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양귀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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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길가의 백합]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풀협죽도]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릐,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층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원추리 -허브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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