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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1번]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1번]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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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1번]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1번]

 

피서록(避暑錄)

1. 피서록서(避暑錄序)

2. 피서록(避暑錄)

 

[2번]

3. 주곤전소지(朱昆田小識)

 

피서록서(避暑錄序)

 

 피서록(避暑錄)은 내가 피서산장(避暑山莊)을 구경갔을 때에 쓴 글이다. 대체로 열하에는 36개소의 이름난 경치가 있는데, 강희가 일찍이 그 경치 좋은 곳마다 전각 하나씩을 두었다. 그 전각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았다.

 

煙波致爽  芝逕雲隄

연파치상  지경운제

무서청량(无暑淸涼) 연훈산관(延薰山館)

수방암수(水芳巖秀) 만학송풍(萬壑松風)

송학청월(松鶴淸越) 운산승지(雲山勝地)

사면운산(四面雲山) 북침쌍봉(北枕雙峯)

서령신하(西嶺晨霞) 추봉낙조(錘峯落照)

남산적설(南山積雪) 이화반월(梨花伴月)

곡수하향(曲水荷香) 풍천청청(風泉淸聽)

호복한상(濠濮閑想) 천우함창(天宇咸暢)

난류훤파(煖溜喧波) 천원석벽(泉源石壁)

청풍록서(靑楓綠嶼) 앵전교목(鶯囀喬木)

향원익청(香遠益淸) 금련영일(金蓮映日)

원근천성(遠近泉聲) 운범월방(雲帆月舫)

방저임류(芳渚臨流) 운용수태(雲容水態)

징천요석(澄泉遶石) 징파첩취(澄波疊翠)

석기관어(石磯觀魚) 경수운잠(鏡水雲岑)

쌍호협경(雙湖夾鏡) 장홍음련(長虹飮練)

보전총월(甫田叢樾) 수류운재(水流雲在)

 

그리고 전체를 합하여 피서산장이라 이름하고 강희가 친히 기()를 지었다.

 

금산(金山)은 줄기차게 뻗어 내리고 따뜻한 샘은 솟구쳐 흐른다. 

구름 잠긴 동학은 깊디깊고 돌 쌓인 못엔 푸른 아지랑이 둘렸다. 

경계가 넓고 초목이 무성하니 밭집에도 해롭진 않으리. 

바람이 맑아 여름철도 서늘하니 사람의 수양할 곳으로 적당하구나. 

내 일찍이 여러 차례 양자강 가를 순행하여 깊이 남방의 수려함도 알고, 

두 번이나 진롱(秦隴 섬서감숙성 지방)에 거둥하여 더욱 서토의 사정을 잘 알았으며, 

북으로는 용사(龍沙 흑룡강 지방)를 지나고, 동으로는 장백산을 구경하여

산천과 인물의 아름다움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모두 나의 좋아하는 바 아니었고 

다만 이 열하는 길이 북경으로부터 가깝고, 땅은 거친 들판을 새로이 개척하였구나. 

이에 높고 낮으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측량하며, 빼어난 봉우리 자연의 형세를 따라서

소나무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물을 이끌어서 정자에 둘렀으니, 이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바가 아닐 것이다. 

꽃다운 벌판을 빌렸을 뿐, 서까래의 새김이나 기둥의 단청에도 아무런 허비가 없었으나, 

아늑한 임천(林泉)이 나의 정서에 맞음을 기뻐하노라. 

날개가 찬란한 새들은 푸른 물 위에 노닐되 사람을 피하지 않고, 노는 사슴들은 저녁 볕을 띠고 떼를 이루었구나. 

솔개는 공중에 날고 고기는 물에 뛰노니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름이요, 

파란 빛과 붉은 기운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오르내리는구나. 

이것이 곧 피서산장의 경개이다.”

이 글은 강희 50(1711) 6월 하순에 쓴 것이나 강희가 늘그막에는 주로 열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때는 바야흐로 8월이 되었건만 북방의 더운 기운이 오히려 찌는 듯하므로, 나는 늘 흰 모시 홑적삼을 입었는데 대낮이 되면 땀이 흐르곤 했다. 유람하다 짬이 날 때마다 의자를 잿방 밖의 큰 회나무 밑으로 옮겨서 바람을 쏘였다. 이에 귀에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느낀 것들을 그 자리에서 얻는 대로 적어 보았다. 이름을 피서록이라 한다.

 

 

[C-001]피서록서(避暑錄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은 기()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우양도 어버이 것 창고도 어버이 것이니 / 牛羊父母倉廩父母

우리는 다만 아들 직분을 지키자 / 共爲子職而己矣

보물도 예서 일고 재산도 예서 생기니 / 寶藏興焉貨財興焉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일까 보냐 / 此豈山之性也哉

라고 썼더라는군요.”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남쪽 골목 둘째 문은 동씨(董氏)의 집이다. ‘쌍청문(雙淸門)’이란 현판이 붙었는데 강희의 어필이다. 또 지금 황제가 쓴 양세삼효(兩世三孝)’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이곳은 구외(口外)의 민가(民家)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거둥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다.

강희가 절강(浙江)에 순행할 때에 산음(山陰)에 살고 있는 노인 왕석원(王錫元)  5형제를 불러 보았다. 그들은 누런 머리에 어린 아이의 이빨이며 서로 붙들고 다닌다. 황제가 행궁(行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들 다섯 중 맏이와 둘째는 쌍둥이로 나이가 80이요, 그 다음은 78, 다음은 76, 다음은 75인데, 통계하면 3 89세이다. 그들의 자손은 모두 45명인데, 각기 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어필로 일문인서(一門仁瑞)’라는 액자를 써서 주고 황태자는,

 

다섯 가지 비단 나무 이 세간의 영화이고 / 五枝錦樹榮今代

백세토록 높은 나이 한 집안에 모였구나 / 百秩仙籌萃一門

라는 주련을 써서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 요즘 그들의 정려(旌閭)나 표창하는 은전이 전대보다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북진묘(北鎭廟) 뜰에 서 있는 늙은 솔을 지금 황제가 친히 그림 그려서 검은 돌에 새겨 바위 뱃구레를 파고 간직했는데, 그 바위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하다. 

이를 명() 때에는 취운병(翠雲屛)이라 불렀더니 지금 황제가 보천석(補天石)이라 고치고 그림 곁에 시를 지어서 새겼다.

 

북진묘 서이러냐 일산처럼 퍼진 솔이 / 鎭廟門西似蓋松

절반은 시들었고 푸른 잎도 상기로다 / 半存枯幹半籠葱

정신이 어렸으니 포박자(갈홍(葛洪)의 호)를 보는 듯이 / 凝神如見抱朴子

얼굴을 그리자니 진소옹(미상)이 내 아니다 / 圖貌慙非陳少翁

밑에 서서 볼 양이면 비나 개나 의심이요 / 立下忽疑晴與雨

앞에 뵈는 그 무엇이 색이 공임 깨닫고녀 / 現前可悟色兮空

유월이라 더운 날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 何當六月其根坐

낭랑히 글을 외며 맑은 소 들어보렴 / 讀疏仡聽謖謖風

그리고는 건륭의 낙관이 찍혀 있다. ,

 

갑술년(1754)에 내가 동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친히 북진묘에 치제하고, 예가 끝나자 묘 속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늙은 솔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반은 벌써 철석같이 굳은 가장귀였고, 다만 동편 한 가지가 울창할 뿐이다. 오히려 기이하고 에굽은 품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무 밑에 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구월 이십사일 어필.”

이라는 글이 있고 천지위사(天地爲師)’라는 도장이 찍혔다. 황제의 글씨나 그림이 모두 공교롭다.

바위 곁에 또 삼한(三韓) 사람 김내(金鼐)의 시가 있었다.

 

의무려산 이마 턱에 때때로 오르거다 / 時登醫巫閭山頭

구름이랑 바다랑 한 눈에 다 보리라 / 雲舍滄桑望裏收

돌 옷과 바위 털은 티끌 자취 혐의롭고 / 石髮巖衣嫌跡擾

우는 새 읊는 매미 사람 소리 섞이누나 / 鳥鳴蟬噪帶人幽

공중에 솟은 나무 늙은 용은 어디 가고 / 凌空樹古龍飛去

그 곁에 피는 꽃이 봉황 성터 남아 있네 / 傍地花新鳳壘留

북두성 높디높아 하늘 괴는 기둥이라 / 北斗惟神天一柱

갸륵하신 우리 님은 억만 년을 누리소서 / 億年萬紀庇皇秋

그 끝에는 화공(和公)’이란 낙관을 찍었으며 필력(筆力)이 몹시 옹졸하다. 혹은,

 

이 시는 조선 사람 김내가 지은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요동(遼東)을 또한 삼한이라 일컫는 줄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정림(顧亭林)은 일찍이 관함이나 지명에 옛 이름을 빌려서 쓰는 것을 배격했으나, 아직도 그를 본받아 남용하는 이도 없지 않을뿐더러, 이 시가 비록 잘된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기(口氣)는 아니다.

난설헌(蘭雪軒 이조(李朝)의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허씨(許氏)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전겸익(錢謙益) )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 )에 실려 있는데, 혹은 이름으로, 또는 호를 쓰되 모두 경번(景樊)으로 적혀 있다. 

내 일찍이 청비록서(淸脾錄序 청비록은 이덕무(李德懋) )를 쓸 때에 상세히 고증한 일이 있었다. 

무관(懋官 이덕무의 자)이 연경에 있을 때에 그것을 축 한림(祝翰林) 덕린(德麟)과 당 낭중(唐郞中) 낙우(樂宇)와 반 사인(潘舍人) 정균(庭筠)의 세 사람과 함께 돌려 가면서 읽고 모두 칭찬했다 한다. 

이제 내가 이곳에 와서 시 중의 빠지고 그릇된 곳을 논하다가 이내 허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우회암(尤悔菴) ()이 지은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보면 그 첫머리에 귀국의 것을 지어 실었는데,

양화도 드는 어귀 살구꽃이 붉으레라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 민요들이 그 나라의 국풍이라 / 八道歌謠東國風

못내 님을 그리노니 저 비경 여도사를 / 最憶飛瓊女道士

들보 올려 글 지려고 달나라에 노닌다오 / 上梁曾到廣寒宮

라고 하였고, 

그는 또 주석을 내기를,

규수 허경번이 나중에는 여도사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廣寒宮白玉樓)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에 허경번에 대한 그릇된 것을 상세히 변명하였더니, 윤과 기 두 사람이 각기 나누어 기록하여 간직한다. 중국의 명사들이 마땅히 이 일로써 또 한 번 저서의 자료를 삼을 것이다.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는 일찍이 그의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도 나타나지 못했은즉, 이 난설의 호 하나라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일이어늘, 하물며 경번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는 군데군데에 기록되어서 천추에 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가 어찌 뒷세상의 재사(才思)가 풍부한 규중 재녀들의 의당히 경계하여야 할 거울이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요술 중에는 술을 만들어 낸다는 주석(酒石)이 가장 요긴한 물건이다. 만일 참으로 이러한 돌이 있다면 의당히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 천계(天啓) 연간에 왜()가 유구(琉球)를 쳐서 그 임금을 사로잡았는데, 유구의 태자가 그 나라의 세보(世寶)를 싣고 가서 그 아버지를 속()하려 하다가, 배가 풍파에 휩쓸려서 제주(濟州)에 닿았다. 목사(牧使) 아무가 배에 무슨 물건이 실렸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답하였다. 

주천석은 모양이 마뇌(瑪瑙)처럼 생겼는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이고 물 한 잔이 들 정도이다. 맑은 물을 채우면 곧 아름다운 술이 되고, 만산장은 바닷거미의 실에다 약으로 물빛을 들여서 뜬 것인데, 적게 펼치면 집 하나를 덮을 정도이나 넓게 펼치면 산 하나를 덮을 수 있으며, 작은 놈으로는 모기나 파리, 큰 놈으로는 뱀이나 이무기 따위가 모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가 그것을 얻고자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내어서 배를 에워싸니 태자가 돌과 창을 모두 바다 속에 던졌다. 목사가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몰수하고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가 죽기에 임하여,

착한 말은 분간 없고 몹쓸 옷을 입은 이 몸 / 堯語難分桀服身

꿈이러냐 이 죽음을 푸른 하늘 아오리까 /臨刑何暇訴蒼旻

삼량이 묘혈 판들 누구라서 속해 낼꼬 / 三良臨穴誰能贖

두 아들 배를 탈 제 도적 어이 잔폭하오 / 二子乘舟賊不仁

백골은 모래벌판 거친 풀에 얽혔어라 / 骨暴沙場纏有草

혼이야 고국 간들 슬퍼할 이 누구던고 / 魂歸古國吊旡親

죽서루 밑 저 물 소리 처량도 한져이고 / 竹西樓下滔滔水

만고의 끼친 한을 분명히 울어 예네 / 遺恨分明咽萬春

라는 시 한 편을 읊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중환(李重煥 이조 때 학자. 자는 휘조(輝祖)) 택리지(擇里志)에 실렸으며, 목사는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사형에 한 등급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기록이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일이 과연 참말이라면 목사의 죄악은 비록 거리에다 시신을 진열한다 해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이제 그의 자손이 어찌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유구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편에 자주 글월과 예폐를 부쳐 오더니, 갑신년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이번 걸음에 해외의 모든 나라 사신을 만나보지 못함이 더욱 유감이다. 아까 구경하던 요술 중의 주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구의 주석도 역시 요술의 하나인 듯싶다. 그리고 민중(閩中 복건성) 사람 왕삼빈(王三賓)이 말한 바와 같이, 바닷거미가 범을 얽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만산장(漫山帳)은 이치에 그럴 법도 하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학지정(郝志亭)더러,

장군은 비록 무관 출신이지만 장고(掌故)에 몹시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여, 비록 이름 있는 학자나 늙은 선비라도 장군의 짝이 될 자 드물까 하오니, 귀국의 무관은 반드시 문관과 학문이 넉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은 특히 유가의 연원이 깊어서 정원(定遠)의 문장이 금석에 새겼음을 본받은 것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의 집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스러운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수( () 때의 장수 수하(隨何))( 미상)( () 때의 장수 주발(周勃). 강은 그의 봉호)( () 때의 장수 관영(灌嬰))의 한스러운 일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자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으니 무엇을 칭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와 얼마 전에 태학사를 지낸 서혁덕(舒赫德)과 같은 분은 모두들 문장이 태평 성대를 이룩할 만하며, 무략이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할 수 있고, 부귀와 수복(壽福)은 분양(汾陽)서평(西平 미상)이요, 공로와 훈벌은 배진(裵晉 배도(裵度). 진은 봉호)문로(文潞)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관도 할 수 없고 무관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이(四彝)가 모두 복종하고 풍진이 고요하니, 저 같은 자는 가위 한 개의 썩은 무부(武夫)였습니다.

서른 해 쉬지 않고 옛 병서를 읽고 나서 / 三十年來學六韜

꽃다운 그 이름이 당시에 문장이라 / 英名嘗得預時髦

나라에 몸을 던져 금 갑옷 입었을 제 / 曾因國難披金甲

아무리 가난해도 보배칼을 팔진 않네 / 不爲家貧賣寶刀

뛰노는 이 팔뚝에 화살 힘이 약다 하랴 / 臂健尙嫌弓力輭

오히려 밝은 눈에 싸움 터를 바라보네 / 眼明猶識陣雲高

어젯밤 뜰 앞에서 가을 바람 일어나니 / 堂前昨夜秋風起

꽃 놓인 옛 전포를 보기도 부끄러라 / 羞見團花舊戰袍

이 조한(曹翰)의 시를 외고 나면 그들이 안장에 걸터앉아서 사면을 돌보던 모습이 못내 그리워질 뿐입니다. 

옛날부터 글 읽은 장수로서 손무(孫武)오기(吳起)염파(廉頗)악의(樂毅)왕전(王翦)조충국(趙充國)반초(班超)심경지(沈慶之)한세충(韓世充) 등은 모두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심경지는 글 모르는 까막눈인데, 어찌 글 읽은 장수라 하시요.” 하였더니, 

지정은

심공(沈公)이 일찍이 농사일은 사내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고, 길쌈 일은 여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그 당시에 벌써 인정된 것이었고, 척남궁(戚南宮)은 더욱 시 공부가 깊어서,

호각 소리 처량할사 초목 그저 쓸쓸하군 / 畫角聲傳草木哀

구름 머리 높이 솟고 돌문이 열리누나 / 雲頭起對石門開

삭풍 불어 술이 찰 제 취하지도 않거니와 / 朔風邊酒不成醉

지는 잎 기러기는 요란스레 우는구나 / 落葉歸鴻無數來

다만 당 원과 쉬어 살기 아예 사라지면 / 但使元戈銷殺氣

이 몸이 헛 늙은들 그 무엇이 한이리요 / 未妨白髮老邊才

높은 봉에 이름 새김 이 내 뉘와 함께 할꼬 / 勒名峯上吾誰與

칼춤 추던 저 대 위에 그리워라 이 장군이 / 故李將軍舞劍臺

이라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장수 재주는 미칠 수 있겠으나 시 재주는 미칠 수 없겠습니다그려.” 하고 웃었다.

저녁 무렵에 풍윤성(豐潤城)에 올랐더니 수염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내 앞에 와서 손을 들어 읍하면서,

저의 성명은 임고(林皐), 절강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나의 성명을 물어서 알자 놀라는 듯 반기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일가시죠.” 한다. 

나도 역시 놀라서,

당신은 초정을 어떻게 잘 아시나요.” 한즉, 

임고는지난해에 초정이 같은 나라 사람 이형암(李炯菴 이덕무. 형암은 그의 호)과 함께 문창루(文昌樓)에 올랐다가 이내 그 고을 호형항(胡逈恒)에게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성 밑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곧 호씨(胡氏)의 집이며, 그 바람벽 위에는 초정의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한다. 

이에 변계함(卞季涵)과 정 진사(鄭進士) ()으로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 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 이조 때 서울에 있던 동리)에 있을 때에 형암이 마침 왔다가 지은 것이다.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 泬㵳秋令樹先知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 任忘暄涼做白癡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 壁靜萬蟲勤自護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 簾虛一鳥慣相窺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 抛他錢癖如將浼

나를 일러 서음(書淫)이라 하니 나는 이를 사양 않소 / 呼我書淫故不辭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 好事中州空艶羨

요봉(() 문학가 왕완(王琬)의 호)은 문필이요 완정(왕세진(王世稹)의 호)은 시라 하네 / 堯峯文筆阮亭詩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는 듯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만 하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했던 것이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고인의 얼굴을 만나는 듯싶었다.

유리창(琉璃廠) 육일재(六一齋)에서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처음 만났다. 그의 자는 식한(式韓)인데, 눈매가 맑고 눈썹이 길기에 나는 그가 혹시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축덕린(祝德麟)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나보다 앞서 교유한 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름이 입에 향기롭고 그들의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유()와 필담을 하는 사이에 그는 유혜풍(柳惠風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호)이 그 숙부 탄소(彈素 유금(柳琴)의 호)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

고운 국화 시든 난초 님의 수레 비치옵네 / 佳菊衰蘭映使車

맑은 구름 보슬비는 구월도 늦가을 / 澹雲微雨九秋餘

이 말씀 한 토막을 중토에다 전하고저 / 欲將片語傳中土

지북의 어떤 사람 다시금 글을 쓸꼬 / 池北何人更著書

를 써서 보였더니, 

황포는지북의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이름이시오.”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완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우리나라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고사를 쓴 것이지요.” 한즉, 

황포는글쎄, 감구집(感舊集 왕세진 저) 가운데 이름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라는 이가 있더군요.” 한다. 

나는옳습니다. ,

엷은 구름 가벼운 비가 시누이의 사당터에 / 淡雲輕雨小姑祠

고운 국화 시든 난초 팔월이 이때라네 / 佳菊衰蘭八月時

라는 시는 곧 청음이 지은 것이요, 

또 완정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는,

맑은 구름 이슬비가 소고사가 여기로다 / 淡雲微雨小姑祠

빼어난 국화 지는 난초 때마침 팔월이야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에서 오신 손님 그 말을 기억하니 / 記得朝鮮使臣語

동쪽 나라 그분네가 시를 과연 알더구먼 / 果然東國解聲詩

이라 하였으니, 혜풍의 이 시는 완정을 본받아서 지은 것입니다.” 한즉, 

황포는 또,

 

혜풍의 시는 실로 얻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동국 사람이 시를 안다는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다. 나는 곧,

글을 읽다 눈물 지니 옛 역사가 아롱지네 / 看書淚下染千秋

물에 닿은 저 시인은 시름도 하도 할사 / 臨水騷人旡限愁

확사(심덕잠(沈德潛)의 자)가 시를 엮되(청시별재(淸詩別裁)) 너무나 초라터라 / 碻士編詩嫌草草

치청전집 있다 하니 어디서 구해 볼까 / 豸靑全集若爲求

를 썼더니, 

황포는 손을 흔들며 붓으로 치청전집 넉 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금서(禁書)랍니다. 철군(鐵君 이개(李鍇)의 자)의 선조는 애초에 귀국 사람이라지요.” 한다. 

나는무슨 까닭으로 금법에 걸렸나요.” 하였더니, 황포는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잇달아서 그 다음 절의,

시 짓기로 이름 높은 곽집환이 있다고녀 / 有箇詩人郭執桓

담원(곽태봉(郭泰峯)이 거처하는 곳)이 읊은 글귀 동국에 헌사롭네 / 澹園聯唱遍東韓

이제껏 삼 년이라 소식 그저 끊겼으니 / 至今三載旡消息

처량한 이 꿈속에 물 소리 뿐이로세 / 汾水悠悠入夢寒

를 읊었더니, 

황포는 평하려 들면서곽은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그는 태원(太原)에 산답니다.” 하고, 

사동망(師東望)과 양유동(梁維棟)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한다.

 나는 또

그러면 서점 중에는 갓 새긴 회성원집(繪聲園集)이 있겠습니까. 그 책머리에 사와 양의 두 서문이 있고, 역시 저의 것도 있습지요.” 한즉, 

황포는 곧 회성원집 넉 자를 써서 문수당(文粹堂)서사(書肆)의 편액(扁額)이다. 에 사람을 보내어 구했으나 없다 한다.

나는 또선생은 반정균학사를 잘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황포는일찍이 사귀어 본 일은 없습니다.” 한다. 

나는반 학사의 댁이 종인부(宗人府)에서 벽 하나가 가렸답니다. 제가 나라를 떠나올 때에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종인부 대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그 댁이 있다.’ 합니다. 그러면 종인부가 여기에서 거리로 얼마나 됩니까.” 한즉,

 황포는선생이 예부(禮部)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반문할 즈음에 마침 한 손님이 좌석에 들어앉더니,

종인부를 찾을 것 없이 그 댁이 여기서 멀지 않소이다. 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는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槀藥鋪)에서 마주 선 문이 곧 반이 우거한 곳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황포가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하더니 곧,

지난해 가을에 그가 이곳으로 옮아왔다 하는데, 선생은 누구를 통해서 그를 아셨나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 사람 홍대용(洪大容)이 건륭 병술년(1766)에 공사(貢使)를 따라서 연경에 왔다가 반을 만났고, 그 뒤에도 그와 서로 사귀어 본 이가 있으니, 저는 비록 그를 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서로 통했답니다. 반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스스로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그리고서,

우리 집은 서자호(서호(西湖)) 물가를 둘린 나무 / 吾家西子湖邊樹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네 / 淺碧深紅二月時

이렇듯한 저 강남을 돌아가지 못하고는 / 如此江南歸不得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는 시를 써서 홍대용에게 주었답니다.” 한즉, 

황포가 크게 권주를 치면서,

선생의 벗 홍 수재(洪秀才)의 아름다운 글귀를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나는일찍이 외우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혜풍(惠風)이 탄소(彈素)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서,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오 / 淺碧深紅二月時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항주가 낳은 선비 그 사람은 반향조를 / 杭州擧子潘香祖

어여쁠사 그의 시구 남시와 어떻던고 / 可憐佳句似南施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명사를 그리워함이 이렇답니다.”

한즉, 황포는 또 이에 권주를 치면서,

반은 진실로 이름 있는 선비이긴 하나 혜풍의 것도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고, 

황포는 곧 그 종이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면서,

제가 방금 구당시화(毬堂詩話)를 쓰고 있는데 다행히 이런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었소이다.”

하고는 이내 같이 문을 나와서 작별할 제, 

황포는이 길이 바로 양매서가로 가는 것입니다. 단씨의 약포는 저 문패에 큰 물고기를 그린 곳이 그 집이랍니다.”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강녀묘(姜女廟)는 산해관 밖에 있는데, 이는 이른바 망부석(望夫石)이다. 

왕건(王建 () 시인. 자는 중초(仲初)),

 

고운 님 바라던 곳 강물만이 예는구나 / 望夫處江悠悠

이 몸이 돌 될망정 고개도 안 돌리네 / 化爲石不回頭

나날이 이 산 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제 / 山頭日日風和雨

님이 돌아오시는 땐 이 돌 응당 입 열 것을 / 行人歸來石應語

이란 시가 곧 이것을 말함이다. 

세간에서는 망부석이 이 한 군데뿐이 아니라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고, 또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으니, 그러면 왕건이 읊은 것은 이 돌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이곳에 행궁(行宮)이 있는데, 그 웅장화려함이 북진묘(北鎭廟)에 못지 않고, 또 과친왕(果親王)이 금자(金字)로 쓴 진고명적(振古名蹟)’이라는 주련이 있으며, 

건륭 8(1743) 10월에 황제가,

 

서늘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 / 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프게 고운 님을 그리웁네 / 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 / 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고 죽음 강상을 위함이네 / 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 / 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을 울었다네 / 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 / 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 / 訛傳是處也何妨

라는 시를 지어서 돌에 새겼고, 돌 곁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진의정(振衣亭)이다. 대체로 청의 황실은 대대로 명필이 많으나 과친왕(果親王)이 더욱 이에 능하여 미원장(米元章)보다도 나을 듯싶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이라 하니 대개 반()과 반()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가며 지껄인다. 

대체로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어째서 세 가지 고기라 하는고.”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哥吾里)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가 아닌가.”

한즉,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푸른 깃 은 정수리 의젓한 무부로서 / 翠翎銀頂武夫如

천리라 요동 길을 사신 뒤를 따랐구나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 땅에 들어서자 고기 별호 세 번째와 / 一入中州三變號

예부터 못난 이 몸 종이 씹는 좀이라오 / 鯫生從古學蟲魚

고려(高麗)는 애초에 고구리(高句驪)로부터 나온 이름이었는데, ‘()’ 자와 ()’ 변을 생략한 것이다. 만일 산과 물이 곱다고 풀이해서 고려라고 읽는다면 이는 천자문(千字文)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 ()’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거성(去聲)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평성(平聲) ()’로 발음한다. 당 때에도 고구리를 모두 고리라고 불렀으니 고리란 이름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이무관(李懋官)은 일찍이,

“‘고구리란 말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들 조상은 금와(金蛙)인데, 우리나라 말로 와()를 개구리(皆句麗)라 하고 또는 왕마구리(王摩句麗)라 한다. 옛 사람들이 몹시 질박하여 곧 임금 이름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는 성을 그 위에다 씌워서 고구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일시의 조롱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마는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이다. 외국의 방언이 대체로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는 것이 많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옮겼을 때 예를 들면, ()을 몽고(蒙古)라 하고, 아름다운 금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부르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산서(山西)에 살고 있는 사람 곽집환(郭執桓)의 자는 봉규(), 또는 근정(勤庭)이며, 호는 반오(半迂), 혹은 동산(東山)이며, 또는 회성원(繪聲園)이라 한다. 그는 건륭 병인년(1746)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고 집이 대대로 부유하였으며, 그의 집은 호산(虎山)을 뒤에 지고 앞에는 노천(蘆泉)이 흐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태봉(泰峰)의 자는 청령(靑嶺)이요, 호는 금랍(錦衲)이니 나라에서 중헌 대부(中憲大夫)의 직함을 주었는데, 뒤에 또 자정 대부(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금랍은 날마다 심덕잠(沈德潛)가락택(賈洛澤) 등 모든 명사와 더불어 그 동산에서 시를 창수(倡酬)하였다.

봉규가 일찍이 그와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등문헌(鄧汶軒) 사민(師閔)을 통하여 우리나라 명사들에게 담원팔영(澹園八詠)의 시를 청하였으니, 담원은 곧 금랍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이 시는 대체로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붉은 파초 푸른 바위 담 너머로 솟아 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오동일랑 깊숙한 찰 간직했네 / 一樹梧桐窈窕堂

평생에 오만한 몸 손님 맞이 게을리하여 / 傲骨平生迎送懶

어른님 하시는 일은 저문 산에 절만 하네 / 丈人惟拜暮山光

위는 내청각(來靑閣)을 읊었다.

 

남쪽 비탈 그림자는 진종일 나풀나풀 / 南陀竟日影婆娑

그림자 물에 지자 나를 불러 누구인가 / 耐可呼吾亦喚他

산들바람 잠깐 불 제 해오라기 저어가니 / 乍綴微風鳬鷺去

요란한 물결 위에 백 동파가 설렁이네 / 不禁撩亂百東坡

위는 감영지(鑑影池)를 읊었다.

 

코 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 已觀微白鼻端依

무엇이고 맡으려니 콧구멍이 닫혔고나 / 欲辨臟神掩兩扉

다만 암향 있어 꿈에 들어 싸늘하네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 밝은 달에 매화 가지 춤추는 듯 / 羅浮明月弄輝輝

위는 소심거(素心居)를 읊었다.

 

자 새긴 난간 위에 울한 솔이 덮여 있고 / 松覆深深卍字欄

기운 바위 넌출 달려 푸른 빛이 어울렸네 / 垂蘿欹石翠相攅

그림 배에 바람 불어 가는 대로 두려무나 / 一任畫舫風吹去

밤새도록 들려오는 찬 여울 물소린 듯 / 盡夜寒聲瀉作灘

위는 송음정(松陰亭)을 읊었다.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우는 듯 / 噀輕堪醒醉魂花

하늘 말이 높이 달려 푸른 갈기 너울너울 / 天褭行空翠鬣髿

약 캐러 갔다가 옛 신선을 찾으려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아침 놀에 길마저 아득코녀 / 路迷廉閃赤城霞

위는 비하루(飛霞樓)를 읊었다.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 囑他風雨反逢嗔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 自從洞裏修甁史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 三百六旬都是春

위는 유춘동(留春洞)을 읊었다.

 

옥파리채 맑은 저녁 높은 대에 홀로 올라 / 玉塵淸宵獨上臺

버들 울에 서리 내리고 기러기 슬피 울 제 / 杞棚霜落雁流哀

찢어지듯 한 소리에 가을 구름 흩어지고 / 一聲劃裂秋雲盡

깨끗한 저 하늘에 달님 이제 오신다네 / 萬里瑤空皓月來

위는 소월대(嘯月臺)를 읊었다.

 

꽃다운 화예부인 이 궁에 들어올 제 / 花蘂夫人初入宮

수줍은 채 말하자니 뺨이 먼저 붉었다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의 사리쯤이 그 무엇이 묘하던고 / 鸚哥舍利元非妙

아란의 깨달은 도를 누구라서 알아주리 / 誰識阿難悟道功

위는 어화헌(語花軒)을 읊었다.

봉규가 그가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 각본(刻本) 한 권을 나에게 보내고는 서문을 청하였다. 그 글을 읽어본즉 청허(淸虛)하고도 쇄탈(灑脫)하여 세속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그는 약관 때부터 그 아버지의 가진 재산을 받았으며, 해내의 사객(詞客)들을 초빙하여 글과 술로 회합을 지었으니, 양유동(楊維棟)노병순(盧秉純) 등이 모두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의 회진문서정(懷津門西亭)’이라는 시에,

 

향기 흩자 꽃이 지니 작은 정원 가을이라 / 香散花殘小院秋

추녀 끝에 달린 달은 갈퀴인양 되었으리 / 西亭簾角月如鉤

북으로 예는 외기러기 푸른 공중 스쳐오니 / 北來一雁橫空碧

그 그림자 동남으로 바다에 흘러드네 / 影下東南入海流

라 하였고, 또 그의 제표요산수소폭(題表耀山水小幅)’이라는 시에는,

 

고기잡이 갯마을에 물빛은 밝았는데 / 蟹舍漁灣水色明

이슬 젖은 나무 숲에 흐렸다가 맑아지네 / 煙條露葉半陰晴

하늘가 구름 사이 외로운 배 멀리 저어 / 雲間天際孤帆遠

적막한 석양 속에 한 소리 기러기를 / 寂寞斜陽一雁聲

이라 하였고, 또 그의 유감(有感)’에는,

 

강가에 밝은 달빛 가을이 맑노매라 / 壕梁月色照淸秋

회남의 갈대 숲에 내 꿈이 둘리누나 / 夢繞淮南蘆萩洲

초원에 잠긴 비는 갯마을이 고요하고 / 雨暗楚原連浦靜

고목에 급한 바람 강물 소리 섞여 흘러 / 風催古木雜江流

외로운 배 방향 몰라 건곤이 넓은지고 / 孤舟旡依乾坤濶

물과 구름 같은 신세 내 홀로 떠 있구나 / 隻影空持雲水浮

한없이도 쓸쓸한 건 시력이 끝난 그곳 / 最是蕭條極目處

머나먼 만리 길에 끝없는 나의 시름 / 迢遙萬里使人愁

이라 하였다. 

내 일찍이 금오(金鰲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와 옥동(玉蝀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 사이를 배회한 일이 있으니, 저 우촌(雨村)이조원(李調元) 과 추루(秋樓)반정균(潘庭均), 지당(芷塘)축덕린(祝德麟) 의 모든 명류는 오히려 만나 볼 기회가 있겠으나, 다만 곽씨 집환(執桓)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집환이 건륭 을미년 8월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회성원집은 아마 중간된 책[]이 있을 듯 싶기에 유리창 안에서 구하여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윤경(尹卿)이 검은 종이로 장정한 작은 부채를 내어서 대와 돌을 그리고 또 젖에다 금가루를 타서,

 

아름다운 푸른 대는 님의 풍채 보는 듯이 / 綠竹瞻君子

굽어진 저 언덕에는 님의 소리 듣는 듯이 / 卷阿矢德音

이 부채를 펼쳐 내어 그림 한 폭 그려 들고 / 揮毫開便面

두 손을 맞잡으니 마음마저 같으리 / 握手得同心

라고 써 있고, 그 밑에는,

윤가전(尹嘉銓)이 쓰니 이때에 나이는 70이다.” 라고 썼다.

명시종(明詩綜)에 나의 5세조(世祖) 금양군(錦陽君)의 대동관제벽(大同館題壁)의 한 절로서,

 

한 나라의 홍가(() 성제(成帝)의 연호) 연간에 일어난 고구려 / 高句麗起漢鴻嘉

쓸쓸한 옛 궁터가 풀숲에 가리웠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다 을지문덕 그이가 죽은 뒤에 / 怊悵乙支文德死

나라가 망한 것 후정화 탓 아니라네 / 國亡非爲後庭花

가 실려 있다. 

고구려의 일어남은 홍가 연간이 아니요, 곧 한 원제(漢元帝)의 건소(建昭) 2(기원전 37)이다. 성제(成帝)의 홍가 3년에는 백제(百濟)의 태조 고온조(高溫祚)가 직산(稷山)에 왕도를 정하였던 것을 선조께서 우연히 상고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유식한(兪式韓) 구당록(毬堂錄)에는 일지록(日知綠)을 이끌어서 조선 역사의 자료로서 서경(書經) 대전(大傳)을 고증삼아, 이 시 가운데서 쓴 홍가의 그릇된 것을 변증(辨證)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이 고거(考據)와 변증에 알뜰하여 이로써 박아(博雅)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장주(長洲 우동이 살고 있던 지명) 우동(尤侗) 회암(悔菴)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지으매, 그 첫머리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그 다음 백여 나라의 민요(民謠)와 토산(土産)의 대개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서도 그의 서술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만 리의 먼 곳이랴. 더군다나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토속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조선(朝鮮)을 두고 읊은 시에,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어서 고쳤다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란 옛 이름이 보다 더 아름답네 / 未若朝鮮古號宜

천 리란 그 서울엔 온갖 연극 벌여 있고 / 千里王京陳百戱

한 나라 옛 모습을 이곳에서 보겠구나 / 漢城猶見漢官儀

라 하고는 그 주()에는,

옛 조선이 고구려에게 합병되었으므로 수()가 그를 쳤으되 항복받지 못하고는 그를 낮추어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더니, ()의 홍무(洪武) 연간에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의 이름을 회복시켰으며 한성(漢城)을 서울로 삼았다. 매양 조사(詔使)가 이르면 여러 가지 연극(演劇)을 진열하였다.”

라고 하고, 

또 그 뒤를 이어서,

긴 저고리 넓은 소매 절풍건은 머리에다 / 長衫廣袖折風巾

다듬 종이 이리 붓은 한자 쓰면 진서라네 / 硾紙狼毫漢字眞

스스로 쓴 역사에는 전통이 오래다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의 구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라네 / 尙書篇內九疇人

라 하고는, ,

 

작은 아이 여덟 살이 황창이라 부르는데 / 小兒八歲號黃昌

칼춤을 추다 말고 백제왕을 베었다네 / 舞劍能誅百濟王

8월이라 한가윗날 회소곡을 다시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 나절 그 길쌈이 대바구니 가득 찼네 / 朝來蠶績已盈筐

라고 하고, 또 그 주에,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7월 보름에 신라왕이 왕녀(王女)로 하여금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이르러서 그들의 공적을 비교하여 이에 진 자가 비용을 담당하여 주연을 벌이고 서로 노래 부르며 춤추되,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중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더니, 그 뒤에 조선이 신라를 깨치고 끼친 소리를 모의하여 황창과 회소의 두 곡조를 만들었다.” 하였다.

기려천(奇麗川) 소대총서(昭代叢書 () 장조(張潮) ) 를 내놓고 이 글을 뽑아서 나에게 뵌다. 

내가 윤형산(尹亨山)에게,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낮춘 것은 곧 왕망(王莽) 때 일입니다.” 

 윤은그렇습니다.” 한다. 

나는 또,

스스로 쓴 역사라는 구절은 온통 그릇된 것입니다. 기씨(箕氏)의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윤은,

그거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는 복잡한 관계인 동방(東方)의 삼국(三國)을 통틀어 이야기한 것이요, 오로지 귀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통이 오래다는 것은 대체로 그의 나라 이름 조선이 벌써 기자(箕子)로부터임을 말하며, 귀국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본시 가작(佳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시피 또는 가죽신을 격해 놓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의 주()에 이르기를 조선이 신라를 깨쳤다는 것은 더욱 그릇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어찌 5백 년 앞의 신라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한즉, 

여천은이야말로 을축(乙丑)갑자(甲子)라는 겁니다.”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윤경더러,

현존한 시인(詩人)으로서 해내(海內)에 가장 으뜸될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은,

천하가 넓은지라, 홍장(鴻匠)과 묘재(妙才)가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는 나이가 늙고 세상일을 모두 끊어버렸으므로 젊은 재자들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저의 늙은 벗으로서 원 태사(袁太史) ()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는 자재(子才)였고 뜻이 고상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랑하지 않고 산수에 방랑하여 가장 회고적(懷古的)인 작품이 능수입니다.”

하고는, 이내 소리를 높여서 그의 시 두어 귀를 읊는다. 나는 그가 읊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글씨로 써서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박랑성시(博浪城詩),

약을 캐는 진인들은 봉래산을 향해 가고 / 眞人採藥走蓬萊

아득한 박랑의 모래벌은 망해대에 연했구나 / 博浪沙連望海臺

구정은 아직 잠기고 삼호들은 일어섰네 / 九鼎尙沈三戶起

여섯 왕이 쓰러지자 한 방망이 오는구려 / 六王纔畢一椎來

범과 용이 기개 높은들 누른 금은 다하였네 / 虎龍有氣黃金盡

산도깨비 소리 없고 흰 구슬만 슬프다네 / 小鬼旡聲白璧哀

열흘 두고 찾다 못해 손을 마침 떼었다네 / 大索十日還撒手

그대 같은 기이한 재주 예부터 몇이런고 / 如君終古儘奇才

하였으니, 그 시를 보아서도 가히 중국 사대부(士大夫)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이 구태여 이 시를 읊어 보임도 역시 그의 뜻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려천(奇麗川)에게도 기피하지 않음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강희 무오년(1678)에 강우(江右)에 살고 있는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이 되놈들의 노략을 당하여 심양으로 가다가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서 바람벽 위에 시 한 절을 썼으되,

 

뭉텅 머리 방망인양 옛 단장 가엾어라 / 椎髻空憐昔日粧

길 나선 초라한 양은 비단 치마 다 낡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아빠 엄마 어떠신고 그곳 몰라 애태우며 / 爺孃生死知何處

봄 바람에 흐뭇 울어 심양으로 예는구나 / 痛哭春風上瀋陽

하고는, 그 아래에 또 쓰기를,

 

저라는 계집은 곧 강우에 살고 있는 우 상경(虞尙卿) 수재(秀才)의 아내로서 지아비는 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이제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서 심양으로 가는 길이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 벽을 닦고 이 시를 쓰노니, 오직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서 이 몸을 가엾이 여겨 건져 주시옵길 바랍니다. 제 나이는 지금 21세외다.”

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계해(1683)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공(金公) 석주(錫胄)가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기록하여 돌아왔고, 또 그 뒤 30여 년을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공(金公) 창업(昌業)이 역시 이곳을 지나니 바람벽에 쓴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나는 노가재보다도 60여 년 뒤인 이날에 또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생각하여 배회하였으나 벽 사이의 글자는 다시 찾아 볼 곳이 없었다. 내 우연히 이 시로써 기풍액(奇豐額)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산연(潸然)히 눈물지우며,

 

진자점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산해관 밖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기는 곧 시 한 절을 읊었다.

 

붉은 단장 아침 나절 되놈에게 팔렸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호가의 슬픈 박자 그 다섯째 글귈러라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에 많은 사내 맹덕이 이제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손들 채문희를 속할쏘냐 / 千金誰贖蔡文姬

강희의 산장시(山莊詩)는 통틀어 36마디였는데, 모두가 야비하고 졸렬하여 운치가 없으니, 대체로 그는 억지로 읊어서 평소의 포부를 자랑한 것인데 그의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뭇 글을 수집나열하여 전주(箋注)를 내었으니, 한 예를 들면 그의 연파치상(煙波致爽)을 읊은,

 

서늘한 이 산장에 가끔 와서 더위 피하니 / 山莊頻避暑

잠자코 고요하여 떠들썩한 일 드무네 / 靜黙少喧嘩

는 아무런 주석도 필요하지 않건마는 그들은 양() 소통(蕭統 ()의 문학가. 자는 덕시(德施)) 시의,

 

수레를 바삐 몰아 산장으로 가자꾸나 / 命駕出山莊

든가, 유우석(劉禹錫) 시의,

 

푸른 넌출 그늘 속에 산장 하나 예 있구나 / 綠蘿陰下有山莊

라든가, 대숙륜(戴叔倫) 시의,

 

지초 이랑 대추밭 길 오가기도 잦았고녀 / 芝田棗逕往來頻

, 손적(孫逖 당의 문학가) 시의,

 

이 땅이 가장 맑으니 숲 속 정자 좋을씨고 / 地勝林亭好

시절이 태평인 제 잔치도 자주로다 / 時淸宴賞頻

, 위징(魏徵)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銘),

 

황제께서 구성궁에서 더위를 피하셨다.”(그 서문의 한 구절)

, 양 간문제(梁簡文帝 자는 세찬(世纘)) 납량시(納涼詩),

 

높은 오동 그 밑에서 더위를 피하노라니 / 避暑高梧側

가벼운 바람 들어 옷깃이 서늘하군 / 輕風時入襟

, 백거이(白居易) 시의,

 

봄철을 바라보며 꽃빛이 따뜻하고 / 望春花景暖

더위를 피하니 대 바람이 서늘코녀 / 避暑竹風涼

, 남사(南史) 심린사전(沈麟士傳),

 

나이가 80이 지났으나 귀와 눈은 오히려 총명하므로 남들은 그의 몸 수양이 정()()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 황보증(皇甫曾 당의 문학가. 자는 효상(孝常)) 시의,

 

화창한 바람엔 풀잎이 빼어나고 / 草長光風裏

잠자코 고요한데 꾀꼬리만 우는구나 / 鶯啼靜黙間

, 하손(何遜 양의 문학가. 자는 중언(仲言)) 시의,

 

뵈는 거나 듣는 것이 떠들썩한 일 전혀 없네 / 視聽絶喧嘩

등을 이끌었으니, 이 시는 겨우 두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이 풀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어찌 허다한 전주(箋注)를 내었을까. 제용작가(帝庸作歌)라는 글이 있으나 어찌 허다한 출전을 밝힐 것이야 있으리요.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관관저구(關關雎鳩)란 말은 애초부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시학(詩學)에서의 대성(大成)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佔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1463)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이요, 이름은 중()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망부석(望夫石)에는 천산(千山) 범광원(范光遠)의 시 일절이 쓰여져 있다.

 

성 쌓은 이 어디 가고 보이지를 않는구나 / 不見築城人

다만 정녀 아씨 그 자취 완연쿠나 / 但見貞女迹

묻노라 만리장성 너는 이를 알려니 / 試問萬里城

이 한 조각 돌에 비겨 봄이 어떠할꼬 / 何如一片石

강희때 간행한 전당시(全唐詩)는 모두 1 20권이나 되는 거질이었으니, 마땅히 빠진 것이 없을 것이로되 당 현종(唐玄宗) 어제사신라경덕왕(御製賜新羅景德王)이라는 5 10()의 시가 그 속에 실리지 않았다. 삼국사(三國史),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 봄 2월에 경덕왕은 당 현종이 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의 절강으로부터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조서(詔書)로 말하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능히 예악(禮樂)과 명분(名分)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준다 하고,

넷 벼리 나누어서 밝은 햇빛 나타나고 / 四維分景緯

여러 가지 기상들이 그 속에 포함되네 / 萬象含中樞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 玉帛遍天下

다리 놓고 배를 저어 우리나라 찾아드네 /梯航歸上都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더니 /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 흐르도록 우리 위해 수고했소 / 歲月勤黃圖

망망한 하늘가를 그즈음 누가 알꼬 / 漫漫窮地際

창창한 그 어란이 바다 구석 자리잡아 / 蒼蒼連海隅

갸륵한 이 나라는 명분을 지켰다네 / 興言名義國

산천이 멀다 하여 허수로이 생각하랴 / 豈謂山河殊

우리 사신 갔을 때엔 풍속 교화 전해 있고 / 使去傳風敎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 人來習典謨

옷갓이 정제하니 예식을 알아 하고 / 衣冠知奉禮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 忠信識尊儒

어린 정성 나타나니 하느님이 하감하고 / 誠矣天其鑒

어질도다 그의 덕은 외롭진 않으리라 / 賢哉德不孤

깃발 안고 함께 일어 인민을 기르리니 / 擁旄同作牧

아름다운 이 선물은 생추에 비할쏘냐 / 厚貺比生蒭

님이 가진 푸른 뜻을 더 한층 굳게 하여 / 益重靑靑志

바람 서리 치더라도 어디까지 변치 마오 / 風霜恒不渝

라고 하였다.”

한다. ()의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관반(館伴)으로 있던 학사(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 휘종 황제(徽宗皇帝) 에게 올렸는데 이내 양부(兩府)와 모든 학사들에게 보이고, 황제는 또,

 

이 진봉시랑(進封侍郞)이 올린 시는 당 명황(唐明皇)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이야.”

하고 가탄하여 마지않았다. 이 시가 이미 중국에 들어가서 도군(道君 () 휘종이 자칭한 별호)의 예상(睿賞)을 겪었으나, 후세 사람이 당시(唐詩)를 엮는 이는 모두 이를 수록하지 않았음을 보아서, 비로소 옛날의 잃어버린 글은 듣고 본 것으로서만이 다할 바가 못 되고, 도리어 해외 편방(偏邦)의 선비가 이따금 천유(闡幽)의 업적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 어찌 우리들의 다행이 아니리요.

오중(吳中)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박하고 허탄하며, 경솔하고 변덕이 많으나 대체로 문장이 공교롭고 글씨 그림을 잘하기로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을 미워하여 장사치나 장쾌들을 지목할 때에는, 반드시 항주풍(杭州風)이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오인(吳人)은 교활한 술책이 많았던 까닭이다. 전당(錢塘) 전여성(田汝成) 위항총담(委巷叢談),

 

항주의 풍속이 부박하고도 허탄하여 남을 자랑함에도 가벼이 하려니와, 구차히 나무라기도 잘하여 한 길에서 들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여 보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이상한 물건을 가졌다고 하거나, 또는 아무개의 집에 범상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한 사람이 외치면 뭇 사람이 따라서 남의 의심나는 일에는 스스로 증언하되, 마치 자기의 눈으로 환하게 본 듯이 하여 저 바람처럼 일 때에도 머리가 나타나지 않거니와, 지나는 곳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상말에 항주 바람은 포착하자 없어져 버린다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한 패가 되어 있네.’라고 하였거니와, 또 이르기를, ‘항주 바람은 한 묶음 파라네. 꽃은 쭝긋쭝긋 속은 다 비었다네.’라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습속이 거짓을 만들어서 눈앞의 이익을 맞이하되, 신후(身後)의 일을 돌보지 않음도 일쑤이다. 그리하여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다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기나 생선에 물을 집어 넣으며, 천에 기름과 분을 바르는 따위의 일이 벌써 송() 때부터 그러하였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기 귀주(奇貴州)에게 육비(陸飛)의 글씨와 그림이 공교함을 이야기하였더니, 기는,

 

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벌레입니다.”

한다. 이도 역시 항주풍을 두고 말함이다. 그들 북쪽 사람이 남쪽 선비를 미워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

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

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

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송 휘종(宋徽宗)의 대관(大觀) 연간에 섭몽득(葉夢得)이 고려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옛 규칙에 사신이 대궐 아래에 이른 지 달이 넘지 않아서 곧 돌려보내는 법이었는데, 휘종은 그로 하여금 전시(殿試) 신방(新榜)과 상지(上池 상림원(上林苑)의 못)를 구경시키고자 하여, 드디어 거의 70일을 머물게 되었다. 사신이 자못 몸가짐을 삼가고 행동이 아담하였으므로 섭()이 그를 전송하려 점운관(占雲館)까지 이르러서 하직하였더니, 그의 부사(副使) 한교여(韓皦如)가 섭에게 옥대(玉帶)를 주면서,

 

이것은 애초에 당()의 고물이었으며, 우리 선조부터 대대로 보배로 삼았던 거요.”

하고는, 또 스스로 홀() 위에다가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이별이 장차로다 / 泣涕汍瀾欲別離

이 몸이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此生旡復再來期

다만 보배 띠로 깊은 뜻을 베푸노니 / 謾將寶帶陳深意

이 물건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잊지 마오 / 莫忘思人見物時

라 하였으나, 섭은 고려 사신의 옛 일에 물건을 끌어서 기증하는 예가 없었으므로 굳이 사양하고는 다만 그 시가 비록 박졸(朴拙)하긴 하나, 가히 그의 견권한 뜻은 짐작할 수 있겠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옹정(雍正) 초년에 칙사(敕使) 서산(書山)이 부벽루(浮碧樓)에 시를 썼으되,

 

풍물은 아름다워 옛적과 같건마는 / 風物獨依舊

산천은 어찌하여 부끄럼을 띠었는고 / 山河猶帶羞

하였으니, 서산은 만인(滿人)인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한()을 생각하는 말을 지음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에 상선(商船)이 바람을 만나서 옹진(甕津)에 닿았는데, 배 가운데에는 시에 능통한 자가 있어서 율시 한 편으로 수사(水使)에게 올렸으되,

 

고국에 누구 있어 변한 음률 슬퍼하랴 / 故國誰憐鍾簴變

타향에 이 몸이란 성명이 부끄럽소 / 殊方還愧姓名通

천고에 주의 있어 신정에 빚은 눈물 / 千秋周顗新亭淚

바다에 뿌려본들 마를 줄이 있으랴 / 空灑滄溟水不窮

하였더니, 그 전편(全篇)을 얻어 보지 못함이 유감이려니와 그의 성명도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석림시화(石林詩話) 섭몽득(葉蒙得) ()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고려가 태종조(太宗朝)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더니, 원풍(元豐) 초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매 신종(神宗)이 장성일(張誠一)을 관반(館伴)으로 삼고는, 그에게 다시 조회하는 뜻을 물었더니, 그는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誅求)에 견디지 못한 국왕(國王) 왕휘(王徽)문종(文宗)의 휘 는 늘 화엄경(華嚴經)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 惡業因緣近契丹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 一年朝貢幾多般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 移身忽到中華裏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 / 可惜深宮滴漏殘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수지는 자)의 이른바,

 

나라 안에 창이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

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 자는 넓게 쓰고, () 자는 길게 쓰며, ()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이 일을 들어서 유식한(兪式韓)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식한은 곧 이를 적어서 품속에 간직하되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최간이(崔簡易) 삼일포시(三日浦詩),

 

갠 봉우리 서른 여섯 조개인 양 나비 눈썹 / 晴峰六六斂螺蛾

흰 해오라기 쌍을 지어 맑은 물결 희롱할 제 / 白鳥雙雙弄鏡波

사흘을 바장이곤 님은 다시 못 오시니 / 三日仙遊猶不再

십주 아름다운 곳이 많은 줄을 알았노라 / 十洲佳處始知多

라 하였다. 내 일찍이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심백수(沈伯修)가 이 시를 새겨서 정자 위에 걸었으나 이는 결코 가작은 아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간이(簡易)가 왕감주(王弇州)를 만나러 갔더니 그는 공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어서 수십 명의 서리(書吏)가 번차례로 문서를 아뢰는데, 감주는 교의에 기대고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좌수우응(左酬右應)하되, 결재가 몹시 빠르매 뭇 사람들의 붓이 일제히 움직여서, 잠깐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 10여 명의 청년이 각기 그들의 과작(課作)한 시()와 문(), 또는 소품(小品)서종(書種) 등을 바치면 감주는 곧 붉은 먹으로써 비점(批點)을 치며 빨리 넘기는 손에는 붓이 멈춰지지 않았다. 간이는 이를 보고 크게 경복(驚服)하여 시자(侍者)더러, ‘노야께서는 전에도 늘 저러시고 계셨던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마침 자리가 조용하여 조금 한가하신 편입니다. 노야께서는 전일에 벌써 시 1만 수()를 읊었으며 글 천 권을 지으셨답니다.’ 한다. 간이는 한참 잠자코 풀이 죽어 소매 속에 간직하였던 자기의 글을 내어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글짓기에 뜻을 둔 분임은 알 수 있겠으나 다만 글 읽은 게 많지 못하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이제 돌아가서 창려(昌黎)의 글 중에서 획린해(獲麟解) 5백 번만 읽고 나면 마땅히 글 짓는 혜경(蹊逕)을 알 것이오.’ 하였다. 간이가 크게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감주를 만났던 일을 깊이 숨기고는 글쓸 때에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기괴한 글을 썼으니, 이는 이우린(李于鱗 () 문학가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이것으로써 그를 한 번 누르려던 것이다.”

허균(許筠)이 주 태사(朱太史) 지번(之蕃)을 접대할 때에 주()에게,

 

일찍이 감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는,

 

일찍이 계사년(1593) 봄에 태창(太蒼 강소성에 있는 지명)에 가서 감주에게 배움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그때에 남사구(南司寇)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얼굴은 중인(中人)에 비하여 지나침이 없으나, 눈빛이 별 같고 서재를 화원(花園)에 쌓고 문도를 모아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데, 감주는 날마다 56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구라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시비(侍婢)로 하여금 음악으로 아뢰게 하면서 먹을 갈며 종이를 펴는 것이 마치 풍운과 귀신이 이는 듯이 빠릅니다.”

한다. 그는 또,

 

그러면 감주도 누구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던가요.”

한즉, 주는,

 

공이 평생에 두려워하고 심복하는 이는 오직 창명(滄溟 이반룡의 호) 한 분이 있을 뿐이니, 그는 매양 글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우린(李于麟) 진관시(秦關詩),

푸른 용이 멀리 걸리니 진천에 비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 말이 길이 우니 한원에는 바람 이네 / 石馬長嘶漢苑風

를 높은 목소리로 읊었으니 그는 어찌 두려운 이가 없으리요.”

하고 답하였다.

심분(沈汾 남당(南唐) 때의 문학가)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빈공(賓貢) 진사(進士) 김가기(金可紀 신라 때의 문학가)가 신선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장효표(章孝標)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라는 시에,

 

당나라에 과거 하여 말소리도 닮았더니 / 登唐科第語唐音

해돋이를 바라보곤 고국 생각 간절하다네 / 望日初生憶故林

일엽편주 바람 일 제 고래 등에 나는 듯이 / 風高一葉飛魚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삼신산이 솟아나네 / 湖淨三山出海心

라 하였으니, 김가기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온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런데 속신선전에는,

 

가기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고 있더니, 그 뒤 3년 만에 뱃길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도복(道服)을 입고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더니, ()의 대중(大中) 11(857) 12월에 별안간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이 옥황(玉皇)님의 조서를 받자와 명년 2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이를 이상히 여겨서 궁녀(宮女)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하사하고, 또 중사(中使) 두 사람을 보내어 가까이 모시게 하였더니, 그날에 이르러 과연 채색 구름과 난새학새와 저퉁소와 금석과 깃일산과 깃발이 공중에 가득하더니, 그는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 조사(朝士)나 서민(庶民)을 나눌 것 없이 구경하는 이가 산골짜기에 모여서 누구든지 우러러 절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고, 한무외(韓无畏) 전도록(傳道錄)에는, ,

 

김가기가 최승우(崔承祐)와 중 자혜(慈惠)와 더불어 신원지(申元之)를 좇아서 도술(道術)을 배우더니, 종리 장군(鍾離將軍)과 지선(地仙) 2백의 무리를 만났다.”

고 일렀으나, 이는 아마 부회(傅會)한 이야기인 듯싶다.

나의 벗 나걸(羅杰) 중흥(仲興 나걸의 자)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다. 그는 역리(易理)에 깊고 평생에 종(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여 휴지 한 장이나 편지 한 쪽을 얻게 되면, 언뜻 종이 뒷장에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때로는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붓을 움직여 종이 밖에까지 뻗어서,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하는 까닭에 만일 문밖에 중흥의 나막신 소리가 나면 반드시 먼저 연구(硯具)를 감춘 뒤에 나가서 맞이하고, 중흥이 방에 들어오자 반드시 먼저 좌우(左右)를 살펴서 종이와 붓을 찾아도 눈앞에 뜨이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된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지난 병신년(1776) 동짓달에 그는 신 서장(申書狀) 사운(思運)을 따라서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그때의 정사(正使)도 곧 금성위(錦城尉)로서 선비에 대한 대우가 높아서, 그에게 아무런 검속을 가하지 않고 부채와 환약을 공급하기도 하려니와, 자주 역관에게 타일러서 그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중흥의 천성이 몹시 진솔하므로 이르는 곳마다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껏 유람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중국의 이름 높은 선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그가 연경 길을 떠날 때에 내가 송도(松都)까지 전송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의 처자를 태우고는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茂州)에 있다) 속으로 들어간 지 이제 벌써 4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상자 속에 두었던 친구들의 서찰과 시문을 찾아서 다시 간직하려다가 중흥이 옛날에 쓴 시를 발견하였는데 행초(行草)로 쓴 것이 자못 찬란하였다. 곧 행탁(行槖)에 집어넣었던 것을 이에 기 귀주(奇貴州)에게 내어 보였더니 기는,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그의 격력(格力)은 흡사 노두(老杜 두보를 높인 말)와 같아.”

하고는 크게 칭상(稱賞)하였다. 그의 우성(偶成),

 

산 사립문 비었는데 옷갓을 다 버리고 / 山扉寥廓棄冠巾

이 몸이 늙어갈수록 한가한 일뿐이라네 /老去漸能幽事親

빈 뜰에 홀로 앉으니 햇빛만 고요코야 / 階除留對日華靜

공중에 지나는 구름 한 조각 또 한 조각 / 空外翻過雲片新

꾀꼬리 어디서 오자 푸른 숲에 울어 있고 / 黃鳥忽來啼綠樹

아롱진 꽃 수없이 청춘을 수놓는다 / 斑花旡數度靑春

어느 것 한 물건이 내 뜻을 새오리요 / 知旡一物違吾意

하느님 길러 주시는 그 은덕을 저버리랴 / 不負皇天長育辰

하늘가의 금서산은 산 밖에 또 산이고 / 天外錦西山復山

요즈음 집을 지니 한가함이 늘상이라 / 近來卜宅不離閒

외로운 봉우리 갠 바위 공중에 비겼구나 / 孤峰晴石依空翠

벼랑 길 깊숙한 꽃 점점이 아롱졌네 / 側徑幽花點細斑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 鳥避誤疑沾雨過

꿀벌은 너도 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 蜂窺爭占飫香還

흥겨운 그날 그날 청려장을 짚고 일어 / 興長日日扶黎杖

보고 읊고 읊고 보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一望一吟開旅顔

흑치 장군(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전장터서 그 동쪽에 자리 잡아 / 戰經黑齒郡之東

타향살이 몇 해런고 일일마다 다 잘 아네 / 久住殊方事盡通

깊은 산 새벽 구름 골짜기에 잠겨 있고 / 峽曉雲移幽洞翠

시냇가 저녁놀은 옛 성에 붉었구나 / 澗曛日隱古城紅

늦게 일고 일찍 잠도 멋대로 하려니와 / 晩興早寢從他好

짧은 노래 긴 읊음이 그 맛이 무궁하구나 / 短咏長吟不自窮

다만 지체하여 흥취마저 없다 하면 / 若道淹留旡逸興

나그네 이 시름을 어느 때나 씻으리요 / 何時得豁旅愁空

라고 하였고, 또 그의 불매(不寐)에는,

 

밤 들어 산 구름은 보암직도 한져이고 / 入夜喜看連峽雲

먼 허공에 붉은 빛이 어지러이 떠오르네 / 遙空漸改赤紛紛

처마를 향해 앉자 새 소리도 고요하곤 / 對簷獨坐息喧雀

베개 괴고 잠깐 졸매 모기들이 모여드네 / 支枕乍眠還聚蚊

산 나무 시냇 모래 부질없이 헤어 볼까 / 峰樹溪沙漫欲數

남기성과 북두성은 저절로 무늬로다 / 南箕北斗自成文

시름이 병이 된들 무엇이 해로우랴 / 未憐愁劇添新病

아름다운 시를 낳아 비단에 수놓은 듯 / 剩得詩如刺繡紋

이라 하였고,  오침(午枕)에는,

 

낮 졸음에 잠겼더니 날씨가 찌는 듯이 / 昏昏午睡困炎蒸

모든 일에 게을러서 하는 수가 없구나 / 萬事疎慵著不能

책권을 펴 두니 엿보는 건 제비이고 / 未卷牀書窺紫燕

벼루에 먹물 고여 파리를 배불리네 / 常餘硯墨飽靑蠅

길 지나던 손님들이 부질없이 찾아오곤 / 客過小徑虛相問

밭 이랑이 거치니 아내마저 밉구나 / 妻對荒畦久欲憎

맑은 빛이 별안간에 달돋이를 보고서는 / 忽得淸光看月出

붉은 해가 솟는가봐 그릇되이 의심코녀 / 錯疑赫日碾空昇

라고 하였다.

귀주(貴州)는 이에 대하여 비평하되,

 

실로 명구(名句)가 많긴 하나 이따금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 음운(音韻)이 중국의 것과 같지 않으므로 가끔 음률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박충(朴充)과 김이어(金夷魚)는 모두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에 들어가 빈공(賓貢)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당 장교(張喬 () 소정 때의 문학가) 송김이어봉사귀본국(送金夷魚奉使歸本國)이라는 시(),

 

바다를 건너와서 선적(빈공과의 학적(學籍))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고향에 돌아갈 젠 한의(중국의 문물(文物))를 갖추었네 / 還家備漢儀

라 하였고, 장교는 또 송박충시어귀해동(送朴充侍御歸海東)이라는 시에,

 

하늘가에 떠나온 지 이제 벌써 스물 네 해 / 天涯離二紀

대궐에 드나들어 세 임금을 섬겼구나 / 闕下歷三朝

라고 하였더니, 중국의 인사들이 나와 처음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항해(航海)의 노정과 어느 곳에서 상륙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줄곧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부터 산해관을 들어 연경에 닿았다고 답하면 그들은 혹시 믿지 않은 이가 있어서,

 

바다에 건너와서 선적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라는 글귀를 외어 고증(考證)을 삼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저 먼 바다 밖에 있는 유구(琉球)나 구라(毆邏 구라파)와 같은 나라인 줄로 아는 모양인즉 중국 사람들이 가끔 무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무관(李懋官)이 묵장(墨莊)을 찾았을 때에 반추루(潘秋樓)에게 시를 청했더니, 묵장은 한림서길사(韓林庶吉士) 이정원(李晶元)이니 촉()의 금주(錦州) 사람이요, 추루는 반정균의 호이다. (),

 

내 앞날에 시를 쓸 때 제법 생각을 허비하여 몹시 곤작(困作)이었기 때문에 시가 많지 못함을 한했더니, 요즈음 운철소(惲鐵簫 ()의 문학가)의 한류(寒柳)를 읊은 책자(冊子)를 읽은즉, 왕추사(王秋史 () 문학가 왕평(王苹). 추사는 자)가 그 뒤에다 네 편의 시를 썼으며, 이 버들은 곧 명() 은 상국(殷相國 미상)의 통악원(通樂園) 옛 나무였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되,

서러운 이내 심사 화공에다 얘기할까 / 愁心都付畫工論

애처로운 긴 가지가 갯마을이 꿈에 드네 / 凄絶長條夢水邨

바다 한 편 묵은 정자 명사들은 흩어지고 / 海右亭荒名士散

하늘가 지는 잎은 옛 동산만 남았다네 / 天涯木落廢園存

반만 남은 지새는 달 봄 두고 이별할 제 / 半規殘月春留別

석양 빛 어제대로 저녁 넋을 거두었네 / 一例斜陽暮斂魂

예순 해를 읽어 오던 곱게 꾸민 그 책들을 / 六十年來看粉本

먹 향기 종이 빛깔 티끌 속에 침침할 뿐 / 墨香牋色又塵昏

그 둘째는,

슬슬 동풍 고루 불어 씻어 간 곳 새로운데 / 看遍東風窣地新

잠긴 가지 나는 가지 모두가 정이 얽혀 / 蘸波吹絮摠情塵

푸른 잎 매미 울던 그곳이 그리웁고 / 可憐碧葉吟蟬地

붉은 난간 말 매던 이 찾을 길 전혀 없네 / 不見紅欄係馬人

낡은 다락 그림자에 늙은 두보 슬퍼했고 / 衰影驛樓傷老杜

시름 어린 이 마음에 털보 그대 추억되오 / 離悰門巷憶髯秦

자주(自注) : 진관사(秦關詞)에 이르기를, “꽃 밑에는 거듭 문이요, 버들 가에는 깊은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작화산 저 기슭에 우뚝 섰는 가지 밖에 / 鵲華山麓髡枝外

맑은 호수 가에 앉아 수건 씻는 이만 뵈네 / 只有明湖冷濯巾

그 셋째는,

화가나 시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 畫人吟子一時稀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네 / 減盡金城翠十圍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문 눈 속 비껴 섰고 /緣岸臥枝欹暮雪

어둔 빛이 스민 다락 겨울 해를 띠었구나 / 入樓暝色帶冬暉

떨어진 잎 숨 죽인 채 소리도 적거니와 / 靜中黃葉旡多響

아득한 까치마저 두어 점이 날아가네 / 遠處昏鴉數點歸

오히려 진흙 젖은 부질없는 한이 있어 / 猶有沾泥閒恨在

다시금 봄이 온단들 한목 날지나 말아다오(버들꽃을 말한다) / 逢春莫更作團飛

그 넷째는,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초라한 두 나무에 들 서리 자욱하네 / 兩株憔悴野霜濃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톱이 남아 있고 / 前朝臺榭沙痕在

늙을 무렵 변방살이 숲 그늘이 층층코녀 / 晩歲關河樹影重

우연히 선비 위해 푸른 눈을 지어보나 / 偶爲士流靑眼放

흡사 기생처럼 흰 머리로 서로 만나 / 恰如女妓白頭逢

오동꽃 떨어지곤 산 생강이 늙다 한들 / 桐花零落山薑老

왕랑의 아름다운 얼굴 뉘라서 알아볼까나 / 誰識王郞濯濯容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이에서도 한인(漢人)들이 접하는 것마다 감흥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형산(亨山) 제공(諸公)에게 보였더니, 모두 슬픈 빛으로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이 어사(御史)로 순행하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밤에 본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열람하다가,

 

제말(諸沫)은 만력(萬曆) 계사(1593) 정월 아무 날에 도임(到任)하여 4월 아무 날에 파귀(罷歸)하였다.”

라는 말을 발견하고, 그는 우리나라에 제()의 성()을 지닌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자못 괴이하게 여겨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

 

중국 강()() 사이에 제씨(諸氏)가 살고 있으니, 제말의 조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제말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서 그가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니, 이름이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높았다오.”

라고 답하였다 한다. 이 일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의 시문집) 중에 실려 있다. 약천과 같은 박식으로도 오히려 백 년 이내인 제말의 사적을 알지 못하였는즉, 그가 미천한 계층의 출신인 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록 공을 세움이 이렇다 했더라도 이름이 그만 묻혔으니, 어찌 그 억울함이 원혼이 되지 않았겠는가.

성주에 살고 있던 정석유(鄭錫儒)가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과체(科體)의 시문(詩文))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하니, 그 집 뒤에는 매죽당(梅竹堂)이 있고 당 앞에는 지이헌(支頤軒)이 있었다. 하루는 정()이 지이헌 속에서 홀로 거니는데 때마침 달이 몹시 밝았다. 별안간,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붉은 도포(道袍) 입은 이가 대밭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 고을 옛 목사(牧使) 제말이다. 나는 본시 고성현(固城縣)에 살던 백성으로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쳤으매, 조정(朝廷)에서 특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저 웅해(熊海)작영(斫營)정진(鼎津) 등지에서 왜적을 맞으면 깨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당시의 격문(檄文)이 없어지고 역사가 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정기룡(鄭起龍) 같은 여러 사람은 모두 나의 비장(裨將)이었다.”

하고는, 이내 허리에 찼던 보검(寶劍)을 뽑으면서,

 

이 칼로써 일찍이 왜장(倭將) 몇 놈을 베었다.”

한다. 그는 이마 위에 불꽃이 펄펄 이는 듯하고 성기고 뻣뻣한 수염이 움직이면서 시를 읊었다.

 

머나먼 산 길에선 구름과 함께 예고 / 山長雲共去

높디높은 하늘에는 달과 함께 외롭네 / 天逈月同孤

그는 또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칠원(漆原 경남 창원)에 있으나, 자손이 없어서 이제껏 묵고 있다.”

하고는, 표연히 읍하고 물러가서 다시 대숲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밝은 뒤에 함께 그 일을 이야기한즉, 그들도 평일에 비록 선생안(先生案)에 제말이라는 이가 있었으나, ()도 쓰여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였을 뿐, 그의 공렬(功烈)이 이렇게 갸륵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별안간 알게 되어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석유를 불러 상세히 물은 뒤에 바야흐로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마침 벼슬이 갈렸으므로 여의치 못하고, 다만 칠원에 통첩하여 그의 무덤을 수축하고 묘지기 두 호()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칠원의 원으로 있던 어사적(魚史迪)이 낮에 졸다가 꿈에 한 관인(官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이 동헌에서 몇 리쯤 되는 아무 마을 아무 좌향(坐向)에 있다. 감사가 마땅히 무덤을 수리하라 명령하실 테니, 그대는 유의할지어다.”

한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겼더니, 그날 저녁에 통첩이 이르렀으므로 어사적이 드디어 그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한다. 제말은 실로 시골뜨기여서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이런 갸륵한 공적이 있었다 해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하고 본즉, 죽어서 그 억울한 영혼이 맺히어 흩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을 뿐더러, 그는 또 능히 시를 읊을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 평사(辛評事) 경연(慶衍)이 나이 열두 살에 배천(白川)에서 서울로 올라갈 제, 길에서 명()의 조사(詔使)를 만났다. 때마침 역놈이 신()이 탔던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사정이 몹시 궁박하였다. 그는 도보로 조사의 점심참에 닿아 하소연하였더니, 조사는 그의 얼굴이 백옥처럼 맑음을 보고 사랑하여, 길가에 서 있는 장승(長丞)을 가리키면서,

 

그대 능히 이를 두고 시를 읊는다면 마땅히 말을 주리라.”

하여, 신이 운자(韻字)를 청하니, 조사가 운자를 내어 주었다. 신은 곧 대답하기를,

 

초 패왕(항적(項籍))의 혼령인 양 천추에 남아 있네 / 楚伯千秋尙有靈

오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 渡江旡面只存形

당년에 한스러운 일은 음릉 길을 잃은 것이 / 當年恨失陰陵道

언제나 길에 서서 앞잡이 노릇 하렵니다 / 長向行人指去程

하매, 조사가 크게 놀라서 탄식하여 칭상하고 문방(文房)의 여러 보물을 주었다 한다. 이 글이 무명씨(無名氏)의 작으로 명시선(明詩選 () 이반룡(李攀龍) )에 실렸으며, 그는 광해(光海) 때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 평사에 이르렀을 때에, 서쪽 변새에 일이 있어서 청천강(晴川江)을 아홉 번 건넜으며 이내 관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령이 여러 번 나타났다. 그 뒤 수십 년에 그의 벗 아무개가 그를 관서(關西) 도중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의 자를 부르며 옛 일을 이야기함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벗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자손이 심히 가난한데 유물이 있는 것을 미처 전하지 못했네. 보도(寶刀)와 옥관자 한 쌍이 우리집 들보 위에 얹혀 있어도 집 권속들이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말을 전해 주소. 이 두 가지 물건을 판다면 많은 값을 받을 것이네.”

하매, 그의 벗은 크게 이상히 여겨 돌아오자 곧 그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함께 그 집을 들춰서, 마침내 보도와 옥관자를 발견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다가 매 10 5리 마다 나무로 장군과 같이 깎은 등선을 세우고 지명과 이정을 기록하여 두는데, 이를 보통 장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중국의 장정(長亭)단정(短亭)과 같으므로, 우리나라 시민들은 흔히들 장정을 빌려 쓰면서 혹은 중국의 이정표도 우리나라 장승과 같은 줄만 알고, 또는 장정을 정장(亭長)으로 잘못 알기도 하니 심히 고루한 일이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 보니, 길에는 장정표를 세우고 아무 땅이라 쓰고는, 그 좌우에는 단정표를 세우며, 동으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요, 서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라고 써 있었다. 이제 열하에 오는데 장정 밖에는 장정에 흔히들 신() 자를 썼는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신장(辛丈) 돈복(敦復)씨가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중종(中宗) 때 남주(南趎 조선 때 학자. 자는 계응(季應))가 열아홉 살에 급제(及第)하여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천에 올랐으며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매일 아침 글방 선생에게 글을 배우는데 결석할 때가 많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그의 뒤를 밟은즉, 도중에 지레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정사(精舍)가 있는데 주인의 행동이 맑고 훤하여 속기(俗氣)가 없었다. 주가 그의 앞에 절하고 나아가서 글을 강론받고 반드시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집 사람들이 물으면 문득 괴변으로 대답하더니, 그 뒤 신선의 수련술(修鍊術)을 행하였고 그가 급제하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곡성현(谷城縣)에 귀양갔고, 이내 그곳에서 집을 정하고 살았다. 하루는 종을 시켜 편지를 갖고 지리산(智異山)청학동(靑鶴洞)에 들여보냈는데, 오채가 영롱한 집이 있고 극히 정려(精麗)하며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운관(雲冠)과 자의(紫衣), 또 하나는 늙은 중이었다. 둘이 종일토록 바둑만 두기에 그 종은 하루를 묵고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었다. 종이 애초에 2월에 떠나 산에 들어갈 제는 초목이 바야흐로 무성하던 것이, 산을 나올 때에는 들판에서 익은 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으니 곧 9월 초순이다. 남주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다. 널을 들어보니 유달리 가벼운지라, 집안 사람들이 관을 열고 본즉 빈 것이었고 그 안에 시가 쓰였는데,

창해에 떠난 배는 찾을 곳이 전혀 없고 / 滄海難尋舟去跡

청산에 나는 학은 흔적조차 뵈지 않네 / 靑山不見鶴飛痕

라 하였다. 그 마을 앞에 김을 매던 농부가 공중에서 흘러내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쳐다본즉, 남주가 말을 타고 둥실 떠서 흰 구름 사이로 올랐다 한다. 지금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 진사(進士) 남대유(南大有)가 그의 방손(傍孫)이라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 木石生妖變

하였지마는, ()의 말년에 소주(蘇州)에 살고 있던 중 의사(義師)는 나무로 새긴 부처를 만나면, 문득 한 군데 모아서 불살라 버렸다 한다. 우리나라 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에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큰 부처가 있어서 극히 영검스러우므로, 원근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숭배해서 향화(香火)가 심히 성하였다. 나옹(懶翁 이성계(李成桂)의 스승으로 있던 중)이 처음 주지(住持)가 되어 이 절에 도임할 제, 뭇 중들에게 명하여 그 부처를 끌어 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나옹은 듣지 않고 중 백여 명을 시켜 큰 동아줄로써 동여매라 하고 밀쳐당겼으나 털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옹이 노하여 스스로 한 쪽 손으로 밀어 곧 넘어뜨리고 절 밖에 이끌어 내어 장작을 쌓고 태우니, 더러운 냄새가 견디지 못할 만큼 풍겼다. 대개 큰 뱀이 부처 뱃속에 서리어 있던 것으로 그런 뒤에는 오래도록 재환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나무가 오랫동안 묵으면 접신(接神)이 되므로 허물어진 절간의 나무 부처에 많이들 이상한 요물이 붙는 법이니, ,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오늘 저 반선(班禪)이 우리에게 준 부처는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될뿐더러, 아마 나무로 새긴 데다 금을 입힌 것인즉 이에는 어찌 요물이 붙지 않았을 줄 알리요. 창졸간에 이 물건을 받긴 했으나, 일행의 상하가 모두 꿀 단지에 손 빠뜨린 듯이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다. 내가 밤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 구처하겠습니까.”

하고 정사께 물었더니, 정사는,

 

벌써 수역(首譯)을 시켜 작은 궤짝을 만들어라 하였네.”

한다. 나는,

 

잘 하셨소이다.”

하였더니 정사는,

 

뭐가 잘했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이는 강에 띄우고자 하는 의미뿐이겠죠.”

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사가 웃기에 나도 웃었다. 대저 이 부처를 길가 사찰에다 내어버린다면 중국의 노염을 입을까 두렵고 또 이를 이끌고 입국한다면 마땅히 물의(物議)를 일으킬 테니, 저들과 우리나라의 국경에서 순류(順流)에 띄워 바다에 추방하는 수밖에 없고 보니, 띄울 곳은 압록강(鴨綠江)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은 평생에 호사로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에게 나아갔더니, 평성이 때마침 수상(首相)이 되어서 별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시비(侍婢) 수십 명을 시켜 호음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니, 호음이 겹문을 지나 들어오는데 곳곳이 아롱진 누각이요, 구비구비 붉은 난간이다. 평성은 못 위 반송(盤松) 그늘 밑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시비들이 모두 비단 치마를 질질 끌고 번갈아가면서 진귀한 음식상을 올리고, 또 기생 몇 패가 풍악을 하면서 날이 다하도록 기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호음이 공사(公事)에 대한 결재를 청했으나 평성은,

 

이 늙은 사람은 애초에 무인(武人)이라, 다행히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만나 몸이 이 자리에 이르렀으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세(盛世)의 은혜를 보답할 따름이므로 그대가 가진 공사는 돌아가서 본조(本曹)의 판서(判書)에게 물어보게.”

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음은 망연히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평생에 연모하였으므로 늙을 때까지 호사를 계속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6세조(世祖) 금계군(錦溪君)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

 

호음이 평성의 이 일을 연모하여 호백구(狐白裘)를 훔치는 수단에 익숙하니, 그가 일찍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정양사(正陽寺)에서 묵는데 순금 부처를 훔쳐서 드디어 크게 치부(致富)하더니, 나이 늙으매 그 일을 심히 참회하여,

정양사 깊은 곳 향불 태던 그날 밤에 / 正陽寺裏燒香夜

40년 그릇된 일을 거원인 양 깨우쳤네 /蘧瑗方知四十非

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내 일찍이 정양사에 놀 때 과연 바람벽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 이제 삼사(三使)들의 선사받은 금부처는 모두 셋인즉 수천 냥의 돈을 얻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일 호음으로 하여금 이 경우를 만나게 하였으면 반드시 저 정양사에서만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리라. 내 부사와 이 이야기를 하고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는 또,

 

이제 이 불상이 불행히도 나무 몸뚱이인지라 멀찍이 물리쳐 버렸지만, 만일 순금으로 된 몸이었더라면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논()도 아마 좀 생각할 점이 있겠지요.”

하고는, 서로들 허리를 잡았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말 머리엔 굴레를 씌우고 소 코엔 코뚜레 꿴다.”

하였으니, 소의 코 꿰는 일은 옛날부터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는 난 지 겨우 7, 8삭이 되면 벌써 코를 꿴다. 왕형공(王荊公)의 시에,

 

미련한 저 소에다 코를 꿰지 않을 양이면 / 牛若不穿鼻

맷돌 방아 찧으려도 곧잘 되지 않으리라 / 豈肯推入磨

하였으니, 맷돌 방아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수레 끌기나 밭 갈기야 어떠하겠는가. 이제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열하에 이르기까지 호()마다 기르는 소가 78() 이하가 없고, 혹은 340두에 이른다. 그런데 밭을 가나 수레를 이끄나 모두 뿔을 얽매어서 부리고, 하나도 코를 꿴 놈은 없었으며, 소는 모두 유달리 크되 집집마다 방목하였으며, 작은 아이 하나가 수십 마리를 몰 수 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뿔도 얽매지 않았으니, 중국 사람들의 소치는 기술이 비록 우리에 미칠 바 아니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는 것은 역시 고금의 다름이 있는가 싶다. 그리고 진() 두예(杜預 ()의 학자. 자는 원개(元凱))의 상소(上疏) 중에도,

 

전목(典牧)의 종우(種牛) 4 5천여 두나 있으나, 수레도 이끌지 않을뿐더러 늙을 때까지도 코를 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서도 옛날에는 부리는 소는 모두 코를 꿰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강녀묘(姜女廟)의 주련(柱聯)은 문 승상(文承相)이 쓴 것이 가장 비장(悲壯)하다. 그 글에,

 

강녀가 죽지 않았고나 천 년 묵은 조각돌이 정렬하고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猶貞

진황은 어디로 갔는고 만리성엔 원망만 쌓였구녀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라 하였는데, 글씨도 몹시 기굴(奇崛)하고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가 쓴 시는 역시 전려(典麗)하다.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 栢葉從來常自苦

매화꽃은 곱잖아도 향기로 한몫 보네 / 梅花終古不爲姸

그 글씨는 신화(神化)한 듯싶고, 또 건륭(乾隆) 을해년(1755) 동짓달에 황삼자(皇三子) 등금거사(藤琴居士)가 쓴 시는 또한 산한(酸寒)하다.

 

늙은 솔 허물어진 담장 옛 사당이 보이고녀 / 松老頹垣見古祠

임 위해 죽은 강녀 그 일이 슬프구나 / 崩城姜女事堪悲

집 방춧돌 바라다가 기절을 이루고는 / 藁砧望斷成奇節

환패만 남았으니 옛 자태를 보는 듯이 / 環佩空餘識舊姿

돌에 뿌린 눈물 자취 그날의 한이러냐 / 石洒淚痕當日恨

예는 물 구슬퍼서 이내 생각 자아내네 / 水流鳴咽後人思

정자 기슭 옷을 털매 쓸쓸하기 짝이 없어 / 振衣亭畔凄涼甚

임의 그 어린 눈동자 이제 더욱 그리워라 / 猶憶凝眸睩曼滋

그 글씨는 더욱 민묘(敏妙)하다. 그리고 방류요수(芳流遼水)는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어필이요, 경절처풍(勁節凄風)은 과친왕의 글씨였고 망부석(望夫石)’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輝)가 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을 토()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파촉(巴蜀)도 역시 관중(關中)이랍니다.”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예양교(豫讓橋)황하(黃河)촉도(蜀道)아미(峨眉)공명사당(孔明祠堂)함곡관(函谷關)민지(澠池)이릉(二陵)맹진(孟津)비간묘(比干墓)금산사(金山寺)초산(焦山)다경루(多景樓)고소대(姑蘇臺)도량산(道場山)호구사(虎口寺)표모묘(漂母墓)탁군(涿郡)백구(白溝)업성(鄴城)담회(覃懷)왕상비(王祥碑)효릉(崤陵)장안(長安)정장공묘(鄭莊公墓)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관용방묘(關龍逄墓)망사대(望思臺)무측천릉(武則天陵)숙종릉(肅宗陵)빈주(邠州)경주(涇州)보타굴(寶陀窟)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장양호(張養浩 ()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감구집(感舊集 왕사진(王士稹) )에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대개 왕이상(王貽上 왕사진. 이상은 호)의 전처(前妻) 추평(鄒平) 장씨(張氏)는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추관(推官) 만종(萬鍾)의 딸이요, 도찰원(都察院)좌도어사(左都御史) 충정공(忠定公) 연등(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년에 선생이 뱃길로 중국을 향하매, 길이 제남(濟南)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장충정(張忠定)이 한 번 보고 곧 기뻐하여 엿새를 만류하고, 선생의 조천록(朝天錄)’ 1권에 서()를 썼다. 이상이 선생을 익숙히 알게 된 것은 대개 그 처가를 통해서이다. 그가 선생의 시를 초록하여 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 바닷가엔 기러기 처음 오고 / 三秋海岸初賓雁

깊은 밤 천문에는 객성 하나 번뜩인다 / 五夜天文一客星

폭군의 모진 손에 돌다리는 끊어졌고 / 橋石已從秦帝斷

은하성 높은 배에 사신 오길 허락했네 / 星槎猶許漢臣通

조각달 오경 깊어 수역의 성 머리에 / 五更殘月水城頭

외로이 역사 읊어 배 닿은 이 누구런고 / 咏史何人獨艤舟

동쪽 바다 향해 서서 돌아갈 길 찾지 않고 / 不向東溟覓歸路

북두성 의지하여 신주(중국의 별칭)를 바라보네 / 還依北斗望神州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그림 새 푸른 주렴 몇 군데나 배 떴던고 / 畫鷁靑簾幾處舟

죽지사 함께 불러 팔 겨르고 지나가니 / 齊唱竹枝聯袂過

성 속에 연월 가득 이곳도 양주(양자강 운화가 통하는 곳)인 듯 / 滿城煙月似揚州

이들은 모두 이상이 이른바, 맑고 완순하여 가히 읊을 만하다는 작품이다. 이상은 당시 해내의 시종(詩宗)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그의 척자(隻字)편언(片言)에 대하여 다반(茶飯)처럼 입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청음의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천고 대절(大節)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학지정(郝志亭) ()이 김숙도(金叔度 김상헌. 숙도는 자)의 몇 편 가작(佳作)을 들었으면 하고 청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저는 애초부터 그의 시를 외는 것이 없고, 다만 이번 걸음에 청음 선생의 6대손(代孫) 이도(履度)의 별장(別章)이 있습니다.”

한즉, 지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 역시 기이한 일이군요.”

하기에, 나는 그 시를 내어 보였다. 지정이 두세 번 읊더니 그 뒤에 이 일을 그의 초록한 용재소사(榕齋小史)중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화산(華山 김이도의 호) 김이도(金履度)는 조선 사신 김청음 상헌의 6세손인데, 그의 봉별연암조경(奉別燕巖朝京) 원고(原稿)에는 부연(赴燕)’으로 된 것을 지정이 조경(朝京)’이라고 고쳤다. 이란 시에,

넓디넓은 저 연산은 사면에 벌여 있고 / 四面燕山濶

높다란 이 장성은 만 리를 뻗쳤구나 / 萬里秦城高

그 중에 말 달리며 가시는 임이시여 / 中有垂鞭者

백발이 성성하시니 먼 길에 수고할사 / 白髮行邁勞

그 둘째다.

경개하신 담헌(홍대용(洪大容)의 호)이요 / 耿介湛軒子

척당할사 연암님을 / 倜儻燕巖叟

사해가 넓건마는 그의 성명 다 알리라 / 海內知姓名

앞 가고 뒤따르니 높은 바람 한 가지라 / 高風屬前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건륭(乾隆) 경자년 5 23일에 화산 김이도는 쓰다.’라고 하였다. 그의 자()는 계근(季謹)이요, 글씨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니 동국(東國)의 문장 기사(奇士)이다. 그의 벗 박연암(朴燕巖)한석호(韓錫祜)와 함께 시주로써 막역의 친구를 삼았더니, 이해 8월에 박연암이 공사(貢使)를 따라 북경에 와서 나와 함께 만나 서로 기뻐하였다. 이에 나는 화산의 증행시(贈行詩) 석 장을 얻어 읽은즉, 그는 사모(四牡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 황화(皇華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의 끼친 뜻을 깊이 지니었다. 나는 그 중 두 마디를 뽑아서 기록하였다.” 원시(原詩)에는, ‘수방지성명(殊方知姓名)’ 고풍계전후(高風繼前後)’라 했던 것을 지정이 수방(殊方) 사해(四海)’, () ()’으로 고쳤다.

지정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암의 족손(族孫) 남수(南壽)의 자는 산여(山如), 호는 금성(錦城)이니, 그는 얼굴이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옥으로 꾸민 갓)과 같다 한다. 그의 증행(贈行),

머리가 세었다고 임은 슬퍼하지 마오 / 莫云頭已白

이 하늘 이 땅이란 잠깐인 듯 가 없어라 / 天地忽無窮

요동성 넓은 들에 필마로 돌아 들면 / 匹馬遼東野

한 번 채찍 휘두르매 만리의 바람 부네 / 一鞭萬里風

라고 하였다.” 금성(錦城)은 우리 관형이므로 남수가 금성 박남수 산여라고 썼던 것을 지정은 그릇 호인줄 알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나라의 고사(高士) 이재성(李在誠) 중존(仲存 이재성의 자)의 호는 지계(芝溪)인데, 연암의 부제(婦弟)이다. 그의 증행(贈行)에는,

압록강 두른 물은 띠처럼 되어 있고 / 鴨綠衣帶水

만 리라 저 장성은 묵어서 가올 것을 원고(原稿)에는 연성(燕城)’이라 되었던 것을 지정이 장성(長城)’이라 고쳤다. / 長城宿舂之

머나먼 이 길 떠나 오가는 나그네여 원고에는 고래경유객(古來經遊客)’이라 되어 있었다. / 悠悠遠行客

역력히 알고파라 묻노니 누구누구 / 歷歷知是誰

라고 하였고, ,

열 해나 지나도록 바위 틈에 숨은 선비 / 十載巖棲客

새벽에 행장 묶어 먼 길을 떠난다니 / 晨裝告遠遊

반생을 글만 읽고 본 적이 없던 것을 / 半生方冊裏

이제야 구경하니 제왕의 거룩한 고을 / 今日帝王州

이라 하였고, ,

뽕나무 활 다북 살은 일찍 품은 뜻이언만 / 宿昔桑蓬志

사슴 떼와 함께 놀아 불우한 지 몇 해런고 / 沈冥鹿豕群

오히려 두 눈 있으니 이 구경이 재미로서 / 猶被雙眼役

헝클어진 백발 시름 잊어나 보올까나 / 可忘白頭紛

라고 하였고, ,

여름 비 끓는 곳에 강물은 부풀고 / 雨熱關河漲

구름은 찌는 듯이 계문 숲이 낮게 뵈네 / 雲蒸薊樹低

청컨대 임이시여 먼 길에 조심하오 / 請君愼行李

임은 떠나 가시거다 부디 평안 하옵소서 원고에는 면전신행역(勉旃愼行役)’이라 되어 있다. / 去矣莫棲棲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석호(韓錫祜) 혜당(惠堂 한석호의 호)과 양상회(梁尙晦) 백후(伯厚 양상회의 자)와 이행작(李行綽) 유재(裕齋 이행작의 자)는 모두 개성(開城)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성은 여씨(麗氏)의 옛 도읍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송경(松京)이라 부른다. 이는 옛 개주(開州)이며 옛 이름은 촉막군(蜀莫郡)이다. 이곳에는 신숭(神嵩 개성(開城)의 진산(鎭山))자하(紫霞 개성의 동명(洞名))의 좋은 경치가 있고, 문인(文人)과 운사(韻士)들은 오히려 을지생(乙支生)정인지(鄭麟趾)가 끼친 풍채를 지녔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널리 먼 나라에까지 미친 보람이었다. 혜당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

우연히 방향 몰라 이 몸을 붙인 곳이 / 偶爾無方住著身

한 하늘 아래건만 바다 동쪽 가이라네 / 一天之下海東濱

가까운 곳 먼 지역을 평등으로 본다 하면 / 如將遠邇看平等

문밖으로 안 나와도 만리 사람 되오리라 / 不出門時萬里人

새벽 달 뫼에 걸려 시냇집 창이 밝고 / 曉月依山磵戶明

목련화 나무 밑에 남은 정서 이끌리네 / 木蓮花下藹餘情

중국의 아름다움 꾀꼬리는 모르고서 / 黃鸝不識中州好

이별이 서러 우냐 소리소리 울더라 / 啼作陽關惜別聲

푸른 하늘 들을 덮어 사면을 둘렀는데 / 靑天蓋野四周環

동남쪽 솟은 뫼는 한점 두점 사라지네 / 漸失東南點點山

요양에 들어서는 무엇이 보이던고 / 行到遼陽何所見

햇바퀴 빙글 굴러 고국 산천 가리키네 / 日輪回指海雲間

만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저어가서 / 常願風漂萬里舟

천하 명루 곳곳마다 두루 올라 보고져라 / 遍登天下有名樓

유유히 필마로써 금대 길 달려 본들 / 悠悠匹馬金臺路

가을 바다 외로운 돛에 설렁임과 어떻더니 / 何似孤帆碧海秋

장성이 무너지자 나라도 그렇건만 / 長城自壞國隨之

도시와 인물이야 갑자기 변탄말가 / 朝市人煙遂不移

공자문 사당에는 돌북이 상기 있어 / 夫子廟庭周石鼓

인간 세상 몇 번이나 석양을 겪었던고 / 人間幾度夕陽時

라고 하였고, 또 그의 춘원세우(春院細雨)에는,

이슬이 방울짐을 오동잎이 먼저 듣고 / 露重梧先聞

우레 소리 가벼우니 새들도 놀라지 않네 / 雷輕鳥不疑

고운 풀 깊어가니 꿈이런가 의심하고 / 嫩草深疑夢

짙어가는 꽃봉오리 흡사히 어린 듯이 / 濃花恰欲痴

검정 개미 섬돌 위에 미끄럼을 타는 듯이 / 玄蟻緣階滑

파랑 벌레 잎을 안아 그 재주 위태롭네 / 靑蟲抱葉危

물 속에 솟아 선 건 쌍무지개 멀리 뵈고 / 水立雙虹遠

연기를 뚫고 가니 외론 새 더디고나 / 煙穿獨鳥遲

시름에 잠긴 채로 홀로 앉은 나그네 / 悄悄孤客坐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깊이 잠겼구나 / 湛湛美人思

라고 하였고, 백후(伯厚)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는,

눈이 닿도록 바라보니 갈 길이 실이라네 / 極目山河路一絲

마음이 얽혔다면 따라갈 수 없단말가 / 心如相約未相隨

떠나려는 이 자리에 한잔 술 거듭 권하니 / 離筵更進一杯酒

때마침 석양이라 양류만 그저 청청 / 楊柳靑靑斜日時

이라 하였고, 이행작(李行綽) 송별(送別)에는,

바닷가에 떠나는 임은 채찍 하나 믿을 뿐 / 濱海行人信一鞭

먼 하늘 유월 철에 빗줄기 길이 달려 / 遼天六月雨長懸

노정을 헤어보니 이에서 삼천 리를 / 計程從此三千里

묻노니 어느 때에 연경에 이를꼬 / 借問幾時可到燕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원시(原詩)를 많이 점화(點化)하였을뿐더러, 그가 이른바 을지생(乙支生)과 정인지(鄭麟趾)의 끼친 바람이라는 말은 더욱 허리를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을지생이란 사람이 없은즉, 이는 아마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이름일 것이다. ()()은 실로 수천 년이나 멀리 떨어진 인물인데, 이제 그들을 나란히 열거하였으니, 이는 아마 을() 수서(隋書)에 나타났고, ()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 까닭으로 특히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기록 중에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명일 내 별안간 길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불(李紱 청 문학가. 자는 거래(巨來)) 목당집(穆堂集)  경인원조조조시(庚寅元朝早朝詩),

 

조선 사람 멀리 천자국에 통래한 지 오래되니 / 朝鮮內屬來王久

의관이 속될망정 괴이할 것 무엇 있나 / 肯怪衣冠太俗生

사모 쓰며 관복 입고 봄 들어서 공 바치니 / 紗帽版袍春入貢

바닷가 해돋이에 태평시절 누리고녀 / 海隅日出最昇平

하였으니, 아침 날 산장(山莊) 밖에 천관(千官)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한즉, 붉은 벙거지에 마제수(馬蹄袖)를 입은 차림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기 짝이 없음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의 의관이야말로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우리를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하니, 아아, 서글프다.

이익재(李益齋)의 자는 중사(仲思), 또 하나의 호는 역옹(櫟翁)이며, ()은 경주(慶州)이고, 나이 15세에 급제에 올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의 수도에 머물 때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동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어서 익재를 불러 부중(府中)에 두고 중국의 명류(名流) 조자앙(趙子昻 ()의 문학가,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자앙은 자)원복초(元復初 원의 문학가 원명선(元明善). 복초는 자) 등과 함께 창수하였으며, 그는 또 서촉(西蜀)에까지 사신으로 간 적도 있거니와, 강남(江南)에도 강향(降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영(題詠)한 작품이 남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그가 동으로 돌아오자, 다섯 임금을 섬겨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자질에 얽혀서 토번(吐蕃)에 귀양살이 갔을 때, 만 리를 달려가서 위문하되 충분(忠憤)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뒤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했더니 나이 81세에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곱고도 밝고 맑아서 우리나라 사람의 궁벽하고 고루한 기습에서 쾌히 탈피하였다. 그의 노상(路上),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난을 읊으면서 / 馬上行吟蜀道難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감숙성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갈 제 / 今朝始復入秦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감숙성에 있는 수명) 막혀 있고 / 碧雲暮隔魚鳧水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감숙성에 있는 산명)이 여기라네 / 紅樹朝連鳥鼠山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 文字賸添千古恨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꼬 / 利名誰博一身閒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 길에서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 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 / 竹杖芒鞋自往還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턱을 격하여 안화사(安和寺)의 옛 터가 있으므로 익재의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가 죽장 망혜로 이 사이에 서성이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려니와 저 촉도(蜀道)진관(秦關)어부(魚鳧)조서(鳥鼠)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은 듯이 멍하였거든, 하물며 나의 이번 걸음은 또 익재가 이르지 못한 곳일까보냐.

() 원풍(元豐) 7(1084)에 경동(京東) 회남(淮南) 고을에 조서를 내려 고려(高麗) 정관(亭館)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밀()() 두 고을에 시소(時騷)가 일어 백성이 도망한 자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소식(蘇軾)이 그곳을 지나다가 제도의 웅장 화려함에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읊었으되,

 

처마 끝 높이 솟아 담장 밖에 나르는 듯 / 簷楹飛舞垣墻外

농가 숲은 쓸쓸하여 도끼 자취 뿐이고나 / 桑柘蕭條斤斧餘

오랑캐의 종으로서 다 내주고 보니 / 盡賜昆耶作奴婢

내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에런고 / 不知償得此人無

하였으며, 동파(東坡)가 고려를 미워함이 이르는 곳마다 이러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강희(康熙)가 세운 33()의 찰원(察院 조선 사신의 내왕을 위해 설치한 숙소)을 보았던들, 그는 또 무어라 하였겠는가.

황산곡(黃山谷 () 문학가 황정견(黃庭堅). 산곡은 호) 차운목보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扇),

 

은 마구리 옥 물리고 깨끗한 고치 종이 / 銀鉤玉唾明繭紙

솔 부채 가벼운 바람 한꺼번에 보내 주네 / 松箑輕涼幷送似

가애롭다 이 부채가 책구루고려의 성() 이름 를 멀리 건너 / 可憐遠度幘溝漊

더위에 알맞음이 내대자(피서립(避暑笠))와 어떠한고 / 適堪今時褦襶子

라 하였고, 

 

옥보다 결백한 문인 기운이 높고 차고 / 文人玉立氣高寒

삼한에 사신 가서 삼신산을 보았다네 / 三韓持節見神山

안기생(중국 신선의 이름)의 불사약을 의당코 얻어다가 / 合得安期不死藥

티끌 속 이내 몸에 옛 껍질을 벗겨 주리 / 使我蟬蛻塵埃間

하였으니, 이제 와서는 고려의 송선(松扇)이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일찍이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의 좌상(座上)에서 반정균(潘庭筠) 차왕추사한류시(次王秋史寒柳詩)를 외었더니 한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한다. 나는 이내,

 

왕추사(王秋史)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풍명재(馮明齋) 병건(秉健),

 

이는 곧 역성(歷城) 왕 진사(王進士)인데, 이름은 평()이요, 자는 추사(秋史)이며, 자호(自號)를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 하였으니, ()의 시에,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는 곧 이를 두고 이른 것이랍니다.”

하고, 능사헌(凌蓑軒 사헌은 능야의 호) (),

 

국조(國朝)의 시인으로서는 많이들 추사를 추앙합니다. 그는 일찍이,

어지런 폭포 속에 나막신 소리 누구던고 / 亂泉聲裏誰通屐

누른 잎 숲 사이에 스스로 글을 쓰네 / 黃葉林間自著書

라는 글귀를 읊었고, 그는 또,

누른 잎 떨어질 제 황소 등에 해 늦었고 / 黃葉下時牛背晩

푸른 뫼 이지러진 곳 술 취한 손님 지나가네 / 靑山缺處酒人行

를 읊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그를 왕황엽(王黃葉)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한다.

고 태사 역생 풍승기(馮乘驥 풍병건. 승기는 자) 등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명성당(鳴盛堂)에서 이야기하다가 도보(道甫 이조 때의 문학가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자)가 쓴 글씨첩 하나를 내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살펴보더니, 이윽고 나에게,

 

이 글씨는 동한(東韓)에 있어서 어떤 등류(等流)에 속합니까.”

한다. 나는 이에 대하여 멍하니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렵기에 다만,

 

우연히 행장(行裝)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스스로 옛날 조자(趙資)의 말처럼 슬쩍 피해버렸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주이준(朱彝尊) ) 동국사략(東國史略 저자 미상)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열전(列傳)의 말을 실었는데, 그 글에,

 

고려 세자(世子)가 원()에 들어가서 원제(元帝)를 편전(便殿)에서 만날 제, 그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세자는 선비 정가신(鄭可臣 고려 때의 정치가. 자는 헌지(獻之))민지(閔漬 고려 때의 문학가. 자는 용연(龍涎))가 따라왔으며 시위하는 여가를 타서 그들에게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질문합니다.’ 하였더니, 원제가 기뻐하여 세자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하고 자리를 주고서, ‘본국(本國)의 세대(世代)가 서로 전해온 순서와 치란(治亂)의 자취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하라.’ 하여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들었다. 그 뒤 공경에게 명하여 교지(交趾 월남(越南))를 치려고 할 때 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론하니, 그 진술한 것이 뜻에 맞기에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주고, 민지에겐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였다.”

하고, 열전(列傳)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제(元帝)가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 볼 때 가신이 뒤를 따랐더니, 원제가 명하여 앉게 하고 이내 명하여, ‘갓을 벗기되 수재(秀才)는 머리를 묶을 필요가 없으니 의당 건()을 써야 될 것이야.’ 하였다. 그리고 어안(御案)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둥글면서도 조금 뾰죽하고 빛은 깨끗하며, 높이는 한 자 다섯 치며, 그 안은 술 댓 말쯤 수용될 만하다. 이는 마하발국(摩訶鉢國 미상)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라 한다. 원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키면서 이내 세자와 종신(從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가신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였다. 가신이 시를 드리되,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봄이리다 / 中藏不老春

원컨대 천세 수를 임이 먼저 누리시고 / 願將千歲壽

남은 은택 나누어다 해동에도 미치소서 / 醺及海東人

라 하니, 원제가 기뻐하여 자기의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D-001]우양도 …… 썼더라는군요 : 여기서 우양도 …… 것이니 맹자 만장 상(萬章上), ‘우리는 …… 지키자 맹자 이루 상(離婁上), ‘보물도 …… 생기니 중용 26, ‘이것이 …… 보냐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D-002]하였다. : ‘그 뒤에 연경 …… 하였다 수택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여러 본에 의하여 대문(大文)으로 하였다.

[D-003]우회암(尤悔菴) () : 청의 문학가. 회암은 호요, 동은 이름. 자는 전성(展成).

[D-004]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 : 외국의 지방 풍속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읊은 것.

[D-005]비경(飛瓊) : 중국 여도사의 이름. 여기서는 허초희를 그에게 비한 것이다.

[D-006]나는 …… 것을 : 허경번은 본시 여도사 번 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하여서 지은 것인데,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풍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그릇된 것을 변명하였다.

[D-007]목사(牧使) 아무 : 김려(金鑪)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에는 이난(李灤)이라 하였다.

[D-008]삼량(三良) : 어진 세 사람. 춘추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매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중행(仲行)겸호(鎌虎)를 가리킨 말이다.

[D-009]두 아들 …… 잔폭하오 : 전국 때 위 선공(衛宣公)의 두 아들 급()과 수()가 계모의 흉계에 의하여 배에서 피살된 일을 말한 것. 左傳 桓公 16

[D-010]모수(毛遂) : 전국 때 조()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문하에 있던 변사(辯士).

[D-011]분양(汾陽) : 당의 정치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자도 역시 자의(子儀).

[D-012]상간(桑間) : 하남성에 있는 지명. 음탕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곳.

[D-013]백설(白雪)의 곡조 : 백설은 곡조 이름. 백아(伯牙)가 저속한 하리(下俚)를 탈 때에는 듣는 이가 많았는데, 백설을 타니 화답하는 자가 적었다 한다.

[D-014]태평광기(太平廣記) : 송의 이방(李昉) 등이 어명을 받들어 엮은 책.

[D-015]왕벽지(王闢之) : 송 철종(宋哲宗) 때 학자. 벽지는 이름이요, 자는 성도(聖塗).

[D-016]정원(定遠) :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 정원은 봉호요, 자는 중승(仲升).

[D-017]그러나 …… 일은 : 위의 네 장수는 모두 무식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들이다.

[D-018]문로(文潞) : 송 인종(宋仁宗) 때 명상 문언박(文彦博). 노는 봉호. 자는 관부(寬夫).

[D-019]사이(四彝) : 사이(四夷). 연암과 필담하였기 때문에 이()를 이()로 하였다.

[D-020]그들이 …… 모습 : 전국 때 조()의 장수 염파(廉頗)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기에 그는 말에 올라서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D-021]농사일은 …… 의당하다 : 이 몇 구절은 한() 진평(陳平)의 말인데, 심경지가 빌려 썼던 것이다.

[D-022]() : ()이다. 청 나라 사람은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曄)이었으므로 ()’ 자를 피하여 ()’ 자로 대신 썼다.

[D-023]이 장군 : 이광(李廣)

[D-024]돈 벽 : 화교(和嶠)가 그 가멸기가 왕자에 비길 만하였으나 오히려 돈을 아꼈으므로 그를 전벽(錢癖)이라 하였다.

[D-025]서음(書淫) : 황보밀(皇甫謐)이 글 읽기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침식을 잊으므로 그를 서음(書淫)이라 하였다.

[D-026]치청전집 : 청 이개(李鍇) . 치청은 그의 호. 치청산인(豸靑山人).

[D-027]종인부(宗人府) : 황족(皇族)의 관계 사무를 보는 관부.

[D-028]기량을 울었다네 : 전국 제()의 사람. 그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덤에 가서 우는 소리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제인(齊人)은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 한다.

[D-029]봉규() : 어떤 본에는 봉규(封圭)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D-030]담원팔영(澹園八詠) : 담원의 주위에 벌여 있는 팔경(八景)을 읊어서 축하하는 시.

[D-031]절만 하네 : () 서예가 미불(米芾)이 무위(無爲)라는 고을에서 커다란 괴석(怪石)을 발견하고는 의관을 갖추어 절하여 형()이라 일컬었다.

[D-032]백 동파 : 소식(蘇軾)이 미피(渼陂)에서 놀 때의 고사.

[D-033]나부산 : 매화가 많이 난 고장.

[D-034]적성(赤城) : 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다.

[D-035]화예부인 : 오대 때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부인으로 절색에 문장을 겸하였다.

[D-036]아름다운 …… 같으리 : 이 시는 벌써 망양록(忘羊錄) 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하였다.

[D-037]진서라네 : 당시에는 국문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였다.

[D-038]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홍범편(洪範篇)에 실린 정치 이론.

[D-039]육부(六部) : 신라 초기에 그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

[D-040]약을 …… 가고 : 진 시황이 서시(徐市)로 하여금 동남(童男) 동녀(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보내어 불사약(不死藥)을 구했다.

[D-041]박랑의 모래벌 : 장량(張良)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박랑 모래벌에서 매복하였다가 철퇴로써 진 시황을 쳤으나 잘못되어 다음 수레가 맞았다.

[D-042]구정은 아직 잠기고 : 구정은 하우(夏禹) 때부터 내려오던 신기(神器)였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구정이 잠겼다 한다. 여기서는 주()가 망했다는 말.

[D-043]삼호들은 일어섰네 : ()의 항적(項籍)을 말한다.

[D-044]여섯 왕이 쓰러지자 : 당시의 한()()()()()() 6국이 망했음을 말한다.

[D-045]손을 마침 떼었다네 : 진 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D-046]호가의 슬픈 박자 : 한말 채문희(蔡文姬)가 되놈에게 몸이 팔리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D-047]채문희를 속할쏘냐 : 조조(曹操)가 천금으로 채문희를 속환하였다.

[D-048]대숙륜(戴叔倫) : 당 현종(唐玄宗) 때 문학가. 자는 유공(幼公).

[D-049]제용작가(帝庸作歌) : 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한 구절.

[D-050]관관저구(關關雎鳩) : 시경 관저장(關雎章)의 첫 구절.

[D-051]양백화 : 음탕한 일을 풍자한 패곡(牌曲)의 이름인 듯하나 출전 미상.

[D-052]점필재(佔畢齋) : 이조 때의 문학가 김종직(金宗直)의 호. 자는 계온(季昷).

[D-053]생추(生蒭) : 시경 소아(小雅) 백구장(白駒章)에 나오는 말로서 예물(禮物)이라는 뜻.

[D-054]기 귀주(奇貴州) : 기풍액(奇豐額). 귀주는 그가 그 고을을 맡고 있었다.

[D-055]최두기 …… 일쑤이다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최두기는 조선 정조(正祖) 때 문학가로, 두기는 호요, 성대는 이름이며, 자는 사집(士集)이다.

[D-056]주의(周顗) : ()의 지사(志士). 자는 백인(伯仁). 신정에서 고국이 망하였음을 슬퍼하였다.

[D-057]나라 …… 있네 : ()자 속에 과() 자를 떼고 일() 자와 인() 자를 더 넣은 듯하나 무슨 글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D-058]김모재(金慕齋) : 조선 때 유학자 김안국(金安國)의 호. 자는 국경(國卿).

[D-059]화홍산(華鴻山) () : ()의 관리이면서 문학가. 홍산은 호요, 찰은 이름이며, 자는 자잠(子潜).

[D-060]최간이(崔簡易)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학가 최립(崔岦). 간이는 호요, 자는 입지(立之).

[D-061]사흘을 바장이곤 : 국선(國仙)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詳)남석(南石) 네 사람이 사흘을 놀았다 해서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D-062]심백수(沈伯修) : 조선 영조(英祖) 때 관리이며, 문학가인 심염조(沈念祖). 백수는 자.

[D-063]왕감주(王弇州) : 명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감주는 호.

[D-064]만나러 갔더니 : 최립은 일찍이 이정귀(李廷龜)의 사행을 따라서 명에 갔다.

[D-065]획린해(獲麟解) : 불과 2백 자도 차지 않는 단편이지마는 논리의 정연함과 조직의 체계로 보아서 전형적인 고문장의 궤범이 된다.

[D-066]허균(許筠) :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저명한 문학가사상가. 자는 단보(端甫).

[D-067]주태사(朱太史) 지번(之蕃) : 명의 정치가요, 문학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일이 있다.

[D-068]빈공(賓貢) : ()에 외국 학생을 받기 위해 설치한 학과(學科). 곧 빈공과.

[D-069]한무외(韓无畏) : 조선 선조(宣祖) 때 신선이 되었다는데 방술에 저명하였다.

[D-070]최승우(崔承祐) : 신라 진성왕(眞聖王) 때 문학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D-071]종리 장군(鍾離將軍) : 한 고조(漢高祖) 때 장군 종리매(鍾離昧). 한신(韓信)을 위해서 자살하였다.

[D-072]예학명(瘞鶴銘) : 육조(六朝) 때 양()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긴 글의 탑본(搨本).

[D-073]사운(思運) : 자는 형중(亨仲). 어떤 본에는 사운(思運)’이란 두 글자는 소주로 되어있다.

[D-074]칠십천 : 왕추사가 살고 있던 성수천(聖水泉)은 원()의 우흠(于欽)이 품정(品定) 72 () 중의 24천이었으므로, 그는 이십사 천초당집(二十四泉草堂集)이 있었다.

[D-075]왕랑의 …… 얼굴 : ()의 왕공(王恭)의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탁탁한 봄 버들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왕추사가 서로 견준 것이다.

[D-076]남약천 구만(九萬) : 조선 숙종(肅宗) 때 문학가며 정치가. 약천은 호요, 구만은 이름이며, 자는 운로(雲路).

[D-077]선생안(先生案) : 그 고을 장관을 지낸 이의 성명과 약력을 기록한 책.

[D-078]윤형성(尹衡聖)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임(景任). 당시의 진주 목사(晉州牧使).

[D-079]곽재우(郭再祐) : 조선 선조(宣祖) 때 저명한 장수.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다.

[D-080]웅해 …… 정진(鼎津) : 모두 경상도에 있는 작은 지명들이다.

[D-081]음릉 …… 것이 : 항적이 한 고조(漢高祖)와 싸우다가 해성(海城)에서 패하여 음릉으로 도망할 때, 어떤 노부의 말을 들어 길을 잃었고, 오강에 이르러서는 강동(江東) 사람들을 대하기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D-082]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 조선 중종(中宗) 때 문학가. 호음은 호요, 사룡은 이름이며, 자는 운경(雲卿).

[D-083]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 : 조선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을 맞아들인 훈신. 평성은 봉호요, 원종은 이름이며, 자는 백윤(伯胤).

[D-084]금계군(錦溪君) : 조선 문학가 박동량(朴東亮). 금계는 봉호요, 자는 자룡(子龍).

[D-085]호백구 …… 수단 : 전국 제()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에서 붙들려 있을 때에, 그의 문객이 개구멍 도적질을 잘하여 진왕(秦王)의 흰 여우 갖옷을 훔쳐서 진왕의 애희(愛姬)에게 바치고 면했다.

[D-086]거원(蘧瑗) : 전국 때 위()의 현인으로서, 나이 50이 되어서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

[D-087]설부 …… 계림유사(鷄林類事) : 설부는 명의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것이요, 계림유사는 손목(孫穆)이 지었다.

[D-088]파촉 …… 관중(關中)이랍니다 : 파촉은 중국 사천 지방이요, 관중은 섬서 지방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적이 서로 먼저 관중을 점령하려고 경쟁을 할 때 생긴 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D-089]() …… 있으니 : 정형은 하북성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지. 예양교는 전국 때 절사(節士) 예양이 지백(智伯)을 위해서 조양자(趙襄子)를 저격하려고 숨었던 다리. 촉도는 사천성에서 섬서성으로 통하는 험로(險路). 아미는 사천성에 있는 산명. 공명사당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공명은 그의 자. 함곡관은 하남성 서북부 황하의 계곡에 있는 요해의 관문.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호수명. 이릉은 하남성 효()에 있는 명소. 맹진은 하남성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을 칠 때 제후를 모았던 곳. 비간묘는 은의 충신 비간의 무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부에 있는 명소. 초산은 강소성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명소. 다경루는 강소성감로사(甘露寺)에 있는 명소. 고소대는 강소성 오현(吳縣)에 있는 명소. 도량산은 강소성에 있는 명소이며, 호구사도 같다. 표모묘는 강소성 회음(淮陰)에 있는데, 한신(韓信)에게 밥을 먹인 표모의 무덤. 탁군은 하북성에 있는 지명. 백구는 위와 같음. 업성은 하남성에 있으며 담화도 같다. 왕상비는 하남성에 있으며 왕상은 진()의 효자. 효릉은 하남성에 있는 명소. 장안은 섬서성에 있는 도시. 정장공묘는 전국 때 정장공의 무덤. 허문정공묘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의 무덤. 문정은 시호. 관용방묘는 하()의 충신 관용방의 무덤. 망사대는 한 무제(漢武帝)가 그의 아들 여 태자(戾太子)를 죽이고 후회하여 쌓은 대. 무측천릉은 당의 황후 무조(武曌)의 무덤. 숙종릉은 당 숙종의 무덤. 빈주는 섬서성에 있는 지명. 경주는 안휘성에 있는 지명. 보타굴은 절강성에 있는 명소. 월지사자헌마는 중앙 아시아 지방에 있던 월지국 사자가 헌납한 말을 보고 읊었다.

[D-090]요공(姚公) : ()의 문학가 요수(姚燧). 목암은 호요, 자는 단보(端甫).

[D-091]주행아미(舟行峨眉) : 원제(原題) 8 17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放舟向峨眉山).

[D-092]다경루(多景樓) : 원제에는 다경루배권일재용고인운동부(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韻同賦).

[D-093]깊은 …… 번뜩인다 : 한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태사(太史)가 여쭙기를 객성이 제좌(帝座)를 범했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자기가 사신으로 왔음을 말한 것이다.

[D-094]은하성 …… 허락했네 : ()의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으로 사신 가던 고사.

[D-095]만리 …… 보고져라 : 연암의 아들 종간(宗侃)의 주(), “삼가 상고하옵건대 이 두 글귀는 원집(原集) 중에 있는 것을 혜당(惠堂)이 이용한 것이다.”

[D-096]강향(降香) : 유명한 사원(寺院)이나 묘우(廟宇)에 내리는 치전(致奠).

[D-097]촉도난(蜀道難) : 촉도의 험준함을 읊은 이백(李白)의 시가 있다.

[D-098]조자(趙資) : 삼국 때 오()의 변사. 자는 덕도(德度). 조위(曹魏)에 사신 갔을 때 임기응변이 많았다.

[D-099]슬쩍 피해버렸다 : ‘고 태사 역생 …… 피해버렸다 까지의 이 한 절은 다른 본에 없던 것을 이에 일재본에 의하여 넣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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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황교문답(黃敎問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교문답(黃敎問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교문답(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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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황교문답(黃敎問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교문답(黃敎問答)

1. 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2. 황교문답(黃敎問答)

3. 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4. 중존평어(仲存評語)

 

 

 

 

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남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흔히들,

나는 용하게도 적국(敵國)의 비밀을 엿본다.”

하기도 하려니와, 또는,

 

난 남의 나라 풍속을 잘 살피지.”

하고 과장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반드시 믿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남의 나라에 들어간 자가 어찌 길에 다니는 사람을 잡고 갑자기 그 나라의 정세를 캐어 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첫째 불가한 일이요. 그들과 말씨가 서로 같지 않아서 주고 받는 사이에 서로 의견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둘째 불가한 일이요. 안팎의 지역적인 차이가 있어서 저절로 형적(形迹)이 드러날 혐의가 있으니, 이것이 셋째의 불가한 일이요. 말이 얕으면 그 나라 실정을 얻지 못할 것이고 말이 깊으면 기휘(忌諱)에 저촉되기 쉬우니, 이것이 넷째로 불가한 일이요. 묻지 않을 것을 물으면 정탐을 하는 듯한 자취가 생길 것이니, 이것이 다섯째로 불가한 일이요. 그 지위에 있지 않거든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 것이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니, 하물며 다른 나라일까 보냐. 그 나라의 크게 금하는 것을 물어본 연후에야 감히 들어가는 것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도리라 하겠거늘, 하물며 대국(大國)일까 보냐. 이것이 여섯째로 불가한 일이요. 더욱이 그 나라 장수나 재상들의 어질고 그른 것과 풍속의 맑고 흐린 것과, 만주와 중국의 등용되고 소외되는 것과 명()의 옛 실정은 더구나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은 비단 물어서 안 될 일일 뿐만 아니라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저들도 또한 마땅히 대답할 것이 아니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다. 또 돈이나 곡식과 군사와 산천의 형승(形勝)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심한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이것도 마땅히 말할 일이 못 되는 것이며, 저들도 또한 이를 의심하고 괴상히 여길 것이니, 그 까닭인즉 돈과 곡식은 국가의 허실에 관계되는 일이요, 산천의 형승은 관액(關阨)과 요새(要塞)에 관계되므로 이것을 문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 옛날 사람들은 항상 언어를 문답하는 사이에 실정을 얻어서 교량과 시간과 또는 관리들의 등급 같은 것을 점쳐서 안 일도 있었다. 시가(詩歌)를 베풀고 음악을 들은 뒤에 시장 물가의 높고 낮은 것을 징험해 알아 맞힌 일도 있었다. 이미 옛 사람만 한 지식과 재주도 없으면서 한갓 조그만 글이나 짤막한 말로써 그 나라 실정을 얻는다는 것은 그 또한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사해(四海)가 광대하여 끝간 데를 못 보는 데일까보냐. 내가 열하에 이르러 잠자코 천하의 형세를 살펴 본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주필(駐驆)하게 되는데 열하란 장성(長城) 밖 궁벽한 땅이라, 천자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변두리의 거친 벽지에 와서 거처하는 것일까. 이름은 피서(避暑)’라 하였지만 그 실상인즉 천자가 몸소 나가서 변방을 방비한 것이니, 이러고 본즉 몽고가 강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겠다. 황제는 서번(西番)의 승왕(僧王)을 맞아다가 스승으로 삼아 황금으로 전각을 지어 그를 살게 하고 있으니, 천자는 또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한 떳떳하지 못한 참람된 예절을 쓰는 것일까. 명목은 스승으로 대접하지만 그 실상인즉 전각 속에 가두어 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할 것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니, 이러고 보면 서번이 몽고보다도 더 강한 것을 알 수 있는 터로, 이 두 가지 일은 황제의 마음이 이미 괴롭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들의 문자를 보면 비록 그것이 심상(尋常)한 두어 줄 편지라 하더라도, 반드시 역대 황제들의 공덕(功德)을 늘어놓고 당세의 은택(恩澤)에 감격한다는 것은 모두 한인(漢人)들의 글이다. 대개 스스로 중국의 유민(遺民)으로서 항상 걱정을 품고 혐의하는 경계를 이기지 못하여, 입만 열면 칭송(稱頌)을 하고 붓만 들면 아첨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당세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 한인들의 마음도 이미 괴롭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사람과 필담(筆譚)을 할 때는 비록 심상한 수작을 한 것이라도 말을 마친 뒤에는 곧 불살라 버리고 쪽지 하나도 남겨 두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한인만이 이런 것이 아니라 만인(滿人)들은 더욱 심하다. 만인들은 그 직위가 모두 황제와 근밀(近密)한 데 있는 터이므로, 법령이 엄하고 가혹한 것을 더욱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고 보니 비단 한인들의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천하를 법으로 금하고 있는 자의 마음도 괴로울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벼루 한 개의 값이 백 냥을 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슬프다. 천하가 일이 있으면 주옥(珠玉)이 굴러다녀도 거두어들이지 않지만 해내(海內)가 승평한 때는 기왓장이나 벽돌이 땅에 묻혀 있어도 반드시 캐내는 것이다. 부귀한 자들은 심심풀이로 취하여 보고, 빈천한 자들은 눈을 뒤집고서 거두어 간직하며, 취미로 감상하는 자는 우연히 한 번 만져만 보고, 우둔한 자는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니며 구하여 밭 갈다가 얻은 것, 낚시질하다가 건진 것, 송장 냄새나는 무덤 속에서 파낸 것까지도 천하의 보물로 여기고 있으니, 천하의 보물을 보배롭게 감상하는 마음도 또한 괴롭다 할 것이다. 이러고 보니 한 조각 돌로 족히 천하의 대세를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어늘 하물며 천하의 괴로운 심정이 돌보다 더 큰 것이 있음에랴. 이제 타고 남은 반선(班禪)에 관계되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황교문답(黃敎問答)이라 한다.

 

 

[C-001]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 여러 본에 모두들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넣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교문답(黃敎問答)

 

 

내가 찰십륜포(札什倫布)’로부터 먼저 숙소로 돌아오니, 지정(志亭)은 자는 학성(郝成)이 요, 호는 장성(長城)이다. 나를 맞으면서,

 

선생이 잠깐 보고 온 활불(活佛)의 얼굴 모양이 어떻습디까.”

하고 묻는다. 나는,

 

공은 그를 보지 못하셨나요.”

하였더니, 지정은,

 

활불은 깊고도 장엄한 데 거처해서 사람마다 볼 수가 없답니다. 더구나 신통한 법술(法術)이 있어 사람의 장부를 들여다 본답니다. 보배로운 거울을 하나 걸어 놓았는데 사람이 간음한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푸른 빛으로 비치고, 사람이 탐심이나 적심을 품으면 반드시 검은 빛으로 비치며, 사람이 위험하고 불측한 마음을 지니면 반드시 흰 빛으로 비치고, 오직 충효(忠孝)스러운 마음과 일심(一心)으로 부처를 공경하는 사람이 오면, 반드시 붉은 빛 아지랑이에 누른 빛을 띄워 경운(慶雲)과 같이 거울 바닥에 서리게 되니, 이 다섯 색 거울이야말로 가히 두려운 것이지요.”

한다. 나는,

 

이것은 진 시황의 조담경(照膽鏡)을 본떠서 이야기를 신통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담경은 역시 정사(正史)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보니, 어찌 족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지정은,

 

벽 사이에 그 거울이 없던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오색경이 가히 두렵다.’라는 대목에 권주를 치면서,

 

공이 푸르고 검고 흰 세 가지 마음이 스스로 없고 보면 무엇 때문에 이 거울이 그렇게 두려울까요.”

하였더니, 지정은,

 

법화(法華)》ㆍ《능엄(楞嚴) 같은 모든 불경의 게()들은 모두 사람을 위협하여 그 책을 존경하지 않으면 곧 화를 받는다고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가공하도록 하여 착한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대개 이 거울이나 마찬가지 일이지요. 거울은 글자를 쓰지 않은 경전(經典)이요, 경전은 또 구리로 만들지 않은 거울일 것입니다. 내가 비록 열흘 동안 담식(淡食)을 하고 열흘 동안 목욕을 했더라도, 혹시 간() 구석이나 폐() 틈에 터럭만 한 흠이라도 있다면 어찌 세 가지 빛깔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바로 글쓴 종이를 찢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과연 진실로 신통하답니다. 활불에게 절을 하는 자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 활불이 친히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웃음을 머금으면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이요, 만일 웃지 않으면 받는 복이 그리 크지 못하고, 또 활불이 눈을 감을 때는 절하던 사람은 겁이 나서 향불을 피우고 참회하면서 뼈저리게 회개하면, 자연히 죄악은 소멸되고 다시는 죄를 짓지도 않는답니다. 이것은 활불이 말로써 교훈하지 않고, 손 한 번 펴는 사이에 공과(功果)가 이 같은 것입니다. 화석(和碩) 친왕(親王)과 화석 액부(額駙)는 매일 아침 활불 앞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지만, 외인들이나 보통 관품(官品)들은 이런 사실을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다. 내가 그 내력을 물었더니, 지정은,

 

건륭 40년 경에, 서방(西方) 사람들이 자자하게 말하기를, 활불 법왕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떠들었고, 혹은 이 법왕은 능히 사십세(四十世) 전신(前身)의 일까지도 안다고 했는데, 지금의 몽고 48부가 강하다 하지만 가장 서번을 무서워했고, 서번의 여러 나라들은 활불을 가장 무서워 한답니다. 활불이란 곧 장리대보법왕(藏理大寶法王)입니다. ()의 양삼보(楊三寶)와 중 지광(智光)오향(吾鄕)하객(霞客) 등 여러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여러 불교국을 두루 다닌 일이 있었는데, 오사장(烏斯藏)은 중국으로부터 1만여 리나 떨어져 있고, 이 나라에는 대보법왕(大寶法王)과 소보법왕(小寶法王)이 있는데, 서로 번갈아 후생(後生)에 환생하여 모두 도술이 있고 나면서부터 신성하니, 지금의 활불은 곧 옛날 원()의 시대의 서천(西天) 지방 부처의 아들이요, 대원 황제(大元皇帝)의 스승의 후신이랍니다. 지난해에, 내각(內閣)의 영공(永公 영귀(永貴))은 여섯 황자(皇子)를 배종(陪從)하여 불교의 예식을 갖추고 가서 활불을 맞아 왔는데, 활불은 이미 황제의 귀한 신하들이 자기를 맞으러 올 것과 북경을 떠날 날짜와 귀신(貴臣)의 이름이 아무개라는 것까지도 알았다 합니다. 이름은 영귀(永貴), 현재 내각의 학사(學士)로 총애받는 신하라 한다. 거처하는 곳은 모두 황금으로 지은 집이요, 그 사치하고 화려한 품은 중국보다도 굉장하더랍니다. 도중에서 신통한 일이 많이 있었고, 거쳐온 여러 나라의 번왕(番王)들은 심지어 몸뚱이를 불사르고 머리를 태우며 손가락을 끊고 살을 베는 자까지 있었답니다. 또 어리석은 백성 중에 불효한 자가 활불을 한번 보더니 갑자기 효심이 생겨, 아비가 괴상한 병에 걸리자 칼로 자기 왼쪽 옆구리를 베고 간()의 한쪽 끝을 잘라서 구워 먹이니, 아비의 병이 즉시 낫고, 불효자의 왼쪽 옆구리도 금방 나아서 금시에 효자로 변하매, 나라로부터 표창을 받고, 고향에서는 정문(旌門)을 세우며, 몸을 부역에서 면제하였답니다. 또 산서(山西)에 어떤 어리석은 자는 형세는 거부(巨富)이나 평생에 인색하여 한 푼 돈도 쓰지 않더니, 길에서 활불을 쳐다보고는 곧바로 자비심이 생겨 드디어 10만 금을 녹여 일좌(一座) 부도(浮圖)를 세웠다 하니, 이것이 활불의 공덕 중의 대략입니다. 물을 만나도 다리나 배가 필요 없고, 맨발로 물을 밟아도 물결이 발목을 넘지 않았답니다. 강 건너 저쪽 언덕에 큰 범 한 마리가 길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황자(皇子)가 화살을 빼어 쏘려 하니, 활불은 이를 말리면서, 수레에서 내려 범을 쓰다듬어 주자, 범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무슨 호소할 일이 있는 것처럼 하며 남쪽으로 가매 활불도 따라가 보니, 큰 바위 틈에 굴이 있는데 범 한 마리가 바야흐로 젖을 먹이고 있고, 큰 뱀 두 마리가 범의 굴을 둘러싸고 범의 새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뱀의 한 마리는 젖먹이는 범과 겨루고, 다른 한 마리 뱀은 숫범과 겨루고 있었으나 범의 어금니로도 이것을 막을 도리가 없어 슬피 울다가 기진해 버렸습니다. 이때 활불은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주문(呪文)을 외우니, 두 마리의 뱀은 저절로 돌에 부딪쳐 죽었는데, 그 대가리 속에서 밤중에도 빛이 나는 진주가 한 개씩 나오자, 이 구슬을 한 개는 황자에게 바치고, 한 개는 학사(學士)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뒤에, 범은 열흘 동안이나 활불을 모시고 따라가면서 심히 공손하고 순하니, 황자는 범을 궤 속에 잡아 넣어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활불은 이것을 불가하다고 하여 중지시키고, 드디어 범을 경계하여 말하는 듯하니, 범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가버렸다 하니, 이는 그 법술의 신통한 것입니다. 두 개의 구슬은 임금의 행차에 쓰는 물건으로 바쳤는데, 홍수나 가뭄 및 역질에는 신비스러운 물건이 되어 영험이 많다 합니다.”

한다. 나는 또,

 

활불의 전생(前生) 일이란 비유하면, 느티나무 잎에 붙은 푸른 벌레가 꿀집을 뚫고 들어가 벌이 되고, 큰 송충이가 표범 가죽 같은 껍질을 벗고 범 나비가 되며, 누에가 나방이 되고, 굼벵이가 매미가 되며, 비둘기가 매가 되고, 매가 꿩이 되며, 꿩이 조개가 되고, 닭이 뱀이 되며, 뱀은 거북이 되는 등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이 모두 각성(覺性)이 있어 이렇게 변화된 몸을 가지고 능히 전생에 가졌던 형태를 안단 말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장주(莊周)가 호접(蝴蝶)의 꿈을 깬 것처럼 서로 판이하여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인가요. 만일 과연 활불처럼 전생에는 이 몸이 아무데 누구의 아들이요, 금생(今生)에는 이 몸이 다시 아무데 누구의 아들이 되었다면 전생의 부모와 금생의 아비 어미가 오늘도 아무런 탈도 없이 한결같이 자애(慈愛)롭게 역력히 다 알아보고, 저마다 아무개냐고 부를 터이니 이러고서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은혜롭게 여길 것이며,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즐거울 것입니까.”

했더니, 지정은 홀연 두어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즐거울 것인가.’라는 구절에 권주를 쳤다.

이때 홀연 문 여는 소리가 나니, 지정은 바쁘게 글 쓰던 종이를 비벼서 손에 쥔다. 문이 열리고 보니, 같은 숙소에 있는 왕민호(王民皥)였고, 뒤따라 들어오는 이는 역시 왕군(王君)과 같이 있는 추사시(鄒舍是)이다. 이들은 모두 거인(擧人)으로서 객지인 장성 밖에서 노는 사람들이다. 지난해에, 열하에 태학(太學)을 신설하였으니 북경 제도를 본떠서 세웠다. 이때 두 사람은 그 태학에서 머무르며 공부하는 중이었는데 나를 찾기 위해서 온 것이다. 지정이 두 손님을 향하여 무엇인가 글을 읽듯이 설명을 하는데, 두 손님은 한편으로 지정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책상 위에 권주 쳐놓은 데를 가리키는 것이 필경 내가 한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왕 거인(王擧人)은 내 성명과 자와 호를 써서 추 거인에게 보였는데, 왕은 벌써 숙면(宿面)이요, 추는 처음 보기 때문이다.

추생(鄒生),

 

귀국은 불교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소량(蕭梁 대통(大通 527~529) 연간에 중 아도(阿道)가 신라(新羅)에 처음 들어왔지요.”

했더니, 그는,

 

귀국의 사대부들은 세 가지 교 중에, 어느 교를 가장 숭상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사실 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사족으로서 비록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도 서교(西敎 불교)를 공부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우리나라(이조(李朝))가 나라를 세운 지 4백 년에 사족으로서는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공자의 글을 외우고 익힐 뿐입니다. 국내의 명산(名山)에는 비록 전대에 세운 명찰(名刹)들이 있으나, 이미 모두 황폐되었고, 절에 사는 중들이란 대체로 천한 무뢰배(無賴輩)로서 종이나 뜨고, 신이나 삼아서 생업을 삼고 있으나, 명목은 비록 중이지만 눈으로 불경을 볼 줄도 모르니 누가 배척하기를 기다릴 사이 없이 그 교는 스스로 끊어질 것입니다. 또 국중에 도교(道敎)란 것이 없으므로 역시 도관(道觀)도 없는 까닭에 소위 이단(異端)의 교는 금절할 것을 기다릴 사이 없이 저절로 국중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했더니, 추생은,

 

가위 천하 중의 낙국(樂國)입니다그려. 이단의 폐해는 성인들이 이미 우려한 터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있어, 이것을 듣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지나친 말이라고 여기게 하였으나, 요즈음 산중에 왕왕 사람을 잡아먹는 도사(道士)가 있어 어린애를 기르기는 더욱 어려우니, 순양(純陽) 동자(童子)가 제일 좋다고 해서 이를 쪄서 먹는답니다. 심지어 밤에는 궤 속에 감추어 두어도 오히려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 이 지방의 관청에서는 이것을 적발하여 붙들고자 도관을 불살라 허물면, 다시 이름을 중의 명목에 붙여 두고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몸을 절간에 숨기고 있답니다. 심지어 은밀한 방 속에서 하는 비술(秘術)이라든지, 더러운 병에 쓰는 기이한 방문들은 모두 가난한 도사가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많이 따라다니며, 또는 몰래 이 술법을 배우고 있으니, 해괴하여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선()과 석()은 그 본지(本旨)에 어그러져 앙루(仰漏)가 말한 바 소위 이름은 중인데, 실상은 도교라는 말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한다.

앙루란 이는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의 자인데, 나와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 중 이름이 도사 노릇을 한다는 말을 하였기에 나는 이를 지정에게 하였더니 지금 한 말은 지정이 아마 외워서 추생에게 말한 모양이다. 추생은 또,

 

귀국에서도 옛날에는 역시 신승(神僧)이 있었나요. 그 이름을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내가,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쪽에 있으나 풍속은 언제나 유교를 숭상하여 예나 지금이나 큰 선비나 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의 묻는 것은 이것이 아니고 도리어 신승 이야기고보니, 우리나라 풍속에는 이단의 학문을 숭상하지 않아 신승이 없는지라, 진실로 대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왕군(王君)이 말하기를,

 

이단 가운데도 또한 이단이 있어 도리어 그 도를 해치는 일이 있지요. 이제 우리 친구 추()는 귀국의 유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알고자 해서 한 말이지요.”

하니, 추생도,

 

그렇습니다.”

한다. 내가,

 

비록 중의 이름을 듣는다 해도 어찌 유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추생은,

 

유학하는 사람 중에도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의 이름이 있는데 귀국에서도 유학자 중에 또한 이런 분간이 있나요.”

한다. 나는,

 

성문(聖門)의 설교(設敎)에는 오직 네 가지 과목을 두어 이것을 일관(一貫)한 도는 다만 한 가지 이치일 것이요, 이것을 배우고 이것을 묻는 것이 바로 학문일 것입니다. 어찌 유문(儒門)에 함부로 딴 과목을 두어 이런 두 가지 명목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추생은,

 

그렇습니다. 선생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공자의 문도(門徒) 70명이 그들의 스승에게 묻는 것은 인()이나 효()에 지나지 않는데, 후세에 와서는 그렇지 않아서 제자된 자가 맨처음 책을 펴 놓고서는 우선 이기(理氣)부터 묻습니다. 그러면 소위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올라 앉으면서 문득 말하는 것이 성명(性命)입니다. 요즈음 학자들의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꿰뚫고 있지만 실지로는 한 고을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그들의 이학이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현상을 살피면서도(중용(中庸)에 나오는 말) 한 가지 일도 판단을 못합니다. 이러한 학문을 하는 자를 소위 이학선생(理學先生)’이라 합니다. 시골의 사숙(私塾)에서는 천품과 성질이 고루하고 행동이 못나고 괴이한 자라도 약간 경전(經傳)을 배우고 조금 훈고(訓詁)를 익히면 자리를 베풀고 강론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야말로 썩어빠진 것을 맛보고는 숙속(菽粟)이라 하고 누더기를 기워 모은 것을 구갈(裘褐)이라 하여,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을 오히려 정도(正道)를 지킨다 하고, 호광(胡廣)의 처세하는 것을 스스로 중용(中庸)이라 하니, 이러한 학문을 하는 자를 소위 도학군자(道學君子)’라 한답니다. 이것은 오히려 족히 말할 것이 못 되지만 옛날 이단은 묵()을 버리고 유로 돌아오기도 하고, 유로부터 양()의 도로 붙는 자도 있어, 서로 시새우고 갈라지며, 서로 배반하고 저마다 딴 속셈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유학자들을 본다면 죽기까지 제 고장을 떠나지도 않고 한번 지반을 잡은 뒤에는 더욱 육경(六經)의 공부를 쌓아서 자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학설을 뒤바꾸어 새로운 기치를 올려, 반은 주자요, 반은 육상산(陸象山)으로 이들로 포주(逋主)를 삼아서, 머리를 감추기도 하고 머리를 들기도 하여, 물에 빠진 두어(蠹魚)가 여우나 쥐로 화한즉, 고증학(攷證學)을 가지고 성이나 사직단 같은 것을 근거를 삼고 뛰어난 인재들을 억눌러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훈고학(訓詁學)으로써 재갈을 물립니다. 때로 용기를 돋구어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강력한 공격을 만나서 형세가 불리하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것이 요즈음 세상의 유학자들입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할 것이니, 저는 평생에 유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능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열어 이단의 학문을 제창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장차 불원 천리하고 양식을 짊어지고 쫓아가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선생의 의론을 들으니 확실히 옳은 것을 지켜 소인의 마음으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게 합니다.”

한다. 추생의 용모를 보니 의젓하게 생겼으며 그의 언사는 방탕해서 칭도하는 것도 같고 조롱하는 것도 같으며, 변환하고 속이는 듯하여 모든 사건에 나를 업신여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선생의 이단을 물리치는 의론을 들으니 흠복함을 이기지 못하오나 도리어 이렇게 괴상한 말을 하시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저는 바다 한쪽에서 나서, 듣고 본 것이 적고 학식이 보잘것없으니,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만, 잘하는 것을 칭도하고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군자의 덕의(德義)로 정당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족하(足下 상대방을 높인 말)는 성묘(聖廟)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서 이단을 배우고 싶다 하니, 그 말씀이 만일 진정이라면 상국(上國)이 먼저 본을 보일 처지에 있으면서 이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요, 또 만일 그 말씀이 거짓이라면 외국에서 온 한 부유(腐儒)를 조롱하는 것이니, 먼 데서 온 사람을 대접하는 덕의가 아닐까 두렵습니다. 부끄러워서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더니, 추생은 사과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마침 심중에 격한 일이 있어 말머리가 왔다갔다 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이처럼 저를 죄주시니 저는 감히 오래 족하를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추생이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니, 이것은 사과를 하는 뜻이다. 왕군이,

 

저의 친구는 순실한 사람으로 그의 뜻은 본래 그렇지 않사온데, 선생이 잘못 의심한 것이니, 그가 이단을 배우고 싶다고 한 말은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논어에 나오는 말)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고, 서로들 크게 웃기에 나도 따라서 웃었으나 심사가 끝내 개운하지는 못했고, 구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는 비유가 더욱이 나로 하여금 한스럽게 하였다. 추생은 다시,

 

선생의 이번 길은 오로지 서불(西佛)을 배망(拜望)하기 위한 것인가요, 또는 황제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인가요.”

하고 묻는데, 그 동안 지정은 잠깐 문밖에 나갔었다. 나는,

 

오로지 황제의 칠순(七旬) 경절(慶節)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지요. 황제의 조지(詔旨)가 없으면 어떻게 열하까지 왔겠습니까. 어제 활불을 본 것도 역시 황제의 분부입니다.”

하였다. 왕군이,

 

박 선생은 사신이 아니고 그 족형(族兄)되는 어른을 따라 구경차 오신 길이랍니다.”

하니, 추생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선생은 이번 길에 담인(噉人)이 무섭지 않습디까.”

한다. 나는,

 

담인이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추생은,

 

양련진가(楊璉眞加)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답니다.”

한다. 이때 왕군은 얼굴빛을 변하여 말다툼을 하려는 모습인데,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왕군이 추생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이럴 즈음에 지정이 돌아와 자리에 앉아 글쓴 종이를 보자, 급히 손으로 찢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눈으로 추생을 보며 얼마 동안 말이 없다가 내가 한눈 파는 틈을 타서 입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추생에게 눈을 주다가, 우연히 내 눈과 마주치자 몹시 부끄러운 빛을 보이더니, 이내 차를 청하면서,

 

귀국 말은 하소(何宵 어느날 밤)에 낳았는지요.”

하고 묻기에, 내가,

 

말 낳는 시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매 여러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지정이,

 

소소(宵小)라는 소() 자로 써서 음이 같으면 쓰기를 같이 합니다.”

하니, 대개 그들은 음이 같으면 같은 뜻으로 쓰곤 한다. 나는,

 

나라가 작은 까닭에 먹이는 짐승들도 따라서 작아집니다.”

했다. 나는 반선의 내력을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추생의 말에 무슨 곡절이 있기에 저 두 사람이 저렇게 기휘하는가 싶어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다. 추생은 차를 마신 후에 바로 돌아가고, 지정 역시 다른 일이 있었고 나도 또한 일어나니, 왕군도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어느 날 내가 형산(亨山)을 찾았더니, 그는 대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형산의 이름은 가전(嘉銓)이요, 성은 윤씨(尹氏)인데, 역시 태학에서 묵고 있었다. 벼슬은 대리(大理), 나이는 지금 일흔으로서 올해 봄에 치사(致仕)하였다. 다시 지정의 처소에 들렀으나 빈 방에 아무도 없으므로 바로 발길을 돌려 나오려 하는데, 지정이 출타했다가 때마침 돌아오다 나를 보고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내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벗어 벽에 걸고 나서 차를 청하더니,

 

추 거인(鄒擧人)은 광사(狂士)이니 선생은 절대로 다시 만나지 마시오.”

한다. 나는,

 

무엇을 가리켜 광사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의 뱃속에는 강개(慷慨)한 기운이 꽉 차 있어서 사람들과 더불어 토론을 할 때에는 좀처럼 지려고 하지 않고 욕질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혹시 노야(老爺)께서 그 사람의 성질도 모르고 주먹으로 때리지나 않는가 걱정했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 미친 짓은 따르지 못하겠군요.”

했더니, 지정은,

 

저 같은 사람으로는 그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크게 웃었다. 나는,

 

활불이 양련(楊璉)의 후신이라는 것을 장군(將軍)은 이제 무슨 까닭으로 심히 꺼려하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 추생 미치광이가 나를 끌어다가 남을 욕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짐짓,

 

양련이란 것이 무슨 욕입니까.”

하고 물으니, 지정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차마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한다. 나는,

 

왕팔(王八)이나 마박륙(馬泊六) 같은 몹시 나쁜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양련이란 원래 서번(西番) 중으로, () 때에 중국에 들어와 송조(宋朝)의 능침(陵寢)들을 파헤치기를 병화(兵火)보다 더 지독하게 하여, 보물과 구슬을 모은 것이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는 비술(秘術)이 있고, 산을 쪼개는 보검(寶劍)을 가지고 있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한번 치면 비록 남산(南山)에 석곽(石槨)이 아무리 깊이 묻혀 있더라도 즉시 열리지 않는 것이 없어, 금으로 만든 오리나 옥으로 만든 물고기 같은 것이 땅을 차면 저절로 뛰어 나오고, 구슬로 짠 옷과 옥 궤짝이 낭자하게 벌려 있으며, 심지어 시체를 달아매고 수은(水銀)을 짜내며 시체의 뺨을 쳐가며 진주를 찾는답니다. 강남(江南) 사람들은 서로 욕하기를, 밥을 지어 곰보 양련에게 바칠 놈이라고 하는데, 이제 활불은 서번 사람이므로 그를 빌려다가 한번 욕한 것이요, 양련의 후신이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한다. 나는,

 

그는 무슨 까닭에 그토록 활불을 욕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는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는 고로 활불에게는 불복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가 만일 유학이 본업이라면, 저번에는 어째서 또 유학자를 욕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는 미치광인지라 하늘이나 우레도 무서워하지 않고 왕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성인도 욕하고 부처도 욕하여, 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꾸짖어야만 정수리까지 차 있는 객기가 풀리는 모양입니다.”

하고는, 지정은 다시,

 

귀국의 침묘(寢墓) 제도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비록 옛날 예법을 모방하지만, 나라 풍속이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보옥을 순장하지 않고 공경과 귀인으로부터 아래로 필부(匹夫)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상장(喪葬)의 제도는 모두 주자의 가례(家禮)를 쓰고 있습니다. 또 땅이 궁벽한 한쪽에 있고 보니 병화(兵禍)도 자주 일어나지 않아 저절로 그러한 근심은 없습니다.”

했다. 지정은 감탄하면서,

 

즐거운 나라 즐거운 땅에 즐겁게 나서 즐겁게 죽는 셈입니다. 주공(周公)이 예법을 만든 것은, 만세에 도적질할 마음을 열어 준 것이지요. 필부의 시체가 무슨 죄리오. 구슬을 가진 것이 죄이지요. 하물며 제왕가(帝王家)의 일이겠습니까.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 것인데(맹자에 나오는 말) 천고 제왕의 말을 화로 삼으니, 이러므로써 한번 상난(喪亂)을 겪으면 파헤치지 않는 능침이 없어 경사(京師)의 유리창 같은 데서 파는 고완품(古玩品)은 모두 역대의 능침에서 나온 물건들이랍니다. 파묻자마자 바로 파헤치기도 하고 묻힌 세월이 오랠수록 그 파헤치는 도수가 잦았으며, 이런 데서 파낸 물건일수록 더욱 보기(寶器)라고 쳐주어, 그 중에는 열 번이나 땅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있답니다. 이제 와서는 비록 장석지(張釋之 ()의 법관)가 삽을 쥐고, 유향(劉向)이 삼태기를 잡아서 양후(楊侯 후한 때의 명신 양진(楊震))를 장사지낸다 하더라도 도적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무덤 속에서 나온 기완(器玩)이란 흉하고 더럽고 냄새가 나서 상서롭지 못한 데가 많을 터인데, 그것을 어찌 보물로 칩니까.”

하고 물으니, 지정은,

 

참 그렇습니다. ()의 대야와 주()의 술잔은 그 해독이 만고에 내려와 후세의 일 좋아하는 자들이, 글 읽는 방이나 그림 그리는 마루나 위신을 높이는 방 치장에 이렇게 상서롭지 못한 그릇 아니고는 벌여 놓을 줄 모른답니다. 감상가들은 역력히 이것을 알아내는 것으로 박식하다 하였고, 수장가들은 부지런히 모아들이는 것으로 취미를 삼습니다.”

한다. 나는,

 

장군 댁에도 역시 볼 만한 고기(古器)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는 무인(武人)이라 능히 이런 것을 사 모을 수도 없고 대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묵은 물건도 있을 수 없으나 다만 손바닥만 한 옛날 벼루 하나를 가졌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는 동파(東坡)가 손수 만든 것이라 하며 원장(元章 () 미불(米芾)의 자)의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또 원풍(元豐 ()의 연호) 연간에 구리로 만든 푸른 금잔이 있습니다.”

한다. 내가 한번 구경하기를 청하자 지정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지금은 객지에 와서 묵고 있는 처지인즉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제가 듣기에는 강남(江南)에서 나는 서화와 기완은 교장(巧匠)들이 위조한 것이 많다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렇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그릇 두 개도 창문(閶門 항주(杭州)에 있다)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고 어찌 보증하겠습니까. 저는 본래 감식이 깊지 못하여 바보 형세를 면치 못합니다.”

한다. 나는 다시,

 

활불은 참으로 그러한 행동이 있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무슨 행동이란 말입니까.”

한다. 나는 종이에 양() 자를 써 보이니 지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신통하였습니다.”

하고는, 또 부탁하기를,

 

삼가 다시는 그(추사시(鄒舍是))를 찾아보지 마시오.”

하는데 지정의 뜻은 추를 마음 놓고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해서 말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또 묻기를,

 

소위 라마(喇嘛)란 무슨 종족(種族)인가요. 이것도 몽고의 딴 부족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아닙니다. 라마란 말은 서번에서 도덕(道德)을 일컫는 것으로, 소위 라마라 하면 이것은 모두 중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몽고 사람들이 중이 되면 모두 라마 복장을 차립니다. 북경의 웅화궁(雄和宮)에 있는 중들은 모두 라마라고 불러 만인이나 한인들도 라마에 몸을 붙여 중이 되는 자가 많으니, 이것은 의식이 풍족한 까닭이지요. 대체로 원()이나 명()의 시대는 번왕(番王)이 몸소 사신이 되어 조공(朝貢)을 바쳤는데 3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국경에 들면 항상 생기는 것이 많아서 혹 새하(塞下)에 머물러 있고 돌아가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홍무(洪武) 초년에는 번왕을 경중하고 사랑하기 비할 데 없이 하였고, 영락(永樂) 연간으로부터 무종(武宗) 때에 이르기까지는 대우가 더욱 융숭해서 수도 안에 있는 여러 절간에 머물러 두고 대접했습니다. 금년 봄에는 금으로 궁전을 세우고 활불을 맞아다가 살게 했지만 옛날 원()이나 명()의 시절에 비한다면 그 접대하는 품이 못한 데가 많을 것입니다. 서번의 여러 법왕(法王)들은 그 거처하는 곳이 황금 기와와 백옥 층대로, 문과 난간에는 침향(沈香)이나 강진(降眞 향나무의 일종)오목(烏木 화류) 같은 목재를 쓰고, 창에는 수정(水晶)과 유리를 달고, 벽은 모두 화제(火齊 운모(雲母)의 일종)나 슬슬(瑟瑟 구슬의 일종) 같은 구슬로 만들었답니다. 지금 거처하는 집을 그의 본집에 비하면 토계(土階) 무자(茅茨 요의 궁전을 가리킨다)와 같은 것이라 오랫동안 머물기를 즐기지 않고 굳이 돌아가기를 청합니다. 황제는 내년에 오대산(五臺山)으로 거둥을 할 때 친히 산서(山西)까지 전송을 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기일까지 이미 정했습니다. 그는 음률을 잘 알아 팔풍(八風)을 점치고 열 나라 말에 능하답니다.”

한다. 나는,

 

열 나라 말에 능하다면 무엇 때문에 이중으로 통역을 할까요.”

하고 물으니, 지정은,

 

비록 소리는 잘 안다 하지만 어찌 능히 제자리에서 말뜻이 통할 수야 있겠습니까. 또 그가 올 적에는 나무숲 속에서 향내를 맡고서 신령스러운 나무 한 주를 뽑아다가 분에 심어가지고 왔답니다.”

한다. 나는,

 

신령스러운 나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지정은,

 

이것은 이름을 천자만년수(天子萬年樹)라 하는데 엇걸린 나무와 뒤덮은 가지가 모두 천자만년(天子萬年)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었으니 장주(莊周)가 이른바 3천 년으로 봄을 하고, 3천 년으로 가을을 한다는 나무로서 혹은 이 나무를 명령(冥靈)이라고 한답니다.”

한다. 나는,

 

지금 집안에 있는 매화에서 연한 가지를 잘 잡아 옆으로 비스듬히 눕힌 거야 사람의 교묘한 재주이지 어디에 하늘이 만든 것입니까.”

하니, 지정은,

 

아닙니다. 잎새 옆에 있는 힘줄이 모두 천자만년(天子萬年)이란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하고는, 이어서 그 잎새를 그려서

 

나에게 보였다. 나는,

 

공은 일찍이 이 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 형상을 보지는 못했으나 다만 그 이름만 들었습니다. ()의 뜰에 있었던, ()이요, ()에 있었다는 영()과 같아서 온 사해에 향기를 퍼뜨려 만국이 다 같이 평안하고 사시에 언제나 꽃이 핀답니다. 꽃은 열두 잎으로 꽃봉오리가 처음 터지는 것으로써 초하루인 것과 초생달의 밝아지는 것을 알게 되고, 꽃이 하루 한 잎씩 피어 열두 잎이 다 피고 보면 보름인 것과 달의 이그러지는 것을 알게 되며, 꽃이 하루 한 잎씩 말라 들어가 꽃 꼬투리가 떨어지면 그믐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명수(蓂樹)라고도 부르고 또는 영수(靈樹)라고도 부릅니다. 또 일찍이 황제와 함께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찻물을 뿌리자 황제는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활불은 공손히 대답하기를, 방금 7백 리 밖에서 큰불이 나서 1만 호나 되는 인가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비를 좀 보내 불을 끄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다음날 부신(部臣)이 아뢰기를, 정양문(正陽門) 밖 유리창에서 불이 나서 망루(望樓)에까지 연소되어 화세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인력으로는 끄지 못하겠더니 마침 대낮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졸지에 큰비가 동북방으로부터 몰려와서 즉각에 불을 껐다 하니, 대개 차를 뿌려 비를 보낸 시각이 꼭 불났던 때와 맞았답니다.”

한다. 나는,

 

나도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도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난파(欒巴)도 술을 뿜어 비를 만들었다는데 이것이 무슨 기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북경으로부터 이곳까지는 4백여 리인데 7백 리란 말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지정은,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험이 신통하다는 것이지요. 대체로 이곳은 북경으로부터 7백 리인데, 인조(仁祖 () 고종의 별칭)가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고 보니 화석(和碩) 친왕(親王)을 비롯하여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다들 발섭(跋涉)하기를 꺼리게 되었으므로 특히 각 참()의 이수(里數)를 줄여서 4백 리로 만들어 항상 말을 달려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군이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운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다. 내가 지정과 말할 때는 매양 동점(東漸)하는 교화와 사해에 퍼지는 문교(文敎)를 칭송하였으므로 그는 나와 더불어 말하기를 즐겨했던 것이요, 또 추생이 망발을 하였으므로 짐짓 장황스레 말을 늘어놓아 나로 하여금 청각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대궐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한 다락집에 올랐더니 거기에 웬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다가 나를 보고는 수저를 놓고 옛 친구나 만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잡아 맞으면서 자기 의자에 앉기를 청하고, 자기는 딴 의자를 이끌어서 마주 앉아 각각 성명을 써 보였다. 그의 이름을 보니 파로회회도(破老回回圖), 자는 부재(孚齋), 호는 화정(華亭)인데 지금 강관(講官)의 직책에 있었다. 나는 그가 만주 사람인 줄 알고 물었더니 몽고 사람으로서 종이를 만지는 것이라든가 글씨를 속히 쓰는 것을 보니 매우 솜씨가 정민했다. 나는,

 

군은 박명(博明)이란 사람을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내 아우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정균(潘庭筠)을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일찍이 무영전(武英殿)에서 한 번 본 일이 있습니다.”

한다. 박명은 박식한 데다가 글씨를 잘 써, 나는 수십 년래로 그의 필적을 많이 보았던 터라, 그가 같은 몽고 사람이기에 물어 본 것이요, 또 그는 현재 강관의 직책에 있다기에, 반의 소식을 물어 그가 사는 집이 어딘지를 알고자 했더니, 반과는 그다지 친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세상에는 세 가지 교가 있는데, 귀국에서는 무슨 교를 가장 숭상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재(孚齋),

 

어찌 중국 같은 큰 나라로서 세 가지 교만 있겠습니까. 그 도를 행하는 자는 모두 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귀국은 몽고이지요. 중국을 이른 것이 아닌데요.”

했더니, 부재는,

 

저는 중화(中華)에서 생장하여 사막(沙漠)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그도 대국의 한 모퉁이겠으니 마땅히 우리 도가 성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무릇 몇 교나 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유교가 있을 뿐입니다.”

했다. 부재는,

 

인생의 무엇이 유교가 아니리요마는, 유교라고 부르고 보면 이미 구류(九流)의 열에 물러서게 되니, 유교같이 광대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세 가지 교라는 좁은 틈에 끼어 유() 자 하나로써 끝을 맺으니, 이것이 이단을 조장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다. 이때 마침 회회(回回) 사람 몇이 와서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저 사람들도 서번의 부락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닙니다. 회회 사람들은 당()의 시대에 회흘(回紇)이라고 불렀는데 당에 공을 세웠고, 또 역시 중국의 큰 걱정거리가 되던 나라로서 회골(回鶻)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대(五代) 시절에는 서쪽으로 돌궐(突厥) 땅을 침입해서, ()의 서역(西域)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소위 청진교(淸眞敎)를 행했으니, 이 역시 이단 중의 한 교입니다. 천지 사이에는 다만 우리 도가 있을 따름인데, 우리 도의 일단(一端)을 얻은 자가 스스로 한 교를 만들어 부릅니다. 우리들 도를 배운 사람들은 바로 우리 도라고 부를 것이지 유교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한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은 저 사람을 대해서 부르는 말이니, 우리와 저 사람이 서로 대하게 될 때에는, 상대와 내가 서로 형성되는 터라 우리라는 한 편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자신을 우리에만 국한한다면, 우리와 상대자 사이가 공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이 천지 사이에 가장 공변된 이치인데, 또한 우리 한 사람의 물건을 만들어 딴 사람이 와서 엿보지도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오도(吾道)라는 두 자를 확연(廓然)히 크게 공변된 칭호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서는 이미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만, ()에 이르러서는 어찌 도를 닦는 것이 교라(중용에 나오는 말)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교(文敎)니 성교(聲敎)니 명교(名敎)니 하는 것은 모두 성인의 교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도 교라 하고 저것도 교라고 하여 이단과 서로 혼돈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교라는 글자가 장차 없어질 판입니다. 지금 우리 도라고 부르는 것을, 저들도 역시 그 교를 가져다가 우리 도라고 부르고 보면, 나중에는 우리 도까지 삭제해 버리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부재는,

 

그런 일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선비들은 이단이란 것이 우리 도의 한 끝인 줄을 모르고서 분분하게 배격하다 보니, 저들도 비로소 앙연(昻然)히 머리를 쳐들어 우리 도와 대치하려 합니다. ()()이나 노()() 등의 말은 모두 우리 도에 있는 말이요, 더구나 불교의 인과설(因果說)은 우리 도로서는 가장 깊이 배척하는 바이지만, 그 실상인즉 우리 도에서 먼저 말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인과(因果)란 윤회(輪回)한다는 것과 다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닙니다. 인과설이란 다만 어떤 일에 인연이 되면 어떤 것이 공()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서, 비유하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원인이 되고 거기서 나는 싹이 결과가 되는 것이요, 밭을 매는 것이 원인이라면 수확하는 것이 결과가 되는 것이요, 나무를 심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 그 꽃은 원인이 되고 열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가면 길하고 역리를 따르면 흉하게 되는 것(서경에 나오는 말)이니, 이것이 우리 도의 인과로서, 옳은 길과 역리는 원인이 되고, 길하고 흉한 것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또 길흉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림자와 소리처럼 따르고 좇는 사이에 부응(孚應)하는 영험이 이같이 빠를 수야 있겠느냐고 합니다. 또 착한 일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 있고, 착하지 않은 일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을 것(역경에 나오는 말)이니, 이는 우리 도의 인과입니다. 그러나 재앙과 경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반드시 남음이 있다고 하는데, 이 반드시 남는 것을 본 것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불교를 하는 자도 처음에 인과를 말한 것은 지극히 고명했지만, 다음에 우리 도에서 좋고 나쁜 일에는 반드시 보응(報應)하는 자취가 있다는 것을 보고는 윤회설(輪廻說)로 바꿨으니, 실상 우리 도에서는 병통으로 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로운 것이 내려지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이 내린다는 말도 우리 도의 인과설인데, 그렇다면 그 내려 주는 자는 누구일까요. 태서(泰西)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공경한 데 두는 것이 심히 두터우면서 불교를 공박하는 데 더욱 힘쓰지만, 오히려 천당지옥의 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도에서 한 마음으로 월()을 대한다는 말을 듣고 임()했느니 감()하느니 보느니 듣느니 하여 분명히 주재(主宰)하는 것이 있다 하고, 재앙과 상서를 내린다는 내릴 강() 자를 가지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대체로 불가에서는 윤회설도 없었는데, 중국 사람이 불경을 번역할 때에 그 말이 다르고 글도 서투르고 보니 형용하기가 어려워서, 보응설(報應說)과 윤회설로 번역하고 그 위에 인과설을 가져다가 관련시켰던 것입니다. 후세에 와서 선가(禪家)에서도 또 인과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를 불교의 조박(糟粕)으로 여겼으니, 이는 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지금 법왕이 말하는,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법은 윤회의 증거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재는,

 

아닙니다.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법은 윤회설과는 다릅니다. 소위 윤회설이란, 곧 여기 맹수(猛獸)가 있어 홀연히 불성(佛性)을 품게 되면 다음 대에는 좋은 갚음을 입어 착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요, 오늘의 중생(衆生) 중에도 짐승의 행실을 하는 자가 있으면 후생에 가서는 나쁜 보복을 받아 반드시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하는 말에 불과한 것으로, 조잡하고 어리석고 천박한 말들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는 끊어지지 아니하여 / 孝子不匱

너와 같은 무리를 길이길이 주시리라 / 永錫爾類

 

하였으니, 윤회설의 증거는 본래 이러한 것으로, 법왕이 말한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것은 때묻고 더러운 옷을 갈아입듯이 자기 몸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참으로 이러한 이치가 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부재는,

 

그가 주문을 가지고 기운을 움직이는 술법은 도가(道家)의 것과 같으나, 실상은 선가(禪家)에서 이르는 마선(魔禪)일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일은 있을 법도 하고 없을 법도 해서, 제 자신이 중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참과 거짓을 어찌 능히 알겠습니까. 옛날 내가 진남(鎭南)에 있을 적에 공사의 틈을 타서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태학사(太學士)아계(阿桂)에게 묻기를, ‘서장 땅에 들어가 본 자들이 지혜가 부족해서 이렇게밖에 알지 못한 모양인데, 장군은 명철한 분이니 그 일이 필경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했더니, 아공은 대답하기를, ‘그 사실이 반드시 있고 없음을 물어 볼 것도 못 됩니다. 만일 우리 집안에서 지극히 총명스러운 자식 하나가 났는데, 네댓 살 때부터 일호도 세상일을 알리지 않고, 날마다 늙은 스승과 탁월한 선비로 하여금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성현의 말로써 그 마음을 적셔 주고, 자란 뒤에는 먹고 입는 데 걱정이 없이 금옥과 금수 같은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물건들을 눈에 띄어도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하여 신명(神明)과 같이 공경하고 보면, 날마다 한결같이 도를 향하여 나갈 뿐이니 어찌 성현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늙은 중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여, 날마다 설법을 하고 부처를 극진히 존경하게 하여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세상 걱정으로 그 마음을 쭈그러지지 않도록 한다면, 또한 어찌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더이다.”

하였다.

저녁에는 형산을 찾아,

 

법왕이 다른 데 태어난다는 것이 윤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그것은 몸을 바꾸는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육신(肉身)이란 바람과 비, 또는 덥고 추운 데 침노되어 머리털이 희어지고 가죽이 쭈그러져서 늙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흙이나 물바람비 같은 것으로 화해 버리게 마련이지만, 소위 밝은 정신과 금강(金剛)의 보체(寶體)는 본래부터 젊고 늙는 것이 없이, 한 개비 장작이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비유하건대, 천 리 길을 가는 자가 자기 집을 짊어지고 가지는 못할 것이요, 반드시 숙소를 갈아 가면서 갈 것입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자던 주막집에 정이 들어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은 나무에 인연(因緣)하여 일어나서 잠시는 불과 나무가 서로 엉키어 기쁜 듯이 타다가도, 불이 다른 나무로 옮겨 붙을 때에 다시 먼저 타버린 재를 연모하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법왕이 다른 몸에 태어난다는 것도 다만 이런 말일 것이요, 윤회설이란 불가의 율서(律書)일 뿐입니다. 옛날 한()의 두 태후(竇太后 () 무제(武帝)의 황후)가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을 꾸짖으며 어찌 사공(司空)의 성단서(城旦書)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으니 이는 유가의 말을 율서로 본 것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윤회설은 당시의 임금들이 제정한 제도로서, 오복(五服)오형(五刑)이 모두 다 헌장(憲章)이 있어 경상(慶賞)과 위살(威殺)하는 것이 다 같이 문서를 따라서 공죄(功罪)도 보이기 전에 먼저 법문부터 갖춘 셈입니다. 불교를 하는 자는 세간의 공죄가 부당하고 상벌이 믿을 수 없다고 하여 발로 밟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기기 쉽다 해서 유명(幽冥)의 불칙한 데에 옮겨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속에서 징계하고 벌을 주려 하니, 옛 사람들의 이른바 남몰래 임금의 권세를 조종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유가에서는 또한 반드시 그들을 원수와 같이 공격하지는 않으니, 성인이 도로써 교양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또 천지는 한없이 크며, 풍속도 각각 다르고, 기운은 바르고 편벽된 것이 있으며, 이치도 경우에 따라 달라서, 마치 그곳에 담긴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고금 천하에 또한 윤회란 것이 없지 않으며, 또한 다른 몸에 태어나는 법도 없지 않고, 화식(火食)을 끊는 사람도 없지 않으며, 장생불사하는 사람도 없지 않고, 또 이러한 이치가 전혀 없다는 사람도 혹()한 탓이요, 이런 이치가 있다는 사람도 역시 혹한 탓입니다. 대체로 이런 이치가 왕왕 있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 왕왕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함부로 만 가지 이치에 맞추려 하거나 천하를 바꾸려 하는 것은 더욱 혹한 노릇입니다.”

한다. 나는,

 

한 이래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단이었으니, 진은 형명(刑名)으로도 오히려 능히 천하를 겸병(兼幷)했고, 한은 황()()의 도로써 족히 백성을 가멸지게 하였습니다. 성인들은 비록 이단이 인의(仁義)를 억누를까 하여 근심하지만, 오늘 법왕이 말하는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술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더라도, 그가 도리어 우리 유교에 의존하여 인의예지의 사이를 벗어나지 않고 인간 윤리를 근본으로 삼은 법칙 안에 설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요순의 도에까지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했다. 형산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입속으로 염불을 하는 것 같더니, 얼마 후에야 눈을 뜨고 빙그레 웃으면서,

 

선생님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이단과 우리 도를 비교해 보면, 비록 사정(邪正)과 수박(粹駁)의 분별은 있지마는, 그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어진 것을 행하며 잔악한 일을 물리치고 살육을 없애는 점은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법왕의 법술을 무슨 도라고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소위 황교(黃敎)라고 합니다.”

한다. 나는,

 

황교란 황()()의 도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황백(黃白) 비승(飛昇)의 법술을 말하는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천지간에는 별스러운 세상과 별스러운 사람도 있어서 그 도야말로 이름 없는 것도 귀하게 여기며, 맑고 참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그 사는 것이라면, 때를 맞추어 귀화(歸化)하는 것이 그 죽음이랍니다. 그 사는 것이 즐거울 것이 없고, 죽는 것이 슬플 것이 없이 번갈아 가며 환생(幻生)해서 만겁(萬劫)을 겪어도 변하지 않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아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그 모르는 것도 깨닫는 듯하여 혼돈(昏屯)히 법천(法天)에도 말이 없고, 난리나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꿈속같이 여기고 모든 사물을 요망된 것으로 보며, 모든 언어를 거짓으로 보고, 세상에 붙어사는 것을 모두 허탄한 것으로 보며, 사모하는 것을 장애로 보아, 부처도 아니요, 선술(禪術)도 아니며,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니, 이야말로 천지간에 별다른 세계를 꾸민 셈이요, 일종의 별다른 학문을 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지인(至人)이나 신인(神人)들의 도이며, 자기 자신도 없고 공리(功利)도 모르는 학문입니다. 자휴(子休)의 이른바 정신을 가다듬으면 백성이 병이 없고, 농사도 풍년이 든다는 말과, ()가 고산(姑山)분수(汾水)를 보고 망연히 그 천하를 잊어버렸다고 한 것이 곧 이 도 같은 것이니, 비단 서번 여러 나라들이 그 교에 복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몽고 지방의 여러 부족들도 이 교를 숭신(崇信)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본조(本朝)의 정치와 교화는, 위로는 당우를 능가하여, 성교(聲敎)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가 편안하여 국경 밖의 풍진은 항상 맑았습니다. 대개 그 싸우고, 죽이며, 침략하고, 도적질하는 것은 나라의 풍속에 꺼리는 바인즉, 역시 황교(黃敎)란 것이 도리어 중국 성화(聖化)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겠지요.”

한다. 이때 딴 곳에서 일이 있는 듯하기에 즉시 일어나서 여천(麗川)의 처소로 갔다. 여천은 기풍액(奇豐額)의 자요, 그는 만주 사람이다. 여천은 사천 어사(四川御史)단례(端禮)의 시, 칠언(七言) 50()를 내어 보인다. 이 시는 황제가 공작(孔雀)의 깃을 하사한 데 대하여 읊은 것이다. 무관이 사품(四品) 이상의 지위가 되면 모자 앞에 깃을 다는 법이요, 문관도 황제로부터 하사를 받으면 역시 이것을 달게 되므로 이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시를 보니 섬세하고 교묘(巧妙)하고도 고와서, 그 절향(絶響)이 만당(晩唐)과 호원(胡元) 때의 시체(詩體)가 있었다. 여천이 나를 보고 비평하라 청했지만 내 굳이 사양했더니, 여천도 역시 굳이 청한다. 대개 그는 내 재주와 식견을 보고자 함인데, 나도 역시 자신의 우졸(愚拙)함을 탄로하고 싶지 않아서 끝내 사양했던 것이다. 여천은 즉시 염()이 틀린 데를 세 군데나 지적하면서 다시 접어 탁자 위에 놓더니, 형산의 율시(律詩) 하나를 내어 보이면서 붓으로 함련(頷聯)의 대구인 연모(燕毛)와 웅장(熊掌)에 점을 찍으면서 웃고 하는 말이,

 

이건, 구시(狗屎)로군. 이 사람이 한 정사(政事)도 모호하기가 이 시와 같겠지.”

한다. 나는,

 

어찌 그리 경박합니까.”

했더니, 여천은 즉시 구시(狗屎) 두 자를 찢어서 입에 넣고 씹는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어른을 조롱하더니 그 벌로 개똥을 자시는구료.”

했더니, 여천도 역시 크게 웃었다. 조금 있다가 형산이 들어와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형산이 바로 나가기에, 둘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어느 날 여천이 명륜당(明倫堂)으로 산보를 하는데 한 사람이 대야를 들고 뒤를 따르니, 여천은 서서 낯을 씻고 수건질을 한 다음 다시 걸어가면서 나를 보고 멀리서,

 

박공.”

하고 부른다. 내가 바로 쫓아갔더니, 여천은,

 

아까 황제가 어사한 누른 비단으로 봉한 것을 조금 맛봅시다.”

한다. 나는 곧 돌아와서 병을 기울여 보니 꼭 한 잔쯤 남았기에, 손수 들고 갔더니, 여천은 웃으면서,

 

이것은 여지즙인데, 여지란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져 하루만 지나면 바로 향기와 빛깔이 변해서 만 분의 하나도 성하질 못합니다. 그러므로, 꿀에 담가 두어도 열에 아홉은 빛과 맛이 변하기 쉽습니다. 처음 나무에서 딸 때에는, 비록 입이 열이고 손이 열이라도 실로 그 맛을 형용하기 어렵지요. 저도 북경에 이르러서 이것을 하사받은 것이 한 번뿐이 아니어서, 어제도 또한 이것을 받았지요.”

하고, 인해 한 잔을 내어 소주 대여섯 잔에 타서 나에게 권한다. 내가 한 잔을 마시니, 맑은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달고 시원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내가 여천에게 잔을 돌려 권했더니, 여천은 머리를 흔들면서 굳이 사양한다. 나는 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이미 불계(佛戒)를 좇아서 술을 끊은 지 오래입니다.

하루 줄곧 먹어져라 여지도 삼백 낱을 / 日食荔支三百顆

영남 사람 된 이 내 팔자 무방코야 / 不妨常做嶺南人

라는 것은 곧 동파(東波)의 시입니다.”

하고, 그는 또,

 

저는 지금 얼사(臬司 안찰사(按察使))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이것을 먹습니다.”

하고는 또,

 

영남(嶺南)이란 옛날 귀양살던 곳입니다.”

한다. 어느 날 밤중에 달이 밝기에 여천과 함께 대() 위를 배회하다가, 밤이 깊고 이슬이 차서 여천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면서,

 

사신이 활불을 보지 않으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하고 묻는다. 나는,

 

사신은 조서(詔書)를 받들고 만나러 갔습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사신이 말에서 내려 도중에 앉아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그만두라고 했다니,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어정거리나요.”

하는데, 그 말로 보아 자못 무슨 관계가 있는 듯하고, 그 정실(情實)을 파보려 하는 것 같기에, 나도 갑자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천은,

 

사신의 반열 순서는 소문이 자자합디다.”

한다. 나는,

 

도중에 말에서 내렸다는 것은,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통관의 말에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꼭 오게 되었다고 기다려서 같이 가는 것이 옳다 하기에, 궁성(宮城) 밑 나무 그늘 아래서 말에서 내려 피서(避暑)하면서 군기 대신을 늦도록 기다리다가, 갑자기 분부가 내린 까닭에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이요, 일부러 자신이 늦게 온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여천은,

 

사신이 책망을 당할 뻔하였고, 예부(禮部)의 여러 대인(大人)들은 이 때문에 겁을 내어 식사를 폐하고 있는데, 어제는 다시 황제의 은지(恩旨)를 들었으니, 이것은 세상에 없는 성전(盛典)입니다. 고려는 마땅히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더욱 굳게 해야 할 것이요, 두 대인도 서로 은총을 치하하여야 할 것입니다. 묘중(廟中)에서 덕대인(德大人)을 만났더니 기쁨을 이기지 못합디다.”

한다. 나는 놀라고 괴이함을 깨닫지 못하여 천천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대국과는 한 집이나 같은 터라, 이제 저와 공은 이미 안팎의 구별이 없지만, 법왕(法王)에 이르러서는 이는 서번 사람이고 보니, 사신으로서 어찌 감히 선뜻 만나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인신(人臣)으로서는 사사로운 외교가 없다는 의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번 성상(聖上)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보니, 사신이 또한 어찌 감히 가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천은,

 

진실로 의당한 말씀입니다. 어제 사신이 활불에게 절했나요.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성지를 받고 절을 하였던가요.”

한다. 실상 사신은 활불에게 절을 한 적은 없었으나, 그의 묻는 말이 몹시 깊은 의미이기에 감히 절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어 붓을 쥔 채 주저하고 있는데, 여천이 먼저,

 

조서를 받들고 갔으니, 응당 성은에 숙배(肅拜)한 것이나 같겠지요.”

하고는 또,

 

존형(尊兄)도 활불에게 절을 했던가요.”

한다. 나는,

 

다만 망견(望見)하였을 따름이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망견(望見) 두 자를 가리키면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활불에게 아첨했다는 말이지요. 존형은 이미 분부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옷을 거꾸로 입고 뛰어나갔습니까.”

한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이내 사과하기를,

 

관광(觀光)하는 데 미쳐서 그런 생각을 못했군요.”

하였다. 여천은 또 크게 웃으면서,

 

그렇지요. 진실로 어진 분에게 행동이 완벽하기를 따졌음에 불과하니 만 번 죄를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한다. 나는,

 

저는 이미 만 리 길에 관광차 나선 터라,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따라가서 금전 옥루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여천은,

 

그렇지요.”

하고는 또,

 

저의 전신(前身)은 본래 중입니다. 뒤에는 일찍이 한 번 …… .”

하고는, 수십 자를 먹이 마른 붓으로 바삐 써서 뜻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침 촛불에 담배를 붙이느라고 자세히 보지 못하고 막 다시 보려 하는데, 이미 촛불을 이끌어 태워 방바닥에 던져 버리면서,

 

저는 본래 유발(有髮)한 늙은 비구(比丘)입니다.”

한다. 나는,

 

공은 일찍이 활불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친왕(親王)이나 액부(額駙)몽고왕(蒙古王)이 아니면 감히 볼 수 없답니다.”

하더니 또,

 

저는 유학자의 갓을 쓰고 유학자의 옷을 입은 자로서, 평생에 흙으로 만든 고불(古佛)에게도 절을 안 했는데, 어찌 육신(肉身)의 가짜 부처에게 절을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유발(有髮)이니 관유(冠儒)니 하는 말을 보고 실소(失笑)함을 금하지 못하여 굵다랗게 권주를 쳤더니, 여천은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으로 역시 크게 웃으면서 즉시 태워서 방 아래로 던진다. 나는,

 

공은 자신을 스스로 유학자라고 하면서, 또 말마다 늙은 비구니 머리 있는 중이니 하는 것은 어찌된 셈입니까. 딴 사람을 부처에게 아첨을 한다고 책을 잡아, 저로서 본다면 가위 가불(假佛)의 제자(弟子)라 할 수 있으니, 힘써서 부처나 배우시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으면서 가불 제자란 구절에 크게 권주를 치고는,

 

만일 형이 재물이 많았다면, 저는 반드시 단골 손님을 삼았을 것이요.”

한다. 나는,

 

그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웃으면서,

 

말 빚을 잘 갚으니까요.”

하고 또,

 

한창려(韓昌黎)도 늙을 지경에는 마침내 선학(禪學)을 즐겼다지요.”

한다. 나는,

 

양명(陽明 ()의 왕수인(王守仁). 양명은 호)의 학문은, 비록 편벽되기는 하지만, 창려와 같이 희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신건백(新建伯 왕수인의 봉호)이 명분과 이론은 자못 성하고, 그의 부처를 배척하는 것은 깊이 기골(肌骨)에 사무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쾌하게 해 줄 뿐이요, 창려의 장맹(壯猛)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또,

 

재 마루턱 위 구름을 보고 집을 생각하며, ()에 쌓인 눈을 보고 말을 걱정했다는 말은, 이미 지난 일을 뉘우쳤던 것이지요.”

한다. 나는,

 

지금 세상의 문장 대가로서 이 두 늙은이에 비교할 만한 이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대답하지 않고 이내 붓장난으로,

 

()은 곧 색()이요, 색도 역시 공이지요.”(불가의 말이다.)

한다. 나는,

 

나는 너요, 너는 나로다.”

하였더니, 여천은 앞으로 와서 내 손을 잡고 한참 있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또 내 가슴을 가리키더니 이내,

 

그 중의 상모가 어떻습디까.”

하고 묻는다. 나는,

 

여래존자(如來尊者)의 상과 비슷합디다.”

하였더니, 여천은,

 

응당 살이 쪘겠지요.”

하고는 탐() 자를 크게 쓰면서,

 

구하지 않는 것이 없고 취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지요.”

한다. 나는,

 

출가승(出家僧) 같지도 않은데 무슨 계율(戒律)이 있을까요.”

하였더니, 여천은,

 

즐기지 않는 것이 없지요. 약대돼지거위오리를 모두 먹기도 하려니와 나귀를 통째로 먹으니, 살이 찔 수밖에 없잖아요.”

한다. 나는,

 

탐색(貪色)도 하나요.”

하고 물으니, 여천은,

 

그것 한 가지만은 범하지 않는가 봅디다.”

한다. 나는,

 

법술이 신통한가요.”

하고 물었더니,

 

전혀 없답니다.”

하고는 또,

 

완적(阮籍)의 후신이 안 태사(顔太師), 안태사의 후신이 포염라(包閻羅), 포염라의 후신이 악무목(岳武穆)이라 한다니, 이것은 간사한 사람들이 가르친 말이지요.”

한다. 내가 지정이 말한 오색경(五色鏡) 이야기를 물었더니, 여천은,

 

과연 그런 것이 있다고 합디다. 그런데 화제(火齊)로 만든 거울이라 합니다.”

한다. 다시 만년수(萬年樹) 이야기를 물었더니, 그는,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겼답디까.”

하고 묻기에, 나는 학성(郝成)에게 들은 대로 대강 이야기를 하고,

 

만일,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신령된 나무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으면서,

 

존형은 이런 허망한 나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하면서, ,

 

활불은, 임종(臨終)할 때에는 자기의 학문을 말 한 구절로 전한다고 했답니다.”

한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사대부와 더불어 함께 논 일이 많았지만, 여천같이 철저히 불교를 배척해서 말하는 자는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방문 앞에 서 있노라니, 여천이 거울을 가지고 자기를 비춰 보고 다시 와서 내 얼굴을 비치다가, 또 장난으로 내가 차고 있는 주머니에 든 연주(聯珠)를 만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유가가 가질 물건이 아닌데요.”

하기에, 나는,

 

이것은 갓끈입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좀 빌려 보아야 믿을 수 있지요.”

한다. 즉시 주머니 속에서 꺼내 보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었다. 대개 그는 처음에 그것을 염주(念珠)로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벽에 걸린 조주(朝珠)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무슨 물건인가요.”

하였더니, 여천은,

 

이것은, 국가의 명기(名器)로서 없을 수 없는 물건이외다. 대개 조복(朝服)을 입으면 목에 염주를 거는 까닭에 이것을 조주라 하며, 그 값이 천만 냥이 되기도 한답니다. 우각노(于閣老) 민중(敏中)의 자는 내재(耐齋)인데, 금년에 죽었지요. 7월에 그 집 재산을 몰수해서 파는데, 조주 네 개 값이 은() 3 7천 냥이더랍니다. 그 값이 너무 많아서, 감히 사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하였다.

 

 

[D-001]네 가지 과목 :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

[D-002]자막(子莫) : 전국 때 고집쟁이.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나온다.

[D-003]호광(胡廣) : 후한의 정치가. 자는 백시(伯始). 모두들 천하에 중용을 지키는 이는 호공(胡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칭찬이 있었으나 그 뒤에는 일을 잘못해서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D-004]() : 전국 때 저명한 사상가 묵적(墨翟). 그는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제창하였다.

[D-005]() : 역시 전국 때 철학자인 양주(楊朱). 극단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제창하였다.

[D-006]담인(噉人) : 활불을 가리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 하여 모욕하는 말이다.

[D-007]양련진가(楊璉眞加) : 원 세조 때에 강남 석교(釋敎)의 총통이 되어서 송조의 임금과 대신들 무덤을 판 것이 백 한 곳이요, 미녀와 보물을 받은 것이 많았다. () 박영철본에는 가()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D-008]소소(宵小) : 작고 가늘다는 뜻. 곧 사람으로 말하면 소인을 소소배(宵小輩)라 한다.

[D-009]팔풍(八風) : 팔음(八音)과 같은 뜻으로 팔풍지음(八風之音)’의 준말.

[D-010]이어서 …… 보였다 : 그 그림은 여러 본에 다 있는데, 여기에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복사하여 실었다.

[D-011]() : 그 잎의 나고 떨어짐으로써 월력을 대신했다 한다.

[D-012]() : 곧 위에서 말한 장주의 명령(冥靈).

[D-013]효자 …… 주시리라 :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편(旣醉篇)에 나오는 두 글귀.

[D-014]마선(魔禪) : 불교의 참선 중에서 정통파가 아닌 참선.

[D-015] ……  :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뚱이를 구성하는 사대(四大) 원소.

[D-016]옛날 …… 꾸짖으며 :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이 신공(申公)을 맞이하여 명당(明堂)을 짓고 유학을 숭상하려 하였으나, 두 태후는 황()()를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경제에게 꾸지람을 하였더니, 경제는 조관과 왕장을 가두어서 스스로 죽게 하였다. 성단서(城旦書)는 형서(刑書)를 이르는 말.

[D-017]형명(刑名) : 유가의 인의(仁義)와는 달리 강력한 형법으로써 국가를 다스리려는 정치의 이론.

[D-018]자휴(子休) : 남화경(南華經) 중에는 연숙(連叔)으로 되었으니, 이는 오기인 듯하다.

[D-019]정신을 …… 잊어버렸다 : 남화경(南華經)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나오는 말. 가상적인 인물 연숙의 말을 인용한 것.

[D-020]() : 율시(律詩)에 있어서 평측(平仄)을 보는 원칙.

[D-021]함련(頷聯) : 율시 팔구(八句) 중의 다섯째 구와 여섯째 구.

[D-022]한창려(韓昌黎) : 당의 저명한 유학자요, 문학가인 한유(韓愈). 창려는 봉호.

[D-023]재 마루턱 …… 걱정했다 : 한유(韓愈)의 시에, “운횡진령가하재(雲橫秦嶺家何在), 설옹남관마부전(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구절이 있다.

[D-024]나는 …… 나로다 : 왕수인의 시에, “칠십년전왕수인(七十年前王守仁), 개문인시폐문인(開門人是閉門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D-025]완적(阮籍) : ()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 자는 사종(嗣宗).

[D-026]안 태사(顔太師) : 당 현종(唐玄宗) 때 저명한 서예가요, 충신인 안진경(顔眞卿). 태사는 벼슬이요, 자는 청신(淸臣).

[D-027]포염라(包閻羅) : 송 인종(宋仁宗) 때의 저명한 법관인 포증(包拯). 죽어서 염라왕이 되었다 한다.

[D-028]악무목(岳武穆)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저명한 충신 악비(岳飛). 자는 붕거(鵬擧).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연암이 말하기를,

 

천하에는 여러 가지 잡종락(雜種落)이 많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왕이라 하여 모여든 자들을 많이 보았다. 몽고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생장한 자는 그 문장과 학문이 만인이나 한인에게 어깨를 겨누지만, 그 용모는 험상스럽고 커서 아주 달랐으니, 더구나 그 48부의 추장(酋長)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추장들은 저마다 각기 왕호를 가져서 좌현(左賢)이니 곡리(谷蠡)니 하는데, 저희들끼리는 서로 예속(隸屬)되는 법이 없이 세력을 나누고 힘으로 버티고 있어, 누구든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중국이 안연(晏然)히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몽고왕 두 사람을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보았고, 또 두 사람을 산장(山莊) 문 앞에서 보았는데, 그 중에도 늙은 왕 하나는 나이 방금 81세로서 허리가 굽고 피골이 썩은 것 같으며, 얼굴은 나귀처럼 길고 키는 거의 한 길이 되었다. 젊은 자는 귀신같이 생겼고, 종규도(鍾馗圖) 같기도 하였다. 서번 사람들은 더욱 사납고 날래고 추악해서, 괴상한 짐승이나 기이한 귀신 같아서 두려웠다. 회회국은 옛날 회골(回鶻)로서, 더욱 사나웠다 한다. 토사(土司 남방 묘족(苗族) 두목의 칭호)는 서번이나 회골에 비하면 웅장하고 큰 것이 대개 같았다. 아라사(鄂羅斯)란 것은 흑룡강(黑龍江)에 있는 부락으로, 집마다 반드시 개 한 마리를 두는데, 개마다 크기가 나귀만 하고, 목에는 작은 방울을 10여 개나 달며, 턱 밑에는 여러 가지 끈을 장식해서 멍에로써 수레를 끌게 했으니, 개 크기도 이 같거든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출입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개를 이끌고 옆눈을 뜨고 퉁소를 분다. 그들의 갓이나 의복은 신분에 따라 모양이 다르므로 분간하기가 쉽다. 대개 만주는 비록 많이 번식했지만 아직 천하의 반이 못 되니, 그들이 중국에 들어온 지는 이미 백여 년으로, 수토(水土)에 익고 풍기를 길렀으므로 한인과 다를 것이 없이 맑아지고 단아해져서 이미 저절로 문약(文弱)해지고 있으니, 오늘 천하의 형세를 돌이켜 볼 때, 그 두려운 바는 항상 몽고에 있고 딴 오랑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몽고의 강하고 사나움은 서번이나 회회국만은 못하나, 전장(典章)과 문물이 가히 중원(中原)과 서로 대항할 만하기 때문이다. 유독 몽고는 땅이 서로 접하기가 백 리도 못 되는데, 흉노(匈奴)돌궐(突厥)로부터 거란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국의 후예이다. 위율(衛律)과 중행열(中行說)이 이미 도망가는 소굴로 삼았거든, 하물며 그 전장과 문물이 아직도 옛날 원()의 유풍(遺風)을 가지고 있음에랴. 겸해서 군사와 말이 강장한 것은 본래 사막의 본질이고 보니, 천하의 법도가 한 번 해이(解弛)해지고 호흡이 잠깐 급해지면, 48부의 몽고왕들이 또한 한갓 강한 활을 가지고 새하(塞下)에 가서 토끼나 여우만 쫓을 뿐이리요. 내가 본 바로는 그들 추장이 이미 저와 같고 나와 더불어 이야기한 자들도 부재(孚齋)앙루(仰漏) 같은 사람은 모두 문학하는 선비이다. 옛날 유연(劉淵)이 새내(塞內)에 들어와 살 때에, 유주(幽州)기주(冀州)의 명사들은 많이 그를 따라갔다. 연의 아들 총()은 경사(經史)를 널리 알고, 약관(弱冠) 시절에 경사에 놀며 명사들과 더불어 사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슬프다. 천하가 한 번 흔들려 풀처럼 움직이고 바람처럼 일어나면, 어찌 연과 총의 무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을 알리요.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본 바 확실한 몇 사람이거든, 하물며 내가 얻어 보지 못한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함에랴. 이제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두뇌(頭腦)와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인후를 틀어막자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몽고는 이미 날마다 나와서 요동을 뒤흔들었을 것이니, 요동이 한 번 흔들리고 보면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고 보면 하황(河湟 영하성 지방)은 천하의 오른편 팔이라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보기에는 서번의 여러 오랑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농()()을 엿볼 것이다. 우리 동방은 다행히 바다 한 쪽에 궁벽되어 있어서 천하 일에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내 이제 머리털이 흰지라 앞일을 가히 보지는 못할 것이로되, 30년을 넘지 않아서, 능히 천하의 근심을 걱정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응당 나의 오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호()() 잡종의 일을 위와 같이 아울러 기록해 둔다.”

하였다.

 

 

[C-001]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종규도(鍾馗圖) : 당 현종(唐玄宗)이 꿈에 본 귀신을, 오도현(吳道玄)을 시켜 그린 그림.

[D-002]위율 …… 중행열(中行說) : 위율과 중행열은 한() 때 한을 배반하고 흉노에게 항복하여 이적의 행위를 한 자.

[D-003]유연(劉淵) : 오호(五胡) 때 전한(前漢)을 세운 흉노족 출신의 임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의 망령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지 못한 일은, 모두 반드시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 있는 3천 가지 금지(禁止)하는 일은 아니지만, 예절을 아는 자는 자연히 이것을 범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비단 딴 나라에 간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집에 앉아서 한 사람을 접대하고 한 물건을 접할 때에도 다 그렇지 않을 수 없으니, 소위 말이 충성되지 못하고 행실이 도탑지 못하면 비록 자기 고을에서도 살 수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다. 알지 못하는 자는, 이것은 연암이 남들에게 세상에 행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할 것이나,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바로잡는 법이 본래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한 개의 반선(班禪)이지마는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인데, 그 괴상망측한 것은 말로는 능히 그 모양을 짐작할 수 없고, 보아도 그 빛깔을 능히 감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말한 바는 한 날 한 자리에서 한 것이 아니요, 제각기 들은 바와 전한 바를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그 천심(淺深)과 상략(詳略)함이 이처럼 같지 않았다. 대개 모두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며, 칭찬하는 듯도 하고 조소하는 듯도 하며, 기괴하고 거짓말 같아서 모두 믿을 수가 없으나, 아무튼 이것들을 주워 모아서 쓰고, 조잡한 것들을 서술해서 한 편의 글을 이룬 것이다. 신령스럽고 현란스럽고 크고 곱고 비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섬세하고 교묘하여 평범하지 않은 이 문자는, 소위 활불이란 자의 법술의 내력을 특별히 깊이 캐어서 썼을 뿐만 아니라, 만나서 서로 이야기한 여러 사람들의 성정과 학식, 용모와 말솜씨 등도 똑똑히 나타내고 있었다.”

하였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다섯 …… 못한 일 : 연암의 심세편(審勢編)에 자세히 나온다.

[D-002]소위 …… 없다 :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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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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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반선시말(班禪始末)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반선시말(班禪始末)

 

1. 반선시말(班禪始末)

2.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3 중존평어(仲存評語)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서번(西番) 오사장(烏斯藏 서장 지방의 일부)의 대보법왕(大寶法王)입니다. 서번은 사천(四川)운남(雲南)의 지경 밖에 있고, 오사장은 대개 청해(靑海) 서쪽에 있는데, 옛 경()에는 당() 때의 토번(吐蕃) 옛 땅으로 황중(湟中)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다 합니다. 혹은 반선을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는데, 소위 삼장(三藏)이 바로 그 땅입니다. 반선액이덕니는 서번 말로는 광명(光明)신지(神智)와 같은 말인데, 법승(法僧)들이 말하기를, ‘그의 전신(前身)은 파사팔(巴思八)이라 하여 그 말에 허탄하고 이상한 것이 많으나, 도술(道術)이 고명해서 때로는 징험(徵驗)이 있다고도 합니다. 대개 파사팔이란, 토파(土波)의 계집이 새벽에 나가서 물을 긷다가 웬 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찼더니, 얼마 있다가 점점 기름으로 엉키며 이상한 향기가 나고, 먹으면 맛이 좋으면서 곧 사내의 생각이 나더니 무엇이 감촉되고 파사팔을 낳았는데, 그는 나면서부터 신성했다 합니다. 원 세조(元世祖)가 사맥에 있을 때 그가 어려서부터 능히 능가경(楞伽經 불경의 일종) 등을 1만 권이나 왼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니 과연 지혜가 있고 명랑하며, 전신이 향기롭고 걸음걸이는 천신 같으며, 목소리는 율려(律呂)에 맞는지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여래를 본 것같이 기뻐했으며, 당시 요()()와 같은 모든 어진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했습니다. 능히 소리를 맞춰 몽고의 새 글자를 만들어 천하에 반포하매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했으니, 이것은 불교의 존호요, 국토를 가진 왕의 작위는 아니었으나, 대개 법왕의 이름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죽자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대원제사(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라는 호를 하사했습니다. 그 뒤에 청산압마(淸繖壓魔)라는 놀이가 있어, 군사 수만 명을 내어 비단 바지와 수놓은 도포를 입고, 수레나 말에는 깃대를 달고 보물로 일산을 만드는 등 모두 금주(金珠)와 보옥과 비단으로 장식하여 황성을 에워싸고, 사문(四門)을 지나고 나서 다시 서번과 한()의 음악으로 산()을 맞이하여 궁중으로 들이는데 이것을 파사팔교(巴思八敎)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는 본래의 교지와는 크게 틀려, 기괴하고 요란해서 귀신의 도까지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황제와 후비와 공주들이 모두 소식(素食)을 해 가면서 산을 맞아서, 막배(膜拜)를 하고 억조 창생들의 복을 비는데, 이것을 소위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巴思八)을 만나는 놀잇날이라 하여, 심지어는 집을 파산하고 재산을 기울여, 만 리 길을 와서 보는 자도 있었다 합니다. ()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로써 일을 삼았으니, 그 교를 숭봉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시에 담파(澹巴)라는 중이 있었고 그 뒤에 가린진(加璘眞)이란 중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번 중으로서 비밀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파사팔교와는 달라서 능히 딴 사람의 마음을 알고 황제의 마음속까지 알아 맞힌다고 하여, 황제가 그들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시 남에게 태어난다는 말이 아직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초년에 황제가 서번 여러 나라에 널리 유시를 내리자 이에 오사장(烏斯藏)이 먼저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했는데, 그 왕은 난파가장복(蘭巴珈藏卜)이라는 중으로 오히려 황제의 스승이라고 자칭했습니다. 이때 여러 번지에 있는 황제의 스승과 대보법왕은 이미 자기 나라를 가진 칭호로 되어, ()이나 당()의 선우(單于)극한(可汗)의 칭호와 같았습니다. 황제는 제사(帝師)란 명칭을 모두 고쳐서 국사라 일컫고, 옥으로 된 도장을 하사하는데 황제가 친히 옥의 품질을 보살펴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고, 그 글에는 출천행지선문대성(出天行地宣文大聖) 등의 칭호를 썼던 것이나 역사가들이 이것을 생략했었습니다. 이 인()은 옥새와 같이 쌍룡이 얽힌 모습을 그렸는데, 그 뒤로 서번 여러 나라를 법왕이니 제사(帝師)니 하고 불러, 더욱 사신을 보내어 그 이름이 천자의 뜰에까지 들리게 된 자가 무려 수십 국으로서 이들을 모두 국사로 봉하고, 혹 대국사를 더해서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성조(成祖) 때에는 부마를 보내어, 서번의 중 탑립마(嗒立麻)를 맞고자 법가(法駕)를 하사했는데, 반은 천자의 쓰는 것이나 다름없이 참람되었고, 금은 보화와 비단을 하사한 것이 이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고제(高帝)와 고후(高后)를 위하여 절을 세워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경운(卿雲)과 감로(甘露)의 상서와 조수화과(花果)의 길조가 나타나니, 성조가 크게 기뻐하여 탑립마를 만행구족십방최승등여래대보법왕(萬行俱足十方最勝等如來大寶法王)에 봉하고, 금으로 짜고 구슬로 꿴 가사를 하사했으며, 그 막리들을 모두 대국사에 봉했습니다. 그가 가진 불가의 비법은 신통하여, 환술과 같은 것이 많아서 능히 조그마한 귀신을 시켜, 경각 사이에 만 리 밖에 있는 때 아닌 얻기 어려운 물건을 가져 오는 등, 그의 술법은 현란하고 괴망해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서장 각지에 대승(大乘)이니 대자(大慈)니 하는 법왕의 칭호를 얻은 자도 있고, 또 천교(闡敎)천화(闡化)라는 다섯 교왕이 있어서, 이 다섯 교왕의 조공 바치는 사신들이 서령(西寧)조황(洮潢) 사이를 쉴새없이 다니니 중국도 또한 일찍부터 그들의 번거로운 비용을 괴롭게 여겼으나, 실상은 넉넉한 대접으로 그들을 어리석게 만들었고, 넓게 왕호를 봉하여 제각기 조정에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을 남모르게 쪼개었지만, 서번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중국이 주는 상금을 탐내어 조공하는 것을 오히려 이로운 일로 여겼었습니다. 정덕(正德) 연간에는 중관(中官)을 보내어 오사장 활불을 맞아오는데 황금으로 공물을 하고, 황제황후와 왕비와 공주들은 서로 다투어 패물이나 노리개머리꽂이 같은 보물을 내어 그를 맞는 비용으로 쓴 것이 몇 만 금으로 셀 정도였다 합니다. 그들은 온 지 10년 만에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돌아갈 기한이 이미 다 되자 활불은 피해 숨어서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가졌던 보옥은 다 없어져 빈손으로 도망했다 합니다. 만력(萬曆) 때에는 또 신승(神僧) 쇄란견조(鎖蘭堅錯)라는 자가 있었는데, 역시 중국에 통하여 활불이라 일컬었다 합니다. 이것이 그 서번 이야기의 대략입니다.”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왕성(王晟)이 일찍이 나를 위하여 그 시말(始末)을 이같이 말했었다. 왕성의 집은 영하(寧夏)로 본래는 채씨(蔡氏)의 아들인데, 자기 말로는 그 숙부가 차()를 팔기 위하여 자주 국경 밖으로 왕래하면서 서번 지방 사정을 익혔다고 한다. 또 왕씨는 대대로 서방(西方)의 관리로 있었는데, 왕성은 어려서부터 자못 오사장의 시말에 밝았었다. 왕성은 금년 초에 평생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와 4월 회시(會試)에 몇 째 안 되게 합격했고, 전시(殿試)에 열셋째로 붙었다. 경서와 사기를 넓게 알고 기억하는 정신이 남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내가 우연히 창중(敞中)에서 만나 그의 뜻을 살펴보니, 자못 자기도 기이한 인연으로 아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처음 북경에 와서 교유하는 데도 넓지 못하고 기휘(忌諱)할 것도 알지 못하는 터이다. 그 이튿날 천선묘(天仙廟)로 나를 찾아와서 서번 중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필담(筆談)도 물 흐르듯 하여 박식함과 문아한 것을 자랑하는 듯하나, 그의 말을 역사와 전기에 고증해 보면 실지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파사팔을 비롯하여 중국에 들어온 자 중에 혹 어진 자도 있고 혹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는데, 활불이란 칭호는 없었고 활불의 칭호는 명()의 중년 때부터 비롯하여, 비록 그를 승왕(僧王)이라 불렀지만 모두 처자를 가지고 있어 그 아들로 대를 잇게 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아내는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봉함을 받으려고 요청한 일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하는 중국의 예우가 비록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음에도 특히 이것만을 아니한 것은 대개 그 왕들이 모두 중인 때문일 것입니다. 홀로 오사장만은 법승들이 서로 이어 스스로 왕이 되어 명()의 중년으로부터 그 후 오래도록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는 번거로움이 없이, 항상 대법왕(大法王)소법왕(小法王)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데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 것이니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법왕이 이미 죽고 나서 아무데서 난다면 아이가 과연 나게 되고, 아이의 살에서 과연 향기가 나는가를 알아보고 나서 즉시 의장을 꾸미되, 보배로운 일산과 구슬 늘인 양산과, 옥 가마금 수레를 갖추어 가지고 가서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맞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애당초 파사팔이 향기로운 수건에 감촉되어 난 때문이라 했습니다. 드디어 이를 길러서 소법왕으로 삼고 전에 있던 소법왕을 대법왕으로 삼는데, 지금의 반선인 대보법왕은 이미 14대째 환생한 법왕으로서 원()() 사이에 있었던 신승들은 모두 그의 전신이라 합니다. 그는 도중에 원의 시절에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의 교를 맞을 때의 고사(故事)를 역력히 이야기하면서, 이번에 자기를 맞이하는 예식이 간소한 의장과 악기를 써서 위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운휘사(雲麾使)와 난의십이사(鑾儀十二司)에 속한 의장을 모두 내게 하고, 태상시(太常寺)의 법악(法樂)과 청진악(淸眞樂)과 흑룡강(黑龍江)의 고취(鼓吹)와 성경(盛京)의 고취 등의 모든 음악으로서 교외에 나가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태상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세히 모릅니다.”

한다. 나는 또,

 

청진악은 어떤 것이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회자(回子)들이 뜯는 70줄 대슬(大瑟)입니다.”

한다. 나는,

 

흑룡강 고취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12구멍이 뚫린 용적(龍笛)으로 랄와가등(剌窩哥登)이라 하는데, 그 기계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한다. 나는,

 

운휘사(雲麾使)와 난의(鑾儀)란 어떤 것입니까.”

하였더니, 그는,

 

노마(路馬)에 견주면 어림없습니다.”

한다. 이때 주 거인(周擧人)이 옆에 있다가 훈상(訓象)훈마(訓馬)정편(靜鞭)골타(骨朶)종천(椶薦)비두(篦頭)선수(扇手)반검(班劍) 등을 열서(列書)하는데 그 종목이 수없이 많았다. 그가 이내 먹으로 지워 버려서 알 수 없게 되었다.

왕 한림(王翰林)의 자는 효정(曉亭)이다. 효정은 말하기를,

 

반선은 도중에 내각(內閣)에 대해서 말하기를, ‘조왕(趙王)이 보운전(寶雲殿) 동편 마루에서 나를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쓰던 중, 겨우 29자를 쓰자 때마침 가경문(嘉慶門)에 불이 붙어 조왕은 놀라서 정신이 산란하여 능히 다시 쓰지 못하였다고 하나 천하의 보배가 되었다 하며, 지금 그 글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을 학사(學士)가 전했다.’ 하는데 조왕이라 한 것은 조맹부(趙孟頫)를 말하는 것입니다. 패엽(貝葉) 29자를 옻으로 썼는데, 세상에서는 무슨 까닭에 29자만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처음에 성안사(聖安寺) 부처 뱃속에 감춰 두었던 것을 명() 천계(天啓) 연간에 강남 지방의 큰 장사치 ()’씨 성을 가진 자가 부처 몸뚱이를 고쳐 새기다가 이 글씨를 얻어서 몰래 갖고 갔더라고 합니다. 본조(本朝) 강희 연간에 황제가 남방으로 순행하는데 이과(李果)라는 늙은 선비가 이 글씨를 갖다가 바치매, 드디어 이것이 비부(秘府)에 간직되고 무근전(懋勤殿)에는 황제가 이 글씨를 모사(摹寫)한 것까지 간직해 두었습니다. 창정(滄亭)에 이르자 반선이 글씨를 대하게 되어, 이에 탑본(搨本)을 보였더니 아니라 하면서 글씨의 힘이 고르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패엽에 쓴 진적(眞蹟)을 보였더니 기뻐하면서 이 글씨야말로 진짜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효정은 또 말하기를,

 

영락천자(永樂天子)가 나와 함께 영곡사(靈谷寺)에서 분향을 하는데, 천자의 수염이 아름다워서 그 수염을 쥐어 품속으로 넣다가 갓끈을 건드려 구슬 두 개가 떨어져 없어지니, 천자가 노하여 태감(太監)위방정(魏方庭)을 꾸짖었는데, 이때 유리 국사(琉璃國師)가 흰 코끼리를 타고 따라 와서 육환장(六環杖)으로 절 문지기를 치니 그 문지기가 무서워서 우는데 국사가 손바닥으로 그 눈물을 받자 구슬 두 개로 되었고, 태감도 이로써 꾸지람을 면했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안 것은 유걸(劉傑) 오운비기(五雲秘記)에 실린 말을 읽은 것인데, 역대의 좋은 일, 궂은 일과, 제왕들의 수요를 모두 점괘(占卦)처럼 적어둔 것으로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어, 민간에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비부에 간직해 둔 것이 있을 뿐인데, 반선은 어디에서 이것을 알았을까 했습니다. 반선이 또 말하기를, 정덕 천자(正德天子)를 나의 표방(豹房)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정덕 시대에는 소위 활불이 일찍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은 모두 증거가 있고, 옛 사람들의 전기에도 그렇게 말했으나 수백 년 동안 내력이 끊어졌으니 모두가 황홀한 일입니다. 이로써 반선을 파사팔의 후신이니, 혹은 탑립마이니, 혹은 전대에 있던 활불들도 모두 반선의 윤회로 환생했다고 하는 것은 그 진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라 하여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원장이 갈 적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었고 큰 물을 건너 갔었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물은 말라버리고 촌락이 생겼으며, 당의 중엽에는 갑자기 토번(吐蕃)이란 큰 나라가 생겨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를 숭상했는지는 알 수 없고, 원의 초년에 불교가 북쪽으로 흘러 들어 번승(番僧)이 생겼는데, 그를 파사파(巴斯巴) ()는 팔()과 음이 같으니 역시 파사팔(巴思八)이다. 라고 불렀으나 이것도 별호요, 그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어 원의 초년에 제사(帝師)로써 대보법왕을 봉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조카로 대를 잇게 했습니다. 명의 초년에 여러 법왕들이 중국에 왔을 때 성조(成祖)는 당의 예법을 따서 모두 우대하였는데, 그 중들도 역시 환술(幻術)을 할 줄 알아서 더욱 높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라마는 대체로 명의 중엽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중에도 이상한 중이 있었으니 종객파(宗喀巴)라고 하는데, 역시 먼 곳으로부터 서장으로 들어온 자로서 이상한 술법이 있어, 한 번 보면 사람마다 놀라 자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또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말도 있었는데 모든 법왕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제자의 반열에 들기를 달게 여겼습니다. 종객파는 두 제자에게 그 대를 전했는데, 첫째는 달뢰라마(達賴喇嘛)이고, 둘째는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라고 했습니다. 달뢰라마는 이제 7대를 거듭 환생했고, 반선라마는 4대째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조의 천총(天聰 청 태종의 연호) 시절에 반선은 동방에 성인이 난 것을 알고 큰 사막을 넘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해왔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들을 보내서 조공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강희 때에 인조(仁祖)는 그를 중국으로 입조(入朝)시키고자 하였으나 일찍이 오지 못 했으며, 지난해에 만수절(萬壽節) 그는 스스로 주를 내기를 곧 금년이라 하였다. (스스로라는 것은 왕효정을 일컬었다.) 이 오면 입근(入覲)할 것을 청했으므로 우대해 주었으니, 대체로 이교에서 이름은 중이라 했지만, 실상인즉 도교(道敎)였습니다. 정신이나 술법이나 주문(呪文) 같은 것이 도가(道家)와 비슷하고, 그 글의 넓고 깊은 것과 과장해 말하는 것이 또한 도가에 비하여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외에 또 호도(胡圖)와 극도(克圖)란 자가 있으니, 모두 그의 제자로서 역시 56대 이상을 환생했다 합니다. 국왕의 스승으로서 신통력은 없고, 다만 선리(禪理)에 대한 것을 잘 말했다 합니다.”

했다. 경순미는 또 말하기를,

 

중의 이름을 가졌어도 실상은 도교라 하는 말은 곧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분명하지 못하기에 나는,

 

왕성(王晟)의 말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성의 말에는, 명의 중엽에 특이한 중이 있어 종객파라고 했는데, 그 맏제자는 달뢰라마요, 다음은 반선액이덕니라 하고, 그는 또 말하기를, ‘천총 때에 반선이 큰 사막을 넘어 조공하러 왔다.’ 하였으니, 천총은 명의 중엽으로부터 1백여 년이나 되었고, 지금까지는 또 1백여 년이 되니, 한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인가요, 아니면 4대째 환생해서 한 이름을 답습한 것일까요. 그리고 소위 호도니 극도니 하는 자는 또 누구의 제자입니까.”

하고 묻고는 나는 또,

 

국왕의 스승으로서 선리(禪理)를 잘 말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하고 물었으나, 순미는 모두 대답하지 않고 마침내 딴 이야기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 아래에서 어느 손 하나를 만나 서번 일을 물었더니, 손은 대답하기를,

 

서번은 옛날 토번(吐蕃) 땅으로, 장교(藏敎)를 숭상하고 있으니 역시 황교(黃敎)라고도 부르는데, 본래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러한 것으로, 중이란 명칭은 일부러 붙인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중이란 것은 실상 불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한다. 이제 중국의 불교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비록 조정의 귀관(貴官)들이라도 도리어 나에게 반선의 모습을 물어 보았으니, 대개 친왕(親王)이나 부마나 또는 조선 사신이 아니고서는 얻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경(燕京)으로 돌아오자 날마다 유황포(兪黃圃)진입재(陳立齋) 등 모든 사람들과 놀았는데, 그들은 일찍이 한 마디도 반선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물어보면 번번이 말하기를,

 

그건, 명 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고, ,

 

우리들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여 마침내 한 마디도 즐겨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과 함께 단가루(段家樓)에서 술을 마시다가 고 태사가 반선의 말을 바야흐로 꺼내려 하는데, 그 자리에 풍생(馮生 풍병건(馮秉健))이란 자가 있다가 눈짓을 하여 그치니, 이것을 나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 오래 있다가 들으니, 산서(山西)에 사는 포의(布衣) 하나가 일곱 가지 조목으로 상소했는데, 그 중에 하나로서 반선의 이야기를 크게 말했다가 황제가 크게 노하여, ‘살을 벗겨 죽이라.’ 했다 한다. 우리나라 역부(驛夫)들이 이것을 선무문(宣武門) 밖에서 많이 보았다 한다. 이로부터는 감히 다시 반선의 말을 물어보지 못했으니 비록 유황포진입재처럼 서로 친한 사이에도 그러했고, 더구나 산서 포의 선비는 성명도 알아볼 수 없었다. 혹은 상소를 올린 자는 거인(擧人) 장자여(張自如)라고 한다. 서번의 시말은 대체로 왕효정의 말만큼 자세한 것이 없는데, 이에 술을 뿌려서 불을 끄고, 물결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난파(欒巴)나 달마(達摩)의 지난 사적이므로 여기에 쓰지 않는다.

 

 

[D-001]황중(湟中) : 감숙 지방으로 흘러드는 서녕하(西寧河)의 좌우 서강족(西羌族)이 사는 곳.

[D-002]토파(土波) : 땅 이름인 듯하나 미상.

[D-003]() : () 때 사씨(史氏) 중에 명인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D-004]청산압마(淸繖壓魔) : 신을 맞아서 마귀를 누른다는 말.

[D-005]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D-006]이것이 …… 대략입니다 : “반선액이덕니 …… 대략입니다 이 단락은 왕성이 연암에게 일러준 말이다.

[D-007]노마(路馬) : ()는 큰 수레요, ()는 승마(乘馬). 시경(詩經) 채숙장(采菽章)에 나오는 말.

[D-008]훈상 …… 반검(班劍) : 이 여덟 가지는 황제가 거둥할 때에 동원하는 기물의 명칭.

[D-009]무근전(懋勤殿) : 자금성 대궐 안에 있는 전각. 그림과 글씨를 진열해 두는 곳.

[D-010] …… 보냈다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한 구절.

[D-011]원장 법사(元裝法師) :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중. 곧 현장 법사(玄裝法師). ()은 청의 어휘를 피한 것이요, ()은 장().

[D-012]난파(欒巴) : 후한 때의 도가(道家). 자는 숙원(叔元).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적이 말하건대, 옛날의 제왕들은 자기가 능히 배운 뒤에 그 사람을 신하로 삼았으므로 더욱 성스러웠고, 천자로써 필부(匹夫)를 벗 삼되 자기의 높은 것이 깎이지 않으므로 더욱 크게 되었으나, 후세에는 이러한 도가 없어졌음에 따라, 다만 호승(胡僧)이라든가 방술(方術)이라든가 비뚤어진 도라든가 하는 이단의 유에 대해서는 자기 몸을 낮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이제 그 일을 목격했거니와, 반선이 과연 어진 자라면 황금집은 지금 황제로서도 능히 거처하지 못하는 터인데, 저 반선이 무엇이기에 감히 안연(晏然)히 점령하고 있었을까. 혹은 말하기를,

 

명 이래로, ()의 토번 난리를 경계하여 반선이 오기만 하면 문득 봉하여 그 세력을 쪼개어 놓고, 그들을 대우하기를 신하의 예로 아니 했으니, 역시 유독 지금에 와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리라. 당시에는 천하가 처음으로 정해진 때로서, 뜻이 일찍이 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에서 그의 제사(帝師)에게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라고 호를 주었는데, 일인(一人)이란 천자를 가리킨 말이니, 천자는 만방(萬邦)에서 함께 임금으로 받드는 터에 천하에 어찌 다시 천자보다 높은 자가 있단 말인가. ‘선문대성지덕진지는 공자를 가리킨 말이니, 백성이 생긴 이래로 어찌 다시 공자보다 어진 자가 있단 말인가. 원 세조(元世祖)는 사막에서 일어났으니 족히 괴이할 것도 없겠지만, 황명(皇明) 초년에 맨 먼저 이승을 찾아 귀족들의 자질로 하여금 스승으로 섬기게 하고, 널리 서번의 중을 불러서 높이 대접하면서도, 스스로 중국을 낮추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지존(至尊)을 깎고 선성(先聖)을 욕뵈며, 참다운 스승을 억눌러 나라를 세우는 시초부터 이것으로 자제들을 가르쳤으니, 또 무슨 더러운 짓인가. 대저, 그 술법이란 능히 오래 살고 오래 본다는 것으로 이것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데, 이것으로 세속 임금들의 마음과 귀를 흐리고 말았을 뿐이다. 혹은,

 

()()의 제왕들은 자기 몸을 버리고 불가(佛家)의 종이 되었으니, 중이 천자보다 높아진 지가 오래긴 했으나, 다만 황금 궁전을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네 그려.”

라고 말하는 자 있으리라.

 

 

[C-001]반선시말후지(班禪始末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따라 추록하였다.

[D-001]백성 …… 있단 말인가 :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에 나오는 구절.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가 말하기를,

 

이는 대저 모두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글이나, 다음날 일대의 역사를 쓰려면 부득이 반선을 위해서 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지나가서 이 글만큼도 자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외국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 역사 쓰는 사람의 참고가 되기에는 인연이 없으니, 이것은 가석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3033504

 

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찰십륜포(札什倫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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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찰십륜포(札什倫布)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찰십륜포(札什倫布)

 

1. 찰십륜포(札什倫布)

2. 중존평어(仲存評語)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를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보았다. 찰십륜포란, 서번(西番) 말로서 대승(大僧)이 거처하는 곳이란 말과 같다.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부터 궁성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반추산(盤捶山)을 바라보고 더 북쪽으로 십여 리를 가서 열하를 건너면, 산을 의지하여 동산을 만들었고 언덕을 뚫고 산 모롱이를 끊어 산 뼈다귀만 드러내고 있는데, 저절로 언덕이 찢어지고 석벽이 깎여져 십주(十洲)와 삼산(三山)의 모양같이 바윗돌이 착낙(錯落)하여, 마치 짐승이 입을 벌리고 새가 날개를 펴서 구름이 흩어지고 우레가 터지는 듯한데, 공중에 다리 다섯이 놓였고 다리로부터 층계로 길을 내어 그 평평한 곳에 용과 봉을 새겼다. 길을 따라 흰 돌로 된 난간이 구부러지고 꺾이어 문까지 닿았다. 또 두 개의 각문(角門)이 있는데 모두 몽고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문에 들어서니 땅에는 벽돌을 깔아 층계로 세 길을 만들었는데, 흰 돌로 된 난간에는 모두 구름과 용을 새겼고 길은 한 다리로 합치게 되었다. 다리에는 구멍 다섯이 있고 대()의 높이는 다섯 길이나 되는데, 난간을 둘렀고 모두 무늬 있는 돌에는 해마(海馬)나 기린 같은 짐승들을 새겼는데, 비늘과 뿔과 갈기와 발굽들은 모두 돌 빛깔을 따라서 했다. 대 위에는 전각 둘이 있는데 전각은 모두 처마를 겹으로 했고 황금 기와를 이었다. 집 위에는 여섯 마리 용이 걸어 다니는 듯이 만들어졌는데 모두 황금으로 그 몸뚱이를 만들었다. 둥근 정자나 굽은 집과 겹쳐 있는 다락과 포개어진 전각이나 드높은 헌함과 층으로 된 행랑들은 모두 푸른빛초록빛자줏빛남빛으로 된 유리 기와를 이어 억천만금의 비용을 들였다. 채색은 신기루(蜃氣樓)를 능가했고, 아로새긴 솜씨는 귀신도 부끄러워할 만하고 헛 신령이 우레를 핍박하는 듯하고 어둡기는 새벽녘과 같았다. 동산 가운데는 새로 어린 소나무를 심었는데 산골짜기에 연해서 모두 곧고 크기는 한 길이나 되었다. 나무에는 종이를 매어 그 전에 심은 것을 표해 놓았다. 섞어 심은 기이한 화초는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그 이름도 알 수 없는데, 이때 바야흐로 죽도(竹桃)가 만개했다. 나마(喇嘛) 수천 명이 모두 붉은 선의(禪衣)를 끌고 누런 좌계관(左髻冠)을 쓰고 팔뚝을 내놓고 맨발로 문이 메도록 몰려드는데, 그들의 얼굴은 모두 칼로 깎은 듯, 검붉고 코가 크고 눈이 오목하며, 턱이 넓고 곱슬 수염에 손과 발은 사슬로 채우고 머리는 맨머리였다. 귀에는 금고리를 달고 팔뚝에는 용 무늬를 수놓았다. 전각 속 북쪽 벽 아래에는 침향(沈香)으로 높이가 어깨에 닿게 연꽃 탁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반선은 남쪽을 향해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누런 빛 우단으로 된 관을 썼는데 말갈기 같은 털이 달렸고 모양은 가죽신같이 생겨 높이가 두 자 남짓이나 됐다. 금으로 짠 선의(禪衣)를 입었는데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온몸을 옷으로 쌌다. 오른편 옷깃 겨드랑 밑으로 오른 팔뚝을 드러냈는데 장대하기가 다리만 하고 금빛이었다. 얼굴빛은 누렇고 둘레가 예닐곱 뼘이나 되는데 수염 난 자리는 없고, 코는 쓸개를 떼어 달아맨 것 같으며, 눈썹은 두어 치나 되고 흰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음침하고 컴컴해 보였다. 왼쪽에는 낮은 상 두 개가 있어 몽고왕 둘이 무릎을 연해 앉았는데, 얼굴은 모두 검붉으며 그 중 하나는 코가 뾰족하고 이마가 드높고 수염이 없었으며, 한 명은 얼굴이 깎인 듯하고 올챙이 수염에 누런 옷을 입었다. 중얼거리면서 서로 보고는 다시 머리를 들고 무엇을 듣는 듯했다. 나마 두 명이 오른편에 모시고 섰고 군기 대신(軍機大臣)은 나마의 밑에 서 있다. 군기 대신이 황제를 모실 적에는 누런 옷을 입었는데 반선을 모실 적에는 나마의 옷을 바꾸어 입었다. 내가 아까 황금 기와가 햇빛에 번쩍이는 것을 보다가 전각 속에 들어가니, 집 안은 침침하고 그가 입은 옷은 모두 금으로 짰으므로 살갗은 샛노랗게 되어 마치 황달병 걸린 자와 같았다. 대체로 금빛깔로 뚱뚱 부어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데 살은 많고 뼈는 적어서 청명하고 영특한 기운이 없으니, 비록 몸뚱이가 방에 가득하나 위엄(威嚴)을 볼 수 없고, 멍청한 것이 수신(水神)과 해약(海若)의 그림과 같았다. 황제가 내무관(內務官)을 시켜서 조서(詔書)를 전달하게 하는데 오색 비단 한 필을 가지고 반선을 보게 하여, 내무관이 손수 비단을 세 곳에 나누어 사신에게 주었다. 이것은 이름을 합달(哈達)’이라 하는 것으로, 대개 반선은 자기 말에 그의 전신(前身)이 파사팔(巴思八)이라 하고, 파사팔은 그 어머니가 향내 나는 수건을 물고 낳았으므로 반선을 보는 자는 반드시 수건을 갖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어, 황제도 매양 반선을 볼 때마다 역시 누런 수건을 갖는다 한다. 군기 대신의 처음 말로는, 황제도 머리를 조아리고 황육자(皇六子)도 머리를 조아리며 부마도 머리를 조아리니, 이번 사신도 응당 가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했다. 사신은 아침에 이미 예부(禮部)와 다투어 말하기를,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나 하는 것인데, 이제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番僧)에게 쓸 수 있겠소.”

하여 항의하였더니, 예부에서 말하기를,

 

황제도 역시 스승의 예절로 대우하는데, 사신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었을 적에야, 같은 예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했다. 사신이 즐겨 가지 않으려 하여 굳이 서서 다투니, 상서(尙書)덕보(德保)는 노해서 모자를 벗어 땅에 던지고, 몸을 던져 방바닥에 쓰러지면서 큰 소리로,

 

빨리 가, 빨리 들어가.”

하면서 사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때 군기 대신이 무슨 말을 하는데 사신은 못 들은 것 같았고, 제독(提督)이 사신을 인도하여 반선(班禪) 앞에까지 이르니, 군기 대신이 두 손으로 수건을 받들고 서서 사신에게 준다. 사신은 수건을 받아 가지고 머리를 들고 반선에게 주니, 반선은 앉은 채 수건을 받으면서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수건을 무릎 앞에 놓으니, 수건이 탁자 아래까지 늘어졌다. 차례로 수건 받기를 마친 다음에 반선은 다시 군기 대신에게 주니, 군기 대신이 수건을 받들고 반선의 오른편에 모시고 섰다. 사신이 막 돌아서려 하는데 군기 대신은 오림포(烏林哺)에게 눈짓을 하여 중지시켰다. 이것은 대개 사신으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사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머뭇머뭇 물러서서 검은 비단에 수놓은 요를 깐 몽고왕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앉을 때 조금 허리를 구부리고 소매를 들고는 이내 앉으니, 군기 대신은 얼굴빛이 황급해 보였지만 사신이 벌써 앉아버렸으니 또한 어쩔 수가 없는지라 숫제 못 본 체했다. 제독은 수건을 나누어 얻을 때 남은 것이 한 자 남짓하였는데 이것을 반선에게 올리면서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고, 오림포 이하 모두들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차를 몇 바퀴 돌린 뒤에 반선은 소리를 내어 사신이 온 이유를 묻는데, 말소리가 전각 안을 울려 독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숙여 좌우편을 고루 둘러 보더니, 미간(眉間)을 찡그리고 눈동자가 눈 속에서 반쯤 드러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굴리는 것이 시력(視力)이 나쁜 사람 같았다. 눈동자는 더 희어지고 흐릿하여 더욱 정광(精光)이 없어 보였다. 나마가 말을 받아서 몽고왕에게 전하자, 몽고왕은 군기 대신에게 전하고 군기 대신은 오림포에게 전하며, 오림포는 우리 역관(譯官)에게 전하니, 대체로 이것은 오중(五重)의 통역이다. 상판사(上判事)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뚝을 걷어붙이며,

 

만고에 흉한 사람이로군. 옳게 죽을 리가 없을 거야.”

하기에, 나는 그에게 눈짓을 했다. 나마 수십 명이 붉고 푸른 모직과 붉은 탄자와 서장 향()과 조그마한 금 불상을 메고 와서 등급대로 나누어 주는데, 군기 대신이 받들고 있던 수건으로 불상을 쌌다. 사신은 그 다음에 일어서서 나왔는데, 군기 대신은 반선이 하사한 모든 물건을 펴 보고 황제께 아뢰기 위하여 말을 달려 갔다. 사신은 문을 나와 560보쯤 가서 절벽을 등지고 소나무 그늘 모래 위에 둘러 앉아 밥을 먹으면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번승을 볼 적에 예절이 많이들 소홀하고 거만해서, 예부의 지도대로 못했으니 저이는 만승 천자의 스승인지라, 앞으로 우리에게 득실이 없을 수 없을 것이야. 그가 준 선물들을 물리친다면 불공하다 할 것이요, 받자니 또 명색이 없는 일인즉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당시의 일이 창촐간이라 받고 사양하는 것이 마땅한지 않은지를 계교(計較)할 여가도 없었고, 모두 황제의 조서에 매인 일인데다가 저들의 행사는 번개 치고 별 흐르듯이 삽시간에 끝내버렸기 때문에 우리 사신의 진퇴와 좌립은, 다만 저들의 인도에만 따를 뿐이어서 흙으로 뭉치고 나무로 깎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이다. 또 통역은 중역(重譯)이 되어 피차의 통관이 도리어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마치 벌판에서 괴상한 귀신을 갑자기 만난 듯 어떻다고 측량할 수 없었다. 사신은 비록 묘한 말과 익숙한 행동이 있었지만 장황스레 늘어놓을 수도 없었고, 저들도 역시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도 그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정사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유숙하는 집은 태학관(太學館)이라서 불상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 역관을 시켜 불상 둘 곳을 찾아보게 하라.”

고 했다. 이때, 번인(番人)한인(漢人) 할 것 없이 구경꾼이 성같이 둘러싸서 군뇌(軍牢)들은 몽둥이를 휘둘러 쫓았으나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들었다. 모자에 수정 구슬을 단 자와 푸른 깃을 꽂은 궁중의 근신(近臣)들이 와서 그 속에 섞여 서서, 염탐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돌(永突)이 큰 소리로 나를 불러,

 

사신께서 좋지 않은 기색으로 마당에 나앉아서 오랫동안 잘잘못을 의논하고 수군대시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공연히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하기에, 내가 돌아다 보니, 전에 황제의 조서를 전하던 소림(素林)이 내 등 뒤에 서 있다가 여러 사람 틈으로 나가 말에 올라 달려 가는 것이다. 여러 사람 중에 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은 모두 환관 나부랑이들이다. 박불화(朴不花)가 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원의 내시들은 우리나라 말을 많이 배웠고, ()의 시절에도 얼굴이 잘생긴 조선 고자들을 시켜 내시들에게 조선말 공부를 시켰으니, 지금 우리를 엿보고 간 두 사람도 어찌 조선말을 배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랴. 소림과 같이 있던 푸른 깃을 꽂은 자도 와서 말을 세우고 자못 오랫동안 있다가 갔는데, 그 왕래가 하도 빨라서 마치 나는 제비와 같았다. 사신과 역관들은 이 자들이 와서 엿듣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고 반선에게 받은 불상도 미처 처치하지 못했으므로,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모두 묵묵히 앉았는 판에, 황제는 어원(御苑)에서 매화포(梅花砲)를 놓고 사신을 불러 들어와 보게 하였다. 전각은 처마가 겹으로 되었고, 뜰에는 누런 장막을 치고 전각 위에는 일월과 용봉을 그린 병풍과 벌여 놓은 보물들이 심히 엄숙했다. 일천 관리들이 차서대로 섰는데 반선이 혼자 먼저 탁자 위에 앉으니, 일품(一品) 보국공(輔國公)들과 조정의 고관들이 모두 탁자 아래로 나아가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반선이 손수 한 번씩 이마를 어루만져 주자 그들은 일어서서 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천자가 누런 빛 작은 가마를 타니 다만 칼찬 56쌍 시위(侍衛)가 길을 인도한다. 풍악은 퉁소 한 쌍, 젓대 한 쌍, 징 한 쌍, 비파생황거문고와 구라파의 쇠 거문고 두세 대와 박자판 한 쌍이요, 의장(儀仗)도 없이 따르는 자는 백여 명쯤 되었다. 황제가 탄 가마가 앞에 이르자, 반선은 천천히 일어나 탁자 위에 몇 걸음 발을 옮겨 동쪽으로 향해 즐거운 빛으로 웃는 얼굴을 짓는다. 황제는 45칸 떨어져 가마에서 내려 빨리 쫓아가서, 두 손으로 반선의 손을 잡고 서로 흔들면서 마주 보고 웃고 이야기를 한다. 황제는 갓 꼭지가 없는 붉은 실로 짠 모자에, 검정 옷을 입고, 금실로 짠 두꺼운 요 위에 평좌(平坐)하고, 반선은 금 삿갓에 누런 옷을 입으며, 금실로 된 두꺼운 방석 위에 부처 모양으로 동쪽으로 나가 한 탁자 위에 앉는다. 둘의 방석은 무릎이 닿을 듯한데, 자주 몸을 기울여 서로 이야기할 적에는 반드시 둘이 서로 웃음을 띠고 즐거워했다. 자주 차를 올리는데 호부 상서(戶部尙書)화신(和珅)은 천자에게 바치고, 호부 시랑(戶部侍郞)복장안(福長安)은 반선에게 바치는데, 복장안은 병부 상서융안(隆安)의 아우로서 화신과 함께 시중(侍中)으로 귀한 품위가 조정에 진동한다. 날이 이미 저물자 황제가 일어서니 반선도 역시 일어나 황제와 함께 마주 서서, 둘이 서로 악수를 하고 얼마 있다가 등을 지고 갈라져 탁자에서 내려섰다. 황제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는데 나올 적의 차림대로 돌아가고, 반선은 황금 교자를 타고 찰십륜포로 돌아갔다.

 

 

[D-001]십주(十洲) : 중국 전설 중의 신선이 살고 있는 열 군데의 섬.

[D-002]삼산(三山) : 역시 전설 중의 신선이 살고 있는 세 군데의 명산.

[D-003]해약(海若) : 바다의 귀신. 남화경(南華經) 추수편(秋水篇)에 나온다.

[D-004]합달(哈達) : 나마교에서 예물로 쓰는 엷은 비단.

[D-005]박불화(朴不花) : 원 순제(元順帝) 때 곧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우리나라 환관으로 원에 들어가, 황후의 사랑을 받은 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말하였다.

 

목천자전(穆天子傳)으로부터 이하 한의 동방삭전(東方朔傳)》ㆍ《비연외전(飛燕外傳)》ㆍ《서경잡기(西京雜記) (() 유흠(劉欽)이 지음) □□□ 등 서적은, 모두 궁중 밖에서는 참견할 것이 못되는 여관(女官)들이 쓴 책이므로 일체 이것을 패관(稗官)으로 돌리지만, 모두 족히 당시 제왕들의 취미와 행동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실린 글은 무엇이라 일컬을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의 사대부들로서 반선을 얻어 보지 못한 자는 도리어 우리에게 그 모양이 어떻더냐고 물었으니, 이것은 그들의 뜻이 사람의 이목을 더럽히지 않고자 함인데, 우리는 그들의 외설된 일에 이끌려서 아무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가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 모두들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가한다.

[D-001]중존씨(仲存氏) : 연암의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자.

[D-002]목천자전(穆天子傳) : 주 목왕(周穆王)이 서역을 여행한 기록이다. 저자는 미상.

[D-003]동방삭전(東方朔傳) : 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의 골계적(滑稽的)인 일을 기록한 것. 저자 미상.

[D-004]비연외전(飛燕外傳) : 한 성제(漢成帝) 때 황후인 비연의 자매(姉妹)에 대한 고사. 영현(伶玄)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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