰡔本義󰡕에 의하여 孔門의 翼을 터득하고, 孔門의 翼에 의하여 文王의 卦辭와 周公의 爻辭를 터득한다면, 그 정맥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주희 이후로 岐論이 많아져, 先天圖를 의심하는 자에 袁樞와 林栗의 무리가 있고 河圖를 배척하는 자로는 項安世와 王褘의 부류가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來知德의 卦綜이나 毛奇齡의 卦變은 漢儒의 緖餘를 훔쳐다가 程朱를 매도하였다고 비난하였다.45) 정조의 󰡔주역강의󰡕는 청초의 卦變說을 재비판하여 󰡔易傳󰡕과 󰡔本義󰡕의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한 때에 모기령의 설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50 -

정조는 1781년(신축)․1783년(계묘)․1784년(갑진) 세차례에 걸쳐 󰡔尙書講義󰡕를 시행하면서 고문상서설에 대하여 정론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條問辛丑選二卷, 條問癸卯選二卷, 條問甲辰選四卷이 엮여 나왔다. 󰡔상서강의󰡕의 「군서표기」는 “古今眞僞의 辨說은 아직 결론을 맺지 못한 案”라고 전제한 뒤, 이 編의 條問은 學術을 바로잡고 聖經을 保衛하는 大用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고 하였다.46) 󰡔서경강의󰡕의 총론은, 六經 가운데 󰡔역경󰡕과 󰡔시경󰡕은 諸家의 텍스트가 각기 다르지만 字句나 訓詁에서의 차이일 뿐이거늘 󰡔상서󰡕만은 今文 28편과 古文 58편의 텍스트 자체가 다른데, 고문상서 가운데 금문상서에 없는 25편에는 의심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였다.47) 정조는 고문상서 25편을 僞書라고 보는 논거로, 첫째, 한무제 때 공안국이 고문상서를 秘府에 올린 이후 동진 때 매색본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점, 둘째, 秘府에 漆書竹簡으로 보관된 고문상서가 몇차례의 병화를 거치는 과정에 온전히 보존될 수 없었으리란 점, 셋째, 그 문체가 한결같이 文從字順하다는 점 등 세가지를 들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의 근거는 元의 吳澄의 文體辨僞說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48) 정조는 결코 모기령의 설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문상서를 전면 폐기하지는 않았으며, 모기령의 고문상서 옹호론을 간접적으로 참고하였다. 고문상서 25편을 僞書라고 하여 그 가치를 부정할 경우에는 「大禹謨」․「太甲」․「說命」․「周官」 편에 들어 있는 聖學의 핵심이 부정되므로, 주희가 고문상서를 의심하면서도 그 결론을 유보하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고문상서를 전면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가 모기령을 비판한 것은 會極之妙를 살려 정국과 학술계를 통합하려던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면 모기령의 주자 비판을 공박하여야 하였고, 지식층의 학문을 大用의 學으로 수렴시키기 위하여 모기령 이후 청대 고증학의 번쇄한 경학논의를 경계하였다.

Ⅳ. 북학파 학자의 모기령 경학설 수용

- 51 -

이른바 북학파의 학자들은 모기령의 고증적 경학설을 眞僞의 여부에 근거해서 從違를 결정하는 관점을 다소 지녔다. 특히 李德懋는 모기령 시의 ‘高華逸宕’을 좋아하여 󰡔淸脾錄󰡕에 佳句를 뽑아두었다. 또한 그는 모기령의 해박함을 사모하였다. 다만 그 말이 번다하고 六書에 밝지 못한 것을 흠이라고 여겼다.49) 모기령도 모기령의 인간적 결함을 비판하였다. 즉 󰡔앙엽기󰡕(3) 「毛奇齡駁忠臣」에서는 모기령이 자신의 훼절을 미봉하고자 충신을 논박한 저열한 심사를 상세히 논하였다.50) 顧炎武나 魏禧가 있었더라면 마땅히 침을 뱉았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덕무는 󰡔禮記臆󰡕에서 고염무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모기령의 설을 함께 참고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여러 곳에서 밝혔다.51) ① ‘三年問’ 조항에서는 고염무 󰡔일지록󰡕의 ‘二十五月而畢’說을 인증하고 按語를 붙여 ‘모기령의 설을 참고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기령의 설은 󰡔西河文集󰡕 권4에 수록된 「擬喪制以日易月議‘를 가리킨다. ② ’大學‘ 조항에서는 古本 대학설과 관련하여 모기령의 상세한 설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덕무는 󰡔앙엽기󰡕(6)의 ‘經書人物辨證’ 조항에서 모기령의 변증에 찬동하였다. 즉 모기령의 󰡔四書索解󰡕․󰡔四書謄言󰡕․󰡔春秋傳󰡕․󰡔四書謄言補󰡕․󰡔四書索解󰡕와 「答柴陛升書」가 경서의 인물을 고증한 것을 상세히 소개하고, “여러 선현이 다시 살아나 보더라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할 것이며 위로하고 사과하기에 바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덕무는 󰡔앙엽기󰡕에서 모기령의 설을 논평 없이 소개하거나 그 설에 따랐다.

① 󰡔盎葉記󰡕(2)에서 徐緘(자 伯調)의 「讀書說」을 소개하고, 서함의 근면함을 칭찬한 모기령의 「二友銘」을 각주로 인용하였다.

② 󰡔앙엽기󰡕(3)의 ‘博學鴻詞科’ 조항에서는 청나라가 명의 유민들을 포섭하는 방안으로 1678년(강희 17년)에 개설한 박학홍사과의 연혁을 서술하면서 모기령의 󰡔制科雜錄󰡕을 인용하였다. 모기령은 바로 강희 17년의 박학홍사과 출신으로 翰林院 檢討의 벼슬을 받았던 5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제과잡록󰡕은 그 시말을 스스로 적은 책이다.52) 이덕무는 강희 때에 制科한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 때에 성장하였으므로 모두 淸에 臣僕하지 않았으니, 박학홍사과 뿐만 아니라 다른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고 하여, 모기령 등의 훼절을 비판하였다. 다만 雍正과 乾隆 때의 사람은 명이 망한 뒤 1백년 동안에 태어났으므로 가혹하게 책망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③ 󰡔앙엽기󰡕(6)의 ‘孔子生卒’ 조항에서는 공자의 생졸 시기와 관련된 ‘근세 사람’의 설로 郭存․朱書의 설과 함께 모기령의 설을 논평 없이 소개하였다.

④ 󰡔앙엽기󰡕(7)의 ‘공(石貢)妃’ 조항에서는 모기령의 󰡔彤史拾遺󰡕(󰡔勝朝彤史拾遺記󰡕)53)를 인용하여, 명나라 영락 7년(1409)에 조선 여성으로 賢妃에 책봉되었던 權氏와 당시 조선 여성으로 位號가 드러난 여인들의 사적 및 賜祭의 사실을 기록하여 두었다. 또한 명태조의 비 공씨의 사적을, 朱彛尊의 󰡔靜志居詩話󰡕와 󰡔明詩綜󰡕을 인용하여 沈玄華의 「삼가 남경 봉선전에서 제사를 올리다(敬禮南都奉先殿紀事)」를 근거로 설명하였다. 모기령의 󰡔동사습유󰡕는 고황후 마씨가 成祖를 낳았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덕무는 󰡔靜志居詩話󰡕 󰡔명시종󰡕의 설에 좌단하여, 공비가 성조의 생모라는 설에 찬성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 52 -

⑤ 󰡔앙엽기󰡕(8)의 ‘慧通浚禪師’ 조항에서는 1691년(강희 30) 高麗寺에서 설법한 慈聖賢禪寺가 고려에서 불법을 얻었다고 기록한 모기령의 「慧通浚禪師塔誌」를 인용하고 고려사의 내력을 고증하였다.

⑥ 󰡔앙엽기」(8)의 ‘八股’ 조항에서는 모기령의 설을 전재하였다. 모기령은 󰡔制科雜錄󰡕에서, 팔고의 後股(원나라 제도의 경우)나 大結(명나라 제도의 경우)이 없어지고 高手들의 講章이란 것이 集註만 본받아 터럭만큼도 다르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한편 이덕무는 모기령의 설을 곳곳에서 ‘실증적으로’ 비판하였다.

① 徐有年(稼雲)에게 보낸 서신(󰡔아정유고󰡕)을 보면, 「堯典」의 ‘放勳’에 대하여 모기령의 설을 지지하였다. 모기령은 󰡔大戴禮記󰡕 「五帝德篇」에서 “帝堯는 高辛의 아들이니 방훈이요, 帝舜은 瞽瞍의 아들이니 重華요, 禹는 鯤의 아들이니 文命이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방훈’을 이름이라고 단정하고 요․순․우는 당시에 통칭한 호로 보았다. 이덕무는 다시 고염무가 요․순․우를 이름이라고 보았던 설을 인증하여 고염무의 설에 좌단하였다.

② 󰡔盎葉記󰡕(1)에서는 모기령의 「續詩傳鳥名」을 거론하여 그 득실을 논하였다. 모기령은 ‘睍睆黃鳥’에 대하여 주희의 󰡔詩集傳󰡕이 凱風篇의 주에서 ‘현환은 황조의 소리라 하고 또 淸和圓轉의 뜻이다’라고 한 것을 비판하고, 꾀꼬리는 엿보기를 좋아하므로 ‘현환’은 꾀꼬리의 눈을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集韻󰡕과 󰡔廣韻󰡕에 黃鳥=鶯이 黃 으로 되어 있어서, 현환이 눈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덕무는 이러한 설명을 수용하였다. 단 모기령은 󰡔주역󰡕 繫辭傳의 離卦爲目說과 󰡔상서󰡕 洪範 伏生傳의 五事說 가운데 目爲火說을 끌어다가 鸎이란 글자의 二目一八說(두 目자는 離가 둘이라는 뜻이고 하나의 八자는 부리를 가진 새의 유를 뜻하여 艮의 八을 가리킨다고 주장)을 부회하였다. 이덕무는 字書에 인용된 󰡔禽經󰡕의 말과 󰡔시경󰡕 小雅 桑扈篇 毛傳의 注文, 󰡔說文󰡕의 字訓을 끌어와 모기령의 자학이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 󰡔금경󰡕에는 鸎자가 ‘賏’자를 따르고 있다고 하였으니, ‘目’자를 따른다고 한 설은 잘못이다. ⓑ 󰡔시경󰡕 桑扈篇의 毛傳에 “鶯은 文章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鸎을 鶯으로 쓰는 것은 문장이 있음을 취하여 이름한 것인데, 모기령은 ‘머리에 두 개의 火를 이고 있다’고 고루한 설명을 하였다. ⓒ 󰡔설문󰡕에 “黃離는 倉庚이니 隹가 붙었고 음은 离이라”라고 하였으므로 괘명의 離는 창령의 離를 가차한 것일 뿐인데 모기령은 그것을 새이름에 관계시켰다.

③ 󰡔앙엽기󰡕(3) 「原憲燕伋字子思」에서는 모기령의 󰡔喪禮吾說篇󰡕을 인용하였다. 모기령은 檀弓篇에 기록된 ‘子思가 형수의 초상에 곡할 때 哭位를 만든 일’을 변증하면서 子思는 공자의 손자 孔伋의 字가 옳다고 논하였다. 이덕무는 다시 󰡔사기󰡕 「仲尼弟子列傳」을 검색하여 原思와 燕伋의 자가 子思라고 덧붙였다.

- 53 -

④ 󰡔앙엽기󰡕(4) 「經解目」에서는 모기령이 󰡔論語稽求錄󰡕 서문에서 侍衛 納蘭成德의 󰡔경해󰡕(즉 󰡔皇淸經解󰡕)가 ‘수만 권’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경해󰡕는 모두 144종 1,775권 5백책이라고 정정하였다. 이미 무술년에 涵齋 沈念祖가 연경에서 구득하여 와서 皆有窩에 소장해 두어, 자신이 열람하고 서목을 기록하였다고 하고, 그 서목을 상세히 열거하였다.

북학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박지원도 모기령의 인간적인 결함을 비판하였으나 그의 박학고증을 인정하였다. 즉 그는 󰡔西河集󰡕을 보고 모기령이 經典의 뜻을 考證한 데는 그럴싸한 의견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학자들과 필담을 하는 중에 그의 경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박지원은 󰡔鵠汀筆談󰡕에서 王民皥와 󰡔논어󰡕의 “태백은 세번이나 천하를 사양했다”는 말의 진위에 대하여 논란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인용하였다. 왕민호는 당시 紂王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古公은 附庸國에 불과하므로 태백이 천하를 세 번씩이나 양보했다는 말은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는 주희(《集注》)가 季歷의 아들 昌(주 문왕)에게 태어나면서부터 거룩한 덕이 있어서 太王(古公의 묘호)이 殷을 멸망시킬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풀이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기령을 雷公이란 별명으로 부르며,54) 모기령을 망령된 사람이라 지탄하였다. “그의 문장도 역시 교할한 백성[刁民]의 疏章과 같은 점이 많습니다. 모기령은 蕭山 사람이어서 그 지방은 글하는 아전들이 많아 글장난을 잘하므로 안목 가진 사람들은 모를 지목하여 蕭山氣를 벗어나지 믓했다고 합니다.” 박지원도 태백의 일에 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고 하였으나, 모기령의 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 54 -

한편 󰡔銅蘭涉筆󰡕에서 박지원은 毛詩序의 從違 문제를 논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분석하였다. 박지원은 玩亭 王士禎이 小序를 없앨 수 없다고 한 설에 동의하였다. 또한 朱彛尊(호 竹垞)의 󰡔經義攷󰡕도 인용하였다. 주이존은 「木瓜」․「子衿」․「野有蔓草」 등의 소서를 주희가 폐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박지원은, 주희는 실상 소서를 많이 이용하되 유독 鄭․衛의 시만은 󰡔논어󰡕에서 “鄭聲을 버리라”고 한 말에 근거하여 모두 음탕한 시의 부류에 남겨 두었다고 비판하고, 모기령이 鄭詩는 음탕하지 않다고 한 설에 동의하였다. 다만 박지원은 󰡔宋史󰡕 「儒林傳」에서 王栢이 시경 삼백 편의 산정에 漢代人의 증보가 있었으리라고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보아, 小序에 漢代人의 傅會가 있었으리라고 유보하였다. 박지원은 또 翰林 彭齡과 太史 高棫生과 함께 段家樓에서 小序의 문제를 힐문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박지원은 詩篇風謠說을 주장하였는데, 중국인들은 소서를 중히 여기는 편이었다. 박지원은, 馬端臨․毛奇齡․朱彛尊 등에 이르러 주희를 비판하는 것이 극심하였고, 당시에는 아주 時義로 되어 버렸다고 파악하였다.

연경에서 돌아와 박지원은 연암골에서 󰡔열하일기󰡕를 정리하면서 望洋錄과 󰡔혹정필담󰡕을 校閱하다가 <審勢編>이란 義例를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서 터놓고 주희를 반박하는 자를 만나거든 함부로 배척하지 말고 그 속내를 탐색하라고 하였다. 淸朝는 주희를 十哲의 열에 올리고 주희의 도덕을 帝室의 家學이라고 선언하였다. 박지원은 그것을 두고, 淸朝가 중국의 대세를 살펴 先占해서 온 천하 사람의 입을 재갈먹이는 일일 뿐이라고 보았다. 淸朝는 주희의 攘夷 사실을 알고 宋 高宗이 《春秋》의 정의를 알지 믓하였다고 배격하였고, 秦檜가 강화를 주장한 죄악을 성토하였다. 또 淸朝는 주희가 모든 글에 集注한 것을 보고는 곧 圖書集成과 四庫全書 등을 만들고 ‘주자가 끼치신 宗旨’라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사대부의 사상을 억누르고자 고식적으로 주희의 학문을 높여서 중국 선비의 사상을 약체화시키고 지식인들을 문자 교정의 사무에 골몰하게 하였다. 購書의 災殃이 焚書에 비해서 심하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기령이야말로 ‘주자의 충신’이라 하거나 “衛道의 공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자의 도덕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오른 것과 같아서 세계 만국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이거늘 저 황제가 사사로이 숭배했다 한들 주자에게는 아무런 누가 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비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대체로 저 황제가 주자를 거짓 높여서 세인을 억누르려 하는 資具로 쓰는 데에 격분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끔 한두 가지 集注의 그릇된 곳을 빙자하여 백년 동안의 번민하고 원통한 기운을 씻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주자를 반박하는 자는 실로 옛날 陸氏의 학문을 하는 이와는 차별이 있다.”55)

Ⅴ. 소론계 학자의 漢學 수용과 모기령 경학설 참고

- 55 -

정조 때 소론계 관각문인이자 학자였던 徐瀅修(1749~1824)는 明淸의 ‘訓詁名物學’을 수용하여 程朱學의 결락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는 그는 모기령의 정주학 비판을 참고로 하였다. 다만 모기령의 논설이 지리한 데로 빠졌다고 억누르기를 잊지 않았다.56) 그는 󰡔西河集󰡕에 제한 글(「題毛西河集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程朱學은 위로 孔孟에 접하여 오랫동안 斯文의 正脉이어 왔으나 名物訓詁에서는 혹 검색을 잘못하거나 대조를 못한 과실이 없을 수 없으니, 後人이 빈틈을 보수하는 것은 실로 程朱가 후인들에게 바라는 바였다. 비록 주자가 걸음마다 程子를 따랐지만 󰡔주역󰡕․󰡔시경󰡕․󰡔논어󰡕․󰡔맹자󰡕에서는 전적으로 程子를 따른 것은 아니었고, 󰡔대학󰡕․󰡔중용󰡕에서는 程子를 받듬이 아주 돈독하였지만 정정한 것도 아주 많았다. 대개 크나큰 근본을 마음으로 체득하여 이어받았기에, 章次와 文義에서 각자 지닌 의견은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程朱에서 나온 말이라면 털끝만큼도 감히 의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은 정말로 남송 이후 유가의 말폐이다. 그런데 이 󰡔毛西河集󰡕의 경우는 考證의 巨觀이자 宏博의 上乘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툭하면 매도하는 爭心과 勝氣는 남을 해꼬지하려는 본색을 가릴 수가 없다. 무릇 名理는 천하의 公物이다. 그것을 젠 체해서 立言한다면 本領이 이미 잘못된 것이다. 비록 만가지 말이 모두 다 들어맞는다고 하여도 屠家에서 禮佛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자는 정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瑚璉에 대해 夏의 것을 殷의 것으로 바꾼 것이라든가, 農家에 대해 班固의 설을 司馬遷의 설이라고 바꾼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따위이니, 누가 잘못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주자의 주자됨에 손상이 가겠는가! 옛날에 陳大章은 󰡔通鑑󰡕에 익어서, 그 빠지고 잘못된 부분을 찾아 辨駁하는 글을 지어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그 친구가 말하였다. “이렇게 소모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밑에 ‘응당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註를 다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우주간의 몇몇 大作은 父祖의 遺訓과 같아서, 만일 우연히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우리는 ‘그때 그렇게 기억해두었다’고 해야 하지, 만약 강직하게 변증하려 한다면 立言의 體가 아니다.” 󰡔통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經傳 箋注의 경우에랴? 이러한 풍조가 한번 열린 뒤 폐단이 더욱 만연하였다. 근래의 유자로 이름난 자들은 程朱書를 읽으면서 義理의 精純한 곳에 대하여는 한번도 그 울타리조차 엿보지 않고, 人名․地名․度數와 관련된 글구가 한두가지 訛傳된 것을 만나면, 미친 듯 크게 떠들어대면서 종이 몇 장을 써내려가도 그치지를 않고, 이것으로 주자에게 대항하려 하니,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함이 너무 심하다. 그런데 그 기원을 궁구하면 모두 西河가 처음으로 인형을 만든데서 비롯한다. 궁극에까지 논한다면 西河가 어찌 斯文의 賊임을 면할 수 있으랴!57)

- 56 -

서형수는 모기령이 斯文의 賊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주학의 義理精純處를 살피는 일이 긴요한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吾於尊朱, 自有平生血誠”이라고까지 하였다.58) 그러나 그는 정주학 심성론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시경󰡕과 󰡔상서󰡕의 설에서 名物訓詁學을 중시하고, 古注를 掇拾하는데 공력을 기울였다. 󰡔詩故辨󰡕에서는 毛傳과 集傳을 倂錄하고 古今의 諸說을 취하여 篇旨를 발명하고자 한다는 의도를 밝혔다. 毛傳의 설을 적극 취하여 󰡔詩集傳󰡕의 설을 절충하고자 한 것이었다.

徐瀅修는 1791년 초계문신 친시 및 반유 응제에서 정조가 「俗學」이란 제목의 책문을 내걸었을 때 그 뜻을 헤아려 「俗學十韻排律」59)을 지었다.

- 57 -

康成(鄭玄) 이후로는 康成같은 이 없어

말만 늘어놓거나 글품 팔아 일생을 마친다만,

이것은 모두 오래된 담벼락에 귀뚜라미 우는 격이라

가을 지렁이마냥 분분하게 빈 굴에 메아리 울릴 뿐이지.

성왕의 공덕은 二程과 朱子의 가르치심 따랐고

王制도 馬融과 鄭玄의 주석 따라 밝아졌도다.

공자 구택에서 古文經이 먼저 나왔고

汲塚의 科斗 문자도 진작에 행하였다.

이런 전통에 어두워 명물에만 빠져서는

새 학문이란 칭찬에 舌耕을 일으켜

丹鉛으로 논함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리저리 함부로 黃妳(책)을 평가하다니.

하나라도 합당한 것 없으면 내려깔아 보고

반푼도 못미치면서 큰 소리쳐

經解로 헐뜯지만 모두다 엉성하고

疏家가 인증하는 것도 번번이 식은 죽일 뿐.

우박 보고 아이들 떠드는 말이 우습고

가난뱅이가 옷자랑하니 얼굴이 붉어온다.

습속이 근래에 고질로 되었기에

영명한 조칙으로 표준 내리시길 기다리노라.

康成以後無康成, 飣餖賃傭了此生.

渾是寒蛩唫老壁, 紛如秋蚓響空坑.

聖功已有程朱訓, 王制亦因馬(原註 : 馬貴與)鄭(原註 : 鄭漁仲)明.

孔宅古文先我出, 汲墳科斗自前行.

迷茫墜緖惟名物, 僥倖新譽起舌耕.

甲乙丹鉛何太易, 縱橫黃妳妄加評(原註 : 昔人呼書爲黃妳, 以爲老人耆書如穉子之須妳.)

一無中有尙低視, 半不及他敢大聲.

經解訾謷皆粗跡, 䟽家援引每陳羹.

羣兒咻雹言堪笑, 窮子誇衣面發騂(原註 : 羣兒咻雹, 窮子誇衣, 皆出錢虞山語.)

習俗邇來成痼弊, 會須明詔目示權衡.

서형수의 조카 徐有本도 楊愼과 毛奇齡 이하 明淸의 諸儒가 考證之學에 自托하여 “輒欲凌駕前賢, 高視千古”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60)

徐有本의 아우 徐有榘는 「與李愚山論尙書古文書」에서 역대 문헌을 조사하여 고문상서의 종류를 나열하고, 梅賾本 고문상서가 僞作임을 논하였다. 그는 모기령의 󰡔고문상서원사󰡕가 고문상서를 변호하려고 󰡔한서󰡕 儒林傳을 인증한 내용이 잘못임을 반박하였다.61) 서유구는 정조의 詩經條問에 條對에서 1727년(雍正 5)에 청에서 간행된 󰡔欽定詩經傳說彙纂󰡕(20권)을 인용하는 등 청의 학술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조 때의 󰡔四書輯釋󰡕 登刊과 관계하여 仲父 徐瀅修에게 보낸 서한에서, 청의 欽纂本 등을 참고로 ‘十三經傳說’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로하였다. 즉 󰡔易󰡕은 󰡔折中󰡕을 이용하고, 󰡔詩󰡕․󰡔書󰡕․󰡔春秋󰡕는 󰡔彙纂󰡕을 이용하여, 三禮는 󰡔義䟽󰡕(欽定本)를 이용하여 더욱 檃栝하고, 󰡔孝經󰡕․󰡔爾雅󰡕도 그런 방식을 준용한다. 󰡔대학󰡕․󰡔중용󰡕은 󰡔禮記󰡕로 되돌려 넣고, 󰡔左傳󰡕․󰡔穀梁󰡕․󰡔公羊󰡕은 각각 單行한 뒤, 각각 󰡔註䟽󰡕를 前編으로 삼고 󰡔傳說󰡕을 後編으로 삼으며 諸儒의 箚解를 망라할 것을 권하였다.62) 그는 정주학을 회복하기보다, 청조의 신 학술을 받아들여 절충적인 주석서를 편찬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 58 -

한편 소론계 江華學派의 학자 石泉 申綽은 三次故를 저술하여 古訓을 망라하였다. 그는 당대의 학술이 西河 毛奇齡에 쏠리고 있다고 하여 그 편향성을 비판하되, 주자학이 아니라 樸學(朴學)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그의 󰡔시차고󰡕는 毛詩說 이외의 三家詩說을 취록하였으며, 齊魯韓의 어느 설에 속하는지를 밝히려고 하였다.63) 그런데 그는 唐의 劉安世가 읽었다는 齊詩, 董逌의 󰡔藏書志󰡕에 있는 齊詩 6권, 豊坊이 발견했다는 子貢詩와 申培詩가 모두 위작이라고 하였다.64) 豊坊本 자공시와 신배시가 위작임을 단정한 것은 모기령의 설을 참고한 결과라고 짐작된다. 그는 古注를 광범하게 수집하여 경전의 원뜻에 접하고자 하는 일을 경학 연구의 과제로 삼았다. 이 때 경문을 改易하지도 않고 己見의 피로를 극력 억제한 일은 모기령이 綱領처럼 제시한 治經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신작 󰡔시차고󰡕의 본편(「詩經故訓及異議」) 5책은 注疏本의 체재를 따라 風雅頌을 배열하고 章句를 나누되, 篇名은 注疏와는 달리 각편의 앞에 두었다. 그는 小學類에서 고훈을 인용하고 󰡔예기󰡕․󰡔좌전󰡕․󰡔사기󰡕․󰡔한서󰡕․󰡔후한서󰡕․󰡔문선󰡕을 2차로 인용하였으며, 다시 경사자집․잡가의 서적을 두로 인용하였다. 「詩經異文序」에 보면 그는 󰡔시경󰡕의 異文이 있게된 이유를 古今․假借․隸變․音轉․形轉․義轉․涉誤․師讀․俗寫․方音등 10族으로 나누어 보았다. 雅學을 토대로 하는 박학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역차고󰡕(8권 3책)를 편찬하여 漢注를 수록하되, 󰡔本義󰡕가 권두에 실었던 易圖를 전혀 싣지 않았고 ‘大衍之數’의 注에서도 선천도․후천도와의 관련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기령의 송역 비판설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신작의 樸學도 훈고적 과심에 머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경전의 원뜻을 파악하고 그것을 인간학에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宋學을 ‘解體’하려 한 것이었다. 신작은 ‘次故’의 작업에서 박잡한 인증례의 나열로 그치지 않고 古註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正義를 남겨두려 하였다. ‘以故訂故’를 통해 經義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려한 것이 그의 治學 방법이었다.

Ⅵ. 노론계 학자의 宋學 재해석과 모기령 비판

- 59 -

정조조의 초계문신을 거쳐 19세기 전반의 京畿學人으로서 활발한 저술을 하였던 洪奭周(1774~1842)는 宋學의 경세적 요소를 부각시키고 발전시키려는 과정에서 모기령을 비판하였다.

홍석주도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모기령의 인격을 비판하였다.65) 하지만 그는 모기령의 경학설을 내재비판하여 그 고증학적 연구성과를 수용한 면도 있다. 즉 그는 󰡔주례󰡕가 周公의 작이 아니라고 하여 󰡔주례󰡕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주례󰡕의 작가에 관한 그 설은 모기령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는 󰡔주례󰡕의 傳授 관계가 불분명하여 劉歆 이전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고, 󰡔주례󰡕의 제도에 의심나는 점이 많으며, 그 내용이 다른 경전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고 하였다.66) 홍석주는 초계문신 시절의 課試 「今古文辨」 답안에서, 25편을 僞古文이라고 보는 설에 반대하였다. 그는 주희가 의심한 고문은 經의 본문이 아니라 「孔安國傳」이었고, 한두 구절의 補綴은 있었겠지만 25편 전체가 위작일 리는 없다고 하였다.67) 이것은 명백히 모기령의 󰡔古文尙書寃詞󰡕 설을 수용한 것이었다. 1824년에 이르러 홍석주는 󰡔尙書補典󰡕을 저술하면서 금고문에 대한 종래의 설을 다소 수정하여, 「舜典」 서두의 28자가 隋文帝 때의 위작이라고 논하기에 이르렀다.68) 그러나 그는 󰡔상서󰡕의 금문과 고문이 모두 불완전하므로 󰡔상서󰡕의 모든 구절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성인의 가르침이 많이 들어 있고 六經에 포함되어 있던 고문을 전면 부인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827년에 정약용과 금고문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선왕의 교훈이 담겨 있어서 世敎에 도움이 되는 고문을 그대로 남겨두자고 하였다.69) 그는 모기령의 고문상서설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아, 만년에 이르도록 부분적인 수정론에 머물렀다.

- 60 -

하지만 홍석주는 근본적으로는 청의 고증학적 방법론을 비판하였다. 즉 古書를 이해하기 위하여 名物訓詁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고증학이 경전의 大義와 무관하게 고증 자체에 치중하는 점을 비판하였다.70) 그리고 명물훈고의 방법은 이미 송학 속에 내재하여 있었으며 그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鶴岡散筆󰡕의 권5와 권6의 상당한 지면을, 모기령 경학설의 결함을 논하는 데 배당하였다. 즉 ① 모기령은 堯의 행적을 簒逆으로 보았으나, 이것은 異端의 짓이다. ② 모기령은 명청 교체기의 義士들을 狂惑하다고 평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다. ③ 모기령은 《春秋》 이전에 五倫에는 父․母․兄․弟․子만 있었고 君臣․夫婦의 윤리가 없었으며 오늘날의 오륜은 전국 이후에 맹자가 처음 언급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先賢을 모욕하고 經訓을 그르치는 망발이다. ④ 모기령은 古訓이나 經義를 빌려 私見을 강변하고 고훈의 인용에도 오류가 있으며 朱子書는 아예 변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心術이 不正한데서 나온 것이다. 홍석주는 모기령이 畢沅과는 달라 程朱 이하의 先賢을 비난하였다고 하되,71) 역시 선현을 ‘侵詆’하기를 능사로 삼아 ‘醜悖無倫’하다고 혹평하였다.

홍석주는 모기령의 인간적 결함에 초점을 두어 그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또한 모기령 경학설의 眞僞를 화두에 올리지도 않았다. 홍석주는 송학의 義理實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기에, 그러한 정신을 결여한 번쇄한 고증적 방법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홍석주와 인척 관계에 있었고, 안동김씨 노론계의 가학을 이은 金邁淳(1776~1840)도 송학의 의리실용학을 중시하고, 모기령 이하 고증학의 治學 방법을 극력 비판하였다. 그는 37세 때인 1812년에 󰡔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를 완성한 것으로 저명하다. 만년에는 경학 관련 수필집인 󰡔闕餘散筆󰡕을 적어, 誠篤의 학문 자세를 다잡았다.72) 즉 그는 “배움이란 다름 아니라 善을 실천하는 것”이며, 善의 실천은 “반드시 탐구하고 강습하며 오랫동안 쌓고 배양하여 道理가 눈에 익숙해지고 취미가 자신의 몸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致知存心이 力行보다 앞에 놓인다고 보아 그것을 ‘學의 體’라고 하였으며, 일마다 中節之和를 얻는 것을 ‘學의 用’이라고 하였다.73) 그는 주자학을 맹신하지는 않았고 의리의 개념을 확장시켰으며, 新注를 부분 수정하였다. 하지만 章句訓釋의 의문점을 강론하는 일은, 그로서는 결국 體用을 겸하고 條理를 아우르는 진정한 학문에 대해 방편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다. 장구훈석의 眞僞를 화두에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 61 -

김매순은 당시의 학자들이 걸핏하면 漢儒의 업적을 칭찬하고 주희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古註를 순수하게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희가 존숭하던 第一義的인 것을 도외시하여, 결국 송학도 아니고 한학도 아니라 私見에 빠지고 말았기에, 實事求是의 진정한 학문 태도를 상실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74) 그로서는 解經의 어려움은 訓詁章句에 있지 않고 立言宗旨를 살피는 데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보낸 서한에서, “明淸 이래로 才氣가 좀 있다고 뽐내어 朱子를 專心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毛氏나 鄭玄을 떠받들고 스스로 古雅하다고 하면서, 章句集註는 功令俗學에게나 관계한다고 결론짓고 오만하게 깔보는 것을 高致하다고 여긴다. 그 心志와 眼界가 일찌감치 偏蔽되어 공정하지 못하니, 어찌 虛明하여 金鐵珉玉의 분간에서 또렷히 오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하였다.75) 이것은 정약용의 治學이 속학의 폐습을 띠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지만, 결국 章句集註를 기본으로 하고 宋學의 治學 방법을 계승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평소의 지론을 피로한 것이었다. 그가 四庫書目을 열람하고는, 그것이 程朱를 游辭陰攻하였다고 경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76)

홍석주는 구체적으로 모기령의 경학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명청 이래로 才氣가 좀 있다고 뽐내어 朱子를 專心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였을 때 모기령도 염두에 두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淑人心, 致時用’이 학문의 지향처라고 보아, 顧炎武도 만년에 자신의 학문을 후회하였다고 하였고, 모기령이나 閻若璩․胡渭는 ‘往而不返’한 자라고 비판하였다.77) 심지어 그는 고의로 모기령의 경학설을 무시하였다. 역학과 관련하여 “近世說易之士, 惟李光地一人, 可以上下, 餘皆不及也”라고 논단하여 모기령의 󰡔중씨역󰡕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그 일례이다.78)

홍석주와 김매순의 예를 통하여, 노론계의 이른바 京畿學人이 義理之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모기령 이하 명청의 고증적 경향의 학자들을 경계하거나 무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Ⅶ. 丁若鏞의 모기령 경학연구법 참조와 신 경학방법론 수립

- 62 -

18세기 말, 19세기 초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도 모기령의 경설을 숙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약용과 문학적 실천 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洛下生 李學逵도 󰡔因樹屋集󰡕에 수록된 尺牘 가운데 한 편에서 모기령(「詩說」)의 ‘睍睆黃鳥’ 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詩集傳󰡕이 그것을 ‘淸和圓轉之意’로 풀이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었을 것이므로 󰡔시집전󰡕의 설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79)

그런데 남인 지식인 가운데 모기령의 경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그 경학연구의 방법을 일정하게 채용한 인물은 茶山 丁若鏞(1762~1836)이다. 그는 초계문신 시절에 경학 강의에 참여하여 주희의 설과 주희 비판의 설을 대조 논단하는 일을 한 일이 있어, 그 때부터 모기령의 설을 철저히 분석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정약용은 32세때 지은 「古詩二十四首」의 제21수에서 “천하에 터무니없는 남자라면 나는야 모기령을 보았고 말고. 자기 보루 드높이 쌓아 올리고, 주자를 향해 활을 당기다니. 샅샅이 찾고 뒤져 흠 하나 잡아선, 이리저리 날뛰는 게 원숭이같았다. 마음 바르고 말도 공손하다면, 경전을 논하지 못한단 말인가.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본들, 잎사귀 하나라도 떨어진 적 있는가(天下妄男子, 我見毛奇齡. 突兀起壁壘, 關弓對考亭. 窮搜摘一疵, 踊躍如猴정. 平心遜其詞, 獨不能談經. 蚍蜉撼大樹, 一葉何曾零)”80)라고 하였다. 모기령은 翰林院 檢討官으로 있을 때 妾 曼殊를 위해 「曼殊藏銘」과 「曼殊別誌書罇」을 남겼는데, 정약용은 「跋曼殊傳」을 지어 “風情의 妙를 극도로 서술하고 孅濃한 자태를 다 갖추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고 간장을 녹게 하므로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다”고 비난하였다. 모기령은 만수를 糟糠之妾이라 불렀고, 自撰墓誌銘에서도 그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정약용은 또 모기령이 지은 「連廂詞」가 체제는 󰡔西廂記󰡕를 닮고 글은 󰡔金甁梅󰡕를 닮았으니, 儒者로서 어찌 이런 것을 지을 수 있었단 말이냐라고 개탄하였다. 「連廂詞」란 모기령이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고 名敎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擬連廂詞」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모기령이 “망녕되이 주자를 공박하였으나 이는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논하였다.81) 인간과 학문과 시문을 불가분리의 것으로 보는 입장이 조선후기 학자-문인의 지배적 문학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비판한 모기령의 「曼殊別誌書罇」은 청초의 張潮가 편찬한 󰡔虞初新志󰡕에 수록되어 있어서 조선후기에 널리 읽혔다.82)

- 63 -

(1) 정약용은 모기령의 역학이론을 비판하여 「題毛大可子母易卦圖說」을 지었다. 정약용은 󰡔左傳󰡕의 일부 卦 해석과 虞翻의 역학을 개괄하여 推易․物象․互體․爻變의 법칙을 새로 해석하고 독특한 十二辟卦說을 운용하였다. 즉 󰡔周易四箋󰡕에서 易卦를 乾坤과 12벽괘와 50衍卦로 나누고 12벽괘를 다시 四時之卦와 再閏之卦로 나눔으로써 程伊川의 乾坤二辟卦說이나 朱子의 十辟卦(乾坤除外)說에 반대하되, 경방의 分卦直日法은 취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종래 역학자의 推易․物象․互體․爻變說을 비판하였는데, 모기령의 子母易卦說도 함께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모기령이 推移의 의의와 爻變의 법칙을 모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모기령은 宋易을 극복하는데 공을 기울였으니, 정약용의 역학설은 모기령의 역학설을 일정하게 수용한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정약용의 역학은 송대의 관념론이나 도가 사상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儒家易을 탐구하고자, 독자적인 推易․物象․互體․爻變說을 수립하여 역해석 전반에 적용하였다. 그는 易의 생활세계적 기반과 의미를 탐색하였으며, 개인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체제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이념을 易學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83)

- 64 -

(2) 정약용은 梅賾本 고문을 위고문이라고 보아, 모기령의 󰡔古文尙書冤詞󰡕를 비판한 󰡔梅氏書平󰡕을 저술하였다.84) 모기령은 고문상서 경과 공안국 전을 구별하여 東晉 때 梅賾이 헌정한 것은 공안국 전이었다고 하여, 고문상서의 경이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정약용은 󰡔매씨서평󰡕에서 그 설을 摘記하고, 臆說이라 비판하였다. 그 뒤 1827년에 洪奭周가 소장한 閻若璩의 󰡔古文尙書疏證󰡕을 빌어보고 자신의 󰡔매씨서평󰡕을 없애도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염약거의 저술이 義例를 갖추지 못하고 眞古文과 僞古文을 뒤섞었으며 上下를 착간하고 禮樂․刑政․地理․曆法 등을 애매하게 처리하여 초학자가 이치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즉 정약용은 염약거의 󰡔소증󰡕이 吳棫 이후 처음으로 위고문을 변증한 주요한 업적이지만 모기령이 여전히 舞弄하고 宋鑑이 󰡔尙書考辨󰡕을 저술하여 疊牀하였던 것은 오로지 󰡔소증󰡕의 義例가 정돈되어 있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閻氏古文尙書疏證鈔󰡕를 작성하고, 다시 1834년에는 유배지에서 작성한 󰡔古訓蒐略󰡕과 󰡔尙書知遠錄󰡕을 합하여 󰡔尙書古訓󰡕을 엮었다. 정약용은 관련 자료의 校合과 변증에서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고, 體例 연구법을 활용하여 書序와 상서 경문의 原義를 탐구하려 하였다. 󰡔상서고훈󰡕에서는 考異, 考誤, 考證, 考訂, 考辨, 論曰․訂曰, 衍義 등 표출어를 사용하여 訓詁와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그가 書序의 完缺과 眞僞를 분별하고 원의를 추정할 때에 體例硏究法을 원용한 것은 모기령 이래 청대 문헌고증학의 방법을 참조한 측면이 있다.

(3) 정약용은 「題毛奇齡喪禮吾說篇」을 지어 모기령의 三禮에 대한 기본시각을 논박하였다. 그는 󰡔周禮󰡕의 문체가 아주 고고하므로 결코 춘추시대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주례󰡕를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이라 논하였던 모기령의 설을 반박한 것인데, 현대의 통설과는 견해가 다르게 되었다. 또 󰡔禮記󰡕에 대하여도, 그것이 공자 이후에 子游․子夏의 문인으로 公羊․穀梁같은 무리가 각각 옛날에 들은 것을 기술한 것이라고 하여, 모기령의 漢初成立說을 부정하였다. 모기령의 경학설이 종전의 학설을 뒤집는 懷疑에 철저하였던 데 비하여, 정약용은 尙古와 衛道의 정신에서 󰡔周禮󰡕를 주공의 작으로 존숭하고 󰡔禮記󰡕를 선진시대의 저술로 소급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4) 정약용은 󰡔시경󰡕 국풍과 二雅를 ‘군주를 풍간하는 시’로 규정하였다.85) 그런데 그가 이렇게 시경을 ‘諫書’로서 파악한 것은 모기령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다. 1791년에 반급된 정조의 시경조문에 답한 정약용의 條對86)는 주희의 鄭風淫詩說을 비판하는 모기령의 설을 수용하였고, 또 󰡔시집전󰡕 논리의 비판 방식도 모기령으로부터 얼마간 영향을 받았다. 다만 모기령은 諫書說을 더욱 논리화하지는 않았고, 陳詩觀風說을 고집하여 주희의 鄭風淫詩說을 비판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하여 정약용은 󰡔시경강의보유󰡕에서 국풍과 二雅의 ‘諷人主’ 양식을 분류하였다. 또한 󰡔시󰡕 내용이 지닌 풍자의 철저성을 들어 “시인(시경시편의 작자)의 직필이 󰡔춘추󰡕보다도 더 엄하여, 자기 나라의 나쁜 일도 감추지 않았고 강한 자 앞에서 움츠러드는 일도 없다(詩人直筆, 嚴於春秋, 不諱國惡, 不吐彊禦)”고 하였다. 이처럼 풍자가 엄하였으므로 연회 때나 향당에서 국풍의 시들을 진설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결론이었다.

- 65 -

정약용은 국풍의 시들은 ‘諷人主’의 시로 규정하고 小序의 美刺說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小序를 신봉한 呂祖謙(呂氏家塾讀詩記, 四部叢刊本 권5 ‘桑中’)은 풍자의 방식을 ① 직접 비판하는 것(‘新臺’ 등) ② 은근히 풍자하는 것(‘君子偕老’ 등) ③ 사실을 서술하기만 하고 한마디도 풍자의 말을 덧붙이지 않되 뜻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桑中’ 등)의 셋으로 나누었다. 주희는 小序가 어느 때 어느 사람을 美刺한다고 한 설에는 견강부회가 많다고 보았고, ‘옛일을 진술하여 이제를 풍자한다’(陳古刺今)는 원리를 소서가 무책임하게 사용한 것은 ‘온유돈후’의 가르침을 해친다고 논하였다.87) 정약용은 시편을 실제 비평할 때 대부분 小序와 新注를 그대로 따랐다. 다만 그는 주희가 ‘陳古刺今’설을 배격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원리를 알아야만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본래 小序의 ‘陳古刺今’은 시경의 편차가 시대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해당 시기의 王公이 善行을 한 기록이 없고 나쁜 시호가 붙여져 있을 때 적용하는 원리였다. 정약용은 시편의 世次와 관계없이 ‘陳古刺今’설을 적극 도입하려 하였다.88)

(5) 한편 정약용은 모기령의 樂論이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緯家의 雜法을 청산하지 못하였으며, 史籍의 문장을 임의로 끌어오고, 六律을 五聲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모기령이 지은 󰡔聖論樂本解說󰡕․󰡔皇言定聲錄󰡕․󰡔竟山樂錄󰡕 등의 樂論 數種을 유배지에 가지고 가서 그 내용을 심리하였다.89) 그리고 󰡔樂書孤存󰡕을 집필하여, 五聲의 체계인 五聲九差圖와 十二律의 체계인 三紀六平(紀之以三, 平之以六)을 양분하고, 독특한 三分損益論을 마련하였다.90) 그는 종래 律을 吹律(吹律定聲)로 해석해 오던 관점을 비판하고, 律을 差等之約例로 규정하였다. 한편 聲은 악기를 두드린 뒤에 나오는 소리로서, 율의 체계에 의하여 악기를 제작한 이후에 오성을 분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 설에 따르면 律은 樂家의 先天, 聲은 樂家의 後天으로 구분된다.

- 66 -

(6) 정약용은 󰡔論語古今註󰡕에서 新舊註를 審定하면서, 일본의 太宰純의 󰡔論語古訓外傳󰡕과 함께 모기령의 論語說을 가장 많이 거론하고 辨駁하였다. 그리고 󰡔孟子要義󰡕에서도 청대 학자 가운데 모기령의 설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大學要義󰡕에서는 모기령의 설을 서너 곳에서 반박하였으나, ‘고본대학’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는 모기령의 견해와 같았다. 󰡔中庸自箴󰡕에서도 정약용은 모기령의 설을 간간이 인용하였다.91)

만년에 이르도록 정약용은 모기령에 대한 반감을 삭이지 못하였다. 1821년에 두 번째로 춘천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汕行日記󰡕에 보면, 4월 21일에 史外倉92)의 放量을 목격하고 지은 「곳마을에서 잠시 쉬며」(倉村小憩)라는 시93)에 自註를 하면서 일부러 모기령을 언급하였다. 즉 그 날 양곡을 푼다고 해서 산간 백성이 수십여 명 모였으나, 官倉에 곡식이 결손된 것이 많아 그저 이름만 방량한다 하고 결손을 彌縫하는 데 불과하다고 정약용은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로부터 “중국 蕭山의 縣吏는 법령을 제마음대로 주물렀다”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춘천도호부의 아전들이 방량을 빙자해서 장부상의 결손분을 메꾸려 하는 작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鵠汀 王民皥가 “모기령에게는 蕭山氣가 있다”고 비판한 말을 함께 따왔다.94)

정약용은 모기령이 程朱와 背馳하기를 甘心하여 ‘狂悖偏隘, 非復常理’95)하였음을 공박하고, 그의 경학설이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경학에 끼친 모기령의 영향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그가 樂論에 이르기까지 六經=六藝의 경학설을 구비하고자 하였던 데는 역시 모기령과의 대결의식이 없지 않았다.96) 정약용은 「喪禮四箋序」에서 “以經證經, 期得聖人之旨”라 하여, 경문의 실제 용례로 경문을 해석하는 경학방법론을 수립한 바 있다. 그 방법론은 바로 송학의 관념론적 논리를 배격하고자 모기령이 주장한 ‘以經解經’의 방법론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듯이 여겨진다.

- 67 -

또한 정약용이 自撰墓誌銘을 지어 경학상의 創新을 특기하고 金邁淳 등 당대인의 예찬을 부기하여 둔 것은, 비록 심리의 正不正은 전혀 다르다고 할지라도, 모기령이 묘지명을 자찬하고 당대인의 평가를 부기한 방식과 흡사하다.

Ⅷ. 마 무 리

18세기 중엽에 모기령의 경학설이 소개된 이후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그 경학연구 방법에 자극을 받되, 그의 治學의 근본지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朴趾源은당시 淸朝가 주자학을 聖學으로 내걸어 학술사상을 통제하던 상황이기에 모기령 이후 발달한 고증학이 주자학을 비판하는 것은 곧 청조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를 지녔다고 논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정조는 會極之妙를 살려 정국과 학술계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인하고자 모기령의 주자학 비판을 반격하였고, 지식계층의 학문을 大用의 學으로 수렴시키고자 모기령 이후 청대 고증학의 경학논의를 경계하였다.

- 68 -

한편 李德懋는 일부 모기령의 경설을 그 眞僞에 따라 취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기령이 입만 열면 程朱 이하 모든 송인들의 죄악을 비판한 것은 바로 자신이 죄악의 구덩이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盎葉記󰡕(2)에 「榕村衛程朱」 조항을 두어, 李光地가 “지금 사람들은 程朱의 글을 읽으면서도 정밀 순수한 도리를 말한 곳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지명․인명이나 제도가 우연히 소루하거나 틀리게 기재된 데 대해서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큰 일로 삼고서 미친 듯이 소리치고 크게 외치며 여러 폭의 종이를 소비해 마지 않으니, 비록 그 말한 것이 옳다 하더라도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고 한 말에 동의하였다. 이광지의 비판은 바로 명의 楊愼과 毛奇齡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보았다. 모기령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조선 경학계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洪奭周와 金邁淳 등 노론계 京畿學人이 義理之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모기령 이하 명청의 고증적 경향의 학자들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 그 정통 계보에 속한다. 丁若鏞도 한학과 송학을 두루 연찬하여 모기령의 경학설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고하되, 명물훈고의 번쇄한 학문을 배격하고 송학이 지녔던 義理之學의 내용을 經世學의 방향으로 더욱 강화시켰다. 다만 18세기 말에 모기령의 경설이 알려진 이후, 주희의 新注를 맹신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학자에 따라서는 한송의 절충론을 제안하거나, 송학의 보완을 위하여 한학의 훈고적 방법론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선후기 경학사의 흐름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한 면도 있고, 상이한 면도 있다. 모기령의 경학은 일본에서 고증학파가 성립할 때 상당히 참고로 되었고,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에 비하여 조선 지식인들은 義理之學의 기본 전제를 결코 폐기하지 않았으므로, 의리학의 토대 위에 고증적 방법을 원용할 때 모기령의 경학론이 일부 참고가 되는데 그쳤다.

일본에서는 1804년(일본 文化 원년)에 󰡔九經談󰡕을 출판한 大田錦城(1765~1825)은 모기령의 경학설을 크게 참고하여, 일본내 고증학파를 열었다. 그도 모기령의 󰡔古文尙書寃詞󰡕에 대하여는 그 强辯을 증오하였으나, 河圖洛書와 太極圖를 비판할 때는 朱彛尊의 설과 함께 모기령의 설에 크게 의존하였다. 󰡔九經談󰡕에는 모기령의 󰡔西河全集󰡕이 顧炎武의 󰡔日知錄󰡕, 胡渭의 󰡔大學翼眞󰡕, 朱彛尊의 󰡔經義考󰡕, 余蕭客의 󰡔古經解鉤沈󰡕, 閻若璩의 󰡔尙書古文疏證󰡕, 全謝山의 󰡔經史問答󰡕, 徐乾學의 󰡔澹園集󰡕, 紀昀의 󰡔四庫全書簡明目錄󰡕, 江聲의 󰡔尙書集注音疏󰡕, 王鳴盛의 󰡔尙書後辨(後案)󰡕 등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모기령의 설은 대학․중용․논어․시․서․좌전․역의 경설에 두루 걸쳐 있다.97) 물론 大田錦城은 고증학이 義理의 當否를 논하지 않고 引據의 해박만 목표로 한다는 이유에서 고증학을 비판하고 송학과의 절충을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이를수록 踐履之學으로서의 實學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학문의 분화가 일어나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되고, 고증학은 ‘허학’으로서 실증적 진실추구의 학문으로 기능하게 된다. 모기령의 경학론은 일본에서 고증학파가 독자적으로 성립하고 학문에서 진위론이 분화하는 때에 일정한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1800년(寬政 12, 경신)에는 山本北山이 모기령의 󰡔經問󰡕(西河合集經問) 9권에 訓點을 치고 送り假名를 붙인 것을 蔓延堂에서 목판 간행하여, 그것이 널리 행하였다. 그 뒤 1829년(文政 12, 기축)에는 猪飼彦博이 모기령의 󰡔경문󰡕을 축조 비판한 󰡔西河折妄󰡕이 駿府 采選亭에서 活版 간행되었다.98)

- 69 -

조선후기에는 모기령의 경학설을 체계적으로 논박한 성과는 집적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기령의 경학연구 방법론은 조선후기의 지식인이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할 때에 일단 초극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되었다. 모기령의 경학은 비록 당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모기령의 경학이 송학 비판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경계하였다. 또한 그것은 청대의 고증학에 대한 경계 혹은 평가유보로 이어졌다. 조선후기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전의 訓詁考證을 통하여 經學史學의 이론을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응용하였고, 독서와 박학을 토대로 실증적 귀납적 연구를 수행하되 송학 이래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用不用의 문제와 분리된 眞僞論이 대두된 것과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http://blog.empas.com/sacheon/16710967-에서 펌

 

 

       
국풍(國風)  
    총 160편
  한자 한글 번호
01 周南 주남 001-011
02 召南 소남 012-025
03 邶風 패풍 026-044
04 鄘風 용풍 045-054
05 衛風 위풍 055-064
06 王風 왕풍 065-074
07 鄭風 정풍 075-095
08 齊風 제풍 096-106
09 魏風 위풍 107-113
10 唐風 당풍 114-125
11 秦風 진풍 126-135
12 陳風 진풍 136-145
13 檜風 회풍 146-149
14 曹風 조풍 150-153
15 豳風 빈풍 154-160
       
소아(小雅)     총 74편
01 鹿鳴之什 녹명지습 161-170
02 白華之什 백화지습 170-175
03 彤弓之什 동궁지습 175-185
04 祈父之什 기부지습 185-195
05 小旻之什 소민지습 195-205
06 北山之什 북산지습 205-215
07 桑扈之什 상호지습 215-225
08 都人士之什 도인사지습 225-234
       
대아(大雅)     총 31편
01 文王之什 문왕지습 235-244
02 生民之什 생민지습 245-254
03 蕩之什 탕지습 255-265
       
송(頌)         총 40편
01 周頌 주송 266-296
01a -清廟之什 청묘지습 266-275
01b -臣工之什 신공지습 276-285
01c -閔予小子之什 민여소자지습 286-296
02 魯頌 노송 297-300
03 商頌 상송 301-305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니라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논어(論語) 위정(爲政)편 2장]

라 했으나 현전하는 작품은 305편이고

笙詩를 합하면 311펀이 된다.

공자는“시경시집  305 편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순수한 생각과 사실성에 바탕한 純正한 생각과 정서의 표현임을 위와 같이 말했다. 이는 곧 공자의 詩觀이라 할 수 있다.

 

笙詩[가락만 남고 한시 작품 망실] 6편명

170 小雅 녹명지십(鹿鳴之什) 제10편 남해(南陔)[笙詩]

 171 小雅 백화지십(白華之什) 제1편 백화(白華) [笙歌,笙詩]

 172 小雅 백화지십(白華之什) 제2편 화서(華黍)[笙歌,笙詩]

 174 小雅 백화지십(白華之什) 제4편 유경(由庚)[笙歌,笙詩]

 176 小雅 백화지십(白華之什) 제6편 숭구(崇丘)[笙歌,笙詩]

 178 小雅- 南有嘉魚之什-유의(由儀) [笙歌,笙詩]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911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http://www.chinabang.co.kr/gudaiwenxue/shi/shijing.htm

 

시 경( 詩 經 )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인 동시에 중국 순문학의 시조이다. ≪시경≫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 3000여년 전인 서주(西周) 초기로부터 춘추(春秋) 중기에 이르는 약 500여년간의 시가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경≫은 당시에 민의(民意)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채시(采詩), 진시(陳詩), 헌시(獻詩) 등의 방법에 의하여 수집되었다. 민간가요와 사대부들의 작품 및 신에게 제사 드리는 송사(頌辭)가 포함되어 있는 ≪시경≫에는 풍부한 언어, 사회학적 자료가 내재되어 있다.

 

1. <시경>의 명칭

 

"시경"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단지 그것을 "시(詩)" 또는 "시삼백(詩三百)"이라고 칭하였으며, ≪역(易)≫,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과 마찬가지로 "경(經)"이란 존칭이 없었다. 물론 전국시대 말기부터 이미 "육경(六經: 詩, 書, 樂, 易, 禮, 春秋)"이니 하는 말은 있었지만, 후세의 ≪십삼경(十三經)≫ 중에서 ≪효경(孝經)≫을 제외하고는 초기에는 모두 서명(書名) 뒤에 "경(經)"자를 붙여 "시경(詩經)"이나 "역경(易經)"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책의 이름으로서 "시" 뒤에 "경"자가 붙여진 것은 남송(南宋) 초엽 요강(廖剛)의 ≪시경강의(詩經講義)≫가 가장 빠른 듯하다. 그 후에 이러한 기풍은 매우 유행하여 명대(明代) 이후에는 ≪시≫, ≪서≫, ≪역≫ 등의 경서에 "경"자가 붙여진 말이 더 흔히 쓰이게 된다. "경"자는 이들 책을 높이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2. <시경>의 편집

 

≪시경≫의 시가 300여편으로 정착되기에는 그 과정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산시설(刪詩說), 채시설(采詩說), 헌시설(獻詩說), 진시설(陳詩說) 등이 있다.

 

옛날에는 시를 채집하는 관리가 각 지방의 시가를 모아 오면 임금은 그것을 보고 민심의 동향을 알아내어 행정(行政)에 참고하였다. ≪시경≫은 이러한 채시관(采詩官)들이 모은 시로 이루어진 것인데, 공자(孔子)가 그것의 편차(編次)를 지금의 형태로 정리하였다.

 

3. 삼가시(三家詩)

 

한초(漢初)에 ≪시경≫을 전한 사람으로 신배공(申培公)과 원고생(轅固生) 및 한영(韓嬰)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금문(今文)으로 된 ≪시경≫을 전하였으며, 후세에 이들을 "삼가시(三家詩)"라 부르게 되었다.

 

1) 노시(魯詩) : 노나라 사람인 신배공이 전한 시. 서진(西晋)시대에 없어졌다.

 

2) 제시(齊詩) : 제나라 사람인 원고생이 전한 시. 위대(魏代)에 없어졌다.

 

3) 한시(韓詩) : 연(燕)나라 사람인 한영이 전한 시. 삼가시 중에서 생명이 가장 길어 당대(唐代, 또는 北宋)까지 존재하였으며, 지금도 ≪외전10권(外傳十卷>≫이 전해지고 있다.

 

서한 때에 성행한 삼가시가 모두 후세에 전하지 않게 된 것은 삼가시를 공부한 학자들이 학관으로 출세하는 대신 경(經)을 빌어 그 시대의 정치원리를 설명할 목적으로 시의 대의를 억지 해석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즉 그 시대의 정치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시의 대의 파악은 곧 그 시대가 지나고 나면 거의 가치가 없는 게 되고 말기 때문에 삼가시는 일찍이 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4. 모시(毛詩)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가시는 일찍이 실전되어 송대 이후로는 고문(古文)인 ≪모시(毛詩)≫만이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통 읽고 있는 ≪시경≫이란 모두가 ≪모시≫인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모시(毛詩)≫ 29권과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30권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뒤의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오래된 시경의 판본이며 그 해설서이다.

 

≪모시≫는 조(趙)나라 사람인 모공(毛公)이 전한 시를 말한다. 모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대모공(大毛公)은 모형(毛亨), 소모공(小毛公)은 모장(毛萇)이라는 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모시≫에는 맨 앞머리에 자하(子夏)의 작(作)이라는 <대서(大序)>가 있고, 각 시의 앞머리에는 자하와 모공의 합작이라는 <소서(小序)>가 있어 시의(詩意)를 설명하고 있다.

 

삼가시에 비하여 ≪모시≫는 서한 때 학관에 오르지 못하여 비교적 착실한 훈고에 노력하고 있고, 동한 때에 ≪모시≫를 보충 해설한 ≪전(箋)≫을 쓴 정현(鄭玄) 같은 대학자가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모전(毛傳)≫이 유일하게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5. <시경>의 내용

 

≪시경≫에는 모두 305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이들은 다시 풍(風), 아(雅), 송(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외에도 ≪모시(毛詩)≫ 가운데는 내용은 없고 제목만 남아 있는 것이 6수가 있다.

 

1) 풍(風) :

 

옛날 학자들은 "풍(風)"자를 "풍자(諷刺)" 또는 "풍유(諷諭)"의 뜻을 지닌 "풍(諷)"으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풍(風)"을 현대 중국어의 민간가요라는 뜻인 "풍요(風謠)로 풀이하고 있다.

 

"풍"자에 "국(國)"자를 덧붙여 "국풍(國風)"이라 한 것은 전국시대 말엽부터 시작된 듯 한데, 이것은 여러 나라의 민요라는 뜻이다. 국풍 속에는 주남(周南), 소남(召南), 패(邶), 용(鄘), 위(衛), 왕(王), 정(鄭), 제(齊), 위(魏), 당(唐), 진(秦), 진(陳), 회(檜), 조(曹), 빈(豳) 등 15국의 민요가 실려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작자를 알 수 없는 것으로 후인의 윤색을 거친 민간가요들이다.

 

≪시경≫ 305편 중에서 160편을 차지하는 국풍은 가장 우수하면서도 현실주의 특색을 구비한 작품이다. 그것은 생동적이면서도 소박한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가장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은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이나 농촌의 생활, 사회생활에 대한 인식 등을 묘사한 것으로 제재의 폭이 아주 넓으며, 특히 정풍(鄭風), 제풍(齊風), 위풍(衛風)에는 연정시가 많다.

 

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가슴에 가득한 분노와 한,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을 묘사한 것으로 <칠월(七月, 豳風)>, <벌단(伐檀, 魏風)>, <석서(碩鼠, 魏風)> 등이 있다.

 

② 가혹한 부역과 병역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한을 묘사한 것으로 <보우(鴇羽, 唐風)>, <파부(破斧, 빈풍)>, <동산(東山, 빈풍)>, <무의(無衣, 秦風)> 등이 있다.

 

③ 통치계층의 황음무도함을 폭로하고 풍자한 것으로 <신대(新臺, 邶風)>, <남산(南山, 齊風)>, <주림(株林, 陳風) 등이 있다.

 

④ 남녀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노래한 것이 있는데, <건상(褰裳)>, <출기동문(出其東門)>, <진유(溱洧)>(이상 鄭風),

<목과(木瓜), <상중(桑中)>(이상 衛風),

<대거(大車)>, <채갈(采葛)>(이상 王風),

<정녀(靜女, 패풍)> 등은 청춘남녀의 사랑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한 아름다운 시편이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사랑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여인의 불행을 노래한 <장중자(將仲子, 鄭風)>, <맹(氓, 衛風)>, <곡풍(谷風, 패풍)> 등도 있다.

 

2) 아(雅) :

 

옛날에는 "하(夏)"자와 음이 비슷하여 가끔 통용되기도 하였다. 하(夏)는 우(禹)임금이 세웠던 나라로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황하유역 일대에 걸친 땅이다. 각국의 국풍들이 여러 나라에 유행하던 토속적인 악조임에 비추어 "아"는 중원일대에 유행하여 조정에서 숭상되던 정악(正樂)이었다.

 

"아(雅)"에는 바르다는 뜻이 있다. 당시에 사람들은 주왕조가 직접 통치하던 지역의 음악을 바른 소리로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풍이 그 시대의 속악(俗樂)이라면, "아"는 당시 궁전의 "아악(雅樂)"과 같았던 것이다. "아"는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구분되는데, 이를 음악에 따른 구분으로 보기도 하고, 창작 시기에 따른 구분으로 보기도 한다.

 

① 소아 : 총 74편이며(제목만 있는 6편을 포함하면 80편) 잔치하고 즐길 때의 음악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부분 주왕실의 쇠퇴와 평왕(平王)의 동천(東遷)이라는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탄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현실을 비판하고 상란(喪亂)을 반영한 시도 많다. 그 중에서 <초지화(苕之華)>와 <하초불황(何草不黃)>은 통치계층의 착취와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분개를 표출한 것으로 대중적 색채가 강하다.

 

② 대아 : 총 31편이며 조회에 사용되던 음악으로 축복과 훈계를 노래한 가사이다. 가창의 대상은 주로 천자, 군자, 가빈(嘉賓)과 같은 통치계층들이었으며, 그 내용은 대체로 귀빈을 접대하는 것, 제후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 병사들을 위로하는 것 등이다. 대아 중에서도 <생민(生民)>, <공유(公劉)>, <면(綿)> 등의 5편은 후직(后稷), 고공단보(古公亶父)로부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것으로 내용이 생동감 있고 조리가 분명하여 민족사시(民族史詩)라 일컬어진다. 어떤 것들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그들의 조상을 신격화하였지만 그속에 노동인민의 지혜와 역량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대아와 소아의 시들은 대부분 사대부들의 작품으로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허탈하여 진지한 맛이 없으므로 국풍에 비할 바가 못된다.

 

 

3) 송(頌) :

 

주송(周頌)과 노송(魯頌), 상송(商頌)으로 나누어지는데, 주송 31편, 노송 4편, 상송 5편이다.

 

"송(頌)"은 "형용" 또는 "모습"이라는 "용(容)"과 상통하는 것으로 "노래에 춤을 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송"의 내용은 제사지낼 때 신을 찬양하거나 조상들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이다.

 

① 주송 : 서주 초기에 생겨난 것으로 주왕조의 종묘 제사에 사용된 가무곡(歌舞曲)이다. 하늘에 대한 경외(敬外)와 조상에 대한 찬송이 주종을 이루며 종교적 색채가 짙다. 예술적인 면에서는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해 그 가치가 높지 않다.

 

② 노송 : 춘추 전기 노(魯)나라에서 조상과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음악이다.

 

③ 상송 : 춘추 전기 송(宋)나라에서 조상과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음악이다.

 

 

4) 부, 비, 흥(賦比興)

 

113 위풍 제7편 석서3장(碩鼠三章)-比也

http://blog.paran.com/kydong/35636596

 

"풍, 아, 송"이라는 분류 외에도 ≪시경≫은 "부(賦), 비(比), 흥(興)"으로도 나누어진다. 주자(朱子)의 견해에 따르면, "부"는 대상을 직접 길게 펼쳐 쓰는 것이고, "비"는 빗대는 것, "흥"은 먼저 다른 대상을 읊은 다음 읊고 싶은 대상을 읊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시경≫을 문자화 이후의 읽는 시로만 잘못 생각하여 그 표현방식을 나누어 본 것이다.

 

그러나 ≪시경≫은 원래 문학 이전의 음악이었으므로 ≪시경≫을 문자화 이전의 노래로 볼 때 "부, 비, 흥"은 시의 표현방식이 아니라 노래 또는 연주의 표현방식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주자의 견해는 간명하게 정리될 수 있다. 즉, "부"는 독창, "비"는 주고받는 노래(對唱), "흥"은 멕이고 받는 노래(독창+중창)이다.

 

≪주례(周禮)≫에서 "육시(六詩)"라 하여 "풍·아·송"과 "부·비·흥"을 나누지 않고 함께 언급하면서도 그 순서도 "풍·부·비·흥·아·송"으로 뒤섞어 놓았던 것은 기본적으로 육시 전체를 음악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그 후 한대(漢代)에 이르러 ≪시경≫은 이미 가사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음악적 기준에 따른 "부·비·흥"의 분류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시경≫을 최초로 해석한 한대의 ≪모전(毛傳)≫도 "부·비·흥"에 대한 설명은 하지 못한 채 사승관계에 따라 물려받은 대로 작품들을 각기 "부·비·흥"으로 나누고 있을 뿐이다.

 

 

6. <≪시경≫>의 문학적 성격

 

≪시경≫은 시가집이면서도 육경(六經)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읽혀진 것이다. 그리고 시경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갖가지 아름다운 서정이 상당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문장 속에 담겨 있다. ≪시경≫의 시들은 4언이 기본형식을 이루고 있지만, 3언 5언 등 잡언도 상당히 섞여 있다.

 

또 ≪시경≫의 시들은 서정시, 사회시, 전례시의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서정시는 중국 정통문학의 중심을 이루는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고, 사회시는 공용적인 문학론의 근거가 되며, 전례시는 고대의 시의 실용적인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시경≫ 305편은 실로 주대(周代)에 있어서 북방문학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문학의 원천이다. 이처럼 가치 있는 시경문학은 후대의 4언, 5언, 7언, 부(賦)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또 산문이나 기타 문학 분야에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인근 여러 나라에 까지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실로 동양문학의 연원이라 말할 수 있다.

 

≪시경≫은 유럽 최초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인 호머(Homeros, 荷馬)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d, 伊利亞特)>와 <오딧세이(Odyssey, 奧德賽)>보다도 약간 빠르다.

 

 

7. ≪시경≫의 예술적 특징

 

1) 묘사의 기법이 지극히 소박하며 싯구를 중복하여 여운이 길다.

 

2) 일정한 시형이나 구격이 없다. 대부분 4언을 위주로 하면서도 장단구를 자연스럽게 운용하여 격조가 활발하고 리듬감이 있다.

 

3) 상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법을 사용하고 추상적인 말은 피했다.

 

4) 쌍성(雙聲), 첩운(疊韻), 첩자(疊字) 등을 사용하여 시가의 서정성과 언어의 표현력을 강화시키고 음운상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