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五 孫子吳起列傳第五5-1. 孫武列傳(손무열전)

 

孫子武者,齊人也。〔一〕以兵法見於吳王闔廬。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闔廬曰:「子之十三篇,〔二〕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

합려가 말했다.

" 그대가 지은 병법 13편을 내가 모두 읽어 봤오. 한 번 시험삼아 적은 군사로 시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對曰:「可。」

손자 "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闔廬曰:「可試以婦人乎?」

합려 " 그러면 부녀자라도 가능하겠습니까?"

 

曰:「可。」

손자 " 가능합니다."

 

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三〕皆令持戟。令之曰

그의 용병술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히여합려는 손무에게 궁중의 미녀 중 모두 180명을 주었다. 손자는 궁녀들을 2대로 나눈 다음에, 합려가 사랑하는 총희(寵姬) 2명에게 그 각대의 대장으로 삼았다. 손자는 모든 궁녀들에게 극(戟)을 들게 하고 군령을 내렸다.

 

「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

" 너희들은 가슴,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등을 알고 있는가?"

 

婦人曰:「知之。」

궁녀들이 대답했다.“압니다.”

 

孫子曰

손자가 다시 령을 내렸다.

 

「前,則視心;左,視左手;右,視右手;後,即視背。」

" '앞으로' 하면 너희들은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우로' 하면 오른손을,

'뒤로'하면 등을 본다. "

 

婦人曰:「諾。」

궁녀들이 대답했다." 잘 알았습니다."

 

約束既布,乃設鈇鉞,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婦人大笑。

손자가 자기의 말을 군령으로 선포하고 대오의 좌우에 부월(鈇鉞)을 설치했다.

손자는 자기의 군령에 대하여 여러 차례에 설명했다.

이윽고 북소리를 울리며 '우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크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

손자가 궁녀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 군령이 불분명하여 군사들이 구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그 장수의 잘못이다."

 

復三令五申而鼓之左,婦人復大笑。

손자가 다시 군령에 대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한 후에 북소리를 울리며 '좌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궁녀들은 여전히 크게 웃기만 할뿐이었다.

 

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

손자가 다시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 군령이 확실치 않고 군사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다. 그러나 군령이 이미 확실해 졌음에도 구령에 따르지 않은 것은 군리(軍吏)와 군사들의 잘못이다."

 

乃欲斬左古隊長。吳王從臺上觀,見且斬愛姬,大駭。趣使使〔四〕下令曰

손자는 오왕의 총희인 두 대장을 끌어내어 참수하려고 했다. 오왕은 높은 대에 올라 참관하다가 두 총희가 참수 당하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사자를 손자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

" 과인은 이미 장군이 능히 용병을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과인에게 두 총희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참수형을 면케 해주기 바랍니다."

 

孫子曰:「臣既已受命為將,將在軍,君命有所不受。」

손자

" 저는 이미 대왕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된 자가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임금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遂斬隊長二人以徇。用其次為隊長,於是復鼓之。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於是孫子使使報王曰

드디어 오왕의 두 회첩을 참수형에 처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군사들에게 보였다. 이어서 두 희첩 대신에 다른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은 후에 북소리를 울리고 구령을 발했다. 궁녀들은 모두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등의 구령이나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모두 규율을 지켜 호령대로 움직여, 감히 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궁녀들이 구령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손자가 사자를 오왕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

" 군사들이 이미 정비되었으니 대왕께서는 내려오셔서 한번 시험삼아 호령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왕께서 그들을 부리고 싶다면 물 속이건, 불구덩이 속이건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吳王曰:「將軍罷休就舍,寡人不願下觀。」

오왕이 말했다. " 장군은 이제 조련을 파하시고 숙사에 돌아가 쉬시기 바랍니다. 과인은 내려가 군사를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

손자 " 대왕께서는 단지 저의 병법의 이론만을 좋아하실 뿐이고, 그 실제적인 것은 쓰실 줄 모르고 계십니다."

 

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西破彊楚,入郢,北威齊晉,顯名諸侯,孫子與有力焉。

그러자 합려는 손무의 용병 능력을 인정하고 결국은 그를 대장으로 삼았다. 후에 오왕 합려가 서쪽의 강대국인 초나라의 군사들을 파하고 그 서울인 영도(郢都)를 점령하여, 북쪽의 제(齊)와 당진(唐晉)에 위세를 떨치고,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크게 드러낸 것은 모두 이에 참여한 손자의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一〕正義魏武帝云:「孫子者,齊人。事於吳王闔閭,為吳將,作兵法十三篇。」   〔二〕正義七錄云孫子兵法三卷。案:十三篇為上卷,又有中下二卷。   〔三〕索隱上音徒對反。下音竹兩反。   〔四〕索隱趣音促,謂急也。下「使」音色吏反。

 

孫武既死,〔一〕後百餘歲有孫臏。

손무가 이미 죽고 백 년쯤 지나 손빈이 나타났다.

 

臏生阿鄄之閒,臏亦孫武之後世子孫也。孫臏嘗與龐涓〔二〕俱學兵法。

손빈은 아·견이라는 두 고을 사이에서 태어났다. 손빈은 손무의 후손이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龐涓既事魏,得為惠王將軍,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위나라를 섬겨 혜왕의 장군이 되었다.

 

而自以為能不及孫臏,乃陰使召孫臏。臏至,龐涓恐其賢於己,疾之,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가만히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러들였다. 손빈이 찾아오자 방연은 그의 재능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미워했다.

 

則以法刑 斷其兩足而黥之,欲隱勿見。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두 다리를 끊고 이마에 묵형을 가하였다. 그렇게 되면 손빈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一〕集解越絕書曰:「吳縣巫門外大冢,孫武冢也,去縣十里。」索隱按:越絕書云是子貢所著,恐非也。其書多記吳越亡後土地,或後人所錄。正義七錄云越絕十六卷,或云伍子胥撰。   〔二〕索隱臏,頻忍反。龐,皮江反。涓,古玄反。

 

齊使者如梁,〔一〕孫臏以刑徒陰見,說齊使。

그 뒤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 서울 대량을 방문하였다. 손빈은 형을 당한 상태로 비밀리에 그를 만나 제나라 사신을 설득했다.

 

齊使以為奇,竊載與之齊。齊將田忌善而客待之。

제 나라 사신은 손빈의 기인이라 여기고 몰래 자기의 수레에 숨겨 제 나라로 데리고 갔다. 제 나라에 간 손빈은 곧 장군 전기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으로 머물렀다.

 

忌數與齊諸公子 馳逐重射。孫子見其馬足不甚相遠,馬有上、中、下、輩。

전기는 때마침 도박에 빠져 공자들과 기마와 활쏘기를 즐겼다. 손빈은 그 내기를 구경하다가 그 기마의 발길이 심히 먼 것을 간파하였다. 당시의 말에는 상중하의 등급이 있었다.

 

於是孫子謂田忌曰:「君弟重射,〔二〕臣能令君勝。」

이에 손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임금의 아우가 활쏘기를 중히 여기니 내가 장군을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

 

田忌信然之,與王及諸公子逐射千金。〔三〕及臨質,〔四〕

전기는 그를 그러하리라 믿고 왕과 공자들에게 다시 천 금을 건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상대하여 활쏘기를 하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四〕索隱按:質猶對也。將欲對射之時也。一云質謂堋,非也。

 

孫子曰:「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取君上駟與彼中駟,取君中駟與彼下駟。」

孫子曰(손자왈) : 손빈이 말했다.“지금 당군의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라고

 

既馳三輩畢,而田忌一不勝而再勝,卒得王千金。

달리기 경기가 3차례 끝나자 전기는 2승 1패의 결과로 결국 내기에 이겨 왕은 천금을 얻었다.

 

於是忌進孫子於威王。威王問兵法,遂以為師。

이 일로 전기는 손자를 위왕에게 그를 천거했다. 위왕 역시 손빈과 병법에 관한 문답을 가진 뒤로 마침내 스승로 삼았다.

 

  〔一〕正義今汴州。   〔二〕索隱弟,但也。重射謂好射也。   〔三〕正義射音石。隨逐而射賭千金。  〔四〕索隱按:質猶對也。將欲對射之時也。一云質謂堋,非也。

 

其後魏伐趙,趙急,請救於齊。齊威王欲將孫臏,臏辭謝曰:「刑餘之人不可。」

그 후에 위 나라가 조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는 위급해져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 나라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아 조 나라를 구원하려 했으나 손빈은 사양하여 말했다. “죄를 진 사람이므로 불가 합니다.”

 

於是乃以田忌為將,而孫子為師,居輜車中,坐為計謀。

이에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되 손빈은 군사로서 치차 속에 들어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田忌欲引兵之趙,孫子曰

전기가 군대를 이끌고 조 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이 말했다.

 

「夫解雜亂紛糾者〔一〕不控捲,〔二〕救鬪者不搏撠,〔三〕批亢擣虛,〔四〕形格勢禁,則自為解耳。〔五〕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 놓고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막을 것이 아니라 허점을 칠 때 모양이 바로 잡히고 세력이 그쳐 싸움은 자연히 풀립니다.

 

今梁趙相攻,輕兵銳卒必竭於外,老弱罷於內。

지금 위 나라와 조 나라가 서로 싸우기 때문에 정예부대는 반드시 바깥 방어에 주력할 것입니다.위 나라에 남은 자는 다만 노약자에 불과합니다.

 

君不若引兵疾走大梁,據其街路,衝其方虛,彼必釋趙而自救。

이제 장군께선 군사를 이끌고 위 나라 서울 대량으로 달려가 신속히 그 길을 점령하고 그 허점을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위 나라 군사는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자기네의 도성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是我一舉解趙之圍 而收獘於魏也。」〔六〕

이야말로 저의 한 번 움직여 조 나라의 포위를 풀고 동시에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田忌從之,魏果去邯鄲,與齊戰於桂陵,大破梁軍。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랐다. 위나라 군사는 과연 조나라 서울 한단에서 철수했다. 계릉에서 제나라와 싸워 크게 양군을 격파했다. [위나라 군대가 크게 졌다.]

 

  〔一〕索隱按:謂事之雜亂紛糾擊挐也。   〔二〕索隱按:謂解雜亂紛糾者,當善以手解之,不可控捲而擊之。捲即拳也。劉氏云「控,綜;捲,縮」,非也。   〔三〕索隱博戟二音。按:謂救鬥者當善撝解之,無以手助相搏撠,則其怒益熾矣。按:撠,以手撠刺人。   〔四〕索隱批音白結反。亢音苦浪反。按:批者,相排批也。音白滅反。亢者,敵人相亢拒也。擣者,擊也,衝也。虛者,空也。按:謂前人相亢,必須批之。彼兵若虛,則衝擣之。欲令擊梁之虛也。此當是古語,故孫子以言之也。   〔五〕索隱謂若批其相亢,擊擣彼虛,則是事形相格而其勢自禁止,則彼自為解兵也。   〔六〕索隱謂齊今引兵據大梁之衝,是衝其方虛之時,梁必釋趙而自救,是一舉釋趙而斃魏。

 

後十三歲,〔一〕魏與趙攻韓,韓告急於齊。

그로부터 13년 뒤 위 나라는 조 나라와 더불어 한 나라를 공격했다. 한 나라는 위급한 사정을 제 나라에 고했다.

 

齊使田忌將而往,直走大梁。魏將龐涓聞之,去韓而歸,齊軍既已過而西矣。

제나라는 전기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가서 구하게 했다. 전기는 또다시 곧장 대량을 향해 달려갔다. 위나라 대장 방연은 급보를 받자 즉시 한나라를 버려두고 귀로에 올랐으나 이미 국경을 넘어선 제나라 군사는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孫子謂田忌曰:「彼三晉之兵 素悍勇 而輕齊,齊號為怯,善戰者因其勢而利導之。

이때 손빈은 전기에게 이르기를 “저들 3진의 군사는 원래 사납고 용맹스럽습니다. 제나라를 경멸하여 제나라 군사를 겁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주어진 형세를 잘 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나갑니다.

 

兵法,百里而趣利者蹶上將,〔二〕五十里而趣利者軍半至。

병법에는 ‘승리에 취해 백 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그 상장군을 꺾이게 되고 50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반밖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使齊軍入魏地為十萬灶,明日為五萬灶,又明日為三萬灶。」우리 제나라 군대로 하여금 위나라 땅에 들어가 10만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내일은 5만 개로 만들고 모래는 3만개로 만들어 줄여 나가는 것입니다.”고 했다.

 

龐涓行三日,大喜,曰:「我固知齊軍怯,入吾地三日,士卒亡者過半矣。」

한나라에서 되돌아온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기 사흘째에 이르자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땅을 침입한 3일만에 사졸 중에서 도망한 자가 절반을 넘었다.”고 했다.

 

乃棄其步軍,與其輕銳 倍日并行逐之。孫子度其行,暮當至馬陵。

그리고 곧 보병은 따로 떼어놓은 채로 기병 등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로 단축시켜 급히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손빈이 위나라 군사의 속도를 계산해 본 결과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馬陵道陝,而旁多阻隘,可伏兵,乃斫大樹白而書之曰「龐涓死于此樹之下」。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지형이 많아 복병을 두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손빈은 길 옆에 있는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기고 그 흰 부분에다 글씨를 쓰기를,“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고 했다.

 

於是令齊軍善射者萬弩,夾道而伏,期曰「暮見火舉而俱發」。

이에 제나라 군사들 가운데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무수한 쇠뇌를 가지고 길 양쪽에 숨어 있도록 한 다음 기약하기를, ‘날이 저물어 이곳에 불이 밝혀지는 즉시 일제히 쏘아라.’고 명령해 두었다.

 

龐涓果夜至斫木下,見白書,乃鑽火燭之。讀其書未畢,齊軍萬弩俱發,魏軍大亂相失。

방연은 과연 날이 저문 뒤에야 그 나무 밑에 이르렀고 흰 부분에 씌어진 글씨를 보기 위해 불을 일으켜 그것을 밝혔다. 방연이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복병의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위나라 군사는 크게 어지러워져 서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다.

 

龐涓自知智窮兵敗,乃自剄,曰:「遂成豎子之名!」〔三〕

방연은 더 이상 지혜를 써 볼 수도 없이 싸움에 패했음을 알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이르기를,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했다.

 

齊因乘勝盡破其軍,虜魏太子申以歸。孫臏以此名顯天下,世傳其兵法。

제나라 군사는 승세를 몰아 위나라 군사를 전멸하다시피 하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이 승리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세상에 그의 병법이 전해졌다.

 

注[一]索隱王劭*[按]*:紀年云「梁惠王十七年,齊田忌敗梁于桂陵,至二十七年十二月,齊田敗梁於馬陵」,計相去無十三歲。注[二]集解魏武帝曰:「蹶猶挫也。」索隱蹶音巨月反。劉氏云:「蹶猶斃也。」注[三]索隱豎子謂孫臏。

 

[이하의 논평은 아래 오기열전 끝부분에서 손무 논평을 가져옴.]

太史公曰:태사공은 말한다.

 

世俗所稱師旅,皆道孫子十三篇,吳起兵法,世多有,

“세상에서 군사를 논하는 사람은 모두 손자 13편에 대해서 말하고 오기의 병법도 세상에 많이 유포되어 있다.

 

故弗論,論其行事所施設者。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사적과 시책에 대해서만 논했다.

 

語曰:「能行之者未必能言,能言之者未必能行。」

옛말에 이르기를 ‘능히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말하는 것은 아니며

능히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孫子籌策龐涓明矣,然不能蚤救患於被刑。

손빈은 방연을 치는 데에는 그렇게 밝았지만

그에 앞서 그에게 형벌을 당하는 화를 방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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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穰苴列傳第四

4.사마양저열전

司馬穰苴者,田完之苗裔也。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의 먼 후예이다.

齊景公時,晉伐阿、甄,

而燕侵河上,齊師敗績。

景公患之。

제경공(齊景公) 시절에 진(晉)나라가 아(阿)와 견(甄)을 정벌하자

연(燕)나라가 황하 상류를 침략하여 제나라 병사가 계속 패배했다.

경공이 이를 근심했다.

晏嬰乃薦田穰苴曰:

안영(晏嬰)이 이에 전양저(田穰苴)를 추천하며 말했다.

「穰苴雖田氏庶孽,

然其人文能附眾,武能威敵,願君試之。」

“양저가 비록 전씨의 서얼(庶孽)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의 문(文)은 대중들을 따르게 할 수 있고,

무(武)는 적을 위협할 수 있으니

군주께서 그를 시험해 보시길 원하옵니다.”

景公召穰苴,與語兵事,大說之,

以為將軍,將兵扞燕晉之師。

경공은 양저를 불러

함께 병사(兵事)를 이야기 하며 크게 기뻐하고

장군을 삼아

병사들을 이끌고 연과 진의 군대를 막아내게 했다.

穰苴曰:

「臣素卑賤,君擢之閭伍之中,

加之大夫之上,

양저가 대답했다.

“신은 바탕이 비천한데

군주께서 여오(閭伍)속에서 발탁하셔서

대부의 윗자리에 있게 했으니,

士卒未附,百姓不信,

人微權輕,願得君之寵臣,

國之所尊,以監軍,乃可。」

사졸들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불신하고

사람은 왜소해 권위가 가벼우니, 군주가 총애하고

나라가 존경하는 신을 얻으셔서 군사를 살피게 하면 좋겠습니다.”

於是景公許之,使莊賈往。

穰苴既辭,與莊賈約曰:

「旦日日中會於軍門。」

이에 경공은 이를 허락하고 장고(莊賈)로 하여금 가게 했다.

양저는 물러나와 장고와 함께 약조하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군문(軍門)에서 만납시다.”

穰苴先馳至軍,立表下漏待賈。

양저가 먼저 군에 도착하여

해시계기둥을 세우고 물시계를 내리고 장고를 기다렸다.

賈素驕貴,以為將己之軍而己為監,不甚急;

장고는 본바탕이 교만하고 고귀하여

장차 자기의 군대라서 자기가 감독하게 될 거라고 여기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親戚左右送之,留飲。

日中而賈不至。

친척이 좌우에서 그를 위해 송별회를 열었고

그는 지체하며 술을 마셨다.

정오에 장고는 도착하지 않았다.

穰苴則仆表決漏,

入,行軍勒兵,申明約束。

約束既定,夕時,莊賈乃至。

양저는 해시계기둥을 뒤집어 버리고 물시계를 터놓고

들어와서 군에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정돈하며

약속을 밝히어 펼쳤다.

약속이 정해지고, 저녁때가 되서야 장고가 도착했다.

穰苴曰:「何後期為?」

양저가 물었다.

“어찌해서 늦었소?”

賈謝曰:「不佞大夫親戚送之,故留。」

장고가 사과하며 대답했다.

“재주없는 사람에게 대부친척들이 송별회를 열어주어 지체했습니다.”

穰苴曰:

「將受命之日則忘其家,

臨軍約束則忘其親,

援枹鼓之急則忘其身。

양저가 말했다.

“장군은 명령을 받은 날 집을 잊어야 하고

군의 약속을 임해서는 그 가족을 잊어야 하며

북과 북채를 잡아 급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합니다.

今敵國深侵,邦內騷動,

士卒暴露於境,

君寢不安席,食不甘味,

百姓之命皆懸於君,何謂相送乎!」

지금 적국이 깊숙이 침입해서

나라 안은 소동이 일어나고

사졸(士卒)들은 국경에서 비바람에 직접 노출되어 있으며

군주는 잠자리도 불안해하고 음식도 달게 못 먹으며,

백성들의 운명은 그대에게 매달려 있는데

어찌 송별회를 한단 말이요!”

召軍正問曰:「軍法期而後至者云何?」

양저는 군정(軍正)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 기한 이후에 도착한 자는 어찌하오?”

對曰:「當斬。」

대답했다.

“당연히 참형입니다.”

莊賈懼,使人馳報景公,請救。

장고는 두려웠다.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경공에게 보고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既往,未及反,

於是遂斬莊賈以徇三軍。

그가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장고는 참형을 당해 삼군(三軍)에게 돌려졌다.

三軍之士皆振慄。久之,

景公遣使者持節赦賈,馳入軍中。

삼군의 병사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한참 후에

경공은 장고를 구원하기위해 부절(符節)을 가진 사자(使者)를 파견하였고,

그 사자는 말을 타고 군중으로 들어왔다.

穰苴曰:「將在軍,君令有所不受。」

양저가 말했다.

“장군은 군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는 바가 있소.”

問軍正曰:「馳三軍法何?」

군정에게 물었다.

“삼군에 말을 타고 들어오면 법이 어떠합니까?”

正曰:「當斬。」

군정이 대답했다.

“당연히 참형입니다.”

使者大懼。

穰苴曰:「君之使不可殺之。」

사자가 크게 두려워했다.

양저가 말했다.

“군주의 사자라 죽여서는 안되오.”

乃斬其僕,車之左駙,

馬之左驂,以徇三軍。

遣使者還報,然後行。

이에 그의 종과 수레의 왼쪽 말을 참수하고

왼쪽 곁방나무를 베어 삼군에게 돌렸다.

파견한 사자가 보고하러 되돌아간 후에 군대가 출발했다.

士卒次舍井灶飲食問疾醫藥,

身自拊循之。

悉取將軍之資糧享士卒,

身與士卒平分糧食。

사졸들의 거처, 우물, 아궁이, 음식, 문병, 의약 등을

자신이 어루만지며 돌아다녔다.

장군이 취하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사졸들에게 주고

자신은 사졸들과 함께 양식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最比其羸弱者,三日而後勒兵。

病者皆求行,爭奮出為之赴戰。

어리고 약한 자를 가려서 모아서

3일후에 병을 정비했다.

병자들 모두가 가기를 요청하며

그를 위해 싸움에 나가려고 애를 쓰며 경쟁했다.

晉師聞之,為罷去。

燕師聞之,度水而解。

진나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

연나라 군사들도 이 소문을 듣고 강을 건너 흩어졌다.

於是追擊之,

遂取所亡封內故境而引兵歸。

이에 그들을 추격하여

드디어 잃었던 예전 국경 내에 있는 봉지(封地)를 빼앗고

병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未至國,釋兵旅,

解約束,誓盟而後入邑。

나라에 도착하기 전 무기와 군대를 해산시키고

약속을 풀고 맹서한 후에 읍으로 들어갔다.

景公與諸大夫郊迎,

勞師成禮,然後反歸寢。

경공과 모든 대부들이 성 밖에서 맞이하여

수고한 병사들에게 예를 갖춘 다음에 침소로 되돌아갔다.

既見穰苴,尊為大司馬。

田氏日以益尊於齊。

경공은 양저를 보고 대사마(大司馬)로 높였다.

전씨는 제나라에서 날로 더욱 존중받았다.

已而大夫鮑氏、高、國之屬害之,譖於景公。

景公退穰苴,苴發疾而死。

얼마 후 대부 포씨(鮑氏), 고(高)씨, 국(國)씨의 무리들이

그를 헤치려고 경공에게 참소(讒訴)하였다.

경공은 양저를 물러나게 했고 양저는 병이 생겨 죽었다.

田乞、田豹之徒由此怨高、國等。

其後及田常殺簡公,盡滅高子、國子之族。

전걸(田乞), 전표(田豹)의 무리들이 이를 이유로

고씨와 국씨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후 전상(田常)에 이르러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고씨의 자손과 국씨의 자손을 모두 멸했다.

至常曾孫和,因自立為齊威王,用兵行威,

大放穰苴之法,而諸侯朝齊。

상의 증손자 화(和)에 이르러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제나라 위왕(威王)이 되어

군대를 이용해 위세를 떨치며 크게 양저의 법을 넓히자

제후들은 제나라에 모였다.

齊威王使大夫追論古者司馬兵法

而附穰苴於其中,因號曰司馬穰苴兵法。

제나라 위왕은

대부에게 옛날의 사마병법을 추론(追論)하게 하여

그 속에 양저를 붙이게 하고

이로 인해 사마양저 병법이라 불렀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余讀司馬兵法,閎廓深遠,

雖三代征伐,未能竟其義,

如其文也,亦少褒矣。

내가 사마병법을 읽으니 넓고 심원(深遠)하여

비록 3대(하, 은, 주)가 정벌했어도

그 뜻을 두루 미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도 역시 적게 칭찬했을 것이다.

若夫穰苴,區區為小國行師,

何暇及司馬兵法之揖讓乎?

만약 양저가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소국을 위하여 군대를 움직였다면

어찌 사마병법의 겸손한 태도를 미치게 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世既多司馬兵法,以故不論,

著穰苴之列傳焉。

세상에 이미 사마병법이 많으니

논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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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화산]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第五

5-2. 吳起列傳(오기열전)

吳起者,衛人也,好用兵。

오기라는 사람은 위나라 사람으로

용병에 능했다.

嘗學於曾子,事魯君。

일찍이 증자에게 배워

노나라 임금을 섬긴 일이 있다.

齊人攻魯,魯欲將吳起,

吳起取齊女為妻,而魯疑之。

그때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왔다.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대장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오기가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므로

의심을 품고 주저하였다.

吳起於是欲就名,遂殺其妻,以明不與齊也。

그러자 오기는 이에 공명심에 불타

마침내 자기 아내를 죽여

자기와 제나라와의 관계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

魯卒以為將。將而攻齊,大破之。

노나라는 마침내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고

오기는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魯人或惡吳起曰:

「起之為人,猜忍人也。

其少時,家累千金,

游仕不遂,遂破其家,

그러나 노나라 어떤 사람들은 오기를 악평하여 이르기를

“오기의 사람됨이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하다.

젊었을 때도 천 금이나 되는 가산을

벼슬을 구해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 집을 탕진했습니다.

鄉黨笑之,吳起殺其謗己者三十餘人,

而東出衛郭門。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조소하였다 하여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사람을 죽인 것이 30이 넘어

동으로 위나라에서 도망쳤었다.

與其母訣,齧臂而盟曰:

『起不為卿相,不復入衛。』

遂事曾子。

그때 오기는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자기 팔을 물어뜯으며 맹세하였다.

‘저 오기는 대신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다시 고향 위나라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더니

마침내 증자를 섬기었다.

居頃之,其母死,起終不歸。

증자를 모시던 중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오기는 끝내 귀국하지 않았다.

曾子薄之,而與起絕。

起乃之魯,學兵法以事魯君。

증자는 그를 박정하게 여겨

오기와 관계를 끊었다.

오기는 이 때문에 노나라에 왔다.

노나라에서 병법을 배우고 노나라 임금을 섬겼다.

魯君疑之,起殺妻以求將。

夫魯小國,而有戰勝之名,則諸侯圖魯矣。

노라나 임금이 그를 의심하니

제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군 자리를 구하였다.

무릇 노나라는 작은 나라라

조그만 싸움에 이겼다는 공명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제후들의 표적이 되었다.

且魯衛兄弟之國也,而君用起,

則是弃衛。」

더군나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다.

그래서 임금이 그 위나라에서 도망쳐 온 오기를 계속 중용한다는 것은

위나라와의 친교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魯君疑之,謝吳起。

노나라 임금 역시 심중에 의혹이 생겨

오기를 해임했다.

吳起於是聞魏文侯賢,欲事之。

文侯問李克曰:「吳起何如人哉?」

오기는 찾아갈 곳을 궁리하다가 당시에 현군이라고 칭송받던

위문후를 섬기려 했다.

문후는 중신인 이극에게 오기의 사람됨을 묻기를

“오기는 어떤 사람입니까?”하니

李克曰:

「起貪而好色,[一]

然用兵司馬穰苴不能過也。」

이극이 이르기를,

“오기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나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와 겨룰 수 있을 정도입니다.”하였다.

於是魏文候以為將,擊秦,拔五城。

그리하여 문후는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다.

과연 오기는 진나라를 쳐서

5개 성을 함락시켰다.

起之為將,與士卒最下者同衣食。

臥不設席,行不騎乘,

오기는 장군이 되어

언제나 하급 병졸들과 의식을 같이 했고

누울 때도 자리를 까는 법이 없었으며

행군할 때도 수레에 타지 않았다.

親裹贏糧,與士卒分勞苦。

卒有病疽者,起為吮之。[一]

또한 자기가 먹을 양식은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등

사졸들과 노고를 나누었다.

언젠가 병졸들 가운데 종기를 앓는 사람이 생기자

오기는 그를 위하여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다.

卒母聞而哭之。人曰:

「子卒也,而將,軍自吮其疽,何哭為?」

병졸의 어머니는 그 소문을 듣고 소리 내어 우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 아들은 병졸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께서 친절하게도 종기를 발아 주기까지 하지 않았소.

어찌 우는 것입니까?”

母曰:「非然也。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遂死於敵。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오기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었습니다.

그 아비는 감격한 나머지 끝가지 도망하지 않고 싸우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是以哭之。」

오공께서 지금 또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셨으니

첩은 그 자식도 싸우다가 죽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文侯以吳起善用兵,

廉平,盡能得士心,

乃以為西河守,以拒秦、韓。

문후는 오기가 용병술에 뛰어날 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평하여

사졸의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를 서하 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군사를 막게 했다.

魏文侯既卒,起事其子武侯。

武侯浮西河而下,

中流,顧而謂吳起曰:

위 문후가 죽자

오기는 계속해서 문후의 아들 무후를 섬겼다.

무후는 어젠가 배를 서하에 띄우고 물을 따라 내려가다

중간 지점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말하기를,

「美哉乎山河之固,此魏國之寶也!」

“참으로 아름답구려,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들이 우리 위나라의 보배입니다.”하니

起對曰:

「在德不在險。

昔三苗氏左洞庭,右彭蠡,

德義不修,禹滅之。

이에 오기가 답하기를

“임금의 덕일 뿐 험난한 지형은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는 동정호를 왼쪽에 끼고

팽려호를 오른 쪽에 두었으나

덕의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라의 우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夏桀之居,左河濟,右泰華,

伊闕在其南,羊腸在其北,[一]

修政不仁,湯放之。

하나라의 걸왕이 도읍한 곳은

하수와 제수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을 오른쪽에 두었으며

이궐이 그 남쪽에 있고

양양이 그 북쪽에 있었으나

정사가 어질지 못한 나머지

상나라 탕왕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殷紂之國,左孟門,[二]右太行,

常山在其北,大河經其南,

修政不德,武王殺之。

은나라 주왕은 맹문산을 왼쪽으로 하고

태행산을 오른쪽으로 하고

상산이 그 북쪽에 있고

하수가 그 남쪽에 둘렀으나

주왕이 덕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나라 무왕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由此觀之,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舟中之人盡為敵國也。」[三]

武侯曰:「善。」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님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무후는 이르기를 ‘과연 옳은 말이로다.“ 했다.

*(即封)*吳起為西河守,甚有聲名。

魏置相,相田文。[一]

오기에게 계속 서하 태수를 맡겼다.

이로부터 오기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다.

위나라에서는 새로 재상의 직을 설치해

전문을 임영했다.

吳起不悅,謂田文曰:

「請與子論功,可乎?」

오기는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전문에게 말을 걸기를

“당신과 공로를 비교해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소?”하니

田文曰:「可。」

전문이 이르기를 “좋소.”하였다.

起曰:

「將三軍,使士卒樂死,

敵國不敢謀,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3군의 장군이 되어

사졸들로 하여금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도록 하며

또 적국이 감히 우리 위나라를 넘볼 수 없게 하는 점에서

당신과 나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오.”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에 어찌 미칠 수 있겠소.” 라고 했다.

起曰:「治百官,親萬民,實府庫,

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백관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신뢰를 받으며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점에서

누가 낫겠소?”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을 따를 수 없소.”했다.

起曰:

「守西河

而秦兵不敢東鄉,

韓趙賓從,子孰與起?」

오기가 이르기를,

“서하를 지켜

진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을 향해 우리 위나라를 칠 생각을 못하게 하고

한·조 두 나라를 함께 복종하게 만든 점에서

누가 낫겠소.”하니

文曰:「不如子。」

전문이 이르기를

“당신을 따를 수 없소.”했다.

起曰:

「此三者,子皆出吾下,

而位加吾上,何也?」

오기가 이르기를,

“이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만 못한데

지위는 나보다 높으니 무슨 까닭이오?” 하니

文曰:

「主少國疑,大臣未附,百姓不信,

方是之時,屬之於子乎?屬之於我乎?」

전문이 이르기를,

“지금은 임금님께서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온 나라가 불안에 싸였소.

대신들은 아직 왕에게 심복하지 않으며

백성들도 왕을 신뢰하지 못하오.

이런 시기에

당신에게 맡길까요?

나에게 맡길까요?”하니

起默然良久,曰:

「屬之子矣。」

오기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이르기를,

“당신에게 맡기겠지요.”하였다.

文曰:

「此乃吾所以居子之上也。」

吳起乃自知弗如田文。

전문이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까닭이오.”하였다.

그제야 오기는 자신이 전문만 못하다는 것을 자인했다.

注[一]索隱按:呂氏春秋作「商文」。

田文既死,公叔為相,[一]

尚魏公主,而害吳起。公叔之僕曰:

「起易去也。」

그 뒤 전문이 죽자 공숙이 재상이 되었다.

공숙은 또한 위나라의 부마로 위세를 떨쳤다.

그는 오기를 해치려 했는데

때마침 부하 하나가 진언하기를

“오기를 내쫓기란 쉽습니다.” 하니

公叔曰:「柰何?」

공숙이 이르기를

“어떻게 말이냐?”하니

其僕曰:

「吳起為人節廉 而自喜名也。

君因先與武侯言曰:

부하가 이르기를

“오기란 사람은 절조가 굳세고 청렴하지만 이름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상공께서 먼저 임금과 말씀하실 기회를 만들어 말씀하기를,

『夫吳起賢人也,

而侯之國小,

又與彊秦壤界,

臣竊恐起之無留心也。』

‘오기는 현인입니다.

임금께선 나라도 작은데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신은 오기가 우리 나라에 머무를 생각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武侯卽曰:『柰何?』

무후께서는 곧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君因謂武侯曰:

『試延以公主,

起有留心 則必受之。

無留心則必辭矣。

以此卜之。』

그러면 상공께서는 무후님께 이르기를

‘시험삼아 공주를 시집보내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오기가 머무를 생각이면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고

머무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사양할 것이니

이것으로 점쳐 보십시오.’ 하였다.

君因召吳起而與歸,

令公主怒而輕君。

吳起見公主之賤君也,則必辭。」

임금은 오기를 초대하여 함께 댁으로 가신 뒤에

공주로 하여금 성난 얼굴로 상공을 푸대접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하십시오.

오기는 공주가 상공를 푸대접하는 태를 보면

반드시 사양할 것입니다.” 하였다.

於是吳起見公主之賤魏相,

果辭魏武侯。

이리하여 오기는 공주가 위상을 천대하는 것을 보고

과연 무후에게 부마되기를 사양하고 말았다.

武侯疑之而弗信也。

吳起懼得罪,

遂去,卽之楚。

이를 계기로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여 그를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

오기는 죄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떠나 바로 초나라로 건너갔다.

楚悼王素聞起賢,

至則相楚。

초도왕은 일직부터 오기가 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오기가 이르자 곧 초나라 재상에 임명했다.

明法審令,捐不急之官,

廢公族疏遠者,

以撫養戰鬪之士。

오기는 법을 밝히고 영을 살펴

필요하지 않은 벼슬을 없애며

또 왕족들 중에서도 이미 멀어진 사람들의 봉록을 폐지시켜

그 비용을 싸음에 종사하는 군인들에게 돌렸다.

要在彊兵,

破馳說之言從橫者。

그는 강병책을 적극 추진해

합종이니 연횡이니 하는 유세객의 논리를 무시해 버렸다.

於是南平百越;

北并陳蔡,

卻三晉;西伐秦。

이리하여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진·채를 병합하고

삼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쳤다.

諸侯患楚之彊。

故楚之貴戚盡欲害吳起。

及悼王死,

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

한편 제후들은 초나라가 강성해짐을 우환으로 여겼고

그래서 초나라 귀족들은 모두 오기를 미워하여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도왕이 죽자

종실의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제히 오기를 공격하였다.

吳起走之王尸而伏之。

擊起之徒因射刺吳起,

并中悼王。[一]

오기는 마침내 쫓기다가 도왕의 영구를 둔 방으로 가서 시신 위에 엎드렸다.

그러나 오기를 쫓던 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기에게 화살을 소아 붙였다.

화살은 도왕의 시신까지 꿰뚫었다.

悼王既葬,太子立,[二]

乃使令尹盡誅射吳起

而并中王尸者。

坐射起 而夷宗死者七十餘家。

도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자가 임금으로 앉자

영윤에게 명해서 오기를 쏘기 위해

왕의 시신에까지 화살을 쏘아 댄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는데

이로 인해 멸족의 화를 입은 집은 70여 세대나 되었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世俗所稱師旅,

皆道孫子十三篇,

吳起兵法,世多有,

“세상에서 군사를 논하는 사람은

모두 손자 13편에 대해서 말하고

오기의 병법도

세상에 많이 유포되어 있다.

故弗論,論其行事所施設者。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사적과 시책에 대해서만 논했다.

語曰:

「能行之者 未必能言,

能言之者 未必能行。」

옛말에 이르기를,

‘능히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말하는 것은 아니며

능히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孫子籌策龐涓明矣,

然不能蚤救患於被刑。

손빈은 방연을 치는 데에는 그렇게 밝았지만

그에 앞서 그에게 형벌을 당하는 화를 방지하지 못했다.

吳起說武侯以形勢不如德,

然行之於楚,

以刻暴少恩亡其軀。悲夫!

오기는 무후에게는 형세가 덕만 못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초나라에서 행한 것은

각박하고 몰인정하여 자신의 몸을 망쳤으니

슬픈 일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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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卷六十五

孫子吳起列傳 第五

[주]여기에는 손무와 오기의 열전이 수록되었다.

다음 순서로 소개한다.

5-1. 孫武(손무)

5-2. 吳起(오기)

5-1. 孫武列傳(손무열전)

孫子武者,齊人也。〔一〕

以兵法見於吳王闔廬。

손자(孫子) 무(武)는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이름이 나, 오왕 합려(閤閭)를 접견하게 되었다.

闔廬曰:「子之十三篇,〔二〕

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

합려가 말했다.

" 그대가 지은 병법 13편을 내가 모두 읽어 봤소.

한 번 시험삼아 적은 군사로 시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對曰:「可。」

손자 "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闔廬曰:「可試以婦人乎?」

합려 " 그러면 부녀자라도 가능하겠습니까?"

曰:「可。」

손자 " 가능합니다."

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

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三〕

皆令持戟。令之曰:

그의 용병술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히여

합려는 손무에게 궁중의 미녀 중 모두 180명을 주었다.

손자는 궁녀들을 2대로 나눈 다음에,

합려가 사랑하는 총희(寵姬) 2명에게 그 각대의 대장으로 삼았다.

손자는 모든 궁녀들에게 극(戟)을 들게 하고 군령을 내렸다.

「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

" 너희들은 가슴,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등을 알고 있는가?"

婦人曰:「知之。」

궁녀들이 대답했다.

“압니다.”

孫子曰:

손자가 다시 령을 내렸다.

「前,則視心;左,視左手;

右,視右手;後,即視背。」

" '앞으로' 하면 너희들은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우로' 하면 오른손을,

'뒤로'하면 등을 본다. "

婦人曰:「諾。」

궁녀들이 대답했다.

" 잘 알았습니다."

約束既布,乃設鈇鉞,

即三令五申之。

於是鼓之右,婦人大笑。

손자가 자기의 말을 군령으로 선포하고

대오의 좌우에 부월(鈇鉞)을 설치했다.

손자는 자기의 군령에 대하여 여러 차례에 설명했다.

이윽고 북소리를 울리며 '우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크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孫子曰:

「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

손자가 궁녀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 군령이 불분명하여 군사들이 구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그 장수의 잘못이다."

復三令五申

而鼓之左,婦人復大笑。

손자가 다시 군령에 대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한 후에

북소리를 울리며 '좌로'라는 구령을 내렸지만

궁녀들은 여전히 크게 웃기만 할뿐이었다.

孫子曰:

「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

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

손자가 다시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 군령이 확실치 않고 군사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다.

그러나 군령이 이미 확실해 졌음에도 구령에 따르지 않은 것은

군리(軍吏)와 군사들의 잘못이다."

乃欲斬左古隊長。吳王從臺上觀,

見且斬愛姬,大駭。

趣使使〔四〕下令曰:

손자는 오왕의 총희인 두 대장을 끌어내어 참수하려고 했다.

오왕은 높은 대에 올라 참관하다가

두 총희가 참수 당하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사자를 손자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

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

" 과인은 이미 장군이 능히 용병을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과인에게 두 총희가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참수형을 면케 해주기 바랍니다."

孫子曰:

「臣既已受命為將,

將在軍,君命有所不受。」

손자 " 저는 이미 대왕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된 자가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임금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遂斬隊長二人以徇。

用其次為隊長,於是復鼓之。

婦人左右前後跪起

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

於是孫子使使報王曰:

드디어 오왕의 두 회첩을 참수형에 처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군사들에게 보였다.

이어서 두 희첩 대신에 다른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은 후에

북소리를 울리고 구령을 발했다.

궁녀들은 모두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등의 구령이나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모두 규율을 지켜 호령대로 움직여,

감히 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궁녀들이 구령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

손자가 사자를 오왕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

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

" 군사들이 이미 정비되었으니

대왕께서는 내려오셔서 한번 시험삼아 호령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왕께서 그들을 부리고 싶다면

물 속이건, 불구덩이 속이건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吳王曰:

「將軍罷休就舍,寡人不願下觀。」

오왕이 말했다.

" 장군은 이제 조련을 파하시고 숙사에 돌아가 쉬시기 바랍니다.

과인은 내려가 군사를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

손자

" 대왕께서는 단지 저의 병법의 이론만을 좋아하실 뿐이고,

그 실제적인 것은 쓰실 줄 모르고 계십니다."

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

西破彊楚,入郢,

北威齊晉,顯名諸侯,

孫子與有力焉。

그러자 합려는 손무의 용병 능력을 인정하고

결국은 그를 대장으로 삼았다.

후에 오왕 합려가 서쪽의 강대국인 초나라의 군사들을 파하고

그 서울인 영도(郢都)를 점령하여,

북쪽의 제(齊)와 당진(唐晉)에 위세를 떨치고,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크게 드러낸 것은

모두 이에 참여한 손자의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孫武既死,〔一〕後百餘歲有孫臏。

손무가 이미 죽고

백 년쯤 지나 손빈이 나타났다.

臏生阿鄄之閒,

臏亦孫武之後世子孫也。

孫臏嘗與龐涓〔二〕俱學兵法。

손빈은 아·견이라는 두 고을 사이에서 태어났다.

손빈은 손무의 후손이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龐涓既事魏,得為惠王將軍,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위나라를 섬겨

혜왕의 장군이 되었다.

而自以為能不及孫臏,乃陰使召孫臏。

臏至,龐涓恐其賢於己,疾之,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가만히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러들였다.

손빈이 찾아오자

방연은 그의 재능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미워했다.

則以法刑 斷其兩足而黥之,欲隱勿見。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두 다리를 끊고 이마에 묵형을 가하였다.

그렇게 되면 손빈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齊使者如梁,〔一〕

孫臏以刑徒陰見,說齊使。

그 뒤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 서울 대량을 방문하였다.

손빈은 형을 당한 상태로 비밀리에 그를 만나

제나라 사신을 설득했다.

齊使以為奇,竊載與之齊。

齊將田忌善而客待之。

제 나라 사신은 손빈의 기인이라 여기고

몰래 자기의 수레에 숨겨 제 나라로 데리고 갔다.

제 나라에 간 손빈은 곧 장군 전기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으로 머물렀다.

忌數與齊諸公子 馳逐重射。

孫子見其馬足不甚相遠,

馬有上、中、下、輩。

전기는 때마침 도박에 빠져 공자들과 기마와 활쏘기를 즐겼다.

손빈은 그 내기를 구경하다가 그 기마의 발길이 심히 먼 것을 간파하였다.

당시의 말에는 상중하의 등급이 있었다.

於是孫子謂田忌曰:

「君弟重射,〔二〕臣能令君勝。」

이에 손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

“임금의 아우가 활쏘기를 중히 여기니

내가 장군을 이기게 해 드리겠습니다.”

田忌信然之,

與王及諸公子逐射千金。〔三〕及臨質,〔四〕

전기는 그를 그러하리라 믿고

왕과 공자들에게 다시 천 금을 건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상대하여 활쏘기를 하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四〕索隱按:質猶對也。將欲對射之時也。一云質謂堋,非也。

孫子曰:

「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

取君上駟與彼中駟,

取君中駟與彼下駟。」

孫子曰(손자왈) :

손빈이 말했다.

“지금 당군의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

既馳三輩畢,

而田忌一不勝而再勝,卒得王千金。

달리기 경기가 3차례 끝나자

전기는 2승 1패의 결과로

결국 내기에 이겨 왕은 천금을 얻었다.

於是忌進孫子於威王。威王問兵法,遂以為師。

이 일로 전기는 손자를 위왕에게 그를 천거했다.

위왕 역시 손빈과 병법에 관한 문답을 가진 뒤로

마침내 스승로 삼았다.

其後魏伐趙,趙急,請救於齊。

齊威王欲將孫臏,臏辭謝曰:

「刑餘之人不可。」

그 후에 위 나라가 조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는 위급해져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 나라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아 조 나라를 구원하려 했으나

손빈은 사양하여 말했다.

“죄를 진 사람이므로 불가 합니다.”

於是乃以田忌為將,而孫子為師,

居輜車中,坐為計謀。

이에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되

손빈은 군사로서

치차 속에 들어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田忌欲引兵之趙,孫子曰:

전기가 군대를 이끌고 조 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이 말했다.

「夫解雜亂紛糾者〔一〕不控捲,〔二〕

救鬪者不搏撠,〔三〕批亢擣虛,〔四〕

形格勢禁,則自為解耳。〔五〕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 놓고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막을 것이 아니라 허점을 칠 때

모양이 바로 잡히고 세력이 그쳐

싸움은 자연히 풀립니다.

今梁趙相攻,輕兵銳卒必竭於外,

老弱罷於內。

지금 위 나라와 조 나라가 서로 싸우기 때문에

정예부대는 반드시 바깥 방어에 주력할 것입니다.

위 나라에 남은 자는 다만 노약자에 불과합니다.

君不若引兵疾走大梁,

據其街路,衝其方虛,

彼必釋趙而自救。

이제 장군께선 군사를 이끌고 위 나라 서울 대량으로 달려가

신속히 그 길을 점령하고 그 허점을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위 나라 군사는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자기네의 도성을 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是我一舉解趙之圍 而收獘於魏也。」〔六〕

이야말로 저의 한 번 움직여 조 나라의 포위를 풀고

동시에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田忌從之,魏果去邯鄲,

與齊戰於桂陵,大破梁軍。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랐다.

위나라 군사는 과연 조나라 서울 한단에서 철수했다.

계릉에서 제나라와 싸워

크게 양군을 격파했다.

後十三歲,〔一〕魏與趙攻韓,

韓告急於齊。

그로부터 13년 뒤

위 나라는 조 나라와 더불어 한 나라를 공격했다.

한 나라는 위급한 사정을 제 나라에 고했다.

齊使田忌將而往,直走大梁。

魏將龐涓聞之,去韓而歸,

齊軍既已過而西矣。

제나라는 전기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가서 구하게 했다.

전기는 또다시 곧장 대량을 향해 달려갔다.

위나라 대장 방연은 급보를 받자

즉시 한나라를 버려두고 귀로에 올랐으나

이미 국경을 넘어선 제나라 군사는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孫子謂田忌曰:

「彼三晉之兵 素悍勇

而輕齊,齊號為怯,

善戰者因其勢而利導之。

이때 손빈은 전기에게 이르기를

“저들 3진의 군사는 원래 사납고 용맹스럽습니다.

제나라를 경멸하여 제나라 군사를 겁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주어진 형세를 잘 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나갑니다.

兵法,百里而趣利者蹶上將,〔二〕

五十里而趣利者軍半至。

병법에는

‘승리에 취해 백 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그 상장군을 꺾이게 되고

50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반밖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使齊軍入魏地為十萬竈,明日為五萬竈,

又明日為三萬竈。」

우리 제나라 군대로 하여금 위나라 땅에 들어가 10만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내일은 5만 개로 만들고

모래는 3만개로 만들어 줄여 나가는 것입니다.”고 했다.

龐涓行三日,大喜,曰:

「我固知齊軍怯,入吾地三日,

士卒亡者過半矣。」

한나라에서 되돌아온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기 사흘째에 이르자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땅을 침입한 3일만에

사졸 중에서 도망한 자가 절반을 넘었다.”고 했다.

乃棄其步軍,與其輕銳 倍日并行逐之。

孫子度其行,暮當至馬陵。

그리고 곧 보병은 따로 떼어놓은 채로

기병 등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로 단축시켜 급히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손빈이 위나라 군사의 속도를 계산해 본 결과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馬陵道陝,而旁多阻隘,可伏兵,

乃斫大樹白而書之曰

「龐涓死于此樹之下」。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지형이 많아

복병을 두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손빈은 길 옆에 있는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기고 그 흰 부분에다

글씨를 쓰기를,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고 했다.

於是令齊軍善射者萬弩,

夾道而伏,期曰

「暮見火舉而俱發」。

이에 제나라 군사들 가운데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무수한 쇠뇌를 가지고

길 양쪽에 숨어 있도록 한 다음 기약하기를,

‘날이 저물어 이곳에 불이 밝혀지는 즉시 일제히 쏘아라.’고 명령해 두었다.

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乃鑽火燭之。

讀其書未畢,齊軍萬弩俱發,

魏軍大亂相失。

방연은 과연 날이 저문 뒤에야 그 나무 밑에 이르렀고

흰 부분에 씌어진 글씨를 보기 위해

불을 일으켜 그것을 밝혔다.

방연이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복병의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위나라 군사는 크게 어지러워져 서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다.

龐涓自知智窮兵敗,乃自剄,曰:

「遂成豎子之名!」〔三〕

방연은 더 이상 지혜를 써 볼 수도 없이 싸움에 패했음을 알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이르기를,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했다.

齊因乘勝盡破其軍,虜魏太子申以歸。

孫臏以此名顯天下,世傳其兵法。

제나라 군사는 승세를 몰아 위나라 군사를 전멸하다시피 하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이 승리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세상에 그의 병법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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