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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1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2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3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5 죽오기(竹塢記)
6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7 사장(士章) 애사(哀辭)
8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9 남수(南壽)에게 답함
10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11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12 영규비(靈圭碑)
13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1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박군 경유(朴君景兪)의 누이는 김씨의 처인데 지아비를 따라 죽으니 조정에서 일찍이 정려(旌閭)의 은전을 내렸다. 그 뒤 경유가 죽자 그의 아내 이씨가 의(義)에 따라 처신한 것이 경유의 누이에 비해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또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우기를 김씨 처의 경우와 같이 하였다.
아! 이런 일은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바이거늘 마침내 박씨의 집안에는 저와 같이 용이하니, 또한 어찌 근본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박군은 나를 종유(從遊)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효우(孝友)하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혹 마지못해 한숨지으며 하는 일이라도 박군은 날마다 항상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린 누이와 젊은 아내가 귀에 젖고 눈에 익어 그 의열(義烈)을 보기를 마치 물 긷고 방아 찧는 일처럼 몸소 할 만하고 술과 음식을 의논하여 마련하는 것같이 여겼으며, 그다지 가혹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로 보지 않고 참으로 보통 남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한 번도 얻기 어려운 것을 그 집안에서는 15년 사이에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이다.
박군은 밀양인(密陽人)으로 자(字)는 치연(穉然)이며 자호(自號)는 담영(澹寧)이라 한다. 이씨는 학생 윤배(允培)의 따님인데 임인년(1782) 5월 18일에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죽은 그 이듬해 정월 21일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주D-001]박군 경유(朴君景兪)의 …… 내렸다 : 《연암집》 권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주D-002]그 …… 뛰어났다 : 《연암집》 권10 이 열부 사장(李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밤에 봉상촌(鳳翔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강화(江華)로 들어가는데 5리쯤 가니 하늘이 비로소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한 점의 구름이나 한 올의 아지랑이도 없더니 해가 겨우 하늘에 한 자쯤 떠오르자 갑자기 검은 구름 한 점이 일어나 까마귀 머리만 하게 해를 가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해의 절반을 가려 버려 어두침침해지자, 한스러운 듯 근심스러운듯 얼굴을 찡그리며 편안치 못한 것 같더니, 바깥으로 혜성과 같은 빛줄기를 뿜어 대는데 성난 폭포수처럼 하늘가로 내리쏘았다.
바다 건너 여러 산에는 각각 작은 구름이 나타나 멀리 서로 조응하여 뭉게뭉게 독기를 머금고 간혹 번개가 번쩍여 위용을 떨치며 해 아래서 우르르 꽝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사면이 검은빛으로 온통 뒤덮여 혼솔과 틈 하나 없고, 번개가 그 사이로 번쩍하고 나서야 비로소 첩첩이 주름진 구름이 수천 꽃가지 수만 꽃잎을 이루어 마치 옷 가장자리에 선을 덧댄 듯, 꽃잎 가장자리에 무늬가 번진 듯 각각 그 엷고 짙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하여 혹시 흑룡(黑龍)이라도 뛰쳐나오지 않나 하였으나, 비는 그다지 사납게 내리지 않았다. 멀리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사이를 바라보니 빗발이 명주필을 드리운 것 같았다.
말을 재촉하여 십 리를 가니 햇빛이 갑자기 뚫고 나와 차츰 밝고 고와지며 아까 보이던 먹구름이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하여 오색이 영롱하였다. 말 머리 위로 무슨 기운이 한 길이 넘게 뻗쳐 나 누르꾸름하여 마치 엉긴 기름 같더니, 어느새 갑자기 붉고 푸른 색으로 변하여 하늘로 높이 치솟았는데, 마치 문을 삼아 지나갈 수도 있을 듯했고 다리로 삼아 건널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말 머리에 있어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더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멀어져만 갔다. 이윽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당도하여 산기슭으로 돌아 나가 강화부(江華府)의 외성(外城)을 바라보니, 강을 누빈 백 리 연안에 하얀 성첩(城堞)이 해에 비치는데 무지개발은 여전히 강 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진(秦)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柳))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주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주D-001]박성언(朴聖彦) : 1743~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로, 성언은 그의 자이다.
[주D-002]서원덕(徐元德) : 1738~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 · 병조 · 호조 · 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주D-003]진(秦)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주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주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 인수(梁君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집은 푸른 벼랑 늙은 소나무 아래 있었다. 모두 여덟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을 칸으로 막아 깊숙한 방을 만들었으며 창살을 성글게 하여 밝은 마루를 만들었다. 드높이어 층루(層樓)를 만들고, 아늑히 하여 협실(夾室)을 만들었으며, 대 난간으로 두르고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바른편은 둥근 창문이요 왼편은 교창(交窓)을 만들었다. 그 몸체는 비록 크잖으나 오밀조밀 갖출 것은 거의 갖추어졌으며 겨울에는 밝고 여름에는 그늘이 졌다. 집 뒤에는 여남은 그루의 배나무가 있고 대 사립 안팎은 모두 묵은 은행나무와 붉은 복숭아나무요, 하얀 돌이 앞에 깔려 있다. 맑은 시냇물이 소리 내며 급히 흐르는데, 먼 샘물을 섬돌 밑으로 끌어들여 네 귀가 번듯한 연못을 만들었다.
양군은 본성이 게을러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권태가 오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검은 궤(几) 하나, 거문고 하나, 검(劍)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옛 서화축(書畵軸) 하나, 바둑판 하나 사이에 퍼진 듯이 누워 버린다. 매양 자다 일어나서 주렴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보면,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울 밑에 낮닭이 처음 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 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碁譜)를 들여다보면서 두어 판 벌여 놓기도 한다. 이내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듯 나오고 눈시울이 처진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또 퍼져 누워 버린다. 손이 와서 문에 들어서면, 주렴이 드리워져 고요하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처마 끝의 풍경은 저절로 울린다. 주인의 자(字)를 서너 번 부르고 나서야 일어나 앉는데,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면 해가 여전히 서산에 걸리지 않았다.
[주D-001]교창(交窓) :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 설치하는 광창(光窓)의 일종으로, 창살을 효(爻)자 모양으로 짜기 때문에 교창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죽오기(竹塢記)
예로부터 대나무를 칭송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시경(詩經)》 기욱편(淇奧篇)에서부터 대나무를 노래하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군(君)이라 칭하여 높이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대나무가 마침내 이 때문에 병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하에서 대나무로써 호(號)를 삼는 자가 그칠 줄을 모르고, 더 나아가 글을 지어 기록까지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고 몽염(蒙恬)이 붓을 만들었다 한들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대나무의 지조와 소탈하면서도 고고한 태도를 예찬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지었다는 글들이 모두 다 쓸데없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은 셈이어서, 대나무는 이 때문에 풀이 죽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글 못하는 나조차도 대나무의 덕성(德性)을 칭송하고 대나무의 소리와 색깔을 형용하여 시문을 지은 것이 많은데 다시 또 무슨 글을 짓는단 말인가.
양군 양직(梁君養直)은 강직하고 지절(志節)이 있는 사람이다. 일찍이 스스로 호를 ‘죽오(竹塢)’라 하여 자기 거실에 편액을 걸고 내게 기(記)를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아직껏 응해 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나무에 대하여 진실로 난처하게 여기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그대가 그 액호를 바꾸면 글은 당장이라도 지어 줄 수 있다.”
하고서, 그를 위하여 고금의 인물들이 지은 기발하고 운치 있는 이름으로 이를테면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행화춘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畵溪),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 열이고 백이고 누차 꼽으면서 그더러 스스로 선택하라고 권했으나, 양직은 머리를 흔들며 다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앉으나 누우나 ‘죽오’요 잠시 잠깐도 ‘죽오’를 떠나지 아니하며, 매양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죽오’라 쓰게 하여 벽에 걸곤 하니 벽의 네 모퉁이가 모두 ‘죽오’뿐이었다. 향리에서 죽오를 들어 기롱하는 사람 또한 많았지만, 천연덕스레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 채 편안히 받아넘기곤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글을 청한 것이 지금 하마 십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천번 꺾이고 백번 눌려도 그 뜻을 바꾸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간절하였다. 심지어는 술까지 대접하며 달래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번번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면, 분격하여 낯빛을 붉히고 삿대질하며 노려보는데, 눈썹은 개(个) 자 모양으로 치켜세우고 손가락은 메마른 댓마디가 되며, 꿋꿋하면서도 비쩍 마른 모습이 갑자기 대나무의 형상을 이룬다.
아아! 양직은 어쩌면 진정으로 대나무에 미쳐서 그렇게 극진히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겉모습만 보아도 그의 마음이 기암괴석처럼 울뚝불뚝하고, 그윽한 대나무 숲이 그 마음속에 무성하게 들어차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나의 글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찌 말려야 말 수 있겠는가? 옛사람 중에 이미 대나무를 높여서 군(君)이라 부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양직 같은 이는 백세(百世) 뒤에 차군(此君)의 충신이 될 만하다. 나는 이에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정표(旌表)하기를, ‘고고하고 정결한 양 처사의 집〔高孤貞靖梁處士之廬〕’이라 했다.
[주D-001]군(君)이라 …… 있었으니 : 대나무를 차군(此君)이라 한다. 왕희지(王羲之)가 대나무를 몹시 사랑하여, 단 하루도 ‘차군(此君)’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소식(蘇軾)의 묵군당기(墨君堂記)에 “유독 왕희지가 대나무를 군(君)이라 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따라 군(君)으로 삼으면서도 군말이 없었다.”고 하였다.
[주D-002]양군 양직(梁君養直) : 양호맹(梁浩孟)을 말한다. 그의 자가 양직이고, 호가 죽오였다. 양호맹은 개성의 부유한 향반(鄕班)으로, 연암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거하면서 개성에 잠시 머물 때 그의 별장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교분을 맺고 연암의 문하를 출입했다.
[주D-003]개(个) 자 : 대 줄기를 상형(象形)한 글자로서, 대를 헤아리는 단위로도 쓰인다. 또한 동양화에서 죽엽(竹葉)을 개(个) 자 모양으로 그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무릇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모두 비바람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비바람은 바로 꽃의 조맹(趙孟)이라 할 것이다. 필운동(弼雲洞)에서 살구꽃을 구경할 때는 어찌 이 골짜기의 복사꽃이 열흘을 넘지 않아서 필 줄을 알았겠는가. 필운동에 놀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 골짜기로 왔으니, 비하자면 위기후(魏其侯)의 빈객(賓客)들이 무안후(武安侯)를 섬기자고 떠난 것과 같다. 어찌 나면서부터 고귀한 대접을 받는 복사꽃에 한(恨)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기쁨과 성냄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나니, ‘화’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고 자욱하며 성대하게 유행하여, 온 누리가 따뜻한 햇빛을 머금어 한 번의 숨도 끊어지지 않고 틈이 생길 만한 한 번의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골짜기로 와 보니 충만하고 성대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이 무성하다. 한 나무도 복사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없어, 온후하면서도 빼어나게 환해서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이 가라앉고 기(氣)가 평온해지니, 평소의 편벽된 성품이 어찌 이에 이르러 누그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저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떼 지어 웃고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 통곡하며 말끝마다 제 어미를 불러 대고 있었다. 구경꾼이 담장을 두르듯 모여들었으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 하나 없고 거듭 흐느끼는 소리의 억양이 모두 다 절주(節奏)에 들어맞았다. 이는 그의 마음이 우는 데 전념하여 자연히 음률에 들어맞은 것이다. 만약 취한 사람이 복사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이는 계절과 사물에 감촉되어 저절로 슬픔이 일어났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효자가 어머니를 생각하여 어디를 가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역시 아닐 것이다. 이는 곧 구경하는 사람의 억측일 뿐이요, 취한 사람의 진정은 아니니,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무슨 일로 통곡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난(阿難)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미소를 지은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날 경부(敬夫)가 특히 많이 취하여 사언(士彦)의 나귀를 거꾸로 타고 소나무 사이로 어지러이 달렸고, 일여(逸如)의 무리는 좌우에서 소리치고 둘러싸서 웃고 즐겼으며, 무관(懋官 이덕무)과 혜보(惠甫 유득공) 또한 크게 취하여 너털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가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했다고 하겠으니 즐거움이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사람마다 돌아갈 길을 재촉하는데, 한 사람도 질탕하게 복사꽃 밑에서 머물러 자는 이가 없었으니, 아, 슬프도다! 어부가 나루터를 찾지 못한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도도인(觀桃道人)이 마침내 게어(偈語)를 지었노라.
복숭아꽃 빛깔을 내 처음 보니 / 我見桃花色
발끈히 성낸 모습 생동하는 듯 / 勃然如有神
복숭아꽃도 역시 향기가 있어 / 亦有桃花香
바람이 불면 사람 향해 뿜어 대네 / 臨風噴射人
꽃망울은 팥알만 한 불상 같고 / 菩蕾如豆佛
뒤집힌 잎사귀는 느슨해진 활 같네 / 反葉學弨弓
향기와 빛깔 모두 형체에 덧붙은 것일 뿐 / 香色皆附質
생명력은 도로 공(空)을 따라 사라지네 / 生意還從空
- 원문 빠짐 - / □□□□□
- 원문 빠짐 - / □□□□□
투기 않고 앙탈도 부리잖으면 / 不妬亦不嗔
정(情)의 의미를 결코 모르고말고 / 定不識情字
[주C-001]도화동(桃花洞) : 한양의 북악(北岳) 아래에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으므로 도화동이라 했다. 청헌(淸軒) 문성(文晟)이 이 동리에 살았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옛 집터도 있었다. 《漢京識略 卷2 名勝》
[주D-001]조맹(趙孟) : 조맹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에서 나온 말로, 비바람이 꽃을 피게 할 수도 있고 떨어지게 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2]위기후(魏其侯)의 …… 같다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권세가 약해지고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권세가 강해지자 권세를 좇는 사람들이 모두 무안후에게 가서 붙었다. 이 글에서 위기후는 살구꽃에 해당하고, 무안후는 복사꽃에 해당한다. 《史記 卷107 魏其武安侯列傳》
[주D-003]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 : 몽득은 당(唐) 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자(字)이고, 현도관은 장안(長安)에 있던 도교사원〔道觀〕이다. 유우석의 ‘꽃구경하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지어 주다〔戲贈看花諸君子〕’라는 시에서 “현도관 안의 복사나무 천 그루, 모두 내가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세.〔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劉賓客文集 卷24》
[주D-004]기쁨과 …… 이르나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05]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 : 경일은 명(明)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우정(郵亭)의 복사꽃을 노래한 그의 시가 있는 듯하다.
[주D-006]아난(阿難)이 …… 것 : 미상(未詳)이다. 석가의 염화시중(拈花示衆)에 가섭(迦葉)이 홀로 파안미소(破顔微笑)한 고사와 혼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D-007]일여(逸如) : 김사희(金思羲)의 자이다. 김사희는 호를 이아탕주인(爾雅宕主人)이라 하며, 진사 급제하였다. 이덕무와 친하여 그가 만든 윤회매(輪回梅)를 사 주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63 輪回梅十箋 附詩 炯菴》
[주D-008]실컷 …… 취했다 : 원문의 ‘劇飮’은 ‘極飮’과 같다. 구양수(歐陽脩)의 석비연시집서(釋秘演詩集序)에 비연(秘演)이 석만경(石曼卿)과 절친하여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면 노래 부르고 시를 읊조리며 웃고 소리치는 것으로 제 마음에 맞는 천하의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이 얼마나 씩씩한가.〔當其極飮大醉 歌吟笑呼 以適天下之樂 何其壯也〕”라 하였다.
[주D-009]어부가 …… 것 :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진(晉) 나라 때 무릉(武陵) 출신의 한 어부가 복숭아나무 숲을 지나 수원(水源)이 다하는 곳에 있는 어느 산속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진(秦) 나라 때 피난 왔다는 사람들의 후손이 모여 사는 별세상을 만났으나, 일단 그곳을 나온 뒤 다시는 그리로 들어가는 나루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사장(士章) 애사(哀辭)
사장(士章)이 죽어 염을 마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방에서 곡을 하였다. 그림을 벽에서 떼어 내고 병풍과 장자(障子)를 치우고 서책(書冊)을 옮겼으며, 집기와 감상품 따위를 바깥 마루에다 흩어 놓았고, 방 한가운데에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얇은 이불로 덮어 놓아, 마치 거문고를 집에 넣어 금상(琴牀) 위에 둔 것 같았다. 쓰다듬으며 통곡했더니 손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울컥 싫은 마음이 나서 방문을 닫고 나왔다. 뜰에는 왁자지껄하면서 뚝딱뚝딱 널을 짜고 이음매에 옻을 칠하니, 장차 우리 사장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었다. 그의 벗 함원(咸原) 어경국(魚景國)과 풍산(豐山) 홍숙도(洪叔道)의 이름이 조문객 명부에 있었다. 문설주를 잡고 엎디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두 분은 그리도 애통하시오?” 하고 물었더니, “너무도 애통하오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호곡하기도 전에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아! 사장은 명문가의 자제로 용모가 아름다웠다. 일찍이 필운대(弼雲臺)에서 꽃구경할 적에 그때는 바야흐로 석양이라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부채를 들어 해를 가리고 있었더니 사람마다 얼굴을 돌려 돌아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시(詩)는 전우산(錢虞山 전겸익(錢謙益))을 본받고 글씨는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을 배웠으며, 그가 좋아하는 것은 보검(寶劍)인데 그 값이 왕왕 백금(百金)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무릇 공작새가 먼지를 피하는 것과 화포(火布)가 때를 씻어 내는 것과 백지(白芷)와 백출(白朮)이 땀을 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천성이라 하겠고, 원앙새나 금계(錦鷄)가 물에 섰는 것은 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사랑한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의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을 좋아하여, 한밤중에 가야금을 타면서 매양 그들의 신성(新聲)을 변주(變奏)하는데 가락이 느릿느릿하게 변하여 처량하고 슬픈 회포를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혈병을 앓은 지 두어 달 만에 죽으면서 뱃속에 아들을 남겼다. 그 선세(先世)는 나와 조상이 같다.
애사(哀辭)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고 감정이 극에 달해야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것이 어떤 모양이관대 생각만 하면 내 코 끝을 시리게 하는지. 또한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관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우는 것을 남이 가르쳐서 하기로 한다면 나는 의당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이제사 알았노라, 이른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란 배워서 될 수 없다는 것을.
[주D-001]사장(士章) : 박상한(朴相漢 : 1742~1767)의 자이다. 그의 조부는 이조 판서를 지낸 박사수(朴師洙)이고, 부친은 박만원(朴萬源), 장인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이다. 그의 집안과 연암의 집안은 야천(冶川) 박소(朴紹) 이후 갈라져, 박상한은 야천의 9대손이 되고, 연암은 8대손이 된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주D-002]어경국(魚景國) : 경국(景國)은 어용빈(魚用賓 : 1737~1781)의 자이다. 함원(咸原)은 곧 함종(咸從)으로, 함종 어씨 집안과 반남 박씨 집안은 가까운 인척간이었다. 어경국은 어유봉(魚有鳳)의 손자로, 연암의 고모부인 어용림(魚用霖)의 동생이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주D-003]홍숙도(洪叔道) : 숙도(叔道)는 홍낙임(洪樂任 : 1741~1801)의 자이다. 그는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어용빈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주D-004]두 분은 …… 하였다 : 《논어》 선진(先進)에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곡하며 너무도 애통해하니, 따라간 제자가 ‘선생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십니다.’ 하였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는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주D-005]사장(士章)이 죽어 …… 아름다웠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缺百六字’로 되어 있는데, 윤광심(尹光心)의 《병세집(幷世集)》에 의거하여 보충 · 번역하였다. 단 보충된 원문은 모두 126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士章歿 旣殮 余始哭于其室 畵刊于壁 撤屛捲障 遷其書冊 器什玩好 散于外廳 中霤東首 覆以涼衾 若室琴而床者 憮以慟 黏手津津 心慨然惡之 扃戶而出 中庭薨薨 約之丁丁 陳柒其坎 將以閉吾士章也 其友咸原魚景國 豊山洪叔道 名在弔簿 問其持戶伏而啼者曰 二子慟歟 曰 慟矣 泗先其咷 嗟乎 士章名家子 美姿儀”
[주D-006]화포(火布) : 화완포(火浣布)라고도 하며 지금의 석면(石綿)에 해당한다. 화포는 불 속에다 집어넣어 때를 없앤다고 한다. 《列子 湯問》
[주D-007]백지(白芷)와 백출(白朮) : 백지는 우리말로 구릿대, 백출은 흰삽주라고 하며, 이것으로써 온분(溫粉)을 만들어 몸에 뿌리면 땀 나는 것이 멈춘다고 한다. 《東醫寶鑑 止汗法 溫粉》
[주D-008]신성(新聲) : 당시 한양의 가객(歌客)들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빠른 가락의 시조창(時調唱)을 즐겨 불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서 곡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조문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욕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웃을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마실 수도 있어 서로 벌거벗은 몸으로 치고받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위가 뒤집어지고 어찔어찔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참말로 죽었구나!
석치가 죽자 그 시신을 빙 둘러싸고 곡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석치의 처첩과 형제 자손 친척들이니, 함께 모여서 곡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적지 않다. 또한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덕문(德門 남의 집안을 높여 부르는 말)이 불행하여 철인(哲人)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면, 그 형제와 자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제 집안이 흉한 화를 만났습니다.”
하고, 그 붕우들마다 서로 더불어 탄식하며,
“이 사람은 확실히 얻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니, 함께 모여서 조문하는 사람들도 진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와 원한이 있는 자들은 석치더러 염병 걸려 뒈지라고 심하게 욕을 했지만, 석치가 죽었으니 욕하던 자들의 원한도 이미 갚아진 셈이다. 죄벌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간 세상에서 유희(遊戲)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
석치가 참말로 죽었으니 귓바퀴가 이미 뭉그러지고 눈망울이 이미 썩어서,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젯술을 따라서 땅에 부으니 참으로 마시지도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평소에 석치와 서로 어울리던 술꾼들도 참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파하고 떠날 것이며, 진실로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하고 가서는 자기네들끼리 서로 모여 크게 한잔할 것이다.
제문을 지어서 읽어 가로되,
- 원문 빠짐 -
[주D-001]석치(石癡) :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정철조는 정조 5년(1781)에 죽었다.
[주D-002]철인(哲人) :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른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죽기 얼마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려는가? 철인이 병들려는가?〔哲人其萎乎〕”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남수(南壽)에게 답함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던들, 왜 서로 주선하여 하루 동안의 심심풀이를 서둘지 않았겠는가? 긴긴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甲)이 되고 왼손은 을(乙)이 되어, 오(五)를 부르고 백(百)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彼我)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簾〕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 하였느니.”
그랬네. 내 나이 사십이 못 되었는데 벌써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그 기력과 태도가 하마 노인 같아, 제비 손님과 장난치며 웃으니, 이것이 노인의 소일하는 비결일세.
이때에 갑자기 그대의 서찰이 내 앞에 떨어져 나의 그리운 마음을 충분히 위안해 주기는 하였으나, 자줏빛 첩(帖)에 쓴 부드러운 필치는 너무도 문곡(文谷)과 흡사하여 우아한 점은 있지만 풍골(風骨 웅건한 기상)이 전혀 없네그려. 이는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가 비록 진신(搢紳)의 모범은 될지언정 결국은 대가(大家)의 필법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 점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정존와기(靜存窩記)는 그 글을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지금 읽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평소 남에게 너무 쉽게 승낙하기 때문에 이런 독촉을 받게 되는 것이라 자못 후회가 되고 부끄럽군. 그러나 지금 이미 유념해 두었으니 삼가 차분하게 만들어 보겠으나, 다만 그 더디고 빠름은 미리 헤아릴 수 없네. 불선(不宣).
[주C-001]남수(南壽) : 박남수(朴南壽 : 1758~1787)를 말한다. 그는 자가 산여(山如)로, 진사 급제 후 대과에는 누차 낙방하여 불우하게 지냈다. 연암의 증조인 박태두(朴泰斗) 이후 갈라진 동족간으로, 연암의 족손(族孫)이 된다. 박남수는 남공철(南公轍)과 절친한 사이였다.
[주D-001]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음이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제비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주D-002]바둑이나 …… 낫겠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호이다. 김수항은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전서(篆書)와 해서(楷書) · 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다고 한다.
[주D-004]윤 상서(尹尙書) : 판서를 지낸 윤급(尹汲 : 1697~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용기 있게 반대하여 자주 파직 · 좌천되었으므로 직신(直臣)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필법이 정려(精麗)하여 당시 이름난 고관 대신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으며,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여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불렀다고 한다. 《槿域書畵徵》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심한 더위 속에 여러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는지?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은 근자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마음에 걸리어 더욱 잊혀지지 않네.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과는 가끔 서로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백선(伯善)은 청교(靑橋)를 떠나고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도 이동(泥洞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없으니 이와 같이 긴긴날에 무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네.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은 듣자니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다는데, 집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서로 만났는가? 그가 이미 조강지처를 잃고 또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 같은 훌륭한 벗을 잃어, 이승에서 오래도록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그의 얼굴과 말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네. 그 또한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말고.
아아, 슬프도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심하다고 논한 적이 있었지.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장가라도 들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의복이 터지고 찢어지면 꿰매고 때우는 것과 같고, 집기가 깨지고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는 것과 같네. 때에 따라서는 후처(後妻)가 전처(前妻)보다 나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비록 늙었지만 상대는 새파랗게 젊어서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지.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며,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맡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靈覺)을 함께한단 말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伯牙)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한단 말인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고말고.”
“울고 싶으냐?”
“울고 싶고말고.”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火齊)나 슬슬(瑟瑟)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암, 보았고말고!
[주C-001]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 것이다 : 연암은 정조 16년(1792) 음력 1월에 안의에 부임하여 정조 20년(1796) 2월까지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글 중에 이덕무(李德懋)가 사망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면, 1793년 여름 무렵에 씌어진 편지로 짐작된다.
[주D-001]청교(靑橋) :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쌍리동(雙里洞)의 개울물이 북쪽으로 흘러 이 다리를 지나 태평교와 합친다고 하였다. 《漢京識略 卷2 橋梁》
[주D-002]영각(靈覺) : 불교 용어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본성을 말한다.
[주D-003]종자기(鍾子期) : 중국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했다는 인물이다. 거문고 명수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였더니, 종자기가 이를 듣고 백아의 뜻이 고산유수(高山流水)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 세상에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知音〕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줄을 끊고 거문고를 부수어 버린 뒤 종신토록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本味》 《列子 湯問》
[주D-004]울음소리가 …… 듯하며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위(衛) 나라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주D-005]화제(火齊)나 슬슬(瑟瑟) : 모두 구슬 모양으로 된 보석의 일종이다.
[주D-006]빈 산에는 …… 피어 있네 : 원문은 ‘空山無人 水流花開’로, 소식(蘇軾)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이 구절을 빌려, 고산유수(高山流水)의 뜻을 표현했던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이제는 없음을 서글퍼한 백아의 심경을 나타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인산(因山)이 끝나고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멀리 운향(雲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치리오.
깊은 겨울 모진 추위에 대감의 기거(起居)는 두루 좋으신지요?
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은 교정된 본(本)으로 모두 몇 권이나 되는지요? 말세의 풍속이 명예만을 제일로 삼고 덕을 알아보는 자는 드물지요. 이는 아마도 형님께서 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뜻은 고상하고, 겉모습은 여위었지만 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은거하면서도 친한 이를 기피하지 않아 남들이 은거하는 줄을 알지 못한 때문일 것이오. 유명해져도 선비의 본분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소. 또 처지가 이처럼 가까운데도 멀리 떠나려는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고, 도(道)가 형통하려는 때를 만났는데도 고생을 마다 않는 굳은 절개를 굽히게 하기 어려웠으니, 이 어찌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히지 않는’ 그런 인물이 아니겠소. 옛 현인 중에서 찾아봐도 실로 더불어 짝할 이 드문지라, 비록 그 명성과 지위가 충분하지 못하고 출사(出仕)와 은거가 똑같지는 않지만, 민풍(民風)을 세워 세상을 선도하고 학설을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미상불 동일하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그 공이 어찌 다만 사문(斯文 유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그칠 뿐이리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과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두 선조를 보좌하고 우리 종중을 더욱 튼튼히 하리라 믿소.
지난번 영남의 고을에 있을 적에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제사 지낼 때 축문(祝文)을 쓰는 일로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내려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가 유집 가운데 수록되었는지 모르겠소. 그때 답서를 올리면서 부득불 낱낱이 들어 실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에 아울러 등초(謄抄)하여 보내니, 부디 원서(原書)의 아래에다 붙이되 글자 한 자를 낮추어 기록함이 어떻겠소?
족종(族從 연암을 가리킴)은 노병이 날로 심한데도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인지요?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바람마저 매우 달라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리곤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며, 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이 바로 베개맡에 들린다오.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지요.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되지요.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로이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이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리움으로 울적한 마음을 소폭의 편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이만 줄이오.
[주C-001]족제(族弟)에게 보냄 : 이 편지는 1800년 음력 9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임명된 연암이 연말에 쓴 것으로 보인다.
[주D-001]인산(因山)이 …… 떠나셨으니 : 순조(純祖) 즉위년(1800) 11월에 거행된 정조(正祖)의 장례를 가리킨다. 원문은 ‘珠邱事竣 弓劍永悶’인데, ‘주구(珠邱)’는 순(舜) 임금의 무덤에 새가 날아와 구슬을 떨어뜨린 것이 쌓여서 언덕을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능침(陵寢)을 뜻한다. 《拾遺記 虞舜》 그리고 ‘궁검(弓劍)’은 각각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지상에 떨어뜨렸다는 활과, 텅 빈 그의 무덤 속 관에 남아 있었다는 칼을 가리킨다. 《史記 卷28 封禪書》 《列仙傳》
[주D-002]운향(雲鄕) : 운향은 백운향(白雲鄕) 또는 제향(帝鄕)과 같은 말로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은 “천세(千歲)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주D-003]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 : 박준원의 형인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의 문집 《근재집(近齋集)》을 가리킨다. 《근재집》은 이후 1807년에 박준원의 아들인 박종경(朴宗慶)에 의해 전사자(全史字)로 간행되었다.
[주D-004]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 원문은 ‘卑牧’인데,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의 상사(象辭)에 “지극히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고 하였다.
[주D-005]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 원문은 ‘肥遯’인데,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물러가 숨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无不利〕”고 하였다.
[주D-006]처지가 …… 없었고 : 아우 박준원의 딸이 후궁이 되어 왕세자(후일 순조〈純祖〉)를 낳음에 따라 귀근(貴近)의 처지가 되었는데도 굳이 은둔하려 했다는 뜻이다. 정조 22년(1798) 원자(元子)를 위한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그 요속(僚屬)으로 천거 · 선발되었으나, 박윤원은 정조의 거듭된 엄교(嚴敎)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 대고 취임하지 않았다. 원문은 ‘地如此近 而遐心莫回’인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그대의 목소리를 금옥처럼 여겨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품지 마소.〔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고 하였다. 이 시는 산중으로 떠나려는 현자(賢者)를 만류하는 시라고 한다.
[주D-007]홀로 …… 않는 : 원문은 ‘獨立而不懼 確乎其不拔’인데,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상사(象辭)에 “군자는 이 괘를 써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아니한다.〔君子以獨立不懼〕”고 하였고,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문언전(文言傳)에 공자 가라사대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힐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하였다.
[주D-008]영남의 …… 없었지요 :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96년 박윤원이, 안의현 부근의 합천(陜川)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선조 박소(朴紹)의 묘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호장(戶長)이 축문(祝文)을 쓴다고 잘못 전해 듣고 그 비례(非禮)를 견책하면서 시정을 촉구한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연암이 그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는 답서를 보낸 바 있다. 그 답서는 《연암집》 권2에 ‘답족형윤원씨서(答族兄胤源氏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박윤원의 편지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근재집(近齋集)》 권18에도 연암에게 보낸 박윤원의 편지가 실려 있다.
[주D-009]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 연암이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1800년 음력 8월 승진하여 강원도 양양(襄陽)에 부사(府使)로 부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양양은 동해에 임하여 바닷바람이 거세고 산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한 고을이었다.
[주D-010]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 : 원문은 ‘鯨吼鼉鳴’인데, 비바람을 몰고 오는 대해(大海)의 거센 파도 소리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영규비(靈圭碑)
신종황제(神宗皇帝) 20년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5년에 왜놈이 침략해 와 우리 삼경(三京 경주 · 한양 · 평양)을 무너뜨리자, 중 영규(靈圭)가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수길(秀吉)의 군사를 청주(淸州)에서 크게 깨뜨리고, 군사를 금산(錦山)으로 옮겨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때를 당하여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은 의(義)를 내걸고 민병(民兵)을 일으켜 초토사(招討使)가 되었으며, 최경회(崔慶會)는 송골매 골(鶻) 자로 군기(軍旗)를 표(標)하고, 임계영(任啓英)은 범 호(虎) 자로 군기를 표하고, 김덕령(金德齡)은 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곽재우(郭再祐)는 홍의(紅衣)로 군을 구별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大夫)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세신(世臣)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토지나 병갑(兵甲)을 지닌 것도 아니고 부신(符信)을 발급하거나 호령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궐기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의를 내세워 궐기한 자들이 10여 진(陣)이었다. 그들은 혹 제 고장을 스스로 호위하기도 하고, 혹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고, 혹 연수(連帥 관찰사)의 죄를 성토하여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기도 했는데, 오직 문열공 조헌의 군중만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스스로 조정과 연락을 취했으니 그 의(義)가 특히 정대하였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의(義)가 동맹자를 얻었음을 알았다.
절도사(節度使) 박홍(朴泓)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각(李珏)과 조대곤(曺大坤)은 군량 10여 만 가마를 불태우고 정기(旌旗)를 땅에 묻어 버리고 적을 만나자 먼저 도망했으며, 부사(府使) 서예원(徐禮元)과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관찰사 이광(李洸)과 윤선각(尹先覺)은 10여 만의 군사를 지니고도 왕을 호위하지 못했고, 왕이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거둥하였으나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한 치의 무기나 한 말의 군량도 지닌 처지가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힘껏 싸웠다. 문열공의 군사가 청주성(淸州城)의 동문(東門)을 포위하자 영규는 성의 서문에서 전투를 벌여 먼저 성에 올라가니,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용맹함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대신을 보내어 조선 문제를 맡기니, 군사를 통솔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은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고, 군무(軍務)를 맡아 다스린 어사(御史) 만세덕(萬世德) · 양호(楊鎬)와 상서(尙書) 형개(邢玠)는 모두 병법에 깊은 자들이었다. 유격장군(遊擊將軍) 낙상지(駱尙志)는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릴 정도로 힘이 세었고, 양원(楊元)과 사대수(査大受)는 기이한 재주와 굳센 용맹으로 적진에 뛰어들 때는 맨 앞에서 나서고 성을 칠 때는 남보다 먼저 올라갔다. 군사들은 모두 절강(浙江) · 사천(泗川)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來州)의 날랜 기병(騎兵)과 활 잘 쏘는 사수들이며, 거기에는 대장군의 집종 천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놈을 공격하다가 자주 군사가 퇴각했으며, 포위망을 공격하다 패한 적도 자주 있었으며, 항상 많은 군사로 적은 수효의 왜병을 공격했으되, 무기가 파손되고 군사는 지쳐서 7년 사이에 성을 쳐서 빼앗은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영규는 승려로서, 머리 깎고 검은 옷 입고 술과 고기를 끊고 살생을 경계하는 무리를 이끌고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 아래로 육박하여, 왜병들로 하여금 제 한 목숨 구하기에도 바빠 죽은 시체를 불태우고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공적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었다. 급기야 군사를 금산으로 이동하여 절도사 및 여러 의병들과 왜병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군사들이 모두 기일을 놓치게 됨으로써 문열공이 전사하였다. 영규가 장중(帳中)에 들어갔으나 문열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공의 휘하 700사람과 더불어 같은 날에 전사하였다.
오호라! 이때를 당하여 정발(鄭撥)은 적의 습격을 받아 죽었고,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무너지고 힘이 다해 적을 꾸짖고 죽었으며, 신립(申砬)과 김여물(金汝岉)은 군대가 패하여 죽었으며, 신길원(申吉元), 정담(鄭湛), 변응정(邊應井)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었으며, 황진(黃進), 원호(元豪)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모두 공(公)에 죽고 절(節)에 죽은 신하들이다. 저 영규는 승려로서, 공에 죽고 절에 죽어야 하는 신하가 아닌데도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특별히 죽었으니, 그 의열(義烈)과 충용(忠勇)은 족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저 영규는 승려인데도 선비와 군자들이 그 절의를 지극히 사모하여 비석을 깎아 그 공을 새긴다고 한다. 영규의 법호(法號)는 ‘청허대사(淸虛大師)’라 한다.
[주D-001]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 초승은 수레 위를 훌쩍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리킨다. 김덕령은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주D-002]군무(軍務)를 …… 양호(楊鎬)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 양호는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되었으며, 만세덕은 양호가 파직된 뒤 그의 후임으로 왔다.
[주D-003]상서(尙書) 형개(邢玠)는 : 원문 중 ‘尙書邢玠’ 다음에 몇 자가 누락된 듯하다. 정유재란 때 병부 상서 형개는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총독계요보정군무(總督薊遼保定軍務)를 겸임하였다.
[주D-004]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주(州)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주D-005]원호(元豪) : 1533~1592. 퇴직 무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여강(驪江)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 한양의 오부(五部) 중 하나)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작고한 사인(士人) 김국보(金國輔)의 아내 밀양 박씨가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저희들은 박씨의 이웃에 살고 있는데, 이달 열아흐렛날 밤 삼경에 이웃집 문지게를 누차 두들기며 급한 목숨 구하라는 소리가 있으므로, 위아래 여남은 집이 일제히 놀라 일어나 급히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바로 박씨가 독약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그 집안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웃에 이에 대한 경험방(經驗方)을 여기저기 물어보아 만의 하나나마 살릴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그 집에 모여 그가 마신 독약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바로 간수였습니다. 그래서 방약(方藥)을 이것저것 쓰게 하고 쌀뜨물을 여러 번 퍼먹여 보았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슬피 부르짖어 차마 듣지 못하도록 참혹했습니다.
대개 박씨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 대한 효순(孝順)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의복과 음식의 범절에 있어 부모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으며, 몸 한 번 움직이고 발 한 번 옮기는 사이에도 반드시 어른의 뜻을 받들어 중문 밖을 내다보지 않고 바깥 뜰에는 노닐지 않으며, 단장(端莊)하고 근칙(謹飭)하여 매사에 여자의 법도를 따랐으니, 비록 이웃집의 계집종이나 물건 팔러 다니는 할멈도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닐곱 살 때에 벌써 소문과 칭송이 무성하여 사방에서 딸 가진 자들은 누구나 박씨의 어린 딸을 칭찬하는 것으로써 자기 딸을 가르치고 타일렀습니다.
나이 열여섯 살이 되자 김씨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지아비가 불행히도 병에 걸렸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약물 치료도 계속하기 어려웠으므로 비녀와 가락지 등속을 다 팔았으며, 병간호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천역(賤役)을 자청하였으며,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잠 한숨 붙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점치고 기도하기를 극진히 아니한 적이 없어 매번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칠성님께 빌었는데,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도 행여나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급기야 지아비가 죽어 초혼(招魂)하게 되자 크게 한 번 부르고는 까무라쳤다가 겨우 깨어났으며,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고 한 숟갈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죽어서 지하로 따라가기를 맹세하였습니다. 때때로 정신을 잃고 숨이 넘어가려 하여 친정 부모나 시부모들이 백방으로 달래고 타이르며 천 가지로 간곡히 권하자, 겨우 죽을 마음을 늦추고 억지로 부드러운 얼굴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친부모와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지, 죽으려는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이 처음에 가끔 말을 걸어 의중을 떠보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목이 막혀 하는 말이,
“내가 김씨 집안에 들어와서 이미 한 점의 혈육도 둔 바 없으니 삼종(三從)의 도리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살아서 또한 무얼 하오리까? 한낮의 촛불같은 목숨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 오래도록 부모님께 근심만 끼쳐 드리고 있으니, 이 역시 큰 불효입니다.”
하였습니다. 항상 조그마한 방에 따로 거처하여 발걸음이 뜰을 내려가지 않으니 사람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집안사람들이 무언중 그 뜻을 살피고서 극력 방비하여, 비록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반드시 그 동정을 살폈으며 잠시 동안이라도 감히 방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반년이 되어 방비가 조금 풀어지자, 이달 초열흘경에 턱밑에 갑자기 조그마한 부스럼이 생겨 그다지 아픈 지경까지 이르지도 않았는데, 박씨는 그 오라비에게 청하여 의원에게 물어 고약을 붙이곤 하므로 그 집에서는 더욱 방심했던 것입니다. 열아흐렛날 밤 화장실에 가는 길에 그 어머니가 따라가다가 앞과 뒤가 조금 떨어졌는데 갑자기 대청 위에서 넘어져 거꾸러지는 소리가 들리기에 놀라 쫓아 나와 보니 삽시간에 이미 구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생각하고 그 곁을 두루두루 살펴봐도 칼이나 비단 같은 도구들은 없고, 간수만 대청에 흥건하였습니다. 대개 그 집안에서 막 침장(沈醬)을 하려고 소금을 달아매어 짠맛을 빼고 있었으므로, 몰래 그 액체를 마시고서 기절하여 토했던 것입니다. 워낙 일이 경각에 일어났기 때문에 먼저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일을 목격하고 서로 돌아보며 화들짝 놀라고는, 모두 말하기를,
“놀랍도다, 이렇게 정말 죽다니!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했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 마을에 사는 정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所志)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그 아버지가 울며 중지시키면서 하는 말이,
“내 딸이 저의 뜻을 이룰 수 있었으니 열녀라 이를 수는 있지만, 나에게 지극한 슬픔을 끼치고 죽었으니 효녀라고 이를 수는 없소. 지금 일을 크게 벌인다면 이 역시 죽은 자의 본뜻이 아닐 것이오.”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이 일은 친청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
하고서 물러 나와, 마을 안의 제일 어른의 집에 일제히 모였으며, 소지를 올려야 마땅하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동안 듣고 본 바를 주워 엮어 일제히 예조의 문밖에서 부르짖는 바입니다.
아아!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은, 진실로 남다르고 정숙한 행실을 포상하고 정표(旌表)하는 은전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영화(榮華)를 탐하거나 은혜를 바라서가 아니라 실은 풍속을 돈후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閭巷)에서 부르는 풍요(風謠)의 가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신하들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樂)을 맡은 관원들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感發)시켰는데, 지금 박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는 보통을 훨씬 넘었으며 담담하게 의(義)에 나아가고 결백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임금님께 아뢰어 정려(旌閭)의 은전을 얻게 하여, 이로써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고 정렬(貞烈)을 지킨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한다면,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서 산 덕분으로 본받는 바 있을 것이며,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D-001]급기야 …… 되자 : 원문은 ‘及其皐復’인데, 초혼(招魂)을 고복(皐復)이라 한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손에 들고 지붕에 오르거나 마당에 서서 영혼이 돌아오라는 뜻으로 “아무개 복!〔某復〕”이라고 세 번 외치는데 이를 삼고(三皐)라 한다.
[주D-002]침장(沈醬) :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는 일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남양 이씨(南陽李氏)의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이씨는 곧 문장과 덕행을 지닌 선비인 박경유(朴景兪)의 아내입니다. 경유가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앓아 오던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요절했는데, 그때에 경유의 조모(祖母)는 나이 82세로서 오래된 병고로 오늘내일하여 집안에 어떠한 상사(喪事)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으며, 경유의 부친도 평소 기이한 병을 앓아 역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좌우로 병 수발하느라 남편의 죽음에 울음 울 겨를도 없이, 한편으로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염하고 입관(入棺)할 채비를 몸소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노인의 탕약을 손수 달여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삼키며 금방 밝은 낯빛을 짓곤 하였습니다. 친척으로 조문하는 자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격하였으며, 이웃에서도 듣고 그 정경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삼우제(三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자 보살피던 두 병자가 차례로 조리되어 마침내 완쾌를 보게 되니, 모두들 이씨의 지성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5월 17일이 되어 집안사람들에게 두루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 이튿날이 바로 이씨의 생일이라 집안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이날을 당하고 보니 비통함이 마땅히 갑절이나 더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을 뿐, 죽기로 맹세한 뜻을 품고 남몰래 시기를 정해 두었을 줄은 실로 알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시조모를 모시고 곁에 앉았는데 그 처량한 말과 비통한 안색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며 어물어물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니, 온 집안이 잠이 들어 변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이씨가 잠자는 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가 나기에 옆방 사람들이 급히 가 보니 조금 전에 이미 혼절했으나 따스한 기운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베개맡의 사발에 간수가 흥건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허둥지둥 이웃을 찾아다니며 해독할 경험방을 여기저기 묻고 다니자, 위아래 마을 여남은 집이 놀라고 가엾이 생각하여 일제히 살피러 쫓아가서 쌀을 씻어 뜨물을 내어 수없이 입에 부어 넣었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통곡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죽은 이날이 바로 그의 생일날이라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열부로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자리 밑에서 언문 유서 두 통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정월에 쓴 것으로서 기일을 정하여 죽기로 맹세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바로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시조모와 시아버님 병환이 모두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10년 동안 병자를 모시면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내 뜻대로 한다면 지은 죄가 더욱 클 것이요, 또 죽은 남편의 초종(初終)도 거듭되는 초상으로 인해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서 시일을 끌면서 참아 왔는데 5월 18일은 나의 생일이니 이날이 바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달 17일에 쓴 것으로서 시아버님께 이별을 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우선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초상을 치르는 범절은 반드시 남편의 상보다 줄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 염할 준비는 다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모두 밤을 틈타 손수 만든 것이라 운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씨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다섯 달이나 시일을 끌면서 몰래 염할 옷을 꿰매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일 처리의 치밀함과 죽음을 결단하는 차분함으로 보자면 비록 옛날 전기(傳紀)에 열거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무엇이 더하오리까?
대개 이씨는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며, 성장해서는 여자로서의 행실이 예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았으며, 구태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바느질과 길쌈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경유에게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경유는 뜻이 독실하고 행실이 옛사람 같았으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으므로 아내를 벗으로 삼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습니다. 경유의 조모는 여러 해를 앓아 온 고질로 노상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씨가 조모를 간호하고 봉양하던 범절은 한결같이 경유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10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한 바 없었으니, 경유가 옷의 띠를 풀지 않으면 이씨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경유가 몸소 변기(便器)를 가져 나르면 이씨는 친히 변기를 씻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절통한 마음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다 한 번의 결단으로 목숨을 버린 것을 가지고는 이씨의 고절(高節)을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하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마을에 사는 도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마을 안의 제일 어른 집에 일제히 모였는데, 어떤 이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우리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요, 10년 사이에 이런 일이 모두 한집안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전번에 이미 소지를 올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뒤의 일인들 혹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대개 경유의 누이인 김씨의 아내도 예전에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앞뒤로 잇닿아 빛났으므로, 저희들이 일제히 예조에 부르짖고 다시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미 정려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도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 전인(前人)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아아!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에서 부르는 풍요의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관원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樂)을 맡은 관원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시켰는데, 지금 이씨의 성취한 바가 어찌 풍요로서 채집되거나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 살고 있어 눈으로 익히 보고 귀에 젖었으면서도 연명(聯名)으로 소지를 만들고 일제히 한목소리로 집사(執事)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일을 드러냄으로써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풍속을 바로 세우고 도탑게 하는 정사(政事)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각하(閣下)의 직분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그것까지 관여하겠습니까?
[주D-001]박경유(朴景兪) : 《연암집》 권10 열부 이씨 정려음기(烈婦李氏旌閭陰記)에 소개되어 있다. 연암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던 선비로 정조 5년(1781)에 요절했다. 박윤원(朴胤源)이나 이덕무의 문집에 박경유에게 준 답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박경유를 덕행을 갖춘 인물로 칭찬했다.
[주D-002]초종(初終) : 초상이 난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말한다.
[주D-003]거듭되는 초상 : 병 수발을 소홀히 하여 시조모와 시아버지가 잇달아 죽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다.
[주D-004]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로(子路)가 전한 공자(孔子)의 말로 “상례(喪禮)에 슬픔은 부족한데 예절이 남음이 있는 것은, 예절은 부족하되 슬픔이 남음이 있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고 하였다.
[주D-005]각하(閣下) : 이본들에는 ‘합하(閤下)’로 되어 있다. 집사(執事)와 각하, 합하는 모두 판서(判書)에 대한 경칭으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연암집
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원사(原士)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篇)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글뭉치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아들 종채(宗采)가 삼가 쓰다.
무릇 선비〔士〕란 아래로 농(農) · 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사(士)’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士)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을 ‘사’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秦)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孝)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悌〕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統〕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雅〕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이랴?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요,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雅〕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術)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고 하는데, 안로(顔路)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
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道)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性)과 명(命)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理)와 기(氣)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性)과 정(情)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註)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아마도 주공(周公)의 저술인저!”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
“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칭찬을 들은 이는 오직 안로(顔路)의 아들 안자(顔子)일 것이다. 안자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말이다.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이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상(喪)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喪)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글을 읽다가 예전에 잘 몰라서 질문을 한 적이 있던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잘 몰라서 의심이 나는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깨닫게 된 것이 있으면 탄식한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주D-001]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주D-002]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권4에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주D-003]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즉, 노(魯)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4]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주D-005]송 광평(宋廣平)이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주D-006]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송(宋)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주D-007]노중련(魯仲連)이 …… 물러갔으니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8]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제 5 장의 한 구절이다. 단 《시경》에는 ‘疹’ 자가 ‘殄’ 자로 되어 있다.
[주D-009]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제 3 장의 한 구절이다.
[주D-010]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禮)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주D-011]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는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주D-012]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素’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統’ 자, ‘본디’로 번역한 ‘雅’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D-013]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雅’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주D-014]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를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주D-015]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과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雅’ 자를 ‘바르다〔正〕’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주D-016]안자(顔子)는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주D-017]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노(路)는 그의 자(字)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槨)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주D-018]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주D-019]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주D-020]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反’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주D-021]《주례(周禮)》는 …… 저술인저 : 정현(鄭玄)은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注)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즉,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주D-022]왕망(王莽)은 …… 그르쳤다 : 한(漢)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주D-023]중니(仲尼)가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를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주D-024]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5]내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6]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주D-027]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주D-028]중니(仲尼)의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를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29]《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善)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역(易)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30]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주D-031]대숙(大叔) : 누구의 자(字)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주D-032]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주D-033]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4]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주D-035]기공(朞功)의 …… 경우 : 상기(喪期)가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喪)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D-036]글을 …… 탄식한다 : 원문에는 앞의 단락과 연결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보아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야 한다.
[주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주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에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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