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六

伍子胥 列傳 第六

오자서 열전 제6-1

伍子胥者,楚人也,名員。

員父曰伍奢。員兄曰伍尚。

其先曰伍舉,以直諫事楚莊王,[一]

有顯,故其後世有名於楚。

오자서(伍子胥)는 초나라 출신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오원(伍員)의 부친은 오사(伍奢)이고 그 형은 오상(伍尙)이다.

그 선조에 오거(伍擧)라고 있었는데 초장왕(楚庄王)에게 직간(直諫)하여

공을 세워 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초나라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注[一]索隱按:舉直諫,見左氏、楚系家。

楚平王有太子名曰建,使伍奢為太傅,費無忌[一]為少傅。

無忌不忠於太子建。

초평왕(楚平王)은 태자에 그의 아들 건(建)을 세우고

오사를 태부(太傅)로 삼고 비무기(費无忌)를 소부(少傅)로 삼았다.

무기(无忌)가 태자 건(建)을 정성스럽게 모시지 않았다.

平王使無忌為太子取婦於秦,

秦女好,無忌馳歸報平王曰:

「秦女絕美,王可自取,而更為太子取婦。」

평왕이 비무기에게 태자의 부인을 진(秦)나라에서 청해오라고 시켰다.

비무기가 사자로 진나라에 가서 보니 진녀(秦女)는 절색이었다.

무기(无忌)가 먼저 달려와 평왕에게 고했다.

「진녀(秦女)는 천하절색이라 대왕께서 취하시고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인을 구해 부인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平王遂自取秦女而絕愛幸之,

生子軫。更為太子取婦。

평왕이 결국은 진녀를 자기의 부인으로 삼고 매우 총애하였다.

진녀가 아들을 낳아 진(軫)이라고 이름 지었다.

태자를 위해서는 다른 여인을 구하여 그의 부인으로 삼게 했다.

注[一]索隱按:左傳作「費無極」。

無忌既以秦女自媚於平王,因去太子而事平王。

恐一旦平王卒而太子立,殺己,乃因讒太子建。

진녀를 평왕에게 바친 무기는 평왕의 총애를 받아

태자 곁을 떠나 왕의 측근에서 모셨다.

그러나 그는 평왕이 언젠가는 죽고

태자 건(建)이 뒤를 이으면 자기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태자 건을 참소 하였다.

建母,蔡女也,無寵於平王。

平王稍益疏建,使建守城父,[一]備邊兵。

건(建)의 생모(生母) 채녀(蔡女)는 처음에는 평왕의 총애를 받았었다.

그러나 진녀를 얻어 진(軫)을 낳고부터는

채녀와 멀어지고 태자 건(建)과와도 점점 소원하게 되었다.

이윽고 태자 건을 성보(城父)로 보내어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注[一]集解地理志潁川有城父縣。索隱本陳邑,楚伐陳而有之。地理志潁川有

城父縣。

頃之,無忌又日夜言太子短於王曰:

「太子以秦女之故,不能無怨望,願王少自備也。

自太子居城父,將兵,外交諸侯,且欲入為亂矣。」

무기는 다시 밤낮으로 시간만 있으면 태자의 허물만을 들추면서 말했다.

「태자가 진녀의 일을 알게 되면 어찌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스스로 대비하셔야 합니다.

태자가 성보(城父)에 부임하고부터는

군사들을 조련하고 이웃나라의 제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는

장차 란을 일으켜 이곳으로 진격하기 위해서입니다.」

平王乃召其太傅伍奢考問之。

伍奢知無忌讒太子於平王,因曰:

「王獨柰何以讒賊小臣 疏骨肉之親乎?」

평왕이 즉시 태부(太傅) 오사(伍奢)를 소환하여

태자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오사는 비무기가 평왕에게 태자를 참소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유독 남을 헐뜯는 소인배의 참소하는 말만을 들으시고

골육인 자식까지 의심하여 멀리하려고 하십니까?」

無忌曰:「王今不制,其事成矣。王且見禽。」

비무기가 전해 듣고 평왕을 부추겼다.

「왕께서 오사를 지금 잡아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획책하고 있는 음모를 거행시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오사를 붙잡아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십시오.」

於是平王怒,囚伍奢,

而使城父司馬奮揚[一]往殺太子。

평왕이 비무기의 말대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분양(奮陽)에게 태자를 잡아서 죽이라는 명을 전했다.

行未至,奮揚使人先告太子:

「太子急去,不然將誅。」

太子建亡奔宋。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분양은 그들의 부대가 태자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몰래 사람을 보내 몸을 피해 도망치라고 고했다.

「태자께서는 급히 달아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태자는 분양의 통고를 받고 그 즉시 송나라로 달아났다.」

注[一]索隱城父司馬之姓名也。

無忌言於平王曰:

「伍奢有二子,皆賢,不誅且為楚憂。

可以其父質而召之,不然且為楚患。」

태자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비무기가 평왕에게 말했다.

「지금 옥에 갇힌 오사에게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위인들이 모두 현능하여 죽이지 않는다면

장차 초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친을 인질로 삼아 도성으로 불러와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두 사람을 살려둔다면

장차 초나라에 재난을 몰고 올 것입니다.」

王使使謂伍奢曰:

「能致汝二子則生,不能則死。」

평왕이 사람을 옥중의 오사에게 보내 명을 전하게 했다.

「그대가 두 아들을 이곳으로 불러 올 수 있다면 살겠지만,

불러 올 수 없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伍奢曰:「尚為人仁,呼必來。

員為人剛戾忍訽,[一]能成大事,

彼見來之并禽,其勢必不來。」

오사가 듣고 말했다.

「큰아들 상(常)은 마음이 어질어 내가 부르다면 틀림없이 오겠지만

작은아들 원(員)은 매우 고집이 세고 참을성이 많아〔강려인구(剛戾忍訽〕

능히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인중호걸입니다.

원은 내가 부른다고 해도 도성에 들어오면 사로잡혀

같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王不聽,使人召二子曰:

「來,吾生汝父;不來,今殺奢也。」

평왕이 오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사람을 성보(城父)에 보내 두 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나의 부름에 응하면 너희들 부친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이며

응하지 않는다면 죽일 것이다.」

伍尚欲往,員曰:

「楚之召我兄弟,非欲以生我父也,

오상(伍常)이 초왕의 부름에 응하려고 하자 오원이 말했다.

「초왕이 우리 형제를 부르고 있는 이유는

부친을 살리려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恐有脫者後生患,

故以父為質,詐召二子。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이 초나라를 빠져나가

후에 초나라의 근심거리가 되는 경우를 두려워하여

부친을 인질로 삼아

우리 두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二子到,則父子俱死。

何益父之死?

우리 두 사람이 초왕의 속임을 당해 부친이 계신 곳에 간다면

우리 세 부자는 모두 한꺼번에 죽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찌 아버님께서 몸을 보전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往而令讎不得報耳。不如奔他國,

借力以雪父之恥,俱滅,無為也。」

우리가 간다면 모두 함께 죽게 되어

원수도 갚을 수 없게 될 뿐이니

차라리 도망가 외국의 힘을 빌려

부친의 원수를 갚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 세 부자가 모두 함께 죽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伍尚曰:

「我知往終不能全父命。

然恨父召我以求生 而不往,

後不能雪恥,終為天下笑耳。」

오상이 말했다.

「 초왕의 부름에 응한다고 해서

아버님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님이 그 목숨을 위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데

가지 않았다가 후에 아버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謂員:

「可去矣!汝能報殺父之讎,我將歸死。」

너는 다른 나라로 달아나라!

너는 능히 아버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님의 곁으로 가서 같이 죽겠다!」

尚既就執,使者捕伍胥。

伍胥貫弓[二]執矢嚮使者,使者不敢進,

오상이 즉시 밖으로 나가 스스로 결박을 받았다.

초왕이 보낸 사람이 오자서(伍子胥)마저 붙잡으려 했다.

오자서가 활에 화살을 재어 겨누자 사자는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伍胥遂亡。

聞太子建之在宋,往從之。

오자서는 그 틈을 이용해 달아났다.

먼저 달아난 태자 건(建)이 송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그를 모셨다.

奢聞子胥之亡也,曰:

「楚國君臣且苦兵矣。」

감옥의 오사(伍奢)는 자서가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장차 병란에 시달림을 받겠구나!」

伍尚至楚,楚并殺奢與尚也。

이윽고 오상이 초나라 서울에 당도하자

초왕은 오사와 오상을 함께 죽였다.

注[一]集解音火候反。索隱鄒氏云:「一作『詬』,罵也,音逅。」劉氏音火候反。

注[二]集解貫,烏還反。索隱劉氏音貫為彎,又音古患反。貫謂滿張弓。

伍胥既至宋,宋有華氏之亂,[一]

오자서가 송나라에 머물고 있던 중에

그 나라에서 화씨(華氏)들이 란을 일으켰다.

乃與太子建俱奔於鄭。鄭人甚善之。

太子建又適晉,晉頃公曰:

오자서와 태자 건은 란을 피해 정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 사람들이 오자서 일행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태자 건이 당진(唐晉)에 갔다.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함)

당진의 경공(頃公)이 태자 건에게 말했다.

「太子既善鄭,鄭信太子。

太子能為我內應,而我攻其外,

滅鄭必矣。滅鄭而封太子。」

「태자는 이미 정나라를 좋아하고

정나라는 태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소.

태자가 안에서 내응하고 우리는 밖에서 공격하면

정나라를 필시 멸할 수 있소.

정나라를 멸한다면 태자를 그 곳에 봉하겠소.」

太子乃還鄭。事未會,

會自私欲殺其從者,

從者知其謀,乃告之於鄭。

태자가 다시 정나라에 돌아와 거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사로운 일로 그의 시종 중에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죽이려고 하자,

시종은 그 음모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정나라 조정에 고변했다.

鄭定公與子產誅殺太子建。

建有子名勝。伍胥懼,乃與

勝俱奔吳。

정정공(鄭定公)과 자산(子産)이 상의하여

계책을 세워 태자 건을 불러 죽였다.

태자 건에게는 승(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오자서는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승(勝)을 데리고 오나라로 도망쳤다.

到昭關,[二]昭關欲執之。

伍胥遂與勝獨身步走,幾不得脫。

두 사람이 소관(昭關)을 도착하자

소관의 초나라 군사들은 오자서 일행을 잡으려 했다.

오자서는 승과 헤어져 홀로 소관을 넘어 달아났으나

추격하던 초나라 군사들에게 거의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追者在後。

至江,江上有一漁父乘船,

知伍胥之急,乃渡伍胥。

추격자들이 뒤쫓았다.

오자서가 강수(江水)에 당도하자

강변에서 고기잡던 어부가 배에 태우고

오자서의 다급함을 알고는 자서를 건네주었다.

伍胥既渡,解其劍曰:

「此劍直百金,以與父。」

오자서가 강수를 건너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어부에 주었다.

「이 칼은 백금의 가치가 있어 당신께 줍니다.」

父曰:

「楚國之法,得伍胥者 賜粟五萬石,爵執珪,

豈徒百金劍邪!」不受。

어부가 말했다.

「초나라 법에는 오자서를 잡아다 바친 자에게는

곡식 오 만석과 집규(執珪)의 작위를 준다 했습니다.

어찌 다만 백금밖에 나가지 않는 칼이리오?」

어부는 칼을 받지 않았다.

伍胥未至吳而疾,止中道,乞食。[三]

오자서는 오나라로 미처 들어가기 전에 병이 들어

중도에 걸식을 하였다.

至於吳,吳王僚方用事,公子光為將。

伍胥乃因公子光以求見吳王。

오나라에 이르니

오왕(吳王) 요(僚)가 오왕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공자 광(光)이 오나라의 병권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의 천거로 오왕을 접견했다.

注[一]索隱春秋昭二十年,宋華亥﹑向寧﹑華定與君爭而出奔是也。

注[二]索隱其關在江西﹑乃吳楚之境也。

注[三]集解張勃曰:「子胥乞食處在丹陽溧陽縣。」索隱按:張勃,晉人,吳鴻

臚嚴之子也,作吳錄,裴氏注引之是也。溧音栗,水名也。

久之,楚平王 以其邊邑鍾離

與吳邊邑卑梁氏俱蠶,

兩女子爭桑相攻,乃大怒,

그리고 얼마 후에 초평왕은 초나라의 변읍(邊邑)인 종리(鍾離)7)와

오나라의 변읍(邊邑) 비량지(卑梁氏)에서 누에를 기르기 위해

두 고을 여인들이 뽕나무를 두고 서로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노했다.

至於兩國舉兵相伐。吳使公子光伐楚,

拔其鍾離﹑居巢而歸。[一]

이윽고 두 나라는 거국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오나라가 공자 광을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공자광이 초나라의 종리와 거소(居巢) 두 고을을 함락시키고 귀국했다.

伍子胥說吳王僚曰:

「楚可破也。願復遣公子光。」

오자서가 오왕 요에게 말했다.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공자광을 다시 출정시키기 바랍니다.」

公子光謂吳王曰:

「彼伍胥父兄為戮於楚,而勸王伐楚者,

欲以自報其讎耳。伐楚未可破也。」

공자 광이 오왕에게 말했다.

「저 오자서의 부친과 형이 초왕에게 살륙당했습니다.

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초나라를 공격해도 격파할 수 없습니다.」

伍胥知公子光有內志,

欲殺王而自立,未可說以外事,

오자서는 공자 광이 마음속으로

오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함을 짐작했으나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乃進專諸[二]於公子光,

退而與太子建之子勝 耕於野。

공자 광에게 전제(專諸)라는 사람을 천거하고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勝)과 함께 초야에서 농사를 지었다.

注[一]索隱二邑,楚縣也。按:鍾離縣在六安,古鍾離子之國,系本謂之「終

」,嬴姓之國。居巢亦國也。桀奔南巢,其國蓋遠。尚書序「巢伯來朝」,蓋

因居之於淮南楚地也。

注[二]索隱左傳謂之「專設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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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八十五

呂不韋列傳第二十五 

려불위 열전 제25-4

秦王十年十月,免相國呂不韋。

及齊人茅焦說秦王,

秦王乃迎太后於雍,歸復咸陽,[一]

而出文信侯就國河南。

진왕 10년 11월(기원전 237년),

여불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켰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의 간언을 듣고

진왕이 그 모후를 옹에서 맞이하여 함양으로 데려왔으나

문신후는 하남의 봉국에 부임하도록 했다.

注[一]集解徐廣曰:「入南宮。」

歲餘,諸侯賓客使者相望於道,請文信侯。

秦王恐其為變,乃賜文信侯書曰: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제후와 빈객들이 보낸 사자들이

진나라로 통하는 길을 열을 지어 오고가면서 문신후를 뵙기를 청하곤 했다.

진왕이 문신후로 인해 변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서신을 한 장 써서 보냈다.

「君何功於秦?秦封君河南,食十萬戶。

君何親於秦?號稱仲父。其與家屬徙處蜀!」

"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하남에 10만 호의 식읍을 봉국으로 주었고,

그대가 진나라 종실과 무슨 인척관계가 있기에 중부(仲父)라는 호칭을 받은 것이오.

그대는 가솔들을 이끌고 촉군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呂不韋自度稍侵,恐誅,乃飲酖而死。[一]

秦王所加怒呂不韋、嫪毐皆已死,

乃皆復歸嫪毐舍人遷蜀者。

여불위는 자기의 지위가 시간이 갈수록 깎여지는 것을 보고

혹시라도 진왕에게 살해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여불위와 노애로 인해 분노했던 진왕은 두 사람이 모두 죽자

촉군으로 보내 살게 했던 노애의 문하 사인들을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注[一]集解徐廣曰:「十二年。」駰案:皇覽曰「呂不韋冢在河南洛陽北邙道西

大冢是也。民傳言呂母冢。不韋妻先葬,故其冢名『呂母』也」。

始皇十九年,太后薨,謚為帝太后,[一]

與莊襄王會葬陽。[二]

시황 19년 기원전 228년, 태후가 죽자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 짓고 장양왕이 묻혔던 채양(茝陽)에 합장했다.

注[一]索隱王劭云「秦不用謚法,此蓋號耳」,其義亦當然也。始皇稱皇帝之後,

故其母號為帝太后,豈謂誄列生時之行乎!

注[二]集解徐廣曰:「一作『芷陽』。」

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한다.

不韋及嫪毐貴,封號文信侯。[一]

비천한 출신의 여불위와 노애는 신분이 귀하게 되어

문신후라는 봉호를 받았다.

人之告嫪毐,毐聞之。

秦王驗左右,未發。

 어떤 사람이 노애를 고변했으나 노애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왕은 좌우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上之雍郊,毐恐禍起,乃與黨謀,

矯太后璽發卒以反蘄年宮。[二]

 진왕이 옹성(雍城)의 교외에 당도하자

노애는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같은 당의 무리들과 모의하고

태후의 옥쇄를 위조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년궁(蘄年宮)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發吏攻毐,毐敗亡走,

追斬之好畤,[三]遂滅其宗。

진왕이 관리들에게 군사를 주어 노애를 공격하게 하자

노애는 싸움에서 지고 도주했다.

호치(好畤)에서 노애를 잡아 참수하고 노애의 종족을 멸족시켰다.

而呂不韋由此絀矣。

그래서 여불위는 그 사건에 연루되어 축출된 것이다.

孔子之所謂「聞」者,其呂子乎?[四]

공자가 말한 바 있는 '명성만 쫓는 사람'이 바로 여불위가 아니었겠는가?

注[一]索隱按:文信侯,不韋封也。嫪毐封長信侯。上文已言不韋封,此贊中

言嫪毐得寵貴由不韋耳,今此合作「長信侯」也。

注[二]正義蘄年宮在岐州城西故城內。

注[三]索隱地理志扶風有好畤縣也。

注[四]集解論語曰:「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在邦必聞,在家必

聞。」馬融曰:「此言佞人也。」

【索隱述贊】不韋釣奇,委質子楚。華陽立嗣,邯鄲獻女。及封河南,乃號仲

父。徙蜀懲謗,懸金作語。籌策既成,富貴斯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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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八十五

呂不韋列傳第二十五 

려불위 열전 제25-3

秦昭王五十六年,薨,太子安國君立為王,

華陽夫人為王后,子楚為太子。

趙亦奉子楚夫人及子政歸秦。

진소왕 56년(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화양부인은 왕비가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가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찾아 진나라에 보냈다.

秦王立一年,薨,謚為孝文王。

太子子楚代立,是為莊襄王。

진왕은 왕위에 오른지 1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태자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莊襄王)이다.

莊襄王所母[一]華陽后為華陽太后,

真母夏姬尊以為夏太后。

莊襄王元年,以呂不韋為丞相,[二]

封為文信侯,食河南雒陽[三]十萬戶

장양왕의 어머니인 화양왕비는 화양태후가 되고,

장양왕의 친모 하희(夏姬)는 하태후로 높여졌다.

장양왕 원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

하남의 낙양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注[一]索隱劉氏本作「所生母」,「生」衍字也。今檢諸本並無「生」字。

注[二]索隱下文「尊為相國」。案:百官表曰「皆秦官,金印紫綬,掌承天子助

理萬機。秦置左右,高帝置一,後又更名相國,哀帝時更名大司徒」。

注[三]索隱戰國策曰「食藍田十二縣」。而秦本紀莊襄王元年初置三川郡,地理

志高祖更名河南。此秦代而曰「河南」者,史記後作,據漢郡而言之耳。

莊襄王位三年,薨,太子政立為王,[一]

尊呂不韋為相國,號稱「仲父」。[二]

秦王年少,太后時時竊私通呂不韋。

不韋家僮萬人。

장양왕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왕의 자리를 이었다.

진왕 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올리고

중보(仲父) 즉 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

진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태후는 아무도 몰래 여불위를 불러 정을 통했다.

불위의 집에는 가동만 만 명이 넘었다.

注[一]集解徐廣曰:「時年十三。」

注[二]正義仲,中也,次父也。蓋效齊桓公以管仲為仲父。

當是時,魏有信陵君,[一]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齊有孟嘗君,[二]

皆下士喜賓客以相傾。

당시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는데

모두 빈객을 모으기를 좋아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呂不韋以秦之彊,羞不如,

亦招致士,厚遇之,至食客三千人。

여불위는 진나라는 강대국임으로

그들보다 빈객들을 많이 모으지 못한다면 수치라고 여겨

그 역시 선비들을 초빙하여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여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을 모았다.

是時諸侯多辯士,如荀卿之徒,著書布天下。

그때 많은 변사들이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하고 있었는데

순경(荀卿)도 그 중 한 사람으로써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반포하고 있었다.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為八覽﹑六論﹑十二紀,二十餘萬言。[三]

여불위는 즉시 그의 빈객들을 시켜

당시 다른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을 모아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의 20여 만자로 된 책을 편찬했다.

以為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이로써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들을 모두 기록했다고 하며

그 책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1)라고 명명했다.

布咸陽[四]市門,懸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함양성 시중의 조문 위에 천금을 걸어놓고 공포하기를

제후들이나 각 나라의 유세객이나 빈객들 중에서

이 책에 한 자라도 글을 더하거나 감할 수 있다면 천금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注[一]正義年表云秦昭王五十六年,平原君卒;始皇四年,信陵君死;始皇九

年,李園殺春申君。孟嘗君當秦昭王二十四年已後而卒,最早。

注[二]索隱按:王劭云「孟嘗﹑春申死已久」。據表及傳,孟嘗﹑平原死稍在前。

信陵將五國兵攻秦河外,正當在莊襄王時,不韋已為相。又春申與不韋並時,

各相向十餘年,不得言死之久矣。

注[三]索隱八覽者,有始﹑孝行﹑慎大﹑先識﹑審分﹑審應﹑離俗﹑時君也。

六論者,開春﹑慎行﹑貴直﹑不苟﹑以順﹑士容也。十二紀者,記十二月也,

其書有孟春等紀。二十餘萬言,二十六卷也。

注[四]索隱地理志右扶風渭城縣,故咸陽,高帝更名新城,景帝更名渭城。案:

咸訓皆,其地在渭水之北,北阪之南,

水北曰陽,山南亦曰陽,皆在二者之陽也。

始皇帝益壯,太后淫不止。

呂不韋恐覺禍及己,乃私求大陰人嫪毐以為舍人,

時縱倡樂,使毐以其陰關桐輪而行,[一]

令太后聞之,以啗太后。

시황제가 장성했음에도 태후는 음행을 그만두지 않았다.

여불위는 태후와의 일이 발각되어 그 화가 자기에 미칠 것을 두려워

비밀리에 양물이 대단히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찾아 사인으로 삼아

유흥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노애로 하여금 그의 양물을 동으로 만든 수레바퀴를

가운데에 끼고 돌리는 묘기를 펼치도록 해서

고의로 태후의 귀에 들리도록 해서 유인했다.

太后聞,果欲私得之。

呂不韋乃進嫪毐,詐令人以腐罪[二]告之。

소문을 듣게 된 태후가 과연 비밀리에 노애를 찾았다.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궁으로 들여보내면서

다시 사람을 시켜 그를 궁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변하게 했다.

不韋又陰謂太后曰:

「可事詐腐,則得給事中。」

그리고는 여불위가 태후를 찾아가 은밀히 말했다.

" 거짓으로 궁형을 받게 한 다음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곁에 두십시오. "

太后乃陰厚賜主腐者吏,詐論之,

拔其鬚眉為宦者,遂得侍太后。

태후가 은밀히 궁형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후한 재물을 하사하고

노애에게 궁형을 집행한 것처럼 꾸미고

그의 몸에 난 수염과 눈썹을 뽑아 내시로 만들고는

드디어 태후를 시중들게 했다.

太后私與通,絕愛之。

有身,太后恐人知之,

詐卜當避時,徙宮居雍。[三]

태후가 노애와 아무도 몰래 정을 통하기 시작하더니

노애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이윽고 임신하게 된 태후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점을 쳐 거짓 점괘를 만들어 좋지 않은 때를 피하기 위해

거처하는 곳을 옹(雍)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嫪毐常從,賞賜甚厚,

事皆決於嫪毐。

嫪毐家僮數千人,

諸客求宦為嫪毐舍人千餘人。

노애가 항상 태후를 시종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로 후하게 대했다.

태후의 일은 모두 노애의 손에서 처결되었다.

노애는 수천 명의 가동을 거느렸고

많은 사람들이 궁형을 받아

노애의 사인으로 일하고 싶다는 사람만도 천여 명이 넘었다.

注[一]正義以桐木為小車輪。

注[二]正義腐音輔,謂宮刑胥靡也。

注[三]正義雍故城在岐雍縣南七里,有秦都大鄭宮。

始皇七年,莊襄王母夏太后薨。

孝文王后曰華陽太后,與孝文王會葬壽陵。[一]

夏太后子莊襄王葬芷陽,[二]故夏太后獨別葬杜東,[三]曰

「東望吾子,西望吾夫。後百年,旁當有萬家邑」。[四]

시황 7년(기원전 240년), 장양왕의 생모 하태후가 죽었다.

효문왕후 화양태후가 효문왕과 같이 수릉(壽陵)에 합장되었고

하태후의 아들 장양왕은 지양(止揚)에 장사지냈음으로

하태후는 결국 혼자 두동(杜東) 묻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 동쪽으로는 아들이 서쪽으로는 남편을 바라 볼 수 있으니

수백 년 후에는 아마도 주위에 만호의 사람이 사는 성읍이 들어서게 되겠구나!"

注[一]正義秦孝文王陵在雍州萬年縣東北二十五里。

注[二]索隱芷音止。地理志京兆霸陵縣故芷陽。案:在長安東也。正義秦莊襄

陵在雍州新豐縣西南三十五里。始皇在北,故俗亦謂之「見子陵」。

注[三]索隱杜原之東也。正義夏太后陵在萬年縣東南二十五里。

注[四]索隱按:宣帝元康元年起杜陵。漢舊儀武、昭、宣三陵皆三萬戶,計去

此一百六十餘年也。

始皇九年,有告嫪毐實非宦者,常與太后私亂,

生子二人,皆匿之。與太后謀

曰「王即薨,以子為後」。[一]

시황 9년(서기 238년),

실제로 환관이 아닌 노애가 태후와 침식을 같이하여

아들 둘을 낳아 감추어 기르고 있으면서

태후와의 모의를 고변했다.

“만일 왕이 죽는다면

그 아들로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於是秦王下吏治,具得情實,事連相國呂不韋。

그래서 진왕이 관리에게 사실 여부를 조사하라고 명하자

그 고변이 사실임이 들어나고 상국 여불위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九月,夷嫪毐三族,殺太后所生兩子,而遂遷太后於雍。[二]

諸嫪毐舍人皆沒其家而遷之蜀。[三]

王欲誅相國,為其奉先王功大,及賓客辯士為游說者眾,

王不忍致法。

9월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의 소생 두 아들을 죽인 다음

태후를 옹에서 다른 곳으로 쫓아내어 연금시켰다.

노애의 수많은 사인들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촉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진왕이 상국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선왕을 받드는 공이 큰것을 생각해서

여불위의 빈객들과 변사들이 죽이면 안된다고 여러 대중들에게 유세했기 때문에

왕은 차마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注[一]集解說苑曰:「毐與侍中左右貴臣博弈飲酒,醉,爭言而?,瞋目大叱曰:

『吾乃皇帝假父也,寠人子何敢乃與我亢!』所與?者走,行白始皇。」索隱

劉氏寠音其矩反。今俗本多作「屢」字,蓋相承錯耳,不近詞義。今按:說苑

作「寠子」,言輕諸侍中,以為窮寠家之子也。

注[二]索隱按:說苑云遷太后棫陽宮。地理志雍縣有棫陽宮,秦昭王所起也。

注[三]索隱家謂家產資物,並沒入官,人口則遷之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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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八十五

呂不韋列傳第二十五 

려불위 열전 제25-2

求見華陽夫人姊,而皆以其物獻華陽夫人。

因言子楚賢智,結諸侯賓客遍天下,常曰

「楚也以夫人為天,日夜泣思太子及夫人。」

진나라에 당도한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 보고

그 물품들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치면서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자초는 현능하고 지혜를 갖추었으며

천하의 이름있는 빈객들과 두루 결교맺고 있으면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 이 자초는 부인을 하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태자와 부인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며 생활하고 있다.'라고.

夫人大喜。不韋因使其姊說夫人[一]曰:

「吾聞之,以色事人者,色衰而愛弛。

今夫人事太子,甚愛而無子,

화양부인이 듣고 크게 기뻐했다.

여불위의 부탁을 받은 부인의 언니가 부인을 찾아가 말했다.

" 내가 들으니 미색으로 다른 사람을 모시는 자는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게 되면 총애도 식는다 했는데,

지금 너는 태자를 모시며, 그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으나 자식이 없다.

不以此時蚤自結於諸子中賢孝者,舉立以為適而子之,[二]

夫在則重尊,夫百歲之後,所子者為王,終不失勢,

此所謂一言而萬世之利也。

사랑을 받을 때

빨리 다른 여러 공자들 중 현능하고 효성스러운 적자로 세운다면

태자가 곁에 있을 때는 존중을 받다가

먼 훗날 그 아들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

그때까지 세를 잃지 않으니

그것이야 말로 한 마디로 말하면

만세에 이르도록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아니겠는가?

不以繁華時樹本,即色衰愛弛後,

雖欲開一語,尚可得乎?

또한 모든 일이 번성할 때 기반을 마련해 좋지 않고

후에 미색이 쇠해져 부군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버리면

그때는 네가 하는 말 중 한마디라도

다른 사람이 받들겠는가?

今子楚賢,而自知中男也,次不得為適,

其母又不得幸,自附夫人,

夫人誠以此時拔以為適,

夫人則竟世有寵於秦矣。」

오늘 자초가 현능하다 하고,

또한 자신은 여러 공자들 중 서열이 중간 밖에 못 되어

스스로는 적자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더군다나 그의 생모는 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너에게 의지하려고 하니,

네가 이 번 기회에 그를 선택하여 적자로 세우면

너는 결국 대를 이어가며 진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으리라. "

華陽夫人以為然,承太子閒,

從容[三]言子楚質於趙者絕賢,

來往者皆稱譽之。乃因涕泣曰:

화양부인이 그 말에 혹하여 태자가 쉬는 사이에

넌지시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자초가 매우 현능하고

그와 내왕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를 칭찬해 마지않는다고 전했다.

그리고 화양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妾幸得充後宮,不幸無子,

願得子楚立以為適嗣,以託妾身。」

" 제가 후궁에 있다가 태자님의 총애를 받아 태자비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자초를 적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워 주시면

제가 노년에 몸을 그에게 의탁하려고 합니다. "

安國君許之,乃與夫人刻玉符,

約以為適嗣。

安國君及夫人因厚餽遺子楚,

而請呂不韋傅之,

子楚以此名譽益盛於諸侯。

안국군이 허락하고 그 즉시 부인에서 옥을 갈라 맹세의 징표로 주며

자초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약속했다.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자초에게 보내며

여불위에게 그의 태부가 되어 줄 것을 청했다.

자초는 이로써 그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注[一]索隱戰國策作「說秦王后弟陽泉君」也。

注[二]索隱以此為一句。子謂養之為子也。然欲分「立以為適」作上句,而「子

之夫在則尊重」作下句,意亦通。

注[三]索隱閒音閑。從音七恭反。

呂不韋取邯鄲諸姬絕好善舞[一]者與居,知有身。

子楚從不韋飲,見而說之,

因起為壽,請之。

여불위가 한단에서 춤을 잘 추는 무회를 취하여 같이 동거하던 중

그 무희가 임신을 한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말, 자초가 여불위와 함께 술을 들다가

그 무희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불위를 위해 축수를 하고

그 여인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呂不韋怒,念業已破家為子楚,

欲以釣奇,[二]乃遂獻其姬。

姬自匿有身,至大期時,[三]生子政。

子楚遂立姬為夫人。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미 일이 이미 진행되어 전 집안의 재산이 자초를 위해 탕진되었으며

또한 자초를 이용하여 얻어야 할 큰 이득이 있음으로 그 무희를 바쳤다.

그 무희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숨기고 있다가

이윽고 12달 만에 아들 政을 낳았다.

자초는 그 무회를 자기의 정부인으로 삼았다.

注[一]索隱言其姿容絕美而又善舞也。

注[二]索隱釣者,以取魚喻也。奇上云「此奇貨可居」也。

注[三]集解徐廣曰:「期,十二月也。」索隱徐廣云「十二月也」。譙周云「人

十月生,此過二月,故云『大』」,蓋當然也。既云自匿有娠,則生政固當踰

常也。

秦昭王五十年,

使王齮圍邯鄲,急,趙欲殺子楚。

子楚與呂不韋謀,行金六百斤予守者吏,得脫,

亡赴秦軍,遂以得歸。

진소왕 50년(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왕의(王齮)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한단을 포위하고 급공을 가하자

조나라가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자초와 여불위가 서로 모의하여

황금 6백 근으로 자기를 감시하는 관리들을 매수하여

한단성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일행은 진나라 진영에 당도함으로써

무사히 진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趙欲殺子楚妻子,子楚夫人趙豪家女也,

得匿,以故母子竟得活。

조나라가 자초의 처자를 찾아 살해하려고 했으나

자초의 부인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몸을 숨길 수 있었음으로 자초의 부인과 아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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