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소하천에서 벗어나 큰 강의 형태를 갖추는 곳이 상주다. 중동면 오상리에 위치한 경천섬은 낙동강 가운데 위치한 타원형의 하중도(하천 중간에 있는 섬)다. 약 20만㎡의 평평한 잔디밭에 소나무 등 각종 수목과 걷기 코스가 이어져 있다. 걷다보면 강과 산,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천섬은 원래 모래밭이었지만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섬이 됐다. 상주시가 인근 관광지인 경천대를 따 경천섬으로 이름 짓고 관광 자원으로 만들었다.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이면 메밀꽃과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관광객을 반긴다. 경천섬과 낙동강 변을 잇는 다리도 빼놓을 수 없다. 강 서쪽 도남동을 잇는 교량은 범월교, 동쪽 중동면 회상리를 잇는 다리는 낙강교다. 모두 보행자 전용 다리다. 범월교(泛月橋)의 범월은 달밤에 강에 배를 띄웠다는 의미다. 고려 문신 이규보가 1196년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은 ‘낙강범주유(洛江泛舟遊)’에서 시작해 1862년까지 행사가 이어졌다. 경천섬 건너 서쪽의 도남서원 앞에는 ‘낙강범월시 유래비’가 있다.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국왕을 수명 내지 수십명을 배출한 곳은 많다. 고도 경주가 그렇고, 고려 개성과 조선의 한양이 있다. 하지만 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지역은 상주뿐이다. 바로 고대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상주는 경주와 서울, 개성과 함께 왕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사벌국은 사벌면 화달리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삼한의 소국이었다. 청동기에 이어 초기의 철기 문화를 가졌고, 인구는 4천~5천가구 규모, 약 2만5천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상주지명유래총람에선 상주의 '사벌'이나 경주의 '서벌'은 '수읍'(首邑)을 뜻한다고 했고, 국문학자인 고 양주동 박사는 사벌을 '동쪽 나라' 또는 '동쪽의 머릿고을'로 풀이했다. 고대문헌인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 등지에서도 사벌국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또 사벌면 금흔리 일대에는 원삼국시대의 산성인 이부곡토성이 자리하고 있고, 상주시 병성동과 낙동면 성동리 사이의 병풍산에는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에 따르면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에 있으며 성 옆에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예로부터 사벌왕릉이라 전한다"고 기록했다. 특히 이 고분군에는 바닥 지름이 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많고, 내부도 대형 석실분이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이안천이 내려다보이는 경북 상주의 기장리 언덕에는 쾌재정(快哉亭)이 있다. 조선 초기 문장가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부인 안동 권씨 고향에 정착해 지은 정자다. 상주와 점촌을 잇는 경북선 철도가 시내를 건너고 있어 급할 것 없이 달려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수라면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소설을 써서 조선 최대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쾌재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자주 찾았다는 중국 쉬저우(徐州)의 정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채수와 쾌재정에 얽힌 이야기는 문장과 글씨에 두루 뛰어났던 남곤(1471∼1527)이 지은 나재 무덤 앞 신도비 비문에 보인다.
‘병인년(1506년) 반정 때 공이 공신의 맹약에 참여해 관례에 따라 가정대부로 승진하고 인천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동료 벼슬아치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주변에 없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이내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 아무런 욕심 없이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 사는 집 남쪽에 뚝 끊긴 산봉우리가 흐르는 물가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지은 다음 편액을 쾌재(快哉)로 붙여 놓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다시금 세상의 조그만 일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여유롭게 노닐며 천수를 마쳤다’
지금의 쾌재정은 18세기 중반 중건한 건물이다. 벌판 가운데 솟은 봉우리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시야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주변 풍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안천 건너에서 바라봐도 지붕의 모습만 어렴픗하다.
채수의 무덤은 쾌재정 남쪽의 공검면 율곡리에 있다.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나재채수신도비’를 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율곡리 길가에는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신도비도 있다. 옛 신도비가 풍우에 시달려 비문을 읽을 수 없게 되자 199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셜공찬이’의 발굴이 계기가 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쪽 야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옛 신도비의 비각이 보인다. 비석은 당당한 모습이다. 상주에 남은 신도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인상적인 것은 신도비의 받침돌이다. 대개 거북이 모양인데, 독특하게도 사자다. 커다란 비석을 등에 이고 있는 사자의 모습은 귀엽기만 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무덤이다.
채수의 위패를 모신 임호서원은 무덤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너머 동쪽에 있다. 역시 ‘상주시 합창읍 신흥리 377’이라는 주소로 찾아가는 것이 좋다. 서원은 1693년 함창 서쪽 10리 입암산 아래 검암서원으로 출발했다. 1871년 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88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간소한 데다 연륜도 짧은 만큼 서원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사당에는 경현사(景賢祠)라는 편액이 붙었다.
‘설공찬전’의 배경은 전북 순창이다. 학계는 나재가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로 나오는 설위는 대사성을 지낸 세종시대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설공찬이라는 이름은 족보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채수에 대한 탄핵 과정에 검토관 황여헌의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이니, 반드시 믿고 혹하여 지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 설공찬은 채수의 친척인 실존 인물이었고, 소설 또한 체험담에 근거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종실록 중종 6년 辛未(1511) :「한문으로 필사하거나 국문으로 번역해 유포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패관잡기 등에 중종 때 내용이 문제가 돼 왕명으로 불태워졌다는 기록만 전해옴.
당시 승지를 지낸 李文楗(1494-1567)의 생활일기 《黙齋日記》의 낱장 속면에 기록됨.
일기는 1535-1567년 사이의 기록. 이 소설이 서울에 전파되자 사헌부에서는 이 작품을 수거해 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간 논의를 계속함.
◇작자 蔡 壽(1449-1515): 훈구파. 세조14년(1468) 장원급제. 실록 편찬 등에 종사함.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애석한 정을 나타내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남.
성종16년(1485) 충청도 관찰사로 관직에 들어서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 지냄.
연산군 즉위 후 외직에 머물러 무오사화(연산군4,1498)의 화를 모면함.
중종반정(1506)에 가담한 공로로 仁川君에 봉해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병을 핑계로 경상도 상주에 은거해 지내며 이 소설을 씀.
행장에 의하면 거사 주도 인물들이 채수를 동참시키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 데려오게 하였으며 만약 이에 불응하면 목을 베도록 지시함. 장인의 성품을 잘 아는 사위가 술을 만취케 하여 부축하여 대궐문 앞으로 인도했고, 술에서 깨어난 그는 「어찌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다 전함.
◇창작시기:1506-1515.중종은 1506년9월 즉위했고 채수는 1515년 사망함. 일기가 1535-1567년 사이의 기록이므로 필사연대는 1567년 이후.
◇《설공찬이》란 제목의 필사상태로 총13쪽 4천여 자 분량.
◇<개관>
내용은 건국공신과 신흥사대부의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치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당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됨.
순창에 사는 설충란의 아들 공찬이 장가들기 전에 병사한다.
공찬의 혼령은 삼촌 설충수의 아들 공침의 몸을 수시로 왕래한다.
오른손잡이인 공침의 몸에 공찬의 혼령이 들어오면 그는 왼손잡이가 된다.
저승에서는 모두 왼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공찬의 혼령이 공침의 몸을 빌어 저승 경험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허구와 사실을 결합하였다.
공찬의 혼령은 삼촌들을 불러모으고 「내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 해로 머리조차 희니 매우 슬픈 뜻이 있다.」는 말로 저승의 소식을 전한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 바닷가에서 40리,저승의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 소개한 후 명이 다한 영혼을 불러오는 저승의 심판 모습을 일러주었다.
자신도 심판을 받았으나 증조부 덕택으로 놓여 나게 되었다.
그의 증조부는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薛緯였다. 그는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반전되어 반역자들에 미친다.
민후, 애박이 등의 이름이 나오고, 당나라 신하였다가 반난을 일으켜 양나라 시조가 된 朱全忠(852-912)이 대표적 인물로 소개된다.
그의 결론은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 비명에 죽더라도 저승에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기술로 「이승에서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아 잘 지낸다.」며 저승에는 남존여비가 없음도 말하였다.
전체적으로 당시 실존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중종반정에 가담했던 신흥사림파를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치적 의도가 잘 드러난다.
◇《사학연구》53호 원문 소개. 이복규 교수의 설공찬전연구 발표,한남대,1997.5.10. 2시
◇魚叔權,稗官雜記2.국역 대동야승Ⅰ,민족문화추진회,1984,p.456.
「懶齋 蔡壽가 중종 초에 薛公瓚傳을 지었는데,(그 내용이) 극히 괴이하다.
그 끝에 이르기를,
『공찬이 남의 몸을 빌어 몇 달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일들을 아주 자세히 말하고, (또) 말하고 쓴 것을 그대로 써 보게 하여, 한 자도 틀리지 않은 것은 그것을 전하여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하였다.
言官(諫官)이 논박하기를, 『채 아무개가 지은 책은 허황하고 거짓되어 믿을 수가 없으며, 상도에 어긋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는 것이니, 죽음을 내려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파직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지난 1997년, 성주이씨 문중에서 소장해 오던 '묵재일기' - 묵재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30여년간 쓴 한문일기- 의 낱장 속면에서 의문의 한글로 씌여진 소설이 발견되었다. 이는 앞서 최초의 한글소설이라 불리는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100여년이나 앞서있는 한글문학작품으로 알려지며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설공찬전'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한글로 씌여진 최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채수(蔡壽. 1449~1515)라는 사람이 쓴 한문소설을 국문으로 옮겨 적은 것이었다.
채수는 어렷을 적 귀신의 출현을 목격한 바 있다고 하는데, 그때의 경험이 이 작품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듯 하다.
이 소설은저승의 이야기를 빌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이런 내용 때문에,설공찬전은
중종 당시 금지도서로 분류되어 모조리 불태워지고 가진 사람은 문책을 당하였다 한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빙의현상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술이 쓰여있는것과,
우리나라에서 귀신을 물리치는(이른바 퇴마) 의식에 대한 몇몇 단서와 그에 대한 직업(엑소시스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잠시 원문중 일부를 살펴보면,
정덕(正德) 무신년 7월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끌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한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슬퍼 더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청하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로 가리키고 방법하여 부적하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계집이므로 이기지 못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 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가 오니 그 계집은 없어졌다.
공찬이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를 붙들어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아주버님이 백방으로 양재(攘災)하시려 하시지만 오직 아주버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고 이르기를, 아주버님(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 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보았더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하고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 하였다.
공찬의 넋이 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가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았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번씩 먹되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얘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는가?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내리면 공침의 마음도 제대로 되어 도로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보채여 서럽습니다하더니 그로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에 가서 겨우 들이더니 충수가 아들의 병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냥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 말을 많이 하여 그 영혼에게 들려주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대로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때리시면 아주버님 얼굴을 변화시키겠습니다하고 공침의 사지를 비틀고 눈을 뜨니 눈자위가 자지러지고 또 혀도 파서 베어내니, 코 위에 오르며 귀 뒤로 나갔더니, 늙은 종이 곁에서 병구환하다가, 깨우니 그 종도 죽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기는 것이었다. 공침의 아버님이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놓아보내고 부르지 않으마하고 많이 빌자, 한참만에야 얼굴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설공찬전 속에 나타나는 빙의현상은 그 기괴함이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속의 흉측한 악마의 모습을 보는듯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어, '스펀지'라는 TV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도 있을 정도이다.
원문 중, 공침에게 빙의된 공찬의 혼이 공침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정신을 혼란시키며, 얼굴을 변형시켜
공침의 아비에게 공포를 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빙의라는 현상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비일비재하게 인간들을 괴롭혀 왔으며, 그 양상또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빙의라는 현상이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우리 주변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고,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여러 TV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그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빙의가 정신분열증과 같은 여태의 정신질환과 다른 점은, 빙의환자 본인이 자신의 이상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영화속의 대사처럼,
빙의된 사람은 빙의령의 영향이 사라졌을때 의식이 지극히 정상이며,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설공찬전"속에도 그런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빙의령이 발현되어 몸과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극심한 정서적 변화와
기억상실, 뇌파변형, 호르몬 이상(특히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정상인의 2~3배로 증가)은 물론 완전히 다른 인격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약하게는 말을 더듬는 증상에서부터 틱장애(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욕설이나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는 증세), 신체마비 등이 함께 찾아온다.
빙의가 더욱심해지면 끈임없는 자해와 폭력을 일삼고, 알 수 없는 말을 끈임없이 지껄이며,
술이나약물을 과다복용하거나 폭식-거식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특히 밤(자정에서 새벽이 이르는 시간대)에는 증세가 훨씬더 심해진다.
빙의가 별다른 조치없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자신의영력이 쇠약해져 점점 자신의 혼을 잃어간다.
자기 영혼의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가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 정신으로 있을 때조차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며,
점점 빙의령에 몸이 지배당해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설공찬전"속의 엑소시즘
우리는 고대로부터 빙의를 치료하고 혼을 통제하는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식이 언제, 어디로부터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우리의 무속 문화에
그 흔적이 남아있으며, 고대 갑골문과 같은 기록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극중 귀신을 쫏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김석산'이라는 사람은 말 그대로 엑소시스트이다.
김석산은 공찬이 빙의되기 전에 먼저 공침에게 빙의된 어떤 여자아이의 혼령을 내쫓는다.
이때 김석산이 사용하는 것이 복숭아나무 가지이다. 복숭아나무는 퇴마와 관련된 의식에 자주 등장하는 자연물이다. 왜 복숭아나무인가?, 라고 묻는다면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왜 복숭아나무인지는 모른다. 다만 복숭아(특별히 천도복숭아)의 색깔이 후에 김석산이 사용하려하는 '주사(경면주사)'와 거의 똑같다는 점에서 복숭아나무가 어떤 상징적인 의미(귀신을 쫓는 붉은색)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하고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경면주사 인데, 경면주사는 이 블로그에서 전에도 다룬 적이 있지만,
매우 특별한 광물이다. 황화수은을 주 성분으로 하는 경면주사는 핏빛처럼 깊은 붉은 빛을 띈다.
무속에서는 주로 곱게 갈아서 기름과 혼합해 부적을 그리는데 쓰는데, 그 정확한 용도와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 이 물질이 귀신을 통제하는데 쓰이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봐야한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 분화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지식들 중 일부가
지금은 세속화된 무당들(블랙샤면)에게 그 사용법이 전수되었을 뿐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아주 먼 옛날에는 단순히 부적에 쓰려고 이 광물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장을 찍는 인주에 이 경면주사를 사용했던 것과, 도장 인(印)이라는 한자의 고대어원을 살펴보면
분명 이 물질이 영혼과 육신을 연결하는 어떤 의식에 사용되는 주요한 재료였다는 것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음.)
각설하고, 설공찬전에서 등장하는 퇴마사가 경면주사를 이용해 귀신을 쫓으려 했던 것은 아마도
'부'를 그려 퇴치하려 했던것이 아닌가...하고 유추해 볼 수 있을뿐이다.
부적은 지금도 무속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중 하나지만, 사용자의 믿음 여하에 따라 그 효과가 차이나기도 하고, 영험이 없는 무당이 그려준 부적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다, 애시당초 부적의 사용이 아예 아무 효과도 없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의 영험이 쇠락하고, 자연과 신령, 영적믿음에서 멀어진 생활을 오래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