附. 돈황본 육조단경 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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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육조단경-全文-부 원문 돈황본 육조단경

     ◈  한글  육조단경- 33장까지 全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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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西方 - 서방극락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西方)에 가서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어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去此不遠)'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니라.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바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속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隨其心淨 則佛淨土)'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願生)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으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이 없는 돈법(無生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로 보게 하리니 사군은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色身)은 성(城)이요 눈·귀·코·혀·몸(眼耳鼻舌身)은 곧 성의 문(門)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佛是自性作),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자비(慈悲)는 곧 관음(觀音)이요 희사(喜捨)는 세지(勢至)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人我相)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용이며 진로(塵勞)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三毒)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十善)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자기 마음의 땅 위에 깨달은 성품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眼耳鼻舌身意)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欲界)의 모든 여섯 하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라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22. 修行 - 수행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道俗)을 위하여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어 가지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한 곳에 있음과 다름이없느니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頓敎)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수는구나.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자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無餘)에 이르는 도다.

보리(菩提)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 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더라도
일체가 다 방해되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 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 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正行)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 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邪見)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正見)는 세간을 벗어남(出世間)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23. 行化 - 교화를 행하심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어 가지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천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지거라. 혜능은 조계산(曹溪山)으로 돌아가리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리라(同見佛性)."

함께 앉아 있던 관료·스님·속인들이 육조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치심이여! 옛적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오'한 다음 한꺼번에 다 흩어졌다.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韶州)·광주(廣州)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 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이 삼오천 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宗旨)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였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 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頓敎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24. 頓修 - 단박에 닦음

세상 사람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南能北秀)'라고 하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神秀)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玉泉寺)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시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딘즉 '점(漸)'이요, 견해가 빠른즉 '돈(頓)'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疾直指路)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志誠)스님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서 혜능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왔다 하지 말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스님과 나의 견해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첫째로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卽契本心).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결합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렷다!"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니옵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정·혜(戒定惠)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惡)을 짓지 않는 것을 계(戒)라고 하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惠)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고 합니다. 신수스님의 말씀은 그렇거니와, 큰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 다르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스님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無非)이 자성의 계(戒)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無亂)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癡)이 자성의 혜(惠)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 생각마다 지혜로 관조(觀照)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을 단박 닦으라(自性頓修).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은 예배하고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25. 佛行 - 부처님의 행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어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正法之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正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一佛乘)을 듣고서 이불승(二佛乘)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空寂)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리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開示悟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자리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一乘)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三乘)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心行) <법화경>을 굴리고(轉法華),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구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轉經)이니라."

법달은 한 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佛)."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26. 參請 - 예배하고 법을 물음

그 무렵 지상(智常)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원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四乘)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中乘)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大乘)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은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神會)라고 하였으며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앉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依法修行).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 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 머물렀다.

 

http://www.ss.ncu.edu.tw/~calin/textbook2008/w6.pdf

六祖壇經敦煌本 目錄 眾請說法品………………………………………p.4

悟法傳衣品………………………………………p.4

定慧一體品………………………………………p.8

教授坐禪品………………………………………p.10

傳戒歸依品………………………………………p.10

摩訶般若品………………………………………p.13

功德淨土品………………………………………p.17

參請機緣品………………………………………p.20

唐朝徵詔品(無) 法門對示品………………………………………p.23

付囑流通品………………………………………p.25

 

https://ko.wikisource.org/wiki/%EC%9C%A1%EC%A1%B0%EB%8B%A8%EA%B2%BD

 

육조단경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1. 序言 - 머리말[편집] 혜능(慧能)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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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549

 

 

16. 根機 - 근기

16.根機

善知識아 若欲入甚深法界하며 入般若三昧者는 直修般若波羅蜜行이니 但持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하면 即得見性하야 入般若三昧니라.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法界)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말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當知此人功徳은 無量하야 經中에 分明(名)讃嘆하니 不能具説이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此是最上乘法이니 爲大智上根人説이라 小(少)根智人은 若聞[此]法하면 心不生信하나니 何以故오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譬如大龍若下大雨雨衣閻浮提如漂草葉若下大雨雨放大海不增不減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閻浮提)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若大乘者聞說金剛經心開悟解故知本性自有般若之智自用知惠觀照不假文字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譬如其雨水不從無有元是龍王於江海中將身引此水令一切眾生一切草木一切有情無情悉皆[5]像潤諸水眾流却入大海海納眾水合為一體眾生本性般若之智亦復如是

비유컨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과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少根之人聞說此頓教猶如大地草木根性自少者若被大雨一沃悉皆自到不能增長少根之人亦復如是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頓敎)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有般若之智之與大智之人亦無差別因何聞法即不悟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緣邪見障重煩惱根深猶如大雲蓋覆於日不得風吹日無能現般若之智亦無大小為一切眾生自有迷心外修覓佛[6]來悟自性

삿된 소견(邪見)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即是小根人聞其頓教不信外修但於自心令自本性常起正見煩惱塵勞眾生當時盡悟猶如大海納於眾流小水大水合為一體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頓敎)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正見)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塵勞)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即是見性內外不住來去自由能除執心通達無礙心修此行即與般若波羅蜜經本無差別一切經書及文字小大二乘十二部經皆因[7]因智惠性故故然能建立我若無智人一切萬法本無不有故知萬法本從人興一切經書因人說有緣在人中有愚有智愚為少故智為大人問迷人於智者智人與愚人說法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17. 見性 - 견성

一切經書及文字小大二乘十二部經皆因[7]因智惠性故故然能建立我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나를 세운 것이니라.

若無智人一切萬法本無不有故知萬法本從人興一切經書因人說有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緣在人中有愚有智愚為少故智為大人

사람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問迷人於智者智人與愚人說法令使愚者悟解[8]深開迷人若悟心開與大智人無別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故知不悟即是佛是眾生一念若悟即眾生不是佛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故知一切萬法盡在自身心中何不從於自心頓現真如本[]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眞如)의 본성(本性)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菩薩戒經云我本願自[]姓清淨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識心見性自成佛道即時豁然還得本心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18. 頓悟 - 단박에 깨침

善知識我於忍和尚處一聞言下大[9]頓見真如本性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弘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말끝(言下)에 크게 깨쳐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頓見眞如本性).

是故汝教法流行後代今學道者頓[10]俉菩提各自觀心令自本性頓悟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頓悟) 하는 것이다.

若能自悟者頓覓大善知識[11]亦道見性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何名大善[12]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解最上乘法直是正路是大善知識是大因緣所為化道令得見佛一切善法皆因大善知識能發起故

최상승법(最上乘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因緣)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느니라.

三世諸佛十二部經云在人性中本自具有不能自[]姓悟須得善知識示道見性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若自悟者不假外善知識若取外求善知識望得解說無有是處識自心內善知識即得解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若自心邪迷妄念顛倒外善知識即有教授汝若不得自悟當起般若觀照剎那間妄念俱滅即是自真正善知識一悟即知佛也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觀照)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다.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自性心地以智惠觀照內外[13]名徹識自本心若識本心即是解脫既得解脫即是般若三昧悟般若三昧即是無念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無念法者見一切法不著一切法遍一切處不著一切處常淨自性使六賊從六門走出於六塵中不離不染來去自由即是般若三昧自在解脫名無念行[14]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六賊)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六塵)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인 무념행(無念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莫百物不思當令念絕即是法[15]即名邊見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悟無念法者萬法盡通悟無念法者見諸佛境界悟無念頓法者至佛位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19. 滅罪 - 죄를 없앰

善知識後代得[16]悟法者常見吾法身不離汝左右

"선지식들아, 뒷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나의 법신이 너희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善知識將此頓教法門同見同行發願受持如是佛故終身受持而不退者欲入聖位

선지식들아, 이 돈교(頓敎)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同見同行) 소원을 세워 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받아 지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然須[17]縛受時從上已來默然而付於法發大誓願不退菩提即須分付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에는 모름지기 예로부터 말없이 법을 부촉하여 큰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곧 모름지기 분부(分付)한 것이니라.

若不同見解無有志願在在處處勿妄宣傳損彼前人究竟無益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若遇人不解謾此法門百劫萬劫千生斷佛種性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 만겁 천생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되리라."

大師言.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善知識[]悟說無相[1]令汝[2]名者罪滅亦名滅罪頌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無相頌)'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느니라."

 

頌曰

게송에 말씀하셨다.

 愚人修福不修道  謂言修福而[3]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業元來在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三業)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若將修福欲滅罪  後世得福罪無造

 若解向心除罪緣  各自世中真懺悔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요.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懺悔)니라.

 

   若悟大乘真懺[4]  除邪行正造無罪

 學道之人能自觀  即與悟人同一例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大師令傳此頓教  願學之人同一體

 若欲當來覓本身  三毒惡緣心中洗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 버려라.

 

 努力修道莫悠悠  忽然虛度一世休

 若遇大乘頓教法  虔誠合掌志心求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0341a17] 大師說法了韋使君官寮僧眾道俗讚言無盡昔所未聞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시니, 위사군(韋使君)과 관료와 스님들도 도교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기지 않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20. 功德 - 공덕

使君禮拜自言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和尚說法實不思議弟子當有少疑欲聞和尚望意和尚大慈大悲為弟子說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 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大師言有議即聞何須再三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使君聞法可不[5]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師宗旨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宗旨)가 아닙니까?"

大師言是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弟子見說達磨大師[6]代梁武

"제자가 들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7]諦問達磨

朕一生[8]未來造寺布施供養有[9]有功德否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물었다.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功德)이 있습니까?'

達磨答言並無功德

달마대사께서 대답했다.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

武帝惆悵遂遣達磨出境未審此言請和尚說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六祖言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實無功德使君[10]朕勿疑達磨大師言武帝著邪道不識正法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使君問何以無功德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和尚言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造寺布施供養只是修福不可將福以為功德在法身非在於福田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고 복밭(福田)에 있지 않으니라.

自法性有功德平直是德佛性外行恭敬若輕一切人[11]悟我不斷即自無功德自性虛妄法身無功德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見性)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內見佛性 外行恭敬).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念念德行平等真心德即不輕常行於敬自修身即功自修身心即德功德自心作福與功德別武帝不識正理非祖大師有過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功)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11. 四願 - 네 가지 원

11.四願

今既自歸依三身佛已하니 與善知識으로 發四弘大願하리라 善知識 一時 逐惠能道하라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三身佛)에 귀의하여 마쳤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發四弘大願).

선지식들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衆生無邊誓願度하며 

煩惱無邊誓願斷하며 

法門無邊誓願學하며 

無上佛道誓願成이로다

三唱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衆生無邊誓願度).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煩惱無邊誓願斷).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法門無邊誓願學).

위없는 불도 모두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無上佛道誓願成).

三唱

 善知識아 衆生無邊誓願度는 不是惠能이 度善知識이라 心中衆生을 各於自身에 自姓自度니라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의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何名自姓自度오 自色身中의 邪見煩惱와 愚癡迷()에 自有本覺性하야 將正見度니라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既悟正見 般若之智하야 除却愚癡迷妄하면 衆生의 各各自度라 

邪來()면 正度하고 迷來면 悟度하며 

愚來면 智度하고 惡來면 善度하며 

煩惱來菩薩度하나니 如是度者是名眞度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般若智)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 버리면 중생들 저마다 스스로 제도한 것이니라. 삿됨(邪)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하고 미혹함(迷)이 오면 깨침(悟)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愚)이 오면 지혜(智)로 제도하고 악함(惡)이 오면 착함(善)으로 제도하며 번뇌(煩惱)가 오면 보리(菩提)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眞度)라고 하느니라.

 

煩惱無邊誓願斷은 自心에 除虚妄이요 

法門無邊誓願學은 學無上正法이요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는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虛妄)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없는 바른 법(無上正法)을 배우는 것이다.

 

無上佛道誓願成은 常下心行하야

恭敬一切하야 遠離迷執하야 覺知生般若하야 除却迷妄이니 

即自悟佛道成하야 行誓願力이니라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下心行)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라."

 

12. 懺悔 - 참회

12.懺悔

今既發四弘誓願訖하니 與善知識으로 無相懺悔하야 []三世罪障케하리라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어서 삼세(三世)의 죄장(罪障)을 없애게 하리라."

大師言하되

善知識 前念後念及今念 []念不被愚迷染하야 從前惡行 一時[永斷]하야 自姓 若除하면 即是懺悔 前念後念及今念 念念[]被愚癡染하야 除却從前矯誑心하라 永斷名爲自性懺이요 前念後念及[念念] 念念不被妬(疸疾)하야 除却從前疾妬()하라 自性 若除하면 即是懺이니라 已上三唱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懺悔)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自性懺)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善知識 何名懺悔

 [] 終身不作이요 悔者 知於前非 惡業 恒不離心하면 諸佛前 口説無益이라 我此法門中 永斷不作 名爲懺悔니라

"선지식들아, 무엇을 이름하여 참회(懺悔)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13. 三歸 - 세 가지 귀의

13.三 歸

今既懺悔已하니 與善知識으로 ()無相三歸依戒케하리라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無相三歸依戒)'를 주리라."

大師言하되 善智識 歸依()覺兩足尊하며 歸依()正離欲[]하며 歸依()淨衆中尊하라 

從今已後로는 稱佛爲師하야 更不歸依()餘邪迷()外道하노니 願自[]三寶 慈悲證()()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覺兩足尊)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正離欲尊)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淨衆中尊)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自性)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善知識 惠能 勸善善知識하야 歸依()[自性]三寶하노리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니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

自心 歸依覺하야 邪迷()不生하며 少欲知足하야 離財離色 名兩足尊이요 自心 歸正하야 念念無邪故 即無愛著이니 以無愛著 名離欲尊이요 自心 歸淨하야 一切塵勞妄念 雖在自姓이나 自姓 不染著 名衆中尊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小欲知足) 재물(財)을 떠나고 색(色)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하느니라.

凡夫 []하고 從日至日하야 受三歸依()하나니 若言歸佛인댄 佛在何處 若不見佛하면 即無所歸 既無所歸 言却是妄이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말한다면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善知識 各自觀察하야 莫錯用意하라 經中 只即言自歸依佛이요 (不言歸他佛) 自姓 不歸하면 無所[]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14. 性空 - 성품이 빔

14. 性空(성품이 빔)

今既自歸依()三寶하니 總各各至心이라 與善知識으로 説摩訶般若波羅蜜法하리라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들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善知識雖念이나 不解 惠能與説하리니 各各聽하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어라.

摩訶般若波羅蜜者 西國梵語 唐言 大智惠彼岸到 此法 須行이요 不在口[] 口念不行하면 []如化 修行者 法身 與佛 等也로다.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大智惠彼岸到)'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 외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何名摩訶 摩訶者 是大 心量 廣大하야 猶如虚空하나 莫空()心坐()하라 即落無記()이니라 [虚空] 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하야 盡在空中하나니 世人性空 亦復如是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摩訶)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一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性含萬法 是大 萬法 盡是自姓이라 見一切人及非人 惡之()與善 惡法善法하되 盡皆不捨하며 不可染著하야 ()如虚空하야 名之爲大 此是摩訶行이라

자성이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摩訶行)이니라.

迷人 口念하고 智者 []하니라. 又有迷()하야 空心不思 名之爲大하니 此亦不是로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라.

心量 []어늘 不行하면 是小() 莫口空説하고 不修此行하라 非我弟子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15. 般若 - 반야

15.般若

何名般若 般若 是智惠 []時中 念念不愚하야 常行智惠 即名般若行이라 一念愚하면 即般若絶하고 一念智하면 即般若生이어늘 心中常愚하되 [自言]我修로다

"어떤 것을 반야(般若)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般若는 無形相이니 智惠性이 即是라 何名波羅蜜고 此是西國梵音이 言彼岸到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 '저 언덕에 이른다(彼岸到)'는 뜻이니라.

解義하면 離生滅이니 著境()하면 生滅起()하야 如水有波浪하니 即是於此岸이요 離境하면 無生滅하야 如水承長流하니 故即名到彼岸일새 故名波羅蜜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억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迷人 口念하고 智者 心行하나니 當念時有妄하면 有妄 即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니라 悟此法者 悟般若法이며 修般若行이니 不修即凡이요 一念修行하면 法身 等佛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善知識 即煩惱是菩提 捉前念 迷即凡이요 後念 悟即佛이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卽煩惱是菩提),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이라 無住無去無來하야 三世諸佛 從中出하야 將大知惠到彼岸하야 打破五陰煩惱塵勞하니 最尊最上第一이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五陰)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讃最上하야 最上乘法 修行하면 定成佛하야 無去無住無來往하나니  定惠等하야 不染一切法일새 三世諸佛 從中變三毒하야 爲戒定惠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 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혜(戒定惠)로 삼느니라.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하나니 何以故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爲世有八萬四千塵勞 若無塵勞 般若常在하야 不離自姓하니라 悟此法者 即是無念이라 無億無著하야 莫起()()하면 即自是眞如姓이라 用智()惠觀照하야 於一切法 不取不捨하나니 即見姓成佛道니라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無念)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54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6. 受法 - 법을 받음

 

五祖夜知三更에 喚惠能堂内하야 説金剛經이어늘 惠能이 一聞하고 言下에 便悟(伍)하야 其夜受法하니 人盡不知러라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었다. 혜능이 한 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言下便悟)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便傳頓法及衣하되 汝爲六代祖하니 衣將爲信하라 禀代代相傳에 法以心傳心하야 當令自悟케하라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五祖言하되 惠能아 自古傳法에 命(氣)如懸絲하야 若住此間하면 有人害汝하리니 汝即須速去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能이 得衣法하고 三更에 發去할새 五祖自送能於九江驛하야 登時에 便悟祖處分하되 汝去努力하야 將法向南하야 三年을 勿弘此法하라 難起(去)하리니 在後弘化하야 善誘迷人하야 若得心開하면 汝悟로 無別하리라 辭違已了하고 便發向南하니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며, 떠날 때 문득 오조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兩月中間에 至大庚嶺이러니 不知向後에 有數百人來하야 欲擬害(頭)惠能하야 奪於法이러니 來至半路하야 盡總却迴하고 唯有一僧 姓陳 名惠明(順)하니 先은 是三品將軍이라 性行이 麁惡하야 直至嶺上하야 來趁犯著이어늘 惠能이 即還法衣하되 又不肯取하고 我故遠來는 求法이요 不要其衣니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陳)이요 이름은 혜명(惠明)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하였다.

能이 於嶺上에 便傳法惠明(順)한대 惠明(順)이 得聞하고 言下心開어늘 能이 使惠明(順)으로 即却向北化人來케하니라.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이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7. 定慧 - 정과 혜

惠能이 來衣此地하니 與諸官奪道俗으로 亦有累劫之因이로다 教是先性所傳이요 不是惠能自知니 願聞先性教者는 各須淨心하야 聞了願自餘迷하야 於先代悟하라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서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下是法)惠能大師喚言하되 善知識아 菩提般若之知는 世人이 本自有之로되 即縁心迷하야 不能自悟하니 須求大善知識하야 示導(道)로 見性하라. 善知識아 遇悟成智로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以定惠爲本하나니 第一勿迷言惠定이 別하라 定惠는 體一不二라 即定是惠體요 即惠是定用이니 即惠慧(之)時에 定在惠하고 即定之時에 慧在定이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善知識아 此義는 即是慧等이니 學道之人은 作意하되 莫言先定發慧하며 先惠發定하야 定惠各別하라. 作此見者는 法有二相이니 口説善하고 心不善하면 惠定不等이요 心口倶善하야 内外一衆種이면 定惠即等이니라

혜능이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自悟修行은 不在口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即是人이라 不斷勝負니 却生法我하야 不離四相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一行三昧者는 於一切時中 行住座臥에 常行眞(眞眞)心이 是니 淨名經에 云眞心이 是道場이요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直(眞)心이 是淨土라하니라 莫心行諂曲(典)하고 口説法直하라 口説一行三昧하고 不行直(眞)心하면 非佛弟子니라 但行直(眞)心하야 於一切法에 上無有執著이 名一行三昧어늘 迷人은 著法相하야 執一行三昧하야 直(眞)心을 坐(座)不動이라하며 除妄不起心이 即是一行三昧라하나니 若如是하면 此法은 同無清이라 却是障道因縁이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가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坐不動)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道須(順)通流니 何以却滯리오 心[不]住在하면 即通流니 住即彼縛이라 若座不動이 是면 維摩詰이 不合呵舍利弗의 宴座林中이니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던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라.

善知識아 又見有人이 教人座하야 看心看淨하며 不動不起라하야 從此置功하나니 迷人은 不悟하고 便執成顛하야 即有數百盤하니 如此教道者는 故之大錯이로다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거나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善知識아 定惠는 猶如何等고 如燈光하니 有燈即有光이요 無燈即無光이라 燈是光之(知)體요 光是燈之用이니 [名]即有二나 體無兩般이라 此定惠法도 亦復如是니라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 無念 - 생각이 없음

善知識아 法無頓漸이로되 人有利鈍이라 迷(明)即漸契(勸)하고 悟人은 頓修하나니 識自本[心]이 是見本性이라 悟即元無差別이로되 不悟면 即長劫輪迴니라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善知識아 我自法門은 從上已來로 [頓漸]皆立無念爲(無)宗하야 武(無)相爲無體하며 無住無爲本이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何名(明)無(爲)相고 無相者는 於相而離相이요 無念者는 於念而不念이요 無住者는 爲人本性이 念念不住하나 前念今(念)念後念이 念念相讀하야 無有斷絶하나니 若一念斷絶하면 法身이 即是離色身이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念念時中에 於一切法上無住니 一念若住하면 念念即住라 名繋縛이요 於一切法上에 念念不住하면 即無縛也일새 [是]以無住로 爲本이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善知識아 外離一切相이 是無相이나 但能離相하면 性體清淨이라 是 是以無相爲體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於一切境(鏡)上에 不染이 名爲無念이니 於自念上離境(鏡)하야 不不於法上念生이니라 莫百物不思하야 念盡除却하라 一念이 斷하면 即無別處受生이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學道者는 用心하야 莫不息法意하라 自錯은 尚可어니와 更勸他人가 迷不自見하고 迷 又謗經法하니 是以立無念爲宗이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르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即縁迷(名)人이 於境(鏡)上에 有念하고 念上에 便起邪(去耶)見하야 一切塵勞妄念이 從此而生하니라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然此教門은 立無念爲宗하나니 世人이 離見하야 不起於念하야 若無有念하면 無念도 亦不立이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離二相諸塵勞요 眞如는 是念之體요 念是眞如之用이라 姓起念하야 雖即見聞覺知(之)나 不染萬境(鏡)而常自在로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維摩經에 云 外能善分別諸法相하고 内於第一義而不動이라 하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9. 坐禪 - 좌선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忘無處所).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自作自成佛道)."

  

10. 三身 - 세 몸

善知識아 總須自體하야 以(與)受無相戒하되 一時에 逐惠能口道하라 令善知識으로 見自三身佛케하리라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於自色身에 歸依(衣)清淨法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衣)千百億化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衣)當來圓滿報身佛하라 

'나의 색신(自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 귀의합니다'하라.(이상을 세 번 한다)

已上三唱 色身은 是舍宅이라 不可言歸니 向者三身이 在自法性하야 世人盡有하되 爲迷(名)不見하야 外覓三[身]如來하고 不見自色身中三性佛하나니라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善知識아 聽하라 與(汝)善知識説하야 令善知識으로 衣自色身에 見自法性이 有三世身佛케하리라

선지식들은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此三身佛은 從性上生이니 何名清淨[法]身佛고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法身)의 부처라고 하는가?

善知識아 世人의 性이 本自淨하야 萬法이 在自姓이라 思量一切[惡]事하면 即行衣惡하고 思量一切善事하면 便修於善行하나니 知如是一切法이 盡在自姓하야 自姓이 常清淨하니라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日月常明(名)하되 只爲雲覆蓋하야 上明(名)下暗하야 不能了見日月西辰이라가 忽遇惠風이 吹散하야 卷盡雲霧하면 萬像參羅가 一時皆現하나니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世人性淨이 猶如清天하야 惠如日 智如月하니 智惠常明(名)하되 於外著境(看敬)하야 妄念浮雲이 蓋覆하야 自姓이 不能明이라 故遇善知識이 開眞法하야 吹却迷(名)妄하면 内外明(名)徹하야 於自姓中에 萬法이 皆見하야 一切法의 自在姓이 名爲清淨法身이니라 自歸衣者除不善行이 是名歸依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慧)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밝아 사무쳐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何名爲千百億化身佛인고 不思量하면 性即空寂이로되 思量하면 即是自化라 思量惡法하면 化爲地獄이요. 思量善法하면 化爲天堂하고 毒害는 化爲畜生이요 慈悲는 化爲菩薩이며 智惠는 化爲上界하고 愚癡는 化爲下方하야 自姓變化甚多(名)어늘 迷人은 自不知見이로다 一念善하면 知惠即生하나니 [此名自性化身이니라]

어떤 것을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空寂)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의 화신(化身)이라 하니라.

[何名圓滿報身佛고] 一燈이 能除千年闇하고 一智能滅萬年愚하나니 莫思向前하고 常思於後하라 常後念善이 名爲報身이니라 一念惡報는 却千年善心하고 一念善報는 却千年惡滅하나니 無始(常)已來로 後念善이 名爲報身이니라 從法身思量이 即是化身이요 念念善이 即是報身이요 自悟自修 即名歸依(衣)也라 皮肉은 是色身이며 是舍宅이라 不在歸依也니 但悟三身하면 即識大意(億)로다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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