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cafe.daum.net/kiwonsub/19lIH/1/1/8739/8739

천혜의 요새(要塞),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답사

- 비는 그치지 않았다. 환도산성 주차장에서부터 삼삼오오 우산을 받쳐 들고 산성 안의 점장대(點將臺)까지 올라가 보았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지안시 북쪽 퉁구하를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성이 평지의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衛城)으로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산성자산의 이름이 환도산(丸都山)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 21년 국내성으로 천도 후,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 둘레 7km의 산성이다. 현재에는 흔적을 알 수 있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발 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 올린 산성 입구에는 석각으로 된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城壁)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飮馬池),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點將臺)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언뜻 눈으로 보아도 천혜의 요새지이다.

아아, 유현(幽玄)하고도 찬란한 고구려 벽화, <오회분(五盔墳) 오호묘(五號墓)> 탐방

- 우산 아래 고분군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 분묘, 지안 고구려 유적지에서 묘실의 화강암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5개의 고분을 오회분(五盔墳)이라고 하며, 그 중 다섯 번째가 바로 오호묘(五號墓)이다. 큰 봉토분 다섯 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같다 하여 '투구 회(盔)'자를 붙여 오회분이라 한다. 오호묘는 사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6세기 중반~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8m, 무덤 둘레가 약 180m의 규모이다. 1962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발굴 정리되었기에 국내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가히 고구려 유적의 꽃이라 할 만 하다.

- 놀랍고도 실로 감격적이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가니 후덥지근한 바깥 기온과는 달리 서늘한 냉기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전율(戰慄)이었다. 무덤의 음산함이라기보다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를 만나게 되는 짜릿한 긴장이었다. 나는 지금 1,300여 년 전 고구려인의 인식의 태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무덤 속에서 고구려인의 원형적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아아, 나는 지금 말로만 듣던 고구려 고분 벽화를 현장에 와서 그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인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하여 풍부한 설화성을 지니고 있다. 돌 위에 직접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길고 긴 세월을 넘어…

- 묘실 안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주피장자(主被葬者)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또 다른 부인의 관으로 추정된다. 예의 사면의 화강암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 양식에 따라 동벽에는 청룡(靑龍), 서벽에는 백호(白虎), 남벽에는 주작(朱雀), 북벽에는 현무(玄武)의 사신도가 신비로운 빛깔로 그려져 있으며, 그 위층에는 28마리의 용(龍)이 역동적으로 뒤엉켜 있는데, 신비로운 기운을 더했다. 그리고 층위별로 각종 문양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최상단 암벽의 사면의 한 가운데에는 야명주(夜明珠)를 하나씩 박아 놓아 어두운 현실(玄室)을 환하게 비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야광주는 보이지 않고 빈 구멍만 남아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여기 오호묘는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러나 묘실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 그 외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사신총(四神塚), 무용과 생활상이 그려진 무용총(舞踊塚), 고구려인들의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각저총(角觝塚) 등이 인근에 있다.

- 그런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보물인 고구려 벽화의 관리 상태가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이다. 벽면에는 단순한 습기 이상의 물기가 흘러내리고, 두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는 천정에서 간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밖에서 비가 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늘 그렇게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일까.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가이드 김용의 말로는 몇 년 전 개방 당시에는 그림의 윤곽이나 채색의 상태가 아주 선명했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서 훼손이 매우 심한 상태란다. 비싼 입장료를 받고 관광 수입을 올리면서 정작 그 묘실은 이렇게 무도하게 방치하다니 … 참담하고 안타까워 분노가 치밀었다. 아아, 고구려!

고구려의 기백(氣魄), 우리 역사의 광장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광개토대왕 사후 2년(414년)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덮개돌[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이다. 참으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당대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 중, 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 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비석의 주위를 돌면서, 장엄한 대왕비를 바라보는 후생(後生)의 마음은 뜨거웠다. 이 광활한 대지에 고구려의 기백을 장엄하게 펼치셨던 대왕의 위용이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하고 온몸이 출렁거렸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비석과 태왕릉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이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다. 비각을 나와서 성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경내를 걸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왕의 능을 찾아갔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수목이 싱그러웠다.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본 감동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비각을 돌아보았다. 경내는 다른 관광객이 없어 주위의 분위기가 아주 호젓했다. 잔디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린 길 주위로 사람의 키 두 배 정도 크기의 가로수가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한 줄기로 자란 나무 위에서 수양버들처럼 가느다란 실가지를 사방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균형 잡힌 옹기를 엎어 놓은 듯했다. 가장자리로 늘어져 있어 속은 비어 있다. 그 외양이 아주 특이했다.

◈[자료] 논란이 되는 비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신묘년 기사대목으로 △△은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한민족 최대의 웅대한 시대를 이끈 고구려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

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각에서 서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왕릉는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되어 있는데 높이만 14,8m,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철제 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틀로 덮여 있는데 대왕과 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석실의규모가 생각보다 아주작았다. 오회분(五盔墳) 오호묘(五號墓)에 비하면 아주초라한 정도였다. 벽면에는 벽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화강암으로 네 벽을 축조해 놓았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어져 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이라는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매우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속칭 <장군총(將軍冢)> 답사

- 길림성 용산에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으로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는 고분이다.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1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장엄한 규모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밑변의 길이가 31.6m, 높이 12.4m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방단계단식적석묘(方壇階段式積石墓, 돌을 계단형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5.7m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1,100여 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정면은 국내성(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있는데 피라미드 위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 보이는 일종의 향당 (享堂)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積石塚)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護石]이 있다는 것과 그 주변의 배총(陪塚)이 있다는 것이다. 호석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위해 세운 것으로 3개씩 4면에 총 12개가 있는데,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는 그 중 하나가 소실되었다. 배총(陪塚)은 현재 하나만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모서리 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총은 고인돌 형태이다.

지안(集安)에서 퉁화(通化)로, 내일 백두산을 등정을 위하여

지안에서 답사를 끝낸 일행은 전용버스 편으로 303번 국도를 타고 통화로 이동했다. 길은 2차선 포장도로였는데 거의 산간으로 난 길이어서 구비가 심하고 넘어가는 고갯길도 많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중의 날씨는 금방 어두워져서 예정보다 이동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심신이 피로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압록강변의 지안에서 만났던 고구려를 생각하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제 내일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퉁화시(通化市)로 가고 있는 것이다. 통화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더욱 세찼다. 도심에는 가로등을 비롯하여 길을 따라 아치형으로 네온사인을 설치하여 아주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계속>

[은자주]아래 창에 천마총을 소개한 바 있다. 맨아래에 은자가 찍은 말다래와천마총 사진을 싣는다.

http://blog.paran.com/kydong/32211007

http://blog.paran.com/kydong/32214128

천마도 적외선 사진 공개,, 정수리에 외뿔

고화상 세부 판독 결과 ‘기린’ 가능성

원문 http://blog.naver.com/unesco114/110070202576



지금까지 ‘천마를 그린 말안장(천마도장니,국보 제 207호)’으로만 알려져 이름붙은 ‘천마도’에서

뿔 모양의 세부그림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났다.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29일부터 11월8일까지 개최되는 특별전(‘100주년 기념특별전-여민해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천마’로 알려진 동물의 머리 위에 단발 모양의 ‘뿔’ 형상이 확연하게 드러났다고 23일 밝혔다.

허형욱 학예사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천마도에 대한 고화상의 사진을 찍은 결과 동물의 머리 위에서 반달형의 뿔 그림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물관 측은 1997년 천마도에 대한 보존처리를 하면서 찍은 적외선 사진에서 뿔 모양의 형태를 일부 확인했지만 당시 장비로는 세부 그림의 완전한 모습을 찍지는 못했다.

‘천마도(天馬圖)’는 73년 경주 황남동 155호분을 발굴하다가 발견된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마치 말이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 해서 ‘천마도’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고분 이름도‘천마총’이 되었다. 하지만 2000년 이재중씨“이 그림은 ‘천마’의 형상이 아니라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麒麟)’이 맞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논쟁이 벌어져왔다. (여기서 기린은 아프리카 기린과는 관계없음)

기린은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징조에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기린은 머리 위에 뿔이 있고, 몸은 사슴 같으며, 소의 꼬리에, 말 발굽과 갈기를 지니고 있다”

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 위에 반달형 뿔 형상의 완전한 모습이 나타남으로써 ‘천마’ ‘기린’

논쟁이 ‘기린’으로 완전 종식될지 주목된다.

한편 특별전에서 공개되는 유물(150여점) 가운데 특별공개되는 유물은 30여점이다. 국가지정문화

(국보 및 보물)는 33건 55점이며, 해외 대여유물은8건 10점이다.

이번에 세번째로 선보이는 ‘몽유도원도’(일본 덴리대 소장·29일~10월7일)와 ‘훈민정음해례본’

‘석가탑무구정광대다라니경’ ‘태조 이성계 어진’ 등도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원문: http://blog.daum.net/skj2607/11304873

[광복절 특집]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방송 (일명 玉音放送) (1945년 8월 15일)


        이 녹음은 1945년 8월 15일, 당시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방송한,
        연합국에 대한 '종전방송'입니다.
        당시 프로그램에는 '옥음방송(玉音放送)'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 방송은 당시 일본 국민들에게 최초로 공개된 천황의 육성녹음이었습니다.
        이 녹음은, 8월 14일 밤, 도쿄 황궁에서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된 뒤,
        다음날 아침 방송국으로 인계되어 8월 15일 정오에 방송되었고, 다시 두 시간 뒤에 재방송 되었습니다.
        그 직후에 원본 디스크는 국가의 수치라 하여 분노한 방송국 직원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지방 방송국 여러곳과 미군 방송 등지에서 여러 복사본을 제작해 놓은 덕택에
        녹음 자체는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방송 당시에는 방송국 측이 의도적으로 잡음을 심하게 넣어,
        정작 이 방송을 듣고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지극히 적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송 직후 경성방송국에서 요약 방송을 다시 하기 전까지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1935년의 히로히토 천황의 공식 사진과, 녹음의 원문과 해석 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 방송 원고의 원본 사진입니다.

    (해석)
    대동아 전쟁의 종결조서(소화 20년 8월 14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원문은 米英支蘇; 중국을 '支那'로 썼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黃祖黃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 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는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었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信義)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자세히 보면 자기네들이 뭔가 잘못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군요...
    게다가 항복도 아니고 '종전'입니다.
    오히려 대동아 해방에 협력을 했다는 둥 하는 소리 뿐입니다....
    꽤나 씁쓸한 기분은 들지만, 여튼, 이 방송이 우리나라의 해방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그 나름대로 뜻깊은 자료였기에 여기 올려봅니다.
    P.S.
    '대일본제국'이 승승장구할때는 저리도 당당해 보이던 이 '천황 폐하'는,
    이 방송이 나간 지 1년 쯤 뒤, 저런 비굴한 모습으로 또 다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원래부터 인간이었지만) 선언을 하고 난 뒤,
    잿더미가 된 '제국'의 새로운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옆에서요. 아래를 보시죠.



출처 흐르는물처럼 | 우화의강
원문 http://blog.naver.com/nenia21/130045692944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

남재(南齋) 심우정(沈愚正)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건비배경과 시대적 상황

1. 배경과 내용

2. 시대적 상황

Ⅲ. 서체의 독창성

1. 4-5세기 고구려의 서체유형

2. 서체논변 점검

3. 서체의 특징

Ⅳ. 서예사적 가치

Ⅴ. 맺음 말

* 참고문헌

Ⅰ. 시작하는 말

중국의 한자가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시기는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한반도를 침공하여 평양과 만주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한 때이다. 이 시기는 소전(小篆)에서 보다 간편한 예서(隸書)가 나왔던 때로, 우리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2천년이 넘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해 왔다. 단순 서사(書寫)와 서예(書藝)는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갑골문 이후 변이가 정지된 해서(楷書)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형상을 극단적으로 추상화한 조형의 변천임을 따져본다면 한자의 역사는 서(書) 예술(藝術)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2천 년 동안 서예라는 조형예술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왔지만, 항상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변용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자기화의 변용은 우리민족의 독특한 미적 감수성과 주체성이라 할 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비1)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림 1 광개토대왕비문(상해 유정서국 1905년 발행 구탁호태왕비 탁본)

광개토대왕비의 서체가 우리민족의 독창성의 발현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단의 논변과 서체의 분석이 있었지만, 이 비문의 서체를 공부하는 학서(學書)들에게는 쉽게 전달되지 못한 것은 서체의 독창적 예술성보다 앞서 인식되어졌어야 할 한국서예사적 가치를 뒷전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의 특징이나 서예사적 가치의 연구는 비문의 해석과 역사적 사실문제 그리고 탁본의 연구에 비하여 대단히 미미한 편이다. 그 이유로 우리에게 먼저 해결해야 할 급요한 역사적 쟁점도 있었겠지만, 비가 건립 이후 무려 1500여 년간 발견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던 원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1616년 후금(後金) 건국 후 백두산 일대를 만주족의 발흥지로 이른바 봉금제(封禁制)를 실시하여 출입을 금하였기에 비가 발견될 수 없었고, 또한 청의 강희(康熙, 1662-1722) 무렵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고증학과 금석학은 서예 복고의 소리가 높았고, 고법의 연구는 자연스레 당비나 한비에 쏠렸다. 서예사(史)에서 이 시기 이후를 비학기(碑學期)라 부르고, 이전을 첩학기(帖學期)라 부른다. 이 비학기의 정점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교류한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 등이 있어 금석학의 금자탑을 이루었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추사가 우리의 금석문 발견과 보존 ․ 고증에 열정을 쏟은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 그가 금석학에 힘쓴 이유를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되었을 당시 함경도 관찰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는바, “대개 이 비는 한갓 우리나라 금석의 시조(始祖)가 될 뿐만 아닙니다. 신라의 봉강(封疆, 봉토의 경계)에 대하여 국사(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비열홀(比列忽)까지에만 미쳤으니, 이 비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황초령(黃草嶺)까지 미쳤던 것을 다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2)라고 하면서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영원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즉 금석학을 통하여 서체의 고증은 물론 우리민족사 상고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가 평생 파임획이 없는 방경고졸(方勁古拙)한 서한 예서를 서법의 조가(祖家)로 삼아 추구했던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묘법(妙法)의 전형을 광개토대왕비가 보여주고 있음이 발견되었더라면 얼마나 멋진 고증이 나왔을까 상상하여 본다. 광개토대왕비는 추사 사후 30년도 채 되지 않은 1880년을 전․ 후하여 발견되었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있지만, 비가 발견된 이후, 중국인으로 정문작(鄭文焯)의《高句麗永樂太王碑釋文纂考》, 구양보(歐陽輔)의 《高麗好太王碑》, 영희(榮禧)의 《讕言》, 고섭광(顧燮光)의 《夢碧簃石言》에서 단편적이나마 논변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임창순, 김응현에 이어 박시형, 최완수, 채용복, 정상옥, 손환일, 김수천, 고광의, 김병기 등 꾸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어 다행스런 일이다.

아무리 선행연구자들의 연구 집적을 토대로 한다지만 광개토대왕비에 표현된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를 조명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자별 다양한 이견(異見)과 이견의 당연성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지만, 자칫 민족적 편향의 예단을 앞세워 균형점을 잃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단을 배제하고 객관성이 담보를 위하여 먼저 입비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검토한 뒤에 지금까지 발굴된 사료를 통하여 4-5세기 고구려 서체의 유형을 추론해 보고, 선행 연구자들의 서체 논변 점검과 서체의 특징을 조명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한국미술의 독창성에 서예를 접목하여 비문의 서예학적 독창성을 현출하여 본다면 한국서예사적 가치여부는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Ⅱ. 건비 배경과 시대적 상황

1. 배경과 내용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은 서기 414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능묘를 쓰면서 부왕의 공적을 기림과 아울러 수묘(守墓)의 연호(煙戶)를 명기해 두기 위하여 비(碑)를 세웠다. 비문은 높이 6.39미터의 각력응회암을 약간 가공한 뒤 비신 4면에 종(縱)으로 계선(界線)을 긋고 네모 진 정방형의 구획 안에 예서로 1,775자3)를 음각했는데 글자의 규격은 큰 것은 16센치, 작은 것은 11센치 정도로 배합과 간격이 비교적 균등하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제1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전설, 왕위계승과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고, 제2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비려와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하고 왜구를 물리쳤으며 동부여를 정벌한 사실을, 제3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존시교언(存時敎言)에 근거해서 수묘인 연호(守墓人煙戶)의 내원(來援) 및 인가 수(人家數)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한중 어느 사서에서도 볼 수 없는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신비성 있는 자료로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귀중한 자료로 취급을 받고 있다.

2. 시대적 상황

비가 건립된 서기 414년 전후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대격변기였다. 당시 중국은 남북으로 양분되어 양자강 이북은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 등 북방민족들이 중원을 나누어 각기 국가를 세운 이른바 5호16국이, 이남은 북방민족에 밀려난 한족의 동진(東晋, 317-420)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국가는 요서(遼西)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後燕, 384-409), 북연(北燕, 409-436)이 있어 잦은 접촉과 충돌이 있었다. 그 후 중국 북부지역은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 386-534)가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동북아시아 패권은 고구려와 북위 그리고 동진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물론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는 한강 이남지역으로 밀려나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재위기간에 가강 강력한 동북아 패권을 형성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국력의 성장은 자주적 역사관, 자주적 문화관을 형성시켰다. 비문에도 나타나 있듯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天帝之子母河伯女郞(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이라 하였듯이 고구려가 중국과 다른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대 내외에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서체의 독창성

1. 4-5세기 고구려의 서체유형

가. 문자수용과 문화수준

▼그림 2 광개토대왕 호우명 탁본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한 고구려는 4-5세기 중국의 분열로 혼란한 시기에 국가기틀을 완성하였다. 즉 313-314년에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있던 낙랑(樂浪)과 대방군(帶方郡)을 완전히 몰아내고, 소수림왕(371-384)때에 이르러 율령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는 등 국가체제가 완비되었다. 또 전하지 않지만 국사인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한 것은 이미 자주 국방 역량의 바탕위에 법치행정의 시행, 인재양성을 통한 관료 임명,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였을 정도의 문화적 자신감과 역사서 편찬이라는 국가사업으로 볼 때에 다음 설명하는 바와 같이 문자생활의 일반화는 물론 문화적 수준도 상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4-5세기 서체유형

▼그림 3 모두루 墓誌 묵서

광개토대왕비 건립(414)과 같은 시기의 문자 유물은 비(碑) ․ 금속기(金屬器) ․ 인장(印章) ․ 전(塼,벽돌) ․ 도기(陶器) 등에 남겨진 명문(銘文)과 고분벽화에 남겨진 묵서(墨書)를 통해 4-5세기 고구려의 서체유형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원 고구려비>, <광개토대왕호우명(壺杅銘)>, <광개토대왕릉 전명(塼銘)>은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 비슷한 예서 체세를 보이고 있으며, 같은 시기 고분 가운데 서사 묵적이 있는 것은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모두루묘(牟頭婁墓)>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의 벽화묵서명은 앞서 설명한 비, 호우, 전명에서 보인 예서 체세와는 달리 격식이나 위엄보다는 활달하고 행기 있는 해서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비, 전, 금속면과는 달리 발묵(潑墨)이 비교적 잘되는 회벽 위에 모필로 직접 서사하는 조건의 차이도 있지만, 당시 일상생활에 행서와 해서가 자연스럽게 서사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 4 덕흥리 고분 묵서

이에 대해 고광의는, “동한(東漢, 25-220) 중기에 일상에서 사용하는 속체(俗體)인 예서(隸書) 가운데는 팔분(八分)과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후대의 해서(楷書)와 유사한 자형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신예체(新隸體)라 한다. 신예체는 위진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고구려에서 신예체의 사용은 주로 4-5세기 유물들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안악3호분>, <덕흥리. 고분>, <모두루묘> 등의 묵서(墨書)나 주서(朱書)의 부분적인 자형결구에서는 파책이 나타나고, 옆으로 긴 체세를 보이는 등 팔분의 서사법을 보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체세는 규범적인 팔분과는 이미 거리가 멀고, 해서나 행서에 접근되어 일종의 신예체라 할 수 있다. 또한 4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고구려 와당 명문과 중원고구려비에서도 부분적으로 신예체의 자형이 나타나고 있어, 당시 고구려에서 예서의 사용이 이미 쇠퇴하였고, 신예체가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4)고 하여 고구려의 서체연변 상황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하였다

▼그림 5 광개토대왕릉전명 탁본

2. 서체논변 점검

가. 중국학자들의 논변5)

광개토왕비의 서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정문작(1856-1918)은 ≪고려국영락태왕비석문찬고≫에서 “자체가 팔분으로 준혼(遵渾)하다. 이 비는 예서체로써 송곳으로 그린 것 같다. 그 당시는 동경에서 멀지 않아 촉대인의 영향이 있었으며 더욱이 신비함은 마치 吳의 <구진태수곡량비> 같다. 촉한의 비문은 몇 가지 보기 힘든데 동국에 이를 얻어 보아 역사의 기록에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으니 가히 뒤에 나온 것 중 가장 오랜 것이라 이를 수 있다(字體八分遵渾 此碑隸體如錐畫沙 其時去東京未遠 多漢人遺意 尤神似吳九眞太守谷郞碑 蜀漢石文 世不數覯 東國得此 足補史乘之闕)” 이라 한 것에 대하여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는 팔분체도 아니고 한대 예서도 아니라고 하면서 정문작이 광개토대왕비의 건립이 한 건흥12년이라고 본 것이나 서평도 틀렸다고 했다.

구양보는 ≪고려호태왕비≫의 안어(按語)에서 “진의 말기엔 진서(眞書=楷書)가 이미 고구려에 전입되었다. 즉 해서가 위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있고 이것이 증거가 된다. 억지로 제양(齊梁)때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집과 편벽에서 비롯됨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當晋之末 眞書已傳至高麗 則眞書之始于魏晋 益信而有 征而强以爲始于齊梁者 可以自知其偏執矣)”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비를 진서(해서)로 보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면서, 서체의 명칭과 생겨난 시대는 당대부터 청 말에 이르도록 계속 논쟁거리였으며, 특히 팔분체와 예서에 대해서는 더욱 주장들이 다르고, 진서에 대해 서한 때 이미 출현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확인할 수 있는 자적으로는 한위(漢魏) 이후에야 점점 통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예서는 방직하고 팔분도 방정하나 파책을 중시하여 구별된다. 진서의 파책은 순세(順勢)가 자연스러워서 팔분처럼 강한 파책(波磔)과 필획이 좌우로 상배(相背)되는 모습과는 다르다. 결론적으로 예서, 해서, 팔분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는 비록 개별적으로는 약간의 파세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의도적으로 파책한 것과는 달라 팔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희는 ≪난언≫에서, “전서와 예서가 서로 교차되어 글자에 획을 많이 생략했으며 고박하여 즐길만하다. 지극히 위비(魏碑)와 흡사하다. 그 연대를 상고해보고 그 자적을 참고해보면 ‘추(鄒)’자와 ‘개(開)’자를 쓴 것으로 보아 해서의 서법은 겨우 2-30퍼센트요 전서, 예서의 서법이 여전히 6-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마침 진대는 예서가 해서로 변화하는 시기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때이므로 이런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篆隸相羼兼多省文 古樸可喜 極似魏碑 考其時代 參其字跡 如鄒字作 開字作等類 楷法甫有二三 篆隸仍存六七 正與晋世化隸爲楷 將變未變之頃 如出一轍)”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약간은 이치에 맞기도 하면서 맞지 않아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고 했다.

고섭광은 ≪夢碧簃石言≫에서, “이 비의 글자는 큰 것은 밥공기 만하며 방엄후정하여 예서와 해서의 중간이다(此碑字大如碗 方嚴厚整 在隸楷之間)”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과학적인 서평이 아니라면서, 서체란 서사(書寫)의 표현형식으로써 그 형체로 말하면 마땅히 기본적인 귀납처(歸納處)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의 문자는 엄격히 말하여 동진의 예서이고 그 서체의 계통은 직접 한대 예서를 이은 것이다. 그리고 필획의 많은 부분이 초서에서 간편을 취했다고 하였다.

나. 국내 연구자들의 논변

임창순은 “이 시기에 일반통용문자는 해서였으나 본 비는 예(隸)로 썼다. 그것은 예(隸)는 해(楷)보다 정중하고 경건성(敬虔性)을 띠기 때문에 왕릉에 대한 최고의 존엄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 당시의 비지(碑誌)는 역시 예(隸)를 썼다. 그러나 예체를 쓰면서도 초(草) ․ 해(楷)의 각체가 혼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건(建), 영(迎), 위(違) 등의 책받침이라든지 차(此), 개(開)의 독특한 간이화 등의 예에서 쉽게 나타난다”6)고 하였고,

최완수는 “글씨체도 기묘하여 기본적으로 위예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해법을 가미하면서 파책의 교(巧)를 극도로 자제함으로써 오히려 고예(古隸)의 질박웅경한 필법에 가까운 듯하되 방정근엄한 기미는 이와도 또 달라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계속하여 “이와 같은 글씨체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호우명>에서도 확인 되는 바 이것이 당시 고구려 특유의 서체였음을 알 수 있다.”7)라 하였으며,

채용복은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문자미학을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한 한국서예의 원류이며 우리 민족자존심의 상징으로 그 남성적 넉넉함과 구수한 큰 맛은 북방민족 특유의 질긴 완강함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8)면서 서체는 ‘해서로 변화하는 예서’라고 하였고,

정상옥은 “이 비의 서체는 횡획이 수평에 가까운 직선으로 고예와 같고, 후한의 <開通褒斜道刻石>이나 <大吉買山地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파책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이 비의 서체는 예서가 6내지 7이고 해서의 필법이 2내지 3”9)이라고 김응현의 ≪書與其人≫을 인용하면서 건비 시기는 예서가 해서로 변하여 가는 과정의 시기이며 일방적으로는 해서를 상용하던 때라고 하였으며,

손환일은 종합적인 설명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예서의 필획과 결구법을 보이나 부분적으로 팔분법이 보인다”10)고 하였고,

김수천은 “광개토왕비는 서한 고예와 전진(前秦)의 <광무장군비>와 <장산비> 그리고 낙랑의 전명(塼銘)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딱히 광개토왕비 서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있는 중국의 글씨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11)라고 하였으며,

고광의는 “자형은 기본적으로 정방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 ․ 예 ․ 해 ․ 초 ․ 행서의 서사법이 나타나고 있다. 자형결구의 측면에만 보면 파책이 극도로 자제되고 古式의 결구들이 보이고 있어, 예서에서 해서로의 과도적 성격을 띠는 예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고려할 때 이미 하나의 양식으로 독립된 서체라 할 수 있다”12)라 하였고,

김병기는 “자체로는 예서, 그중에서도 서한시대의 예서인 고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체로는 중국과는 판이한 ‘고구려체’ 혹은 ‘광개토대왕비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13) 고 하였으며,

북한의 박시형은 “광개토왕릉비의 글씨는 이른바 ‘해예지간(楷隸之間)’ 즉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의 자형은 이미 해서로 전변되고 얼마간이 아직 예서의 자형을 보유하고 있다. (중략) 일반적으로 한자에서는 주서(籒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및 기타의 글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글씨체들은 각기 표준으로 된다고 볼 수 있는 자형들이 있는 동시에 많은 변형의 글자들이 있다. 이 가운데 주서, 전서, 예서, 행서, 초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해서까지도 실로 많은 속자(俗字), 이체자(異體字), 별체자(別體字), 가차자(假借字), 통용자(通用字)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실상 한자 자체의 전 역사적 시기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예서로부터 해서가 발생 ․ 발전 ․ 고착되어 가던 위(魏), 진(晋), 남북조시기, 그 중에서도 북조제국에서 더욱 심하게 한자 자형에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벌써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비판(碑版)들에서 더욱 심하였다. (중략) 능비 예서의 거의 전부는 물론 중국 한(漢), 위(魏), 진(晋)의 고비 예서들에 다 나오는 글자들이다 다만 능비의 서법, 문장 등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전혀 틀림없이 고구려에서는 중국 예서들과 취미를 달리함으로써 자형에 다소간 차이를 낸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고비의 글자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14)고 비교적 상세히 논변하였다.

다. 한자의 변용과 광개토대왕비체

서체의 연변(演變)에 대하여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비문에 개별적인 파세가 있지만 팔분으로 볼 수 없으며 고예’라는 의견이다. 이는 앞의 <4-5세기 서체유형>에서 당시 고구려의 서체연변이 해서와 유사한 신예체의 자형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과 다름이 아니라, 비문의 서체를 채택함에 있어 전서의 장중함과 예서의 안정미를 찾아 고예법으로 택하고, 편의상 필획이 많은 글자일 경우 초서에서 간편을 취하여 각(刻) 하였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비문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서체의 귀의처를 추적한 인상이라면, 국내 연구자들은 서체는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는 민족성을 내포한 논변이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알 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다수의 논변에서 자체(字體)와 서체(書體)를 혼용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한자의 자체의 연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15) 김병기가 설명한 바와 같이 “자체(字體)는 한자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글자의 모양이 변하여 전서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로 나누는 것을 말하고, 서체(書體)는 같은 자체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의 차이를 분류한 것으로 통상 왕희지체, 구양순체, 추사체 등의 서예가를 이르거나 신라체, 백제체, 백제무녕왕지석체, 신라봉평비체 등으로 부르는 것”이라 하면서,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자체로는 예서, 그중에서도 서한시대의 예서인 고예(古隸) …, 서체로는 중국과는 판이한 고구려체 혹은 광개토대왕비체”16) 라는 설명이 적절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많은 변형체들은 통 털어 고구려 특유의 서체로써 독창적 현상으로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박시형도 지적했듯이 남북조시기 북조에서 한자 자형의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다고 보았거니와 다음의 기록17)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또렷이 제기된다.

① ≪안씨가훈≫ 권7<잡예> 에, “북조에서 난리가 발생한 후로는 필적이 고상하지 않고 천박하거나 또는 제멋대로 글자를 더 만들고 졸렬하게 되어 강남보다 심하였다”

② ≪양서(梁書)≫에는, “북조의 비지(碑誌)를 시험적으로 살펴보아도 거의 오자(誤字)들이 어지럽게널려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용문(龍門)에 쓰여 있는 글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③ “육조시대 여러 지역의 문인들이 호기심으로 별자(別子)를 쓰거나 혹은 새롭게 글자를 만들었으며, 당시에는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관청에서도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는데, 예를들면 북위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2년(425)에 새로운 글자 1,000여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속자(俗字)를 승인하고 자전(字典)을 편찬한 것이 바로 안야왕(顔野王)의 ≪옥편(玉篇)≫이다. 또북위 도무제(道武帝) 천흥(天興)4년(401)에 4만여 자를 모아서 ≪중문경(衆文經)≫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어 문법과 음운을 연구한 최영애의 견해와 같이, “한자의 영향력은 한자를 매개로 한 중국문명의 전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 일본 ․ 베트남처럼 문자 없는 주변국의 언어에 한자라는 문자 자체가 그대로 대여되기도 하고, 자남(字喃)이나 카나(假名)처럼 문자설계의 청사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자남(字喃)은 한자형태를 겹쳐서 복잡하게 만든 것이고, 일본의 카나(假名)는 그 반대로 한자의 변 또는 초서체를 본떠서 간단히 만든 문자체계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사자(死字)가 된지 오래인 여진문자(女眞文字)나 거란문자(契丹文字)도 한자체의 변용이고, 중국의 서북부 서하(西夏)도 한자체를 모방하여 서하문자(西夏文字)를 만들었고, 중국 남부지역 소수민족언어문자인 수어문자(水語文字)나 장어문자(壯語文字)도 한자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18)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 주변에서의 한문자 변용은 언제나 있어온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광개토대왕비 건립 당시에도 문자 상황은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최소 북위(北魏)를 포함한 접경국인 고구려 등 동북의 주변국들은 어느 정도 통일된 문자체계를 갖추었지 않았을까 가정해 보았을 때에 고구려인만 사용하는 글자를 능비에 새겼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앞서 인용한 박시형의 “능비 예서의 거의 전부는 물론 중국 한(漢), 위(魏), 진(晋)의 고비 예서들에 다 나오는 글자들이다. 다만 능비의 서법, 문장 등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전혀 틀림없이 고구려에서는 중국 예서들과 취미를 달리함으로써 자형에 다소간 차이를 낸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19)고 한 견해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변형체 모두가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는 등식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3. 서체의 특징

이제 본 논고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서체의 특징’에 대하여 논(論)할 차례이다. 앞서 설명한 선행연구자들의 논변이 비문의 자체(字體)와 서체(書體)에 대한 총론적 성격이라면 이제 논할 서체의 특징은 각론에 해당할 것이고, 이는 비문에 쓰인 서체의 풍조와 품격(風格)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은 독창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의 특징에 대하여 김응현이 “예서에 근간을 두고 전 ․ 해 ․ 행 ․ 초의 새로운 운미(韻味)를 혼합한 창조적 종합서체”20)라고 한 것과 같이 국내 대다수 연구자들도 같은 의견이다.

논자도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풍격을 밝힘에 있어 국내 선행연구자들과 별다른 이견 없이 장법, 필획, 결구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고 별도로 별체자(別體字)와 간체자(簡體字)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가. 장법의 특징

장법(章法)이란 자간과 행간의 분간포백(分間布白)과 상하좌우단(上下左右段)의 여백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쉽게 말하여 글자 한 자 한 자가 어떻게 전체에 조화롭게 어울려 배치되는지 여부를 말하는 것이며 ‘포치(布置)’라고도 하나 엄밀히 ‘글자의 포치(布置)’라고 써야 타당할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는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면에 글자를 새겨 정연한 맛을 내기위해 계선(界線)을 치고 정방형의 예서장법이다. 이는 장법의 변화에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글자마다 장단과 대소의 변화를 꾀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행에서 41자씩 배당하는 규칙을 지켰다. 주목할 것은 광개토대왕비와 동일인의 글씨로 보이는 <광개토왕릉 전명>과 <광개토대왕 호우명>은 장법적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광개토대왕비와 전명이 계선을 그어 규칙적으로 배열하였다면, 호우는 글자의 대소와 자간의 간격이 서로 다르고 글자의 배열 또한 불규칙이다. 이러한 표현양식의 차이는 같은 글씨라도 용도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나. 필획의 특징

광개토대왕비체의 필획은 고른 통나무를 연결한 듯 굵기의 변화 없이 직선과 단조로운 점으로 가로획의 가지런한 수평이나 정방형의 구획선 안에 튼튼하고 투박한 모습이다. 가식 없는 자연 ․ 소박 ․ 진실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이를 송하경은, “노자의 소위 박(樸, 통나무)이요, 산에서 갓 캐어낸 박옥(璞玉)이라 일컫는다. 박과 박옥은 완성품이 아니요 인공이 전연 가하여지지 아니한 미완된 가능태의 집합체다. 그것은 예쁘고 깜찍하고 날씬하고 매끄럽고 자세하고 완숙하게 다듬어진 세련미는 없다. 그저 투박하고 소탈하고 무뚝뚝하고 촌스럽고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미숙한 고졸미(古拙美)가 있다”21)라 적절히 표현했다. 이를 기본으로 광개토왕비 서체의 필획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가 있다.

① 예서의 자체(字體)이나 전서 ․ 해서 ․ 행서 ․ 초서풍의 다양한 체세가 혼융되어 있다. 즉 건비 시기가 예서에서 해서로 변해가는 단계였지만 서체 각각의 장점을 취한 듯하다. 읍부(邑部)가 들어있는 ‘鄒’, ‘朗’, ‘都’, ‘部’字의 경우 ‘㠯(이)’로 써서 전서의 서법이 보이고, 책받침(辵) 방(旁)의 경우 ‘ 辶’으로 하지 않고 ‘ㄴ’이나 ‘ㄴ’위에 점을 하나 찍어 표현했는데 행서와 초서의 서법이다. 예서와 초서의 체세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은 ‘岡’, ‘來’, ‘獲’, ‘渡’字 등이고, 초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는 ‘開’, ‘顧’, ‘號’, ‘與’, ‘往’, ‘龍’, ‘示’字 등 있는데, 이 가운데 號, 與 字는 전서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 정리하면 <그림6>과 같다.

▼그림 6 체세의 혼합

② 점을 제외한 모든 획을 직선으로 처리하고 가로획이 중첩될 때에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고, 별획(撇劃, 丿)이나 날획(捺劃, 乀)도 모두 직선이거나 중간 아랫부분으로 약간 굽어있다.

③ 적법(趯法, 갈고리)이 생략 또는 퇴화되고, 약세(掠勢, 긴삐침)와 파세(波勢, 가로획의 끝을 물결치듯 빼는 체세)나 책세(磔勢, 파임)를 극히 제한하였다.

다. 결구의 특징

서예학에서 ‘결구(結構)’와 ‘간가(間架)’란 용어를 구분 없이 혼용하는 예가 많고, 또 ‘간가결구(間架結構)’라는 합성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시 의미를 집어보면서 보다 더 쉽게 서예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간가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徑間)을 무한정 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게 되고,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으로 평면에 칸(間)이라는 일정한 모듈이 적용된다. 이때 평면을 나타낸 그림을 ‘간가도(間架圖)’ 라고 하는데 서양건축학의 평면도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부재를 길이 방향으로 이어가는 것을 ‘이음’, 달리 직교하여 연결하는 것을 ‘맞춤’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 털어 결구(結構)라고 부른다. 따라서 목구조는 어느 한 부분에서 어음과 맞춤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결구되는 것이다. 기둥머리부분을 예를 들면, 기둥과 도리 및 보는 서로 맞춤으로 연결되고, 도리와 도리는 이음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목조건축은 이음과 맞춤으로 많은 결구부분을 갖는 조립식 가구구조(架構構造)라고 하는 것이다.22)

▼그림 7 다양한 결구형태

집을 짓는 것이나 글자를 만드는 일이나 이치는 같다. 따라서 결구는 점과 선 또는 선과 선의 이음과 맞춤의 구조이며, 간가는 한 글자의 점과 선의 배분적 조화로움을 말한다고 본다. 간가를 ‘점획의 포치(布置)’라고 한 채숭명(蔡崇名)의 설명은 정확하다. 본고는 결구에 간가가 내재된 혼합된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광개토대왕비의 결구의 특징을 알아본다.

▼그림 8 동일자 비교표

① 광개토대왕비의 결구형태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이나 세로로 긴 직사각형, 가로로 긴 직사각형 등 다양한 결구형태를 보이고 있다. 몇 가지 특징을 분류하면 정방형(正方形), 종장형(縱長形), 횡장형(橫長形), 상하대소형(上下大小形), 편방대소형(偏旁大小形), 대칭형(對稱形), 비대칭형(非對稱形)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해 ․ 전 ․ 예체가 혼성된 결구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정방형은 전서에서 보이는 강경한 세로획과 파세 없는 가로획을 써서 장중미와 안정미를 주고 있고, 종장형과 횡장형은 해서와 예서의 영향이며, 상하대소형은 상하의 크기를 변화시켜 부정형의 미를, 편방대소형은 예서의 편(偏=形部)이 작고 방(旁=聲部)이 큰 것과 또는 그 반대의 표현으로 공간감과 형태미를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있고, 대칭형은 신성하고 근엄한 전서의 영향이며, 비대칭형은 역시 변화미를 추구했다고 보여 진다. 이 가운데 몇 가지 특징을 <다음7>과 같이 정리했다.

② 비문의 동일자를 비교해보면, <그림 8>에서 보는 것과 같이 ‘家’, ‘年’, ‘看’, ‘山’, ‘爲’, ‘韓’, ‘牟’, ‘國’, ‘其’, ‘羅’, ‘百’字 등에서 동형의 반복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림 9 추사체와 비교

③ ‘顧’, ‘領’, ‘碑’字의 경우는 좌변의 ‘雇’, ‘令’, ‘石’을 위로 올려붙여 수평을 유지하는 표현은 마치 秋史의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에서 ‘루(樓)’의 ‘木’과 <사서루(賜書樓)>에서 ‘사(賜)’ 의 ‘貝’와 ‘루(樓)’의 ‘木’의 표현을 보는 듯하다.

라. 별체자(別體字)와 간체자(簡體字)

앞서 논했듯이 남북조시기, 그중에서도 북조 제국에서 한자 자형의 복잡성, 다양성, 혼란성이 조성되었다고 하였듯이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예, 해, 초서에서 취한 별체자가 많이 보인다. 그 가운데 ‘門’字는 ‘門’, ‘閣’, ‘閏’이 나오지만 오직 ‘開’字의 ‘門’부분을 초서처럼 간략하게 썼으나 岡’字 등의 자형과 함께 중국의 금석문에서 찾을 수 없는 형태라서 흥미롭다. 또 2면 2행의 ‘彡’字의 독특함과 획의 일부를 생략한 것으로 보이는 ‘顧’, ‘隨’字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면의 6행에서 보이는 ‘貢論事九年己亥’에서 ‘己亥’가 아니고 ‘己死’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탁본상 확인되나, 간지의 순서로 보아 ‘己亥’가 맞다는 주장이 다수이지만, ‘己死’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나진옥, 유승간)23), 물론 논자도 ‘己亥’라고 보고 있었으나, 지난 2009년 1월 발굴된 <백제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와 중국 육조시대 새긴 <관세음응험기> 목판과 또 이를 필사한 일본 교토 청련원 소장 <관세음응험기>의 ‘기해(己亥,639)’ 기사부분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동일한 결구형태가 나와 의구심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림10 ① <광개토대왕비> ②<백제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③중

국육조시대 목판 <관세음응험기>의 ‘己亥’字 표기

Ⅳ. 서예사적 가치

광개토대왕비가 갖는 서예사적 가치를 찾는 일은 서예의 발원지인 중국 중심의 서예관(觀)에서 벗어나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지나치게 중국서예를 중시한 나머지 한국서예의 독창성을 도외시하는 풍조는 분명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때에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한국 서예사에 접목하여 삼국금석문서예의 창조성을 규명하려한 김수천의 시도24)는 주목된다.

그는 논문에서 독일인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와 일본인 야나기(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한국인 고유섭(高裕燮,1905-1944)을 통하여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설명하면서, “안드레 에카르트는 한국민족이 지닌 예술적 감수성은 매우 높아 중국미술을 본받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으로 한층 더 심화시켰고 그 표현은 ‘자연스럼’이다”라고 하였고, “냐나기 무네요시는 풍토와 역사의 특수성은 각각 그 민족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표현을 추구시키는데 한국의 예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작위, 비정제성, 비균제성, 구수한 큰 맛으로 규정하고, 이 다양한 용어들은 자연미로 함축 된다”는 3인의 미술론을 인용하면서, 한국미술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그동안 발원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한국의 서예이론과 너무 대조적인 차이를 보였다고 지적하고 전면적 검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김수천의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술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각성 없이 창발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서예술의 독창성 또한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서예는 선(線)의 예술이다. 그 선은 우리의 풍토 자연의 선이다. 우리의 산봉우리, 하천계곡, 구부러진 소나무, 달, 초가지붕과 묘지 등의 선율이 그대로 우리민족의 미적 유전자로 스며들었다가 흔연히 표출되어 나와 건축으로, 회화로, 도자기로, 서예로 조방(粗放)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또 한 사람,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과 언어말살정책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예리한 선비정신과 굳건한 민족정신으로 유린된 정신문화의 마지막 파수꾼이 되고자 했던 김용준(金瑢俊,1904-1967),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독창성에 대하여 수필집 ≪근원수필≫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는 세인이 이미 주지하는 바다. 비수(碑首)나 비부(碑趺)의 수식도 없이 고구려 사람의 진취적 기상과 독창적 정신을 웅변으로 말하는 이 비는 수십 척 높이의 한 덩어리의 자연석 그대로다. (중략) 이분의 기적비(紀績碑)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아무렇게나 생긴 돌로 우뚝 세워졌다는 것은 고구려의 감각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미는 곧 힘이다. 힘이 없는 곳에 그들의 미는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의 이러한 힘, 즉 미의 이상은 글씨로도 나타난다. 시대는 비록 분예가 생긴 훨씬 뒤인 진(晋)대라 할지라도 이 석문의 패기 있고 치졸웅혼(稚拙雄渾)한 맛은 도저히 후한비의 유(類)가 아니다. 공주비(孔宙碑)나 조전비(曹全碑)나 예기비(禮器碑)에서와 같은 염려(艶麗)하다거나 간경(簡勁)한 맛이라고는 약에 쓸래야 찾아볼 수 없다”25)고 하여 바로 우리민족만의 독특한 자연석을 이용한 건비양식과 서체의 독창성을 힘주어 말했다.

소나무

도자기

개심사 심검당

임신서기석

최근의 초정

▼그림 10 한국미술의 독창적 발현 사례

서예는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였지만 에카르트의 말대로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으로 한층 더 심화시켰다. 즉 재창조한 것이다. 이것의 표현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놓고 한 ․ 중 의견이 분분한 것은 재창조된 한국서예를 중국의 서예사적으로 해석하려했기 때문이다. 질박하고 순진하며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한 표현은 바로 우리민족적인 서체의 특징이며 가치인 것이다.

Ⅴ. 맺음 말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아울러 이 비가 갖는 한국 서예사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함이 논고의 목적이었다. 서체의 독창성에서는 먼저 4-5세기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될 당시의 서체유형을 살펴보니 단순 ‘광개토대왕비체’만이 아닌 팔분의 서사법이나 활달하고 행기 있는 해서체인 일종의 신예체가 나타나 이미 고구려의 서체연변상황이 중국의 영향으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에 대하여 중국의 학자와 국내연구자들의 논변을 통하여 자체의 귀납처와 서체의 출처를 규명하려 하였지만 자체는 대체적으로 고예(古隸)라는 의견이지만 서체의 출처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에 표현된 서체가 고예(古隸)의 자체(字體)이지만, 전 ․ 해 ․ 초 ․ 행서의 서사법이 혼융된 종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독창성에서 비롯된 ‘고구려체’ 또는 ‘광개토대왕비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서체의 특징에서 장법, 필획, 결구의 특징을 파악하였는데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 면에 글자를 새겨 넣으려고 계선을 그어 정방형의 장법을 택하였으므로 많은 변화를 꾀하지는 못하였지만, 글자의 대소, 자간의 간격, 서로 다른 불규칙한 글자배열 등으로 장법을 대신하는 탁월한 심미적 감수성을 표현했다. 필획에서는 굵기의 변화 없는 직선과 가지런한 수평을 구사하였지만 전서 ․ 해서 ․ 행서 ․ 초서풍의 다양한 체세를 창조적으로 구성하였고, 결구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이지만, 다양한 직사각형, 대칭형, 비대칭형, 동일자의 동형반복을 회피하는 근엄미와 안정미 ․ 변화미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비문에 별체자와 간체자가 많이 보이는데 대부분 초서의 자형을 취한 것으로, 이는 단단한 비문에 각자(刻字)의 편의와 성글고 시원시원한 맛을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특히 별체자에 대하여 몇몇의 글자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표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자형의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던 것을 반영한다면 비문에 표현된 별체자라고 하여 고구려만의 독특한 표현이라는 즉 독창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며,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광개토대왕비의 한국 서예사적가치는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확인하면서 얻으려는 시도였다. 서예의 원류는 분명 중국이지만, 이것을 수용하였으면 우리의 서예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개토대왕비는 분명 우리북방민족의 질박하고, 순진하며,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한 성격을 그대로 표현해 낸 서체라는데 그 가치를 찾았던 것이다.

남은 과제는, 그동안 지나치게 편식해온 ‘기예적(技藝的) 서사(書寫)’에서 광개토대왕비를 포함한 삼국시대 이후는 물론, 삼국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서예의 독창성을 탄탄하게 이론(理論) 정립하고 연구하는 일이다. 이것의 실천은 우리의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국서예의 법첩화’ 작업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체적 서예관(觀)’ 없이 한국서예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로 졸고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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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순, “고구려의 금석과 서예”

채용복, “금석문을 통해 본 서에 대한 조형의식”

최완수, “우리나라 고대 ․ 중세 서예의 흐름과 특질”


1)광개토대왕의 이름은 ‘安’이며, <삼국사기>에는 ‘談德’이라했는데 이는 ‘談’과 ‘安’이 같은 韻이며 德은 收音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같은 인물이라고 왕건군은 말한다(호태왕비연구). 광개토대왕은 재위 시 ‘永樂大王’이라 칭하였으나, 사후에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諡號로 불리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최완수, 김병기, 채용복), 광개토왕(박시형, 이진희, 김수천), 호태왕(왕건군, 박진석), 광개토태왕(고광의), 광개토호태왕(고구려연구회) 등으로 다르게 불리고 있다.

2)민족문화추진회(1995),『국역 완당전집』Ⅰ(완당전집 제3권 與權彛齋敦仁 三十二), p.280-282.

3)비문의 전체 字數에 대하여 1,775자(왕건군 ․ 김병기), 1,800자(박시형), 1,804자(박진석) 등 연구자 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음.

4)고광의, "서체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정체성(4-5세기 문자 유물을 중심으로)".

5)이에 대해 왕건군(1985),「광개토왕비연구(원제 : 호태왕비연구)」임동석 譯(역민사), p.287-293을 인용.

6)임창순, “고구려의 금석과 서예”.

7)최완수, "우리나라 고대 ․ 중세 서예의 흐름과 특질".

8)채용복, "금석문을 통해 본 서에 대한 조형의식".

9)정상옥, 『서법예술의 미학적 인식론』(이화문화출판사), P.166-167.

10)손환일,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가 6C 신라 금석문 서체에 미친 영향".

11)김수천,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삼국 금석문 서예의 창조성".

12)고광의, 전게서.

13)김병기(2005),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학고재), P. 89.

14)박시형(2007), 『광개토왕릉비』(푸른나무), p. 118-119.

15)곽노봉 選譯(1996),『중국서예논문선』(동문선), “서예적인 측면에서 본 자체의 연변”(郭紹虞) 참조.

16)김병기, 전게서, P. 83-91 중에서 간취.

17)노간(1995), 『위진남북조사』김영환 譯, (예문춘추관), P. 179-181.

18)최영애(2000), 『한자학강의』(통나무), P. 38-39.

19)박시형, 전게서.

20)김응현(1994), 『동방서범 광개토왕비』(동방연서회), P. 313-314.

21)송하경(1996), 『신서예시대』(도서출판 불이), P. 124.

22)김왕직(2007),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동녁), p. 87-88, 321.

23)임기중(1995),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동국대학교 출판부), P.341.

24)김수천, 전게서.

25)김용준(1988), 『근원수필』(범우문고), p.14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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