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95%BC%EC%8B%AC%EA%B2%BD

 

반야심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야심경》(般若心經, 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हृदय 프라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

ko.wikipedia.org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顛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괘애 무괘애고 무유공포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11]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空)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을 깨달으셨도다.
사리자여! (色)이 공(空)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은 곧 공이오, 공은 곧 색이며, (受)·(想)·(行)·(識)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러한 은 서로 공하니 새로 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안에는 색도, 수·상·행·식도,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도,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도, 눈과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도다.
무명(無明)과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음과 죽음, 늙음과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지혜도, 얻는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기대므로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걸리는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뒤바뀐 헛된 생각을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노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기대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도다.
고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따라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읊노라
"가자, 가자, 피안(彼岸)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영원한 깨달음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개달음에 뿌리를 내리자.)


*위 주문(呪文)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자 음역)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한국어 음역)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국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자. 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자.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 주소서.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912 

 

https://www.youtube.com/watch?v=QgT7c-AJW0g&t=34s 

 

 

https://www.youtube.com/watch?v=bTizqvC5X9o&t=60s 

 

 

 

 

 

https://www.youtube.com/watch?v=Lo7OaKVaoF0&t=17s 

 

 

https://kydong77.tistory.com/20988

 

돈황막고굴 석굴사원/ 반야경 등 주요 불교경전을 번역한 쿠마라지바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XDZlbWTM474

 

 

https://www.youtube.com/watch?v=hKNJo1PL7uQ 

 

 

https://kydong77.tistory.com/21521

 

구마라집, 마하반야바라밀경 27권 外 다수의 불경번역

https://ko.wikipedia.org/wiki/%EC%BF%A0%EB%A7%88%EB%9D%BC%EC%A7%80%EB%B0%94 쿠마라지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마라지바키질 석굴 입구의 광장에 세워진 쿠마라지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0988

 

돈황막고굴 석굴사원/ 반야경 등 주요 불교경전을 번역한 쿠마라지바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0762

 

불경 1차결집/ 2차결집 - 부파불교, BC 2세기-AD4세기경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

kydong77.tistory.com

 

 

원시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시불교(原始佛敎)는 고타마 붓다가 도(道)를 깨닫고 전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그의 입적(入寂)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성립된 불교를 일반적으

ko.wikipedia.org

원시불교는 초기불교(初期佛敎)[3] 또는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기도 한다.[4] 고타마 붓다 및 그의 직제자(直弟子)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그 후의 것을 협의의 원시불교라 하는 설도 있다.[1] 근본불교라는 용어는 고타마 붓다의 진면목 또는 근본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4]

원시불교의 특색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에 있으나 실은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口傳)된 것이 고타마 붓다의 입적 후 정리된 것으로 그 확실성의 한계점을 긋기는 어렵다.[1]

 

https://ko.wikipedia.org/wiki/%EB%B6%80%ED%8C%8C%EB%B6%88%EA%B5%90

 

부파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파불교(部派佛敎, 영어: early Buddhist schools)는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제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생겨 불멸 후 100

부파불교(部派佛敎, 영어early Buddhist schools)는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제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생겨 불멸 후 100년 경에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고, 이어서 이 두 부파(部派: 종파)로부터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 불교가 여러 부파로 나뉘면서 전개되었던 시대의 불교이다.[1][2]

서력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게 되자 대승불교도들은 그때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

불교 전통 연표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밀교 ·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514

 

수심결(修心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불교의 마음을 닦는 방법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저술한 책이다. 1권 1책. 목판본. 집필 연대와 장소는 미상이나, 저자가 41세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있을 때 열람했던 『대

encykorea.aks.ac.kr

불교의 마음을 닦는 방법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저술한 책이다. 1권 1책. 목판본. 집필 연대와 장소는 미상이나, 저자가 41세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있을 때 열람했던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인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1198년(신종 1) 이후의 저술로 추정된다.
체제는 불경의 일반적인 내용 구분방법인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종분은 다시 9문9답(九問九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분의 내용을 보면, 이 세계가 불타는 집과 같이 뜨거운 번뇌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인간은 그 속에서 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상기시킨 뒤 윤회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부처가 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리석어 자기의 몸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法)임을 알지 못한 채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 성품 밖에서 법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려는 사람은 밖으로 향하는 눈길을 안으로 돌려 마음을 밝힐 것을 가르쳤다. 마음의 본바탕은 물듦이 없고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진 것으로, 사람들이 허망한 분별만 여의면 곧 어엿한 부처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유통분의 제1문답에서는 만일 불성(佛性)이 이 몸 가운데에 있다면 어찌 불성을 보지 못하는가를 질문한 데 대하여, 지눌은 불성이 몸 안에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사람이 목마르고 배고픈 줄 알며, 차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할 줄 아는 그것이 곧 불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성이 부처님의 법인(法印)이요, 사람들은 본래 마음인 만큼 불성을 헛되이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비추어 볼 것을 강조하였다.
지눌은 이에 관하여 옛날 이견왕(異見王)과 바라제존자의 문답 등을 예로 들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2문답에서는 자기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으면 부처로서의 영원성과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야 할텐데 어찌 오늘날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신통(神通)을 나타내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지눌은 이러한 의심이 앞뒤를 알지 못하고 도를 배우는 헛된 견해에서 비롯된 잘못이라고 꾸짖고, 돈오(頓悟)점수(漸修)신통의 관계로 이를 설명하였다.
지눌은 여기서 도(道)에 들어가는 문은 결국 돈오와 점수의 이문(二門) 밖에 없다는 것과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를 행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해탈론(解脫論)을 제시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신통이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아서 단박에 깨달은 뒤 다시 점차로 익히고 닦아감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한 현상이라고 하였다.
 
제3문답에서는 돈오와 점수의 뜻을 분명히 규정지었다. 돈오는 범부가 한 생각에 본래부터 번뇌가 없고,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본성을 보아 단박에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점수는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은 한순간에 없애기 어려우므로, 돈오에 의지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점차로 닦아 익히는 수행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눌은 해탈의 방법에는 돈오후점수(頓悟後漸修)라는 한 가지 길밖에 없음을 시사하여 종래의 점수후돈오(漸修後頓悟)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제4문답과 제5문답은 돈오의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제4문답에서는 지눌이 “돈오는 곧 그대의 마음이다. 만일 잃지 않은 줄 알면, 곧 마음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견성(見性)이다.”라고 한 것을 더욱 자세히 풀이하였다.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 곧 본성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공적영지를 ① 망념[妄念]은 본래 고요함(寂),
② 객관세계는 본래 공(空)함,
③ 모든 법(法)이 공한 그곳에 신령한 앎이 있음[靈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6문답에서는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르다 하는 온갖 행위를 하는 것이 곧 범부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되돌려 비추어 보면 어떤 소리도 분별도 얻을 수 없고, 범부와 성인, 더러움과 깨끗함, 옳고 그름을 찾을 수 없으며, 온갖 이름과 말을 붙일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붙을 수 없는[空寂] 그곳에 영지가 항상 밝게 있어서, 스스로 모든 것을 분명히 분별할 줄 알기 때문에 공적영지심이라고 하였다. 이어 지눌은 이 공적영지심이 성인이라 하여 더하지 않고 범부라 해서 덜하지 않은 것이지만, 성인이 범부와 다른 점은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믿어 의심이 단번에 없어지면 곧 돈오한다고 가르쳤다.
 
제7문답은 돈오 후에 점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와 점수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점수하는 방법으로는
① 망념을 다스리고, ②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는[定慧等持] 것으로 요약하였다.
 
제8문답에서는 점수문(漸修門)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정혜등지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지눌은 불교의 수행 방법에 8만 4000가지 문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요강을 간추려 보면 정혜(定慧)·체용(體用)으로 집약되고, 다시 정(定)은 체(體)로, 혜(慧)는 용(用)으로 묶을 수 있으며, 정과 혜는 또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혜수행을 지눌은 자성정혜(自性定慧)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업장(業障)이 두터워서 선악의 경계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허망한 인연을 다스리는 공부방법을 취해야만 한다. 따라서 산란한 번뇌가 성한 사람은 먼저 선정을 닦고 다음에 지혜를 닦아야 하며, 졸음이 많고 멍청한 상태에 잘 빠지는 사람은 지혜를 먼저 닦아 공의 도리를 관찰한 뒤 선정을 닦을 것을 권장하였다. 이렇게 사람의 소양에 따라 수행을 달리 하는 정혜법을 지눌은 수상정혜(隨相定慧)라고 하였다.
 
제9문답에서는 제8문답의 자성정혜와 수상정혜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자성정혜의 돈오문은 공(功) 들임이 없이 공을 닦는 무공지공(無功之功)으로 정혜쌍수하여 성불하는 법이고, 수상정혜는 원래 아직 깨닫기 전의 열등한 근기(根機)가 번뇌를 억지로 끊어서 고요한 데로 들어가는 점수문(漸修門)의 공부 방법이다.
그러나 돈오 후의 수행에 이 수상정혜법을 둔 것은 단순히 교문(敎門)에서 말하는 점수의 수상정혜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방편상 이 방법을 말한 것 뿐이다. 깨달은 뒤에 닦는 수상정혜는 점수문의 수행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오염되지 않고 하는 것이 없는 무위(無爲)의 입장에서 닦는 것이므로, 비록 상을 따라 닦는다고 하여도 마침내 정혜를 함께 닦아서 천진자성(天眞自性)에 계합하게 된다고 하였다.
 
유통분에서는 이 책을 올바로 이해하여 부지런히 도를 닦는 것과 이러한 법문이 가지는 공덕을 누누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사상인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사상은 뒤에 지눌이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을 지어 주장한 간화경절선(看話徑截禪)의 사상과 함께 지눌의 대표적인 사상이 되었고, 이러한 사상은 한국불교선종의 수행지표가 되었다.
 
우리 나라 불교의 선종 뿐 아니라 교종에서도 중요한 전적으로 전수되어온 이 책은 명나라 대장경인 명장(明藏)과 『빈가대장경 頻加大藏經』·『대정신수대장경 大正新修大藏經』 등 높은 권위를 가진 여러 나라의 대장경 안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눌의 생존 당시 이래 수십 차례에 걸쳐 판본이 발간되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중요한 고간본(古刊本)은 다음과 같다.
 
① 비현각(丕顯閣)이 결하고 신미(信眉)가 언해한 것으로 1467년(세조 13)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② 『선종유심결 禪宗唯心訣』에 합간된 것으로, 1493년(성종 14) 고성 벽운사(碧雲寺)의 개판본을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복간하였다.
 
③ 1500년 가야산 봉서사에서 개판한 것으로 해인사 사간장경에 소장되어 있다. ④ 1799년(정조 3)송광사(松廣寺)에서 개판한 것으로 장서각도서에 있다. ⑤ 『선문촬요 禪門撮要』에 수록되어 있으며, 1908년 금정산 범어사 개간본에도 수록되어 있다.
 
현대판으로는 1934년방한암(方漢岩)이 현토하고 이종욱(李鍾郁)이 번역한 『고려보조국사법어 高麗普照國師法語』와 김탄허(金呑虛)의 『고려국보조선사어록』, 『한글대장경』 153권, 이기영(李箕永) 역 『한국의 불교사상』, 심재열(沈載烈) 강설 『보조법어』(보조문화사, 1979) 등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보조법어(普照法語)』(김탄허역,법보원,1963)
  • 『한국의 불교사상』(이기영 역,삼성출판사,1976)
  •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김위석,『불교학보』 2,1964)
  • 『지눌(知訥)의 선(禪)사상』(한국불교사상사,1975)

 

http://kr.buddhism.org/%ec%a1%b0%ec%82%ac%ec%96%b4%eb%a1%9d/?mod=document&uid=42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1. 밖에서 찾지 말라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kr.buddhism.org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심결 修心訣

1. 밖에서 찾지 말라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 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의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하시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변화가 다 여래의 밝은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들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다.



2. 불성은 어디에

[질문] 만약 불성(佛性)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안에 있으면서도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어째서 나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설하여 깨닫게 하소서.

[대답]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대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또 이 육신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된 것이므로 그 바탕이 둔해서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닫고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臨濟)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수·화·풍 사대(四大)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그대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그것만이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이며, 그대 본래의 마음이다.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가. 그대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인들이 도에 들어간 두어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 줄 테니 잘 듣고 믿어라.

옛날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견성(見性)한 이가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견성을 했습니까?"

"나는 견성을 했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體)도 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그럼 작용할 때는 몇 군데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쥐고,

발에 있으면 걸어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歸宗和尙)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말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는 믿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닦아가야(保林)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가려 있으면 허공의 꽃(空華)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단박 깨달았다.

옛 성인의 도에 들어간 인연은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다.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린 바가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갈 것이다.



3. 신통변화

[질문] 앞에서 말씀하신 견성이 진정한 견성이라면 그는 바로 성인입니다. 그는 마땅히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수도인들은 어째서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대답]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릴 줄 모르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곧잘 진리를 말하면서 마음은 게을러 빠져 도리어 분수 밖의 잘못을 범하고 있으니, 다 그대가 의심하는 데에 떨어진 것이다. 도를 배우면서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면서 근본과 지말을 가리지 못하면, 그것은 삿된 소견이지 진실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남까지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으니 요약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頓修)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 차츰 익혀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일시에 단박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도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은 먼저 깨달은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해 증득했다. 그러니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서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을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봉(圭峰)스님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상세히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얼어붙은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을 깨달았지만 법력으로써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흘러야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통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익혀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짓이며, 성인에게 있어서도 하찮은 일이다.

혹시 나타낼지라도 요긴하게 쓸 것이 못되는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妙用)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고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근본과 지말을 알지 못한 탓이다. 앞과 뒤, 근본과 지말을 모르고 불도를 구한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대하 듯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씨앗을 말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도 믿지 않으며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4. 돈오점수(頓悟漸修)

[질문]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라고 말씀하였는데, 깨달음이 단박 깨달음(頓悟)라면 왜 차츰 닦을(漸修)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차츰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닥박 깨달음이라 합니까?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씁하여 의심을 풀어주소서.

[대답]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濕氣)은 갑자기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기르기를 오래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질문]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대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신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 것이니,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成)이다.


5. 공적영지(空寂靈知)

[질문] 상상(上上)의 뛰어난 사람은 들으면 쉽게 알지만 중하(中下)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이들도 알아듣게 해 주소서.

[대답]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그대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空寂)하고 영지한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아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를 올라 걸음마다 삼계를 뛰어넘고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自利) 이타(利他)를 갖추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그대가 이와 같다면 진짜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질문]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대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의 마음인데, 어째서 돌이켜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내 이제 그대에 분수에 따라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잘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만약 이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일단 죽게 되면 몸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를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는 그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妙用)을 느끼는 대로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치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으나 그대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에 들어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는지.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얻을 수 없다면 그 때는 허공이 아니겠는가?"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실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미 모양이 없는데 어디에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는데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으므로 피차(彼此)가 없다. 피차가 없으므로 가고 옴이 없으며,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으므로 옛날과 지금이 없으며, 옛날과 지금이 없으므로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으므로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므로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도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모든 이름과 말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없어지니 모든 감관과 대상과 망념, 나아가서는 갖가지 모양 과 온갖 이름과 말이 다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본래부터 공적하고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아 무정(無情)한 것과 같지 않고 성품이 스스로 신기롭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하는 청정한 마음의 실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각성(本源覺性)이다. 이 것을 깨달아 지키는 이는 한결 같은(一如)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자는 육도(六道)에 나아가 한량없이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한 마음이 어리석어 육도로 나아가는 자는 가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며, 법계(法界)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이는 오는 사람이고 고요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다. 그래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있어도 어둡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라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 해서 덜하지도 않는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보통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은 스스로 그 마음을 살피는데 있다. 그대가 이 말을 믿고 의문이 단박 풀리며 대장부의 뜻을 내어 진정한 견해를 일으켜서 몸소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 닦는 사람의 알아 깨닫는 곳이고, 따로 계급과 차례가 없기 때문에 돈(頓)이라고 한다. 이것은 '믿음의 인(因) 중에서 부처의 과덕(果德)에 계합하여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고 한 말과 같다.



6. 소먹이는 행

[질문] 이 이치를 깨달으면 다시 계급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깨달은 뒤에 다시 닦으면서 차츰 익히고 차츰 이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답] 깨달은 뒤에 차츰 닦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누누이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들어라. 범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를 유전하면서 나고 죽음에 '나'라는 관념에 굳게 집착하여 망상과 뒤바뀜과 무명의 종자와 익힌 버릇이 오랫동안 한데 어울려 그 성품을 이루었다. 금생에 이르러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닫더라도, 그 오랜 버릇을 갑자기 끊어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경과 순경을 당하면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고, 바깥 대상에 대한 번뇌가 이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지혜로써 공부를 더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으나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서, 바람은 멎었지만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드러났지만 망상이 그대로 침노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종고선사도 말씀하기를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깨치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더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헤매면서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피어 망상이 문득 일어날지라도 아예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 무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경(究竟)이 된다. 천하 선지식이 깨친 뒤에 소 먹이는 행(牧牛行)을 닦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하지만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으려 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온갖 행(萬行)을 두루 닦더라도 오로지 무념(無念)으로 근본을 삼으라' 하였고 규봉(圭峰) 스님께서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치를 통틀어 이렇게 결론지었다. '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여기에 의지해 닦는 것을 최상승선(最上勝禪)이라 하고, 또 여래의 청정한 선이라 한다. 만약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저절로 차츰 백천삼매(百千三昧) 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전해 오는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선악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억제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미혹(迷惑)이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성문(聲聞)들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둑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이 성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피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어서 그 자리가 곧 고요함(寂)이니 어찌 다시 끊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깨달음이 더딜까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으라. 깨달으면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외부의 번뇌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제호(醍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음식. 불성에 비유한 말)가 될 것이다. 미혹이란 그 근본이 없음을 살피면 허공의 꽃인 삼계(三界)는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허깨비인 육진(六塵)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서 살피고 돌아보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면, 사랑과 미움이 저절로 사라지고 자비와 지혜가 밝아질 것이다. 죄업은 자연히 소멸되고 공덕이 늘어나 번뇌가 다할 때 생사도 곧 끊어질 것이다. 미세한 번뇌의 흐름조차 아주 끊어지고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뚜렷이 홀로 드러나면, 천백억 화신(化身)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해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달이 허공에 떠오르면 그 그림자가 물 위에 두루 비치는 것과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건지면서 근심없이 즐거울 것이다. 이를 가리켜 크게 깨달은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7.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라

[질문] 깨달은 뒤에 닦는 법문 가운데 선정(定)과 지혜(慧)를 고루 가진다는 이치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여 의혹을 풀고 해탈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대답] 법과 이치를 말한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면 자성의 본체와 작용 두 가지 뜻인데, 앞에서 말한 공적 영지가 바로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고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의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의 본체이기 때문에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 자성(自性)의 선정이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깨달아 고요함(寂)과 앎(知)에 자재하여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되면, 돈문(頓門)에 들어간 이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 된다.

그러나 먼저 적적(寂寂)으로써 흩어지려는 생각을 다스리고 그 다음 성성으로써 흐리멍텅함을 다스린다 하여, 앞과 뒤에 대치하여 혼침(昏)과 산란(亂)을 고루 다스려 고요함에 들어가는 이는 점문(漸門)에 속하는 낮은 근기의 소행이다. 그는 성성과 적적을 고루 가진다고 하지만, 적적만을 취한 수행이 될 뿐이다. 어찌 할일을 마친 사람의 본래 고요함(本寂)과 본래 앎(本知)을 떠나지 않고 자유자재로 겸해 닦는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앞 뒤를 따진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뜻은, 힘씀과 작용(功用)에 떨어지지 않고 원래 저절로 무위(無爲)여서 따로 특별한 때가 없는 것이다.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도 그러하며, 대소변을 볼 때도 그러하고, 남과 만나 이야기할 때도 그러하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항상 그러하여, 마치 빈배가 물결을 타고 높았다 낮았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기슭을 돌 때 굽었다 곧았다 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마다 분별이 없다. 오늘도 유유자적(悠悠自適) 내일도 유유자적하면서, 온갖 인연을 따라도 아무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으며, 순진하고 거짓이 없어 보고 들음이 예사로워 한 티끌도 맞서는 것이 없다.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노력도 필요 없고, 한 생각도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힘을 빌릴 것도 없다. 그러나 업장은 두텁고 익힌 버릇은 무거우며,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뜨며, 무명의 힘은 세고 지혜의 힘은 약해서, 선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이는 얽힌 인연을 잊고 번뇌를 떨어버리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옛 사람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다.

'여섯 감관(六根)이 대상을 거두어 마음이 인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定)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함께 공함을 비추어보아 미혹이 없는 것을 지혜(慧)라 한다.'

이것이 상(相)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행할 바이지만 대치하는 문에서는 어쩔 수 없다. 만약 들뜸이 심하면 먼저 선정의 문으로써 산란을 거두어 마음이 인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도록 하며, 혼침(昏沈)이 많으면 지혜의 문으로써 공(空)을 관하여 비추어보아 미혹을 없애고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한다.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무기(無記, 선도 악도 아닌 것)를 다스려, 움직이고 고요한 자취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공부를 마치면, 어떤 대상을 대하더라도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인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비로소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불성을 분명하게 본 이라 할 것이다.



8. 깨치기 전은 참 수행이 아니다.

[질문] 스님의 판단에 따르면, 깨달은 뒤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뜻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성의 문에서는 '걸림 없는 고요와 앎이 원래 무위(無爲)여서 한 티끌도 상대될 것이 없으므로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수고가 없고, 한 생각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하고 판단하기를 '그것은 돈문(頓門)에 들어간 이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른 문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을 거두고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판단하기를 '이것은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가 행할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수행할 경우, 먼저 자성의 문에 의해 선정과 지혜를 겸수한 후에 다시 상을 따르는 문의 다스리는 공부를 하는지,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문에 의해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성의 문에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걸림 없이 고요하고 알기 때문에 다시 더 다스릴 공부가 없는데 무엇 하러 또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흰 옥에 문채를 새겨 덕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먼저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다음에 자성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문의 낮은 근기가 깨치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문자가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데에 노력이 없는 노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문의 선정과 지혜가 돈. 점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돈문자는 자성의 문에 의지해 걸림 없이 더 공부할 필요도 없고, 점문의 낮은 근기는 상을 따르는 문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입니다. 두 문의 근기가 돈점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문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해석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하여 의문을 풀어 주소서.

[대답] 내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문을 갖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따질 필요가 없다. 그 두 문에 대해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성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돈문에서 노력함이 없는 노력으로 두 가지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고 자성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깨치기 전 점문의 낮은 근기가 다스리는 공부이고,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수행자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깨친 다음에 닦는 문에서 겸하여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를 말한 것은, 전혀 점문의 근기가 행할 바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숙박을 의탁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근기가 뛰어난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써 그 가는 길을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다. 번뇌가 사라지고 심신이 홀가분해서, 선에서도 선을 떠나고 악에서도 악을 떠나 여덟 가지 바람(八風)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 가지 느낌(三受, 괴로움.즐거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해 걸림 없이 겸해 닦으며 천진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禪)이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문의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할 필요도 없다.

먼저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번뇌가 심히 진하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워 대상과 마주칠 때마다 생각 생각 감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대상을 만든다. 혼침과 산란에 부추김을 당해 고요함과 앎이 한결같지 않은 어두운 이는,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어 대치하기를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에 의해 잠시 익힌 버릇을 억제하더라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점문의 낮은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은 비록 공부를 잊지 않아 생각 생각 익히고 닦더라도 곳곳에 의문을 일으켜 거리끼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 같아서 불안한 자취가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대치하는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홀가분해질지라도 의혹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 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깨친 사람의 경지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한 묘성(妙性)에 계합하여 걸림 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되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기(漸機)의 행할 바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본다면 쇠로써 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순서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문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수도인은 이 일을 잘 되새겨 다시는 더 의혹을 일으켜 스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다시 또 어떻게 하겠는가. 부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알아 낱낱이 자신에게 돌리어 근본에 계합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진한 이치가 어둡지 않고 분명해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것에 의해 깨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는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씨를 뿌린 대승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면서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번 귀를 스쳐 잠시 인연을 맺어 놓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될 종자의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우며 이루어서 지키고 잊어버리지 않는 이의 공덕이야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9. 이 몸 이 때 못 건지면 지난 세월 윤회의 업을 돌이켜보면 몇천 겁을 두고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방종하여 그전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잃지 않게 하였는고.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남이고,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을 때, 한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될수 있겠는가. 막상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수도인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無常)은 신속해서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살아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세상의 유위(有爲)의 선을 가지고도 삼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여러가지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最上勝)의 심오한 법문이겠는가. 잠시 믿기만 해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전에 말씀하기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게 칠보로 공양하여 모두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 성자의 네 가지 지위)를 얻게 하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러나 잠깐동안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여 얻는 공덕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법문은 가장 존귀하여 어떤 공덕으로도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道場)이니, 간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을 세우는 것보다 뛰어나다. 보배로 된 탑은 언젠가 무너져 티끌이 되겠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마침내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고 하였다.

원컨대 수도인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두라.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닦지 않으면 만겁(萬劫)에 어긋날 것이고, 힘써 닦으면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배가 고파 음식을 대하고도 먹을 줄 모르고, 병들어 의사를 만나고서도 약을 먹을 줄 모르니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또 세상 일은 그 모양도 볼 수 있고 그 공도 징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얻더라도 희귀하다고 찬탄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마음 법문은 그 모양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마(天魔)와 외도(外道)가 비방할래야 문이 없고, 제석·범천 등 모든 천신이 칭찬할래야 미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식견이 옅은 범부들이야 어찌 흉내인들 낼 수 있겠는가.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떻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떻게 사자처럼 소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서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세월에 모든 성인을 섬기어 온갖 선근(善根)을 심었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게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 말씀하기를 '이 글귀에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 계신 데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대승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해 말한다'고도 하였다. 바라건대 도를 구하는 사람은 미리 겁을 먹지 말고 용맹심을 내야 할 것이니, 지난 세월에 얼마나 착한 인연을 쌓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뛰어난 이 법문을 믿지 않고 열등을 자처하여 어렵다는 생각으로 지금 닦지 않는다면 비록 지난 세상의 선근이 있다 할지라도 이제 그것을 끊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대로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가 쌓인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하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다가 어찌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할 것인가.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그 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려라.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B%88%8C

 

지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눌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법명지눌(知訥)출생1158년고려 황해도 서흥군 동주(洞州: 서흥)입적1210년 (53세)종파조계종저작《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

ko.wikipedia.org

지눌(知訥, 1158년~1210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은 고려 중기 ~ 후기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鄭)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며, 탑호는 감로(甘露)이다. 동주(洞州: 서흥) 출생이다.[1]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道義: fl. 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2]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3] 태고국사 보우(普愚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4]

 

달마대사혈맥론(達磨大師血脈論)

목차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제3장

第三節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

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제4장

第四節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제5장

第五節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58226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달마대사혈맥론(達磨大師血脈論) 목차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제2장 迷...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59321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5. 問曰:...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3813

 

제3장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제3장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 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8. 問曰:因何不得禮佛菩薩等? "무엇 때...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4078

 

제4장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제4장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3. 問曰:白衣有妻子,婬欲不除,憑何得...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4331

 

제5장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제5장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問曰:旃陀羅殺生作業,如何得成佛? “찬드...

blog.naver.com

 

 

달마대사혈맥론(達磨大師血脈論)

목차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제3장
第三節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
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제4장
第四節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제5장
第五節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58226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달마대사혈맥론(達磨大師血脈論) 목차 제1장 心外無佛性(심외무불성) 마음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 제2장 迷...

blog.naver.com



1.
삼계(三界)가 뒤섞여 일어나지만, 함께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 전하고, 문자(文字)를 세우지 않는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고,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나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에게 답할 수 있겠으며, 그대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니, 시작 없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모두가 그대의 본래 마음이고, 모두가 그대의 본래 부처이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 역시 그와 같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 얻을 수 있는 다른 부처는 결코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 밖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찾을 수는 절대로 없다.

스스로의 본성(本性)은 진실하여,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법(法)은 곧 마음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바로 깨달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와 깨달음이 모두 어디에 있는가?

비유하자면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으니, 붙잡을 수가 있겠는가?

허공은 다만 이름일 뿐이고, 모양은 없어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허공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마음을 없애고 밖에서 부처를 찾을 수는 결코 없다.

부처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인데, 어떻게 이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을 것인가?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그 마음을 말할 뿐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 밖에 이미 부처가 없는데, 왜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켜서 서로 속이고 속는가?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저 무정물(無情物, 불상)에게 사로 잡혀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일 뿐 이익이 없다.

부처에게는 허물이나 근심이 없는데, 중생이 거꾸로 되어 있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2.
만약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니, 

부처가 부처를 헤아리지는 않는다.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는다면, 부처를 알지 못한다.

밖에서 부처를 찾기만 하면, 모두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할 수는 없으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할 수는 없다.

부처는 경(經)을 외우지도 않고, 부처는 계(戒)를 지키지도 않고,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지키고 범함이 없으며, 선(善)도 악(惡)도 짓지 않는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성을 보아야 하니, 본성이 곧 부처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염불(念佛)하고 경을 외우고, 재(齋)를 지내고, 계(戒)를 지킨다고 하여도 이익될 것이 없다.

염불하면 인과(因果)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聰明)을 얻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날 수 있고, 

보시(布施)하면 복된 과보(果報)를 얻지만, 끝내 부처를 찾지는 못한다.


3.
만약 스스로 밝게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생사(生死)의 근본을 밝혀내어야 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 한다면,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비록 12부경을 설명할 수 있더라도, 역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삼계(三界)에서 받는 고통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善星) 비구는 12부경을 외울 줄 알았지만, 도리어 스스로는 윤회를 면하지 못했으니,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성(善星)이 이미 그와 같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서너권의 경론(經論)을 강의할 수 있는 것으로 불법(佛法)이라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하면서 쓸데없는 글들만 외운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4.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바로 본성을 보아야만 한다.
본성이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자재(自在)한 사람이며, 할 일이 없는 사람이고, 조작함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종일 아득하고 어두워서 밖으로 쫓아 다니며 찾겠지만,

부처를 찾아 보아야 원래 부처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얻을 수 있는 한 물건도 없지만, 아직 깨닫지를 못했다면,

역시 선지식 (善知識, 일체 이치를 요달한 불조<佛祖>의 혜명을 상속받은 분)을 찾아가

반드시 끈기 있게 공부해서 마음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살고 죽는 일이 크니,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아니된다.

스스로를 속여 보아야 이로울 것이 없다.


비록 값진 보배가 산처럼 쌓여 있고, 일가 권속이 강의 모래알처럼 많더라도,

눈을 뜨면 보이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가 ?

그러므로 유위(有爲)의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급히 스승을 찾지 않는다면, 헛되이 일생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은 자신에게 있지만, 스승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끝내 밝혀낼 수가 없다.

스승을 말미암지 않고 깨닫는 자는 매우 희귀하다.

만약 자기 스스로 인연을 깨달아 성인(聖人)의 뜻을 얻는다면,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

이런 사람은 곧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남다른 뛰어난 공부꾼이다.

만약 아직 깨달아 알지 못했다면, 반드시 부지런히 끈기 있게 선지식을 찾아 배워야 하니,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밝게 깨닫는다면,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과는 같지가 않다.

흑백을 분별하지도 못하면서 망령된 말로써 불교를알린다면,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는 법을 말하는 것이 내리는 빗물처럼 유창하더라도 모두가 마구니의 말일 뿐, 부처의 말은 아니다.

스승은 마구니의 왕이고, 제자는 마구니의 백성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저 백성을 떠맡아 이끌어 모르는 사이에 생사(生死)의 바다에 떨어진다.

그저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이면서 망령되이 부처라고 자칭한다면, 이러한 중생은 죄가 큰 사람이니,

저 일체 중생을 속여서 마구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도 12부 경전의 가르침을 말한다면,

이것은 모두 마구니의 말이며, 마구니 집안의 권속이지, 불법의 제자는 아니다.

이미 흑백을 구분히 못하는데, 무엇에 의지하여 생사를 면할 것인가?

만약 본성을 본다면 곧 부처이고, 본성을 보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만약 중생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얻을 불성(佛性)이 있다면,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중생의 본성이 곧 불성이다. 본성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가 곧 본성이다.

본성을 제외하고는 얻을 부처가 없고, 부처를 제외하고는 얻을 본성이 없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59321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5. 問曰:...

blog.naver.com

제2장  迷心萬行 未免輪回(미심만행 미면윤회)
-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5.
“만약 본성을 보지 않더라도,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精進)하고,

널리 복되고 이로운 일을 한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성불할 수 없다.“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인과법(因果法)으로서,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니, 곧 윤회(輪廻)하는 법이다.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느 때에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겠는가? 

성불이란 모름지기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않으면, 인과(因果) 등의 말들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만약 부처라면, 외도법(外道法)을 익히지 않는다.

부처는 업을 짓는 사람이 아니니, 부처에게는 인과(因果)가 없다.

다만 얻을 수 있는 조그만 법이라도 있기만 하면,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어떻게 성불하겠는가?

하나의 마음(一心)에든, 하나의 능력(一能)에든, 하나의 이해(一解)에든, 하나의 견해(一見)에든, 

머물기만 하면, 부처는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부처에게는 지키거나 범할 것이 없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 공(空)이니, 역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모든 법은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선(善)을 닦지도 않고, 악(惡)을 짓지도 않고, 정진(精進)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만드는 일이 없는 사람이니, 마음에 머물러 부처를 본다면, 용납되지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라.

만약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결코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자성을 보지 못하고서, 언제나 ‘만드는 일이 없다’라는 생각을 만들려 한다면, 이것은 큰 죄인이고,

어리석은 사람이고, 무분별의 허공 속에 떨어져서 어둡기가 술취한 것과 같은 사람이어서 좋고 나쁨을 판별하지 못한다.

만약 만드는 일이 없는 법을 닦으려 한다면, 먼저 반드시 자기성품을 본 연후에야 반연하는 생각이 쉬어지는 것이다.

자성을 보지 못하고도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사람은 인과(因果)를 무시하고 마구 악업(惡業)을 짓고는,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空)이니 악한 일을 해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무간흑암지옥(無間黑暗地獄)에 떨어져 영원토록 벗어날 기약이 없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6.
“이미 움직이고 동작함이 언제나 모두 본래 마음이라면, 육체가 무상(無常)할 때에 어떻게 본래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본래 마음이 늘 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 무슨 까닭에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없는가?“

“꿈 꾼 적이 있습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에, 그대의 본래 몸인가?“

“본래 몸입니다.“

“그대의 말과 움직임과 동작은 그대와 따로 있는가, 따로 있지 않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미 따로 있지 않다면, 곧 이 몸이 그대의 본래 법신(法身)이고, 이 법신이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과 다르지 않아서, 생기거나 사라진 적이 없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옳고 그름도 없고, 남녀의 모습도 없고, 

승속(僧俗)과 노소(老少)도 없고, 성인(聖人)도 없고, 범부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닦아서 깨달음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고, 근력(筋力)도 없고, 용모(容貌)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산이나 강이나 석벽(石壁)이 가로 막을 수도 없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가고 옴에, 자재(自在)하고 신령스러이 통한다.

오온(五蘊)의 산을 통과하고,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니, 어떤 업(業)이라도 이 법신(法身)을 구속할 수 없다. 

이 마음은 미묘(微妙)하여 보기가 어려우니, 이 마음은 색심(色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사람들은 모두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광명(光明) 속에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물어 보면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과 같다.

모두가 스스로 받아서 사용하는데,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부처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은 전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까닭에 업을 지어서

생사(生死)의 강에 떨어져 나오고자 하지만 도리어 잠겨 버리니, 단지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생이 만약 어리석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물어 보면 그 가운데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면서도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말은 잘못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밝히기가 어려워서 오직 부처 한 사람만이 이 마음을 잘 알아차릴 뿐,

나머지 사람들과 하늘사람과 중생들은 전혀 밝게 깨닫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지혜가 이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바야흐로 법성(法性)이라 이름하고, 또 해탈이라 이름 하니, 

생사에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그를 구속할 수 없으니, 일컬어 크게 자유로운 으뜸가는 여래[大自在王如來]라 하고,

또 생각과 말로 하지 못한다[不思議, 부사의]고 하고, 또 성스러운 바탕[聖體, 성체]이라고 하고,

또 영원히 살아서 죽지 않는다[長生不死]고 하고, 또 큰 신선[大仙]이라 한다.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바탕은 곧 하나이니, 성인(聖人)이 여러 가지로 분명한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크기는 광대하고, 응대하여 작용함은 끝이 없다. 눈에 응해서는 색을 보고, 귀에 응해서는 소리를 듣고,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고, 혀에 응해서는 맛을 알고,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이다.

언제나 말길이 끊어지기만 하면, 곧 자기 마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色)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색에 다함 없음이 곧 자기 마음이고, 마음인 의식이 모든 것을 잘 분별함과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함이 모두 지혜이다. 

마음은 모습이 없고, 지혜 역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사대색신(四大色身)이 곧 번뇌이니, 색신에는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이다.

법신은 언제나 머물러 있으니, 다시 머물 것은 없다.

여래의 법신은 한결같아서 다르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불성이 본래 스스로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7.
가섭(迦葉)은 다만 본성(本性)을 깨달았을 뿐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본성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의 마음과 같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이 마음을 전하였을 뿐이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는 얻을 부처가 없다.

뒤집힌 중생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찾아서 하루 종일 바쁘다.

염불(念佛)하고 예불(禮佛)하지만,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단지 자기 마음만 알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무릇 모습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妄)하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있는 그곳에 곧 부처가 있다.’ 고 하였다.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문득 앞에 나타나더라도, 결코 절하고 공경할 필요가 없다.

나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니, 본래 그런 모습은 없다.

만약 모습을 취한다면 곧 마구니에게 포섭되니, 모두 사도(邪道)에 떨어진다.

만약 (불상과 보살상이라는) 환상(幻想)이 마음에서 생긴다면, 절할 필요가 없다.

절하는 자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진실을) 아는 자는 절하지 않는다.

절 하는 것은 마구니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할까봐 염려되어, 그 때문에 이렇게 판별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와 본성(本性)의 바탕 위에는 전혀 이러한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다른 경계가 있더라도, 결코 붙잡아 취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심할 필요도 없다.

나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니, 어느 곳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겠는가?

나아가 천룡(天龍), 야차(夜叉), 귀신(鬼神),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등의 모습에 대해서도,

또한 마음을 써서 공경하거나 귀중하게 여기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마음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모든 모습은 전부 허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결코 모습을 붙잡지는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를 내고, 부처라는 모습, 보살이라는 모습을 내어서,

공경하고 귀중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중생의 처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무릇 있는 모습들은 모두 허망하다.'고 하였으니, 전혀 정해진 진실은 없는 것이다.

환상(幻相)에는 정해진 모습이 없으니, 이것이 곧 무상(無常)한 법이다.

단지 모습을 취하지 않기만 하면, 저 성인의 뜻과 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모습을 떠난 것을 모든 부처라고 일컫는다.’라 한 것이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3813

 

제3장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제3장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 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8. 問曰:因何不得禮佛菩薩等? "무엇 때...

blog.naver.com

제3장  明不敬所以(명불경소이)
          
공경치 말라는 이유를 밝히다



8.
"무엇 때문에 부처나 보살들에게 절하면 안됩니까?"

“천마(天魔)와 파순(波旬)과 아수라(阿修羅)가 신통(神通)을 드러내어 모두 보살의 모습을 지을 수 있다. 

여러 가지로 변화(變化)하는 것은 모두 외도(外道)이고, 결코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자기 마음이니, 착각하여 절하지 말라.

각(覺)이란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것이다.

기연(機緣)에 응하고, 사물을 대하며,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도(道)이고, 도가 곧 선(禪)이다.

선(禪)이라는 한 글자는 범부도 성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본성을 보는 것이 선(禪)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선이 아니다.

설사 천 권의 경전과 만 권의 논서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다만 범부일 뿐, 불법(佛法)은 아니다.

지극한 도는 그윽하고 깊어서 말로써는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 

경전의 가르침이 어떻게 미치겠는가?

단지 본성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된다.

자기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이다.

성스런 본바탕은 본래 청정하여 잡스런 때가 없다.

있는 말들은 모두가 성인(聖人)이 마음에서 일으켜 사용하는 것이다.

작용이니 본체니 하는 것은 본래 헛된 이름이다.

말로 미치지도 못하는데, 12부 경전으로 어떻게 미칠 수 있겠는가?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아서 증득(證得)할 필요가 없다.



9.
도는 소리와 색이 아니니,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차갑고 따듯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남에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여래(如來)만이 알 수 있을 뿐, 나머지 사람이나 하늘사람 등의 부류는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한다.

범부의 지혜로는 미치지 못하니, 모습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마음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한 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모습을 붙잡고, 일체법을 붙잡으면,
바로 외도(外道)에 떨어진다.

만약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남을 안다면, 붙잡지 말아야 하니, 붙잡으면 알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12부 경전은 모두 부질없는 문자이다.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서가 다만 마음을 밝히는 것이니, 

말끝에 계합(契合)하여 알아차리면,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극한 도리는 말을 벗어났지만, 가르침은 말이니, 사실은 도(道)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이 없고, 말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밤에 꿈속에서 누각, 궁전, 코끼리, 말 등을 보거나, 나무, 수풀, 연못, 정자 등과 같은

모습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모습들에는 좋아하여 집착하는 한 생각도 낼 수가 없으니,

모두가 의탁하여 생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 모습을 붙잡지 않을 수 있다면, 의심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이 잠깐이라도 일어나면, 곧 마구니에게 사로잡힌다.

법신(法身)은 본래 청정하여 받을 것이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헤매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알 지 못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망령되이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좋아하여 집착하게 되면, 자재할 수가 없다.

지금 만약 깨닫는다면, 본래의 몸과 마음은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는다.

만약 성인을 벗어나 범부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면, 스스로 중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거스르는 경계에서든 순탄한 경계에서든 모두 자재할 수 있으니,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 없어서 성스러움이 영원하다.

큰 위덕(威德)이 있는 모든 종류의 업(業)을 저 성인이 부리니, 천당과 지옥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범부는 정신과 의식이 어두우니, 성인이 안팎이 밝게 통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의심이 있으면 행하지 않지만, 행하게 되면 생사의 바다 위에서 떠다니게 되어, 뒤에 후회하더라도 구해 줄 수가 없다.

가난과 고생이 모두 망상으로 말미암아 생기니, 

만약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서로서로 권고하여 다만 행함 없이 행한다면, 곧 여래의 지견으로 들어간다.


10.
처음 발심한 사람은 정신과 의식이 전혀 안정되어 있지 않다.

만약 꿈속에서 흔히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바로 의심할 필요는 없으니, 모두 자기의 마음이 일으킨 것이고, 밖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만약 밝음이 나타남을 보았는데, 태양보다도 더 밝다면, 곧 남은 습이 문득 없어지고, 법계(法界)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바로 도를 이루는 원인이지만, 오직 스스로가 알 뿐, 남에게는 말할 수 없다.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이에 눈에서 밝음을 보는데,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면, 남에게 말하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지니, 역시 자성(自性)의 밝음이다.

혹은 밤중에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눈에서 밝음을 보아 낮과 다름이 없다면,

괴이하게 여기지 말 것이니,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게 드러나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밤에 꿈속에서, 별이나 달을 또렷이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여러 인연을 쉬고자 하는 것이니,

역시 남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꿈이 만약 어둡고 어두워서 마치 어두운 그늘 속을 가는 것과 같다면, 

자기 마음에 번뇌의 장애가 두꺼운 것이니, 역시 스스로 알 수 있다.


11.
만약 본성을 본다면, 독경하고 염불할 필요가 없다.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보아야 이익될 것이 없고, 정신과 의식이 더욱 혼미하게 될 뿐이다.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다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마음을 안다면, 가르침을 살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만약 범부를 빠져나와 성인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곧 업(業)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서 분수따라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만약 자주 성을 내거나 기뻐한다면, 본성을 돌려서 도와 서로 어긋나게 만들 것이다.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한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

성인은 생사 속에서 자재하여, 나타나고 사라지고 숨고 드러남에 정해진 것이 없다.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할 수가 없으니, 성인은 삿된 마구니를 부순다.

모든 중생이 본성을 보기만 하면, 남은 습이 문득 소멸하고, 정신과 의식이 어둡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알아차린다.

다만 지금 진실로 도를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업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 남은 습도 역시 사라져서, 저절로 명백할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없다.

외도(外道)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힘써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삼으니, 성인의 뜻과는 어긋난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염불하고, 경전을 뒤져 보아야, 정신의 본성에는 어두워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바삐 두루 명성과 이익을 찾겠는가? 나중에 어디에다 쓰겠는가?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고, 늘 배움에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도를 행하고, 

늘 배움에 앉아서 눕지 않고, 두루 배우고 많이 듣는 것을 불법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12.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니,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나는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큰 죄인이다.

10인의 큰 제자 가운데, 아난(阿難)은 다문(多聞) 가운데 첫째였지만, 부처를 알지는 못하고, 다만 배워서 많이 알 뿐이었다.

이승(二乘)과 외도(外道)는 모두 부처를 알지 못하고, 하나하나 닦아서 깨닫는다고 알고 있으니,

인과에 떨어져 중생의 업보를 받고 생사를 면하지 못한다.

부처의 뜻에 위배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이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이 없다.

경에서 말하기를 ‘천제인(闡提人)은 믿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믿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순서대로 나아가도 소용없다.

저 선량한 성인을 비방하고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선과 악이 또렷하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 

천당과 지옥이 다만 눈앞에 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고,

지금 깜깜한 지옥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 업이 무겁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마치 눈 없는 사람이 빛이 밝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에게 말해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맹인(盲人)이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알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지금 축생의 잡류에 떨어져 있고, 빈궁하고, 하천(下賤)하게 태어나 있어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비록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바로 물으면 또한 말하기를

 ‘나는 지금 즐거워서 천당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살아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다.

이와 같이 악(惡)한 사람은 다만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낼 수가 없는 것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만약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보면,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으니, 세속인 또한 부처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머리를 깎아도 역시 외도이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4078

 

제4장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제4장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3. 問曰:白衣有妻子,婬欲不除,憑何得...

blog.naver.com

 

제4장   道不在山野(도부재산야)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



13.
“세속인은 처자가 있고, 음욕도 없애지 않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습니까?”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음욕을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견성하기만 하면 음욕은 본래 공적(空寂)하니, 끊어 없앨 필요도 없고, 즐겨 집착하지도 않는다.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본성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비록 오온(五蘊)의 색신(色身) 속에 있지만, 그 본성은 본래 깨끗하여 오염될 수가 없다.

법신(法身)은 본래 감각을 받아들임이 없어서, 배고픔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추움도 없고, 더움도 없고, 

병도 없고, 사랑도 없고, 딸린 권속도 없고, 고통과 즐거움도 없고,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고, 

장점과 단점도 없고, 강함과 약함도 없다.

본래 얻을 수 있는 한 물건도 없다.

다만 이 색신(色身)이라는 원인에 집착하기 때문에, 배고픔, 갈증, 추움, 더움, 질병 등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만약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자재하게 행위하여라.

만약 생사 속에서 자재(自在)를 얻어 일체법을 굴린다면, 성인과 같이 신령스러이 통하고 자재하고 막힘이 없어서 불안한 곳이 없을 것이다.

만약 마음에 의심이 있다면, 결코 어떤 경계도 뛰어넘지 못한다. 조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조작하면 생사의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찬드라(candala; 도살업 등에 종사하는 최하층의 천민)도 역시 성불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8464331

 

제5장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제5장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問曰:旃陀羅殺生作業,如何得成佛? “찬드...

blog.naver.com

 

제5장 屠漢亦得成道(도한역득성도)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찬드라는 살생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가 있습니까?”

“단지 견성을 말할 뿐, 업 짓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비록 업 짓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아도,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다만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속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한다. 본성을 깨닫게 되면, 끝내 업을 짓지 않는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염불해도 과보를 면하지 못하니, 생명을 살해하는 것까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본성을 보면, 의심이 문득 사라지니, 생명을 죽인 것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14.
인도의 27조사가 다만 차례차례 심인(心印)을 전했을 뿐이며,

나는 이제 이 땅에 와서 오직 돈교대승(頓敎大乘)의 즉심시불(卽心是佛)만을 전할 뿐,

지계(持戒)나 보시(布施)나 정진(精進)이나 고행(苦行)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물과 불 속에 들어가고, 칼을 꽂은 바퀴 위에 올라가고, 

한 끼 밥만 먹고, 늘 앉아서 눕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외도의 유위법(有爲法)이다.

만약 행위와 동작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대가 곧 모든 부처의 마음이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단지 마음을 전한다고만 하였으니, 다시 다른 법은 없다.

만약 이 법을 알아차리게 되면, 범부가 한 글자도 알지 못해도 역시 부처이지만, 

만약 자기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더라도 부처 찾는 일은 끝내 이룰 수 없다.

부처는 또 법신(法身)이라고도 하고, 본심(本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음에는 모습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근육과 골격도 없고, 

마치 허공과 같아서 붙잡을 수도 없고,물질과 같지 않고, 외도와 같지가 않다.

이 마음은 여래(如來)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중생인 어리석은 사람들은 밝게 알 수가 없다.


15.
이 마음은 사대색신(四大色身, 흙 물 불 바람) 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 마음을 벗어난다면,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몸에는 지각(知覺)이 없으니 마치 초목(草木)이나 기와조각 같고,

이 몸에는 정식(情識)이 없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겠는가?

만약 자기 마음이 움직이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들이, 모두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여 작용함이다.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니, 움직임이 바로 그 작용이다.

움직여 작용함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에는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은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에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마음에는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은 마음의 작용이고, 작용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움직이면 마음이 작용하고, 작용하면 마음이 움직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작용하지도 않는다.

작용의 바탕은 본래 공(空)인데,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지만,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움직이니 또 움직일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까닭에 종일 왔다갔다하지만 한 번도 왔다갔다한 적이 없으며, 종일 보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종일 웃지만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으며, 종일 듣지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 알지만 한 번도 안 적이 없으며, 

종일 기뻐하지만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으며, 종일 다니지만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으며, 

종일 머물지만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사라졌다’고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 두루 고요하다.

나아가 성내고 기쁘고 아픈 것이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아픔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악업(惡業)은 고통스런 과보를 가져오고, 선업(善業)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성을 내면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만약 성냄과 기쁨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모든 업(業)에서 해탈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경전을 읽는다면, 결정코 의지할 것이 없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드러낸 것이 이와 같지만, 한 두 가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16.

頌曰 (송왈)

心心心難可尋,寬時遍法界,窄也不容針。
심심심난가심,관시편법계,착야불용침。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은 찾기가 어려우니,
넓을 때에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다.

我本求心不求佛,了知三界空無物。
아본구심불구불,료지삼계공무물。

나는 본래 마음을 찾고 부처를 찾지 않으니,
;삼계(三界)가 비어서 물건이 없음을 밝게 안다.

若欲求佛但求心,只這心這心是佛。
약욕구불단구심,지저심저심시불。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찾을지니,
단지 이 마음, 마음 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다.

我本求心心自持,求心不得待心知。
아본구심심자지,구심불득대심지。

나는 본래 마음을 찾았으나,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마음을 찾아도 마음을 기다릴 수는 없음을 안다.

佛性不從心外得,心生便是罪生時。
불성불종심외득,심생편시죄생시。

불성은 마음 밖에서 얻을 수 없으니,
마음이 생기면 곧 죄가 생기는 때이다.
 

17.

偈曰  (혜가대사께 전한 전법게)

吾本來此土。  傳法救迷情。
오본래차토 전법구미정。

나는 본래 이 땅에 와서,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려 했다.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열리니,
열매 맺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 달마대사 혈맥론 정리 마침 -  

 

https://book.bfnn.org/books/0848.htm

 

達磨大師血脈論

達磨大師血脈論 達摩祖師著 達摩大師血脈論序 右朝奉郎通判建昌軍事賜緋魚袋任哲作 原人之心,皆具佛性。泛觀諸家禪說一切經文,原其至當之理,未有不言自己性中本來真佛。達磨西來,直

book.bfnn.org

 

 

https://www.youtube.com/watch?v=Bncypq2UzSU&list=PLiAe0FYWJGKwTarJlCUyF3ClwNPNejA84 

 

 

https://www.youtube.com/watch?v=Gp9hMOFNJVQ&list=PLiAe0FYWJGKwTarJlCUyF3ClwNPNejA84&index=2 

 

 

https://www.youtube.com/watch?v=WB1QtxY92qM&list=PLiAe0FYWJGKwTarJlCUyF3ClwNPNejA84&index=3 

 

이하 순서대로  55강까지 나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AJTjXh2A&list=PLiAe0FYWJGKwTarJlCUyF3ClwNPNejA84&index=5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