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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일신수필(馹汛隨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일신수필(馹汛隨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일신수필(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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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 62리다.

1.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2. 가을 7 15일 신묘

3. 북진묘기(北鎭廟記)

4. 거제(車制)

5. 희대(戲臺)

6. 시사(市肆)

7. 점사(店舍)

8. 교량(橋梁)

9. 16일 임진(壬辰)

10. 17일 계사(癸巳)

11. 18일 갑오(甲午)

12. 19일 을미(乙未)

13. 20일 병신(丙申)

14. 21일 정유(丁酉)

15. 22일 무술(戊戌)

16. 23일 기해(己亥)

17. 강녀묘기(姜女廟記)

18. 장대기(將臺記)

19. 산해관기(山海關記)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한갓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학문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의 평생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성인(聖人)이 태산(泰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보살핀다 하면 그는 곧 환망(幻妄)된 일이라고 배격할 것이며, 태서(泰西 서양(西洋))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地球) 밖을 둘러 다녔다 하면, 그는 괴이하고도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아아, 성인(공자를 가리킴) 2 40년간의 역사를 필삭(筆削)하여 이름을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2 40년간의 옥백(玉帛)과 병거(兵車)의 모든 일은 곧 하나의 꽃피고 잎지는 삽시의 광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이제 글을 빨리 써서 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이 한점의 먹을 찍을 사이는 하나의 순()과 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건만, 눈 한번 감고 숨 한번 쉬는 사이에 벌써 소고(小古)소금(小今)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옛날이란 것이나, 지금이란 것 역시 대순(大瞬)대식(大息)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 그 사이에서 온갖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한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 일찍이 묘향산(妙香山)에 올라서 상원암(上元庵)에 묵을 때 밤이 다하도록 낮과 다름없이 달빛이 밝았다. 창문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절 앞에는 안개가 질펀하여 그 위에 달빛을 받자 별안간 수은 바다가 이룩되었다. 그리고 바다 밑에는 은은히 코고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자 중들이,

 

저 하계(下界)에는 방금 큰 천둥과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다.”

한다. 며칠 뒤에 산을 떠나 안주(安州)에 이른즉, 전날 밤에 과연 갑작스러운 비천둥번개로 물이 평지에 한 길이나 괴고, 민가들이 많이 해를 입었다. 이를 보고서 나는 말을 멈추고 섭섭한 듯이,

 

어제 밤에는 나는 운()() 밖에서 밝은 달을 껴안고 누웠은즉, 저 묘향산이란 태산에 비한다면 겨우 한 개의 둔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으나, 이토록 높낮이가 심한 세계를 이룩했거늘 하물며 성인이 천하를 봄이랴.”

하니, 설산(雪山 석가가 도를 닦던 곳)의 고행(苦行)을 닦는 이가 만일 공씨(孔氏 공자의 한 가족)의 집을 두고서 다만 세 번이나 출처(出妻)를 했느니, 백어(伯魚)가 일찍 죽었느니, ()()에서 봉변을 당했느니 하고서 조금 더 넓게 보지 못한다면, 이는 실로 땅바람불 등이 별안간에 모두 빈 것이 된다는 것인즉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다. 또 그들은 성인과 불씨(佛氏)의 관점도 오히려 땅에 떠나지 못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지구를 어루만지고 공중을 달리며 별을 따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의 보는 것이, ()() 이씨(二氏)보다 낫다고 함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그들이 모두 이국(異國)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끝이 희도록 남의 글을 익혀서 썩지 않을 사업을 꾀함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경지이니, 그 경지가 지나고 또 지나서 쉬지 않는다면 옛사람들의 이를 빙자하여 학문을 하는 이 역시 무엇을 가지고 고증(考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꿋꿋이 글을 지어서 남들이 이를 반드시 믿어주게 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그들(서양 사람)은 우리 유가(儒家)에서 이단(異端)을 치는 이론을 보고는 그 남은 일을 주어서 억지로 불교를 배격하고, 또 그들은 불씨의 천당(天堂)지옥(地獄)의 설을 기뻐하여 그의 조박(糟粨)을 들일 뿐이었다. 몇 글자가 빠졌다. 내 이번 걸음 이하는 탈락되었다. ,

 

 

[C-001]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수택본 또는 일재본에 모두 서() 자가 있으므로 이들을 따라서 이 다섯 글자의 소제를 붙였다.

[D-001]태산(泰山) …… 생각하였다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성인은 곧 공자. 공자의 학문 세계가 점차 넓어짐을 의미한 것이다.

[D-002]시방세계(十方世界) : 불가에서 말하는 이 세상 밖의 다른 여러 세계들.

[D-003]춘추(春秋) : 공자가 지은 책. 기원전 770년으로부터 240년간 노()를 중심으로 하여 쓴 역사서.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D-004]공씨(孔氏) …… 했느니 : 공자백어자사의 3대가 모두 아내를 내쫓았다 한다.

[D-005]백어(伯魚) …… 죽었느니 : 백어는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자. 공리는 공자가 재세할 때에 요사하였다.

[D-006]() …… 당했느니 : 공자는 일찍이 노위 등지에서 무뢰배에게 봉변하였다.

[D-007]귀로 …… 보았다 : ‘수택본에는 애초 이 몸의 현재를 위함이다.”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가을 7 15일 신묘

 

 

개다.

내원과 변 태의(卞太醫) 관해(觀海) 조 주부 달동과 새벽에 소흑산을 떠나 중안포(中安浦)까지 30리를 와서 점심 먹고, 또 앞서 떠나 구광녕(舊廣寧)을 지나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고, 달빛을 띠고 40리를 가서 신광녕(新廣寧)에서 묵었다. 북진묘를 구경하느라고 20리 돌림길을 하니 모두 90리를 갔다. 정리록(程里錄)에 실린 것으로 말하면, 백대자(白臺子)망우대(蟒牛臺)사하자(沙河子)굴가둔(屈家屯)삼의묘(三義廟)북진보(北鎭堡)양장하(羊腸河)우가둔(于家屯)후가둔(侯家屯)이대자(二臺子)소고가자(小古家子)대고가자(大古家子) 등의 지명과 이수가 서로 어긋난 것이 많다. 만일 이대로 계산한다면 1 80리가 될 것이나 지금은 상고할 길이 없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북경에서 돌아온 이를 처음 만나면 반드시,

 

자네, 이번 걸음에 제일 장관(壯觀)이 무엇이던고. 그 제일 장관을 뽑아서 이야기해 다오.”

하면, 그들은 제각기 본 바를 좇아서 입에 나오는 대로,

 

요동 천 리의 넓디넓은 들이 장관이죠.”

구요동 백탑(白塔)이 장관이더군.”

그 연로의 시가와 점포가 장관이오.”

계문(薊門)의 내 낀 숲들이 장관이오.”

노구교(蘆溝橋)가 장관이야.”

산해관이 장관이오.”

각산사(角山寺)가 장관이오.”

망해정(望海亭)이 장관이오.”

조가패루(祖家牌樓)가 장관이오.”

유리창이 장관이오.”

통주(通州)의 주집(舟楫)들이 장관이오.”

금주위(錦州衛)의 목축(牧畜)이 장관이오.”

서산(西山)의 누대가 장관이오.”

사천주당(四天主堂)이 장관이오.”

호권(虎圈)이 장관이오.”

상방(象房)이 장관이오.”

남해자(南海子)가 장관이오.”

동악묘가 장관이오.”

북진묘가 장관이오.”

하고, 대답이 분분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도무지 볼 것이 없더군요.”

한다.

 

어째서 아무런 볼 것이 없더냐?”

하고 물으면, 그는,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과 대신 모든 관원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와 서인(庶人)들까지도 모두 그러한즉, 비록 공덕이 은()()와 같고 부강함이 진()()에 지나치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아직껏 머리 깎은 천자는 없었다오. 또 비록 육롱기(陸隴其)이광지(李光地)의 학문이 있고, 위희(魏禧)왕완(汪琬)왕사징(王士澂 왕사진(王士稹)인 듯함)의 문장이 있고, 고염무(顧炎武)주이준(朱彛尊)의 박식이 있다 한들 한번 머리를 깎는다면 곧 되놈이요, 되놈이면 곧 짐승일 것이니, 우리가 그들 짐승에게서 무슨 볼 게 있단 말이오.”

한다. 이것이 곧 으뜸가는 의리(義理)라 하여 이야기하는 이도 잠잠하고, 듣는 이도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중사(中士)는 말하기를,

 

그들의 성곽은 장성(長城)의 남은 제도를 물려받은 것이요, 건물은 아방궁(阿房宮)의 법을 본뜬 것이요, ()서인(庶人)은 위()()의 부화를 숭배함이요, 풍속은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의 사치함을 지었으며, 신주(神州)가 더럽힘을 입어서 그 산천이 피비린내 나는 고장으로 변했고, 성인들의 끼친 자취가 묻혀지자 언어조차 야만의 것을 따르게 되었으니 무슨 볼 만한 게 있으리오. 진실로 1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다면 급히 달려 산해관을 쳐 들어가서, 중원(中原)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한다. 이는 춘추(春秋)를 잘 읽은 이의 말이다. 이 일부(一部) 춘추는 중화를 높이고 이족(夷族)을 낮추어보는 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우리나라가 명()을 섬긴 지 2백 년 동안 충성을 한결같이 하여 이름은 속국(屬國)이라 하나 실상은 한 나라나 다름 없고,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 왜적의 난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를 구원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종(頂踵)모발(毛髮) 어느 것 하나하나 그 은혜 아닌 것이 없었고, 인조(仁祖) 병자(丙子 1636)에 청()의 군대가 쳐 들어오매, 의열 황제(毅烈皇帝)가 우리나라가 난리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곧 총병(總兵) 진홍범(陳洪範 명의 장수 이름)에게 명하여 시급히 각 진()의 수군(水軍)을 징벌하여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홍범이 관병(官兵)의 출범(出帆)을 아뢸 제, 산동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조선이 이미 무너져서 강화(江華)마저 떨어졌다 아뢰니, 황제는 계조가 힘껏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준절히 나무랐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는 안으로 복주(福州)초주(楚州)양주(襄州)당주(唐州) 등 각지의 난리를 누를 길이 없고, 밖으로 조선의 근심이 더욱 절박하여 그 구출해 줄 뜻이 형제의 나라에 못지 않았더니, 마침내 온 누리가 천붕(天崩)지탁(地坼)의 비운을 만나고 온 인민의 머리를 깎아서 모두 되놈을 만들었은즉, 비록 우리나라만이 이런 수치를 면했으나 그 중국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 하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 사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그리고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춘추 ()()의 이론을 일삼는 이가 군데군데 우뚝 서서 백년을 하루같이 줄기차게 잇달렸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이르겠다.

그러나 존주(尊周)의 사상은 주를 높이는 데에만 국한될 것이요, 이적(夷狄)의 문제는 이적에서만 쓸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성곽과 건물과 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의 씨족도 없어지지 않았고, ()()()()의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삼대(三代 ()()()) 이후로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의 아름다운 법률 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저들이 이적일망정 실로 중국이 자기에게 이로워서 길이 누리기에 족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웅거하되 마치 본시부터 지녔던 것같이 한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聖帝)명왕(明王)과 한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적(固有的)인 옛것인들 어떨쏘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서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하사(下士 하류의 선비)이지마는 이제 한 말을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도 있다.”

고 하련다. 대개 저 깨어진 기와 조각은 천하에 버리는 물건이지만,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담 높이가 어깨에 솟을 경우, 다시 이를 둘씩 또 둘씩 포개어서 물결 무늬를 만든다든지, 혹은 넷을 모아서 둥근 고리처럼 만든다든지, 또는 넷을 등지워서 옛 노전(魯錢)의 형상을 만들면 그 구멍난 곳이 영롱하고 안팎이 서로 어리비쳐서 저절로 좋은 무늬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깨어진 기와 쪽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무늬가 이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집마다 뜰 앞에 벽돌을 깔지 못한다면 여러 빛깔의 유리 기와 조각과 시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가 꽃나무와 새짐승의 모양으로 땅에 깔아서 비올 때 진수렁이 됨을 막으니, 이는 곧 부서진 자갈돌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도화(圖畫)가 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 황금처럼 아껴 길에 내다 버린 분회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를 주워 모으되 네모 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고 또는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으로 만드니, 이는 곧 똥무더기를 보아서 모든 규모가 벌써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저 기와 조각이나 똥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니, 하필 이 성지(城地)궁실(宮室)누대(樓臺)시포(市舖)사관(寺觀)목축(牧畜)이라든지, 또는 저 광막한 원야(原野)라든지, 변환하는 연수(煙樹)라든지, 그런 것들만이 장관이 아닐 것이다.”

구광녕성은 의무려산(醫巫閭山)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 둘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광녕성 동문밖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 패하(覇夏)와 같음)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였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노라니 점포들의 번화함이 요동만 못지 않다.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패루(牌樓)가 성 북쪽에 있다. 혹은 이르기를,

 

광명은 본시 기자(箕子)의 나라여서 옛날에 기자의 우관(冔冠 () 때의 갓 이름) 쓴 소상이 있더니, ()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난리통에 타버렸다.”

한다. 성이 겹으로 되었는데 내성은 온전하나 외성은 많이 헐었다. 성 안의 남녀가 집집이 나와서 구경하며 거리의 노는 사람들이 수없이 떼를 지어 말머리를 둘러싸기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힘들었다.

성 밖의 관제묘는 그 장려함이 요양의 것과 비슷하다. 문 밖에는 희대(戲臺)가 있어 높고 깊고 화려사치하며, 마침 뭇사람이 모여서 연극을 하고 있는 모양이나 길이 바빠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 왕화정(王化貞)이 이영방(李永芳)에게 속아서 그의 날랜 장수 손득공(孫得功)이 적군을 성 안으로 맞아들이었으므로 광녕이 떨어지고 천하의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이 되어 버렸다.

 

 

[C-001]가을 : ‘수택본 일재본에는 이 위에 18년이란 글자가 있으나 삭제됨이 옳다.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관해(觀海) : 곧 변계함. 태의는 그의 벼슬이요, 관해는 이름.

[D-002]상사(上士) : () 중에서도 지식이 높은 이. 여기서는 존명사상에 철저한 고루한 선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D-003]이광지(李光地) : 청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광지는 이름이요, 자는 진경(晉卿).

[D-004]위희(魏禧) : 청의 문학가(文學家). 희는 이름이요, 자는 빙숙(氷叔).

[D-005]왕완(汪琬) : 역시 청의 문학가. 완은 이름이요, 자는 소문(苕文). 당시에 요봉(堯峯)의 문필(文筆)과 원정(院亭)의 시()를 병칭하였으니, 요봉은 그의 호요, 원정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D-006]아방궁(阿房宮) : 진 시황(秦始皇)이 그의 수도 함양(咸陽)에 세운 큰 궁궐 이름.

[D-007]신주(神州) : 전국 때 학자 추연(騶衍)이 중국을 신주라 하였는데, 그 뒤에 이내 중국의 별칭으로 써왔다. 신은 신성의 의미를 지녔다.

[D-008]각지의 난리 : 명말(明末) 안으로 장헌충(張獻忠)이자성(李自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D-009]정덕(正德) …… 도구 : 이 세 가지의 일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에 나온 말.

[D-010]() …… 씨족 : 이 네 성씨는 진()으로부터 당()에 이르기까지의 벌족들.

[D-011]() …… 학문 : 이 넷은 송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와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를 일컬었다.

[D-012]노전(魯錢) : 노는 전신론(錢神論)의 저자 노포(魯褒).

[D-013]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 : 명 신종 때 요동좌도독(遼東左都督)이 되었으며, 그의 선조는 조선 사람이었다. 영원백은 그의 봉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D-014]왕화정(王化貞) : 명말의 장수로 일찍이 광녕을 지켜서 몽고를 무마하였으나 웅정필(熊廷弼)과 함께 요동에서 실패하여 극형을 받았다.

[D-015]이영방(李永芳) : 명의 유격(游擊)으로 무순(撫順)을 지키다 청에 항복하여 병자호란에도 종군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북진묘기(北鎭廟記)

 

 

북진묘는 의무려산 밑에 있다. 그 뒤에 여러 묏부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큰 벌이 트이었으며, 오른편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광녕성은 마치 슬하의 아이들처럼 앞에 벌여져 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띠를 두른 듯 그 속에 잠긴 탑()이 유달리 희게 보인다. 그 지형을 살펴본즉 편편한 벌판이 차츰 여러 길 되는 둥근 언덕을 이루어, 굽어보나 쳐다보나 천지가 하도 넓어 걸릴 것이 없으며, 해와 달이 떴다 졌다 하며 바람과 구름이 일다 사라졌다 함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 동쪽을 바라보니 오()()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나 내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당의 모양이 웅장하고 괴걸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진사(鎭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는 북의의 현명제군(玄冥帝君 북방을 맡은 신군)과 아울러 그 종신(從神)을 모셨는데, 모두 곤포(袞袍)를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쓴 채 옥을 차고 옥홀(玉笏)을 받들고 섰는데, 위풍이 늠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향정(香鼎)은 높이 여섯 자가 넘고 괴상한 간물(姦物)과 귀물(鬼物)들을 새겼는데, 푸른 기운이 속속들이 스며 배었다. 그 앞에는 검은 항아리가 놓여 있어서 열 섬은 듬직하며, 횃불 네 개를 켜서 밤낮없이 밝히고 있다.

 

()이 일찍이 열 두 곳의 이름난 산에 봉선(封禪)할 때 이 의무려산을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더니, 그 뒤 하()()()()이 모두 그대로 변경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예식은 저 오악(五岳)이나 사독(四瀆)과 같이하였다. 이 사당이 어느 시대에 비롯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의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 의무려산의 신을 봉하여 광녕공(廣寧公)으로 삼았고, ()() 때에는 왕호를 붙였으며, ()의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연간에 정덕광녕왕(貞德廣寧王)을 봉했더니, 명의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초년에는 다만 북진의무려산지신(北鎭醫巫閭山之神)이라 하고, 설이 되면 향품을 하사하여 제사하고 축문(祝文)에는 천자의 성명까지 쓴다고 한다. 나라에 큰 식전(式典)이 있으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지금은 청이 동북에서 일어났으므로 특히 이 산의 신을 받드는 품이 더욱 융숭하다 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옹정 황제(雍正皇帝)가 아직 등극하기 전에 칙명을 받들고 강향하러 와서 그 제삿날 밤에 재실에서 자는데, 꿈에 신인이 그에게 커다란 구슬 한 개를 주어 그 구슬이 해가 되었더니, 그 길로 돌아가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 사당을 크게 중수하여 그 신인의 은덕을 갚았다.”

한다.

 

사당 앞에는 다섯 문의 패루가 있는데 순전히 돌로만 세워 기둥이며 서까래며 기와며 추녀며 모두 다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공교함이나 조각의 정미로움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패루의 좌우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높이는 두 길이었고, 묘문(廟門)으로부터 흰 돌로 층계를 놓았으며, 묘문의 왼편에는 절이 있는데 그 뜰에는 빗돌 둘이 서 있다. 하나는 만수선림(萬壽禪林)’이라 하였고, 또 하나는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하였으며, 절 속에는 큰 금불 다섯을 모셨다.

 

절 오른편에는 문 하나가 있는데 왼쪽은 고루(鼓樓), 오른쪽은 종루(鍾樓)였고, 그 두 누의 사이에 또 문 셋이 있고 그 앞에는 비석 셋이 있는데, 모두 누런 기와로 비 위를 덮었다. 그 둘은 강희제(康熙帝)의 글과 글씨였고, 또 하나는 옹정제의 글과 글씨였다.

 

정전(正殿)은 푸른 유리기와를 이었는데, 북쪽 벽에는 울총가기(鬱葱佳氣)’라 써 붙였으니 이는 옹정제의 글씨였고, 층계 위에는 동서로 돌화로가 마주 서 있는데 높이는 모두 한 발이 넘었으며, 다시 동서로 낭무 수백 칸이 있고 정전 뒤에는 공전(空殿)이 있으되, 그 제도는 정전과 다름없이 단청이 휘황찬란하나 텅 비어서 아무 것도 놓인 것이 없고, 그 뒤에 또 전각 한 채가 있는데 제도는 역시 정전과 같으며, 소상 둘이 있는데 면류를 쓰고 옥홀을 가진 이는 문창 성군(文昌星君)이요, 봉관(鳳冠 중국 고대 여자용의 관)을 이고 구슬띠를 띤 것은 옥비 낭랑(玉妃娘娘)이라 한다. 그 좌우에는 두 동자가 모시고 섰다. 현판에는 건시령구(乾始靈區)’라 하였으니 이는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바깥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층계마다 흰 돌로 만든 난간을 둘렀는데 그 조촐하고 매끄러움이 마치 옥 같으며, 그 위에는 골고루 이룡과 도롱룡을 새겨서 곁채와 층대를 두루 둘러 전전(前殿)에까지 이르고, 또 전전에서 굼틀굼틀 끊이지 않게 후전(後殿)까지 흰 빛 일색이 눈부시어 티끌 하나가 날지 않는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 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빈 말들이다. 그 중에는 송의 연우비(延祐碑 연우는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각문(西角門)을 나서니, 두어 길이나 되는 창벽이 있어 보천석(補天石)’이라 새겼는데, 이는 명의 순무(巡撫) 장학안(張學顔 명 신종(明神宗) 때의 명신)의 글씨였고, 다시 한 칸쯤 떨어져 취병석(翠屛石)’이라 새긴 것이 있으며, 동문 밖으로 수백 걸음을 나와서 커다란 둥근 돌이 놓였는데, 마치 거북의 등처럼 금이 갔으며, ‘여공석(呂公石)’ 또는 회선정(會仙亭)’이라 새겼다. 그 위에 오르니 의무려산의 아름다운 기운과 가득찬 형세가 한 눈에 선뜻 들어온다. 문득 조그만 정자 하나가 바위를 의지하여 섰는데 흙 섬돌이 두 층이요, 띠이엉에 끝을 약간 가지런하게 베었는데 그 깨끗하고 그윽함이 퍽 마음을 즐겁게 한다. 거기서 잠깐 앉아 쉬면서 변군은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마치 감사(監司)가 군읍을 돌아다니느라면 아침저녁으로 공궤하는 것이 모두 산해의 진미여서 속이 거북하고 구역질이 날 즈음에 문득 산뜻한 야채 한 접시를 보면 그냥 구미가 당기는 것 같군요.”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야말로 참 의원다운 말이로군.”

하니, 조군은,

 

늘 분단장한 기생과 노닐어서 그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조차 분간하지 못하다가 들이랑 촌 싸리문에서 별안간 형차(荊釵)포군(布裙)으로 수수하게 차린 여인을 만나면 모르는 결에 눈이 훤하게 트이지 않겠습니까.”

한다. 나는,

 

이건 호색가(好色家)다운 말이로군. 만일 그대들 말과 같이 될진댄 이제 이 흙 섬돌과 띠 이엉에 천자의 안목과 비위를 이끌 수 있겠지요.”

하고는, 돌아와 회랑(廻廊) 아래에 앉았는데, 사당을 지키는 도사(道士) 셋이 있기에 부채 석 자루, 종이 세 권, 청심환 세 개를 선물하니, 모두들 못내 기뻐하였다. 뜰 앞에 복숭아가 방금 무르익은 것을 도사가 한 쟁반 따 왔다. 하인들이 다투어 나무 아래로 달려가서 가지를 휘어잡고 마구 딴다. 내가 그리 말라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도사는,

 

애써 금하실 게 없습니다. 배부르면 저절로 그만두겠죠.”

하고, 또 하인들을 향하여,

 

마음대로 따 먹게만 가질랑 다치지 마오 / 任君摘取莫傷枝

그렇게들 두었다가 명년에 다시 때맞춰 오소 / 留待明年再到時

라 한다. 그 도사의 성명은 이붕(李鵬)이요, 호는 소요관(逍遙館), 또는 찬하도인(餐霞道人)이라 한다. 뜰에는 반이나 썩은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황제가 갑술년(甲戌年 건륭 19) 거둥 때에 남겼다는 시()와 그림은 바위 사이에 새겨져 있다.

 

 

[D-001]오악(五嶽) :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

[D-002]사독(四瀆) : ()()()().

[D-003]형차(荊釵)포군(布裙) : ()의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의 고사에서 나온 말. 형차는 나무로 만든 머리꽂이.

[D-004]마음대로 …… 오소 : 고시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거제(車制)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쇳조각과 쇠못을 온 바퀴에 입혔다. 그 위에는 둥근 방을 만들어 세 사람이 들 만하다. 방에는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휘장을 치고 더러는 주렴을 드리워 은 단추로 여닫게 되었다. 좌우에는 파리(玻璃)를 붙여서 창을 내고, 앞에 널판을 가로 놓아서 마부가 앉게 되었으며, 뒤에도 역시 하인이 앉게 마련이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 수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것은 대차(大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덜한 듯하며 바퀴 살은 입(廿) 자의 모양으로 되었고, 싣는 수량은 8백 근으로 정하여 말 두 필을 메우고, 8백 근이 넘을 경우에는 짐을 보아서 말을 늘린다. 짐 위에는 삿자리로 방을 꾸미되 마치 배 안같이 하여 그 속에서 자고 눕게 되어 있다. 대체로 말 여섯 필이 끄는데 수레 밑에 커다란 왕방울을 달고 말 목에도 조그만 방울 수백 개를 둘러서 그 댕그랑댕그랑 하는 소리로 밤을 경계한다. 태평차는 겉 바퀴로 돌며, 대차는 속 바퀴로 돈다. 그리고 쌍 바퀴가 똑같이 둥글므로 고루 돌아가고 빨리 달릴 수 있다. 멍에 밑에 매는 말은 제일 튼튼한 말이나 건실한 나귀를 사용하며, 수레 멍에를 쓰지 않고 조그만 나무 안장을 만들어 가죽끈이나 튼튼한 바로 멍에 머리에 얽어매어서 말을 달았다. 멍에 밑에 들지 않은 말들은 모두 쇠가죽끈으로 배띠를 하고 바를 매어서 끌게 되었다. 짐이 무거우면 바퀴채보다도 훨씬 더 밖으로 튀어 나오고 때로는 높이가 몇 길이나 되며, 끄는 말도 많으면 십여 필이나 된다. 말 모는 사람을 칸처더[看車的]’라 부르며, 그는 짐 위에 덩실 높이 앉아서 손에는 긴 채찍을 쥐고 길이 두 발이나 되는 끈 두 개를 그 끝에 매어서, 그것을 휘둘러 때리되 그 중에 힘내지 않는 놈은 귀며 옆구리며 헤아리지 않고 때리고, 손에 익으면 더욱 잘 맞는다. 그 채찍질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요란스럽다.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칫대를 잡고 수레를 밀도록 되었다. 한가운데쯤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가 수레바탕 위로 반이나 솟았으며, 양쪽이 상자처럼 되어 싣는 물건이 꼭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바퀴 닿는 곳에는 북을 반쯤 자른 것같이 보이며, 바퀴를 가운데로 하고 짐은 사이를 두고 실어서 바퀴와 짐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하였다. 칫대 밑에 짧은 막대가 양쪽으로 드리워서, 갈 때는 칫대와 함께 들리고 멈출 때는 바퀴와 함께 멈추어서, 이것이 버팀나무가 되어 수레가 쓰러지지 않게 마련이다. 길가에서 떡능금오이 등을 파는 장사들도 모두 이 독륜차를 이용하며, 또 밭둑 길에 거름 내기에 가장 편리하다. 언젠가 보니, 시골 여자 둘이 양쪽 상자에 타고 앉아서 각기 어린애 하나씩을 안고 가는 것도 있으려니와 물을 긷는 데는 한 쪽에 대여섯 통씩 싣는다. 짐이 무겁고 많으면 끈을 달아서 한 사람이 끌고, 때로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마치 배를 끌 듯이 한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로 가는 것이며, 땅 위를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례(周禮)에 임금의 가멸함을 물었을 때 수레의 많고 적음으로써 대답했다 하니, 수레는 비단 싣고 타는 것뿐이 아님을 말함이다. 수레 중에도 융차(戎車)역차(役車)수차(水車)포차(砲車) 등이 있어서 천백 가지의 제도가 있으므로 이제 창졸간에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타는 수레,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내 일찍이 담헌(湛軒) 홍덕보(洪德保), 참봉(叅奉) 이성재(李聖載)와 더불어 거제(車制)를 이야기할 제,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이 이른바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을 이름이다. 그리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자리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니, 이른바 거동궤(車同軌)는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제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으나, 앞 수레와 뒷 수레가 언제나 한 자국을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쓰지 않고도 같이 되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서 홈통을 이루니 이는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음은 아니나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리오. (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배와 수레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

이라 하였으니, 이는 수레가 어떠한 먼 곳이라도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중국에도 검각(劍閣) 아홉 굽이의 험한 잔도(棧道)와 태항(太行)과 양장(羊腸)처럼 위태한 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리하여 관()()()()()()()() 등지와 같은 먼 곳에서도 큰 장사치들이나, 또는 온 가족을 이끌고 부임(赴任)하러 가는 벼슬아치들의 수레바퀴가 서로 잇대어서 저의 집 뜰 앞을 거니는 것이나 다름없이 다니고, 우렁차게 굉굉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대낮에도 늘 우레치듯 끊이지 않는다. 이제 이 마천(摩天)청석(靑石)의 고개와 장항(獐項)마전(馬轉)의 언덕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것보다 덜 위험하겠는가. 그 큰 바위에 막혀 험준한 것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도 목격(目擊)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수레를 폐하고 다니지 않음이 있던가. 이러므로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뿐더러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流通)함은 모두 수레를 쓴 이익일 것이다. 이제 비근한 예를 든다면, 우리 사행이 모든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가 올라 타고 바로 연경에 닿을 텐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영남(嶺南)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과 감자(柑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웅큼에 한 푼씩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 육진(六鎭)의 마포(麻布)와 관서(關西)의 명주(明紬),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의 딱종이와 해서(海西)의 솜, 내포(內浦 충청남도 서해안)의 생선소금 등은 모두 인민들의 살림살이에서 어느 하나 없지 못할 물건들이며, 청산(靑山 충청북도에 있다)보은(報恩)의 천 그루 대추와 황주(黃州 황해도에 있다)봉산(鳳山)의 천 그루 배와 흥양(興陽 전남 고흥)남해(南海)의 천 그루 귤()유자[], 임천(林川 충청남도에 있다)한산(韓山)의 천 이랑 모시와 관동의 천 통 벌꿀 들은 모두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역해 써야 할 것인데도, 이제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만 알고 실지로 보지 못함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오로지 멀리 나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國內)에 다니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그러면 수레는 어찌하여 다니지 못하는 거요.”

하고 묻는다면, 역시 한 마디 말로,

 

이는 사대부(士大夫)들의 허물입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주례는 성인이 지으신 글이야.”

하고는, 또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거인(車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고 떠들어대나, 끝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한갓 글만 읽을 뿐이니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황제(黃帝)가 수레를 창조하였으므로 헌원씨(軒轅氏)라 불린 뒤에 백천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몇 성인의 심사(心思)목력(目力)수기(手技)가 마멸 되었고, 또 몇 사람의 수()처럼 공교한 손을 거쳤으며, 또 상앙(商鞅)이사(李斯) 같은 이들의 제도 통일을 가져왔으니, 이는 실로 저 현관(縣官)들의 학술에 비한다면 몇백 배나 나을 것이다. 그들의 정미로운 연구와 행하기 간편함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되고 나라 경영에 큰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날마다 눈에 나타나는 놀랍고 반가운 것들을 이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렴풋이나마 몇천 년 모든 성인의 고심(苦心)을 알 수 있겠다.

밭에 물을 대는 것으로 용미차(龍尾車)용골차(龍骨車)항승차(恒升車)옥형차(玉衡車) 등이 있고, 불을 끄는 것으로서 홍흡(虹吸)학음(鶴飮) 등의 제도가 있으며, 싸움에 쓰는 수레로는 포차(砲車)충차(衝車)화차(火車) 등이 있어서 모두 서양의 기기도(奇器圖)와 강희제(康熙帝)가 지은 경직도(耕織圖)에 실려 있고, 그 글로 설명된 것은 천공개물(天工開物)》ㆍ《농정전서(農政全書 명 서광계(徐光啓)의 저)에 있으니 이에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병도 얼마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본 불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려 한다.

북진묘(北鎭廟)에서 달밤에 신광녕(新廣寧)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성밖의 어떤 집이 저녁 나절에 불이 나서 이제 겨우 불길을 잡은 모양인데, 길 위에 수차(水車) 세 대가 있어서 방금 거두어 가려는 것을 내가 그들을 잠깐 멈추어 세우고 먼저 그 이름을 물었더니, 수총차(水銃車)라 한다. 그 제도를 살펴본즉 바퀴가 넷에 그 위에 큰 나무 구유가 놓였고, 구유 속에 커다란 구리그릇이 있으며, 구리그릇 속에는 구리통 둘을 두었는데, 구리통 사이에는 목이 을() 자 모양으로 생긴 물총을 세웠다. 물총은 발이 둘이어서 양쪽 구리통에 통하였고, 양쪽 구리통은 짧은 다리가 있어서 밑에 구멍이 뚫렸으며, 구멍은 얇은 구리쇠쪽으로 문짝을 만들어서 물의 오르내림을 따라 여닫게 되었다. 그리고 두 구리통 주둥이에는 구리반으로 뚜껑을 해 달되 그 둘레가 구리통에 꼭 알맞게 되었다. 그 구리반 한복판에 쇠기둥을 세워서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나무가 구리반을 누르기도 하고 들기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구리반의 드나들고 오르내림이 그 나무에 달렸다.

그리고는 물을 구리동이 속에 붓고 몇이서 나무를 밟으면 구리반이 솟았다 내렸다 하여, 대체로 물을 빨아들이는 조화는 구리반에 있다. 구리반이 구리통 목에까지 솟으면 구리통 밑에 뚫린 구멍이 갑자기 열리면서 바깥 물을 빨아들이고, 이와 반대로 구리반이 구리통 속으로 떨어지면 그 밑구멍이 세차게 닫히어서 이에 구리통 속에 물이 가득 차서 쏟아질 곳이 없으므로, 물총 뿌리로부터 을() 자로 생긴 물총의 목으로 내달아서 위로 치솟아 내뿜으니, 여남은 길이나 물발이 서고 가로는 3, 40보에 뻗는다.

그 제도가 생황(笙簧 관악기(管樂器)의 일종)과 비슷하고 물 긷는 이는 연방 나무 구유에 물을 들어부을 따름이다. 옆에 있는 두 물차는 그 제도가 이것과도 다르고 더욱 무슨 곡절이 있는 듯싶으나 창졸간에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물을 빨아들이고 뿜는 묘리는 거의 같았다.

물건을 찧고 빻는 데는 큰 아륜(牙輪 치륜(齒輪))이 두 층으로 되어서, 쇠궁글 막대로 이를 꿰어 방 안에 세워두고 틀을 움직여서 돌리게 되었다. 아륜이라는 것은 마치 자명종(自鳴鍾)의 기계 속처럼 이가 들쭉날쭉하여 서로 맞물게 된 것이다. 방 안 네 구석에 두 층으로 맷돌반을 두고, 맷돌반의 가장자리 역시 들쭉날쭉하여 아륜의 이와 서로 맞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륜이 한번 돌기만 하면 여덟 맷돌 반이 모두 다투어 돌며, 순식간에 밀가루가 눈처럼 쌓인다. 이 법은 시계의 속과 비슷하다. 길가의 민가들은 각기 맷돌 방아 하나와 나귀 한 마리씩이 있고 곡식 빻는 데는 항상 돌곰배를 쓰며, 더러는 나귀를 끌어서 방아공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가루 치는 법은 굳게 닫힌 방 안에 바퀴가 셋이 달린 요차(搖車)를 놓았는데, 그 바퀴는 앞이 두 개, 뒤가 한 개이다. 수레 위에 기둥 넷을 세우고 그 위에 두어 섬들이 큰 채를 두 층으로 간들거리게 놓았다. 윗채에 가루를 붓고, 아래채는 비워 두어서 윗채의 것을 받아서 더 보드랍게 갈리도록 되었다. 그리고 요차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바로 질렀는데 그 막대기의 한쪽 끝은 수레를 잡아 달리고 또 한쪽 끝은 방 밖으로 뚫고 나가 있다.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서 그 막대기 끝을 잡아매고, 기둥 밑에는 땅을 파서 큰 널빤지를 놓아 막대기 밑이 이에 닿게 했다. 그 널빤지 밑 한가운데에 받침을 놓고, 그 양쪽을 뜨게 하여 마치 풀무를 다루듯 한다. 사람이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만 약간 움직이면 널빤지의 두 머리가 서로 오르내리며 널빤지 위의 기둥이 견디지 못하여 흔들린다. 그러면 그 기둥 끝에 가로지른 막대기가 세게 들이밀고 내밀고 하여 방 안의 수레가 나섰다 물러섰다 한다. 방은 네 벽에 열 층으로 시렁을 매어서 그릇을 그 위에 올려 놓아 날아오는 가루를 받게 되었다. 방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발을 놀리면서 책도 읽고 글씨도 쓰고 손님과 수작도 하여 못하는 일이 없다. 다만 등 뒤에 약간 요란한 소리가 들릴 뿐 누가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대체로 그 발 움직이는 공력은 아주 적으면서도 일은 많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몇 말 가루를 한 번에 치려면 머리도 눈썹도 삽시에 하얗게 되고 팔이 나른해지니, 그 어느 것이 힘이 덜들고 편리한 것인가. 이와 비교해 보면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치 켜는 소차(繅車)는 더욱 묘하니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이는 아까 곡식 빻는 것과 같이 커다란 아륜을 쓰되 소차의 양쪽 머리에 아륜이 달리고, 그 역시 들쭉날쭉한 이가 서로 맞물려서 쉴 새 없이 저절로 돌아간다. 소차는 별 것이 아니요, 곧 몇 아름드리가 되는 큰 자새이고, 수십 보 밖에서 고치를 삶되, 그 사이에는 여러 층 시렁을 매고 높은 곳에서부터 차츰 낮은 데로 기울게 하고, 시렁 머리마다 쇳조각을 세워서 구멍을 바늘귀처럼 가늘게 뚫고 그 구멍에 실을 꿴다. 틀이 움직이면 바퀴가 돌고, 바퀴가 돌면 자새가 따라 돌되 그 아륜이 서로 맞물려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실을 뽑는다. 그 움직임이 거세지도 않고 몰리지도 않게 제대로 법도가 있으므로 실이 고르지 않거나 한데 얽히거나 하는 탈이 없는 것이다. 켠 실이 솥에서 나와 자새로 들기까지에 쇠구멍을 두루 지나서 털도 다듬어지고 가시랭이도 떨어져 버렸으며, 또 자새에 들기 전에 실몸이 알맞게 말라서 말쑥하고 매끄러우므로, 다시 재에 삭히지 않아도 곧 베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치 켜는 법이란 다만 손으로 훑기만 할 뿐이지 수레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놀림이 그 타고난 바탕 제대로의 성질에 맞지 않아서, 빠르고 더딘 것이 고르지 않다. 어쩌다 홀치고 섞갈리면 실과 고치가 성내는 듯 놀래는 듯 뛰어 내달려서 실켜는 널판 위에 휘몰리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무거리가 나서 덩이가 지면 저절로 광택을 잃게 되며 실밥이 얽히어 붙으면 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므로, 티를 뽑고 눈을 따려면 입과 손이 모두 피로하다. 이를 저 고치 켜는 수레와 비교하면, 그 우열이 또한 어떠한가. 나는 그들에게 고치가 여름을 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방법을 물었더니, 약간 볶으면(찌면) 나비도 나지 않고, 또 더운 구들에 말리면 나비도 나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으므로 겨울철이라도 켤 수 있다 한다.

길에서 날마다 상여(喪轝)를 만났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지 않으나 가장 거추장스럽게 보인다. 거의 두 칸 방만하고 오색 비단으로 휘장을 치고, 거기다 구름참새 같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으며, 당마루턱에는 혹은 은실을 땋아 늘이었다. 양쪽 대채의 길이는 거의 일곱여덟 발이나 되는데,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구리를 올려서 금빛으로 꾸몄다. 횡강목(橫杠木)은 앞뒤에 각기 다섯씩인데 길이는 역시 서너 발이나 되고 그 위에 짧은 막대기를 걸쳐서 양쪽을 어깨에 메게 되었다. 상여꾼은 적어도 수백 명이고, 명정(銘㫌)은 모두 붉은 비단에 금자(金字)로 썼다. 명정대는 세 길이나 되는데 검은 칠을 하고 금빛 나는 용을 그렸다. 깃대 밑에는 발을 달고, 거기에 역시 막대기 두 개를 가로 놓아서 반드시 아홉 사람이 멘다. 붉은 일산 한 쌍, 푸른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수레 앙장 대여섯 쌍이 이에 따르고 그 다음에 저퉁소나팔 등 악대가 서고, 승려와 도사들이 각기 그 구색을 차리고 불경과 주문(呪文)을 외면서 그 뒤를 따른다.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함을 위주하여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물론 본받을 것이 못 된다.

 

 

[D-001]이성재(李聖載) : 이광려(李匡呂). 참봉은 벼슬이요, 성재는 자.

[D-002]거동궤(車同軌) : 중용(中庸) 좌전(左傳) ()에 나오는 말.

[D-003]육진(六鎭) :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있는 여섯 고을. 곧 종성(鍾城)경원(慶源)회령(會寧)경흥(慶興)온성(穩城)부령(富寧).

[D-004]윤인(輪人) …… 주인(輈人)이니 : 이 넷은 모두 주례 중에 나오는, 옛날 수레를 맡은 관리의 벼슬 이름.

[D-005]글만 읽을 뿐 : 전국 때 장수 조괄(趙括)의 고사.

[D-006]() : 중국 황제(黃帝) 때의 유명한 공장(工匠)의 이름.

[D-007]상앙(商鞅) : 전국시대 정치가. 위인(衛人)으로서 형명(刑名)의 학으로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부국강병의 실적을 이룩하였다.

[D-008]이사(李斯) : 전국시대 정치가. 진 시황(秦始皇)을 도와서 육국을 통일하였다.

[D-009]홍흡(虹吸) : 굽은 관()으로 만들어서 액체(液體)를 이 그릇에서 다른 높은 그릇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 기계.

[D-010]학음(鶴飮) : 홍흡과 비슷한 기계일 것이나 자세한 제도는 알 수 없다.

[D-011]기기도(奇器圖) :  기기도설(奇器圖說). 서양 사람 등옥함(鄧玉函)의 저. 전중(轉重)취수(取水)전마(轉磨)  39()에다 각기 설명을 붙였다.

[D-012]천공개물(天工開物) : 명 송응성(宋應星)의 저. 중국의 천산(天産)과 인공(人工)에 관한 저서. 그 원본은 일본제국도서관(日本帝國圖書館)에 간직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희대(戲臺)

 

 

절이나 관( 도사가 깃들이는 건물)이나, 사당의 맞은편 문에는 반드시 희대(戲臺)가 하나씩 있다. 들보의 수가 모두 일곱 혹은 아홉이므로 드높고 깊숙하고 웅걸하여 보통 점방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이렇게 깊고 넓지 않으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들일 수 없는 까닭이다. 등자(登子), 탁자며, 의자며, 평상이며 모든 앉을 자리가 적어도 천을 헤아리며 붉은 칠이 조촐하고도 사치롭다. 연로 천 리에 가끔 삿자리로 누()()()(殿)의 모양을 본떠서 높은 희대를 만들었는데, 그 구조의 공교로움이 기와집보다 더 낫게 보인다. 혹은 현판에 중추경상(中秋慶賞)’이라 하였고, 또는 중원가절(中元佳節)’이라 하였다. 소소한 시골 동네에 사당이 없는 곳이면 반드시 정월 보름과 8월 보름을 맞이하여 이러한 삿자리로 희대를 만들어 여러 가지 광대놀이를 연출한다. 언젠가 고가포(古家舖)를 지나다가 보니, 길에 수레가 끊이지 않고 수레마다 여인들 일곱여덟 명씩 탔는데 모두 진한 화장에 고운 나들이 차림새였다. 그런 차들이 몇백 대로 셀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소흑산(小黑山)에 가서 광대놀이를 구경하고 해가 저물어서 돌아가는 시골 부인네들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시사(市肆)

 

 

이번 천여 리 길에 지나온 시포(市舖)는 봉성요동성경신민둔소흑산광녕 등지였는데, 그 크고 작고, 사치하고 검소한 구별이야 없지 않겠지만 그 중 성경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그곳은 모두 비단 창에 수 놓은 무늬요, 길을 사이 두고 늘어선 술집들이 더욱 오색이 찬란하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처마 밖에 불쑥 내민 아롱진 난간이 여름 장마를 겪고도 그 단청 빛이 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봉성은 동쪽 변두리에 있는 다시 더 발전하지 못할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의 의자탁자주렴휘장담요 등의 모든 도구라든가 꽃과 풀까지도 모두 우리로서는 처음 본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문패며 간판들이 서로 사치화려함을 다투어 그 겉치레를 꾸미기 위하여 낭비가 천금에 그칠 뿐이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사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재신(財神)이 도와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모신 재신은 흔히들 관공(關公)의 소상이었으며, 탁상에 향불을 피우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품이 가묘(家廟)보다 더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산해관 안의 습속을 가히 예측할 수 있겠다.

길을 가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은 혹은 큰 소리로 싸구려를 부르기도 하나, 푸른 천을 파는 장수는 손에 든 작은 북을 흔들고, 머리를 깎는 이는 양철판을 두드리고, 기름 장수는 바리때를 친다. 또 더러는 쇠징대비치개목탁 따위를 갖고 다니는 자도 있다. 그들이 거리를 감돌며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으니 집 안에서 작은 아이들이 달려나와 이를 부른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두드리는 소리만 들으면 그 파는 물건을 알게 마련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점사(店舍)

 

 

점사는 뜰이 넓어서 적어도 수백 보는 된다. 그렇지 못하면 수레와 말과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에 들어가서도 한 마장을 달리어야 전당(前堂)에 이르니, 그 넓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낭각 사이에 의자탁자 40~50개가 놓였고 마굿간에는 길이가 두세 칸, 너비가 반 칸쯤 되는 돌구유가 있었는데 돌이 아니면 벽돌을 쌓아서 돌구유처럼 만들었다. 뜰 가운데 역시 나무통 수십 개를 나란히 두고는 양쪽 머리에 아귀진 나무로 받쳐 두었다. 기명은 오로지 그림 그린 자기를 쓰고, 백통놋쇠주석 등의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궁벽한 두메에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라도 날로 쓰는 밥주발접시 등속은 모두 울긋불긋 그림을 아로새긴 것들이다. 이는 반드시 사치를 숭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릇 굽는 이들의 솜씨가 본시 그러해서 아무리 조잡한 것을 쓰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깨어져도 버리지 않고 밖으로 쇠못을 쳐서 다시 쓴다. 다만 아무리 해도 내가 알지 못할 것은 못이 그릇 속에는 비어져 나오지 않고 꼭 끼어서 풀로 붙인 듯 감쪽같은 것이다. 높이 두 자나 되는 여러 가지 빛깔의 술잔과 오지병이며, 꽃과 잎을 꽂은 병과 두루미 같은 것은 어딜 가나 흔히들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 분원(分院)에서 구운 것은 저자에 들어올 수도 없을 것들이다. 아아, 그릇 굽는 법 한 가지가 좋지 못하여 온 나라의 모든 일과 모든 물건이 그 그릇과 같아서 마침내 한 나라의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D-001]분원(分院) : 조선시대 궁중이나 중앙 관아에서 쓰던 자기를 만든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경기도 광주(廣州) 즉 한강 기슭 마현(麻峴)의 건너편에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교량(橋梁)

 

 

교량은 모두 무지개 다리여서 다리 밑이 성문과 같다. 큰 것은 돛단배가 마음대로 지나갈 수 있겠고, 작은 것도 거룻배는 지나다닐 수 있다. 돌 난간에는 흔히들 구름 무늬와 공하()교리(蛟螭) 등을 새겼고, 나무 난간에도 역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양쪽 다리목에는 모두 팔() 자로 된 담을 쌓아서 이를 보호하게 하였다. 지나온 것 중에서 만보교(萬寶橋)화소교(火燒橋)장원교(壯元橋)마도교(磨刀橋)가 가장 큰 것들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6일 임진(壬辰)

 

 

개다.

정 진사변 주부내원과 이날도 서늘한 새벽에 먼저 떠나기로 약속했다. 신광녕에서 흥륭점(興隆店)까지 5, 쌍하보(雙河堡) 7, 장진보(壯鎭堡) 5, 상흥점(常興店) 5, 삼대자(三臺子) 3, 여양역(閭陽驛) 15, 모두 40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부터 등마루 없는 집이 시작된다. 여양역에서 두대자(頭臺子)까지 10, 이대자(二臺子) 5, 삼대자 5, 사대자(四臺子) 5, 왕삼포(王三舖) 7, 십삼산(十三山) 8리 이날 80리를 가 십삼산에서 묵었다.

새벽에 신광녕을 떠날 때 지새는 달이 아직 땅 위에서 몇 자 아니 되는 곳에 걸려 있는데 서늘하고 완연하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성기고 옥토끼와 은두꺼비는 금방도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듯하고 펄펄 날리는 항아(姮娥 달 속에 산다는 선녀)의 흰 옷자락 속으로 비치는 살결이 얼룽얼룽하여, 나는 정군(鄭君)을 돌아보면서,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돋는구려.”

하였더니, 정은 그것이 달인 줄을 깜박 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늘 새벽에 여관을 떠나므로 처음에 정말 동서남북을 가리기 어렵더군요

하매, 모두들 허리를 잡았다. 조금 뒤에 달이 점점 기울어져 들 밖에 떨어지니 정도 역시 크게 웃었다. 아침 노을이 물결처럼 일어 먼 나무 끝에 가로 뻗치더니, 별안간 천만 가지 이상한 봉우리로 화하여 맑은 기운 탄탄한 형세가 마치 용이 서린 듯 봉이 춤추는 듯 천리 벌에 가없이 뻗쳤다. 나는 정을 돌아보면서,

 

, 장백산이 뽀얗게 눈에 드네그려.”

하니, 비단 정군만이 그러려니 할 뿐 아니라 모두들 기이하다고 외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해가 이미 서 발은 솟았는데 하늘에는 한 점 티끌도 없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낫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비유 잘하는 이도 흔히들 강물빛 같다 하고 또는 호수(湖水)빛 같다 하나, 말끔하고도 어리어리한 것이 그 무엇인지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네와 집, 수레와 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 태복은,

 

이것이 곧 계문(薊門)의 연수(煙樹)올시다.”

하기에, 나는,

 

계주(薊州)가 여기서 오히려 천 리인데 연수가 어찌 이곳에 있으랴.”

하니, 의주(義州) 상인 임경찬(林景贊)의 말이,

 

계문이 비록 이곳에서 멀지만 이를 통칭 계문연수(薊門煙樹)’라 한답니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때면 요동 천 리 벌에 늘상 이 기운이 있사오나, 계주에 들어가더라도 만일 바람이 불고 날씨가 음산하면 볼 수 없습니다.”

한다. 이는 통상 겨울 날씨가 고요하고 따뜻하면 산해관 안팎에서 날마다 볼 수 있다 한다. 마침 여양(閭陽)의 장날을 만났는데 온갖 물건이 모여들고 수레와 말이 거리에 가득 찼다. 아로새긴 듯한 초롱 속에 가지가지 새를 넣어서 그 이름이 매화조(梅花鳥), 요봉(幺鳳)이니, 오동조(梧桐鳥), 화미조(畵眉鳥)니 하여 형형색색이다. 새장수는 수레가 여섯, 우는 벌레를 실은 수레가 둘이어서 그 지저귀는 소리에 온 장판이 마치 깊은 산 속에나 들어온 듯싶다. 국차[菊茶] 한 잔, ‘불불[餑餑]’ 두 덩이를 사먹고, 거기서 조 역관(趙譯官) 명회(明會)를 만나서 어떤 술집에 들어가니, 마침 소주를 내린다기에 다른 집으로 옮기려 했더니 술집 아범이 성을 내고 조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앙가슴을 받으며 꼼짝 못하게 한다. 조는 부득이 웃고 자리에 돌아와 돼지고기 볶음 한 쟁반,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술 두 주발을 사서 배불리 먹고 자리를 떴다. 멀리 십삼산을 바라보니, 산맥이 뻗어온 것도 없고 끊어진 곳도 없이 별안간 큰 벌판 가운데에 열세 무더기의 돌메 봉우리가 날아와 앉은 듯하여, 그 보일락말락 기이하게 솟은 품이 마치 여름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 봉우리 같다. 머리가 뽀얗게 센 늙은이 하나가 손에 조그만 낚싯대를 들고 그 끝에 고리를 달아서 참새 한 마리를 앉히고 색실로 발을 잡아 매어 길로 다니고 있다. 그 새짐승을 놀리는 양이 거의 다 이러하다. 더위에 지쳐서 졸리므로 말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7~8세쯤 되는 아이 하나가 머리에는 새빨간 실로 뜬 여름 모자를 쓰고 몸에는 고동색 운문사(雲紋紗) 두루마기를 입고 공단 까만 신을 신었는데, 걸음걸이가 아담하고 얼굴이 눈빛 같고 눈매가 그린 듯싶다. 내 짐짓 길을 막아 서니,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앞에 와 공손히 절하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황망히 안아 일으켰다. 그 뒤에 한 노인이 멀찌감치 따라오면서 웃음을 머금고,

 

이 애는 이 늙은 몸의 손주놈이오. 영감께서 이 놈을 귀여워하시니, 원 무어라 고마운 말씀을 사뢰리까.”

하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이는 이제 몇 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손가락을 꼽아서 보이면서,

 

아홉 살입니다.”

한다. 나는 또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제 성은 사()입니다.”

하더니, 곧 신발 속에서 작은 쇠빗[鐵箆] 하나를 꺼내어 땅에다 효()()의 두 글자를 그으면서,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요, 수는 오복(五福)의 으뜸이기에 저의 할아버지가 제게 축원하시기를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를 해야 한다 하시고, 또 저에게, 첫째는 수()하라 하시고, ‘ 두 글자를 합하여 아명(兒名)을 지어서 효수(孝壽)라 부르옵니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지금 무슨 글을 읽느냐.”

하고 물었더니, 효수는,

 

두 책은 벌써 외고 지금은 학이편(學而篇 논어(論語)의 편명)을 읽는 중입니다.”

하기에, 내가,

 

두 책이라니 무엇무엇인가?”

하였더니, 그는,

 

대학(大學)》ㆍ《중용(中庸)입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강의(講義)도 이미 끝났느냐?”

하니, 그는,

 

두 글은 외우기만 하였고, 논어(論語)는 강의(講義)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이어서,

 

선생께서는 성이 누구시오니까?”

하기에, 나는,

 

내 성은 박()이야.”

하고 답하였다. 효수는,

 

백가원(百家源)에도 없는 것이옵니다.”

한다. 노인은 내가 그 손자를 귀여워함을 보고는, 얼굴에 천진스러운 웃음을 가득 머금고,

 

고려 노야(老爺)께서는 부처님같이 어지신 양반입니다. 아마 슬하에는 많은 봉새 같은 아드님에 기린 같은 손주님을 두신 모양이어서, 그 생각을 하시고 남의 어린이를 귀여워하신 게죠.”

하기에, 나는,

 

내 나이는 많이 먹었으나 아직 손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내,

 

당신께서는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헛되이 쉰여덟 해를 지났소이다.”

한다. 나는 손에 들었던 부채를 아이에게 주니, 노인은 허리춤에서 쇠사슬 고리에 달아매어 찼던 비단 수건과 아울러 부시까지 겹쳐 주면서 못내 고마운 뜻을 표한다. 나는 노인에게,

 

댁은 어디 계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사생(謝生)

 

여기에서 멀지 않은 왕삼포(王三舖)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영손(令孫)이 매우 숙성하고 총명하여 옛날 왕()사가(謝家)의 풍류에 부끄럽지 않겠소이다.”

하니, 사생은,

 

조상(祖上) 때부터 내려오는 계통이 끊인 지 이미 오래이니 어찌 강좌(江左 강소성(江蘇省))의 풍류를 다시 바라오리까.”

한다. 길이 바빠서 드디어 서로 작별하였다. 아이가 공손히 읍하면서,

 

영감, 행리(行吏) 보중(保重)하옵소서.”

한다. 나는 길을 가며 늘 그 아이의 절묘한 눈매와 동작이 눈에 삼삼하고 또 사생이 땅에 그린 몇 마디 말이 족히 서로 이야기할 만하였으나, 갈 길이 바빠서 그 집을 찾지 못하였음이 한스럽다.

 

 

[D-001]대학(大學)중용(中庸) : 이 두 책은 본시 예기(禮記) 중의 각기 한 편이었으나 주희(朱熹)가 뽑아 사서(四書)의 하나로 독립시켰다.

[D-002]백가원(百家源) : 백가성(百家姓). 곧 여러 성씨를 모은 책으로, 중국 촌 글방에 흔히들 유행되는 책이다.

[D-003]() …… 풍류 : 사는 진()의 왕검(王儉)과 사안(謝安). 풍류는 왕검이 일찍이, “강좌의 풍류는 다만 사안이 있을 뿐이야.” 하였으니, 이는 실은 자기를 비기어 하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7일 계사(癸巳)

 

 

개다.

아침에 십삼산을 떠나 독로포(禿老舖)까지 12, 배로 대릉하(大陵河)를 건너기까지 14, 대릉하점(大陵河店) 4, 이곳에서 묵었다. 이날 겨우 30리를 갔다.

대릉하는 그 근원이 장성 밖에서 시작하여, 구관대(九官臺)와 변문을 뚫고 광녕성을 지나 두산(斗山)을 나와서, 금주위(錦州衛) 지경에 들어와 점어당(點魚塘)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든다.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은 곧 조선수통관(朝鮮首通官) 오림포(烏林哺)의 아들이며, 집은 봉성에 있다. 말은 호행이라 하지만 저는 태평차를 타고 뒤를 따를 뿐이며, 그의 행동거지는 우리 사행의 관할할 바가 아니다. 그는 하인 넷을 거느렸는데, 하나는 성이 악()이라 하여 연로의 조석 공궤와 말 먹이는 일만을 맡아보고, 또 하나는 이()인데 매를 가지고 그저 길에서 꿩 사냥만 일삼고, 또 하나인 서()는 제 말로 의주 부윤 서모(徐某)와는 서로 일가간이라 하며, 또 하나는 감()인데 그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고 나이도 열아홉 살이며 눈매가 아름다워서 쌍림의 길동무들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감()이란 성은 없으니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내 책문에 든 지 10여 일이 되어도 쌍림의 꼴을 보지 못하더니, 통원보(通遠堡)의 시냇물을 건널 때 언덕에 올라가서, 내가,

 

물살이 센데.”

하니, 이때 언덕 위에 깨끗하게 차린 되놈 하나가 우리 역관들과 함께 서 있다가 선뜻 조선말로,

 

물살이 셉니다. 그런데도 용하게 건너셨습니다.”

한다. 그는 연산관에 이르러서 수역더러,

 

아침나절 물 건널 때 얼굴이 웅위(雄偉)한 이가 거 누구요?”

하고 물으매, 수역은,

 

정사 대감과 일가 형제 되시는 분이오. 글을 잘 아셔서 구경하러 오셨답니다.”

하니, 쌍림은,

 

그러면 사점(四點)인가요?”

한다. 수역은,

 

아니오, 정사 대감의 적친(嫡親) 삼종형제(三從兄弟)입죠.”

하니, 쌍림은,

 

그럼, 이량위첸[伊兩羽泉]이구먼.”

한다. ‘이량위첸이란 중국 말로 한냥 닷돈을 말한다. 한냥 닷돈은 곧 양반(兩半)이라, 우리나라에서 사족(士族)을 양반(兩班)이라 하니, 양반(兩半)과 양반(兩班)이 음이 같으므로, 쌍림이 이량우첸[一兩五錢]’이라 하여 은어(隱語)를 쓴 것이다. 사점(四點)이란 서() 자이니 우리나라 서얼(庶孼)을 두고 말함이다.

사행이 갈 때마다 사무를 맡은 역관이 공비(公費)로 은 4천 냥(四千兩)을 가져 가서 5백 냥은 호행장경(護行章京)에게 주고, 7백 냥은 호행통관에게 주어 차삯과 여관비에 쓰게 되었으나, 실상은 한 푼도 쓰는 일이 없이 상사와 부사의 주방(廚房)에서 돌려가면서 두 사람을 먹인다. 쌍림은 그 사람됨이 교활하고 조선말을 잘한다고 한다. 앞서 소황기보(小黃旗堡)에서 점심을 먹을 때 여러 비장역관 들과 둘러앉아서 한담을 하노라니, 쌍림이 밖에서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반겨 맞았다. 쌍림이 부사의 비장 이성제(李聖濟)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또 내원을 향하여 말을 붙였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두 번째 길이어서 구면이기 때문이다. 내원이 쌍림더러,

 

, 영감께 섭섭한 일이 있소.”

하니, 쌍림이 웃으면서,

 

무슨 섭섭한 일이오니까.”

한다. 내원은,

 

상사또(上使道)께서는 비록 작은 나라의 사신이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일품(正一品) 내대신(內大臣)이므로 황제께서도 각별히 예법으로 대우하시는 바이니, 영감은 대국 사람이지만 조선의 통관인즉 우리 사또에게 마땅히 체면을 지켜야 할 것이어늘, 두 사또께서 말을 갈아타실 때마다 길가에 가마를 멈추시는 데마다 영감들은 마땅히 수레를 멈춰 기다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번번이 수레를 그냥 몰아서 지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요. 이래서 장경(章京)도 영감을 본받으니 더욱 한심한 일이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거요. 대국의 체모가 당신네 나라와는 훨씬 다르오. 대국에서 칙사가 가면 당신네 나라 의정대신(議政大臣 내각의 세 대신)이 우리들과 평등하게 대접하여 말도 서로 공경하는 것인데, 이제 당신이 새로이 체모를 지어내어서 나더러 회피하란 말이오.”

하고 발끈 성을 낸다. 조 역관 학동(學東)이 내원에게 눈짓하여 더 다투지 말라 하였으나, 내원은 한층 소리를 높여서,

 

그럼, 영감의 종놈은 어느 존전이라고 손에 매를 낀 채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간단 말이오. 그건 해괴한 일이 아니오. 이제 다시금 그런 걸 보면 내 곧 곤장을 내릴 테니 영감은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아직 못 보았소. 만일 내가 보기만 하면 단매에 처치해 버리겠소.”

한다. 그는 조선말을 잘한다지만 가장 분명하지 못하고 다급하면 도로 북경말을 쓰곤 한다. 공연히 7백 냥 돈을 허비하니 실로 아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내가 이때 종이를 꼬아서 코를 쑤시니, 쌍림이 제 콧담배(코로 피우는 담배) 그릇을 끌러서,

 

재채기를 하시려오.”

하나, 나는 그와 말을 건네기도 싫고 또 콧담배 그릇을 쓰는 법도 알지 못하므로 받지 않았다. 쌍림이 날 보고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싶어했으나 내가 더욱 도사리고 앉으니 그는 곧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그 뒤에 역관들의 말을 들은즉, 쌍림이 내가 저와 수작을 건네지 않으므로 무료히 일어나서 매우 노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아비가 늘 아문(衙門)에 앉아 있으니 만일 쌍림의 노염을 사면 구경하러 드나들 때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고, 또 속담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저번 쌍림을 냉대한 것은 재미없는 일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마음에 그러려니 여겼다. 이윽고 사행은 먼저 떠나고, 나는 곤히 잠들었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마침 밥상을 물리고 행장을 차리는 차에 쌍림이 들어온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여,

 

영감, 한참 못 뵈었구려. 요즘 안녕들 하시오.”

하니, 쌍림이 좋아라고 자리에 앉으면서 삼등초(三登草)를 달라 하고 또 제집에 붙일 주련(柱聯)도 구하며, 또 내가 먹는 진짜 청심환과 단오(端午)에 기름 먹인 접부채를 달라 한다. 나는 일일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레에 실은 짐이 도착되면 다 드리구말구.”

하고, ,

 

내 먼 길에 말을 타고 왔기에 퍽 고단하니 한 정거장만 당신과 한 수레에 타고 갔으면 좋겠소.”

하였더니,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공자(公子)와 함께 타고 간다면 이 길이 퍽 제게 영광이겠소.”

하고, 곧 함께 떠날 즈음에 쌍림이 수레 왼편을 비워서 나를 앉히고 제가 스스로 몰아갔다. 쌍림은 또 장복을 불러서 오른편에 앉히고는 그더러,

 

내가 조선말로 묻거든 너는 북경말로 대답하여라.”

한다. 둘이서 수작하는 것을 들으니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었다. 한편 쌍림의 조선말은 세 살 먹은 아이가 밥 달라는 말이 밤 달라는 듯싶고, 또 한편 장복의 중국 말은 반벙어리가 이름 부르는 듯 언제나 애()하는 소리만 거듭한다. 혼자서 보기는 참 아까운 일이다. 쌍림의 우리말이 장복의 중국말보다 어림없이 못하여 말끝마다 존비(尊卑)를 가려 쓸 줄 모르고, 게다가 말 마디를 굴릴 줄 모른다. 그는 장복더러,

 

, 우리 아버지를 보았니.”

하니, 장복은

 

칙사 나왔을 때 보았소이다. 대감(大監) 수염이 좋으시고 내가 보행으로 뒤를 따르며 권마성(勸馬聲)을 거푸 지르니, 대감이 눈에 웃음을 가득 담고 네 목청이 좋아. 그치지 말고 불러라.’ 하시기에 나는 쉬지 않고 외쳤더니 대감이 연방 좋다, 좋아.’ 하시고, 곽산(郭山)에 이르러선 손수 차담(茶啖)을 주시었다오.”

하매, 쌍림은,

 

우리 아버지 눈이 흉악해 보이지.”

하니, 장복은 껄껄 웃으면서,

 

마치 꿩 잡는 매 눈과 같더구먼요.”

하니, 쌍림은,

 

옳아.”

하고, ,

 

, 장가들었나.”

한즉, 장복은,

 

집이 가난해서 아직 못 들었습니다.”

하매, 쌍림은 연신,

 

하하, 불상(不祥)하이.”

한다. ‘불상이란 우리말로 아아, 안 됐군.’ 하고 차탄하는 따위의 말이다. 쌍림은 다시,

 

의주 기생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매, 장복은,

 

아마 30~40명 있죠.”

하니, 쌍림은,

 

예쁜 것도 많겠지야.”

한다. 장복은,

 

예쁘다 뿐이오. 양귀비(楊貴妃) 같은 것도 있고, 서시(西施) 같은 것도 있소. 이름이 유색(柳色)이라는 기생은 수줍은 꽃, 밝은 달 같은 자태가 있고, 또 춘운(春雲)이란 기생은 구름을 멈추고 남의 애를 끊을 만큼 창()을 잘한다오.”

하니, 쌍림은 깔깔대면서,

 

이런 기생이 있다면 내가 갔을 때에는 왜 현신(現身)하지 않았나?”

한다. 장복은,

 

만일 한번만 보시면 대감님 따위는 혼이 그만 구만 리 장천(長天) 구름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손 속에 쥐었던 만 냥 돈이 저절로 사라지고는 저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질 못하리다.”

하니, 쌍림은 손뼉치고 깔깔거리면서,

 

내 다음 번 칙사를 따라 가거든 네가 가만히 데려오려무나.”

한다. 장복은 머리를 흔들면서,

 

잘 안 될 거요. 남에게 들키면 목이 달아나게요.”

하고, 둘이 모두 한바탕 크게 웃는다. 이렇게 주고받고 하면서 30리를 갔다. 이는 대개 둘이 서로 피차의 말을 시험하려 한 것인데 장복은 겨우 책문에 들어온 뒤 길에서 주워 들은 데 불과하나, 쌍림이 평생 두고 배운 것보다 더 잘한다. 이로 보아 우리말보다 중국말이 쉬움을 알겠다. 수레는 삼면을 초록빛 전으로 휘장을 쳐서 걷어올렸고, 동서 양쪽에는 주렴을 드리우고 앞에는 공단으로 차일을 쳤다. 수레 안에는 이불이 놓였고, 한글로 쓴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두어 책이 있다. 비단 언문(諺文) 글씨가 너절할 뿐 아니라 책장이 해어진 것이 있다. 내가 쌍림더러 읽으라 하였더니, 쌍림이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높여 읽었으나 전혀 말이 닿지 않고 뒤범벅으로 읽어 간다. 입 안에 가시가 돋힌 듯 입술이 얼어 붙은 듯 군소리를 수없이 내며 끙끙거린다. 내 역시 한참 들어도 멍하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그래서는 제가 늙어 죽도록 읽어도 아무 보람이 없을 것이다. 길에서 사행이 말을 갈아타는데 쌍림이 수레에서 뛰어 내려 점포 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사행이 떠난 뒤에 천천히 수레에 올랐다. 전날 내원이 그를 나무랐을 때 겉으로 버티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움츠러들었던 모양이다.

 

 

[D-001]내대신(內大臣) : 황제의 친척으로 시위하는 관직. 조선에서는 이런 것이 없으나 정사 박명원(朴明源)이 부마(駙馬)이므로 청()의 제도에 비겨서 말한 것.

[D-002]삼등초(三登草) : 평안남도 삼등에서 나는 질이 좋은 담배.

[D-003]양귀비(楊貴妃) : 당 현종(唐玄宗)이 사랑하던 미녀 양태진(楊太眞). 귀비는 봉호.

[D-004]서시(西施) : 전국시대 월()의 미녀. 시는 그의 성이요, 서는 시가(施家)의 서편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D-005]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 우리 고전 소설의 일종. 작자는 미상.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8일 갑오(甲午)

 

 

개다.

새벽에 대릉하점(大凌河店)을 떠나 사동비(四同碑)까지 12, 쌍양점(雙陽店) 8, 소릉하(小凌河) 10, 소릉하교(小凌河橋) 2, 송산보(松山堡) 18,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송산보에서 행산보(杏山堡)까지 18, 십리하점(十里河店) 10, 고교보(高橋堡) 8, 모두 36, 이날은 80리를 가서 고교보에서 묵었다.

사동비 근처에 이르니, 길가에 큰 비석 넷이 있는데 그 제도가 꼭 같으므로 지명을 사동비라 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만력(萬曆) 15(1587) 8 29일에 왕성종(王盛宗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을 요동전둔유격장군(遼東前屯遊擊將軍)으로 삼는다는 칙문(敕文)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는데 비문 가운데 노추(虜酋)라는 두 글자는 모두 지워 버렸다. 그 둘째는 만력 15 11 4일에 왕성종을 요동도지휘체통행사(遼東都指揮體統行事)로 삼아서 금주(金州) 지방을 지킨다는 칙문을 새긴 것이요, 그 셋째는 만력 20(1592) 9 3일에 왕평(王平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으로 요동유격장군(遼東遊擊將軍)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긴 것인데, 위에는 칙명지보(敕命之寶)를 찍었고, 그 넷째는 만력 22(1594) 10 10일에 왕평으로 유격장군금주통할(遊擊將軍錦州統轄)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다. 왕평은 왕성종의 아들이 아니면 조카인 듯싶다. 그들이 노추를 잘 막았다 하여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칙명을 내려 이를 표창하고, 큰 돌을 갈아 칙문과 고신(告身 사령장(辭令狀))을 새겨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갸륵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종이 만일 요동에서 대대로 장수의 직책에 있었다면, 임진년에 왜놈들을 칠 때 참가하지 않았음은 어찌된 까닭일까.

전에 사행이 다닐 때 이곳에 이르면, 비장이 반드시 이 비석에다, ‘모일 모시에 관()에 나왔고 모일 모시에 이곳을 지난다.’고 써 놓기로 되어 있다. 먹이는 말이 곳곳마다 떼를 지어 한 곳에 천여 마리씩 몰리어 다니는데 모두 흰 빛깔이다.

배로 소릉하를 건넜다. 수레에 몇 천 바리의 쌀을 싣고 지나가는데 먼지가 하늘을 덮는다. 이는 해주(海州)에서 금주(錦州)로 실어들이는 것이다. 사나운 바람이 일기에 내가 먼저 말을 달려 사관에 들어가 한숨 자고 나니, 정사가 뒤이어 와서 말하기를,

 

낙타 수백 마리가 철물(鐵物)을 싣고 금주로 가더군.”

한다. 나는 공교롭게 두 번이나 낙타를 보지 못한 셈이다. 강가에 민가 몇 백 호가 있던 것이 지난해 몽고의 침략을 입어서 모두 아내들을 잃고 몇 리 밖으로 옮겨갔다 한다. 이제 그 길가에 허물어진 담이 둘렸으나 네 벽만이 쓸쓸하게 서 있을 뿐, 강가 아래 위에 흰 장막을 치고 파수를 보고 있다. 대개 이 강은 몽고의 지경에서 50리밖에 되지 않은 곳으로 며칠 전에 몽고기병 수백 명이 이에 이르렀다가 수비가 있음을 알고 도망해 버렸다 한다. 송산(松山)에서부터 행산(杏山)고교(高橋)를 거쳐 탑산(塔山)까지의 백여 리 사이에는 동리나 점포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쓸쓸하여 그들은 조금도 생업에 안주할 의사가 없다. 아아, 이곳이 곧 옛날 숭정(崇禎) 경진(庚辰)신사(辛巳) 연간(1640~41)에 피흘리던 마당이다. 이제 벌써 백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소생하는 기색이 뵈지 않으니, 그 당시 용과 범들의 싸움이 격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 황제가 엮은 전운시(全韻詩) (),

 

숭덕(崇德) 6(1633) 8월에 명의 총병 홍승주(洪承疇)가 구원병 13만 명을 송산에 모으니, 태종(太宗)이 곧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 마침 코피를 쏟았는데, 일이 시급하자 증세가 더욱 심하여 사흘 만에 겨우 그쳤다. 제왕(諸王)과 패륵(貝勒)들이 천천히 행군하기를 청했으나 태종은 싸움에 이기려면 행군을 빨리해야 한다 하고는, 빨리 달려서 엿새 만에 송산에 이르러 군사를 송산행산 사이에 풀어서 한길을 가로 막았다. 이에 명의 총병 여덟 명이 전봉을 범하는 것을 모두 쳐 무찌르고 그들이 필가산(筆架山)에 쌓아둔 양식을 빼앗고, 해자를 파서 송산행산의 길을 끊었다.

이날 밤 명의 여러 장수가 칠영(七營)의 보병을 거두어 와서 송산성(松山城) 가까이 진을 쳤다. 이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오늘 밤 들어 적병이 반드시 도망치리라 하고, 이내 호군(護軍) 오배(鼇拜) 등으로 사기(四旗)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봉과 몽고 군사가 함께 나란히 진을 펴고 곧 바닷가에 닿게 하고, 또 몽고 고산액진(固山額眞) 고로극(固魯克 액진의 이름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 길에 매복하였다가 적을 맞아서 치게 하고, 예군왕(睿郡王)을 시켜서 금주로 가서 탑산 한길에 이르러 가로질러 적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 초경(初更)에 명의 총병 오삼계(吳三桂 명말의 이름 높던 장수) 등이 바닷가로 도망치는 것을 서로 잇대어 추격하고, 또 파포해(巴布海 청 태조의 열한째 아들) 등을 시켜서 탑산 길을 끊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에게 명하여 역시 탑산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며, 패자(貝子) 박락(博洛 청 태조의 손자)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상갈이채(桑噶爾寨)에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고, 고산액진 담태주(譚泰柱)를 시켜서 소능하에 가서 바닷가까지 이르러 적의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며, 매륵장경(梅勒章京) 다제리(多濟里 매륵장경의 성명)에게 명하여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게 하고, 또 고산액진 이배(伊拜) 등을 보내어 행산의 사방에서 명병(明兵)이 행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오는 것을 치게 하고, 몽고 고산액진 사격도(思格圖) 등을 보내어 그들의 도망하는 군사를 추격(追擊)하게 하며, 국구(國舅) 아십달이한(阿什達爾漢 청 태종의 장인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의 병영을 가 보아서 만일 그곳이 좋지 못하거든 다른 곳을 골라서 옮기게 하며, 그 이튿날 예군왕과 무영군왕을 시켜 탑산의 사대(四臺)를 에워싸고 홍의포(紅衣礮 대포의 일종)로 쳐서 이겼다.

명의 총병 오삼계와 왕박(王樸 명말의 장수)이 행산으로 달아나니, 이날 태종은 군사를 송산으로 옮기고 해자를 파서 에우려 하였다. 이날 밤 총병 조변교(曹變蛟)가 진을 버리고 에워싼 것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므로 다시 내대신(內大臣) 석한(錫翰) 등과 사자부락(四子部落) 도이배(都爾拜 사자부락 군대의 장수)에게 명하여 각기 정병 2 50명을 거느리어 고교보(高橋堡)와 상갈이보(桑噶爾堡)에 매복시키고는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교보 동쪽에 이르러 패륵 다탁(多鐸)으로 하여금 군사를 매복시켰다. 오삼계와 왕박이 패하여 고교보에 이르니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겨우 몸을 빼쳐 도망하였다. 이 싸움에서 명병 5 3 7백 명을 죽이고,  7 4백 필, 낙타 60, 갑옷과 투구 9 3백 벌을 노획하였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청군은 잘못하여 다친 자가 겨우 여덟일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송산행산의 싸움이다. 각라(覺羅 청 태조 애친각라(愛親覺羅))는 관외(關外)의 이자성(李自成)이요, 이자성은 역시 관내(關內)의 각라였으니, 명이 비록 망하지 아니한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에 13만의 많은 군사로 각라의 수천 명에게 에워싸인 바 되어서 잠시 동안에 마치 마른 나무가 꺾이듯이, 썩은 새끼 끊기듯이 되어버리고, 홍승주와 오삼계같이 슬기 있고 용맹스러움이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이들이건만 한번 각라를 만나자 곧 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져 그의 거느린 13만의 군사가 마치 지푸라기나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할 수 없이 운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겠다.

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송계집(松溪集)을 읽자니까,

 

청병이 송산을 에워쌌을 때에 마침 효종 대왕(孝宗大王 이호(李淏)의 묘호)께옵서 세자의 몸으로 인질(人質)이 되어 청의 진중(陣中)에 계시더니 잠깐 다른 곳으로 막차(幕次)를 옮긴 사이에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가 거느린 만 명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려 나오니 애초에 막차이던 곳이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왕령(王靈)이 계신 곳에 천지의 신명이 힘을 합하여 도우신 밝은 증험이 아니겠는가.

밤에 고교보(高橋堡)에 묵었다. 이곳은 지난해 사행이 은()을 잃은 곳이다. 지방관은 이로 말미암아 파직을 당하였고, 근처 점포에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갑군(甲軍)이 밤이 새도록 야경을 돌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도적과 다름 없이 엄하게 방비한다. 사처방 청지기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원수같이 보아서 간 곳마다 문을 닫고 맞이하지 않으며, ‘고려야, 고려는 그 신세진 사관 주인을 죽였다. 단 천 냥 돈이 어찌 4~5명의 목숨을 당할 것인가. 우리들 가운데도 불량한 이가 많지만 당신네들 일행 중엔들 어찌 좀도둑이 없을 건가.’ 하고는 그 은닉하는 교묘한 방법이 몽고와 다름없사옵니다.”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역관에게 물으니, 그는,

 

지난 병신년(丙申年 1776) 고부차(告訃次)로 사행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공비은(公費銀) 1천 냥을 잃어버린 일이 있습니다. 사신들이 의논하되, ‘이는 나라의 돈이라 만일 쓴 곳이 없을 때에는 액수를 맞추어서 환납함이 곧 국법이거늘 이제 공연히 잃었으니 장차 돌아가 무슨 말로 사뢸 것인가. 잃었다 한들 누가 믿으며, 이를 물자 한들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고 곧 지방관에게 그 사연을 알렸더니, 곧 중후소 참장(中後所叅將)에게 알리고, 중후소에서는 금주위(錦州衛), 금주에서는 산해관 수비(守備)에게 알리게 되어 며칠 사이에 이 일이 예부(禮部)에 알려져서 황제의 분부가 이내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 관은(官銀)으로 잃은 돈을 물리고, 또 이 지방관이 항상 도적을 막기에 힘쓰지 아니하여 길손에게 원통한 변을 당하게 하였다 하여 파직으로 그 책임을 지우고, 사관의 주인과 그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닥달해서 그 중 너덧 사람이나 죽었습니다. 사행이 미처 심양에 이르기 전에 황제의 분부가 벌써 내렸으니, 그 거행의 신속함이 이러합니다. 그 뒤로부터 고교보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같이 봄이 괴이한 일은 아닐까 하옵니다.”

한다. 대개, 의주의 말몰이꾼들은 태반이 거의 불량한 축들이며, 오로지 연경에 드나드는 것으로 생계를 삼아서 해마다 연경 다니기를 저희들 뜰 앞처럼 여긴다. 그리고 의주부에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사람마다 백지 60권에 지나지 않으므로, 백여 명 말몰이꾼들이 길가며 훔치지 않으면 다녀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낯도 씻지 않고 벙거지도 쓰지 않아 머리털이 더부룩하여 먼지와 땀이 엉기고 비바람에 시달리어 그 남루한 옷과 벙거지 차림이 귀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꼴이 마치 도깨비처럼 우습게 보인다. 이 무리 중에는 열다섯 살 나는 아이가 있는데 벌써 이 길을 세 번이나 드나들었다는데 처음 구련성에 닿았을 때는 제법 말쑥하여 뵈던 것이 반 길도 못 가서 햇빛에 얼굴이 그슬리고 시꺼먼 먼지가 살에 녹슨 듯하여 다만 두 눈만 빠꼼하니 희게 보일 뿐 홑 고쟁이가 낡아서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이 아이가 이러할 제야 다른 것들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둑질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밤에 사관에 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훔치고 만다. 그러므로 이를 막으려는 주인의 수단도 극도에 달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 사행 때에 의주 상인 하나가 은화를 가만히 가지고 오다가 말몰이꾼에게 맞아 죽었는데, 빈 말 두 마리만 고삐를 놓아서 도로 강을 건너보냈으므로 말이 각기 그 집에 찾아 드는 것을 증거로 삼아서 마침내 법에 걸렸다 한다. 그 흉험함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제 그 은을 잃음이 어찌 이놈들의 소행이 아니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지만 만일 병자년 호란(胡亂) 같은 일이 다시 있다 하면 용천(龍川)철산(鐵山)의 이서는 우리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 역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날 밤 바람이 심하여 날이 새도록 하늘을 뒤흔드는 듯하였다.

 

 

[D-001]노추(虜酋) :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명이 청의 임금이나 장수를 부를 때 쓴 말.

[D-002]홍승주(洪承疇) : ()의 장수로서 청군과 싸우다가 항복하여 청에 공이 많았다. 그가 송산에서 청군에게 사로잡혔을 때, 명의 조정에서는 그가 순국한 줄로 알고 치제하였다.

[D-003]오배(鼇拜) : 만인. 일찍부터 전공을 세워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고, 강희 초년에 선제의 고명(顧命)을 받아 정치에 참여했으나 전횡이 심하여 적몰(籍沒) 당하였다.

[D-004]고산액진(固山額眞) : 청의 벼슬 이름. 고산장경(固山章京)이라고도 함. ‘고산은 만주 말에서 아름다운 칭호이므로 그들의 벼슬 이름 위에 씌워서 불렀다.

[D-005]예군왕(睿郡王) : 청 태조의 열넷째 아들. 세조를 받들고 관에 들어가 이자성(李自成)을 깨뜨리고 중원을 평정하였다.

[D-006]아제격(阿濟格) : 청 태조의 열두째 아들. 무영군왕은 봉호.

[D-007]패자(貝子) : 청의 벼슬 이름. 종실(宗室)이나 몽고 외번(外藩)에게 주었다. 패륵의 아래요, 진국공(鎭國公)의 위이다.

[D-008]담태주(譚泰柱) : 만인. 명과 싸운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극형을 당하였다.

[D-009]매륵장경(梅勒章京) : 팔기(八旗)의 부장(副將). 장경은 액진(額眞)이라고도 하였다.

[D-010]이배(伊拜) : 만인. 홍승주를 송산에서 사로잡았다.

[D-011]조변교(曹變蛟) : 명말의 장수. 홍승주를 따라 송산에서 싸우다가 붙잡혀서 죽었다.

[D-012]다탁(多鐸) : 청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 보정왕(輔政王).

[D-013]이자성(李自成) : 명말의 유적(流賊)으로서 북경을 함락시켜 명을 망하게 했으나 오삼계가 끌어들인 청군에게 패사하였다.

[D-014]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 이요(李㴭)의 봉호. 병자호란이 끝난 뒤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갔다.

[D-015]고부차(告訃次) : 국상을 알리는 사신. 이때는 영조(英祖)의 국상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9일 을미(乙未)

 

 

개다.

새벽에 고교보를 떠나 탑산(塔山)까지 12, 주사하(朱獅河) 5, 조라산점(罩羅山店) 5, 이대자(二臺子) 10, 연산역(連山驛) 7, 모두 32리를 가서 점심 먹었다. 또 연산역에서 오리하자(五里河子)까지 5, 노화상대(老和尙臺) 5, 쌍수포(雙樹舖) 5, 간시령(乾柴嶺) 5, 다붕암(茶棚菴) 5, 영원위(寧遠衛) 5, 모두 30리이다. 이날 62리를 가서 영원성 밖에서 묵었다.

어저께 벌써 부사서장관과 새벽 일찍 탑산에 가서 해돋이를 구경하자고 약속하였으나, 모두 늦게 떠났으므로 탑산에 이르자 해가 세 발이나 높이 올랐다. 동남으로 큰 바다가 하늘에 닿은 즈음에, 만으로 헤일 만큼 많은 상선(商船)이 간밤의 바람에 쫓기어 들어와서 작은 섬에 의지하였다가 마침 일시에 돛을 달고 떠나는 것이 마치 물에 뜬 오리떼 같았다. 영녕사(永寧寺)는 숭정(崇禎) 연간에 조대수(祖大壽)가 처음 지은 절이라 한다. 절이나 관묘(關廟)는 요동에서 처음 그 웅장 화려함을 보았으므로 대략 기록한 바 있었으나, 그 뒤 길에서 수없이 본 것이 비록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제도는 대체로 같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역시 구경하기에도 지쳐서 나중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길가에 여남은 길이나 되는 묏봉우리가 있어 이름이 구혈대(嘔血臺)라 한다. 전하는 말에,

 

청 태종이 이 봉우리에 올라서 영원성 안을 굽어보다가 명의 순무(巡撫)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한 바 되어서 피를 토하고 죽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영원성 안 한길 가에 조가(祖家)의 패루(牌樓)가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수백 보나 되며, 두 패루가 모두 삼문(三門)으로 되었고 기둥마다 앞에 몇 길 되는 돌사자를 앉혔다. 하나는 조대락(祖大樂 조대수의 형)의 패루요, 또 하나는 조대수의 패루이다. 높이 모두 예닐곱 길이나 되는데, 대수의 패루가 조금 낮은 편이다. 둘 다 옥결 같은 흰 돌로 층층이 쌓아 올려, 추녀도리들보서까래며, 기와처마들창기둥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한 토막도 쓰지 않았고, 대락의 패루는 오색 무늬가 있는 돌로 세웠다. 두 패루를 세운 솜씨와 그 아로새긴 공력은 거의 사람 힘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대락의 패루에는 삼대(三代)의 고증(誥贈), 곧 증조 조진(祖鎭)과 할아비 조인(祖仁), 아비 조승교(祖承敎)를 쓰고, 전면에는 원훈초석(元勳初錫)이요, 후면에는 등단준열(登壇峻烈)이며, 맨 위층에는 옥음(玉音)이라 썼고, 주련(柱聯)에는,

 

무덤이 처음 같아 새로운 경사가 네 대를 쌓였거니 / 松檟如初慶善培于四世

자손이 현달하여 영광이 천추에 빛나리라 / 琳琅有赫賁永譽于千秋

라 새겼고, 그 뒷면에는,

 

노래로 찬송하니 늠름한 모습은 간성의 중책이요 / 恒赳興歌國倚干城之重

임금이 괴오시니 갸륵한 공훈 금석에 새겼구나 / 絲綸錫寵朝隆銘鼎之褒

라고 새겼다. 대수의 패루에도 사대(四代)의 고증을 썼는데, 증조와 조부는 대락과 같고, 아버지는 조승훈(祖承訓)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력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훈이 요동 부총병(副摠兵)으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구원하러 왔던 사람이다. 윗층에는 확청지열(廓淸之烈)이요, 아래층에는 사대원융(四代元戎)이라 썼으며, 그 앞뒤 주련이며 날짐승과 길짐승의 모양이나 싸움하는 그림을 새긴 것은 모두 양각(陽刻)이다. 주련의 글은 바빠서 적지 못했다. 조씨는 요계(遼薊)에서 대대로 이름난 장수 집안이다. 숭정 2(1629) 일월에 청병이 북경을 쳐들어오매 이해 12월에 독수(督帥) 원숭환이 조대수하가강(何可剛) 등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구원하여 지나는 곳마다 군대를 머물러서 지키니, 황제는 그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군을 모두 통솔하게 하였다. 청인이 이를 이간하려고 그 장수 고홍중(高鴻中)을 시켜 사로잡아 온 명의 태감(太監) 두 사람 앞에서 일부러 귓속말로,

 

오늘 군사를 파함은 아마 원 순무(袁巡撫)와 비밀 약속이 있어서 한 일인가 보오. 아까 두 사람이 와서 한()을 뵙고 이야기하다 한참 만에야 돌아갔다오.”

하였다. 양 태감(楊太監 양의 성을 가진 태감)이 잠든 체하고 그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 청이 짐짓 그를 놓아 보내자 이 일을 황제에게 일러 바쳤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원숭환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대수가 크게 놀라 하가강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아나서 산해관을 헐고 나갔다. 그 뒤 금주송산의 싸움에 조대락조대성(祖大成)조대명(祖大明 세 사람 모두 한 형제간임) 등이 모두 사로잡히고, 대수는 대릉하성(大凌河城)을 지키던 중 청군에게 에워싸였다가 양식이 다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패루만 우뚝 서 있을 뿐, 농서(隴西)의 가성(家聲)은 벌써 헐리어서 부질없이 후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대수가 성 안에 있던 곳을 문방(文坊)이라 하고, 성 밖에 있던 곳을 무당(武堂)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딴 사람이 들어있다. 그리고 서쪽 몇 길 되는 담 안에 조그만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문과 담의 제도가 패루의 기묘한 솜씨와 비슷하다. 담 안에 오히려 두어 칸 정사(精舍)가 남아 있어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대수가 한가할 때 글 읽던 곳이라 한다. 이날 밤에 천둥과 비가 새벽까지 멎지 않았다.

 

 

[D-001]조대수(祖大壽)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를 지키다가 실패하고, 면주(綿州)에서 청에게 항복하여 총병(摠兵)이 되었다.

[D-002]원숭환(袁崇煥) : 명말의 대장,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요동 순무(遼東巡撫)로 공이 많았으나 청과 화친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D-003]고증(誥贈) : 추증과 같다. 청의 제도에 5품관 이상은 죽은 조모 처를 추봉했는데 이때 고() 자를 붙였다. 생존한 이는 고봉(誥封)이라 한다.

[D-004]하가강(何可剛)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 싸움에 조대수가 청군에 항복하려는 것을 굳이 말리다가 피살되었다.

[D-005]태감(太監) : 명의 벼슬 이름. 내부(內部) 모든 감()의 장관.

[D-006]() : 청의 군장(君長)을 일컫는 말.

[D-007]농서(隴西)의 가성(家聲) : () 이광(李廣)이 농서의 명장으로 대대로 높은 명망이 일세를 울렸으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0일 병신(丙申)

 

 

아침에 개었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리다.

이날 새벽에 영원성을 떠나 청돈대(靑墩臺)까지 7, 조장역(曹庄驛) 6, 칠리파(七里坡) 7, 오리교(五里橋) 5, 사하소(沙河所) 5, 모두 30리를 가서 점심 먹으니, 사하소는 곧 중우소(中右所). 낮 뒤에 찌는 듯한 더위가 비를 빚더니 겨우 간구대(乾溝臺) 3리를 와서 큰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연대하(煙臺河) 5, 반랍점(半拉店) 5, 망하점(望河店) 2, 곡척하(曲尺河) 5, 삼리교(三里橋) 7, 동관역(東關驛) 3, 모두 30리이다. 이날 60리를 갔다. 청돈대는 해돋이를 구경하는 곳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닭 울 임시에 먼저 떠나서 해돋이를 구경할 예정으로 내게 하인을 보내어 같이 가기를 청했으나, 나는 푸근히 자야겠다 하고 늦게 떠났다. 대체로 해돋이를 구경함도 역시 운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내 전에 동쪽 바다에 노닐 때 총석정(叢石亭)의 해돋이와 옹천(甕遷 통천군 남쪽)석문(石門 통천군 바닷가)의 해돋이를 하나도 시원히 보지 못했다. 혹은 늦게 이르러 해가 벌써 바다를 떠났고, 혹은 밤새 자지 않고 일찍 나가 보면 구름과 안개에 가려서 흐리곤 하였다.

대개, 해뜰 하늘에 구름 한점 없으면 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처럼 무미한 것이 없다. 이는 다만 빨간 구리 쟁반 한 덩이가 바다 속에서 나올 뿐 아무런 가관이 없는 것이다. 해는 임금의 기상이라, ()를 기리는 말에도,

 

바라볼 젠 구름이요 / 望之如雲

다가서니 해일러라 / 就之如日

하였으니, 그러므로 해가 돋기 전에는 반드시 많은 구름 기운이 그 변두리에 몰려들어, 마치 앞길을 인도하는 듯 뒤를 따르는 듯 의장(儀仗)을 갖추는 듯 천승(千乘)만기(萬騎)가 임금을 모시고 옹위하여 깃발이 펄럭이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연후에야 비로소 장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구름이 너무 많이 끼면 도리어 가물가물하고 가려져서 또한 볼 것이 없으려니, 대개 새벽 순음(純陰) 기운이 햇빛을 받아서, 이로 말미암아 바위 틈에 구름이 서리고 시냇가에 안개가 피어나서 서로 비치어 해가 돋을락 말락할 때에 그 기상이 원망스러운 듯 수심겨운 듯 해미가 끼어서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가 읊은 시(),

 

나그네 밤중되자 서로들 외치는데 / 行旅夜半相呌譍

먼 마을 닭 울음소리 외로이 들리누나 / 遠雞其鳴鳴未應

먼 닭이 먼저 우니 그곳이 어디더뇨 / 遠雞先鳴是何處

내 마음속 그 소리는 파리처럼 가늘도다 / 只在意中微如蠅

이웃 개 짖던 것이 그마저 고요하구나 / 村裏一犬吠仍靜

고요에 잠긴 이 몸 마음속이 떨리네 / 靜極寒生心兢兢

이때에 또 한 소리 귓가에 울려 와서 / 是時有聲若耳鳴

더 자세히 들으니 또 한 소리 홰를 친다 / 纔欲審聽簷雞仍

예서 총석정이 가까워 십 리라니 / 此去叢石只十里

넓디넓은 바닷가에 해돋이를 보오리라 / 正臨滄溟觀日昇

하늘인양 물인양 혼돈하여 가이 없고 / 天水澒洞無兆眹

언덕 위에 물결 치니 벼락이 이는 듯이 / 洪濤打岸霹靂興

흑풍이 이는 곳에 온 바다를 뒤집는 듯 / 常疑黑風倒海來

멧부리째 뽑을 듯이 돌인들 온전하리 / 連根拔山萬石崩

고래 싸움 등 터지니 이게야 예사련만 / 無怪鯨鯤鬪出陸

별안간 바다 끓어 큰 붕새 날아든다 / 不虞海運値摶鵬

오래도록 이날 밤이 안 샐까 근심이라 / 但愁此夜久未曙

이제 더욱 혼돈한들 뉘라서 분간할꼬 / 從今混沌誰復徵

이곳에 신령 있어 삼엄한 경계 펴니 / 無乃玄冥劇用武

땅 깊이 문이 닫혀 서산에 얼음 어네 / 九幽早閉虞淵氷

저 하늘 한 덩이가 뒤집혀 도는 듯이 / 恐是乾軸旋斡久

서북이 기울고 지구가 휘둘리네 / 遂傾西北隳環絙

세 발 까마귀 날기도 빨리 하네 / 三足之烏太迅飛

뉘라서 그 발 하나를 놋줄에 달아맬까 / 誰呪一足繫之繩

해약(바다 귀신)의 옷과 띠에 검은 빛이 듣는 듯 / 海若衣帶玄滴滴

수비(바다의 여신)의 쪽질머리 차갑기 짝이 없네 / 水妃鬢鬟寒凌凌

큰 고기 설렁이며 용마처럼 달려올 제 / 巨魚放蕩行如馬

붉은 갈기 푸른 등성이 어찌 그리 터벅한고 / 紅鬐翠鬣何鬅鬠

하늘이 만물 낼 제 뉘라서 참간했나 / 天造草昧誰叅看

미친 듯이 고함 치며 등불 켜고 보련다 / 大呌發狂欲點燈

창날 같은 혜성 꼬리 불살을 드리운 듯 / 攙搶擁彗火垂角

나무 위에 부엉이는 그 울음이 얄미워라 / 禿樹啼鶹尤可憎

잠깐 만에 바다 위에 작은 멍울 생긴 듯이 / 斯須水面若小癤

용의 발톱 그릇 닿아 독이 나서 아픈 듯이 / 誤觸龍爪毒可疼

그 빛깔 점점 커져 만 리를 뻗치누나 / 其色漸大通萬里

물결 위 붉은 무늬 꿩 가슴 모습일레 / 波上邃暈如雉膺

아득한 이 천지가 이제야 경계 생겨 / 天地茫茫始有界

붉은 빛 선 하나가 나누어 두 층 되네 / 以朱畵一爲二層

어둠 세계 깨어나서 온누리가 물든 듯이 / 梅澀新醒大染局

만상에 빛이 스며 비단 무늬 이루었네 / 千純濕色縠與綾

산호수 찍어 내니 검은 숯을 구우련가 / 作炭誰伐珊瑚樹

동녘에 빛 오르자 찌는 듯 뜨거워라 / 繼以扶桑益熾蒸

염제는 풀무 불어 입이 응당 비뚤겠고 / 炎帝呵噓口應喎

축융이 부채 부쳐 오른팔이 피로하리 / 祝融揮扇疲右肱

새우 수염 길다 한들 불사르긴 가장 쉽고 / 鰕鬚最長最易爇

달팽이 집 굳다 한들 저절로 익어지네 / 蠣房逾固逾自脀

얇은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모여들어 / 寸雲片霧盡東輳

찬란한 온갖 상서 제각기 나타내네 / 呈祥獻瑞各效能

옥황상제 뵙기 전에 갖옷을 던져 두고 / 紫宸未朝方委裘

도끼 그린 병풍 치고 잠자코 비껴 앉아 / 陳扆設黼仍虛凭

조각달이 가늘건만 계명성과 빛을 새워 / 纖月猶賓太白前

설의 나라일망정 장단을 다투도다 / 頗能爭長薛與滕

붉은 기운 점점 엷어 오색이 찬란쿠나 / 赤氣漸淡方五色

머나먼 곳 물결 머리 그 먼저 맑아지니 / 遠處波頭先自澄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딘지 도망치고 / 海上百怪皆遁藏

희화(태양을 몰고 가는 귀신)만 홀로 수레를 타는구나 / 獨留羲和將驂乘

둥글둥글 저 얼굴이 육만하고 사천 년에 / 圓來六萬四千年

오늘 아침 변하더니 네모도 나는구나 / 今朝改規或四楞

만 길이나 깊은 속에 뉘라서 떠올릴지 / 萬丈海深誰汲引

하늘에도 섬돌 있어 오르게 되었구려 / 始信天有階可陞

등림의 익은 과실 한 낱이 붉어 있어 / 鄧林秋實丹一顆

해 아드님 붉은 공이 꺼지고 반만 올라 / 東公綵毬蹙半登

과보(해와 경주하던 선인(仙人))도 뒤에 와서 쉬지 않고 헐떡이고 / 夸父殿來喘不定

여섯 용이 앞을 서서 자랑하기 그지없네 / 六龍前導頗誇矜

하늘 가이 어두워져 얼굴빛을 찌푸린다 / 天際黯慘忽顰蹙

햇바퀴를 힘껏 밀어 기운이 배가 솟네 / 努力推轂氣欲增

길기가 항아리라 바퀴처럼 못 궁글어 / 團未如輪長如瓮

솟았다 잠겼다 철석 소리 들리는 듯 / 出沒若聞聲砯砯

어제와 같이 환하게 만물을 보려면 / 萬物咸覩如昨日

뉘라서 두 손으로 한 번 들어 뛰올릴꼬 / 有誰雙擎一躍騰

라 하였다. 대개 해돋는 광경은 천변만화하여 사람마다 보는 바가 같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바다에서 구경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요동 벌에서 날마다 해돋이를 보았는데 하늘이 개서 구름 없으면 햇덩이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열흘을 두고 보아도 날마다 같지 않다. 부사와 서장관은 오늘도 역시 구름이 가려서 보지 못하였다 한다.

오후에 더위가 심하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우장옷이 찌는 듯하고 가슴이 그득한 것이 더위를 먹은 듯싶다. 잠자리에 들 때 큰 마늘을 갈아 소주에 타서 마셨더니, 그제야 배가 편하여 온전히 잘 수 있었다. 밤새 비가 멎지 않았다.

 

 

[D-001]총석정(叢石亭) : 관동 팔경의 하나. 강원도 통천(通川)에 있다.

[D-002]바라볼 …… 해일러라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서 나왔다.

[D-003]세 발 까마귀 : 태양 속에 까마귀가 깃들었다는 전설. 삼족오(三足烏).

[D-004] : 전국 때 두 개의 작은 나라.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

[D-005]등림(鄧林) : 곧 도림(桃林)인데, 중국의 전설에 과보(夸父)라는 선인(仙人)이 해를 쫓아 가다가 목이 타서 죽을 때 지팡이를 던지매 등림이 이룩되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1일 정유(丁酉)

 

 

비오다 개다 하다.

강물에 막혀서 동관역(東關驛)에 머물렀다. 들으니 옆 사관에는 등주(登州)에서 온 이 선생(李先生)이란 자가 있어서 점을 잘 치고, 또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기에 식후에 찾아갔다. 그의 점치는 법은 태을수(太乙數)를 본다 한다. 나는 그에게,

 

이게 자미두수(紫微斗數)가 아니오.”

하고 물었더니, 이생(李生),

 

이른바 자미(紫微)’란 소수(小數)에 불과하오나, 이 태을(太乙)은 곧 태을의 일성(一星)이 자미궁(紫微宮 옥황이 살고 있는 궁전)에 있어서 천일생수(天一生水)에 속하므로 태을이라 하오. 그리하여 을()이란 곧 일()이요, ()는 조화의 근본이며, 육임(六壬)은 곧 물이요, 둔갑(遁甲) 역시 태을이라, 이는 오월춘추(吳越春秋) 같은 책에 명험(明驗)이 많이 나타나 있고, 육십사괘(六十四卦 역경(易經)에 실린 네 개의 괘)가 도시 이에 자나지 못하는 거요. 그러므로 장수(將帥)가 된 자로서 이 육임과 둔갑(遁甲)의 법을 모르면 기변(奇變)을 알지 못하는 법이오.”

한다. 내 본시 성미가 관상(觀相)이나 사주(四柱 생년) 같은 걸 좋아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그 법을 알지 못하고, 또 그가 말한 육임둔갑이라는 것이 몹시 허망한 것이므로 사주를 내어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자 역시 그의 술수를 과장하여 많은 복채를 낚으려다가 내 기색이 매우 냉담함을 살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방 맞은편에 한 노인이 안경을 쓰고 앉아서 글을 베끼고 있기에, 그 앞으로 다가서서 베끼는 것을 본즉, 모두 근세의 시화(詩話)이다. 노인이 안경을 늦추고 붓을 멈추면서,

 

손님이 멀리 오셨으니 길에서 해랑(奚囊)이 필수 풍부하시리니 아름다운 글귀 두어 구를 남겨 주시지요.”

한다. 그 베끼는 글씨는 비록 옹졸하나 시화에는 제법 묘한 것이 더러 있고, 노인 역시 생김새가 밝고 아담하고 곁에 놓인 물건들도 정쇄하기에 구들에 들어앉아서 서로 성명을 대니, 노인 역시 등주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성은 축()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가 우리나라 여자의 비녀를 지르는 법과 의복 제도를 묻기에, 나는,

 

모두 중국 상고 시대의 것을 본받았습니다.”

하니, 축은,

 

좋아요, 좋소이다.”

한다. 나는 그에게,

 

그럼, 귀향(貴鄕)의 여복은 어떠하오니까.”

한즉, 축은,

 

대략 같습니다. 풍습이, 여자가 시집갈 때면 쪽지만 하고 비녀는 꽂지 않으며, 빈부를 가릴 것 없이 평민(平民)의 부녀는 관()을 쓰지 않고, 다만 명부(命婦)만이 관을 쓰는데, 제각기 남편의 직품(職品)에 따라서 잠이나 머리꽂이 역시 모자의 제도와 같이 층하가 있으며, 쌍봉차(雙鳳釵)가 제일 고귀하되, 그 중에도 비봉(飛鳳)입봉(立鳳)좌봉(坐鳳)즙봉(戢鳳) 등의 구별이 있고, 비취잠(翡翠簪)에도 모두 품직의 차이가 있으며, 처녀는 긴 바지저고리를 입다가 시집가면 적삼에다 큰 소매 달린 긴 치마를 입고 띠를 두릅니다.”

한다. 나는,

 

등주가 여기서 얼마나 되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와 계시오.”

하니, 축은,

 

등주는 옛날 제()의 지경으로 이른바 바다를 등진 나라라 하는 곳입니다. 육로로는 북경까지 1 5백 리지만 우리들은 배를 타고 면화(綿花)를 사러 금주(金州)에 가다 이곳에 지체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베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이 적힌 것이 있다.

 

나홍선(羅洪先 양명학파(陽明學派)의 대가)은 길수(吉水) 사람인데, ()의 가정(嘉靖) 기축년(1529) 과거에 장원(壯元)했다.

주연유(周延儒)는 직례(直隷) 사람인데 만력(萬曆) 계축년(1613) 과거에 장원했다.

위조덕(魏藻德)은 통주(通州) 사람인데 숭정(崇禎) 경진년(1640) 과거에 장원했다.

그 중 연유는 명의 왕실을 크게 무너뜨렸고, 조덕은 적병에게 항복하였으나 죽음을 당했고, 나홍선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으나 그는 20년 동안 성인의 도()를 배운 힘이 마음속에 겨우 장원(壯元)’ 두 글자를 잊어버렸을 정도이다.

또 근세의 유림(儒林)들을 열록(列錄)하였다.

 

육가서(陸稼書) 선생의 시호는 청헌(淸獻)이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탕형현(湯荊峴) 선생의 휘는 빈()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요, 자는 공백(孔伯)이며, 호는 잠암(潛菴)이니, 문묘에 종사하였다.

이용촌(李榕村 용촌은 호()) 선생 광지(光地) 운운(云云).

위상추(魏象樞 청초의 직신(直臣), 자는 환극(環極))는 모두들 큰 선비라 일컫는다.

서섬포(徐蟾圃 청초의 학자. 섬포는 호) 건학(乾學) 운운(云云).

그리고 축 노인(祝老人)은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글 베끼기에 바빴다. 그 옆에 다섯 권 책이 있어 고인의 생년시를 적었는데 하우씨(夏禹氏)항우(項羽)장량(張良)영포(英布 한의 명장)관성(關聖 관우(關羽)) 등의 사주가 모두 적혀 있다.

내가 종이 몇 쪽을 빌려서 한 벼루에 대고 대강 초하는데 이때에 점쟁이 이()는 방에 있지 않았더니, 내 겨우 백 명 남짓 베꼈을 때 그가 밖에서 들어와서 보고는 크게 노하여 이를 빼앗아 찢으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면 아니되어.”

하기에, 나는 한 번 껄껄 웃고 일어나 사관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오히려 찢은 나머지 종이쪽이 있다.

 

왕서공(王舒公 진 명제(晉明帝)의 명신)은 신유 11 1일 진시(辰時)에 나다.

부정공(富鄭公 부필(富弼), 정공은 봉호)은 갑진 정월 20일 사시(巳時)에 나다.

소자용(蘇子容)은 경신 2 22일 사시에 나다.

왕정중(王正仲 ()은 중()인 듯, 명말의 절신(節臣))은 계해 정월 11일 신시(申時)에 나다.

한장민(韓莊敏)은 기미 7 9일 인시(寅時)에 나다.

채경(蔡京 ()의 정치가)은 정해년 임인월 임진일 신해시에 나다.

증포(曾布 송대 증공(曾鞏)의 아우 채경에게 밀려났다)는 을해년 정해월 신해일 기해시에 나다.

그 중 한장민왕정중은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모두 귀인임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른바 천기 누설이란 말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오후에 비가 잠깐 개기에 심심하여 한 상점에 들어갔다. 뜰 안에는 반죽(斑竹)으로 난간을 두르고, 도미(茶蘼 장미과에 속한 식물)로 짠 시렁 아래에 한 길 되는 태호석(太湖石)이 서 있다.

돌 빛은 파랗고 뒤에는 길 넘는 파초(芭蕉)가 심어져 있어서 비온 뒤의 빛깔이 더욱 산뜻해 보인다. 난간 가에 다만 사람 하나가 걸터앉아 있고, 책상 위에 놓인 붓과 벼루가 다 품질이 좋은 것들이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 앉아 글을 써서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손을 흔들며 대답하지 않고 곧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 주인이 아닌가보다 하였으나 태호석을 구경하느라고 잠깐 지체하였더니, 그 사람이 한 청년을 데리고 웃으며 들어온다.

청년이 내게 읍하여 앉히고 바삐 종이 한 쪽을 내어 만주 글자를 쓰기에, 나는,

 

그건 모르오.”

한즉, 둘이 다 웃는다. 아마 주인이 글을 한 글자도 모르므로 나가서 맞은편 점포 청년을 데리고 온 모양이다.

그 청년은 비록 만주 글은 잘 아는 듯하나 한자(漢子)는 모르므로, 마침내 서로 말로 두어 마디 수작(酬酌)하였으나 피차에 얼버무려 넘기니, 이야말로 이른바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요, 장님 아닌 장님이요, 벙어리 아닌 벙어리 꼴이다.

세 사람이 정좌(鼎坐)한즉 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병신들이다. 다만 서로 웃음으로 껄껄거리고 지나가는 판이다. 아까 그 청년이 만자(滿字)를 쓸 때 주인은 옆에서,

 

동무가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나는 만주 글을 모르오.”

하니, 청년은,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하면 어찌 즐겁지 않겠소.”

한다. 나는,

 

그대들이 논어를 이처럼 잘 외면서 어찌 글자를 모르나.”

하니, 주인은,

 

남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노여워하는 뜻을 품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소이까.”

하기에, 나는 시험삼아서 그들이 외운 석 장()을 써 보인즉, 그들은 모두 눈이 둥그레지며 들여다볼 뿐, 멍하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나기가 퍼부어서 옆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으나, 둘이 다 글을 모르고 나 역시 북경 말에 서툴러서 어쩌는 수 없다.

지척(咫尺) 사이에 비에 막혔으므로 더욱 마음이 갑갑하고 무료(無聊)하기 짝이 없다. 청년이 일어나 나가더니 조금 뒤에 그 비를 무릅쓰고 손에 능금 한 바구니,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수란(水卵) 한 자배기를 들고 왔다. 그 자배기는 둘레가 칠 위(七圍 다섯 치)나 되고, 두께는 한 치, 높이는 서너 치 되는데 푸른 유리를 올리고 두 볼엔 도철(饕餮)의 무늬를 새겼으며, 입에는 큰 고리를 물렸는데 세숫대야로 쓰기에 알맞을 것 같으나 무거워서 멀리 가져 갈 수는 없게 생겼다.

그 값을 물으니 1()라 한다. 1초는 1 63푼이니 은()으로 치면 겨우 서 돈에 지나지 않는다. 상삼(象三)의 말이,

 

이게, 북경에선 두 돈밖에 주지 않으나 몹시 무거워서 옮겨가기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가져 가면 희귀한 보배일 줄 뻔히 알면서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한다. 저녁 때 비가 쾌히 개기에 또 한 점포에 들렀더니, 역시 등주서 온 장사치 세 사람이 솜을 틀고 고치를 켜기 위하여 배로 금주(金州)를 다니는데, 대개 금주의 우가장(牛家庄)은 등주에서 수로로 2백여 리의 맞은 편이건만 순풍에 돛을 달아 쉽사리 왕래할 수 있다 한다. 셋이 모두 약간 글을 아나 다만 사납게 생긴데다 전혀 예의를 모르고 버릇없이 농담을 붙이기에 곧 돌아왔다.

 

 

[D-001]태을수(太乙數) : 점술의 용어. 태을은 별의 이름.

[D-002]자미두수(紫微斗數) : 점술의 용어. 자미는 별의 이름. 제왕에 해당한 성좌(星座).

[D-003]천일생수(天一生水) : 하늘이 열릴 때 첫째로 물을 낳는다는 것.

[D-004]육임(六壬) : ()이 음수(陰數)인 동시에 임()도 북방의 귀신이었다.

[D-005]둔갑(遁甲) :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의 몸을 못 보도록 한다는 술법.

[D-006]오월춘추(吳越春秋) : () 조욱(趙煜)의 저. 전국 때 오와 월의 역사를 소설체로 쓴 것.

[D-007]해랑(奚囊) : 시구를 수집해 넣은 주머니. () 천재 시인 이하(李賀)의 고사에서 나왔다.

[D-008]명부(命婦) : 부녀로서 봉호를 받음이니 내명부와 외명부의 구별이 있다.

[D-009]주연유(周延儒) : 내치(內治)와 외정(外政)에 많은 공이 있었으나, 위인이 용렬하여 나중에 사사(賜死)되었다.

[D-010]위조덕(魏藻德) : 이자성에게 붙잡혀 굴복하였으나 피살되었다.

[D-011]탕형현(湯荊峴) : () 초의 명신. 형현은 자.

[D-012]태호석(太湖石) : 양주(楊州) 태호에서 나는 돌. 구멍이 많고 주름살이 잡힌 것.

[D-013]동무가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學而章)의 첫째 절().

[D-014]배운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의 둘째 절.

[D-015]남이 …… 아니겠소이까 : 논어(論語) 학이장의 셋째 절.

[D-016]도철(饕餮) : 탐식하는 악수(惡獸)의 이름. 옛날 그릇에 흔히 이를 새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2일 무술(戊戌)

 

 

개다.

동관역에서 떠나 이대자(二臺子)까지 5, 육도하교(六渡河橋) 11, 중후소(中後所) 2, 모두 18리를 가서 점심 먹다. 중후소에서 일대자(一臺子) 5, 이대자 3, 삼대자(三臺子) 4, 사하점(沙河店) 8, 엽가분(葉家墳) 7, 구어하둔(口魚河屯) 3, 어하교(魚河橋) 1, 석교하(石橋河) 9, 전둔위(前屯衛) 6, 모두 48리이다. 전둔위서 묵었다. 이날 66리를 갔다.

배로 중후소하(中後所河)를 건너다. 옛날엔 성이 있었더니 중년에 허물어져서 방금 수축하는 중이다. 점포와 여염이 심양에 버금가겠고, 관제묘(關帝廟)의 장려함이 요동보다 나은데 매우 영험이 있다 한다. 일행이 모두 예폐(禮幣)를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비를 뽑아 길흉을 점쳐본다. 창대가 참외 한 개를 놓고 무수히 절하고 또 그 참외를 소상 앞에서 제가 먹어버렸다. 제가 무엇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가진 것이 적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사치롭다.’는 옛말이 곧 이를 두고 이름이다. 문 안 조장(照墻)에 그린 파란 사자가 그럴 듯하다. 이는 감로사(甘露寺)의 것을 본뜬 것 같다.

오도자(吳道字)가 그리고,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찬()을 지었는데, 그 글에,

 

위엄은 이빨에 보이고 / 威見齒

기쁨은 꼬리에 나타나네 / 喜見尾

하였으니, 이는 가히 잘 형용했다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는 모두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다. 그 공장은 모두 셋이 있는데, 한 집이 적어도 30~40칸은 되며 거기서 일하는 공인은 모두 백 명이 넘는다. 의주 상인들이 수없이 많이 와서 모자를 예약해 놓았다가 돌아갈 때 싣고 간다. 모자 만드는 법은 매우 쉽다. 양털만 있다면 나도 만들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양을 치지 않으므로 인민이 1년 내내 고기 맛을 모르고, 전국의 남녀 수는 수백 만이 넘는데 사람마다 털모자 하나씩을 써야만 겨울을 날 수 있게 된다. 해마다 동지(冬至)황력(黃曆)재자(賫資) 등의 사행에 가지고 가는 은이 줄잡아도 10만 냥은 될 것인즉, 10년을 계산하면 무려 백만 냥이다.

모자는 사람마다 삼동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말 뿐인즉,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써 한겨울 쓰면 내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어 내는 한도 있는 은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고 그 손놀림이 바람처럼 날쌔다. 우리나라에서 갖고 온 은화(銀貨)가 이곳에서 반은 사라지는 터이므로 공장 주인이 각기 단골 손님을 정하여 의주(義州) 장사치가 오면 반드시 크게 주식(酒食)을 베풀어 대접한다는 것이다.

길에서 도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짝을 지어 시장 골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구걸한다. 그 중 하나는 머리에 구름 무늬를 놓은 검은 사()로 만든 모난 갓을 쓰고, 몸에는 옥색 추사(縐紗)로 지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도포와 푸른 항라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띠고 발엔 붉고 모난 비운리(飛雲履)를 신고, 등에는 옛 참마검(斬魔劒 마귀를 베는 칼)을 지고 손에는 죽간(竹簡)을 들었는데, 흰 얼굴과 삼각(三角) 수염에 미목이 헌칠하다.

또 하나는 머리에 두 갈래 뿔상투를 짜고 붉은 비단을 감았으며, 몸에는 소매가 좁은 푸른 비단 저고리를 입고, 어깨에는 벽려(薜荔)를 걸치고, 두 무릎 위에는 호피(虎皮)를 대었으며, 허리에는 홍단 넓은 띠를 띠고 발에는 청혜(靑鞋)를 신고, 등에는 비단으로 꾸민 오악도(五嶽圖 오악을 그린 그림)의 족자를 지고 또 허리엔 금호로병을 찼으며, 손에는 도서(道書) 한 갑()을 들었는데 얼굴은 희고 가냘프다.

또 하나는 머리를 말아서 어깨에 척 걸치고 금테를 둘렀으며, 몸은 검은 공단으로 지은 소매 넓은 장삼(長衫)을 입고, 맨발인 채 손엔 붉은 호로병을 들었다. 붉은 얼굴에 고리눈이요, 입 속으로 주문(呪文)을 외면서 간다. 저자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그들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석교하에 다다르니, 강물이 불어서 물과 언덕의 분간이 없다. 물은 그렇게 깊지 않으나 물살이 제법 세다. 모두들 말하기를,

 

지금 곧 건너지 않으면 물이 차츰 더 불을 걸.”

한다. 이에, 나는 정사의 가마에 들어 함께 건너서 저쪽 언덕에 닿아서 보니 말을 타고 건너는 이는 모두 모두 하늘을 쳐다보고 얼굴빛[顔色]이 푸르락누르락 한다.

서장관의 비장 조시학이 물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하여 모두들 몹시 놀랐다. 의주 상인 중에 돈주머니를 빠뜨린 자가 있어 물을 굽어 보면서, ‘아이구, 어머니 하고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한다.

전둔위 시장에 연극이 열렸다가 막 파하려 한다. 시골 여자 수백 명이 모두 늙은이들이었으나 오히려 차림새는 야단스럽게 꾸몄다. 연극하는 자는 망포(蟒袍)상홀(象笏)피립(皮笠)종립(椶笠)등립(藤笠)종립(鬉笠)사립(紗笠)사모(紗帽)복두(幞頭) 같은 것이 완연히 우리나라 풍속과 다름없다. 도포는 자줏빛도 있고 방령(方領)은 검은 선을 둘렀으니, 이는 아마 옛날 당()의 제도인 듯싶다. 아아, 슬프다. 신주(神州)가 육침(陸沉)한 지 이제 백여 년에 의관의 제도는 오히려 저 배우 연극의 사이에 남아 있으니 하늘이 마치 이에 무심하지 않는 성싶다. 무대에는 모두 여시관(如是觀 불가(佛家)의 말)’이란 석 자를 써 붙였으니 이에서도 역시 그 숨은 뜻이 어디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마침 지현(知縣 ()의 장관) 한 사람이 지나는데, ‘정당(正堂)’이라 쓴 큰 부채 한 쌍, 붉은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붉은 우산 한 개, () 두 쌍, 대곤장 한 쌍, 가죽채찍 한 쌍을 가졌으며 지현은 가마를 타고 뒤에 활과 살을 가진 기병 5~6명이 따랐다.

 

 

[D-001]가진 …… 사치롭다 : 사기(史記) 골계전(滑稽傳) 중에 실린 순우곤(淳于髡)의 말.

[D-002]오도자(吳道字) : ()의 저명한 화가(畵家)인 오도현(吳道玄). 도자는 자.

[D-003]황력(黃曆) :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는 사행. 본시 동지사가 받아왔던 것을 조선 현종(顯宗) 원년부터는 따로 가게 되었다.

[D-004]재자(賫資) : 삼사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역관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약식 사행.

[D-005]비운리(飛雲履) : 신발 이름. 검은 능 바탕에 흰 견을 가지고 구름 모양으로 꾸몄다. 당의 백거이(白居易)에서 비롯하였다 한다.

[D-006]벽려(薜荔) : 풀 이름. 여기에서는 은사(隱士)들 옷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3일 기해(己亥)

 

 

이슬비 내리다 곧 개다. 이날이 처서(處暑)이다.

전둔위에서 아침에 떠나 왕가대(王家臺)까지 10, 왕제구(王濟溝) 5, 고령역(高嶺驛) 5, 송령구(松嶺溝) 5, 소송령(小松嶺) 4, 중전소(中前所) 10, 모두 39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중전소에서 대석교(大石橋)까지 7, 양수호(兩水湖) 3, 노군점(老君店) 2, 왕가점(王家店) 3, 망부석(望夫石) 10, 이리점(二里店) 8, 산해관 2, 관에 들어 다시 10리를 가서 심하(深河)에 이르러 배로 건넜다. 거기에서 홍화포(紅花舖) 7, 모두 47리이다. 이날 86리를 갔다. 홍화포에서 묵었다.

길가에 보이는 분묘(墳墓)들은 반드시 담을 둘렀는데, 그 둘레가 수백 보이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나란히 심어서 그 배포가 가지런하다. 묘 앞에는 모두 화표주(華表柱)가 서 있는데, 석물(石物)들을 보니 거의 전조(前朝) 귀인들의 무덤이다. 문은 셋이나 혹은 패루로 하였는데 그 제도는 비록 이전 조가(祖家)의 패루만은 못하나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많다. 문 앞에는 돌다리를 무지개처럼 놓고 난간을 둘렀다. 그 중 영원 서문 밖의 조대수(祖大壽)의 선영과 사하점의 섭씨(葉氏)의 분묘가 가장 웅장화려한 것이다.

여인 셋이 있어 모두 준마를 타고 말 위에서 재주를 넘는데, 그 중에 열세 살난 소녀가 가장 재빠르고 잘 탄다. 모두 머리에 초립(草笠)을 쓰고, 그 좌우(左右)칠보(七步)도괘(倒掛)시괘(尸掛) 등 법은 날램이 마치 나부끼는 눈송인 듯 춤추는 나비인 듯하다. 한녀(漢女)는 살 길이 막히면 대개 비럭질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된다 한다.

또 들 위에 한 전진(戰陣)을 벌여 놓았는데, () 네 귀퉁이에 각기 기 하나씩을 꽂았다. 비록 검()()()() 따위는 없으나 사람마다 앞에 체바퀴만한 큰 화살통을 놓고 모두 수백 개나 되는 화살을 꽂았다. 진의 모양은 똑바르고 기병은 모두 말에서 내려 진 밖에 흩어져 있다. 내가 말에 내려서 한 바퀴 둘러본즉 다만 둘씩 늘어서 있을 뿐 중권(中權 참모부 같은 중심부)의 깃발이나 북소리도 없으려니와 또 천막을 친 것도 없다.

혹은 말하기를,

 

성경장군(盛京將軍)이 내일 순시한다오.”

하고, 또는,

 

성경 병부시랑(兵部侍郞)이 갈리어서 점심 참에 당도(當到)할 예정이므로 중전소(中前所) 참장(叅將)이 이곳에서 맞이하는데, 참장이 아직 이르지 아니하므로 진을 풀어 방금 신지(迅地)에 모이는 중이에요.”

한다. 들판 못에 붉은 연꽃이 한창이라 말을 멈추고 한참 구경했다. 왕가점에 이르니 산 위에 장성이 아득히 눈에 들어온다. 부사서장관과 변 주부(卞主簿)정 진사(鄭進士)와 수종인 이학령(李鶴齡) 등과 함께 강녀묘(姜女廟)에 갔다가 다시 관 밖의 장대(將臺)를 거쳐 마침내 산해관에 들다. 저녁 나절에 홍화포(紅花舖)에 닿았다. 밤엔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잠을 설쳤다.

 

 

[D-001]좌우(左右) …… 시괘(尸掛) : 마상재(馬上才) 연기의 네 가지 종류 이름. 도괘는 새의 이름.

[D-002]신지(迅地) : 청의 병제(兵制)에 있는 일종의 군관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강녀묘기(姜女廟記)

 

 

강녀(姜女)의 성은 허씨(許氏), 이름은 맹강(孟姜)인데, 섬서(陝西) 동관(同官)에 사는 사람이다. 범칠랑(范七郞)에게 시집갔더니 진()의 장군(將軍)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을 때, 범랑(范郞)이 그 일에 역사하다가 육라산(六螺山) 밑에서 죽어 그 아내 맹강에게 현몽되었다. 그리하여, 맹강이 손수 옷을 지어 혼자서 천 리를 가서 그 지아비의 생사를 탐지하다가 이곳에서 쉬며 장성을 바라보고 울어서 이내 돌로 화하였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맹강이 그 지아비의 죽음을 듣고 홀로 가서 그 뼈를 거두어 업고 바다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돌 하나가 바다 가운데 솟아서 조수가 밀려 들어도 잠기지 않았다.”

한다. 뜰 가운데 비석 셋이 있는데 거기 기록된 것이 모두 같지 않고, 또 허황한 말이 많다. ()에는 소상을 세우고 좌우에 동남(童男)동녀(童女)를 늘어 세웠다. 황제가 여기다 행궁(行宮)을 두었는데, 지난해 심양에 거둥할 때, 지나는 행궁마다 죄다 중수하였으므로 단청이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묘에 문문산(文文山)이 쓴 주련(柱聯)이 있고, 망부석(望夫石)에는 황제가 지은 시()를 새겼으며, 돌 곁에는 진의정(振衣亭)이 있다. () 왕건(王建)의 망부석시(望夫石詩)는 이 돌을 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지(地志),

 

망부석이 둘인데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고, 또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다.”

하였은즉, 왕건의 읊은 것이 그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진() 나라 때엔 아직 섬()이란 땅 이름이 없었을뿐더러 강()도 제녀(齊女)를 일컬은 것인즉, 허씨를 섬서 동관 사람이라 함은 더욱 터무니 없는 말이다. 행궁 섬돌에서 강녀묘에 이르기까지 돌난간을 둘렀고, ‘방류요해(芳流遼海)’라는 현판은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D-001]문문산(文文山) : 송말의 이름 높은 충신 문천상(文天祥). 문산은 호.

[D-002]왕건(王建) : 당의 시인(詩人). 특히 궁사(宮詞)로 유명하였다.

[D-003]()도 제녀(齊女) : ()는 강성의 고장이요, 또 미녀가 강성에 많기로 이름났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장대기(將臺記)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산해관을 1리쯤 못 가서 동향으로 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가 여남은 길, 둘레는 수백 보이고, 한 편이 모두 칠첩(七堞)으로 되었으며,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사람 수십 명을 감출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구멍이 스물 네 개이고,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의 쌓은 것이라 하나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吳王臺)’라고도 한다.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을 지킬 때에 이 굴 속으로 행군하여 갑자기 이 대에 올라 포성을 내니, 관 안에 있던 수만 병이 일시에 고함을 질러서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관 밖의 여러 곳 돈대에 주둔했던 군대도 모두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호령이 천 리에 퍼졌다.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첩 위에 올라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창해(滄海)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을 다다르고 서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眺望)이 좋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관 속 수만 호의 거리와 누대(樓臺)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은 곧 창려현(昌黎縣) 문필봉(文筆峯)이다. 한참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니 아무도 먼저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 하나 몸을 돌릴 공간이 없어서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다. 나는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대개 오를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험함을 몰랐는데, 급기야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 보니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니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한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혹은 남을 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렇다.

 

 

[D-001]() : 혹은 한()으로도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산해관기(山海關記)

 

 

산해관은 옛날의 유관(楡關)인데, 왕응린(王應麟) 지리통석(地理通釋),

 

()의 하양(下陽), ()의 상당(上堂), ()의 안읍(安邑), ()의 유관, ()의 서릉(西陵), ()의 한락(漢樂)은 모두 그 지세로 보아서도 꼭 웅거해야 하고, 그 성으로 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

하였다. ()의 홍무(洪武) 17(1384)에 대장군 서달(徐達)이 유관을 이곳에 옮겨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이름을 산해관이라 하였다. 태항산(太行山)이 북으로 달려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는데, ()이 열두 산을 봉()할 때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그 산이 중국의 동북을 가로막아 중국과 외국의 경계가 되었으며, 관에 이르러서는 크게 잘리어서 평지가 되어 앞으로 요동 벌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는 창해를 낀 듯하니, 이는 우공(禹貢),

 

오른편으로 갈석(碣石)을 끼었다.”

는 것이 곧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그리고 장성이 의무려산을 따라 굼틀굼틀 굽이쳐 내려와 각산사(角山寺)에 이르며, 봉우리마다 돈대가 있고 평지에 들어와서 관을 둔 것이다. 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三簷)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望海亭)’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徐中山 서달의 봉호)이 쌓은 것이다. 이 관의 첫째 관은 옹성(甕城)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문 위의 홍예(虹霓) 이마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4층의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홍예 이마에 산해관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사(三使)가 모두 문무로 반()을 나누어 심양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했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는데,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 조사서(調査書))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십자가(十字街)에 성을 둘렀는데, 사면에 둥근 문을 내고 그 위에 삼첨 높은 다락을 세웠으며, ‘상애부상(祥靄榑桑)’이라 현판을 붙였으니 이는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글씨다. 원수부(元帥府)의 문 밖에 돌사자 둘을 앉혔는데, 높이가 각기 두어 길이나 되며 여염과 저자의 번영함이 성경보다 낫고 수레와 말이 가장 많은데, 청춘 남녀들이 더욱 화려한 화장을 꾸몄으니 그 번화롭고 풍부한 품이 이제껏 보아 온 중에 제일이라 하겠다. 대개 이곳은 천하의 웅관(雄關)이며 또는 서쪽으로 북경이 멀지 않은 까닭이다. 봉성으로부터 천여 리 사이에 보(), ()이니, (), ()이니 하여 나날이 성 몇 곳씩은 보아 왔건만, 이제 장성을 보고 나니, 그들의 시설이나 솜씨가 모두 이 관에서 본뜬 것이긴 하나 그들을 이 관에 비하면 어린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다. 아아, 슬프다.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아서 되놈을 막으려 하였건만 진()을 망칠 호()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서중산이 이 관을 쌓아 되를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서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천하가 일이 없는 지금,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을 사게만 되었으니, 난들 이 관에 대하여 다시 무어라고 말할 것이 있으리오.

 

 

[D-001]왕응린(王應麟) : 송의 저명한 학자. 자는 백후(伯厚).

[D-002]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 중국 최초의 지리지(地理志).

[D-003]() …… 났으며 : 진 시황이 당시에 진을 망칠 자는 호()라는 비결을 믿어서 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사실 진을 망친 자는 호()가 아니요, 집안에 생겨난 그의 아들 호해(胡亥)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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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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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 27리다.

 

1.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2. 11일 정해(丁亥)

3. 속재필담(粟齋筆談)

4. 상루필담(商樓筆談)

5. 12일 무자(戊子)

6. 고동록(古董錄)

7. 13일 기축(己丑)

8. 14일 경인(庚寅)

9.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10. 산천기략(山川記略)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비오다 곧 개었다.

십리하(十里河)에서 일찍 떠나 판교보(板橋堡) 5, 장성점(長盛店) 5, 사하보(沙河堡) 10, 폭교와자(暴交蛙子) 5, 전장보(氈匠堡) 5, 화소교(火燒橋) 3, 백탑보(白塔堡) 7, 도합 40리를 가고, 백탑보에서 점심 먹고 거기서 다시 일소대(一所臺) 5, 홍화포(紅火舖) 5, 혼하(渾河) 1, 배로 혼하를 건너서 심양(瀋陽)까지 9, 도합 20리이니, 이날은 60리를 갔다. 심양에서 묵었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멀리 요양성(遼陽省) 밖을 돌아보니 수풀이 아주 울창한데 새벽 까마귀 떼가 들 가운데 흩어져 날고 한 줄기 아침 연기가 하늘 가에 짙게 끼었는데다 붉은 해가 솟으며 아롱진 안개가 곱개 피어 오른다. 사방을 둘러본즉 넓디넓은 벌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다. 아아, 이곳이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던 터전이구나. 범이 달리고 용이 날 제 높고 낮음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옛말도 있겠지만, 그러나 천하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싸움 북이 소란히 울려댄다. 이는 어인 까닭일까. 대개 평평한 벌과 넓은 들판이 한 눈에 천 리가 트인 이곳을 지키자니 힘들고, 버리자니 오랑캐가 쳐들어 오는데 아무런 방비할 계교가 없으므로 이곳은 중국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터전이어서, 비록 천하의 병력을 기울여서라도 이를 지킨 뒤에야 천하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천하가 백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음이 어찌 그들의 덕화와 정치가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이라 할 수 있으리오. 단지 이 심양은 본시 청()이 일어난 터전이어서 동으로 영고탑(寧古塔)과 맞물리고, 북으로 열하(熱河)를 끌어당기고,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며 서로는 향하는 곳마다 감히 까딱하지 못하니, 그 근본을 튼튼히 다짐이 역대에 비하여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요양에 들어오면서부터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지고, 닭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토록 백 년 동안이나 무사하긴 하나 청의 황제로서는 오히려 한낱 근심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몽고(蒙古) 수레 수천 채가 벽돌을 싣고 심양에 들어오는데, 수레마다 소 세 마리가 끈다. 그 소는 흰 빛깔이 많으나 간혹 푸른 것도 있으며, 찌는 듯한 더위에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고 코에서 피를 뿜는다. 몽고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옷과 벙거지가 남루하고 얼굴에는 땟국이 흐른다. 그런데도 버선은 꼭 신고 있다. 우리 하인배들이 알정강이로 다니는 것을 보곤 이상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의 말몰이꾼들은 해마다 몽고 사람을 봐 와서 그 성격을 잘 알므로 서로 희롱하면서 길을 간다. 채찍 끝으로 그들의 벙거지를 퉁겨서 길 곁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공처럼 차기도 한다. 그래도 몽고 사람들은 웃고, 성내지 않으며 두 손을 펴서 부드러운 말씨로 돌려 달라고 사정한다. 또 하인들이 뒤로 가서 그 벙거지를 벗겨 가지고 밭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면서 짐짓 그들에게 쫓기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켜 그들의 허리를 안고 다리를 걸면 영락없이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 그 가슴을 가로 타고 앉아서 입에 티끌을 넣으면, 뭇 되놈들이 수레를 멈추고 서서 모두들 웃으며, 밑에 깔렸던 자도 웃으며 일어나서 입을 닦고 벙거지를 털어서 쓰고는 다시 덤벼들지 않는다.

길에서 한 수레를 만났다. 사람 일곱을 태웠다. 모두 붉은 옷을 입었고 쇠사슬로 어깨와 등을 얽어 매어서 목덜미에다 채우고는 다시 한 끝은 손을 매고 한 끝은 다리를 묶었다. 이들은 금주위(錦州衛)의 도둑으로, 사형을 한 등 감하여 멀리 흑룡강(黑龍江) 수자리 지역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라 한다. 그들의 입이나 눈의 생김새가 무서워 보인다. 그래도 수레 위에서 서로 웃고 떠들며 조금도 괴로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말 수백 필이 길을 휩쓸고 지나간다. 마지막 한 사람이 썩 좋은 말을 타고 손에 수숫대 한 가지를 쥐고 뒤에서 말 떼를 따라 간다. 말들은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이 다만 가끔 뒤를 돌아다 보면서 걸어 간다.

탑포(塔舖)에 이르렀다. 탑은 그 동리 한 가운데 있는데, 8 13층이고, 높이는 20여 길이나 된다. 층마다 둥근 문 네 개씩 틔어져 있다. 그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서 우러러보니 홀연 현기증이 생기기에 고삐를 되돌려 나와 버렸다. 일행은 벌써 사관에 들었다. 뒤쫓아 후당으로 들어가니 주인의 수염 밑에서 갑자기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멈칫하니, 주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앉기를 청한다. 주인은 긴 수염이 희끗희끗한 늙은이로 방 안 나지막한 걸상에 오똑이 걸터앉았고, 방 밖에는 교의를 마주하여 한 할멈이 앉아 있다. 머리 위에 희붉은 촉규화(蜀葵花) 한 봉오리를 꽂았으며, 옷은 야청 빛깔에 복숭아꽃 무늬 놓은 치마를 입었다. 할멈의 품에서도 강아지 짓는 소리가 더욱 사납게 들린다. 그제사 주인이 천천히 가슴 속에서 삽살강아지 한 마리를 끄집어 낸다. 크기는 토끼만 한데, 눈처럼 흰 털은 길이가 한 치나 되고, 등은 담청색이고 눈은 노랗고 입 언저리는 붉으레하다. 노파도 옷자락을 헤치고 강아지 한 마리를 꺼내어 내게 보이는데, 털 빛은 똑같다. 노파가 웃으면서,

 

손님, 괴이하게 여기지 마셔요. 우리 영감할멈 둘이서 하는 일 없이 집안에 들앉았으려니 정말 긴긴 해를 지우기가 지루해서 이것들을 안고 놀리다가 도리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요.”

한다. 나는,

 

주인 댁엔 자손이 없으신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아들 셋, 손주 하나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올해 서른 하나에, 방금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모시는 장경(章京)으로 있으며, 둘째 놈은 열아홉 살이고, 막내는 열여섯 살인데 둘 다 서당에 가서 글 읽는답니다. 아홉 살 된 손주놈은 저 버드나무에서 매미 잡는다고 나가선 해가 지도록 보기조차 어려워요.”

한다. 얼마 안 되어서 주인의 어린 손자가 손에 웬 나팔을 쥐고 숨이 차서 후당으로 뛰어 들어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나팔을 사 달라고 조른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사랑겨운 빛을 띠면서,

 

이런 건 쓸데없어.”

하고 타이른다. 그 아이는 미목이 희맑게 생겼다. 살구빛 무늬 놓인 비단 저고리를 입었다. 갖은 재롱과 어리광을 다 떨면서 이리저리 뛴다. 노인이 손자더러 손님 뵙고 인사 드리라고 시킨다. 군뇌가 눈을 부르뜬 채 후당으로 쫓아 들어와서 그 나팔을 빼앗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친다. 노인이 일어나서,

 

미안합니다. 그 놈이 놀잇감으로 갖고 온 게요. 물건은 아무런 파손이 없습니다.”

하고 사과한다. 나도,

 

찾았으면 그만이지. 하필 이토록 야단을 쳐서 남을 무료하게 한단 말인가.”

하고 군뇌를 나무랐다. 나는 또,

 

이 개는 어디서 나는 것이오.”

물은즉, 주인은,

 

운남(雲南)서 나는 거랍니다. 촉중(蜀中사천(四川)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강아지가 있지요. 이것의 이름은 옥토아(玉兎兒)이고, 저것은 설사자(雪獅子)라 부른답니다. 둘이 모두 운남 산이지요.”

하고 주인이 옥토아를 불러 인사하라 하니, 그 놈이 오똑히 서서 앞 발을 나란히 추켜들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다시 땅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리곤 한다.

장복이 와서 식사를 여쭙는다. 나는 곧 몸을 일으켰다. 주인은,

 

영감, 이미 이 미물을 귀여워하셨은즉 삼가 이걸 드리고자 합니다. 방물을 바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영감께서 가져 가셔도 무방하옵죠.”

한다. 나는,

 

고맙소이다마는, 어찌 함부로 받으리까.”

하고 급히 돌아서 나왔다. 일행이 벌써 나팔을 불고 떠나려 했으나, 내가 간 곳을 몰라서 장복을 시켜 두루 찾아 다닌 것이다. 밥을 이미 지은 지 오래되어 굳어지고, 또 마음이 바빠서 목에 넘어가질 않기에 장복과 창대더러 나눠 먹으라 하고, 혼자서 음식점에 들어가서 국수 한 그릇, 소주 한 잔, 삶은 달걀 세 개, 참외 한 개를 사 먹고는 마흔두 닢을 헤어서 치르고 나니 상사의 행차가 문 앞을 막 지나간다. 곧 변군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길을 떠났다. 배가 잔뜩 불렀으므로 20리 길을 잘 갈 수 있었다. 해는 벌써 사시(巳時)가 가까워서 볕이 몹시 내려 쪼인다.

요양에서부터 길가에 버드나무를 수없이 많이 심어서 그 우거진 그늘에 더위를 잊을 만하다. 가끔 버드나무 밑에 물이 괴어서 웅덩이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길 위로 둘러 나오면, 찌는 듯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후끈거리는 흙 기운이 치올라서 삽시간에 가슴이 막힐 듯 갑갑해진다. 멀리 버들 그늘 밑을 바라본즉 수레와 말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말을 재촉하여 그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기로 했다. 장사꾼 수백 명이 짐을 내리고 땀을 들이고 있다. 혹은 버드나무 그루에 걸터 앉아서 옷을 벗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혹은 차를 마시고 술을 기울이며, 어떤 이는 머리를 감기도 하고 깎기도 하며, 더러는 골패도 치며, 또는 팔씨름도 한다. 짐 속에는 모두 그림 그린 자기가 있고, 또 껍질 벗긴 수숫대로 조그맣게 누각의 모양을 만들어서 그 속에는 각기 우는 벌레나 매미를 넣은 것이 여남은 짐이나 되며, 어떤 것은 항아리에 빨간 벌레와 파란 마름을 넣었는데, 빨간 벌레는 물 위에 둥둥 뜬 것이 마치 새우알처럼 작다. 이는 고기 밥으로 쓰인다. 수레 30여 채에 모두 석탄을 가득히 실었다. 술도 팔며, 차도 팔고, 떡과 과실 등 모든 음식을 파는 자가 모두 버들 그늘 밑에 걸상을 죽 늘어 놓고 앉아 있다. 나는 여섯푼으로 양매차(楊梅茶) 반 사발을 사서 목을 축이었다. 맛이 달고 신 것이 제호탕(醍醐湯)과 비슷하다.

태평거(太平車 청의 승용차의 한 가지) 한 채에 두 여인이 탔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나귀가 물통을 보자 수레를 끈 채 통으로 달려 든다. 그 여인 둘 중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었다. 앞을 가렸던 발을 걷고 바람을 쏘이고 있다. 둘 다 꾀꼬리 무늬 놓은 파란 웃옷에 주황 빛깔 치마를 입고, 옥잠화패랭이꽃석류화로 머리를 야단스럽게 꾸몄다. 아마 한녀(漢女)인 듯하다.

변군이 술을 마시자기에 각기 한 잔씩 기울였다. 곧 떠났다. 몇 리를 못 가서 멀리 군데군데에 불탑(佛塔)이 나타나서 훤히 눈에 든다. 아마 심양이 점점 가까워지는가보다.

 

어부가 손을 들어 강성이 여기매요 / 漁人爲指江城近

뱃머리에 솟은 탑이 볼수록 더 높아지네 / 一塔船頭看漸長

하는 옛 시가 문득 생각난다. 대개 그림을 모르는 이 치고 시를 아는 이가 없는 법이다. 그림에는 짙고 옅은 법이 있으며, 또는 멀고 가까운 자세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저 그림 그리는 방법을 체득했으리라고 깨달은 것이 있다. 대개 성의 멀고 가까움을 탑의 길고 짧음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까닭이다.

혼하의 이름은 아리강(阿利江)이요, 또는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부른다. 장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사하(沙河)와 합하고, 성경성(盛京城) 동남을 굽이쳐 흘러 태자하와 합하며, 또 서로 비끼어서 요하(遼河)와 합하여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혼하를 건너 몇 리를 가서 토성이 있다. 그다지 높지 않고 성 밖에는 검은 소 수백 마리가 있는데, 그 빛깔이 아주 새까맣게 옷칠한 듯하다.  1백 경()이나 되는 큰 못이 있는데, 붉은 연꽃이 한창이고 그 속에는 거위와 오리 떼가 수없이 떠다닌다. 못가에는 백양(白羊) 천여 마리가 마침 물을 먹다가 사람을 보고 모두 머리를 쳐들고 섰다. 외곽의 문을 들어가니 성 안 인물의 번화함과 점포의 호화스러움이 요양보다 10배나 더하다.

관묘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삼사(三使)는 관복을 모두 갖추었다. 한 노인이 있어 수화주(秀花紬)로 지은 홑적삼을 입고 민숭하니 벗어진 이마에, 땋은 뒷머리가 드리웠다. 내게 깊이 읍하면서,

 

수고하십니다.”

한다. 나도 손을 들어서 답례하였다. 노인이 내가 신고 있는 가죽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마치 그 만든 법을 상세히 알고자 하는 듯하므로 나는 곧 한 짝을 벗어서 보였다. 사당 안에서 갑자기 도사(道士) 한 사람이 뛰어나오는데 몸에는 야견사(野繭絲) 도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등갓을 썼으며, 발에는 검은 공단 신을 신었다. 그는 갓을 벗고 상투를 어루만지면서,

 

이게 영감의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한다. 노인은 자기 신을 벗고서 내 신을 바꿔 신어 보면서,

 

이 신은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소이까.”

하고 묻는다. 내가,

 

나귀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하니, 그는 또,

 

밑창은 무슨 가죽입니까.”

한다. 나는,

 

쇠가죽에 들기름을 먹여서 만든 것이라 흙탕을 디디어도 젖지 않는답니다.”

하고 답했다. 노인과 도사가 한 마디로 참 좋다고 칭찬하고 또,

 

이 신은 진 땅에는 편리하지만 마른 땅엔 발이 부르트지나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나는,

 

정말 그렇소.”

하고 답하였다. 노인이 나를 인도하여 사당 안 한 군데에 이르렀다. 도사가 손수 두 주발의 차를 따라서 각기 권한다. 노인이 제 성명을 복녕(福寧)이라 써 보인다. 그는 만주 사람으로 현재 성경 병부낭중(兵部郞中)의 벼슬에 있으며 나이는 63세이다. 성 밖에 피서 와서 큰 못에 연꽃이 한창 핀 것을 조용히 한 바퀴 둘러 보고 방금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그는 이어,

 

영감의 벼슬은 몇 품이오며, 연기(年紀)는 몇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나의 성명은 아무개요, 그저 선비의 몸으로 중국에 관광(觀光)하러 온 것이고 나이는 정사생(丁巳生)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그는 또,

 

그러면 월일과 생시(生時)?”

하기에 나는,

 

“2 5일 축시(丑時).”

했다. 그는,

 

그러면 하마경(蝦蟆更)이오.”

하기에, 나는,

 

아니오.”

했다. 복녕이 다시,

 

저 윗 자리에 앉으신 분은 지난해에도 오셨더랬죠. 내 그 때 서울서 막 내려오다가 옥전(玉田)서 며칠 동안 한 객사에서 묵은 일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 한림(翰林) 출신이죠.”

하고 묻는다. 나는,

 

한림이 아니라 부마도위(駙馬都尉). 나하고는 삼종 형제 사입니다.”

하고 답했다. 그가 또 부사와 서장관에 대한 일을 묻기에 각각 성명과 관품을 일러 주었다. 사행들이 옷을 갈아 입고 떠나려 한다. 나는 하직하고 일어섰다. 복녕이 앞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행차 보중(保重)하시오. 마침 쇠어 가는 더위가 점점 더하오니 날오이나 냉한 음료수를 부디 자시지 마시오. 우리 집은 서문 안 마장거리 남쪽에 있는데, 문 위엔 병부낭중이란 패가 있고, 또 금자로 계유문과(癸酉文科)라 써 붙였으니 찾기 쉬우리다. 영감은 언제쯤 오시게 되는지요.”

한다. 나는,

 

“9월 중에나 성경에 돌아오게 될 것 같소이다.”

한즉, 복녕은 또,

 

그 무렵에 긴급한 공무가 생기지 않는다면 반가이 맞이하오리다. 이미 당신의 사주(四柱)를 알았으니 조용히 추수(推數)해 두었다가 귀한 행차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리다.”

한다. 그 어조가 정중하여 작별을 못내 서운해 하는 모양이다. 도사는 코 끝이 뾰족하고 눈동자가 똑바로 박혔으며 행동이 경박하여 전혀 은근한 맛이라곤 없다. 복녕은 사람됨이 기걸하고 원만하다.

삼사(三使)가 차례로 말을 타고 간다. 대개 문무관이 반()을 짜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 둘레가 10리인데 벽돌로 여덟 문루를 쌓았다. 누는 모두 3층이며 옹성(甕城)을 쌓아서 보호했다. 좌우에는 또한 동서 두 대문이 있는데 네거리를 통하도록 돈대를 쌓고, 그 위에 3층으로 문루를 세웠다. 문루 밑에는 저절로 십자로가 트이었는데 수레바퀴는 서로 부딪히고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이다. 그 번화함이 바다 같다. 점방들은 한길을 사이에 두고 그림 그린 층집과 아로새긴 들창에다 붉은 간판 푸른 방()을 써 붙였으며, 가지 각색의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다. 점방을 보는 이들은 모두 희멀건 얼굴에 옷[] 차린 맵씨가 깨끗하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 일컫는다.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 장군(奉天將軍)부도통(副都統)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承德知縣)이 있는데, 각부(各部)를 설치하고 좌이아문(佐貳衙門)을 두었다. 문 맞은편에 조장(照墻)이 있고 문 앞마다 옻칠한 나무를 어긋매끼로 세워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길에서 그 지붕의 알록달록한 유리 기와를 바라보았다.

내원과 계함과 함께 행궁(行宮) 앞을 지나가다가 한 관인(官人)을 만났다. 그는 손에 짧은 채찍을 쥐고 매우 바쁜 걸음으로 간다. 내원의 마두(馬頭) 광록(光祿)이 관화(官話)를 잘하므로 관인을 쫓아가서 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그는 얼른 광록을 붙들어 일으키면서

 

큰 형님, 왜 이러시오. 편히 하시오.”

한다. 광록이 절하며 여쭙기를,

 

저는 조선 방자(幫子)이온데, 우리 상전께서 큰 임금님 계신 궁궐을 구경하시길 마치 하늘같이 높이 바라오니, 영감께서 이를 승낙하시겠습니까.”

한즉, 관인이 웃으면서,

 

그것, 어려울 것 없소. 날 따라 오시오.”

한다. 나는 곧 쫓아가서 인사를 하고자 했으나 그의 걸음이 나는 듯 빨라서 따라갈 수 없다. 길이 막다른 곳을 바라본즉 붉은 목책(木柵)을 둘렀는데, 관인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돌아다 보고 채찍으로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여기 좀 서서 기다리시오.”

하고 이내 몸을 돌이켜 어딘지 가버린다. 내원은,

 

이왕 들어가 보지 못할 바에는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싱거운 노릇이야. 또 이렇게 겉으로 한 번 바라보았으면 그만이지.”

하고 곧 계함과 함께 술집으로 가버린다. 나는 다만 광록과 함께 목책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문의 이름은 태청문(太淸門)이라 하였다. 마침내 그 문을 들어섰다. 광록의 말이,

 

아까 만났던 관인은 필시 수직장경(守直章京)일 겁니다. 지난해 하은군(河恩君)을 모시고 왔을 때도 두루 행궁을 구경했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사오니 아주 마음 놓고 구경하시지요. 설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네 말이 옳다.”

하고 곧 걸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崇政殿)이라 하였고, 또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왼편은 비룡각(飛龍閣), 오른편은 상봉각(翔鳳閣)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鳳凰樓)이다. 좌우에 익문(翼門)이 있고 문 안에는 갑군(甲軍) 수십 명이 있어서 길을 막는다.

할 수 없이 문 밖에서 멀리 바라본즉, 높은 누각 겹전과 겹겹이 둘린 회랑들이 모두 오색 찬란한 유리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이층 8각 집을 대정전(大政殿)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神祐宮)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 황제(康熙皇帝)의 어필로 소격(昭格),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어필로 옥허진제(玉虛眞帝)라 써 붙였다.

도로 나와서 내원을 찾아 한 술집에 들렀다. ()에 금자로,

 

하늘 위엔 술별[酒星] 한알 번쩍번쩍 빛나고요 / 天上已多星一顆

인간 세상엔 부질없이 고을이름[酒泉]과 나란하네 / 人間空聞郡雙名

라고 썼다. 술집은 붉은 난간에, 파란 문, 하얀 벽에 그림 기둥인데, 시렁 위에는 층층이 똑 같은 놋 술통을 나란히 놓고 붉은 종이로 술 이름을 써 붙인 것이 이루 다 헤일 수 없이 많다.

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이 마침 그 집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어나 웃으면서 나를 맞아들인다. 방 안에는 50~60개의 훌륭한 걸상과 20~30개의 탁자가 놓였으며, 화분 수십 그루가 있는데 마침 저녁 물을 주고 있었다. 추해당수구화는 이제 한창으로 피었고, 다른 꽃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뿐이다.

조군이 불수로(佛手露 술 이름) 석 잔을 내게 권한다. 계함 등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한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에서 또 주부 조명회(趙明會)를 만나니 몹시 반가워하면서 어디 가서 함께 실컷 마시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돌이켜 방금 나온 술집을 가리켰다. 다시 저기로 가서 마시자는 의미이다. 조는,

 

반드시 저 집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다 그만큼은 하죠.”

한다. 이에 서로 손을 맞잡고 어떤 술집에 들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함은 아까 그 집보다 훨씬 지나친다. 달걀부침 한 쟁반, 사괴공(史蒯公) 한 병을 사서 실컷 먹고 나왔다.

어떤 한 골동품 다루는 점포에 들렀다. 그 집 이름은 예속재(藝粟齋)이다. 수재(秀才) 다섯 사람이 동업하여 점포를 내고 있는데,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리따운 청년들이다.

다시 밤에 이 집을 찾아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상세한 이야기는 따로 속재필담(粟齋筆談)에 실었다.

또 한 점포에 들렀다. 이는 모두 먼 곳에서 온 선비들이 갓 개업한 비단점이었다. 집 이름은 가상루(歌商樓)이다. 모두 여섯 사람인데 의관의 차림이 깨끗하고 행동과 인상이 모두 단아하므로 또한 밤이 되면 예속재에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형부(刑部 지금의 재판소) 앞을 지나니 아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나무를 어긋지게 둘러쳐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스스로 외국 사람임을 믿고 거리낄 것이 없을뿐더러, 여러 아문 중에 오직 이 문만 열렸으므로 관부(官府)의 제도를 속속들이 봐 두리라 생각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었다.

한 관인이 대 위에서 걸상에 걸터앉았고 그 뒤에는 한 사람이 손에 지필을 든 채 모시고 섰다. 뜰 아래는 한 죄인이 꿇어앉았고, 그 좌우에는 한 쌍 사령이 대곤장을 짚고 섰다. 그러나 분부나 거행 등의 여러 가지 호통도 없이, 관인이 죄인을 마주보고 순순히 말을 따진다. 한참 만에 큰 소리로 치라고 호통하니, 그 사령이 손에 들었던 곤장을 던지고 죄인 앞으로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따귀를 네다섯 번 때리고 다시 전 자리에 돌아가서 막대를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기로니 따귀 때리는 형은 옛적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저녁 뒤에 달빛을 따라 가상루에 들러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예속재에 이르렀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다.

 

 

[D-001]범이 …… 달렸다 : 후한서(後漢書) 하진전(何進傳)에 있는 말인데, 큰 권세를 홀로 잡았으며, 그 조종(操縱)은 나 한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D-002]()이 일어난 터전 : 청은 애초 무순(撫順)의 동쪽 흥경(興京)에서 일어나서 태조 천명(天命) 10년에 심양에 수도를 옮겼다.

[D-003]청의 황제 : ‘박영철본(朴榮喆本)’에는 청실(淸室)로 되었다.

[D-004]성경장군(盛京將軍) : 성경을 지키는 관원. 성경은 지금의 봉천(奉天).

[D-005]양매차(楊梅茶) : 소귀나무의 열매를 볶아서 만든 차.

[D-006]제호탕(醍醐湯) : 오매육(烏梅肉)백단향(白檀香)사인(砂仁)초과(草果) 등의 가루를 꿀에 넣어서 끓인 청량 음료.

[D-007]하마경(蝦蟆更) : 오경(五更). 주준도(周遵道)의 표은기담(豹隱紀談)에 나온다. “내루(內樓) 5경이 다하면 목탁과 북을 울리니 이를 하마경이라 한다.” 하였다.

[D-008]부마도위(駙馬都尉) : 임금의 사위인데, 일반적으로 부마라 하였다.

[D-009]옹성(甕城) : 큰 성 밖의 작은 성인데 혹은 월성(月城)이라 한다.

[D-010]원위(元魏) : 남북조 시대의 후위(後魏). 그의 성은 본시 척발(拓跋)이었으나 효원제(孝元帝)에 이르러서 원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 일컬었다.

[D-011]조장(照墻) : 병문(屛門)의 담. ‘박영철본에는 향장(響牆)으로 되었다.

[D-012]패루(牌樓) : 우리나라 홑살문처럼 세우는 기념용 장식 건물.

[D-013]방자(幫子) : 지방 관아 하례(下隷)의 하나. 조선시대에는 방자(房子)로 통용함.

[D-014]하은군(河恩君) : 이광(李垙)의 봉호. 정조 원년에 진하사은진주겸동지행정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行正使)가 되었다.

[D-015]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 : ‘박영철본에는 태정전(太政殿)으로 되었다.

[D-016]삼청(三淸) : 도교에서 말하는 세 신선(神仙). , 원시천존(元始天尊)태상도군(太上道君)태상노군(太上老君).

[D-017]옹정 황제(雍正皇帝) : 청의 5대 황제인 세종(世宗). 강희 황제의 아들.

[D-018]사괴공(史蒯公) : 술 이름. ‘박영철본에는 사국공(史國公)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해(丁亥)

 

 

개었다. 몹시 덥다. 심양에서 묵다.

아침 일찍 성 안에 우레 같은 대포소리가 들린다. 대개 상점들이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 때면 으레 종이 딱총을 터뜨리는 버릇이라 한다.

급히 일어나 가상루로 가자 여러 사람이 또 모였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사관에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리 구경을 나섰다.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는데 서로 팔을 끼고 간다. 보아한즉 생김새들이 모두 수려하기에 그들이 혹시 글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그 앞에 가서 읍을 한즉, 둘이 팔을 풀고 답례를 아주 공손히 하고는 이내 약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뒤좇아 들어갔다. 둘은 빈랑(檳榔) 두 개를 사서 칼로 넷으로 쪼개어 나에게 한 쪽을 먹어보라 권하고 자기네도 씹어 먹는다. 내가 그들의 성명과 거주를 글로 써서 물은즉, 둘이 들여다보고 멍해 하는 품이 글을 모르는 듯싶다. 다만 길이 읍하고는 가버린다.

해마다 연경에서 심양의 여러 아문과 팔기(八旗)의 봉급을 지급하면 심양에서 다시 흥경(興京)선창(船廠)영고탑 등지로 나누어 보내는데 그 돈이 1 25만 냥이라 한다.

저녁에는 달빛이 더욱 밝다. 변계함에게 함께 가상루에 가자 하였더니, 변군이 부질없이 수역(首譯)에게 가도 좋으냐고 물었으므로 수역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성경은 연경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함부로 밤에 나다닌단 말씀이오.”

하는 바람에 변군이 한풀 꺾이었다. 수역은 실로 어젯밤 우리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만일 알게 되면 나도 붙잡힐까 두려워서 일부러 알리지 않고 홀로 빠져 나가면서 장복더러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이가 있거든 뒷간에 간 것처럼 대답하라고 일러 두었다.

 

 

[D-001]빈랑(檳榔) : 한약의 일종으로 소화제로 씹기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속재필담(粟齋筆談)

 

 

전사가(田仕可)의 자는 대경(代耕) 또는 보정(輔廷)이고, 호는 포관(抱關)이며, 무종(無終) 사람이다. 자기 말로, 전주(田疇)의 후손이며 집은 산해관(山海關)에 있는데, 태원(太原) 사람 양등(楊登)과 함께 이곳에 점포를 내었다 한다.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넓은 이마와 갸름한 코에 풍채가 날렵하다. 그는 고기(古器)의 내력을 잘 알고 남에게 몹시 다정스러웠다.

이귀몽(李龜蒙)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인재(麟齋)이며, ()의 면죽(綿竹)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입이 모나고 턱은 넓으며 얼굴은 분바른 듯 희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금석을 울리는 듯싶다.

목춘(穆春)의 자는 수환(繡寰)이요, 호는 소정(韶亭)이며 촉 사람이다. 나이는 스물넷이요, 눈매가 그린 듯하나 글을 모르는 게 흠이다.

온백고(溫伯高)의 자는 목헌()이며 촉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하나인데 역시 까막눈이다.

오복(吳復)의 자는 천근(天根)이요, 항주(杭州) 사람이며, 호는 일재(一齋). 나이는 갓 마흔이요, 학문은 짧으나 사람은 얌전하다.

비치(費穉)의 자는 하탑(下榻)이요, 호는 포월루(抱月樓) 혹은 지주(芝洲) 또는 가재(稼齋)이며 대량(大梁)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다섯이요, 아들 여덟을 두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에도 능하며, 경의(經義)도 곧잘 이야기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남들을 잘 도와 주니, 이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복을 기르는 것이라 한다. 목수환(穆繡寰)온목헌(溫軒)을 위하여 회계를 보아줄 양으로 방금 촉에서 돌아온 것이라 한다.

배관(裴寬)의 자는 갈부(褐夫)이며 노룡현(盧龍縣) 사람이다. 나이는 마흔일곱이요, 키는 일곱 자 남짓 하고, 아름다운 수염에 술을 잘하고 문장에 능하여 나는 듯 빠르며, 너그러운 품이 장자의 풍도이다. 스스로 과정집(薖亭集) 두 권을 새기고 또 청매시화(靑梅詩話) 두 권을 지었다. 아내 두씨(杜氏)는 열아홉에 요절했다 한다. 임상헌집(臨湘軒集) 한 권이 있는데 내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써주었다.

그 다음 몇몇 사람들은 모두 녹록하여 적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게다가 목소정이나 온목헌과 같은 풍골도 없고 그저 장사치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틀 밤이나 함께 놀았으나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내가 목소정을 보고,

 

저처럼 미목이 그림 같은 분으로서 젊어서 이렇게 멀리 고향을 떠나와 있음은 어인 까닭이오. 인재와 온공(溫公)과는 모두 같은 촉의 사람인즉 무슨 친척의 연줄이나 없으시오?”

하고 물은즉, 인재가,

 

그에겐 묻질 마십시오. 그의 얼굴은 비록 아름답긴 하나 마치 관옥(冠玉) 같아서 그 속엔 아무 것도 든 것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이건 비평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한즉, 인재는,

 

온형과 수환과는 종모(從母) 형제 사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우리 세 사람이 배에다 서촉(西蜀) 비단을 싣고 병신년(丙申年 청의 건륭 41) 2월에 촉을 떠나, 삼협(三峽)을 거쳐 오중(吳中강소성(江蘇省)오현(吳縣))에 넘겨 버리고 장삿길을 좇아서 구외(口外)로 나와 이곳에 점포를 낸 지도 벌써 3년이랍니다.”

한다. 내 목춘을 못내 그리워하여 그와 더불어 필담(筆談)을 하고자 하였더니, 이생(李生 이귀몽)이 손을 저으면서,

 

목 저 두 분은 입으론 봉황새를 읊을 수 있으나 눈으론 시()와 해()를 분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럴 리가 있나요.”

한즉, 배관이,

 

허튼 소리가 아니오. 귀에는 이유(二酉)의 많은 서적을 간직했으나 눈엔 하나의 고무래정() 자도 뵈지 않는답니다. 하늘에 글 모르는 신선은 없어도 인간 속세엔 말 잘하는 앵무새가 있다오.”

한다. 나는,

 

과연 그러할진댄 비록 진림(陳琳)으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쓰인대도 골치 앓는 것이 시원해지지 않겠소그려.”

한즉, 배관이,

 

아주 이것이 모두 유행(流行)이랍니다. ( 서한(西漢))이 육국(六國)을 세운 뒤에 문득 이 법이 그릇됨을 깨달았다 합니다. 이는 이른바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나오는 학문이라는 것이니, 지금 향교(鄕校)나 서당(書堂)에서도 한갓 글을 읽기에만 힘쓸 뿐 강의(講義)는 하지 않으므로 귀로는 똑똑히 들으나 눈으로 보는 건 아득해서, 입으론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모두 술술 풀려 나오지만 손으로 글을 쓰려면 한 글자도 어려울 뿐이랍니다.”

한다. 이생이,

 

귀국에서는 어떠합니까.”

하기에, 나는,

 

책을 펴놓고 읽는 법을 가르치되 소리와 뜻을 함께 익힌답니다.”

한즉, 배생(裵生 배관(裵寬))이 거기에 관주(貫珠)를 치면서,

 

그 법이 정말 옳습니다.”

한다. 나는,

 

비공(費公 비치(費穉))은 언제 촉을 떠나셨습니까.”

하고 물은즉 비생(費生),

 

이른 봄이었습니다.”

한다. 내가,

 

촉에서 여기가 몇 리나 됩니까.”

한즉, 비는,

 

 5천여 리나 된답니다.”

한다. 나는,

 

비씨(費氏)의 여덟 용( 아들들을 지칭)은 모두 한 어머니가 낳으셨나요.”

하자, 비는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고, 배생이,

 

아니어요. 소실 두 분이 좌우에서 도와 드렸답니다. 난 저 사람의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것보다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

한다.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다. 나는,

 

오실 때 검각(劒閣)의 잔도(棧道)를 지나셨나요.”

하고 곧 물은즉, 비는,

 

그랬죠. 참 좁디좁은 조도(鳥道) 일천 리(一千里), 하루에 열두 시간 줄곧 원숭이 소리뿐입디다그려.”

한다. 배생은,

 

참말, ()의 길은 배로 가나 뭍으로 가나 마찬가지로 어려워요. 이는 이른바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지요. 내가 요전 신묘년(辛卯年 청의 건륭 36)에 강을 거슬러 촉()으로 들어갈 제 74일 만에 겨우 백제성(白帝城)에 이르렀습니다. 배를 타니 때마침 늦은 봄철이이어서 양쪽 언덕에는 여러 가지 꽃이 한창으로 피었고, 쓸쓸한 다북 창 속의 나그네 외론 밤 길기도 한데 소쩍새 피를 뿜고, 원숭이 우지지며, 학이 울고, 매가 웃으니, 이것은 고요한 강물 위의 달 밝은 경치였고, 낭떠러지 위의 큰 바위가 무너져 강에 떨어지자 두 돌이 서로 부딪혀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일어나니 이것이 여름 장마 때의 경치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비록 황금덩이와 비단이 바리로 많이 생긴다손 치더라도 머리칼이 세고 가슴이 타는 이 고생을 어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비록 고생하신 것은 그러하지만 저 육방옹(陸放翁 송대의 문호인 육유(陸游)의 호)의 입촉기(入蜀記)를 읽을 때면 미상불 흥겨워 춤이라도 너풀너풀 추고 싶던 걸요.”

한즉, 배생은,

 

무어,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한다.

이날 밤에는 달이 낮처럼 밝았다. 전사가가 주식을 차리느라고 이경(二更)에야 겨우 돌아왔다. 불불(호떡의 일종) 두 소반, 양 곱창 곰국 한동이, 익힌 오리고기 한 소반, 닭찜 세 마리, 돼지 삶은 것 한 마리, 신선한 과실 두 쟁반, 임안주(臨安酒 중국 남방산 명주) 세 병, 계주주(薊州酒 중국 북방산 명주) 두 병, 잉어 한 마리, 백반(白飯) 두 냄비, 잡채(雜菜) 두 그릇이니, 돈으로 친다면 열두 냥어치나 된다. 전생(田生 전사가)이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이 변변치 못한 걸 장만하느라고 오늘밤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교의에서 내려서며,

 

이다지 수고하시니 꼿꼿이 앉아 받긴 황송합니다.”

한즉, 여러 사람들도 일어서면서,

 

귀하신 손님이 오셨는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한다. 이에 일제히 일어나서 다른 좌석(座席)으로 옮기고 이내 점방 문을 닫았다.

들보 위에 부채 모양의 사초롱[紗燈] 한 쌍을 달았는데, 겉에는 모두 꽃과 새를 그렸으며, 또 이름 있는 사람의 시구(詩句)도 적혀 있다. 그리고 네모난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낮처럼 밝게 비친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한두 잔씩 권하는데 닭이나 오리는 모두 주둥이도 발도 떼지 않았고, 양고기 국도 몹시 비려서 비위에 받지 않으므로 떡과 과실만 먹었다.

전생이 필담한 종이쪽을 두루두루 열람하고 연신,

 

좋아, 좋거든.”

하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선생께서 아까 저녁 전에 골동을 구하셨으면 하시더니, 어떤 진품(眞品)을 구하시렵니까?”

하기에, 나는,

 

비단 골동뿐만이 아니라 문방(文房)의 사우(四友)까지도 사고 싶습니다. 정말 희귀하고 고아(古雅)한 것이라면 값은 계교치 않으렵니다.”

하니, 전생은,

 

선생께서 이제 오래지 않아서 북경에 들르시면 유리창(琉璃廠) 같은 데도 들르실 테니 얻기 어렵지는 않으리다. 그러나 다만 그의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사오니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생의 감상력이 어떠하신지요?”

한다. 나는,

 

궁벽한 바다 구석에 살고 있는 이 사람이라 감식이 고루하니, 어찌 진짜 가짜를 잘 분간할 줄 알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또,

 

이곳은 말이 도회이지 중국에선 한 구석이었으므로, 모든 거래는 다만 몽고나 영고탑이나 또는 선창 등지에 의뢰할뿐더러, 변방의 풍습이 몹시 무디어서 아담한 취미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빛깔이나 고아한 그릇조차 이곳에는 나온 일이 드물거늘, 하물며 은()의 그릇과 주()의 솥과 같은 것이야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귀국에서 골동 다루는 식이 이곳과는 또 달라서 전에 그 장사하는 이들을 본즉, 비록 차[]와 약재 같은 따위라도 상품을 가리지 않고 값싼 것만 따지더군요. 그러고서야 무슨 진짜 가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차나 약재뿐만 아니라, 모든 기물이 무거우면 실어가기 어려우니까 대개 변문(邊門)에서 사가지고 돌아가더군요. 그러므로 북경 장사꾼들이 미리 내지(內地)에서 쓰지 못할 물건들을 변문으로 넘겨보내서 서로 속여서 이익을 취한답니다. 이제 선생께서는 구하시는 것이 속류(俗流)에서 훨씬 벗어난 것이고, 또 우연히 이 타향에서 서로 만나서 불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나머지 벌써 지기의 벗이 되었으니, 비록 정성을 다하여 물건을 드리진 못할망정 어찌 잠깐이라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는 가히 이미 술로 취하게 하고 또 덕()으로써 배부르게 했다.’고 할 만하군요.”

하니, 전생은,

 

너무 지나치신 사랑이십니다. 내일 아침 다시 오셔서 점포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구경하시죠.”

하니 배생은,

 

내일 아침 일을 미리 이야기할 것 있소. 다만 선생을 모시고 이 밤의 즐거움을 다하면 그만이죠.”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옳소.”

한다. 전생은 또,

 

옛날 공자께서도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다.’ 하셨고,  군자(君子)가 그곳에 산다면 무엇이 야비함이 있겠느냐.’ 하셨은즉, 상공(相公)께서 비록 먼 나라에 계시오나 기우(氣宇)가 헌칠하시고, 또 글은 공()()의 끼치신 글을 통하시며, 예법에는 주공(周公)의 도()를 닦았사온즉 이는 곧 한 분의 군자이신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들이 먼 땅 다른 하늘 밑에 살고 있어서 서로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풀지 못한 채 만나자 곧 헤어지게 되니 이를 어이하오리이까.”

하니 이귀몽이 그 대목에다 수없이 동그라미를 치면서,

 

은근하고도 애처로움이 꼭 내 마음 같구려.”

하고 감탄한다. 술이 다시 두어 순배 돈 때에 이생이,

 

이 술 맛이 귀국의 것과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 임안주는 너무 싱겁고, 계주주는 지나치게 향기로워서, 둘 다 술의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맑은 향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엔 법주(法酒)가 더러 있습니다.”

한즉, 전생은,

 

그러면 소주(燒酒)도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 있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전생이 곧 몸을 일으켜 벽장에서 비파를 끄내어 두어 곡조를 뜯었다. 나는,

 

옛날에도 연()()엔 슬피 노래부르는 이가 많다고 일컬었으니 여러분도 응당 노래를 잘 하시겠죠. 원하건대, 한 곡조 들려 주시지요.”

하니, 배생은,

 

잘 부르는 이가 없어요.”

하고, 이생은,

 

옛날에 이른바 연조의 슬픈 노래는 곧 궁벽하고도 작은 나라 선비로서 뜻 잃은 이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제야 사해가 한 집이 되고 성스러운 천자(天子)가 위에 계시오니, 사민(四民)이 업을 즐기어서 어진 이는 밝은 조정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어, 임금과 신하가 노래를 창수(唱酬)하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강구(康衢)의 연월(煙月) 속에서 밭 갈고 우물 파며 노래 부르니 아무런 불평이 있을 리 없으니, 어찌 슬픈 노래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

한다. 나는,

 

성스러운 천자가 위에 계시면 나아가 섬김이 의당하올 것인데, 여러분으로 말하면 모두 당세의 영걸이시라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넉넉하옵거늘, 어찌 세상에 나가서 일하지 않으시고 이다지 녹록하게 이 시정 사이에 잠겨 지내시나요.”

하고 물으니, 배생은,

 

이런 자격은 다만 전공(田公)께서나 담당하실 수 있겠죠.”

하니, 한 자리에 앉은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이생은,

 

이야말로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인즉, 함부로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하고, 그는 곧 책꽂이 위에서 선문(選文) 한 권을 뽑아서 나에게 한 번 읽기를 청한다.

나는 곧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읽을 제 우리나라 식의 언토(諺吐) 구두(句讀) 를 달지 않고 높은 소리로 읽었다. 여럿이 둘러앉아 듣다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생이 내가 다 읽기를 기다려서 유량(庾亮) 사중서감표(辭中書監表)를 골라 읽는데 그의 높았다 낮았다 하는 음절이 분명해서 비록 글자를 따라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어느 구절을 읽고 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청이 맑아서 마치 관현을 듣는 듯하였다.

벌써 달은 지고 밤은 깊었는데 문 밖에는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성경에는 순라(巡邏 야경꾼)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전생은

 

, 있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럼, 길에 행인이 끊이지 않음은 어인 까닭이죠.”

한즉, 전생은

 

다들 긴한 볼일이 있는게죠.”

한다. 나는,

 

아무리 볼 일이 있은들, 어찌 밤중에 나다닐 수 있겠어요.”

한즉, 전생은

 

, 못 다닌답니까. 초롱 없는 이야 못 다니겠지만, 거리마다 파수보는 데가 있어서 갑군이 지키고, 창과 곤봉으로 나쁜 놈을 적발하여 낮과 밤의 구별이 없거늘, 어찌 밤이라고 다니지 못하리까.”

한다. 나는,

 

밤도 깊고 졸리니 초롱을 들고 사관으로 돌아감이 어떨까요.”

하니, 배와 전이 함께,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파수꾼에게 검문을 당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깊고깊은 밤에 혼자서 쏘다니냐고 하며 오가면서 들르신 처소까지 밝히라 할 것이온즉, 몹시 귀찮을 것입니다. 선생이 이미 졸리신다면 이 누추한 곳에서나마 잠시 눈을 붙이시죠.”

하자, 목춘(穆春)이 곧 일어나서 탑() 위의 털방석을 말끔히 털고 나를 위해서 누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젠 졸음도 갑자기 깨는군요. 다만 나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룻밤 잠을 잃으실까 두려울 뿐입니다.”

하니, 여럿이,

 

아니오, 조금도 졸립지 않아요. 이토록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하룻밤 아름다운 이야기로 새는 건 참으로 한 평생 가도 얻기 어려운 좋은 인연일까 합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하룻밤은커녕 석달이 넘도록 촛불을 돋우어 밤을 새워도 무슨 싫증이 나겠습니까.”

하고, 모두들 흥이 도도하여 다시 술을 더 데우고 안주를 다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술을 다시 데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그들은,

 

찬 술은 폐()를 해칠 우려가 있을뿐더러 독이 이[]에 스며듭니다.”

한다. 그 중 오복(吳復)은 밤새도록 단정히 앉았는데 눈매가 범상치 않다. 나는,

 

일재선생(一齋先生)께선 오중을 떠나신 지 몇 해나 되시는지요.”

하니, 오생(吳生 오복(吳復)),

 

열한 해나 되었습니다.”

한다. 내가,

 

무슨 일로 고향을 떠나 이다지 분주히 다니십니까?”

하니, 오생은,

 

장사로 생애를 삼고 있습니다.”

한다. 내가 또,

 

가족도 이곳에 따라와 계십니까?”

하니, 오생은,

 

나이는 벌써 40세입니다마는, 아직껏 장가 들지 못했습니다.”

한다. 나는,

 

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의 휘()는 영방(潁芳)이옵고, 항주(杭州)의 고사(高士)이신데 혹시 노형의 일가가 아닙니까?”

한즉, 오생은,

 

아니에요.”

하기에, 나는 또,

 

해원(解元) 육비(陸飛)와 철교(鐵橋) 엄성(嚴誠)과 향조(香祖) 반정균(潘庭筠)은 모두 서호(西湖절강(浙江)에 있는 명소)의 이름 높은 선비들인데 노형이 혹시 잘 아시나요.”

한즉, 오생은,

 

모두들 서로 이름을 통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다만 육비가 그린 모란을 본 기억은 납니다. 그는 호주(湖州) 사람이더군요.”

한다.

조금 뒤에 닭이 우니 이웃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인다. 나는 고단한데 또 술까지 취하여, 교의 위에 걸터앉은 채 꾸벅꾸벅하다가 곧장 코를 골고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훤하게 밝을 무렵에야 놀라서 잠을 깨니, 모두들 서로 걸상에 의지하여, 베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혹은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나는 홀로 두어 잔 술을 기울이고 배생을 흔들어 깨워서, 가노라 이르고는 곧 사관에 돌아오니 해가 벌써 돋았다.

장복은 깊은 잠에 빠졌고 일행 상하도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장복을 툭 차 깨워서,

 

누가 날 찾는 이가 있더냐.”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없더이다.”

한다. 곧 세숫물을 재촉하여 망건을 두르고 바삐 상방(上房)으로 가니, 여러 비장과 역관들이 바야흐로 아침 문안을 아뢰는 중이었다. 아무도 간밤의 일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모양이므로 마음속으로 적이 기뻐하며 다시 장복더러,

 

입밖에 내지 말라.”

당부하였다.

아침 죽을 약간 마시고 곧 예속재에 이르니 모두들 일어나 가고, 전생과 이인재가 골동을 벌여 놓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모두 놀라는 듯이 반기면서,

 

선생은 밤새 고단하지 않았습니까.”

하기에, 나는,

 

밤낮을 헤일 것 없이 게으름증은 나질 않아요.”

하니, 전생은,

 

그럼, 차나 한 잔 드시죠.”

한다. 조금 앉았으려니 한 아름다운 청년 하나가 밖에서 들어와 찻잔을 받들어 내게 권한다. 나는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저는 부우재(傅友榟)입니다. 집은 산해관에 있사옵고 나이는 열아홉 살입니다.”

한다. 전생이 골동들을 다 늘어놓고는 날더러 감상하기를 청한다. ()()()() 등이 모두 열하나인데,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모난 것이 제각기 다르고, 그 새김질과 빛깔이 낱낱이 고아하며, 관지(款識)를 살펴보니 모두 주()() 시대의 물건이다. 전생은,

 

그 글자는 고증할 것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요새 금릉(金陵)하남(河南) 등지에서 새로 꽃 무늬를 새긴 것이라, 관지는 비록 옛 식을 본떴더라도 꼴이 벌써 질박하지 못하고, 빛깔이 또한 순하지 못해서, 만일 이것들을 진짜 골동 사이에 놓는다면 필시 야비함이 대번에 드러날 것입니다. 내 비록 몸은 시전(市廛)에 잠겨 있더라도, 마음은 늘 배움터에 있던 차에 선생을 뵈오니, 마치 여러 쌍 보패(寶貝)를 얻은 듯싶사온즉, 어찌 조금이라도 서로 속여서 한평생을 두고 마음에 께름칙하게 하오리까.”

한다. 나는 여러 그릇 중에서 창 같은 귀가 달리고 석류 모양으로 발을 단 통화로 하나를 들고 자세히 훑어본즉, 납다색(臘茶色) 빛깔에 제법 정미하게 만들었다. 화로 밑을 들쳐보니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 선덕은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라고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다. 나는,

 

이것은 제법 좋은 듯싶은데요.”

하니, 전생은,

 

실상 그대로 말씀드린다면 이는 선로(宣爐)가 아닙니다. 선로는 대개 납다색 수은(水銀)으로 잘 문질러서 속속들이 스미게 한 뒤 다시 금가루를 이겨 칠하였으므로, 불을 오래 담으면 저절로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거야 어찌 민간에서 함부로 흉내낼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골동기에 청록색 주반(硃斑 주사의 얼룩)이 생기는 건 흙 속에 오랫동안 파묻혀야 그러하므로, 그래서 무덤 속에 묻혔던 것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이 그릇들이 만일 갓 구운 것이면 어찌 이런 빛깔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즉, 전생은,

 

이건 참 알아 두어야 합니다. 대개 골동기는 흙에 들면 청색(靑色)이 나고, 물에 들면 녹색(綠色)이 나는 법입니다. 무덤 속에서 파낸 그릇들은 흔히 수은빛을 내는데, 어떤 이는 시체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흔히 수은으로 염()을 했기 때문에, 혹시 제왕의 능묘에서 나오는 그릇은 수은이 옮아서 오래된 것일수록 속속들이 스며 배는 법이므로, 대개 갓 구운 것인지, 옛 것인지, 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기 쉽습니다. 고기(古器)는 비단 살이 두껍고 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 몸에서 나는 빛이 대체로 천연스럽게 맑고도 윤기 있고, 수은 빛 역시 그릇 전체에 고루 퍼지는 게 아니라, 혹은 반쪽에서, 혹은 귀에서만, 또는 다리에서만, 그리고 가끔 번져나간 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록색 얼룩 역시 그러하여, 전체 아닌 반만이 짙게도 들고, 여리게도 들고,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흐리다고 더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머리카락 같은 무늬가 투명하게 뵈며, 맑다고 매마르진 않아서 어른어른함이 마치 물오른 듯합니다. 가끔 주사 알록점이 속속들이 깊이 스며든 것이 있는데, 그 중에도 갈색(褐色)진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어서, 흙 속에 오래 들어 있으면 청()()()()의 점들이 알록달록 하여, 혹은 버섯 무늬 같기도 하고, 혹은 구름 속 햇무리 같기도 하고, 또는 함박눈 조각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흙 속에서 천 년쯤 묻혀 있어야 될 테니 이건 정말 상품으로 치는 것입니다. 옛날 명 선종(明宣宗)이 무척 갈색을 좋아해서 이른바 선로에는 갈색이 많았던 것입니다. 근년에 섬서(陝西)에서 갓 지은 것도 문득 선덕의 것을 본뜨려 하였으나, 선로는 아예 꽃 무늬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일부러 꽃 무늬를 새겼으니, 이것은 모두 요즘의 가짜입니다. 그들이 빛깔을 이토록 잘 위조함은, 대체로 그릇을 구운 뒤에 칼로 무늬를 새기고 관지를 파서 넣은 다음 땅속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다 소금물 두어 동이를 들이 붓고 마르기를 기다려 그릇을 그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해 만에 꺼내 보면 자못 고의(古意)가 있어 보이나, 이는 가장 하품이며 서투른 솜씨입니다. 이보다 더 교묘한 방법은, 붕사(鵬砂)한수석(寒水石)망사(䃃砂)담반(膽礬)금사반(金砂礬)으로 가루를 만들어 소금물에 풀어서, 붓으로 골고루 그릇에 먹여 말린 뒤에, 씻고 또 씻은 다음 다시 붓질하여, 이러기를 하루에 서너 번 한 뒤에 땅을 깊게 파서 그 속에 숯불을 피워 구덩이를 화로처럼 달군 뒤에 진한 초[]를 뿌리면, 구덩이가 펄펄 끓으면서 곧 말라 버립니다. 그 다음 그릇을 그 속에 넣고 초 찌꺼기로 두껍게 덮고, 또 흙을 다져서 빈틈 없이 하여 4~5일 지난 뒤에 꺼내 보면 여러 가지 알록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댓잎을 태워 그 연기를 풍겨서 푸른빛을 더 짙게 하고, 납으로 문지르되, 수은 빛을 내려고 한다면 바늘로 가루를 만들어 문지르고 그 위에 백랍(白蠟)으로 닦으면 그럴듯한 고색(古色)이 납니다. 그러고도 혹은 일부러 한쪽 귀를 떼기도 하고, 또는 몸에 흠집을 내기도 해서, ()()()() 시대의 유물이라고 속이는 것은 더욱 얄미운 짓입니다. 뒷날 창() 중에 가시면 모두 먼 곳에서 온 장사치들이오니 물건을 사실 때 진가를 분간치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웃음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다. 나는,

 

감사합니다. 선생이 이렇게 진심을 보여주시니까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북경으로 떠날테니, 바라건대, 선생은 문방서화정이(鼎彛) 등 여러 가지에 대하여 고금의 동이(同異)와 명호(名號)의 진위(眞僞)를 기록하셔서 어두운 길에 지남(指南)이 되도록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선생이 만일 이것이 소용이 있으시다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서청고감(西淸古鑑)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제 소견을 첨가하여 깨끗이 써서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에 달이 돋으면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사관에 돌아오니, 이미 아침 밥을 올렸으므로 잠깐 상방에 다녀 빨리 조반을 치르고 다시 나오니, 정 진사가 계함과 내원과 함께 역시 유람을 나서면서 나더러,

 

혼자서 다니며 무슨 재미난 구경을 하시오.”

하고 나무라더니, 내원이 또,

 

실은 아무 것도 구경한 게 없습디다. 옛날 광주(廣州) 골 생원님이 처음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인사 한 마디도 똑똑히 못하여 서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더니 이제 우리들이 꼭 그 꼴이군요. 난 더군다나 두 번째라 아무런 재미란 느끼지 못했구려.”

한다.

길에서 비치(費穉)를 만났더니 나를 이끌고 담자리전으로 들어가서 오늘 밤 가상루에서 모이자고 부탁한다. 나는 이미 전포관(田抱關)과 예속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어제 저녁에 모였던 여러분들이 다 모이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비생은,

 

아까 포관과도 잘 이야기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이 외국의 손님으로 녹명(鹿鳴)을 노래하며 북경으로 가시는 길이온즉, 우리들이 선생을 위해서 백구(白駒)의 옛 시를 읊는 심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것입니다. 배공이 이미 촉중의 온공(溫公)과 함께 주식을 장만하였은즉, 이 약속을 어기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어제 저녁엔 너무 많이 여러분께 폐를 끼쳤는데 오늘밤은 그러시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비생은,

 

저 뫼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면 공장이 자로 잴 것이요, 나는 백로(白鷺)가 멀리 찾았으니 피차 서로 싫지 않을 것입니다. 열두 행와(行窩)엔 애초부터 일정한 약속이 없을 것이요, 사해가 모두 형제인즉 누구에게 후박이 있겠습니까.”

하자, 마침 내원 등이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나를 찾아 가게로 들어왔다. 나는 급히 필담(筆談)하던 종이쪽을 걷어치우고 고개를 끄덕여서 응낙하였다. 비생 역시 내 뜻을 눈치채고 빙그레 웃으면서 턱을 끄덕였다. 계함이 종이를 찾으며 말을 하고 싶어 하기에 내가 먼저 일어나면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게 못 되네.”

하니, 계함 역시 웃고 일어선다. 비생이 문까지 나와서 내 손을 넌지시 잡고 은근한 뜻을 비치므로, 나는 그저 끄덕이고 나와 버렸다.

 

 

[C-001]속재필담(粟齋筆談)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속재야화(粟齋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各立)시켰으며, 또 차례를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의 다음에 두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전주(田疇) : 조위(曹魏)의 문학가. 격검(擊劒)에 능하였다.

[D-002]소정(韶亭) : 어떤 본에는 소정 두 글자가 궐문(闕文)이 되었다.

[D-003]아들 여덟 : 어떤 본에는 아들 여덟이 궐문으로 되었다.

[D-004]온공(溫公) : 곧 온백고인데, ()은 성 밑에 붙이는 미칭(美稱).

[D-005]관옥(冠玉) : 한서(漢書) 진평전(陳平傳)에 있는 말. 마치 옥으로 꾸민 갓과 같아서 비록 밖에 나타나는 빛은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변변하지 못함을 이른 말이다. 미남자의 호칭으로 쓰임.

[D-006]구외(口外) : 장성(長城) . 그 경계에 장가구(張家口)와 고북구(古北口)가 있으므로 그 밖의 땅을 구외라 한다.

[D-007]이유(二酉) :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 그 산 밑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그 중에는 책 천 권을 간직하였다 한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나온 말이다.

[D-008]진림(陳琳) : 조위(曹魏)의 문학가. 일찍이 원소(袁紹)의 밑에 있으면서 조조(曹操)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바쳤더니 조조는 마침 머리를 앓다가 그 자리에서 나았다 한다.

[D-009]귀로 …… 학문 : 순자(荀子)에서 나온 말. 소인(小人)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어 나간다. 그의 얕음을 일렀다.

[D-010]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고전으로 각파 학자들의 학술이 실려 있는 서적.

[D-011]관주(貫珠) : 글이 잘된 곳을 보아서 그 글자의 오른편에 주묵(朱墨)으로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다.

[D-012]잔도(棧道) : 중국 사천(四川) 지방에 있는 험준한 절벽에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길을 낸 곳.

[D-013]하늘에 …… 더 어렵다 : 이백(李白)의 시구에, “촉도의 가기 어려움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하구려.” 하였다.

[D-014]양곱창 곰국 한 동이 : 이 구절은 수택본에는 다음에 나오는 과실 두 쟁반의 밑에 있다.

[D-015]이미 술로 …… 했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지십(生民之什) 기취(旣醉).

[D-016]구이(九夷) …… 싶다 :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 공자께서 구이에 살고 싶으셨다.” 했다. 구이는 견이(畎夷)어이(於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등 동방의 여러 민족.

[D-017]상공(相公) : 통속편(通俗篇) 이제 의관을 차린 이를 모두 상공이라 남용하여 그의 계급에 따라서 대상공(大相公)이상공(二相公)이라 한다.” 했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 말.

[D-018]주공(周公) : 성명은 희단(姬旦). ()의 대표적 정치가.

[D-019]() …… 많다 : 한유(韓愈)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 중의 한 구절.

[D-020]어리석은 …… 부르니 : 열자(列子), “제요(帝堯)가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 만에 미복(微服)으로 강구에 놀면서 동요(童謠)를 들었다.” 했다. 강구는 한길.

[D-021]전공(田公) …… 있겠죠 : 전의 이름이 사가(仕可)  출사할 만하다는 뜻이었으므로 농담을 붙인 것이다.

[D-022]선문(選文) : 어떤 본에는 문선(文選)으로 되었으나 그릇된 듯하다. 문선에는 출사표는 있으나 후출사표는 실려 있지 않다.

[D-023]후출사표(後出師表) : 촉한의 명신 제갈량이 지었다 하나 출사표 곧 속칭 전출사표(前出師表)는 그가 지은 것이요, 소위 후출사표는 뒷사람의 위작(僞作)이라 한다.

[D-024]유량(庾亮) : 동진(東晉)의 정치가로서 특히 사부(辭賦)에 능하였다. 사중서감표는 유량이 진 명제(晉明帝)에게 올려서 중서감을 사퇴한 표문.

[D-025]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 : 청 고종(淸高宗) 때의 학자. 서림은 그의 자.

[D-026]관지(款識) : 골동에 새긴 글자. 관은 음각(陰刻)이요, 지는 양각(陽刻).

[D-027]서청고감(西淸古鑑) : 청 고종(淸高宗)의 명참(命讖)으로서 내부(內府)에 있는 고기를 해설한 책 이름.

[D-028]박고도(博古圖) : 송 휘종(宋徽宗)이 지은 책 이름. 흔히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라 한다.

[D-029]광주(廣州)  …… 되었다 : 우리나라에 많이 유행된 속담.

[D-030]녹명(鹿鳴)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임금이 군신(羣臣)을 모아서 잔치할 때 녹명편을 노래로 불렀다.

[D-031]백구(白駒) : 시경의 편명. 어진 선비를 여의는 노래. 백구는 흰 말.

[D-032]저 뫼에 …… 잴 것 :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

[D-033]나는 …… 찾았으니 : 시경 진로편(振鷺篇)에서 나온 말. 나는 백로로써 외국 손님이 이름에 비하였다.

[D-034]열두 행와(行窩) : 송사(宋史) 소옹전(邵雍傳), “일을 좋아하는 자가 별도로 소옹의 살고 있는 집과 비슷한 집을 지어서 그가 이르기를 기다렸으니 그 이름은 행와라 한다.” 했다. 그리하여 열두 군데에 행와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루필담(商樓筆談)

 

 

저녁에는 더위가 오히려 찌는 듯하고 하늘 가엔 붉은 햇무리가 끼었다.

나는 밥을 재촉해 먹고 잠깐 상방에 가서 조금 앉았다가 곧 일어나면서 혼잣말로,

 

고단하고 더위가 특히 심하니 일찍 자야겠군.”

하고는, 뜰로 내려와서 서성거리다가 틈만 있으면 나갈 궁리였다. 마침 내원과 주 주부노 참봉 등이 밥 먹은 뒤 뜰을 거닐면서 배를 문지르며 트림을 하고 있다. 때에 달빛이 차츰 돋아나고 시끄러운 소리가 잠깐 끊기었다. ()가 달그림자를 따라 두루 거닐면서 부사가 요양서 지은 칠률(七律)을 외고, 또 자기가 차운(次韻)한 것을 읊고 있었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마루로 올라갔다가 도로 나오면서 노군더러,

 

형님이 매우 심심해하시더군.”

하니, 노군은,

 

사또께서 너무나 적막하시리다.”

하고, 곧 마루 위로 향한다. 주군도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요즘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하고, 곧장 마루 쪽으로 향해 가니 내원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빨리 문을 나가면서, 장복에게,

 

어제처럼 잘 꾸며 대려무나.”

하고, 타이르자 계함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어디를 가시오.”

한다. 나는 가만히,

 

달을 따라 어디 좋은 데 가서 이야기나 해보자꾸나.”

한즉, 계함은,

 

어딜요.”

하므로, 나는,

 

그야 어디든지.”

하였더니, 계함이 발을 멈추고 망설이는 차에 수역이 마침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달이 좋으니 좀 거닐다 와도 좋겠지요.”

한다. 수역이 깜짝 놀라면서 무어라고 말하니, 계함은 웃으면서,

 

일이야 의당 이렇게 해야죠.”

하기에, 나도 허튼 말로,

 

그럴 법 하군.”

하고,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갈 제 마침 수역과 계함이 마루에 올라서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서 나는 가만히 빠져 나왔다. 이미 한길에 나오니,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였다. 더위도 약간 물러가려니와 달빛이 땅에 가득하다. 먼저 예속재에 이른즉, 벌써 문이 닫혔는데 전생은 어딘지 나가고 이인재만이 혼자 있었다. 이는 곧,

 

잠깐 앉으셔서 차나 마시세요. 전공이 곧 돌아올 겁니다.”

한다. 나는,

 

가상루의 여러분께서 벌써 모여서 몹시 기다릴 걸요.”

하니, 이생은,

 

가상루의 아름다운 약속은 벌써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모시고 가리다.”

한다. 마침 전생이 손에 붉은 양각등(羊角燈)을 들고 들어와서 곧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생과 함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을 나섰다. 한길이 하늘처럼 넓고 달빛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전생이 손에 들었던 초롱을 문 위에 걸기에, 나는,

 

초롱을 들지 않아도 무방한가요.”

한즉, 이생은,

 

아직 밤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한다. 드디어 천천히 네거리를 거닐었다. 양편 상점(商店)들은 벌써 문이 닫혔고, 문 밖엔 모두 양각등을 걸었는데 더러는 푸르고 붉은 빛깔도 섞여 있다.

가상루 여러 사람들이 마침 난간 밑에 죽 늘어서 있다가 나를 보고 모두들 못내 반겨하며 상점 안으로 맞아들인다. 이중에는 배관갈부이귀몽동야비치하탑전사가포관온백고목재( 목헌())목춘수환오복천근 등이 모두 모였다. 배생이,

 

박공(朴公)은 가히 믿음 있는 선비라 이를 만합니다.”

한다. 마루 가운데에 부채처럼 생긴 사초롱 한 쌍이 걸려 있고 탁상에는 촛불 두 자루가 켜졌는데, ()()()() 들을 이미 차려 놓았으며, 북쪽 벽 밑에도 따로이 한 식탁을 벌여 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먹기를 청하기에 나는,

 

저녁밥이 아직 덜 내려갔습니다.”

한즉, 비생이 손수 더운 차 한 잔을 따라서 권한다. 마침 자리에 처음 보는 손님이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저이는 마영(馬鑅)이라 하며, 자는 요여(耀如)이고,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분인데 장사하러 이곳에 왔으며, 나이는 스물셋이고 글도 대략 안답니다.”

하고, 소개한다. 비생은,

 

오십독역(五十讀易)을 어떤 이는 정복독역(正卜讀易)이라 하여 복() 자에다 획 하나 더 붙은 것이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오십독역의 오십(五十)은 비록 졸() 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는 있겠으나, 이제 정복(正卜)의 그릇된 것이라 함은 너무 천착함이 아닐까요. 역경(易經)은 비록 복서(卜筮)에 쓰는 책이지만 계사(繫辭 역경 중의 한 편명(篇名))에도 점()과 서()를 말했으나 복()자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복 자로 말한다 하더라도 곤() 자에다 한 점()을 더한 것인만큼 애초에 일() 자의 획을 건너 그은 건 아니니까요.”

하니, 비생은 또,

 

혹은 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의 오() 자를 오() 자의 잘못이라 하고, 그 아래 망수행주(罔水行舟)라는 글을 보아서도 두 사람으로 봄이 옳다 하는데요.”

하기에, 나는,

 

()가 능히 뭍에서 배를 저었다 하니, 망수행주와 뜻은 매우 그럴싸하게 맞으나 오()와 오()는 비록 음은 같을지라도 글자의 모양은 아주 다를뿐더러 오()와 착()으로 말하면 모두 하 태강(夏太康) 때의 사람인즉 위로 우순(虞舜) 시대와는 매우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동야는,

 

선생의 변증이 꼭 옳습니다.”

한다. 나는 전포관더러,

 

부탁드린 골동의 목록은 이미 집필을 시작하셨지요.”

하고 물은즉, 전생은,

 

점심 때 마침 조그마한 일이 생겨서 아직 반도 베끼지 못한 채 그대로 접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떠나시는 길에 잠시 점포 앞에서 행차를 멈추시면, 제 손수 수하 사람에게 전해 드릴 터이오며, 이번엔 결단코 전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한다. 나는,

 

선생께 이렇듯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니, 전생은,

 

이건 친구간의 예사 일입죠. 다만 진작 못해 드려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다. 나는 또,

 

여러분은 일찍이 천산(千山)을 구경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예서 백여 리나 되어 아무도 가본 일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병부 낭중(兵部郞中) 복녕(福寧)이란 이를 잘 아십니까.”

하니, 전생은,

 

아직 모릅니다. 우리 친구 중에도 다들 그럴 것입니다. 그는 벼슬하는 양반이요, 우리는 장사치인데 어찌 서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동야는,

 

선생은 이번 길에 황제를 직접 뵈옵지요?”

하기에, 나는,

 

사신은 때로 뵐 수 있겠지만, 나는 한갓 수원(隨員)이라 그 반열에 참가할 것 같지 않습니다.”

하니, 동야는,

 

지난해에 어가(御駕)가 능()에 거둥하셨을 때 귀국의 종관(從官)들은 모두 천자의 존안을 가까이 뵙곤 하던데 우리네는 도리어 그가 부럽더군요.”

하기에, 나는,

 

여러분은 어째서 우러러뵙지 못합니까?”

하니, 배갈부는,

 

어찌 감힌들 당돌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문 닫은 채 잠자코 있을 뿐이죠.”

한다. 나는,

 

황상께서 거둥하실 때면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들판에 모여들어 다투어 그 행차를 우러러보려고 할 것 아닙니까.”

하니, 그는,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지금 조정 각로(閣老)들 중에 누가 가장 인망이 높지요?”

하였더니, 동야는,

 

그들 이름은 모두 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에 실렸으니 한번 훑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비록 영안(榮案)을 본단들 그들의 사업이야 알 수 있습니까.”

하니, 동야는,

 

우리네야 모두 초야(草野)에 묻힌 몸이어서 지금 조정에 누가 주공(周公)인지 소공(召公)인지, 또 누가 꿈에서, 또는 점쳐서 등장되었는지를 모르지요.”

한다. 나는,

 

심양성 중에 경술(經術)과 문장이 능통한 이가 몇이나 있을까요?”

하니, 배생은,

 

저는 녹록해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고, 전생은,

 

심양 서원(書院)에 서너너덧 사람 거인(擧人)이 있었는데 마침 과거보러 북경에 가고 없답니다.”

한다. 나는,

 

여기서 북경까지 1 5백 리 사이 연로에 이름난 사람과 높은 선비들이 응당 많겠죠. 그들 성명(姓名)을 알았으면 찾아보기에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생은

 

산해관(山海關) 밖은 아직도 변방이라 지기(地氣)가 거칠고 사람이 사나워서, 연로엔 모두 우리와 같은 장사꾼들뿐이니, 이름을 들 만한 이도 없거니와 역시 사람을 천거하기란 가장 어려운 노릇이어서, 기껏해야 제가 아는 사람을 들춤에 지나지 못하며,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한번 높으신 눈으로 보시어 꼭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에겐 부질없는 말이 되고, 남들에겐 실망을 줄 뿐이리다. 이제 무슨 좋은 바람이 불어서 선생을 뵙고, 덕망을 우러러 촛불을 밝히고 마음껏 토론하니, 이를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했던 일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하늘이 맺어 준 연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서 한 사람 지기의 벗을 얻는다면 족히 한이 없을 것이니, 선생께서는 가시는 길에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인즉, 어찌 다른 사람을 미리 소개할 일이겠습니까.”

한다. 술이 몇 순배 돌 때에 비생이 먹을 갈고 종이를 펴면서,

 

목수환이 선생의 필적을 얻어서 간직하고자 합니다.”

하기에, 나는 곧 반향조가 김양허(金養虛)를 보낼 때 준 칠절(七絶) 중에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동야는,

 

반향조란 귀국의 이름 높은 선비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이름은 정균(廷筠)인데, 지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고 향조는 그의 자랍니다.”

했다. 배생은 또 한 공첩(空帖)을 내어서 글씨를 청한다. 짙은 먹 부드러운 붓끝에 자획이 썩 잘 되었다. 내 스스로도 이렇게 잘 쓰여질 줄은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한 잔 기울이고 한 장 써 내치고 하매 필태(筆態)가 마음대로 호방해진다. 밑에 몇 쪽은 진한 먹으로 고송(古松)과 괴석(怪石)을 그렸더니, 여러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면서 종이와 붓을 내놓고 삥 둘러 서서 써 달라고 조른다. 또 검은 용() 한 마리를 그리고 붓을 퉁겨서 짙은 구름과 소낙비를 그렸는데, 지느러미는 꼿꼿이 세워지고, 등비늘은 순서 없이 붙었으며, 발톱이 얼굴보다 더 크고, 코는 뿔보다 더 길게 그렸더니,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이하다 한다. 전생과 마영(馬鑅)이 초롱을 들고 먼저 돌아가려 하므로, 나는,

 

이야기가 한창 재미있는데 선생은 왜 먼저 가시렵니까.”

하고 물은즉, 선생은,

 

지레 돌아가고 싶진 않으나 다만 약속을 지키려니 하는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 문에 나서서 작별 드리오리다.”

한다. 나는 아까 그린 검은 용을 들고 촛불을 당겨 사르려 했다. 온목헌이 급히 일어나서 앗아다가 고이 접어서 품속에 간직한다. 배생은 껄껄 웃으면서,

 

관동(關東) 천 리에 큰 가뭄이 들까 두렵군.”

하기에, 나는,

 

어째서 가문단 말씀이오.”

하니, 배생은,

 

만일 이게 화룡(火龍)이 되어 간다면 누구든지 괴로움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걸요.”

한다. 모두 한 바탕 웃은 뒤에 배생은 다시,

 

용 중에도 어질고 나쁜 것이 있는데 화룡이 가장 독하답니다. 건륭(乾隆) 8년 계해(癸亥 1743) 3월에 산해관 밖 여양(閭陽) 벌판에 용 한 마리가 떨어져서 구름도 없이 우레하며, 비도 내리지 않으면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해서관 밖 늦은 봄 일기가 별안간 6월 더위로 변하였답니다. 용이 있는 곳으로부터 백 리 안은 모두 펄펄 끓는 도가니 속같이 되어서 사람과 짐승이 목말라 죽은 게 수없이 많았고, 장사치와 나그네도 다니지 못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밤낮 없이 발가숭이로 앉아도 부채를 손에서 놓지 못했답니다. 황제께서 분부를 내리시어 관내의 냉장고에서 얼음 수천 차를 내어 관 밖에 고루 나눠서 더위를 가시게 하였답니다. 용 가까이 있던 나무와 흙과 돌은 모두 콩 볶듯 되고 우물과 샘이 들끓었습니다. 용이 열흘 동안 누워 있더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치고 천둥이 일며 콩알 같은 비가 퍼붓고, 대릉하(大陵河)의 집들이 비 속에서 저절로 불이 나곤 하였으나, 다만 사람과 짐승에겐 아무런 해도 없었답니다. 용이 떠날 때엔 사람들이 나가 보니, 마침 몸을 일으켜서 하늘로 오르려 할 제 처음엔 무척 굼뜨게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끌되, 마치 타마(駝馬)가 일어선 모양인데 길이는 겨우 서너 길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그러다가 입으론 불을 뿜고 꼬리만 땅에 붙이고는 한 번 몸을 굼틀하매 비늘마다 번개가 번쩍 일면서 우레 소리가 나고 공중에서 빗발이 쏟아지더니, 이윽고 몸을 묵은 버드나무 위에 걸치자, 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여남은 길이나 되며, 소낙비가 강물을 뒤엎는 듯 퍼붓더니 이내 멎었답니다. 그제야 하늘을 쳐다본즉, 그 날랜 품이 동쪽 구름 사이에 뿔이 나타나고 서쪽 구름 사이엔 발톱이 드러나는데, 뿔과 발톱 사이가 몇 리나 되더랍니다. 용이 오른 뒤엔 날씨가 청명하여 도로 삼월의 천기가 되고, 용이 누웠던 자리엔 몇 길이나 되는 맑은 못이 파이고, 못 가에 있던 나무와 돌은 모두 타버리고 반쯤만 남았으며, 마소들은 털과 뼈가 모두 타서 녹아버렸고, 크고 작은 물고기 죽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 냄새에 사람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답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용이 걸렸던 버드나무는 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 해에 관동의 일대에 큰 가뭄이 들어서 9월이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용이 간다면 또 그런 변이 생길까 저어하는 바입니다.”

하자, 일좌가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잔에 술을 부어 죽 들이키고 나서,

 

이 이야기에 아주 술맛이 도는군요.”

하니, 여럿이,

 

옳습니다. 이번엔 우리 각기 한 잔씩 돌려서 박공의 기쁨을 도웁시다.”

한다. 나는,

 

여러분이 그 용의 이름을 아십니까?”

한즉, 혹은 응룡(應龍)이라 하고, 또는 한발(旱魃)이라 한다. 나는,

 

아니에요. 그 이름은 강철(罡鐵)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강철이 지난 곳엔 가을도 봄이 된다 하니, 이는 가물어 흉년이 짐을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다 잘 이룩되지 않음을 보고는 강철의 가을이라 합니다그려.”

하였더니, 배생이

 

그 용 이름이 참 기이하구려. 내가 난 때가 바로 그 해이니, 이는 곧 강철의 가을이라 어찌 가난치 않고야 견디겠소.”

하고, 그는 다시 긴 목소리로,

 

강처(罡處).”

하기에, 나는,

 

아니오, 강철.”

하고, 다시 일러주니, 배생은 또,

 

강천(罡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 아니요, 도철(饕餮)이란 철()과 음이 같은 철()이어요.”

하니, 동야가 크게 웃으며 이내 커다란 소리로,

 

강청(罡靑).”

하여,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었다. 대개 중국 사람들의 발음엔 갈()() 등의 리을 받침이 잘 궁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은 모두 오()()에 살고 계시면서 이렇게 멀리 장사와서 해를 거듭 바꾸시면 고향 생각이 간절치 않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오복은,

 

간절타 뿐입니까.”

하고, 동야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심신이 산란해집니다. 천애(天涯)지각(地角)과 같은 먼 곳에 와서 사소한 이문을 다투다 보니, 연만하신 어머니께서는 부질없이 해저문 여문(閭門)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시고, 젊은 아내는 침방을 홀로 지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편지마저 끊어지고, 꾀꼬리 소리엔 꿈 역시 이르지 않으니, 어찌 사람으로서 머리가 세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달 밝고 바람 맑으며, 잎 지고 꽃 피는 때면 하염없이 간장만 타니 이를 그 어이하오리까.”

한다. 나는,

 

그렇다면 진작 고향에 돌아가서 몸소 밭을 갈아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거느릴 계획을 세우시지 않고, 오로지 이렇게 하찮은 이문을 좇아서 멀리 고장을 떠나셨나요. 설사 이리하여 재산이 의돈(猗頓)과 겨루고 이름이 도주(陶朱)와 같이 된단들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까.”

하니, 동야는,

 

그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도 더러는 반딧불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면서 글 공부하며, 아침에 나물 밥, 저녁엔 소금 찬으로 가난을 견디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한 정성을 하늘이 가엾이 여기셨음인지 때로 비록 하찮은 벼슬을 얻어 하는 일이 있사오나, 만 리 타향에 일터를 찾으려니 고향을 떠나 사는 건 마찬가지지요. 혹시 친상을 당하든지 파면을 당하든지 한다면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 관직을 가진 자는 마땅히 그 일터에서 죽어야 할 것이며, 혹시 잘못이 있을 때엔 장물(贓物)을 도로 토해내야 할뿐더러 세업(世業)마저 기울이게 될 것이니, 그때에야 비록 황견(黃犬)의 탄식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배운 것이 어설프니 벼슬길도 가망 없고, 그렇다고 해서 피땀 흘리며 공장이 노릇으로 일생을 보낼 기술도 없거니와, 쌀 한 알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는 농업으로 한 평생을 지낸댔자, 이는 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불과 좁은 고장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 채, 마치 여름 벌레가 겨울엔 나오지 못하듯이 이 세상을 마칠 터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 빨리 죽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제 가게를 내고 물건을 사고 팔아서 생활을 삼는 건 남들은 비록 하류로 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를 위하여 이에 하늘이 한 개의 극락계(極樂界)를 열고 땅이 이러한 쾌활림(快活林)을 점지하여, 도주공의 편주(扁舟)를 띄우고, 단목씨(端木氏)의 수레를 잇달아서 유유히 사방을 다니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어떤 넓은 대도시라도 뜻에 맞는 대로 그칠 것이니, 드높은 처마와 화려한 방 안에 몸과 마음이 한가롭고, 모진 추위나 가혹한 더위에도 방편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께 위안되시고 처자들도 원망치 아니하여, 나아가나 물러서나 피차간 여유 있고 영화롭거나 욕되거나를 모두들 잊게 된즉, 저 농사와 사환의 두 길에 비하여 그 괴롭고 즐거움이 어떻다 하리까. 또 저희들은 특히 사귐에 있어서 모두 지성(至性)을 지녔답니다. 옛 글에도 세 사람이 같이 행하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될 이가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한다면 굳은 쇠라도 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누리의 지락(至樂)이 이보다 더 지나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한평생에 만일 동무가 없다면 아무런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입고 먹는 것밖에 모르는 위인들은 모두 이런 취미를 모른답니다. 세상에는 과연 그 면목이 얄밉고 말씨가 멋 없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들의 눈엔 옷가지 밥사발만 눈에 뜨일 뿐 동무를 사귀는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지니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중국의 백성들은 제각기 네 갈래의 분업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만큼 거기엔 귀천의 차별이 없을 터이며, 따라서 혼인이라든지 또는 사환에 있어서도 아무런 구애가 없겠지요.”

한즉, 동야는,

 

우리나라에선 벼슬아치들은 장사치나 장인바치와는 혼인함을 금하여 관기(官紀)를 깨끗이 하고, 아울러 도()를 높이고 이()를 낮게 보며, 근본을 숭상하고 지엽을 누르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는 모두 대대로 장사하는 집이므로 사대부의 집과는 혼인이 없고, 돈과 쌀을 바쳐서 생원(生員)이나 얻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향공(鄕貢)을 거쳐서 거인(擧人)이 되지는 못한답니다.”

하매, 비생은,

 

그러나 그건 다만 고향에서만이지 타관에 나서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고, 덧붙여 설명한다. 나는,

 

한 번 제생(諸生 생원과 같음)이 되기만 하면 사류(士類)로 행세함은 용허됩니까.”

하였더니, 이는,

 

그렇습니다. 제생 중에서도 늠생(廩生 국가 급비생(給費生))감생(監生)공생(貢生) 등의 여러 가지 명목이 있어서 이들은 모두 생원 중에서, 뽑혀 오르기 때문에 한 번만 생원에 통과되면 구족(九族)에게 빛이 나나, 그 대신 이웃들이 해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관권(官權)을 잡고 시골에서 무단(武斷)을 감행하는 게 곧 생원님네의 전문적인 기술이고, 소위 사류(士類) 중에도 대체로 세 층이 있으니, 상등은 벼슬아치가 되어 관록을 먹는 것이요, 중등은 학관(學館)을 열어서 생도를 모집하는 것이요, 하등은 남에게 창피를 무릅쓰고 빌붙고 꾸러 다니는 축들입니다. 이는 속담에 이른바 남에게 빌붙어 사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건만, 당장 살길이 막연하니 남에게 빌붙지 않을 수 없지요. 추위와 더위를 헤아리지 않고 줄곧 쏘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말을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그 야비한 정상이 먼저 나타납니다. 한때엔 고담준론만 하던 선비가 뜻밖에 세상이 미워하는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담에 남에게 구하는 것은 나에게 스스로 구함만 같지 못하다고 했듯이, 장사를 하면 저절로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한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서,

 

중국의 상정(觴政)엔 반드시 묘한 방법이 있을 터인데, 어제 오늘 이틀 밤을 여럿이 모여 마셔도 주령(酒令)을 내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배갈부가,

 

이는 옛날의 상정을 말씀함이죠. 지금은 하찮은 운전수(運轉手)나 금고직(金庫直)이 따위도 다 아는 일이어서 그리 운치(韻致) 있는 일로 치질 않습니다.”

하니, 비생은 다시,

 

입옹소사(笠翁笑史)에 용자유(龍子猶)의 고려 중의 주령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는데, 어떤 사신이 고려에 갔을 때 고려에서는 한 중으로 하여금 그를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더니 중이 영()을 내되, 항우(項羽)와 장량(張良)이 서로 산() 하나를 놓고 다투는데, 항우는 우산(雨傘)이라 하고 장은 양산(凉傘)이라 했다 하니, 사신이 창졸간에 대답하기를, ‘허유(許由)와 조조(鼂錯)가 호로(胡盧) 하나를 두고 다투는데, 허유는 유호로(油胡盧)라 하고 조조는 초호로(醋胡盧)라 하였다.’ 하니, 그때 고려 중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나는,

 

이 영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을뿐더러 중의 이름도 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금 눈을 붙였다가 문 밖에 사람 소리가 중얼거리기에 곧 일어나 사관에 돌아오니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다. 옷 벗고 다시 잠들어서 조반을 알릴 때 겨우 깨었다.

 

 

[C-001]상루필담(商樓筆談) : ‘다백운루본에는 상루야화(商樓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형님 : 곧 상사 박명원. 연암의 삼종형.

[D-002]오십독역(五十讀易) : 논어(論語), “쉰 살에 역경(易經)을 읽었다.” 하였다.

[D-003]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 : 서경(書經) 단주처럼 거오한 자는 없다.” 했다. 단주는 요()의 아들 이름.

[D-004]() : 논어 ()는 능히 뭍에서 배를 끈다.” 했다. 오는 역사(力士)의 이름.

[D-005]망수행주(罔水行舟) : 물도 아닌 뭍에서 배를 가게 함을 이른 말.

[D-006]() : 사람 이름. 혹은 오가 착의 아들이라 하였다.

[D-007]하 태강(夏太康) : ()의 임금. 태강은 시호(諡號).

[D-008]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 : 만인과 한인을 함께 실은 일종의 잠영록(簪纓錄).

[D-009]소공(召公) : 성명은 희석(姬奭). 주공과 함께 주초(周初)의 어진 재상. 소공은 봉호(封號).

[D-010]꿈에서 : 은 무정(殷武丁)이 꿈에 부열(傅說)을 만나고 초상을 그려 붙여서 그를 찾아 재상을 삼았다.

[D-011]점쳐서 : 주 문왕(周文王)은 점쳐서 여상(呂尙)을 얻어 스승을 삼았다.

[D-012]거인(擧人) : 지방에서 국가 고시에 합격하고 중앙 고시에 응할 자격을 지닌 선비.

[D-013]김양허(金養虛) : 김재행(金在行). 양허는 자. 그는 김상헌(金尙憲)의 오대손. 영조(英祖) 41년에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연행(燕行)을 하였다.

[D-014]약속 : 등사해 주기로 한 고동록(古董錄)을 베끼기 위함이었다.

[D-015]계해(癸亥) : ‘일재본에는 계사(癸巳)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16]() : ‘일재본에는 명철(明哲)이란 철()로 되었다.

[D-017]의돈(猗頓) : 전국 때 노()의 유명한 부자. 돈은 이름이요, 의는 산동성 의씨(猗氏)라는 고을에서 살림을 일으켰으므로 붙였다.

[D-018]도주(陶朱) : 성명은 범려(范蠡). ()에 살 때에 주공(朱公)이 되었으며, 19년 만에 세 번이나 천금을 이룩하였고 그 자손이 더욱 돈을 늘려서 거만에 이르렀다.

[D-019]반딧불을 …… 하고 : ()의 가난한 학자 차윤(車胤)의 옛 일. 형설(螢雪)의 공()이 여기서 유래되었음.

[D-020]송곳으로 …… 찌르면서 : 육국(六國) 때 여섯 나라 재상을 겸임하던 소진(蘇秦)의 옛 일.

[D-021]황견(黃犬)의 탄식 : ()의 이사(李斯)가 그의 아들과 함께 형장으로 갈 때 그의 아들을 돌아보면서, “내 비록 너와 다시 황견을 몰고 동문을 나서 사냥을 하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D-022]쾌활림(快活林) : ()의 수도 교외에 있는 유명한 유원지의 이름.

[D-023]도주공의 …… 띄우고 : 범려가 절세의 가인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함께 오호(五湖)로 떠다녔다.

[D-024]단목씨(端木氏) …… 잇달아서 :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돈벌이를 잘하는 단목사(端木賜). 그의 자는 자공(子貢).

[D-025]세 사람 …… 있다 : 논어(論語)에 나온 말.

[D-026]두 사람의 …… 있다 : 역경(易經)에서 나온 말.

[D-027]향공(鄕貢) : 지방 출신의 과거 응시자.

[D-028]감생(監生) : 국립 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이때에는 아래 나오는 공생과 함께 일정한 월사금을 내고 관립 학교에 학적을 지니게 된 자.

[D-029]상정(觴政) : 주령(酒令)과 같다. 술을 마시는 좌석에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면 이에 맞추어 대구를 하여 승부를 보아 벌주를 먹이는 놀음.

[D-030]입옹소사(笠翁笑史) : 청의 유명한 희곡작가 이어(李漁)가 지은 서명(書名).

[D-031]장량(張良) : 한 고제(漢高帝) 유방(劉邦)을 도와서 천하를 얻게 한 책사.

[D-032]허유(許由) : ()가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는 은사.

[D-033]조조(鼂錯) : 한 경제(漢景帝)의 어진 신하.

[D-034]옷벗고 …… 깨었다 : ‘일재본에는 이 부분이 탈락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자(戊子)

 

 

보슬비 오다 곧 멎다.

심양에서 원당(願堂)까지 3, 탑원(塔院) 10, 방사촌(方士邨) 2, 장원교(壯元橋) 1, 영안교(永安橋) 14리였고, 길 쌓은 것이 영안교에서 비롯하여 쌍가자(雙家子)까지 5, 대방신(大方身) 10, 모두 45리다. 이곳에서 점심 먹고, 대방신에서 다시 마도교(磨刀橋)까지 5, 변성(邊城) 10, 흥륭점(興隆店) 12, 고가자(孤家子) 13, 모두 40리다. 이날 85리를 갔다. 고가자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 일찍 심양을 떠날 제 가상루에 들르니, 배관이 홀로 나와 맞고 온백고는 마침 잠이 깊이 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배를 작별하고 예속재에 이르니, 전사가와 비치가 나와 맞는다. 전생이 두 봉() 글을 내어서 한 봉은 떼어 내게 뵈는데 곧 내게 주는 고동(古董)의 명목을 기록한 것이었고, 또 한 봉은 겉에 붉은 쪽지로 허태사 태촌선생 수계(許太史台邨先生手啓)’라 썼다. 전생은 다시,

 

이는 저의 성심에서 나온 것이요, 아무런 객기(客氣) 없는 말씀이옵니다. 조선관(朝鮮館 조선 사신이 드는 객관)과 서길사관(庶吉士館)은 바로 문이 나란히 있사오니, 선생이 북경에 도착하시거든 이 편지를 전하시오. 허태사는 그 의표(儀表)가 속되지 않고 게다가 문장이 아름다운즉 반드시 선생을 잘 대우하리다. 편지 중에도 선생의 존함(尊啣)과 자함(字啣)을 함께 적었으니 결코 헛걸음이 되지 않으리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여러분을 면면이 만나서 하직하지 못하니 매우 서운합니다. 선생이 이 뜻을 잘 전해 주시오.”

하니, 전생이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곧 몸을 일으키려 하는 즈음에 전생은,

 

목수환이 옵니다.”

한다. 목춘이 한 청년을 데리고 왔는데, 청년은 손에 포도 한 광주리를 들었다. 대체 청년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예물로 포도를 가지고 온 모양이다. 그는 나를 향하여 공손히 읍한 뒤에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는데 구면이나 다름없이 익숙해 한다. 그러나 길이 바빠서 이내 손을 들어 작별하고 점방을 떠나 말을 타는데, 그는 말 머리에 이르러 두 손으로 포도 광주리를 받쳐 들었다. 나는 말 위에서 그 한 송이를 집고 다시 손을 들어 치사하고 떠났다. 얼마 가다 돌아본즉 여러 사람이 아직도 점방 앞에서 내 가는 양을 바라보고 섰다. 길이 바빠서 미처 그 청년의 성명을 묻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연거푸 이틀 밤을 잠을 설치었으므로 해 뜬 뒤에 고단함이 더욱 심하였다. 창대로 하여금 굴레를 놓고 장복과 함께 이쪽저쪽에서 부축하게 하고 가면서 한숨 달게 잤더니, 정신이 비로소 맑아지고 주위의 물색이 한층 더 새롭다. 장복은,

 

아까 몽고 사람이 낙타 두 마리를 끌고 지나가더이다.”

하기에, 나는,

 

, 내게 알리지 않았어.”

하고 꾸짖었더니, 창대는,

 

그때 코 고는 소리가 천둥치듯하와 불렀사오나 아니 깨시는 걸 어찌하오리까. 쇤네들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무언지는 똑똑히 모르오나 생각에 낙타인가 싶습니다.”

한다. 나는,

 

그 꼴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다시 물었더니, 창대는,

 

정말 형언하기 어렵습디다. 말인가 하면 굽이 두 쪽일뿐더러 꼬리가 소처럼 생겼고, 소인가 하면 머리에 뿔이 없을뿐더러 얼굴이 양같이 생겼고, 양인가 하면 털이 꼬불꼬불하지 않을뿐더러 등엔 두 뫼봉우리가 솟았으며, 게다가 머리를 쳐들면 거위 같기도 하려니와, 눈을 떴다는 것이 청맹과니와 같사옵더이다.”

한다. 나는,

 

그게 과연 낙탄가보다. 그 크기가 얼마만하더냐?”

하니, 그는 한 길이나 되는 허물어진 담을 가리키며,

 

높이가 저만하더이다.”

한다. 나는,

 

이 담엘랑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려야 한다.”

하고, 타일렀다.

지는 해가 뉘엿뉘엿 말 머리에 감돈다. 강가에 나귀 떼가 수백 마리 물을 먹고 있다. 한 노파가 손에 수숫대를 들고 나귀를 모는데, 일곱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노파를 따라 다닌다. 그는 시골 마나님으로 몸에는 푸른 색 짧은 치마를 입고 발엔 검은 신을 신었는데, 머리가 모두 벗어져서 뻔질뻔질한 게 마치 바가지처럼 빛난다. 게다가 또 정수리 밑에 조그마하게 낭자를 틀고 겨우 한 치길이밖에 안 되는 곳에 온갖 꽃을 수두룩이 꽂았다. 장복을 보고 조선담배를 달라 한다. 나도,

 

저 나귀가 모두 너의 한 집에서 기르는 것이냐?”

하고 물었더니, 노파는 머리를 끄덕이고 가버린다. 그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D-001]서길사관(庶吉士館) : 한림원에 속한 문인들을 모아 둔 곳. 서길사는 한림의 후보격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동록(古董錄)

 

 

문왕정(文王鼎)

소보정(召父鼎)

아호부정(亞虎父鼎)

이는 모두 상()() 시대의 유물로서 상상(上賞)에 해당됩니다.

주왕백정(周王伯鼎)

단도정(單徒鼎)

주풍정(周豐鼎)

이는 모두 당()의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年間)에 국()에서 만든 것인데, 몸집이 작아서 서재(書齋)의 향불 피우기에 가장 알맞습니다.

상부을정(商父乙鼎)

부이정(父已鼎)

부계정(父癸鼎)

상자정(商子鼎)

병중정(秉仲鼎)

도철정(饕餮鼎)

이부정(李婦鼎)

상어정(商魚鼎)

주익정(周益鼎)

상을모정(商乙毛鼎)

부갑정(父甲鼎)

이는 모두 원나라 때 강낭자(姜娘子)의 옛것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주대숙정(周大叔鼎)

주련정(周䜌鼎)

이는 모두 서실(書室)의 청공(淸供)에 들 만합니다. 대개 솥이나 화로의 귀가 고리로 된 것, 아가리가 헤벌어진 것, 배가 민숭하게 내민 것, 밑이 뾰족한 것 등은 다 하품이어서 볼 것이 못 되오니 아예 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사망대(周師望敦)

시대(兕敦)

익대(翼敦)

상모을력(商母乙鬲)

주멸오력(周蔑敖鬲)

상호수이(商虎首彝)

주신이(周辛彝)

이는 모두 박고도(博古圖) 중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근일에 새로 나온 서청고감(西淸古監)엔 도식(圖式)이 더욱 정밀하니, 먼저 서사(書肆) 중에서 서청고감을 찾아서 그릇 이름을 보고 그림을 살피신 뒤에, 그 모양이 단아한 것을 마음에 골라 두신 다음, 창중(廠中)에나 혹은 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의 장날에 가서 찾으시면 모두 틀림없으리다.

()

()

()

이 세 가지는 모두 술 그릇이지만 역시 꽃을 꽂아서 평상시의 맑은 감상에 이바지될 것입니다.

대체로 관요(官窰)는 그 법식이나 품격이 가요(哥窰)와 다름없으나, 빛깔은 분청(粉靑) 혹은 난백(卵白)을 취하였으되 맑고도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이 상품이고, 그 다음이 담백색(澹白色)이고, 다만 유회색(油灰色)은 사지 마십시오. 무늬는 얼음장이 깨진 것처럼 된 것, 또는 뱀장어 피무늬같이 된 것이 상품이고, 자디잔 무늬는 그 중 하품이니 취하지 마십시오. 그 만드는 법식 역시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본받은 것이 많습니다. 다만 정()()()()()() 등의 어느 것을 막론하고, 특히 키 작고 배부른 것은 속되고 추악하여 볼품없으니 결코 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제가 지난해 첫 겨울에 북경까지 갔다가 2월에 돌아왔습니다. 북경에 있을 때 날마다 창중(廠中)에 가보았는데, 눈에 띄는 게 모두 보배롭고 기이하여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그때 심경은 마치 하백(河伯 물귀신)이 자기 얼굴의 누추함을 앎과 같이, 싸움을 시작도 않고서 벌써 항복했답니다. 다만 저 금창(金閶소주(蘇州)의 별명) 지방에 살고 있는 경박한 무리들이 마치 이와 벼룩처럼 기고 뛰어서, 창중(廠中)에 들끓으면서 값을 함부로 올려 불러서 비단 열곱이 넘게 만들뿐더러, 온갖 감언 이설로써 사람의 굳은 간장을 녹일 듯 덤빕디다.

저는 그 길이 처음인지라 하도 놀랍고 미혹하여, 삼관(三官 )이 아찔하고 오장(五膓)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얻은 바 없이 그저 어리둥절하다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이 일을 생각하면 문득 머리카락이 솟는 듯하니 이는 어인 까닭일까요. 제가 시골에서 생장하여 어리석고 겸허함이 지방성을 그대로 지닌지라, 연석(燕石)을 보배로 여기고 어목(魚目)을 진주로 그릇 앎은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만 분한 것은 그들의 웃음감이 될 만큼 많은 값을 치렀으니, 이는 이른바 도척(盜跖)의 배를 불린다는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선생이 북경으로 가시는 마당에 제가 잊지 못하고 이런 구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로 선생과 같은 외국의 손님으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어 중국에 전혀 옳은 사람이 없더라고 하실까 두려워함입니다. 아울러 충심껏 말씀드릴 것은 제가 옛 서화에 대해서는 감상한 것도 아직 넓지 못할뿐더러 사랑하는 버릇도 깊지 못한 것이 함부로 말씀 드리긴 어렵사오나, 이들은 대체로 전현들의 수적은 아닐지라도 역시 후세의 명필들이 잘 본뜬 것이어서, 비록 노성(老成)한 티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형(典刑)을 엿볼 수 있으며, ( 미불(米芾))( 채경(蔡京))(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은 모두 그 이름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전날에 저의 보잘것없음을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시는 뜻을 말씀하셨으나, 연로 중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붙이는 일도 너무 창졸간이어서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일부러 길을 돌아가면서 일일이 찾아봄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에 허태사 조당(兆黨)과 며칠 동안 사귀어 지기의 벗으로 맹세하였는데, 그의 자는 태촌(台邨)이며 호북(湖北) 사람입니다.

여기 그에게 부치는 편지 한 통이 있으니, 선생이 북경에 닿으시는 날 곧 한림원(翰林院)에 가셔서 이 허태촌을 찾아서 제 이름을 대시고 이 글을 전하십시오.

그가 만일 선생과 저의 사이가 이처럼 친밀함을 알게 되면 반드시 푸대접하지 아니하오리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헌걸하오니 한번만 보시면 문득 뜻이 맞으실 것이오며, 결코 제가 그릇 추천함이 아님을 아시리다. 아울러 박공(朴公) 노야(老爺)께옵서 양해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전사가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뢰옵니다.

 

[C-001]고동록(古董錄) : ‘백운루본에는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이는 모두 …… 해당됩니다 : ‘박영철본에는, 이 부분이 소주(小註)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2]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 : 북경 동사패루(東四牌樓) 융복사가(隆福寺街)에 있다. 보국사와 함께 골동품들을 많이 매매한다. 보국사는 호국사(護國寺)라고도 함. 서성(西城) 호국사가(護國寺街)에 있다. ‘일재본에는 홍인사(弘仁寺)로 되었다.

[D-003]관요(官窰) : () 휘종(徽宗) 정화(政和) 연간에 관에서 직접 구워 낸 자기.

[D-004]가요(哥窰) : ()의 처주(處州)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 형제가 각기 자기를 구웠는데, 형이 구운 것이 아우의 것보다 약간 더 희고 깨진 무늬가 많아서 이를 가요라 하였다.

[D-005]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 이 편지는 다만 주설루본(朱雪樓本)’에 있는 것을 여기에 추록하였다.

[D-006]연석(燕石) …… 여기고 :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말. ()의 어떤 어리석은 이가 기와 쪽과 다름없는 연석을 보배로 그릇 알고 깊이 간직하여 남의 조소를 샀다.

[D-007]어목(魚目) …… 그릇 앎 :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 고기 눈과 구슬과의 혼동을 이른 말.

[D-008]도척(盜跖) : 전국 때 노()의 대도(大盜). ‘는 도적이요, ‘은 그의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축(己丑)

 

 

날은 맑으나 바람이 심하다.

고가자(孤家子)에서 새벽에 떠나 거류하(巨流河)까지 8리였으니, 거류하는 주류하(周流河)라고도 한다. 거기서 거류하보(巨流河堡) 7, 필점자(泌店子) 3, 오도하(五渡河) 2, 사방대(四方臺) 5, 곽가둔(郭家屯) 3, 신민둔(新民屯) 3, 소황기보(小黃旗堡) 4리를 와서 이곳에서 점심 먹었다. 모두 35리를 갔다. 소황기보에서 대황기보(大黃旗堡)까지 8, 유하구(柳河溝) 12, 석사자(石獅子) 12, 영방(營房) 10, 백기보(白旗堡) 5, 모두 47리다. 이날에는 도합 82리를 가서 백기보에서 묵었다.

이날 새벽에 일어나 아침 소세를 마치니 몹시 고단하다. 달이 지새니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모두 깜박거리고 마을 닭이 서로 홰를 친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가 뽀얗게 끼어 큰 별이 삽시에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한 떼의 의주(義州) 장사꾼들이 서로 지껄이며 지나는데, 그 소리가 몽롱하여 마치 꿈속에 기이한 글을 읽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영검스러운 경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금 뒤에 하늘 빛이 훤해지며 길에 늘어선 수많은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한다. 저들이 그처럼 알리지 아니한들 이미 낮 더위가 몹시 뜨거운 줄을 모르랴. 점차 들에 가득했던 안개가 걷히고 먼 마을 사당 앞에 세운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보인다. 동쪽 하늘을 돌아보니 불빛 구름이 용솟음치며 붉은 불덩이가 옥수수 밭 저편에 솟을 듯 말 듯 천천히 온 요동벌에 꽉 차게 떠오른다. 땅 위의 오가는 말이며, 수레며, 나무며, 집이며, 털끝같이 보이는 것이 불덩이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신민둔의 시가나 점포가 요동보다 못지 않게 번화하다. 한 전당포(典當舖)에 들어가니 뜰 가득히 시렁 위에 포도 덩굴의 그늘이 영롱한데, 뜰 가운데엔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돌을 포개어 한 개의 가산(假山)이 이룩되었고, 그 산 앞에 높이 한 길이나 되는 항아리를 놓아서 연꽃 너덧 포기가 피어 있고, 땅을 파서 한 칸 나무통을 묻고 그 속에 뜸부기 한 쌍을 기른다. 산에는 종려추해당안석류(安石榴) 등 화분 여러 개가 놓여 있고, 휘장 밑엔 의자를 나란히 놓고 우람한 사나이 대여섯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일어나 읍하며, 앉기를 청하고 시원한 냉차 한 잔을 권한다. 점포 주인이 유금색(乳金色)으로 이룡(螭龍) 두 마리를 곱게 그린 붉은 종이 두 장을 끄내며 주련(柱聯)을 써달라 한다. 나는 곧,

 

쌍 목욕 원앙새는 나는 비단이요 / 鴛鴦對浴能飛繡

갓 피는 연꽃송이 말없는 신선일세 / 菡蓞初開不語仙

라고 쓰니, 보던 이들이 모두 필법이 아름답다고 칭찬이다. 주인은,

 

영감은 잠깐만 지체하셔요. 제가 다시 좋은 종이를 가져 오겠습니다.”

하고 일어나더니, 조금 뒤에 왼손에 종이를 들고 오른손엔 진한 먹 한 종지를 받쳐들고 오더니, 칼로 백로지(白鷺紙) 한 장을 끊어서 석 자 길이로 만들어 문 위에 붙일 만한 좋은 액자(額字)를 써 달라 한다. 내가 길을 오며 보니, 점포 문설주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네 글자가 써 붙여 있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애초에 지닌 심지(心地)가 깨끗하기는 가을 서릿발 같고, 게다가 또 희디흰 눈빛보다도 더 밝음을 스스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또 문득 생각하기를,

 

며칠 전에 난리보를 지날 때 어떤 점포 문설주에 붙인 이 넉자의 필법이 심히 기묘하기에, 내 한참 말을 멈추고 감상해 본즉, 상설(霜雪)이란 두 글자는 틀림없이 미해악체(米海嶽體)거니 하였더니, 이제 그 체대로 한번 써봄직도 하구나.’

하고, 먼저 붓끝을 먹물에 담가 붓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니 먹빛은 붉은 기운이 돌 듯, 짙고 연함이 골고루 퍼진 다음 종이를 펴고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쓰기 시작하여 ()’ 자가 이룩되었다. 이는 비록 미원장(米元章)의 것에야 비길 수 없겠지만 어찌 동 태사(董太史)만이야 못하랴 싶게 잘된 셈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그들은 일제히,

 

글씨가 퍽이나 잘 되었습니다.”

하고 감탄한다. 다음 ()’ 자를 쓰니 더러는,

 

잘 되었다.”

하고, 칭찬하는 이도 있으나 다만 주인의 기색이 적이 달라지고 아까 ()’ 자 쓸 때처럼 절규(絶叫)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정말 () 자야 늘 써본 적도 없어서 손에 익지 못하여 위  자는 너무 빽빽하게 썼고 아래 () 자는 지나치게 길어서, 그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붓끝에서 짙은 먹물이 () 자의 왼편에 잘못 떨어져서 점차 번져 마치 얼룩진 표범처럼 되었으니, 이게 아마 그 자가 언짢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고, 짐짓 단숨에 잇달아서 ()’()’의 두 자를 쓰고 붓을 던지고 한번 주욱 읽어본즉, 큼직한 기상새설(欺霜賽雪)’ 네 글자가 틀림없다. 그런데 주인은,

 

이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 없어요.”

하며, 머리를 저을 뿐이다. 나는,

 

그저 두고 보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나오면서,

 

이런 궁벽한 곳의 장사치가 제 어찌 전날 심양 사람들만 할까. 저깐 놈이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은 어찌 안단 말야.’

하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날 해가 뜬 뒤에 바람이 온 누리를 뒤덮을 듯이 불어치더니, 오후에는 멎고 공중에 한 점 바람기도 없어 더위가 더욱 찌는 듯하다.

영안교(永安橋)에서부터 아름드리 통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았는데, 다리의 높이가 두세 길이가 되고, 넓이가 다섯 길은 되며, 양쪽의 나무 끝이 가지런하여 마치 한 칼로 밀어 놓은 듯싶다. 다리 밑 도랑엔 푸른 물이 끝없이 흐르고 진흙 벌이 윤기난다. 만일 이를 개간해서 논을 만든다면 해마다 몇만 섬의 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강희황제가 일찍이 경직도(耕織圖)와 농정(農政)에 대한 모든 글(농정전서(農政全書))을 지었으니, 지금 황제도 역시 노농가(老農家)의 자제이신만큼 이 산해관 밖의 푸른 듯 검은 기름진 땅이 상상전(上上田)이 될 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저 관 밖의 땅은 실로 자기네들이 일어난 고장이라, 벼가 기름지고 향기로우며 이밥이 차져서 백성이 혀에 감기도록 늘 먹어 버릇들인다면, 힘줄이 풀리고 뼈가 연해져서 용맹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 차라리 수수떡과 산벼 밥을 늘상 먹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림을 잘 참고 혈기를 돋우어 구복(口腹)의 사치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함일 것이다. 비록 천 리의 기름진 땅을 버릴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메마른 땅에 정의를 위해서 사는 백성이 되게 함이니, 이게 그의 더욱 깊은 생각일 것이다.”

한다.

길에서 보니 2리나 3리마다 시골 집들이 끊어졌다 또 이어지고, 수레와 말이 수없이 쏘다니고, 좌우의 점포들도 모두 볼 만하여 봉성에서 여기까지 비록 사치하고 검박한 것은 혹 다른 점도 없지 않겠지만, 그 규모는 모두 한결같을 뿐이다. 때로 휘딱휘딱 눈에 띄는 것이 실로 놀랄 만한 것, 기뻐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건만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먼 곳에 자욱이 번지는 연기를 바라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참()으로 달리는데 오이밭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말 앞에 엎드려서 서너댓 칸 되는 초가집을 가리키면서,

 

이 늙은 게 혼자 길가에서 참외를 팔아서 오늘 내일 지내는데, 아까 당신네 조선 사람 40~50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쉬면서 처음엔 값을 내고 참외를 사 자시더니, 떠날 때 참외를 한 개씩 손에 쥐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왜 그 우두머리 어른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는고.”

하니, 늙은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리하였더니 그 어른이 귀먹고 벙어린 척하시는데 나 혼자 어찌 그 40~50명 힘센 장정을 당하오리까. 이제도 쫓아가니까 한 사람이 가는 길을 막으며 참외로 냅다 저의 면상을 갈기니, 눈에선 별안간 번갯불이 일고 아직도 참외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고, 결국은 청심환을 달라고 조르기에 없다고 했더니, 그는 창대의 허리를 꼭 껴안고 참외를 팔아달라고 떼를 쓰고는 참외 다섯 개를 앞에 갖다 놓는다. 나는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한 개를 벗겨서 먹어본즉, 향기와 단맛이 비상하므로 장복더러 남은 네 개를 마저 사가지고 가서 밤에 먹기로 하고, 그들에게도 각기 두 개씩을 먹였다. 모두 아홉 개인데, 늙은이가 80()을 달라고 떼를 쓴다. 장복이 50문을 주니 골을 내며 받지 않는다. 창대와 둘이 주머니를 털어 세어본즉 모두 71문이라, 주기로 하고, 나는 먼저 말에 오르고 장복을 시켜 주게 하였더니, 장복이 주머니를 털어 뵈자 그제야 가만 있다. 그는 애초에 눈물을 흘려서 가련한 빛을 보인 다음에, 억지로 참외 아홉 개를 팔고서 1백 문에 가까운 비싼 값을 내라고 떼를 쓰니 심히 통탄할 만한 일이며, 그보다도 우리나라 하정배들이 길에서 못되게 구는 것이 더욱 한스러운 노릇이다.

어두워서야 참에 이르렀다. 참외를 내어 청여(淸如 내원의 자)계함 들에게 주어 저녁 뒤 입가심으로 먹게 하고, 길에서 하인들이 참외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한즉, 여러 마두들은,

 

도무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외딴집 오이 파는 늙은 것이 본시 간교하기 짝이 없어, 서방님이 홀로 떨어져 오시니까 거짓말을 꾸며 가지고 짐짓 가엾은 꼴상을 지어서 청심환을 얻으려던 것이죠.”

한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닫고, 그 참외 사던 일을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다. 대체 그 갑작스러운 눈물은 어디서 솟았을까. 시대(時大)의 말이,

 

그 놈은 바로 한인(漢人)일 겝니다. 만인(滿人)은 실로 그다지 요악한 짓은 아니합니다.”

한다.

 

 

[D-001]기상새설(欺霜賽雪) : 희기가 서리를 능가하여, 백설을 걸고 내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D-002]미해악체(米海嶽體) : 곧 미불(米芾)의 글씨체. 해악은 호, 원장(元章)은 자임.

[D-003]동 태사(董太史) : 동기창(董其昌). 태사는 그의 벼슬.

[D-004]경직도(耕織圖) : 본시 남송의 누숙(樓璹)이 경도(耕圖) 21과 직도(織圖) 24를 그려서 고종(高宗)에게 바쳤던 것을, () 성조 때에 초병정(焦秉貞)냉매(冷枚)진매(陳枚) 등에게 명하여 각기 한 책씩을 짓게 하였다. 특히 초병정이 그린 경도와 직도 각기 23으로 된 것이 아름다웠으므로, 판각하여 군신(羣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D-005]시대(時大) : ‘일재본에는, 창대(昌大)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인(庚寅)

 

 

개다.

백기보(白旗堡)에서 소백기보(小白旗堡)까지 12, 평방(平房) 6, 일반랍문(一半拉門) 12리인데, 일반랍문은 일판문(一板門)이라고도 한다. 거기서 또 곡산둔(靠山屯) 8, 이도정(二道井) 12, 모두 50리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도정에서 은적사(隱寂寺)까지 8, 고가포(古家舖) 22리다. 여기서 다리[梁路]가 다하다. 다시 고정자(古井子) 1, 십강자(十扛子) 9, 연대(煙臺) 6, 소흑산(小黑山) 4, 모두 5리다. 이날 1백 리를 갔다. 소흑산에서 묵다.

이날은 마침 말복(末伏)이라 늦더위가 더욱 심할 것이고 또 참()이 멀어서 일행이 새벽에 떠났다. 나와 정 비장변 주부가 먼저 떠났다. 길에서 어제 해돋이 광경을 이야기했더니, 두 사람이 꼭 한번 구경하고자 하였으나 막상 해가 뜰 무렵엔 동녘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개지 아니하여 광경이 어제보다 훨씬 못하다. 해가 이미 한 길이나 땅 위에 솟았을 때 그 밑의 구름이 여러 가지 금빛 용이 되어, 뛰고 솟고 꾸불거리고, 뒤눕는 듯, 신출귀몰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데, 해는 다만 천천히 높은 공중으로 향해 오른다.

요양에서부터 조그마한 성과 못을 많이 거쳐 왔으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른바, ‘3리마다 성이요 5리마다 곽()이라.’ 함은, 반드시 모두 군이나 읍의 청소(廳所)가 있음이 아니고, 그저 시골의 취락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제도는 큰 성과 다름이 없다.

일판문과 이도정은 땅이 움푹 파인 곳이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되어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려우므로, 작년 봄에 산서(山西) 장사꾼 20여 명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일판문에 이르러 한꺼번에 빠졌으며, 우리나라 마부 역시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한다. 그리고 당서에 이르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에 수레가 통할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양사도(楊師道 당 고조(唐高祖)의 사위) 등이 군정 1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고 수레를 잇달아 다리를 놓을 제 태종이 말 위에서 손수 나무를 날라서 일을 도왔고, 때마침 눈보라가 심해서 횃불을 밝히고 건넜다.”

하였으니,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 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마치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만일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 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에서 자주 성경으로 거둥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古家舖)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2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物力)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끝이 한 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2백 리 사이에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 그 일솜씨의 정미로움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간에서 항용 쓰는 물건들이라도 이를 본받아서 그 규모가 대체로 같으니, 이는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의 자)가 이른바 중국의 심법(心法)을 우리로선 당하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한 것이리라. 이 다리는 3년 만에 한 번씩 고친다 한다. 그리고 당서의 발착수는 아마 일판문이도정의 사이를 말한 것인 듯싶다.

아골관(鴉鶻關)에서부터 가끔 마을 가운데 높다랗게 흰 패루(牌樓)를 세운 것이 보이는데 이는 초상난 집들이다. 이는 삿자리로 지었는데 기왓골이나 치문(鴟吻)이 여느 성조나 조금도 다름없으며, 높이가 너덧 길이고 그 집 문앞에서 열 걸음쯤 떨어져 세웠는데, 그 밑에는 악공들이 늘어앉아서 풍류를 아뢴다. 바리 한 쌍, 피리 한 쌍, 쇄납(嗩吶) 한 쌍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객이 문에 이르면 요란하게 불고 두드린다. 상식(上食)이나 제전이 시작되자 안에서 곡성이 일면 밖에선 반드시 음악으로 서로 화답하는 듯이 야단들이다. 내가 십강자에 이르러 쉬는 사이에 정()() 둘과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한 삿자리로 만든 패루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제도를 상세히 구경하려 할 즈음에 요란스러운 음악이 시작된다. 둘은 엉겁결에 귀를 막고 도망치고, 나 역시 두 귀가 먹을 것 같아서 손을 흔들어 소리를 멈추라 하여도 영 막무가내로 듣지 않고, 다만 힐끔힐끔 돌아보기만 하고 그냥 불고 두드리고 한다. 나는 상가의 제도가 보고 싶어서 발을 옮겨 대문 앞에 이르니, 문 안에서 한 상주(喪主)가 뛰어나오더니 내 앞에 와 울며 대막대를 내던지고, 두 번 절하는데 엎드릴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설 땐 발을 구르며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창졸에 변을 당했사오니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수없이 울부짖는다. 상주 뒤에 5~6명이 따라 나오는데, 모두 흰 두건을 썼으며 나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문 안으로 들어가니 상주 역시 곡을 멈추고 따라 들어온다. 때마침 건량마두(乾糧馬頭) 이동(二同)이 안으로부터 나오기에, 나는 하도 반가워서 엉겁결에,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니, 이동은,

 

소인은 죽은 사람과 동갑이라서 본시 서로 친절하게 지냈습니다. 그래 아까 들어와서 그 처를 조문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한다. 나는,

 

조문례를 어떻게 하는 거야.”

한즉, 이동은,

 

상주의 손목을 잡고 너의 어른이 돌아가셨다지야 할 뿐입니다.”

하고, 이동 역시 나를 따라 다시 들어오면서,

 

백지(白紙) 권이나 주지 않으면 안 되오니 쇤네가 마련해 드리오리다.”

한다. () 앞에 삿자리로 큰 집을 세웠는데 그 제도가 매우 이상스러우며, 뜰에는 흰 베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내외(內外) 복인들을 따로 나누어 두었다. 이동은,

 

주인이 주과 대접을 하오리니 좀 지체하시고 너무 빨리 일어나시지 마십시오. 만일 자시지 않으면 큰 수치랍니다.”

한다. 나는,

 

이왕 들어왔으니 이것 역시 봄직하다만, 상주가 조문을 받으려면 너무 괴롭겠구나.”

하니, 이동은,

 

아까 벌써 조문은 끝났사오니 다시 조문하실 것 없습니다.”

하고, 이내 삿자리집을 가리키며,

 

이게 빈소(殯所)올시다. 남녀가 모두 집을 비우고 이 빈소로 옮겨 옵니다. 그리고 포장 속에 각기 기()()의 복제(服制)를 따라 장소가 마련되었으며, 장사를 치른 뒤에 제마다 돌아간답니다.”

한다. 포장 속에서 한 여인이 가끔 머리를 내밀고 엿보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고 제법 자태가 흐른다. 이동은,

 

저 이는 죽은 이의 딸이온데,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부상의 아내랍니다.”

하고, 말해 준다. 이윽고 상주가 빈소에서 나와 걸상에 나앉고, 흰 두건을 쓴 사람 둘이 국수 두 그릇, 과실 한 쟁반, 두부 한 소반, 채소 한 쟁반, 차 두 잔, 술 한 주전자를 탁자 위에 벌여 놓고, 내 앞에 빈 잔 세 개를 놓으며 탁자 저편엔 빈 의자를 가져 오고, 잔 세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는 이동더러 앉기를 청한다. 이동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의 상전이 계신데 어찌 감히 마주 앉을 수 있으리까.”

하고, 곧 밖으로 나가더니 백지 한 권과 돈 일초(一鈔)를 갖고 들어와서 상주 앞에 놓고 내가 부의(賻儀)하는 뜻을 말하니, 상주가 걸상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사례한다. 나는 대충 음복하는 시늉만 하고 곧 일어나 나오니, 상주가 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한다. 문 앞 양쪽 상랑(廂廊)에서는 방금 대말을 만들어 종이로 옷을 입히고 있다. 이윽고 사행이 이곳에 와서 쉬고, 부사도 잇따라 이르러 길가에 가마를 내렸다. 내가 아까 조상하던 이야기를 하니 모두 허리를 잡고 웃는다.

이도정은 마을이 꽤 번화롭다. 은적사는 굉장한 절인데 많이 헐었다. ()에는 조선 사람 시주(施主) 성명들이 새겨졌는데, 이는 모두 의주 상인인 것 같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보이는데, 멀리 서북을 가로지른 것이 마치 푸른 장막을 드리운 것 같고, 뫼 봉우리가 오히려 보일락말락한다. 혼하를 건넌 뒤로 무릇 다섯 번 강을 건넜는데 모두 배로 건넜다. 연대(煙臺)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리마다 대()가 하나씩 있는데, 원경(圓徑) 10여 장이요, 높이가 대여섯 발이며, 쌓은 제도가 성과 다름이 없고, 그 위엔 총구멍을 뚫고 여장(女墻 성 위에 또 쌓은 담장)을 둘렀다. 남궁(南宮) 척계광(戚繼光)이 만들었다는 팔백망(八百望)이 곧 이것이다. 소흑산은 들 가운데 민 듯이 편평하며, 조금 불룩하고 주먹처럼 생긴 작은 산이라 하여 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인가가 즐비하고 점포가 번화한 품이 신민둔보다 못지 않고, 푸른 들 가운데 말노새양 수천백 마리가 떼를 지어 있으니, 역시 큰 곳이라 이를 수밖에 없다. 일행 하인들이 으레 이 소흑산에서 돼지를 삶아서 서로 위로하므로 장복창대 역시 밤에 가서 얻어먹겠다고 여쭙는다.

이날 밤 달빛이 낮같이 밝고 더위는 이미 한물 간 모양이다. 저녁 식사 후에 곧 밖으로 나가서 아득히 먼 들판을 바라보니, 푸른 내는 땅에 깔리고 소와 양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점방들은 아직 모두 문을 닫지 않았으므로 그 중 한 집에 들어가니, 뜰 가운데 시렁을 높이 매고 삿자리로 덮어 두었다가 밑에서 끈을 당기면 걷히어서 달빛을 받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화초가 달빛 아래 얽히어 있다. 길에서 놀던 사람들이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들어와서 뜰에 가득하다. 다시 일각문을 들어서니 뜰 넓이가 앞 뜰과 같고, 난간 아래 몇 그루 푸른 파초가 심겨 있으며, 네 사람이 탁자를 가운데 놓고 삥 둘러앉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탁자를 차지하고 신추경상(新秋慶賞)’이란 넉 자를 쓴다. 자줏빛 먹 붉으레한 종이 위에 흰 달빛이 비끼어서 똑똑히 보이지는 않으나, 붓놀림이 매우 간삽하여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루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 필법을 보매 저토록 옹졸하니, 내가 정작 한번 뽐낼 때로구나.’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글씨를 다투어가면서 구경하고, 곧 당 앞 한가운데 문설주 위에 붙였으니, 이는 대개 달 구경에 축하하는 방문(榜文)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일어나 당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 구경을 한다. 아직 탁자 위엔 남은 종이가 있기에 내가 걸상에 가 앉아서 남은 먹을 진하게 묻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커다랗게 신추경상(新秋慶賞)’이라 써 갈겼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뭇 사람들에게 소리쳐 모두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서로 웃고 떠들며,

 

조선 사람이 글씨 참 잘 쓰네.”

하기도 하고, 혹은,

 

동이(東夷)도 글씨가 우리와 같네.”

하고, 혹은,

 

글자는 같지만 음은 다르다네.”

한다. 나는 붓을 처억 던지고 일어섰다. 여럿이 내 손목을 잡으면서,

 

영감은 잠깐만 앉으셔요. 존함은 뉘시오니까?”

하기에, 내가 성명을 써 보이니 그들은 더욱 기뻐한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때엔 반가워하지 아니할뿐더러 본체만체 하더니, 이제 내 글씨를 본 뒤에 그 기색을 살펴보매 너무 분에 지나치게 반기면서 급히 차 한 잔을 내오고, 또 담배를 붙여 권한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염량(炎凉)이 달라진다. 그들은 모두 태원(太原) 분진(汾晉)에 사는 사람으로, 지난해에 이곳에 와서 수식포(首飾舖)를 갓 열었는데, ()비녀귀걸이가락지[彄環] 등속을 사들이고 가게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 한다. 그 중 셋은 성이 최(), 둘은 유()()인데 모두 문필(文筆)이 극히 짧아서 말할 것도 없으나, 곽생(霍生)이 가장 나아 보인다. 다섯 사람이 다 나이 서른 남짓하고 호건하기가 마치 노새 같으며, 얼굴들은 모두 희멁고 눈매가 서늘하나 맑고 아담한 기는 전혀 없다. 요전 오()()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 지방 풍토의 같지 아니함을 이로써 넉넉히 알 수 있으며, 산서에서 장수[]가 잘 난다더니 과연 빈 말이 아닌 듯싶다. 나는 곽생에게,

 

당신이 태원에 살고 계시다니, 귀향(貴鄕) 곽태봉(郭泰峰), 아호는 금납(錦衲)이란 어른을 아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곽생은,

 

모릅니다.”

하고는, 이내 곽()과 곽()의 두 글자에다 점을 치면서,

 

이는 곽 태조(郭太祖 후주(後周)의 태조 곽위(郭威))의 곽() 자요, 나는 곽거병(霍去病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의 곽() 자입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왜 분양(汾陽)박륙(博陸)을 끌어 오지 않고, 하필이면 주 태조나 표요(驃姚)로써 증명하시오.”

한즉, 곽생이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아마 제 생각엔 내가 만인들처럼 곽()()을 혼용할까 보아서 이렇게 밝히는 듯싶다. 곽생은,

 

등주(登州)에서 뭍에 내리셨으면 어찌해서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바꾼다. 나는,

 

아니, 거기로 오지 않았소. 육로 3천 리로 바로 북경까지 대어가는 길이오.”

하니, 곽생은,

 

조선은 곧 일본(日本)과 같습니까?”

한다. 마침 한 사람이 붉은 종이를 가지고 와서 글씨를 써 달라 하고는 저의 아는 사람끼리 몰려와서 모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내가,

 

붉은 종이엔 글씨가 잘 되지 않으니 계란빛 종이를 가져 오시오.”

하니, 한 사람이 바삐 가더니 분지(粉紙) 몇 장을 가져 왔다. 나는 그것을 끊어서 주련(柱聯)을 만들어,

 

옹은 산과 숲을 즐기노니 / 翁之樂者山林也

객도 물과 달을 아시나요 / 客亦知否水月乎

라 썼더니, 그제야 여러 사람들이 좋아라고 환성을 지른다. 서로 다투어 먹을 갈고 왔다갔다 분주하니 모두 종이를 구하느라고 그러는 모양이다. 나는 이에 종이를 펴고 쓰며 쉴새 없이 붓을 달리기를 마치 소지(所志)에 제사(題辭 고소장)를 쓰듯 하니, 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영감은 술을 자실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한 잔 술이야 어찌 사양하리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크게 한바탕 웃고 곧 따끈한 술 한 주전자를 가져 와서 연거푸 석 잔을 권한다. 나는,

 

주인은 어찌 아니 마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하나도 먹을 줄 아는 이가 없소이다.”

한다. 이에 모여 구경하던 이들이 서로 능금과 사과와 포도 등을 가져다 내게 권한다. 나는,

 

달빛이 비록 밝다 해도 글씨 쓰기엔 방해가 되니 촛불을 켜는 게 좋겠소.”

하니, 곽생은,

 

하늘 위에 저 한 조각 거울이 달렸으니 이 세상에 천만 개의 등불보다 낫지 않소이까.”

하고, 한 사람은,

 

영감, 눈이 좋지 못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그렇소.”

하니, 곧 네 가지 촛불을 밝혀 준다. 나는 갑자기 생각하기를,

 

어제 전당포에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썼는데 주인이 왜 갑자기 좋아하지 않았는지 오늘은 단연코 그 설치를 해 보렸다.”

하고, 곧 주인더러,

 

주인댁에서는 점포 머리에 달 만한 액자(額字)가 어떨까요?”

하니, 그들은 일제히,

 

이것이야말로 더욱 좋겠습니다.”

한다. 내가 드디어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써 놓은즉, 여럿이 서로 쳐다보는 품이 어제 전당포 주인 기색과 한가지로 수상스럽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 또 이상스러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또,

 

이건 아무런 상관없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렇습니다.”

한다. 곽생은,

 

저의 집에선 오로지 부인네들 수식을 매매하옵고 국숫집은 아니옵니다.”

한다. 나는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전에 한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애오라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이오.”

하여 얼버무리고 나서, 전일 요양 점포에서 본 계명부가(鷄鳴副珈 닭이 울자 수식을 갖춤)’라는 금자로 쓴 간판이 퍼뜩 생각나기에, 이와 그와는 한가지일 듯싶어서 이에 부가당(副珈堂)’이란 석 자를 써 주었더니, 그들이 소리치며 좋아해 마지않는다. 곽생은,

 

이게 무슨 뜻이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제 귀댁에선 부인네들의 수식을 전문으로 한다 하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부계육가(副笄六珈)란 곧 이것이오.”

하니, 곽생은,

 

저의 집을 빛내주신 그 은덕을 무엇으로 갚아 드리리까.”

하고, 사례한다. 다음날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기로 되었으므로 일찍 돌아와서 일행 여러 사람에게 아까 일을 이야기하니 허리를 잡지 않은 이가 없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반드시 국숫집이로구나 하였다. 이는 그 심지의 밝고 깨끗함을 이름이 아니요, 실로 그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함이다. 여기서 면발[]이란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말(眞末)’이다. 청여계함, 조 주부 달동과 함께 다음날 북진묘에 가기로 약속했다.

 

 

[D-001]연대(煙臺) : 옛날의 통신 기관으로, 봉화를 놓던 축대.

[D-002]3리마다 …… ()이라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D-003]장손무기(長孫無忌) : 당의 명신. 태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저수량(褚遂良)과 함께 고종(高宗)을 섬겼다.

[D-004]치문(鴟吻) : 큰 전각 같은 지붕의 용마루 끝에 장식하는 물형.

[D-005]쇄납(嗩吶) : 애초에 회족(回族)이 사용하던 것인데, 본명은 소랄(蘇㖠) 또는 쇄랄(瑣㖠).

[D-006]상식(上食) : 초상집에서 조석으로 음식을 영좌에 차려 놓는 것이다.

[D-007]제법 …… 흐른다 : 이 한 구절은 일재본에만 있는 것을 추록하였다.

[D-008]척계광(戚繼光) : 명말(明末)의 저명한 군사가요, 학자. 남궁은 그의 호. 기효신서(紀效新書),이융요략(莅戎要略) 등의 저서가 있다.

[D-009]분양(汾陽) : 당의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한 명장 곽자의(郭子儀). 분양은 봉호.

[D-010]박륙(博陸) : 곽거병의 이모제(異母弟) 곽광(霍光). 박륙은 봉호.

[D-011]표요(驃姚) : 곽거병이 일찍이 표요 교위(驃姚校尉)를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D-012]옹은 …… 아시나요 : 앞 구절은 구양수(歐陽脩)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뒷 구절은 소식(蘇軾) 적벽부(赤壁賦)에서 각기 따왔다.

[D-013]부계육가(副笄六珈) : 비녀에 뒤이어서 온갖 수식을 꽂는다는 뜻.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성자사(聖慈寺)는 숭덕(崇德 청 태종(靑太宗)의 연호) 2년 무인(戊寅)에 세웠다. 전각은 깊숙하고도 장려(壯麗)하다. 법당은 돈대 높이가 한 길, 두루 돌난간을 세우고, 전각 위엔 부시(罘罳)로 둘러싸고, 세 그루 늙은 소나무 가지가 서로 엉켜서 푸른 그림자가 뜰에 가득하여 어둠침침한 빛이 고요한 속에 잠겨 있다. 비석 둘이 있는데, 하나는 태학사(太學士) 강림(剛林)이 지은 글로 뒷면엔 만주글이고, 또 하나는 앞뒷면이 모두 몽고 서번(西番)의 글자이다. 지키는 중들 중에는 라마(喇麻) 중 몇 명이 있고, 전 속엔 8백 나한(羅漢)이 있는데, 키가 겨우 몇 치씩밖에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가 모두 정묘하다. 강희 황제가 손수 작은 탑 수백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주사위만하고, 그 아로새긴 솜씨가 기묘하여 신경(神境)에 들어갔고 탑 높이가 10여 길인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났으며 사자를 새기었다.

만수사(萬壽寺)는 강희(康熙) 55년 병신(丙申)에 중수하였다. 절 앞에 패루 하나가 있는데, 현판에는 만세무강(萬歲無彊)’이라 하였고, 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는 성자사를 능가하나 다만 뜰에 가득한 소나무 그늘이 없었다. 비석 둘이 있으며 정전(正殿)에는 강희황제가 쓴 요해자운(遼海慈雲)’이란 액자가 붙어 있고, 향정(香鼎)이며, 보로(寶爐), 그 밖에도 보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겠다. 라마 중 10여 명이 있는데,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벙거지를 썼으며 사납고 헌칠해 보인다.

실승사(實勝寺)는 현판에 연화정토(蓮花淨土)라 하였고, 숭덕 3년에 세웠다. 지붕 위엔 모두 푸르고 누런 유리기와로 이었다. 이는 청 태종(淸太宗)의 원당(願堂)이다.

 

 

[C-001]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부시(罘罳) : 큰 건물에서 참새가 들어 보금자리 트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물 같은 것으로 처마 밑을 둘러친 것.

[D-002]서번(西番) : 서장(西藏)을 비롯하여 중국 아시아 등지 서역의 모든 국가의 총칭.

[D-003]라마(喇麻) : 몽고서장 등지에서 성행하는 불교의 한 종파.

[D-004]병신(丙申) : ‘박영철본에는 병술(丙戌)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5]실승사(實勝寺) : ‘일재본에는 보승사(寶勝寺)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산천기략(山川記略)

 

주필산(駐蹕山)은 요양의 서남에 있다. 애초 이름은 수산(首山)이더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 이 산 위에 며칠 머물면서 돌에 그 공덕을 새기고 주필산이라 이름을 고쳤다.

개운산(開運山)은 봉천부(奉天府) 서북에 있다. 여러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많은 물의 근원이 거기서 나온다. 곧 청()의 영릉(永陵)이다.

철배산(鐵背山)은 봉천부 서북에 있다. 그 위엔 계()() 두 성이 있다 한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承德縣) 동쪽에 있다. 곧 청의 복릉(福陵 청 태조의 능)이 있는 곳이다. 진사(晉史)에 이른바 동모산(東牟山)이 곧 이것이다.

융업산(隆業山)은 승덕현 서북에 있다. 여기에는 청()의 소릉(昭陵 청 태종의 능)이 있다 한다.

십삼산(十三山)은 금주부(錦州府) 동쪽에 있다. 봉우리가 열 셋이 있으므로 채규(蔡珪)의 시에,

 

여산이 다한 곳에 다시금 열세 봉우리 / 閭山盡處十三山

갯마을 집집마다 그림 사이 보이누나 / 溪曲人家畵幅間

라고 하였다.

발해(渤海)는 봉천부 남쪽에 있다. 성경통지(盛京統志)에 이르기를,

 

바다의 옆으로 나간 줄기를 발()이라 한다.”

하였다. 요동 2천 리 벌이 뻗쳤는데 그 남쪽이 곧 발해이다.

요하(遼河)는 승덕현의 서쪽에 있다. 곧 구려하(句驪河)인데 혹은 구류하(枸柳河)라고도 한다. 한서(漢書) 수경(水經)에는 모두 대요수(大遼水)라 하였다. 요수의 좌우가 곧 요동요서의 갈리는 경계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渾河)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 소요수(小遼水), 혹은 아리강(阿利江)이라 하고, 또는 헌우록수(軒芋濼水)라고도 한다.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太子河)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변문(邊門) 밖 영길주(永吉州)에서 발원하여 변문 안으로 흘러들어 혼하요하와 합쳐 삼차하(三叉河)가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 태자(燕太子) ()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한다. 소심수(小瀋水)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동관(東關) 관음각(觀音閣)에서 발원하여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이라 하므로 심양(瀋陽)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내가 이제 지나온 산하는 다만 그 지방 사람들의 구전(口傳)하는 말과, 또 길가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였을뿐더러 자주 다니는 우리 하인들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대체로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것이어서 도무지 상세하지 않다. 화표주는 요동의 고적인데, 그나마 어떤 이는 성 안에 있다 하고 혹은 성 밖 10리에 있다 하니, 다른 것도 이를 미루어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C-001]산천기략(山川記略)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영릉(永陵) : 청 태조의 부조(父祖) 4대의 능이 있다.

[D-002]진사(晉史) : 당 태종의 명찬인 진서(晉書)를 이름인 듯하다.

[D-003]채규(蔡珪) : ()의 학자. 자는 정보(正甫).

[D-004]성경통지(盛京統志) :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다른 본에는 성경통지(盛京通志)로 되었다.

[D-005]수경(水經) : 당서(唐書) 중에 있는 상흠(桑欽)이 지은 서명.

[D-006]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 다른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있으므로 이를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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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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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 27리다.

 

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 62리다.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40리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경개록(傾蓋錄)

경개록(傾蓋錄)

 

심세편(審勢編)

심세편(審勢編)

 

망양록(忘羊錄)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혹정필담(鵠汀筆談)

 

찰십륜포(札什倫布)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

황교문답(黃敎問答)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피서록보(避暑錄補)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시화(楊梅詩話)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銅蘭涉筆)

 

옥갑야화(玉匣夜話)

옥갑야화(玉匣夜話)

 

행재잡록(行在雜錄)

행재잡록(行在雜錄)

 

금료소초(金蓼小抄)

금료소초(金蓼小抄)

 

환희기(幻戲記)

환희기(幻戲記)

 

산장잡기(山莊雜記)

산장잡기(山莊雜記)

 

구외이문(口外異聞)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앙엽기(盎葉記)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내 일찍이 시험삼아 논하여 보았노라.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서 언급한 물건으로서 용이니, 말이니, 사슴이니, 돼지니, 소니, 양이니, 범이니, 여우니, 또는 쥐니, 꿩이니, 독수리니, 거북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참으로 있었던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진 못할 것이다.

 

또 인간에 있어서는 저 웃는 자, 우는 자, 부르짖는 자, 노래부르는 자나, 또는 눈먼 자, 발저는 자, 엉덩이에 살이 없는 자, 그 척추의 고기가 벌어진 자 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런 인간이 참으로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蓍草)를 뽑아서 괘()를 벌이면, 그 참된 상()이 곧 나타나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내는 경지로 지향하는 까닭이었으니, 우언(寓言)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춘추중에 기록된 2 42년 사이의 일에는, 온갖 제사와 수렵(狩獵)과 조회와 회합과 정벌(征伐)과 침입이, 실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구명(左丘明)공양고(公羊高)곡량적(穀梁赤)추덕보(鄒德溥)협씨(夾氏) 등의 전()이 제각기 같지 않을 뿐더러, 이를 논하는 자들이 남이 반박하면 나는 지키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는 드러난 곳에서부터 미묘한 곳으로 드는 까닭이었으니, 외전(外傳)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 “장주(莊周)가 저서에 능하다.”고 일렀던 것이다. 장주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나, 임금과 정승, 처사(處士)와 변객(辯客) 들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正史)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 ()이나 윤() ()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부묵자(副墨子)니 낙송손(洛誦孫)이니 하는 자는 어떤 인물들이었던가. 또 망량(罔兩 물귀신)이니 하백(河伯 물귀신)이니 하는 귀신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사람으로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조궤(弔詭 궤변(詭辯))라 불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설을 결국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저서가(著書家)로서의 웅()이 아니라 이르진 못할 것이다.

 

이제 대체로 연암씨(燕巖氏)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알지 못하겠다. 그 어떠한 글이었던고. 저 요동(遼東) 들을 건너서 유관(渝關)으로 들어 황금대(黃金臺) 옛 터에 서성이고, 밀운성(密雲城 하북성에 있다)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를 나서 난수(灤水) []와 백단(白檀 밀운성의 현())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으며, 또 그 나라의 석학(碩學)운사(韻士)와 함께 교제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인물이 있었으며, 사이(四夷)가 모두 이상한 모양과 기괴한 옷에 칼도 머금고 불도 마시며, 황교(黃敎) 반선(班禪)의 난쟁이가 비록 괴이한 듯하지마는 그가 반드시 망량이나 하백은 아닐 것이요, 진귀한 새나 기이한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이상한 나무의 그 정태(情態)를 곡진히 묘사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어찌 일찍이 그 등마루의 길이가 천 리라느니, 그 나이가 8천 세라느니 하는 따위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C-001]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 다른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서()가 보이지 않고, 다만 최근에 발견된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추가하였다.

[D-001]우언(寓言) : 말이나 글에 실제가 아닌 뜻을 의탁한 것이니, 장주(莊周) 남화경(南華經) 중에 우언편(寓言篇)이 있다.

[D-002]외전(外傳) : 정사(正史)에 싣지 않은 전기를 내전(內傳)과 구별하기 위한 서술이니,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 이에 해당한다.

[D-003]시초(蓍草) : ()를 뽑는 데 쓰는 영초(靈草).

[D-004]회린(悔吝) : ()는 괘()의 상체(上體), ()은 인색(吝嗇)함이니, 곤괘(坤卦)에서 나타난 효상(爻象)의 하나.

[D-005]좌구명(左丘明) : 춘추 때 노()의 태사(太史).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D-006]공양고(公羊高) : 춘추 때 자하(子夏)의 제자. 역시 춘추전을 지었다.

[D-007]곡량적(穀梁赤) : 역시 자하의 제자로서 춘추전을 지었다.

[D-008]추덕보(鄒德溥) : ()의 학자. 덕함(德涵)의 아우.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었다.

[D-009]장주(莊周) : 춘추 시대의 철학가(哲學家). 저서에는 남화경(南華經)이 있다.

[D-010]() () : 옛 장인(匠人). ()은 그의 이름.

[D-011]() () : 옛 수레바퀴를 만드는 공인. ()은 그의 이름.

[D-012]부묵자(副墨子) …… 하는 자 : 문자(文字)에 대한 의인칭(擬人稱)이니, 남화경 대종사(大宗師), “나는 부묵자에게 들었고, 부묵자는 또 낙송손(洛誦孫)에게 들었노라.” 하였다. 낙송은 반복(反復)하여 외는 것을 이름이니, 역시 의인칭이다.

[D-013]연암씨(燕巖氏) : 저자 연암을 일컫는 말.

[D-014]유관(渝關)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

[D-015]황금대(黃金臺) :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춘추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세웠다.

[D-016]고북구(古北口) : 하북성에 있는 관() 이름. 곧 호북구(虎北口).

[D-017]난수(灤水) : 찰합이(察哈爾)에서 발원하여 열하성(熱河省)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D-018]사이(四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을 말한다.

[D-019]황교(黃敎) : 서장(西藏) 라마교(喇嘛敎)의 한 파. 그 교의 중들이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름하였다.

[D-020]반선(班禪) : 황교 즉 라마교의 교주(敎主). ()은 박학(博學)이요, ()은 광대(廣大)의 뜻을 가졌다.

[D-021] …… 천 리라느니 : 남화경에 새 위나 대붕(大鵬)의 등마루가 천 리나 된다 하였다.

[D-022] …… 8천 세라느니 : 남화경에 이른바 영춘(靈椿) 8천 년을 묵었다 하였다.

[D-023]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진의 임금. 문공은 시호요, 이름은 중이(重耳), 당시 오패(五覇)의 하나.

[D-024]제 환공(齊桓公) : 춘추 시대 제의 임금. 환공은 시호요, 이름은 소백(小白)이니, 역시 오패의 하나.

[D-025]이용(利用)후생(厚生) : 정덕(正德)과 함께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이른바 삼사(三事)가 된다.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1. 도강록 서(渡江錄序)

2. 6 24일 신미(辛未)

3. 25일 임신(壬申)

4. 26일 계유(癸酉)

5. 27일 갑술(甲戌)

6. 28일 을해(乙亥)

7. 29일 병자(丙子)

8. 7 1일 정축(丁丑)

9. 2일 무인(戊寅)

10. 3일 기묘(己卯)

11. 4일 경진(庚辰)

12. 5일 신사(辛巳)

13. 6일 임오(壬午)

14. 7일 계미(癸未)

15. 8일 갑신(甲申)

16. 구요동기(舊遼東記)

17. 관제묘기(關帝廟記)

18.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19. 광우사기(廣祐寺記)

20. 9일 을유(乙酉)

 

 

 

도강록 서(渡江錄序)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年號)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황명(皇明)은 중화인데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 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年號)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에 열상외사(洌上外史)는 쓰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 4(1780) 청 건륭(淸乾隆) 45년 이다.

 

 

[C-001]도강록 서(渡江錄序) : 연암의 수택본(手澤本)’에는 열하일기 (熱河日記) ()라 하여 열하일기 첫머리에 두었으나 그릇되었다.

[D-001]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 명의 최후 황제로서, 1635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D-002]열상외사(洌上外史) : 연암의 별호(別號). ‘수택본에는 열상외수(洌上外叟)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역원(譯員)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灣尹]이재학(李在學) 역시 비장(裨將 사신에게 시중드는 관원)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狀啓)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梳灑)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家書)와 모든 곳의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把撥)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銀花)운월(雲月)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紡紗紬) 전대(纏帶)를 두르고 환도(環刀)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 중에 노 참봉(盧參奉) 이름은 이점(以漸), 상방(上房) 비장 은 첩리(帖裏) 첩리는 방언(方言)으로 철릭[天翼]이라 한다. 비장은 우리 국경 안에서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협수(狹袖)로 바꿔 입는다. 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鄭進士) 이름은 각(), 상방 비장 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이야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관()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한 생각을 품어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雲山)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퇴할 의사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 2품 당상관 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昌大 연암의 마부(馬夫) 이름)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張福 연암의 하인 이름)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성문(城門)에 못 미쳐 소나기 한 줄기가 동에서 몰려든다. 이에 말을 급히 달려 성 문턱에서 내렸다. 홀로 걸어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밑을 굽어 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뵈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一角門)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 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갖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

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龍灣)철산(鐵山)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담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무더운 구름이 잠깐 피어 오르고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 한 봉우리가 갑자기 그 반쪽을 드러냈는데, 그 빛이 하도 푸르러서 흡사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에서 불일산(佛日山) 뒷봉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홍분루 높은 다락 막수 아씨 여의고는 / 紅粉樓中別莫愁

두어 기마 가을 바람에 변방을 달리었네 / 秋風數騎出邊頭

그림배에 실은 퉁소 장고 어이하여 소식 없나 / 畵船簫鼓無消息

애끊고 추억할 제 우리 청남 첫째 골을 / 腸斷淸南第一州

이 시는 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가 일찍이 심양(瀋陽봉천(奉天))으로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내 이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이건 국경을 넘는 이가 부질없이 무료한 정서를 읊은 것이겠지. 제 이곳에서 무슨 그림배퉁소장고 따위를 얻어서 놀이를 했단 말인가.”

하고,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에 형경(荊卿)이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太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同志) 한 분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재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불칙한 진()에 들어가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오.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으로 애오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니,  멀리라는 말이 참 교묘한 칭탁이다.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것이요, 그 약속이란 천하에 다시 변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떠남을 당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으리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삼진(三晉)의 먼 곳이 아닐 것이요, 또 반드시 이 날로써 진으로 들어가기를 기약하여 손잡고 맹세한 일도 없는 듯싶다. 다만 형경이 의중(意中)에 문득 생각나는 어떤 벗을 기다린다 하였을 따름이어늘, 이 글을 적은 이는 또한 형경의 의중(意中)의 벗을 이끌어다가 그 사람하고는 부연 설명하였으나,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함을 말함이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서 막연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이라 하여 형경을 위로함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시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릴까 저어하여 그가 오지 못할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형경을 위하여 그 사람이 오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긴 것이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이미 그를 보았을 것이다. 응당 그 사람의 키는 일곱 자 두 치, 짙은 눈썹에 검은 수염, 볼이 처지고 이마가 날카로웠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줄 알리오마는 이제 내 혜풍(惠風)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안 것이다. 혜풍(惠風)의 이름은 득공(得恭)이요, 호는 영재(泠齋).

정사(正使)의 전배(前排)기치(旗幟)와 곤봉(棍棒) 따위를 앞에 세웠으므로 전배라 한다. 가 설렁이면서 성을 나서니, 내원(來源)과 주 주부(周主簿) 내원(來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 주 주부(周主簿)의 이름은 명신(命新)인데,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가 두 줄로 서서 간다. 채찍을 옆에 끼고 몸을 솟구어 안장에 올라 앉으매 어깨가 으쓱하고 머리가 꼿꼿한 품이 미상불 날쌔고 용맹스럽긴 하나, 부대 차림이 너무 너털거리고,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어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조금 뒤에, 부사(副使)의 행차가 성에 나감을 기다려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하여 가장 뒤떨어져 구룡정(九龍亭)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만윤(灣尹)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서장관(書狀官)이 맑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만윤과 함께 합동 수사함이 전례이다. 방금 사람과 말을 사열(査閱)하는데, 사람은 성명거주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금물을 뒤지니, 중요품으로 황금(黃金)진주(眞珠)인삼(人蔘)초피(貂皮 수달피)와 포() 이외에 남은(濫銀)이었고, 영세품(零細品)은 새 것이나 옛 것을 통틀어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구종들에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지 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 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다 보곤 한다. 대체 수색을 아니하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용만의 장수들은 이 수색보다 앞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는 걸 누구로서 금할 재간이 있으리오. 금물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 걸린 자는 중곤(重棍)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뭇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이번 길에는 원포(原包)조차 반도 차지 못하고 빈 포도 많으니 남은의 있고 없음이야 따질 것도 없었다.

다담상(茶啖床 교자상)은 초라하고 그나마 들어오자 곧 물려 내니 대체 강 건너기에 바빠서 젓갈을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마치 한강(漢江)의 나룻배와 비슷하되 조금 클 뿐이다. 먼저 방물(方物)과 인마를 건네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表咨文 국서(國書))과 수역(首譯역관 중의 수석)을 비롯하여 상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 배에 탔다.

이에 용만의 이교(吏校)방기(房妓)통인(通引)과 평양에서 모시고 온 영리(營吏)계서(啓書)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한다. 상사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 의 창알(唱謁) 소리가 채 마치지 못해서 사공이 삿대를 들어 선뜻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수역(首譯) 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응당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倫理)와 만물의 법칙(法則)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 글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道心)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幾何學)에 있어서 한 획의 선()들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였은즉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佛氏)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의 자산(子産)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마치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뵈지 않는다. 하인들이 다투어 언덕에 내려가서 갈대를 꺾고 빨리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서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또 검은 진흙이 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건너간 사람과 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다들,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

 

방물은 어디 있어.”

해도 역시,

 

모르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멀리 구룡정 모래톱을 가리키면서,

 

우리 일행의 인마가 아직도 거지반 건너지 못하고 저기 개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곧 그들인 것 같습니다.”

한다. 멀리 용만쪽을 바라보매 한 조각으로는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 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그리로 쬐는 햇살이 마치 한 점 샛별 같아 뵌다.

이때 커다란 뗏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온다. 시대(時大 상사 마두(馬頭)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대체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 위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朝貢)을 바치려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시대는 또,

 

너희들은 어느 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어디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냐.”

하고 묻는다. 그는 답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봉황성(鳳凰城)에 사는데, 시방 장백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요.”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뗏목은 어느 새 까마득히 가버렸다.

이 즈음에 두 갈래 강물이 한데 어울려서 중간에 한 섬이 이룩되었다. 먼저 건너간 사람과 말들은 잘못 여기에 내렸으니, 그 거리는 비록 5리밖에 되지 않으나 배가 없어서 다시 건너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에 사공에게 엄명을 내려서 배 두 척을 불러 재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였으나, 사공은,

 

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배로 올라감은 아마 하루 이틀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사신들이 모두 홧증을 내어 배 일을 맡은 용만의 군교(軍校)를 벌하고자 하였으나 딱하게도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가 없다. 알아본 즉 군뢰 역시 먼저 건너 잘못 중간 섬에 내렸기 때문이다. 부사의 비장 이서귀(李瑞龜)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마두(馬頭)를 호통하여 용만 군교를 잡아들였으나, 그 놈을 엎을 자리가 없으므로 볼기를 반만 까고 말 채찍으로 네댓 번 때리며 끌어내어서 빨리 거행하라고 호통한다. 용만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쥐고 또 한 손으론 고의춤을 잡으면서 연방,

 

예에, 예이

하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배 두 척을 내어 사공이 물에 들어서서 배를 끌었으나, 워낙 물살이 세어서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 가량 후퇴하고 만다. 아무리 호통한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다.

이윽고 배 한 척이 강 기슭을 타고 나는 듯이 빨리 내려오니 이는 군뢰가 서장관의 가마와 말을 거느리고 오는 건데, 장복이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구나.”

하니, 기뻐하는 말이다. 이에 두 놈을 시켜서 행장을 점검해 보니 모두 탈이 없으나, 다만 비장과 역관이 타던 말이 혹은 오고 더러는 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사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군뢰 한 쌍이 말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또 한 쌍은 보행으로 앞을 인도하되 버스럭거리면서 갈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말 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三江)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배 두 척이 보이는데, 꼴이 마치 우리나라 놀잇배와 비슷하나 길이나 넓이는 그만 못하되 제도는 퍽 튼튼하고도 치밀한 편이다. 배 부리는 이는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노라고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대체 이 강은 너나없이 서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나, 우리나라의 역학(譯學 역관들의 관계 사업)이나 중국 외교 문서가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 장군(鳳城將軍봉황성에 주둔한 중국측 장수)이 이에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배 닿는 곳이 몹시 질척질척하다. 나는,

 

웨이.”

하고는 한 되놈을 불렀다. 이는 아까 시대한테서 겨우 배운 말이다. 그 자가 냉큼 상앗대를 놓고 이리로 오므로 나는 얼른 몸을 솟구쳐 그 등에 업히니, 그 자는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배에 들여다 놓고 후유하고 긴 숨을 내뿜으면서,

 

흑선풍(黑旋風) 어머니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한다. 주부(主簿) 조명회(趙明會)가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저 무식한 놈이 강혁(江革)은 몰라도 이규(李逵)는 어찌 알았던고.”

했더니, 조군(趙君),

 

그 말 가운데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에 이규의 어머니가 이렇게 무겁다면 비록 이규의 신력(神力)으로도 등에 업은 채 높은 재를 넘지 못했으리라는 의미였고, 또 이규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그는 이렇게 살집이 좋은 분을 만일 저 주린 호랑이에게 주었다면 오죽 좋으랴 하는 의미죠.”

하고, 설명해 준다. 나는

 

제 따위들이 어찌 이처럼 유식한 문자를 쓸 줄 안단 말이오.”

했다. 조군은,

 

옛 말에 눈을 부릅떠도 고무래정() 자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저런 놈 따위를 두고 이름이었건마는, 그는 패관(稗官) 기서(奇書)를 입에 담아둔 상용어(常用語)로 쓰는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관화(官話)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이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은 푸른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 놓았다. 의주의 창군(鎗軍)이 가는 곳마다 나무를 찍어서 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온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판국이 툭 트이고,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그 속에 은은히 큰 부락들이 자리 잡고 개와 닭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하기에도 알맞을 것 같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편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의당히 이곳이 거진(巨鎭)이나 웅부(雄府)를 설치함직하거늘, 너나없이 이를 버려두어 아직까지 공지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고구려 때에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이다. () 때에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더니, 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매 진강 사람들이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혹은 모문룡(毛文龍)에게 가고 혹은 우리나라에도 귀화하였는데, 그 뒤에 우리나라로 온 사람은 모조리 청의 요구에 의하여 돌려보냈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많이 유해(劉海 ()을 저버린 장수)의 난리에 죽었다. 이리하여 공지가 된 지도 벌써 백여 년에 쓸쓸하게도 산 높고 물 맑은 것만 눈에 띌 따름이다.

모든 노둔(露屯) 친 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역관은 혹 세 사람씩 한 막에, 또는 다섯 사람씩 장() 하나를 쳤고, 역졸(驛卒)과 마부(馬夫)들은 다섯씩 또는 열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히 서리고, 인마소리 소란한 품이 의젓한 한 마을을 이룩하였다. 용만서 온 장수들 한 패가 저희들끼리 한 곳에 모였는데,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한편에서는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낱낱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니 그들의 살림이 매우 푸짐하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군뢰란 만부(灣府)에서 가장 기운 센 자를 뽑아온 것인데, 이 일행 하인들 중에서 특히 일도 많이 하고 먹음새도 제일 세다고 한다. 그 자들 차림차림이란 몹시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쳐 댄 전립(氈笠)에 털상투의 높은 정수리에는 운월(雲月)이나 다홍빛 상모(象毛)를 걸고, 벙거지 이마에는 날랠용() 자를 붙였으며, 쇠붙이로 오려낸 아청(鴉靑)빛 삼베로 만든 소매 좁은 군복에 다홍빛 무명 배자(褙子)를 입고, 허리엔 남방사주(藍方絲紬) 전대(纏帶)를 띠고, 어깨엔 주홍빛 무명실 대융(大絨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을 걸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그 꼴이야 말로 어엿한 한 쌍의 사내다. 다만 그 말 탄 꼴을 보면 이른바 반부담(半駙擔)이어서 안장 없이 짐을 실었는가 하면, 타는 것도 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터앉은 셈이다. 등에는 남빛 조그마한 영기(令旗 () 자를 쓴, 군령을 전하는 기())를 꽂고, 한 손엔 군령판(軍令版 군령을 적은 널빤지), 또 한 손에는 붓벼루파리채와 팔뚝만한 마가목(馬家木) 짧은 채찍을 잡고,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앉은 자리 밑엔 비스듬히 여남은 개의 붉게 칠한 곤장(棍杖)을 꽂았다. 각방(各房)에서 약간 호령이 있을 때 문득 군를 부르면, 군뢰. 일부러 못 들은 체하다가 연거푸 10여 차례 불러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하다가는, 금시에 처음 들은 듯이 커다란 소리로 예이 하고 곧 말에서 뛰어내려, 마치 돼지처럼 비틀걸음에 소처럼 식식거리면서 나팔군령판벼루 등속을 모두 한 쪽 어깨에 메고 막대 하나를 끌며 나간다.

한밤중 못 되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위로 장막이 새고 밑에선 습기가 치밀어 피할 곳이 없더니, 이내 날이 개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 손으로 어루만지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D-001]당서(唐書) : 후진(後晉) 유후(劉煦)가 지은 당의 역사.

[D-002]말갈(靺鞨) : 당에서 부르던 만주(滿洲)의 별칭. 거기에 말갈족 즉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D-003]산해경(山海經) : 일명씨(逸名氏)의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

[D-004]황여고(皇輿考) : 명 장천복(張天復)이 지은 지리서.

[D-005]역원(譯員) : 통역관. 중국에 사행할 때에는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와 청학상통사(淸學上通事) 이하 많은 역관이 따랐다.

[D-006]정사(正使) : 사행의 수석. 당시의 정사는 곧 연암의 사종형(四從兄)으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다.

[D-007]파발(把撥) : 공문서를 급히 전하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驛站).

[D-008]은화(銀花) : 정월 대보름날 밤에 등불을 다는 것. 여기에서는 그 모양을 형용하였다.

[D-009]운월(雲月) : 물건 변두리를 구름달 모양으로 곱게 꾸민 것.

[D-010]막수(莫愁) : ()의 석성(石城)에 살던 여인인데, 노래를 잘 불렀다.

[D-011]청남(淸南) : 청천강(淸川江)의 남쪽 평양(平壤)을 이름.

[D-012]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 : 연암의 일계(一系)에 속하는 학자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자요, 영재는 호이다. 다른 본에는 영재(泠齋)라는 두 글자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연암의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D-013]형경(荊卿) :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자객(刺客)인 형가(荆軻)를 말한다. ()나라에서는 '형경'으로 불렸으며, 연나라 태자 단()의 식객(食客)이 되어 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왕(秦王)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D-014]태자(太子) : 전국 때 연()의 태자 단().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형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였다.

[D-015]진무양(秦舞陽) : 형가가 진에 들어갈 때에, 지도(地圖)를 갖고 따르던 젊은 협사의 이름.

[D-016]() : 형가가 역수(易水)를 건널 때, 그의 친구 고점리(高漸離)는 축()을 치고, 형가는 박자 맞추어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이라는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D-017]그 사람 : 형가가 기다렸다는 그 사람.

[D-018]() : 지금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지방.

[D-019]() : 지금 중국의 강소(江蘇)호남(湖南)절강성(浙江省) 등지.

[D-020]삼진(三晉) : 당시의 한()()(). 지금의 산서(山西)하남성(河南省) 서남부.

[D-021]부사(副使) : 차석 사신. 당시의 부사는 이조 판서 정원시(鄭元始).

[D-022]서장관(書狀官) : 일행의 행정(行程)에 관한 통계 책임을 맡은 관원. 당시의 서장관은 장령(掌令) 조정진(趙鼎鎭).

[D-023]남은(濫銀) : 팔포(八包)  2천 냥, 3천 냥의 한도를 넘은 은자(銀子).

[D-024]중곤(重棍) : 대곤(大棍)보다 더 큰 곤장.

[D-025]먼저 …… 오른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에서 나온 말이다.

[D-026]()의 자산(子産) : 자산은 전국 시대 정 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

[D-027]흑선풍(黑旋風) :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역사 이규(李逵)의 별명.

[D-028]강혁(江革) : 후한(後漢) 때 효자. 어려서 난리를 만나 홀어머니를 업고 갖은 곤란을 겪고서 마침내 어머니를 보전하였다.

[D-029]말이오 : ‘조군(趙君) …… 말이오 이 부분은 다른 본에 없고, 다만 일재본 유당본(綏堂本)’에 있을 뿐이다.

[D-030]모문룡(毛文龍) : 명의 장수로, 청병에게 패하여 우리나라 서해 가도(椵島)에 일시 주둔하고서 조선에 원조를 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5일 임신(壬申)

 

 

아침에 가랑비 내리더니 낮에 개다.

각방(各房)과 역관들이 모든 노둔(露屯)한 곳에서 이곳저곳 옷과 이불들을 내어 말린다. 간밤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쇄마(刷馬 관용으로 세 낸 말) 마부 중에 술을 갖고 온 자가 있어서 대종(戴宗)선천(宣川)의 종으로 어의(御醫) 변 주부(卞主簿)의 마두이다. 이 한 병을 사서 바치기에 서로 이끌고 시냇가에서 잔을 기울인다. 강을 건넌 뒤로 우리 술은 아주 단념하다가, 이제 갑자기 이 술을 얻어 마시게 되니 술맛이 몹시 좋을 뿐더러 한가히 시냇가에 앉아 마시는 그 멋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낚시질을 하기에, 나도 취한 김에 낚싯줄 하나를 빌려 던지자 곧 조그만 고기 두 마리가 걸리니, 아마 이 시냇고기는 낚시에 단련되지 못한 까닭이리라.

방물이 미처 대어 오지 못하였으므로 또 구련성에서 노숙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6일 계유(癸酉)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개다.

구련성을 떠나 삼십 리를 가서 금석산(金石山) 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다시 삼십 리를 가서 총수(葱秀)에서 노숙하다.

날이 새자 새벽 일찍 안개를 헤치고 길을 떠났다. 상판사(上判事)의 마두 득룡(得龍)이 쇄마 구종들과 함께 강세작(康世爵)의 옛 일을 이야기한다.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형주(荊州) 사람 강세작이 숨었던 곳이오.”

하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퍽 재미있어 들을 만하다. 대략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세작의 조부 임()이 양호(楊鎬)를 따라 우리나라를 구원하다가 평산(平山) 싸움에 죽고, 그 아버지 국태(國泰)는 청주 통판(淸州通判)을 지내다가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에 죄를 지어 요양(遼陽)으로 귀양오게 되었다. 그때 세작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청이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유격장군(游擊將軍) 이영방(李永芳)이 항복하고 말았다. 경략(經略) 양호가 여러 장수를 나눠서 파견할 제 총병(揔兵) 두송(杜松)은 개원(開原)으로, 왕상건(王尙乾)은 무순으로, 이여백(李如栢)은 청하(淸河)로 각각 나오고, 도독(都督) 유정(劉綎)은 모령(毛嶺)으로 나왔다. 이때 국태 부자는 유정의 진중에 있었는데, 청의 복병이 산골짜기에서 몰려나오자, 명의 군사 앞뒤가 연락되지 못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국태도 화살을 맞은 채 쓰러졌다.

세작이 해 저문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산골에 묻고 돌을 모아 표를 했다. 이때(1619)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는 산 위에 진을 쳤고, 조선의 좌우 영장(營將)은 산 밑에 진을 쳤었다. 이에 세작이 원수(元帥)의 진에 투신했다. 그 이튿날 청병(淸兵)이 조선의 좌영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니, 산 위에 있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병이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도망쳐 온 명병(明兵)을 샅샅이 뒤져내어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세작도 역시 청병에게 붙들려서 묶인 채 바위 아래 앉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를 맡은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그러자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눈짓하여 묶인 것을 풀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기웃기웃 보기만 하고 손 하나도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이 할 수 없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부비적거려 줄을 끊고 죽은 조선 군사의 옷을 바꾸어 입고 조선 군대 가운데 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이에 요양으로 돌아갔더니, 웅정필(熊廷弼)이 요양을 지키면서, 세작을 불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다. 이해에 청이 잇달아 개원과 철령(鐵嶺)을 함락하니 정필이 갈리고 설국용(薛國用)이 대신 요양을 지키게 되자, 세작이 곧 설()의 군중에 머물러 있었더니 심양마저 함락되매, 세작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봉황성에 닿아, 광녕(廣寧) 사람 유광한(劉光漢)과 함께 요양의 패잔병을 소집하여 거기를 지켰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광한은 전사하고 세작도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향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나라 조선으로 나가서 저 치발(薙髮)좌임(左衽)의 되놈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드디어 싸움터를 탈출하여 금석산 속에 숨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양구(羊裘)를 불에 구워 나뭇잎에 싸서 먹고 두어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에 압록강을 건너 관서(關西)의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회령(會寧)까지 굴러 들어가서,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나이 팔십이 넘어서 죽었다. 그 자손이 퍼져서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오히려 한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

득룡(得龍)은 가산(嘉山) 사람인데, 열네 살부터 북경(北京)에 드나들어 이번이면 삼십여 차례에 이른다. 화어(華語)에 가장 능통하여 일행의 모든 일에 득룡이 아니면 그 책임 있게 해낼 자가 없다. 그는 이미 가산과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 부()의 중군(中軍)을 지내고 품계가 가선(嘉善 2품 문관 품계)에까지 이르렀다. 사행이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통첩하여 그 차지(次知)가속(家屬)을 차지라 한다. 를 감금(監禁)하여 그의 도피함을 막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위인의 재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세작이 처음 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 묵고 득룡의 조부와 친하여 서로 중국 말과 조선 말을 배웠으며, 득룡이 화어를 그토록 잘함도 그의 가전(家傳)의 학문이라 한다.

날이 저물어 총수에 이르다. 여기는 우리나라 평산(平山)의 총수와 흡사하다. 그제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명 짓는 예가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서 평산의 총수도 이곳과 유사하다 해서 이름을 지은 것이나 아닐까.

 

 

[D-001]상판사(上判事) : 사행이 있을 때, 임시로 잡무의 처리를 맡은 직명.

[D-002]평산(平山) : ‘수택본에는 서흥(瑞興)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7일 갑술(甲戌)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걷혔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길에서 되놈 5~6명을 만났는데, 모두 조그만 당나귀를 탔고 벙거지나 옷이 남루하며 얼굴은 지친 듯 파리하다. 이들은 모두 봉황성의 갑군(甲軍)으로 애랄하(愛剌河)에 수자리 살려 가는데, 대부분 품삯을 받고 팔려 가는 자들이라 한다. 이 일을 보니 우리나라는 염려할 것 없으나, 중국의 변비(邊備)는 너무나 허술하다고 느껴졌다.

마두와 쇄마 구종들이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치니, 앞서 가던 둘은 곧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서 가는데, 뒤에 가는 셋은 내리기를 거부한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꾸짖으니,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쏘아 보면서,

 

당신네 상전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 있어.”

한다. 마두가 바짝 달려들어 그 채찍을 빼앗아 그 맨 종아리를 후려갈기면서 꾸짖는다.

 

우리 상전께서 받들고 온 것이 어떤 물건이며 싸 갖고 오는 것이 어떤 문서인 줄 아느냐. 저 노란 깃발에 만세야(萬歲爺 청의 황제) 어전상용(御前上用)이라고 써 있지 않느냐. 너희 놈들이 눈깔이 성하다면 황제께서 친히 쓰실 방물인 줄 모른단 말이냐.”

하니, 그제야 그들은 곧 나귀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서,

 

그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한다. 그 중 한 녀석이 일어나더니 자문(咨文)을 지닌 마두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영감, 제발 참아 주십시오. 쇤네들의 죄는 죽어야 하옵니다.”

한다. 마두들이 모두 껄껄 웃으면서,

 

너희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렷다.”

하니, 그들이 진흙 바닥에 꿇어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니, 이마가 죄다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일행이 모두 크게 웃고,

 

빨리 물러가라.”

호통한다. 나는 다 보고 나서,

 

내 듣기에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요단(鬧端)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건대 과연 앞서 들은 바와 틀림없구나. 아까 한 일은 대체 부질없는 짓이니 이 담엘랑 아예 장난으로 요단을 일으키지 말려무나.”

하니, 모두들,

 

이렇게라도 아니 하면 먼 길 허구한 날을 무엇으로 심심풀이를 합니까.”

한다.

멀리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 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맑고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

내가 일찍이 우리 서울의 도봉(道峯)과 삼각산(三角山)이 금강산(金剛山)보다 낫다고 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그 동부(洞府)를 엿보면 이른바 1 2천 봉이 그 어느 것이나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깊지 않음이 없어서, 짐승이 끄는 듯, 새가 날아가는 듯, 신선이 공중에 솟는 듯, 부처가 도사리고 앉은 듯, 음산하고 그윽함이 마치 귀신의 굴 속에 들어간 것 같다. 내 일찍이 신원발(申元發)과 함께 단발령(斷髮嶺)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일이 있다.

때마침 가없이 파란 가을 하늘에 석양이 비꼈으나, 다만 창공에 닿을 듯한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가 없음을 느낀 나는 미상불 금강산을 위해서 한 번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배를 타고 상류에서 저어내려 오면서 두미강(頭尾江) 어귀에서 서쪽의 한양(漢陽)을 바라보니, 삼각산의 모든 봉우리가 깎은 듯 파랗게 하늘에 솟구쳤다. 엷은 내와 짙은 구름 속에 밝고 곱게 아리따운 자태가 나타나고, 또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 거울 속의 달과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목의 윤기 나는 기운이 공중에 어림은 왕기(旺氣)라고 하였으니, 왕기(旺氣)는 곧 왕기(王氣)인즉, 이는 우리 서울은 실로 억만 년을 누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였으니, 그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야말로 당연히 범상한 산세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봉황산 형세의 기이하고 뾰족하고 높고 빼어남이 비록 도봉삼각보다 지나침이 있건마는, 어린 빛깔은 한양의 모든 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넓은 들판이 질펀한데 비록 개간은 안 되었지마는, 가는 곳마다 나무 찍어 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소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리가 풀섶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책문(柵門)이 여기서 가깝고, 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무시로 이곳에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말을 빨리 몰아 7~8리를 가서 책문 밖에 닿았다. 양과 돼지가 산에 질펀하고 아침 연기는 푸른 빛으로 둘러 있다. 나무 쪽으로 목책(木柵)을 세워서 겨우 경계(經界)를 밝혔으니, 이른바 버들을 꺾어서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 곧 이것인 듯싶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이었고 널판자 문이 굳게 닫혔다.

목책에서 수십 보 떨어져서 삼사(三使)의 막을 치고 조금 쉬려니까 방물이 다 이르렀으므로 책문 밖에 쌓아 두었다. 뭇 되놈들이 목책 안에 늘어서서 구경을 하는데, 대부분 민머리 바람에 담뱃대를 물고 부채를 부치고 있다. 혹은 검은 공단(貢緞) 옷을 입고, 또는 수화주(秀花紬)생포(生布)생저(生苧)석새삼베[三升布]야견사(野繭絲) 옷들을 입었으며 바지들도 역시 그러하다.

허리에는 찬 것이 주렁주렁하게 많았는데, 수놓은 주머니 서너 개씩과 조그만 패도에 모두 쌍아저(雙牙箸)를 꽂았고, 담배쌈지는 호로병(胡盧甁)처럼 생겼는데 거기에다 꽃새 또는 옛사람의 이름난 글귀를 수놓았다. 역관과 모든 마두들이 다투어 목책 가에 나서서 그들과 손을 잡고 반가이 인사를 교환한다. 되놈들은,

 

당신은 언제쯤 한성을 떠났으며, 길에서 비나 겪지 않았나요. 댁에선 모두들 안녕하시고요. 포은(包銀) 돈도 넉넉히 갖고 오셨습니까.”

하고, 사람마다 수작이 거의 한 입에서 나오는 것 같다. 또 다투어 묻되,

 

한 상공(韓相公)과 안 상공(安相公)도 오시나요.”

한다. 이들은 모두 의주 사는 장사꾼들로서, 해마다 연경으로 장사 다녀서 수단이 매우 능란하고 또 저쪽 사정을 익히 아는 자들이라 한다. 그리고 상공이란 장사꾼들끼리 서로 존대하는 말이다. 사행이 갈 때에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를 내리는 법이다. 정관은 비장역관까지 모두 서른 명이고, 팔포(八包)란 이전부터 나라에서 정관에게 인삼(人蔘) 몇 근씩을 주었었는데, 이를 팔포라 일렀다. 지금은 이것을 나라에서 주지 않고 제각기 은을 갖고 가게 하되, 단지 그 포 수를 제한하여 당상관(堂上官) 3천 냥, 당하관(堂下官) 2천 냥인데, 이것을 지니고 연경에 가서 여러 가지 물건을 바꾸어 이문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가난하여 스스로 갖고 갈 수 없으면, 그 포의 권리를 파는데 송도평양안주(安州) 등의 장사꾼들이 사서 대신 은을 넣어 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연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므로, 이 포의 권리를 의주 장수들에게 넘겨주어서 물건을 바꿔 오는 것이다. ()이나 임() 같은 장사꾼들은 해마다 연경에 드나들어서 연경을 제집 뜰처럼 여기며, 저쪽 장수들과 서로 뜻이 맞아서 물건 값의 오르내리는 것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물건 값이 날로 오르는 것은 실로 이 무리들 때문이거늘 온 나라가 도대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역관만 나무란다. 그러나 역관도 이들 장사꾼에게 권리를 빼앗기고는 어쩔 도리가 없을 뿐이다. 다른 곳 장사꾼들도 이것이 의주 장사꾼놈들의 농락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골은 낼 수 있겠으나 무어라 말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요즘 의주 장사꾼들이 잠깐 은신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역시 흥정하는 술책의 하나다.

책문 밖에서 아침 밥을 먹다. 행장을 정돈한즉, 양편 주머니 중 왼편 열쇠가 간 곳이 없다. 샅샅이 풀밭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장복을 보고,

 

너는 행장에 유의하지 않고 늘 한눈만 팔더니, 겨우 책문에 이르러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겼구나. 속담에 사흘 길을 하루도 못 가서 늘어진다는 격으로, 앞으로 2천 리를 가서 연경에 이를 즈음이면 네 오장인들 어디 남겠느냐. 내 듣건대, 구요동(舊遼東)과 동악묘(東岳廟)엔 본시 좀도둑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니, 네가 또 한눈을 팔다가는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겠구나.”

하고 꾸짖으니, 장복은 민망하여 머리를 긁으며,

 

쇤네가 인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 곳을 구경할 적엔 제 두 손으로 눈깔을 꼭 붙들고 있으면, 어느 놈이 빼어갈 수 있으리까.”

한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옳아.”

하고 응락하였다. 대체 장복이란 녀석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처음 길이며 바탕이 몹시 멍청해서, 동행하는 마두들이 흔히 장난으로 놀리면, 그는 곧잘 참말로 곧이 듣고 그러려니 한다. 매사가 다 이러하니 앞으로 먼 길을 데리고 갈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民家)들은 대체로 들보 다섯이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었는데,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곧아서 양쪽이 마치 먹줄 친 것 같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며 벌여 놓은 기명들은 모두 그림 그린 자기(瓷器)들이다. 그 제도가 어디로 보나 시골 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앞서 나의 벗 홍덕보(洪德保),

 

그 규모는 크되, 그 심법(心法)은 세밀하다.”

고 충고하더니, 이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앞으로 더욱 번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보다 하는 생각에 온 몸이 화끈해진다. 그럴 순간에 나는 깊이 반성하되,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시 성미가 담박(淡泊)하여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던 것이 이제 한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보지 못하고 벌써 이런 망녕된 마음이 일어남은 어인 까닭일까. 이는 곧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만일 여래(如來)의 밝은 눈으로 시방 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이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모든 것이 평등하면, 저절로 시기와 부러움이란 없어질 것이다.”

하고 장복을 돌아보며,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중국은 되놈의 나라이옵기 쇤네는 싫사와요.”

하고 대답한다. 때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고 손으로 월금(月琴)을 뜯으면서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하였다.

조금 뒤에 책문이 활짝 열린다. 봉성장군과 책문어사(柵門御史)가 방금 와서 점방(店房)에 앉아 있다 한다. 여러 되놈들이 책문이 메이게 나오며, 다투어 방물과 사복(私卜 개인이 가진 짐짝들)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대체 이곳에 이르러서는 으레 되놈의 수레를 세내어서 짐을 운반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사신이 앉은 곳에 와 보고서는 담뱃대를 물고 힐끗힐끗 치어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희들끼리,

 

저이가 왕자(王子)인가.”

하고, 중얼거린다. ‘왕자란 종반(宗班 임금의 가까운 집안)으로서 정사가 된 이를 이름이다. 그 중에 잘 아는 자가,

 

아니야, 저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가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어른인데, 지난해에도 왔던 이야.”

하고 부사를 가리키면서,

 

저 수염 좋고 쌍학(雙鶴) 무늬 놓은 관복 입은 이가 얼대인(乙大人)이지.”

하고 서장관을 보고는,

 

산대인(山大人)인데, 모두 한림(翰林) 출신이오.”

한다. ()은 이( 둘째), ()은 삼( 셋째)이요, 한림 출신이란 문관(文官)을 이름이다.

때마침 시냇가에서 왁자지껄하며 무엇을 다투는 소리가 나는데, 말 소리가 새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급히 가 보니, 득룡이 방금 뭇 되놈들과 더불어 예물(禮物)이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다. 대체 예단(禮單)을 나눠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좇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들이 반드시 명목(名目)을 덧붙여서 그 가지수를 채워주기를 강요한다. 이에 대한 처리의 잘하고 잘못함은 전혀 상판사(上判事)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투른 풋내기라든지, 또는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 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그대로 줄 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에는 벌써 전례가 되기 때문에 기어코 아귀다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신들은 이 묘리를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만 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의 유래가 오랜 것이다.

상삼(象三)상판사의 마두이다. 이 방금 예단을 나눠 주려 한다. 되놈 백여 명이 삥 둘러섰다. 그 중 한 청인이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상삼을 욕한다. 득룡이 수염을 쓱 쓰다듬고 눈을 부릅뜬 채 내달아서 그 앙가슴을 움켜잡고 주먹을 휘두르며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뭇 청인을 둘러보고,

 

이 뻔뻔스럽고 무례한 놈 보아. 지난해에는 대담하게도 어른의 쥐털 목도리를 훔쳐 가고, 또 그 다음해엔 어른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나의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어른의 칼집에 달린 술[]을 끊어가지고 다시 나의 찬 주머니를 훔치려다가 내게 들켜서는 주먹 한 대에 톡톡히 경을 치지 않았나. 그 때는 아주 만단으로 애걸복걸하면서 나더러 목숨을 살려 주신 부모 같은 은인이라 하던 놈이 이번엔 오랜만에 오니까 도리어 어른께서 네 놈의 꼴을 몰라보실 줄 믿고 함부로 떠들고 야단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은 어디 봉성장군에게 끌고 가야지.”

하고 야단한다. 여러 되놈은 모두 용서해 줄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도 수염이 아름답고 옷을 깨끗이 입은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득룡의 허리를 껴안고,

 

형님, 제발 좀 참으시오.”

하고 사정한다. 득룡이 그제야 노여움을 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만일 동생의 안면을 보지 않는다면, 이놈의 콧잔등이를 한 주먹 갈겨서 저 봉황산 밖에 던지고 말 것을.”

하며 으르댄다. 그의 날뛰는 거조는 참으로 우습다. 판사(判事) 조달동(趙達東)이 마침 내 곁에 와 섰기에 아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혼자서만 보기에 아깝더라 하니, 조군이 웃으면서,

 

그야말로 살위봉법(殺威棒法)이군요.”

한다. 조군이 득룡더러,

 

사또께서 이제 곧 책문으로 들어가실 테니, 예단(禮單)을 지체 말고 나눠 주렷다.”

하고 재촉한다. 득룡이 연방,

 

예에, 예이

하며, 짐짓 바쁜 척하고 서둔다. 나는 일부러 그 곳에 머물러 서서 그 나눠주는 물건의 명목(名目)을 상세히 보았다. 매우 괴잡(怪雜)스러운 일들이다.

 

예단물목(禮單物目)

책문수직보고(柵門守直甫古) 2(二名)과 갑군(甲軍) 8(八名)에겐 각각 백지(白紙) 10(十卷), 소연죽(小煙竹) 10(十箇), 화도(火刀) 10, 봉초(封草) 10(十封)씩이고, 봉성장군 2(二員), 주객사(主客司) 1, 세관(稅官) 1, 어사(御史) 1, 만주장경(滿洲章京) 8, 가출장경(加出章京) 2, 몽고장경(蒙古章京) 2, 영송관(迎送官) 3, 대자(帶子) 8, 박씨(博氏) 8, 가출박씨(加出博氏) 1, 세관박씨(稅官博氏) 1, 외랑(外郞) 1, 아역(衙譯) 2, 필첩식(筆帖式) 2, 보고(甫古) 17, 가출보고(加出甫古) 7, 세관보고(稅官甫古) 2, 분두보고(分頭甫古) 9, 갑군 50, 가출갑군(加出甲軍) 36, 세관갑군(稅官甲軍) 16명 등 도합 1 2명에게는 장지(壯紙) 1 56, 백지 4 69, 청서피(靑黍皮) 1 20, 소갑초(小匣草) 5 80, 봉초 8백 봉, 세연죽(細煙竹) 74, 팔면은항연죽(八面銀項煙竹) 74, 석장도(錫粧刀) 37자루[三十七柄], 초도(鞘刀) 2 84자루, 선자(扇子) 2 88자루, 대구어(大口魚) 74마리[七十四尾], 다래[月乃] 가죽 장니(障泥). 7(七部), 환도(環刀) 7(七把), 은장도(銀粧刀) 7자루, 은연죽(銀煙竹) 7, 석장연죽(錫長煙竹) 42, () 40(), () 40(), 화도 2 62, 청청다래[靑靑月乃] 2, 별연죽(別煙竹) 45, 유둔(油芚) 2부씩이다.

 

뭇 되놈은 끽소리 없이 받아 가지고 가버린다. 조군이,

 

득룡의 수단이 참으로 능하단 말요. 그는 지난해에 휘항이며 칼이며 주머니며 잃어버린 일이 도시 없답니다. 공연히 트집을 만들어서 그 중 한 놈을 꺾어놓으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수그러져 서로 돌아보고는 무료히 물러서곤 하더군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던들, 사흘이 가도 끝이 나지 않아 좀처럼 책문 안으로 들어갈 가망이 없으리다.”

한다. 이윽고, 군뢰가 와 엎드리어,

 

문상어사(門上御史)와 봉성장군이 수세청(收稅廳 세관)에 나와 계십니다.”

하고 아뢴다. 이에 삼사(三使)가 차례로 책문으로 들어간다. 장계(狀啓)는 전례대로 의주의 창군(鎗軍)에게 부치고 돌아오다.

한번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고국의 소식은 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에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섰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향했다.

길 오른편에 초청(草廳) 세 칸이 있어서 어사장군으로부터 아역(衙譯)에 이르기까지 반열을 나눠 의자에 걸터앉고, 수역(首譯) 이하는 그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사신이 이에 이르면 마두가 하인을 호통하여 가마를 머무르고 잠시 말을 쉬어 마치 행차를 중지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재빨리 달려서 그곳을 지나가 버린다. 부사서장관도 이같이 하여 마치 서로 구원하는 듯한 모양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비장역관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지나가는데, 다만 변계함(卞季涵)만이 말탄 채 그냥 지나간다. 말석에 앉은 한 청인이 갑자기 조선말로,

 

여보 잘못이에요. 어른들 몇 분이 여기 앉아 계신데, 외국의 수행원이 어찌 이렇게 당돌하단 말이오. 사신께 빨리 고해서 볼기를 침이 마땅하지.”

하고 고함친다. 그 소리는 비록 거세고 크나 혀가 굳고 목이 꺽꺽하여 마치 어린아이의 어리광부리듯하며 주정꾼이 노닥거리는 것 같다. 이건 곧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이라 한다. 수역(首譯)이 얼른 대답하여,

 

이는 우리나라 태의관(太醫官 어의(御醫))인데 처음 길이라 실정을 몰라서 그랬으며, 태의관은 국명(國命)을 받자와 정사를 보호하는 직분이므로, 정사께서도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처지예요. 여러 어른께서는 위로 황제께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체득하시와 깊이 따지지 마시면 더욱 대국의 너그러운 도량을 잘들 인식하겠습니다.”

하매, 그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소, 그래.”

한다. 다만 쌍림은 눈을 부라리고 소리 지르는 것이 사나워서 노여움이 아직 덜 풀린 모양이다. 수역이 나를 보고 그만 가자고 눈짓한다. 길에서 변군(卞君)을 만났다. 변군이,

 

큰 욕을 보았어.”

한다. 나는,

 

볼기둔() 자를 잘 생각해 봐.”

하고는 한바탕 웃었다. 이에 그와 나란히 가면서 구경하는데 가끔 감탄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책문 안의 인가는 20~30호에 지나지 않으나 모두 웅장하고 깊고 높고 통창하다. 짙은 버들 그늘 속에 푸른 주기(酒旗)가 공중에 솟은 채 나부낀다. 변군과 함께 들어가니 웬걸 조선 사람들이 그 속에 그득하다. 맨종아리며 때 낀 살쩍에 걸상을 가로 타고 앉아 떠들던 그들은 우리를 보고 모두 피하여서 밖으로 빠져버린다. 주인이 성을 내어서 변군을 가리키면서,

 

눈치성 없는 저 관인(官人)이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군.”

하고 투덜거린다. 대종(戴宗)이 주인의 등을 두드리며,

 

형님, 잔소리 할 것 없어. 두 어른은 한두 잔만 자시면 곧 나가실 텐데 그 망나니들이 어찌 제멋대로 걸상을 타고 앉았을 수 있겠소. 잠시 피한 것이니 곧 돌아와서, 이미 먹었으면 술값을 치를 것이고, 아직 덜 먹었으면 흉금을 터놓고 즐거이 마실 테니 형님은 마음놓고 우선 넉 냥 술이나 부으시오.”

한즉, 주인은 그제야 웃는 얼굴로,

 

동생, 지난해도 보지 않았소. 이 망나니들이 야로하는 바람에 모두 먹기만 하고는 뿔뿔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니 술값을 어디 가 받겠소.”

한다. 대종은 다시금,

 

형님, 염려마오. 이 어른들이 자시고 곧 일어나시면, 내 다 그들을 이리로 몰고 와서 술을 사게 할 테니.”

한즉, 주인은,

 

그러시오. 두 분이 함께 넉 냥으로 하실까. 각기 넉 냥으로 하실까.”

한다. 대종은,

 

따로따로 넉 냥씩 부으시오.”

하자, 변군이 나무라면서,

 

넉 냥 술을 누가 다 먹는단 말이냐.”

하매, 대종이 웃으면서,

 

넉 냥이란 돈이 아닙니다. 술 무게 말씀입니다.”

한다.

탁자 위에 벌여놓은 술잔이 한 냥으로부터 열 냥까지 제각기 그 그릇이 다르다. 모두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어서 빛깔을 내어 은과 같다. 넉 냥 술을 청하면 넉 냥들이 잔으로 부어준다. 술을 사는 이는 그 많고 적음을 계교할 필요가 없다. 대체 그 간편함이 이와 같다. 술은 모두 백소로(白燒露)인데, 맛이 그리 좋지 못하고 취하자마자 금방 깬다.

그 주위의 포치(鋪置)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고르고 단정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구차스럽게 미봉해 놓은 법이 없고, 한 물건도 허투루 어지럽혀 놓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제곳에 놓였으며 나무 더미나 거름 무더기까지도 유달리 깨끗하고 맵시 있는 품이 그린 듯싶다. 아아, 이러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이를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대체 이용이 되지 않고서는 후생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오.

정사의 행차가 이미 악()의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을 사처로 들였다. 주인은 신장이 일곱 척이요, 기개가 호장하고 성격이 매서운 분이다. 그 어머니는 나이 70세에 가까우나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눈매가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손이 앞에 가득한 원만한 가정이라 한다.

점심 뒤에, 내원 및 정 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7리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성싶고 오직 정남의 한 쪽만이 좀 편평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아서,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 때의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아닐 테니, 이는 아마 고구려 때의 조그마한 보루(堡壘)가 있었던가 싶다.

셋이 함께 큰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이고 있었다. 옆에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다. 위는 넓고 돌을 다듬어서 덮고, 양쪽에는 구멍을 뚫어서 겨우 두레박만 드나들게 되었다. 이는 사람이 빠지는 것과 먼지가 들어감을 막기 위함이었고, 또 물의 본성이 음()하기 때문에 태양을 가려서 활수(活水)를 기르는 것이다. 우물 뚜껑 위엔 녹로(轆轤 활차(滑車))를 만들어 양쪽으로 줄 두 가닥이 드리워져 있고, 버들가지를 걸어서 둥근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바가지 같으나 비교적 깊어서 한 편이 오르면 한 편이 내려가서 종일토록 물을 길어도 사람 힘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물통은 모두 쇠로 테를 두르고 조그마한 못을 촘촘히 박은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은 오래 지나면 썩어서 끊어지기도 하려니와 통이 마르면 대나무 테가 저절로 헐거워서 벗겨지므로 이렇게 쇠 테로 메우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물을 길어가지고는 모두 어깨에 메고 다닌다. 이것을 편담(扁擔)이라 한다. 그 법은 팔뚝만큼 굵은 나무를 길이가 한 길쯤 되게 다듬어서 그 양쪽 끝에 물통을 걸되 물통이 땅 위에서 한 자 넉넉히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이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평양에서만 이 법이 있기는 하나, 그것도 어깨에 메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니기 때문에 고샅길 좁은 골목에서는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다. 이렇게 어깨에 메는 법이 훨씬 편리할 것이다. 옛날에 포선(鮑宣)의 아내가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었다 하는 대목을 읽다가 왜 머리에 이지 않고 손에 들었을까 하고 나는 일찍 의심하였더니, 이제 보니 이 나라 부인들은 쪽진 머리가 모두 높아서 물건을 일 수 없음을 알겠다.

서남쪽은 탁 트여서 대체 평원한 산과 질펀한 물이었다. 우거진 버들에 그늘은 짙고, 띠지붕과 성긴 울타리가 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가없이 푸른 방축 위에 소와 양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다. 먼 강 다리에 행인들이 혹은 짐지고 혹은 이끌고 가는 것을 나는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못 요사이 행역(行役) 중의 고단함을 잊어버릴 듯싶다.

동행 두 사람은 저 새로 지은 불당(佛堂)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때마침 말 탄 사람 10여 명이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데 모두 수놓은 안장에 재빠른 말이어서 자못 의기가 양양하다. 그들은 내가 홀로 서있음을 보고 고삐를 돌려 말에서 내려 서로 다투어 내 손을 잡고 정답게 인사를 한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내가 땅에 글자를 써서 필담(筆談)을 시작했으나, 그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비석 둘이 있는데 모두 푸른 돌이다. 하나는 문상어사(門上御史)의 선정비(善政碑), 또 하나는 세관(稅官)아무의 선정비다. 둘은 다 만주 사람이요 넉 자 이름이다. 비문을 지은 이도 역시 만주인이어서 글이나 글씨가 모두 옹졸하다. 다만 비의 제도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공력과 경비가 절약된 것이 본받음직하다. 비석의 양쪽은 갈지 않고, 벽돌로 담을 쌓아 올리되 비 머리가 묻히게 하고, 위에 기와를 얹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비석은 그 속에서 비바람을 피하게 되었으니, 일부러 비각을 세워서 비바람을 가리는 것보다 월등 낫겠다.

비부(碑趺)에 놓인 비희(贔屭 용의 새끼)나 비문의 양쪽 변두리에 새긴 패하(覇夏 동물 이름)가 다 그 털끝을 셀 수 있으리만큼 정교하다. 이는 한갓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세운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미로움과 아담스러운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한결 더 기승을 부린다. 급히 사관으로 돌아와서 북쪽 들창을 높이 떠 괴고 옷을 벗고 누웠다. 뒤뜰이 꽤 넓은데, 파 이랑과 마늘 두둑이 금을 그은 듯 곧고 방정하다. 오이 덕박 덩굴을 올린 시렁이 착잡(錯雜)하게 뜰을 덮고, 울타리 가에 붉고 흰 촉규화(蜀葵花)와 옥잠화(玉簪花)가 방금 한창으로 피었고, 처마 끝엔 석류(石榴) 몇 분(), 수구(繡毬 팔선화(八仙花)) 한 분, 추해당(秋海棠) 두 분이 심어져 있다. 주인 악군(鄂君)의 아내가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나와서 차례로 꽃을 딴다. 아마 저녁 화장(化粧)에 쓰기 위해서이리라.

창대가 술 한 그릇과 초란(炒卵) 한 쟁반을 가지고 와 드리면서,

 

어딜 가셨습니까. 저는 기다리느라고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그 어리광을 짐짓 떨어 제 충성을 나타내려 하는 양은 밉살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나, 술은 내 본시 즐기는 바요, 하물며 달걀 지진 것 역시 먹고 싶던 것임에랴.

이날 30리를 행하였다. 압록강에서 여기가 1 20리다.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책문이라 하고, 이곳 사람은 가자문(架子門)’이라 하며, 중국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한다.

 

 

[D-001]이곳에 …… 마련 : 봉성에서부터 청인들에게 짐삯을 주고 짐을 실린다. 청인들 중에는 이를 독점하는 조합(組合) 같은 것이 있어서, 오랫동안 여러 가지의 폐해가 많았다.

[D-002]한림(翰林) :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에 대한 통칭으로서, 사관(史館)인 검열을 가리킨다. 문벌이 좋고 글을 잘하는 이들로 충원된다.

[D-003]예단(禮單) : 선물의 목록, 또는 선물. 여기서는 사행이 연로(沿路)의 청국 관원에게 선사하는 선물을 말한다.

[D-004]살위봉법(殺威棒法) : 중국 무술(武術) 십팔기(十八技)의 하나. 곧 도둑의 덜미를 먼저 잡는 방법.

[D-005]예단물목(禮單物目) : 제본(諸本)에 애초에는 이 예단물목을 독립시킨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몇해 전에 어디에서 독립된 본을 보고서 잘 된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므로 이에 적용(摘用)한다.

[D-006]책문수직보고(栅門守直甫古) : 보십구(甫十口)의 오사(誤寫)였으나, 이제 그대로 둔다. 청의 구실 이름. 그들의 기록에는 발습고(撥什庫)로 되었다.

[D-007]백지(白紙) …… 10(十封)씩이고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백지 한 권, 소연죽 한 개, 화도 한 개, 봉초 한 봉으로 되어 있다.

[D-008]봉성장군 2 : 청인과 한인 각기 한 사람씩이다.

[D-009]만주장경(滿州章京) : 청의 구실 이름.

[D-010]대자(帶子) : 청의 구실 이름.

[D-011]박씨(博氏) : 청의 구실 이름.

[D-012]필첩식(筆帖式) : 청의 구실 이름.

[D-013]1 2 : 1 80명의 오산인 듯하다.

[D-014]유둔(油芚) : 비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어 붙인 두꺼운 기름종이. ‘주설루본(朱雪樓本)’에는 유단(油單)’으로 되었다.

[D-015]호행통관(護行通官) : 사행을 호송하는 통관. 통관은 청의 구실 이름이다.

[D-016]안시성(安市城) :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치다가 패하여 돌아간 곳.

[D-017]포선(鮑宣) : ()의 강직한 관리. 왕망(王莽)에게 따르지 않았다가 피살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8일 을해(乙亥)

 

 

아침에 안개 끼었다가 늦게 개었다.

아침 일찍이 변군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대종이 멀리 한 군데 큰 장원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입니다. 황성(皇城)에는 저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답니다. 종맹은 본래 탐관으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많고 조선 사람의 고혈을 빨아서 큰 부자가 되더니, 늘그막에 예부(禮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황성에 있던 집은 몰수당하고, 이것만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하고, 또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쌍림(雙林)의 집이옵고, 그 맞은편 대문은 문통관(文通官)의 집이라 하옵니다.”

한다. 대종은 말 솜씨가 극히 예리하고 능숙하여, 마치 오래 익혀 둔 글을 외듯 하였다. 그는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벌써 예닐곱 번이나 연경을 드나들었다 한다.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30리쯤 된다. 옷이 푹 젖고 길 가는 사람들의 수염에는 이슬진 것이 마치 볏모[秧針]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

서쪽 하늘 가에 짙은 안개가 문득 트이며 한 조각 파아란 하늘이 살포시 나타난다. 영롱하게 구멍으로 비치는 것이 마치 작은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시 울 안에 안개는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는 듯한 한 덩이 붉은 해가 벌써 세 발을 올라왔다.

강영태(康永太)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태의 나이는 스물셋인데, 제 말로 민가(民家) 한인(漢人) 민가라 하고 만주족은 기하(旗下)’라 한다. 라 한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서양금(西洋琴)을 잘 친다.

 

글을 읽었느냐?”

고 물으니, 그는,

 

벌써 사서(四書)를 외기는 하였지만 아직 강의(講義)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글 외기 강의하는 것과는 두 길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처음 배우는 이는 그저 사서의 장구(章句)만 배워서 입으로 욀 따름이요, 외는 것이 능숙해진 연후에 다시 스승께 그 뜻을 배우는 것을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하지 못하였더라도 입으로 익힌 장구가 곧 날로 상용하는 관화(官話)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 말이 가장 쉽다는 것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영태가 살고 있는 집은 정쇄하고 화려하여 여러 가지 기구가 모두 처음 눈에 뜨이는 것이다. 구들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모두 용봉을 그린 담이고, 걸상이나 탁자에도 역시 비단 요를 펴 놓았다. 뜰에는 시렁을 메고 가는 삿자리로 햇볕을 가렸으며, 그 사면에는 누른 밭을 드리웠다. 앞에 석류대 여섯분이 벌여 놓였는데, 그 중에서 흰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또 이상한 나무 한 분이 있는데 잎은 동백(冬栢) 같고 열매는 탱자 비슷하다. 그 이름을 물은즉, ‘무화과(無花果)’라 한다. 열매가 모두 두 개씩 나란히 꼭지가 잇대어 달리었고, 꽃이 없이 열매가 맺는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서장관(書狀官)조정진(趙鼎鎭) 이 찾아와서 서로 나이를 대어 보니, 그가 나보다 다섯 해나 많았다. 이어서 부사정원시(鄭元始) 도 찾아와서 먼 길에 괴로움을 같이한 정분을 말한다. 김자인(金子仁)문순(文淳) ,

 

형이 이 길을 떠나신 줄 알고도 우리나라 지경에서는 몹시 분요해서 미처 찾지 못했소.”

하고 사과한다. 나는,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

하니,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알지 못하겠군요. 어떤 곳이 이역이 될는지요.”

한다.

부사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우리 조부님과 부사의 조부님과는 일찍이 동창(同牕)에서 공령문(功令文 과체(科體)의 시문)을 공부하였으므로, 지금도 동연록(同硏錄 동창생끼리 기록한 문헌)이 보존되어 온다. 우리 조부께서 경조당상(京兆堂上)으로 계실 때에, 부사의 조부님께서 경조랑(京兆郞)으로 찾아오셔서, 통자(通刺)하고 서로 지난날 함께 공부한 일을 이야기하시던 걸 내가 그 때 여덟 살인지 아홉 살인지 되어서 옆에서 들었으므로, 세의(世誼)가 있음을 안다.

서장관이 흰 석류를 가리키면서,

 

전에 이런 것을 본 일이 있소.”

하고 묻는다.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소.”

하고 답하니, 서장관은,

 

내가 어렸을 때에 집에 이런 석류가 있었으나 국내 다른 곳에는 없었는데, 대체 이 석류는 꽃만 피고 열매는 맺지 않는다더군요.”

한다.

그들은 대략 이런 한담을 마치고는 일어섰다. 강을 건너던 날에 갈대 우거진 속에서 서로 낯은 알았으나 이야기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고, 또 이틀 동안 책문 밖에서 천막을 나란히 하고 한둔하였으나,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이제 이렇게 이역이니 하고 웃음소리를 붙인 것이다.

점심은 아직도 멀었다 하기에 그냥 기다릴 수 없어서 배고픈 것을 참고 구경을 나섰다. 애초에 오른편 작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사치한가를 몰랐더니, 이제 앞문으로 나가 보니 바깥 뜰이 수백 칸이나 되고, 삼사(三使)와 그 일행들이 다 함께 이 집에 들었건만, 어디에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우리 일행이 거처하고도 남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장수나 나그네들이 끊일 사이 없고, 또 수레가 20여 대나 문이 그득하게 들어온다. 그 수레마다 말과 노새가 대여섯 마리씩이었으나 떠드는 소리라고는 조금도 없고, 깊이 간직하여 텅 빈 것처럼 조용하다.

대개 그 배치해 놓은 것이 제대로 규모가 있어서 서로 거리끼는 일이 없다. 밖으로 보아서 이러하니 속속들이 세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문 밖으로 나섰다. 그 번화하고 부유함이 비록 연경에 이른들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생각된다. 중국이 이처럼 번영할 줄은 참으로 뜻밖이다. 길 좌우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방들은 모두 아로새긴 들창 비단을 드리운 문, 그림 그린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 성적한 주련(柱聯), 황금 빛깔 현판들이 현란하게 눈부실 지경이다.

그 안에 펼쳐 놓은 것은 모두 그 국내의 진기한 물건들이다. 변문(邊門)의 보잘것없는 이 땅에 이처럼 정치하고 아담한 감식(鑑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또 한 집에 들어가니 그 굉려(宏麗)함이 아까 강씨(康氏)의 집보다도 더 지나치나, 그 제도는 거의 한가지다. 대개 집을 세움에는 반드시 수백 보의 자리를 마련하여 길이나 넓이를 알맞게 하고 사면을 반듯하게 깎아서 측량기로 높고 낮음을 재고, 나침반(羅針盤)으로 방위를 잡은 다음에 대()를 쌓되, 바닥에는 돌을 깔고 그 위에 한 층 또는 두세 층 벽돌을 놓으며, 다시 돌을 다듬어서 대를 장식한다. 그 위에 집을 세우되, 모두 한일 자로 하여 꾸부러지게 하거나 잇달아 붙여 짓지 않는다. 첫째가 내실(內室)이요, 그 다음이 중당(中堂), 셋째는 전당(前堂), 넷째는 외실(外室)이다. 외실 밖은 한길이라 점방으로나 또는 시전(市廛)으로도 쓴다. ()마다 좌우의 곁채가 있으니, 이것이 곧 행랑과 재방(齋房)이다. 대개 집 한 채의 길이는 6(六楹)81012영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매우 넓어서 거의 우리나라의 보통 집 두 칸짜리만하다. 그리고 재목에 따라 길고 짧음을 마련하지 않고 또한 마음대로 넓히고 좁히는 것도 아니요, 꼭 자로 재어서 간살을 정한다. 집은 다 들보를 다섯 혹은 일곱으로 하여 땅바닥에서 용마루까지 그 높이를 따지면, 처마는 한가운데쯤 있게 되므로 물매가 매우 싸서 병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가파르다. 집 좌우와 후면은 부연(婦椽)이 없이 벽돌로 담을 쌓아 올려서 집 높이와 가지런히 하니, 서까래가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다. 동서의 양쪽 담벽에는 각기 둥근 창구멍을 뚫고, 남쪽에는 모두 문을 내고, 그 중 한가운데 한 칸을 드나드는 문으로 쓰되, 반드시 앞뒤가 꼭 맞서게 하였으므로 집이 서너 겹이라면 문은 여섯이나 또는 여덟 겹이나 되어도, 활짝 열어젖히면 안채로부터 바깥채에 이르기까지 문이 똑바로 화살같이 곧다. 그들이 이른바,

 

저 겹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 통하게 하는구나.”

함은, 그 곧고 바름을 이에 견준 말이다.

길에서 동지(同知) 이혜적(李惠迪)역관인데 정3품 당상관이다. 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궁벽한 시골 구석에 무어 볼 만한 게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연경인들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어요.”

하였더니, 이군은,

 

그렇습니다. 비록 크고 작으며 사치하고 검박한 구별은 있겠지만, 그 규모는 거의 한가집니다.”

한다.

대개 집을 짓는 데 있어 온통 벽돌만을 사용한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고 두께는 두 치이다. 한 개의 네모진 벽돌박이에서 찍어 낸 벽돌이건마는 귀가 떨어진 것도 못 쓰고, 모가 이지러진 것도 못 쓰며, 바탕이 뒤틀린 것도 못 쓴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를 어기면 그 집 전체가 틀리고 만다. 그러므로 같은 기계로 찍어냈건마는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염려하여, 반드시 곡척(曲尺)으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힘써 가지런히 하여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듯싶다. 그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 )( ) ()가 이룩된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이기어 붙이되 초지장처럼 엷으니 이는 겨우 돌 사이가 붙을 정도여서 그 흔적이 실밥 같아 보인다. 회를 이기는 법은 굵은 모래도 섞지 않고 진흙과 기()한다. 모래가 굵으면 어울리지 않고 흙이 진하면 터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검고도 부드러운 흙을 회와 섞어 이기어 그 빛깔이 거무스름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기와와 같다. 대체 그 특성은 진흙도 쓰지 않고 모래도 쓰지 않으며, 또 그 빛깔이 순수함을 취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어저귀(()의 일종) 따위를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다. 이는 우리나라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으니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함이요, 또 동백기름을 타서 젖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 하여 떨어지고 터지는 탈을 막는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과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보통 민가에는 원앙와(鴛鴦瓦 짝기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엮지 않고 삿자리를 몇 잎씩 펼 뿐이요,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인다. 한 장은 엎치고 한 장은 젖히어 자웅으로 서로 맞추어 틈사이는 한층한층 비늘진 데까지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운다. 이러니까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저절로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으며, 뱀이 서리고,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도 눈가는 곳마다 반듯반듯 바둑판을 그린 것처럼 쌓았다.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여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고양이 같은 놈들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 황새라 하고 사()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지지,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읍루(挹婁)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위씨(衛氏)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의 탁극탁이 씀),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식후에 변계함과 정 진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강영태(康永泰)가 문 밖에까지 나와서 읍()하며 전송하는데 자못 석별(惜別)의 뜻이 보이며, 또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될 터인즉 책력 한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淸心丸) 한 개를 내어 주었다.

한 점포 앞을 지나다 보니, 한쪽에 금으로 ()’ 자를 쓴 패()가 걸려 있는데, 그 곁줄에는 유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기만은 전당잡지 않는다는 뜻)’이란 다섯 글자가 씌었으니, 이것은 전당포(典當舖).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두셋이 그 안에서 뛰어 나와서 길을 막아 서며, 잠깐만 땀을 들이고 가라 한다. 이에 모두들 말에서 내려 따라 들어가 본즉, 그 모든 시설이 아까 강씨의 집보다도 더 훌륭하다. 뜰 가운데 큰 분()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속에는 서너 대의 연()이 심어져 있으며, 오색 붕어를 기르고 있다. 한 청년이 손바닥만 한 작은 비단그물을 가져와서 작은 항아리 쪽으로 가더니, 빨간 벌레 몇 마리를 떠다가 분 속에 띄운다. 그 벌레는 게알[蟹卵]같이 작으며, 모두 꼬물꼬물 움직인다. 청년이 다시 부채로 분의 가장자리[盆部]를 두들기면서 고기를 부르니, 고기가 모두 물 위로 나와서 물을 머금고 거품을 뿜는다.

마침 때가 한낮이라 불볕이 내리쬐어서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길을 떠났다. 정 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나는 정 진사에게 물었다.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떠한가.”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애.”

하고 답한다. 나는 또,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우리나라의 성곽제도[城制]는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저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틀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 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 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수고도 없을 게 아닌가. 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이 벽돌만한 게 없네.

이제 돌로 말하자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에 몇 명의 석수(石手)가 들어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내는 데까지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덕을 깎아내고 돌을 입히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옷을 입혀 놓은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뻔질하나 속은 실로 고르지 못한 법일세. 돌은 워낙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못한 것이기에, 조약돌로 그 궁둥이와 발등을 괴며, 언덕과 성과의 사이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므로, 장마를 한 번 치르고 나면 속이 텅 비고 배가 불러져서, 돌 한 개가 튀어나 빠질 경우 그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무너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요, 또 석회의 성질이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것일세.

내가 일찍이 차수(次修)와 더불어 성제를 논할 때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한 말이오 하더군 그래. 이는 가위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일세. 대개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터져 버리며, 돌을 배치하고 들떠 일어나는 까닭에 돌은 항상 외톨로 돌아서 겨우 흙과 겨루고 있을 따름이네. 벽돌은 석회로 이어 놓으면, 마치 어교(魚膠)가 나무에 합하는 것과 붕사(鵬砂)가 쇠에 닿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뭉치로 엉켜져 굳은 성을 이룩하므로,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다 비할 수 없겠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만 개의 단단함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겠지.”

하였다. 정 진사는 방금 말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것 같다. 그는 잠든 지 오래된 모양이다.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지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웬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정 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시냇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다. 오도하(五渡河)까지 5리만큼씩 돈대가 하나씩 있다. 이른바 두대자(頭臺子)이대자(二臺子)삼대자(三臺子)라는 것은 모두 봉대(烽臺 봉화를 놓는 곳)의 이름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마치 필통(筆筒)같이 동그랗다. 대 위에는 성첩(城堞)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 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길가에 간혹 널을 돌 무더기로 눌러 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 두어서 나무 모서리가 썩어 버린 것도 있다. 대개 뼈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불사른다 한다.

흔히 길 옆에 무덤이 있는데, 위가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아니하였으며, 백양(白楊)을 많이 줄지어 심었다.

도보(徒步)로 길 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적다. 걷는 이는 반드시 어깨에 포개(鋪盖) 침구를 포개라 한다 를 짊어졌다. 포개가 없으면 여점에서 재우지 않으니, 이는 도둑이 아닌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길가는 자는 눈의 정력을 기르고자 함이다. 말을 탄 이는 모두 검은 비단신을 신고, 걷는 이는 대체로 푸른 베신을 신었는데, 신바닥에는 모두 베를 수십 겹이나 받혀 댄 것이다. 미투리나 짚신은 보지를 못했다.

송참(松站)에서 묵다. 이 곳은 설리참(雪裏站)이라고도 하고, 또 설유참(雪劉站)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 70리를 갔다. 누가 말했다.

 

이곳은 옛날 진동보(鎭東堡)이다.”

 

[D-001]경조당상(京兆堂上) :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 한성부의 당상관을 말함.

[D-002]당서(唐書) : 유후(劉煦) 구당서(舊唐書), 구양수(歐陽修)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D-003]동이(東彝) : 어떤 본에는 동이(東夷)로 되었으나 그릇되었다. 연암은 이()는 야만족이라 하여 이()를 썼다.

[D-004]한서(漢書) : 동한(東漢, 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전한(前漢)의 역사서.

[D-005]금사(金史) : ()의 탁극탁(托克托) 등이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D-006]문헌통고(文獻通考) : 원의 마단림(馬端臨)이 지었다.

[D-007]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 또는 재선(在先)수기(修其)라고도 하였다. 연암의 제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9일 병자(丙子)

 

 

맑게 개다. 배로 삼가하(三家河)를 건넜다. 배가 마치 말구유같이 생겼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고, 상앗대도 없이 양편 강언덕에 아귀진 나무를 세우고 큰 밧줄을 건너질렀다. 그 줄을 따라가면 배가 저절로 오가기 마련이다. 말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다시 배로 유가하(劉家河)를 건너 황하장(黃河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이 되니 극도로 더웠다. 말 탄 채로 금가하(金家河)를 건너니, 여기가 이른바 팔도하(八渡河)이다. 임가대(林家臺)범가대(范家臺)대방신(大方身)소방신(小方身) 등지는 5리나 10리마다 마을이 즐비하고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졌으며, 때마침 올기장이 누렇게 익었고 옥수수 이삭이 한창 패었는데, 그 잎을 모조리 베었으니, 이는 말과 노새의 먹이로 쓰기도 하고, 또는 옥수숫대가 지기(地氣)를 오로지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관제묘(關帝廟)가 있고, 몇 집만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벽돌 굽는 큰 가마가 있어서 벽돌을 굽는다. 벽돌을 틀에 박아 내어 말리는 것이며, 전에 구워 놓은 것, 새로 구울 것들이 곳곳에 산무더기처럼 쌓였으니, 대개 벽돌이 무엇보다도 일용에 요긴한 물건인 까닭이다.

전당포에서 잠깐 쉬려는데, 주인이 중간방으로 맞이하여 더운 차() 한 잔을 권한다. 집안에는 진귀한 물건이 진열되었다. 시렁의 높이는 들보에 닿고, 그 위엔 전당 잡은 물건을 차례로 얹어 놓았다. 모두들 옷이다. 보자기에 싼 채 종이쪽을 붙여서 물건 임자의 성명별호(別號)상표(相標 얼굴의 특징을 기록한 것)거주(居住) 등을 적고는 다시,

 

모년모월모일에 무슨 물건을 무슨 자호(字號) 붙인 전당포에다 친히 건너주었다.”

라고 썼다. 그 이자는 10분의 2를 넘는 법이 없고, 기한을 지난 채 한 달이 넘으면 물건을 팔아 버릴 수 있다. 금자(金字)로 쓴 주련(柱聯),

 

홍범의 구주에는 먼저 부를 말하였고 / 洪範九疇先言富

대학의 십장에도 반은 재를 논하였는데 / 大學十章半論財

라는 것이 있다. 옥수숫대로 교묘하게 누각처럼 만들어, 그 속에 풀벌레 한 마리를 넣어 두고 그 우는 소리를 듣는다. 처마 끝에는 조롱을 달아매고 이상한 새 한 마리를 기른다.

이날 50리를 행하여 통원보(通遠堡)에서 묵다. 여기가 곧 진이보(鎭夷堡)이다.

 

 

[D-001]홍범(洪範) : 홍범은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국가의 기본 법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 1일 정축(丁丑)

 

 

새벽에 큰비가 내려 떠나지 못하다.

정 진사주 주부변군내원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상방의 건량판사(乾粮判事)이다. 등과 더불어 투전판을 열어서 소일도 할 겸 술값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몫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고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이나 하고 술은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잖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

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세요.”

한다. 나는,

 

주인께서도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

하며 답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쪽지에는 온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 촘촘히 은단추를 달았으며, 발엔 풀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신었다. 대개 만주 여자인 듯싶다. 다리에는 붕대를 감지 않고 발에는 궁혜(弓鞋)를 신지 않았음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온다. 나이나 얼굴이나가 20여 세쯤 되어 보인다. 그가 처녀임은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서 위로 틀어올린 것으로 보아서 분별할 수 있다. 생김새는 역시 억세고 사나우나, 다만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쇠양푼을 갖고 와서 퍼런 질그릇을 기울여 수수밥 한 사발을 수북하게 퍼담고, 양푼의 물을 부어서 서쪽 벽 아래 놓여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잎사귀째 장에 찍어서 밥과 같이 먹는다. 목에는 달걀만 한 혹이 달려 있다.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얼굴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 와서 아주 예사로 낯익었기 때문이리라.

뜰은 넓이가 수백 칸이나 된다. 장마비에 수렁이 되어 있다. 시냇가 물에 씻긴 조약돌이, 마치 바둑돌이나 참새알 같은 것이 애초에는 쓸데없는 물건이었지마는, 그 모양과 빛이 비슷한 것을 골라서 문간에 아롱진 봉새 모양으로 무늬지게 깔아서 수렁을 막았다.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닭은 모두 꼬리와 깃을 뽑고 두 겨드랑 밑의 털까지도 뜯어 버리어, 이따금 고깃덩이만 남은 닭이 절름거리면서 다닌다. 이는 빨리 키우는 한 방법이요, 또 이가 이는 것을 예방함이다. 여름이 되면 닭에 검은 이가 일어서, 꼬리와 날개에 붙어오르면 반드시 콧병이 생기며, 입으로는 누른 물을 토하고 목에는 가래 소리가 난다. 이것을 계역(雞疫)이라 한다. 그러므로 미리 그 꼬리와 깃을 뽑아서 시원한 기운을 통해 준다 한다. 꼴은 하도 추악해서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D-001]일부러 …… 보니 : 이 부분은 다른 본에 빠졌고, ‘수택본 일재본에서만 보인다.

[D-002]재를 …… 보았다 : 이 구절은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다른 본들에는, “그 복식의 제도를 구경하였다.”로 되었다.

[D-003]이는 빨리 …… 준다 한다 : 이 부분은 모든 본에 빠진 것을, ‘일재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일 무인(戊寅)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 늦게 개었다.

앞 시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으므로 떠나지 못했다. 정사가 내원과 주 주부를 시켜 앞 시내에 나가서 물을 보고 오라 한다. 나도 따라 나섰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큰 물이 앞을 가로막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들어가 그 얕고 깊음을 재게 하니, 열 발자국도 못 가서 어깨가 잠긴다. 돌아와서 수세를 알리니, 정사가 걱정하여 역관과 각방(各房)의 비장들을 모조리 불러서 각기 물 건널 계책을 말하게 한다. 부사와 서장관 역시 참석하였다. 부사가,

 

문짝과 수레의 바탕을 많이 세내어 떼를 매어서 건너는 게 어떠하리까.”

하니, 주 주부가,

 

, 참 좋은 계책이올시다.”

한다. 수역관이,

 

문짝이나 수레를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없으리다. 그런데 이 근처에 집 지으려고 둔 재목이 십여 간분 있으니 그것을 세낼 수는 있으나, 단지 이를 얽어맬 칡덩굴을 얻기 어려울 듯합니다. ”

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내가,

 

무어, 뗏목을 맬 것까지야 있소. 내게 한두 척이 있는데, 노도 있고 상앗대도 갖추었으나 다만 한 가지가 없소.”

하니, 주 주부가,

 

그럼, 없는 게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다만 그를 잘 저어갈 사공이 없소.”

한즉,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는다.

주인은 워낙 추솔하고 멍청하여 눈을 부릅뜨고도 고무래 정() 를 모를 무식쟁이였지만, 책상 위에는 오히려 양승암집(楊昇菴集) 사성원(四聲猿) 같은 책들이 놓여 있고, 길이 한 자 넘어 보이는 정남색(正藍色) 자기병에 조남성(趙南星)의 철여의(鐵如意)가 비스듬히 꽂혀 있으며, 운간(雲間) 호문명(胡文明)이 만든 조그만 납다색(蠟茶色) 향로며 그 밖의 교의탁자병풍장자(障子) 등이 모두 아치(雅致)가 있어서 궁벽한 시골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인의 살림살이는 좀 넉넉한가보오.”

하고 물은즉, 그는,

 

“1년 줄곧 부지런히 일해 봐야 기한을 면하지 못한답니다. 만일 귀국 사신의 행차가 없다면, 아주 살림살이는 막연할 형편입니다.”

한다. 나는 또,

 

아들과 딸을 몇이나 두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도둑놈 하나만 있으나, 아직 여의지 못했답니다.”

하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이오. 도둑놈 하나라니.”

, 도둑도 딸 다섯 둔 집에는 들지 않는다 하오니, 어찌 집안의 좀도둑이 아니옵니까.”

한다.

오후에 문을 나서 바람을 쐬었다. 수수밭 가운데서 별안간 새총 소리가 난다. 주인이 급히 나와 본다. 밭 속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한 손에 총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돼지 뒷다리를 끌고 나와 주인을 흘겨 보고,

 

, 이 짐승을 내놓아서 밭에 들여 보내지.”

하고 노한 음성을 낸다. 주인은 다만 송구한 기색으로 공손히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그 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끌고 가버린다. 주인은 자못 섭섭한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거듭 한탄만 한다. 내가,

 

그 자가 잡아간 돼지는 뉘 집에서 먹이던 돼지인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거죠.”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잘못 남의 밭에 들어갔기로서니 수숫대 하나 다친 것이 없는데, 그 놈이 왜 함부로 돼지를 잡아 죽이지요. 주인은 당연히 그 자에게 돼지 값을 물려야 하지 않겠소.”

한즉, 주인은,

 

값을 물리다니요, 돼지우리를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이 이쪽의 잘못이죠.”

한다.

대개 강희제(康熙帝 청의 제4대 황제)가 농사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그 법에 마소가 남의 곡식을 밟으면 갑절로 물어 주어야 하고, 함부로 마소를 놓는 자는 곤장 60대를 맞히며, 양이나 돼지가 밭에 들어간 것을 밭 임자가 보면, 곧 그 짐승을 잡아가도 주인은 감히 내가 주인인 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만 수레가 다니는 자유는 막지 못한다. 그리하여, 길이 수렁이 되면 밭이랑 사이로도 수레를 끌고 들어가기 쉬우므로, 밭 임자는 항상 길을 잘 닦아서 밭을 지키기에 힘쓴다고 한다.

마을 가에 벽돌가마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마침 거의 굳어서, 흙을 아궁이에 이겨 붙이고 물을 수십 통 길어다가 잇달아 가마 위로 들어붓는다. 가마 위가 조금 움푹 패어서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 가마가 한창 달아서 물을 부으면 곧 마르고 하므로 가마가 달아서 터지지 않게 물을 붓는 것 같다. 또 한 가마는 벌써 구워서 식어졌으므로, 방금 벽돌을 가마에서 끌어내는 중이다. 대체로 이 벽돌가마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기와가마와는 아주 다르다. 먼저 우리나라 가마의 잘못된 점을 말해야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와가마는 곧 하나의 뉘어 놓은 아궁이여서 가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가마를 만드는 벽돌이 없기 때문에 나무를 세워서 흙으로 바르고 큰 소나무를 연료로 삼아서 이를 말리는데, 그 비용이 벌써 수월찮다. 아궁이가 길기만 하고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한다.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 기운이 힘이 없으며, 불 기운이 힘이 없으므로 반드시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한다.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하므로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불길이 고르지 못하므로 불에 가까이 놓인 기와는 이지러지기가 일쑤이며, 먼 데 놓인 것은 잘 구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굽거나 옹기를 굽거나를 무론하고 모든 요업(窯業)의 제도가 다 이 모양이며, 그 소나무를 때는 법 역시 한가지니, 송진의 불광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세다. 그러나 소나무는 한번 베면 새 움이 돋아나지 않는 나무이므로, 한번 옹기장이를 잘못 만나면 사방의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된다. 백년을 두고 기른 것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 버리고, 다시 새처럼 사방으로 소나무를 찾아서 흩어져 가버린다. 이것은 오로지 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되어서,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점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이곳의 벽돌가마를 보니, 벽돌을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에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고, 또 마음대로 높고 크게 할 수 있어서 그 꼴이 마치 큰 종()을 엎어 놓은 것 같다. 가마 위는 못처럼 움푹 패게 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고, 옆구리에 연기 구멍 네댓을 내어서 불길이 잘 타오르게 되었으며, 그 속에 벽돌을 놓되 서로 기대어서 불꽃이 잘 통하도록 되어 있다. 대개 요약해 말한다면, 그 묘법은 벽돌을 쌓는 데 있다 하겠다. 이제 나로 하여금 손수 만들게 한다면 극히 쉬울 듯싶으나, 입으로 형용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정사가,

 

그 쌓은 것이 () 와 같던가.”

하고 묻기에, 내 대답하되,

 

그런 것 같기도 하오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니, 변 주부가,

 

그러면 책갑(冊匣)을 포개 놓은 것 같습디까.”

하기에, 나는 또,

 

그런 듯도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을 걸.”

하였다.

대략 그 쌓는 법이, 벽돌을 눕히지 않고 모로 세워서 여남은 줄을 방고래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다 벽돌을 비스듬히 놓아서 차차 가마 천장에 닿게까지 쌓아올린다. 그러는 중에 구멍이 저절로 뚫어져서 마치 고라니의 눈같이 된다. 불기운이 그리로 치오르면 그것이 각기 불목이 되어, 그 수없이 많은 불목이 불꽃을 빨아들이므로 불기운이 언제나 세어서, 비록 저 하찮은 수수깡이나 기장대를 때도 고루 굽히고 잘 익는다. 그러므로 터지거나 뒤틀어지거나 할 걱정은 저절로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옹기장이는 먼저 그 제도를 연구하지 않고, 다만 큰 솔밭이 없으면 가마를 놓을 수 없다고만 한다. 이제 요업(窯業)은 금할 수 없는 일이요, 소나무 역시 한이 있는 물건인즉, 먼저 가마의 제도를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되면 양편이 다 이로울 것이다. 옛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과 노가재(老稼齋)가 모두 벽돌의 이로움을 논하였으되, 가마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수깡 3백 줌이면 한 가마를 구울 수 있는데, 벽돌 8천 개가 나온다.”

한다. 수수깡의 길이가 길 반이고, 굵기가 엄지 손가락만큼씩 되니, 한 줌이라야 겨우 너덧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 수수깡을 때면 불과 천 개 남짓 들여서 거의 만 개의 벽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 해가 몹시 지루하여 한 해[]인 듯싶고,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더욱 심해져서 졸려 견딜 수 없던 차에, 곁방에서 투전판이 벌어져 떠들고 야단들이다. 나도 뛰어가서 그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땄으므로, 술을 사서 실컷 마시니 가히 어제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다. 내가,

 

그래도 불복인가.”

하니, 조 주부와 변 주부가,

 

요행으로 이겼을 뿐이죠.”

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나는,

 

뜻을 얻은 곳에 두 번 가지 말아야 하느니,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하고 그만두었다.

 

 

[D-001]양승암집(楊昇菴集) : 명의 학자 양신(楊愼)의 문집이다. 승암은 그의 호.

[D-002]사성원(四聲猿) : 명 서위(徐渭)가 지은 전기(傳奇).

[D-003]조남성(趙南星) : 명 희종(明熹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로서, 위충현(魏忠賢)에게 몰리어 대주(代州)로 귀양가서 죽었다.

[D-004]철여의(鐵如意) : 쇠로 만든 여의. 여의는 손에 지니는 완상물의 일종.

[D-005]운간(雲間) :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의 옛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일 기묘(己卯)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가 아침과 낮에는 화창하게 개었다. 밤들어 다시금 큰비가 내려서 이튿날 새벽까지 멎지 않으므로 또 묵다.

아침에 일어나 들창을 여니, 지리하던 비가 깨끗이 개고 맑은 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며 날씨가 청명한 것으로 보아서, 낮에는 더울 것 같다. 석류꽃이 땅에 가득히 떨어져서 붉은 진흙으로 변해 버렸다. 수구화는 이슬에 함빡 젖고, 옥잠화는 눈덩이처럼 머리를 쳐든다.

문 밖에서 퉁소피리징 등의 소리가 나기에 급히 나가 보니, 신행가는 행차다. 채색 그림 그린 사초롱[紗燈籠]이 여섯 쌍, 푸른 일산(日傘)이 한 쌍, 붉은 일산이 한 쌍이요, 퉁소 한 쌍, 날라리 한 쌍, 피리 한 쌍, 징경 한 쌍이 있고, 가운데 푸른 가마 한 채를 교군 넷이 메고 간다. 사면에 유리를 끼어서 창을 내었고, 네모에는 색실을 드리워서 술을 달았다. 가마 한 허리에 통나무를 받혀서 푸른 밧줄로 가로 묶고, 그 통나무 앞뒤로 다시 짧은 막대를 가로질러 얽어매어 그 양쪽 머리를 네 사람이 메었는데, 여덟 발자국이 발맞추어 한 줄로 가므로, 흔들리거나 출렁거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허공에 떠서 가는 폭이다. 그 법이 아주 묘하다. 가마 뒤에 수레 두 채가 있는데, 모두 검은 베로 방처럼 둘러씌우고 나귀 한 마리로 끌고 간다. 한 수레에는 두 늙은 여인을 태웠는데, 얼굴은 모두 추하지만 성적(成赤)은 폐하지 않고 앞머리가 다 벗어져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번들번들 빛난다. 시늉만 생긴 쪽이 뒤에 달렸는데 가지가지 꽃을 빈틈없이 꽂았다. 양쪽 귀에는 귀고리를 달고, 몸에는 검은 웃옷에 누런 치마를 입었다. 또 한 수레에는 젊은 여인 세 사람을 태웠는데, 주홍빛 또는 푸른빛 바지를 입고 모두 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그 중에 한 소녀는 제법 아리땁다. 대체 그 늙은이는 한님과 젖어미요, 이 소녀들은 몸종이라 한다.

30여 명의 말 탄 군사가 삑 둘러서 옹위(擁衛)한 속에 한 뚱뚱한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입 가에나 턱 밑에 검은 수염이 거칠게 헝클어지고, 구조망포(九爪蠎袍 청인 관리들이 입는 관복)를 걸쳐 입었으며, 흰 말과 금안장에 은등자를 넌지시 디디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찼다. 뒤에는 수레 세 바리에 의롱(衣籠)이 가득 실렸다.

내가 주인더러,

 

이 동리에도 수재(秀才)나 훈장(訓長)이 있을 테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이런 시골 구석에 아무런 왕래가 없으니 무슨 학구선생(學究先生)이 있사오리까마는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수재 한 분이 세관(稅官)을 따라 서울서 오셨는데, 도중에서 이질을 만나 이곳에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그려. 이곳 사람들의 각별한 구료를 입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이르기까지에 아주 말끔히 낫게 되었죠. 그 선생님은 문장이 뛰어날 뿐더러, 겸하여 만주글도 쓸 줄 안답니다. 그는 계속해 이곳에 머물러 계셔서, 한두 해 동안 글방을 내고 이 시골의 아이들을 성심껏 가르쳐서 병 구료를 해 준 은혜를 갚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 관제묘에 계십니다.”

한다. 나는,

 

그럼, 잠깐 주인이 인도해 줄 수 없겠소.”

한즉, 주인은,

 

무어, 남의 길잡이를 요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하며 손을 들어,

 

저기 저 높다란 사당집이 거기죠.”

하고 가리킨다. 나는,

 

그 선생의 성함은 무엇이지요?”

하니, 주인은,

 

이 마을에서는 모두들 그를 부 선생(富先生)이라 부릅니다.”

한다. 나는 또,

 

부 선생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소?”

한즉, 주인은,

 

나으리께서 친히 가셔서 직접 물어 보십시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붉은 종이 수십 쪽을 들고 나와서 펴 보이며,

 

이게 부 선생님께서 친히 써 주신 글씨입니다.”

한다. 그 붉은 종이의 글씨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내리쓴 가는 글자로,

 

아무 어른 존전(尊前)에 아뢰옵니다. 모년모월모일에 어른께옵서 제게로 왕림하여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주인은 이어서,

 

이것은 제 아우가 지난 봄에 사위를 볼 때에 청첩을 그에게 빌려서 쓴 것입니다.”

한다. 대체로 그 글씨는 겨우 글자가 모양을 이룬 정도이다. 다만 수십 장의 자양이 크지도 않고 작지고 않으며, 실에 구슬을 꿴 듯 책판에 글자를 박은 듯 똑같다. 나는 혼자서,

 

혹시 그 수재는 부정공(富鄭公)의 후손이나 아닌가.”

생각하고, 곧 시대를 불러서 함께 관제묘를 찾아갔다. 괴괴하여 인기척이 없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차에, 오른편 곁방에서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있다가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목을 늘여 한번 살피더니, 이내 뛰어나와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 달음에 어디로 가버린다. 나는 이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너의 스승님은 어디 계시냐?”

하고 물은즉, 아이는,

 

무엇 말씀이어요?”

한다. 나는 또,

 

부 선생님 말씀이야.”

하였으나, 아이는 조금도 듣는 체 않고 다만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휑하니 가버린다. 내가 시대더러,

 

그 선생이 아마 이 속에 있겠지.”

하고, 줄곧 오른편 곁방으로 가서 문을 열어 보니, 빈 교의 네댓이 놓였을 뿐,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닫고 몸을 돌이키려고 할 즈음에, 아까 그 아이가 한 노인을 데리고 온다. 생각에 이 이가 곧 란 사람인 듯싶다. 그가 잠깐 이웃에 나간 것을 아이가 달려가서 손님이 왔다 하여 돌아온 모양이다. 그 생김생김을 보니, 단아한 빛이라곤 도무지 없다. 앞으로 가서 깍듯이 읍()하자, 노인이 별안간에 와락 달려들어서 허리를 껴안고 힘껏 들었다 놓으며, 또 손을 잡고 흔들면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는다. 처음에는 놀랍고, 다음에는 불쾌하였다. 내가,

 

당신이 부공(富公)이시오?”

한즉, 그 노인이 아주 기뻐하면서,

 

영감께서 어찌 제 성을 아십니까.”

한다. 나는,

 

저는 오랫동안 선생의 성화를 높이 들어서, 마치 우레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싶습니다.”

한즉, 부가,

 

당신의 성함은 무어라 하십니까.”

한다. 내 성명을 써서 보이니, 그 역시 써 보인다. 이름은 부도삼격(富圖三格)이요, 호는 송재(松齋), 자는 덕재(德齋)라 한다. 나는,

 

삼격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즉, 그는,

 

이건 저의 성명이옵니다.”

한다. 나는 또,

 

살고 계신 고을과 관향(貫鄕)은 어디셔요.”

한즉, 그는,

 

저는 만주양람기(鑲藍旗)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하고 다시,

 

영감께서는 이번엔 의당 면가(面駕)하시겠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한즉, 그는,

 

황제께옵서 의당 영감을 불러 보시겠지요?”

한다. 내가,

 

황제께서 만일 접견하신다면 노인의 말씀을 잘 여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붙게 할 생각인데, 어떠하오.”

한즉, 그는,

 

만일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박공(朴公)의 갸륵하신 은덕은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도 갚기 어렵겠소이다.”

한다. 나는 또,

 

물에 막혀서 이곳에 머무른 지가 벌써 수일이나 되었소. 이다지 긴 여름 해를 보내기 난감하니, 노인께 볼 만한 책이 있으면 며칠만 빌려 주실 수 없겠소.”

하였더니, 그는,

 

별로 없습니다. 전에 서울 있을 때, 가친 절공(折公)이 명성당(鳴盛堂 북경 유리창(琉璃廠)에 있었다)이라고 이름을 붙인 각포(刻舖 판각하는 집)를 내었는데, 그 때의 책 목록(目錄)이 마침 행장 속에 들어 있사온즉, 만일 소일삼아 보시려면 빌려 드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영감께서는 이제 바로 돌아가셔서 진짜 환약 청심환이다. 과 조선 부채 중에 잘 된 것을 골라서 초면의 정표로 주신다면 영감의 참된 사귐의 뜻을 알겠으니, 그 때에 서목을 빌려 드려도 늦지 않겠소이다.”

한다. 그 생김새와 말투를 보자니, 뜻이 하도 비루하고 용렬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바가 못 될 뿐더러, 오래 앉았을 수도 없으므로 곧 하직하고 일어섰다. 부가 문에 나와 읍을 하여 보내면서,

 

귀국의 명주를 살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정사가,

 

무어 볼 만한 것이 있던가. 더위 먹을까 조심스러우이.”

하기에, 나는,

 

아까 한 늙은 훈장을 만났는데, 한갓 만주 사람일 뿐 아니라 몹시 비루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위인이 못 됩디다그려.”

한즉, 정사는,

 

그가 이왕 구하는 바에야 어찌 환약 한 개, 부채 한 자루를 아끼겠는가. 그리고 서목을 빌려다 봄도 해롭진 않아.”

한다. 드디어 시대를 시켜서 청심환 한 개와 어두선(魚頭扇) 한 자루를 보냈더니, 시대가 이내 크기가 손바닥만하고 몇 장 되지도 않은 작은 책을 들고 돌아온다. 그나마 모두 빈 종이였고, 기록된 서목은 모두 청인의 소품(小品) 70여 종이다. 이는 불과 몇 장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많은 값을 요구하니, 그의 뻔뻔스러움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왕 빌려 온 것이요, 또 눈을 새롭기 하기 위하여, 베껴 놓고 돌려 보내기로 한다.

 

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척독신어(尺牘新語) 6(六册) : 왕기(汪淇 청대 학자) 첨의(瞻漪 왕기의 자) ().

분서(焚書) 6, 장서(藏書) 18, 속장서(續藏書) 9 : 이지(李贄 명의 사상가요 문인, 이름을 재지(載贄)라고도 함) 탁오(卓吾 이지의 자)  ().

궁규소명록(宮閨小名錄), 장주잡설(長洲雜說), 서당잡조(西堂雜俎) : 우동(尤侗 명의 문학가) 전성(展成 우동의 자) .

균랑우필(筠廊偶筆) : 송락(宋犖 청의 문인) 목중(牧仲 송락의 자) .

동서자(同書字), 촉민소기(蜀閩小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 주량공(周亮工 명말 청조 문학가) 원량(元亮 주량공의 자) .

사례촬요(四禮撮要) : 감경(甘京 청의 학자, 자는 건재(健齋)) .

설림(說林), 서하시화(西河詩話) : 모기령(毛奇齡 청대의 학자, 자는 대가(大可)) .

운백광림(韻白匡林), 운학통지(韻學通指), 손서(潠書) : 모선서(毛先舒 청대의 시인) 치황(稚黃 모선서의 자) .

서산기유(西山紀游) : 주금연(周金然 청대의 시인, 자는 광거(廣居)) .

일지록(日知錄), 북평고금기(北平古今記) : 고염무(顧炎武 청대의 학자, 자는 영인(寧人)) .

부지성명록(不知姓名錄) : 이청(李淸 청의 학자) 영벽(映碧 이청의 호, 자는 심수(心水)) .

장설(蔣說) : 장호신(蔣虎臣) .

영매암억어(影梅菴憶語) : 모양(冒襄 명말 학자) 벽강(辟疆 모양의 자) .

고금서자변와(古今書字辨訛), 동산담원(東山談苑), 추설총담(秋雪叢談) : 여회(余懹 명말 학자) 담심(淡心 여회의 자) .

동야전기(冬夜箋記) : 왕숭간(王崇簡 청대 학자, 자는 경재(敬載)) .

황화기문(皇華記聞), 지북우담(池北偶談), 향조필기(香祖筆記) : 왕사진(王士禛 청대의 문인, 사정(士禎)이라고도 함.) 이상(貽上 왕사진의 자) .

모각양추(毛角陽秋), 군서두설(羣書頭屑), 규합어림(閨閤語林), 주조일사(朱鳥逸史) : 왕사록(王士祿 왕사진의 형으로 문인, 자는 자저(子底)) .

입옹통보(笠翁通譜), 무성희(無聲戲), 소설귀수전고사(小說鬼輸錢故事) : 이어(李漁 청대의 극작가) 입옹(笠翁 이어의 자) .

천외담(天外談) : 석방(石龎 청대 문인, 자는 천외(天外)) .

주대기연(奏對機緣) : 홍각(弘覺) .

십구종(十九種) : 시호신(柴虎臣) .

귤보(橘譜) : 저호남(諸虎男) .

일하구문(日下舊聞) 20, 분묵춘추(粉黑春秋) : 주이준(朱彝尊 청대 학자) 석창(錫鬯 주이준의 자) .

우초신지(虞初新志) : 장조(張潮 청대 학자) 산래(山來 장조의 자) .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 8 : 조길사(趙吉士 청대 학자, 자는 천우(天羽)) .

설령(說齡) : 왕완(汪涴) .

설부(說郛) : 오진방(吳震方 청대 학자) 청단(靑壇 오진방의 자) .

단궤총서(檀几叢書) : 왕탁(王晫 청대 학자) .

삼어당일기(三魚堂日記) : 육롱기(陸隴其 청대 성리학자, 자는 가서(稼書)) .

역선록(亦禪錄), 유몽영(幽夢影) : 장조(張潮) .

양경구구록(兩京求舊錄) : 주무서(朱茂曙) .

연주객화(燕舟客話) : 주재준(周在浚 주양공의 아들, 자는 설객(雪客)) .

숭정유록(崇禎遺錄) : 왕세덕(王世德 명말 절사(節士), 자는 극승(克承)) .

입해기(入海記) : 사사련(査嗣璉 청대 학자, 다른 이름은 신행(愼行), 자는 하중(夏重) 또는 회여(悔餘)) .

유구잡록(琉球雜錄) : 왕즙(汪楫 청대 학자, 자는 주차(舟次)) .

박물전휘(博物典彙) : 황도주(黃道周 명말 절사, 자는 유현(幼玄) 또는 이약(螭若)) .

관해기행(觀海紀行) : 시윤장(施閏章 청대 문인, 자는 상백(尙白)) .

석진일기(析津日記) : 주운(周篔 청대 학자, 자는 청사(靑士), 또는 당곡(簹谷)) .

 

정 진사와 함께 나누어 베껴서 이 뒤에 책사에서 참고하기로 하고, 곧 시대를 시켜서 돌려 보내고, 또 시대더러,

 

이런 책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영감께서 이 서목을 보시지 않았소.”

라고 말하라 일렀더니,시대가 돌아와서,

 

부씨가 제가 전하는 말을 듣더니, 자못 계면쩍은 빛을 보이면서 저에게 수건 한 개를 주더이다.”

한다. 그 수건의 길이는 두 자 남짓한 추사(縐紗 올이 말려들게 짠 천)인데, 새 감으로 만든 것이다.

 

 

[D-001]수재(秀才) : ()()()의 학교에 있는 생원(生員).

[D-002]부정공(富鄭公) : () 인종(仁宗) 때의 정치가 부필(富弼). 부는 성이요, 정은 봉호.

[D-003]양람기(鑲藍旗) : 만주족은 전부 군대의 편제로 하여 팔기(八旗)로 나누었는데, 이는 그 중의 하나이다.

[D-004]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 원전에는 잇달아 씌어 있으나, 위의 예단물목(禮單物目)’의 예를 따라 별도로 제목을 붙이고 정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4일 경진(庚辰)

 

 

어젯밤부터 밤새도록 비가 억수로 퍼부어서 길을 떠나지 못했다.

양승암집도 보며 바둑도 두어 심심풀이하다. 부사와 서장관이 상사의 처소에 모이고, 또 다른 여러 사람을 불러서 물 건널 방도를 묻다가, 오래되어서야 모두 돌아가다. 아마 별 좋은 계책이 없는 모양이다.

 

 

[D-001]바둑 : ‘수택본에는 투전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5일 신사(辛巳)

 

 

맑게 개었다. 물에 막혀서 또 묵다.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는다. 나는 그 구들 제도의 대략을 엿보았다. 먼저 높이 한 자 남짓하게 구들바닥을 쌓아서 편평하게 만든 뒤에, 깨뜨린 벽돌로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그 위에는 벽돌을 깔 뿐이다.

벽돌의 두께가 본시 같으므로 깨뜨려서 굄돌을 해도 절름발이가 될 리 없고, 벽돌의 몸이 본디 가지런하므로 나란히 깔아 놓으면 틈이 날 리 없다. 고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만하고, 굄돌은 갈마들며 불목이 되어 있다. 불이 불목에 이르면 그 넘어가는 힘이 빨아들이듯 하므로, 불꽃이 재를 휘몰아 메어지듯 세차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기어, 도로 나올 새가 없이 쏜살같이 굴뚝으로 빠져 나간다. 굴뚝의 깊이는 길이 넘는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말의 개자리[犬座]. 불꽃이 항상 재를 몰아다가 고래 속에 가득히 떨어뜨리므로, 3년 만에 한 번씩 고래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한다. 부뚜막은 한 길이나 땅을 파서 위로 아궁이를 내고, 땔나무는 거꾸로 집어 넣는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만큼 땅을 뚫고,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봉당바닥과 가지런히 한다. 그 빈 데서 바람이 일어나서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 넣으므로, 연기가 조금도 새지 않는다. 또 굴뚝을 내는 법이,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고 벽돌을 탑처럼 쌓아올리되 지붕과 가지런하게 하였으므로,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굴러 들어서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이듯 한다. 이 법이 가장 묘하다. 대개 굴뚝에 틈이 생기면, 약간의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온돌은 항상 불을 내뿜고 방이 골고루 덥지 않다. 그 잘못이 모두 굴뚝에 있다. 혹은 싸리로 엮은 농()에 종이를 바르고, 혹은 나무 판자로 통을 만들어 쓴다. 처음 세운 곳에 흙이 틈이 나거나, 혹은 종이가 떨어지거나, 또는 나무통이 벌어지거나 하면, 연기 새는 것은 막을 길이 없고, 바람이 한 번 크게 불면 연통은 소용이 없게 된다. 나는 생각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수많은 형제들의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변계함이,

 

이곳 구들은 아무래도 이상해요. 우리나라 온돌만 못한 것 같아요.”

하기에, 나는,

 

못한 까닭이 무어지.”

하고 물었다. 변군은,

 

어찌, 저 기름 넉 장을 반듯하게 깔아서, 빛은 화제(火齊 운모(雲母)의 일종으로 빛이 붉다)와 같고 번드름하기는 수골(水骨)과 같을 수야 있겠소.”

한다. 나는,

 

이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만 못한 것은 그럴싸한 말이야. 그러나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본받아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깔아만 보아. 누가 금할 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나라 온돌제도는 여섯 가지 흠이 있으나 아무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내 시험조로 한번 논할 테니, 자네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고 작음과 두껍고 얇음이 애초에 고르지 못하므로, 조약돌로 네모를 괴어서 그 절름발이를 금지하려 했으나 돌이 타고 흙이 마르면 곧잘 허물어짐이 첫째 흠이요, 돌이 울퉁불퉁하여 옴폭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므로, 불을 때어도 고루 덥지 못함이 둘째 흠이요, 불고래가 덩실 높아서 불길이 서로 맞물지 못함이 셋째 흠이요, 벽이 성기고 얇아서 곧잘 틈이 생기므로, 바람이 새고 불이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됨이 넷째 흠이요,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길이 안으로 빨리어 들어가지 않고 땔나무 끝에서만 남실거림이 다섯째 흠이요, 또 방을 말리려면 적어도 땔나무가 백 단은 들고, 열흘 안으로 입주를 못함이 여섯째 흠이다. 이제 곧 자네와 더불어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이루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 있을 것이니, 그 어떠한가.”

하고 설명하였다.

저녁에 여럿이 술을 몇 잔 나누고, 밤이 이슥하여 취해 돌아와서 누웠다. 정사의 맞은편 방인데, 다만 베 휘장이 중간을 가리었다. 정사는 벌써 한잠이 들었고, 나 혼자 담배를 피워 물고 정신이 몽롱한데, 머리맡에서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거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른즉,

 

도이노음이오(擣伊鹵音爾幺).”

하고 대답한다. 말소리가 심히 수상해서, 나는,

 

이놈 누구야.”

하고 거듭 소리친즉,

 

소인 도이노음이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시대와 상방(上房) 하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난다. 뺨 치는 소리가 들리고, 덜미를 밀어서 문 밖으로 끌어가는 모양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저 갑군(甲軍)이 밤마다 우리 일행의 숙소를 순찰하여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어가는 것을, 깊이 잠든 뒤이므로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갑군이 제 스스로 도이노음이라 함은 더욱 절도할 일이다.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하니, 이는 대개 도이(島夷)’의 준말이요, ‘노음(老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요, ‘이오(伊吾)’란 높은 어른에게 여쭈는 말이다. 갑군이 오랫동안 사행을 치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배우되, 다만 란 말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한바탕의 소란 때문에 그만 잠이 달아나, 이어 벼룩에게 시달렸다. 정사 역시 잠이 달아났는지 촛불을 켠 채 그냥 날을 새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일 임오(壬午)

 

 

개었다.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났다. 나는 정사의 가마에 함께 타고 건넜다. 하인 30여 명이 알몸으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 강 한가운데쯤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별안간 왼쪽으로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니 사세가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정사와 서로 부둥켜 안고서 겨우 물에 빠짐을 면했다. 저쪽 강언덕에 올라서 물 건너는 자들을 바라보니, 혹은 사람의 목을 타고 건너고, 혹은 좌우에서 서로 부축하여 건너기도 하며, 더러는 나무로 떼를 엮어서 타고 네 사람이 어깨로 메고 건너기도 한다. 말을 타고 떠서 건너는 이는 모두 머리를 쳐들어서 하늘만 바라보고, 혹은 두 눈을 꼭 감기도 하고, 혹은 억지로 웃음을 짓기도 한다. 하인들은 모두 안장을 풀어 어깨에 메고 건너는데 젖을까 염려하는 모양이다. 이미 건너왔다 다시 건너가려는 이도 무엇을 어깨에 지고 물에 들므로, 이상하여 물은즉,

 

빈 손으로 물에 들면 몸이 가벼워 떠내려가기 쉬우므로,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어깨를 눌러야 된다.”

한다. 몇 번씩 갔다왔다한 사람은 추워서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다. 산 속 물이 몹시 찬 때문이다.

초하구(草河口)에서 점심을 먹다. 이른바 답동(畓洞)이니, 이곳이 항상 진창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이름지었다 한다. () 자는 본시 없는 글자인데, 우리나라 아전들 장부에 수전(水田) 두 글자를 합쳐서 논이란 뜻을 붙이고, ‘()’ 자의 음을 빌렸다.분수령(分水嶺)고가령(高家嶺)유가령(劉家嶺)을 넘어 연산관(連山關)에서 묵다. 이날 60리를 갔다.

밤에 조금 취하여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 성중에 있었다. 궁궐(宮闕)과 성지(城地)와 여염과 시정들이 몹시 번화장려하다. 나는 스스로,

 

여기가 이처럼 장관일 줄은 몰랐네그려. 내 집에 돌아가서 이를 자랑해야지.”

하고 드디어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내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나는 소리개처럼 날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야곡(冶谷) 옛 집에 이르러 안방 남창 밑에 앉았다. 형님(박희원(朴喜源))께서,

 

심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듣기보다 훨씬 낫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 수없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마침 남쪽 담장 밖을 내다보니, 옆집 회나무 가지가 우거졌는데, 그 위에 큰 별 하나가 휘황히 번쩍이고 있다. 나는 형님께,

 

저 별을 아십니까.”

하고 사뢴즉, 형님은,

 

이름도 모르겠다.”

하시기에, 나는,

 

저게 노인성(老人星 남극성(南極星))이올시다.”

하고 일어나 형님께 절하고,

 

제가 잠시 집에 돌아옴은 심양 이야기를 상세히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제 갈 길이 바빠서 하직드립니다.”

하고, 안문을 나와서 마루를 지나 사랑 일각문을 열고 나섰다. 머리를 돌이켜 북쪽을 바라본즉, 길마재[鞍峴] 여러 봉우리가 역력히 얼굴을 드러낸다. 그제야 홀연히 깨달았다.

 

아아, 내가 바보야. 내 홀로 어이 책문을 들어간담. 여기서 책문이 천여 리니, 누가 나를 기다리고 머물러 있으리.”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안타깝기 짝이 없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나, 문지도리가 하도 빡빡하여 열리지 않으므로, 큰 소리로 장복을 부르려 하나, 소리가 목에 걸려서 나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힘껏 문을 밀다가 잠을 깨었다. 정사가 마침,

 

연암(燕巖).”

하고 부른다. 내 오히려 어리둥절하여,

 

여기가 어디오.”

한즉, 정사는,

 

아까부터 가위에 눌린 지 오래야.”

한다.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으며 머리를 퉁기고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제법 상쾌해진다. 한편 섭섭하고도 한편은 기쁜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이 뒤숭숭하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자리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공상에 잠겨서 날새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연산관은 또 아골관(鴉鶻關)이라고도 부른다.

 

 

[D-001]야곡(冶谷) : 서울 시내 서북방에 있던 동리 이름으로, 연암이 세거하던 곳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일 계미(癸未)

 

 

개었다.

2()를 가서 말을 타고 그냥 물을 건넜다. 강물이 비록 넓지는 않으나, 물살이 어제 건넜던 곳보다도 훨씬 세다. 무릎을 옴츠리며 두 발을 모아서 안장 위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창대는 말머리를 꽉 껴안고 장복은 힘껏 내 엉덩이를 부축하여, 서로 목숨을 의지해서 잠시 동안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말을 모는 소리조차 오호(嗚呼)’ 말에게 조심해 가자고 타이르는 소리가 원래 호호(好護)’인데,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오호(嗚呼)’와 비슷하다. 하니, 어쩐지 처량하게 들린다. 말이 강 복판에 이르자, 갑자기 그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대개 물이 말의 배에 닿으면 네 발굽이 저절로 뜨기 때문에 누워서 건너는 셈이다.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서,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짐을 면하였다. 나 역시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창대도 말다리에 채여 자칫하면 변을 당할 뻔하였으나, 말이 홀연 머리를 들고 몸을 바로 가누니, 물이 얕아져서 발이 땅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마운령(摩雲嶺)을 넘어 천수참(千水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엔 몹시 무더웠다. 청석령(靑石嶺)을 넘다보니 고갯마루에 관제묘가 있는데, 매우 영검스럽다 하여 역부와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탁자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혹은 참외를 사서 바치기도 하고, 역관들 중에는 향을 피우고 제비를 뽑아서 평생의 신수를 점쳐 보는 이도 있었다. 한 도사(道士)가 바리때를 두드리며 돈을 구걸한다. 그는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 환속한 중과 같기도 하고, 머리에는 등립(藤笠)을 쓰고 몸에는 야견사(野繭紗)로 만든 도포(道袍) 한 벌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마치 우리나라 선비들의 차림새와 같으나, 다만 검은 빛깔의 방령(方領)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또 한 도사는 참외와 달걀을 파는데, 참외 맛이 매우 달고 물이 많으며, 달걀은 맛이 삼삼하다.

밤에는 낭자산(狼字山)에서 묵었다. 이날 큰 재를 둘이나 넘었다. 80리를 행하였다. 마운령은 회령령(會寧嶺)이라고도 부른다. 그 높이나 가파르기가 우리나라 관북(關北)의마천령(摩天嶺)에 못지않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일 갑신(甲申)

 

개었다.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서,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 하나를 접어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국궁(鞠躬)하고 말 앞으로 달려 나와서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백탑(白塔)이 보입니다.”

한다. 태복은 정 진사의 마두다. 아직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빨리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人生)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한 곳이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그래, 아니 아니. 천고의 영웅(英雄)이 잘 울었고, 미인(美人)은 눈물 많다지.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기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오. 지극한 정()이 우러나오는 곳에,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하여 상고를 당했을 때 억지로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지. 그러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란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그러므로, 저 가생(賈生)은 일찍이 그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해서 별안간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히 여기지 않으리오.”

한즉, 정은,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한다. 나는,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가.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지.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리 없으며 의당 즐겁고 웃어야 할 정만 있어야 하련만, 도리어 분한(忿恨)이 가슴에 사무친 것같이 자주 울부짖기만 하니, 이는 곧 인생이란 신성(神聖)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마침내는 죽어야만 하고 또 그 사이에는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에, 이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서 스스로를 조상함인가. 그러나 갓난아기의 본정이란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거요. 무릇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나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 것이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毗盧峯)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황해도의 고을)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1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하였다.

한낮은 몹시 무더웠다. 말을 달려 고려총(高麗叢)아미장(阿彌庄)을 지나서 길을 나누어 갔다. 나는 조 주부 달동과 변군내원정 진사와 하인 이학령(李鶴齡)과 더불어 구요양(舊遼陽)에 들어갔다. 구요양은 봉황성보다도 10배나 더 번화하고 호화스러웠다. 따로 요동기(遼東記)를 썼다. 서문(西門)을 나와 백탑(白塔)을 보았다. 제작 기술이 뛰어나고 규모가 웅장하여 요동 벌판과 잘 어울렸다. 따로 백탑기(白塔記)가 있다.

 

 

[D-001]칠정(七情) : 예기(禮記)에서 말한, 사람이 가진 일곱 가지의 감정. 곧 희()()()()()()()을 말한다.

[D-002]가생(賈生) : ()의 신진 문학가. 이름은 의()인데, 나이가 젊었으므로 가생으로 불리었다. 그는 이론이 날카로웠으므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쫓겨났으나, 오히려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이라는 정견을 올려서, 시사(時事)의 통곡(痛哭)유체(流涕)장태식(長太息)할 만함을 진술하였다.

[D-003]선실(宣室) : 한의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정실(正室). 문제가 이곳에서 가의에게 귀신(鬼神)에 대한 이론을 물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구요동기(舊遼東記)

 

 

요동의 구성(舊城)은 한()의 양평(襄平)요양(遼陽) 두 현() 지역에 있었다. ()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웅거한 바 되었으며, ()()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은 행성(行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은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양주(遼陽州)로 승격되었다.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新遼陽)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인데, 혹은 이르기를,

 

이 성은 웅정필(熊廷弼)이 쌓은 것이다. 이 성이 옛날에는 몹시 낮고 비좁았는데, 정필이 적기(敵騎)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성을 헐었다. 청인이 이를 보고 의심하여 감히 가까이 이르지 못하다가, 고쳐 쌓는다는 정보를 정탐해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밑에 이르렀으나, 하룻밤 사이에 새로 쌓은 성이 높다랗게 이룩되었다. 나중에 정필이 이곳을 떠나자 요양이 함락되었다. 청인이 그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느라 어려웠던 점을 분히 여겨서 성을 헐어 버릴 적에 싸움에 이긴 열쌘 군사들을 동원했음에도 열흘이 가도 다 헐지 못하였다.”

한다. ()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시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청나라 황제(皇帝 고종(高宗))가 작년에 전운시(全韻詩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를 지어 이 성이 함락한 사실의 시말을 상세히 적고 또 말하기를,

 

명의 신하로서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우리 선황제께옵서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때 연경에 있는 명의 군신(君臣)들은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과 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러고서야 망하지 않으련들 될 수 있으리오.”

하였다. 명사(明史)를 상고하건대,

 

웅정필이 광녕(廣寧)을 구출하지 않았을 때에 삼사(三司) 왕기(王紀)추원표(鄒元標)주응추(周應秋) 등이 정필을 탄핵하기를, ‘정필의 재식과 기백이 일세를 비웃을 만하므로 지난해에 요양을 지키매 요양이 보존되고 요양을 떠나매 요양이 망했으나, 다만 그 교만하고 괴퍅한 성격은 고칠 길이 없어서 오늘에 한 소()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한 방()을 걸었으니, 그는 양호(楊鎬)에게 비하여서는 도망친 한 가지 죄가 더하고 원응태처럼 죽지도 못하였으므로, 만일 왕화정(王化貞)을 죽이고 정필을 살려둔다면 죄는 같음에도 벌이 다른 것입니다.’ 했다.”

하였다. 이제 당시의 토벽(土壁)이 예와 같이 둘러 있고 벽돌 흔적이 오히려 새로우매, 그때 삼사가 탄핵한 글을 다시 외어 본즉, 그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아아, 슬프다. 명의 말운을 당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으므로, 웅정필원숭환의 죽음을 보건대 가히 스스로 그 장성(長城)을 허물어뜨렸다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기롱을 받지 않으리오.

태자하(太子河)를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위에는 서너 채 고기잡이배가 떠 있고, 성 밑에는 낚시질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다들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생김생김이 단아한 귀공자 같다. 모두 성 안의 장사치들이다. 내가 이에 해자를 한 바퀴 돌아서 그 수문의 여닫는 제도를 엿보려 할 때, 낚시꾼들이 왁자하게 웃으면서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나를 보고 말을 걸기에,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 슬쩍 들여다보고는 웃고 가버린다.

서문(西門)을 나서 백탑을 구경하다. 그 만듦새가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 따로이 백탑기(白塔記)를 썼다.

 

 

[C-001]구요동기(舊遼東記) : 구요동성을 중심으로 하여 고금의 연혁과, 명의 말기에 명과 청의 두 나라가 이어서 격렬히 싸우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편은 원전에는 편말(篇末)에 있었으나, 이제 이곳으로 옮겼다.

[D-001]공손도(公孫度) : 후한(後漢) 말기에 어버이를 따라 현도(玄菟)에 갔다가, 요동태수(遼東太守)를 거쳐 스스로 요동후(遼東侯)가 되었다.

[D-002]웅정필(熊廷弼) : 명의 명신. 그가 요동을 지키매 신흥인 청()도 이를 넘어뜨리지 못하였으나, 당로자의 질시와 파쟁으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최후를 마쳤다.

[D-003]정황기(正黃旗)양황기(鑲黃旗) : 모두 만주군 팔기에 속한 부대.

[D-004]최유수(崔儒秀) : 어떤 본에는 최윤수(崔允秀)로 되었다.

[D-005]장전(張銓) : 자는 우형(宇衡). 국사기문(國史紀聞)을 지었다.

[D-006]명사(明史) : 청의 장정옥(張廷玉)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D-007]삼사(三司) : 시대를 따라 변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상서형부(尙書刑部)어사대(御史臺)대리시(大理寺)를 이른 듯하다.

[D-008]양호(楊鎬) : 명의 장수로서, 임진란에 구원군을 거느리고 패해서 돌아가, 요동에 나가서 청과 싸워 또 패하였으므로 사형을 받았다.

[D-009]왕화정(王化貞) : 몽고를 무마하여 일찍이 공을 세웠으나, 웅정필과 함께 청에 패했으므로 사형을 당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관제묘기(關帝廟記)

 

 

구요동성 문 밖을 나서면 돌다리 하나가 있다. 다릿가 돌 난간은 그 만든 품이 매우 정교하다. 강희(康熙) 57년에 쌓은 것이다. 다리 건너편에서 백여 보쯤 되는 곳에 패루(牌樓)가 있다. 구름 속의 용과 수선(水仙)을 새겼는데, 모두 파서 새긴 것이다. 패루에 올라 본즉 동쪽에 큰 다락이 있는데, 글자를 써서 현판을 걸어 적금루(摘錦樓)라 하였고, 그 왼편의 종루(鍾樓)는 용음루(龍吟樓), 오른편의 고루(鼓樓)는 호소루(虎嘯樓)라 하였다.

묘당(廟堂)이 웅장 화려하여 복전(複殿)과 중각(重閣)에 금빛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그 정전(正殿)에는 관공(關公)의 소상(塑像)을 모셨고, 동무(東廡)에는 장비(張飛 자는 익덕(翼德)), 서무(西廡)에는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을 배향(配享)하였으며, 또 촉()의 장군 엄안(嚴顏)의 굴복하지 않는 꼴을 설치하였다. 뜰 가운데에는 큰 비() 몇이 서 있는데, 모두 이 사당의 창건과 중수한 사실의 시말을 적은 것이다. 그 중 새로 세운 한 비는, 산서(山西)의 어떤 상인(商人)이 사당을 중수한 일을 새긴 것이다.

사당 안에는 노는 건달패 수천 명이 왁자하게 떠들어, 마치 무슨 놀이터 같다. 혹은 총과 곤봉을 연습하고, 혹은 주먹놀음과 씨름을 시험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말애꾸말을 타는 장난들을 하고 있다. 또는 앉아서 수호전(水滸傳)을 읽는 자가 있는데, 뭇사람이 삥 둘러앉아서 듣고 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코를 벌름거리는 꼴이, 방약무인(旁若無人)의 태도이다. 그 읽는 곳을 보니, 곧 화소와관사(火燒瓦官寺 수호 중 장회(章回)의 이름)의 대문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西廂記)였다.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건만 외기에 익어서 입이 매끄럽게 내려간다. 이것은 꼭 우리나라 네거리에서 임장군전(林將軍傳)을 외는 것 같다. 읽는 자가 잠깐 중지하면 두 사람이 비파(琵琶)를 타고 한 사람은 징을 울린다.

 

 

[C-001]관제묘기(關帝廟記) : 구요동에 있는 관제묘를 구경한 기록이다. 어떤 본에는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밑에 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관공(關公) : 촉한(蜀漢) 오호대장(五虎大將) 중의 하나. 이름은 우(), 자는 운장(雲長). 뒤에 그를 추숭하여 제()라 일컬었다.

[D-002]엄안(嚴顏) : 유장(劉璋)의 부하로서, 장비에게 굴복하지 않은 의장(義將).

[D-003]수호전(水滸傳) : 소설 이름. 곧 수호. 원의 시자안(施子安)이 엮은 것을 명의 나본(羅本, 羅貫中)이 완성하였다.

[D-004]서상기(西廂記) : 희곡 이름. 당 원진(元稹)의 회진기(會眞記)를 원의 왕실보(王實甫)가 각색하였다.

[D-005]임장군전(林將軍傳) : 조선 국문 소설의 이름. 임경업(林慶業)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본이름은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이 보인다. 이 탑은 8 13층에 높이는 70[]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을 타고 요동으로 돌아와 본즉, 성곽과 인민이 이미 바뀌었으므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니, 이것이 곧 그가 머물렀던 화표주(華表柱).”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요양성 밖에 있으니 성에서 10리도 못 되는 곳이고, 또 그리 높고 크지도 않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조례(皁隷)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요동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 리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세 개가 놓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만 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린다.

탑 아래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만주 사람으로, 약을 사러 영고탑(寧古塔)에 가는 길이다. 땅에 글자를 써서 문답을 하는데, 한 사람이 고본(古本) 상서(尙書)가 있나를 묻고, 또 한 사람은,

 

안부자(顏夫子 공자의 제자인 안회(顏回), 부자는 존칭)가 지은 책과 자하(子夏 공자 제자, 성명은 복상(卜商), 자하는 자)가 지은 악경(樂經)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이는 모두 내가 처음 듣는 것이므로 없다고만 답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아직 청년인데,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며 이 탑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길이 바빠서 그의 이름을 묻지는 못했으나 수재(秀才)인 듯싶다.

 

 

[C-001]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어떤 본에는 관제묘기(關帝廟記) 위에 있었으나, 그릇되었으므로 여기로 옮겼다.

[D-001]울지경덕(蔚遲敬德) : 당의 명장. 태종을 따라 여러 군데에 원정하였다.

[D-002]정령위(丁令威) : 한의 선인.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의하면, 그가 신선이 되어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하였다.

[D-003]화표주(華表柱) : 큰 길거리나 고을 앞과 같은 곳에 세우는 촛대.

[D-004]고본(古本) …… 묻고 :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고본 상서가 있었다 하므로, 그들이 물은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광우사기(廣祐寺記)

 

 

백탑 남쪽에 광우사(廣祐寺)라는 옛날 절이 있다. 아까 만난 수재들의 말에,

 

한대(漢代)에 지은 절인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를 칠 때에 수산(首山)에 머물러 악공(鄂公 울지경덕의 봉호(封號)) 울지경덕으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였다.”

하고, 전하는 말에는,

 

옛날 어떤 시골 사람이 광녕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동자를 만났는데, 그 동자의 말이, ‘나를 업고 광우사까지 가면 그 절 오른편으로 열 걸음 가서 고목나무 밑에 돈 10만 냥이 묻혀 있을 것이니, 그 돈을 품삯으로 주겠소 하기에, 그 사람이 동자를 업고 수백 리 길을 한나절이 못 되어 닿았다. 내려 놓고 보니, 동자는 사람이 아니고 금부처님이었다. 그 절의 중이 이상히 여겨서 절 오른편 열 걸음쯤 되는 곳 고목나무 밑을 파본즉, 과연 10만 냥이 나왔으므로, 시골 사람이 그 돈으로 절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제 절의 비문(碑文)을 읽어 보니,

 

강희 27년에 태황 태후(太皇太后 태종 홍타시의 비())가 내탕고(內帑庫)의 돈으로 세운 것이고, 강희제도 일찍이 이 절에 거둥하여 중에게 비단 가사(袈裟)를 하사한 일이 있다.”

하였다. 지금은 절이 황폐하여 중도 없다. 요양성으로 돌아오니 수레와 말의 울리는 소리가 우렁차고, 가는 곳마다 구경군이 떼를 지었다. 주루(酒樓)의 붉은 난간이 높다랗게 한길 가에 솟아 있고, 금글자를 쓴 주기(酒旗)가 나부낀다. 그 가에는,

 

이름을 듣고서는 말을 곧장 세우고 / 聞名應駐馬

향내를 찾아서 수레를 잠깐 멈추리라 / 尋香且停車

라고 씌어 있다. 나는 술을 마실 만한 기분이 들었다.

빙 둘러선 구경군은 더욱 많아져서 서로 어깨를 비빈다. 일찍이 들으니,

 

이곳에는 좀도둑이 많아서, 낯선 사람이 구경에만 마음이 팔려 자신을 잘 보살피지 못하면 반드시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만다. 지난해 어느 사신 행차에 많은 무뢰배를 반당(伴當)으로 삼아 거느렸는데 상하 수십 명이 모두 초행이어서 의장(衣裝)이나 안구(鞍具)가 제법 호화로웠다. 이곳에 이르러 유람하는 사이에, 혹은 안장을 잃고 혹은 등자(鐙子)를 잃어버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고 한다. 장복이 갑자기 안장을 머리에 쓰고 등자를 쌍으로 허리에 차고서 앞에 모시고 서서 조금도 창피해하는 기색이 없기에, 내가 웃으며,

 

왜 너의 두 눈알은 가리질 않나.”

하고 나무란다. 보는 이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다시 태자하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부풀었을 뿐 아니라, 배가 없어서 건널 길이 막연하다. 강기슭을 타고 위아래로 바장일 무렵에, 갈대 우거진 속에 콩깍지만 한 고기잡이 배가 저어 나오고, 또 작은 배 하나가 강기슭에 아련히 보인다. 장복과 태복 등을 시켜 소리를 질러 배를 부르게 했다. 어부(漁夫)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배 두 머리에 마주 앉아 있다. 버드나무 짙은 그늘에 석양 놀이 금빛으로 아롱졌는데, 잠자리는 물을 점치며 놀고, 제비는 물결을 차고 난다. 아무리 불러도 저들은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물가 모래판에 섰노라니, 찌는 듯한 더위에 입술이 타고 이마에 땀이 번지며 허기증이 들고 몸이 몹시 지친다. 평생에 구경을 좋아하였더니, 오늘에야 톡톡히 그 값을 치르는구나 싶었다.

정군(鄭君) 등 여럿이 다투어 농담으로,

 

해는 지고 길은 먼데 상하가 모두 배고프고 고달프니, 한번 울기라도 하는 수밖에 아무런 계책이 없구려. 선생은 어찌 참고서 울지 않으시오.”

하고 서로들 크게 웃는다. 나는,

 

저 어부가 남을 구원해 주질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인심을 가히 알지니, 제가 비록 육노망(陸魯望) 선생처럼 점잖은 어른일지라도 나는 한 주먹으로 때려 눕히고 싶구려.”

하였다. 태복이 더욱 초조해하면서,

 

이제 곧 들에 해가 지려 하니, 다른 산기슭에는 벌써 어두움이 깃들었으리이다.”

한다. 대체 태복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일곱 번이나 연경에 드나들었으므로 모든 일에 익숙하다. 얼마 뒤에 사공이 낚시질을 끝마치고서 배 밑에 있던 고기 종다래끼를 거두고 짧은 상앗대로 버드나무 그늘 가로 저어 나오자, 그 속에서 별안간 대여섯 척의 작은 배가 다투어 나온다. 그들은 저 고기잡이배가 저어오는 것을 보고는, 역시 너도 나도 하고 서로 다투어 저어 와서 비싼 삯을 받으려 함이다. 남의 갈급함을 짐짓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와서 건네 주려고 하니 그 소행이 밉다. 배 한 척에 세 사람씩을 태우고, 삯은 한 사람의 몫이 일 초(一鈔 은으로는 서 돈쭝)씩이다. 배는 모두 통나무를 후벼파서 만들었다. 이른바,

 

들배는 넉넉히 두세 사람 탈 수 있네 / 野航恰受兩三人

라 함은, 실로 이를 두고 이름이다. 일행 상하가 모두 열일곱 명에 말이 열여섯 필이다. 함께 강을 건넜다. 뱃머리에서 말굴레를 잡고 순류(順流)를 따라서 7~8리를 내려가니, 그 위험스럽기가 전날 통원보(通遠堡)의 여러 강을 건널 때보다 더하다. 신요양(新遼陽)영수사(映水寺)에서 묵다. 이날 70리를 갔다. 밤에는 몹시 더워서, 잠든 중에 절로 홑이불이 벗겨져서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다.

 

 

[D-001]반당(伴當) : 가마 메는 하인. 반당(伴擋)이라고도 하였다.

[D-002]육노망(陸魯望) : 당의 문학가 육귀몽(陸龜蒙). 노망은 자. 벼슬을 하지 않고 차[]를 심으며 일생을 보내었으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강호산인(江湖散人), 또는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불렀다.

[D-003]들배는 …… 있네 : 두보(杜甫)의 시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9일 을유(乙酉)

 

 

개었다. 몹시 더웠다.

새벽의 서늘함을 타서 먼저 길을 떠났다. 장가대(張家臺)삼도파(三道巴)를 거쳐서 난니보(爛泥堡)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동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끊이지 않고 길 너비가 수백 보나 되며, 길을 따라 양편에는 모두 수양(垂楊)을 심었다. 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는, 마주 선 문과 문 사이에 장마 때 물이 괴어서 가끔 저절로 큰 못이 이루어졌다. 집집마다 기르는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그 위에 떠서 놀고, 양편 촌집들은 모두 물가의 누대처럼 붉은 난간과 푸른 헌함이 좌우에 영롱하여, 슬며시 강호(江湖)를 방불케 한다.

군뢰가 세 번 나팔을 불고 나서 반드시 몇 리 앞서 가면, 전배(前排) 군관이 역시 군뢰를 따라 먼저 떠난다. 나는 행동이 자유로워서, 매양 변군(卞君)과 함께 서늘함을 타서 새벽에 떠난다. 그러나 10리도 못 가서 전배가 따라와 만나게 된다. 그들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재미 있는 이야기와 농담을 붙이면서 간다. 매일 이러하였다.

마을이 가까워질 때마다 군뢰를 시켜서 나팔을 불고, 넷이 모두 합창으로 권마성(勸馬聲)을 부른다. 그러면 집집마다 여인들이 문이 메도록 뛰어나와서 구경들을 한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간에 차림은 거의 같다.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고리를 드리웠으며, 화장은 살짝 하였다. 입에는 모두 담뱃대를 물었고, 손에는 신바닥에 까는 베와 바늘실 등을 들고 어깨를 비비고 서서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한녀(漢女)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궁혜(弓鞋)를 신었다. 자색은 만주 여자[滿女]만 못하다. 만주 여자는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이가 많았다.

만보교(萬寶橋)연대하(烟臺河)산요포(山腰鋪)를 거쳐서 십리하(十里河)에서 묵다. 이날 50리를 갔다.

비장과 역관들이 말등에서, 맞은 편에서 이리 보고 오는 만녀나 한녀 중에서 각기 첩 하나씩을 정하는데, 만일 남이 먼저 차지한 것이면 감히 겹으로 정하지 못하고 법이 몹시 엄격하다. 이를 구첩(口妾)이라 하여 가끔 서로 샘도 하고 골도 내며 욕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여, 이 역시 먼 길에 심심풀이로서 한 가지의 방법이다. 내일은 곧장 심양(瀋陽)에 들어갈 것이다.

 

 

[D-001]권마성(勸馬聲) : 높은 관리의 행차에 앞서, 하인이 위엄을 돋우고 일반 행인을 물러서게 하기 위하여 길게 부르는 소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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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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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1370A

 

이 열하일기(熱河日記) 26편은, 조선 정조왕(正祖王) 때 수많은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서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거성(鉅星)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1737~1805)의 명저이다.

 

그는 정조왕 4,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 고종(高宗)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북평(北平)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일계(一系)의 학자들이 존명사상(尊明思想)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山川)풍토(風土)와 문물(文物)제도(制度)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艶慕)하였는데, 급기야 그 숙원(宿願)이 이루어져 그들의 통도(通都)요새(要塞)를 신력(身歷)하고는 더욱 자신이 만만하여, 모든 역사(歷史)지리(地理)풍속(風俗)습상(習尙)고거(攷據)건설(建設)인물정치경제사회종교문학예술고동(古董)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관상(觀賞)은 오로지 승지(勝地)명찰(名刹)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그 호화찬란한 재료의 구사와 웅려동탕한 문장의 표현이 실로 조선의 일대를 통틀어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독점하였으며, 그 가치로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수록(隨錄), 성호(星湖) 이익(李瀷) 사설(僿說),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등과 함께 추숭(推崇)되었으나, 특히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결코 삼가(三家)의 추급(追及)할 바 아니었다.

 

그리고 본서는 애초부터 명확한 정본(定本)이 없는 동시에 당시의 판본(版本)이 없었으며, 다만 수많은 전사본(傳寫本)이 유행되었으므로, 그 편제(編制)의 이동(異同)이 없지 않음도 사실이었다. 이제 이 역주본(譯註本)은 연암의 수사본(手寫本), 또는 수택본(手澤本)을 근거로 삼고, 그 중의 누락된 부분은 몇십 종의 제본(諸本)을 상세히 대조하여 보충하되, 일일이 주석(註釋)에서 표시하였고, 또 최근에 발견된 원저(原著)의 세 편 중에서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와 양매시화(楊梅詩話) 두 편은 적소(適所)에 추가하였으며, 다만 열하일기 보유(補遺) 한 편은 편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뒷날에 정리 추가하기로 하였다.

 

도강록(渡江錄)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는 책문(柵門) 안을 들어서자 곧, 그들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건설에 심취(心醉)하였다. 주로 성제(城制)와 벽돌을 쓰는 것이 실리임을 역설했다.

 

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에는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談)상루필담(商樓筆談)고동록(古董錄) 등이 가장 재미로운 기사이다.

 

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지(兵站地)를 달리는 9일 동안의 기록이다. 거제(車制)희대(戲臺)시사(市肆)점사(店舍)교량(橋梁) 등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그 서문 가운데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대한 논평이 독자의 흥미를 이끌었다.

 

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11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 중에서,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을 죽이네.”라는 이야기와 우암(尤菴)의 화상에 절하던 이야기 등 기사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호질(虎叱)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허생(許生)과 함께 가장 득의작(得意作)이었다. 남주인공 북곽 선생(北郭先生)과 여주인공 동리자(東里子)를 등장시켜서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그 하나는 유학대가(儒學大家), 또 하나는 정절부인(貞節夫人)으로 가장하여, 사회를 속이며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러한 정상을 알게 된 호랑이는 북곽 선생을 꾸짖었다. 사람이 호랑이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은 것이다. 이는 곧 호랑이를 인격화함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연경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열하의 요해를 역설한 것이 모두 당시 열하의 정세를 잘 관찰한 논평이었고, 열하로 떠날 때의 이별의 한을 서술한 한 토막의 문장은 특히 애처롭기 짝이 없어, 후세의 독자로 하여금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기풍액(奇豐額)왕민호(王民皥)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대체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연암은 그의 지우(摯友)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다시금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주로 교량(橋梁)도로(道路)방호(防湖)방하(防河)탁타(槖駝)선제(船制) 등에 대한 논평이다.

 

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던 6일 동안에 그들의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다.

 

심세편(審勢編)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하였다. 역시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이다.

 

망양록(忘羊錄)

윤가전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모든 견해를 교환한 기록이다. 이 편이 다른 본에는 대체로 행재잡록(行在雜錄)의 다음에 있었고, 또 연암이 비록 이 편을 혹정필담(鵠汀筆談)의 다음에 두었으나, 심세편(審勢編)의 말단에 명확히 망양록과 혹정필담을 열차(閱次)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으로 보아서, 이것이 연암 최후의 수정임을 인정하겠다.

 

혹정필담(鵠汀筆談)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다. 곧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역법(曆法)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찰십륜포(札什倫布)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한 기록이다.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반선시말(班禪始末)

() 황제가 반선에게 대한 정책(政策)을 논하였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었다.

 

황교문답(黃敎問答)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그것은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었으며, 또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 지옥(地獄)의 설에 대한 논평이다. 말단에는 또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피서록(避暑錄)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을 때의 기록이다. 주로 동중(東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그 말단에는 최근에 연암 후손에 의하여 발견된 피서록 수고본을 추보하였으니,  삼한(三韓) 부인 반발(盤髮)’ 이하의 몇 칙()이다.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학자들과 문답한 한시화(漢詩話)이다. 이 편은 각본(各本)에 모두 일서(逸書)로 되었었는데, 최근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추보(追補)하였다. 그 책의 첫 장에 원본중낙루등입차(元本中落漏謄入次)’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음으로 보아서, 당시에 옮겨 써 넣으려던 것이 우연히 누락된 것인 듯싶다. 그래서 다만 다른 편 중에 거듭된 부분과 본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넣지 않았다.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이다. 주로 가사(歌辭)향시(鄕試)서적(書籍)언해(諺解)양금(洋琴) 등에 대한 잡록(雜錄)이다.

 

옥갑야화(玉匣夜話)

일재본(一齋本)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되어 있다. 홍순언(洪純彥)정세태(鄭世泰)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허생(許生)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다. 허생이 실존적인 인물인지, 또는 가상적인 인물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서울 묵적골에 살고 있던 한 불우한 서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속유(俗儒)들의 위학(僞學)과는 달리하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재벌로 이름높은 변씨(卞氏)의 돈을 빌려, 바다 가운데 한 빈 섬을 발견하고 떠돌이 도적을 몰아넣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 것은, 곧 수호(水滸)의 양산박(梁山泊)과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율도국(硉島國) 등 천고의 기인(奇人)기사(奇事)를 재연출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여지없이 풍자하는 동시에, 이완(李浣)에게 세 가지의 당면한 대책(大策)을 제시하였으니, 이는 실로 북벌책의 정반대인 북학(北學)의 이론이었다. 연암은 일생을 통하여 그 소매(笑罵)와 비타(悲咤)의 일체를 모두 이 한 편에 붙여서 유감없이 표현하였던 것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금료소초(金蓼少鈔)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이다. 연암집에서는 이 편을 보유라 하였으나, 열하일기의 제본(諸本)에는 원전의 한 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를 좇았다.

 

환희기(幻戲記)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하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 산장에서 여러 가지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상기(象記) 등이 가장 비장(悲壯)하고도 기휼(奇譎)하다.

 

구외이문(口外異聞)

고북구(古北口) 밖에서의 이문을 적은 것이다.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황도기략(黃圖紀略)

황성(皇城)의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38종의 문관(門館)전각(殿閣)도지(島池)점포(店舖)기물(器物) 등의 기록이다.

 

알성퇴술(謁聖退述)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앙엽기(盎葉記)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기까지 20개의 명소를 역람한 기록이다.

 

이는 실로 진고(振古)에 없는 명저이요, 거작이다. 연암이 귀국하던 날 이 책을 내어 남에게 보이니, 모두 책상을 치면서 기재 기재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를 싫어하던 도배들은 이를 노호지고(虜號之藁)’라 배격하였으니, 이는 곧 되놈의 연호를 쓴 초고라는 뜻이다. 이제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志銘) 중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로 한다.

 

내 일찍이 연암 박미중(朴美仲)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碧梧桐館)에 모였을 적에, 청장(靑莊) 이무관(李懋官)과 정유(貞蕤) 박차수(朴次修)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과 차수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아마 이제부터 고문(古文)이 진흥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옵니다.’ 한다. 연암이 취한 어조로, ‘네가 무엇을 안단 말야.’ 하고는, 다시금 계속했다.

 

산여 역시 취한 기분에 촛불을 잡고 그 초고를 불살라 버리려 하였다. 나는 급히 만류하였다. 연암은 곧 몸을 돌이켜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무관은 거미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차수는 병풍에다가 초서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썼다. 나는 연암에게, ‘이 글씨와 그림이 극히 묘하니, 연암이 마땅히 그 밑에 발()을 써서 삼절(三絕)이 되게 하시오.’ 하여 그 노염을 풀려고 하였으나, 연암은 짐짓 노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서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더니, ‘산여야 이 앞으로 오라. 내 이 세상에 불우한 지 오랜지라, 문장을 빌려 불평을 토로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내 어찌 이를 기뻐서 하겠느냐. 산여와 원평(元平) 같은 이는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문장을 공부하더라도 아예 나를 본받지 말고 정학(正學)을 진흥시킴으로써 임무를 삼아, 다른 날 국가에 쓸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이제 마땅히 제군을 위해서 벌을 받으련다.’ 하고는, 커다란 술잔을 기울여 다시금 마시고 무관과 차수에게도 마시기를 권하여, 드디어 크게 취하고 기뻐하였다.”

 

이로 보아, 연암은 일시의 후배들에 대하여서도 이 글을 서슴지 않고 자랑하였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는 또 자기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열하일기만이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던 것이다.

 

1968 4 15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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