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리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의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리라. 얻을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주왕산전설>은 현재 크게 두 가지유형으로 전승되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다음과 같다. 옛날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주도(周鍍)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주왕’이라 자칭하며 장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치려다 도리어 패하여 요동을 지나 천신만고 끝에 지금의 주왕산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당나라에서는 신라왕에게 주도를 잡으라고 부탁했다. 신라왕은 마일성(馬一聲)의 다섯 형제를 시켜 그곳에 가서 주왕이라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였으며, 다섯 형제는 우여곡절 끝에 주왕을 잡아 죽였다. 그날 밤 주왕의 서자 대전도군(大典導君)이 주왕의 주검을 찾아 굴을 파서 감추었다. 형제는 그것을 알고 그 굴에 안치된 주왕의 시신을 꺼내어 굴 위에다 쇠갈고리로 주왕과 그 부하를 찍어 올려 세웠다.
또 다른 유형은 다음과 같다. 신라의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였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고려의 군사를 막느라 쌓은 성이 ‘주방산성(周房山城)’이라 일컫는다.
분석
<주왕산전설> 중 하나는 당나라 덕종 때 주도란 사람과 관련된 전설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의 왕자 김주원에 관련된 전설이다. 그런데 두 전설 유형은 우리나라 역사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산 이름도 주방산과 주방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1587년 2월에 학봉 김성일이 주왕산을 유람하고 남긴 시에서도 전설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서애 유성룡의 경우에도 주왕산의 한자를 ‘주왕(朱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의 『주왕산유기(周王山遊記)』에서도 주왕산의 언급은 있으나, 인물전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1597년에 저술한 『주왕산록(周王山錄)』에서는 ‘이 산이 주왕이라고 이름 붙은 것은 삼한시대에 왕호를 가지고 있던 자가 이곳에 피난을 와서 산 위에 대궐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 자는 위급한 일이 있으면 폭포수 가운데 바위구멍에 숨어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각편 또한 현재 전승되는 전설유형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승되는 주왕산 유래와 관련된 두 유형의 전설은 이러한 문헌이 생긴 시기보다 훨씬 후대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전승되는 전설 유형 중 주도 관련 각편은 『동아일보』 1926년 10월 31일자 기사에 소개된 내용이고, 김주원 관련 각편은 1966년에 발간된 『경상북도 관광자원집』에 실린 내용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특징
주왕산에는 유래전설 외에도 주왕산 주변의 자연물에 얽힌 전설이 주왕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기암병풍바위, 학소대, 급수대, 주왕암, 주왕굴, 무장굴, 연화굴, 자하성, 백련암 등에 관한 유래전설은 모두 주왕의 전투 및 가족 관련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끼가 숨쉬는 주왕굴
용추협곡으로 향하는데 낙타의 등처럼 모나지 않은 산들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협곡을 따라 늘어선 나무는 굵었고, 바위 위에는 풀꽃이 자랐다.
오래된 숲을 걷다보면 연두색 페인트를 듬성듬성 칠한 것 같은 바위들을 만나게 된다. 바위의 독특한 문양은 알고보니 지의류 때문이었다. 환경오염 지표식물인 지의류가 자라면 그만큼 자연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소나무, 참나무, 박달나무, 금강송까지 초록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마음을 빼앗긴 것은 가늘게 휘어진 까무잡잡하고 늘씬한 쪽동백이었다. 거칠고 우람한 나무 사이에 다소곳하게 홀로 서 있는 고고한 자태가 매력적이었다.
용추협곡은 장자제(張家界), 독일의 검은 숲이 부럽지 않을 만큼 경이로웠다. 시선이 꽂힌 것은 절벽 아래 움푹 파인 ‘포트홀’이었다. 1㎜도 안되는 틈새로 모래알갱이가 휘감아 돌다가 차츰 자갈이 들어가고 구멍이 커져 웅덩이(沼·포트홀)를 만드는 자연의 섭리가 경외스러웠다.
주왕굴로 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흙길을 밟는데 휙 하고 찬 바람이 볼을 스쳤다. 나무에 걸터앉았던 햇살이 산철쭉 잎에서 살포시 부서졌다.
망월대에 올랐다. 연화봉과 병풍바위, 급수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기암절벽이 쩍쩍 갈라져 뚝뚝 떨어진 주왕산은 지질백화점이다.
주왕굴 입구에 있는 주왕암은 검박했다. 평생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한전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했다. 문밖으로 보이는 여름 숲이 네모난 액자에 걸린 것처럼 명징했다.
주왕굴은 습기가 많고 햇살이 없는 이끼투성이였다. 동굴 앞까지 멍석을 깔아놨지만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주왕굴은 처음 생겼을 때보다 점점 작아진 것으로 보인다. 수천만년에 걸친 침식작용으로 주왕굴로 이어지는 절벽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1만년 뒤에는 사라질지도 모를 일 아닌가.
김기덕 감독이 연못에 절을 짓고 동자승과 노승의 삶을 사계의 변화와 함께 담고있다. “순수 속에 잔인함과 욕망 속에, 살의 속에, 번뇌 속에 해탈을…. 기가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단풍처럼 변하고 썩어 이슬로 땅에 스며드는 사람이,사계절의 반복과 무엇이 다른가?” ‘김기덕’과 ‘해탈’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궁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기덕은 무심한 얼굴로 새로운 영토에 들어섰다. 남동철 기자가경북 청송 주왕산국립공원내 <봄 여름…> 촬영지인 주산지 암자세트를 찾았다. - 편집자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 2003년작& 오영수 쵤영당시 60세
이 산 일원의 지질은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백악기 유천층군의 중성 내지 산성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있다.[2]
주왕산은 아름다운 계류와 죽순처럼 솟아오른 암봉 및 기암 괴석에다 울창한 송림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대전사에서 계류를 끼고 올라가는 좌우로 우람하게 치솟은 암봉과 암벽이 마치 바위병풍을 두른 듯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석병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3]
행정구역상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는 한반도에 마지막 남은 주막으로 500살을 떡 버티고 서 있는 회나무 아래 한적하고 외로이 당그랗게 주저앉아 있다.
지난 2005년 89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인 유옥연씨가 1900년경에 지어진 이래 한 칸 남짓한 방 두칸에 딸린 부엌과 툇마루 등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경북도 민속자료 134호인 이 주막은 지난해 겉모습을 새로 단장한 체 역사와 같이 도도히 흐르는 긴 강을 굽어보며 5000원짜리 막걸리에 배추전 3000원. 묵과 두부가 각 2000원으로 1만2000원짜리 한 상이 손님을 대접한다.
유주모가 세상을 떤 이전부터 상류의 안동, 임하 등 댐으로 인해 줄어드는 강물마냥 인적은 줄어들었고 급기야 주모마저 세상을 뜨니 허물어가는 주막은 나이처럼 많아지는 흰 머릿카락과 다를 바 없었다.
삼강은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운 예천의 관광명소 8경중 2경에 해당하는 곳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경에 지어진 주막으로 삼강나루의 나들이객들에게 허기를 면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지난 2005년 9월 유옥연 주모가 돌아가신 후 페허로 변했던 것을 2007년 삼강주막을 해체한 후 원형 복원공사 및 주변 정비사업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