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八 商君列傳第八사기 권68 상군열전 제8-1

商君者,〔一〕衛之諸庶孽公子也,名鞅,姓公孫氏,其祖本姬姓也。

상군은 위왕의 서공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름은 <앙>이고 성씨는 <공손>씨이며 그 조상은 <희>씨였다

鞅少好刑名之學,事魏相公叔座〔二〕為中庶子。〔三〕公叔座知其賢,未及進。

앙은 젊어서 <형명>의 학을 즐겼고 위나라 재상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가 되었다.

공숙좌는 앙이 현명함을 알았으나 아직 왕에게 천거할 기회가 없었다.

會座病,魏惠王親往問病,〔四〕曰:「公叔病有如不可諱,將柰社稷何?」

마침 좌가 병이 났을 때 위혜왕은 친히 병사에 찾아와 문병하고 좌에게 말하기를,

“공숙의 병이 위중하여 피할 수 없으면 나를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소?”

公叔曰:「座之中庶子〔五〕公孫鞅,年雖少,有奇才,願王舉國而聽之。」

공숙은 말했다.

“나의 중서자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연소하나 뛰어난 인재입니다.

임금께서는 국정 전반을 그 사람에게 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王嘿然。王且去,座屏人言曰:「王即不聽用鞅,必殺之,無令出境。」

왕이 잠자코 있다가 왕이 떠나려고 하니 공숙좌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나서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앙을 쓰기를 꺼리신다면 반드시 그를 죽이십시오. 그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王許諾而去。公叔座召鞅謝曰:

왕이 수긍하고 돌아가자 공숙좌는 앙을 불러 사과하여 이르기를

「今者王問可以為相者,我言若,王色不許我。

“조금 전에 임금이 누가 가히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이냐 묻기에

나는 그대를 천거하였는데, 임금의 얼굴빛은 나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我方先君後臣,因謂王即弗用鞅,當殺之。

나는 임금을 첫째로 신하는 다음으로 생각하기에 이어 임금께 아뢰기를

‘만약에 앙을 쓰지 않으시면 죽이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더니

王許我。汝可疾去矣,且見禽。」

임금께서도 나를 수긍하셨다. 그대는 빨리 달아나게. 미구에 감금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鞅曰:「彼王不能用君之言任臣,又安能用君之言殺臣乎?」卒不去。

앙은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나를 쓰라고 한 상공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나를 죽이라고 하는 상공의 말씀을 받아들이겠습니까?”하고 끝내 앙은 도망하지 않았다.

 

惠王既去,而謂左右曰:

〔六〕혜왕은 공숙의 집을 나와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公叔病甚,悲乎,欲令寡人以國聽公孫鞅也,豈不悖哉!」

“공숙의 병은 매우 위중하여 슬픕니다.

국가의 정사를 공손앙에게 물으라고 나에게 권하니 어찌 망령된 소리가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一〕正義秦封於商,故號商君。   〔二〕索隱公叔,氏;座,名也。座音在戈反。   〔三〕索隱官名也。魏已置之,非自秦也。周禮夏官謂之「諸子」,禮記文王世子謂之「庶子」,掌公族也。   〔四〕索隱即魏侯之子,名罃,後徙大梁而稱梁也。   〔五〕索隱戰國策云衛庶子也。   〔六〕索隱疾重而悖亂也。正義悖音背。

 

公叔既死,公孫鞅聞秦孝公下令國中求賢者,將修繆公之業,東復侵地,迺遂西入秦,因孝公寵臣景監〔一〕以求見孝公。

공숙이 죽은 후에 공손앙은 진효공이 나라 안에 영을 내려 현자를 구하고

선조 목공의 업을 일으키고 동쪽의 잃은 땅을 회복하려 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쪽으로 발을 옮겨 진나라로 가서 효공의 총신 경감의 인도로 효공을 만나 뵈었다.

 

孝公既見衛鞅,語事良久,孝公時時睡,弗聽。

효공은 위앙을 인견하고 오랫동안에 걸쳐 말을 하였다. 효공은 가끔씩 졸면서 앙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罷而孝公怒景監曰:

벌떡 일어나 나와 버리니 효공은 노하여 경감에게 말하기를,

「子之客妄人耳,安足用邪!」

“너의 객은 망령된 사람일 뿐인데 어찌 채용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景監以讓衛鞅。衛鞅曰:「吾說公以帝道,其志不開悟矣。」

경감이 그 뜻을 상앙에게 알리니 상앙이 이르기를,

“나는 공에게 재왕의 도를 설명하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였다

 

後五日,復求見鞅。

5일 뒤에 다시 공에게 알현을 청해 주시오.”

鞅復見孝公,益愈,然而未中旨。

이렇게 하여 앙은 다시 효공을 뵙고 거듭 설명을 하였는데

그러나 역시 공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罷而孝公復讓景監,景監亦讓鞅。鞅曰:

효공은 물러나오자 다시 경감을 꾸짖고 경감은 또한 상앙을 책망하였다.

상앙은 말했다.

 

「吾說公以王道而未入也。請復見鞅。」

“나는 공에게 왕도를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공의 마음에 들지 않았소.

한 번 더 공을 뵙게 해 주시오.”

 

鞅復見孝公,孝公善之而未用也。

상앙이 또 다시 효공을 뵈니 공은 그제야 상앙을 좋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아직 쓰지는 않았다.

罷而去。孝公謂景監曰:「汝客善,可與語矣。」

마치고 물러나오니 효공은 경감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손은 사람이 좋더라.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인물이다.”고 했다.

鞅曰:「吾說公以霸道,其意欲用之矣。誠復見我,我知之矣。」

상앙은 경감에게 말하기를,

“나는 공에게 패도를 설명하였더니 공의 뜻이 움직여 나의 말한 바를 쓸 만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오.

모쪼록 한 번만 더 공을 만나게 해주시오. 나는 공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衛鞅復見孝公。公與語,不自知之前於席也。語數日不厭。

상앙은 다시 또 효공을 만나 뵈었는데 이번에는 공이 이야기에 열중하여

부지중에 무릎이 의자 밖으로 나오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으며 여러 날 말을 하여도 싫은 빛이 없었다.

景監曰:「子何以中吾君?吾君之驩甚也。」

경감이 이르기를, “그대는 어떻게 하여 우리 임금의 뜻을 맞추었는가? 임금의 기쁨은 대단했소.”하였다.

鞅曰:「吾說君〔二〕以帝王之道比三代,〔三〕而君曰:「久遠,吾不能待。且賢君者,各及其身顯名天下,安能邑邑待數十百年以成帝王乎?」

앙은 대답하기를

“나는 공에게 제왕의 도리를 설명하고 삼대의 치세와 어깨를 겨룰 만한 이상 정치의 실현을 말하였더니

공이 이르기를, ‘그것은 아득한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없다.

게다가 현명한 임금은 제각기 당대에 이름을 천하에 드러낸다.

어찌하여 유유히 수천 년 제왕의 도리를 성취하기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하였소.

故吾以彊國之術說君,君大說〔四〕之耳。然亦難以比德於殷周矣。」

그러므로 나는 공에게 부국책을 설명하였더니 공은 크게 기뻐하였을 따름이오.

그러나 임금으로서의 덕은 은·주 성에는 미치지를 못하오.”  

〔一〕索隱景姓,楚之族也。監音去聲平聲並通。   〔二〕索隱音稅,下同。   〔三〕索隱比三。比者,頻也。謂頻三見孝公,言帝王之道也。比音必耳反。正義比,必寐反。說者以五帝三王之事比至孝公,以三代帝王之道方興。孝公曰「太久遠,吾不能」。   〔四〕索隱音悅。 


史記卷六十六

伍子胥 列傳 第六

오자서 열전 제6-4

吳王既誅伍子胥,遂伐齊。

齊鮑氏殺其君悼公而立陽生。

오왕은 오자서를 죽이고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제나라의 포씨들은 제 도공(齊悼公)을 시해하고

양생(陽生)을 새로운 군주로 세웠다.

吳王欲討其賊,不勝而去。

其後二年,吳王召魯衛之君 會之橐皋。[一]

오왕이 찬탈의 죄를 묻는다 하고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회군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오왕이 노(魯)와 위(衛)나라의 군주를 탁고(橐皐)의 땅으로 불러 회맹했다.

其明年,因北大會諸侯於黃池,[二]以令周室。

越王句踐襲殺吳太子,[三]破吳兵。

그 다음 해에 황지(黃池)의 땅으로 제후들을 대거 모이게 하여

주왕의 령을 전했다.

월왕 구천이 비어 있는 오성(吳城)을 습격하여 태자를 죽이고

오나라의 군사들을 크게 격파했다.

吳王聞之,乃歸,使使厚幣與越平。

오왕이 듣고 즉시 회군하여

많은 재물을 바쳐 월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後九年,越王句踐遂滅吳,殺王夫差;

그 후 9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왕 부차를 죽였다.

而誅太宰嚭,以不忠於其君,

而外受重賂,與己比[四]周也。

그리고 백비를 주살했다.

그 군주에게 불충하고,

외부의 적인 자기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아

내통했다는 죄목이었다.

注[一]索隱音拓皋二音。杜預云:「地名,在淮南逡遒縣東南。」正義橐皋故縣

在廬州巢縣西北五十六里。

注[二]正義在汴州封丘縣南七里。

注[三]索隱左傳太子名友。

注[四]正義紀鼻二音。

伍子胥初所與俱亡故

楚太子建之子勝者,在於吳。

오자서가 옛날 초나라로 도망쳐 올 때 함께 온

태자 건(建)의 아들 승(勝)도 오나라에 살고 있었다.

吳王夫差之時,楚惠王欲召勝歸楚。

葉公[一]諫曰:

「勝好勇而陰求死士,殆有私乎!」

오왕 부차 재위 시에

초혜왕(楚惠王)이 승(勝)을 다시 초나라로 귀국시키려고 할 때

섭공(葉公)이 간했다.

「승은 용사들을 좋아하며 자객들을 몰래 모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사사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

惠王不聽。遂召勝,

使居楚之邊邑鄢,[二]號為白公。[三]

白公歸楚三年而吳誅子胥。

혜왕이 듣지 않고 승(勝)을 오나라에서 불러와

초나라의 변경인 언(鄢) 땅에 살게 하고 백공(白公)이라 불렀다.

백공이 초나라에 돌아오고 나서 3년 후에

오나라에서는 자서를 주살했다.

注[一]正義上式涉反。杜預云:「子高,沈諸梁。」

注[二]集解徐廣曰:「潁川鄢陵是。」正義鄢音偃。括地志云:「故郾城在豫州

郾城縣南五里,與-信白亭相近。」

注[三]集解徐廣曰:「汝南-信縣有白亭。」正義括地志云:「白亭在豫州-信

縣南四十二里,又有白公故城。又許州扶溝縣北四十五里北又有白亭也。」

白公勝既歸楚,

怨鄭之殺其父,乃陰養死士求報鄭。

백공 승(勝)이 초나라에 돌아오자

옛날 정나라가 자기의 부친 태자 건을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고

아무도 몰래 자객을 양성하여 정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歸楚五年,請伐鄭,

楚令尹子西許之。

초나라에 돌아온 지 5년이 지나자

그는 정나라 공격을 요청했다.

초 영윤 자서가 이를 허락했다.

兵未發而晉伐鄭,鄭請救於楚。

백공 승이 군사를 미처 일으키기도 전에

당진이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정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楚使子西往救,與盟而還。

초나라에서는 자서(子西)로 하여금 정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자서는 정나라를 구한 후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白公勝怒曰:

「非鄭之仇,乃子西也。」

백공 승이 노하여 말했다.

「나의 원수는 정나라가 아니라 자서다.」

勝自礪劍,人問曰:[一]

「何以為?」

승이 스스로 칼을 갈고 있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찌하여 몸소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까?」

勝曰:「欲以殺子西。」

승이 대답했다.

「자서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子西聞之,笑曰:

「勝如卵耳,何能為也。」

자서가 전해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승은 마치 바위 위의 계란일 뿐인데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注[一]索隱左傳作「子期之子平見曰『王孫何自礪也』」。

其後四歲,

白公勝與石乞

襲殺楚令尹子西﹑司馬子綦[一]於朝。

그리고 4년 뒤에,

백공 승과 그의 부하 석걸(石乞)이

영윤 자서와 사마자기(子綦)를 초나라의 조정의 뜰에서 기습하여 죽였다.

石乞曰:

「不殺王,不可。」

석걸이 승에게 말했다.

「왕을 죽이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乃劫*(之)*王如高府。[二]

石乞從者屈固[三]負楚惠王

亡走昭夫人之宮。[四]

석걸이 왕을 죽이기 위해 고부(高府)로 달려갔다.

석걸의 시종 굴고(屈固)가 미리 알고 달려가 초혜왕을 등에 업고

소부인의 궁궐로 도망쳤다.

葉公聞白公為亂,率其國人攻白公。

白公之徒敗,亡走山中,自殺。[五]

섭공은 백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의 국인들을 규합하여 백공을 공격했다.

백공은 싸움에서 지고 산중으로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而虜石乞,而問白公尸處,

不言將亨。

섭공은 석걸을 사로잡았다.

섭공은 석걸에게 백공의 시신이 어디에 묻었는지를 묻고

대답하지 않으면 가마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이겠다고 했다.

石乞曰:

「事成為卿,不成而亨,固其職也。」

석걸이 듣고 말했다.

「일이 성공하게 되면 공경이 되고,

실패하게 되면 삶겨서 죽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終不肯告其尸處。

遂亨石乞,而求惠王復立之。

결국은 석걸은 백공 승이 묻힌 곳을 말하지 않았다.

섭공은 석걸을 삶아 죽이고

혜황을 찾아내어 초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注[一]索隱左傳作「子期」也。

注[二]索隱杜預云:「楚之別府也。」

注[三]集解徐廣曰:「一作『惠王從者屈固』。楚世家亦云『王從者』。」索隱按:

徐廣曰一作「惠王從者屈固」,蓋此本為得。而左傳云「石乞尹門,圉公陽穴宮,

負王以如昭夫人之宮」,則公陽是楚之大夫,王之從者也。

注[四]索隱昭王夫人即惠王母,越女也。

注[五]正義左傳云白公奔而縊。

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한다.

怨毒之於人甚矣哉!

王者尚不能行之於臣下,況同列乎!

「남에게 악랄한 짓을 하여

그로 인하여 맺힌 원한은 참으로 뿌리가 깊도다!

왕이라도 오히려 그 신하된 자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거늘

하물며 동렬의 사람들에게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向令伍子胥從奢俱死,何異螻蟻。

棄小義,雪大恥,名垂於後世,

옛날 오자서가 그 부친 오사(伍奢)의 부름에 응하여 같이 죽었더라면

어찌 한낱 땅강아지나 개미와 다를 것인가?

소의(小義)를 버리고 커다란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졌다.

悲夫!方子胥窘於江上,[一]道乞食,

志豈嘗須臾忘郢邪?

슬프도다!

오자서가 장강을 건널 때나

걸식을 하며 길을 갈 때나

어찌 잠시라도 초나라의 서울 영도를 잊었겠는가?

故隱忍就功名,非烈丈夫 孰能致此哉?

白公如不自立為君者,其功謀亦不可勝道者哉!

그는 만난을 참고 견뎌 결국은 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은 열혈 장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그와 같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백공 승이 만약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과 계책도 역시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注[一]索隱窘音求殞反。

【索隱述贊】讒人罔極,交亂四國。嗟彼伍氏,被茲凶慝!員獨忍詬,志復冤

毒。霸吳起師,伐楚逐北。鞭尸雪恥,抉眼棄德。

 


史記卷六十六

伍子胥 列傳 第六

오자서 열전 제6-3

後二歲,

闔廬使太子夫差將兵伐楚,取番。[一]

그리고 2년 후(기원전 504년)에

합려는 다시 태자 부차(夫差)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부차는 초나라의 파(番) 땅을 취했다.

楚懼吳復大來,乃去郢,徙於鄀。[二]

當是時,吳以伍子胥﹑孫武之謀,

西破彊楚,北威齊晉,南服越人。

초나라를 오나라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올까봐 두려워하여

그 수도를 영(郢)에서 약(鄀)으로 옮겼다.

이때에 이르러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에 힘입어

서쪽으로 강력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점령했고,

다시 북쪽의 제나라와 당진에 위세를 떨쳤으며,

남쪽의 월나라를 복종시켰다.

注[一]集解音普寒反,又音婆。索隱音普寒反,又音婆。蓋鄱陽也。

注[二]集解楚地,音若。索隱音若。鄀,楚地,今闕。

其後四年,孔子相魯。

그리고 4년 즉 합려 15년(기원전 500년)

공자가 노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後五年,伐越。

越王句踐迎擊,敗吳於姑蘇,

傷闔廬指,[一]軍卻。

그리고 다시 5년 후(합려 20년 기원전 496년)

오나라가 월나라를 정벌했다.

오왕 구천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오군을 맞이하여 고소(姑蘇)에서 싸워 이겼다.

합려는 싸움 중에 손가락에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회군했다.

闔廬病創[二]將死,謂太子夫差曰:

「爾忘句踐殺爾父乎?」

합려가 귀환했으나 싸움 중에 입은 손가락 부상이 도져 이내 죽게 되자

태자 부차를 불러 말했다.

「너는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夫差對曰:「不敢忘。」

부차가 대답했다.

「제가 아버님의 원수를 감히 잊을 수 없나이다.」

是夕,闔廬死。

夫差既立為王,以伯嚭為太宰,習戰射。

그날 저녁에 합려가 죽었다.

부차가 오왕의 자리에 오르자

백비를 태재(太宰)로 삼아

군사들의 활쏘기와 싸움 연습을 담당시켰다.

二年後伐越,敗越於夫湫。[三]

越王句踐乃以餘兵五千人棲於會稽之上,[四]

2년 후(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가 이끄는 오군이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夫湫)에서 월군을 대파했다.

월왕 구천은 남은 잔여 병력 5천 명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농성했다.

使大夫種[五]厚幣遺吳太宰嚭以請和,

求委國為臣妾。

吳王將許之。

월왕은 대부 문종(文種)을 시켜

많은 뇌물을 가져가 태재 백비에게 화의를 청했는데,

나라를 바치고 월왕 부부는 오왕의 신하가 되기를 요청했다.

백비의 보고를 받은 오왕 부차가 월왕의 항복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伍子胥諫曰:

「越王為人能辛苦。

今王不滅,後必悔之。」

오자서가 알고 간언을 올렸다.

「월왕이라는 위인은 능히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吳王不聽,

用太宰嚭計,與越平。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에 따라 월나라와 화평했다.

注[一]正義姑蘇當作「檇李」,乃文誤也。左傳云「戰檇李,傷將指,卒於陘」

是也。解在吳世家。

注[二]集解楚良反。索隱音瘡。

注[三]集解音椒。索隱音椒,又如字。正義太湖中椒山也。解在吳世家。

注[四]正義土地名,在越州會稽縣東南十二里。

注[五]索隱劉氏云「大夫姓,種名」,非也。按:今吳南有文種埭,則種姓文,

為大夫官也。正義高誘云:「大夫種,姓文氏,字子禽,楚之郢人。」

其後五年,

而吳王聞齊景公死 而大臣爭寵,新君弱,

乃興師北伐齊。

그후 5년(기원전 489년) 뒤

오왕은 제나라의 경공(景公)이 죽고

대신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고

새로 뒤를 이은 군주는 유약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伍子胥諫曰:

「句踐食不重味,弔死問疾,

且欲有所用之也。

오자서가 간언했다.

「구천은 지금 맛있는 음식은 한 가지 이상 먹지 않으며

백성들 중 초상이 난 집에 조문을 가고

병든 사람들에게 문안을 다니는 것은

후에 소용이 있어서입니다.

此人不死,必為吳患。

今吳之有越,猶人之有腹心疾也。

而王不先越而乃務齊,不亦謬乎!」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필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오나라에 있어서 월나라는

사람에게 심복지환(心服之患)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급한 월나라를 제쳐놓고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시니

어찌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吳王不聽,伐齊,大敗齊師於艾陵,[一]

遂威鄒魯之君以歸。[二]益疏子胥之謀。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제나라로 출정하여

제나라 군사를 애릉(艾陵)8)에서 크게 무찌르고,

위엄 있는 추로의 왕으로 귀환했다.

오왕은 이후부터 더욱 오자서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注[一]正義括地志云:「艾山在兗州博城縣南百六十里,本齊博邑。」

注[二]正義鄒君居兗州鄒縣。魯,曲阜縣。

其後四年,吳王將北伐齊,

越王句踐用子貢之謀,

乃率其眾以助吳,而重寶以獻遺太宰嚭。

그리고 4년 후(기원전485년),

오왕이 다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월왕 구천이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계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나라를 돕는다 하고

다시 많은 뇌물을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太宰嚭既數受越賂,其愛信越殊甚,

日夜為言於吳王。吳王信用

嚭之計。伍子胥諫曰:

백비는 그 전에도 이미 많은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월나라를 지극히 좋아하며 신임했다.

그는 매일 밤낮으로 오왕에게 월왕의 충성심을 이야기했다.

오왕은 백비의 말을 믿고 따랐다. 오자서가 오왕에게 말했다.

「夫越,腹心之病,

今信其浮辭詐偽而貪齊。

破齊,譬猶石田,無所用之。

「무릇 월나라는 오나라의 심복지환인데

오늘 월왕의 허황된 말을 믿고 제나라를 넘보고 있습니다.

제나라를 공격하여 비록 그 땅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단지 자갈밭에 불과하여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且盤庚之誥曰:

『有顛越不恭,劓殄滅之,

俾無遺育,無使易種于茲邑。』

<반경지고(盤庚之誥)>라는 옛글에 말했습니다.

‘예의에 벗어나고 불공한 자들은

코를 베거나 다 죽여

살아남았더라도 자라지 못하도록 하여

이 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此商之所以興。願王釋齊而先越;

若不然,後將悔之無及。」

이로서 상나라가 600년 간 흥성할 수 있었습니다.

원컨대 제나라를 정벌하는 대신 월나라를 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而吳王不聽,使子胥於齊。

子胥臨行,謂其子曰:

「吾數諫王,王不用,吾今見吳之亡矣。

汝與吳俱亡,無益也。」

오왕 부차가 듣지 않고

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자서가 제나라로 출발할 때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여러 번 간했으나 왕은 내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장차 틀림없이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일은 무익하다고 하겠다.」

乃屬其子於齊鮑牧,而還報吳。

오자서는 그의 아들을 제나라로 데려가

그 대부 포목(鮑牧)에게 맡겼다.

오자서는 아들은 제나라에 남겨 두고 혼자 돌아와

오왕에게 사신으로 간 일의 결과에 대해 보고했다.

吳太宰嚭既與子胥有隙,因讒曰:

태재 백비는 자서와 소원함이 있었으므로 오왕에게 참소했다.

「子胥為人剛暴,少恩,猜賊,

其怨望恐為深禍也。

「자서라는 위인은 고집이 세고 포악합니다.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며 시기심이 많습니다.

그의 말을 물리친 대왕을 원망하여 큰 화를 불러 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前日王欲伐齊,子胥以為不可,

王卒伐之而有大功。

子胥恥其計謀不用,乃反怨望。

예전에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한다고 할 때

자서는 불가하다고 하며 극력 반대했으나

대왕께서는 결국은 큰공을 이루셨습니다.

자서는 그의 계책이 들어맞지 않은 것을 가슴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대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而今王又復伐齊,子胥專愎[一]彊諫,

沮[二]毀用事,

徒幸吳之敗以自勝其計謀耳。

지금 다시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나

자서가 또다시 제 멋대로 고집을 부려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은

대왕의 일을 방해하고 비난하여

오직 오나라의 군사들이 싸움에 져서

자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今王自行,悉國中武力以伐齊,

而子胥諫不用,因輟謝,詳病不行。

오늘 대왕께서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오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서는 자기의 간언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물러가

병을 핑계로 종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王不可不備,此起禍不難。

오자서의 행위를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일어날 화를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且嚭使人微伺之,

其使於齊也,

乃屬其子於齊之鮑氏。

대왕께서는 이에 대한 방비를 하셔야만 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의 행적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전번에 그가 제나라에 사자로 갈 때

그의 아들을 대동했었는데

그는 그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 집에 맡겨 놓고 혼자만 돌아왔습니다.

夫為人臣,內不得意,外倚諸侯,

무릇 신하된 자가 나라 안에서 뜻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제후에게 의지하는 행위는 심히 잘못된 일입니다.

自以為先王之謀臣,

今不見用,常鞅鞅怨望。

願王早圖之。」

옛날 선왕 때부터 모신으로 오나라를 받들던 자가

지금은 자기의 의견이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매일 앙앙불락하며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하루 빨리 그에 대한 조치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吳王曰:

「微子之言,吾亦疑之。」

오왕 부차가 말했다.

「태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과인은 벌써 그를 의심하고 있었소.」

乃使使賜伍子胥屬鏤[三]之劍,曰:

「子以此死。」

오왕 부차가 즉시 사람을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 보내면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그대는 이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바란다.」

伍子胥仰天歎曰:

「嗟乎!讒臣嚭為亂矣,王乃反誅我。

我令若父霸。自若未立時,諸公子爭立,

我以死爭之於先王,幾不得立。[四]

오자서가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아아, 슬프도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거늘

왕은 나를 오히려 죽이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 패자로 만들었으며,

그가 세자가 되기 전에, 여러 공자들이 다투던 것을

내가 죽을 각오로 선왕에게 간했다.

그렇게 않았다면 어찌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若既得立,欲分吳國予我,

我顧不敢望也。

然今若聽諛臣言以殺長者。」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오나라를 나누어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내가 감히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신의 말을 듣고

선왕을 모시던 공신을 죽이는 구나!」

乃告其舍人曰:

「必樹吾墓上以梓,令可以為器;[五]

而抉[六]吾眼 縣吳東門之上,[七]

以觀越寇之入滅吳也。」

오자서는 이어서 자기의 문객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오왕을 위한 관을 삼게 하시오.

그리고 나의 두 눈을 뽑아 오성의 동문 위에 걸어 놓으시오.

나는 죽어서라도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리라!」

乃自剄死。吳王聞之大怒,

乃取子胥尸盛以鴟夷革,[八]浮之江中。[九]

吳人憐之,為立祠於江上,[一0]

因命曰胥山。[一一]

오자서는 즉시 촉루검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왕이 자사가 한 말을 듣고 노하여

자서의 시신을 빼앗아 가죽부대에 넣어 강물에 띄어 보냈다.

오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 강가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사람들은 그 사당이 있는 산의 이름을 서산(胥山)이라 불렀다.

注[一]索隱皮逼反。

注[二]集解自呂反。

注[三]集解錄于反。

注[四]正義幾音祈。

注[五]正義器謂棺也,以吳必亡也。左傳云:「樹吾墓檟,檟可材也,吳其亡乎!」

注[六]索隱烏穴反。抉亦決也。

注[七]正義東門,門,謂門也,今名葑門。音普姑反。音覆浮反。越

軍開示浦,子胥濤盪羅城,開此門,有隨濤入,故以名門。顧野王云「

魚一名江豚,欲風則涌」也。

注[八]集解應劭曰:「取馬革為鴟夷,鴟夷,榼形。」正義盛音成。榼,古曷反。

注[九]集解徐廣曰:「魯哀公十一年。」正義案:年表云吳王夫差十一年也。

注[一0]正義吳地記曰:「越軍於蘇州東南三十里三江口,又向下三里,臨江北

岸立壇,殺白馬祭子胥,杯動酒盡,後因立廟於此江上。今其側有浦名上壇浦。

至晉會稽太守麋豹,移廟吳郭東門內道南,今廟見在。」

注[一一]集解張晏曰:「胥山在太湖邊,去江不遠百里,故云江上。」正義吳地

記云:「胥山,太湖邊胥湖東岸山,西臨胥湖,山有古丞胥二王廟。」按:其廟

不干子胥事,太史誤矣,張注又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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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六十六

伍子胥 列傳 第六

오자서 열전 제6-2

五年而楚平王卒。

初,平王所奪太子 建秦女生子軫,

5년 후에 초평왕이 죽었다.

옛날 초평왕은 건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진녀(秦女)의 소생 진(軫)을 세웠었다.

及平王卒,軫竟立為後,

是為昭王。

이윽고 평왕이 죽자

진이 그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다.

이가 초소왕(楚昭王)이다.

吳王僚因楚喪,使二公子將兵往襲楚。

楚發兵絕吳兵之後,不得歸。

오왕 요(遼)가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두 아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 초나라를 기습공격하게 했다.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자

두 공자가 이끄는 군사들은 귀환할 수 없게 되었다.

吳國內空,

而公子光乃令專諸襲刺吳王僚而自立,

是為吳王闔廬。

오나라에서는 국내의 군사력이 비게 되자

공자광이 전제를 시켜 왕료(王遼)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공자 광이 곧 오왕 합려이다.

闔廬既立,得志,

乃召伍員以為行人,而與謀國事。

합려가 오왕의 자리를 차지하여 그가 품고 있던 뜻을 이루게 되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오원을 불러 행인을 삼아

그와 함께 국사를 의논했다.

楚誅其大臣郤宛﹑伯州犂,

伯州犂之孫伯嚭亡奔吳,[一]

吳亦以嚭為大夫。

초나라가 간신 비무기의 참소를 받고

대신 극완(郤宛)과 백주리(伯州犂) 및 그 일족을 주살했다.

백주리의 손자 백비(伯嚭)가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왔다.

오나라는 백비에게 대부의 직을 주었다.

前王僚所遣二公子將兵[二]伐楚者,道絕不得歸。

後聞闔廬弒王僚自立,遂以其兵降楚,

楚封之於舒。

전에 왕료가 두 공자와 그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었는데

초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왕 합려가 왕료를 시해하고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결국 그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초나라에 항복했다.

초나라는 두 공자를 서(舒) 땅에 봉했다.

闔廬立三年,乃興師與伍胥﹑伯嚭伐楚,拔舒,

遂禽故吳反二將軍。

합려가 오왕이 된지 3년이 되는 해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오자서와 백비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서

서(舒) 땅을 함락시키고

전에 초나라에 항복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아 죽였다.

因欲至郢,將軍孫武曰:

「民勞,未可,且待之。」乃歸。

합려가 승세를 타고 초나라의 서울인 영도로 진격하려 했으나

장군 손무(孫武)가 반대했다.

「군사들이 싸움에 지쳐 아직 초나라의 영성을 공격할 시기가 아닙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기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注[一]集解徐廣曰:「伯州者,晉伯宗之子也。伯州之子曰郤宛,郤宛之子

曰伯嚭。宛亦姓伯,又別氏郤。楚世家云殺郤宛,宛之宗姓伯氏子曰嚭。吳世

家云楚誅伯州,其孫伯嚭奔吳也。」索隱按:州犁,伯宗子也。]宛,州犁

子。伯,]宛子。音喜。伯氏別姓]。

注[二]索隱公子燭庸及蓋餘也。

四年,吳伐楚,取六與灊。[一]

합려 4년(기원전 511년) 오나라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육(六)과 잠(潛)을 점령했다.

五年,伐越,敗之。

합려 5년(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군을 패주시켰다.

六年,楚昭王使公子囊瓦[二] 將兵伐吳。

吳使伍員迎擊,大破楚軍於豫章,[三]取楚之居巢。

합려 6년(기원전 509년)

초소왕(楚昭王)은 공자 낭와(囊瓦)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오나라는 오원(伍員,자서)으로 하여금 막게 했다.

오원은 예장(豫章)에서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의 거소(居巢)를 빼앗았다.

注[一]集解六,古國,皋陶之後所封。灊縣有天柱山。索隱六,古國也,皋陶

之後所封。灊縣有天柱山。

注[二]集解案:左傳楚公子貞字子囊,其孫名瓦,字子常。此言公子,又兼稱

囊瓦,誤也。索隱按:左氏楚公子貞字子囊,其孫名瓦,字子常。此言公子,

又兼稱囊瓦,蓋誤。

注[三]集解豫章在江南。索隱按:杜預云「昔豫章在江北,蓋分後徙之於江南

也」。

九年,吳王闔廬謂子胥﹑孫武曰:

「始子言郢未可入,今果何如?」

합려 9년(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말했다.

「전에 두 장군들은 군사들이 지쳐 있어 초나라의 서울을 공격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과연 어떻습니까?」

二子對曰:

「楚將囊瓦貪,而唐﹑蔡皆怨之。

王必欲大伐之,必先得唐﹑蔡乃可。」

두 사람이 대답했다.

「초나라의 대장 낭와가 탐욕하여

당(唐)과 채(蔡), 두 나라가 모두 그를 원망합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꼭 공격하고 싶으시면,

먼저 당과 채, 두 나라를 얻어야만 가능합니다.」

闔廬聽之,悉興師與唐﹑蔡伐楚,

與楚夾漢水而陳。

합려가 그 의견을 좇아 대군을 징발하여

당과 채, 두 나라 군사들과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삼국의 군사들이 한수를 앞에 두고 진영을 세웠다.

吳王之弟夫概[一]將兵請從,王不聽,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병을 이끌고 종군을 청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遂以其屬五千人 擊楚將子常。[二]

子常敗走,奔鄭。

부개는 자기가 데려온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자상이 이끌던 초군의 진지를 기습하자

자상은 패주하여 정나라로 도망쳤다.

於是吳乘勝而前,五戰,遂至郢。[三]

己卯,楚昭王出奔。

庚辰,吳王入郢。

오군은 승세를 타고 한수를 도하해서

다섯 번의 싸움에서 모두 이기고, 초나라의 서울 영성에 이르렀다.

그해 기묘(己卯) 일에 초소왕이 영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음 날인 경진(庚辰) 일에 합려가 영성에 입성했다.

注[一]索隱古賚反。

注[二]集解子常,公孫瓦。索隱公孫瓦也。

注[三]集解郢,楚都。索隱郢,楚都也。音以正反,又一音以井反。

昭王出亡,入雲夢;

盜擊王,王走鄖。[一]

초소왕은 영성에서 달아나 운몽(雲夢)으로 들어갔다.

도적들이 소왕의 일행을 습격하자 그는 다시 운(鄖) 땅으로 몸을 피했다.

鄖公弟懷曰:

「平王殺我父,我殺其子,不亦可乎!」

운공(鄖公)의 동생이 투회(鬪懷)가 초소왕에게 말했다.

「초왕의 아버지 평왕이 아무 죄도 없는 나의 부친을 살해했다.

내가 어찌 그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鄖公恐其弟殺王,與王奔隨。[二]

운공은 그의 동생이 초소왕을 살해할까 걱정하여

왕을 데리고 수(隨)나라로 들어갔다.

吳兵圍隨,謂隨人曰:

「周之子孫在漢川者,楚盡滅之。」

오나라 군사들이 수나라를 포위하고 수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주나라 자손들로 한수(漢水) 주변에 있었던 제후국들을

초나라가 모두 멸망시켰다. 」

隨人欲殺王,

王子綦匿王,己自為王以當之。

隨人卜與王於吳,不吉,乃謝吳不與王。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죽이려고 하자

왕자기(王子綦)가 왕을 은닉하고 초왕을 대신하여 죽으려고 했다.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죽이고 오왕을 섬기는 일에 대해 점을 쳤으나

점괘가 불길하게 나왔다.

수나라 사람들이 오군의 청을 거절하고 초왕을 내주지 않았다.

注[一]集解音云,國名。索隱奏雲二音。走,向也。鄖,國名。

注[二]正義今有楚昭王故城,昭王奔隨之處,宮之北城即是。

始伍員與申包胥為交,

員之亡也,謂包胥曰:

「我必覆楚。」

옛날 오원은 신포서와 초나라에 같이 있을 때 친교가 있었다.

오원이 초나라에서 도망칠 때 도중에 우연히 신포서를 만나 말했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전복시키고야 말겠네!」

包胥曰:「我必存之。」

신포서가 대답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초나라를 보존시키겠네!」

及吳兵入郢,伍子胥求昭王。

既不得,乃掘楚平王墓,

出其尸,鞭之三百,然後已。

이윽고 오군을 이끌고 영성에 입성한 오자서가 초소왕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망친 다음이었다.

할 수 없이 초평왕의 묘를 발굴하여

그 시신을 꺼내어 채찍으로 3백 대 내리치고서야 멈추었다.

申包胥亡於山中,使人謂子胥曰:

그 소식을 들은 신포서가 영성에서 도망처 산중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子之報讎,其以甚乎!

吾聞之,人觽者勝天,天定亦能破人。[一]

今子故平王之臣,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此豈其無天道之極乎!」

「아들이 비록 그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는 하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많으면 일시적으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하나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알고 있네!

지금 그대는 옛날 평왕의 신하로써 북면하여 받들었으면서

지금에 와서는 그 시신까지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천도에 어긋날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伍子胥曰:「為我謝申包胥曰,

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二]

오자서가 말했다.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죄하는 말을 전하라!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일모도원(日暮途遠)〕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

於是申包胥走秦告急,求救於秦。秦不許。

신포서는 산중에서 나와 섬진(陝秦)으로 가서 초나라의 위급을 고하며

구원군을 청했으나 섬진의 애공(哀公)이 신포서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包胥立於秦廷,晝夜哭,七日七夜不絕其聲。

秦哀公憐之,曰:

「楚雖無道,有臣若是,可無存乎!」

신포서가 섬진의 궁정의 뜰에 엎드려 밤낮으로 통곡을 하여

칠일동안 그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진애공이 이를 가엾게 여기며 말했다.

「초나라가 비록 무도하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충신이 있으니 어찌 망하기야 하겠는가?」

乃遣車五百乘救楚擊吳。

六月,敗吳兵於稷。[三]

진애공은 즉시 병거 5백승을 내주며

초나라를 구하고 오군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그해 6월에 섬진의 군사들이 직(稷) 땅에서 오군을 패퇴시켰다.

會吳王久留楚求昭王,

而闔廬弟夫概乃亡歸,自立為王。

그때 오왕 합려는 초소왕을 사로잡기 위해

오랫동안 초나라 영성에 주둔했었는데

합려의 동생 부개가 몰래 도망쳐 오나라에 들어가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闔廬聞之,乃釋楚而歸,

擊其弟夫概。夫概敗走,遂奔楚。

합려가 듣고 초나라를 버리고 오나라로 들어가

부개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부개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楚昭王見吳有內亂,乃復入郢。

封夫概於堂谿,[四]為堂谿氏。

초소왕은 오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즉시 영성으로 다시 들어갔다.

초왕은 부개를 당계(堂谿)에 봉했다.

부개는 그 성을 당계씨로 바꿨다.

楚復與吳戰,敗吳,吳王乃歸。

초나라가 다시 오나라와 싸워 오를 패주시켰다.

합려는 다시 오나라로 돌아갔다.

注[一]正義申包胥言聞人#者雖一時凶暴勝天,及天降其凶,亦破於彊暴之人。

注[二]索隱按:倒音丁老反。施音如字。子胥言志在復讎,常恐且死,不遂本

心,今幸而報,豈論理乎!譬如人行,前途尚遠,而日勢已莫,其在顛倒疾行,

逆理施事,何得責吾順理乎!

注[三]集解稷丘,地名,在郊外。索隱按:左傳作「稷丘」。杜預云「稷丘,地

名,在郊外」。

注[四]集解徐廣曰:「在慎縣。」駰案:地理志汝南有吳房縣。應劭曰「夫概奔

楚,封於堂谿,本房子國,以封吳,故曰吳房」,然則不得在慎縣也。正義案:

今豫州吳房縣在州西北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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