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2.賈誼列傳 01

賈生名誼,[一]雒陽人也。

年十八,以能誦詩屬書聞於郡中。

가생의 이름은 의(誼)니 락양사람이다.

나이 18세에 시를 외고 글을 짓는 데 능숙하다고 하여

온 고을 안에 알려졌다.

注[一]索隱名義。漢書並作「誼」也。

吳廷尉為河南守,聞其秀才,[二]

召置門下,甚幸愛。

오정위는 하남태수가 되어 그의 뛰어난 재능을 듣고

문하에 불러두고 매우 사랑했다.

注[二]正義顏云:「秀,美也。」應劭云:「避光武諱改『茂才』也。」

孝文皇帝初立,

聞河南守吳公[三]治平為天下第一,

故與李斯同邑而常學事焉,乃徵為廷尉。

효문황제가 즉위하여 하남태수 오공이

고을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평안케 함이 천하 제일이고

전에 이사(李斯)와 한 고을에 사면서 이사에게서 배웠다는 말을 듣고

이사를 불러 정위를 삼았다.

注[三]索隱按:吳,姓也。史失名,故稱公。

廷尉乃言賈生年少,頗通諸子百家之書。

文帝召以為博士。

정위는 가생이 연소하면서도

제자백가서에 능통하였다고 아뢰니

문제는 그를 불러 박사를 삼았다.

是時賈生年二十餘,最為少。

每詔令議下,諸老先生不能言,賈生盡為之對,

人人各如其意所欲出。諸生於是乃以為能,不及也。

이 때 가생은 20여세로 가장 연소했다.

조령(詔令)이 자문을 구할 때마다

여러 노선생들은 말할 수 없었지만

가생은 다 응대하여

사람마다 각기 그의 뜻이 나오는 바와 같이 하니

제생들은 이에 가생에게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孝文帝說之,超遷,

一歲中至太中大夫。

효문제가 기뻐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시키니

일년 안에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賈生以為漢興至孝文二十餘年,

天下和洽,而固當改正朔,易服色,

法制度,定官名,興禮樂,

가생은 한나라가 일어나서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천하가 화평하니 진실로 정삭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고

제도를 법제화하고 관명을 정하고

예악을 일으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乃悉草具其事儀法,

色尚黃,數用五,[一]為官名,悉更秦之法。

이에 그의 일이 의례와 법제에 관한 일을 초안하였다.

색은 황색을 숭상하고 수는 5를 쓰며

관명을 지어 진나라 때의 법제를 모두 바꾸었다.

注[一]正義漢文帝時黃龍見成紀,故改為土也。

孝文帝初即位,謙讓未遑也。

諸律令所更定,及列侯悉就國,

其說皆自賈生發之。

효문제는 즉위 초인데다

겸양한지라 거기까지는 손이 미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율령을 개정하고

열후들이 모두 제 자리에 나아가게 한 것은

모두 가생이 발의한 것들이었다.

於是天子議以為賈生任公卿之位。

이에 천자는 가생은 공경(公卿)의 지위를 맡을 만하다고 논의했다.

絳﹑灌﹑東陽侯﹑馮敬之屬盡害之,[二]

乃短賈生曰:

강, 관, 동양후, 풍경의 무리들은 그를 싫어하여

가생의 단점을 말했다.

注[二]正義絳﹑灌,周勃﹑灌嬰也。東陽侯,張相如。馮敬時為御史大夫。

「雒陽之人,年少初學,專欲擅權,紛亂諸事。」

“낙양인은 나이가 연소하고 학문이 일천하며

오로지 정권을 천단하여 모든 일을 분란케 합니다.“

於是天子後亦疏之,不用其議,

乃以賈生為長沙王太傅。

이에 천자도 그 뒤로는 그를 소외시키고

그의 건의를 채용하지 않았으며

이에 가생을 장사왕의 태부로 삼았다.

賈生既辭往行,

聞長沙卑溼,自以壽不得長,

又以適去,[一]意不自得。

가생은 이미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장사는 지대가 낮고 음습하다고 들었다.

그는 스스로 수가 길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귀양가는 길이라 마음도 언짢았다.

注[一]集解徐廣曰:「適,竹革反。」韋昭曰:「謫,譴也。」索隱韋昭云:「適,譴也。」字林云:「丈反。」

及渡湘水,為賦以弔屈原。其辭曰:

상수를 건너며 부를 지어 굴원을 애도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굴원부]

恭承嘉惠兮,[一]俟罪長沙。

삼가 천자의 은혜를 입어

장사에서 죄를 기다렸네.

側聞屈原兮,自沈汨羅。

어렴풋이 들으니 굴원은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네.

造託[二]湘流兮,敬弔先生。

상수의 흐름에 부치어

삼가 선생의 신령을 조상하노라.

注[二]索隱造音七到反。

遭世罔極兮,乃隕厥身。

더할 수 없이 무도한 세상을 만나

그 몸을 떨어뜨렸도다.

嗚呼哀哉,逢時不祥!

아, 슬프도다.

상서롭지 못한 때를 만남이여.

鸞鳳伏竄兮,[三]鴟梟翶翔。

난새와 봉황새는 엎드려 숨어 버리고,

부엉이와 올빼미가 높이 나는구나.

*난봉(鸞鳳) - 봉황새, 즉 군자와 현인.

*치조(鴟鳥) - 잔인하고 흉악한 올빼미류의 악조,

注[三]索隱竄音如字,又七外反。

闒茸尊顯兮,[四]讒諛得志;

어리석고 돼먹지 않은 소인배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고

아첨하는 이들은 뜻을 얻었네.

*(闒茸,탑용)-어리석고 부재불초(不才不肖)함.

注[四]索隱闒音天臘反。茸音而隴反。案:應劭﹑胡廣云「闒茸不才之人,無

六翮翔之用而反尊貴」。字林曰「闒茸,不肖之人」。

賢聖逆曳兮,方正倒植。[五]

성현(聖賢)은 정도(正道)에 따르지 않는 결과로 초야에 묻히고,

방정(方正)한 인물이 정당한 위치에 서지 못하는 거꾸로 된 세상이다.

*逆曳(역예)-정도(正道)에 따르지 않음.

注[五]索隱胡廣云:「逆曳,不得順隨道而行也。倒植,賢不肖顛倒易位也。」

世謂伯夷貪兮,謂盜跖廉;[六]

세상에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탐욕하다고 하고,

춘추시대의 대도인 도척을 청렴하다고 하며,

注[六]索隱案:漢書作「隨﹑夷溷兮跖﹑蹻廉」,一句皆兼兩人。隨,卞隨也。

夷,伯夷也。跖,盜跖也。蹻,莊蹻也。

莫邪為頓兮,[七]鉛刀為銛。[八]

오나라의 명검인 막사(莫邪)는 둔하다고 하고

납으로 만든 칼은 날카롭다고 한다.

注[七]集解應劭曰:「莫邪,吳大夫也,作寶劍,因以冠名。」瓚曰:「許慎曰

莫邪,大戟也。」索隱應劭曰:「莫邪,吳大夫也。作寶劍,因名焉。」吳越春

秋曰:「吳王使干將造劍二枚,一曰干將,二曰莫邪。」莫邪﹑干將,劍名也。

頓,鈍也。

注[八]集解徐廣曰:「思廉反。」駰案:漢書音義曰「銛謂利」。索隱鉛者,錫

也。銛,利也,音纖。言其暗惑也。

于嗟嚜嚜兮,生之無故![九]

아, 선생은 묵묵히

까닭없이 이 화를 입으셨네.

注[九]集解應劭曰:「嚜嚜,不自得意。」瓚曰:「生謂屈原也。」

斡棄周鼎兮 寶康瓠,[一0]

주실의 보정(寶鼎)을 버리고

강고를 보배라 하였으며

注[一0]集解如淳曰:「斡,轉也。爾雅曰『康瓠謂之甈』,大瓠也。」應劭曰:

「康,容也。斡音筦。筦,轉也。一曰康,空也。」索隱斡,轉也,烏活反。

爾雅云「康瓠謂之甈」。甈音丘列反。李巡云「康謂大瓠也」。康,空也。晉灼

云「斡,古『管』字也」。

騰駕罷牛兮 驂蹇驢,[一一]

파리한 소에게 수레를 멍에하고

절름발이 나귀를 준마라 하니

注[一一]正義罷音皮。

驥垂兩耳兮 服鹽車。[一二]

준마는 두 귀를 늘어뜨린 채

소금 수레를 끌어야 하네.

注[一二]索隱戰國策曰:「夫驥服鹽車上太山中阪,遷延負轅不能上,伯樂下車哭之也。」

章甫薦屨兮,[一三]漸不可久;[一四]

잔보를 신발 밑에 깔았으니

점차로 오래 갈 수 없게 되네.

注[一三]集解應劭曰:「章甫,殷冠也。」

注[一四]集解劉向別錄曰:「因以自諭自恨也。」

嗟苦先生兮,獨離此咎![一五]

아, 괴로워라 선생이

홀로 이 화난에 걸리셨네.

注[一五]集解應劭曰:「嗟,咨嗟。苦,勞苦。言屈原遇此難也。」

은나라 탕(湯)왕이 현인 변수(卞隨)에게 양위하려고 하니,

천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며 거절했던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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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作懷沙之賦。[一]其辭曰:

그리고 나서 굴원은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注[一]索隱按:楚詞九懷曰「懷沙礫以自沉」,此其義也。

[제1단]

陶陶孟夏兮,草木莽莽。[一]

傷懷永哀兮,汩徂南土。[二]

眴兮窈窈,[三]孔靜幽墨。[四]

冤結紆軫兮,離愍之長鞠;[五]

撫情效志兮,俛詘以自抑。

注[一]集解王逸曰:「陶陶,盛陽貌。莽莽,盛茂貌。」索隱音姥。正義莫古反。

注[二]集解王逸曰:「汩,行貌。」索隱王師叔曰:「汩,行貌也。」方言曰:「謂疾行也。」

注[三]集解徐廣曰:「眴,眩也。」索隱眴音舜。徐氏云:「眴音眩。窈音烏鳥反。」

注[四]集解王逸曰:「孔,甚也。墨,無聲也。」正義孔,甚。墨,無聲。言江南山高澤深,視之眴;野甚清淨,歎無人聲。

注[五]集解王逸曰:「鞠,窮。紆,屈也。軫,痛也。愍,病也。」索隱離湣。湣,病。鞠,窮。

陶陶孟夏兮

(도도맹하혜)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이라

草木奔奔

(초목망망)

초목도 무성하구나.

傷懷永哀兮

(상회영애혜)

쓰라린 마음에 영원한 슬픔 안고

汩徂南土

(율조남토)

유유히 흘러서 남쪽 땅으로 가련다.

瞬兮杳杳

(순혜묘묘)

쳐다만 보아도 아득하고 멀어서

孔靜幽黙

(공정유목)

조용한 것이 소리조차 없구나.

鬱結紆軫兮

(울결우진혜)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離愍而長鞠

(이민이장국)

시름에 겨우니 못내 괴롭다.

撫情效志兮

(무정효지혜)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寃屈而自抑

(원굴이자억)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네.

[제2단]

刓方以為圜兮,常度未替;[一]

易初本由兮,君子所鄙。[二]

章畫職墨兮,前度未改;[三]

內直質重兮,大人所盛。[四]

巧匠不斲兮,孰察其揆正?

玄文幽處兮,矇謂之不章;[五]

離婁微睇兮,瞽以為無明。[六]

變白而為黑兮,倒上以為下。[七]

鳳皇在笯兮,[八]雞雉翔舞。[九]

同糅玉石兮,槪面而相量。[一0]

夫黨人之鄙妒兮,羌不知吾所臧。[一一]

注[一]集解王逸曰:「刓,削;度,法;替,廢也。言人刓削方木,欲以為圓,

其常法度尚未廢也。」索隱刓音五官反。謂刻刳方木以為圓,其常法度尚未廢。

注[二]集解王逸曰:「由,道也。」正義本,常也。鄙,恥也。言人遭世不道,

變易初行,違離光道,君子所鄙。

注[三]集解王逸曰:「章,明也。度,法也。言工明於所畫,念其繩墨,修前人

之法,不易其道,則曲木直而惡木好。」索隱章,明也。畫,計畫也。楚詞「職」

作「志」。志,念也。餘如注所解。

注[四]集解王逸曰:「言人質性敦厚,心志正直,行無過失,則大人君子所盛美也。」

注[五]集解王逸曰:「玄,黑也。矇,盲者也。詩云『矇瞍奏公』。章,明也。」

注[六]集解王逸曰:「離婁,古明視者也。瞽,盲也。」正義睇,田帝反,眄也。

注[七]索隱音戶。

注[八]集解徐廣曰:「笯,一作『郊』。」駰案:王逸曰「笯,籠落也」。索隱笯

音奴,又女加反。徐云一作「郊」。按:籠落謂藤蘿之相籠絡。正義應瑞圖云:

「黃帝問天老曰:『鳳鳥何如?』天老曰:『鴻前而麟後,蛇頸而魚尾,龍文而

龜身,燕而?喙,首戴德,頸揭義,背負仁,心入信,翼俟順,足履正,尾

繫武,小音金,大音鼓,延頸奮翼,五色備舉。』」

注[九]索隱楚詞「雉」作「鶩」。

注[一0]集解王逸曰:「忠佞不異。」

注[一一]集解王逸曰:「莫昭我之善意。」索隱按:王師叔云「羌,楚人語辭」。

言卿何為也。正義羌音彊。

刓方以爲圜兮

(완방이위환혜)

모난 것을 깎아서둥굴게 만들어도

常度未替

(상도미체)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는데,

易初本廸兮

(이초본적혜)

근본(根本)이나 초지(初志)를 고치는 것은

君子小鄙

(군자소비)

군자(君子)가 얕보는 것이라.

章畫志墨兮

(장화지묵혜)

먹으로 분명히 그려 놓은

前圖未改

(전도미개)

옛날의 설계는 고치지 않으며,

內厚質正兮

(내후질정혜)

충정이 후덕하고 성질이 올바르기를

大人所盛

(대인소성)

대인(大人)이 기리는 바요.

巧倕不斲兮

(교수불착혜)

교수(巧倕)라도 자르지 않는데

孰察其揆正

(수찰기규정)

누가 그 칫수의 바름을 알겠나?

玄文處幽兮

(현문처유혜)

검은 무늬가 어두운데 놓이면

矇睡謂之不章

(몽수위지부장)

청맹과니는 불분명타 하고

離婁微睇兮

(이루미제혜)

이루(離婁)가 실눈을 뜨더라도

瞽以爲無明

(고이위무명)

소경은 못 보는 줄로 여기지.

變白以爲黑兮

(변백이위흑혜)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倒上以爲下

(도상이위하)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鳳凰在笯兮

(봉황재노혜)

봉황(鳳凰)은 새장 속에 있는데

雞鶩翔舞

(계목상무)

닭과 집오리는 나다니며 춤을 추네.

同糅玉石兮

(동류옥석혜)

옥(玉)과 돌을 한 곳에 섞어 놓고

槪面相量

(일개면상량)

하나의 평미래로 재려고 하니

夫惟黨人之鄙固兮

(부유당인지비고혜)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羌不知余之所藏

(강부지여지소장)

내가 가진 것의 값어치를 모른다.

[제3단]

任重載盛兮,陷滯而不濟;[一]

懷瑾握瑜兮,窮不得余所示。[二]

邑犬之群吠兮,吠所怪也;

誹駿疑桀兮,固庸態也。[三]

文質疏內兮,衆不知吾之異采;[四]

材樸委積兮,莫知余之所有。

重仁襲義兮,謹厚以為豐;[五]

重華不可牾兮,[六]孰知余之從容!

古固有不並兮,豈知其故也?[七]

湯禹久遠兮,邈不可慕也。

懲違改忿兮,抑心而自彊;

離湣而不遷兮,願志之有象。[八]

進路北次兮,[九]日昧昧其將暮;

含憂虞哀兮,[一0]限之以大故。[一一]

注[一]集解王逸曰:「言己才力盛壯,可任用重載,而身陷沒沈滯,不得成其本

志也。」

注[二]集解王逸曰:「示,語也。」

注[三]集解王逸曰:「千人才為俊,一國高為桀也。庸,賤之人也。」索隱按:

尹文子云「千人曰俊,萬人曰桀」。今乃誹俊疑傑,固是庸人之態也。

注[四]集解徐廣曰:「異,一作『奧』。」駰案:王逸曰「采,文采也」。

注[五]集解王逸曰:「重,累也。襲,及也。」

注[六]集解王逸曰:「牾,逢也。」索隱楚詞「牾」作「」,並吳故反。王師

叔云「牾,逢也」。

注[七]索隱楚詞作「莫知其何故」。

注[八]集解王逸曰:「象,法也。」

注[九]正義北次將就。

注[一0]索隱楚詞作「舒憂娛哀」。娛音虞。娛者,樂也。

注[一一]集解王逸曰:「娛,樂也。大故謂死亡也。」

任重載盛兮

(임중재성혜)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陷滯而不濟

(함체이부제)

바퀴가 빠져서 움직이질 않네.

懷瑾握瑜兮

(회근악유혜)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지만

窮不知所示

(궁부지소시)

길이 막혔으니 보일 데를 모르겠다.

邑犬之群吠兮

(읍견지군폐혜)

마을 개들이 떼지어 짖는 것은

吠所怪也

(폐소괴야)

이상한 사람 있어 짖는 것이고

非俊疑傑兮

(비준의걸혜)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固庸態也

(고용태야)

본래가 용렬해서 그렇다.

文質疏內兮

(문질소내혜)

무늬와 바탕은 안으로 갖췄으니

衆不知余之異采

(중부지여지이채)

중인(衆人)들은 이채로운 걸 모르고

材朴委積兮

(재박위적혜)

재목과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莫知余之所有

(막지여지소유)

내 것인 것을 모르는 구나.

重仁襲義兮

(중인습의혜)

어짐(仁)이 겹치고 정의가 이어지고

謹厚以爲豊

(근후이위풍)

근신과 온후함이 풍성하여도

重華不可迕兮

(중화불가오혜)

순임금님은 만날 수 없으니

孰知余之從容

(숙지여지종용)

누가 나의 거동을 알아나 줄까?

古固有不竝兮

(고고유불병혜)

옛적에도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같이 나지 않는

豈知其何故

(기지기하고)

그 까닭을 알기나 하랴?

湯禹久遠兮

(탕우구원혜)

탕(湯)과 우(禹)는 먼 옛날이야기

邈而不可慕

(막이불가모)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懲違改忿兮

(징위개분혜)

잘못을 뉘우치고 원한을 삭이고

抑心而自强

(억심이자강)

마음을 억눌러서 스스로 참아

離愍而不遷兮

(이민이불천혜)

시름이 겨워도 변하지 않으리니

願志之有像

(원지지유상)

이 뜻을 본보기로 하리라.

進路北次兮

(진로북차혜)

길을 나아가 북쪽에 다달으니

日昧昧其將暮

(일매매기장모)

해는 뉘엿뉘엿 어두워진다.

舒憂娛哀兮

(서우오애혜)

시름을 풀고 서글픔을 달래며

限之以大故

(한지이대고)

지나간 큰일들을 마감하리라.

[제4단]

亂曰:[一]

浩浩沅﹑湘兮,[二]分流汨兮。[三]

脩路幽拂兮,[四]道遠忽兮。

曾吟恆悲兮,永歎慨兮。

世既莫吾知兮,人心不可謂兮。[五]

懷情抱質兮,獨無匹兮。

伯樂既歿兮,驥將焉程兮?[六]

人生稟命兮,各有所錯兮。[七]

定心廣志,餘何畏懼兮?[八]

曾傷爰哀,永歎喟兮。[九]

世溷不吾知,心不可謂兮。

知死不可讓兮,願勿愛兮。

明以告君子兮,吾將以為類兮。[一0]

注[一]索隱王師叔曰:「亂者,理也。所以發理辭指,撮總其要,而重理前意也。」

注[二]索隱二水名。按:地理志湘水出零陵陽海山,北入江。沅湘之後流也。

正義說文云:「沅水出牂柯,東北流入江。湘水出零陵縣陽海山,北入江。」按:

二水皆經岳州而入大江也。

注[三]集解王逸:「汨,流也。」

注[四]索隱楚詞作「幽蔽」也。

注[五]集解王逸曰:「謂猶說也。」索隱楚詞無「曾」已下二十一字。

注[六]集解王逸曰:「程,量也。」

注[七]集解王逸曰:「錯,安也。」

注[八]索隱楚詞「餘」並作「余」。

注[九]集解王逸曰:「喟,息也。」

注[一0]集解王逸曰:「類,法也。」正義按:類,例也。以為忠臣不事亂君之例。

亂曰

(난왈)

노래 끝에 이르기를,

浩浩沅湘

(호호원상혜)

넘실거리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分流汩兮

(분류율혜)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고

脩路幽蔽

(수로유폐혜)

닦아 놓은 길은 깊숙이 가리워져

道遠忽兮

(도원홀혜)

멀고도 먼 길은 끝이 없네.

曾吟恆悲兮

(증음긍비혜)

이렇게 읊조리며 슬퍼하며

永歎慨兮

(영탄개혜)

길이 개탄하여도

世既莫吾知兮

(세기막오지혜)

세상에 이미 나를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

(인심불가위혜)

인심이란 말할 것도 없네.

懷情抱質

(회정포질혜)

가슴에 품은 도타운 정은

獨無匹兮

(독무필혜)

비할 데 없이 우뚝하지만

伯樂旣沒兮

(백락기몰혜)

백락(伯樂)이 이미 죽었으니

焉程兮

(기장언정혜)

천리마를 어찌 알아보리오?

人生稟命兮

(인생품명혜)

인생은 천명을 받아

*[萬民之生(만민지생):만민(萬民)이 한 세상에 태어나]라고 한 곳도 있음.

各有所錯兮

(각유소착혜)

각기 제자리가 있거늘

定心廣志

(정심광지)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히면

余何畏懼兮

(여하외구혜)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增傷爰哀

(증상원애)

상심이 더하여 서럽게 울며

永歎喟兮

(영탄위혜)

기다랗게 한숨을 쉰다.

世溷濁莫吾知

(세혼탁막오지)

세상이 혼탁하여 알아주는 이 없으니

人心不可謂兮

(인심불가위혜)

사람의 마음을 일깨울 수 없구나.

知死不可讓

(지사불가양혜)

죽음을 물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願勿愛兮

(원물애혜)

애석하다 여기지 말아라.

告君子

(명이고군자혜)

분명히 군자에게 고하노니

吾將爲類兮

(오장이위류혜)

내 이제 충신의 본보기가 되리라!

於是懷石 遂自*(投)**[沈]*汨羅以死。[一]

그리고는 마침내 가슴에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注[一]集解應劭曰:「汨水在羅,故曰汨羅也。」索隱汨水在羅,故曰汨羅。地

理志長沙有羅縣,羅子之所徙。荊州記「羅縣北帶汨水」。汨音覓也。正義故羅

縣城在岳州湘陰縣東北六十里。春秋時羅子國,秦置長沙郡而為縣也。按:縣

北有汨水及屈原廟。續齊諧記云:「屈原以五月五日投汨羅而死,楚人哀之,每

於此日以竹筒貯米投水祭之。漢建武中,長沙區回白日忽見一人,自稱三閭大

夫。謂回曰:『聞君常見祭,甚善。但常年所遺,並為蛟龍所竊,今若有惠,可

以練樹葉塞上,以五色絲轉縛之,此物蛟龍所憚。』回依其言。世人五月五日

作,并帶五色絲及練葉,皆汨羅之遺風。」

屈原既死之後,楚有宋玉﹑唐勒﹑景差[一]之徒者,

皆好辭而以賦見稱;

굴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宋玉), 당륵(唐勒), 경차(景差)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문학을 좋아하여 부(賦)로써 명성이 있었다.

注[一]集解徐廣曰:「或作『慶』。」索隱按:楊子法言及漢書古今人表皆作「景

瑳」,今作「差」是字省耳。又按:徐﹑裴﹑鄒三家皆無音,是讀如字也。

然皆祖屈原之從容辭令,終莫敢直諫。

其後楚日以削,數十年竟為秦所滅。

그러나 모두가 굴원과 같이 완곡하고 함축적인 문체에는 능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직간을 행하지 않아

결국은 초나라는 날이 갈수록 국세가 약화되어

굴원이 죽고나서 몇 십년 후에 진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自屈原沈汨羅後百有餘年,

漢有賈生,為長沙王太傅,

過湘水,投書以弔屈原。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진 이래 100년여 년이 지나자

한나라에 가의(賈誼)란 사람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가 되어

상수(湘水)를 지나다 제문을 지어 물속에 던져 굴원을 애도했다.

[참고]

이 글이 아래 블로그 주소창에 소개할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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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1.굴원열전 02

屈平既絀,

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一〕

굴원이 배척되어 왕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었다.

注[一]正義上足松反。

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曰:

진혜왕(秦惠王)이 이를 근심하여

장의를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을 바치게 하고

위질(委質)의 예를 행하여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秦甚憎齊,齊與楚從親,

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 우리 진나라는 제나라에 많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합종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진실로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우리 진나라는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할양하겠습니다.”

楚懷王貪而信張儀,

遂絕齊,使使如秦受地。張儀詐之曰:

초회왕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장의의 말을 믿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 후에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상오의 땅 600리를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가 사술을 부려 말했다.

「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

“ 이 장의가 초왕과 주기로 한 땅은 6리이지

600리를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楚使怒去,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秦發兵擊之,

초나라 사자가 화를 내며 돌아와 회왕에게 보고했다.

분노한 회왕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도 군사를 보내 반격했다.

大破楚師於丹、淅,〔二〕斬首八萬,

虜楚將屈,[三]遂取楚之漢中地。[四]

초군을 단수(丹水)와 석수(淅水)에서 대파한 진군은

그 군사 8만의 목을 베었으며

초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을 점령했다.

注[二]索隱二水名。謂於丹水之北,淅水之南。丹水﹑淅水皆縣名,在弘農,

所謂丹陽﹑淅。正義丹陽,今枝江故城。

注[三]索隱屈,姓。,名,音蓋也。

注[四]索隱徐廣曰:「楚懷王十六年,張儀來相;十七年,秦敗屈。」正義梁州。

懷王乃悉發國中兵 以深入擊秦,

戰於藍田。

회왕이 다시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魏聞之,襲楚至鄧。[五],

楚兵懼自秦歸。

이에 위나라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기습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이를 두려워한 초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부터 회군했다.

注[五]索隱按:此鄧在漢水之北,故鄧侯城也。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합종을 파기한 초나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아

이로써 초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明年,秦割漢中地 與楚以和。楚王曰:

「不願得地,願得張儀 而甘心焉。」

다음 해에 진나라가 한중의 땅을 떼어 초나라에 돌려주겠다며

강화를 청해왔다. 이에 초회왕이 진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한중의 땅이 아니오.

내가 장의만 얻는다면 그것으로써 매우 만족하겠소.”

張儀聞,乃曰:

「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

장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의 땅을 감당할 수 있다면,

제가 초나라에 들어가겠습니다.”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

이윽고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여

많은 뇌물을 초나라의 권신 근상(靳尙)에게 바쳤다.

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

근상은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로 하여금

궤변으로 초왕을 현혹시키게 했다.

초왕은 정수의 말에 미혹되어

장의를 석방하여 진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

이때 굴원은 이미 초왕과 사이가 소원하여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顧反,諫懷王曰:

「何不殺張儀?」

이윽고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초왕에게 물었다.

“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懷王悔,追張儀不及。[一]

회왕이 후회하고

추격군을 보내 장의를 잡으려고 했으나

장의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注[一]索隱按:張儀傳無此語也。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一]

그 후에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그 대장 당매(唐眛)를 죽였다.

注[一]集解徐廣曰:「二十八年敗唐眛也。」正義眛,莫葛反。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懷王欲行,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양왕(昭襄王)이 혼인을 맺어

양국이 우호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초회왕과 회합을 갖자고 했다.

屈平曰:

「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一]

注[一]索隱按:楚世家昭睢有此言,蓋二人同諫王,故彼此各隨錄之也。

이에 굴원이 회왕에게 말했다.

“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나라입니다.

결코 믿을 수 없으니 가시면 안 될 것입니다.”

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

懷王卒行。

그러나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 어째서 진나라의 호의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자

결국은 회왕은 진왕을 만나러갔다.

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二]

以求割地。

회왕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가자

진나라가 군사를 매복시켜 그 퇴로를 끊고 회왕을 억류시켰다.

진나라는 회왕에게 초나라 땅을 떼어 할양하라고 강요했다.

注[二]集解徐廣曰:「三十年入秦。」

懷王怒,不聽。

亡走趙,趙不內。

復之秦,竟死於秦 而歸葬。

회왕이 노하여 진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에 회왕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조왕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회왕은 다시 진나라에 끌려가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長子頃襄王立,[一]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 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회왕의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고

그의 동생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환국하지 못한 것은

모두 자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注[一]索隱名橫。

屈平既嫉之,

굴원도 자란이 행한 옛날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했다.

雖放流,睠顧楚國,

繫心懷王,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비록 몸은 이미 추방되었음에도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초회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음에

언젠가는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서

나쁜 습속이 개량되기를 기대했다.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그는 왕을 모시고 나라를 부흥시켜

쇠퇴해 가는 국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한 편의 시 중에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그 뜻을 전했다.

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노력도 모두 허사가 되고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돌아오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회왕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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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八十四

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굴원가생열전 제24

1.屈原열전 01

굴원열전 /사기열전 24

http://blog.paran.com/kydong/46264092

[주]'굴원열전'은 위에 올린 바 있으나 다시 나누어서 탑재한다.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一〕

為楚懷王左徒。〔二〕

博聞彊志,明於治亂,

嫺〔三〕於辭令。

入則與王圖議國事,以出號令;

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

王甚任之。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

초회왕(B.C.328년- B.C.296년 재위) 때 좌도(佐徒)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왕과 함께 국사를 논한 후에

호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제후들이 보내는 빈객들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상대했다.

이에 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一〕正義屈、景、昭皆楚之族。王逸云:「楚王始都是,生子瑕,受屈為卿,因以為氏。」

  〔二〕正義蓋今(在)左右拾遺之類。

 〔三〕集解史記音隱曰:「音閑」。

上官大夫與之同列,爭寵而心害其能。

굴원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과 같은 반열에 오르자

근상은 초왕의 총애를 차지하고자

마음속으로 굴원의 능력을 시기하여 해치려했다.

懷王使屈原造為憲令,

屈平屬草稿〔一〕未定。

上官大夫見而欲奪之,〔二〕

屈平不與,因讒之曰:

회왕이 굴원에게 명하여 나라의 율령을 제정하라고 했다.

굴원이 율령의 초안을 미처 완성하기 전에 상관대부가 알고

그 일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원이 그 일을 넘겨주지 않자 상관대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했다.

  〔一〕索隱屬音燭。草稿謂創制憲令之本也。漢書作「草具」,崔浩謂發始造端也。

  〔二〕正義王逸云上官靳尚。

「王使屈平為令,眾莫不知,

每一令出,平伐其功,(曰)以為「非我莫能為」也。」

“ 대왕께서 굴원을 시켜 율령을 제정하라고 명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령이 나올 때마다 그는 자기의 공이라고 자랑하며

‘ 내가 아니면 율령을 제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王怒而疏屈平。

屈平疾王聽之不聰也,讒諂之蔽明也,

邪曲之害公也,方正之不容也,

故憂愁幽思而作離騷。

이에 초왕은 노하여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왕이 한쪽의 말만 듣고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것과,

아첨과 모함하는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과,

사악하고 비뚤어진 무리가 공명정대한 사람을 해치려는 것과,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우수와 근심에 잠겨 <이소(離疎)>〔一〕를 지었다.

〔一〕離騷者,猶離憂也。

索隱,亦作「騷」。按:楚詞「」作「騷」,音素刀反。應劭云「離,遭也;騷,憂也」。又離騷序云「離,別也;騷,愁也」。

夫天者,人之始也;

父母者,人之本也。

이소는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음을 말한다.

대저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人窮則反本,故勞苦倦極,未嘗不呼天也;

疾痛慘怛,〔二〕未嘗不呼父母也。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근본을 돌이켜보는 까닭에

힘들고 피곤할 때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二〕正義上七感反,下丁達反。慘,毒也。怛,痛也

屈平正道直行,〔三〕竭忠盡智以事其君,

讒人閒之,可謂窮矣。

굴원은 올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지혜를 다 발휘하여

그 임금을 섬기었는데,

도리어 군주와 그의 사이가 이간질 당하여,

궁지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三〕正義寒孟反。

信而見疑,忠而被謗,能無怨乎?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바쳤으나 비방을 당하니,

어찌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屈平之作離騷,蓋自怨生也。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는

본디 이런 원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國風好色而不淫,小雅怨誹而不亂。〔四〕

若離騷者,可謂兼之矣。

<국풍(國風)>은 미인을 읊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았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 이소와 같은 것은 그 두 가지를 다 겸한 것이라고 하겠다.

  〔四〕正義誹,方畏反。

上稱帝嚳,下道齊桓,

中述湯武,以刺世事。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환공(齊桓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기술하여

그것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한 것이다.

明道德之廣崇,治亂之條貫,

靡不畢見。

도덕의 넓고 높음과

나라의 흥망성쇠의 인과관계를 밝혀

모두 자세히 드러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其文約,其辭微,

其志絜,其行廉,

其稱文小而其指極大,

그 문장은 간략하나 자세하고,

그의 정신은 정결하며 그의 행동은 청아하다.

그 문장은 비록 작은 것을 세세하게 묘사했으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극히 크고 깊으며

舉類邇而見義遠。

其志絜,故其稱物芳。

예로 든 것은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오(深奧)하다.

그의 정신은 고결했음으로

그는 즐겨 그 자신을 향초(香草)로 비유했다.

其行廉,故死而不容自疏。

濯淖〔五〕汙泥〔六〕之中,

그는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죽어서도 소인배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몸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있으나

능히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있고,

  〔五〕索隱上音濁,下音鬧。

  〔六〕索隱上音烏故反,下音奴計反。

蟬蛻於濁穢,〔七〕

以浮游塵埃之外,不獲世之滋垢,

皭然〔八〕泥而不滓者也。〔九〕

마치 매미가 더러운 오물 속에서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듯이

세속의 먼지구덩이 밖으로 헤엄쳐 나와

더러운 세상의 떼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청백하고 고결하여 진흙 속에 있어도

결코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七〕正義蛻音稅,去皮也,又他臥反。

  〔八〕集解徐廣曰:「皭,疏淨之貌。」索隱皭音自若反。徐廣云「疏淨之貌」。

  〔九〕索隱泥亦音涅,滓亦音淄,又並如字。

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一0〕

이에 그의 지조를 추측해 본다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一0〕正義言屈平之仕濁世,去其汙垢,在塵埃之外。推此志意,雖與日月爭其光明,斯亦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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