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쾌열전 03

項籍既死,漢王為帝,

以噲堅守戰有功,益食八百戶。

항우가 이미 죽고 한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굳게 지키고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웠음으로 식읍 8백 호를 더해 주었다.

從高帝攻反燕王臧荼,

虜荼,定燕地。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를 따라 종군한 번쾌는 장도를 사로잡고 연나라 땅을 평정했다.

楚王韓信反,

噲從至陳,取信,定楚。〔一〕

초왕 한신(韓信)이 반란을 획책했을 때

번쾌가 따라가 진(陳)에 이르러 한신을 사로잡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一〕正義徐州。

更賜爵列侯,與諸侯剖符,

世世勿絕,

황제는 다시 번쾌를 열후의 대열에 세우고

제후들에게 내리는 부절을 주어

대대손손 끊이지 않도록 했다.

食舞陽,號為舞陽侯,

除前所食。

무양현(舞陽縣)을 봉읍으로 주어 봉호를 무양후라고 부르게 하고

그 전의 식읍은 모두 폐했다.

以將軍從高祖

攻反韓王信於代。

장군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을 공격했다.

自霍人以往〔二〕至雲中,〔三〕

與絳侯等共定之,益食千五百戶。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함께 번쾌는

곽인(霍人)애서 운중(雲中)에 이르는 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식읍 1천 5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二〕正義先累反,又蘇果反,又山寡反。杜預云「霍人,晉邑也。「霍人」當作「葰」,地理志云葰人縣屬太原郡」。括地志云:「葰人故城在代州繁畤縣界也。」

  〔三〕正義雲中郡縣,皆朔州善陽縣北三百八十里定襄故城是也。   〔四〕集解徐廣曰:「曼,一作「甯」字。」

因擊陳豨與曼丘臣軍〔四〕,戰襄國,〔五〕

破柏人,〔六〕先登,

진희(秦稀)와 만구신(曼丘臣)의 군사를 공격하여 양국(襄國)에서 싸우고

백인(柏人)에서 격파할 때 번쾌는 성벽에 가장 먼저 올랐다.

  〔五〕正義邢州城。

  〔六〕正義邢州縣。

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縣,

殘東垣,〔七〕遷為左丞相。

이어서 청하(淸河)에서 상산(常山)에 이르는

모두 27개 현으로부터 항복받아 평정했다.

끝까지 항거한 동원(東垣)은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그 공으로 번쾌는 좌승상으로 올랐다.

  〔七〕集解張晏曰:「殘,有所毀也。」瓚曰:「殘謂多所殺傷也。孟子曰「賊義謂之殘」。」

破得綦毋卬、尹潘軍於無終、廣昌。〔八〕

破豨別將胡人王黃軍於代南,

因擊韓信軍於參合。〔九〕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사를 격파하고

계속 대남(代南)에서 진희(秦稀)의 별장(別將)으로

호인(胡人) 출신 왕황(王黃)의 군사를 파하고

삼합(參合)에서 한왕 신(信)의 군사를 공격했다.

  〔八〕正義在蔚州飛狐縣北七里。

  〔九〕正義在朔州定襄縣界。

軍所將卒斬韓信,破豨胡騎橫谷,〔一0〕

斬將軍趙既,虜代丞相馮梁、守孫奮、大將王黃、將軍、

(太卜)太僕解福〔一一〕等十人。

與諸將共定代鄉邑七十三。

번쾌의 부하 장수가 한왕 신을 참하고

진희의 호인 기병을 횡곡(橫谷)에서 무찌르고

대(代)의 장군 조기(趙旣)의 목을 베고,

승상 풍량(馮梁), 수장(守將) 손분(孫奮), 대장 왕황(王黃) 등 의 장군들과

태복 해복(解福) 등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代) 땅의 73개 향을 평정했다.

  〔一0〕正義谷音欲。蓋在代。

  〔一一〕正義人姓名。

其後燕王盧綰反,

噲以相國擊盧綰,破其丞相抵薊南,〔一二〕

定燕地,凡縣十八,鄉邑五十一。

그리고 얼마 후에 연왕 노관(盧綰)이 반하자

그의 승상 저(抵)를 계남(薊南)에서 격파하고

연나라의 18개 현 51개 향을 평정했다.

  〔一二〕索隱抵音丁禮反。抵訓至。一云抵者,丞相之名。

益食邑千三百戶,定食舞陽五千四百戶。

조정은 그 공으로 식읍 1천 3백 호를 더허여

무양(舞陽)의 식읍을 모두 5천 4백로 정했다.

從,斬首百七十六級,虜二百八十八人。

그는 살아 생전에 싸움터를 누비면서

176개의 적군의 목을 베었고,

288명을 포로로 잡았다.

別,破軍七,下城五,

定郡六,縣五十二,

得丞相一人,將軍十二人,

二千石已下至三百石十一人。

이와는 별도로 적군을 7번 격파하고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의 군과 52개의 현을 평정하고,

반군의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 석 이하에서 3백 석 이상의 관리 11명을 사로잡았다.

噲以呂后女弟呂須為婦,生子伉,

故其比諸將最親。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嬃)를 부인으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항(伉)을 낳았다.

그래서 번쾌는 다른 장수들에 비해 여후(呂后)와의 사이가 가장 친밀했다.

先黥布反時,

高祖嘗病甚,惡見人,

臥禁中,詔戶者無得入群臣。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매우 심해 사람을 접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하루종일 침상에 누워있으면서

시위(侍衛)에게 어떤 신하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群臣絳、灌等莫敢入。

신하들 중 강후 주발이나 관영 등 어떤 신하들도

감히 들어가 접견을 하지 못했다.

十餘日,噲乃排闥直入,〔一〕大臣隨之。

그리고 10여 후에 번쾌가 궁문을 밀치고 궁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대신들의 그 뒤를 따랐다.

〔一〕正義闥,宮中小門。

上獨枕一宦者臥

噲等見上流涕曰:

그때 황제는 환관 1명의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침상에 누워있었다.

번쾌 등의 중신들이 일제히 침상 앞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始陛下與臣等起豐沛,

定天下,何其壯也!

今天下已定,又何憊也!" 처음에 폐하께서 저희들을 이끌고 풍패(豊沛)에서 기병하시고

곧바로 천하를 평정할 때는 그렇게 강건하시더니,

천하를 이미 평정한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게 피곤해 하십니까?

且陛下病甚,大臣震恐,

더욱이 폐하께서 병을 잃으시니

우리 신하들은 가슴이 떨려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不見臣等計事,顧獨與一宦者絕乎?

且陛下獨不見趙高之事乎?」

高帝笑而起。   

또한 폐하께서는 우리들은 하찮은 신하들이라고 여겨

접견을 허락하여 국사를 의논하지 않으시고,

단지 환관 한 사람만을 곁에 두어 우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옛날 조고(趙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

황제가 웃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其後盧綰反,高帝使噲以相國擊燕。

후에 다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는 번쾌를 상국(相國)의 신분으로 대신 보내 연왕을 정벌하도록 했다.

是時高帝病甚,人有惡噲

黨於呂氏,即上一日宮車晏駕,

則噲欲以兵盡誅滅戚氏、趙王如意之屬。

그때 고제는 병이 매우 깊었다.

어떤 사람이 번쾌를 모함했다.

여씨들과 결당한 번쾌는 황제가 죽으면

휘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척(戚) 부인과 조왕 여의(如意) 및 그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주살할 것입니다.

高帝聞之大怒,乃使陳平載絳侯代將,而即軍中斬噲。

고제가 믿고 대노하여

진평에게 명하여 강후 주발과 함께 번쾌의 군영으로 가서

강후로 하여금 그의 대장 직을 대신하도록 하고

군중에서 번쾌의 목을 베라고 했다.

陳平畏呂后,執噲詣長安。

진평은 여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번쾌를 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至則高祖已崩,

呂后釋噲,使復爵邑。

진평의 일행이 장안에 당도했을 때는 고제가 이미 죽고 난 이후였다.

여후가 번쾌를 석방하고 그의 작위와 식읍을 돌려주게 했다.

孝惠六年,樊噲卒,謚為武侯。子伉代侯。

혜제(惠帝) 6년 기원전 189년, 번쾌가 죽자 시호를 무후(武侯)라 했다.

아들 번항(樊伉)이 그의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다.

而伉母呂須亦為臨光侯,

高后時用事專權,大臣盡畏之。

그러나 여항의 모친 여수(呂嬃) 역시 임광후(臨光侯)가 되었다.

항은 고후 대에 전력을 행사하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伉代侯九歲,高后崩。

大臣誅諸呂、呂須婘〔一〕屬,因誅伉。

번항이 번쾌의 작위를 이어 받은 지 9년 되는 해에 고후가 죽었다.

대신들이 제려(諸呂) 씨들과 여수르 주살할 때

번항도 같이 살해되었다.

  〔一〕索隱音須眷二音。

舞陽侯中絕數月。孝文帝既立,

乃復封噲他庶子市人為舞陽侯,復故爵邑。

무양후의 후계는 이로써 몇 개월 동안 끊어졌다가

효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번쾌의 서자 시인(巿人)을 무양후에 봉하고 예전의 식읍을 돌려주었다.

市人立二十九歲卒,謚為荒侯。

시인은 후가 된 지 29년에 죽으니 시호는 황후(荒侯)다.

子他廣代侯。

六歲,侯家舍人得罪他廣,怨之,乃上書曰:

시인의 아들 타광(他廣)이 뒤를 이었다.

타광이 작위를 이은 지 6년 되는 해에

집안의 사인이 타광에게 죄를 짓고 쫓겨나자 원망하여 조정에 고변했다.

「荒侯市人病不能為人,〔二〕

令其夫人與其弟亂而生他廣,

他廣實非荒侯子,不當代後。」

" 황후 시인은 병이 들어 생산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과 그의 동생이 사통하여 타광을 낳았습니다.

타광은 실제로 황후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작의 지위를 이을 수 없습니다. "

  〔二〕正義言不能行人道。

詔下吏。

孝景中六年,他廣奪侯為庶人,國除〔三〕。

황제가 조칙을 내려 관리에게 조사하라고 명했다.

효경제 6년 기원전 151년, 타광은 후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어

그의 봉국은 폐해졌다.  

  〔三〕索隱案:漢書平帝元始二年,封噲玄孫之子章為舞陽侯,邑千戶。

[논평은 열전 35권 끝에서 이동함]

太史公曰:

吾適豐沛,問其遺老,

觀故蕭、曹、樊噲、滕公之家,

及其素,異哉所聞!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 패 지역에 가서 그곳의 노인들께 물어

옛날의 소하, 조삼, 번쾌, 등공의 집을 보고

그들의 평소 행동을 알아 보았더니

세상에 전하는 말과 달랐다.

方其鼓刀屠狗賣繒之時,豈自知附驥之尾,

垂名漢廷,德流子孫哉?

그들이 칼을 휘둘러 개를 도살하고

비단을 팔던 때에 어찌 스스로 준마의 꼬리에 붙어서

이름을 한 나라 조정에 드리우고

덕이 자손에게 흘러내릴 것을 알았겠는가?

余與他廣通,為言高祖功臣之興時若此云〔一〕。

나는 타광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위하여 고조의 공신이 처음 일어날 때의 상태를

이상과 같이 말해 주었다.

  〔一〕索隱案;他廣,樊噲之孫,後失封。蓋嘗訝太史公序蕭、曹、樊、滕之功悉具,則從他廣而得其事,故備也。

  「索隱述贊」聖賢影響,雲蒸龍變。屠狗販繒,攻城野戰。扶義西上,受封南面。酈況賣交,舞陽內援。滕灌更王,奕葉繁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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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쾌열전 02

項羽在戲下,欲攻沛公。

沛公從百餘騎 因項伯 面見項羽,

謝無有閉關事。

항우가 희하(戱河)에 주둔하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패공은 백여 명의 호위기병만을 데리고

항백(項伯)의 주선으로 항우를 면담하고

함곡관의 관문을 닫은 일에 대해 사죄했다.

項羽既饗軍士,中酒,〔一〕

亞父謀欲殺沛公,令項莊拔劍舞坐中,欲擊沛公,

項伯常(肩)〔屏〕蔽之。

항우가 군사들을 위해 잔치를 벌려

이윽고 주흥이 도도해졌을 때

범증이 패공을 살해하려는 계획에 따라

항장에게 주흥을 돋우게 한다는 핑계로 검무를 추도록 한 다음

기회를 보아 패공을 찔러 죽이도록 명했다.

이에 항백이 여러 자기의 몸으로 패공을 엄호했다.

  〔一〕集解張晏曰:「酒酣也。」

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

樊噲在營外,聞事急,

乃持鐵盾入到營。

그때 패공의 곁에는 오로지 장량만이 장막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영채 밖에 머물고 있던 번쾌가 일이 급하게 된 것을 알고

쇠방패를 들고 영채로 달려갔다.

營衛止噲,

噲直撞入,〔二〕立帳下。〔三〕

영채를 지키는 군사가 번쾌를 막아섰으나

번쾌는 위병을 제치고 들어가 장하에 섰다.

  〔二〕集解漢書音義曰:「揰音撞鍾。」正義撞,直江反。

  〔三〕集解徐廣曰:「一本作「立帷下,瞋目而視,眥皆血出」。」

項羽目之,問為誰。張良曰:

「沛公參乘樊噲。」

항우가 보고 번쾌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장량이 대답했다.

" 패공의 참승(驂乘) 번쾌입니다."

項羽曰:「壯士。」

항우가 듣고 말했다.

" 참으로 장사로다!"

賜之卮酒彘肩。

噲既飲酒,拔劍切肉食,盡之。

항우가 이어서 번쾌에게 술동이와 돼지다리를 주도록 명했다.

번쾌가 술을 단 번에 마시고

칼을 뽑아 돼지다리 고기를 잘라 모두 먹었다.

項羽曰:「能復飲乎?」

항우가 말했다.

" 다시 술을 더 마실 수 있는가? "

噲曰:

「臣死且不辭,豈特卮酒乎!

번쾌가 대답했다.

" 신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동이의 술인들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

且沛公先入定咸陽,

暴師霸上,以待大王。〔四〕

더욱이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다음

군사들을 패상에 로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四〕正義時羽未為王,史追書。

大王今日至,聽小人之言,

與沛公有隙,臣恐天下解,〔五〕

心疑大王也。」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소인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하고 계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五〕正義紀買反。至此為絕句。

項羽默然。

沛公如廁,麾樊噲去。既出,

항우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패공이 변소에 간다고 하면서

번쾌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沛公留車騎,獨騎一馬,

與樊噲等四人步從,

從閒道山下歸走霸上軍,

거마와 기병들을 그대로 항우의 영채 안에 두고

자신은 말 한 마리를 내어 탄 패공은

번쾌 등의 네 사람만을 도보로 뒤따르게 하고

산속으로 난 지름길을 이용하여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而使張良謝項羽。

項羽亦因遂已,無誅沛公之心矣。

장량으로 하여금 항우에게 사과를 표하게 했다.

항우도 끝난 일이라 패공을 주살할 마음이 없어졌다.

是日微樊噲奔入營 譙讓項羽,〔六〕

沛公事幾殆〔七〕。

이날 번쾌가 군영으로 달려들어가

항우를 나무라는 일이 없었더라면

패공의 사건은 거의 위태로웠다.

  〔六〕索隱譙音誚,責也。或才笑反,或亦作「誚」。

  〔七〕正義幾音祈。

明日,項羽入屠咸陽,

立沛公為漢王。

漢王賜噲爵為列侯,號臨武侯。〔一〕

이튿날 항우는 함양에 입성하여 모조리 파괴하였고

패공을 세워 한왕으로 봉했다.

한왕은 번쾌를 열후에 봉하고

호를 임무후(臨武侯)라고 했다.

  〔一〕正義桂陽臨武縣。

遷為郎中,從入漢中。

후에 랑중(郞中)으로 승진한 번쾌는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還定三秦,別擊西丞白水北,〔一〕

한중에서 돌아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번쾌는 별도로 서현(西縣)의 현승(縣丞)이 이끄는 군사를

백수(白水)의 북쪽에서 공격했다.

〔一〕集解徐廣曰:「隴西有西縣。白水在武都。」駰案:如淳曰「皆地名也」。晉灼曰「白水,今廣平魏縣也。地理志無「西丞」,似秦將名」。索隱案:西謂隴西之西縣。白水,水名,出武都,經西縣東南流。言噲擊西縣之丞在白水之北耳,徐廣等說皆非也。正義括地志云:「白馬水源出文州曲水縣西南,會經孫山下。」

雍輕車騎於雍南,破之〔二〕。

옹현(雍縣)의 남쪽에서

옹왕(雍王) 장한(章邯)의 경기병과 경전차 부대를 격파했다.

  〔二〕正義上「雍」於拱反。

從攻雍、斄〔三〕城,

先登擊章平軍好畤,〔四〕攻城,先登陷陣,

옹(雍)과 태(斄)성을 공격할 때는

선등하여 장한(章邯)의 아들 장평(章平)의 군대를 호치에서 공격하고

성을 공격하는 데 선등하여 적진을 함락시켰다.

  〔三〕集解音胎。

  〔四〕索隱案:雍即扶風雍縣。斄音台,即后稷所封,今之武功故斄城是。章平即章邯子也。

斬縣令丞各一人,首十一級,虜二十人,遷郎中騎將。

현령과 현승 2명을 참하고

적군의 수급 11개와 포로 20명을 얻어 가

랑중의 기마(騎馬)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從擊秦車騎壤東,〔五〕

卻敵,遷為將軍。

진나라의 전차부대와 기마부대를 양(壤)의 동쪽을 치는 데 종군하여

적을 격파하고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다.

  〔五〕索隱小顏亦以為地名。正義壤鄉在武功縣東南二十里。

攻趙賁,下郿、〔六〕槐里、柳中、〔七〕咸陽;

灌廢丘,最。〔八〕

다시 조나라의 조분(趙賁)), 하미(下郿), 괴리(槐里),

유중(柳中), 함양(咸陽) 등의 공략전에 종군했다.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폐구(廢丘)를 물에 잠기게 했다.

계속된 일련의 전투에서 번쾌의 공이 가장 높았다.

  〔六〕正義岐州縣。

  〔七〕索隱按:柳中即細柳,地在長安西也。

  〔八〕集解李奇曰:「以水灌廢丘也。」張晏曰:「最,功第一也。」晉灼曰:「京輔治華陰,灌北也。」索隱灌謂以水灌廢丘,城陷,其功最上也。李奇曰「廢丘即槐里也。上有槐里,此又言者,疑此是小槐里」,非也。按:文云「攻趙賁,下郿、槐里、柳中、咸陽」,總言所攻陷之邑。別言以水灌廢丘,其功特最也。何者?初云槐里,稱其新名,後言功最,是重舉,不欲再見其文,故因舊稱廢丘也。

至櫟陽,〔九〕賜食邑杜之樊鄉。〔一0〕

이윽고 한군이 삼진을 평정하고 역양(櫟陽)에 이르자

한왕은 두릉(杜陵)의 번향(樊鄕)을 번쾌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九〕正義雍州縣。

  〔一0〕索隱案:杜陵有樊鄉。三秦記曰「長安正南,山名秦嶺,谷名子午,一名樊川,一名御宿」。樊鄉即樊川也。

從攻項籍,屠煮棗。〔一一〕

擊破王武、程處軍於外黃。

항우(項羽)와의 싸움에 종군하여 자조(煮棗)를 파괴하고

외황(外黃)에서 왕무(王武)와 정처(程處)의 군사들을 격파했다.

  〔一一〕索隱檢地理志無「煮棗」,晉說是。功臣表有煮棗侯,云清河有煮棗城。小顏以為「攻項籍,屠煮棗,合在河南,非清河之城明矣」。今案續漢書郡國志,在濟陰宛朐也。正義案:其時項羽未渡河北,冀州信都縣東北五十里煮棗非矣。

攻鄒、魯、瑕丘、薛。〔一二〕

계속 진군하여 노(魯), 하구(瑕丘), 설(薛) 등의 성을 공략했다.

  〔一二〕正義鄒,兗州縣,在州東南六十二里。魯,兗州曲阜縣。瑕丘,兗州縣。薛在徐州滕縣界。

項羽敗漢王於彭城,盡復取魯、梁地。

항우는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패주시키고

번쾌가 점령했던 노(魯)와 양(梁) 땅의 성읍들을 모두 수복해갔다.

噲還至滎陽,益食平陰二千戶,〔一三〕以將軍守廣武。

번쾌가 돌아와 형양(滎陽)양에 이르자

평음(平陰)의 2천 호를 식읍에 더해주고

장군으로 삼아 광무(廣武)를 지키게 했다.

  〔一三〕正義平陰故城在濟陽東北五里。

一歲,項羽引而東。

그리고 1년 후에 항우는 홍구(鴻溝)를 경계로 한왕과 협정을 맺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從高祖擊項籍,下陽夏,〔一四〕

虜楚周將軍卒四千人。

한왕이 팽성으로 돌아가는 항우의 뒤를 추격할 때

번쾌는 양하(陽夏)를 함락하고,

초나라의 장수 주장군(周將軍)과 그 군사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一四〕正義夏音假。陳州太康縣。

圍項籍於陳,〔一五〕大破之。屠胡陵。〔一六〕   

항우를 진(陳)에서 포위하여 크게 무찌르고

호릉(胡陵)을 파괴하고 평지로 만들었다.

  〔一五〕正義陳州。

  〔一六〕正義在兗州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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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九十五

樊酈滕灌 列傳第三十五

번력등관 열전제35

1.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

2.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 -[본문생략]

3.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 -[본문생략]

4.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 -[본문생략]

1.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

舞陽侯〔一〕樊噲〔二〕者,沛人也。〔三〕

以屠狗為事,〔四〕與高祖俱隱。

무양후(武陽侯) 번쾌는 패(沛) 출신으로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일로 생활하다가

고조가 죄를 짓고 피해 다닐 때 함께 숨어 지냈다.

  〔一〕正義舞陽在許州葉縣東十里。

  〔二〕正義音快,又吉外反。

  〔三〕正義沛,徐州縣。

  〔四〕正義時人食狗亦與羊豕同,故噲專屠以賣之。

初從高祖起豐,攻下沛。

처음에 고조가 풍(豊)1)에서 기병하자

종군하여 패를 함락시켰다.

高祖為沛公,以噲為舍人。

고조는 패공(沛公)이 되어 번쾌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從攻胡陵、方與,〔一〕

還守豐,擊泗水監豐下,〔二〕破之。

호릉(胡陵)과 방여(方與)의 싸움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풍(豊)을 지키고

사수(泗水)의 감(監)을 풍성 밑에서 격파했다.

  〔一〕正義房預二音。

  〔二〕索隱案:監者,秦時御史監郡也。豐下,豐縣之下也。正義泗水,郡名。

復東定沛,破泗水守薛西。〔三〕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패(沛)를 안정시키고

사수(泗水)의 수장(守將)을 설(薛)의 서쪽에서 무찔렀다.

  〔三〕索隱謂破其守於薛縣之西也。

與司馬枿〔四〕

戰碭東,〔五〕卻敵,

斬首十五級,賜爵國大夫。〔六〕

진나라 장수 사마얼(司馬枿)과

탕(碭)의 동쪽에서 싸워 물리치고

15개의 수급을 베어

그 공으로 국대부(國大夫)2)의 작위를 받았다.

  〔四〕集解張晏曰:「秦司馬。」正義秦將章邯司馬。

  〔五〕正義碭,宋州縣也。

  〔六〕集解文穎曰:「即官大夫也。」正義爵第六級也。

常從,沛公擊章邯軍濮陽,

攻城先登,斬首二十三級,

賜爵列大夫。〔七〕

번쾌는 언제나 고조를 측근에서 수행했다.

패공이 장한의 진나라 군사를 복양(濮陽)에서 공격할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루에 올라 적군의 수급 23개를 베고

열대부(列大夫)3)의 작위를 받았다.

  〔七〕集解文穎曰:「即公大夫,爵第七。」

復常從,從攻城陽,〔八〕先登。

다시 고조를 항상 따라다니다가

성양(城陽) 공성전에 참가하여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八〕集解徐廣曰:「年表二年七月,破秦軍濮陽東,屠城陽也。」

正義按:城陽近濮陽,而漢書作「陽城」,大錯誤。

下戶牖,〔九〕破李由軍,

斬首十六級,賜上閒爵。〔一0〕

호유(戶牖)로 진격하여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격파하고 했다.

적군의 수급 16개를 베어 상간작(上間爵)을 하사 받았다.

  〔九〕正義戶牖,汴州東陳留縣東北九十一里東昏故城是。

  〔一0〕集解孟康曰:「不在二十爵中,如執圭、執帛比也。」如淳曰:「閒,或作「聞」。呂氏春秋曰「魏文侯東勝齊於長城,天子賞文侯以上閒爵」。」索隱賜上聞爵。張晏云:「得徑上聞。」晉灼曰:「名通於天子也。」如淳曰「或作「上聞」,又引呂氏春秋,當證「上閒」。「閒」音「中閒」之「閒」。

從攻圍東郡守尉於成武,〔一一〕

卻敵,斬首十四級,

捕虜十一人,賜爵五大夫。

계속해서 동군의 태수와 도위가 지키는 성무(成武)를 포위한 후 공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적의 수급 14개를 베고

포로 11명을 사로잡아 오대부에 올랐다.

  〔一一〕正義曹州縣。

從擊秦軍,出亳南。〔一二〕

河閒守軍於杠里,〔一三〕破之。

擊破趙賁軍開封〔一四〕北,

계속해서 패공을 따라

진군의 주둔지로 진격하여 박남(亳南)으로 나아가

강리(杠里)에서 하간(河間)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개봉(開封)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사를 격파했다.

  〔一二〕索隱案:亳,湯所都,今河南偃師有湯亳是也。正義亳故城在宋州穀熟縣西南四十里。

  〔一三〕正義地名,近城陽。

  〔一四〕正義汴州縣。

以卻敵先登,

斬候一人,首六十八級,捕虜二十七人,賜爵卿。

從攻破楊熊軍於曲遇。〔一五〕

그 싸움에서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

후(侯) 1인, 수급 68개 . 포로 27인을 잡은 공을 세워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양웅(楊熊)의 군사를 곡우(穀雨)에서 격파했다.

  〔一五〕索隱音齲顒二音,邑名也。正義曲,丘雨反。遇,牛恭反。鄭州中牟縣有曲遇聚。

攻宛陵,〔一六〕先登,

斬首八級,捕虜四十四人,賜爵封號賢成君。〔一七〕

완릉(宛陵)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8개의 수급을 얻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후에 봉해지고 현성군(賢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一六〕索隱地理志屬河南。正義宛陵故城在鄭州新鄭縣東北三十八里。

  〔一七〕集解徐廣曰:「時賜爵有執帛、執圭,又有賜爵封而加美名以為號也。又有功,則賜封列侯。」駰案:張晏曰「食祿比封君而無邑」。瓚曰「秦制,列侯乃有封爵也」。索隱張晏曰:「食祿比封君而無邑。」徐廣曰:「賜爵有執圭、執帛,又有爵封而加美號。」又小顏云:「楚漢之際,權設寵榮,假其位號,或得邑地,或空受爵,此例多矣。約以秦制,於義不通。」

從攻長社、轘轅,〔一八〕

絕河津,〔一九〕東攻秦軍於尸,〔二0〕

南攻秦軍於犨。〔二一〕

장사(長社)와 환원(轘轅)을 공격하고

하수로 나아가는 나루터를 끊었으며,

동쪽으로 나아가 시(屍)에서 진군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진공하여 주(犨)의 진군을 파했다.

  〔一八〕正義許州理縣也。轘轅關在緱氏縣東南三十里。

  〔一九〕正義古平陰津在河南府東北五十里也。

  〔二0〕正義在偃師南。

  〔二一〕正義在汝州魯山縣東南。

破南陽守齮於陽城。

東攻宛城,先登。

남양(南陽) 태수 의(齮)를 양성(陽城)에서 공격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완성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西至酈,〔二二〕以卻敵,

斬首二十四級,捕虜四十人,

賜重封。〔二三〕

서쪽의 역(酈)으로 진공하여 적을 격파하고

24개의 수급을 베고 40명의 포로를 잡아

그 공으로 다시 후에 봉해졌다.

  〔二二〕正義酈音擲。在鄧州新城縣西北四十里。

  〔二三〕集解張晏曰:「益祿也。」如淳曰:「正爵名也。」瓚曰:「增封也。」索隱張晏云「益祿也」。臣瓚以為增封,義亦近是。而如淳曰正爵名,非也。小顏以為重封者,兼二號,蓋為得也。

攻武關,至霸上,

斬都尉一人,首十級,捕虜百四十六人,

降卒二千九百人。

무관(武關)을 공격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러

도위(都尉) 1명을 참하고 수급 10개와 146명의 포로와 함께

항졸 2900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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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가열전 04

 

其後李信追丹,丹匿衍水中,[一]燕王乃使使斬太子丹,欲獻之秦。

注[一]索隱水名,在遼東。

그후 이신은 단을 추격하여 단은 연수에 숨었다. 연왕은 사자를 보내 태자 단을 참수케 하여 진에 바치고자 그를 하였다.

 

秦復進兵攻之。後五年,秦卒滅燕,虜燕王喜。

진은 다시 진격하여 공격했다. 오년이지나 진은 연을 멸하고 연왕 희를 포로로 삼았다.

其明年,秦并天下,立號為皇帝。於是秦逐太子丹﹑荊軻之客,皆亡。

이듬해 진나라는 천하를 병탄하여 왕호를 세워 황제라 하였다.

이에 태자 단과 형가의 식객들을 쫓으니 모두 도망하였다.

 

高漸離變名姓為人庸保,[一]匿作於宋子。[二]

久之,作苦,聞其家堂上客擊筑,傍偟不能去。

고점리는 성명 바꾸고 남의 용보가 되어 송자에서 숨어 노동하였다.

오랜 동안 괴롭게 노동했다. 자기집 마루 위에서 객이 축치는 소리를 듣고방황하며 떠날 수 없었다.

注[一]索隱欒布傳曰「賣庸於齊,為酒家人」,漢書作「酒家保」。案:謂庸作於酒家,言可保信,故云「庸保」。鶡冠子曰「伊尹保酒」。

注[二]集解徐廣曰:「縣名也,今屬鉅鹿。」索隱徐注云「縣名,屬鉅鹿」者,據地理志而知也。正義宋子故城在趙州平棘縣北三十里。

 

每出言曰:「彼有善有不善。」

번번히 비평했다.“저건 잘 치는데, 저건 아닌데.

從者[三]以告其主,

曰:「彼庸乃知音,竊言是非。」

시종드는 이가 주인에게 말했다.

“저 시종이 음을 알아 몰래 시비를 말합니다.”

家丈人召使前擊筑,[四]一坐稱善,賜酒。

집안 주인이 불러 앞으로 나와 축을 치게 하니 모인 사람들이 잘 친다고 하여 술을 내렸다.

注[三]索隱謂主人家之左右也。

注[四]索隱劉氏云:「謂主人翁也。」又韋昭云:「古者名男子為丈夫,尊婦嫗為丈人。故漢書宣元六王傳所云丈人,謂淮陽憲王外王母,即張博母也。故古詩曰『三日斷五疋,丈人故言遲』是也。」

而高漸離念久隱畏約無窮時,[五]乃退,出其裝匣中筑與其善衣,更容貌而前。舉坐客皆驚,

고점리는 오래도록 숨어서 두려워하고 위축할지라도 끝날 날이 없다고 여기고 물러나와 그의 행장 속의 축과 좋은 옷을 꺼내어 용모를 고치고 나아가니모든 좌객들이 모두 놀랐다.

注[五]索隱約謂貧賤儉約。既為庸保,常畏人,故云「畏約」。所以論語云「不可以久處約」。

 

下與抗禮,以為上客。使擊筑而歌,客無不流涕而去者。

몸을 낮추고 상객으로 하였다. 축을 치고 노래하게 하니좌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지 않는 자가 없었다.

 

宋子傳客之,[六]聞於秦始皇。

송자 고을에서 돌려가며 그를 객으로 삼았다.진시황에게 알려졌다.

 

注[六]集解徐廣曰:「互以為客。」秦始皇召見,人有識者,乃曰:「高漸離也。」

진시황이 불러보고 사람들 중에 아는 이가 있어“고점리다.” 라고 하였다.

 

秦皇帝惜其善擊筑,重赦之,乃矐其目。[七]使擊筑,未嘗不稱善。

진시황제는 가가 축을 잘 치는 것을 아껴 거듭 사면하여 그의 눈을 멀게 하고축을 치게 하고는 잘한다고 그를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注[七]集解矐音海各反。索隱海各反,一音角。說者云以馬屎燻令失明。

稍益近之,高漸離乃以鉛置筑中,[八]復進得近,舉筑朴[九]秦皇帝,不中。

조금씩 더욱 친근해지자 고점리는 납덩이를 축(筑) 속에 넣었다가 다시 나아가 가까이 하게 되자 축을 들어 진시황제를 쳤으나 적중하지 않았다.

注[八]索隱案:劉氏云「鉛為挺著筑中,令重,以擊人」。注[九]索隱普十反。朴,擊也。

 

於是遂誅高漸離,終身不復近諸侯之人。

이에 고점리를 베어 죽이고몸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제후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魯句踐已聞荊軻之刺秦王,私曰:

노구천은 이미 형가가 진왕을 찌르려고 했음을 듣고 혼자 말했다.

「嗟乎,惜哉其不講於刺劍之術也![一]甚矣, 吾不知人也!曩者吾叱之,彼乃以我為非人也!」

“아, 아깝도다. 그가 칼 잘 쓰는 법을 익히지 않았음이. 심하도다, 내가 사람 볼 줄 모름이. 지난 번에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注[一]索隱案:不講謂不論習之。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一]太過。

태사공은 말한다. 형가가 태자 단의 목숨을 말하니,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리고 말에 불이 난다.” 고 하는 말은 큰 잘못이다.

 

注[一]索隱燕丹子曰:「丹求歸,秦王曰『烏頭白,馬生角,乃許耳』。丹乃仰

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

또 형가가 진왕을 상하게 했다는 말도 모두 잘못이다.처음 공손계공이 하무저와 놀 때에 모두 그 일을 알았다. 나를 위해 이 같이 말해 주었다.

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

조말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람은 그들의 의협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이뤄지지 못하기도 했다.

然其立意較然,[二]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그러나 뜻을 세움이 명확하고 그 뜻을 숨기지 않았다.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는 것을 어찌 허망하다 하겠는가.

注[二]索隱較,明也。

 

天歎,烏頭即白,馬亦生角。」風俗通及論衡皆有此說,仍云「門木烏生肉足」。

【索隱述贊】曹沫盟柯,返魯侵地。專諸進炙,定吳篡位。彰弟哭市,報主塗

廁。刎頸申冤,操袖行事。暴秦奪魄,懦夫增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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