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한 달이 얼마나 긴지를 모르고 여름에 나타났다가 가을에 사라지는 매미는 일 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합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머리 위의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 같고 땅을 내려다보면 당장이라도 발밑이 꺼질 것 같아 조바심치던 사람도 있었다 합니다 코는 크게 하고 눈은 작게 만드는 것이 나무인형을 새기는 법이고 사람보다는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손쉽다고도 합니다 곧은 것은 곧은 그대로 뻗어가게 놓아두고 굽은 것은 굽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오직 천명(天命)의 일이라고도 합니다 한 인생을 살기가 제각기 다른 것을 구태여 밝혀본들 무엇 하겠소 다만 옛사람의 조박(糟粕)을 옮기는 것이 요즘의 소일거리요 새겨 읽으시압 부생(浮生) 왈.
상징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기술상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조간의 상호 관계를 일별해 보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상징주의는 이전의 낙관주의에 기초한 사조 혹은 사회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태동하였다. 즉 사회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socialisme), 과학만능주의(scientisme),실증주의(positivisme)은 상징주의가 행할 ‘모든 가치 전도’의 대상이었다. 또한 상징주의 이전 시기를 풍미했던 고답파(le Parnasse),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상징주의가 적극적인 부정만을 행하였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상징주의는 고답파의 유미주의 선언처럼 보이는 저 전언,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개념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보들레르는 자신의 《악의 꽃》을 테오필 고티에에게 헌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상징주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고답파의 시론을 검토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고답파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보고 그것을 시 속에서 형상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즉 과학과 예술의 행복한 결합을 꿈꿔온 고답파의 고티에에게 있어 예술가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눈과 손의 확실성을 가지고, 마치 그림이 실현할 수 있음직한 정확하고 고유한 느낌을 말로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다.
하지만 고답파는 시의 회화적 조형성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시를 통한 형이상학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바로 이 지점이 상징주의의 정신주의(spiritualisme)가 부재하는 지점이며 고답파가 종국에는 현실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요약해보자면, 고답파에게 있어 예술의 이상은 칸트미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무관심적 쾌’ 혹은 ‘예술의 무목적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시인의 주관성을 중시하기보다는 고대의 테크네(τέχνη)적 예술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낭만주의에 있어 30년 전쟁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참패가 미치는 영향 또한 그러하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는 상징주의를 태동시키는 물적 토대로 작용하였는데, 이는 이전 프랑스에 팽배했던 진보에 대한 일련의 낙관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예술적 기운은 퇴폐주의(décadentisme)을 거쳐 드디어 상징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우선 상징주의의 현실 인식은 상징주의에 있어 현실은 하나의 가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플라톤주의(platonisme)의 영향 아래에 있다. 하지만 상징주의와 플라톤 철학 사이의 변별점은 개개의 현상 속에 하나의 본질로서의 관념(idée)이 상징주의의 세계관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세계의이원론적 구조를 상정했다면 상징주의는 더 나아가 이원론(dualisme)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일원론적 세계로 이행하고자 한다. 상징주의의 초월적 세계 인식은 가상의 현실, 즉 ‘상징의 숲’을 시인이 직관을 통해서 해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내부에 본질로서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완전하게 자족적인 존재(ens a se)가 되지는 못하나 인식주체, 즉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실상적인 존재자로 도약하게 된다. 따라서 상징주의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현실 세계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야말로 시인에게 ‘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며, 친근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보들레르의 《조응》에서)이자 시인에게 상징을 통해 자신의 존립성과 진실성의 빛을 발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의미이다. 물론 일반 언어와 상징 언어 양자가 공히 기호이면서 의미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의 양태이다. 상징은 단순히 약속되고 정태적인 기호라는 정의에서 탈피하여 배후에 스스로가 지닌 은폐되고 명료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본질(또는 관념)이 파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역동적인 기호인 것이다. 그렇기에 상징이 유추나 암시를 통해 기호로부터 의미에로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초월을 감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되풀이하자면, 상징이라는 것은 해석자가 부재하고 그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 못한다면 한갓 의미 없는 대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앙리 페르의 정의를 인용하자면, ‘그러므로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되, 그 빛을 받고 감동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그 신비를 캐내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 해독되고 설명되기를 요구하는 기호’인 것이다.
대표시
교응(Correspondances)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 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는 사원. 사람들은 친근한 눈길로 자기를 지켜 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빛처럼 드넓으며 컴컴하고도 심원한 통일 속에서 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듯 향과 색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네. 어린 아이들의 살처럼 싱그럽고 오보에처럼 달콤하고, 초원처럼 푸르른 향내들, 또 그밖에도 썩고 풍만하고 의기양양한 것들. 정신과 향기의 교통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끝없는 사물들의 확산을 가진다.
취해라 (Enivrez-vous)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그러나 다만 취하여라.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 가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들랑,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 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하리,
프랑스 치하의 북아프리카알제[1]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프랑스인 뫼르소(Meursault)라는 남자는 양로원에 보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장을 가게 된다. 남자는 슬픔 같은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2]장례 때 어머니의 시신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장례를 치른다. 다음 날 마리와 이야기하며 희극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뫼르소의 집에 가서 같이 잔다.
다음 날에는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을 만난다. 그 영감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고, 그의 옆에는 그가 늘 구박하는 개가 항상 함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웃집 사람 레이몽이 저녁에 초대해서는 자기와 친구가 되자고 한다. 이 레이몽은 평판이 나쁘다. 그리곤 레이몽은 뫼르소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도와달라는 일인즉슨 레이몽에게서 돈만 뜯어가고 자기를 성의 없이 대하는 여친을 좀 두들겨 패려고 하니 자기 여친을 꼬드겨서 유인할 수 있는 편지를 써 달라는 것. 뫼르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해 그를 돕게 된다.
사건이 있고 며칠 후인 일요일에 레이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해변가로 초대한다. 며칠 후 뫼르소는 레몽과 함께 해변으로 놀러 갔다가 그들을 미행하던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그 아랍인들 중에는 레이몽 옛 애인의 오빠가 있었다. 싸움이 벌어져 레이몽이 다치고 소동이 마무리되지만 뫼르소는 답답함을 느끼며 시원한 샘 가로 간다. 레이몽과 함께 간 그곳에서 우연히 레이몽을 찔렀던 아랍인을 만난다. 그리고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을 그에게 다섯 발 쏜다(한 발을 쏘고 뒤이어 시신에 네 발을 연달아 쏜다).
그는 처음에는 법정 등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로 끝날 것이라는 결과를 들었고, 국선변호사[3]나 예심판사[4]도 '당신의 사건은 별 볼 일 없는 정도로 취급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5]
하지만 어이없게도 법정의 주요 화제는 아랍인 살해 건이 아니라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보였고 놀러 다니기까지 했다는 것이 된다. 심지어 검사가 마리를 심문하여 사람들 다 있는 법정에서 뫼르소와 성관계한 이야기까지 공개적으로 하게 만들어 파헤친다. 게다가 판사는 이를 돕거나 방치한다. 이 이야기는 마리가 법정에서 무심코 증언한 것이었는데, 증언하는 도중에 이 증언 때문에 뫼르소가 불리해지는 것을 깨닫고 운다.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때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다는 말만 하는 바람에 배심원들이 뫼르소를 별 것 아닌 일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로 오해한 것도 재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난하게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그는 어머니의 장례 건과 불충분한 자기변호로 인해 계획 살해범과 무자비한 인간으로 부풀려지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
종국에는 교도소의 부속 신부가 찾아와 그에게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하지만, 그는 신부의 위선적인 면을 꾸짖고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며 거부한다. 이에 신부는 그의 비정상적인 면모를 보고 불쌍한 인간이라 말하며 떠나고, 혼자 남은 그는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처형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증오를 퍼붓는 것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삶의 부조리란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며, 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카뮈는 역설하고 있다. 뫼르소는 여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어머니의 죽음이나 애인과의 사랑에서도 별다른 의식을 못하고, 죽기 직전에서야 의식이 깨어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이 작품의 아이러니이자, 백미, 그리고 비극적인 면모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뫼르소는 인간의 기본적 깨달음을 성취한다.
민음사판본 뒤 표지에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 뫼르소'라고 명시했다. 진실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뫼르소의 성격에서 우러나는 것인데, 예컨대 뫼르소는 아랍인을 쏜 게 뜨거운 태양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뫼르소의 변호사는 뫼르소의 감형을 위해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맞출 것을 제안했으나 뫼르소는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며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뫼르소는 작중의 어떤 사건이나 서술에서도 거짓을 거부하는 정의를 따르고, 작중 모든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 특유의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기에 결국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뫼르소는 세상 일에 별 관심도 없다.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대수롭잖게 여긴다. 이러한 뫼르소의 무감수성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반영한실존주의문학의 면모라고 볼 수 있다.[6]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작품이 안 그렇겠냐마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카뮈의 작품이나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고백한다.[7]작품 내에 수많은 상징적 장치가 있고, 부조리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윤리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대로 읽으면 주인공은 그저 '부모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소시오패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작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작품의 철학적 사고관을 독자가 이해한다 한들 작중 인물이 누구나 공감하기는 어려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건 맞다. 그러나 삶의 살과 열기 속에서 뿌리 박힌 실존의식을 감각의 가능성 및 그것에 대한 소화, 반응에 대응하는 작중의 자아의 부유하는 정체성에 감정이입을 해보면 작품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카뮈의 철학을 더 쉽게 이해하려면 여러 전문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해석하는 것도 좋다. 이방인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은 저자의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이며 이 두 권을 같이 읽는 것이 「이방인」을 이해하기에도, 카뮈 철학을 알기에도 좋다.[8]물론 이 에세이 역시 만만하지는 않다. 심도 있게 읽으려면 균형 잡힌 서평 혹은 해설서와 함께 며칠 붙잡고 읽거나 아예 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설명을 부탁하자. 원한다면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을 엮어서 설명해 줄 것이다.
아일랜드의 영국계프로테스탄트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비롯하여오컬트나아일랜드 신화등 초월적 주제에 관심을 품었고 이는 그의 문학적 성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89년 서완하고 탐미적인 첫 시집을 발간한 이후로 그의 시는 특유의사실주의적 묘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3년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예술가인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에이츠 시모음 이니스프리 호수 섬 흰새들 죽음 오랜 침묵 후에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대 늙었을때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술노래 하늘의 융단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레다와 백조 쿠울호의 백조 둘째 트로이는 없다 유리 구슬 학생들 사이에서 내 딸을 위한 기도 1916년 부활절 육신과 영혼의 대화 비잔티움 벌벤산 아래 긴다리 소금쟁이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서 진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집을 지으리라 아홉 이랑 콩밭을 일구고 꿀벌 집을 지으리라 그리고 벌이 웅웅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그리하여 거기서 평화롭게 살리라, 평화는 천천히 방울지듯 오므로. 귀뚜라미 노래하는 곳에 아침의 베일로부터 떨어지는 평화 한밤엔 만물이 희미하게 빛나고 정오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는 곳, 그리고 저녁엔 방울새의 날개소리로 가득한 곳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e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호수의 물이 호숫가에 나지막이 찰랑대는 소리를 듣나니 길에서나, 회색 도로 위에서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소리를 듣나니
두려움도 바램도 죽어가는 동물에 임종하지 않지만, 인간은 모든 걸 두려워하고 바라며 최후를 기다린다. 그는 여러 차례 죽었고 여러 차례 다시 일어났다. 큰 인간은 긍지를 가지고 살의(殺意) 품은 자들을 대하고 호흡 정치 따위엔 조소(嘲笑)를 던진다. 그는 죽음을 뼈 속까지 알고 있다 - 인간이 죽음을 창조한 것을.
왜 내가 그녀를 책망해야 하나 그녀가 내 생애를 고통으로 채운 것을, 또는 그녀가 최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가르친 것을, 또는 작은 거리들을 큰 거리로 내던진 것을, 만일 그들이 욕망에 상응하는 용기를 가졌다면? 무엇이 그녀를 평화롭게 할 수 있었을까, 고상함이 불처럼 단순케 한 마음과, 이런 시대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종류인, 팽팽히 당겨진 활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만일 그녀가 높고 외롭고 매우 엄격했다면? 아니, 무엇을 그녀가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오늘날의 그녀였다면? 또 하나의 트로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불태워 버릴 ?
항상 명랑한 시인들에 넌더리가 난다고, 왜냐면 모든 이들은 알거나 알아야 하기에 만일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비행기와 비행선이 나와서, 빌리 왕처럼 폭탄을 떨어뜨려 도시가 납작하게 두드려 맞을 것이기에.
모두가 자신의 비극을 연출한다, 저기 햄릿이 활보하고, 리어가 있고, 저건 오필리아, 저건 코델리아, 그러나 그들은, 만일 마지막 장면이 되어, 커다란 무대 장막이 내려지려 하더라도, 극 중의 그들의 뚜렷한 역할이 가치가 있다면, 울느라고 대사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햄릿과 리어가 명랑하고, 명랑함이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모든이들이 목표했고, 발견했고 그리고 잃었다. 무대 소등. 머리 속으로 빛내며 들어오는 천국, 최대한도로 진행된 비극. 비록 햄릿이 천천히 거닐고 리어가 분노해도, 수십만 개의 무대 위에서 모든 무대 장막이 동시에 내려진다 해도, 그것은 한 인치도, 한 온스도 자랄 수 없다.
그들은 왔다, 그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배를 타고, 낙타를 타고, 말을 타고, 당나귀를 타고, 노새를 타고, 옛 문명들이 칼로 죽임을 당할 때. 그 후 그들과 그들의 지혜는 파괴되었다. 대리석을 청동처럼 다루었던, 바다 바람이 그 구석을 쓸어갈 때 올라가는 듯이 보이는 휘장을 만들었던, 칼리마커스의 수공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종려나무 줄기 같은 모양의 그의 긴 등갓은 단 하루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세우는 자들은 명랑하다.
두 중국인이, 그들 뒤엔 또 한 사람이, 유리 구슬에 새겨져 있다, 그들 위로는 장수의 상징인, 다리 긴 새가 날아간다. 세번째 사람은, 분명히 하인인데, 악기를 가지고 간다.
돌의 모든 얼룩이, 우연히 생긴 틈이나 움푹한 곳이, 물줄기나 사태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직도 눈내리는 높은 비탈처럼 보인다, 비록 분명히 오얏이나 벗나무인 가지가 그 중국인들이 올라가고 있는 곳의 중간 쯤에 있는 작은 집을 기분좋게 하지만,
그리고 나는 즐거이 상상한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을, 거기에, 산과 하늘 위에,
그들이 바라보는 모든 비극적인 경치 위에.
한 사람이 구슬픈 곡조를 요청하자, 능숙한 손가락들이 연주하기 시작한다. 많은 주름 속의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랜, 빛나는 눈은, 즐겁다.
나는 질문하며 긴 교실을 걸어간다. 흰 두건을 쓴 친절한 노 수녀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배웁니다 셈하기와 노래하기, 독본과 역사를 공부하기, 재단하기와 재봉하기를, 모든 면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하기를--아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응시한다 육십세의 미소짓는 공직자를.
II
나는 꿈꾼다 꺼져가는 불 위에 웅크린 레다의 육체를, 그녀가 말한 어떤 어린 시절을 비극으로 변하게 한 거친 책망이나, 사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자 우리의 두 본성은 섞이는 듯했다 젊은이 특유의 공감 때문에 한 구체로, 아니, 플라톤의 비유를 바꾸어 말하자면, 한 껍질 속의 노른자와 흰자로.
III
그리고 슬픔이나 분노의 그 발작을 생각하며 나는 거기 있는 이 아이 저 아이를 바라보고 궁금해한다 그녀도 그 나이에 저랬을까 하고-- 왜냐면 백조의 딸들이라도 모든 물새들의 유산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뺨이나 머리에 저 색깔을 지녔었을까 하고, 그러자 내 마음은 미칠 듯했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실물과 같은 아이로.
IV
그녀의 현재의 영상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십오세기의 손가락들이 그것을 만들었나 마치 바람을 마시고 고기 대신 한 접시의 그림자를 먹은 듯 뺨이 훌쭉하게? 그리고 나는 결코 레다의 종류는 아니지만 한 때 예쁜 깃털을 가졌었다--그것이면 충분하다, 미소짓는 모든 이에게 미소짓고,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편안한 종류의 늙은 허수아비가 있음을.
V
어떤 젊은 어머니가, 생식의 꿀이 드러내어, 회상이나 그 약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잠자고, 고함치고 고망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형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자신의 아들을, 만일 그녀가 그 머리 위에 육십이나 그 이상의 겨울을 얹은 그 형체를 보기만 한다면, 그의 출산의 고통이나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불확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할까?
VI
플라톤은 자연이 사물들의 희미한 모형 위에 떠도는 거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견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질을 했다 왕 중 왕의 궁둥이 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허벅지의 피타고라스는 바이올린 활대나 줄을 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별이 노래하고 무심한 시신들이 들은 것을. 새를 쫒아버리는 낡은 막대기 위의 낡은 옷들일 뿐이다.
VII
수녀들가 어머니들은 상들을 숭배한다, 촛불들이 밝히는 것들은 어머니의 환상을 활기차게 하는 것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대리석이나 청동의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가슴을 찢는다--오 정열, 경건, 아니면 애정이 알고 천상의 모든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여-- 오 인간의 일을 조롱하는 스스로 태어난 자여.
VIII
노동은 육체가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상처입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절망에서 생기지 않고, 흐린 눈의 지혜는 한밤의 기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 밤나무여, 크게-뿌리박은 꽃피우는 자여, 그대는 잎인가, 꽃인가, 아니면 줄기인가? 오 음악에 맞춰 흔들린 육체여, 오 반짝이는 시선이여, 어떻게 우리는 무용수와 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잿빛 십팔세기의 집들 가운데서 계산대나 책상으로부터 활기찬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을 낮이 끝날 때 만났다 나는 지나갔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의바른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잠시 머물러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하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과 내가 광대옷을 입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클럽의 난로에 둘러 앉아 있는 친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농담이나 조롱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고.
그 여인의 낮들은 보내졌다 무지한 선의 가운데, 그녀의 밤들은 토론 가운데 보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질 때까지. 그녀가 젊고 아름다울 때, 말타고 사냥개를 쫓을 때,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보다 감미로왔는가?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우리의 날개달린 말을 탔다, 이 사람은 그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한창 본령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국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의 본성은 지극히 민감해 보였고, 그의 생각은 지극히 대담하고 감미로워 보였으므로. 이 사람은 내 생각에 술주정뱅이고, 허영심 강한 촌놈이었다. 그는 매우 심한 나쁜 짓을 했다 내 마음에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러나 나는 그를 노래 속에 넣어준다, 그도, 또한, 이 우연한 희극에서 자기 역할을 그만두었다, 그도, 또한, 자기 차례가 되어 변했다, 완전히 변형되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사람들은 매혹되어 돌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강물을 괴롭히기 위하여. 길에서 오는 말, 말탄 자, 구름에서 휘모는 구름으로 날아가는 새들, 순간순간 그들은 변한다, 냇물에 비친 구름 그림자는 순간순간 변한다, 말발굽이 물가에서 미끄러지고, 말은 그 속에서 텀벙거린다, 다리가 긴 붉은 뇌조들이 잠수하고, 암컷들은 수컷들을 부른다, 순간순간 그들은 살아가고. 그 돌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있다.
너무 오랜 희생은 마음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오 언제면 충분할까? 그건 하늘의 몫이다, 우리 몫은 마음대로 뛰놀던 사지에 마침내 잠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부르듯이, 이름들이나 중얼거리는 것, 그것이 황혼이 아니고 무엇이오? 아니,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오. 그건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나? 왜냐면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영국은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충분하다 그들이 꿈꾸었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긜고 과도한 사랑이 그들이 죽을 때가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으면 어떻소?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너와 맥브라이드 그리고 코놀리와 퍼스는 지금과 장래에 녹색 옷이 입어지는 곳 어디서나,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Autumn is over the long leaves that love us, And over the mice in the barley sheaves; Yellow the leaves of the rowan above us, And yellow the wet wild-strawberry leaves.
The hour of the waning of love has beset us, And weary and worn are our sad souls now; Let us part, ere the season of passion forget us, With a kiss and a tear on thy drooping brow.
낙엽 ㅡ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우리를 사랑하는 긴 나뭇잎 위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고 보릿단 속 생쥐에게도. 머리 위 마가목은 누렇게 물들고, 이슬 젖은 산딸기 잎도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사랑이 이우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의 슬픈 영혼은 이제 지치고 피곤합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시간이 우리를 잊기 전에 수그린 당신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