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5 

 

벽암록(6) 51칙 ~ 60칙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

kr.buddhism.org

 

[第051則]要識末句後
〈垂示〉垂示云。纔有是非。紛然失心。不落階級。又無摸索。且道放行卽是。把住卽是。到這裏。若有一絲毫解路。猶滯言詮。尙拘機境。盡是依草附木。直饒便到獨脫處。未免萬里望鄕關。還搆得麽。若未搆得。且只理會箇理成公案。試擧看。
〈本則〉擧。雪峰住庵時。有兩僧來禮拜。峰見來。以手托庵門。放身出云。是什麽。僧亦云。是什麽。峰低頭歸庵。僧後到巖頭。頭問。什麽處來。僧云。嶺南來。頭云。曾到雪峰麽。僧云。曾到。頭云。有何言句。僧擧前話。頭云。他道什麽。僧云。他無語低頭歸庵。頭云。噫我當初悔不向他道末後句。若向伊道。天下人不奈雪老何。僧至夏末。再擧前話請益。頭云。何不早問。僧云。未敢容易。頭云。雪峰雖與我同條生。不與我同條死。要識末句後。只這是。
〈頌〉末後句爲君說。明暗雙雙底時節。同條生也共相知。不同條死還殊絶。還殊絶。黃頭碧眼須甄別。南北東西歸去來。夜深同看千巖雪。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 僧亦云, 是什. 峰, 低頭歸庵. 僧後到巖頭. 頭問, 什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頭云, 他道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 頭云, 噫, 我當初悔, 不向他道末後句.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僧至夏末, 再擧前話請益,. 頭云, 何不早問.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


매화와 벚꽃 다르듯 모양과 작용이 달라
말후구(末後句)는 불법을 체득한 한마디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을 때 두 스님이 찾아와서 예배를 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뭐야!?" 스님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말했다. "영남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예. 갔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물었다.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스님은 지난날에 있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암두화상이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스님은 말했다. "설봉화상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 암두화상이 말했다.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만약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 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은 하안거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설봉이 나와 똑같이 한줄기에서 태어났지만(生) 나와 똑같이 죽지(死)는 않는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

이 공안은 {조당집}제7권 암두장과 {오등회원}제7권 설봉장에 전하고 있다. 설봉과 암두는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 {벽암록} 22칙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두의 교시에 의해 설봉이 오산(鼇山)에서 깨닫고 성도를 하게 되었다. 설봉화상이 영남의 암자에 은거하고 있을 때는 당나라 무종(武宗)의 회창(會昌)5년 폐불사건으로 천하의 사찰을 훼손하고 26만500명의 승려를 환속시킨 일대 법난의 시기였다. 당시 동문인 암두전활(巖頭全豁)선사는 악저호(鄂渚湖)라는 호수에서 뱃사공으로 은거하며 살고 있었다.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는데 두 스님이 찾아와서 참문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뛰어 나와서 "뭐야!?"라고 묻자, 그 스님들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원오는 '화살촉이 서로 마주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과 두 스님의 지혜작용(機鋒)이 일치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원오도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설봉의 기봉에 손 쓸 수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은 임제의 고함이나 덕산의 방망이처럼 격렬한 선기를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깊은 선지(禪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단은 마치 {무문관} 제13칙에 설봉이 덕산선사에게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치는 한마디에 덕산은 말없이 방장실로 되돌아갔다는 내용과 갔다.

그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암두의 물음은 스님들이 어느 지방에서 왔는가를 묻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들의 수행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말이다. 그 스님은 "영남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암두화상은 영남지방의 선지식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설봉화상을 친견하고 왔는가 확인하고 있다. 단순히 설봉의 얼굴을 친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봉의 진의(眞意)와 정법의 안목을 친견했는가를 묻고 있다. 그 스님은 "예, 찾아뵙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차별(양변)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의 처소에 이르렀다는 대답은 벌써 양변의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본래의 근본당처(불심)에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전과 지금으로 논의하거나 사량분별할 장소가 아닌 것이다. 선의 종지로 한방 먹인 것이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묻자, 스님은 지난날에 설봉화상을 참문한 일과 그 당시의 대화를 말씀드렸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고 묻자, 스님은 "당시 설봉화상은 말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암두화상은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때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본칙 공안의 핵심이며,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암두의 인격이 들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스님이 설봉을 참문했을 때, 설봉이 "뭐야!"라고 말하자, 스님도 "뭐야!"라고 응답하자, 설봉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고 한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암두는 "설봉은 나와 같이 덕산을 스승으로 참선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산에서 성도하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 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를 더 제시했었더라면 이 스님들과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인데"라고 후회하고 있는 말이다. 암두의 이 말은 들은 스님은 비로소 설봉이 "뭐야!"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말후구가 불법을 체득해야 할 문제(疑團)가 되어 90일간 안거동안 이 문제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말후구는 최후로 궁극적인 불도를 체득하는 한마디(一句)로 중생심(의심)을 죽이고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信心)으로 불심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법문을 말한다.

그 스님은 하안거가 끝날 때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 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나와 똑같이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서 깨달음은 같지만, 교화방법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똑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설봉은 설봉의 안목이 있고, 암두는 암두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학인을 교화하는 수단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는 바로 이것뿐이다. 지견 분별과 언어문자를 여읜 본래심으로 사는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설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었다. '궁극적인 한마디. 그대에게 말한다.' 암두가 말후구를 설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내가(설두) 학인들을 위해 설하리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다.' 차별과 평등,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초월한 경지가 설두가 설한 말후구이다.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군.' 암두의 말을 이어 설두는 밝음이 쌍으로 이루어지는 천지 만물이 생성하는 경지와 어둠이 쌍으로 전개되는 만물일체의 절대 평등의 세계를 읊고 있다. 만물이 생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처럼, 성장과 모양과 작용은 각기 다른 것이다. 매화와 벚꽃이 다르고 산과 물이 각각 자기의 모양과 색깔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법실상의 세계라는 사실이 설두가 제시한 말후구의 법문이다.

'달리한다는 사실.' 만물이 같이 태어나도 같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와 같이 '석가와 달마의 다름도 잘 분별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만물이 각자 되돌아갈 본래의 곳으로 '남북동서로 돌아가라'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눈을 함께 본다'는 말은 밝음과 어둠(明暗)을 함께 보는 절대평등의 경지를 설두는 말후구로 읊고 있다.



[第052則]渡驢渡馬
〈本則〉擧。僧問趙州。久響趙州石橋。到來只見略彴。州云。汝只見略彴。且不見石橋。僧云。如何是石橋。州云。渡驢渡馬。
〈頌〉孤危不立道方高。入海還須釣巨鼇。堪笑同時灌溪老。解云劈箭亦徒勞。

벽암록 52칙 조주의 돌다리

“조주의 돌다리는 깨달음 인도하는 가르침”


{벽암록} 제52칙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말했다.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우러러 사모한지 오래 되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통나무 다리뿐이군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통나무 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군!" 스님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擧.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 州云, 汝只見略, 且不見石橋. 僧云, 如何是石橋. 州云, 渡驢渡馬.


어떤 사람이나 짐승도 건너가게
모두다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

본칙의 공안은 {조주록} 중권과 {전등록} 제10권 조주전에 전하고 있다. 조주종심(778 ~897)은 {벽암록} 9칙에 조주 동서남북의 문에도 등장한 유명한 선승이다. {전등록}에는 위의 선문답에 이어서 다음의 질문이 첨가되어 있다. "스님이 어떤 것이 통나무 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사람마다 각각 따로 건넌다(度)"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건넌다(度)'라는 말은 다리가 사람과 나귀, 말 등이 건너간다(渡)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곳(사바세계)에서 저곳(열반)의 경지로 구제(渡)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 {조주록}에는 본칙의 공안과 똑같이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건너오게, 건너와!"라고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뭐야! 통나무 다리뿐이군!"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다는 말로 구향(久響)은 구향(久嚮)이 맞다. {무문관} 제28칙에 덕산이 용담선사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용담을 사모(久響龍潭)하고 찾아갔는데, 연못도 없고 용도 보이지 않네"라는 덕산의 말도 같은 의미이다. 원오는 '평창'에서 "하북성 조주 땅에는 돌다리(石橋)가 있었는데, 이 다리는 이응(李膺)이 만든 것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천하에 유명하다. 약작(略)이란 외나무다리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심화상이 거주한 조주의 관음원은 조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조주의 돌다리를 건너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석교(石橋)로 유명한 곳은 천태산과 남악과 조주의 돌다리 세 곳이다.

질문한 스님은 유명한 장소인 조주의 돌다리를 항상 우러러 사모하고 있었는데 와서 직접 확인해 보니 널판자 하나를 걸쳐놓은 다리 아닌가. 널판자 다리를 비유하여 조주화상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은 안목이 뛰어나고 도가 높은 선지식으로 천하에 유명하여 항상 존경하고 사모했었는데, 찾아와서 직접 보니까 '볼품없이 늙고 메마른 영감이 아닌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비판의 일침을 내뱉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그래도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화상을 상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이 스님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아주 위험에 직면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그대는 조주의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진짜 조주의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눈으로 보이는 널판자의 조주 다리만 보고, 늙어빠진 조주를 친견하고도 조주화상의 진수인 지혜작용을 펼치는 참된 법신(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있군' 즉 그대는 눈과 귀로 보고 듣고,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만을 마음이라고 믿고 중요한 본래의 불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역시 조주는 이러한 스님을 상대하는 수단이 노련하다"고 착어했다. 마치 늙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조주의 접화 수단은 너무나 노련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먹이로 제시하여 그 스님을 낚아 올리고 있다.

즉스님은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한 것은 원오의 착어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이 던진 낚시에 걸린 것이다. 사실 질문한 스님은 조주의 돌다리와 널판자다리, 두 가지 다리(사물)로 나누어 대립시키고 있는 것부터 커다란 결함을 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라고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도 마차도 모두 왕래하며 다니는 다리이다. 조주의 돌다리는 어떠한 사람이나 마차나 짐승이 밟고 지나가도 본래 여여한 그대로 무심한 경지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마음도 무심의 경지에서 평상심으로, 일체의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마치 돌다리와 같은 경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황벽의 설법에 '무심한 마음'을 허공과 갠지스 강의 모래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갠지스 강의 모래(恒河沙)라는 말은 경전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설법한다. 이 모래는 부처나 보살이나, 제석천이나 범천 등의 천인이 그 위를 밟고 걸어도 별달리 고맙고 감사하며 기쁘게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소나 양, 곤충 벌레들이 밟고 지나가도 달리 성내거나 화내지 않는다. 진귀한 보물이나 값비싼 향수도 욕심내지 않으며, 똥이나 오줌, 더러운 물질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 갠지스 강의 모래 같은 마음을 무심(無心)의 마음이라고 한다."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라고 말한 것은 무심의 경지에서 묵묵히 하심행을 하는 보살이며, 부처가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으로 철저하게 돌다리와 같고,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은 대승보살의 마음이라고 설한 것이다.

{화엄경} 정행품에 다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교량을 보면 마땅히 원력을 세워라 중생을 위하여 불법의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건너게 하여 망념을 쉬도록 하리라고." 중생의 제도하는 보현보살의 정신을 다리를 건너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자비로 실행할 것을 설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조주의 본래 부처(古佛)를 친견하는 것이며, 중생심의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는 인연인 것이다.

{조당집} 제7권에 설봉은 행각하면서 천태산의 돌다리(石橋)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도를 배우고 수행을 하기에 힘이 충분치 못하거든, 부디 이 몸을 끌고 험한 길을 걸어라. 돌다리(石橋)를 한차례 지나고 난 뒤에 허망한 이 몸이 다시 나지 않는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네." 조주화상이 사람들을 지도하는 방법은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이나 방망이를 사용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고, 일상생활의 평범한 대화로 말하고 있지만, 그의 평범한 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오르기 힘든 천 길의 벼랑이 있다. 설두는 이 한 마디로 조주의 위대한 교화를 찬탄하고 있다.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큰 자라를 낚아야지.” 열자(列子)에 용백국(龍伯國)이라는 곳에 큰 사람이 한 번의 낚시에 여섯 마리의 자라를 낚아 돌아간다는 고사를 토대로 읊은 것인데, 바다에서 낚시를 하려면 피라미나 새우같은 잡어를 낚아서는 안 된다. 조주화상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사람을 접견하는 것은 한마디의 낚시로 큰 자라를 잡는 것처럼, 출격 대장부를 낚으려고 한 것이라고 조주의 수단을 칭송한 말이다.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灌溪)스님이여”

관계스님은 임제의 법을 이은 지한(志閑)선사로 조주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평창'에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관계화상을 침문하고 본칙의 내용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어떤 것이 관계입니까?” 질문하자, 관계화상은 "쏜살같은 급류"라고말했다. 자신의 지혜작용은 "쏜살같은 급류"라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네." 왜 조주화상처럼,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고 평탄한 말로 본지풍광을 들어내지 못했을까? 동시대의 관계스님의 안목을 비판하며 조주의 경지를 칭찬하고 있다.



[第053則]何曾飛去
〈垂示〉垂示云。遍界不藏。全機獨露。觸途無滯。著著有出身之機。句下無私。頭頭有殺人之意。且道古人。畢竟向什麽處休歇。試擧看。
〈本則〉擧。馬大師與百丈行次。見野鴨子飛過。大師云。是什麽。丈云。野鴨子。大師云。什麽處去也。丈云。飛過去也。大師遂扭百丈鼻頭。丈作忍痛聲。大師云。何曾飛去。
〈頌〉野鴨子。知何許。馬祖見來相共語。話盡山雲海月情。依前不會還飛去。欲飛去。卻把住。道道。

벽암록 53칙 마조화상과 들오리

"지극한 '도(道)'는 온 세계에 두루 퍼져있어"


{벽암록} 제53칙은 마조도일 화상과 백장스님이 들오리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조대사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백장스님이 말했다. '들오리입니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어디로 날아갔느냐?' 백장이 말했다. '날아 가버렸습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느라고 신음하였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뭐야! 날아 가버렸다고'

擧. 馬大師, 與百丈行次, 見野鴨子飛過. 大師云, 是什. 丈云, 野鴨子. 大師云, 什處去也. 丈云, 飛過去也. 大師, 遂百丈鼻頭, 丈作忍痛聲. 大師云, 何曾飛去.

본칙은 {광등록} 제8권 백장전에 처음으로 전하고 있으며, {연등회요} 제4권과 {설두송고} 53칙에 최초로 수록한 공안이다. {조당집} 제15권 오설영묵(五洩靈默)전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어느 날 마조대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서쪽 담장 밑을 거닐다가 갑자기 오리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대사가 주위를 돌아보고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정(政)상좌가 말했다. ' 오리떼 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날아갔습니다' 마조대사는 정상좌의 코를 잡아끄니 정상좌가 아파서 소리 지르자, 대사가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는데 언제 날아갔다고 하는가' 정상좌가 활짝 깨달았다” 정상좌는 마조의 제자 백장유정(百丈惟政)으로, 이것이 본칙공안의 원형인데, 뒤에 {광등록}과 {설두송고}에서는 마조와 백장회해와의 인연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도일(709~788)은 {벽암록} 제3칙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사선의 선구자이다. {전등록}에는 그의 문하에 뛰어난 선지식이 139명이나 배출되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사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선원을 독립하고 {백창청규}를 제정하여 선불교의 새로운 교단을 체계화한 사람이 백장회해(749~814)인데, 그의 법문도 26칙에 싣고 있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선문답의 화제로 제시하여 백장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가리켜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문제라고 한다. 마조대사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원오도 '평창'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대사가 들오리인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마조대사는 그렇게 물었을까. 마조대사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말하자면 들오리가 날아가는 그 곳에 만물이 존재하는 본질과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백장이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물음인 것이다.

백장스님은 그냥 "들오리입니다"라고 들오리가 날아가고 있는 그대로를 본대로 정직하게 대답한 것이다. 당시의 백장은 마조대사를 지도를 받고 있는 젊은 수행자였기 때문에 안목을 갖춘 날카로운 선기(禪機)가 없다. 원오도 "백장의 면목(鼻孔)이 이미 다른 사람(마조)의 손안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의 물음에 너무 정직하게 대답한 것은 자신이 자유가 없다. 때문에 그의 생명은 이미 마조대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조대사는 다시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었다. 들오리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 마조대사의 저의는 법계에 두루하여 감출 수 없는 대도의 지혜작용은 필경 어느 곳에 귀착되는가? 들오리와 일체의 만법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 만법의 귀결처를 묻고 있는 말이다. 두 번째로 시험하는 마조의 물음은 문제의 핵심을 더욱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원오도 "앞의 화살은 아직 가볍게 박혔지만, 뒤의 화살은 깊게 박혔다"라고 착어했다. 원오는 또 "또한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가 “이것은 무엇인가?” "어디로 날아갔는가?"라고 혼잣말로 묻는데, 들오리의 낙처를 문제로 한다면 마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백장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백장은 거듭 "날아 가버렸습니다"라고 어디까지나 바보처럼 정직하게 본대로 들오리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원오는 "단지 마조대사의 말만 쫓아다닌다. 정면에서 어긋났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백장은 마조대사의 질문에 따라 너무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대사는 본분사를 문제로 하여 묻고 있는데, 백장은 들오리를 화제로 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빗나간 대화라고 비평하고 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마조대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백장을 깨닫도록 여러가지 물음과 방편을 제시했지만 생각한대로 진행하지 못하자 즉시 선기(禪機)를 발동하여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원오는 "부모가 낳아준 코(본래면목)를 도리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마조가 손으로 비틀은 코는 백장 자신의 코인데, 그 코를 다른 사람이 붙잡고 비틀고 있으니 안타깝다. 멍청하게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며, 마조대사의 물음에 그냥 본대로 대답할 분위기도 아니다. 코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전부 들어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다. 백장 자신도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있는데 왜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선기를 발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백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안을 읽는 모두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을 발휘해야 할 것을 자각해야 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자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아야!"라고 신음소리를 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해서 나오는 신음소리는 본래심의 작용으로 들어난 백장의 본분사인 것이다. 인통(忍痛)의 소리는 일부러 내는 작위성의 소리나 분별심의 소리가 아니다. 백장 자신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고함소리이며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으로 나타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며, 우주법계가 감출 수 없는 본래 자연의 소리이며 법음(法音)인 것이다. 원오는 "아파서 신음하는 그 가운데 본래면목이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백장은 앞에서 "날아가 버렸다"고 말했는데, 들오리는 지금 코를 비틀자 여기서 아프다고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신음하고 있는 것이 들오리인가, 백장인가? 이 소리는 들오리의 울음이기도 하고, 백장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며, 각자의 본래심의 소리(법음)인 것이다.

마조대사는 백장의 코를 비틀고 쳐다보며 “뭐야! 들오리가 날아 가버렸다고” 여기 내 앞에서 아프다고 고함치고 있지 않는가? 젊은 제자 백장을 지도하는 노파심이 넘치고 있다.

이후의 이야기는 '평창'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의 지도와 시절인연이 도래되어 백장은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이튼날 마조대사는 "그대는 깊이 오늘의 일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백장을 인가하였다고 전한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들오리여!” 설두는 큰 소리로 들오리를 부르고 있다. 마조와 백장이 가는 길에 나타난 들오리인가? 여기서 말하는 들오리는 불법의 대도이며, 사람들이 구족하고 있는 불성인 들오리를 불러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디(何許)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들오리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가? 설두는 마조를 대신하여 백장, 그대는 들오리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는가? “마조대사는 만나자 말을 걸었네.” 마조는 들오리를 발견한 백장에게 대화를 한 것을 읊었다. 백장은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파악하고, 대화를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인줄 알고 말을 걸었다. “산, 구름, 바다, 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서 모두 말했네.” 마조는 속진(俗塵)을 떠난 자연의 대도(大道)와 불법의 근본을 마음껏 말했네. 그러나 백장은 마조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르고서 도리어 날아갔다"고 말했다. 백장은 코가 비틀리자 아야! 하면서 깨달았다. 설두는 "날아가려고 하는 순간, 붙잡고서 말해라, 말해봐!"라고 독자에게 재촉한다. 그대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第054則]某甲話在
〈垂示〉垂示云。透出生死。撥轉機關。等閑截鐵斬釘。隨處蓋天蓋地。且道是什麽人行履處。試擧看。
〈本則〉擧。雲門問僧近離甚處。僧云。西禪。門云。西禪近日有何言句。僧展兩手。門打一掌。僧云。某甲話在。門卻展兩手。僧無語。門便打。
〈頌〉虎頭虎尾一時收。凜凜威風四百州。卻問不知何太嶮。

벽암록 54칙 운문화상의 ‘어디서 왔는가’

"구도자는 독자적인 지혜와 안목 갖춰야”


{벽암록} 제54칙은 운문문언 화상을 참문한 스님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운문 화상이 물었다. “서선사에서는 요즘 어떤 말(言句)이 있었는가?” 스님은 두 손을 펼쳤다. 운문 화상은 손바닥으로 한방 갈겼다. 스님은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운문 화상이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운문 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擧. 雲門問僧, 近離甚處. 僧云, 西禪. 門云, 西禪近日, 有何言句. 僧, 展兩手. 門, 打一掌. 僧云, 某甲話在. 門, 展兩手. 僧, 無語. 門, 便打.


운문문언(864~949) 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당말의 선승으로 달리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하권, '감변(勘弁)'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화 내용은 같다. 하안거를 마치고 운수납자인 어떤 수행자가 운문 화상을 친견하러 왔다. 운문 화상은 그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은 선지식이 처음 참문하는 수행자에게 던지는 상투적인 수단이다.

{벽암록} 10칙과 35칙에서도 목주와 앙산이 학인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원오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수단방편으로 설치하는 도구이다.

즉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살펴 측정해 보기 위해 던지는 한마디이다. 물의 깊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지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마디 인사말(一句)를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벌써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취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인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한마디지만 방심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甚處)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나 위치방향을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나 방향위치를 등지고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인사말이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장소로 대답하면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단순히 인사로 받아들이면 운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운문이 묻고 있는 '어디(甚處)서 왔는가?'라는 한마디에 장소와 학인의 본분을 묻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운문어록}에는 운문 화상이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라는 질문에 "서선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서선사는 소주(蘇州)에 있는 사찰인데, 이 스님은 광동성의 소주(韶州) 운문산까지 온 것이다. 당시 서선사에는 누가 주지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등회원} 제4권에는 남전보원의 제자인 소주서선 화상이 행화를 펼친 곳인데, 운문 화상과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회요}에는 서선 화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스님이 뒤에 운문의 스승인 설봉선사를 참문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만, 운문 당시의 서선사의 선지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운문 화상은 스님에게 "서선사의 주지 화상은 어떠한 법문(言句)으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즉 그대는 서선사에서 주지 화상의 법문을 듣고 체득한 경지는 어떠한지 제시해 보라는 말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앞으로 내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 행동을 전수(展手)라고 하는데, 선승들의 선문답에 자주 등장한다.

{운문광록} 중권에도 "운문 화상은 어떠한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양쪽으로 내렸다(展兩手垂兩邊)'라는 일단이 보인다. {조당집} 19권, "'불법의 궁극적인 일은 무엇입니가?'라는 질문에 선사는 양 손을 펼쳤다"라고 하는 것처럼, 양손을 펼쳐 보인 행동은 불법의 근본을 제시하여 보인 행동이다. 이것으로 불법의 근본정신을 하나도 감춤없이 모두 다 들어내 보였다는 의미이다.

또한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조주선사는 새로운 스님에게 '요즘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했다. 그 스님은 '오대산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주는 '문수를 친견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스님은 손을 펴 보였다. 조주는 '그러한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문수는 누가 친견한 것인가?'라는 대화가 있다. 여기서도 자신이 바로 문수이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원행을 손을 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산양개 화상이 학인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조도(鳥道), 현로(玄路),전수(展手)의 세 가지 방편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조도(鳥道)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고, 현로(玄路)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한 공적한 경계에 살도록 하며, 전수(展手)는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수(展手)는 수수(垂手)나 수자(垂慈)와 같은 말로 부모가 손을 내밀어 어린애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한다. {십우도}의 마지막에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는 이러한 보살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법화사상에서 말하는 수적(垂迹)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을 나툰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보살의 근본을 본지(本地)라고 하며 화신으로 몸을 나툰것을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손을 펴서 내보이자 운문 화상은 전광석화와 같이 손으로 그 스님을 한방 후려쳤다. 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고함과 같이 운문의 안목은 일체의 분별심과 거짓 흉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는 그 스님이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살림살이에 대하여 도적의 살림이 파산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운문의 행동에 그 스님은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내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후려갈기면 어떠합니까'라는 강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자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이 행동으로 보인 것처럼,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손을 펼쳐보인 행동은 같지만 그 스님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고,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불법의 대의를 숨김없이 모두 다 행동으로 제시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스님은 운문의 자비심과 행화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그 스님을 본격적으로 곧장 내리치며 정신 차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선지식을 모시고 불법을 공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전등록} 29권에 '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행한 길도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나 여래의 경지까지 초월한 독자적인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일시에 잡으니” 운문화상의 선기와 방편적인 수단이 원만하고 뛰어남을 칭찬한 말이다. 처음 운문 화상이 곧장 한방 후리치리고, 나중에 운문 화상이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자 역시 또 한방 먹인 것은 정법의 안목으로 지도한 것이다. 운문의 교화방법은 전후와 수미(首尾)에 지혜의 방편법문으로 일관되게 대응하여 제시한 것을 읊고 있다.

“늠름한 위풍이 천하(四百州)에 떨쳤네.” 앞의 한 마디로 본칙 공안의 입장을 읊었지만, 다시 뜻을 이어서 운문에 대한 찬사를 연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덕망과 지혜의 선풍은 중국 천하 4백주(四百州)에 두루 하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고 할지라도 운문 화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지극히 높게 찬탄하고 있다. 원오도 "온 천하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있네. 누구 한 사람 운문화상 앞에서 일언반구도 제시할 수가 없다."고 찬탄하고 있다.

“도리어 묻노니 어쩌면 그렇게 험준한지 알 수 없어라.” 설두 화상이 학인에게 제시한 문제의 질문으로 운문 화상의 선기작용이 험준한 경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설두는 운문을 대신해서 '한번 용서해 준다'라고 했다.” 어떻게 운문의 험준한 선기를 파악해야 할 것인가? 잘 사유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第055則]不道不道
〈垂示〉垂示云。穩密全眞。當頭取證。涉流轉物。直下承當。向擊石火閃電光中。坐斷[言+肴]訛。於據虎頭收虎尾處。壁立千仞。則且置。放一線道。還有爲人處也無。試擧看。
〈本則〉擧。道吾與漸源至一家弔慰。源拍棺云。生邪死邪。吾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吾云。不道不道。回至中路。源云。和尙快與某甲道。若不道。打和尙去也。吾云。打卽任打。道卽不道。源便打。後道吾遷化。源到石霜擧似前話。霜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霜云。不道不道。源於言下有省。源一日將鍬子。於法堂上。從東過西。從西過東。霜云。作什麽。源云。覓先師靈骨。霜云。洪波浩渺白浪滔天。覓什麽先師靈骨。源云。正好著力。太原孚云。先師靈骨猶在。
〈頌〉免馬有角。牛羊無角。絶毫絶氂。如山如嶽。黃金靈骨今猶在。白浪滔天何處著。無處著。隻履西歸曾失卻。

벽암록 55칙 도오화상의 조문

“생사가 여일한데 生과 死는 왜 구별하나”


{벽암록} 제55칙은 도오원지(道吾圓智)화상과 제자 점원(漸源)이 어떤 집을 방문하여 문상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도오화상이 제자 점원스님과 함께 어느 집에서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살았는가? 죽었는가?” 도오화상이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절로 돌아오는 길에 점원이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때릴려면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점원은 곧장 후려 쳤다. 그 뒤에 도오화상이 입적하자 점원은 석상화상께 가서 이 이야기를 했다. 석상화상은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석상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고가자, 석상화상이 말했다. “무엇하는가?” 점원은 말했다. “스승(先師)의 영골(靈骨)을 찾습니다.” 석상화상이 말했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까마득히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 설두가 착어했다. “아이고! 아이고!”점원이 말했다. “온 힘을 다해서 부딪쳐 봅니다.” 태원의 부상좌가 말했다. “스승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

擧. 道吾, 與漸源, 至一家弔慰. 源, 拍棺云, 生邪死邪. 吾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吾云, 不道, 不道. 回至中路, 源云, 和尙, 快與某甲道. 若不道, 打和尙去也. 吾云, 打卽任打, 道卽不道. 源, 便打. 後, 道吾遷化. 源, 到石霜, 擧似前話. 霜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霜云, 不道不道. 源, 於言下有省. 源, 一日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霜云, 作什. 源云, 覓先師靈骨. 霜云, 洪波造渺, 白浪滔天. 覓什先師靈骨.(雪竇著語云, 蒼天蒼天.) 源云, 正好著力. 太原孚云, 先師靈骨猶在.


"살았는가 죽었는가…" 물음에
도오화상 "말할 수 없다" 대답

이일단의 선문답은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 점원장에 전하고 있는데, 이야기는 약간 다르다.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화상은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5권, {전등록} 제14권, {송고승전} 제11권 등에 전하고 있다. 점원중흥(漸源仲興)선사에 대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이다.

어느 날 도오화상은 제자 점원과 함께 신도 집에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도오화상에게 질문했다. “관속의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육체적인 현상으로 볼 때 생사가 있고, 관 속의 사람은 죽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선문답의 주제로 하는 법신의 본체상에서 볼 때 생사와 생멸이 없다. 그래서 도오화상은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생사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는 법문을 친절하게 말했다. 점원은 도오화상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어째서 말씀하셔서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다그친다.

도오화상은 역시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법신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사와 생멸의 차별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이다.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제법의 본체를 생사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오화상은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를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점원은 절로 돌아오는 길에 도오화상에게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점원은 생사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승에게 필사적인 결단으로 가르침을 요구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때릴려고하면 그대 마음대로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점원은 도오화상을 곧장 후려쳤다.

'평창'에는 이 사건의 전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이처럼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그를 지도했으나 점원은 깨닫지 못했다. 도오화상은 맞은 뒤에 점원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절의 책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스럽다' 남모르게 점원이 절을 떠나도록 했다. 점원은 그 뒤 작은 절에서 행자가 외우는 {관음경}의 '비구의 몸으로 제도를 받을 자에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설한다'는 구절을 듣고 곧장 크게 깨치고, '내가 당시 스승의 말씀을 잘 모르고 나쁜 짓을 했구나. 생사의 일이 언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구나!'라고 말했다. 점원이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생사문제를 해결한 뒤에 스승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했지만 스승이 입적한 뒤였다.”

점원은 사형인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선사를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제시하며 점검해 줄 것을 청했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으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15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담주 석상산에서 교화를 펼쳤다. 석상선사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점원은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라고 다그쳤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말과 똑같이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많은 세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한 것이다. 이 공안은 여기서 한 단락을 맺는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시늉을 하면서 동쪽에서 서족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하자 석상선사가 "자네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점원의 심중을 떠보려고 물었다. 점원은 "스승(先師)의 영골(靈骨. 법신)을 찾습니다"라고 말했다. 법당에서 입적하신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아 마치 삽으로 파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석상화상은 "뭐야! 여기는 거대하게 파도가 몰아치는 큰 바다 한 가운데야!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즉 온 대지가 마치 하나의 파도와 같이 물거품속인에 선사의 영골을 어디서 찾으려 하는가? 선사의 영골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눈에 가득 귀에 가득 함께 하고 있는데, 굳이 삽을 들고 찾으려고 할 필요가 있는가? 석상은 점원이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타파하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이 공안을 제시하면서 "아아! 아아! 통탄할 일이야!"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는가. 온 천지 가득찬 영골을 찾는 점원에 대한 탄식인가. 아니면 석상의 친절한 가르침에 대한 것인가. 원오는 "너무 늦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점원이 천화한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는 일이 너무 늦은 일이라고 한 것인가. 점원은 석상의 말에 대하여 "찾을 수 없는 영골을 찾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뒤에 설봉의존의 제자인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가 이 선문답에 대하여 "도오화상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라고 평했다. 본원 자성의 법신사리는 천지와 우주에 하나 가득 충만해 목전에 분명히 현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없다” 도오화상이 '말 할 수 없다'는 말을 읊은 것으로, 관 속에는 사인(死人)인데,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세하게 가는 터럭도 끊었네.” 아주 미세한 터럭도 끊었다고 하는 것은 먼지 하나 없는 본래 무일물의 경지로서 생사망념의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이다. 구름 한 점도 없는 창공, 절대의 경지는 생사망념을 초월한 본체의 입장이기에 비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일체를 초월한 절대 평등의 경지에 '산은 높이 솟아 있다' 미세한 터럭도 끊어진 절대 평등의 세계가 그대로 산이 높이 솟아 있는 차별세계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읊고 있다. 생사의 본체인 법신은 없다고 하면 형상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하면 분명하고 역역하게 전부 드러나고 있다. 태원 부상좌가 "황금빛 영골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하고, 석상은 "바닷물이 파도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고 한 것처럼, "찾을 곳이 없다."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서천으로 돌아가다 잃어버렸네.” 달마가 웅이산에서 장례 치른 뒤에, 관을 열어보니 유해도 없고, 인도로 돌아갔다지만, 그의 행방도 알 수 없다는 고사로 게송을 읊고 있다.


[第056則]一鏃破三關
〈垂示〉垂示云。諸佛不曾出世。亦無一法與人。祖師不曾西來。未嘗以心傳授。自是時人不了。向外馳求。殊不知自己脚跟下。一段大事因緣。千聖亦摸索不著。只如今見不見聞不聞。說不說知不知。從什麽處得來。若未能洞達。且向葛藤窟裏會取。試擧看。
〈本則〉擧。良禪客問欽山。一鏃破三關時如何。山云。放出關中主看。良云。恁麽則知過必改。山云。更待何時。良云。好箭放不著所在便出。山云。且來闍黎。良回首。山把住云。一鏃破三關卽且止。試與欽山發箭看。良擬議。山打七棒云。且聽這漢疑三十年。
〈頌〉與君放出關中主。放箭之徒莫莽鹵。取箇眼兮耳必聾。捨箇耳兮目雙瞽。可鄰一鏃破三關。的的分明箭後路。君不見。玄沙有言兮。大丈夫先天爲心祖。

벽암록 56칙 흠산화상의 화살 일촉(一鏃)

“선승 흉내낸다고 깨달음의 세 관문 통과 못해”


{벽암록} 제56칙은 흠산화상과 거양선객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거양(巨良)선객이 흠산(欽山)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흠산화상이 말했다. "관문속의 주인을 들어내 보여라!" 거양이 말했다. "그러한즉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지요." 흠산화상이 말했다. "다시 어느 시기를 기다리는가? 당장 고쳐야지!" 거양이 말했다. "화살은 잘 쏘았는데, 잘 맞지는 않았군요."라고 말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흠산화상이 말했다. "잠깐 보세, 화상!" 거양이 머리를 돌리자 흠산화상은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하는 일은 그만두고 흠산에게 화살을 쏘아 봐라!" 거양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자, 흠산화상이 일곱 방망이를 치면서 말했다. "이 놈은 앞으로 30년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擧. 良禪客, 問欽山, 一鏃破三關時如何. 山云, 放出關中主, 看. 良云, 恁則知過必改. 山云, 更待何時. 良云, 好箭放, 不著所在. 便出. 山云, 且來黎. 良回首. 山把住云, 一鏃破三關, 卽且止. 試與欽山發箭, 看. 良擬議. 山打七棒云, 且聽, 這漢疑三十年.


차별심 빠진 채 함부로 화살 쏘면
본래 면목 과녁 적중시킬 수 없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7권 흠산화상전에 보인다. 흠산문수(文邃)화상은 동산양개화상의 법을 이었으며, 풍주 흠산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인데,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설봉의존과 암두전활, 세 사람이 도반이 되어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다 오산에서 설봉이 깨닫고 성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흠산화상에게 질문을 한 거양선객에 대해서도 전연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행각수행하는 무명의 선승이리라.

어느 날 거양선객이 흠산화상을 찾아와서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개의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관(關)은 관문, 관소로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다. 그런데 세 개나 되는 관문을 돌파했다고 한다. 전쟁에서는 내진(內陣), 중진(中陣), 외진(外陣)의 삼관문(三關門)으로 설치된 난공불락의 돌파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번뇌 망념의 차별심과 중생심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며, 가장 돌파하기 어려운 세 개의 관문이다. 보통 법신, 반야, 해탈이라고 하고, 동산의 조도(鳥道), 현로(玄路), 전수(展手)의 삼로(三路)라고 하거나 황용의 삼관(三關) 등을 배대하여 언급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곧바로 여래의 경지를 체득한 입장이다. 거양선객이 자신이 '나는 일체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여래의 경지를 체득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객을 어떻게 제접하겠습니까'라고 흠산화상에게 정면으로 법전(法戰)을 제기하고 있다.

흠산화상은 "그래! 그렇다면 관문을 돌파한 그 주인공을 들어내 보여라!" 즉 삼관(三關)을 하나의 화살로 돌파한 관문의 주인인 그 대장을 내가 화살로 쏘아 볼 테니 지금 여기 내 앞에 들어내 보여라고 재촉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문의 주인(關中主)은 무엇인가? 원오는 "주산(主山)은 높고, 안산(按山)은 낮다."고 착어했다. 이 말은 {운문광록}의 말인데, 높은 산은 높은 그대로 낮은 산은 낮은 그대로 관문의 주인공(본래면목)이 본래 그대로 있다고 말한 것이다. '관중의 주인공'은 제불이 출세하기 이전, 부모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전의 자기 본래면목을 말한다. 그러자 거양은 "그렇습니까? 제가 화살을 쏘는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고쳐서 다시 한번 화살을 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벌써 두 번째 차별에 떨어졌다."고 하며, 공격한 장수가 이진(二陣)으로 퇴각하고 있다고 착어했다. 그러나 흠산화상은 틈을 주지 않고 급히 추격하며, "잘못을 고친다고 이진으로 물러가더니 언제 다시 공격의 화살을 쏘려고 하는가? 지금 당장 공격해야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거양은 "내가 화살은 잘 쏘았는데, 과녁에 잘 맞지는 않았군요.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량은 흠산화상에게 두 번이나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자신이 쏜 화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흠산화상이라고 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흠산화상에게 정법의 안목을 점검받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 두겠다고 큰소리치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거양선객이 법당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보고 흠산화상은 "잠깐 기다리게. 화상!"이라고 하며, 거양선객을 불렀다. 원오는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나, 잡는 일은 어렵다."라고 착어했다. 즉 땅군이 피리를 불며 뱀을 불러모으는 일은 쉬워도 모인 뱀을 붙잡는 일은 어렵다. 뱀을 잘못 취급하다가는 뱀에게 물리기 때문에 처분하는 일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떠나가는 거양선객을 불러들이는 일은 쉬우나 지금부터 그를 어떻게 제접 할 것인가 어려운 일이라고 평한 말이다.

거양선객은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려서 '무슨 일인가'하고 흠산화상 앞으로 되돌아 왔다. 원오는 "맞추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부르는 화살이 거양선객을 적중시켰다고 착어하고 있다. 그 때 흠산화상은 되돌아온 거양선객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큰 소리 치는 일은 그만두고, 지금 나 흠산에게 한 화살을 쏘아 봐라! 자 어서!"라고 전신의 기력과 지혜의 힘을 다하여 목숨 걸고 던진 선문답이다. 그래서 원오도 "흠산이 학인을 위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몸을 호랑이 입에다 옆으로 누웠다."라고 하며, 흠산의 지혜작용은 '역수(逆水)의 파도'처럼 놀랄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거양선객이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면 흔이 선승들이 사용하는 고함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자신의 기봉을 펼쳐야 하는데, 엉거주춤 머뭇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였다. 이의(擬議)는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심이다. 마음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순간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나고(擬心卽差), 번뇌 망념이 작동하면 곧바로 불심을 벗어난다(動念卽乖). 흠산화상은 안목없이 선승들의 흉내나 내며 큰소리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 거양선객에게 잡고 있던 주장자로 곧장 일곱 번 후려치면서 "이 놈아! 오늘은 이정도로 훈계하지만, 앞으로 30년 더 불법의 수행해야 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이 관중의 주인이 되어 호령하였다. 원오는 '평창'에 당시 거양선객이 안목있는 선승이었다면 흠산화상이 점검받을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 것인데, 그가 안목 없는 선승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그대를 위하여 관문속의 주인공을 내보낸다." 설두는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관중의 주인(본래면목)을 들어내 보이니 잘 파악하라는 말인데, 원오는 첫 번째 화살을 잘 쏘아 맞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결코 함부로 화살을 쏘지 말라." 관중의 주인공에게 화살을 쏘려고 하는 참선수행자들은 함부로 화살을 쏘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화살만 잃어버린다. 거양선객처럼, 함부로 쏘지 말라. 일심으로 신중하게 신명(身命)을 아끼지 말고 철저한 구도심으로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추도록 해야 한다. 관중의 주인공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지만,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아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살을 잘 쏘는 일은 어렵다. '눈에 신경 쓰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쪽에 치우치고 차별심에 떨어지면 적중시킬 수가 없다. 또한 '귀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니 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눈과 귀 그 어느 한쪽에 신경 쓰고, 취사선택하거나 차별하며 집착하면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출 수가 없다고 지적한 말이다. "아아! 가련하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거양선객의 질문은 수행자의 참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누구나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다면, '화살이 지난 뒷길은 분명하다.' 관중의 주인을 맞춘 그 길은 분명한 것이다. "그대 듣지 못했는가? 현사화상이 '대장부란 천지가 개벽되기 전의 마음을 근본(祖)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 대장부는 관중의 주인공인 마음을 깨달아 체득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第057則]處是揀擇
〈垂示〉垂示云。未透得已前。一似銀山鐵壁。及乎透得了。自己元來是鐵壁銀山。或有人問且作麽生。但向他道。若尙箇裏。露得一機。看得一境。坐斷要津不通凡聖。未爲分外。苟或未然。看取古人樣子。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如何是不揀擇。州云。天上天下唯我獨尊。僧云。此猶是揀擇。州云。田厙奴。什麽處是揀擇。僧無語。
〈頌〉似海之深。如山之固。蚊虻弄空裏猛風。螻蟻撼於鐵柱。揀兮擇兮。當軒布鼓。

벽암록 57칙 조주화상과 간택하지 않음

“차별심만 없어지면 지극한 道의 경지 체득”


{벽암록}제57칙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는 말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이다." 스님이 말했다. "이 말 역시 간택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그 스님은 말을 하지 못했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如何是不揀擇. 州云, 天上天下唯我獨尊. 僧云, 此猶是揀擇. 州云, 田庫奴, 什處是揀擇. 僧, 無語.


간택, 즉 편견과 오해가 번뇌 불러
수행통해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도(道)

본칙의 선문답은 {신심명}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선문답의 주제로 삼고 조주화상에게 질문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벽암록} 제2칙에도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화제로 선문답을 한 공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58칙, 59칙에도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주제로 한 선문답을 {조주록}에서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본칙에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오직 취사선택하고 간택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지도의 경지'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취사선택하고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까지 많은 불법공부와 수행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극복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의 대의와 어려운 과제(難題)를 완전히 체득했기 때문에 지도의 원리를 통달하고 보니 지도의 경지가 지극히 간단명료하고 쉽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과 선어록에 '도는 가까이 있다.' '눈에 부딪치는 것이 모두 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도를 찾아서 여기 저기 멀리 헤매며 많은 구도의 노력과 고통과 시간을 극복한 사람이 도를 체득한 뒤에 도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서 찾아 헤맨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수시'에 백운수단(1025~1072)의 법문을 인용하여 "지극한 대도인 만법의 진실을 체득하기 전에는 만물과 매사가 의문 덩어리로 뭉쳐서 어디를 가나 은산(銀山)처럼 접근하기 어렵고, 철벽(鐵壁)처럼 오르기 힘들어 전후좌우로 나를 가로막고 있어 뚫고 나가기 어렵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자기 자신이 원래 견고한 절대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은 은과 철은 견고하여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험준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즉 범정(凡情)과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한 표현인데, 불가사의한 불심의 경지를 사량분별하는 중생심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량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간택이 없다면 지도의 경지'라는 말은 마조가 "도는 수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 망념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는 설법에 의거한 것이다. 사량분별하는 차별심과 취사선택하는 중생심에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마조는 평상심이라고 하고,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주화상도 처음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무엇이 도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남전이 마조의 법문을 체득하여 "평상심이 도"라고 대답하고 있다.

평상심은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이기에 "무심(無心)이 도(道)"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극한 도는 평상심으로 일상생활하는 그 가운데 무심의 경지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신비한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평상심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매사가 깨달음의 생활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려면 오직 간택하는 중생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 취사선택하고 분별하지 않도록 하는 '불간택(不揀擇)'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질문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을 간택하고, 번뇌와 보리를 간택하고 시비득실을 간택하며 애증호오(愛憎好惡)를 간택하며 사는 중생으로 이러한 간택을 초월하는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쇠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삼키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쉬운 질문이 아니다. 지혜의 안목없이 함부로 이 질문을 쉽게 받아들이면 가시가 목에 걸리게 된다.

조주화상은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세존이 출생하여 한 말로 세존이 홀로 유일하게 위대하고 귀중한 존재라는 독선적인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각기 모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유일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개는 개로서, 고양이는 고양이로서 절대 유일한 존재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지도의 절대적인 모습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천상천하 시방법계에 충만하여 다른 어떤 무엇과 대비할 것도 없이 간택이 끊어지고 일체를 초월한 절대존재의 입장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이 한마디로 일체의 사량분별과 간택을 차단하고 범성(凡聖)과 증애(憎愛)와 비시득실의 분별심을 초월한 간택하지 않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대하여 "금강으로 주조한 철권(鐵券)"이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불조(佛祖)도 열 수 없는 한 장의 철권으로 가장 견고한 금강으로 주조한 것이다. 즉 금강과 같이 견고한 틀은 사람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지도(至道)의 보물을 지금 조주화상이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면 좋았을 텐데, 지혜의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화상의 말씀도 역시 간택인 것"이라고 반문했다. 원오는 "과연 예상했던 대로 조주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스님은 '아(我)'라는 말이 타(他)와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간택이라고 하고, '홀로(獨)'는 대중(衆)과, '존귀(尊)'함이 천박(卑)함과 간택한 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도의 경지나 절대의 경지를 언어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간택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입장에서 반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화상은 "이 멍청한 촌놈아! 어디에 간택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나무랐다. 조주화상은 불법의 지혜와 안목도 없는 이 스님을 심하게 욕하며 꾸짖는 한마디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법 뛰는 토끼처럼 날카롭게 질문하였지만, 안목없는 졸승이고 보니 결국 기가 죽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바다처럼 깊고, 산과 같이 견고하네." 이 말은 조주화상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 '이 촌놈'이라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지혜가 바다처럼 깊고 확고부동한 모습이 산과 같이 동요됨이 없이 팔풍(八風)이 불어와도 움직임이 없이 당당한 모습을 칭찬한 게송이다. "모기와 등에(파리)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네." 이 말은 {장자}의 우화에 의거하여 조주화상에게 과감하고 무모하게 질문한 스님에 대하여 읊은 게송이다. 즉 모기나 파리와 같은 벌레는 바람이 없을 때는 여기 저기 잘 날아다니지만 허공에 태풍이 불면 어디로 날려갔는데 알 수가 없는 존재인데, 질문한 스님은 태풍과 같은 조주를 만난 모기와 파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네." 이 말도 {회남자(淮南子)}의 고사에 의거하여 질문한 스님을 비판한 말인데, 땅강아지와 개미같이 미약한 지혜(스님)로 조주와 같은 부동의 쇠기둥을 움직이려고 하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분간하고 선택한다는 것. 난간에 매단 헝겊 북 이로다." 조주는 간택도 없는 지도의 세계에서 헝겊 북을 아무리 쳐도 한결같이 반응없는 것처럼,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第058則]烏飛免走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是時人窠窟否。州云。曾有人問我。直得五年分疏不下。
〈頌〉象王嚬呻。獅子哮吼。無味之談。塞斷人口。南北東西。烏飛免走。

벽암록 58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의 함정

“깨달음 경지는 시방세계에 두루 있어”


{벽암록} 제58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설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요즘 사람(時人)은 이 말에 집착하여 함정에 빠진 것 아닙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떻다고 분명히 설명할 수가 없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是時人窟否. 州云, 僧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疎不下.

본칙의 주제도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인데, {벽암록}에 세 번째 등장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이 말을 많이 인용하여 학인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문하의 제자들과 선승들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신심명}의 대표적인 말을 인용하여 조주화상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여기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찾아와서 "화상은 {신심명}에서 주장하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여 법문을 하고 있는데, 요즘 사람이 이 말에 너무 빠져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신심명}의 일절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스님의 질문에서 먼저 주의해야 할 말은 요즘 사람이라는 '인(時人)'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요즘 사람, 혹은 당시의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한 듯한 객관적인 표현이지만, 질문한 스님은 세간의 여러 일반적인 사람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주화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 당신은 자구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도무난이라는 언구에 너무 집착하여 함정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상당히 날카롭게 비꼬며 힐문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함정이라고 번역한 말은 과굴(窟)이라는 말인데, 새집, 혹은 구멍이라는 의미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좁은 구멍에 빠지고, 이 말에 집착한 포로가 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벽암록} 제3칙의 수시에 "(선승들이 제시한) 하나의 선기작용이나 하나의 경계, 혹은 한마디의 말이나, 하나의 문구를 가지고 깨달음을 체득하려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면 멀쩡한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구멍에 떨어지고 함정에 빠지게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과굴(窟)은 깨달음의 경계나 언어 문자 등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번뇌나 생사, 보리와 열반, 미혹함과 깨달음, 그 어느 한쪽의 경계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모두 함정(窟)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원오는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저울추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올바르게 저울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수행에서 자타(自他)와 미오(迷悟),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 어느 한쪽에만 집착하면 그 집착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려서 진실된 불법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평한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속박된 것을 '금쇄난(金鎖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금으로 만든 쇠사슬은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지만 여기에 속박되면 도리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전등록} 27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금의 쇠사슬에 얽힌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작심과 작위성이 없고, 번뇌 망념의 일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사는 사람이 금쇄난에 떨어진 것은 무위무사라는 조사선의 참된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글자대로 생각하여 무위무사라는 언어문자에 집착하고 빠져서 무애자재한 자유와 지혜작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황용혜남선사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황금의 쇠사슬에 속박된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말도 똑같은 입장이다. {벽암록} 88칙에는 "금쇄(金鎖)의 현관(玄關)을 때려 부숴라!"라는 말도 있다. 현관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지극한 관문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집착하지 말고,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삼매경을 뚫고 나가도록 지시한 말이다. 그밖에도 어떠한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거나 주착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강조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반야경전에서 많이 주장한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구체적인 실천을 선불교의 입장에서 강조한 말이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 당신은 수시로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고 있는데, 이 말에 속박되고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질문한 스님이 이 말의 함정에 빠져있으면서 남도 그렇게 함정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조주화상까지 의심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을 향하여 "아! 그 일 말인가?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대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뭐라고 분명히 설명 할 수가 없어 말없이 가만히 있네"라고 바보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주화상은 '분소불하(分疎不下)'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해명(分疎) 할 수가 없다(不下)고 말한 것이다. 원오는 조주의 이 말에 대하여 "질문에 밀려 낯을 붉히는 것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착어하여 조주화상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생기있는 법문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설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지도가 어려움이 없다는 언어문자로 지도의 경지를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중생심으로 체득할 수 없다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도(至道)의 세계를 어떻게 5년이나 10년이 지났다고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천년만년이 지나도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뭐라고 분명히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조주는 함정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함정 밖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이 공안을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함정에 떨어진 것이고, 이 말을 놓아버린 사람은 천지와 하나되고, 일체의 만물을 초월하여 곳에 따라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한 지혜로 살수가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피며 신음하고, 사자가 고함을 친다." 이 말은 조주화상의 역량이 광대하고 또한 그의 지혜작용은 준엄한 모습을 형용하여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 코끼리과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빈신(嚬呻)이라는 말은 평소에 초원에 누워있는 짐승이 손과 발을 쭉 펴고 하품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코끼리가 초원에 누워 있다가 크게 다리를 펴고 긴 코를 높이 쳐들어 움직이며, 길게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은 태연한 얼굴로 5년이 지났는데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을 읊고 있다.

원오는 "부귀중의 부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결여된 것이 없는 복덕원만한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역량이 광대한 것은 코끼리와 같고, 지혜작용이 민첩하고 준엄한 것은 사자와 같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수많은 짐승이 항복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이 스님에게 대답한 말을 사자의 포효에 비교하여 읊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 평범한 말로 대답한 것이기에 '맛도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맛도 없는 이 말에 무한의 자미(滋味)가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조주의 말을 씹고 또 씹어서 묘미(妙味)를 찾아봐야 한다. 맛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단맛인가? 쓴맛인가? 어떤 맛인가? 찾아서 사량분별하는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지도의 경지는 공간적으로 '남북동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시간적으로 언제나 '태양(까마귀)과, 달(토끼)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第059則]唯嫌揀擇
〈垂示〉垂示云。該天括地。越聖超凡。百草頭上指出涅槃妙心。干戈叢裏點定衲僧命脈。且道承箇什麽人恩力。便得恁麽。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是揀擇。和尙如何爲人。州云。何不引盡這語。僧云。某甲只念到這裏。州云。只這至道無難唯嫌揀擇。
〈頌〉水灑不著。風吹不入。虎步龍行。鬼號神泣。頭長三尺知是誰。相對無言獨足立。

벽암록 59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 법문

“앎이 아닌 실천적 삶으로 분별심 버려라”


{벽암록} 제59칙도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의 법문에 대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겨우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간택인데,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그대는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스님이 말했다. "저는 단지 여기까지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 和尙, 如何爲人. 州云, 何不引盡這語. 僧云, 某甲只念到這裏. 州云, 只這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道' 이미 여러 번 배워
이젠 말 대신 진실하게 실천을

본칙의 공안도 {조주록} 상권에 의거하고 있는데, 역시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주제를 인용하여 자주 설법한 것을 문제로 하여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곧바로 지도의 경지와는 반대인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데, 화상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조주화상은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 것처럼,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심인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그대는 왜 {신심명}의 구절과 내가 한 말을 전부다 인용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쳤다. 조주화상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신심명}의 첫 번째 구절에도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취사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드러나리라"라고 하였다. 또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조주화상의 설법은 {벽암록} 제2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의 설법을 전부 언급하지 않고 왜 일부만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는가라고 역습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원오는 "도적은 소인배이지만 지혜는 군자보다 뛰어나다"라고 {임제록행록}의 앙산혜적의 말을 인용하여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는 정말 노련한 도적과 같이 교묘하게 질문하는 스님의 문제를 완전히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조주라는 도적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저는 단지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교묘하게 몸을 피하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조주화상을 시험하는 용기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노련한 조주화상의 안목을 간파할 수가 있겠는가. 이 스님은 조주화상이 역습한 화살은 일단 피했지만, 조주화상의 날카로운 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원오도 "두 개의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논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이 스님은 이래도 저래도 진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고 평가한다. 노련한 조주화상에게 덜미가 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진흙탕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신심명}의 구절을 그 스님을 위해서 다시 그대로 설하고 있다. 그대는 오직 이 일절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법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려면 먼저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고 차별하며 간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설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선악(善惡), 범성(凡聖), 시비(是非), 득실(得失)과 탐진치 삼독심으로 분별하는 번뇌 망념을 벗어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신심명}의 일절을 잘 외우도록 하라고 당부한 법문이다. 원오는 "이처럼 학인을 위한 교화는 조주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스님의 눈동자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평상의 말로 지도의 당체를 제시하여 질문한 스님의 눈동자도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에 대한 법문을 제시할지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평한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은 중생심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며 분별심이다. 지극한 불도란 이러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청정한 불성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수법장의 {화엄오교장}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이다(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혜능도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마조도 본래 청정한 평상심이 도라고 설한다.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는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물을 부어도 물이 묻지 않네."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물방울구슬이 되어 굴러 떨어지며 연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와 같이 물이 스며들어갈 틈도 없다. 이 말은 {전등록} 제9권 위산장에 보이는 말인데, 조주화상이 견고한 지도의 경지를 제시한 것을 읊은 것이다. "바람으로 불어도 들어가지 않네." 조주화상의 지혜작용은 머리위에 하늘이 없고, 발아래 땅이 없이 바람을 불어넣을 틈도 없었다. 즉 지도(至道)는 가없고(無邊) 법계에 충만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이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원오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허공과 같이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쳤고, 견고하기가 철석(鐵石)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끊을 수도 없고, 쳐부술 수도 없는 견고한 대답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범과 같이 걸어가고, 용과 같이 간다." 범은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용은 구름을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하여 감히 접근 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여 자유 자재한 조주화상의 선기작용을 읊고 있다. 원오는 "조주화상, 그는 자재를 얻었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에는 질문한 스님은 물론, "귀신까지 울면서 소리친다. 머리의 길이가 삼척(三尺),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네. 갑자기 머리의 길이가 삼척인 요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고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다"고 읊고 있다.

'평창'에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질문하자, 동산스님은 '머리는 석자요, 목의 길이는 두 치이다'"고 대답했다. '머리 길이가 삼척'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조주의 풍모임과 동시에 지도의 경지는 일체의 형상을 초월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와 '상대하지만 말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존귀하게 서 있는 조주이다.



[第060則]拄杖呑乾坤
〈垂示〉垂示云。諸佛衆生本來無異。山河自己寧有等差。爲什麽卻渾成兩邊去也。若能撥轉話頭。坐斷要津。放過卽不可。若不放過。盡大地不消一掜。且作麽生是撥轉話頭處。試擧看。
〈本則〉擧。雲門以拄杖示衆云。拄杖子化爲龍。呑卻乾坤了也。山河大地甚處得來。
〈頌〉拄杖子呑乾坤。徒說桃花浪奔。燒尾者不在拏雲攫霧。曝腮者何必喪膽亡魂。拈了也。聞不聞。直須灑灑落落。休更紛紛紜紜。七十二棒且輕恕。一百五十難放君。師驀拈拄杖下座。大衆一時走散。


벽암록 60칙 운문화상의 주장자

“산하대지는 곧 '나'…다른 데서 찾지 말라”


{벽암록} 제60칙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 주장자가 변화하여 용이 되어 천하를 삼켜버렸으니,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擧. 雲門, 以仗示衆云, 仗子化爲龍, 呑乾坤了也. 山河大地甚處得來.


주장자는 자신이자 '한 생각'…
한 생각이 용 만들고 천하도 삼켜

운문화상의 법문은 {운문광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운문종의 조사인 운문화상은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당말의 선승으로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을 비롯해 18회나 등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어느 날 법당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것이다. 주장자는 선승이 항상 몸에 지니는 7가지 생활도구의 하나로서 길이가 7척 정도의 나무지팡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잘 사용하는 선승으로 평가하며, 임기응변에 능숙하고 자유자재한 작가로 학인들을 움켜쥐고(把住) 놓아주는(放行) 교화수단과 중생들의 번뇌 망념을 차단하는 방편의 지혜(殺人刀)와 지혜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活人劍)도 뛰어나다고 착어하고 있다. {벽암록} 22칙에 설봉화상이 남산의 맹독을 가진 독사를 대중에게 제시하였을 때 운문은 주장자를 들고서 응답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이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여 천하를 꿀꺽 삼켜버렸다.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법문이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였다"는 말에 원오는 "무슨 용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가. 주장자는 주장자 그대로 괜찮지 않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사실 주장자가 용이 되지 않아도 된다. 주장자가 천지를 삼켰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주장자는 자기자신의 주장자이며 본래면목의 주장자이다. 원오가 '수시'에 "소위 제불과 중생이 본래 다름이 없는 일심(一心)의 당체이며 산과 강이 자기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일체 만물과 자기는 하나인 것이다. 산하가 즉 자기이며 자기가 곧 산하인 것이다. 차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심의 분별심이다. 그래서 {신심명}에는 만법일여(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화엄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독특한 모양과 존재하는 그대로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만물과 서로 상즉(相卽)하며, 하나의 사물은 일체의 만물을 포용하면서도 그 독자성의 하나는 만물과 서로 상입(相入)하고 있다고 설한다. 즉 자기라는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공간인 시방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라는 하나는 일체의 만물을 포용한 만법의 근원인 것이다.

사실 주장자라는 이름도 임시로 붙인 것이며, 운문화상 자신이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생활도구이기에 편의상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제시하여 설법한 것이다. 자신의 손과 발과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처럼, 선승의 주장자나 생활도구도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혜로운 도구이기 때문에 주장자는 곧 자기 자신인 것이다.

운문화상이 주장자가 "하늘과 땅(乾坤)을 삼켜버렸다"는 말에 원오는 "천하의 납승들의 목숨(性命)이 보존하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이미 주장자가 삼켜버렸기 때문에 주장자의 목숨 그밖에 납승의 목숨이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천하의 납승도 주장자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과 강과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말에 원오는 "시방에는 벽도 없고, 사면에는 문도 없다. 동서남북 사유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미친 소리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기 주장자가 온 우주를 모두 삼켜버렸기 때문에 장벽도 없어졌고, 관문도 없는 무한의 공간이 단지 하나의 주장자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제불도 없고 중생도 없는데 산과 강과 대지가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만약 주장자라는 대상에 집착하면 또다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몸 밖에 다른 것도 없다(身心一如 身外無余)"라고 주장한 혜충국사의 말로 입증하고, 또 중생이 마음과 사물에 대한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전등록} 제10권에 전하는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의 유명한 법문을 인용해 주의 주고 있다. "장사선사가 말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종전의 식신(識神:분별의식)에 의지하여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의 오랜 세월동안 생사 망념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한다.'"

식신(識神)은 {기신론}에서 분류한 중생심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인데, 미오(迷悟), 법성(凡聖)과 생사와 열반을 차별하는 분별의식이다. 불심의 본각(本覺)은 진망(眞妄)과 미오(迷悟)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다르지 않는 불이(不異)인데, 중생심과 불심을 대조해 분별하는 것은 중생의 차별심이다. 참선 수행자가 이러한 불법의 진실을 잘 체득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분별하는 중생심(識神)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신(識神)은 불법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한 생각이며, 무량겁이라는 긴 세월에 생사망념에 윤회한 미혹한 중생심의 근본인데,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이 식신을 본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읊었다. 주장자와 자기는 하나이며, 만물과 자기는 본래 하나인데, 상대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중생심(식신)인 것이다. 자신이 젓가락을 갖고 식사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식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자를 갖고 시방의 일체 만물을 자신의 생활공간과 도구로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니" 본칙의 공안을 이 한마디로 읊고 있다. "복사꽃 떨어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 춘삼월 복사꽃이 필 때 붉은 꽃잎이 용문(龍門)의 물위에 떨어질 무렵, 고기가 몰려와 용문 삼단의 폭포를 뛰어 올라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고사를 토대로 해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하는 말에 대해 설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장자는 주장자로 무엇이 부족한가? "꼬리를 태운 놈이라고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삼단의 폭포를 뛰어오른 용은 천화(天火)가 잉어로 살던 시대의 유물인 꼬리를 불로 태워버린다고 하지만, 구름과 안개를 마음대로 움켜진 살아있는 진짜 용은 꼬리를 태우거나 용문의 폭포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 용은 원래 용인데, 망상의 꼬리를 제거하지 않아도, 폭포를 뛰어올라 진짜를 추구하지 않아도 그대로 건곤을 삼킨 천진불인 것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용이 못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 소냐" 용문의 폭포를 오르지 못한 낙제한 고기(중생)나 뛰어 오른 용(부처)이나 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일미(一味) 평등한 것인데 무슨 정신없이 슬퍼하고 실망하며 낙담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는 "이것으로 법문은 다 했다"고 하며 주장자가 용이 되어 건곤(乾坤)을 삼킨 공안의 이야기를 끝낸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이해했는가. 이해하지 못했는가. '곧바로 깨끗하고 산뜻해야 한다' 산뜻하고 깨끗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본래 청정한 모습을 읊고 있다. 보고 듣는 사물에 조금도 걸림없이 흐르는 물에 땀에 젖은 얼굴을 씻는 것처럼 깨끗한 경지에서 본래 청정한 불심에 계합한 경지를 말한다.

"다시는 지저분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 앞의 산뜻한 본래 청정에 반대된 분별 잡념에 떨어진 중생심에 떨어지지 말라는 충고이다. "72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1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 주기 어렵다." 분별망상에 떨어진 중생은 72 방뿐만 아니라 150 방망이를 쳐도 용서할 수 없다. "돌연 선사(설두)가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의 주장자에 얻어 맞을까봐 걱정하던 대중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6 

 

벽암록(5) 41칙 ~ 50칙

벽암록 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 사람 “잘못된 약으로 대선사 시험하는 건 무모” {벽암록}제41칙은 조주화상과 투자(投子)화상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선사

kr.buddhism.org

 

[第041則]投明須到
〈垂示〉垂示云。是非交結處。聖亦不能知。逆順縱橫時。佛亦不能辨。爲絶世超倫之士。顯逸群大士之能。向冰凌上行。劍刃上走。直下如麒麟頭角。似火裏蓮花。宛見超方。始知同道。誰是好手者。試擧看。
〈本則〉擧。趙州問投子。大死底人卻活時如何。投子云。不許夜行。投明須到。
〈頌〉活中有眼還同死。藥忌何須鑒作家。古佛尙言會未到。不知誰解撒塵沙。

벽암록 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 사람

“잘못된 약으로 대선사 시험하는 건 무모”


{벽암록}제41칙은 조주화상과 투자(投子)화상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선사에게 질문했다.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선사가 대답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된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擧. 趙州問投子, 大死底人却活時如何. 投子云, 不許夜行投明須到.

조주화상에 대해서는 {벽암록} 제2칙에서도 언급하였다. 투자선사는 서주(舒洲) 투자산(投子山)에서 활약한 대동(大同:819~914)선사로서 취미무학(翠微無學)화상의 문하에서 나아가 선종의 종지를 완전히 깨닫고, 두루 유행하다가 투자산에 초암을 짓고 살았다.

{조당집}제6권 투자화상전에는 조주화상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산 밑에 이르니 가게를 보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투자산이 어디인가?" 가게 주인이 "왜 물으시오?" 라고 했다. 조주화상은 "투자화상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듣고 예배하려고 하오", 가게 주인은 "가깝기는 하나 산에 오를 필요가 없소. 내일 아침에 돈을 얻으러 올 것이니 그때 만나시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러면 투자화상이 오시면, 어떤 납자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요." 가게 주인이 승낙했다. 이튼날 과연 투자화상은 산에서 내려와 돈을 얻으니 조주가 나서서 붙들고 말했다. “투자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인데 이것뿐인가?" 투자화상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이내 몸을 숙이고 물러가서 다시 조리를 치켜들고 말했다. "소금 값을 주시오." 조주가 곧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니 투자화상은 그대로 돌아갔다. 조주가 좀 뒤떨어져 따라가면서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되며,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조주는 곧장 달아났다. 투자화상이 사미를 시켜서 조주를 쫓아가 그렇게 행동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조주는 "태백(太伯)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투자화상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태백(太伯)을 만났다'는 것은 투자화상을 큰 선지식으로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조주화상이 질문한 "크게 한번 죽은 사람(大死底人)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라는 말은 선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여 불법의 지혜작용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死)은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자아의식과 중생심(生滅心)을 완전히 텅 비운 공(空)의 실천수행을 말하며, 삶(活)은 일체의 번뇌 망념의 생사심(生死心, 중생심)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철저히 크게 깨달은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서 사활(死活)은 번뇌 망념을 죽이는 칼(殺人刀)과 지혜작용을 살리는 칼(活人劍)과 같은 의미이며 살활자재는 뛰어난 선승의 기지(機智)로서 번뇌 망념을 죽이고, 지혜작용을 살리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한다(殺活自在)고 주장하고 있다. 사활(死活)을 육체적인 생사로 이해하여 깨닫게 되면 육체적인 생사자재(生死自在), 생사해탈을 얻은 경지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불교는 육체적인 임종을 위한 종교도 아니고, 사후의 영생을 얻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불심으로 위대한 보살도의 삶을 잘 사는 지혜를 체득하는 종교이다.


조주의 '사활(死活)'경계 묻는 질문에
투자화상은 초월한 경지서 대답

그런데 조주는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떠한가를 묻고 있다. '되살아났다(活)'는 것은 죽음(死)의 체험을 토대로 한 말이다. 선불교에서 죽음(死)이나,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殺)는 표현은 부처나 조사라는 편견과 고정관념 등 나쁜 업장을 만드는 중생심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이며, 살린다는 것은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전등록} 제20권 소주 영광원의 진(眞)선사는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말끝이 조금만 어긋나도 고향(깨달음의 경지)은 만 리 밖이니, 반드시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懸崖撒水)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다. 죽었다 다시 소생하는 일(絶後蘇生), 그대를 속일 수가 없는데, 비상한 종지를 뉘라서 숨기랴!" 즉 '백 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허공에 몸을 날려야 한다(百尺竿頭 進一步)'는 말과 같이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초월하지 않으면 불심의 지혜의 작용은 되살아 날 수가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 몸을 불태워서 공양하는 소신(燒身)공양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자신의 육체를 불태워 누구에게 공양하는가. 부처님께 공양하려면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는 각자의 청정한 마음이기에 소신공양은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신명(身命)까지도 아끼지 않고 불태워 공양한다는 것은 신명보다도 더 중요한 불법을 깨닫는 법공양을 말한다. 따라서 신명을 아끼는 자아의식을 갖는 마음을 불태워 멸각시키며, 아상과 아집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공(空)의 실천을 소신공양으로 설한 것이다. 신명까지 불태워 없애버리는 소신공양은 참다운 불법을 깨달아 지혜로운 삶을 실행하는 보살도의 법공양이 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조주가 질문한 아상 인상의 자아의식과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죽이고, 불심의 지혜작용을 되살아나도록 한 경지는 어떠한가. 사활(死活)의 어느 한 쪽에 머문다면 사활자재(死活自在)한 작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투자선사는 "한 밤중에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어두운 한밤에 다니지 말고, 날이 밝으면 내일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밤은 암흑(暗)이고, 낮은 밝음(明)인데, 어둠을 피하고 밝음을 선택하며, 취사 분별하는 중생심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어둠과 밝음을 모두 함께 초월하라는 말이다. 조주가 죽고 사는 사활(死活)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질문한 것에 대하여 투자는 명암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입장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석두화상 {참동계(參同契)}에 "밝음(明) 가운데 어둠(暗)이 있거든 어둠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거든 밝음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밝고 어둠이 서로 각각 상대함은 마치 앞뒤의 걸음걸이와 같다"라고 읊고 있다. 조주가 제시한 사활(死活)과 투자가 대답한 명암(明暗)은 삼라만상의 차별경계를 말한다. 인간은 사바세계의 차별세계를 떠나서 살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원력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무심의 경지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차별경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원오도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와 투자는 각자의 선기를 잘 파악하고 있는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살아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면 죽은 것과 같네." 조주는 원래 죽은 사람이 아니라 크게 살아있는 안목을 갖춘 선승인데, 지금 투자화상을 감별해보기 위해 도리어 죽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함께 먹으면 안 될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하려고 하는가' 약기(藥忌)란 환자가 약을 복용할 때에 금기해야할 식물이다. 지황에 무우라든가, 철제(鐵劑)에 차(茶)를 함께 먹지 않도록 금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승의 불법에서 사활(死活)의 차별을 논의한다는 것은 금기해야할 말이다. 불법은 사활(死活)없는 건강한 불심을 체득하는 것인데, 금기해야할 사활(死活)의 차별심을 가지고 투자와 같은 대선사를 감별해 보려고 한 것은 쓸데없이 무모한 일이었다. '고불(古佛)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했네.' 사활(死活)을 초월한 경지는 삼세제불도 아직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제불도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 경계는 어떠한 경지인가. 불법은 체득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체득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 무소득(無所得)의 경지이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했다고, 전해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량분별의 중생심인 것이다. "그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 투자는 조주의 질문에 뛰어난 안목으로 접화한 수단이 있었다고 읊고 있다.



[第042則]握雪團打
〈垂示〉垂示云。單提獨弄帶。水拖泥敲唱俱行。銀山鐵壁。擬議則髑髏前見鬼。尋思則黑山下打坐。明明杲日麗天。颯颯淸風匝地。且道古人還有[言+肴]訛處麽。試擧看。
〈本則〉擧。龐居士辭藥山。山命十人禪客。相送至門首。居士指空中雪云。好雪片片不落別處。時有全禪客云。落在什麽處。士打一掌。全云。居士也不得草草。士云。汝恁麽稱禪客。閻老子未放汝在。全云。居士作麽生。士又打一掌。云眼見如盲。口說如啞。雪竇別云。初問處但握雪團便打。
〈頌〉雪團打雪團打。龐老機關沒可把。天上人間不自知。眼裏耳裏絶瀟灑。瀟灑絶。碧眼胡僧難辨別。

벽암록 제42칙 방거사와 눈 이야기

“눈내리는 풍광 보려면 눈부터 떠라”


{벽암록}제42칙은 방거사가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말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방거사가 약산선사를 방문하고 하직할 때, 약산은 열명의 선승들에게 방거사를 산문 앞에 까지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방거사는 마침 허공에 날리고 있는 눈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멋진 눈이야!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군!' 그때 선승들이 모두 방거사 곁에서 말했다.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 방거사는 손바닥을 한번 쳤다. 선승들이 모두 말했다. '거사는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마시오.' 거사는 말했다. '그대들이 이 정도의 안목으로 선객이라고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주지 않으리라.' 선객들은 말했다.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사는 또다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장님 같고, 입은 벌려도 벙어리 같다.' 설두도 달리 착어했다. '처음 물었을 때 눈을 뭉쳐서 곧바로 쳤어야지.'

擧. 龐居士, 辭藥山. 山, 命十人禪客, 相送至門首. 居士, 指空中雪云, 好片片, 不落別處. 時, 有全禪客云, 落在什處. 士, 打一掌. 全云, 居士, 也不得草草. 士云, 汝恁稱禪客, 閻老子未放汝在. 全云, 居士作生. 士, 又打一掌云, 眼見如盲, 口說如啞. (雪竇別云. 初問處, 但握雪團便打.)


내리는 눈보며 만법 귀결처 제시
본분사 낙처 모르는 선승에 독설

본칙의 이야기는 {방거사어록}에 전하고 있다. 선어록에 선승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많은 노파와 거사가 등장하고 있지만, 방거사는 중국선종의 역사에 거사로서 유일하게 어록을 남기고 있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다.

{조정사원}제3권에 '거사는 네 가지 덕을 갖춘 인물이다. 첫째는 관직을 탐착하지 않고, 둘째는 적은 욕심으로 덕을 쌓고, 셋째는 재산이 있는 큰 부자로, 넷째는 불도를 잘 수호하며 스스로 깨달음을 체득한 인물이다. {보살행경}에 재물이 있는 사람, 세속에 거주하는 사람, 산중에 거주하는 사람, 불법을 체득한 사람을 통칭하여 거사라고 한다.'고 전한다.

방거사의 이름은 방온(龐蘊: ? ~808)이며, 자를 도현(道玄)이라고 하였고 형주(호남) 형양현 출신인데, 부친은 이 고을의 태수였다. 단하천연선사와 과거시험을 가다가 마조의 선원인 선불장(選佛場)으로 가서 참문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방거사는 석두희천선사의 선법을 이은 거사로서 제방의 훌륭한 선승들과 많은 문답을 나누었고, 처와 딸 영조(靈照)와 함께 대나무로 조리를 만들어 팔면서 청빈하게 살면서 가족이 모두 불법을 깨달아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재가불교인이었다.

원오도 '평창'에 방거사가 처음 석두화상을 참문하여 "만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니,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두화상이 방거사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깨친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날마다 하는 일 별다른 것이 없네, 나 스스로 마주칠 뿐이다. 사물에 대하여 취하고 버리려는 망심이 없고, 곳곳마다 펴고 오무릴 차별심도 없으니, 붉은 빛 자주 빛을 그 누가 분별하랴! 청산은 한 점 티끌마저 끊겼네. 신통과 묘용이란 물긷고 나무하는 일이다.'

그 뒤에 마조를 방문하고 또 똑같이 "만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마조는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때 대답해 주마."라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조당집} 제15권에는 방거사가 붓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시방에서 한 모임에 같이하여, 각각 무위(無爲)의 법문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선발하는 장소이니, 번뇌 망심을 비우면 급제하여 돌아가리.'

본칙은 방거사가 약산유엄(惟嚴:751~834)선사를 방문하고 하직할 때, 약산은 열명의 선승들에게 방거사를 산문 앞에까지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약산 역시 석두의 제자로서 방거사와는 동문인데, 늙고 안목있는 거사에 대하여 정중하고 각별한 예의를 갖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산문 앞에서 방거사는 때마침 허공에 날리고 있는 눈송이를 가리키며, '정말 눈이 내리는 풍경은 멋있군!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떨어져야할 장소에 떨어지는군!'이라고 말했다. 방거사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시절인연의 여법한 풍광(風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눈이 내리는 광경에 의거하여 만법의 귀결처인 자기의 본분사의 낙처를 제시하고 있다.

즉 방거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제시하여 열명의 선객들에게 각자 선승으로서 본분사의 낙처를 파악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열명의 선승들이 모두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라고 질문했다. 방거사가 던진 문제에 걸려든 것이다.

그때 방거사는 손바닥을 한번 치자 선승들이 모두 '거사는 지나친 행동은 하지 마시오.' 라고 말했다. 거사가 손바닥을 탁! 친 것은 눈이 떨어지는 곳(낙처)를 가탁하여 그대들은 선승으로서 각자 본분사의 낙처도 모르는가? 질책하고 있는 행위임과 동시에 지금 손바닥을 치는 일이 각자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라는 의미로 친절하게 본분사의 낙처(落處)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거사는 '그대들이 이 정도로 본분사의 낙처도 모르는 안목으로 선객이라고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주지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객들은 입을 닫지 않고 모두가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방거사는 또다시 손바닥을 쳤다. 방거사가 또다시 손바닥을 친 행동에 원오는 '눈위에 서리를 더한 것(雪上加霜)'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선승들에게 다시 한번 낙처를 친절하게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눈은 뜨고 있지만 장님 같고, 입은 벌려도 벙어리 같다.'라고 선승들의 안목을 평하고 있다. 즉 눈을 뜨고 사물을 보고는 있지만, 이렇게 멋진 눈이 내리는 여법한 제법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장님과 다름없고, 입을 벌리고 이러쿵 저러쿵 곧잘 말을 하면서도 자기 본래면목의 지혜작용(落處)을 전혀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혜롭게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벙어리 같다고 신랄하게 독설을 퍼붓고 있다.

설두는 다른 견해로 '처음 방거사가 선객들에게 물었을 때, 선객들은 눈을 뭉쳐서 곧바로 방거사의 문제제기를 쳐버렸어야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처음 방거사가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문제를 제시했을 때 곧바로 눈을 뭉쳐서 절대평등한 깨달음의 경지를 제시한 문제의 근본을 쳐날려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방거사의 문제제시에 걸려서 열 명의 선승들이 방거사에게 이렇게 형편없이 비판받게 되었다는 입장으로 코멘트를 제시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눈덩이로 쳐라, 눈덩이로 쳐라!' 방거사가 이렇게 멋진 눈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맞추어 눈을 뭉쳐서 방거사가 제시한 시절인연의 여법하고 절대 평등의 깨달음의 경지를 쳐부수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과 방편의 수단이 있어야 방거사의 선기(禪機)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방노인의 지혜방편으로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천상과 인간도 전혀 알 수 없으리.'라는 말은 온천지에 흰 눈으로 가득찬 풍경은 천상계나 인간세계에서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경지이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날면서 허공을 모르고, 고기가 물속에 헤엄치지만 물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일체 만물이 모두 차별심 분별심이 없이 무심한 경지에서 제법의 참된 실상이 여법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눈과 귀도 깨끗하고 산뜻하다.' 인간이 차별심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분별작용 때문인데, 만법과 하나 된 무심의 경지는 눈과 귀로 분별심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고 산뜻한 것이다.

'산뜻하고 깨끗함이여!' 천지 가득 흰눈 일색(一色)으로 만법이 청정한 절대 평등의 세계와 무심(無心)의 경지에 만법과 하나 된 깨달음의 세계를 '파란 눈을 가진 달마선사도 파악하기 어렵다.' 방거사나 달마, 설두가 모두 흰눈으로 가득 찬 절대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사는 참된 소식을 전하고 있다.



[第043則]無寒暑處
〈垂示〉垂示云。定乾坤句。萬世共遵。擒虎兕機。千聖莫辨。直下更無纖翳。全機隨處齊彰。要明向上鉗鎚。須是作家爐[糒-米+韋]。且道從上來還有恁麽家風也無。試擧看。
〈本則〉擧。僧問洞山。寒暑到來如何迴避。山云。何不向無寒暑處去。僧云。如何是無寒暑處。山云。寒時寒殺闍黎。熱時熱殺闍黎。
〈頌〉垂手還同萬仞崖。正偏何必在安排。琉璃古殿照明月。忍俊韓獹[犭+盧]空上階

벽암록 43칙 동산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

“피할 수 없는 것이면 직접 부딪쳐라”


{벽암록} 제43칙은 동산양개(洞山良价)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스님이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되도록하라!'

擧. 僧問洞山, 寒暑到來, 如何廻避. 山云, 何不向無寒暑處去. 僧云, 如何是無寒暑處. 山云, 寒時寒殺黎, 熱時熱殺黎.


인간의 生死대사에 비유해 질문
회피말고 초월해야 궁극적 해탈

본칙 공안은 {조당집}과 {전등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출처가 분명치 않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의 {동산록}과 {설두송고} 43칙에 수록하고 있는 것처럼, 송대에 주장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동산양개(807~869)화상은 조동종(曹洞宗)의 개창자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15권, {송고승전} 12권에 전하고 있으며, 그의 법문집인 어록도 전하고 있다. {조당집} 제5권에는 운암화상과 동산의 사자(師資) 전법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운암선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 동산이 질문했다. 화상께서 백년 뒤에 누군가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가 있는가?' 질문한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운암선사가 대답했다. '다만 그에게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이었다고 하라.' 동산이 한참 침음하거늘 운암선사가 말했다. '이 한 문제는 밤송이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는다. 천생 만겁에 쉬어야 한다. 그대가 한 생각 잠깐 일으켜도 번뇌의 풀이 한 길이나 깊을 터인데, 하물며 말로서 표현 하겠는가.' 운암선사는 동산이 깊이 사유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속마음(哀情)을 설하려고 하자, 동산이 말했다. '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뿐이니, 이 본분사의 일을 위해 애를 씁니다.'"

운암선사가 입적한 뒤 신산(神山)과 함께 담주(潭州)에 이르러 동산이 개울을 건너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깨닫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절대로 남에게서 불도를 찾으려 하지 말라. 점점 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나(我)는 지금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渠)를 만난다. 그(渠)는 지금 바로 나(我)이지만, 나(我)는 이제 그(渠)가 아니다. 응당히 이렇게 깨달아야, 비로소 본래와 여여(如如)하게 계합하리라."

운암선사가 제시한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은 운암의 본래면목(본래인)을 말하는데, 동산은 그(渠)로서 체득한 것이다. 동산이 말한 나는 자기 본래이고, 그(渠)는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그림자)이다. 동산의 오도송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는 바로 나(渠是我)'라고 말하지만, '나는 바로 그(我是渠)'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나와 그는 하나이며, 주객(主客)이 둘이 아닌 본래인의 경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조당집} 4권에 약산이 법당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화상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오래된 불전에 한 줄의 글자를 주었다.' '거기에 무엇이라고 씌어 있습니까?' '그는 나를 닮지 않고, 나는 그를 닮지 않았다(渠不似我, 我不似渠)' 동산의 게송은 이 말을 토대로 한 것인데, 여기서 나(我)와 그(渠)는 하나(一如)이며, 불이(不二)이며 불이(不異)인 여여(如如)한 일체인 것이기 때문에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닮았다고 한다면 나와 그가 서로 상대하는 이원(二元)의 차별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여기서 말하는 더위와 추위는 기상날씨의 현상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사대사(生死大事)로 비유하여 질문한 것이다. 더위나 추위는 회피할 수 없는 시절인연인 것처럼, 인간의 생사도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하는 스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생사(生死)가 도래하면 어떻게 회피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동산화상은 '그대는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는 차별심이며 생사 망념의 중생심에 떨어진 것이지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인간 정식(情識)의 갈등과 망념의 생사(生死)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경지를 말한다.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이며, 음양(陰陽)의 차별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동산이 말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無寒暑)'이란 말은 평범한 한마디이지만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당연히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스님도 '그러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는 그 밖에 달리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생사(生死)와 열반을 나누고 번뇌와 보리를 구분하는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유마경}에서 설하고 있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대승의 불법을 체득하지 못한 안목없는 졸승인 것이다.

동산화상은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라고 설했다. 즉 추위와 더위를 대상으로 두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추울 때는 철저하게 추위와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철저하게 더위와 일체가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전등록} 20권 조산혜하장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선사가 말했다. '수행자여! 몹시 덥군!'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는 어디로 가서 피할까.' '끓는 가마솥이나 숯불 속에서 피합니다.' '끓는 가마나 숯불 속에서 어떻게 피하겠는가.' ' 많은 고통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사는 잠자코 있었다." {조당집} 5권 운암장에 동산이 "마치 어떤 사람이 끓는 가마나 숯불속의 지옥에 들어가서도 타거나 데이지 않는 것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동산의 무한서(無寒暑) 공안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백낙천의 시에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지만, 홀로 항(恒)선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선방엔들 무더위가 없으랴만, 단지 마음이 차분하면 몸도 시원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또한 당대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이 오공(悟空)선사의 참선수행에 대하여 "삼복더위에 문을 닫고 승복을 걸친 스님, 소나무 대나무 그늘이 선방을 덮지도 않네. 참선은 반드시 산수(山水)의 경치를 필요치 않나니, 마음에 망념이 없으면 불길도 저절로 시원하리"라고 읊고 있다. '평창'에도 황용 오신(黃龍悟新)선사는 이 시를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추울 때는 추위와 더울 때는 더위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궁극적인 해탈이란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까지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벽암록} 40칙 평창에 "고인(덕산연밀)이 모든 건곤 대지가 바로 하나의 자기이며, 온 천지가 추우면 춥고, 더우면 온천지가 덥다"고 했다. 시방세계와 자기가 하나인 것이기 때문에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교화의 손을 드리우면 만길 벼랑과 같다"는 말은 동산이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라는 법문은 중생교화의 자비심이지만, 그 말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만길 벼랑과 같은 험준한 말이다. "정위(正位)와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동산이 오위송(五位頌)에서 주장하는 평등(正位)과 차별(偏位)의 기준을 가지고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배치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한서(無寒暑)의 정위(正位)와 한서(寒暑)의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없이 한서(寒暑)가 그대로 무한서(無寒暑)인 것처럼, 동산의 법문은 정편(正偏)이 원융무애한 경지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영리한 개(韓)가 괜히 섬돌을 오른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로 한씨집의 개는 영리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은 동산의 법문에 이런 도리 저런 도리를 궁리하여 찾아보지만 진실은 체득하지 못하고 헛된 일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第044則]解打鼓
〈本則〉擧。禾山垂語云。習學謂之聞。絶學謂之鄰。過此二者。是爲眞過。僧出問。如何是眞過。山云。解打鼓。又問。如何是眞諦。山云。解打鼓。又問。卽心卽佛卽不問。如何是非心非佛。山云。解打鼓。又問。向上人來時如何接。山云。解打鼓。
〈頌〉一拽石。二般土。發機須是千鈞弩。象骨老師曾輥毬。爭似禾山解打鼓。報君知。莫莽鹵。甛者甛兮苦者苦。

벽암록 44칙 화산화상의 북솜씨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무심의 경지”


{벽암록} 제44칙은 화산 무은화상(891∼961)의 "쿵쿵 쿵더쿵!" 법문을 싣고 있다. 화산화상이 수시했다. "글을 배워 얻은 지식을 문(聞)이라 하고 다 배워 더 배울 것이 없음을 인()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한 것, 그것을 진과(眞過)라 한다." 한 스님이 "그 진과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내게 북 솜씨가 있지 -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그럼 진과도 초월한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란 무엇입니까"하고 스님이 또 질문했다. 화산화상은 이번에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이 마음이 곧 불심(佛心)임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그대로 두고, 비심비불은 어떤 겁니까"하고 또 다시 파고들었다. 화산화상은 그래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단념하지 않고 스님이 "부처님이나 달마 같은 한층 훌륭한 분이 오신다면 어떻게 맞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끝까지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擧. 禾山, 垂語云, 習學謂之聞, 絶學謂之, 過此二者, 是爲眞過. 僧出問, 如何是眞過. 山云, 解打鼓. 又問, 如何是眞諦. 山云, 解打鼓. 又問, 卽心卽佛, 卽不問, 如何是非心非佛. 山云, 解打鼓. 又問, 向上人來時如何接. 山云, 解打鼓.


'북 잘 친다'는 무애한 지혜상징
불도를 가르치는 뛰어난 방법

화산화상은 무은(無殷 884~960)선사로 설봉의존(雪峰義存)에게 출가하여 11년간 시봉하고, 설봉이 입적한 뒤에 구봉도건(九峰道虔)선사의 법을 계승하고 길주 화산의 대지원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이다. 그의 전기는 서현(徐鉉)이 지은 비문이 있고, {조당집} 12권, {전등록} 17권, {오등회원} 6권, {선림승보전} 5권 등에 전하고 있다. {조당집}에는 화산화상의 법문과 선문답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화산화상의 법문을 잠간 들어보자. '대개 불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옛날부터 노숙들이 제자들에게 사문이란 하루 24시간을 잠깐이라도 주인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고, 한 시각도 등져서는 안 된다. 상근기는 한번 퉁기면 곧 지혜가 작용하지만, 중하(中下)근기는 공훈에 떨어진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애써서 망심과 의식을 텅 비워서 인연의 연결이 끊어진 길과 같이 되도록 하라.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역시 남의 말을 빌린 것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불도수행은 일체의 시간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법문이며 남의 말에 의거하지 말고 자신이 체득한 경지의 법문을 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산화상이 대중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배우고 익히는 습학을 들음(聞)이라 하고, 배움이 없는 것(絶學)을 가까움(隣)이라고 한다. 그러나 습학과 절학을 초월해야 참된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의 설법은 승조의 저술로 주장하는 {보장론}에 '불도를 배움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진(眞)이라 하고, 두 번째는 인(隣)이라 하고, 세 번째는 문(聞)이라고 한다. 습학은 문이라고 하고, 절학(絶學)은 인이라고 하고,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것을 진이라고 한다'는 일절에 의거한다. 습학(習學)은 {논어}에 '배우고 때대로 익히면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에 의거하여 점차적인 수행(漸習)의 입장이고, 절학은 {노자} 20장의 '절학무우(絶學無憂)'에 의거한 돈오의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인은 {회남자(淮南子)}에 '여덕위인(與德爲)'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장론}에는 불도 수행에 '진(眞), 인(隣). 문(聞)'의 세 종류를 세우고, 불도수행을 배우고 익히며 아직 완전히 자신의 몸에 베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습학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점착적인 수행(漸修)을 말한다. 절학은 {증도가}에서 '일체의 작위성이 끊어지고 불도수행에 배움의 대상이 없어진 한가한 도인(絶爲無學閑道人)'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불법도 모두 배웠고 습학과 작위도 초월한 무애자재한 경지를 체득한 돈오의 입장이다. {노자}의 절학(絶學) 무위(無爲)를 선수행의 경지에서 말한 것이다. 불교의 수행을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종합하고 있는 것처럼, 삼학의 수행을 대상으로 수행하지 않고 완전히 끝낸 깨달음을 체득한 아라한을 무학(無學)의 성자라고 한다.

대승보살도의 수행에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위를 설정하고 있는데, 십지보살은 습학의 경지(聞), 51위 등각은 절학(絶學), 최상의 묘각은 일체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을 체득한 입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등각은 최상의 묘각과 같은 경지지만 엄격히 묘각과 구분하고 있다. 등(等)은 같다는 의미인데, 절학의 인과 같은 표현이다.

화산화상은 선은 불도를 배우고 익히는 습학(聞)과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한 절학()까지 완전히 초월한 참(眞)된 깨달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무엇이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의 경지입니까?' 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 라고 대답했다. 북을 잘 치는 것이 어째서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의 경지인가? 선원에서 식사시간, 노동시간 등 시간을 알리는 신호로 북을 친다. 원오는 화산의 대답을 '쇠막대(鐵)'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물건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도록 한 말이다.

스님은 또 '무엇이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또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이나,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나, 마조의 설법에서 주장한 마음과 부처의 문제를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지만, 화산화상의 입장은 한결같이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설사 이러한 문제를 여기서 아무리 논의해 본들 습학과 절학의 경지에 정체되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고, 참된 깨달음이나 불법의 진실은 체득 할 수가 없다. 스님은 또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 사람(向上人)이 오면 어떻게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 스님은 세 번째 질문까지 모두 논의가 되지 않는 대답을 하는 화산화상에게 '나와 같이 일체의 습학과 절학의 경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의 경지까지 모두 초월한 향상인을 어떻게 지도 하겠습니까'라고 최후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역시 반문 할 수가 없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원오는 '화산화상이 북을 잘 친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아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고, 스스로 '아침에 서천에 도달하고, 저녁에 동토에 돌아온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스님의 질문에 네 번 모두 똑같이 대답한 화산화상은 인도와 중국을 아침저녁에 왕복하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자신이 북을 치는 지금의 일에 몰입한 것을 찬탄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 사람은 연자방아 돌을 끌고, 한 사람은 흙을 운반한다'는 말은 귀종선사가 노동시간에 유나에게 연자방아의 돌은 마음대로 끌지만, 중심의 나무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법문과, 목평선도(木平善道)는 처음 찾아오는 스님에게 삼태기에 세 번 흙을 운반 하도록 한 고사인데, 화산의 북을 치는 일처럼, 학인을 지도하는 똑같은 수단을 소개하고 있다. '큰 지혜작용(大機)을 드러내려면 천 균(鈞)짜리 활이어야 한다.' 귀종과 목평, 화산화상처럼, 상근기인 향상인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하고, 정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천근의 활로 화살을 날리는 큰 지혜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일찌기 상골산(설봉산) 노스님(설봉)이 공을 굴렸다지만, 화산화상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는가' 설봉화상은 화산의 스승인데, 그도 언제나 나무로 만든 공을 세 개 가지고 굴리며 학인들을 점검했다. 귀종, 목평, 설봉화상의 지혜작용이 화산의 '북을 치는 지혜작용'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하고 있다. '그대에게 알리노니,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학인들에게 화산의 '북을 치는 일'을 제멋대로 분별하지 말라고 주의하고 있다.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는 습학(習學)과 절학(絶學)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자기와 북이라는 차별대상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기 일을 하는 도인이라고 읊고 있다.



[第045則]布衫重七斤
〈垂示〉垂示云。要道便道。擧世無雙。當行卽行。全機不讓。如擊石火。似閃電光。疾焰過風。奔流度刃。拈起向上鉗鎚。未免亡鋒結舌。放一線道。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萬法歸一。一歸何處。州云。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頌〉編辟曾挨老古錐。七斤衫重幾人知。如今抛擲西湖裏。下載淸風付與誰。

벽암록 45칙 조주스님의 만법귀일

“일곱근 승복도 하나로 돌아간 만법의 모습”


{벽암록} 제45칙은 선문에서 고금제일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조주종심스님(778~897)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유명한 법문을 싣고 있다.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다시 만법으로 돌아가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10권, {전등록} 제10권, {조주록} 중(中)권에 전하고 있다. 조주는 조주종심선사로 {벽암록} 제2칙과 5칙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약전은 생략한다.

{운문어록}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하나(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만법(萬法)입니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공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법(萬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불법(佛法)을 만법(萬法),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교는 법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은 인연법과 연기법을 토대로 만법의 진실을 밝히고 만법의 근본인 마음으로 깨닫도록 제시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심법(心法)이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은 외도(外道)이다.

불법의 근본정신과 본질을 모르고는 이 공안의 의미와 정법(正法)의 안목(眼目)을 체득 할 수가 없다.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 주장하는 '삼계는 오직 마음(三界唯一心)이며,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다(心外無別法)'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조작한 것(一切唯心造)' 설법이나, '만법은 일심(一心)이며 일심이 만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심법(心法)이나,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불법의 본질을 단적으로 설한 말한다.

그런데 만법이 하나(歸一)로 돌아간다고 한 그 하나(一)는 어디이며 무엇인가? {돈오요문}에 다음과 같은 설법이 참고가 된다. '이 법신은 수만 가지 변화의 근본이 되기에 장소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법신의 지혜 작용은 다함이 없기에 무진장이라고 한다. 능히 만법을 생성하기에 본래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며, 일체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장(知慧藏)이라고 하며, 만법이 본래(如)로 돌아가기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금강경}에 "여래는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세간의 일체 생멸법이 모두 본래(如)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즉 만법이 곧 진여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진여가 곧 만법인 것은 인연에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一)는 진여인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며, 법성(法性),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 일물본래인(一物 本來人), 진인(眞人), 본래무사인(本來無事人)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은 일심(一心)의 인식과 지혜의 판단으로 성립되는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만법은 근원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一歸何處)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근본정신과 보살도의 사상인 불법의 대의를 잘 알아야 한다. 선어록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백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百尺竿頭進一步)'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통한 절대 깨달음의 경지(一)를 체득한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 것인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 곳에 머문다면 그 곳이 또 집착의 대상이 되고 중생심으로 타락되는 장소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一)가 되돌아가는 곳을 안다면 불법수행을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하나(一)를 지키고 놓치 않는다면 귀신의 소굴에서 사는 지혜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반야경}에서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구체적인 수행으로 제시한 무주(無住), 무박(無縛), 무상(無相), 무애(無碍), 무아(無我) 등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경지인 하나(一)를 어떻게 벗어나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선에서는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을 강조하고 있다. 죽는다는 말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 자아의식의 중생심 분별심을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임제록}에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殺佛殺祖)라는 말이나,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살리는 칼(殺人刀 活人劍)이라는 표현은 공의 실천으로 체득한 반야의 지혜(칼)로 번뇌 망념인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일어키는 중생심을 비운다는 말이다. 죽인다는 표현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 분별심을 비워 버린다는 반야사상인 공(空)의 실천을 선어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一)까지 초월한다는 것은 어떻게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다시 중생의 사바세계로 되돌아가서 깨달음의 지혜와 부처님의 인격을 자비 광명으로 중생구제의 위대한 보살도의 실천으로 회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법의 근본을 체득한 부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처는 중생을 위한 지혜와 자비 광명의 보살도를 실현함으로써 부처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깨달음을 이룬 부처로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보살도를 의미하는 말이지,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거나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하화중생(下化衆生)과 이타중생(利他衆生)이라고 하며, {십우도}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에 나아가 자비와 지혜의 광명을 베푸는 보살행으로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하며 법계유희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역할은 만법의 차별세계로 되돌아가서 중생과 함께 하며 원력을 세운 보살도를 실행하는 일 뿐이다. 사실 부처나 깨달음은 중생과 미혹을 극복하기 위한 상대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없는 세계에 부처 또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공안은 대승불교의 모든 실천정신을 함축하여 일상의 대화 속에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 수행할 수 있도록 궁구된 문제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와 실천체계를 토대로 조주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나는 고향 청주에 있을 때 승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만법이니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一心. 一)이니 이론적인 불법의 수행체계나 객관적인 불교이론에 전혀 관심 없이 내가 입고 있는 이 승복의 무게나 일곱 근이나 된다고 자신의 일을 말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자신이 만법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원오도 '과연 종횡무진이다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만법이니 하나니 관계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조주가 입고 있는 한 벌의 승복은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 우주 만법을 모두 그 속에 끌어넣고 있다고 평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쪽으로 몰아치는 질문으로 조주화상(老古錐)을 다구쳤네.' 스님은 원숙한 조주화상에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는 질문했네. 편벽(偏僻)은 {인천안목}에 분양화상의 18문(問)의 하나인 편벽문(偏僻問)으로 일방적인 견해를 세워서 조주선사에게 질문한 것을 읊고 있다. '일곱 근 승복의 무게 몇이나 알까?' 질문한 스님을 포함하여 조주화상이 대답한 말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는 납승은 몇이나 될까? '지금 서호(西湖) 속에 내던져 버렸네.' 이 말은 설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대기대용을 들어낸 전구(轉句)이다. 즉 조주화상이 입은 일곱 근의 승복은 만법과 하나를 포용한 일체를 초월한 대단한 옷이지만, 지금 설두는 그러한 옷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서호(西湖)에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나는 조주화상처럼 일체를 초월한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읊고 있다. '얕은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전할까?' 만법과 하나, 불법이나 선법도 텅 비우고 얕은 바람에 강을 건너는 빈 배처럼, 상쾌한 이 마음을 누구에게 전해줄까.



[第046則]出身猶可易
〈垂示〉垂示云。一槌便成超凡越聖。片言可折。去縛解粘。如冰凌上行。劍刃上走。聲色堆裏坐。聲色頭上行。縱橫妙用則且置。刹那便去時如何。試擧看。
〈本則〉擧。鏡淸問僧。門外是什麽聲。僧云。雨滴聲。淸云。衆生顚倒迷己逐物。僧云。和尙作麽生。淸云。洎不迷己。僧云。洎不迷己意旨如何。淸云。出身猶可易。脫體道應難。
〈頌〉虛堂雨滴聲。作者難酬對。若謂曾入流。依前還不會。曾不會。南山北山轉[雨/汸]霈。

벽암록 46칙 경청스님의 빗방울 소리

“자신은 잃어버리고 빗소리에만 집착하는구나”


경청스님은 설봉스님의 뒤를 이은 도부스님(868~937)을 말한다.

경청스님이 한 스님에게 "문 밖에서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다. 스님은 "빗방울 소리"라고 답했다. 경청스님이 말했다. "너는 빗방울 소리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러자 그 스님이 "스님께서는 저 소리를 뭘로 듣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경청스님은 "자칫했으면 나도 사로잡힐 뻔했지"라고 응대했다. "자칫하면 사로잡힐 뻔하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하고 그 스님이 또 물었다. 경청스님이 잘라 말했다.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는 그래도 쉽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擧. 鏡淸問僧, 門外是什聲. 僧云, 雨滴聲. 淸云, 衆生顚倒, 迷己逐物. 僧云, 和尙作生. 淸云, 不迷己. 僧云, 不迷己 意旨如何. 淸云, 出身猶可易, 脫體道應難.


바깥 세상일들에 끄달리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제10권, {전등록}제18권 경청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경청화상(868~937)에 대해서는 {벽암록}제16칙 본칙에도 등장한 선승으로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도부(道)선사다. {현사어록}에는 경청화상이 젊은 시절 현사사비선사의 처소에서 수행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도부상좌가 밤중에 현사화상에게 나아가 예배를 올리고 법문을 청했다. '저는 여기에 와서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화상은 자비를 베풀어 깨달음을 체득하는 길(入路)을 제시해 주십시오.' 현사는 말했다. '그대는 저기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가?' 도부는 '예. 들립니다.'라고 말하자, 현사는 '그러면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청화상은 현사의 지시를 받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였다.

{운문어록}에 운문이 항상 '일체의 모든 소리는 부처의 소리요, 일체의 모든 모양은 부처의 모습이며, 모든 대지가 바로 법신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소동파도 동림상총선사를 참문하여 무정설법을 듣고 대오하고 '개울 물소리가 곧 부처의 설법이요, 산의 모습이 청정법신이로다.'라고 오도송을 읊고 있는 것은 이러한 법문을 체득한 경지이다.

원오도 ‘평창’에 경청화상이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빗방울 소리, 비둘기 울음소리 등 자연을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하는 법문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도 경청화상이 방안에서 어떤 스님에게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고 있다. 스님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경청화상은 '중생들은 누구나 마음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사물을 쫓는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수능엄경} 제2권에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자기에 미혹하여 사물이라고 하고,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물의 지배를 받아서 굴림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대(大)를 보고, 소(小)를 본다. 만약 능히 사물을 지배하여 굴리면 여래와 같이 되리라.'라는 일절에 의거하고 있는 말이다. 즉 중생은 빗소리를 들으면 빗소리에 집착하고,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소리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고 항상 밖의 경계에 끄달리고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입사행론}에도 '미혹할 때는 사람이 법(사물)을 쫓고, 깨달으면 법(사물)이 사람을 쫓는다. 깨달으면 마음이 사물을 수용하고, 미혹하면 사물이 마음을 포섭한다.'라고 설한다. {육조단경}에도 혜능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법달에게,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의 지배를 받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경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굴릴 수가 있다.'라고 설하고 있다. 임제가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라!'고 설하는 것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일체의 사물과 경계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 {수능엄경}에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들음(聽)과 소리(聲)는 모두 처소가 없다. 들음과 소리, 이 둘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실체도 없는 소리에 집착하고, 자기 자신이 미혹하여 빗소리와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중생은 전도되어 있다고 한다. 중생의 전도된 모습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자기의 진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물이나 대상에 집착하여 망념과 분별심을 일으키는 심(心)전도, 두 번째는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데 마치 공중에 나타난 꽃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체로 착각하는 견해를 견(見)전도라고 하며, 세 번째는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알지 못하고 분별망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상(想)전도라고 한다.

스님은 저는 빗소리로 들었습니다만 '화상은 어떻게 들었습니까'라고 경청화상의 경지를 물었다. 경청화상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즉 하마터면 나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에 집착할 뻔했다. 스님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하자, 경청화상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그래도 쉬운 일이지만,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네'라고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앞에서 말한 빗소리와 사물모양의 차별경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즉 밖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빗소리에 끄달려 자신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곧바로 차별경계에 집착한 자신을 자각하고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다. 선에서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없어지고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된다는 선수행의 방법과 본래심을 깨닫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사물을 인식하고 사물에 집착하면 중생이 되지만, 사물의 본질을 깨닫고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부처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道)한다는 말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 자체를 그대로 본분 전체를 언어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조론}에도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 문자로 표현 할 수가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 할 수 없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설하고 있으며, 선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언전불급(言詮不及)을 말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빈집의 빗방울 소리' 밖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집안에는 텅 비어 아무도 없다. 텅 빈 집(마음)에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도 없으니 자신이 미혹한 일도 없고, 사물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고 읊은 말이다. '훌륭한 작가도 대답하기 어렵다.' 문 밖에 들리는 소리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고 말하면, 사물을 쫓는 것이기에 마음이 법을 보는 것이 되고, 빗방울 소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현실의 사실을 위배하여 만법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정법의 안목 없는 사람이 된다. 훌륭한 선지식도 언어와 사량분별이 끊어진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 문자로 말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만약 흐름을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역시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수능엄경}에 '관음보살 흐름을 바꾸어서 아는 바를 잊었다.'라는 말을 토대로 한 게송이다. 흐름을 바꾸다(入流)는 말은 객관의 사물을 주관으로 바꾸어 받아들인 작용(入)을 말한다. 즉 밖에 비오는 소리(객관)를 비오는 소리를 그대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지 비오는 소리로 인식하는 경지라면 여전히 빗소리를 듣는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에 진실로 깨달음의 경지인 비의 소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 비의 소리는 알거나 알지 못했거나 관계없이 역시 비의 소리일 뿐이다. '남산과 북산에는 더욱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네.' 이곳저곳 어느 곳에도 비의 소리가 울린다.



[第047則]六不收
〈垂示〉垂示云。天何言哉。四時行焉。地何言哉。萬物生焉。向四時行處。可以見體。於萬物生處。可以見用。且道向什麽處見得衲僧。離卻言語動用行住坐臥。倂卻咽喉唇吻。還辨得麽。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法身。門云。六不收。
〈頌〉一二三四五六。碧眼胡僧數不足。少林謾道付神光。卷衣又說歸天竺。天竺茫茫無處尋。夜來卻對乳峰宿。

벽암록 47칙 운문의 법신

“육근육식 인식을 초월한 깨달음의 지혜작용”


{벽암록} 제47칙은 운문화상이 독창적인 법신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법신은 어떤 것입니까?" 운문화상은 말했다.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

擧. 僧問雲門, 如何是法身. 門云, 六不收.


무형무상 '불상의 본체'를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곳에서 느껴야


운문화상은 문언(文偃: 864~949)선사로 {벽암록} 제5칙과 14, 15칙 등 여러 차례 등장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어록} 중권(中卷)에 전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언제나 함축된 의미의 짧은 한마디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선사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도대체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사실 불교의 교학에서 부처의 몸을 삼신(三身)으로 나누고,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으로 몸(身)을 모양(相)으로 분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몸(身)이라는 번역 때문에 법신도 형상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구마라집은 "천축에서는 다만 가야(歌耶: kaya)라고 말하는데, 한역하면서 신(身), 중(衆), 부(部), 법(法)의 체상(體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신(身)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불교학자도 부처의 삼신을 잘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법신의 이해는 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솔직히 운문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인 법을 인격화하여 법신이라고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화엄철학에서 비로자나불, 밀교에서는 대일여래,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 등으로 칭하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법신은 시방세계에 두루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법계(周邊法界)라고 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함께 하고 있다. {화엄경} 성기품에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는 곳이나, 모양이 없는 곳이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체가 없고, 색깔도 없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장소나, 국토나 일체의 법이나 중생에게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금강명경}에서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했다.

{대승기신론}에도 "깨달음의 의미는 마음의 본체가 번뇌 망념을 여읜 것이며,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에 법계의 한 모양(一相)이니, 즉 이것이 여래 평등 법신"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법신(法身)은 깨달음의 지혜작용이다.

마조의 {어록}에도 "번뇌에 얽혀있을 때(衆生心)는 여래장이며, 번뇌 망념을 벗어나(佛心)면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법신은 한계가 없고, 법신의 본체는 증감(增減)도 없지만, 크게 되고 작게도 되며, 사각형도 되고, 둥근 원형도 되며,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물 속에 비친 달과 같고, 일체의 모든 곳에 도도하게 운용하지만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하고 있는 교학적인 법신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의 참된 법신을 체득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법신을 체득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운문선사에게 질문하고 있다. 원오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법신을 체득하지 못하고 법신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원오는 또 "일천 성인이라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법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항상하며, 시방에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이 법신 가운데 생존하고 있다. 아침에는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밤에는 부처를 껴안고 잠자고 있기 때문에 울 때도 웃을 때도, 화를 낼 때도 법신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법신을 보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법신에 대한 질문에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라고 대답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라는 말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육근(六根)과 욱식(六識)과 육진(六塵)이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육근(六根)으로 법신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량분별과 망정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전연 관계없는 말이며, 나아가 운문화상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 보려면 곧바로 보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했는가? {법화경}에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서 헤아려 알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운문화상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학으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원오의 비판이다.

사실 운문화상이 말한 '육불수(六不收)'의 육(六)은 불교의 교학에서 말하자면, 육근(六根)과 육식(六識), 육경(六境: 塵), 육대(六大), 육합(六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불수(不收)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없고, 혀로 맛 볼 수가 없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수가 없고, 의식(意)으로 생각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도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로 성립하고 있지만, 법신은 이러한 육대(六大)의 어떠한 주변에도 해당되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육합(六合)이라면 하늘과 땅(天地)과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인 전 우주를 말하는데, 법신은 전 우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법신이 전 우주를 거두어들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신은 형체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기구나 물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측량 할 수가 없고, 파악 할 수가 없는 무한하게도 큰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영원한 법신 그 자체의 전모를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라는 한마디로 말하고 있기에 이 말을 곧바로 체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문이 말한 육(六)을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의미로 해석하여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인식과 중생심의 사량 분별로는 파악 할 수 없으며, 육근 육식의 인식을 초월한 불심(佛性)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문자로 해석한 이론이기 때문에 일체의 언설을 초월하여 곧바로 지금 여기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은 아니다. 전 우주와 자기와 하나가 된 지혜작용이 활발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을 스님은 어떻게 체득해야 할까?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운문이 "육불수(六不收)"라고 한 말은 무한의 공간을 표현한 것에 대하여 설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숫자로 무한의 시간으로 법신을 설하고 있다. 법신은 모양이 없고, 공간적인 한계와 시간적인 수량을 초월했기 때문에, "푸른 눈 달마대사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라." "소림에서 신광에게 법을 부촉했다고 부질없이 말하네." 달마대사가 소림에서 혜가에게 불법을 부촉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법신은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제시하고 부촉 할 수가 있는가? "옷을 걷어 부치고 또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달마대사는 옷을 걷어올리고 한 손에 짚신을 들고서 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설을 가지고 사실로 믿게 하고 있네. 현사는 "달마는 동토(東土)에 오지 않았고, 혜가도 천축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사가 말하는 달마는 참된 법신의 당체를 말하는데, 참된 달마[법신]는 천축에서 왔거나 중국에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만약 달마가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다.' 넒은 천축을 찾아봐도 달마를 찾을 수가 없는 것처럼, 천축과 중국의 국경을 왔다갔다할지라도 참된 달마를 찾을 수가 없다. 달마는 행방불명인가? '간밤부터 설두[乳峰]의 집에 와서 묵고 있네' 설두의 처소에 와서 묵고 있는 달마는 법신인가?



[第048則]踏倒茶爐
〈本則〉擧。王太傅入招慶煎茶。時朗上座與明招把銚。朗翻卻茶銚。太傅見問上座。茶爐下是什麽。朗云。捧爐神。太傅云。旣是捧爐神。爲什麽翻卻茶銚。朗云。仕官千日失在一朝。太傅拂袖便去。明招云。朗上座喫卻招慶飯了。卻去江外。打野[木+埋]。朗云。和尙作麽生。招云。非人得其便。雪竇云。當時但踏倒茶爐。
〈頌〉來問若成風。應機非善巧。堪悲獨眼龍。曾未呈牙爪。牙爪開。生雲雷。逆水之波經幾回。

벽암록 48칙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차 이야기

“진여법성이 어째서 생사 망념을 일으키는가!”


{벽암록} 제48칙은 당말 복건성 천주(泉州) 초경원(招慶院)을 방문한 왕태부와 차를 대접한 혜랑상좌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왕태부가 초경원을 방문하니 마침 스님들이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왕태부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물었다. '차를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있지요.' 왕태부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엎어 버렸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명초가 말했다.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군' 혜랑이 말했다. '화상은 어떠십니까?' 명초가 말했다. '귀신(非人)에게 당했군.' 설두가 말했다.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

擧. 王太傳, 入招慶煎茶. 時, 朗上座, 與明招把, 朗, 却茶 太傳見, 問上座, 茶爐下是什. 朗云, 捧爐神. 太傳云, 旣是捧爐神, 爲什, 却茶, 朗云, 仕官千日, 失在一朝. 太傳, 拂袖便去. 朗上座, 喫却招慶飯了, 却去江外, 打野, 朗云, 和尙作生. 招云, 非人得其便 (雪竇云, 當時但踏倒茶爐.)


왕태부의 선기가 뛰어난 물음에
혜랑 상좌의 안목없는 답변 비판

본칙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오등회원} 제8권 왕태부전에 보이고 있다. 왕태부는 천주칙사(泉州刺史) 왕연빈(王延彬)으로 설봉문하의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보복종전(保福從展. 867~928)선사를 참문한 당대의 안목있는 거사다. 왕태부는 혜릉선사가 설봉산에서 수행할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로 천우(天佑) 3년(906) 자신이 칙사(刺史)로 근무하는 천주에 초경원이라는 절을 지어 혜릉선사가 거주하도록 하고, 자주 찾아가 참선하며 선문답을 나누곤 하였다. 뒤에 조정으로부터 태부(太傅)라는 직위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왕태부라고 경칭(敬稱)하여 불렀다.

혜랑상좌는 혜릉의 제자로 뒤에 복주(福州) 보자원(報慈院)의 주지로 활약한 혜랑선사로 {전등록} 제21권에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명초는 무주 명초산의 덕겸(德謙)선사로 {전등록} 23권의 전기에 의하면 지혜의 기봉이 민첩하고, 왼쪽 눈이 없어 독안룡(獨眼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본칙은 왕태부가 장경혜릉선사가 주석하는 초경원을 방문하자 혜릉화상이 부재중이라 혜랑상좌가 왕태부에게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냄비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고의인가 부주의인가? 왕태부가 혜랑상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다. 즉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화로를 떠받치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모양이 귀신처럼 생겼기 때문에 봉로신(捧爐神)이라고 한다. 구참의 거사가 혜랑상좌에게 한 방 먹이는 질문이다.

혜랑상좌는 왕태부의 질문에 정직하게 "화로를 떠받치는 신(神)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왕태부는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뒤엎어 버렸소?"라고 다구쳤다.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라면 차를 끓이는 주전자를 보호하고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어째서 뒤엎어 버렸소? 왕태부가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혜랑상좌가 봉로신이라고 대답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진여법성이라는 대답이다. 화로를 받치는 봉로신은 진여법성을 말하며,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생사망념을 말한다. 그렇다면 진여법성이 '어째서 생사망념을 일으키는가?'라고 왕태부가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혜랑상좌는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여법성과 생사망념의 관계에 맞추어 보면, {기신론}에 설하고 있는 것처럼, 진여법성은 번뇌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며 불변(不變)이다. 그러나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 것처럼, 열반적정의 경지에서 홀연히 번뇌망념이 일어나 생사에 유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오랫동안 착실하게 근무 잘한 관리도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진여자성인 봉로신이 아무리 잘 보호해도 번뇌망념이 일어나는 시절인연을 만나면 어쩔 수가 없이 주전자가 뒤엎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태부의 행동은 안목없는 한심한 혜랑상좌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진여법성과 생사번뇌의 분별 망념에 떨어진 일체의 차별심을 함께 떨쳐버려야 한다는 주의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명초가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소란을 피우는군"이라고 말했다. 즉,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혜릉선사의 지도를 받고 있으면서 혜릉의 제자다운 정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않고, 불법을 모르는 세간 사람들과 쓸데없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가?'라고 질타하고 있다. 혜랑상좌는 올바른 불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못하고 삿된 길에서 왕태부의 말에 끌려 본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자 혜랑은 "화상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라고 명초의 견해를 묻고 있다. 명초는 "귀신(非人)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비인(非人)은 봉로신을 말하는데, 마음이 방심하면 귀신이 엿본다는 말처럼, 혜랑상좌의 마음이 번뇌망념에 떨어졌기 때문에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번뇌 망념의 실수가 아니라 본분의 작용이었다는 말이다. 원오는 "과연 정법의 안목(一隻眼)을 갖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명초의 견해를 칭찬했다.

설두화상은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라고 말했다. 즉 차 주전자와 화로의 논쟁에 대하여 설두는 왕태부나, 명초나 모두 차 도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의 지혜작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태부가 "차 달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을 때 논쟁의 씨앗인 화로를 뒤엎어버렸다면 봉로신이 엿볼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왕태부를 화내지 않게 할 수가 있었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묻는 말이 바람이 일 듯 하였으나, 선기로 대처함은 훌륭하지 못했다. 목수가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면서 코끝에 묻은 작은 진흙을 제거하였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사람 역시 꼼짝하지 않고 서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장자} '서무귀'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즉 왕태부가 혜랑상좌에게 던진 질문은 목수가 도끼를 휘두른 바람처럼 훌륭한 것인데, 혜랑상좌의 대답은 왕태부의 질문에 부응하지 못했다. 왕태부를 상대할만한 안목이 없었다고 비판한 말이다.

"가련하다, 애꾸눈 용이여!" 독안룡은 명초의 별명인데, 그가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읊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명초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코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지 않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용(龍)이라면 용답게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 왕태부와 대항했다면 좋았을 텐데, 용다운 활기를 들어내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면" 명초가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설두 자신이 대신 "왕태부가 질문할 때에 화로를 뒤엎어 버렸어야지!"라고 착어한 말을 본인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원오는 "만약 이러한 수단이 있었다면 화로를 뒤엎었을 것인데"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혜랑상좌나 명초가 설두화상과 같은 안목과 선기가 있는 선승이라면 이러한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오는 혼자 독백하고 있다. "구름과 우레가 일어나네" 용이 발톱과 어금니를 들어내면 그곳에 구름을 부르고 바람이 일며 우레가 진동하게 된다고 설두가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설두의 지혜작용에 "천하의 납승 몸 둘 곳이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를 몇 번이나 겪었던가?" 우레가 일고 큰 비가 쏟아져 파도가 일어난 것처럼, 설두자신의 선기를 칭찬하고 있다.



[第049則]透網金鱗
〈垂示〉垂示云。七穿八穴。攙鼓奪旗。百匝千重。瞻前顧後。踞虎頭收虎尾。未是作家。牛頭沒馬頭回。亦未爲奇特。且道過量底人來時如何。試擧看。
〈本則〉擧。三聖問雪峰。透網金鱗。未審以何爲食。峰云。待汝出網來。向汝道。聖云。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峰云。老僧住持事繁。
〈頌〉透網金鱗。休云滯水。搖乾蕩坤。振鬣擺尾。千尺鯨噴洪浪飛。一聲雷震淸[颱-台+焱]起。天上人間知幾幾。

벽암록 49칙 삼성(三聖)과 황금빛 물고기

“그물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대자유인”


{벽암록} 제49칙은 삼성화상과 설봉화상이 황금빛 물고기를 잡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삼성화상이 설봉화상에게 물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아야 할까요?" 설봉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그물을 빠져 나오거든 말해주겠다." 삼성화상이 말했다. "1500명의 학인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화두(話頭)도 알지 못하고 있군!" 설봉화상이 말했다. "노승은 주지로서 하는 일이 바쁘다."

擧. 三聖問雪峰, 透網金鱗. 未審以何爲食. 峰云, 待汝出網來, 向汝道.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 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繁.


임제정법 인가받은 삼성화상 도전에
일체 초월한 설봉화상 가볍게 응수

이 공안은 {분양송고(汾陽頌古)} 46칙과 {종용록} 33칙에도 수록돼있다. 설봉화상은 {벽암록} 제5칙에서 언급했다. 삼성(三聖)화상은 임제의현의 법을 이은 혜연(慧然)선사로 {임제록}을 편집한 사람이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 제12권, {회요} 제10권에 앙산(仰山)과 덕산(德山), 설봉(雪峰) 등 당대의 선지식을 두루 참문한 대화를 전하고 있다. 삼성은 임제선사를 17년 모셨다고 하며, 임제의 임종에 즈음하여 정법안장의 부촉하는 선문답으로 임제의 정법을 계승한 사실을 {임제록}에는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임제선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에 벽에 기대어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멸각해 버리면 안 된다!' 그 때 삼성이 나와서 말했다.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임제선사가 말했다. '뒷날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불법의 대의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삼성이 곧바로 고함(喝)을 쳤다. 임제선사가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저 눈먼 당나귀한테서 멸각돼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말을 마치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 일단은 원오가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정법안장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해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선승을 말한다. 임제가 체득한 정법안장은 누구라도 멸각 시킬 수가 없는 것처럼, 각자가 정법안장을 구족해야 정법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의 일갈은 임제의 선풍과 정법을 계승한 지혜작용인 것이다.

삼성화상이 제방을 행각할 때에 설봉화상에게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아야 할까요"라고 문제를 던졌다. 그물은 오욕과 탐착의 그물, 언어문자의 그물, 편견과 착각의 그물, 깨달음에 집착한 그물 등 중생의 그물(선병)을 말한다. 금인(金鱗)은 황금 비늘의 물고기로 뛰어난 선기와 안목을 갖춘 훌륭한 선승을 말한다. '그물을 뚫고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불법이나 계율, 규칙, 깨달음의 틀까지 완전히 초월한 자유자재한 선승을 비유한 것이며, 원오는 '수시'에서 '일체를 초월한 사람(過量底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삼성이 자신은 일체의 그물을 초월한 황금빛 물고기인데, 나와 같은 선승을 어떻게 제접하겠습니까 라고 설봉화상에게 법전(法戰)을 도전하고 있다. 설봉화상은 "그대가 그물을 빠져나오거든 말해주겠다"라고 가볍게 응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문답은 많다. 예를 들면 방거사가 마조선사를 찾아가서,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마조는 "그대가 한 입에 서강수(西江水)를 다 들어 마실 때 말해 주겠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만법과 자기와 짝이 되는 것은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다. 자기와 만법과 하나가 되는 것은 본인이 만법일여(萬法一如),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과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어진 허공과 같이 텅 비운 마음은 서강수를 한 입에 들어 마시는 일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일체 만물을 포용하게 되며 만법일여, 만물일체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그러한 경지를 체험함으로서 저절로 그러한 사실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언어 문자로 설명해도 본인이 체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체험해서 알도록 지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설봉이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라고 대답한 것은 설봉의 입장에서 볼 때 삼성이 아직 그물 속에서 헤매고 있는 물고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그대가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일체의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고기가 돼 봐라. 그 때에 한마디 멋있는 법문을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원오는 설봉이 삼성의 명예에 관계되는 말이라고 하면서, '설봉 노인은 작가 종사'라고 칭찬하고 있다. 삼성은 그물을 뚫고 나왔다고 하는데, 설봉은 그물을 뚫고 나오라고 하고 있다. 설봉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그물을 뚫고 나왔다고 주장하는 놈은 진짜 그물을 뚫고 나온 녀석이 아니다. 뚫고 나왔다는 그 그물에 걸려있는 녀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임제의 정법안장을 인가받은 당대의 선승이다. 설봉의 이러한 응수에 결코 그대로 물러설 수 없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삼성은 "1500명의 학인을 지도하는 선지식이라는 사람이 내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귀(話頭)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네"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원오는 삼성의 기지는 "청천에 벽력이 떨어진 것처럼, 설봉산의 대중이 놀랐다"라고 하고, 또 "삼성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봉화상은 "노승은 주지로서 하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이만 실례하네"라고 역시 가볍게 대응하고 있다. 삼성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주지로서 사찰의 업무에 무척 바쁘다고 하면서 삼성의 무모한 법전(法戰)에 응수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원숙한 경지에서 학인을 지도한 설봉의 대답이다. 삼성의 폭탄적인 법전에 한발 뒤로 물러선 후퇴인가 아니면 삼성이 그물을 뚫고 나온 것을 인정한 것인가. 원오가 "승부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삼성이 이긴 것도 아니고, 설봉이 진 것도 아니다. 설봉이 주지일로 바쁘다고 한 말은 "가장 독한 말"이라고 원오는 착어하고 있는데, 그것은 설봉이 앞에서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는 말보다 더 혹독한 말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삼성이 더 이상 법전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그물을 뚫은 황금빛 물고기" 삼성이 설봉에게 질문한 말을 읊고 있다. 설봉이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는 대답은 삼성이 그물 속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인데, 설두는 설봉에게 "물속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질책하고 있다. "하늘을 흔들고 땅을 움직이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고기가 자유자재로 작용하는 모습은 천지를 진동하고 대기대용을 발휘하고 있다. 원오도 '작가 작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 삼성은 작가 중의 작가라며, '일체를 초월한 사람(過量底人)'이 아니라면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지느러미를 떨치고 꼬리를 흔드네." 황금 물고기(삼성)가 기세 좋게 활동하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다음 삼성이 설봉에게 1500 대중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말귀도 모른다고 한 법전의 기세는 '고래가 뿜어대는 거대한 파도는 천 길이나 나는 것처럼'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한다고 읊고 있다. 설봉이 노승은 주지 일로 바쁘다고 한 말은 '진동하는 우레 소리에 맑은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고 읊고 있다. 설두는 '맑은 회오리바람 일어난다'고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제시하면 또다시 새로운 것이다. 다시 청풍(淸風)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비가 온 뒤에 푸른 산을 보는 것과 같이 진실로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설봉의 한마디는 일체의 시비를 초월하고 선승의 본분에서 안목있는 자신의 일을 하는 신선한 청풍이다. 설봉의 법문을 체득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천상과 인간에 청풍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설두도 묻고 있다.



[第050則]缽裏飯桶裏水
〈垂示〉垂示云。度越階級超絶方便。機機相應。句句相投。儻非入大解脫門。得大解脫用。何以權衡佛祖。龜鑑宗乘。且道當機直截。逆順縱橫。如何道得出身句。試請擧看。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塵塵三昧。門云。缽裏飯桶裏水。
〈頌〉缽裏飯桶裏水。多口阿師難下嘴。北斗南星位不殊。白浪滔天平地起。擬不擬。止不止。箇箇無褌長者子。

벽암록 50칙 운문의 진진삼매(塵塵三昧)

“티끌 하나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


{벽암록}제50칙은 운문화상에게 진진삼매(塵塵三昧)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진진(塵塵) 삼매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

擧. 僧問雲門, 如何是塵塵三昧. 門云, 鉢裏飯, 桶裏水.


발우속에 밥이 들어있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 경지'

운문문언화상은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이 등장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상권에 수록하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진진(塵塵) 삼매란 어떤 경지입니까?"하고 질문하고 있다.

진진삼매(塵塵三昧)란 {화엄경} 14권 현수품 게송에 "일체가 모두 자유 자재한 것은 부처의 화엄삼매 힘이다. 한 티끌(微塵) 가운데 삼매에 들어가 일체의 티끌(微塵)의 선정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 티끌(微塵)은 또한 늘어나지도 않고 하나로서 널리 생각할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나툰다"라고 읊고 있는 말에 의거한 질문이다. {화엄경} 45권에 '한 티끌 가운데 일체가 있다'라는 말이나 '한 티끌(一塵) 법계를 다한다', '한 티끌 가운데 무량의 국토를 나툰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사상을 토대로 질문하고 있다.

의상스님의 {법성게}에도 이러한 화엄사상을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포용하고, 일체의 모든 티끌 하나하나도 낱낱이 또한 같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미진(一微塵)은 지극히 미세한 티끌을 말하며, 진진(塵塵)은 미세한 티끌 하나하나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塵塵) 삼매나 개개(個個)삼매 혹은 개별삼매(個別三昧)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티끌 가운데 우주 일체를 포섭시키고 있는 삼매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진진일념(塵塵一念)이란 말이 있는데,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한 생각의 움직임(작용)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이 질문은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장단(長短)과 대소(大小)의 차별을 초월한 화엄법계의 연기의 이치와 도리를 확실히 체득한 입장이 아니면 질문 할 수도 없고, 또한 대답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화엄철학에서 설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이치를 선사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법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는 만물의 근본은 일체라는 원리와 만물이 서로 상관관계라는 이치를 토대로 주장하고 있다. 만물은 일심(一心)의 법계로 나타낸 것이며 마음 밖에 법이 없다(心外無法). 따라서 '일체는 오직 마음의 조작이다(一切唯心造)'라고 주장한다. 책을 읽는 마음이나 글씨를 쓰는 것, 한 손가락 움직이는 것이 곧 법계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계를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 씀이 곧 일체의 법계와 서로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만물이 일체라는 주장도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연필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무는 땅에서 자란 것이며, 땅은 흙과 물과 바람과 공기 등 많은 사물과 함께 성장된 것처럼, 자신의 마음과 하나 된 경지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서로 서로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화엄철학에서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한다. 상즉(相卽)은 파도와 물과 같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만물이 동체(同體)인 관계를 말하며, 상입(相入)은 두 거울이 서로 마주 비추는 것처럼, 만물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화엄철학에서는 십현문(十玄門)이라는 열 가지 법계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무애자재하게 상즉상입하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또한 육상(六相)이 원융(圓融)한 화엄철학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 무애자재하게 서로서로 즉입하는 관계를 제시하고도 있다.

그리고 삼매(三昧)는 'samadhi'의 음역으로 정수(正受)라고도 번역하는 것처럼,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거울은 어떤 사물이나 무심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무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만물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주관)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자기와 사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하며, 독서삼매라고 할 때 책을 읽는 자신과 책과 하나가 되고, 일을 할 때는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하는 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삼매는 미세한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능히 무량 광대한 세계와 하나가 되고, 한 생각 한 생각에 무량 법계와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스님은 운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 법계의 사는 경지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진진삼매나 사사무애법계의 법문은 자기와는 별개의 법문이며, 자기 밖에서 그러한 법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원오선사가 "천하의 납승들이 모두 여기에 안주할 소굴을 만든다"라고 착어한 것은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승들이 이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즉 경전에서 주장하는 언어 문자의 함정과 미혹함의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서 진진삼매란 특별한 법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치 물 속에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과 깨달음을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다.

깊고 미묘한 화엄사상의 진수를 진진삼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질문하자, 운문화상은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진삼매 말인가. 발우에는 밥이 있고, 물통에는 물이 담겨 있는 이것이 화엄에서 주장하는 진진삼매이며 사사무애한 화엄법계이다. 운문은 발우와 물통이라는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선어에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물 하나하나의 참된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며, 제법의 실상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그대로 진진삼매이며 사사(事事)가 무애(無碍)한 법계의 이치인 것이다.

원오선사는 "포대 속에 송곳을 넣어 두었군!"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운문의 기봉(機鋒. 지혜작용)은 송곳이 포대 밖으로 나온 것으로 비유하여 지혜의 안목이 뛰어남을 칭찬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발우 속에는 밥이, 물통에는 물." 운문의 대답을 다시 인용하여 진진삼매의 경지를 감춤이 없이 그대로 모두 들어낸 것이라고 읊고 있다. ["말 많은 스님도 입을 열기 어렵네." 불법을 잘 알고 변재가 뛰어난 사람이나 삼세의 제불도 운문화상의 이 한마디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북두성과 남극성의 위치는 본래 그 자리에 있는데" 북극성의 별은 언제나 북쪽에, 남극성의 별은 언제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그 곳에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이며 사사가 무애한 경지이다. 운문이 "발우에는 밥, 물통에는 물이 있다"고 대답한 것과 같다.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운문화상의 말은 원융무애하고 변화가 자유자재하여 바다에 있어야 할 성난 파도가 하늘에까지 미친다고 읊고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려 해도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네."]

운문선사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인가, 저것인가 비교해서 사량분별하거나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경지도 아니다. 그렇게 미혹한 마음으로 사량분별하는 모습은 마치 {법화경} 신해품에 나오는 거지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는 장자의 어리석은 아들에 비유하여 "모두가 속옷도 없는 장자의 아들이로다"고 했다. "속옷도 없다"라는 말은 {한산시}에 의거한 표현인데, 사바세계의 미혹한 중생은 모두 가난하여 속옷도 없다고 읊었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7 

 

벽암록(4) 31칙 ~ 40칙

벽암록 31칙 마곡화상이 주장자를 흔들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들면 본래심 상실” {벽암록} 제31칙에는 마곡스님이 사형인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찾아가서 주장자를 흔들어 보인 기연을 다

kr.buddhism.org

 

[第031則]不是不是
〈垂示〉垂示云。動則影現。覺則冰生。其或不動不覺。不免入野狐窟裏。透得徹信得及。無絲毫障翳。如龍得水似虎靠山。放行也瓦礫生光。把定也眞金失色。古人公案。未免周遮。且道評論什麽邊事。試擧看。
〈本則〉擧。麻谷持錫到章敬。遶禪床三匝。振錫一下。卓然而立。敬云。是是。麻谷又到南泉遶禪床三匝。振錫一下。卓然而立。泉云。不是不是。麻谷富時云。章敬道是。和尙爲什麽道不是。泉云。章敬卽是是。汝不是。此是風力所轉。終成敗壞。
〈頌〉此錯彼錯。切忌拈卻。四海浪平。百川潮落。古策風高十二門。門門有路空蕭索。非蕭索。作者好求無病藥。

벽암록 31칙 마곡화상이 주장자를 흔들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들면 본래심 상실”

{벽암록} 제31칙에는 마곡스님이 사형인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찾아가서 주장자를 흔들어 보인 기연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마곡스님이 석정(錫杖)을 가지고 장경 화상의 처소에 도착하여 선상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서 석장으로 한번 내려치고 우뚝 서자, 장경 화상이 말했다. "옳지(是) 옳지(是)"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틀렸다(錯)" 마곡스님이 다시 남전 화상의 처소에 도착해서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남전 화상이 말했다. "아니야(不是), 아니야(不是)"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틀렸다(錯)" 당시 마곡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말했다. "장경화상은 옳다고 했는데, 화상은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시오"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장경은 옳았지만, 그대는 잘못된 것이야!" 이것은 바람의 힘(風力)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결국 부서지고 만다.

擧. 麻谷持錫到章敬, 禪床三, 振錫一下, 卓然而立. 敬云, 是是. (雪竇著語云, 錯.) 麻谷又到南泉, 요禪床麻, 振錫一下, 卓然而立. 泉云, 不是不是. (雪竇著語云, 錯.) 麻谷當時云, 章敬道是, 和尙爲什道不是. 泉云, 章敬卽是, 是汝不是, 此是, 風力所轉, 終成敗壞.

이 공안은 {전등록} 7권 '장경회휘전'에 전하고 있으며, {벽암록} 제20칙의 '평창'과 {종용록} 16칙에도 인용하고 있다. 본칙에 등장하고 있는 마곡보철(麻谷寶徹)과 장경회휘(長慶懷暉, 754~815), 남전보원(南泉普願)은 모두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로서 조사선의 선풍을 확립한 대표적인 선승들이다. 마조문하에 뛰어난 선승 139명 가운데 88명이 모두 훌륭한 선지식으로 활약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실로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를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의 종교로 완전히 정착시킨 선승들이다.

어느 날 마곡선사가 석장(주장자)을 가지고 사형인 장경화상이 앉아 있는 선상(禪床)을 세 바퀴 빙 돌고 나서 석장을 한 번 쾅! 하고 내리치고 장경의 정면에 우뚝 섰다. 마곡의 행동은 형식적으로는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너무 교만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석장은 수행자가 행각할 때 지니고 다니는 나무 지팡이로서 맨 위에 철제로 탑 모양을 만들고, 둥글게 만든 큰 고리에 작은 고리를 12개를 끼워 넣기 때문에 석장(錫杖)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행각할 때 짐승이나 곤충들을 경각시키기 위해 석장을 땅에 치고 둥근 쇠고리가 부딪치어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인데, 짐승이나 곤충이 수행자의 발에 밟혀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원오는 마곡의 행동을 "조계의 모습을 쏙 빼 닮았네"라고 착어(着語)하고 있다. 이 말은 영가현각(永嘉玄覺)이 처음 조계혜능을 방문 할 때도 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참문하였기 때문이다. 즉 '평창'에 "영가스님이 조계에 이르러 육조스님을 친견할 때에 혜능화상이 앉아 있는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석장을 한 번 치고 우뚝 섰다. 그러자 육조는 '사문이란 삼천의 위의와 8만 가지 구체적인 법칙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그대는 어디서 왔기에 이처럼 거만을 부리는가?'"라는 일단을 인용하고 있다.


주장자들고 선기작용 제시했지만
본래인의 지혜 아닌 경계 쫓아 행동

그런데 이러한 마곡의 행동에 장경은 "옳다(是)"고 말했는데, 마곡이 행동으로 제시하고 있는 독자적인 깨달음의 경지는 걸림 없는 지혜작용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곡과 장경의 문답을 설두 화상은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마곡은 처음 사형인 장경으로부터 인정을 받자 득의양양하여 유명한 남전 화상의 처소에 가서도 장경의 처소에서 펼친 행동과 똑같이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번 내려치고 남전 화상의 앞에 우뚝 섰다. 그러나 남전 화상은 "아니야(不是), 아니야(不是)"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마곡의 지혜작용(禪機)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마곡의 행위에 대해서 설두 화상은 역시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했다.

이 때 마곡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장경 화상은 옳다고 했는데, 화상은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시오"라고 다그쳤다. 마곡이 젊은 기운으로 독자적인 경지를 체득하고 장경 화상과 남전 화상을 참문하여 자신의 선기를 탁마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 옳고 그름의 상대적인 차별경계에 떨어지는 어리석은 인물로 평가할 수 없다. 남전의 차원 높은 선기와 안목을 끌어내어 점검하기 위한 차별적인 언어로서 다그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오는 이 말에 대하여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원오는 마곡스님과 이 공안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소? 옳고 그른 차별경계에 떨어져 상실한 것은 아닌지?"라고 자각하도록 던진 착어이다.

남전화상은 "장경은 옳았지만, 마곡 그대는 잘못된 것이야! 이것은 바람의 힘(風力)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결국 부서지고 만다"고 마곡을 위해서 친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그대 자신의 일을 문제로 삼고 지혜로운 일을 해야지 왜 장경을 끌어들이는가? 장경은 관계없는 일이야. 문제는 그대가 올바른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석장을 들고 내 앞에서 선기작용을 제시하고 있는 행동은 본래심의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풍력(風力)의 힘으로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가 흩어지는 시절인연이 되면 파괴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자기는 어떻게 하지"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풍력에 따라 움직인 마곡의 주인공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의미이다.

남전이 말한 '바람의 힘(風力)으로 움직인 것'이란 인간의 신체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육체를 움직이고 활동하는 원동력을 풍대라고 한다. 마곡이 장경과 남전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탁 치며 세운 모습은 풍대(風大)라는 원소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본래인의 지혜작용은 아니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대가 흩어지면 그러한 육체적인 활동은 환멸(幻滅)이며 파괴되고 만다. 무슨 지혜작용인양 행동하는가? 그러한 선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질책한 말이다.

절대 주체이며 진실의 자기인 본래인은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됨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의 본래인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장을 떨치며 선상을 도는 행위는 본래인의 지혜작용이 아니라 단순히 분위기에 휘말리고 경계를 쫓아 육체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진실로 그대 자신의 본래인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고 말했다.

설두는 장경이 "옳다(是)"고 한 것과 남전이 "그릇된 것(不是)"이라고 한 말에 모두 "잘못된 것(錯)"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 끄달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모두 초월한 경지에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이것도 잘못되고, 저것도 잘못되었다"고 읊고 있다. '절대로 제거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 착어한 '잘못된 것(錯)'을 제거하면 옳고 그름의 차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차별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사해(四海)는 물결이 잔잔하고 모든 강물은 썰물이 빠지게 된다"고 무사태평한 경지를 읊고 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범부와 성인이라는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을 일시에 초월한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를 읊고 있다. "고책(古策, 석장)의 가풍이 열 두 대문 보다 높은데, 대문마다 길이 있으나, 죽은 듯 조용하다" 고책(석장)은 본래 구족된 부모미생이전의 본래면목, 즉 고불심(古佛心)을 의미한다. 본래의 석장(불심)에 12개의 고리는 12인연을 상징한 것으로 본래 텅 비어 죽은 듯이 고요하게 울린다. 그런데 설두는 다시 석장의 쇳소리는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이 아니다"고 하여, 텅 빈 공의 경지, 무사 무심의 경지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고 주의하고 있다. "작가는 병 없는 약을 찾는 것이 좋다"고 응병여약의 약이 아닌 본래의 불심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의주고 있는 것이다.



[第032則]佛法大意
〈垂示〉垂示云。十方坐斷千眼頓開。一句截流萬機寢削。還有同死同生底麽。見成公案打疊不下。古人葛藤試請擧看。
〈本則〉擧。定上座。問臨濟。如何是佛法大意。濟下禪床擒住。與一掌。便托開。定佇立。傍僧云。定上座何不禮拜。定方禮拜。忽然大悟。
〈頌〉斷際全機繼後蹤。持來何必在從容。巨靈抬手無多子。分破華山千萬重。

벽암록 32칙 임제와 불법의 대의

“시절인연 도래한 지금 여기에 깨달음"

{벽암록} 제32칙에는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정(定) 상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정(定) 상좌가 임제 선사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선사는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정 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말했다. '정 상좌! 선사께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 상좌가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크게 깨달았다."

擧. 定上座, 問臨濟, 如何是佛法大意. 濟, 下禪床, 擒住與一掌, 便托開. 定, 佇立. 傍僧云, 定上座, 何不禮拜. 定, 方禮拜, 忽然大悟.

이 일단은 고본 {임제어록}에는 보이지 않고 송대(宋代)에 종연 선사가 {임제어록}을 편집할 때 {벽암록}에 전하는 자료를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임제 선사는 황벽 선사의 불법을 전해 받은 유명한 선승으로 임제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법문집을 모은 {임제어록}은 '어록의 왕(王)'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진수를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진인(眞人)의 사상으로 종합하고 있다. 임제의 선사상은 한마디로 '일체의 권위와 형식을 초월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일체의 망념 경계를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사는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시절인연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주체인 본래심을 자각하여 주인이 되어 살 수 있으면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이 진실된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고 주장했다.

임제 선사의 문하에서 참선수행하고 있는 정 상좌라는 스님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평창'에는 {종문통요집} 제6권 '정상좌'전에 수록된 자료에 의거하여, 덕산 문하의 수제자인 암두와 설봉, 흠산 이 세 사람이 임제 선사를 참문 하러 가는 길에서 정 상좌를 만나 임제 선사가 입적한 사실과 그의 무위진인(無位眞人)에 대한 설법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무위진인에 대한 문제로 흠산과 선문답을 나눈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정 상좌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 상좌가 이처럼 곧바로 깨달음의 경지를 출입하고 왕래한 것을 보라. 임제의 정법을 계승한 인물이었기에 이렇게 선기를 전개할 수 있었다. 불법의 대의를 깨칠 수 있다면 하늘을 훌쩍 뒤집어 대지를 만들고 스스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좌는 이러한 인물이었다. 임제 선사에게 한 차례 따귀를 얻어맞고 절을 하다가 곧바로 불법의 귀착점(대의)을 깨달았다. 그는 북방 사람으로 기질이 아주 순박하고 강직했다. 임제 선사의 불법을 이은 후에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 임제 선사의 큰 지혜(大機)를 활용했다. 그는 참으로 빼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임제선사가 법당에서 설법할 때에 정 상좌가 '불법의 대의'에 대해서 질문하자, 임제 선사는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손으로 뺨을 한대 후리치고는 바로 밀쳐 버렸다. 선어록에는 '불법의 대의'와 '조사가 오신 참된 의미' '선사의 가풍'을 묻는 질문이 정형화되어 있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임제와 정상좌의 행동은 {임제어록} 행록에 처음 황벽의 문하에서 수학한 임제가 황벽 선사에게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황벽 선사가 곧장 방망이로 내리쳤다는 행동과 비슷하다. 임제는 세 번이나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대의를 질문했지만 세 번 모두 방망이를 얻어맞고 결국 대우 선사의 인연으로 비로소 깨닫게 된 유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선불교에서 '불법의 대의'를 문제로 삼는 것은 {육조단경}에 오조홍인 선사가 문인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사람은 게송을 지어 보라고 지시하자, 신수가 먼저 깨달음의 게송(心偈)을 지어 벽에다 쓴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황벽선사의 '몽둥이'방편과 흡사
불법의 대의 거친 행동으로 보여줘

불법의 대의는 불법의 현지(玄旨)를 말하는데,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불성을 깨닫는 견성(見性)과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의 근본정신을 말한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정법의 안목으로 일체의 만법을 올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법의 차별경계에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로써 보살도의 삶을 전개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다는 것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경지를 말하는데, 임제는 이러한 선사를 '무위진인'이라고 하였고, 진정한 견해를 갖춘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전등록} 14권에 도오가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석두 선사는 "그대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면 알 수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시 "불법을 체득한 후의 세계에도 다시 진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창공은 걸림이 없다. 백운(白雲)이 날아다니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입장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대변하고 있다. 사실 선불교의 사상은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정리되는 전불교의 실천정신을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으로 귀결시키고 있는데, 무심은 본래심이며 평상심을 말한다. 그래서 "무심(無心)이 도(道)" "평상심이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상좌도 임제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한마디의 법문을 간청했다. 그런데 임제 선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선상에서 내려와 정 상좌의 멱살을 잡고 후리치며 밀쳐버렸다고 하는 것처럼 난폭한 행동으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황벽이 임제를 몽둥이로 후리친 것과 같이 거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오는 "오늘에야 붙잡았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임제가 매일 설법하면서 대장부를 찾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분명히 붙잡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멱살을 붙잡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노파심 간절하게 지도하고 있다고 코멘트하고 있다.

그런데 "정 상좌는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아지경에 서 있는 모습이다. 불법의 대의를 행동으로 보여준 임제의 거친 노파심은 정 상좌를 무아지경에 몰아넣고 말았다. 원오가 "이미 귀신의 소굴에 빠졌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정 상좌가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혜의 작용이 없는 귀산의 소굴에서 사는 죽은 인간이 된다. 그런데 마침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정 상좌에게 "정 상좌! 선문답은 끝났다. 빨리 선사께 인사를 올리게!"라고 고함쳤다. 처음 선문답을 하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하고 마칠 때는 '선사의 깊은 법문 감사 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예절이 있다.

정 상좌는 옆에서 주의를 준 스님의 말을 듣고 무심의 경지에서 임제 선사께 절을 하려는 그 순간 불법의 대의를 깨달았다. 즉 자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옆에 있는 스님이 던진 한마디의 주의에 지금 여기 자신의 할 일을 통해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 상좌가 지금까지 많은 세월에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고심(苦心)으로 참구해온 결과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임제의 친절한 방편 수단으로 번뇌 망념을 초월하고 불법의 근본정신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황벽 선사의 지혜작용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어받은 것이 어찌 점잖을 리 있으랴!" 불법의 대의를 질문한 정 상좌를 선상에서 내려와 거친 행동의 지혜방편으로 제시한 임제 선사를 칭찬하고 있다. 임제도 황벽에게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고 방망이를 얻어맞는 거친 행동의 교화수단을 계승하고 있다. "거령신이 무심코 들어 올린 손 일격에 천만 겹의 화산이 쪼개졌네." 거령신은 황하의 전설에 나오는 신으로 무심코 들어올린 손으로 화산과 수양산을 나누어 그 사이로 황하의 물을 흐르게 한 것처럼, 임제의 무심한 행화가 정 상좌의 의심과 만 겹의 미혹을 타파하게 되었다고 읊고 있다.



[第033則]具一隻眼
〈垂示〉垂示云。東西不辨南北不分。從朝至暮從暮至朝。還道伊瞌睡麽。有時眼似流星。還道伊惺惺麽有時呼南作北。且道是有心是無心。是道人是常人。若向箇裏透得。始知落處。方知古人恁麽不恁麽。且道是什麽時節。試擧看。
〈本則〉擧。陳操尙書看資福。福見來便畫一圓相。操云。弟子恁麽來。早是不著便。何況更畫一圓相。福便掩卻方丈門。雪竇云。陳操只具一隻眼。
〈頌〉團團珠遶玉珊珊。馬載驢駝上鐵船。分付海山無事客。釣鼇時下一圈攣。雪竇復云。天下衲僧跳不出。

벽암록 33칙 자복화상의 일원상(一圓相)

“일원상은 만법일여의 불법의 세계 상징”

{벽암록} 제33칙은 자복 화상이 진조(陳操) 상서(尙書)에게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서 제시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진조 상서가 자복 화상의 견해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갔다. 자복화상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진조가 말했다. '제자가 이렇게 와서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하나의 원상을 그려서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자복화상은 곧장 방장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설두화상이 착어했다. '진조는 단지 한쪽 눈만을 갖춘 인물이다.'"

擧. 陳操尙書, 看資福. 福見來, 便畵一圓相. 操云, 弟子恁來, 早是不着便. 何況更畵一圓相. 福便掩却方丈門.(雪竇云, 陳操只具一隻眼.)

자복 여보(如寶)선사는 당말 위앙종의 선승으로 앙산혜적의 법손으로 길주(吉州, 江西省) 자복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펼쳤기 때문에 자복 화상이라고 부른다. {전등록} 제12권과 {회요} 11권에 약간의 선문답을 수록하고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종문통요집} 제6권 자복전에는 설두의 착어를 첨가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벽암록}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조상서는 {벽암록} 제6칙 평창에 언급된 것처럼, 황벽의 제자 목주화상(진존숙)을 참문하여 선법을 이은 거사이며, 상서는 대신(大臣)으로 장차관급의 고급관리이다. 원오는 평창에 진조 상서가 당대의 유명한 거사 배휴(裵休)와 이고(李)와 같은 유명한 거사로 그는 스님을 만나면 먼저 공양을 청하고 삼백량을 보시한 후에 반드시 그 스님의 안목을 시험하였다. 많은 선승들의 안목을 간파했지만 운문 선사는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가 목주 화상 밑에서 참선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춘 거사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어느 날 진조거사가 여보 선사의 안목을 점검해보기 위해서 자복사를 참문하러 갔다. 그런데 자복 화상은 유명한 진조 거사가 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허공에다 하나의 둥근 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위산과 앙산의 위앙종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독창적인 선풍을 펼쳤다. 일원상을 제시하여 선문답을 나누는 선풍은 혜충 국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천안목} 제4권에는 혜충 국사가 제자 탐원(耽源)에게 내린 일원상의 의미를 앙산혜적이 학인을 제접하는 교화의 수단으로 응용하면서 위앙종의 선풍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원상에는 96가지 의미가 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6종류로 정리된다.

선문답에서 일원상을 그려서 제시한 것은 첫째로 절대의 진실인 불법 그 자체를 상징하여 나타낸 것, 둘째는 수많은 선정의 삼매를 모두 이 일원상에 포함시킨 것, 셋째는 주객의 차별적인 대립이 나누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 넷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대의를 나타내는 문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다섯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여섯째는 원상이 그대로 언어 문자를 초월한 경지에서 종지에 계합된 사실 등이다. 즉 일원상은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심명}에 "둥글기가 허공과 같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 진여(眞如), 불성(佛性), 불심(佛心)은 법계와 하나 된(萬法一如) 것이며, 일체 제법이 본래 공(空)한 모습을 그림(圖示)으로 제시한 법문이다. 하나의 원상은 무한의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킨 법계를 상징한 동적(動的)인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의 시간을 나타내고, 원상안의 공간은 시방(十方)세계를 표현한다. 즉 시방삼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찰나의 시간에 삼세가 함께하고, 여기라는 공간이 시방세계인 것이며, 자기의 본래심(佛心)은 만법과 하나 된 법계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이것이 나의 본래심" 둥근원 제시
방장실로 돌아가 선승의 본분 보여

자복 화상은 일원상을 그려서 선법을 제시한 위앙종의 종지를 계승한 선승답게 불법의 근원과 본질을 텅 빈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서 진조 거사에게 보여준 것이다. 원오는 자복 화상이 일원상을 그린 것에 대하여 "도깨비는 도깨비를 알고,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과 진조 거사의 경지를 똑같이 평하고 있다.

진조 거사는 "제자가 이제 막 화상을 참문하려고 와서 아직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화상은 미리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말했다. 자복 화상보다 나이도 많고 선법도 뛰어난 진조 거사가 자신을 제자라고 하는 말한 것은 거사로서 선승에 대한 겸손의 미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복 화상은 진조 거사가 자신을 방문하는 의도와 그의 선기를 먼저 파악하고 그가 받아먹을 수도 없고 문제를 파악하여 다시 제기할 수도 없는 일원상을 허공에다 그려 보인 것에 대한 반문이다. 즉 도적이 도적의 마음을 먼저 읽어보고 한 발 앞서서 쓸데없는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선수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자복 화상 당신이 그린 원상 가운데 빠져들지 않는다는 선기가 포함된 말이기도 하다.

원오는 진조거사가 "오늘 비로소 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고, 진조 거사는 과연 "노련한 도적"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진조거사보다도 한 수 더 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련한 도적이 자복 화상이다. 자복 화상은 진조거사의 안목을 전부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조거사의 비판적인 말에 한마디의 대꾸나 반응도 없이 방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자신의 살림살이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장실은 주지가 거처하는 공간이며, 본래 깨달음의 공간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진조거사를 위해서 일원상을 그려서 방편 법문을 제시하고는 자신이 제시한 법문을 진조거사가 파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선승의 본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진조 거사는 훌륭한 안목을 갖춘 인물이지만 한쪽 눈만을 갖춘 사람"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복화상은 진조거사가 자복의 견지를 시험하기 위해 오는 것을 보고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원상을 방편문으로 제시한 것은 파악하고 있지만, 방장실로 되돌아 문을 닫고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경지에서 무애자재하게 살고 있는 자복화상의 지혜작용은 파악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원오도 수시에 "낮잠 자고 있는가? 깨어있는가? 유심인가 무심인가, 도인인가. 범부인가 전혀 파악 할 수 없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복화상은 정말 자유 자재한 선기를 펼치고 있는 훌륭한 선지식(작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둥근 진주는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진주나 옥구슬이 둥근 형체로 자복화상이 제시한 일원상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완전무결한 것이며, 옥이 그릇에서 구르는 것처럼, 자유 자재한 지혜작용이 빛난다.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鐵船)을 타고"라고 읊은 말은 둥근 주옥과 같은 진여 법성은 우주 만상을 그대로 들어내고 시방세계에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말에 싣고, 나귀에 얹고, 철선에도 가득 싣게 된다는 의미이다. "온 세상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나그네(海山無事)에게 나누어주네." 수없이 많은 구슬을 말과 나귀, 철선에 싣고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나누어 줄까라고 생각해보니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지만 깨달음의 자취도 없고 지옥과 극락을 초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증도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도의 수학을 일체 끊고(絶學)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아니면 일원상을 수용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큰 자라를 낚을 때는 올가미를 던져라"라고 읊은 것은 자라는 낚싯대로 잡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진조와 같은 거물은 자라를 잡는 방법은 일원상의 올가미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설두는 "천하의 납승도 자복화상이 던진 이 일원상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칭찬하고 있다.



[第034則]不曾遊山
〈本則〉擧。仰山問僧。近離甚處。僧云。廬山。山云曾遊五老峰麽。僧云。不曾到。山云。闍黎不曾遊山。雲門云。此語皆爲慈悲之故。有落草之談。
〈頌〉出草入草。誰解尋討。白雲重重。紅日杲杲。左顧無瑕。右盻已老。君不見。寒山子。行太早。十年歸不得。忘卻來時道。


벽암록 34칙 앙산화상이 산놀이를 묻다

“산놀이는 본래심 체득한 유희삼매의 삶”

{벽암록} 제34칙은 앙산혜적 선사가 어느 스님에게 '여산의 오로봉에 산놀이한 적이 있었는가'를 질문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앙산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최근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여산에서 왔습니다.' 앙산 화상이 물었다. '오노봉(五老峯)에도 가 보았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앙산 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아직 산놀이를 하지 못했군!' 운문 선사가 말했다.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다.'"

擧. 仰山問僧, 近離甚處. 僧云, 盧山. 山云, 曾遊五老峰. 僧云, 不曾到. 山云, 사黎不曾遊山. 雲門云, 此語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이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中卷)에 수록하고 있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선사는 위산영우 선사의 제자로 위산과 앙산의 선풍을 종합하여 일원상(一圓相)을 제시하는 독창적인 위앙종의 종지를 천양한 훌륭한 선승으로 {벽암록} 18칙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임제의 행록과 선문답에 위산과 더불어 촌평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인 안목으로 임제의 지혜작용(禪機)을 비평하면서 인정하고, 예언하는 말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임제록}의 편집자가 당시 최고의 선승으로 안목을 구족한 위산과 앙산의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당집} 18권에 앙산은 날마다 법당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고 한다. "그대들 모두 각자가 광채를 돌이키고 자신을 되찾도록 하라. 나의 말을 기억하지 말라. 나는 시작 없는 예부터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향하여 허망을 쫓는 뿌리가 깊어져 단법에 뽑기가 어렵게 된 그대들을 가엽게 여긴다. 그러므로 거짓 방편을 사용하여 여러분들이 수량 겁에 쌓인 수많은 나쁜 지식을 뽑아 버리려고 한다. 마치 누른 나뭇잎으로 아기의 울음을 달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백가지 재물과 금 은 보화를 한 자리에 뒤섞어 놓고 찾아온 사람의 정도에 맞추어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석두(石頭)는 순금가게(眞金)지만 나는 잡화가게(雜貨)이니 찾아온 사람이 잡화를 찾으면 잡화를 주고, 순금을 찾으면 순금도 준다."

본칙에서 운문이 앙산의 자비심을 언급한 것처럼, 앙산은 다양한 지혜와 방편법문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여 각자의 불심을 체득하도록 하면서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莫記吾語)"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마조의 설법에도 강조하고 있는데, 나의 설법은 우는 아기를 달래는 일시의 방편과 같은 것이니 내 말에 집착하지 말고 불법의 진실을 각자 체득하라고 주장한 말이다.

어떤 스님이 앙산 화상을 참문 하러 왔기에 앙산은 "그대는 최근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선지식이 처음 온 학인에게 말하는 평상시의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학인의 수행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그 스님은 "여산(廬山)에서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에 계합된 맛이 있기에 원오는 "정직한 사람이라, 앙산은 이 스님의 안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고 코멘트 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던진 말이 "그러면 오노봉(五老峯)에도 올라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산은 중국 강서성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련사의 혜원(慧遠) 법사가 은거 수행한 곳으로 유교의 도연명(陶淵明), 도교의 육수정(陸修靜)의 대표적인 은거수행자 3인이 담소하며 여산에 흐르는 호계라는 개울을 처음 건너게 된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로 유명하며, 또한 송대 소동파가 동림상총 선사를 참문하여 참선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뒤에 읊은 "여산은 안개, 절강은 조수"라고 읊고 있는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산의 서쪽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고, 남쪽에는 오노봉이라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 아름다운 경치이기 때문에 관광지로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방문스님과 선문답 통하지 않아
중생 위한 다양한 방편법문 설해

앙산 화상이 스님에게 "오노봉에 산놀이 가 보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스님을 시험하기 위한 두 번째 의 질문이었다. 그 스님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앙산 화상이 질문한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앙산 화상이 질문한 '오노봉'은 여산의 오노봉을 제기한 것이지만, 단순히 경계를 묻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본래 구족한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을 말한다. {벽암록} 23칙에서 말하는 묘봉산의 정상과 같은 의미로 각자의 발아래서 전개되는 진실의 세계, 지금 여기서 자기의 본래심으로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오노봉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기와 깨달음의 경지인 오노봉이 하나가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전개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세월을 행각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깨달음을 체득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과 오노봉이라는 경계와 주객(主客)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앙산 화상은 "그대는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했는가?"라는 질문을 "오노봉에도 가 보았는가?" 라고 질문한 것인데, 그 스님은 정직하게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다. 앙산화상은 "그대는 아직 한 번도 산놀이를 해보지 못했군!"이라고 말했다. 앙산 화상이 말하는 산놀이는 각자가 구족하고 있는 본분(本分)의 산(山: 깨달음의 경지)을 말하며,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을 체득하여 유희삼매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마디의 말이다. 원오도 "이런 스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운문 선사는 본칙의 선문답에 대하여 "이 말은 모두 자비심 때문에 중생을 위한 방편의 말(落草之談)"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낙초지담(落草之談)이란 말은 운문의 독창적인 말로서 사바세계(풀밭)에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의 방편법문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앙산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방편 법문을 설한 위대한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요컨대 산길을 알려면 산에 갔다 온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운문 선사가 오노봉에 산놀이를 한 경험이 있는 선승이기 때문에 앙산의 경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칙은 지극히 평범한 선승들의 일상 대화로서 평상심으로 깨달음(道)의 삶을 일상생활에서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선의 수행은 평상시의 대화에서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고,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일상생활의 대화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처음 "풀밭에서 나오고, 풀밭에 들어가고"라는 말은 앙산의 경계는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는 향상(向上)과 중생 구제를 위한 자비심의 향하(向下)를 자유자재로 펼친 선승이라고 '출초입초(出草入草)'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앙산의 자유 자재한 경지를 "그 누가 판단 할 수 있을까?" 앙산의 향상과 향하를 마음대로 전개하는 출입자재한 경지를 "흰 구름 겹겹이 쌓이고, 붉은 해는 높이 솟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구름에 쌓인 앙산의 깨달음의 경지(向上)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붉은 태양이 솟아 오노봉(向下)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오노봉은 팔면이 영롱한 옥과 같이 조금도 흠(티)이 없는 것처럼, 앙산은 철저히 무심의 경지에서 설법하고 있으며, 일체의 범부의 경계를 초월했다는 의미를 "왼쪽으로 돌아봐도 흠이 없고,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벌써 늙어 버렸다"고 읊고 있다. '늙었다'는 말은 범부의 경지를 완전히 뛰어 넘은 의미이다.

또 설두는 오노봉의 산놀이에 대하여 한산시를 인용하여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한산자에 대하여. 너무 일직 길을 떠나, 십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왔던 길마저 잊어버렸다"고 읊고 있다. 앙산의 오노봉 산놀이를 천태산 근처에서 한산과 습득이 무심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는 유희삼매와 대비하고 있다.



[第035則]前三三後三三
〈垂示〉垂示云。定龍蛇分玉石。別緇素決猶豫。若不是頂門上有眼。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只如今見聞不昧。聲色純眞。且道是皂是白。是曲是直。到這裏作麽生辨。
〈本則〉擧。文殊問無著。近離什麽處。無著云。南方。殊云。南方佛法。如何住持。著云。末法比丘。少奉戒律。殊云。多少衆。著云。或三百或五百。無著問文殊。此間如何住持。殊云。凡聖同居龍蛇混雜。著云。多少衆。殊云。前三三後三三。
〈頌〉千峰盤屈色如藍。誰謂文殊是對談。堪笑淸涼多少衆。前三三與後三三。

벽암록 35칙 무착과 오대산의 문수보살

“오대산 대중은 분별심으로 계산할 수 없어”

{벽암록} 제35칙은 무착문희(文喜)와 오대산의 문수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 왔는가?' 무착이 말했다. '남방에서 왔습니다.' 문수가 물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실천(住持)하는가?' 무착이 말했다.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문수가 말했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무착이 말했다. '300명에서 500명 정도입니다.' 무착이 문수에게 질문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불법을 실천(住持) 합니까?' 문수가 말했다.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무착이 질문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문수가 말했다. '앞도 삼삼(三三), 뒤도 삼삼(三三)'이다."

擧. 文殊問無著, 近離什處. 無著云, 南方. 殊云, 南方佛法, 如何住持. 著云, 末法比丘, 少奉戒律. 殊云, 多少衆. 著云, 或三百, 或五百. 無著問文殊, 此間如何住持. 殊云, 凡聖同居, 龍蛇混雜. 著云, 多少衆. 殊云, 前三三後三三.


'三三'은 숫자개념 초월한 무한 수
차별심 없는 문수의 지혜 드러내

본칙에 대한 단편은 {조당집} 11권 보복전 등에 전하고 있지만, 이렇게 정리된 것은 {설두송고} 35칙이 처음인데, {풍혈록(風穴錄)}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무착(無着) 선사는 두 사람이 전한다. 한 사람은 {송고승전} 20권에 '오대산 화엄사 무착'. 우두종 혜충(慧忠) 선사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광청량전(廣淸凉傳)}에도 전한다. 문수보살이 일만(一萬)의 권속과 함께 오대산에 상주한다는 신앙은 {화엄경}이 전래되면서 일어났으며, 중국 화엄종의 형성과 더불어 성행하게 되었고 밀교가 전래되면서 정점에 이른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오대산의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을 친견하려고 순례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감통과 영험을 전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자장법사도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 한 사람은 {송고승전} 12권, {전등록} 12권의 앙산혜적의 법을 이은 항주용천원 문희(文喜. 821~900) 선사이다. {오등회원} 9권에는 화엄사 무착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데 연대적으로는 무리가 있다. '평창'에서는 남방에서 활약한 문희 선사로 보고 있다.

무착이 오대산 화엄사의 금강굴에서 문수의 화신인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균제동자를 불러 무착에게 차를 대접하도록 하였는데, 다구(茶具)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훌륭한 파리(璃)제품이며 다과(茶菓)도 입에 넣자 경쾌함을 느꼈다. 무착이 동자에게 한마디 청하자, 동자는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마음이 깨끗함이 참된 보배요, 더럽히지 않은 그 마음이 청정법신이로다"라고 읊었다.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동자의 모습도 반야사의 금강굴도 자취를 감추었다. 깜짝 놀란 무착은 머리 위에 오색의 구름 가운데 금모(金毛)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동자를 데리고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는 일단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본칙의 공안이 제기된 것인데, 무착은 그 노인이 문수보살의 화신인줄도 모르고 대화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문수가 오대산에 순례 온 무착에게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하니 무착은 정직하게 "남쪽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불법의 근본에서 볼 때 동서와 남북은 없다. 자기 중심의 차별심으로 본 방향이다. 그래서 문수가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실천(住持)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원래 '실천[住持]'은 불법을 깨달아 지니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무착이 "말법(末法)시대에는 비구가 계율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라고 솔직하게 현상을 말했다.

불교에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시기로 나누며 말법은 불법이 쇠퇴된 시기를 말한다. 석존이 입멸하여 500년은 정법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敎法)에 따라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증득하는 정법이 잘 유지되는 시기이다. 다음 1000간년은 상법의 시대로 부처님의 정법을 깨닫는 수행자가 없이 가르침과 수행자만 있고 正法의 흉내만 내는 시기이다. 부처님이 입적한 1500년 이후는 말법의 시대로 불법의 가르침은 있지만 수행자와 깨달음을 증득하는 사람이 없다는 시대구분이다.(참고로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시대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원오는 "무착이 '너무 정직한 사람'이지만 문수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했다"고 비평하고 있다. 문수는 "그러면 계율을 잘 지키는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자, 무착은 "약 300명에서 500명 정도"라고 너무나도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원오는 무착의 대답에 "들여우"로서 "허물을 들어냈다"고 평했다. 순진하기는 하지만 계율에 의존하여 독자적인 선기가 없는 선승의 허물을 들어냈다고 비평한 것이다.

이제는 무착이 문수에게 "여기 오대산에서는 어떻게 불법을 실천(住持)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문수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라고 대승 보살도의 정신을 그대로 대답하고 있다. 오대산은 일만의 보살이 함께 하며 육도에 윤회하는 일체 중생과 정토(淨土)에 동거(同居)하고 있는 입장이다. 즉 무착은 계율을 지키는 남방의 수행자를 300~500명이라는 숫자로 구분하여 제시하였지만, 문수는 불법의 근본에서 범부와 성인, 용과 뱀을 나누지 않고, 남녀(男女)와 선악(善惡)의 차별을 초월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승불교의 정신이 제법의 차별적인 현상을 그대로 본체가 평등한 실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문수의 지혜인 것이다.

무착은 "그러면 오대산의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질문하자, 문수는 "앞(前)도 삼삼(三三), 뒤(後)도 삼삼(三三)"이라고 대답했다. 문수를 본받아 묻는 무착의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범부와 성인의 숫자가 정해진 것인가? 범부와 성인, 용과 뱀의 숫자는 무궁무진인 것이다. 범부도 무량무수요 불보살도 무량무수인데, 오대산의 대중을 숫자로 묻고 있기에 문수는 "앞에도 삼삼(三三), 뒤에도 삼삼(三三)"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무착이 300이나 500이라는 숫자는 잘 알 수 있지만, 문수의 대답은 세상에서는 파악 할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숫자 말이다. 원오는 "천수천안 대비로서도 셈할 수 없다"고 평하고 있다. 너무 많은 숫자이기 때문에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계산 할 수 없다는 말이며, 숫자적인 견해를 초월한 입장이다.

{전등록} 13권 자복화상전에 "옛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사는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아무개입니다" "차나 한잔하게"라고 대답하고 있다. 삼삼(三三)은 보통의 숫자가 아니라 한정된 차별의 숫자개념을 초월한 무한의 숫자를 말한다. 또 {조당집} 12권 용회(龍回)화상전에는 "옛 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서산(西山)에는 해나 뜨고 동산(東山)에는 달이 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고정관념으로 사량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원오는 '평창'에 {오등회원}에서 인용하여 무착과 문수의 대화를 계속 소개하고 있는데, 요컨대 이 공안은 무착 선사가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는 정토를 멀리서 추구하고, 숫자로 불법을 판단하고 있는 미혹한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오대산에 환화(幻化)의 사찰에서 문수보살과 만나 대화를 나눈 한바탕의 연극을 꾸며서, 미혹한 중생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불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천개의 산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그 누가 문수와 대담을 하였다고 하겠는가? 우습다.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앞에도 삼삼(三三)이요, 뒤에도 삼삼(三三)이다" 첫 구절 '천 개의 산봉우리'는 먼저 오대산의 전경이 청정법신의 세계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불법의 본질(진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착과 문수라는 이름도 없는데 누가 문수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방편의 입장에서 볼 때 무착이 환화의 사찰에 머물며 문수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지만, 무착은 노인을 문수로 알지 못했네. 청량(淸凉)은 문수보살의 정토인 오대산을 말하는데, 대중이 얼마냐고 숫자를 묻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불법을 수량으로 파악하려는 분별심을 비웃고 있다. 그래서 문수는 "앞에도 삼삼(三三)이요, 뒤에도 삼삼(三三)"이라고 설두가 다시 읊고 있다.



[第036則]芳草去落花回
〈本則〉擧。長沙。一日遊山。歸至門首。首座問。和尙什麽處去來。沙云。遊山來。首座云。到什麽處來。沙云。始隨芳草去。又逐落花回。座云。大似春意。沙云。也勝秋露滴芙蕖。
〈頌〉大地絶纖埃。何人眼不開。始隨芳草去。又逐落花回。羸鶴翹寒木。狂猿嘯古臺。長沙無限意。咄。

벽암록 36칙 장사 화상의 봄날 산놀이

삼매에 빠진 산놀이…일체 차별경계 초월

{벽암록} 제36칙에는 장사경잠(長沙景岑) 화상이 꽃피는 봄날에 산놀이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장사 화상이 하루는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대문 앞에 이르자, 수좌가 질문했다. '화상은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수좌가 말했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장사 화상이 말했다.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다.' 수좌가 말했다. '아주 봄날 같군요.' 장사 화상이 말했다.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擧. 長沙, 一日遊山, 歸至門首. 首座問. 和尙什處去來. 沙云, 遊山來. 首座云, 到什處來. 沙云, 始隨芳草去, 又逐落花回. 座云, 大似春意. 師云, 也勝秋露滴芙渠.(雪竇著語云, 謝答話)


산천의 풀.꽃과 완전 하나된 경지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눈' 설파

이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 없지만, 장사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17권, {전등록} 10권 등에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장사(長沙)의 녹원사(鹿苑寺) 초현(招賢) 화상은 남전(南泉)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와 자호(紫胡)스님과 동시대 인물이다. 선지의 작용이 민첩하여 상대방이 교학(敎學)으로 질문하면 교학으로 대답하고 게송을 요구하면 게송으로 대답해 주었다. 만일 작가로서 만나고자 하면 작가로서 맞이해 주었다. 앙산혜적 선사는 평소 선지의 작용(機鋒)으로는 제일인자이다. 하루는 장사 화상과 함께 달구경을 하다가 앙산스님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마다 이것(불성)이 있지만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 장사 화상이 말했다. "옳치 그것 좀 빌려 써 봤으면 좋겠다." 앙산이 말했다. "화상이 한번 사용해 보세요." 그러자 장사 화상은 앙산을 한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은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숙께서는 마치 호랑이(大蟲) 같군요." 이후로 사람들이 장사 화상을 잠대충(岑大蟲: 높은 산의 호랑이)이라고 불렀다. 장사는 호남성에 있는 지명으로 가까이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산수(山水)의 경치로 유명한 명승지이며, 전설로 전하는 무릉(武陵) 도원(桃園) 등이 있는 지방이다.

{전등록} 10권에는 장사화상의 독특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가 만일 매양 종교(宗敎)만을 선전한다면 법당 앞에 풀이 한길이나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눈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의 광명이요,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광명속의 것이며, 시방세계가 온통 자기 아닌 것이 없다. 내가 항상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삼세의 부처님들과 법계의 대중들이 모두가 마하반야의 광명이라 하였는데, 광명이 나기 전에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광명이 나기 전에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징조도 없거늘 산하(山河)와 국토(國土)는 어디서 생겼는가."

즉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주관과 객관의 자기와 부처 등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시방의 세계와 자기가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에서 지혜롭게 사는 사문이 되도록 설하고 있는 유명한 법문이다.

본칙의 공안은 장사의 녹원사 주지로 활약한 경잠 화상이 하루(一日) 산놀이(遊山)를 한 것을 안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금일일일(今日一日)"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매일 오늘을 지금 여기 자기의 깨달음의 삶으로 철저하게 살고 있는 선승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운문이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하루를 좋은 날로 보낸 장사화상의 경지를 유산(遊山)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어록에 산놀이를 유산(遊山)과 완산(翫山) 완수(翫水)라는 말로 언급되고 있는데, 세간에서 말하는 유람행각이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일대사(一大事)를 마친 선승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고 본래심 그대로 임운자재하게 인연에 따라서 자적(自適)한 풍류의 모습을 말한다.

장사 화상이 산놀이를 하고 돌아오니 대문 앞에 수좌가 마중을 나왔다. 수좌는 "화상은 오늘 어디를 다녀오십니까?"라고 질문했다. 수좌의 질문은 지극히 일반적인 인사말이지만 장사의 심경을 점검해보려는 선승의 선기(禪機)가 깔려있다. 장사 화상은 "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네"라고 본심그대로 정직하고 산뜻한 대답을 하고 있다. 수좌는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두 번째 점검하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여기서 장사 화상이 수좌의 질문에 휘말려서, 어떠한 목적으로 어디 어디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별경계에 끄달리고 구경하는 세간사람의 유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며, 여기저기에 자취를 남긴 범부의 행적이 된다. 선승은 범부심을 초월한 소요자적한 유산이 되어야 하며,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청정한 지금 여기의 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 화상은 수좌의 점검하는 질문에 편승하지 않고,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그리고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 왔네"라고 했다. 장사 화상은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하는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멋있는 시로서 대답했다. 즉 갈 때는 향기 좋고 싱싱한 풀을 따라서 무아지경이 되어 갔기 때문에 산을 올라갔는지 계곡을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었다. 올 때는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것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을 쫓고 함께 지나다 보니 어느새 절에까지 오게 되었네. 산천의 풀과 자기가 하나가 되고, 꽃과 자기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이다. "시방세계가 온통 사문의 온몸이며 눈"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유희삼매의 경지에서 산놀이를 하고 있다. 수좌는 "아주 봄날의 소풍놀이 같군요"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화상은 산놀이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일침을 은근히 던지고 있다.

장사 화상은 수좌의 심경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역시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라고 시구로 응대하고 있다. 부거(芙)는 연잎(荷葉)의 다른 이름이다. 가을날 차디찬 이슬이 연잎에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 처량한 것으로 조금도 따뜻한 기운이 없다. 이러한 심경을 선에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향상사(向上事)의 일로서 선승의 본분을 의미한다. 장사 화상은 나는 향하문(向下門)의 입장에서 중생과 함께 하는 낙초(落草)의 봄기운이 훨씬 좋다는 의미를 시로 읊고 있다. 오늘 하루 산놀이를 가고 옴에 삼라만상의 차별경계와 함께 하였지만 어디에도 깨달음의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사 화상의 심경이 산뜻하게 들어나고 있다. 수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문답을 보고 설두화상은 수좌가 인사말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대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말을 착어로 하고 있다. 즉 설두는 장사화상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인데, 그의 본의는 장사의 산놀이가 본분사에 계합된 선승의 삶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대지에는 티끌 한점 없는데, 어떤 사람인들 눈을 뜨고 보려하지 않으랴!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네. 야윈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음 하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을 분다. 장사의 무한한 뜻이여! 쯧쯧." 대지는 티끌 한 점 없다는 말은 시방세계와 자기와 하나로서 일체 차별경계를 초월한 장사의 청정한 심경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두 눈을 뜨고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지혜의 눈으로 보면 장사와 같이 본래 청정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오늘 장사의 무심한 산놀이는 어떠했나. 처음은 향기로운 풀을 따라 갔다가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하는 것처럼, 일체의 사량분별도 없이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한 유산삼매였다고 칭찬한 말이다. 장사는 봄날의 산놀이에 푹 빠져있는데, 나라면 이러한 산놀이 소식도 있다고 하면서 야윈 학이 고목에서 앉아 있는 것과 슬픈 울음을 우는 원숭이를 등장시켜서 완전히 다른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장사의 유산(遊山)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아! 아!



[第037則]何處求心
〈垂示〉垂示云。掣電之機徒勞佇思。當空霹靂。掩耳難諧。腦門上播紅旗。耳背後輪雙劍。若不是眼辨手親。爭能搆得。有般底。低頭佇思。意根下卜度。殊不知髑髏前見鬼無數。且道不落意根。不抱得失。忽有箇恁麽擧覺。作麽生祗對。試擧看。
〈本則〉擧。盤山垂語云。三界無法。何處求心。
〈頌〉三界無法。何處求心。白雲爲蓋。流泉作琴。一曲兩曲無人會。雨過夜塘秋水深。

벽암록 37칙 반산화상의 삼계 무법

“마음이 그대로 부처, 부처가 그대로 사람”


{벽암록} 제37칙은 반산보적화상의 삼계(三界) 무법(無法)이라는 상당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삼계(三界)는 무법(無法)인데, 어디에서 마음을 구하랴!

擧. 盤山, 垂語云, 三界無法. 何處求心.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7권, 반산 화상의 유명한 상당법문의 일절인데, {조당집} 제15권에도 똑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은 마조 문하의 뛰어난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보적(寶積) 선사로 독창적인 법문을 설하고 있다. {전등록}과 {조당집}에는 그의 상당법문을 수록하고 있을 뿐, 그의 생애나 전기를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는데, 그의 문하에 미치광이 같은 풍광승(風狂僧)으로 유명한 보화(普化)선사가 배출되었다. 보화는 {임제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선승으로 임제가 북쪽에서 행화(行化)를 펼치도록 도와준 선승이며, 임제를 어린애로 취급하는 등 뛰어난 역량을 갖춘 선승이었다.

여기서 먼저 {조당집}에 전하는 반산 화상의 법문을 들어보자. "선덕 여러분! 비유하면 칼을 휘둘러 허공에 던지면 칼이 (허공에) 미치거나 미치지 못함을 따지지 못한다. 이것은 허공에는 자취(흔적)가 없고 칼날은 손상하지 않는 경지이다. 만일 능히 이와 같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텅 비우면)마음과 마음이 서로 분별이 없어져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사람이다. 사람과 부처가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도(道)를 이룬다(全心卽佛, 全佛卽人, 人佛無異 始爲道矣) … 선덕들이여! 스스로가 잘 살펴보도록 하라! 아무도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삼계(三界)는 무법(無法)이거늘 어디에서 마음을 구하며,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본래 텅 비어 공(空)한데 부처가 어디에 의지하리요. 마음(旋機)이 움직이지 않으니, 고요하여 근원이 없어졌고 마주보면서 곧바로 드러낼 뿐 다시 다른 일은 없다."

원오도 '평창'에 반산 화상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설두는 본칙에 "삼계가 무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하랴!(三界無法 何處求心)"라는 일절을 문제로 제시하고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원래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 주장한 것으로 우주에 이러한 세계가 있다고 믿었지만, 불교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삼계를 도덕적인 표준으로 삼고, 정신상의 수행단계로 보고 있다. 즉 욕계는 음식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수면에 대한 욕망,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치성한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색계의 색(色)은 형체로 육체를 말하며, 육체가 있지만 욕심이 없는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는 형체가 없고 육체가 보이지 않는 신이나 부처님, 천인(天人) 등의 경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말한다. 욕심도 있고, 육체도 있고, 동물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리적인 현상도 있으며, 부처의 자비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산 화상이 말하는 삼계는 단순히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 시방세계인 무한의 우주를 지칭한 것인데, 이러한 삼계는 무법(無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무법(無法)은 공(空)의 의미이다. {대품반야경} 제22권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일체 종지(種智)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法)에 자성이 없으면 이것을 무법(無法)이라고 한다"라고 설하며, 또 "일체의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법(法)은 독자적인 자성(自性)이 없다. 만약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을 무법(無法)"이라고 한다. {열반경} 26권에도 "공(空)은 바로 무법(無法)"이라고 설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한 것이기 때문에 텅 비어 공(空)하다고 하고, 또 무법(無法)이라고 하며, 인연의 화합의 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생(無生)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화엄철학과 유식사상에서는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주장하고 있으며, {능엄경}과 많은 어록에서는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다고 한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인들이 가끔 "법(法)은 없으나 마음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반산화상이 이러한 전도되고 착각하는 중생의 병(禪病)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디서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가?"라고 했다.


진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가 없으며, 현재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모양도 형체도 색깔도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본체는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낸 것이 중생의 삼계(三界)인데, 삼계도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며,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삼라만상도 텅 비어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만약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친견하리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의 일을 지혜롭게 하고 있는 그 당체(當體)가 여래이며 법신(法身)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달마가 혜가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안심시켜 주마!"라고 말하자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不可得)"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는 "내가 그대를 안심시켜 주었다"고 하여, 혜가는 얻을 수가 없는(不可得) 그 마음이 안심(安心)을 체득한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이 "삼계가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가 텅 비어 공(空)한데 어디서 얻을 수가 있겠는가? 구하고 얻을 수도 없는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을 주우려고 하는 것과 같이 착각과 환상에 떨어지게 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진실을 추구하고 불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 법은 없다" "마음 밖에서 불도를 구하는 것은 외도"라고 선승들이 강조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삼계는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으랴!" 설두는 먼저 반산 화상의 설법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이 말은 귓전에 아직 울리고 있네" "또다시 이 말을 거론하고 있는가?"라고 하면서 앵무새처럼 이 말만 언급하지 말고 자신이 잘 점검해 보라고 착어하고 있다. "흰 구름은 일산이요, 흐르는 물소리 비파소리로다"라는 말은 삼계(三界) 무법(無法)인데 마음을 어디서 구하랴! 반산 화상의 법문을 단적으로 읊고 있다. 멀리 청산을 바라보면 흰 구름이 유유히 왕래하고 산 위를 덮은 일산처럼 보인다. 고개를 숙여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면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거문고를 연주하는 음악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백운(白雲)은 무법(無法)의 상태를 과시하지도 않고, 흐르는 물도 무심(無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냥 유유히 왕래하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무법(無法), 무심(無心)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곡조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한 곡조, 두 곡조 아는 사람 없다"라고 읊고 있다. 이 말은 {열자(列子)} '탕문편'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鐘子期)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그 연주를 듣고 이해하였다는 지음(知音)의 고사에 의거하고 있다. 즉 무심하게 흐르는 물소리의 음악을 백아도 연주 할 수가 없고, 종자기도 듣고 이해 할 수가 없는데 어찌 음악도 모르는 사람이 한 곡 두곡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두는 줄이 없는 거문고(無絃琴)의 연주를 어떻게 들었는가? "비 개인 밤 못 가엔 가을 물이 깊다"라고 읊고 있는데, 한 곡 두 곡의 연주를 듣고 잘 파악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즉 비가 많이 온 원인 때문에 연못의 물이 많이 불어났다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으로 법이 생기는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법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한 불법의 진실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추상적인 것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第038則]祖師心印
〈垂示〉垂示云。若論漸也。返常合道。鬧市裏七縱八橫。若論頓也。不留朕跡。千聖亦摸索不著。儻或不立頓漸。又作麽生。快人一言快馬一鞭。正恁麽時。誰是作者。試擧看。
〈本則〉擧。風穴在郢州衙內。上堂云。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去卽印住。住卽印破。只如不去不住。印卽是。不印卽是。時有盧陂長老出問。某甲有鐵牛之機。請師不搭印。穴云。慣釣鯨鯢澄巨浸。卻嗟蛙步輾泥沙。陂佇思。穴喝云。長老何不進語。陂擬議。穴打一拂子。穴云。還記得話頭麽。試擧看。陂擬開口。穴又打一拂子。牧主云。佛法與王法一般。穴云。見箇什麽道理。牧主云。當斷不斷返招其亂。穴便下座。
〈頌〉擒得盧陂跨鐵牛。三玄戈甲未輕酬。楚王城畔朝宗水。喝下曾令卻倒流。

벽암록 38칙 풍혈화상과 조사의 마음

“불법 체득해야 무쇠소의 무심경지 터득”

{벽암록}제38칙은 풍혈화상이 조사의 심인(心印)은 철우(鐵牛)의 기용(機用)과 같다고 설법하고 있다.

擧. 風穴, 在州衙內, 上堂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只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 時有盧陂長老出問, 某甲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穴云, 慣釣鯨澄巨浸, 却嗟蛙步輾泥沙. 陂, 佇思. 穴喝云, 長老何不進語. 陂, 擬議. 穴, 打一拂子, 穴云, 還記得話頭, 試擧看. 陂, 擬開口. 穴, 又打一拂子. 牧主云, 佛法興王法一般. 穴云, 見箇什道理. 牧主云, 當斷不斷, 返招其亂. 穴, 便下座

풍혈화상이 영주(州) 관청(官衙)의 법당에서 설법하였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의 모양이 무쇠소(鐵牛)의 지혜작용(機)과 같다.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찍어두면 도장으로 쓸모가 없다. 도장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지도 못하니,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그 때 노파장로가 대중 가운데서 나와 말했다. '나한테 무쇠소의 지혜작용(機)이 있습니다. 화상은 찍지 마시요!' 풍혈화상이 말했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는 일은 익숙하지만,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에는 흥미 없다.' 노파장로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자, 풍혈화상이 고함치며 말했다. '장로는 왜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가?' 여전히 장로가 머뭇거리자, 풍혈화상은 불자(拂子)를 한번 치고 말했다.

'할 말을 찾고 있는가? 어서 말해봐라!' 노파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풍혈화상은 또다시 한차례 불자로 치니, 지사(牧使)가 말했다. '불법과 왕법이 똑같군요.' 풍혈화상이 말했다. '그대 지사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지사가 말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풍혈화상은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자신과 무쇠소의 지혜작용 차별한
노파장로의 분별심 날카롭게 비판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3권과 {광등록}15권에 전하고 있다.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는 송초(宋初) 임제종을 중흥한 선승으로 남원혜옹(慧)의 법을 이었으며, 그의 어록 1권이 {고존숙어록}에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풍혈화상은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고승이다. 임제선사가 처음 황벽의 문하에 있으면서 소나무를 심자, 황벽선사가 말했다. "깊은 산중에서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 하려고?" 임제선사는 "첫째는 산문의 경지를 만들고, 둘째는 후대 사람들의 표시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풍혈화상이 임제종을 중흥한 선승으로 주목된 것은 {임제록}에 임제가 소나무를 심는 이야기에 위산과 앙산의 대화에서 풍혈화상의 출현을 예언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혈화상이 영주(州) 도지사의 초청으로 관청(官衙)의 법당에서 설법했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무쇠소(鐵牛)의 지혜작용(機)과 같다.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찍어두면 도장으로 쓸모가 없다. 도장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지도 못하니,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당송시대에는 도지사가 고승들을 관청의 법당에 모시고 법문을 청한 사례가 많다. 마조가 홍주(洪州)의 관청안의 법당에서 법문을 하고 거주한 것은 유명하다.

조사의 심인(心印)은 {벽암록}1칙에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온 것은 불심인(佛心印)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심인(佛心印)과 같은 말로 부처와 조사가 이심전심으로 전한 불법의 근본정신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한다. 풍혈화상은 조사심인의 모습을 "무쇠소의 지혜작용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우(鐵牛)는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협주(陜州)에 철우의 사당이 있는데, 소의 머리는 하남(河南)에 있고, 꼬리는 하북(河北)에 있다, 우왕(禹王)은 황하의 재난을 달랬다'라고 하는 것처럼, 옛날 우왕(禹王)이 황하(黃河)의 물을 다스리기 위해 무쇠로 만든 소로서 수호신처럼 제사를 올리는 철우이다. 원오가 '천인 만인이 움직이려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착어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엄청난 작용을 갖고 있으면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무심의 지혜작용으로 비유하고 있다. 즉 불심을 도장에 비유하여 도장을 종이위에 찍어 두면 그 도장은 사용할 수가 없으며, 도장을 종이에서 떼면 인장의 문자가 종이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문자가 종이에 나타나게 되면, 자취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반대로 도장을 종이 위에 놓아두면 도장의 문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도장으로서 쓸모가 없다. 도장 없이 문자를 나타낼 수가 없고, 문자 없는 도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풍혈화상은 이 문제를 학인들에게 제시하면서 "도장을 찍어야 옳은가? 찍지 말아야 옳은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 때 노파장로가 "나도 무쇠소의 지혜작용(機)을 본래부터 구족하고 있는데, 화상은 도장을 찍는 형식으로 인가하지 마시요!" 라고 말했다. 노파장로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노파장로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가 무쇠 소(불심)의 지혜 작용을 구족하고 있다. 문제는 이 무쇠 소의 지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노파장로는 조사의 심인(心印)이라면 나도 불심을 체득한 지혜가 있으니 선사는 나를 인가해 주시오 라고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풍혈화상은 노파장로에게 "나는 바다를 혼탁하게 하는 고래를 잡아서 바닷물을 맑히는 큰일은 숙달되어 있지만, 개구리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짓거리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 큰 고래를 한 마리 잡기 위해 불법의 바다에 낚시(문제)를 던졌는데, 겨우 개구리가 걸렸나' 하면서 안목 없는 노파장로를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노파장로는 자신과 무쇠 소의 지혜작용을 상대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려고 하고 있는 이원적인 분별의식과 차별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풍혈화상이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노파장로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자, 풍혈화상이 고함치며 말했다. "장로는 왜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가?" 여전히 장로가 머뭇거리자, 풍혈화상은 불자(拂子)로 한번 치고 말했다. "무슨 할말을 찾고 있는가? 어서 말해보게나!" 노파장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풍혈화상은 또다시 한차례 불자로 쳤다. 뭐야! 그대가 체득했다는 무쇠 소의 지혜는 어디서 잠자고 있는가? 라고 다구 치는 말이다. 지사(牧使)가 말했다. "불법과 왕법이 똑같군요." 그러자 풍혈화상은 "그대 지사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라고 질문하니 지사가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불러들이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지사가 한 말은 {사기(史記)} 제도혜왕 세가(齊悼惠王 世家) 등에는 도가의 말로 전하는데, {조정사원}2권에는 황석공(黃石公)의 말이라고 하는데, 출세간이나 세간이나 똑같이 일시적인 임시변통으로는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법의 근본정신을 분명히 체득한 지혜가 있어야 언제 어디서나 무쇠 소의 무심한 경지에서 자신이 세운 원력의 일을 지혜롭게 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오는 "옆에 있는 사람이 안목이 있다는 사실" 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지사의 관찰이 훌륭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으며, 또, "동쪽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집안사람이 조문한다."라고 하면서 노파장로의 안목 없는 죽음을 지사가 조문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풍혈화상은 지사의 대답에 일단 만족하며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노파장로를 붙잡아 무쇠 소에 앉혔다"는 말은 대중 가운데 등장한 노파장로를 어떻게 해서라도 무쇠 소에 앉히려고 노력한 풍혈화상의 자비심을 읊고 있다. 그러나 장로는 자신이 이미 무쇠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삼현(三玄)의 창과 갑옷에 가벼이 덤비지 못하리.' 라고 하는 것은 풍혈화상이 임제의 법손이기 때문에, 가문의 보배라고 할 수 있는 임제의 삼현(三玄), 삼요(三要)의 법문을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전쟁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대적 할 상대 없었다. {임제록}에 "일구(一句)의 법문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고, 일현문(一玄門)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설법인데, 임제의 법문을 체득한 풍혈의 지혜와 방편법문의 수단이 너무나 뛰어난 것이기에 감히 도전하는 장수가 없었다고 읊고 있다. '초왕(楚王)의 성으로 모여든 물이 일갈(一喝)의 고함소리에 거꾸로 흐른다.' 풍혈화상이 설법하는 영주(州)의 관청은 옛날 춘추시대 초왕의 도읍지로서 초왕의 성을 둘러싸고 흐르는 물을 조종(朝宗)이라고 한다. 모두 바다로 흘러가는 물이기 때문이다. 풍혈화상의 일갈(一喝)은 이 물을 역류(逆流)시키는 힘이 있다고 그의 종풍을 칭찬하고 있다.



[第039則]金毛獅子
〈垂示〉垂示云。途中受用底。似虎靠山。世諦流布底。如猿在檻。欲知佛性義。當觀時節因緣。欲[火+段]百鍊精金。須是作家爐[糒-米+韋]。且道大用現前底。將什麽試驗。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淸淨法身。門云。花藥欄。僧云。便恁麽去時如何。門云。金毛獅子。
〈頌〉花藥欄。莫顢頇。星在秤兮不在盤。便恁麽太無端。金毛獅子大家看。

벽암록 39칙 운문화상의 황금빛 털의사자

“작약꽃밭 등 삼라만상이 법신의 나툼”


{벽암록} 제39칙은 운문화상의 '작약(芍藥)의 꽃밭', 혹은 '황금빛 털의 사자(金毛獅子)'라고 불리는 공안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떤 것이 청정 법신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작약(芍藥) 꽃밭이다.' 그 스님이 또 질문했다.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淸淨法身. 門云, 花藥欄. 僧云, 便恁去時如何. 門云, 金毛獅子.


운문화상과 꽃밭이 하나된 경지 제시
'황금빛 사자'는 선지가 뛰어난 선승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상권에 전하고 있다. 운문문언(雲門文偃)화상은 {벽암록} 제6칙에서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벽암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선사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청정법신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심신(三身)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의 삼신불(三身佛)을 설하고 있는데, 보신은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이 순간순간 불법의 정신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가 실행되는 것이다. 화신은 보살이 원력과 서원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절인연에 맞추어서 자신의 지혜와 자비행을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법신은 불법의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즉 원력과 서원을 세운 보살은 위대한 보살행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법의 정신에 의거한 많은 지혜와 자비행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능력이 없는 보살은 올바른 불법을 펼치는 지혜와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중생의 심병(心病)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불법의 지혜와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해야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인데, 중생의 심병을 진단하는 안목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한다. {임제록}에서는 "그대가 지금 한 생각의 청정한 지혜광명이 그 자신의 법신불이다"라고 단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선에서는 지금 여기서 자신의 청정한 불심의 영묘한 지혜의 작용를 법신 혹은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법신을 인격적으로 보고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 법신불이라고 하며, 우주에 가득히 편만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불신은 법계에 두루 충만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태양과 달, 별, 산천초목 등 일체의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의 나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강명경}에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사물에 순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모습이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나 여래라고 하면 신과 같이 고정된 모습과 형체가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집착하기 쉽게 때문에 법신불을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허공과 같이 형체나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의 부처이다. 그렇다면 '청정법신불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것인데, 운문화상은 당시 작약꽃이 만발한 꽃밭을 응시하고 있으면서 즉시 "보라! 이와 같이 아름다운 작약(芍藥) 꽃밭을 보았는가?"라고 대답하고 있다. 작약을 심은 밭에 아름다운 작약의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그 모습이 다름 아닌 청정법신의 경지이며, 만법이 현전한 소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대가 작약 꽃이 만발한 꽃밭을 쳐다보며, 자신과 작약 꽃과 하나가 된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지금 여기 그대자신의 지혜작용 이 외에 달리 청정법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북을 치면 울린다'라는 사투리로 착어하고 있는데, 청정법신이라는 북(질문)을 치니 작약꽃밭(소리)이라고 울렸다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은 청정법신의 지혜작용을 하나도 숨김없이 그대로 정직하게 들어낸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원오가 운문화상이 정직하게 대답했다고 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운문화상이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며, 그가 만약 화장실에 있었다면 '마른 똥막대기(乾屎)'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을 내포한 코멘트라고 할 수 있다. {운문광록}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운문화상은 가끔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창에도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현사스님에게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현사는 "썩은 고름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마른 똥막대기'처럼, 부처나 청정법신은 청정하고 깨끗하다는 차별심, 분별심에 집착된 학인의 선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의 대답인 것이다. 깨끗함은 더러운 것에 대한 상대적인 분별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사물은 차별과 분별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 본성은 모두 청정하며 순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과 분별이 없는 청정법신인 것이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작약꽃밭을 쳐다보고 있는 운문과 꽃밭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운문법신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한 스님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바로 청정법신의 경지 아닌 것이 없지요 바로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곧장 질문했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오는 "대추를 한입에 통째로 삼켰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음식의 참맛을 보지 않고 한입에 집어넣은 녀석이라고 하면서 운문의 대답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운문화상은 "황금빛 털의 사자로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사자는 뭇 짐승의 왕으로 불법을 체득한 대장부에 비유하고 있는데, 황금빛의 사자는 사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자를 말한다. 선에서는 불도의 수행이 무르익어서 선지가 뛰어난 선승을 지칭하고 있거나, 뛰어난 제자를 인가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원오는 "칭찬하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하였다"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이 스님의 경지를 인가한 것인가? 아니면 인가하지 않은 것인가? 원오는 "주사위를 던진 한판의 승부에 각자가 모두 이겼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과 운문화상을 똑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작약꽃밭이여! 우물쭈물 하지 말라. 저울의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 이러함이라! 전혀 잡다함이 없다. 황금빛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 설두스님은 먼저 운문이 대답한 '작약 꽃밭'을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원오는 "이 말은 아직 귓전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 전에 들은 말인데,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운문이 말한 '작약 꽃밭'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다.

운문의 진의를 파악하지도 못한 주제에 우물쭈물 하면 아는 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운문이 '작약꽃밭'이라고 대답한 것은 저울의 눈금자를 제시한 것인데, 저울의 받침대를 말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원오는 각자 운문의 언구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회광반조하여 법신의 지혜작용을 체득하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질문한 스님이 "이러한 법신의 경지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이 스님은 "전혀 잡다함이 없다"라고 간결하게 읊고 있다.

즉 질문한 스님은 너무나 잡다함이 없이 순진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진의를 파악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고 원오도 설두의 게송에 동의하고 있다. 천하의 수행자는 특히 이 공안을 참구하여 운문이 '금모사자(金毛獅子)'라고 대답한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참구해 보라고 문제를 던지고 있다.



[第040則]如夢相似
〈垂示〉垂示云。休去歇去。鐵樹開花。有麽有麽。黠兒落節。直饒七縱八橫。不免穿他鼻孔。且道[言+肴]訛在什麽處。試擧看。
〈本則〉擧。陸亙[一/旦]大夫。與南泉語話次。陸云。肇法師道。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一體。也甚奇怪。南泉指庭前花。召大夫云。時人見此一株花。如夢相似。
〈頌〉聞見覺知非一一。山河不在鏡中觀。霜天月落夜將半。誰共澄潭照影寒。

벽암록 40칙 남전화상과 육긍대부

“분별심 갖고 '만물일체' 논하는 건 무의미”


{벽암록}제40칙은 남전화상과 육긍대부(陸亘大夫)와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육긍대부가 남전화상과 대화를 나누면서, 육긍대부가 질문했다. "승조(僧肇)법사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훌륭한 말이군요." 남전화상이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꽃 한 송이의 꽃을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

擧. 陸亘大父, 與南泉語話次, 陸云, 肇法師道,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也甚奇怪. 南泉, 指庭前花, 召大父云, 時人, 見此一株花, 如夢相似.

이공안은 {전등록} 제8권 남전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는데, 남전화상에 대해서는 이미 {벽암록} 제28칙에서 언급하였다. 육긍대부(陸亘:764~834)는 당나라 헌종을 모셨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관리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일찍이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뛰어난 지혜를 체득한 거사로서 {전등록} 제8권에는 남전화상(南泉和尙: 738~834)과 많은 선문답을 남기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육긍대부는 남전화상을 오래 참문하였다. 평소 불법의 대의(理性)에 마음을 두고 깊이 {조론}을 연구하였다. 하루는 앉아 있다가 이 두 구절이 훌륭한 말이기에 제시하여 질문하였다. "승조법사의 말에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했는데, 매우 훌륭한 말이군요." 승조(僧肇: 374~414)법사는 후진(後晉)시대의 고승으로 도생(道生), 도융(道融), 도예(道叡)와 더불어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의 4대 철인(四哲)의 한 사람이다. 어린시절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에 고본(古本) {유마경}을 베껴 쓰다 깨치고, {장자} {노자}에는 참된 진실이 없음을 알고, 여러 경전을 종합하여 네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장자} {노자}에서는 천지란 큰 형체를 갖고, 나의 형체도 또한 그와 같아 모두 허무(虛無) 그 가운데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승조법사가 주장한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듣지 못했는가? 승조법사의 {열반무명론}에서 "훌륭한 사람(至人)은 텅 비어 아무런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신(神)이나, 사람,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성품과 같은 바탕을 지녔다.

본칙에서 육긍대부가 제시한 말은 {조론} '열반무명론'에 나오는 말인데, 원래 {장자} '제물론'에서 '천지는 나와 함께 살아있고, 만물도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이란 말을 승조는 불교사상에서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라는 말로 만들어 새롭게 주장하고 있다. 승조의 {조론}은 삼론종과 천태종, 화엄종 등 중국의 교학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인데, 석두희천은 이 책을 읽고,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라는 말에 크게 깨닫고 {참동계(參同契)}라는 저술을 지었다.

육긍대부는 승조법사의 이 말이 너무나 훌륭하다고 남전화상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묻고 있다. '기괴(奇怪)'라는 말은 본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지만, 원오가 '평창'에 '기특(奇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뛰어난 안목을 갖춘 훌륭한 말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승조법사가 말한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란 불교에서 제시한 일체 만법의 근본은 공(空)이라는 '일체개공(一切皆空)'과 {신심명}에서 '만법(萬法)은 하나(一如)'라고 말하고 있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만법(만물)이 인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차별세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만물의 상대적인 차별경계에 집착된 중생은 자타(自他)와 주객(主客), 천지(天地)의 만물을 상대적인 분별심으로 나누고 비교하여 차별심을 일으키며 업장을 만들고 이에 따른 과보의 고통을 받게 되는 중생이 된다. 그러나 일체 만물(만법)의 본래 모습은 절대 평등한 세계로서, 둘이 아닌 하나(一如, 不二)의 경지인 텅 빈 공(空, 同根)이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장자}의 말에 의거하여 중국적인 표현으로 주장한 것이다.

인간이 병이 났을 때 먹는 한약은 돌가루나 풀과 나무 열매, 뿌리, 씨앗을 비롯해서 동식물의 신체 일부 등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수집하여 조제하고 물을 붓고 불로 달여서 만든 액체를 마시며 인간의 육체적인 본래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고 있다. 병을 회복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매일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동물과 식물, 광물성을 먹고 마시며 인간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나 영양분을 섭취하는 모든 자료가 자연의 일체 만물인 것이다. 만약 일체 만물과 같은 동질성의 뿌리(근거)가 아니라면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나눌 수가 없는 것이며 나의 존재나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자연의 일체 모든 만물과 하나 된 경지에서 자연인 인간의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체 만물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만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인 마음도 절대 평등의 입장이 똑같은 하나의 뿌리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사상이다.

남전화상은 육긍대부의 이러한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냥 정원에 핀 목단 꽃 한 송이를 가리키며 대부의 이름을 부르며, "요즘 사람들은 이 목단 꽃 한 송이를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이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육긍대부의 질문은 매우 기특하기는 하지만, 교학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교학의 이치를 지극한 법칙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또한 달마조사는 서쪽에서 왔겠는가?' 즉 승조법사가 말한 것처럼,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이치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천지 만물과 어떻게 똑같은 뿌리(同根)이며, 어떻게 한 몸(一體)이 되는 것인지,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꿈도 꾸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천지 만물이 모두 제각기 제멋대로이며, 한 뿌리(同根), 한 몸(一體)이 되지 못하고 있고, 일심(一心)은 일심대로 만물은 만물대로 제각기 따로따로 주객의 차별경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승조법사가 좋은 말을 했다고 인용해도 세상 사람들은 한 송이 목단 꽃을 보는 것과 같이, 꿈을 꾸면서 잠꼬대를 하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제법의 참된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꽃을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경계로 나누어 보고 있으며, 꽃과 자기가 하나 된 만법 일여(一如)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수행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듣고, 보고, 자각하여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다'라는 말은 '천지동근 만물일여(天地同根 萬物一體)'를 반대 측면에서 읊은 말인데, 일체 만물을 보고 듣고 자각하는 마음(주체)과 객체인 만물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唯識)에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인식하는 그 가운데 천지 만물과 하나 된 경지인 것이다. '산하(山河)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천지 만물은 각자의 마음 거울(心鏡)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이 일체 만물이 그대로 무심의 거울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달이 지고 깊은 한밤중에 만물과 하나 된 적정의 세계(一如平等)에서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심의 경지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누구와 함께 이러한 깨달음의 풍광(風光)을 나누랴! 천지가 한 뿌리며, 만물이 일체라는 이치나 주장을 논의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8 

 

벽암록(3) 21칙 ~ 30칙

벽암록 21칙 지문화상과 연꽃 “연꽃과 연잎은 不二…불심과 중생심도 하나” {벽암록} 제21칙에는 지문(智門) 화상에게 연꽃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 화상

kr.buddhism.org

 

[第021則]蓮花荷葉
〈垂示〉垂示云。建法幢立宗旨。錦上鋪花。脫籠頭卸角馱。太平時節或若辨得格外句。擧一明三。其或未然。依舊伏聽處分。
〈本則〉擧。僧問智門。蓮花未出水時如何。智門云。蓮花。僧云。出水後如何。門云。荷葉。
〈頌〉蓮花荷葉報君知。出水何如未出時。江北江南問王老。一狐疑了一狐疑。

벽암록 21칙 지문화상과 연꽃

“연꽃과 연잎은 不二…불심과 중생심도 하나”

{벽암록} 제21칙에는 지문(智門) 화상에게 연꽃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입니까?" 지문 화상이 대답했다. "연꽃이다" "연꽃이 물 밖으로 꽃이 피어 나왔을 때는 무엇입니까?" "연잎(荷葉)이다"

擧. 僧問智問, 蓮華未出水時如何. 智問云, 蓮華. 僧云, 出水後如何. 門云, 荷葉.


망념을 비우면 그것이 곧 보리(菩提)
대승불교와 선사상은 '일치'

송대의 선승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에 대해서는 {연등회요} 제27권, {오등회원} 15권 등에 약간의 법문을 수록하고 있다. {지문광조선사어록}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지문화상은 운문 선사의 제자인 향림징원(香林澄遠) 선사를 멀리 사천 익주까지 찾아가 참문하여 운문종의 정법을 계승하고, 호북성 수주의 지문사에 수행자를 지도하였으며, 그의 문하에 {벽암록}의 '송고(頌古)'를 지은 설두화상을 비롯하여 30여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다. 아마 연못가에서 연꽃을 쳐다보며 나눈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제시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차사문의(借事問義)라고 한다. 연꽃이라는 사물을 차용하여 불법의 근본(본래면목)을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연꽃에 의미를 두고 이 선문답을 이해하려고 하면 연꽃이라는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기 이전(未出水)'은 즉 진실된 자기의 본래면목을 자각하지 못한 순수한 범부의 경지는 어떠한가? 우리들은 진실의 자기 본래면목을 자각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한가?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성은 어디서나 있는 것이다. {열반경}은 "불성은 본래 있었고, 지금도 있다(本有今有)"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원오도 '평창'에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은 어떻습니까? 우두법융선사가 사조도신을 뵙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반석(斑石)에 혼돈이 나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차별심(중생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성을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문답에서 자주 제기하는 '부(父)'나 '모(母)'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父母未生以前]의 소식을 질문하고 있다. 천(天)과 지(地)라는 차별적인 분별의식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자기의 불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연꽃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밖으로 들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불성을 직접 보고 확인 할 수가 없다. 이때 만약 방편의 언구를 사용하면 이미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만다. 이 질문은 근원적인 불성의 본체에 대한 지문화상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문 화상은 "연꽃(蓮華)"이라고 대답했다. 질문한 스님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불성의 실재를 질문했는데, 지문화상은 연꽃이라는 사물의 현상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온 이후(出水)는 무엇입니까? 앞의 질문과 반대로 현상의 입장에서 추궁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연꽃이 물속에 있을 때와 물 밖에 나왔을 때, 즉 '미출수(未出水)와 출수(出水)' 양변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상에 집착되어 있는 질문이다.

불성을 깨닫기 이전의 본래면목과 깨닫고 난 이후는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차별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이 스님의 질문이 미오(迷悟)의 차별심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귀신의 소굴에서 지혜작용이 없는 살림살이 하지 말라!"고 주의 주고 있다.

이 스님은 아마도 당(唐)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 제2권에서 연꽃이 물 속에서 꽃피지 않았을 때와 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두 가지 이름이 따로 따로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지문 화상은 "연잎(荷葉)"이라고 대답했다.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들어 나지 않았을 때도 연잎은 항상 물 밖에 드러내고 있다. 연꽃과 연잎은 같은 것인가? 지문 화상이 "연잎"이라는 대답에 대하여 원오는 "유주(幽州)지방은 그래도 괜찮은데 가장 힘든 곳은 강남(江南)"이라고 착어(着語, 선에서 비평하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북송말 흠종(欽宗)시대에 정강(靖康)의 사변으로 잘 알려진 고사를 말한다. 즉 송대의 조정이 오랑캐의 침략으로 북쪽의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지방을 빼앗기고 남쪽의 강남(江南)으로 도망 왔지만, 계속된 오랑캐(금나라)의 약탈과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옛날 유주의 굴욕은 그래도 견딜 만 한 일이었는데, 뒤에 강남의 굴욕은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당시의 소문을 인용하여 착어한 것이다.

즉 스님의 첫 번째 질문에 지문 화상이 "연꽃"이라고 대답한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두 번째 질문에 "연잎"이라고 대답한 말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수행자는 특별히 주의하여 정신차려 참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물속의 연꽃이 근원적인 불성을 의미하는 대답이라면, 물 밖의 연잎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이 아닌 것처럼, 불심과 중생심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연꽃과 연잎을 둘로 보는 차별심에 떨어져 있다. 즉 중생심과 불심, 생사와 열반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지문화상은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열반경}의 사상을 체득한 입장에서 질문자가 교학에서 주장하는 연꽃의 두 가지 이름과 출수(出水)와 미출수(未出水)의 두 견해(二見)의 차별을 벗어나 일체중생의 불성이 본체(연꽃)와 현상(연잎)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서 불성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유마경}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보리)'이며 '생사심(生死心)이 그대로 열반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정신을 잘 새겨 체득해야 한다. 중생의 번뇌를 텅 비우면 번뇌가 없어진 그대로가 깨달음의 불심이며, 중생의 생사 망념을 텅 비우면 그대로 열반적정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법문을 설하고 있다.

{신회어록}에도 불심과 중생심을 질문하는 사람에게 "중생심(衆生心)이 불심(佛心)이며, 불심이 중생심"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불심과 중생심을 둘이라고 보고 나누는 것이 차별심이며 중생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로 보는 것은 현상의 사물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불심과 중생심은 다른 것이 아니며(不異), 연꽃과 연잎은 둘이 아닌 것(不二)이라는 사실을 체득해야 한다.

설두는 이 공안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지문화상이 연꽃과 연잎으로 질문한 스님에게 잘 가르쳐 주었네" 즉 지문 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연꽃과 연잎, 자기와 남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 만법과 하나 된 불법의 본체 묘용을 잘 제시한 법문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원오도 "지문 화상은 노파심이 간절했다"고 착어(着語)하고 있다. 그리고 "(연꽃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라는 분별심에 사로잡힌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원오는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라고 착어함으로써,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잘 사유하고 음미해서 참구해야 한다고 주의하고 있다.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王老)에게 묻고 물어,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하는군'이라는 말은 지문 화상이 친절하게 분별심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질문자가 잘 사유하여 체득하지 못하고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이렇쿵 저렇쿵 사량 분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많은 의심과 분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되고 만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第022則]南山鼈鼻蛇
〈垂示〉垂示云。大方無外細若鄰虛。擒縱非他。卷舒在我。必欲解粘去縛。直須削跡呑聲。人人坐斷要津。箇箇壁立千仞。且道是什麽人境界。試擧看。
〈本則〉擧。雪峰示衆云。南山有一條鱉鼻蛇。汝等諸人。切須好看。長慶云。今日堂中。大有人喪身失命。僧擧似玄沙。玄沙云。須是稜兄始得。雖然如此。我卽不恁麽。僧云。和尙作麽生。玄沙云。用南山作什麽。雲門以拄杖。攛向雪峰面前。作怕勢。
〈頌〉象骨巖高人不到。到者須是弄蛇手。稜師備師不柰何。喪身失命有多少。韶陽知。重撥草。南北東西無處討。忽然突出拄杖頭。抛對雪峰大張口。大張口兮同閃電。剔起眉毛還不見。如今藏在乳峰前。來者一一看方便。師高聲喝云。看脚下。

벽암록 22칙 설봉화상과 독사 이야기

“진리는 남산에만 있지 않고 천지에 가득”


{벽암록} 제22칙은 설봉 화상이 맹독의 독사를 제기하여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설봉 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남산에 맹독을 가진 독사(鼈鼻蛇)가 한 마리 있다. 그대들은 조심하도록 하라" 장경혜능이 말했다. "오늘 이 법당 안에 큰 사람이 있는데, 몸이 상하고 목숨을 잃었다." 어떤 스님이 이 말을 현사스님에게 전달하자, 현사는 말했다. "혜능 사형이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그러면 스님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현사스님이 말했다. "남산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운문스님은 스승인 설봉화상 앞에 주장자를 던지면서 놀라는 시늉을 했다.

[본칙] 擧. 雪峰示衆云, 南山有一條鼈鼻蛇, 汝等諸人, 切須好着. 長慶云, 今日堂中, 大有人喪身失命. 僧擧似玄沙. 玄沙云, 須是稜兄始得. 雖然如是, 我卽不恁. 僧云, 和尙作生. 玄沙云, 用南山作什. 雲門以杖, 向雪峰面前, 作勢.


발밑 살펴보면 그곳이 자성의 자리
바보는 진여(眞如) 구족하고도 못 깨달아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7권 설봉화상전과 {전등록} 18권 장경화상전, {현사광록} 등에도 전하고 있다. 또 {굉지송고} 24칙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설봉 화상의 법문에 대하여 그의 문하에 뛰어난 제자 장경혜능(長慶慧稜)과 현사사비(玄沙師備), 운문문언(雲門文偃) 착어(코멘트)로 이루어진 공안이다.

설봉(882~908) 화상에 대해서는 {벽암록} 제5칙에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언제나 공양주의 소임으로 대중을 봉양하는 수행자였다. 세 차례나 투자산에 올라 대동 선사를 참문하고, 아홉 차례나 동산양개 화상을 찾아가 법문을 청하는 진정한 구도자였다. 뒤에 덕산 선감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이다. 특히 동문인 흠산과 암두 화상과 함께 행각 수행하다 암두의 교시로 오산(鰲山)에서 불도를 이룬 이야기는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뒤에 설봉산에서 1500명의 수행자들을 지도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다.

설봉 화상이 대중에게 "남산에 맹독의 독사가 한 마리 있으니 그대들은 조심하라!"는 법문을 하였다. 설봉이 말한 별비사(鼈鼻蛇)는 맹독을 가진 코브라 뱀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독사는 한번 물리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특별히 주의주고 있다. 설봉이 제시한 독사는 수행자 각자의 불성(본래면목)으로 학인들이 자각하여 생사대사를 깨닫도록 지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독사이야기는 귀종지상과 대수화상의 법문에도 언급되고 있으며, {종용록} 59칙에 동산은 죽은 뱀을 법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어록에는 개(狗子)나 호랑이(大蟲), 뱀, 지렁이 등 많은 동물이 등장하고 있지만 모두 수행자의 진여자성(본래면목)을 지칭한 것이다.

만약에 설봉이 제시한 남산의 독사를 살아있는 독사로 생각한다면 남산과 독사라는 모양과 경계에 떨어져 헤매고 있는 중생이 된다. 선문답에서 제시한 어떤 사물이라도 사물의 모양과 형체를 의식하고 경계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놈은 밖을 향해서 불법을 구하려는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밖으로 향해서 경계를 쫓는 자기의 마음을 안으로 되돌이켜 근원적인 본래심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무 기둥이나 동물 등 여러 가지 사물을 제시하여 법문을 한다. 이러한 법문을 사물을 가리켜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하는 '지사문의(指事問義)'의 법문이라고 한다. 일체의 만법과 자기는 본래 하나(萬法一如)이며 만물과 자기는 일체(萬物一體)의 근본에서 불법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만약 내가 일체의 만법을 차별과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나라는 주관과 아상(我相) 인상(人相)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을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영원히 중생심으로 업장을 만들며 삼계에 윤회하며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집착(我相)과 상대적인 경계에 차별이 없고 일체의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절대 본래심의 입장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존재나 차별심이 없는 깨달음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봉 화상은 수행자들에게 남산의 독사라는 사물(경계)에 떨어진 사람은 선문답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번뇌 망념에 떨어져 자신의 본래면목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상대적인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순간순간 자신의 불성을 자각(念念自覺)하라는 법문이다.

설봉 화상이 제시한 독사의 법문에 그의 문하 제자들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먼저 장경이 "오늘 이 법당 안에 큰 사람이 있는데, 몸이 상하고 목숨을 잃었다." 설봉의 법당에 독사의 맹독으로 완전히 죽은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유인(大有人)'이라는 말을 '많은 대중'으로 이해하고 법당 안에 많은 대중이 독사에 물려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다고 번역하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많고적음[多少]의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一人)이 크게 목숨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선어록에서 말하는 일인(一人)은 본래인(本來人),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여기서는 설봉을 지칭하고 있다. 또한 장경을 비롯하여 모든 수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한다. 목숨을 잃었다(喪身失命)는 말은 크게 한번 죽었다(大死一番)는 말과 같이 자신의 자아의식(아상)과 상대적인 의식(인상) 등 일체의 번뇌 망념을 죽인 살인도(殺人刀)의 입장을 말한다.

원오는 장경의 말에 "보주인(普州人)이 도적을 전송하다"라고 착어했다. 보주는 도적이 많기 때문에 보주인은 도적놈이라는 말인데, 도적이 도적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설봉의 법문을 곧바로 깨달은 장경의 안목을 칭찬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현사에게 이 법문을 전달하자 현사는 "장경사형 정도의 안목을 갖춘 선승이 되어야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역시 장경의 안목은 대단해!"라고 평가하고 있다. 원오는 "같은 구덩이에 다른 흙이 없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는 장경과 현사는 설봉의 제자니까 집안의 가풍은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사는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남산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즉 설봉 화상은 남산에 독사가 있다고 했지만, 그 독사는 시방세계에 함께하고 우주에 맹독이 꽉 차 있는데, 남산이라는 한 장소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미이다. 현사는 '모든 시방세계가 그대로 사문의 밝은 구슬(明珠)', 혹은 '모든 시방세계가 모두 본래인의 진실한 몸(법신)'이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선승인 것처럼, 불법의 안목이 뛰어난 선승이다. 장경과 비교해 볼 때 현사의 스케일이 훨씬 크고 뛰어난 점을 볼 수 있다.

원오는 "목숨을 잃은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군!"이라고 착어 했다. 현사는 제법 스케일이 큰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남산의 독사를 삼키고도 목숨을 잃은 줄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남산의 독사인 진여법신 여래의 손아귀 속에 살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오공이 여래의 손바닥위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서유기}의 이야기와 같이 만법과 하나 된 무심의 경지에 살고 있는 현사를 칭찬하고 있다.

마지막에 운문은 "주장자를 스승인 설봉의 면전에 내 던지며, '야, 독사다!'라고 말하고 두려워한 표정을 지었다." 주장자는 수행자의 필수 도구로 본래면목을 상징한다. 즉 본래면목의 지혜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조금도 숨김없이 전부 드러내 보인 것인데, 독사가 나오면 갑자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본래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운문을 원오는 "운문이 설봉의 첫째 제자"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다른 형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칭찬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설봉산 상골암은 높고 높아 오르는 이 없는데, 오르는 자라면 모두 독사를 마음대로 취급하는 명인이라야 한다. 장경과 현사도 그 독사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목숨을 잃고 불법을 체득한 자 몇이나 될까? 운문은 독사를 잘 알고 있어 주장자로 풀 속에서 찾아냈다. 그 독사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없으니 밖에서 찾으면 볼 수없다. 운문의 지혜작용은 독사가 입을 벌리는 것이 전깃불과 같이 빠르니, 사람들의 정식으로 볼 수가 없네." 끝으로 설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밑을 살펴라!"고 주의하고 있다.



[第023則]髑髏遍野
〈垂示〉垂示云。玉將火試。金將石試。劍將毛試。水將杖試。至於衲僧門下。一言一句。一機一境。一出一入。一挨一拶。要見深淺。要見向背。且道將什麽。試請擧看。
〈本則〉擧。保福長慶遊山次。福以手指云。只這裏便是妙峰頂。慶云。是則是。可惜許。後擧似鏡淸。淸云。若不是孫公。便見髑髏遍野。
〈頌〉妙峰孤頂草離離。拈得分明付與誰。不是孫公辨端的。髑髏著地幾人知。

벽암록 23칙 보복화상과 산봉우리

“깨달음 경지 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

{벽암록} 제23칙에는 설봉 문하의 보복과 장경화상이 산에서 노닐며 나눈 대화에 경청과 설두가 착어(着語)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보복 화상과 장경 화상이 산에서 노닐 때, 보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경전에서 말하는 묘봉정(妙峰頂)이다.' 장경이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애석하군!'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오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산 놀이해서 무엇하겠는가?' 또 말했다. '백 천년 뒤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물 것이다.' (보복, 장경 두 사람은) 뒤에 경청에게 이 이야기를 제시하니, 경청 화상은 말했다. '손공(孫公: 장경)이 아니었더라면 온 들에 해골이 가득 널려 있었을 것이다.'"

[본칙] 擧. 保福長慶遊山次, 福以手指云, 只這裏便是妙峰頂. 慶云, 是則是, 可惜許.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 圖箇什. 復云, 百千年後, 不道無, 只是少. 後, 擧似鏡淸. 淸云, 若不是孫公, 便見遍野.


묘봉정은 깨달음 세계를 가리켜
일체중생과 함께 보살행 닦아야


이 공안은 {전등록}18권 장경전에 수록하고 있는 것인데, {조당집} 10권에도 보인다.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의 전기는 {조당집} 11권, {전등록} 19권에 수록돼 있다.

원오는 '평창(評唱)'에, "보복과 장경, 경청은 모두 설봉의 제자이다. 세 사람은 똑같이 불도를 체득했고, 똑같이 불법을 깨달았으며, 똑같은 안목으로 진실을 보고, 똑같이 본래면목을 드러내고 지혜작용을 펼쳤으며, 한결같이 출입을 함께 하며, 서로서로 날카롭게 질문하며 탁마(琢磨)하였다. 그들은 동시대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시하면 곧바로 근본을 알았다. 설봉의 문하에 평상시 선문답을 한 사람은 이 세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설봉의 문하에는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비롯하여 운문문언, 현사사비, 남악유경(南岳惟勁) 등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보복과 장경이 산에 노닐(遊山)면서 보복이 손가락으로 눈앞을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묘봉산의 정상'이라고 혼잣말로 말했다. 산놀이(遊山)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선승들이 여러 곳을 다니며 산수(山水)를 바라보고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조당집} 제6권 동산장에 약산과 운암의 산놀이와 {벽암록} 36칙에는 장사(長沙)의 하루 유산(遊山)을 싣고 있다.

보복이 말한 묘봉산(妙峰山)은 수미산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권유로 구도심을 일으켜 최초로 방문하는 산인데, 덕운비구가 거주하고 있다. 선재는 덕운비구를 친견하기 위해 7일간 찾은 뒤에 산의 정상에서 조용히 경행하는 덕운비구의 모습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동산록}에도 동산양개 화상이 묘봉산을 소재로 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원오는 어느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묘봉고정(妙峰孤頂)에 대해 질문한 선문답을 평창에 인용하고 있다. 묘봉산은 깨달음의 세계, 일미평등(一味平等)의 절대세계로서 진실의 완전한 경지를 산에다 비유한 것이다.

{전등록} 10권에 장사경잠이 "백 척의 긴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한 '백척간두(百尺竿頭)'도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같은 의미이며, {임제록}에도 깨달음의 경지(向上門)를 고봉정상(孤峰頂上)으로 중생교화의 보살도(向下門)를 십자가두(十字街頭)로 표현하여 설법하고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현상의 차별세계가 모두 깨달음의 경지인 묘봉정상에 귀결되고, 이 정상에서 다시 만법의 차별세계가 펼쳐진다. 불법 진실의 대의를 완전히 체득하면 깨달음의 세계인 묘봉산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묘봉산을 멀리서 찾아 헤매고 있다. 그래서 보복은 장경이 이 묘봉산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시험하고 있다. 원오가 '수시(垂示, 선에서 고승이 가르침을 내리는 것)'에 "옥(玉)은 불로서 시험하고, 금(金)은 돌로서 시험하고 칼은 터럭으로 시험하고 물은 지팡이로 시험한다"는 마찬가지로, 보복은 묘봉산으로 장경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보복이 제기한 말을 들은 장경은 "그렇지. 묘봉산이 깨달음의 경지이긴 하지만, 애석하다(可惜許)"라고 보복에게 한방 먹이고 있다. 장경의 '애석하다'는 말의 의미는 원래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정상(頂上)은 이름도 없고, 뭐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묘봉정(妙峰頂)'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은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는 것이 좋다고 질책한 말이다. 이 한마디에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원오도 장경의 말에 "보통 사람 같으면 보복의 질문에 혹란되어 묘봉산에서 죽은 인간이 되겠지만, 역시 장경은 지혜의 안목으로 보복의 속을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애석하다'라는 말을 했다"는 의미로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오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산놀이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보복과 장경이 산놀이한다면 산놀이답게, 철저하게 유산(遊山)의 유희삼매에 몰입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산놀이하면서 {화엄경}의 묘봉산 이야기를 제기하여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고, 이러쿵 저러쿵 논의 한다면 산놀이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감들하고 산놀이 한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원오도 이러한 설두의 착어에 "보복과 장경의 몸값이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설두는 또 "백년 천년 뒤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물 것"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백년 뒤나 천년 뒤에도 보복과 장경과 같은 선지식이 출현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안목을 갖춘 선승은 지극히 드물 것이라는 의미이다. 앞의 착어는 비판한 것이지만, 뒤의 착어는 지극히 높이 칭찬한 것이다.

보복과 장경은 뒤에 산놀이에서 돌아와 경청(鏡淸)에게 이 이야기를 제시하니, 경청은 "손공(孫公; 장경)이 아니었더라면 온 들에 해골이 가득 널려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보복이 '여기가 묘봉산'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장경이 '애석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참선수행자가 모두 깨달음의 경지(묘봉정상)에 안주하고 정체되어 지혜의 작용이 죽은 수행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법수행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한 뒤에는 깨달음의 세계인 묘봉산에서 내려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를 실행하지 않으면 모두 묘봉산의 정상에서 죽은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죽은 시체의 해골이 천지에 늘려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경청이 '해골(骸骨)이 들에 널려 있다'고 말한 것은 해골을 제기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본래면목의 지혜작용(본지풍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인데,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그 곳엔 아무 것도 없고, 텅빈 허공만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정상을 오른 목적은 무엇인가? 사실 등산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상의 집(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산의 정상에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을 실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인내와 체험의 지혜(능력)를 자신의 집에서 일체중생과 함께 보살도의 삶으로 회향하며 사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것을 깨달음의 경지를 초월해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법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고 있다. "보복이 묘봉정이라고 절대의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 것은 벌써 차별세계에 떨어진 말이다. 보복이 묘봉정을 들고 나온 것은 장경이 절대 평등의 깨달음의 경지를 분명히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인데, 장경은 '애석하다'"고 말했다. 설두는 "쓸데도 없는 묘봉정을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가?"라고 보복을 다그치고 있다. 보복과 장경의 선문답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손공(장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해골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대는?



[第024則]放身臥
〈垂示〉垂示云。高高峰頂立。魔外莫能知。深深海底行。佛眼覰不見。直饒眼似流星。機如掣電。未免靈龜曳尾。到這裏合作麽生。試擧看。
〈本則〉擧。劉鐵磨到潙山。山云。老牸牛汝來也。磨云。來日臺山大會齋。和尙還去麽。潙山放身臥。磨便出去。
〈頌〉曾騎鐵馬入重城。敕下傳聞六國淸。猶握金鞭問歸客。夜深誰共御街行。

벽암록 24칙 유철마가 위산을 참문하다

“절대 깨달음의 세계는 무사(無事)무심(無心)의 경지”

{벽암록} 제24칙은 유철마(劉鐵磨)라는 비구니가 위산영우 선사를 참문하는 일단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유철마가 위산에 이르자, 위산 화상이 그 비구니에게 말했다. '이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 유철마가 말했다. '내일 오대산에서 큰 대중공양(齋)이 있답니다. 스님! 가시겠습니까?' 위산 화상이 자리에 옆으로 누웠다. 철마는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擧. 劉鐵磨, 到산. 山云, 老牛汝來也.
磨云, 來日臺山大會齋. 和尙還去. 山, 放身臥. 磨, 便出去.

이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연등회요} 제7권 위산영우전에 설두의 게송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며, {선문염송집} 제10권에도 전하고 있다. 위산 화상은 {벽암록} 제4칙에서 언급한 것처럼, 백장의 법을 계승하여 호남성 장사(長沙)에 있는 위산 동경사에서 선법 펼친 당대의 명승 영우(靈祐: 771~853) 선사이며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최초로 개성있는 선법을 펼친 위앙종의 조사이다. 원오는 '평창(評唱)'에 위산과 유철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위산스님은 노승이 죽은 뒤에 산 아래 신도집의 암소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 다섯 글자, '산승모갑(山僧某甲, 산승 아무개)'이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 때 위산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암소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물어도 확실히 대답하지 못한다. 유철마는 오랫동안 참구하여 기봉이 높고 준엄하였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유철마라고 불렀다. 그는 위산에서 10 리 떨어진 곳에 암자를 세웠다."

유철마는 위산과 앙산을 참문하여 대오(大悟)한 비구니로서 성이 유씨, 철마(鐵磨)는 별명으로 쇠로 만든 절구통이라는 의미이다. 즉 유철마의 선기가 뛰어나 닥치는 대로 모두 절구통에 집어넣고 부수는 선풍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걸출한 비구니이다. 유철마에 대해서는 {벽암록} 17칙, 설두의 게송에 언급되었고, {전등록} 17권에는 자호(子湖) 선사와의 선문답도 전하고 있다. 유철마가 어느 날 위산영우 화상을 찾아뵙고 인사 올리자, 위산이 '늙은 암소(老牛), 그대 왔는가'라고 친밀감이 넘치는 말로 맞이하고 있다. 자우(牛)는 새끼를 기르는 어미 소(암컷)라는 의미이다. 위산이 철마를 '늙은 암소'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산은 평생 자기 자신을 '수고우(水牛)'라고 부르고, 죽은 뒤에 천당에나 극락에도 가지 않고 산 아래 신도집의 소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유철마도 자기와 똑같은 무리(同類)로서 친밀감을 가지고 '늙은 암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위산이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라는 말에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서 주장하는 말로, 장대 끝에 깃털을 묶어서 고기를 몰고 다니는 도구와 풀 더미를 물 속에 넣어두어 고기들이 모여들도록 하는 고기 잡는 수단이다. 즉 위산 화상은 유철마의 안목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한마디라는 의미이다.

그러자 유철마는 곧장 위산 화상에게 “내일 오대산에 큰 대중공양(齋)이 있는데, 스님! 가시겠습니까?”라고 여쭙고 있다. 오대산은 중국의 북쪽 산서성(山西省)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화엄경} '보살주처품'의 설법에 의거하여 옛날부터 일만의 보살과 함께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지로 신앙화 된 곳이다. 많은 불교인들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순례하는 영험의 도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대법보기}와 {임제록}에는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고 하면서 마음 밖을 향해 오대산을 찾아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는 수행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대중공양(大齋會)은 보살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종의 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 할 수 있다. 유철마가 오대산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임제록}에 보화 화상이 요령을 흔들며, 밝은 것이나 어두운 것이나 일체의 모든 것을 쳐 날린다는 말을 하고 다니자, 임제가 시자를 시켜서, "아무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라고 묻자, 보화는 "내일 대비원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대답한 것을 연상케 한다. 즉 일체의 명암(明暗)과 차별경계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떨쳐버리는 초월적인 경지를 행동과 말로 표현하고 있다. 보화가 "내일 대비원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한 것은 '그대도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사는 보살이라면 대비원에 와서 공양이나 하라'는 의미이다. 번뇌 망념을 초월한 성자 아라한(應供)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철마 비구니를 맞이한 위산화상
동류의식 가지고 친밀함 나타내

그런데 호남에 있는 위산과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는 오대산과의 거리는 수만리나 되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이다. 당시 걸어서 간다면 몇 달이 걸리는데, 내일 오대산의 대중공양에 참석 할 수가 있을까? {벽암록종전초}에는 "사바세계를 두루하여 자취가 없는 자는 멀고 가까이(遠近)를 문제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는 절대 깨달음의 경지는 멀고 가까이, 높고 낮은, 깊고 얕음을 문제로 삼지는 않는 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산 화상은 '몸을 옆으로 누워 버렸다.' 위산은 자신의 본래면목인 물소(水牛)의 모습으로 벌렁 누웠다. 배도 부른데 대중공양을 하기 위해 밖으로 멀리 오대산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은 여기서 나는 좀 누워서 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위산 화상은 오대산이고 대중공양이고, 선이나 깨달음도 지금 나에게는 관심 없는 일이야. 나는 지금 누워서 쉬는 내 할 일이 있네! 라고 하면서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무사무심(無事無心)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원오는 위산이 벌렁 누어버린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쿵저러쿵 사량분별로 위산의 경계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러한 위산 화상의 모습을 보고, 유철마는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유철마도 위산을 참문한 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곳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 아무런 사량분별도 없이 위산은 위산, 철마는 철마, 각자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유철마는 철마(鐵馬)를 타고 겹겹이 쌓인 성을 쳐들어갔으나, 여섯 나라가 이미 평정되었다는 칙명을 전해 듣게 되었네. 그래도 쇠 채찍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손에게 묻지만, 깊은 밤 누구와 함께 대궐의 뜰 앞을 거닐까."

원오는 '평창'에 "총림에서 설두스님의 이 게송을 최고로 여기고 있다. 송고(頌古) 100칙 가운데 이 게송이 논리가 가장 잘 갖추어졌고 특히 지극히 오묘하며 본질을 명확하게 읊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 철마(鐵馬)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몇 겹의 성을 넘어 천자가 있는 곳까지 뛰어 들은 여장군의 모습을 읊고 있는데, 유철마가 위산 화상을 참문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에 들어가 황제의 칙명을 받아보니 벌써 여섯 나라는 평정되었다고 하네. 여기서 말하는 여섯 나라(六國)는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에 반항한 한(韓), 위(魏), 연(燕), 제(齊), 초(楚) 나라를 말하는데, 지금은 천하태평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적(六賊: 六識)을 말한 것이다. 유철마가 위산 화상을 참문하자, 위산은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라고 한 말에 원오는 "개가 칙서를 물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후한서}에 나오는 고사인데, 변방의 장군 유철마가 기세당당하게 여섯 나라(六國: 六賊)을 쳐부수기 위해 황제(위산)를 친견했지만 위산의 한 마디(칙서)에 천하태평으로 장군으로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유철마는 모처럼 전투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그 냥 돌아 갈 수가 없어, '내일 오대산에 공양이 있다'고 말하며 채찍을 한번 쥐고 휘둘렀다. '천하태평이라고 칙명을 내렸는데 이 무슨 소리냐?'하고 위산은 누어 버리고 철마는 나가 버린 행위를 설두는 '천하태평한 고요한 밤에 누구와 함께 궁궐의 뜰을 산책할까?'라고 읊고 있다.



[第025則]千峰萬峰去
〈垂示〉垂示云。機不離位。墮在毒海。語不驚群。陷於流俗。忽若擊石火裏別緇素。閃電光中辨殺活。可以坐斷十方。壁立千仞。還知有恁麽時節麽。試擧看。
〈本則〉擧。蓮花峰庵主。拈拄杖示衆云。古人到這裏。爲什麽不肯住。衆無語。自代云。爲他途路不得力。復云。畢竟如何。又自代云。楖[木+栗]橫擔不顧人。直入千峰萬峰去。
〈頌〉眼裏塵沙耳裏土。千峰萬峰不肯住。落花流水太茫茫。剔起眉毛何處去。

벽암록 25칙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

“금가루가 귀중하다지만 눈에는 병이 돼”

{벽암록} 제25칙은 연화봉의 암주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연화봉 암자 주지가 입적하던 날 주장자를 제기하고 대중에게 설법했다. '옛 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왜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대중이 아무 말도 없자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스스로 대중을 대신해서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擧. 蓮花峰庵主, 拈杖, 示衆云, 古人到這裏, 爲什不肯住. 衆無語. 自代云, 爲他途路不得力. 復云, 畢竟如何. 又自代云, 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화봉은 원오의 '평창'과 {오등회원} 15권에 '천태산 연화봉'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조정사원} 7권에 의하면 연화봉은 천태의 별산(別山)으로 천태덕소가 입적한 곳이라 하고 있다. 연화봉 암주는 운문의 법을 이은 봉선사 도침(道琛)의 제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잘 알 수가 없으며, 보통 상(祥)암주로 불렸는데, {연등회요} 27권과 {오등회원} 15권에 그의 법문을 전하고 있다. {벽암록} 25칙의 공안도 {연등회요} 27권에 수록된 상암주의 법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연화봉 암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을 무렵 천태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웠다. 옛사람들은 도를 얻은 뒤에는 초옥이나 석실에서 발 부러진 가마솥에 나물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인연따라 한마디 법문(一轉語)을 하면서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고저 하였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바로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했다. 이렇게 전후 20년간을 설법했지만 끝내 한 사람도 올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은 암주가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장자를 들어 보이면서 '옛사람은 왜 깨달음의 경지(주장자)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여 대중에게 법문하고 있는데, 역시 대중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장자는 선승의 7가지 도구 중에 하나로서 항상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다. 선에서는 만법의 근본을 상징하는 도구이며 각자의 불성,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는 지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이 말에 대하여 '허공에다 못을 박지 말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있는 임제의 말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는 것은 허공에 못을 박는 것처럼, 무모하고 헛된 일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법화경} '화성유품'에 한 사람의 길 안내자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보물을 찾아서 먼 길을 갈 때 도중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환화(幻化)의 성(城)을 만들어 쉬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환화의 성에 안주하고 만족하여 참된 보물을 찾으려는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환화의 성을 없애고 모두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길 안내자는 부처님이요 보물은 불법을 비유한 것인데, 수행의 도중에 퇴굴심이 생기면 방편으로 제시한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인줄 알고 집착한다.

암주가 주장자로, 이곳(깨달음의 세계)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으로 제시한 환화의 성과 같은 것이다. {금강경}에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라(無住)'고 주장하고, {유마경}에도 '밖으로 범성(凡聖)의 차별경계를 취하지 말고, 안으로 근본(깨달음)에 안주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이 일절은 {임제록} 등 선어록에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암주의 설법도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독자적으로 설하고 있다. 중생의 차별세계는 물론,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기 일에 몰입하여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선어록에 '백척의 긴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법문과 {벽암록} 23칙에 묘봉산의 정상에서 안주하지 말라는 법문도 똑같은 내용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장자는 깨달음 수행위한 방편
깨달음 자체에도 안주하지 말라

암주의 법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암주는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주장자)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주장자라는 것은 길을 갈 때는 필요한 생활도구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다. 불법수행을 하는 도중에서는 부처나 여래, 깨달음이나, 열반,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주장자가 필요하지만, 여기 깨달음의 집에 도달(歸家穩坐)한다면 자기와 주장자가 하나가 된 본래면목이 그대로 다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주장자라는 방편의 도구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 '한 사람은 도중에 있으면서 집(家舍)을 여의지 않고, 한 사람은 집(家舍)에 있으면서 도중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다. 도중은 수행과 중생구제의 길에서 활약하는 경지이고 집은 깨달음의 마음(본래심)을 상실하지 않은 것이다.

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주장자란 평소 수행자가 사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까? 옛사람은 이런 경지에도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가루가 비록 귀중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는 것과 같다." 주장자나 언어 문자나, 부처나 깨달음 등은 불법 수행에 필요한 방편적인 도구이다. 그러한 방편도구나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면 자신의 생활도구가 자신을 얽어매는 집착과 속박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원오는 '금가루가 귀중하지만… …'이라는 속담을 인용하고 있다.

암주는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어떻게 해야 올바른 불법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가? 학인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도록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이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 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이 말은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제자 엄양(嚴陽)존자 선신(善信)의 말이다. 지금까지 주장자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했는데 그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한눈도 팔지 않고, 암주가 '이 주장자에도 안주하지 않고'라고 말한 것처럼, 대중들의 마음으로부터 주장자를 뺏어들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첩첩히 쌓인 산중을 향해 들어간다는 말에 원오는 "단지 담판(擔板)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판자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옆을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보고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쪽 부분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이 라고 경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수행의 길(도중)에도 있지 않고, 깨달음의 집에도 안주하지 않고, 또한 주장자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오직 자기의 일에 몰입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눈 속의 티끌, 귓속의 흙이여! 천봉우리 만 봉우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네. 꽃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니 아득하기만 한데, 눈썹을 치켜세우고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을까?" 암주의 눈은 먼지가 가득하고 귀에는 흙이 가득 함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同事攝)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중생교화의 설법에 진력하고 있다고 칭송하고 있다. 천봉 만봉 가운데로 들어가 자취도 없고 흔적도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그대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가? 라고 읊고 있는 것은 학인들이 암주의 행방을 찾고 그의 소식을 참구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암주의 지혜작용은 자취가 없고 소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낙화유수처럼, 인연따라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도도하게 끝없이 작용하고 있다. 암주의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작용을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하면 볼 수가 없다.



[第026則]何是奇特事
〈本則〉擧。僧問百丈。如何是奇特事。丈云。獨坐大雄峰。僧禮拜。丈便打。
〈頌〉祖域交馳天馬駒。化門舒卷不同途。電光石火存機變。堪笑人來捋虎鬚。

벽암록 26칙 백장화상과 기특(奇特)한 일

“평상심의 일상생활이 진실로 비범한 일”

{벽암록} 제26칙에는 백장 화상이 홀로 백장산에 앉아 있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백장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아주 특별(奇特)한 일입니까?' 백장 화상이 대답했다.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이지.' 그 스님이 예배를 올리자, 백장 화상은 주장자로 후려쳤다.

擧. 僧問百丈, 如何是奇特事. 丈云, 獨坐大雄峰. 僧, 禮拜. 丈, 便打.

장회해 선사는 중국 선불교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인물이다. 스승 마조도일의 비문에는 십대제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만 백장과 남전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조의 생전에는 훌륭한 선승들의 틈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원청규}를 제정하고, 수행중심교단을 창립했다. 또한 선원의 전 대중이 공동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규정인 보청법(普請法)을 제정하여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생산노동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수행자 교단의 위대한 노동정신을 직접 실천한 선승이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는 위산영우와 황벽희운 이라는 걸승이 배출되어 조사선불교의 교단을 확고히 정착시켰고 선사상을 한층 발전 시켰으며, 위산과 앙산의 위앙종, 황벽과 임제의 임제종이 형성되었다. {전등록} 제6권에는 백장의 선사상이 집약된 '돈오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대들이 모든 반연을 끊고 만 가지 일들을 쉬며, 선과 악,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의식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며, 마음을 목석과 같이 아무런 분별심이 없도록 하라. 마음의 분별작용이 없고, 마음의 근본이 허공과 같이 되면 지혜의 해가 자연히 나타나리라.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일체의 분별심이 쉬고 온갖 반연과 탐욕, 성냄과 애욕, 더럽고 깨끗함에 대한 망정(妄情: 차별심)이 없어지면 육욕(六欲)과 팔풍(八風)을 대하여도 보고 듣고, 깨닫는 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경계에 현혹되지도 않아 자연히 신통묘용이 구족되리라." 백장은 이러한 불법의 지혜를 체득한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하고, 발심한 보살로서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벽암록} 제26칙은 어떤 스님이 백장 화상에게 "불법수행으로 특별히 훌륭한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 스님이 '기특한 일(奇特事)'로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불법을 수행하면 아주 특별히 좋은 일이 있는가? 불법을 깨닫고 체득한 특별하고 신통한 일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수행하여 깨닫게 되면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화두를 참구하여 깨닫게 되면 일체의 만법을 단번에 통달하는 부처의 능력을 구족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이 많다. 기특한 일, 아주 특별한 일, 좋은 일을 찾아서 불법수행을 하는 사람은 밖을 향해서 불법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전등록} 15권에 협산(夾山) 화상이 제자를 행각수행을 시켰는데, 사방에 다니면서 들어보니, 스승의 도덕이 훌륭하고 수행자들을 모아 지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되돌아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이렇게 기특한 일이 있으면서 왜 진작 저에게 설법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협산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밥을 지으면 내가 불을 땠고, 그대가 밥을 돌리면 내가 밥을 먹었는데, 언제 내가 그대에게 불법을 설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제자는 이 말에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운문 화상이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설한 것처럼, 매일 매사가 모두 기특한 일이다.

{조당집} 제3권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본정 화상은 "한 생각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개 좋은 일, 기특한 일은 기쁜 일, 즐거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은 감정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슬픔과 괴로움의 마음에 상대적인 차별심이 기특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기쁨과 슬픔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는 본래심(불심)의 경지에서 사는 일이 기특한 일이라고 본정 화상은 설하고 있다.

지금 하는일이 특별한 일 되게해야
현실생활 떠나 밖에서 찾아선 안돼

백장 화상은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이 기특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웅봉은 강서성 남창에 있는 백장산을 말한다. 백장 화상은 이 산에서 선문을 열고 수행자들을 지도했는데,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은 백장 자신이 불법의 생활을 하는 매일 매일의 기특한 일이다. 백장 화상의 대답은 나는 지금 여기 백장산에서 홀로 좌선수행의 생활을 하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 기특한 일이며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이다. 더 이상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생활에서 기특한 일이란 특별히 없다. 이러한 현실생활을 떠나 달리 깨달음의 기특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공상이며, 망상이 작동하는 환상인 것이지 지금 여기서 자신이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실현 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실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진실로 비범한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수단(守端) 선사가 '풍류스럽지 않은 것이 정말 풍류스러운 것(不風流處也風流)'이라고 말한 것처럼, 평상심으로 평범한 일상생활하는 그 자체가 진실로 풍류의 생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평상심이 도의 경지라는 사실을 체득 할 수가 있다. 기특한 일을 추구하는 마음은 지금 여기 자기자신의 평범한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밖에서 새로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불법은 각자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일체 번뇌 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불심으로 지혜로운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사는 일이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시절인연에 맞는 자신의 일이 모두 기특하고 훌륭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시간과 장소의 시절인연을 떠나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일)을 살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의 기특한 일은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삶을 하는 것이다. 백장 화상이 대웅봉에 앉아 번뇌 망념의 일없이 본래심(불심)으로 좌선 수행의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기특한 일인 것이다. 좌선은 일체 차별심을 초월한 불심의 생활이며, 본래의 자기 위치(깨달음의 장소)에 평안하게 지혜로운 삶을 사는 구체적인 일이다. {유마경}에 본래심(直心)이 정토이며 청정한 도량(道場)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선에서는 본래심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을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 한다.

문한 스님은 "예 잘 알았습니다."라는 의미로 다시 인사를 올렸다. 원오는 이 스님이 "영리한 납승"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백장이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다"고 한 법문의 의미를 체득했기 때문에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장 화상은 인사하는 스님에게 곧바로 주장자로 내리치고 있다. 백장의 주장자는 어떠한 작용인가? 원오도 "이렇게 엄하게 학인을 때리는 율령(律令)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니 잘 참구해야 한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한번 "정신차리게!"라고 전광석화와 같은 기세로 주의주고 있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사의 경지를 달리는 천마(天馬)여!" 이 말은 백장이 마조의 불법을 체득하여 불조(佛祖)의 경지를 종횡으로 자유롭게 치달리는 천마에 비교하고 있다. 원오도 착어에 "오백년에 한 사람 출현할까?"라고 백장의 출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교화의 수단은 놓아주고 거둠이 적절하네." 학인을 지도함에 파주(把住)와 방행(放行), 살인도와 활인검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여 지도하고 있다고 읊고 있다. "전광석화 속에서도 근기에에 알맞게 대처했으니." 기특한 일을 질문한 스님에게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네."라고 대답한 백장과 스님의 선문답은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작용이었다. "가소롭다. 호랑이 수염을 뽑으러 오다니." 백장에게 감히 겁도 없이 기특한 일을 질문한 스님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다.



[第027則]體露金風
〈垂示〉垂示云。問一答十。擧一明三見免放鷹。因風吹火。不惜眉毛則且置。只如入虎穴時如何。試擧看。
〈本則〉擧。僧問雲門。樹凋葉落時如何。雲門云。體露金風。
〈頌〉問旣有宗。答亦攸仝。三句可辨。一鏃遼空。大野兮涼飇[颱-台+焱]颯颯。長天兮疏雨濛濛。君不見少林久坐未歸客。靜依熊耳一叢叢。

벽암록 27칙 운문화상과 가을바람에 진실 드러나다

“진실은 앙상한 고목처럼 무일물의 경지”

{벽암록} 제27칙에는 운문 화상의 유명한 가을바람에 진실이 모두 들어난 체로금풍(體露金風)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 화상이 대답했다.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體露金風).'

擧. 僧問雲門, 樹凋葉落時如何. 雲門云, 體露金風.

오는 '평창'에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떤 사람의 경계인가? 이것은 분양 화상의 18가지 질문 가운데 선지식의 역량을 시험하는 질문(辨主問), 또는 사건을 빌린 질문(借事問)이라고 한다. 운문 화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에게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라는 대답은 아주 훌륭하고, 또한 그 질문에 위배되지 않았다. 즉 질문한 스님도 안목이 있었고, 대답 또한 분명했다."

운문 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樹凋葉落)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수조엽락(樹凋葉落)은 마치 겨울철에 나무에 물이 마르고 낙엽이 져서 나무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이 질문은 그러한 앙상한 겨울나무의 자연풍경을 문제로 삼고 질문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하는 스님이 제시한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樹凋葉落)의 경지'는 사실 {대반열반경} 제35권에 부루나가 비유로 설하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토대로 한 문제제기 인 것이다. 즉 "부루나가 말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 올리니 들어주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했다. '좋은 일이지. 그대 마음대로 말해보게나.' '세존이시여! 마치 큰 마을 앞에 사라나무 숲이 있고, 그 숲 가운데 한 그루의 나무가 숲보다 먼저 생겨서 백년이 넘었습니다. 그 숲의 주인은 물을 주면서 철에 따라 가꾸었는데, 그 나무가 오래되어 껍질과 나뭇가지와 잎은 모두 다 탈락하고, 굳은 고갱이만 남아 있습니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낡은 것은 모두 제거해 없어지고 오직 진실한 법만 남아 있습니다.'"

{마조어록}에 마조대사가 어느 날 약산에게 "그대 요즘 정법 안목에 대한 견해(見處)는 어떠한가?"라고 질문하자, 약산이 "피부가 완전히 탈락되어 오직 하나의 진실만 남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 일단도 {열반경}의 고사를 배경으로 한 선문답이다.


가을바람에 나무 본체 드러나듯
아상(我相), 번뇌 사라진 본래면목 비유

이러한 내용에 {한산시}에도 {열반경}의 고사를 시로 읊고 있으며, 송대 황산곡(黃山谷.庭堅 : 1045~ 1105)은 {한산시}에 의거하여 "피부와 터럭 모두 떨쳐버리니 오직 진실만 있네"라고 시구에 응용하여 읊고 있다. {육조단경}에 "낙엽이 떨어져 근본으로 되돌아간다(葉落歸本)"고 주장하고 있는 말도 같은 의미인데, 이 말은 {노자} 16장에서 주장하는 "대개 사물은 번창하지만 각기 그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근본으로 되돌아 간 것을 정(靜)이라고 한다."는 주장을 토대로 한 말이다. {신심명}에도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종지를 체득하고, 사물에 비친 대상을 따르면 근본을 잃어버린다"고 읊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만법이 하나로 되돌아간다(萬法歸一)'는 주장처럼, 일체의 번뇌 망념의 숲에서 본래인 불심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성(還源性)의 구조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번뇌 망념의 중생심(不覺)에서 본래인 진여 자성의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회귀성(回歸性)의 종교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어록 등장하는 피부나 나무 잎, 혹은 초목과 풀 등은 숲(사바)의 세계인 번뇌 망념(妄念)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동산양개 화상도 번뇌 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멀고 먼 곳에 풀이 하나도 없는 곳(萬里無寸草)을 향해 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체의 번뇌 망념이 없는 절대 평등의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인 진실된 법신(法身: 불성)을 깨닫도록 지시하는 법문이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마저 떨어진 수조엽락(樹凋葉落)은 {열반경}에서 부루나가 비유로 말하고 있는 오래된 사라나무의 껍질과 가지와 잎이 완전히 탈락된 앙상한 고목은 본래 모습인 진실만 남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인데, 즉 여래의 진실한 법신은 일체의 번뇌 망념(皮膚)의 먼지가 완전히 없어진 청정한 불심의 심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시들고 메말라 잎이 완전히 떨어져 없어진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과 일체의 번뇌 망념이 완전히 탈락된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인 법신의 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열반경}에 의거하여 일체의 번뇌 망념이 탈락한 불성상주(佛性常住), 혹은 법신상주(法身常住)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어떤 스님은 "번뇌 망념이 완전히 탈락된 깨달음의 경지(法身)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즉 본래 무일물(無一物)인 열반적정인 법신 경지를 체득한 입장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운문 화상은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體露金風)"라고 대답했다. 체로(體露)는 본래의 모습인 근본이 완전히 들러난 것으로 {광등록} 제8권에 백장이 신령스런 빛이 홀로 빛나니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의 경계를 초월하고, 법신이 그대로 드러났다(體露眞常)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가을바람에 불법의 참된 모습(實相)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의미이다. 오행(五行)에서 가을(秋)은 금(金)이기 때문에 금풍(金風)은 추풍(秋風)을 말한다. {임제록}에도 "금풍(金風)이 옥피리를 불면 누가 그 소리를 알아듣는가?"라고 묻고 있다.

운문은 늙은 피부가 남아 무상에 파괴되고 있는 육신을 통해서 법신의 지혜작용을 꿰뚫어 보고 있다. 운문은 화신이라고도 법신이라고도 말하지 않고도 확실한 자기 존재의 근본 당체(본래면목)를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한마디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숨김없이 완전히 드러난 것처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사는 법신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법음(法音)을 울리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피부는 물론, 몸과 마음(身心)까지 완전히 탈락한 경지에 살고 있는 자신의 본래면목(법신)의 지혜작용이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전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운문의 대답에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버티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온 천지(天地) 가득히 가을바람인데 감추고 숨길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화엄경}에 "법신(佛身)은 온 법계에 가득 충만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만법의 진실(법신)은 감춤이 없고, 여실하고 여법하게 이와 같은 모습(諸法實相)으로 모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운문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은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법신의 경지에서 "가을바람에 진실이 그대로 모두 드러났다(體露金風)"는 법음을 설하고 있는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는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질문에 이미 종지가 있었고, 대답 역시 또한 그렇다" 선문답은 원래 질문 가운데 대답이 있는 법이다. 운문 화상은 스님의 질문에 충분히 종지가 있음을 파악하였고, 스님의 질문 역시 훌륭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삼구(三句)를 판별해야 한다"는 말은 운문의 삼구(三句)설법으로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운문이 대답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일구(一句)에 천지가 하나된 함개건곤(函蓋乾坤)의 구(句)와 일체의 번뇌망념을 끊은 중류절단(衆流截斷)의 구(句), 학인의 근기에 맞추어 지혜를 살리는 수피축랑(隨波逐浪)의 구(句)라는 삼구(三句)가 구비되어 있는가를 판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 화살이 허공을 통과하네”라고 읊고 있는 것은 운문 화상이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고 대답한 한마디는 하나의 화살이 되어 천지를 꿰뚫고 시방세계의 허공을 날아가는 것처럼, 결코 삼구(三句)나 일구(一句)로 논의 하거나 해석하는 경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운문의 대답(一句)을 운문의 선사상인 삼구(三句)로서 견주어 판별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체득하고는 삼구와 일구를 초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第028則]有說不說
〈本則〉擧。南泉參百丈涅槃和尙。丈問。從上諸聖。還有不爲人說底法麽。泉云。有。丈云。作麽生是不爲人說底法。泉云。不是心。不是佛。不是物。丈云。說了也。泉云。某甲只恁麽。和尙作麽生。丈云。我又不是大善知識。爭知有說不說。泉云。某甲不會。丈云。我太殺爲爾說了也。
〈頌〉祖佛從來不爲人。衲僧今古競頭走。明鏡當臺列像殊。一一面南看北斗。斗柄垂。無處討。拈得鼻孔失卻口。

벽암록 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언어문자로 표현하면 불법 그 자체가 아니다”

{벽암록} 제28칙에는 마조 문하의 유명한 남전보원 화상과 백장열반 선사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남전 화상이 백장산의 열반 화상을 참문하자, 열반 화상이 질문했다. "예로부터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있지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입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설해 버렸군!"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不會)."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많이 말했군!"

擧. 南泉參百丈涅槃和尙. 丈問, 從上諸聖, 還有不爲人說底法. 泉云, 有. 丈云, 作生是不爲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丈云, 說了也. 泉云, 某甲只恁, 和尙作生. 丈云,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泉云, 某甲不會. 丈云, 我太爲說了也.

공안은 {전등록} 제9권 '백장유정(百丈惟政)장'에 전하고 있으며, {무문관} 제27칙에도 수록하고 있다. 대개 백장열반 화상은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은 법정(法正)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강의하였기 때문에 열반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남전화상이 조카상좌가 되는 열반 화상을 참문한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한 백장 화상은 마조의 제자 백장 유정(惟政) 화상으로 남전 화상과 법형제가 되는 선승인데, 그의 전기는 잘 알 수가 없다. {전등록}에도 백장유정과 백장열반을 동일인으로 취급하는 혼란이 보인다.

남전(普願 : 748~834)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16권, {송고승전} 11권 등의 자료에 전하고 있다. 출가하여 여러 곳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경율론 삼장을 연마했고, {중론(中論)}, {백론(百論)} 등을 연구하여 불교학에 통달했다. 당시 마조의 선풍이 유명하여 참문하고 그의 선법을 체득하였다. 특히 마조는 그의 대표적인 제자 서당(西堂)과 백장(百丈)과 남전 화상 세 사람이 밤에 달을 보고, 마조가 "정말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가?" 질문하자, 백장은 좋은 수행을, 서당은 좋은 공양을 말하자, 남전은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러한 제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마조는 "경은 서당, 선은 백장에게 돌아갔네. 오직 홀로 남전은 일체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불법은 체득해야… 설할 수 없어
부처님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같은 것

남전 화상이 동문인 백장열반 화상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백장산을 찾아갔는데, 백장열반 화상은 남전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예로부터 부처나 조사가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나 조사들이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천 법문으로 모든 불법을 다 설하였고 그 설법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며 어록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제시한 문제는 8만4천의 법문은 중생을 위한 방편법문으로 불법의 진실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만, 불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불법'이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를 중생들에게 설하고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의 진실을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전화상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천 법문을 설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一字不說)고 {능가경}에서 주장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이 경전을 중시하는 것은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슬로건도 {능가경}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서 교외별전과 이심전심으로 전법이 이루어지게 된 사실의 증명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새로운 출발은 세존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경전에서 언어 문자로 전하는 방편법문과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으로 주장하는 교학체계을 극복하여 불법의 진실을 본인이 직접 체득하는 실천체험의 종교를 주장한 점이다. 이 공안은 이러한 입장에서 주장된 선문답이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말이 {반야경}에는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에 걸림 없고(無碍), 집착 없고(無相), 머무름이 없는(無住) 반야의 논리를 말한다. 또 {반야경}에 "설사 열반의 경지를 초월하는 훌륭한 법이 있을 지라도 나는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설한다"는 말을 선승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는 방편법문이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부처나 조사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불급(言說不及),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불법은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체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물을 마셔보고 차고 따듯함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냉난자지(冷暖自知)'는 선불교의 체험종교를 대변하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장 화상은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인가?"라고 반문하자 남전화상은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을 토대로 하여, 마조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하고,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不是心) 부처도 아니고(不是佛)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의 진실은 지금 여기서 불심(佛心)의 지혜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불심의 지혜작용(본래면목)을 "부처다, 마음이다, 중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표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전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다"고 언어삼매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백장 화상은 "그렇게 말한 것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설해 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남전 화상이 "나는 단지 이와 같이 제시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제시하겠소?"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백장 화상은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즉 백장 화상은 나는 대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며 뒤로 물러서서,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분별과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안목을 '부지(不知)'라고 제시하며, 남전 화상의 지혜작용(禪機)을 점검해 보고 있다. 남전 화상도 "나도 모르겠소(不會)"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한 '불회(不會)'는 백장이 말한 '부지(不知)'와 같이 '설할 수 있는 불법'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중생의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적인 불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을 포용한 본래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말한 '불식(不識)'도 같은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백장 화상은 "내가 그대를 위해서 너무 많이 말해 버렸군!" 하였다. 이 말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남전은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해 버렸다"고 한 것이다. 백장이 '부지(不知)'라고 했는데, 남전은 '불회(不會)'라고 대답한 것처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두 사람이 많은 대화로 설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사나 부처는 예로부터 사람을 위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고금(古今)의 납승들은 다투어 언어 문자를 쫓고 있네. (남전과 백장의 본래면목) 거울(明鏡)이 비춘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남쪽을 향하면서 북두성을 바라본다" 남전과 백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방세계와 하나가 되어 얼굴을 남쪽으로 하면서 북두성을 보고 있는 절대(불심)의 경지에서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거울과 같이 무심(無心)의 대화로서 설하고 있다.



[第029則]隨他去
〈垂示〉垂示云。魚行水濁。鳥飛毛落。明辨主賓。洞分緇素。直似當臺明鏡。掌內明珠。漢現胡來。聲彰色顯。且道爲什麽如此。試擧看。
〈本則〉擧。僧問大隋。劫火洞然大千俱壞。未審這箇壞不壞。隋云。壞。僧云。恁麽則隨他去也。隋云。隨他去。
〈頌〉劫火光中立問端。衲僧猶滯兩重關。可憐一句隨他語。萬里區區獨往還。

벽암록 29칙 대수화상의 시방세계를 멸망시키는 불길(劫火洞然)

“본래면목은 일체의 차별심 초월한 경지”

{벽암록} 제29칙은 대수 화상에게 "시방세계가 멸망하게 될 때 불성(본래면목)도 파괴되는가?"라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수법진 화상에게 질문했다. "시방세계가 종말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맹화(猛火)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삼천 대천의 시방세계가 멸망하게 되는데, 이것(본래면목)도 파괴됩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파괴된다."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따라 갑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그도 따라 간다"

擧. 僧問大隋, 劫火洞然大千俱壞. 未審, 這箇壞, 不壞. 隋云, 壞. 僧云, 恁?則隋他去也. 隋云, 隋他去.


대수화상은 위산영우의 법을 이은 대안(大安: 793~883)선사의 제자 법진(法眞 834~919)을 말한다. 대수법진 화상에 대한 자료는 {조당집} 19권, {전등록} 11권 등에 전하고 있으며, {고존숙어록} 35권에는 그의 법문을 기록한 어록도 1권 전한다. 이 공안은 {전등록}에 의거하고 있으며, {종용록} 제30칙에도 인용하고 있다.

'평창(評唱, 글에 대한 평판)'에는 대수 화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수법진 화상은 대안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60여명의 선지식을 참문하였다. 일찍이 위산영우선사의 문하에 있으면서 불(火)을 관리하는 소임(火頭)을 보고 있었다. 위산 화상이 '그대는 여기 여러 해 있었는데, 불법에 대해서 전혀 질문도 하지 않는구나'하자, '내가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라고 하니, '그러면 무엇이 부처인가를 묻도록 하라'고 말했다. 대수 화상은 곧장 손으로 위산 화상의 입을 막아버리자 위산이 말했다. '이후로도 그대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린 사람을 과연 내가 만날 수 있을까?' '그 뒤로 고향인 사천 동천(東川)으로 돌아가 붕구산 가는 길목에 차를 달여서 오가는 길손을 3년간이나 대접하고, 뒤에 세간에 나아가 대수산에서 법당을 열고 수행자를 지도하였다' 부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벌써 부처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객(主客)이 나누어지며, 진불(眞佛)이 아니다. 그래서 대수 화상은 부처나 불법을 대상으로 제시한 상대적인 차별심을 모두 쓸어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

본칙에 스님이 "시방세계가 종말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맹화(猛火)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삼천 대천의 시방세계가 멸망(劫火洞然 大千俱壞)하게 되는데, 이것(這箇)도 파괴됩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은 {인왕호국반야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토대로 하고 있다. "겁화(劫火)의 불길이 훨훨 타니 대천세계를 모두 파괴시킨다. 수미산과 거해(巨海)도 마멸하여 남김도 없고, 범천(梵天)과 천룡(天龍), 모든 유정(有情)도 모두 파멸해 버리는데, 어찌 이 몸이 남을 수가 있으랴!" 이 게송은 {조정사원} 제2권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구사론} '세간품'에 "성주괴공(成住壞空) 삼재겁(三災劫)이 일어나면 일체가 파괴된다"는 말이 있다. 겁(劫)은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의 사겁(四劫)으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시간을 말한다.

본칙의 질문은 괴겁(壞劫)에 관한 것으로 삼재(三災)가 있다. 먼저 큰 화재(火災)로 전 세계를 불태워 버리고, 그 위에 큰 수재(水災)로 일체를 씻어버리고, 다시 큰 풍재(風災)로 모든 것을 날려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공겁(空劫)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겁화(劫火)는 괴겁(壞劫)에 일어나는 화재(火災)를 말하며, 삼천 대천세계를 모두 불태워 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존재도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겁화통연(劫火洞然)이라고 한다.


'파괴되나… 안되나' 양쪽 다 편견
불성은 현재 자신의 삶의 자각주체

대개 모든 사람들은 우주는 파괴되어도 부처님이나 신(神)은 영원한 존재라고 믿고 있으며,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한 존재로서 천당과 극락에 간다고 믿고 있다. 종교의 목표는 영혼의 불멸(不滅)과 영생(永生)이며, 신(神)과 부처는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서 세계가 종말(終末)해도 신이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과 천국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질문한 스님도 "겁화통연(劫火洞然)에 삼천 대천 세계가 모두 파괴되면 이것(본래면목)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인연으로 생긴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생노병사의 무상한 존재인데, 본래면목도 함께 파괴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즉 육체는 시절인연으로 죽어 없어지는데, 불성(마음)도 함께 파괴되는가? 육체와 마음(불성)을 나누고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질문하고 있다. 즉 고정관념(常見)에 떨어진 것이다.

대수화상은 "파괴되고 말고. 본래면목도 영원한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질문한 스님이 짊어지고 있는 영원한 존재라고 생각한 본래면목에 대한 집착과 착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자비심이다. 원오도 "구멍 없는 철추로 스님의 얼굴을 쳤다"고 평하고 있다. 불성(본래면목)은 중생의 생멸심(生滅心: 생사심)이 없는 자각의 주체이지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실체로서 영원불멸의 존재인 영혼(Atman)은 아니다. 불성을 식신(識神: 중생심)으로 착각하면 정법의 안목 없는 불교인이고,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면 불법을 모르는 외도가 된다.

스님은 "대천이 모두 함께 파괴되면 그(본래면목)도 함께 따라 본래의 공(空)으로 되돌아갑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즉 나는 지금까지 불성(본래면목)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일체의 존재와 함께 파괴되는 것입니까? 믿기 어렵다는 질문이다. 불법은 몸과 마음이 하나(身心一如)이며 본성과 형상이 둘이 아닌(性相不二) 경지를 설하고 있다. 혜충 국사가 "몸은 죽어 없어지지만 마음(불성)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들어 {육조단경}과 남방의 종지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외도법을 불법으로 착각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수 화상은 "그렇다. 본래면목도 대천세계와 함께 파괴되고 말고"라고 말했다. 불성(본래면목)은 번뇌 망념의 생멸심이 없고, 시작과 마침도 없이 대천세계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오는 "앞의 화살은 그래도 가볍게 박혔으나 뒤에 화살은 깊이 박혔다"고 평하고 있다. 대답은 질문 속에 있다고 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의 의문이 깊으면 깊을수록 대수화상의 대답이 깊이 골수에 박히게 된다.

'평창'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도 전한다. "훗날 어떤 스님이 수산주(修山主)에게 질문했다. '겁화동연(劫火洞然)에 대천세계가 모두 타서 파괴되는데 이것(불성)도 파괴됩니가?' '파괴되지 않는다' '왜 파괴되지 않습니까?' '대천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파괴된다(壞)고 말해도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고,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라고 말해도 장애가 된다.'"

이 일단은 대수 화상의 대답과 반대로 대답하고 있다. '파괴된다'는 생각도 편견이요, '파괴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편견이다. 어떤 때는 긍정, 어떤 때는 부정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질문자의 견해에 따라서 방편으로 대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성(본래면목)은 궁극적으로는 긍정(壞)과 부정(不壞)의 차별심(중생심)을 모두 초월한 경지이며, 일체의 만법과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일)을 지혜롭게 사는 자각의 주체인 것이다.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투자대동 화상이 이 스님을 통해서 대수 화상의 법문을 듣고 향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서촉에 고불(古佛)이 출현하였다. 그대는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스님이 다시 대수화상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입적한 이후였다고 한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겁화(劫火)의 불빛 속에 질문을 던지니, 납승이 오히려 두 겹의 관문에 막혀 버렸구나." 질문한 스님은 "불성을 파괴(壞)하는가? 파괴하지 않는가(不壞)"라며 차별심에 떨어진 것을 두 겹의 관문에 막힌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가엾다. 그 스님은 대수 화상이 '그도 따라 간다'는 한 마디를 듣고 깨닫지 못하여 만 리 밖의 투자산 대동화상의 말을 듣고 되돌아오니 대수화상은 입적했다. 쓸데없이 대수산과 투자산의 먼길을 헛되이 애써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第030則]鎭州蘿蔔
〈本則〉擧。僧問趙州。承聞和尙親見南泉。是否。州云。鎭州出大蘿蔔頭。
〈頌〉鎭州出大蘿蔔。天下衲僧取則。只知自古自今。爭辨鵠白烏黑。賊賊。衲僧鼻孔曾拈得。

벽암록 30칙 조주화상과 큰 무(大蘿蔔頭)

“선은 '무' 맛을 보듯 직접 먹어봐야 알아”

{벽암록} 제30칙은 조주 화상과 진주에서 생산하는 큰 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조주 화상이 말했다.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

擧. 僧問趙州, 承聞和尙親見南泉, 是否. 州云, 鎭州出大蘿蔔頭.

이선문답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다. 조주 화상은 2칙과 9칙 등에 등장하고 있는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이다. 그는 학인들에게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喝)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거친 교화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한 두 마디의 말로써 불법을 자유롭게 설하여 지도하고 있다. 그래서 송대 법연선사는 조주의 입술에는 빛이 발한다는 의미로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평하고 있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법의 종교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어록에는 생산노동과 관련된 쌀과 보리, 가지와 무 등의 식물과 호떡과 빵, 과자 등의 많은 음식물들이 선문답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전등록}에 전하는 '청원화상과 여릉의 쌀값' '운문의 호떡'은 유명한 말이다. 조주 화상이 진주지방에 큰 무가 많이 생산된다는 말을 하자 {벽암록} 98칙에 무선(蘿蔔頭禪)이라는 새로운 선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등록} 13권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고불심(古佛心)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수산 화상은 "진주의 무는 무게가 세근이나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 선문답도 조주의 고불심(古佛心)을 진주의 큰 무로 대답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불(古佛)은 조사와 같이 존경한 경칭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말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 화상이 출가하여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선사를 참문하여 선법을 체득한 인연을 배경으로 질문한 것이다. 즉 조주가 사미로서 처음 남전 화상을 친견하니 마침 남전 화상은 방장실에 누워있었다. 남전 화상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조주는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는가?" 라고 묻자, 조주는 "상서로운 모습은 보질 못했지만 누워있는 여래(如來)를 친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주를 맞이하고,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으로 불법의 안목을 체득하게 한 전법상승의 기연을 토대로 질문한 것이다.


지금 여기 불법의 지혜로 살아야
과거의 일 문제 삼는 것은 무의미

특히 조주는 남전 선사를 40년이나 모셨고, 60살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는 구법행각을 하면서, '나보다 불법의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세살 어린애라도 가르침을 받고, 나보다 안목이 못하면 80 노인이라도 불법을 가르친다'는 원력을 세우고 20년을 유행했다. 나이 80살 때에 처음 진주 관음원에서 법당을 열고, 120살까지 수행자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조주 화상의 행적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질문한 스님도 "소문으로 듣기로"라고 정중하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전 화상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는 질문은 간단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하고, 선문답을 나눈 것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다. {금강경}에 "만약 모양(色)으로 자아(自我)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聲)으로 구하려고 한다면 여래(如來)를 친견할 수가 없다"고 설한다. 질문한 스님은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조주 화상이 남전 선사를 친견하고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을 친견하고 체득한 불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설한 여래와 조주가 남전을 보고 말한 여래는 똑같이 참된 자아의 법신(法身)을 말한다. 법신 여래는 감각기관인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심의 지혜로 자각하여야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남전의 모습을 보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남전을 친견한 것을 묻고 있는 스님은 '조주 화상이 남전(여래)을 친견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있다. 조주와 남전을 구분한다면 주객의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남전)를 대상으로 친견했다면 조주와 남전은 올바른 친견이 아니라 대상의 여래를 친견한 차별에 떨어진 것이 된다. 즉 '조주 화상 당신은 남전 화상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남전 화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불법은 어떠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인 것이다.

조주 화상은 "이곳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주는 조주 화상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 큰 무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진주는 원래 큰 무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며, '조주 화상이 남전을 친견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스님이 '화상은 남전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 화상은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혀 관계없는 말이다. 이 공안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게는 하늘에 통하는 길이 있다.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구봉(九峰)스님에게 "제가 듣기로 스님(구봉)은 연수(延壽)스님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앞산에 보리가 익었는가?"라고 대답한 말을, 원오는 이 일단의 선문답도 본칙의 공안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조주의 대답에 "하늘을 떠 바치고 땅을 버티고"라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조주의 대답은 천지(天地) 가득 무로 꽉 찼다는 의미인데, 조주와 무가 하나 된 경지, 조주화상은 만법(萬法)과 하나(一如) 된 법신(法身)의 입장에서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주가 남전을 친견한 것도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인 법신으로서 남전의 법신(여래)을 친견한 것이었다.

지금 조주 화상이 '진주의 큰 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상황(풍경)에서 자신이 남전 선사로부터 전해 받은 새로운 불법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의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을 듣고 남전의 선법을 전해 받은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남전 화상을 친견하고 전해 받은 불법은 항상 지금 여기서 항상 자신이 불법의 지혜로 살고 있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 그대는 '내가 남전을 친견하고 선법을 전해 받은 사실'에 집착되어 있다. 내가 새롭게 제시한 불법을 그대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진주에 왔으니 유명한 진주의 큰 무를 맛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진주의 유명한 무가 어떤 맛인지 그대는 아는가? 본인이 직접 먹어보고 맛보는 수밖에 없다"고 조주 화상은 설하고 있다.

선은 항상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처럼 과거의 일이나 남의 일을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한 일이며 자신의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물을 마셔보고 물의 찬 맛과 따뜻한 맛을 자각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자아의 법신(본래면목)을 친견하는 일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주 화상이 진주에 큰 무가 난다고 말하니, 천하의 납승이 조주를 흉내내며 선의 극칙으로 삼고 있네" 그러나 많은 수행자가 조주 화상의 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줄만 알 뿐,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까?" 그리고 "도적놈! 도적놈! 납승의 본래면목(鼻孔)을 체득하게 했다"는 말은 조주 화상의 교화를 읊은 말인데, 조주 화상은 질문한 스님의 집착심을 뺏는 도적이 되어, 수행자가 자기의 본래면목을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