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 방경각 외전의 초기구전을 정리해 본다. 이 구전은 앞에서 정리한 <방경각외전 자서>와 함께 읽는 것이 효과적이다. 거기에는 각 작품의 창작 동기를 연암 자신이 밝혔기 때문이다. <양반전>은 앞에서 정리하였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한다.먼저 연암의 선비론인 <원사>를 <회우록서> 다음에 싣는다. <마장전> 아래 꼭지에는 우정론의 일단을 볼 수 있는 <회우록서>를 싣는다.

 

 

마장전(馬駔傳)

 

 

馬駔舍儈 擊掌擬指

말 거간꾼이나 집주름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짓이나,

 

管仲蘇秦 鷄狗馬牛之穴 信矣.

관중(管仲)과 소진(蘇秦)이

닭 · 개 · 말 · 소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던 일

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주D-001]손뼉을 …… 짓이나 : 맹세할 때 하는 동작들이다. 격장위서(擊掌爲誓)니, 지일서심(指日誓心)이니 하는 성구(成句)들이 있다.
[주D-002]닭 …… 일 :
고대 중국에서 동맹을 맺을 때 천자는 입가에 말이나 소의 피를 바르고, 제후는 개나 돼지의 피를 바르고, 대부 이하는 닭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微聞別離 抛彄裂帨 *彄(구)활고자. *帨(세)수건.

어렴풋이 헤어지잔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벗어던지고 수건을 찢어 버리고

回燈向壁 垂頭呑聲 信妾矣.

등잔불을 돌아앉아 벽을 향하여 고개를 떨구고 울먹거리는 것은 믿을 만한 첩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吐肝瀝膽 握手證心 信友也 .*瀝(력)거르다. *餂(첨)낙다, 꾀어내다. *

가슴속의 생각을 다 내보이면서 손을 잡고 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친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然界準(音巀)隔扇

그러나

콧잔등〔準〕

- 음은 ‘절(巀)’이다. - 까지 부채로 가리고

[주D-003]콧잔등〔準〕 : ‘準’ 자를 콧잔등이란 뜻으로 쓸 때는 ‘절’이라 읽는다.

左右瞬目 駔儈之術也.

좌우로 눈짓을 하는 것은 거간꾼들의 술책이며,

動蕩危辭 餂情投忌

위협적인 말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상대가 꺼리는 곳을 건드려 속을 떠보며

 

[주D-004]상대가 …… 떠보며 : 원문은 ‘餂情投忌’이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선비가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속을 떠보는 것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라고 비판하였다. 투기(投忌)는 ‘쥐 잡으려 해도 그릇 깨뜨릴까 봐 꺼려진다.〔投鼠忌器〕’는 말의 준말이다.

脅 强 制 弱 散同合異

강한 상대에겐 협박을 하고 약한 상대는 짓눌러서 동맹한 나라들을 흩어 버리거나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하게 하는 것은

覇者說士 捭闔之權也 *捭(패)치다, 깨뜨리다. *闔(합)문을 닫다.

패자(覇者)와 유세가들이 이간하고 농락하는 권모술수이다.

昔者 有病心 而使妻煎藥

옛날에 가슴앓이 하는 이가 있어, 아내를 시켜 약을 달이게 하였는데

多寡不適. 怒而使妾 多寡恒適

그 양이 많았다 적었다 들쑥날쑥하였으므로 노하여 첩을 시켰더니, 그 양이 항상 적당하였다. 甚宜其妾 穴牕窺之
그 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창구멍을 뚫고 엿보았더니,

多則損地 寡則添水

많으면 땅에 버리고 작으면 물을 더 붓는 것이었다.

此其所以取適之道也.

이것이 바로 그 첩이 양을 적당하게 맞추는 방법이었다.

故附耳底聲 非至言也.

그러므로 귀에 대고 소근거리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요,訟情淺深 非盛友也.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깊은 사귐이 아니요,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벗이 아니다.

宋旭 趙闒拖 張德弘 相與論交於廣通橋上.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이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D-005]송욱(宋旭) : 《연암집》 권7 염재기(念齋記)에 의하면, 송욱은 당시 한양에 실존했던 기인(奇人)이었다.
[주D-006]광통교(廣通橋) :
한양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다리. 광교(廣橋)라고도 한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다.

闒拖曰“吾朝日 .”

탑타가 말하기를,

鼓瓢行丐 入于布廛.

“내가 아침에 일어나 바가지를 두드리며 밥을 빌다가 포목전에 들렀더니,

有登樓而貿布者

포목을 사려고 가게로 올라온 자가 있었습니다.

擇布而舐之 暎空而視之.

그는 포목을 골라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공중에 비쳐 보기도 하면서

價則在口 讓其先呼.

값은 부르지 않고 주인에게 먼저 부르라고 하더군요.

旣而兩相忘布 布人忽然望遠山 謠其出雲.

그러더니 나중에는 둘 다 포목은 잊어버린 채 포목 장수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주D-007]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하게 산굴에서 나오고〔雲無心以出岫〕”라는 구절이 있다.

 

其人負手逍遙 壁上觀畵

사러 온 사람은 뒷짐을 지고 서성대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더군요.

” 하니,

[주D-008]벽에 …… 있더군요 : 원문은 ‘壁上觀畵’인데,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의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秦) 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다른 제후의 장수들이 성벽 위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벽상관전(壁上觀戰)’이란 성어의 패러디이다. 역시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宋旭曰“汝得交態 而於道則未也.”

송욱이 말하기를,“너는 사귀는 태도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道)는 보지 못했다.” 하였다.

德弘曰“傀儡垂帷 爲引繩也.”

덕홍이 말하기를,“꼭두각시놀음에 장막을 드리우는 것은 노끈을 당기기 위한 것이지요.” 하니,

宋旭曰“汝得交面 而於道則未也.

송욱이 말하기를,“너는 사귀는 겉모습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夫君子之交三 所以處之者五

무릇 군자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법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而吾未能一焉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故行年三十 無一友焉.

그러기에 나이 삼십이 되었어도 벗 하나 없다.

雖然其道則 吾昔者竊聞之矣.

그러나 그 도만은 내 옛적에 들었노라.

臂不外信 把酒盃也.”

팔이 밖으로 펴지지 않는 것은 술잔을 잡았기 때문이지.

” 하니,

[주D-009]팔이 …… 때문이지 :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열상방언(洌上方言)》에는 “술잔 잡은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把盃腕 不外卷〕”라고 소개되었다. 《靑莊館全書 卷62》

德弘曰“然. 詩固有之

덕홍이 말하기를,“그렇습니다. 《시경(詩經)》에도 확실히 그런 것이 있지요.


鳴鶴在陰 저 숲 속에 학이 우니

其子和之 그 새끼가 화답하네.

我有好爵 내 벼슬이 아름다우니

吾與爾縻之.* 너와 함께 하여 보세. *注]출전:易經 中孚. 縻(미)고삐.

[주D-010]우는 …… 같이한다 :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이다. 따라서 인용상 실수를 범했거나, 아니면 이를 《시경》의 일시(逸詩)로 간주한 듯하다.

其斯之謂歟?”

하였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하였다.

宋旭曰“爾可與言友矣.

송욱이 말하기를,“너만 하면 벗에 대한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吾向者 告其一 爾知其二者矣.

내가 아까 그 한 가지만을 알려 주었는데, 너는 두 가지를 아는구나.

天下之所趨者 勢也.

천하 사람이 붙따르는 것은 형세요,

所共謀者 名與利也.

모두가 차지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이다.

盃不與口謀 而臂自屈者 應至之勢也.

술잔이 입과 더불어 약속한 것도 아니건만, 팔이 저절로 굽혀지는 것은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형세이며,

相和以鳴 非名乎?

학과 그 새끼가 울음으로써 서로 화답하는 것은 바로 명예를 구하는 것이며,

夫好爵利也.

벼슬을 좋아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然而趨之者多 則勢分

그러나 붙따르는 자가 많아지면 형세가 갈라지고,

謨之者衆 則名利無功.

도모하는 자가 여럿이면 명예와 이익이 제 차지가 없다.

故君子諱言此三者 久矣.

그러므로 군자는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말하기를 꺼려 왔다.

吾故隱而告汝 汝則知之.

내가 그렇기 때문에 은유적인 말로 네게 알려 주었는데 네가 이 뜻을 알아차렸구나.

汝與人交 無譽其善

너는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譽其成善 倦然不靈矣.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毋醒其所未及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將行而及之 憮然失矣.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稠人廣衆 無稱人第一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第一則無上 一座索然沮矣.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故處交有術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기법이 있다.

將欲譽之 莫如顯責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將欲示歡 怒而明之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將欲親之 注意若植 回身若羞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使人欲吾信也 設疑而待之.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夫烈士多悲 美人多淚

또한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故英雄善泣 所以動人.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夫此五術者 君子之微權

이 다섯가지 기법은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而處世之達道也.”

처세(處世)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闒拖問於德弘曰

탑타가 덕홍에게 묻기를,

“夫宋子之言 陳義獒牙

“송 선생님의 말씀은 그 뜻이 너무나 어려워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庾辭也 吾不知也.”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德弘曰“汝奚足以知之?

덕홍이 말하기를,“네까짓 게 어찌 알아?

夫聲其善而責之 譽莫揚焉

잘한 일을 가지고 성토하여 책망하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이다.

夫怒生於愛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노여움이 생기는 것이요,

情出於譴 家人不厭時嗃嗃也. *嗃(학)엄하다.

꾸지람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붙는 것이므로

가족에 대해서는 이따금 호되게 다루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주D-011]가족에 …… 법이다 : 《주역》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가족을 호되게 다루었으나 엄격함을 뉘우치면 길하니라.〔家人嗃嗃 悔厲 吉〕”라고 하였다.

夫已親而逾疎 親孰踰之

친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둔다면 이보다 더 친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已信而尙疑 信孰密焉?

이미 믿는 사이인데도 오히려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이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酒闌夜深 衆人皆睡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뭇사람은 다 졸고 있을 때

黙然相視 倚其餘醉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그 남은 취기(醉氣)를 타서

動其悲思 未有不悽然而感者矣.

슬픈 심사를 자극하면 누구든 뭉클하여 공감하지 않는 자 없다.

故交莫貴乎相知 樂莫極乎相感.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狷者解其慍 *狷(견):성급하다.

따라서 편협한 사람의 불만을 풀어 주고

恃者平其怨 莫疾乎泣.

시기심 많은 사람의 원망을 진정시켜 주는 데에는 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吾與人交 未嘗不欲泣 泣而淚不下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울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故行于國中 三十有一年矣 未有友焉.”

이 때문에 31년 동안 나라 안을 돌아다녀도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闒拖曰 “然則忠而處交 義而得友 何如?”
탑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충(忠)으로써 사귐에 임하고 의(義)로써 벗을 사귀면 어떻겠는가?” 하니,

德弘唾面而罵之曰

덕홍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鄙鄙哉. 爾之言之也. 此亦言乎哉?

“네 말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비루하구나.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냐?

汝聽之 夫貧者多所望 故慕義無窮

너는 듣거라. 가난한 놈이란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한없이 의(義)를 사모한다.

何則? 視天莫莫 猶思其雨粟

왜냐하면 저 아득한 하늘만 봐도 곡식을 내려 주지 않나 기대하고,

聞人咳聲 延頸三尺.

남의 기침 소리만 나도 무엇을 주지 않나 고개를 석 자나 빼고 바라기 때문이다.


夫積財者 不恥其吝名

반면에 재물을 모아 놓은 자는 자신이 인색하단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所以絶人之望我也.

그것은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을 끊자는 것이다.

夫賤者 無所惜 故忠不辭難

그리고 천한 자는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심(忠心)을 다하여 어려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何則? 水淺不蹇 衣弊袴也.

왜냐하면 물을 건널 때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지 않는 것은 떨어진 고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乘車者 靴加坌套 猶恐沾泥

반면에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가 갖신에 덧신을 껴신는 것은 그래도 진흙이 묻을까 염려해서이다.

履底尙愛 而況於身乎?

신 바닥도 아끼거든 하물며 제 몸일까 보냐?

故忠義者 貧賤者之常事

그러므로 충(忠)이니 의(義)니 하는 것은 빈천한 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而非所論於富貴耳.”

부귀한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하였다.

闒拖愀然變乎色曰

탑타가 발끈하여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吾寧無友於世 不能爲君子之交.”

“내 차라리 세상에 벗이 하나도 없을지언정 군자들과는 사귀지 못하겠다.” 하고서

於是 相與毁冠 裂衣垢面

이에 서로 의관을 찢어 버리고 때묻은 얼굴과

蓬髮帶索 而歌於市.

덥수룩한 머리에 새끼줄을 허리에 동여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滑稽先生友情論曰,
골계선생(滑稽先生)은 우정론(友情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D-012]골계선생(滑稽先生)은 …… 말했다 : 골계선생은 작가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 인물이다. 따라서 우정론 역시 실제로는 작가가 지은 글이다. 골계란 풍자나 궤변(詭辯)을 잘한다는 뜻이니, 《사기》에 골계열전(滑稽列傳)이 있다.

 

續木 吾知其膠魚肺也.

나무를 붙이자면 생선 부레를 녹여서 붙이고,

接鐵 吾知其鎔鵬砂也.

쇠를 붙이자면 붕사(鵬砂)를 녹여서 붙이고,

附鹿馬之皮 莫緻乎糊粳飯

사슴이나 말의 가죽을 붙이자면

멥쌀밥〔粳飯〕

을 이겨서 붙이는 것보다 단단한 것이 없음을 내 안다.

[주D-013]멥쌀밥〔粳飯〕 : 찹쌀밥〔糯飯〕의 오류인 듯하다. 멥쌀은 차지지 않아 풀로 쓰기 어렵다.

至於交也 介然有閒

그러나 사람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는 떨어진 틈이란 것이 있다.

燕越之遠也 非閒也

연(燕) 나라와 월(越)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요,

山川閒之 非閒也.

산천(山川)이 가로막고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다.

促膝聯席 非接也

또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요,

拍肩摻袂 非合也. / *摻(삼)잡다.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有閒於其間

그런 사이에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衛鞅*張皇 孝公時睡

예를 들어

상앙(商鞅)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자 효공(孝公)이 꾸벅꾸벅 졸았고,

 

注] 商鞅(상앙):秦孝公을 도와 부국강병책을 설함.

[주D-014]상앙(商鞅)이 …… 졸았고 : 상앙이 진(秦)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이에 경감이 나와서 상앙을 꾸짖자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覇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應侯*不怒 蔡澤*噤喑 /*噤(금)입다물다. *喑(음)목이쉬다 벙어리.

범수(范睢)가 성내지 않았다면 채택(蔡澤)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注] *范雎(범수)응후에 봉해짐. 秦에 들어간 채택이 재상 범저를 대신코자 했으나 범저는 노여워하지 않음.

[주D-015]범수(范睢)가 …… 것이다 : 채택(蔡澤)이 진 나라에 들어가 진 소왕(秦昭王)을 볼 목적으로 먼저 사람을 시켜 당시 승상인 범수에게 자신이 진왕을 만나면 승상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하여 범수를 노하게 만듦으로써 범수와 만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진왕을 만났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故出而讓之 必有其人也

그러므로 밖으로 나와서 상앙을 꾸짖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으며,

宜言怒之 必有其人也.

채택의 말을 전하여 범수가 화를 내도록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趙公子爲之佋介

 

공자(公子) 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이 소개의 역할을 하였다.

[주D-016]공자(公子) …… 하였다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노중련(魯仲連)이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설득하여 조 나라를 돕도록 하겠노라고 자청했으므로, 공자 조승, 즉 평원군(平原君)이 노중련을 신원연에게 소개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을 상대로 유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원군의 소개 덕분이었다는 뜻이지만, 탈문(脫文)이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생략한 탓인지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夫成安侯常山王 其交無間

반면에 성안후(成安侯 진여(陳餘))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은 사귐에 있어 조금의 틈도 없이 너무나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故一有間焉 莫能爲之間焉

그들 사이에 한번 틈이 생기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주D-017]성안후(成安侯)와 …… 없었다 : 《사기》 권8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故可愛非閒 可畏非間 그러기 때문에, 중히 여길 것은 틈이 아니고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도 틈이 아니고 무엇이랴.

詔由閒合 讒由閒離

아첨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영합하는 것이요, 참소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이간질하는 것이다.

故善交人者 善事其間

그러므로 사람을 잘 사귀는 이는 먼저 그 틈을 잘 이용하고,

不善交人者 無所事間.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는 이는 틈을 이용할 줄 모른다.

夫直則逕矣. 不委曲而就之

성격이 강직한 사람은 외골수여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나아가지도 않고

不宛轉而爲之.

우회적으로 말을 하지도 않으며,

一言而不合 非人離之 已自阻也.

한번 말을 꺼냈다가 의견이 합치하지 않으면 남이 이간질하지 않아도 제풀에 막히고 만다.

故鄙言有之曰 “伐樹伐樹 十斫無蹶.”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찍고 또 찍어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어디 있으리.”라고 했으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其此之謂歟?

 

“아랫목에 잘 보이기보다는 아궁이에 잘 보여라.”

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18]아랫목에 …… 보여라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이다.

故導諛有術
따라서 아첨을 전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

飭躬修容 發言愷悌

몸을 정제(整齊)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스레 하고

澹泊名利 無意交遊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며 상대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척함으로써

以自獻媚 此上諂也.

저절로 아첨을 하는 것이 상첨(上諂)이다.

其次 讜言款款

다음으로 바른 말을 간곡하게 하여

以顯其情 善事其間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잘 이용하여

以通其意 此中諂也.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중첨(中諂)이다.

穿馬蹄 弊薦席

말굽이 닳도록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하며 돗자리가 떨어지도록 뭉개 앉아,

仰脣吻 俟顔色

상대방의 입술을 쳐다보며 얼굴빛을 살펴서,

所言則善之 所行則美之

그 사람이 하는 말마다 다 좋다 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마다 다 칭송한다면,

初聞則喜 久則反厭

처음 들을 때에야 좋아하겠지만 오래 들으면 도리어 싫증이 난다.

厭則鄙之 乃疑其玩己也. 此下諂也.

싫증이 나면 비루하게 여기게 되어, 마침내는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는 하첨(下諂)이다.

夫管仲九合諸侯

관중(管仲)이 제후(諸侯)를 여러 번 규합하였고,

蘇秦從約六國

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을 합종(合縱)시켰으니

可謂天下之大交矣.

천하의 큰 사귐이라 이를 만하다.

然而宋旭闒拖乞食於道

그러나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德弘狂歌於市

덕홍은 저자에서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도

猶不爲馬駔之術

오히려 말 거간꾼의 술수를 부리지 않았거늘,

而況君子而讀書者乎?

하물며 군자로서 글 읽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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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허생후지(許生後識)

5.차수평어(次修評語)

4.허생후지(許生後識)

[주C-001]허생후지(許生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으며, 또 여러 본에는 모두 이 편이 없었고, 다만 ‘일재본’ㆍ‘옥류산장본(玉溜山莊本)’ㆍ‘녹천산장본(綠天山莊本)’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은자주]<진덕재야화>를 말한다. 이것이 처음 쓴 후지이나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던지 앞꼭지의후지1로 바꾸었다. 그래서 후지1이 문집의 허생전 후지의 정본으로 전해온다.

나의 나이가 20살(1756년) 되었을 때 봉원사(奉元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떤 손님 하나가 음식을 적게 먹으며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선인(仙人) 되는 법을 익혔다. 그는 정오가 되면 반드시 벽을 기대어 앉아서 약간 눈을 감은 채 용호교(龍虎交)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자못 늙었으므로 나는 존경하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허생의 이야기와 염시도(廉時道)배시황(裵是晃)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잇달아 몇 만언(萬言)으로써 며칠 밤을 걸쳐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거짓스럽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휼황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모두 들음직하였다.


[주D-001]용호교(龍虎交)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물과 불의 교합 도인술(導引術)의 하나.
[주D-002]
염시도(廉時道) :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잡록(石北雜錄)》과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東野彙輯)》에는 염시도(廉時度)로 되어 있고, 일명씨의 《성수총화(醒睡叢話)》에는 염희도(廉喜道)로 되어 있다.
[주D-003]
배시황(裵是晃) :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배시황(裵是熀)으로 되어 있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는 배시황(裵是愰)으로 되어 있다.
[주D-004]
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
완흥군은 인조(仁祖)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등의 하나인 이원영(李元榮)인 듯하다.


그때 그는 스스로 성명을 소개하기를 윤영(尹映)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병자년(1756년) 겨울이다. 그 뒤 계사년(1773년) 봄에 서쪽으로 구경갔다가 비류강(沸流江)에서 배를 타고서 십이봉(十二峯) 밑까지 이르자, 조그마한 초암 하나가 있었다. 윤영이 홀로 중 한 사람과 이 초암에 붙여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기뻐하면서 서로 위안의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열여덟 해를 지났지마는 그의 얼굴은 더 늙지 않았다. 나이 응당 팔십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주D-005]비류강(沸流江) : 평안도 성천(成川)에 있는 물 이름.
[주D-006]
십이봉(十二峯) :
성천부 동북 30리에 있는 흘골산(紇骨山). 속칭 무산(巫山) 12봉이라 한다.


나는 그에게,

“허생 이야기 말입니다. 그 중 한두 가지 모순(矛盾)되는 점이 있더군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곧 풀이해 주는데 역력히 그저께 겪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자네, 지난날 창려(昌黎)의 글을 읽더니 의당….”

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자네, 일찍이 허생을 위해서 전(傳)을 쓰려더니 이젠 글이 벌써 이룩되었겠지.”

하기에, 나는 아직 짓지 못했음을 사과하였다.


[주D-007]창려(昌黎) : 한유(韓愈)의 봉호.
[주D-008]
:
원전(原典)에 한 글자가 탈락되었다.


이야기 할 때 나는,

“윤 노인(尹老人).”

하고 불렀더니, 노인은,

“내 성은 신(辛)이요, 윤이 아니거든. 자네 아마 잘못 안 것일세.”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는,

“내 이름은 색(嗇)이라우.”

한다. 나는,

“영감님의 옛 성명은 윤영이 아닙니까. 이제 갑자기 고쳐서 신색이라니 무슨 까닭이십니까.”

하고 따졌더니,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자네가 잘못 알고서 남더러 성명을 고쳤다구.”

한다. 나는 다시 따지려 했으나 노인은 더욱 노하여 파란 눈동자가 번뜩일 뿐이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 노인이 이상한 도술을 지닌 분임을 알았다. 그는 혹시 폐족(廢族)이나 또는 좌도(左道)ㆍ이단(異端)으로서 남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는 무리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문을 닫고 떠날 무렵에도 노인은,

“허생의 아내 말씀이요, 참 가엾더군요. 그는 마침내 다시 주릴 거요.”

하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또 광주(廣州) 신일사(神一寺)에 한 노인이 있어서 호를 삿갓 이생원이라 하는데 나이는 아흔 살이 넘었으나 힘은 범을 껴잡았으며, 바둑과 장기까지도 잘 두고 가끔 우리나라 옛 일을 이야기할 제 언론이 풍부하여 바람이 불어 오는 듯했다. 남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나이와 얼굴 생김을 듣고 보니 윤영(尹映)과 흡사하기에 내가 그를 한번 만나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물론 이름을 숨기고 깊이 몸을 간직하여 속세를 유희(遊戲)하는 자가 없지 않은즉 어찌 이 허생에게만 의심할까보냐.

평계(平谿) 국화 밑에서 조금 마신 뒤에 붓을 잡아 쓴다. 연암(燕巖)은 기록하다.


[주D-009]
평계(平谿) : 연암서당(燕巖書堂) 앞에 있는 시내 이름,


5.차수평어(次修評語)



[주C-001]차수평어(次修評語) :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차수(次修)는 박제가(朴齊家)의 자.



차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는 대체로 규렴(虬髥)으로써 화식(貨殖)에, 합친 것이었으나 그 중에는 중봉(重峯)봉사(封事), 반계(磻溪)수록(隨錄), 성호(星湖)사설(僿說) 등에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능히 말하였다. 문장이 더욱 소탕(疎宕)하고 비분(悲憤)하여 압수(鴨水) 이동에 있어서의 유수한 문자이다. 박제가(朴齊家)는 삼가 쓰다.


[주D-001]
규렴(虬髥)ㆍ화식(貨殖) : 당(唐)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규렴객전(虬髥客傳)》과 한(漢) 사마천(司馬遷)ㆍ반고(班固)의 〈화식열전(貨殖列傳)〉.
[주D-002]
중봉(重峯) :
조선 선조(宣祖) 때 유학자 조헌(趙憲)의 호.
[주D-003]
봉사(封事) :
조헌이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임금에게 올린 글.
[주D-004]
반계(磻溪) :
조선 실학파(實學派) 학자 유형원(柳馨遠)의 호.
[주D-005]
수록(隨錄) :
유형원이 실학의 이론을 저술한 책. <반계수록>
[주D-006]
성호(星湖) :
조선 실학파 학자 이익(李瀷)의 호.
[주D-007]
사설(僿說) :
이익의 저서.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이 유선하여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만들었다.
[주D-008]
박제가(朴齊家)는 삼가 쓰다 :
어떤 본에는 이를 중존(仲存)의 평어라 하였으나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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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후지(許生後識)


[주C-001]허생후지(許生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주C-002] : 또 한 편이 발견되었으므로 구별하기 위해서 표시하였다.

[은자주] <진덕재야화>을 말함. 당므 꼬지에 싣는다.


혹자는 이르기를,

“그이는 황명(皇明)의 유민(遺民)이야.”

한다. 숭정(崇禎) 갑진년(甲辰年) 뒤로 명의 사람들이 많이들 동으로 나와 살았으니 허생도 혹시 그런 분이라면 그 성은 반드시 허씨가 아니리라 생각된다. 세속에서 전하는 말이 있으니 다음과 같았다.


[주D-001]
숭정(崇禎) 갑진년 : 1664년. 실은 청 나라 강희 4년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오히려 명의 연호인 숭정을 썼다.


“조 판서(趙判書) 계원(啓遠)이 일찍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순행차로 청송(靑松)에 이르렀을 때, 길 왼편에 웬 중 둘이 서로 마주 베고 누웠다. 앞선 마졸(馬卒)이 비켜달라 고함을 쳤으나 그들은 피하지를 않고, 채찍으로 갈겨도 일어나지 않기에 여럿이 붙들어 끌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趙)가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는,
‘어디에 살고 있는 중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주D-002]계원(啓遠) : 조선 효종 때 관리. 자는 자장(子長).
[주D-003]
조(趙) :
‘박영철본’에는 조공(趙公)으로 되었으나 김택영(金澤榮)이 추가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수택본’과 ‘주설루본’을 좇았다. 이 후지(後識) 중 다음에 나오는 것도 이에 따랐다.


두 중은 일어나 앉아 한결 더 뻣뻣한 태도로 눈을 흘기고 한참 동안 있다가 하는 말이,
‘너는 헛된 소리를 치며 출세를 하여 감사의 자리를 얻은 자가 아니냐.’
한다. 조가 중들을 보니 한 명은 붉은 상판이 둥글고, 또 한 명은 검은 상판이 길었으며, 말하는 태가 자못 범상치 않았다. 가마에서 내려 그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중은,
‘따르는 자들을 물리치고 나를 따라 오려무나.’
한다. 조는 몇 리를 따라 가노라니 숨은 가빠지고 땀은 자꾸만 흘러 좀 쉬어서 가기를 청했더니 중은 화를 내어,
‘네가 평소에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는 언제나 큰소리를 하면서 몸에는 갑옷을 입고 창을 잡아 선봉(先鋒)을 맡아서 대명(大明)을 위하여 복수와 설치를 하겠다고 떠들더니, 이제 보아 몇 리의 걸음도 못 걸어서 한 자국에 열 번 헐떡이고, 다섯 자국에 세 번을 쉬려고 하니 이러고서 어찌 요(遼)ㆍ계(薊)의 벌판을 맘대로 달릴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어떤 바위 밑까지 닿으니 나무에 기대어서 집을 만들고, 땔나무를 쌓고는 그 위에 가 눕는 것이었다. 조는 목이 몹시 말라 물을 청하였다. 중은,
‘에퀴이, 귀인이니 또 배도 고프겠지.’
하고는,
황정(黃精)으로 만든 떡을 먹이려고 솔잎 가루를 개천 물에 타서 주었다.


[주D-004]황정(黃精) : 한약재의 일종. 도사(道士)들이 장생(長生)을 위하여 복용했다 한다.


조는 이마를 찡그리며 마시지 못한다. 중은 또,
‘요동 벌은 물이 귀하므로 목이 마르면 말 오줌을 마시는 것이 일쑤렷다.’
하며, 크게 호통치고는, 두 중은 마주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면서,
‘손 노야(孫老爺), 손 노야.’
하고 부르더니, 조에게,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키어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방이 소란한 것을 네가 아느냐.’
하고 묻는다. 조는,
‘들은 적이 없소이다.’
하였더니, 두 중은 탄식을 하면서,
‘네가 방백(方伯)의 몸으로서 천하에 이런 큰 일이 있건마는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는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벼슬자리를 얻었을 뿐이로고.’
한다. 조는,
‘스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였더니, 중은,
‘물을 필요가 없어. 세상에는 역시 우리를 아는 이가 있을거야. 너는 여기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렷다. 내가 우리 선생님하고 꼭 같이 와서 너에게 이야기를 하련다.’
하고는, 일어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조금 뒤에 해는 지고 오래 지나도 중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는 밤 늦도록 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밤은 깊어 푸나무에는 우수수 바람 소리가 나면서 범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는 기겁을 하고 거의 까무러쳤다. 조금 뒤에 여럿이 횃불을 켜들고 감사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는 거기서 낭패를 당하고 골짜기 속을 빠져 나왔다. 이 일이 있은 지 오래 되어도 조는 언제고 마음이 불안하여 가슴속에는 한을 품게 되었다. 뒷날, 조는 이 일을 우암 송 선생(尤菴宋先生)에게 물었더니, 선생은,
‘이는 아마도 명(明)의 말년 총병관(總兵官) 같아 보이네.’
한다. 조는 또,
‘그는 언제나 저를 깔보고, 네니 또는 너니 하고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나라 중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고, 땔나무를 쌓아둔 것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의미함일세.’
한다. 조는 또,
‘울 때면 반드시 손 노야를 찾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했더니, 선생은,
‘그는 아마 태학생(太學生) 손승종(孫承宗)을 가리킨 듯싶네. 승종이 일찍이 산해관(山海關)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만큼, 두 중은 아마 손(孫)의 부하인 듯하네.’
하였다.”


[주D-005]와신상담(臥薪嘗膽) : 전국 때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가 망했음을 한하여 땔나무 위에 누워서 괴로움을 체험하여 광복을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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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갑야화(玉匣夜話)

-열하일기 25편 중 한 편임.

그 구성은 아래와 같으므로 앞에 실은 허생전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전 작품을 읽어본다. 허생전은 앞에서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 ]속은 내용 이행를 도우려고 은자가 적었다. 행간이 좁으니 한글창에다 복사하여 읽기 바란다.


[구성]

1.옥갑야화(玉匣夜話)


2.허생전(許生傳)


3.허생후지(許生後識)


4.허생후지(許生後識)

<진덕재야화>란 표제로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민족문화추진회 열하일기 번역에 후지2로 추가함.


5.차수평어(次修評語)



1.옥갑야화(玉匣夜話)


비장들의 이야기들. [제5화]에는 변승업의 이야기가, [제6화]에는 내가 허생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잇다.



[서언]

옥갑(玉匣)에 돌아와서 모든 비장들과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밤들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연경은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역관배가 말하면 비록 만 금이라도 무난히 빌려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모두 사기로써 능사를 삼으니 이는 실로 잘못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제1화]

지금으로부터 서른 해 전에 한 역관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연경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제 그 단골 주인을 보고서 울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강을 건널 때에 가만히 남의 은(銀)을 가지고 왔더니 일이 발각되자 제 것까지 모두 관(官)에 몰수되었습니다. 이제 빈 손으로 돌아가려니 무엇으로도 생활할 수 없겠기에 차라리 이곳에서 죽고자 합니다.”

하고는 곧 칼을 빼어 자살하려 하였다. 주인이 놀라서 급히 그를 껴안고 칼을 빼앗으면서,

“몰수된 은이 얼마나 되는지요.”

하였더니, 그는,

“삼천 냥입니다.”

하였다. 주인은,

“사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음이 걱정이지, 은이 없기로 무엇이 근심이요. 이제 이곳에서 죽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처자에게 어떻게 하려는 거요. 이제 내가 당신에게 만 금을 빌려 드릴 테니 다섯 해 동안을 늘이면 아마 만 금은 남겠지요. 그때 가서 본전으로 나에게 갚아 주시오.”

하고는, 그를 돌보면서 위안하였다. 그는 이미 만 금을 얻자, 곧 물건을 많이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그 일을 아는 이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그의 재능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과연 다섯 해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곧 역원(譯院)의 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깎아버리고는 다시 연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친구 하나가 연경에 들어가기에, 그는,

“연경 저자에서 만일 아무 단골 주인을 만나면 그는 응당 나의 안부를 물을 테니 자네는 그의 온 집안이 몹쓸 유행병을 만나서 죽었다고만 전해 주게.”

하고, 가만히 부탁의 말을 던졌다. 그 친구는 이 말이 너무나 허황함으로 곤란한 빛을 보였다. 그는,

“만일 그렇게만 하고 돌아온다면 마땅히 자네에게 돈 일백 냥을 바치겠네.”

하고, 단단히 부탁하였다. 그 친구가 연경에 들어서자 그 단골 주인을 만났다. 주인이 역관의 안부를 묻기에, 그 친구의 부탁한 바와 같이 답하였더니, 주인은 곧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한바탕 슬피 울면서,

“아아, 하느님이시여. 무슨 일로 이다지 좋은 사람의 집에 이렇듯 참혹한 재앙을 내리셨나요.”

하고는, 곧 백 냥을 그에게 주면서,

“그이가 처자와 함께 죽었다니 주장할 이도 없을 테니, 당신이 고국에 돌아가시는 그 날로 나를 위하여 오십 냥으로 제물을 갖추고, 또 나머지 오십 냥으로 재(齋)를 벌여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어 주시오.”

하였다. 그 친구는 몹시 아연했으나 벌써 거짓말을 하였는지라, 하는 수 없이 백 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역관의 온 집안은 벌써 역질을 만나서 몰사하였다.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두렵기도 하여 그 일백 냥으로 그 단골 주인을 위하여 재를 드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 연행(燕行)을 폐기하고는, 말하기를,

“내 무슨 낯으로 그 단골 주인을 만나겠어.”

라고 하였다.


[제2화]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 추(樞)는 근세에 이름 있는 통역관이었으나 평소에 입에는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40여 년을 연경에 드나들었으되 그 손에는 일찍이 은을 잡아본 적이 없었으며, 근실한 군자(君子)의 풍도를 지녔다.”

한다.


[제3화]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은 명(明) 만력(萬曆) 때의 이름난 통역관으로서 명경(明京)에 들어가 어떤 기생 집에 놀러 갔었다. 기생의 얼굴에 따라서 놀이채의 등급을 매겼는데, 천 금이나 되는 비싼 돈을 요구하는 자가 있었다. 홍(洪)은 곧 천 금으로써 하룻밤 놀기를 청하였다. 그 여인은 나이 바야흐로 16세요, 절색을 지녔다. 여인은 홍과 마주 앉아서 울면서 하는 말이,

‘제가 애초 이다지 많은 돈을 요청한 것은 실로 이 세상에는 모두들 인색한 사나이가 많으므로 천 금을 버릴 자 없으리라 생각하고서 당분간의 모욕을 면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을 지나면서 관 주인을 속이는 한편, 이 세상에 어떤 의기를 지닌 남자가 있어서 저의 잡힌 몸을 속(贖)하여 사랑해 주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창관(娼館)에 들어온 지 닷새가 지났으나 감히 천 금을 갖고 오는 이가 없었더니, 이제 다행히 이 세상의 의기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公)은 외국 사람인 만큼 법적으로 보아서 저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시기에는 어렵사옵고, 이 몸은 한번 더럽힌다면 다시 씻기는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한다.

홍은 그를 몹시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창관에 들어온 경로를 물었더니, 여인은 답하기를, ‘저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 아무개의 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장물(贓物)에 얽매였으므로 이를 갚기 위하여 스스로 기생 집에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속하고자 하옵니다.’ 한다.

홍은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실로 이런 줄은 몰랐소이다. 이제 내가 당신의 몸을 속해 줄 테니 그 액수(額數)는 얼마나 되는지요.’ 했다.

여인은 말하기를, ‘이천 냥이랍니다.’ 하였다.

홍은 곧 그 액수대로 그에게 치르고는 작별하기로 하였다. 여인은 곧 홍을 은부(恩父)라 일컬으면서 수없이 절하고는 서로 헤어졌다.

그 뒤에 홍은 이에 대하여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중국을 들어갔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모두들 ‘홍순언이 들어오나요.’ 하고 묻기에, 홍은 다만 괴이하게 여겼을 뿐이었더니, 연경에 이르자, 길 왼편에 공장(供帳)을 성대하게 베풀고 홍을 맞이하면서, ‘병부(兵部) 석 노야(石老爺)께서 환영하옵니다.’ 하고는 곧 석씨(石氏)의 사저로 인도한다.

석 상서(石尙書)가 맞이하여 절하며, ‘은장(恩丈)이시옵니까. 공의 따님이 아버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답니다.’ 하고는 곧 손을 이끌고 내실로 들었다. 그의 부인이 화려한 화장으로 마루 밑에서 절한다. 홍은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석 상서는 웃으면서, ‘장인(丈人)께서 벌써 따님을 잊으셨나요.’ 한다.

홍은 그제야 비로소 그 부인이 곧 지난날 기생 집에서 구출했던 여인인 줄을 깨달았다. 그는 창관에서 나오게 되자 곧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던 바, 전보다 귀하게 되었으나 그는 오히려 손수 비단을 짜면서 군데군데 보은(報恩) 두 글자를 무늬로 수놓았다.

홍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보은단(報恩緞) 외에도 각종 비단과 금은 등을 이루 헤아리지 못할 만큼 행장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성이 병부에 있으면서 출병(出兵)을 힘써 주장하였으니, 이는 석성이 애초부터 조선 사람을 의롭게 여겼던 까닭이다.”


[제4화]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사람 장사치들과 친하고도 단골 주인인 정세태(鄭世泰)는 연경에서의 갑부(甲富)였다. 그러던 것이 세태가 죽자, 그 집은 곧 일패도지(一敗塗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만 손자 하나가 있었는데, 뭇 사내 중에 절색(絶色)이었으나 어려서 극장(劇場)에 몸을 팔았다.

세태가 살아 있을 적에 회계(會計)를 보던 임가(林哥)는 이때에 와서 이름난 부자가 되었는데, 극장에서 어떤 미남자가 연극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퍽 애처롭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정씨(鄭氏)의 손자인 줄을 알고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곧 천 금으로 그를 속(贖)해 집에 데리고 돌아와 집 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잘 대우하렷다. 이 이는 우리 집 옛 주인이니 결코 배우의 몸이라 해서 천시하지 말라.’ 하고는 그가 자라난 뒤에 그 재산의 절반을 나눠서 살림을 시켰다.

그는 몸이 살찌고 살결이 몹시 희며,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도 화려하였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이 다만 연(鳶) 날리기로써 성 안을 노닐 따름이었었다.”

옛날 이곳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는 봇짐을 끌러 검사하지 않고, 곧 연경에서 싸보낸 그대로 갖고 와서는 장부와 대조해 보아도 조금도 그릇됨이 없었다. 어느 때인지 흰 털감투로써 겉을 싼 것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끌러 본즉 모두 흰 모자였다. 그러나 저쪽에서 고의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저곳에서 검사해 보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후회하였더니, 정축년(1517년)에 두 번이나 국상(國喪)을 당하자 도리어 배나 되는 값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역시 그네들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전조(前兆)인 것이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화물을 반드시 스스로 단속하고, 단골집 주인에게 맡기지 않는다 한다.


[주D-001]국상(國喪)을 당하자 : 2월에는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국상이 있었고, 3월에는 인원 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국상이 있었다.


[제5화]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승업(卞承業)이 중한 병에 걸리자 곧 변돈 놀이의 총계를 알고자 하여 모든 과계(夥計) 장부(帳簿)를 모아 놓고 통계를 내어본즉, 은(銀)이 모두 50여 만 냥이나 적립되었다. 그의 아들이 청하기를,

‘이를 흩는다면 거두기도 귀찮을 뿐더러 시일을 오래 끌면 소모되고 말 테니 그만 여수(與受)를 끊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을 때

승업은 크게 분개하면서,

‘이는 곧 서울 안 만호(萬戶)의 명맥(命脈)이니 어째서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 하고는, 곧 빨리 돌려 보내게 하였다.

승업이 이미 나이 늙으매 그의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일찍이 공경(公卿)들을 섬겨본 적이 많은데 그들 중에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자기의 사사 이익을 꾀하는 이 치고 그 권세가 삼 대를 뻗는 이가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중에서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도 역시 국론(國論)인 만큼, 이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거야.’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자손이 번창하면서 모두들 가난한 것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흩어버린 까닭이다.”


[제6화]

나도 역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찍이 윤영(尹映)이란 이에게 변승업의 부(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는 애초부터 유래가 있어서 승업의 조부 에는 돈이 몇 만 냥에 지나지 않았더니, 일찍이 허씨(許氏) 성(姓)을 지닌 선비의 은 십만 냥을 얻어서 드디어 일국의 으뜸이 되었던 것이 승업에게 이르러서 조금 쇠퇴된 셈이다.

그가 처음 재산을 일으킬 때에 역시 운명이 있는 듯싶었다. 허생(許生)의 일로 보아서 이상스러우니, 허생은 끝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제 윤영의 이야기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은자주]<허생전>의첫 구는 "윤영이 말하기를[映之言曰]" 에 이어 시작된다.


[주D-002]
승업의……드디어 : 옥갑야화(玉匣夜話)로 되어 있는 여러 본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옥류산관본(玉溜山館本)’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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