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규수 작품

 

 

兩班傳(양반전)

◇ <兩班傳>의 성공 비결

1)충격적 소재:양반 매매.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의식 파괴-양반과 천부의 전도(顚倒) 신분 맞바뀜.

2)수사법:반어법(신분과 부의 불일치, 士族의 존칭에서 멀어진 양반론), 열거법(두 문권)

3)허상과 실상의 대비: 제일문권에서는 양반 행동양식의 허위의식을, 제이문권에서는 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를 고발함.

 

[은자주] 고전번역원의 주석을 첨가하였다. 주석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번거로움을 피해왔는데, 민추의 해박한 주석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어구가 맞지 않더라도 바로 위의 주석임을 감안하고 보면 된다.

 

 

1]권위의 상징인 양반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兩班者 士族之尊稱也.

'양반'이란 사족(士族)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旌善之郡 有一兩班 賢而好讀書.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현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每郡守新至 必親造其廬而禮之.

그래서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집에 몸소 나아가서 예의를 갖추었다.

然家貧 歲食郡糶 積歲至千石.

그러나 그는 살림이 가난해서, 해마다 관가에서 환자를 빌어먹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보니, 환곡(還穀)은 천 석이나 되었다.

觀察使巡行郡邑 閱糶糴 大怒曰,

관찰사가 여러 고들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환곡의 출납을 검열하고는 매우 노하였다.

“何物兩班 乃乏軍興?”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이렇게 축냈단 말이냐?"

命囚其兩班

그 양반을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郡守意哀 其兩班貧 無以爲償.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길이 없는 것을 없으니

不忍囚之 亦無可奈何.

차마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兩班日夜泣 計不知所出.

그 양반은 밤낮으로 울음을 삼켰지만 대책은 세우지 못했다.

其妻罵曰,

그의 아내는 불평을 털어 놓았다.

“生平 子好讀書 無益縣官糴. 咄 兩班. 兩班不直一錢.”

"한평생 당신은 글읽기를 좋아했지만, 관가의 환곡을 갚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은한 푼짜리도 못 되는 구려.”

 

[주D-001]한 푼짜리도 ……구려 :

양반(兩班)을 양반(兩半)으로 풀어 한 냥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2]부자 농부는 양반신분을 사서 양반이 되다.

其里之富人 私相議曰,

그 마을의 부자가 가족들과 서로 의논하였다.

“兩班雖貧 常尊榮 我雖富 常卑賤 不敢騎馬.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언제나 높고 영광스럽지만,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언제나 낮고 천하여 감히 말을 탈수도 없다.

見兩班 則跼蹜屛營 匍匐拜庭

양반만 보면 저절로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 밑에서 절해야 한다.

曳鼻膝行 我常如此 其僇辱也.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면서, 우리네는 줄창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한다.

今兩班貧 不能償糴 方大窘.

지금 저 양반이 가난해서 환자를 갚지 못해 몹시 곤란해질 모양이야.

其勢誠不能保其兩班 我且買而有之.”

참으로 그의 가세가 양반 신븐을 보전할 수 없으니 내가 그것을 사서 가지려 한다."

遂踵門 而請償其糴.

부자는 곧 양반의 집을 찾아가서 그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청하였다.

兩班大喜許諾.

양반은 크게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於是 富人立輸其糴於官.

그래서 부자가 곧 그 환곡을 관가로 수송했다.

郡守大驚異之 自往勞其兩班 且問償糴狀.

군수는 매우 놀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직접 양반에게 찾아가 위로하면서, 환자를 갚은 사정을 물으려 하였다.

兩班氈笠衣短衣 伏塗謁稱小人 不敢仰視.

그러자 양반은 벙거지를 쓰고 베잠방이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엎드려, '쇤네'라고 칭하면서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주D-002]벙거지 : 하인들이 쓰던 털모자.

郡守大驚 下扶曰,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며,

“足下 何自貶辱若是?”

"선생께서 어찌 이다지도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는지요." 하였다.

兩班益恐懼 頓首俯伏曰,

양반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惶悚 小人非敢自辱 已自鬻其兩班 以償糴 里之富人 乃兩班也.

"황송하옵니다. 쇤네가 감히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쇤네는 벌써 스스로 양반을 팔아 환자를 갚았으니, 마을의 부자가 바로 양반이옵니다.

小人安敢冒其舊號 而自尊乎?”

쇤네가 어찌 다시금 뻔뻔스럽게 옛날처럼 양반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 높이겠습니까?"

郡守歎曰,

군수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君子哉 富人也 兩班哉 富人也.

"군자답구려 부자시여. 양반답구려 부자시여.

富而不吝 義也 急人之難 仁也 惡卑而慕尊 智也 此眞兩班.

부유하면서도 아끼지 않음은 의(義)요, 남의 어려움을 돌봐 줌은 인(仁)이요, 낮은 신분을 싫어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함은 지(智)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雖然私自交易 而不立券 訟之端也.

비록 그러하더라도 사사로이 신분을 바꾸고 문권(文券)을 작성하지 않으면 소송의 단서가 된다.

我與汝約 郡人而證之 立券而信之 郡守當自署之.”

내가 그대와 약조하노니, 고을 사람들을 모아 증인을 세우고, 문권을 작성하여 증거하리라. 군수인 내가 마땅히 서명해야 하네."

 

於是 郡守歸俯 悉召郡中之士族 及農工商賈 悉至于庭.

군수가 곧 동헌으로 돌아와서 온 고들 사족과, 농민, 공장(工匠), 장사치까지 모두들 불러 뜰에 모았다.

富人坐鄕所之右 兩班立於公兄之下.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세웠다.

[주D-003]향소(鄕所)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주D-004]공형(公兄) :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및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한다.

 

 

3]문권 작성


1)제1문권 -양반의 행동규범[허위의식]

乃爲立券曰,

바로 증서를 작성하였다.

“乾隆十年九月日 右明文段

"건륭(乾隆) 10년 9월 모일에 아래와 같이 문권을 밝힌다.

[주D-005]명문(明文) : 증명서란 뜻으로, ‘적발’이라고도 한다.

국(厂下屮2)賣兩班 爲償官穀 其直千斛.

*厂下屮2(국):持也

양반을 팔아서 관가의 곡식을 갚은 일이 생겼는데, 그 곡식은 천 섬이나 된다.

維厥兩班 名謂多端

이 양반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讀書曰士 從政爲大夫 有德謂君子

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謂兩班.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양반'이라고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五更常起 點硫燃脂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目視鼻端 會踵支尻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東萊博議 訟如氷瓢.

"동래박의"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叩齒彈腦 細嗽嚥津 *嗽(수):기침.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袖刷毳冠 拂塵生派.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盥無擦拳 潄口無過. *潄(수):양치질하다.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長聲喚婢 緩步曳履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手毋執錢 不問米價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暑毋跣襪 飯毋徒髻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食毋先羹 歠毋流聲*歠(철):마시다.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下箸毋舂 毋餌生葱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嘬(최):물다. *窳(유):비뚤다.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忿毋搏妻 怒毋踢器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毋拳毆兒女 毋罵死奴僕. *毆(구):때리다.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죽일놈의 종놈이라고 꾸짖지 말아야 한다.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叱牛馬 毋辱鬻主.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病毋招巫 祭不齋僧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에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爐不煮手 語不齒唾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毋屠牛 毋賭錢.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도박도 하지 말아야 한다.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양반의 규범에 한 가지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城主 旌善郡守 押. 座首別監 證署.”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於是 通引搨印 *搨(탑):박다, 베끼다.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錯落聲中嚴鼓 斗縱參橫.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戶長讀旣畢.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양반이 겨우 이것뿐입니가?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 지나치게 재산을 몰수합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제2문권-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

 

於是 乃更作券曰,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維天生民 其民維四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焉.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橐. *橐(탁):전대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進士三十 乃筮初任 猶爲名蔭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은자주] 연암도 쉰 살에 음관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지체 높은 음관을 잘 섬기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희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됩니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室珥治妓 庭穀鳴鶴.

방안의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窮士居鄕 猶能武斷.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무력을 마음대로 단행할 수 있다.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灰灌汝鼻 暈髻汰鬢 無敢怨咨.”*暈(훈):무리. *咨(자):묻다.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4]부자 농부는 양반신분을 포기하다

 

富人中其券 而吐舌曰,

부자가 그 증서 만들기를 중지시키고, 혀를 빼면서 말하였다.

“已之已之 孟浪哉. 將使我爲盜耶?”

"그만 두시오. 제발 그만 두시오. 참으로 맹랑합니다. 나를 도둑놈이 되게 하시렵니까?"

掉頭而去

농부는 머리를 내두르며 달아났다.

終身不復言兩班之事.

그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양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금강산]







[주] 연암소설

①初期九傳; 放경閣外傳 自序(연암집 권8)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광문자전,양반전,김신선전,우상전

(역학대도전,봉산학자전 二篇은 焚失)

②中期二篇;(연암집 권11~15, 別集 熱河日記 수록)

호질(권12 關內程史),허생전(권14,玉匣夜話)

③後期一篇; 열녀함양박씨전(권1, 연상각선본)

 

󰡔放璚閣外傳󰡕 自序>(󰡔燕岩集󰡕 권8, 別集)

[注]①外傳;㉠對內傳而言 謂其文不主於解經也. ㉡凡人爲正史所不載 而別爲立傳. 或於正史外 別爲記載者 皆曰外傳.

【마장전】

友居倫季 벗이 五倫의 끝에 자리를 잡은 것은

[주D-001]오륜 …… 것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차례를 두고 한 말이다.

匪厥疎卑 결코 낮은 위치에 둔 것이 아니라

如土於行 마치 土가 五行 중에서 [끝에 있으나 실은]

寄王四時. 四時의 어느 것에 흙이 해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주D-002]마치 …… 같다네 :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나무〔木〕의 기운이 왕성하고, 여름에는 불〔火〕의 기운이 왕성하고, 가을에는 쇠〔金〕의 기운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물〔水〕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흙〔土〕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 90일에서 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 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親義別敍 그러므로 아무리 父子가 친함이 있고, 君臣이 정의를 지니고,夫婦가 분별이 있고,長幼가 차례가 있다 하더라도

非信奚爲?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常若不常 윤상(倫常)이 상도(常道)에서 어긋나면

友迺正之 벗이 곧 바로잡으니[주D-003]상도(常道)가 …… 시정하나니 : 인의예지(仁義禮智)에다 신(信)을 보태어 오상(五常)이라 한다. 본래 신은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인의예지에 추가된 것이었다.

所以居後乃殿統. 뒤에 있더라도 실은 그 넷을 포괄한다.

斯三狂友 이제 송욱, 조탑타, 장덕홍 등의 세 狂士가

遁世流離 서로 벗을 삼아 속세에 몸을 뽑아내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論厥讒諂저 참소하고 아첨함을 논평하여

若見鬚眉 [그들의 행동하는 꼴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주D-004]그들의 …… 듯하네 : 《순자(荀子)》 해폐(解蔽)에, 인심(人心)을 대야의 물에 비유하면서, 대야의 물을 안정시켜 혼탁한 것들을 가라앉히면 “수염과 눈썹을 볼 수 있다〔足以見鬚眉〕”고 했다.

於是述馬駔. 이에 《마장전》을 쓴다.

 

【예덕선생전】

士累口腹 선비가 구복(口腹)으로써 몸을 더럽힌다면

百行餒潔 여러 가지 행실이 결핍될 것이며

鼎食鼎烹 큰 솥에 많은 음식을 쌓아 놓은 이는

[민추역: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주D-005]호화롭게 …… 해도 : 정식(鼎食)은 솥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뜻하고, 정팽(鼎烹)은 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不誡饕餮 음식 탐하는 자를 경계하지 않을 법이다.*饕餮(도철):탐하다.

[민추역: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嚴自食糞 이제 엄항수는 스스로 똥을 날라서 먹을 것을 장만한다.

[주D-006]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에는 “엄 행수는 제힘으로 먹고살았으니〔嚴自食力〕”로 소개되어 있다.

迹穢口潔 그의 자취는 더러우나 그의 입은 정결하다.

於是述穢德先生.이에 《예덕선생전》을 쓴다.

 

【민옹전】

閔翁蝗人 민옹은 사람을 황충[곡식 축내는 벌레]으로 여겼고

學道猶龍 도(道)를 배워서 [그의 조화는] 龍과 같았다.

[민추역: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주D-007]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託諷滑稽 골계(滑稽)에 취미를 붙여

翫世不恭 이 세상을 비웃었으며

書壁自憤 그는 해마다 바람벽에 글을 써서 스스로 분발하고

可警惰慵 게으름을 경계하였다.

於是述閔翁. 이에 《민옹전》을 쓴다.

 

【양반전】

士迺天爵 선비란 곧 천작(天爵)이었으며,

[주D-008]천작(天爵) : 인작(人爵)의 대립 개념으로, 천부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士心爲志 선비의 마음은 곧 志字가 되는 것이다.

[주D-009]선비의 …… 뜻이라네 : ‘지(志)’라는 글자의 구조를 ‘士’와 ‘心’의 결합으로 풀이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는 이와 다르다.

其志如何 그러면 그 지(志)란 무엇인가?

非謨勢利 첫째 권세와 이익을 꾀하지 말 것이니,[

達不離士 선비는 몸이 비록] 현달하더라도 선비에서 떠나지 않고,

窮不失士 몸이 비록 곤궁하더라도 선비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

不飭名節 [지금 소위 선비들은] 名節을 닦기에는 힘쓰지 않고

徒貨門地 부질없이 문벌(門閥)만을 기화(奇貨)로 여겨

酤鬻世德 그의 세덕(世德)을 팔고 사게 되니,

商賈何異? 저 장사치와 무엇이 다른가?

於是述兩班. 이에 《양반전》을 쓴다.

 

【김신선전】

弘基大隱 김홍기는 당세의 大隱이다.

[주D-010]대은(大隱) : 은자에도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의 등급이 있다. 산중에 숨어 사는 은자가 소은이라면, 진정으로 위대한 은자인 대은은 하층 민중이나 다름없이 시중에서 산다.

迺隱於遊 그는 도시나 名山의 놀음에 은둔했고,[

淸濁無失 그의 처세는] 淸과 濁에 그르침이 없어서

不忮不求 남을 헐뜯지도 않고 남에게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주D-011]남을 …… 않았네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 구절이다.

於是述金神仙. 이에 《김신선전》을 쓴다.

 

【광문자전】

廣文窮丐 광문은 곤궁하여 밥을 빌었다.

聲聞過情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치나

[주D-012]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다.

非好名者 이름을 좋아하는 자는 아니었다.

猶不免刑 오히려 [그는 그를 몰라주는 야비한 비렁뱅이 아이들은] 그를 죽이려 했다.

矧復盜竊 하물며 또다시 도적이 되어

要仮以爭 거짓말을 두고 다투었으랴!

於是述廣文.이에 《광문전》을 쓴다.

 

【우상전】

孌彼虞裳 아리따운 저 우상은

力古文章고문(古文) 짓기에 힘썼다.

禮失求野 고례(古禮)를 상고할 곳이 없으면 오로지 野人에게 구하여서

[주D-013]서울에서 …… 구한다더니 :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 《연암집》 권3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亨短流長 단점을 형통케 하고 장점을 유지시킨다.

於是述虞裳. 이에 《우상전》을 쓴다.

 

【역학대도전】

世降衰季 세상이 쇠퇴한 말기로 오면

崇飾虛僞 허위를 숭상하고 꾸민다.

詩發含珠 시경에서는 죽은 이의 입에 문 구슬을 꺼집어 내고②,

②南華經 권9.雜篇 外物26. 詩固有之曰 靑春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接其鬢 壓其頻 儒以金椎控其頣 徐別其頰 無傷口中珠.

[주D-014]시를 …… 도굴하는 :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시경》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나온다.

愿賊亂紫 시골에서 근후한체 하는 것은 덕을 해치고,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고 間色이 正色을 빼앗으며[惡貨가 良貨를 驅逐하고],

③愿賊,論語 陽貨13. 子曰 鄕原 德之賊也.原=愿(성실할 원)[시골에서 근후한 체하는 것은 덕을 해치는 것이다.]

④亂紫,論語 陽貨18.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자색이 주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재주를 피어 나라를 전복하는 것을 미워한다.

[주D-015]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향원(鄕愿)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鄕愿 德之賊也〕”라고 했으며, 또한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

逕捷終南 종남산에 들어가 벼슬의 첩경으로 삼음은⑤

⑤당서 列傳48. 盧藏用 노장용이 출세의 야욕을 품고 서울 가까운 종남산에 들어가 숨어서 仕路를 노리다가 司馬 承 禎으로부터 「南山은 仕宦의 捷徑이다.」라는 기롱을 받다.

[주D-016]은자인 …… 짓을 : 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從古以醜 예로부터 추악하게 여겼다.

於是述力學大盜. 이에 《역학대도전》을 쓴다. [주D-017]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관한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봉산학자전】

入孝出悌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우애하면

未學謂學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더라도 배웠다고 말한다.

[주D-018]집에서 …… 하리니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자제들은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고 했으며, 자하(子夏)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호색하는 마음을 바꾸며 …… 벗과 사귈 때 말이 믿음직하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賢賢易色 ……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했다.

斯言雖過 이 말이 비록 지나칠지라도

可警僞德 거짓 덕을 지닌 이에겐 경계가 될 만하다.

明宣不讀 공명선은 독서하지 아니하였으나

三年善學 3년만에 잘 배웠고⑥

⑥公明宣:曾參(B.C.505-?)의 제자.《說苑》권20. 反質 3년간 자기 문하에 있으면서 글을 배우지 않는 공명선에게 증삼이 그 까닭을 물었다. 공명선이 답했다.

◇安敢不學 宣見夫子居宮庭 親在 叱咤之聲 未嘗至於犬馬.

◇宣見夫子之應賓客 恭儉而不懈情.

◇宣見夫子之應朝廷 嚴臨下 而不毁傷 宣說之 學而未能 宣說之此三者 學而未能 宣安敢不學 而居夫子之門乎. 曾參避席 謝之曰 參不及宣 其學也已.

[주D-019]공명선(公明宣)은 …… 배웠으며 :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農夫耕野 농부가 들에서 밭갈이할지라도

賓妻相揖 아내를 손님처럼 여겨 서로 절하니

目不知書 눈으로 글자를 모르더라도

可謂眞學 진짜 배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於是述鳳山學者. 이에 《봉산학자전》을 쓴다. [주D-020]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50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 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

*初期九傳 중 遺失二篇: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유실됨

외숙

지계공(芝溪公)

의 말씀을 듣건대, “역학대도전은 당시에 선비로서의 명성을 빌려 권세와 이권을 몰래 사들여 기세등등한 자가 있어서 부군(府君)이 이 글을 지어 기롱한 것인데, 대개

노소(老蘇)

의 변간론(辨姦論)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패가망신 당하자, 부군이 마침내 이 글을 불살라 버렸으니, 대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자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편 우상전에 결락이 있고 하편들이 유실된 것은 권질(卷帙)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함께 없어진 것이다.” 하였다.
아들

종간(宗侃)

이 삼가 쓰다.

[주D-001]지계공(芝溪公)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다. 호를 지계(芝溪)라 하였다.


[주D-002]노소(老蘇) :

소식(蘇軾)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을 가리킨다. 소순은 변간론(辨姦論)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주D-003]종간(宗侃)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의 초명(初名)이다. 그의 형 박종의(朴宗儀)는 백부 박희원(朴喜源)의 양자가 되었다.

이상 아홉 편의 전은 다 아버님이 약관 시절에 지은 것으로서, 집에 장본(藏本)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서 얻어 왔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이들 작품을 없애 버리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젊었을 적에 작가에 뜻을 두어 작문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도 더러 이 작품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하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비록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는 싶지만, 사람들이 전파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러한 일로 외숙 지계공께 상의를 드렸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선공(先公)이 지은 논설 중에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것이 많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사실 저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있건 없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젊었을 때의 작품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예로부터 문장가들에게는 이와 같이 유희 삼아 지어 보는 작품이 없지 않았으니, 반드시 폐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반전 한 편은 속된 말이 많아서 조그마한 흠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실로

왕포(王褒)의 동약(僮約)

을 모방하여서 지은 것이니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하였으므로, 불초한 우리 형제가 감히 함부로 취사(取舍)를 할 수 없어, 별집(別集)의 말미에 붙여 둔다.
아들 종간이 삼가 쓰다.
[주D-004]왕포(王褒)의 동약(僮約) : 노비 계약을 다룬 글로서 그 내용은, 왕포가 양혜(楊惠)라는 과부의 집에 들렀다가 오만하게 술심부름을 거부하는 양혜의 노비 편료(便了)를 샀는데, 그 노비문서에서 노비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 조항까지도 세세하게 밝혀 놓음으로써 편료를 길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왕포는 전한(前漢) 시대의 인물로 사부(辭賦)에 능했다. 《古文苑 卷17 僮約》

 

[금강산]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주수 작품]

 

[주]특기사항을 표시하여 다시 읽어본다.

 

연암 박지원 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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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연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연암 박지원의 연보이다.[1] 10대까지[편집] 1737년 음력 2월 5일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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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연암 박지원 연보이다.[1]

목차

10대까지

1737년 음력 2월 5일

  •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 아현동쯤인 듯하다. 야동은 1850년대 방각본 고소설을 간행하던 곳이었다)에서 아버지 사유(師愈, 1703-1767)와 어머니 함평 이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2월 5일 축시에 출생.
  • 휘는 지원, 자는 중미, 호는 연암이었다.
  •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 부사를 지냈으며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 이후 대단한 명문가였다.

1739년(3세)

  • 형 희원 장가 들다. 형수는 이씨로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연암을 잘 돌보았다.
  • 옛 사람의 편침(扁枕) 온피(溫被) 같은 것을 흉내내었다.

1741년(5세)

  • 경기도 관찰사를 제수 받은 조부를 따라갔다가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말하였다.

1752년(16세)

  •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웠다. 연암이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전’을 지었는데, 반고사마천과 같은 글 솜씨가 있다고 크게 칭찬받았다.
  • [은자주]처숙 이량천이게서 사기, 좌전, 국어 등의 역사서와 한유, 유종원, 두보의 시문을 배우다. 사마천의 발분(發憤)의 정신과 사실에 바탕한 시문의 글쓰기는 이때 터득되고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명말청초 이지(李摯)의 동심설(童心說)에서 크게 확충되었다.

1754년(18세)

  •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 보고자 했다. ‘민옹전’에 나오는 민유신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 거지 광문의 이야기로 ‘광문자전’을 썼다.
  • [은자주] 발경각외전에 수록한 초기구전은 이때부터 30대 초반까지 창작되었다. 구전중최고 걸작은 <양반전>이다. 신분사회에서 양반을 매매하다니....이제 조선의 양반사회는 붕괴되었다.

1755년(19세)

  •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영목당 이양천이 4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연암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을 지었다.

20대

1756년(20세)

  •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서 허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 이 무렵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었다.

1757년(21세)

  • 시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을 듣고 ‘방경각외전’을 썼다.
  • 불면증과 우울증이 깊어졌다.

1759년(23세)

  • 어머니 함평 이씨가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 「독례통고(讀禮通考, 북학파 인사들의 관심을 모은 책)」를 초(抄)하였다.
  • 후일 이종목(李鍾穆)에게 출가한 큰딸이 태어났다.

1760년(24세)

  • 할아버지 박필균이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조부는 노론을 지지했던 선비로, 사간원정언, 경기관찰사, 예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내고 지돈녕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조부의 신중한 처신과 청렴한 생활은 연암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761년(25세)

  • 북한산에서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 때 수염이 은백이 되었다고 한다.
  •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썼다.
  •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에게 주역을 배웠고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났다.
  • 성균관 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 놓아 과거에 뜻이 없음을 보였다.

1764년(28세)

  • 효종이 북벌 때 쓰라고 송시열에게 하사했다는 초구를 구경하고 ‘초구기(貂汨記)’를 썼다.
  • <양반전>과 <서광문전후>를 지었다.

1765년(29세)

  • 벗 김이중(金履中, 1736-1793)이 나귀를 팔아 마련해준 돈으로 가을에 유언호, 신광온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다. 이 글은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판서 홍상한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한다.
  • <김신선전>을 지었다.
  • 홍대용이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연행을 하였다(12월 27일 북경 도착, 다음 해 5월 2일 귀향).

30대

1766년(30세)

  • 장남 종의가 태어났다.
  • 홍대용이 중국 문인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한 ‘건정동회우록(乾淨隙會友錄)’의 서문을 썼다. 홍대용과 중국 사람들의 우정을 예찬하고, 청을 무조건 배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2]

1767년(31세)

  • 아버지 박사유가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장지 문제로 녹천 이유 집안과 시비가 벌어졌다. 이 일로 상대방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렸던 이상지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연암도 스스로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 삼청동에 있는 무신 이장오의 별장에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을 지었다.

1768년(32세)

  • 백탑 근처로 이사해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등과 가까이 지냈다.
  •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가 제자로 입문하였다.
  • [은자주]탑골공원 백탑 주위에 살던 이들의 북학파 그룹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불교사를 연구하는 남동신 서울대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1일 공개한 학술지 '미술자료' 제100호에 낸 논문에서 "현재 국가가 공인하고 있는 원각사지 석탑 10층설에는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어 13층설로 돌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조선 세조가 1467년 세운 원각사지 석탑은 높이가 12m이다. 문화재청은 이 탑에 대해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 구조 등이 고려시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남 교수는 "언젠가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이 내려졌다"며 그 이유로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일본으로 반출하려 했다는 설 등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110153600005

 

"국보 원각사탑은 13층…日학자 주장 '10층설'에 오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10층이 아닌 13층으로 봐야 하며, 비판 없이 통용되고 있...

www.yna.co.kr

* 10층은 오류 - 홀수가 陽이므로 모든 탑은 홀수임.

[국보 2호] (현재)십층석탑< 13층  *세조 원각사> 탑골공원> 삼일공원(팔각정에서 독립선언문 낭독)

https://www.youtube.com/watch?v=ydi1l-6EPQk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378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

팔각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99(종로2가) 탑골공원 내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정자이다.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73호이다. 팔각정의 건립 시기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지 못하나,

ncms.nculture.org

 

1769년(33세)

  • 이서구가 쓴 문집인 녹천관집(綠天館集)의 서문‘옛 사람을 모방해서야〔綠天館集序〕’를 썼다.

1770년(34세)

  •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려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응시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아예 노송과 괴석을 그려 제출하여 벼슬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이후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고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 벗들과 북한산의 대은암에 놀러가 시와 문장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의인과 소인배[大隱菴唱酬詩序]’를 썼다.

1771년(35세)

  • 큰누님 박씨가 43세로 돌아가셨다. 누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을 썼다.
  • 이덕무, 백동수 등과 송도, 평양을 거쳐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고, 황해도 금천 연암골을 보고는 몹시 좋아했다.
  • 장지 문제 발생하여 이상지(李商芝, 1729-1799)와 크게 다투었다.

1772년(36세)

  • 식솔들을 광릉 석마향(石馬鄕,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 일대)에 있는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 가까이 지내던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벗들과 더욱 친하게 사귀었다.
  • 이서구가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를 쓰자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酬素玩亭夏夜訪友記〕’를 써서, 소탈하게 지내던 자신의 생활을 그려 보였다.
  • 삼종질 박종덕의 아들 수수가 29세로 죽자, ‘족손증홍문정자박군묘지명(族孫贈弘文正字朴君墓誌銘)’을 썼다.
  • 벗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영대정잉묵映帶亭刷墨’을 펴고, 스스로 서문을 썼다.
  • 박제가의 문집 《초정집(楚亭集)》에 법고창신의 문학론을 담아 서문을 썼다. [3]

1773년(37세)

  • 유등곡, 이덕무와 서도를 유람했다. 허생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윤영을 또 만났다.

1774년(38세)

  • 송나라 이당의 그림 ‘장하강사(長夏江寺)’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내력을 기록한 ‘제이당화(題李唐畵)’를 썼다.

40대

1776년(40세)

  • 북학파의 문집인 '한객건연집'이 중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중국인 이조원이 ‘사가지시(四家之詩)’라 하여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 더 유명하였다.
  • [은자주]이서구를 제외한 삼인은 서얼 검서관 출신에 연행기를 남겼다.

1777년(41세)

  • 장인 이보천이 64세의 나이로 죽었다. 장인을 추모하는 글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을 썼다.

1778년(42세)

  •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했다.
  •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왔던 형수 이씨가 55세로 돌아가셨다.
  •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에 은둔하였다. [4]초가삼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도 심었다. 형수의 유해를 연암으로 옮기고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을 썼다.
  • (4)정조의 비인 효의 김씨가 생산을 하지 못하자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 원빈 홍씨로 입궁시켜 원자를 얻은 뒤 득세하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연암이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에게는 전달 안 되었고, 이 사건으로 홍국영은 연암을 미워하게 되었다.
  • [은자주]집앞 깎아지른 듯한 바위 틈에 제비집이 있어 그 후로 호를 연암이라 하다.
  • 유언호가 연암에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뒤 유언호에게 편지 ‘웃음의 말[答兪士京書]’을 썼고, 왕이 내린 귤첩을 보내준 데 대한 감사로 ‘사유수송혜내선이귤첩謝留守送惠內宣二橘帖’을 써서 보냈다.
  • 유언호의 도움으로 개성 금학동에 있는 양호맹의 별장에 머물면서 이행작, 이현겸, 양상회, 한석호 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연암을 찾아온 유언호와 젊은 날 금강산을 유람한 일을 두고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여 ‘내가 하나 더 있어서[琴鶴洞別墅小集記]’를 썼다. 금학동 별장 안에 있는 만휴당에 붙인 글 ‘늘그막에 휴식하는 즐거움[晩休堂記]’을 썼다.
  • 다시 연암골로 돌아왔다. 개성에서 만난 유생들이 따라와서 글을 배웠다. 이 무렵의 생활은 ‘산중지일서시이생山中至日書示李生’에 잘 담겨 있다.

1779년(43세)

  •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에 쓴 ‘답홍덕보서答洪德保書’ 세 통은 홍대용에게 연암골 생활을 전하고, 세 사람이 기용된 것을 축하한 편지들이다. [5]

1780년(44세)

  • 홍국영이 실각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렀다.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연암은 <열하일기> <산장잡기> ‘후지(後識)’에서 “평생토록 괴이함을 봄에 열하에 있을 때를 능가한 적이 없었다(平生詭異之觀 無逾在熱河之時)”라고 그 놀라움을 적었다.
  • 둘째 아들 종채가 태어났다.
  • <허생전>, <호질>을 짓다.
  • [은자주]<허생전>, <호질>을 열하일기 안에 수록하다.

1781년(45세)

  •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얼룩소 2마리, 공책 20권, 돈 200민(緡) 등을 보내면서 연암의 <열하일기> 저술을 격려해주었다.
  • 박제가가 쓴 《북학의北學議》에 서문을 썼다.[6]
  • 친구 정철조가 죽어 그를 위해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을 지었다.

1783년(47세)

  • 연암에게 글을 배우던 박경유의 처가 남편을 따라 죽자, ‘열부이씨정려음기烈婦李氏旌閭陰記’를 썼다.
  • 벗이었던 담헌 홍대용이 53세로 죽었다. 손수 염을 하고, 담헌이 중국에서 만난 벗 손유의에게 부고를 전했다. ‘나의 벗 홍대용[洪德保墓誌銘]’을 썼다. 이 충격으로 이후 연암은 음악을 끊었다.
  • 《열하일기》의 첫 편 ‘압록강을 건너서〔渡江錄〕’의 머리말을 썼다.
  • [은자주]연암협을 드나들며 열하일기를 완성하다.

50대

1786년(50세)

  • 7월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 연암이 음보(蔭補)로 처음 출사하자 노론 벽파의 실력자 심환지(沈煥之), 정일환(鄭日煥) 등이 찾아와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연암은 그때마다 해학적인 말로 쫓아내었다.
  • [은자주]30대 중반 과거를 포기한 후 조상 덕에 음관에 올라 처음으로 국록을 받다.

1787년(51세)

  •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부인의 상을 당하여 이를 애도한 절구 20수를 지었다하나 전하지 않는다. 박지원은 그 뒤로 죽 혼자 지냈다. [7]
  • 큰형 희원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형을 보내면서 쓴 시 ‘연암에서 돌아간 형님을 생각하고[燕巖億先兄]’를 보고,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 한다.
  •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다. 연암은 우암 송시열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논한 대목에 전아(典雅)하지 못한 칭위(稱謂)가 있어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한다.

1788년(52세)

  • 부인이 죽은 지 1년 만에 맏며느리 덕수 이씨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장남 종의도 위독했으나 회생했다.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처를 얻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 종제 박수원이 선산부사로 나가 있는 동안 계산동 집을 빌렸다.
  • 선공감 제조인 서유린이 자문감 일을 함께 하면서 대궐의 춘장대를 보수해야 했는데, 연암이 벽돌을 구워 쓰는 것이 견고하고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제안하여 중국 제도에 따라 가마를 제작하고, 벽돌 크기도 중국의 제도를 따랐다. 《열하일기》에 쓴 그대로 하여 비용을 절감했으나 그때는 쓰지 못했고, 후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해 성을 쌓았다.

1789년(53세)

  • 평시서주부로 승진했다. [음관으로 출사함, 이 시기에 생애 처음으로 녹봉을 받음 .]
  • 문하생 최진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치암최옹묘갈명癡菴崔翁墓碣銘’을 지어 주었고, 개성의 선비 김형백이 죽자 ‘취묵와김군묘갈명醉默窩金君墓碣銘’을 써서 죽음을 애도하였다.
  • 가을에 공무의 여가를 얻어 다시 연암골로 들어갔다.

1790년(54세)

  • 삼종형 박명원이 66세로 돌아가셨다. 누구보다 연암의 뛰어난 재질을 아끼고 사랑했던 형이었다. 박지원은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을 썼다.
  • 사복시주부로 전보되었으나, 사퇴하였다.
  • 사헌부감찰로 전보되었으나, 사퇴하였다.
  • 제릉령에 임명되자 한가로운 곳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저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연암골 가까이에서 일하게 되어 일에서 벗어나면 연암골에서 하루 이틀 소요하였다. 말단 벼슬아치로 유유자적 지내는 모습을 ‘재거齋居’란 시로 썼다.

1791년(55세)

  • 한성부판관에 임명되었다. [8]
  • 모함을 받아 강등되어 겨울에는 안의현감으로 부임했다.

1792년(56세)

  • 1월, 임지 안의에 도착. 안의는 거창현과 함양군을 이웃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5천여 호였다. [9]
  • 현감으로 있는 동안 현풍 사람 유복재를 죽인 범인에 대해 논한 ‘답순사논현풍현살옥원범오록서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와 밀양 사람 김귀삼 살인 사건을 논한 ‘김귀삼의 살인 사건[答巡使論密陽金貴三疑獄書]’과 함양 사람 장수원의 살인 사건을 논한 ‘장수원의 강간 미수 사건[答巡使論咸陽張水元疑獄書]’과 밀양 사람 윤양준의 살인 사건을 논한 ‘답순사논밀양의옥서答巡使論密陽疑獄書’와 함양 사람 조판열의 죽음을 논한 ‘답순사논함양옥서答巡使論咸陽獄書’ 들을 썼다.
  • 삼종질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취임을 축하하면서 ‘천하 사람의 근심을 앞질러 근심하시오[賀三從姪宗岳拜相因論寺奴書]’를 썼고, 벗 김이소가 우의정에 임명되자 ‘화폐가 흔한가 귀한가[賀金右相履素書]’를 써서 축하했다. 이 편지에는 화폐 유통을 바로잡고 은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에 대한 의견을 썼다.
  • 문체반정의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1793년(57세)

  •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임금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 벗 이덕무가 53세로 죽었다. 정조가 이덕무의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 행장炯菴行狀’을 썼다. 이덕무의 유고집을 내었다.
  • 흉년이 들자 자기 녹봉을 덜어 백성을 구했다. 공진 설치를 거절하는 ‘답순사론진정서答巡使論賑政書’와 다른 고을 수령들과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길에 대해 의논한 ‘굶주린 백성이 살 길[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答大邱判官李侯論賑政書]’를 썼다.
  • 벽돌을 구워 관아에 새로 정각들을 지었다. 이때 ‘백척오동각을 지어 놓고[百尺梧桐閣記]’, ‘연암의 제비가 중국에서 공작새를 보았다[孔雀館記]’, ‘아침 연꽃, 새벽 댓잎[荷風竹露堂記]’ 들을 지었다. 고을 아전들이 전에 있던 현감 곽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칭찬한 ‘곽공을 제사 지내며[安義縣縣司祀郭侯記]’, 거창읍 이술원에게 정려가 내린 일을 기록한 ‘충신증대사헌이공술원정려음기忠臣贈大司憲李公述原旌閭陰記’ 들도 이 무렵에 썼다.
  • 지나친 수절 풍습을 비판한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를 썼다.
  • 계속 유한준의 모함을 받았다.

1794년(58세)

  •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워, 창고에 곡식을 10만 휘나 쌓아 두게 되었는데, 호조판서가 그것을 팔 것을 제안하나 수입이 생길 것을 꺼려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 버렸다.
  • 함양군수의 부탁으로 학사루를 수축한 전말을 기록한 ‘천년 전의 최치원을 기리며[咸陽郡學士樓記]’를 썼고, 함양군에 새로 지은 학교 흥학재에 부치는 ‘흥학재를 지은 뜻[咸陽郡興學齋記]’도 썼다.
  • 장남 종의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려 하자, 이서구가 성균관장으로 있다고 편지를 보내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1795년(59세)

  • ‘보름날 해인사에서 기다릴 것이니[海印寺唱酬詩序]’를 썼고, 장편시 ‘해인사海印寺’도 썼다.
  • 전라감사 이서구가 천주교를 비호한다고 유배를 가자 ‘답이감사적중서答李監司謫中書’를 보내 위로했다.
  • 차남 종채가 혼인하였다.

60대

1796년(60세)

  • 안의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며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 안의현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로구 계동에 벽돌을 사용하여 계산초당을 지었다. 아들 박종채가 머물렀고, 손자 박규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제용감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도사로 전보되었다.
  • 벗 유언호가 67세로 죽었다.
  • [은자주]유언호는 연암에게 자주 경제적 도움을 주었는데 음관 출사도 은자는 그의 도움으로 추정한 바 있다.

1797년(61세)

  •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고, 이때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라는 글을 쓰게 됐다.
  • 충청감사와 불화를 겪고 있을 때 ‘답공주판관김응지서答公州判官金應之書’를 썼다. [10]

1798년(62세)

  • 연암이 있던 면천군에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방면했다.

1799년(63세)

  • 봄에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 했던 것처럼 봉록을 덜어 백성을 구휼했다.
  • 농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썼다. ‘부자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어라[限民名田議]’가 부록으로 붙어 있는데, 중국에 갔을 때 본 것들과 우리 나라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묶어 14권의 책으로 엮었다. 정조가 이 책을 보고 농서대전을 박지원에게 편찬케 해야겠다는 말을 하였다.

1800년(64세)

  • 6월에 정조가 승하했다.
  • 8월에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1801년(65세)

  • 봄에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다.
  •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1802년(66세)

  • 겨울, 아버지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하려다가 유한준이 방해하여 좌절되었다. 유한준은 평소 연암에게 유감을 갖고 있어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책’이라며 비방을 일삼았던 사람이다.[11]

1805년(69세)

  • 박지원은 10월 20일,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69세 나이에 죽었다. 홍대용이 그랬던 것처럼 반함(飯含)하지 말고, 다만 깨끗하게 씻어 달라고만 유언을 남겼다.

사후

1826년

  • 둘째 아들 박종채가 부친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을 완성했다.
  • (1831년에는 《과정록》을 보완하였다.)

1900년

  • 김택영이 편찬한 <연암집>이 간행되었다.
  • 연암집의 저본은 57권 18책. 필사본.
  • 저자의 사후 아들 종간(宗侃)이 편집하여 57권 18책의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초간본은 김택영에 의해 1900년에 원집이 나왔다. 원집은 6권 2책,

1901년

  • 김택영이 편찬한 <연암속집>이 간행되었다. 속집은 3권 1책.

1911년

  •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한 <연암외집 열하일기 전全>이 간행되었다. 《열하일기》가 따로 출판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14년

  • 김택영이 망명지 중국에서 〈연암집〉과 〈연암속집〉을 합해서 <중편 박연암 선생 문집>을 간행했다.
  •  
  • 1914년 김택영이 다시 원집과 속집을 합해 7권으로 줄여 정리한 중편본(重編本)을 냈다.
  •  
  • 이 초간본은 고활자본으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관점에서 문장을 골라 실은 것이다.

1921년

  • 김택영이 조선 시대 한문학자들의 좋은 글을 묶어서 《여한십가문초》를 냈는데, 그 안에 박지원의 글이 많이 들어 있었다.

1932년

    • 박영철이 돈을 대어 <연암집>이 간행되었다. 전부 17권 6책을 대동 인쇄소에서 인간하였다.
    •  

1932년 박영철이 편집하여 간행한 중간본은 박지원의 모든 문장을 빠짐없이 싣는다는 취지 아래 종간의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고 〈열하일기〉·〈과농소초〉 등을 별집으로 덧붙여 17권 6책의 신활자본으로 펴냈다.

    •  

[은자주]각 대학의 도서관본은 대개 이 책이다.

  •  

1955년

  • 북의 국립출판사에서 《열하일기 상》을 출판했다. 중권은 1956년, 하권은 1957년에 간행했다.

1959년

  • 북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에서 《열하일기 상》을 출판했다. 하권은 1960년에 간행했다.

1967년

  • 남의 민족문화추진회가 이가원이 옮긴 《열하일기》를 펴냈다. 1987년에 한 번 더 인쇄했다.

1983년

  • 남의 박영사가 윤재영이 옮긴 《열하일기》를 펴냈다.

1991년

  • 북의 문예출판사에서 《박지원 작품집 1》을 〈조선고전문학선집〉 제66권으로 간행했다. 이 책은 보리 출판사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겨레고전문학선집 4)라는 제목으로 펴낸다.

1995년

  • 북의 문예출판사에서 《박지원 작품집 2》가 〈조선고전문학선집〉 제67권으로 나왔다. 이 책은 보리 출판사가 《열하일기 상》(겨레고전문학선집 1)으로 펴낸다.

[손자 박주수 작품]

[추가]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1737%EB%85%84)#.EC.83.9D.EC.95.A0

박지원 (1737년)

목차

참고 자료[편집]

 

  •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게. 2006년. ISBN 89-7199-237-9
  • 최정동,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푸른역사. 2005년. ISBN 89-91510-10-8
  • 김지용, 《연암 박지원의 이상과 그 문학》. 명문당. 2005년.
  • 박수밀,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태학사. 2005년.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년.
  • 이현식, 《박지원 산문의 논리와 미학》. 이회문화사. 2002년.
  • 김혈조, 《박지원의 산문문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년.
  •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 조선조 근대화의 기수》. 한양대학교출판부. 2000년.
  • 강혜선, 《박지원 산문의 고문 변용 양상》. 태학사. 1999년.
  •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비. 1990년.
  • 간호윤, 《개를 키우지 마라》. 경인문화사, 2005년.

 

  • 김영동, 《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88년.
  • 김영동, 증보《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93년.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7182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주수 작품]



 

 

 

[사진]1988년 내가 처음 출간했던 책의 표지입니다. 1993년 작품 및 관련 자료를 얹어 증보판을 출간하였습니다.

[주]중학동기 한 분이 동기들 홈피에 <호질>을 소개한 글이 있어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섭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섭님의 탐구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열하일기> 25권은 조선후기에 쓴 책 중 베스트셀러에 속합니다.

내용면에서도 박제가의 <북학의>와 함께 당대 양반관료지식인 그룹이 몰두하던 성리학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로 개설과 수레의 제작, 해외무역 등을 통한 물류의 유통, 수로(水路)와 수차(水車)의 개발 등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 북학파의 주장을 대변합니다. 조선 후기 지성의 압권이라 할 만합니다.

북한의 <조선문학사>에도 이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호질’이란 제목은 없고, <범의 꾸중>이라고 제목을 번역하여 실었습니다.

아래에 <호질>의 이해를 위한 자료 주소창을 소개하고 ‘연구요약’을 옮겨 봅니다.

‘연구요약’의 주소창을 클릭한 내용입니다.

 

원문 & 번역 대역

http://blog.naver.com/osj1952/100024984969

 

호질(虎叱)-박지원(朴趾源)

호질(虎叱)-박지원(朴趾源) 호랑이의 질책-박지원(朴趾源) 虎睿聖文武慈孝智仁雄勇壯猛(호예성문무자효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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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주석과 함께 읽을 것]

http://cafe.naver.com/komup/29

 

호질(虎叱)

범은 착하며 성스럽고, 문채로우면서 싸움 잘 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영웅스러우며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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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요약

http://cafe.naver.com/muzasicsangpalza/61

 

호질-박지원

호 질 박지원 <호질의 작가> 박지원은 <호질>은 원작자가 중국인이고, 자신은 수정 가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연암의 이 진술을 믿어야 좋을 듯하다. 실제로 <광문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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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질(虎叱)의 구성

<호질문>은 <열하일기> 「관내정사」 7월 28일자에 실려있는데, 이 <호질문>은 단일 액자 서사 문학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작품 출처에 대한 진술로 도입 부분이고

둘째, 작품 <호질> 부분이고

셋째, 후지 부분이다.

이처럼 <호질문>은 액자 소설의 성격이 있다. 액자 소설의 형태는 자기 의식 고백의 주관적 자아와 허구적인 서사적 자아 사이에서 망설이는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형태로서, 작가가 씩씩하게 현실의 한복판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우리가 <호질문>을 읽을 때, 소설에서 중시하는 등장 인물의 형상화나 배경에 대한 세부 묘사, 교묘한 사건 구성 등은 대화 내용을 부각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배려에 그칠 따름으로, 작자의 분신인 작중화자가 개진하는 도도한 변론과 그 논리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호질>에서 우연의 묘미는 역설적인 논리와 온갖 고사를 동원하여 북곽선생을 질타하는 범의 도도한 웅변 그 자체에 있다. 범이 인의 도덕을 표방하면서도 불의를 자행하는 유자를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2. 호질을 얻은 경위

호질을 얻은 경위는 (1)과 (2)에 나타나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호질>은 박지원이 산해관에서 연경으로 가는 도중 옥전현이란 곳에서 묵게 되었을 때 심유붕이라는 소주인의 점포 벽상의 절세기문의 격자를 발견하고 동행한 정진사란 인물과 함게 베겨온 글이다.그 베낀 동기는 국내에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혀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웃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이글을 베낄 때 정진사는 중간부터,자신은 처음부터 베꼈는데 숙소에 돌아와 살펴보았더니 정진사가 베낀 부분에 잘못 쓴 글자와 빠뜨린 자구가 무수히 많아 도무지 문맥이 통하지 않아 대략 자신의 뜻으로 얽어서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들었다.그리고 <호질>은 원래 작자 성명과 제목이 없었는데,아마 근세 화인이 비분하여 지은 것일 것이며, 글 중의 <호질> 두 글자를 뽑아 제목을 삼았다.

 

3. 우언(寓言)과 패로디

<호질>은 소설의 성격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특징이 많이 나타나는데,이는 우언과 패로디의 관점으로 접근할 때 온당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언(寓言)은 상대방을 더욱 잘 설득하기 위해 자기 견해를 직접 주장하는 대신 허구적인 이야기를 빌어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글을 가리킨다. 이 우의는 비판이 금지된 대상을 비판할 때 큰 구실을 한다.

패로디는 유명한 작품, 문장, 고사, 사건, 인물 등을 넌지시 빌어와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이 패로디는 과거의 전통을 가치의 한 근원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의미의 이중화를 통한 새로움 가치의 추구에서 둘의 조화를 꾀하는 방식이다.

<호질>에선 『시경』 『주역』 『예기』 『맹자』 『대학』 같은 유가(儒家) 경전 중의 유명한 명구를 대거 패로디하여 다름아닌 유자(儒者)를 풍자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1> 원전의 알레고리

박지원은 심유붕의 점포에 걸린 격자문을 두고 근세 중국인(華人)이 비분함을 참지 못해서 지었으리라고 하였으니,<호질>의 원문의 내용이 우언의 형식을 빌어 청조 중국의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호질>의 어느 내용이 반청적인 불온한 것일까.

작중 배경은 춘추 시대에 풍속이 음란했던 것으로 소문난 정(鄭)나라로 설정되어 있고,등장 인물들의 성도 북곽이니 동리니 하는 고대 중국의 복성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漢人들의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청조의 가차없는 탄압을 의식해서 이러한 작중 배경과 인물을 설정한 것이지,실제로 청조 치하의 중국 현실을 풍자하고자 한 것이다.

작품의 초두에서 범을 소개하며 "예성문무 자효지인 웅용장맹(睿聖文武 慈孝智仁 雄勇壯猛)"이라 예찬한 문구는 황제에게 바치는 존호를 익살맞게모방한 패러디로 범이 포악한 만주 황제를 상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이 점에 관해 성현경은 '虎者 胡也'로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이 밖에 창귀 육혼의 제안에 대해 범이 "짐이 이를 좀더 소상히 듣고자 한다."라 말한 대목도 범이 황제를 상징하고 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한편 천하무적이라는 범에게도 그를 잡아먹는 비위,죽우 등 갖가지 맹수들이 있다고 한 것은 천하 막강의 대청 황제도 강성한 주변 민족들의 발호를 두려워하여 몽고의 추장들이나 티베트의 판첸 라마를 극진히 대우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을 암암리에 풍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북곽선생은 '손수 교열한 책만도 만 권이요,九經을 해설한 저서는 만오천 권'이나 된다는 위선적인 학자로,이는 '고증학풍에 매몰되어 만족 통치의 현실에 안주하는 한족 선비'를 형상화한 것이다. 만주족 지배하에 곡학아세로 자신을 적응시켜가는 중국인사들의 비열상을 풍자한 것이니,말하자면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자신의 고발이요 성토인 것이다.

아울러 소문난 절부임에도 실은 姓이 다른 자식을 다섯이나 둔 동리자는 천저가 가짜 절부인 음녀 동리자에게 정문까지 세워주며 표창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청조의 위선적인 예치주의를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중원은 장악한 청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前明의 충신들을 표창하고 효자와 노인에게 특전을 베푸는 등 유교식의 예치를 강화해 왔다.

박지원은 <호질>의 후지에서 당시의 중국사를 '기나긴 밤'의 시대요 '夷狄의 禍가 맹수보다 더 심한'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그리고 그는 이러한 시대에도 문장으로 출세를 꾀하는 선비들에 대해 '맹수조차도 잡아먹고 싶어하지 않을' 추악한 존재로 매도하는 한편,청조는 漢族에게 胡俗을 강요하는 무리한 강권통치로 인해 언젠가는 타도되고 말 것임을 예언하면서 '중국이 맑아질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 후지를 통해서 원전 <호질>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작(박지원)의 알레고리

지금 전하고 있는 박지원 개작 <호질>은 <호질> 원작의 패로디의 성격이 있다. 연암이 <호질> 원작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반청적인 내용 때문이겠지만, 이와 함께 일찍부터 조선 선비 사회의 풍조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품고 있던 연암으로서는 <호질> 원작 중의 통렬한 유자(儒者) 비판에 대해서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비록 조선 현실을 맞대놓고 풍자한 작품이 아니지만,원전의 우의로서 읽을 때 어떤 점이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일치하는가. 기존의 <호질>원전을 개작하여 새로운 주제가 덧붙여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 다시 말해 <호질> 원전의 우언(寓言)이 거듭 우언화되어 '우언의 우언'으로 되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호질>에서 읽을 수 있는 조선적 성격은 무엇일까.이는 박지원이 원작을 부연 개작하는 과정에서 첨가된 대목에 잘 드러나 있을 것이다. 박지원의 입김을 강하게 받은 대목을 찾아보자.

박지원이 어느 부분을 개작하였는지 명백하게 가리기는 어렵지만,가필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범도 상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조선 속담을 차용한 구절이라든가, '의(醫)'란 곧 의심스러울 '의(疑)'요,'무(巫)'는 속일 '무(誣)'이며,'유(儒)'란 아첨할 '유(諛)'라는 조선식 한자음에 따른 것도 연암의 가필일 가능성이 많다. (유(儒)와 유(諛)는 중국어로는 각각 '르우'와 '위'로 발음되므로, 醫와 疑, 巫와 誣 같은 정확한 동음이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범이 '오행정립(五行定立) 미시상생(未始相生)'하면서 전래의 오행상생설을 비판하거나 인성과 물성의 동일을 주장하는 대목은 분명히 박지원의 손길이 미친 곳이니,이 의견들은 박지원의 평소 신론이기 때문이다.

 

[은자주]이 부분은 일기 내용을 사실로 인정한 경우이고 골동품 가게에는 이 천하의 기이한 문장은 아예 없었거나 간략했을 것이라는 것이 김택영의 주장인데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김택영은 중국에서 연암 선생 사후 105년 만인 1910년에 <연암집>을 간행하며 발문에서 이 점을 밝혔다.그의 손자 박규수는 문집을 출간했지만 연암선생은 강렬한 비판의식을 담은, 양반관료지배계층을 공격하는 반체제적가치관 때문에 문집이 간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것을 가지고 검다고 말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나의 성벽도 상당 부분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탐닉하여 발분(發憤)의 문학정신을 정립한 연암선생에게서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연암 선생의 글은 1900년에 김만식이라는 분이 간행한 것이 있으나 필자는 진본을 본 적이 없고, 지금 도서관 등에 전하는 것은1932년 박영철이 납활자로 찍은 <연암집>이다. 연암문집은 조선시대에는 필사로 전해오던 금서였다.

 

4. <호질>의 기본구조

<호질>의 기본 구조는 사람을 잡아먹는 범이 위선적인 대학자 북곽선생을 논변으로 압도시키는 것이다. <호질>의 중심은 의인화된 범과 가공적인 인물 북곽선생 사이의 대화에 있다. 작가는 표면에 나서지 않고 범을 풍자의 주체로 내세우고 있다.

이 작품은 시점에서 형식적으로는 서술자가 사건에 참여하지 않지만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객관적인 삼인칭 서술자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양반의 허위의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서술자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작품에서 서술자와 가장 가까운 견해를 가진 인물은 범이라고 하겠다. 범을 연암 자신이라 할 때 서두 부분에 표현된 범을 잡아 먹을 수 있는 많은 상상적인 동물들은 연암 자신에 내재해 있는 모순이나 도덕적 결함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연암 자신의 심리 상태를 은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당시 사회에서 권력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권력자들과 같은 부류인 위선적인 도학자들에게는 과감하게 질책을 가할 수 잇는 연암 자신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호질>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범의 앞장을 서서 먹이감을 찾아준다는 악귀들이 범과 문답을 나누는 대목, 동리자와 밀회 중이던 북곽 선생이 그녀의 자식들에게 들켜 도망치다가 두엄 웅덩이에 빠지는 대목, 그리고 범의 꾸짖음이 나타난 대목이다.

이 중 범의 꾸짖음이 소설 전체 분량 가운데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중심 사상은 범의 꾸짖음에 드러나 있다고 할 것이다. 범이 북곽선생을 앞에 두고 꾸짖는 요지는 대충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선비라는 것이 아부, 아첨을 잘 한다.

2) 천하에 이치는 하나다.

3) 인륜 도덕을 세워서 권장하지마는, 인간의 나븐 짓은 막을 길이 없다.

4) 理를 논하고 性을 이야기하지만, 벌꿀·젖·누에·옷을 빼앗고는 마침내 저희들끼리 잡아먹고

5) 전쟁을 일으켜서 서로 잡아 먹고, 전쟁 기구를 자꾸만 만들어 낸다.

 

5. <호질>의 해학성 - 상대주의적 인식론에 의거한 풍자적 수법

범은 유가적·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이외의 사물을 보는 더욱 높은 차원의 관점에 서서 유자의 위선을 풍자하고 있다.

전형적인 유가적 발상으로는 인간의 특권적인 우위를 전제하고 인간 이외의 모든 사물을 이와 대립시키는데, 연암은 만물을 차별성보다는 동일성의 차원에서 인식하려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릇 천하의 理는 하나이니 虎가 실로 악하다면 인성도 악할 것이요,인성이 선하다면 호성도 선하다"든가 "天이 명한 바로 보자면 虎와 人은 똑깥은 一物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물성 동일론은 인간과 금수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차등을 인정하지 않는 만인평등론으로 발전할 수 잇는 단초이다. 따라서 범의 질책은 조선 양반사회의 불평등 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은자주]조선후기사회의 사상사적 쟁점은 인물성상동론(人物性上同論)과 인물성상이론(人物性上異論)의 대립이었다. 이는 호락(湖洛)논쟁으로 지역적 특성을 지니는데, 범의 주장을 연암 박지원의 생각으로 본다면 인간과 범의 성품이 같다는 낙론(洛論)의 인물성상동론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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