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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혹정필담(鵠汀筆談)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혹정필담(鵠汀筆談)
1. 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2. 혹정필담(鵠汀筆談)
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어제는 윤공에게 이야기를 하여 해가 저무는 줄을 몰랐다. 윤공이 가끔 졸며 머리로 병풍을 받곤 하였다. 나는,
“윤 대인(尹大人)께선 아마 피로하신 모양이니,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더니, 혹정(鵠汀)은,
“그야 조는 이는 졸고 이야기하는 이는 이야기하는 것이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한다. 윤공이 약간 그 말을 들었는지 혹정을 향하여 무어라고 두어 마디 말을 하자, 혹정은 곧 머리를 끄덕이고는 담초(談草)를 거두고 나에게 읍하며 함께 일어났다. 이는 대저 윤공은 노인인 데다가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한낮이 지나도록 수작하였으니, 그가 피로해서 조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고 하겠다.
혹정이 그 이튿날 아침밥을 짓기로 하고, 나에게 같이 먹기를 청한다. 나는,
“이야기 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늘 해가 짧음이 걱정이니, 내일은 특히 일찍이 가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렇게 하시죠.”
한다. 그 이튿날 오경(五更)에 사신이 일어나 조회에 나갈 때 나도 함께 일어나서 곧 혹정을 방문하여 촛불을 밝히고 이야기할 적에, 학도사(郝都司) 성(成)은 왔으나, 윤공은 벌써 새벽에 조회하러 들어갔다. 밥을 먹으며 필담(筆談)하는 사이에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를 허비하였다. 그러고 보니, 인시(寅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무려 8시간으로 계산된다. 학공(郝公)은 좀 늦게 왔다가 먼저 가 버렸다. 이 담초(談草)를 차례대로 엮어서 ‘혹정필담(鵠汀筆談)’이라 이름하였다.
[주C-001]혹정필담서(鵠汀筆談序) : ‘박영철본’에는 본래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혹정필담(鵠汀筆談)
나는 말하기를,
“윤 대인께선 어제 손 접대에 몹시 괴로우신 모양이어서 제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지루하지 않으실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윤공은 늘 한나절이면 한참 졸기 마련이므로, 남들에게 그의 이런 꼴을 뵈지 않으려고 했긴 하나, 결코 손님을 싫어하는 뜻은 없을 거요.”
하고는 또 나에게,
“윤공은 어떠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한다. 나는,
“그는 참 신선(神仙) 같은 분입니다. 선생은 그와 친한 지 오래됐습니까.”
하였다. 혹정은,
“다북쑥과 도리(桃李)처럼 문벌과 가는 길이 전혀 다르답니다. 요즘 벗한 지 겨우 한 10여 일 넘었습니다.”
한다. 혹정은 다시 묻기를,
“공자(公子)께서는 아마 기하학(幾何學)에 정통하신가 봅니다.”
한다. 나는,
“어째서 그런 줄 아십니까.”
했더니, 혹정은,
“저 윗방에 든 기 안사(奇按司)가, 고려 박 공자(朴公子)는 우리나라를 부를 때는 ‘고려’라고 불러,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을 말할 때 한(漢)이니 당(唐)이니 하는 것과 같고, 그들은 나를 부를 적에 가끔 공자(公子)라 하였다. 기하학에 정통하다고 크게 칭찬하며, 그의 말에 의하면 ‘달 가운데 한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이 땅과 같을 것이고, 또는 지구(地球)가 저 공중에 걸려 있으니 그는 실로 한 개의 작은 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 지구의 자체에서 빛이 생겨서 달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라고 하더이다.’ 하니, 이들은 모두 기이한 이론인 동시에 경천(經天) 위지(緯地)의 재주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다. 나는,
“저는 솔직하게 말한다면, 기하학에 대하여서는 반 글자도 엿본 적이 없습니다. 요전 밤에 우연히 기공(奇公)과 함께 앞 청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기이한 흥취를 걷잡지 못하여 아무런 헤아림도 없이 멋대로 지껄인 것이니 이야말로 일시적인 허튼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저의 억측(臆測)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기하학으로 유추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혹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겸손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지구의 빛에 대한 이론을 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지구에 빛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햇빛을 받아서 빛이 생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자체에서 저절로 빛이 생기는 것입니까.”
한다. 나는,
“마치 꿈결에 푸른 글씨로 쓴 부적을 읽은 것처럼 되어서, 지금은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저도 평소에 남 몰래 발명한 것이 없지 않으나, 역시 남을 만나서 발표하진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여러분들로 하여금 대경(大驚) 소괴(小怪)하게 할까 보아서입니다. 그래서 마치 무엇이 탯덩이처럼 가슴속에 뭉쳐 있어서 오래도록 소화되지 않아, 겨울과 여름철이 되면 더욱 괴로워집니다그려. 선생도 이런 증세가 이루어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한다. 나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서 그걸 깨뜨려 버립시다. 몇 해 동안의 숙증(宿症)을 약 쓰기 전에 낫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아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손을 흔들며 웃는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손된 이가 먼저 꺼내진 못하는 겁니다.”
하고는 말을 끝냈다. 얼마 아니 되어 밥상이 들어온다. 그 차린 순서를 본즉, 과실과 나물이 먼저 오르고 다음에는 떡, 또 다음에는 볶은 돼지고기와 지진 달걀 등이 오르고, 밥은 가장 뒤에 올랐는데, 하얀 쌀로 지은 데다가 양곱창국을 끓였다. 중국 음식은 모두들 저를 사용하고 숟갈은 없었으며, 권하거니 받거니 하며 작은 잔으로 기쁨을 나눈다. 우리나라처럼 긴 숟갈로써 밥을 둥글둥글 뭉쳐 한꺼번에 배불리고는 곧 끝내는 법이 없이, 가끔 작은 국자로써 국물을 떴을 뿐이다. 국자는 마치 숟갈과 비슷하면서 자루가 없어서 술잔 같기도 하나, 또 발이 없어서 모양은 연꽃 한 쪽과 흡사하였다. 나는 국자를 집어서 한 공기 밥을 떠 보려 하였으나 그 밑이 깊어서 먹을 수 없기에,
“빨리 월왕(越王)을 불러 오셔요.”
하고는, 무심코 웃었다. 학지정은 나더러,
“무슨 말씀이셔요.”
한다. 나는,
“월왕의 생김새가 목이 썩 길고 입부리가 까마귀처럼 길었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혹정의 팔을 잡고 웃느라 입에 들었던 밥이 튀어나오며 재채기를 수없이 한다. 지정은 이내,
“귀국 풍속에는 밥을 뜰 때에 무엇을 쓰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숟갈을 쓴답니다.”
했더니, 지정은,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한다. 나는,
“작은 가지잎 같습니다.”
하고는, 이내 탁자 위에다 그려 보였더니, 둘은 더욱 배꼽을 움켜쥐고 절도한다.
지정은 곧,
어떻게 생긴 가지잎 숟갈이 / 何物茄葉匕
저 혼돈하 구멍을 뚫었던고 / 鑿破混沌霞
라고 읊자, 혹정은,
많고 적은 영웅들 손이 / 多少英雄手
젓가락 비느라 얼마나 바빴으랴 / 還從借箸忙
한다. 나는,
“기장밥은 저로써 먹질 않고 남과 함께 먹을 때는 손을 국물에 적시지 않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들어와선 숟갈을 구경하지 못하겠으니, 옛 사람들이 기장 밥 자실 때 손으로 뭉쳐서 잡수셨던가요.”
하였더니, 혹정은,
“숟갈이 있긴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기장밥이고 쌀밥이고 저를 쓰기로 관습이 되었답니다. 소위 조행이 습관이 된다는 것도 예와 지금이 저절로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한다. 나는 또,
“혹정 선생은 뱃속에 가득히 꾸불꾸불 뒤틀어져 있는 그 무엇을 끝내 해산하기 어려운지요.”
하였더니, 지정은,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한다. 나는,
“아까 이야기하던 대경 소괴의 탯덩이 말씀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며,
“여기에는 ‘도라면탕(兜羅綿湯 한약)’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매, 지정은,
“그야말로 홀륜탄조(囫圇呑棗 우물우물해서 삼키는 것)이군요.”
한다. 나는,
“이는, 만일 안기생(安期生)의 대추가 아니라면, 아마 위왕(魏王)의 고주박일 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런 정도이지요.”
하고는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러나 저는 온몸에 가려움증이 나서 배기지 못하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시다면 어디서 마고(麻姑)의 손톱을 구해 오란 말씀이요.”
한다. 지정이 다시 지구의 빛에 대한 설명을 청하기에, 나는,
“제가 다만 허망한 말씀을 드렸으니, 선생께서는 역시 허망한 말로 들어 주신다면 좋겠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는 것도 해롭진 않을 것이오.”
한다. 나는,
“낮이면 만물이 모두 환하게 보이다가도 밤들면 곧 모든 것이 암흑 속에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이어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것이야 햇빛을 받아서 밝은 것이지요.”
한다. 나는,
“모든 물건이 그 자체로서는 밝음이 없으니 그 본질(本質)은 어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저 어두운 밤중에 거울을 대해 보더라도 목석(木石)과 다름없으니, 이는 비록 빛을 받아들일 성격은 포함되었으나 그 자체가 밝을 수 있는 바탕을 갖춘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받은 연후에야 빛을 낼 수 있으므로 그 반사(反射)하는 곳에 도리어 밝은 그림자가 생기니, 물의 밝음도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구(地球)의 밖에 바다가 둘린 것은, 비유하건대 한 개의 큰 유리 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월세계(月世界)에서 이 땅의 빛을 바라본다면, 역시 현(弦)이니 보름이니 또는 그믐이니 초하루니 하는 것이 있을 테며, 그 해와 마주 대한 곳에는 큰 물과 큰 땅덩이가 서로 잠기며 비춰져서 그 빛을 받아 반사되어 바꾸어 가며 밝은 그림자를 토하되, 마치 저 달빛이 이 땅에 고루 퍼졌으나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은 저절로 어두워져서 현(弦)이 이룩되기 전 초승달처럼 빈 넋둘레만 걸려 있어, 그 흙의 깊은 곳이 마치 달 속의 검은 그림자처럼 엉성하지 않겠소.”
하였더니, 혹정은,
“저도 역시 일찍이 망령되이 지구에 빛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선생의 논하신 것과는 좀 다른 것이 있을 뿐이어요.”
한다. 나는,
“그야 반드시 서로 같아야 됨은 아니니까, 이에 대한 설명이나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지정이 혹정을 돌아보며 잇달아서 몇 마디 말로,
“산하(山河)의 그림자.”
하므로, 혹정은 머리를 흔들며, 연달아,
“그렇지 않아.”
라고 한다. 나는,
“무엇이 아니란 말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선생께서는 방금 지구의 빛을 설명하셨는데, 학공(郝公)은 산하의 그림자로 안 까닭이어요.”
한다. 나는,
“불가(佛家)의 설에 의하면, 저 달 가운데에서 마치 무엇이 춤추는 듯한 것이 곧 산하(山河)의 그림자라 하였은즉, 이는 곧 달은 한 둘레의 허명체(虛明體)에 지나지 않아서 마치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이 대지(大地)에 내리쬠을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 소위 철요형(凸凹形)이란 것도 역시 산하의 높고 낮음으로서, 마치 그림의 부본(副本)처럼 위로 올라서 달 가운데 물들인 것이니, 이는 모두 땅과 달의 본분(本分)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달 속의 세계란, 참으로 한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지구의 빛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나타내 보일 만한 것이 없으므로 이러한 달 속의 세계를 가설(假設)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치를 바꿔서 대처해 보자는 것이니, 설사 우리들이 달 가운데에서 지구의 바퀴를 쳐다본다면, 역시 이 땅 위에서 저 달의 밝음을 바라봄과 똑 같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옳습니다. 선생의 이 말씀은 내 벌써 명백히 알아들었소이다. 이미 달 속의 세계가 있다면 자연 산하가 있겠고, 산하가 있다면 자연 철요가 있겠으므로, 멀리 서로 바라본다면 으레 이런 형태가 나타날 것이니, 이는 대지(大地)를 빌리지 않아도 그 그림자는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빛에 대해서 나는, 햇빛을 빌려서가 아니요 그 자체에서 빛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체로 물건이 크면 신(神)이 그를 지키는 것이요, 물건이 오래 묵으면 정기가 어리는 법이니, 늙은 조개가 구슬빛을 토하여 어두운 밤을 밝혀 줌은 곧 신과 정기가 한 곳에 모인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땅덩이야말로 참으로 크고도 오래갈 수 있는 감공보주(嵌空寶珠)인즉, 큼직한 신정(神精)이 저절로 빛을 발할 것이니, 예를 든다면 저 도덕 있는 군자가 그의 화순한 마음이 속에 쌓여서 그 영화(英華)가 외면에 나타남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저 공중에 가득한 별이나 은하에는 모두 제 몸에서 나오는 빛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다.
지정은 옆에서 읽다가 웃으며, 위에 적은 ‘월중 세계(月中世界)에서 이 지구의 빛을 바라본다’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치고는, 또 ‘지구는 곧 감공보주’라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치며,
“두 분 선생께서는 아마 한 번 달나라에 가셔서 항아낭랑(姮娥娘娘)에게 소송을 걸어 판결지어야 하겠소이다. 그때에는 아예 학성(郝成)더러 증인이 되라 마십시오.”
한다. 혹정은 곧 그 항아낭랑에게 소송을 걸라는 구절에다 동그라미를 친다. 혹정은 또,
“달 가운데에 만일 한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어떨 것이라 생각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웃으며,
“아직 월궁(月宮)에 한 번도 가 구경한 적이 없은즉, 그 세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다만 우리들 티끌 세계의 사람으로서 저 달의 세계를 상상한다면, 역시 어떤 물건이 쌓이고 모여서 한 덩이가 이룩되었으되, 마치 이 큰 땅덩어리가 한 점 미진(微塵)이 모인 것과 같을 것이니, 티끌과 티끌들이 서로 의지하되 티끌이 부드러운 것은 흙이 되고, 티끌이 거친 것은 모래가 되며, 티끌이 굳은 것은 돌이 되고, 티끌의 진액(津液)은 물이 되며, 티끌이 따스한 것은 불이 되고, 티끌이 맺힌 것은 쇠끝이 되며, 티끌이 번영한 것은 나무가 되고, 티끌이 움직이면 바람이 되며, 티끌이 찌는 듯하게 기운이 침울하여 모든 벌레(생물을 뜻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람들은 곧 모든 벌레 중의 한 족속에 불과함이니, 만일 달 세계가 음성(陰性)으로 형성되었다면 그 물은 곧 티끌일 것이요, 그 눈은 곧 흙일 것이며, 그 얼음은 곧 나무일 것이고, 그 불은 곧 수정일 것이며, 그 쇠끝은 곧 유리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달 세계가 반드시 진정코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록 제가 추상적으로 이런 명제를 설정했지마는, 역시 어찌 그다지 크나큰 물체가 이룩되어 그 덕(德)은 햇빛에 비교할 수 있고, 그 체(體)는 해에 배합할 수 있으면서, 오히려 한 물건도 기운이 모여서 벌레처럼 변화함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들 사람은 불에 들어가면 타 버리고, 물에 빠지면 가라앉곤 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일찍이 불과 물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비록 물과 불 속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체로 모든 벌레는 물속에 살고 있는 것이 다만 고기와 자라 등속뿐이 아니고, 비록 비늘과 껍질로 주를 삼았다 하나, 역시 날개가 돋친 놈이나 털에 감싸인 놈들로써 이웃을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저 고기와 자라는 비록 뭍에 놓는다면 죽어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역시 때에 따라서는 깊이 진흙 속에 숨어 사는 것을 보아서는, 이는 인(鱗)과 개(介)의 족속도 또한 일찍이 흙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 직방(職方)이 소개한 외에 정말 몇 개의 세계가 있을는지요.”
하였다. 지정은,
“저 서양 사람들의 기록한 바를 믿는다면, 아마 구국(狗國)ㆍ귀국(鬼國)ㆍ비두국(飛頭國)ㆍ천흉국(穿胸國)ㆍ기굉국(奇肱國)ㆍ일목국(一目國) 등의 여러 가지 기기괴괴한 것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모두들 보통 생각으로는 미칠 바 아니었습니다.”
하매, 혹정은,
“이는 다만 서양 사람의 기록에 나타났을 뿐 아니라, 우리 경(經)에도 있지 않습니까.”
한다. 나는,
“어떤 경(經)에 실려 있나요.”
했더니, 혹정은,
“《산해경(山海經)》이지요.”
한다. 나는,
“이 대지를 둘러서 몇 곳의 인황(鱗皇)과 모제(毛帝)가 있는지 알 수 없은즉, 이 땅에서 저 달을 생각해 볼 때에는 그에 한 개의 세계가 있음도 이치에 괴이할 건 없으리라 생각되어요.”
했더니, 혹정은,
“달 세계의 있고 없음이야 우리들 진세에 아무런 상관이 없은즉, 이는 곧 이른바 월인(越人)의 살찌고 여윈 것이 진인(秦人)에게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옛 성인들도 말씀하지 못한 것이거늘 이제 선생이 말씀해 주시니 나로 하여금 티끌 세상의 모든 번뇌가 별안간 없어지곤 마치 저 광한궁(廣寒宮 달 속에 있는 궁전)에 앉아서 얼음 비단을 입은 채 싸늘한 술을 마시며 백이(伯夷)와 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로 더불어 노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 ‘떼를 타고 바다에 뜬다’ 함은 곧 공자의 별계 망상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선생이 영연(泠然)히 서늘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향할 때에는 저는 저 중유씨(仲由氏)에게 결코 뒤질 생각은 없소이다.”
한다. 지정은 곧 ‘별계 망상’에다 동그라미를 치며,
“그럴 때에는 저는 팔짝팔짝 저 토끼나, 펄쩍펄쩍 저 두꺼비의 노릇을 할지라도 사양하진 않겠어요.”
하고는, 온 좌석이 왁자하고 웃었다.
혹정은 또,
“우리 유학자 중에서도 근세에 이르러선 저들 지구의 설을 제법 믿는 모양이어요. 대체로 땅이 모나고 고요하여 하늘이 둥근 채 움직인다 함은 우리 유학자의 명맥임에도 불구하고 저 서양 사람들이 이러한 혼란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어떤 학설을 좇으려 하십니까.”
한다. 나는,
“선생은 어떤 것을 믿으십니까.”
하고 반문했더니, 혹정은,
“전 비록 손으로 육합(六合)의 등마루를 어루만지지는 못했습니다만 자못 지구가 둥글다는 설을 믿지요.”
한다. 나는,
“하늘이 만든 것 치고 어떤 물건이고 간에 모진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저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등과 같은 것이라도 둥글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 산하ㆍ대지와 일월ㆍ성신들도 모두 하늘의 창조였으나, 우리는 아직 모난 별들을 본 적이 없은즉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서양 사람들의 저서를 읽어 본 적이 없으나 일찍이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 없다고 생각하였거든요. 대체로 지구의 꼴은 둥그나 그 덕(德)인즉 모나며, 그의 사공(事功)은 동(動)하는 것이나 그 성정(性情)은 정(靜)한 것이니, 만일 저 허공이 땅덩이를 편안히 한 곳에 정착시켜 놓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구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저 공중에 매달려 있기만 하게 하였다면, 이는 곧 썩은 물과 죽은 흙인 만큼 잠깐 사이에 그는 썩어 사라져 버릴지니, 어찌 저다지 오랫동안 한 곳에 멈추어 있어서 허다한 물건을 지고 싣고 있으며, 하(河)ㆍ한(漢)처럼 큰 물들을 담고서도 새나가지 않게 하였겠습니까. 지금 이 지구는 면면마다 구역이 열리고, 군데군데 발을 붙여서 그 하늘로 머리 솟고, 땅에 발을 디딤은 나와 다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벌써 땅덩어리를 구(球)로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구가 구르는 데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 이는 땅덩어리가 둥근 줄은 알면서 둥근 것이 반드시 구를 수 있음은 모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르면 하루가 되고, 달이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되며, 해가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해가 되고, 세(歲) 세성(歲星) 가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일기(一紀 12년)가 되며, 성(星) 항성(恒星) 이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일회(一會 1만 8백 년)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뿐 아니라 저 고양이의 눈동자를 보고서 역시 지전(地轉)을 증험할 수 있겠으니, 고양이의 눈동자가 열두 시간을 따라 변함이 있은즉, 그 한 번 변하는 순간에 땅덩어리는 벌써 7천여 리나 달리는 것입니다.”
했다. 지정은,
“이야말로 토끼 주둥이에 달린 건곤이요, 고양이 눈에 돌아가는 천지라고 이를 만합니다.”
하고는 크게 깔깔댄다. 나는,
“우리나라 근세 선배에 김석문(金錫文)이 처음으로 큰 공 세 개가 공중에 떠 논다는 학설을 했고, 저의 벗 홍대용(洪大容)이 또 지전설(地轉說)을 창안했던 것입니다.”
했더니, 혹정이 붓을 멈추고 지정을 향해서 무어라고 하되 마치 홍(洪)의 자와 1호를 말하는 듯하였다. 그러더니 지정은,
“담헌 선생(湛軒先生)은 곧 김석문 선생의 제자이십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아뇨. 김(金)은 돌아간 지 벌써 백 년이나 되었으니 서로 사수(師授)할 터수가 못됩니다.”
했더니, 혹정은,
“김 선생의 자와 호는 무엇이며, 아울러 저서는 몇 편이나 있습니까.”
한다. 나는,
“그의 자와 호는 모두 기억되지 않소이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한 저서도 없거니와 홍도 역시 저서가 없고 다만 제가 일찍부터 그의 지전설을 깊이 믿었으므로, 나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저서하기를 권했던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국내에 있을 때, 그럭저럭 하지 못했더니 어제 저녁에 우연히 기공(奇公)과 함께 달을 구경하다가 달을 보고는 친구 생각이 난 것이니, 이는 곧 곳에 따라 생각이 솟은 것인 만큼 저절로 진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서양 사람들이 지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저가 생각하건대 그들의 생각에는 만일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른다면 모든 전도(躔度)야말로 더욱 추측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이 땅덩어리를 붙들어서 한 곳에다 안정시켜 놓되, 마치 말뚝을 꽂은 듯이 한 연후에 측량하기에 편리하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전 본래부터 이런 학문에는 어두웠으나 역시 한두 가지의 엿본 것이 없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일곱 잔 차[茶]를 마신 듯이 다시 정신을 허비하지 않았더니, 이제 선생의 말씀은 저 서양 사람들의 발명한 바도 아닌 만큼 저는 감히 꼭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역시 감히 갑자기 그르다고 배격하기도 어렵고, 요컨대 아득히 상고할 곳이 없더니 이 선생의 변설은 몹시 정밀하여 마치 고려에서 만든 송납(松衲) 꿰매는 바늘 구멍처럼 되어서 그 둘린 선과 길이 하나하나가 투명하군요.”
한다. 지정은 또,
“어떤 것을 ‘큰 공 세 개’라 하고 또 어떤 것을 ‘하나의 작은 별’이라 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공중에 떠도는 ‘큰 공 세 개’란 곧 해와 땅과 달을 이른 것입니다. 지금 대체로 이에 대해서 논하는 이는 말하기를, 저 별은 해보다 크고 해는 땅보다 크며 땅은 달보다 크다 하였으니, 만일 그들의 말과 같다면 저 공중에 가득찬 별들은 모두 이 땅과는 상관이 없는 채, 다만 이 세 개의 공이 서로 가까운 이웃에 있어서 그 둘이 땅덩어리의 사유물처럼 되자, 그의 이름을 ‘해’니 ‘달’이니 하고서 해를 양이라 하고 달을 음이라 일컫되, 예를 들면 마치 어떤 살림집에서 동쪽 이웃에 불을 빌리고 서쪽 집에 물을 꾸는 것과 같아서, 저 공중에 가득히 박힌 별들로서 이 세 공을 본다면 저 태공에 얽혀 붙은 것이 저절로 쇄쇄(瑣瑣)한 작은 별들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들이 한 둘레의 물과 흙 어울음에 앉아서 시야가 넓지 못하고 생각이 한계가 있은즉, 그제야 망령되이 저 열수(列宿)들을 갖고 구주(九州)에다 분배(分配)시킨 셈이니, 이제 저 구주가 사해 안에 있음이 마치 검은 사마귀가 얼굴에 찍혀 있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는 곧 이른바 큰 못에 뚫린 작은 구멍이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별이 제각기 분야(分野)를 맡았다는 설이야말로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지정은 워낙 이 말을 믿었으므로 쇄쇄한 작은 별들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어지럽게 동그라미를 쳤고, 혹정도,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이론이며, 상쾌한 이론이어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습니다.”
하고는, 몹시 칭도하였다.
나는 또,
“저는 만리나 머나먼 길을 걸어서 귀국에 관광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극동에 있고 구라파는 곧 서양인 만큼 이 극동과 서양의 사람으로서 평소에 한 번 만나기를 원했더니, 이제 갑자기 열하에 들어왔으나 아직 천주당(天主堂)을 구경하지 못했은즉 이로부터 칙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시 연경에 들어올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외람되이 대인ㆍ선생들과 교제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았사오니, 비록 나의 큰 원을 덜었으나 다만 저 멀리에 사는 서양 사람들은 서로 만날 길이 없사오니, 이것이 나의 한스러운 바이었습니다. 이제 들은즉 서양 사람도 대가(大駕)를 모시느라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 하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혹시 그들과 아시거든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했더니, 혹정은,
“이런 일은 워낙 관서에 매인 일인 만큼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 법일 뿐더러, 또 이 행재(行在)한 곳은 모두 일하(日下 수도(首都))로서 인산과 인해인 만큼 그들을 찾기가 곤란할지니 헛수고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정은,
“저는 저녁에 잡무가 있습니다.”
하고는, 먼저 일어나 담초(談草) 오륙 장을 거두고 가 버렸다.
혹정이 또 묻되,
“홍담헌 선생은 건상(乾象)을 점칠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아니, 아뇨. 역상가(曆象家)와 천문가(天文家)는 같지 않소이다. 대체로 해와 달의 무리와 꼬리별이 떨어질 때에 그 빛의 움직임을 보아서 길흉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천문가였으니, 장맹(張孟 한(漢) 때의 천문가)ㆍ유계재(庾季才 수(隋) 때의 천문가) 등이 이에 속하는 바요,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서 일월과 성신을 살펴서 칠정(七政)을 다스림은 역상가였으니, 낙하굉(洛下閎 한(漢) 때의 태사)ㆍ장평자(張平子 동한 때의 역상가) 등이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도 천문가 20여 명과 역법가(曆法家) 10여 명을 둘로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의 벗도 자못 기하학(幾何學)에 관심을 갖고서 그 전도(躔度)의 느리고 빠름을 알고자 했으나 이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송 경공(宋景公)의 세 마디 말에 형혹성(熒惑星)이 물러가고, 처사(處士)가 임금의 몸에 발을 올리자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범하였다는 이야기는 사학가들이 부회한 것이라 하였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옛날의 혼의(渾儀)에 정통한 자로서는 낙하굉과 장평자 이외에도 채백개(蔡伯喈 동한 때의 채옹(蔡邕), 백개는 자)와 오(吳)의 왕번(王蕃)이 있었고, 유요(劉曜 전조(前趙)의 임금)의 광초(光初) 연간의 공정(孔定)과 위(魏)의 태사령 조숭(晁崇) 등은 모두 선기옥형의 옛 법을 얻었으며, 송의 원우 연간에, 소자용(蘇子容)이 종백(宗伯)이 되어서 옛 의기(儀器)를 참고하여 수년 만에 이룩하였더니, 서양 학술이 중국에 들어오자 저 의기는 모두 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학술이 천루하여 가소로울 뿐이었고, 저 이른바 야소(耶蘇)는 마치 중국 말에 현인을 군자(君子)라 함과 번속(番俗)에 승려를 나마(喇嘛)라 함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야소는 온 마음껏 하느님을 공경하되 온 팔방에 교리를 세웠으나, 나이 서른에 극형을 입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애모하여 야소회(耶蘇會)를 설립하고는 그의 신(神)을 높여서 천주(天主)라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교에 들어간 자는 반드시 눈물지며 슬퍼하여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천주는 어릴 때부터 네 가지의 신서(信誓)를 세웠으니, 첫째로는 색념(色念)을 끊을 것, 둘째로는 벼슬 생각을 버릴 것, 셋째로는 팔방을 다니며 선교하되 다시 고국으로 돌아옴을 원하지 말 것, 넷째로는 헛 이름을 연모하지 말 것 등이었고, 그는 비록 부처를 배격했으나 다만 윤회(輪回)의 설을 독신하였다고 합니다. 명(明)의 만력 연간에 서양 사람 사방제(沙方濟 미상)라는 이가 월동(粤東)에 이르러서 죽었고, 그 뒤를 이어서 이마두(利瑪竇) 등 모든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교리는 일을 밝힘으로써 종지를 삼고, 몸 닦기로써 요체(要諦)를 삼고, 충효와 자애로써 공부를 삼으며, 천선(遷善)과 개과(改過)로써 입문(入門)을 삼고, 생사와 같은 큰 일에 대해서 예비하여 걱정이 없게 함을 극치로 삼는답니다. 그리하여 서방의 모든 나라들이 이 교를 신봉한 지 벌써 천여 년이 되매, 나라가 아주 편안해졌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허탄한 편이어서 중국 사람들은 믿는 이가 없답니다.”
한다. 나는,
“만력 9년(1581년)에 이마두가 중국에 들어와 수도에 머물러 산 지 29년이나 되었는데, 그는 이르기를, 한 애제(漢哀帝) 원수(元壽) 2년(기원전 1년)에 야소가 대진국(大秦國 로마 제국(帝國))에서 나서 서해 밖을 다니면서 교를 선전했다 하였으나, 한의 원수로부터 명의 만력까지 이르기에는 1천 5백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야소’라는 두 글자마저 중국 서적에 나타나지를 않았으니 이는 아마 야소가 저 절량(絶洋)의 밖에 났으므로 중국 선비들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는지 또는 비록 들어서 안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가 이단(異端)이므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진국의 또 한 가지의 이름은 불림(拂菻)이라고도 하고, 그의 이른바 구라파는 곧 서양의 총칭이 아닌가 합니다. 홍무(洪武) 4년(1272년)에, 날고륜(捏古倫 미상)이 대진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서 고 황제(高皇帝)를 뵈었으나, 야소교(耶蘇敎)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일까. 대진국에는 애초에 이른바 야소교란 것이 없었던 것을 이마두가 비로소 천신(天神)에게 의탁하여 중국 사람들을 의혹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는 어째서 윤회(輪回)의 설을 독신하여 천당과 지옥의 설로써 불씨를 비방하며 공격하되 마치 원수나 다름 없었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 내시니 / 天生烝民
사물 있으면 법칙 있네 / 有物有則
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불씨의 학문은 형기(形器)로써 환망(幻妄)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모든 백성에게 사물과 법칙이 없음이었고, 또 야소교는 이(理)로써 기(氣)라 하였는데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모든 일은 / 上天之載
소리 냄새 다 없고녀 / 無聲無臭
라고 하였는데, 이제 야소교에서는 안배(安排)와 포치(布置)로써 소리와 냄새라 하였으니, 이 두 가지의 교에서 어떤 것이 낫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야 서학(西學)이 어찌 불씨를 헐뜯을 수 있으리까. 불씨는 참 고묘(高妙)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그에는 수많은 비유의 말이 많아서 아무런 귀숙(歸宿)시킬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 보았자 결국은 한 개의 환(幻) 자만 남음이 결점이었으나, 저 야소교는 애당초 정확치도 않게 불씨의 조박만을 얻어 가지고는 중국에 들어오자 곧 중국의 서적을 배워서 비로소 중국 사람들이 불씨의 배격함을 알고서, 곧 중국을 본받아 불씨를 같이 배격하되 중국 서적 중에서 상제(上帝)니 주재(主宰)니 하는 말들을 따서 우리 유학에 아부하였을 뿐이었으나, 그 본령인즉 애초부터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만큼 이는 벌써 우리 유학에서의 제이의(第二義)에 떨어진 것이었으나 그도 역시 ‘이(理)’에 대해서 아무런 본 바가 없음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가 ‘기(氣)’를 이기지 못한 지도 오랜지라, 요(堯) 때의 장마와 탕(湯) 때의 가뭄도 역시 기수(氣數)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합니다. 나의 친구 개휴연 선생(介休然先生)도 자못 기수에 대한 이론을 믿어서 일찍이 이르기를, 기수와 ‘이’는 본래 한 속으로서 기수가 이렇게 되면 ‘이’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개(介)의 호는 희암(希菴)이요, 자는 태초(太初)이며, 또 자를 북궁(北宮)ㆍ옹백(翁伯)이라고도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천리와 인사를 겸통하여 《옹백담수(翁伯談藪)》 1백 권과 《북리제해(北里齊諧)》 1백 권과 《양각원(羊角源)》 50권을 지었는데, 올해 그의 나이는 60여 세나 되었으나 오히려 저서를 중지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양각원에는 더욱이 천근(天根)과 월굴(月窟)의 이치에 깊었다 하였은즉, 지전설(地轉說)도 혹시 그 속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해설(解說) 중에 솔개가 하늘을 날 때에 발을 움켜쥐고 뒤로 뻗었으며, 물고기가 물에 뛰놀 때에는 부레를 믿고서 버티는 것과 같이 만물이 모두 땅에다가 중심(重心)을 붙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땅의 중심이란 마치 우박이 제 몸을 스스로 싼 것과 같고, 그 움직이지 않는 곳이 마치 수레바퀴에 굴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모두 그의 오묘한 이론들이었습니다. 제자 일찍이 나이 어릴 때에 세심히 읽지 못하고는 다만 그 대략의 제목들만을 엿봤을 뿐이었더니, 이제 와서는 벌써 그 대지(大旨)까지도 잊어 버렸습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개희암 선생을 오늘 당장이라도 만나 뵙고 싶은데 다행히 선생의 소개를 얻었으면 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개는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애초에 촉인(蜀人)으로서 지금은 역주(易州) 이가장(李家庄)에서 차[茶]를 팔아서 생애를 삼는답니다. 그곳은 북경으로부터 2백여 리인데, 저 역시 서로 만난 지 벌써 7년이 넘었습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희암 선생의 용모는 어떻게 생겼는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눈이 깊숙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분으로 각로(閣老) 조공(兆公) 이름은 혜(惠)이다. 이 그의 경학과 행검을 조정에 추천하여 특히 강서교수(江西敎授)를 주었으나, 그는 병들었다 핑계 대고 응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일찍이 수염이 아름다웠던 것을 별안간 깎아 버려서 이것으로써 조(兆)가 자기를 그릇되어 추천한 것을 밝혔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칠품(七品)의 모자와 복장이 주어졌으며,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장차 그의 모든 저서를 추천하려 하매, 그는 흔연히 허락하였으나, 하룻밤 집에 불이 나서 글이 모두 타 버렸으므로 마침내 주달되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선생의 가슴속에 얹힌 체증을 이제는 토해 냄직도 하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저는 애초부터 그런 증세가 없더니 늙은 뱃가죽의 간사로움이 많아서, 삶아 먹은 고기가 살아서 양양히 갔다 한들 무엇이 군자에게 손실이 되겠습니까.”
하고는,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혹정은 또,
“태초(太初)의 저서는 실로 일찍이 불사른 것이 아니요, 그 벗 동정(董程)과 동계(董稽)에게 숨겨 두었던 만큼 반드시 뒷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선생은 외국 사람이시므로 나는 흉금을 터놓고 한 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다. 나는,
“그럼, 개선생의 저서 중에는 기휘할 것이 많단 말씀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아무런 기휘될 건 없답니다.”
한다. 나는,
“그럼, 무슨 까닭으로 숨겼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해마다 금서(禁書)는 모두 삼백여 종이나 되는데 그들은 대체로 군(君)ㆍ공(公 삼공(三空) 별의 이름이다)ㆍ고(顧)ㆍ주(廚)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한다. 나는,
“금서가 어째서 이다지 많단 말입니까. 그들은 모두 최호(崔浩)의 《사기》를 비방한 것과 같은 책들이란 말씀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는 모두 뒤틀어진 선비들의 구부러진 글들이었습니다.”
하기에, 내가 금서의 제목들을 물었더니, 혹정은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의 호)ㆍ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의 호)ㆍ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의 호) 등의 문집(文集) 수십 종을 써서 보이고는 곧 찢어 버린다. 나는 또,
“저 영락 때에 천하의 군서(群書)를 수집하여 영락대전(永樂大全 명(明) 성조(成祖) 때 엮은 유서(類書)) 등을 만들되, 당시의 선비들로 하여금 머리가 희도록 붓을 쉴 사이 없게 했다더니, 지금 《도서집성(圖書集成)》 등의 편찬도 역시 그런 뜻인지요.”
했더니, 혹정은 곧 재빨리 붓으로 이 말을 지워 버리며,
“본조(本朝)의 문치 숭상은 백왕(百王)들 중에서 탁월합니다. 그러니까 사고(四庫 사고전서(四庫全書))에 편입되지 않은 글이야말로 아무런 쓸 곳이 없겠습지요.”
한다. 나는 또,
“앞서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조송(趙宋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국명(國名))을 낮추어 보셨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는 왕통이 서지 않았습니다. 송 태조는 아무런 갸륵한 공업도 없이 우연히 나라를 얻었으므로, 당시로 본다면 판에 박아 놓은 천자에 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경륜은 고성묘(顧成廟)에 있을 뿐이었고, 태종(太宗)은 가정에 있어서도 배심한 사람을 면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한다. 내가,
“촛불 그림자 사건이 만일에 참말이라면 어찌 태종이 배심한 것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혹정은,
“그야말로 천고에 억울한 일입니다. 그때에 태조의 병은 벌써 위급하여 아침저녁 시간을 다툴 지경이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다지 괴로운 일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행위를 보아서는 그러한 비방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려. 이 이야기는 애당초 호일계(胡一桂 원(元)의 학자)와 진경(陳經)의 사사(私史)에서 나와서 이도(李燾 송(宋)의 학자)의 장편(長編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약칭)에 비로소 기록되었는데, 이는 실로 오중(吳中)의 중 문형(文瑩 송(宋)의 중)이 지은 《상산야록(湘山野錄)》에서 계시해 준 것으로, 저 한 개의 중이 어디에서 이런 비밀을 알아내었겠습니까. 대체로 그의 글이 전연 의도적이지 않았음은 아니었으나 그 글 중의 ‘멀리서 촛불 그림자가 붉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면서 큰 소리로 잘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라는 여남은 글자가 천고의 의문의 실마리를 열었으나, 촛불이란 원래 컴컴한 밤에만 쓰이는 물건이요, 촛불 그림자라는 것은 희미한 것이며, 붉게 흔들린다는 것은 촛불 빛이 껌벅거린다는 것이요, 큰 소리라는 것은 화평하지 못한 소리요, 잘하라는 말은 그 뜻이 똑똑치 못한 말입니다. 또 멀리서 본다든가 멀리서 듣는다는 말은 이 또한 분명스럽지 못한 까닭에 참으로 천고의 의문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으니, 뒤틀린 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대부들은 태종에 대해서, 첫째로 해를 넘기지 못한 채 개원(改元)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고, 둘째로 형수를 핍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고, 또 형수가 죽었는데 복을 입지 않은 것을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셋째로 정미(廷美)와 덕소(德沼)가 죽은 것을 옳지 못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으니 천하 인심을 어떻게 눌러 나갈 것입니까. 6국(國)의 선비들은 노여움이 진(秦)에게 쌓이자 진이 6국보다 먼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불위(呂不韋 진(秦)의 정승)의 사건을 교묘히 만들어서 한갓 기화(奇貨)로 삼았거늘, 하물며 진 시황(秦始皇)이 서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묻어 죽인 데 대해서야 그 욕설이 어떠했겠습니까. 한(漢)의 책사(策士)가 무엇보다도 먼저 진을 욕하려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문(奇文)이 만들어진 것이니, 촛불 그림자 사건만 해도 역시 이와 같은 의도일 것입니다. 송 인종(仁宗)의 영특한 기운은 한 문제(漢文帝)와 비슷하나 학식은 위였고, 송 신종(神宗)은 정치를 하려는 의욕은 한 무제(漢武帝)보다 앞서나 재주와 책략이 미치지 못했으며, 건염(建炎 남송(南宋) 고종의 연호) 이후로는 족히 이야기할 거리도 없습니다. 그 중에도 제일 통탄할 일은 원수를 잊고 이를 어버이로 인정했으니, 이미 천륜이 아닌데 어찌 조카라고 부를 것입니까. 힘이 모자라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복(僕)이나 신하로 자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는지 모르겠지마는, 조카나 손자라고 일컬은 것이야 이 위에 더 큰 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시의 사대부들은 속국 신하 노릇 한 치욕만 면하기 위해서, 신하란 명목을 조카로 바꾸어 마침내는 그 임금으로 하여금 인륜을 무시하는 경지에 빠지게 했으니, 그 인륜을 무시하고 강상에 어긋나게 한 것이 석진(石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의 귀함만 소중히 여겨 난데없는 애비를 맞이하면서도 임안(臨安 남송의 수도)의 군신들은 바야흐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축하했으니 무식하기가 심한 것입니다. 눈앞의 급한 일에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연히 헛일을 이야기하기만을 일삼았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송 이종(理宗)은 40년 동안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공부한 보람으로 죽은 뒤에 ‘이종(理宗)’이라는 ‘리(理)’ 자를 얻은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모를 일입니다. 이종이 평생에 연구한 이치란 과연 어떠한 물건이었는지요. 옛날로부터 남의 신하가 누구나 자기 임금의 학문을 위하여 애쓰지 않는 이가 없지만 천 년 동안 적막하다가 겨우 이종 한 사람을 얻었습니다그려. 그러나 그의 학문도 나라의 존망ㆍ승패에는 이로운 일이 없으니, 그를 만일 귀산(龜山 양시(楊時)의 호)의 문하(門下)에다가 둔다면 높은 제자가 무난히 되겠지마는, 그 학문은 또한 눈으로 한 글자도 보지 못하는 석세룡(石世龍 후조(後趙)의 고조(高祖))ㆍ막길렬(邈佶烈)을 따르지 못할 것이니, 천하 일을 보리 떠내려가는 줄 모르는 것과 같이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구사량(仇士良 당(唐)의 포악한 관리)은 벼슬을 내놓으면서 그 무리들에게 훈계하여 글을 읽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보경(寶慶 송(宋)의 연호)ㆍ경정(景定 송(宋)의 연호) 사이에 40년 동안이나 어두운 안개가 사방 천지를 막은 속에서 고금의 이치를 연구하느라고 서당(書堂) 문을 닫고 앉아 이로써 두 이랑 무논마저 반 넘게 묵혔다 하니 이것이 바로 그 시절 일인가 봅니다. 도군 황제(道君皇帝 송(宋) 휘종의 별칭)는 참으로 명사(名士)라 할 수 있어 비록 동파 선생(東坡先生)처럼 송균(松筠 송죽(松竹)과 같다) 같은 기절은 적다 하더라도 그의 풍류와 감상하는 안목은 반드시 진(陳 송(宋)의 진사도(陳師道))ㆍ황(黃 송(宋)의 황정견(黃庭堅)) 두 분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산은 뒤따라 필담 초기를 열람하고는 웃으면서 못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낫다고 하였다.
한다. 형산은,
“그러나 한 성제(漢成帝)에게 비한다면 더욱 방탕한 셈입니다. 초여름에 황제가 강관(講官)에게 칙유(勅諭)하되, ‘내가 매양 옛날 역사를 보니 신하는 아첨하고 임금은 교만하였는데 …… ,’ 하였는데 대성문(大成門) 오른편 담벽에 붙인 방(榜)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하고는 껄껄댄다. 나는,
“이야말로 위(衛)의 무공(武公)의 억계(抑戒 무공이 스스로 경계하기 위하여 시를 지었다)라도 더할 수는 없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참 그렇구 말구요.” 어제 내가 세 사신을 따라서 공자묘를 가 뵈올 때 왕혹정과 추거인 사시(舍是)가 주인이 되어 길을 인도했다. 대성문 앞에 오석(烏石)을 첩첩이 놓고, 벽에 강희(康熙)ㆍ옹정(雍正)과 또 지금 황제의 훈유(訓諭)한 글들을 새겨 두었다. 그 오른편 담벽에는 새로 방(榜)을 붙였는데, 곧 황제가 강신(講臣)에게 내린 칙유로서 그 내용을 보니 모두 자가(自家)의 학문과 문장을 굉장히 자랑하고, 옛날에 학문에 힘쓰던 임금들은 모조리 비방하되, 실속 없이 허식만 일삼아서, 전각 위에서는 만세를 부르느니 조정에서는 감탄을 낸다느니 하는 것이 모두 그 조칙 중의 말들이다. 대체로 여러 신하들이 글 뜻을 꾸며 윗사람에게 아첨함을 경계하면서도, 윗사람은 함부로 자기 잘난 것만 믿고 아랫사람들을 멸시한다 하였다. 내가 혹정과 함께 누누(累累) 천여 언(千餘言)을 읽어 보니 모두가 자기들의 자랑뿐이다. 내가 전각 위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물으니 혹정은, ‘경연(經延)에서 강의나 토론을 할 때 임금이 글 뜻을 알아맞힐 때에는 좌우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부르며, 또 강의하는 자가 알아맞혀서, 임금이 좋아할 때에도 좌우가 역시 만세를 불러서 좋은 것은 모두 임금에게 돌려보내는 법이니, 이는 소위 임금의 옳은 견해에 따른다는 것이요, 또 신하의 좋은 말을 발견했다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한의 육가(陸賈)가 임금 앞에 나아가 글 한 편씩 아뢸 적마다 임금은 칭선(稱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좌우는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였다.
한다. 나는 또,
“이종(理宗)은 송이 망할 무렵 맨 끝의 임금으로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족히 의논할 바가 못되지만 어떤 임금이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서 그가 곧 총명한 자질(資質)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문제ㆍ송 인종의 아름다운 자질과 한 무제, 당 태종의 영특한 성품에다가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학문을 겸하고 보면 이야말로 요(堯)ㆍ순(舜)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글짓는 말예(末藝)와 기송(記誦)하는 폐단만을 가지고 경솔히 남의 임금된 자를 무식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고개를 흔들면서,
“그렇지 않지요. 내 본래 송 이종을 말한 것이 아니지요. 《송사(宋史)》 형법지(刑法志)를 보면 이상하게도 사람의 심사가 번민해집니다. 내가 말한 것은 학문의 폐단인데, 대체로 옛날에 총명하고 영특한 임금이란 바로 한 무제나 당 태종을 두고 말한 것뿐이요, 선생이 말씀한 정자나 주자의 학문을 겸했다고 운운한 것은 가설(假說)입니다. 이러한 가설이 곧 천고의 뜻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소의 한스러움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다소의 한스러움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옛 시에,
군사 내어 이기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죽으니 / 出師未捷身先死
뒷 세상 영웅들이 길이길이 눈물 짓누나 / 長使英雄淚滿襟
라고 한 것이 바로 한스러움을 품었다는 말입니다.”
한다. 나는 또,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만일 조맹덕(曺孟德 조조(曺操). 맹덕은 자)이 두통을 앓다가 죽었더라면, 어찌 그가 한(漢)의 제 환공(齊桓公)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다시,
“그 말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웃으면서,
“선생이 말씀하신 만약에라든가 설사라든가 하는 것은 가설과 비유해서 하는 말이요, 결코 이것이 참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사 제갈량(諸葛亮)이 사마중달(司馬仲達 사마의(司馬懿). 중달은 자)을 죽이고 군사를 몰아 중원 땅으로 들어갔던들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가령 당(唐) 명황(明皇)이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러서 양귀비(楊貴妃)를 만나 빙그레 웃으면서 눈을 굴리게 되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통쾌했을 것이며, 또 만약에 송 고종(宋高宗)이 진회(秦檜)의 머리를 베었던들 얼마나 통쾌했을 것이며, 만약에 정자ㆍ주자 두 선생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고 만기를 총람하는 정치를 할 때 다시 정자ㆍ주자 같은 이가 옆에 있어서 요ㆍ순의 도로써 충고해 준다면 후세에 무슨 한스러움이 있겠습니까. 또 이 부인(李夫人)의 혼령(魂靈)이라도 한 번 보였던들 무슨 한스러움이 남았겠습니까. 대체로 한때의 임금된 자로서 지극히 어둡고 못난 자를 제외하고는 보통 볼 수 있는 임금일지라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당시 명석(名碩)들로 하여금 자리를 한 번 바꾸어 본다면 도리어 그들만큼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그 신하들에게 자기가 가르치기만 좋아하였으나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영화를 탐내고 녹봉에만 눈이 어두워 그 임금에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면 반드시 이렇지도 않을 것이니, 밝은 이를 내세우고 미천한 이를 뽑아내어 어진 사람 쓰는데 그 지위를 가리지 않고 보면 꿈속에 담 쌓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점을 쳐서 낚시꾼도 만날 수 있어서 함께 사업을 하는 데도 마음이 서로들 맞았기 때문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만약 저들이 구하지 않았다면 어찌 하늘이 내려 주는 인재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란 당했을 때와 말할 때가 서로 같지 않은 법이요, 바둑이란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직접 두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맹공작(孟公綽 점잖기로 유명했다)이 조(趙)ㆍ위(魏)의 장로(長老)로서는 넉넉하다 할 수 있으나, 등(藤)ㆍ설(薛)의 대부 노릇은 못한다.’(《맹자(孟子)》에서 나온 구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역사를 읽으면서 평심(平心)하고 연구한 대목입니다. 만일 송 인종이 염계(濂溪 송(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출생지)나 낙양(洛陽 송(宋) 유학자 정이(程頤)ㆍ정호(程顥)의 출생지)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도학의 아름다움이 어느 현자(賢者)에게도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양(紫陽)은 평생 정력을 사서(四書)에 더욱 기울였으나, 그 실상인즉 인종이 먼저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왕요신(王堯臣 송(宋) 유학자)이 과거에 급제하매, 대기(戴記 소대기(小戴記) 즉 예기(禮記)) 중에서 〈중용(中庸 이때에는 중용이 예기 중의 한 편이었다)〉 한 편을 하사(下賜)하였고, 여진(呂瑧 송(宋)의 유학자)이 과거에 오르자 다시 〈대학(大學 대학도 예기 중의 한 편이었다)〉 한 편을 뽑아서 하사했습니다. 그 학식의 고명한 품은 당세 선비들 중에 뛰어났고, 〈중용〉과 〈대학〉 두 편을 따로 뽑아 낸 공로는 범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 문정은 시호)보다도 앞섰다고 하겠습니다. 후세 선비들은, 한 문제가 가의(賈誼)를 재상으로 등용하지 않은 까닭에 한(漢)의 업적에 많은 손실이 있었다고 책망하고, 또 장석지(張釋之 한(漢)의 법관)의 고론을 배척했다 해서 문제를 얕잡아 판단했지만, 그 실상인즉 문제가 가의보다는 훨씬 어질었던 것입니다. 가생(賈生 젊은 가의를 가리킨다)을 보지 않았을 때는 자신이 가생보다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가생을 따를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제가 자기 중심에서 우러나 한 말이지, 문제가 자기 스스로 가생과 현부(賢否)를 비교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역량을 헤아리고 남도 잘 짐작해야 하는 것이니, 선제(先帝) 때부터 있던 장상과 대신들은 어찌하고, 일조에 아무런 경험도 없는 서생으로 하여금 그들을 탄압하게 한단 말입니까. 선실(宣室)에서 앞자리에 가까이 앉게 했을 때에 가생이 지닌 포부는 이미 다 들었던 것이니, 요컨대 문제는 그의 재주를 길러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가생의 아량은 이업후(李鄴侯 당(唐)의 이필(李泌). 업후는 봉호)에게 따를 수 없었으니, 이업후는 백의(白衣)로 재상이 되었다가 강서 판관(江西判官)으로 좌천된 일이 있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이를 한스럽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생은 언제나 가슴속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수없이 드러내려고 애썼으나, 문제는 이것을 잘 간직하고 이용하는 수단이 능란하여 아무런 객기(客氣)도 부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제의 장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세 명의 서자(庶子)에게 천하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고, 당시의 부귀를 누리던 대신들은 모두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전쟁을 치른 인물들로서, 이제는 편안히 앉아 종정(鍾鼎)을 누리고 있는 터에, 누가 즐겨 뛰어나와 사업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문제는 가생보다 앞서 통곡하고 긴 한숨을 지었을 것입니다. 가생은 조급한 것을 참지 못하고 곧 분개하여, 어느 한 사건을 뼈아프게 지적하여 통곡하고 한숨 쉰 것이니, 이야말로 거리에 서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통곡하는 격이니 그렇게 하고서 과연 얼마나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 또 의혹시켰겠습니까. 양(梁)ㆍ초(楚)의 검객(劍客)들은 먼저 원앙(袁盎 한(漢)의 명신)의 배를 찔렀고, 하(河)ㆍ삭(朔)의 용사(勇士)들은 마땅히 배도(裵度 당(唐)의 명신)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것을 문제는 미리부터 근심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건대 바둑 두는 것과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當局者)요 신하들은 옆에 앉은 구경꾼으로서, 선생의 이른바,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당국자보다 낫다.’라는 말이 곧 이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자가 잘 판단을 못할 때에도 어찌 구경꾼의 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아니올시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면, 언제나 자기 열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고 자랑하는 법이며, 대를 이어서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호화로운 옷을 입고 부녀가 시중드는 것이 본래 있는 것처럼 여김이 통례입니다. 천하 일이 모두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된 지가 이미 오랜 일인바, 이는 또 천고에 바꿀 수 없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짐(朕)이란 한 글자를 지워 버렸을 때는, 자기는 당장에 요ㆍ순 같은 임금 노릇을 할 것같이 될 것이요, 만약 짐이란 글자를 붙여 놓고 보면, 누가 감히 그 앞에 나가 소매 속에 넣은 손이나 꺼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가 소정묘(小正卯 노(魯)의 정치가)를 죽인 것은, 임금까지 떨도록 한 지나친 위엄이라는 비평을 듣게 되었고, 주공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이 모반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도, 그 지위에 따라 이런 비평을 들었던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는 유학(儒學)을 주장하는 대신으로서 왕망(王莽)만한 사람이 없었건만, 그는 처음부터 천하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지나치게 독신하여 평생에 배운 학문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책임을 맡았다고 자처했으니, 어찌 임금의 비위만을 맞추기 일삼았으리요. 다만 그의 품성(稟性)은 초조하고 분주하여, 가만히 앉아서 요ㆍ순의 도를 의논하는 것보다도 몸소 자신이 당대에 시험하고 실천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성인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역적이 되라고 가르쳤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도 역시 웃으면서,
“이는, 신하로서 일을 할 때는 아무래도 일대(一代)의 제왕보다는 못하다는 증거를 말씀한 것입니다. 황(黃)ㆍ노(老)의 학문으로 천하를 다스릴 때는 혹 일시의 효력을 거둔 적도 있었지마는, 경술(經術)로 세상을 다스릴 때는 일찍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생령을 도탄에 빠지도록 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왕개보(王介甫 왕안석. 개보는 자)의 학술에는 범(范 범중엄)ㆍ한(韓 송(宋)의 한기(韓琦))과 같은 이도 따르지 못할 바이지마는, 가의나 왕망ㆍ개보나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 손지는 자) 같은 이들은 한결같이 조급하게 서두르는 축들입니다.”
하였다.
이때 어느 사람 하나가 몸에 망포(蟒袍)를 입고 주렴을 걷어젖히면서 들어와 의자에 앉는데, 보복(補服)도 입지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무어라고 말을 하기에, 나는 못 알아듣겠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은 혹정과 귀엣말로 몇 마디 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나는 그가 누구냐고 물으니, 혹정은 대답하기를,
“그는 본래 제남(濟南) 사람으로, 성은 등(鄧)이요, 이름은 수(洙)인데, 현재 호부 주사(戶部主事)로 있습지요. 그 못생긴 자가 무엇을 보려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는 갔는지 모를 일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그분은 선생의 친지(親知)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그가 등수라는 것만 알았을 뿐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귀국이 우리와 같은 문자(文字)를 쓰고 있는 동방의 한 나라인 줄도 모르지 않아요.”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제남에는 아직도 백설루(白雪樓)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백설루는 원래 우린(于麟 명(明)의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의 누각으로서, 처음에는 한창점(韓倉店)에 있었는데, 그 뒤에 백화주(白花洲) 위에 고쳐 지어 벽하궁(碧霞宮) 서쪽에 있었답니다. 지금은 박돌천(趵突天) 동쪽에 백설루가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옛날 그 집이 아닙니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황(黃)ㆍ노(老)를 귀하게 여기고 경술(經術)을 천하게 여기며 역적에게 관대하여, 성인을 독실(篤實)히 믿는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왕개보를 가리켜 범문정보다도 더 어질다 하니, 억누르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경술이 천하를 파괴하는 도구라 하시니, 이것은 나를 한번 시험해 보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선생이 이처럼 죄주시니, 소자(小子)가 다시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의 의논하시는 바는 모두 고원(高遠)해서, 구구한 선비들의 짧은 소견으로서야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하한(河漢)의 놀라움이 없지 않으니, 선생의 이론을 어찌 감히 처사(處士)들의 잘못된 억설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선생의 저속한 것을 가리시지 않는 아량에 감격합니다. 대개 세상 일이란, 마치 저 사냥하는 데 있어서 정도가 아닌 일로 짐승을 잡아서는 아니됨과 같은 것이요, 또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바로잡는다 해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다면, 모두 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삼척 동자라도 오패(五霸)를 추앙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렇게만 이론을 세운다면, 다시 다른 일이 생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창려는 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고, 그 이론은 불살라 버린다(〈원도(原道)〉에서 나온 말)면, 도리어 세상은 태평해질 것이요, 또 동중서(董仲舒 한(漢) 때의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의리를 바로잡고, 이(利)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한서(漢書)》에서 나온 말)면, 세상 사람은 응당 길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선생의 말씀대로, 삼대 이후로 경술로써 정치를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입니까. 창공(倉公 한(漢) 때의 의원)이, 사람의 병을 고칠 때에는 화제탕(火齊湯 한약)에 대황(大黃 한약) 네 근을 넣어 달이라고 했는데, 그 후 2백 년을 지나 장중경(張仲景 한(漢) 때의 의원 장기(張機). 중경은 자)은 팔미탕(八味湯 한약)에 부자(附子 한약) 닷 냥을 넣으라고 했으니, 얼마 못 되는 동안에 고금이 이같이 달라졌습니다. 백이ㆍ숙제가 말머리에서 말렸을 때에는 그래도 이를 옳다 하여 데리고 간 태공(太公) 망(望)이 있었으니, 세상에 양쪽이 모두 옳고 양쪽이 모두 그르다는 법이 없을 바에는,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마땅히 흑룡강(黑龍江)으로 귀양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저 천하 일이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줄이 끊어지면 짧은 쪽이 먼저 넘어지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처음에 두 편은 힘이 비슷했기 때문에, 역리와 순리만 있고 옳고 그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 분명히 성패가 밝혀진 뒤는 역리라든지 순리란 말도 도리어 등불 뒤에서 하는 귀엣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릇 이치를 말하는 자는 까마귀가 고기를 간직하는 것과 같으니, 까마귀가 고기를 감추어 둘 때는 구름으로 안표(眼標)를 하고 감추어 두는데, 그 구름이 지나가 버리면 감추어 둔 곳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리가 말뚝 박아 놓은 듯한 법은 없으니, 의리란 때를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비들의 처사라는 것은 구름을 바라보는 까마귀 친구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구름은 가 버려도 고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비록 때는 흐르고 일은 지나가 고금이 다를지라도 의리는 제자리에 있겠건만, 사람들이 이것을 찾지 않는 것뿐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본래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가는 자가 임금이 되는 것이지요.”
한다. 나는 또,
“경술(經術)이 국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어찌 그것이 경술의 죄이겠습니까. 저속한 선비들이 경술의 이름만을 도둑질한 까닭이지요.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게 한 것은 경술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만일 올바로 경술을 썼더라면, 세상에 밭이란 밭은 모조리 정전법(井田法)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요, 천하의 제후(諸侯)들은 모두 다섯 가지 등급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혹정은,
“선생은 꼭 내가 대담스럽게 경술을 배척하는 줄만 아십니까. 옛날부터 말이란 것은 반드시 마음에 있어야만 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요, 실천을 하는 자도 반드시 말이 먼저 있으란 법도 없습니다. 일부 세계는 허위 세계이니, 선생의 말씀은 약방문을 믿고 단번에 신선이 되겠다고 날뛰는 친구들의 말투에 지나지 못합니다.”
한다. 나는 이에,
“신선이 되겠다고 날뛰는 자들의 단번 말투란 무엇을 말함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문성장군(文成將軍 한(漢) 이소옹(李少翁)의 봉호)이 말간[馬肝]을 먹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성인도 역시 적은 것을 상대로 일을 착수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것도 고금이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다. 탕은 70리를 나라로 삼았고, 문왕은 백 리를 가지고 일어났는데, 맹자는 걸핏하면 이 은ㆍ주를 인용하여 당시 임금들에게 유세했습니다. 그러나 등 문공(藤文公)은 천하의 어진 임금으로, 그가 임금이 되었을 때 허행(許行 초(楚)의 농학자)과 진상(陳相) 같은 호걸들도 그의 신하가 되어 등(藤)으로 갔던 것입니다. 맹자는 등 문공에게, 국가의 반록(班祿)과 경계(經界)에 대해서는 그 큰 강령을 들어 말했지마는, 한 번도 등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긴 곳을 끊어다가 짧은 것을 보탠다 하더라도 모두 해야 50리밖에 되지 않으니, 대국의 지도자가 될지언정 그의 크나큰 경륜을 베풀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齊)ㆍ위(魏)의 임금들은 지극히 못났건만, 그래도 이들에게 미련을 두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한 것은, 그 토지가 넓고 백성이 많고 군사가 강하며 재물이 풍부했던 까닭입니다. 그 형세로 인해서 성공하기가 쉬웠던 까닭에, 제(齊)로써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손바닥 한 번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고 말했던 것입니다.”(《맹자》에 나오는 말)
하고 말하니, 혹정은,
“공자는 말씀하기를 1년이면 바로잡을 수 있다(《논어》에 나오는 말) 하고, 맹자는 이미 5년이나 7년이라고 (《맹자》에 나오는 말)구별을 하였으니, 이는 정치를 하는 방도에서 제를 높이고 등(藤)을 깎아서 말한 것이 아니라, 고금의 형편이 다르고 대소의 형세가 다른 까닭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결코 요ㆍ순 같은 제왕의 이야기를 먼저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졸음이 오도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다. 나는 또,
“위앙(衛鞅 진의 정치가 상앙(商鞅). 위는 봉호)이 먼저 말한 것은 무슨 제왕이었던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특히 황제(黃帝)와 요ㆍ순의 이름을 빌려서 한만하고 쓸모 없는 이야기를 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싫증이 나게 했으니, 이는 손무자(孫武子 제의 장군 손무. 자는 높이는 말)의 삼사술(三駟術)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혹정이 고금의 인물과 학술ㆍ의리 등 여러 가지를 논변함에 있어서, 억누르고 찬양하며 세로로도 가로로도 멋대로 하니, 대체로 내 속을 떠보려는 뜻이 있어 보였는데, 나는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조심하여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데, 간신히 원칙을 지었더니, 혹정은 붓을 들면 몇 장씩 쓰다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다가 갑자기 얼버무리고 말았다. 나는 늦게야 이것을 깨닫고, 맹자의 내용을 들어 한번 시험해 보았더니, 혹정의 주론(主論)은 역시 순정(醇正)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아래 몇 대목은 잃어버려서 말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혹정이 말하기를,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학문을 신(申 신불해(申不害))ㆍ한(韓 한비(韓非))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원통한 일입니다. 그가 비록 세밀히 글을 읽은 것이 후세의 선비들만은 못했다 하더라도, 《맹자》 한 질에 대해서는 도리어 대의를 뚜렷이 찾아 내어, 분명히 그의 가슴속에는 공(公)이란 글자 한 자를 새겨 두었고, 그의 안중에는 성(成)이나 패(敗)의 두 글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대 이래로 홀로 공명(孔明) 한 사람이 가히 대신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론을 볼 때 다스리는 방법을 말할 적에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한 몸이 된다.’ 하였고, 임금을 권면할 적에는 ‘함부로 자신을 비하시켜서 쓸데없는 말을 끌어 의리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으며, 또 자신이 천하의 중임을 맡은 데 대해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나의 과실을 부지런히 공격하라.’ 하였으니, 이야말로 만세 뒤에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대승상(大丞相)이라 할만합니다.”
한다. 나는,
“그러나 유장(劉璋)의 땅을 빼앗은 것은, 한 자[尺]를 굽혀서 한 길을 바르게 하자는 노릇이 아닐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공명이 반드시 유장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장에게 대하여 그를 성토하는 것은 합당할 터이지만, 당랑(螳螂)이 매미를 잡듯이 한 것은 잘못입니다. 유장은 자기 아버지 언(焉)의 때부터 천부(天府)의 나라 촉(蜀)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으면서, 한 번도 제후(諸侯)들을 도와 나라의 역적(조조(曹操))을 토벌하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표(劉表 한의 종실)는 형주(荊州)의 아홉 고을 땅을 차지하여 학교를 세우고 아악(雅樂)을 만들었으니, 이때가 어느 때인데 이렇게도 옹용(雍容)히 앉아 있었단 말입니까. 만약 한(漢)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자들을 추궁한다면, 의당 같은 성을 가진 유씨(劉氏) 제후의 죄를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공명이 초려(草廬)에 높이 누웠을 때부터 유표ㆍ유언(劉焉)의 무리들에게 분개한 지 오래된 것입니다. 만일 한의 제실(帝室)의 자손으로 신의가 드러난 후손이 있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 봤다면, 손권(孫權)이나 조조보다 먼저 이 자들을 토벌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나 주자(朱子)는 매양 공명의 학문이 순정(純正)하지 못하다 하여, 그가 촉을 빼앗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형주ㆍ익주(益州 유장이 웅거했던 지방) 사이에 걸터앉는다는 것은, 본래 초려에서 생각한 제일의(第一義)로서, 이야말로 국적(國賊)에 대한 공명의 안목이 밝은 것과 또 그의 학술이 정대한 것입니다. 다만 유언에게 대하여는 한의 종실로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죄로 그를 성토할 자료는 된다고 보지만, 유장에게 대해서는 그를 속여 가면서 땅을 빼앗을 것은 못 됩니다. 형주는 지탱할 만한 형세가 되지 못하나, 유종(劉琮)에게 대하여는 습탈(襲奪)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종은 분명히 국토를 역적에게 바쳤으니, 소열(昭烈)이 이를 대의로써 빼앗는데도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잘못이라 했겠습니까. 그러나 소열은 형주에서는 한사코 신의를 지키다가 익주에서는 갑자기 간웅(姦雄)의 버릇을 드러내어, 차려다 줄 때에는 먹지 않다가 빼앗아 갔다는 비평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그야말로 원앙각(鴛鴦脚)으로써 지리소(支離疏)를 차 버렸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선생 역시 관화(官話)도 하실 줄 아십니다그려. 우리나라 속담에, 약한 놈을 업신여겨 무슨 물건을 빼앗는 것을 ‘어린아이 눈물 묻은 떡’이라 하고, 또 ‘난장이 턱 차기’라고도 한다. 내가 오는 길에 통관(通官) 쌍림(雙林)의 무리는 사람이 남과 싸우는 것을 보고 꾸짖을 적에, 원앙각(鴛鴦脚)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난장이 턱 차기’라는 말과 같고 글귀가 묘하기에, 이때에 중국 발음으로 이 말을 써 보았더니, 입이 둔해서 발음이 잘 되지 않아 혹정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이것을 종이에 써서 보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이런 조롱을 한 것이다. 가령 성왕(成王)이 주공을 죽였다면, 소공이 어찌 감히 집에 있으면서 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는 위원리(魏元履 송(宋)의 유학자)에게 글을 보내어 소열에 대해서 논하면서, 유종이 조조를 맞아들이던 날 형주를 쳐서 빼앗지 못하고 자기 근거지를 갖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면서 비로소 도적의 꾀를 취했으니, 이는 정도와 권도를 모두 잃어버린 셈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당시 소열이 비록 형주를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지켜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공(曹公 조조를 높인 말)이 이미 80만 대군으로 지경을 억누르고 있는 판에, 어찌 구구하게 새로 만든 형주를 가지고 그를 막아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청렴하고 사양하는 절조나 굳게 지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의가 놀랍다는 소리나 듣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이래서 유종이 조조를 맞이하던 날 형주를 빼앗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정도와 권도를 다 얻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장은 암약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잘 보살필 줄 몰라, 공명이 초려에서 소열과 처음 만났을 때 벌써 약한 자를 집어삼키고 어두운 자를 쳐부수는 계획에 찬성했던 터이고, 결코 꼭 속여서 취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치당(致堂) 호씨(胡氏 송(宋)의 유학자 호인(胡寅). 치당은 호)는 현덕을 가리켜 노식(盧植 후한 때의 학자)ㆍ진원방(陳元方 후한 때의 학자 진기(陳紀). 원방은 자)ㆍ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 강성은 자) 같은 인물들과 교제했다 하여, 정말 착실히 경술과 학문을 한 선비로 쳤는데, 이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그 당시의 현덕은 구름이 찌는 듯하니, 용(龍)이 틀어올라가는 격으로 사람을 씹어먹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효웅(梟雄)으로서, 일이 없을 때는 시름에 겨워 울기를 잘하고, 큰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서 변고(變故)가 있는가 묻고, 천지 사이에 자기 한 몸이 없어질까 근심하여 급할 때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원숭이 새끼 같은 유장에게야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당시 공명은 결코 유장의 땅을 빼앗으라고 권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후세 선비들이 한갓 지난 일만 가지고 선주(先主)를 탕(湯)이나 무왕(武王)의 위에 치켜세우고 있으니, 이것도 역시 후세 선비들의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탕이나 무왕의 한두 가지 사적에 대하여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입 밖에는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대하여는 으레 그들을 두둔하고 편을 들어서 천고를 통하여 동림당(東林黨)처럼 정의를 굳혀 실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금(伯禽)이 종아리를 맞은 것은 필경 무슨 죄이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아버지는 저더러 잘하라고 하시지만 아버지도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반발을 일으킬까 걱정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의 결과만 가지고 마음가짐을 달리 판단하는 것은, 후세 유학자들의 편파적인 버릇입니다. 공명을 평해서 이윤과 여상에 비하여 형과 아우 같다고 한 것은 옳은 비평입니다. 대개 천고의 군신에 대하여 일정한 단안(斷案)이 있는데, ‘일부(一夫)ㆍ일부(一婦)가 그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그 사람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것과 같이 여긴다.’(《맹자》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만일 임금된 자가 모두 이런 심정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한 명의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한 가지 불의를 행해서 천하를 얻는다 하여도 이를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호도 이런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후세의 임금들에 대한 하나의 정평(定評)일 것입니다. 포악한 임금과 어두운 임금이라도, 오히려 때로는 충성을 받아들이고 옳은 일을 권장하는 일을 행할 때도 있었지마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어진 재상이라도, 자기에 대한 공격을 달게 받고 자기 스스로 언로(言路)를 열어 놓는 자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임금된 사람으로서는 비록 옹치(雝齒) 같은 미운 사람이라도 때로는 마음을 놓고 안심하도록 할 수 있었으나, 신하의 처지에 있어서는 비록 한기(韓琦)ㆍ부필(富弼) 같은 어진 사람으로도 자기의 몸이 죽어 가면서도 자신에 대한 유감을 풀지 못했으니, 이는 천고를 통하여 신하된 자에 대한 단안일 것입니다.”
한다.
내가 혹정과 더불어 닷새를 같이 있었는데, 매양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언제나 탄식하는 소리를 자주 내었다. 그 소리는 한숨 쉬는 것으로, 옛날부터 이르던 위연태식(喟然太息)이란 말이 곧 이것이다. 나는,
“선생은 평소에 어째서 자주 탄식을 하십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나의 한 가지 병으로서, ‘휴우’ 하고 기운을 내뿜는 버릇이 드디어 탄식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평생에 글을 읽어도 세상에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십중팔구이니, 어찌 이 병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글을 읽을 때마다 세 번씩 탄식을 지으신다면, 선생의 탄식은 가 태부(賈太傅)의 여섯 번 지은 탄식보다도 6만 번이나 많을 것 같군요.”
하자, 혹정은 웃으면서,
“천하 일이란, 매양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는 싸움이라 할 수 있어, 제가 글을 읽다가도, 공자가 하수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은 명(命)이야.’ 한 구절에 이르러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항우(項羽)가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았다는 대문에 이르러 또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종 유수(宗留守)가 세 번 외쳐 ‘하수를 건너라.’ 하는 데 이르러서 또 세 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만해도 아홉 번이나 탄식을 한 것으로, 가 태부의 여섯 번 탄식보다 많지 않습니까.”
하고는, 둘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또,
“머리 깎는 봉변을 당했으니, 지사(志士)로서 이미 만 번은 탄식을 하였겠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얼굴빛을 변했다가 얼마 뒤에 낯빛을 바루고는, 머리 깎은 봉변이라고 쓴 종이를 찢어서 화로에 던지면서,
“노(魯)의 사람들이 사냥하기 경쟁을 하였는데, ‘나도 사냥 경쟁을 하겠다.’ 했으니, 어찌 시중(時中)의 성인이 아니겠습니까.(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뜻) 이탁오(李卓吾)는 자진하여 갑자기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흉성(凶性)이더군요.”
한다. 나는 또,
“듣건대 절강(浙江) 지방에서는, 머리 깎는 전방에다가 성세낙사(盛世樂事)라는 편액을 써 붙였다는데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들은 일이 없는데요. 이것은 석성금(石成金 청(淸)의 학자)의 쾌설(快說)과 같은 뜻이지요.”
한다. 전일 혹정과 이야기할 때에, 머리와 입과 발에 세 가지의 대액(大厄)이 있다는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나는 또 묻기를,
“명(明)의 국가 창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니, 혹정은,
“《주례(周禮)》에 이른바 승국(勝國)이라 한 것이 이것이지요. 공자가, ‘은(殷)에는 어진 임금이 6ㆍ7명이나 있다.’(《맹자》에 나오는 말)고 칭찬한 것처럼, 이것으로써 더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송(宋)의 시대란 볼 만한 것이 없었으니, 무력이 강하지 못한 것은 범중엄ㆍ한기 두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원칙은, 흡사 누대 선비의 집에서 그 자제들이 옹용(雍容)히 제사를 모시고, 빨리 말하거나 갑자기 얼굴빛을 고치거나 하는 법이 없고, 하인들은 조심스러이 발을 디디고, 뜰에서 빠른 걸음이나 큰 기침을 들을 수 없이, 이야말로 절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은 썩고, 사당이 타 버린 뒤에 축관(祝官)을 부르는 격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또,
“특별한 예악(禮樂)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실은 여러 방면으로 한(漢)의 제도를 본뜬 것이 적지 않지마는, 그때는 섬라(暹羅) 소주를 마셔서 술이 크게 취하면 노래하는 놈, 우는 놈, 춤추는 놈, 욕설하는 놈들 모두가 천진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송조(宋朝)에 와서는 한의 찌꺼기 술을 물려 먹으면서도 서로 쳐다보고 술맛이 좋다고 하면서 몸을 똑바로 가지고 종일토록 마셔도, 질서가 어지럽지 않았으나 정말 진의(眞意)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실(宗室)의 대신 중에는 한 사람의 하간헌왕(河間獻王)도 볼 수 없으니, 정(鄭)의 재육(裁堉) 같은 인물이 있을 수가 있나요.”
하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정(鄭)은 어느 때 사람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명(明)의 종실 정왕(鄭王)의 세자(世子)이지요. 이름은 재육인데, 《율려정의(律呂精義)》를 지었습니다. 이 명(明)이야말로, 참으로 종소리로 시작하여 편경 소리로 끝냈던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시 광명(光明)하여, 하나도 구차한 데가 없었지요.”
한다. 나는 다시,
“과연 그러했을까요.”
하고 묻자, 혹정은,
“태조(太祖) 운운 …… . 그는 붓으로 점만 툭툭 치면서 나를 향하여 무어라 무어라 하면서도 즐겨 쓰지 않는다. 이는 아마 명이 원(元)의 오랑캐를 몰아낸 것이 가장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하는 듯싶었다. 건문(建文 명(明)의 연호)이 대궐 안에서 편안히 살다가 죽었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지만, 당(唐) 원종(元宗)은 필경 머리에 구리철사로 테를 매게 되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무슨 말씀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보국(李輔國 당(唐)의 정치가)은 방망이로 장양제(張良娣)를 때려죽였고, 오래 취하는 치뇌주(鴟腦酒)를 바쳐 숙종(肅宗)을 벙어리로 만들었지요. 천순(天順 명(明)의 연호)의 복위(復位)는 기적이어서, 천고에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천자가 잡히고 보면, 누가 능히 술잔을 올리고 일산을 받드는 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숭정(崇幀)으로 말하면 17년 동안 50명의 재상을 갈아 썼는데, 사람 쓰는 법이 이토록 어지러웠으니 일 처리도 엉망진창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마는, 군자는 차라리 부서질지언정 옥을 택하지 온전하다고 하여 기왓장을 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야말로 숭정의 공명정대한 처사로서, 명(明)의 흥하고 망한 역사는 천고에 둘도 없는 모범이었습니다.”
한다. 내가 이때,
“사해(四海)의 남은 백성들.”
이라고 가는 글씨로 썼더니, 혹정은 얼핏 말하기를,
“청조(淸朝)가 나라를 얻을 때 공명정대했다는 것은, 천지에 대하여 유감이 없습니다. 대체로 국가를 창건한 자가 정권을 잡을 때는 전조(前朝)에 대하여 원수와 같이 대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입국 당초에 큰 은혜를 베풀어 명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은 우리 청조밖에 없습니다. 여덟 살 난 어린아이로서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다는 것은, 생민(生民)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 세조장 황제(世祖章皇帝)는 처음에는 천하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다만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며, 명(明)의 원수를 갚고 천하 백성을 혈해(血海)와 골산(骨山) 속에서 구해 내려 하였으나,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이 한결같이 귀순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 숭정을 따라 죽은 대신 범경문(范景文 명(明)의 명신) 등 20명을 표창했고, 지난해에도 황제는 숭정의 죽음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 1천 6백여 명에게 충민(忠愍)ㆍ민절(愍節) 등의 시호를 주었습니다. 공명정대하고 강상(綱常)을 올바로 붙들어 잡은 일은, 삼황(三皇)ㆍ오제(五帝) 이래로 이러한 일을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천하를 차지하는 자는, 자기 집안에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만 능히 그 나라를 오래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을미년(1775년) 11월에 내각(內閣)에 내린, 숭정의 죽은 일에 대한 조서(詔書)를 좀 보자고 했더니, 혹정은 밤에 보여 주겠다고 허락하였다. 나는 다시 묻기를,
“앞서 선생이 백이ㆍ숙제 이전에는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있었고, 백이ㆍ숙제 뒤에는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였더니, 혹정이 미소를 띠면서 대답하지 않기에, 내가 다시 졸랐더니 혹정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의리라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쇠를 녹여서 모형(模型)에 붓는 것과 같아서, 쇠 스스로가 무슨 물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형에 따라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또 조개껍질을 보는 것과 같으니, 조개껍질은 일정한 빛이 있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이 바로 보고 옆으로 보는 데 따라 그 빛도 각각 다른 것입니다.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터지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터지는 것은, 다만 물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묻기를,
“물을 격동시켜서 올리면 산 위에까지 올릴 수 있으나,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세상일이란 거꾸로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요.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태백은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다.’(《논어》에 나오는 말)고 칭찬했지만, 은(殷)의 주왕(紂王)으로 말한다면 그때 아직 뱃속에도 들지 않았을 적이요, 당시 고공(古公)의 일을 여러 제후(諸侯)들의 나라에 비교해 본다면 한 변방의 부용(附庸 위성국(衛星國))된 나라에 지나지 못하니, 당시의 천하는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할 일이요, 태백이 과연 누구에게 천하를 세 번씩이나 양보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주자(朱子)는, 계력(季歷)이 아들 창(昌 주 문왕의 이름)을 낳으며 거룩한 덕이 있어, 태왕(太王 고공의 묘호)이 이 때문에 은(殷)을 멸망시킬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지마는,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는 너무 일찍 서둔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기 집안이 창성하는 것을 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망령되이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랄 것입니까. 주자는 또 말하기를, ‘이 같은 뜻은 지극히 공변된 마음에서 나왔다.’고 했으나, 이 역시 잘못된 말이니, 모르기는 하지마는 지극히 공변된 마음이란 과연 어떠한 마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렇고 보면, 주(周)가 국가를 창건한 사적에는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겠지마는, 다만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공자가 홀연히 태백의 신상(身上)에 대하여 탄복한 것을 본다면, 주가 국가를 창건할 시초에는 은연히 무슨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뇌공(雷公 뇌신(雷神))이 이에 대하여 주자를 공박한 이론은, 마치 조민(刁民 교활한 백성)들이 소장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한다. 내가,
“뇌공이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모기령(毛奇齡)입니다. 국초의 대가(大家)라 합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털보 뇌공 말입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또 위공(蝟公 고슴도치)이라고도 부릅니다. 전신이 모두 가시거든요.”
한다. 나는,
“《서하집(西河集)》을 나도 한 번 얼핏 보았지만, 그가 경전(經典)의 뜻을 고증(攷證)한 데는 혹 그럴싸한 의견이 없지도 않더군요.”
하고 말하자, 혹정은,
“대단히 망령된 사람입니다. 그의 문장도 역시 교활한 백성의 소장과 같은 점이 많습니다. 모기령은 소산(蕭山) 사람이어서, 그 지방은 글하는 아전들이 많아 글장난을 잘하므로, 안목 가진 사람들은 모기령을 지목하여 소산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다. 나는 또,
“문왕은 태왕의 막내아들의 아들인데, 태왕이 본래 어린 손자가 갸륵한 덕(德)이 있음을 보았으니, 아무래도 태왕의 나이가 백 살은 먹었을 것이요, 기(岐)나 옹(雍)으로부터 형만(荊蠻)까지라면 만 리 길이 될 터인데, 백 살된 어버이를 집에다 남겨 두고 만 리 길에 약을 캐러 갔다니, 이야말로 3년 동안 앓는 환자를 위하여 7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중국의 속담)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태백을 보고 지극한 덕을 갖춘 인물이라 하고, 주자는 태왕을 가리켜 지극히 공변된 인물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아무런 충돌도 없는 백이와 태공의 사이와는 같지 않습니다. 태백으로 본다면 태왕이 지극히 공변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태왕으로 본다면 태백이 지극한 덕을 갖추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현들이 말씀한,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정미한 뜻을, 겉만 핥는 얇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추측조차 못할 바이지만, 저도 역시 이 사실에는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니,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좁은 골목에 몰아넣을 것은 아닙니다. 소자첨(蘇子瞻)은, 다만 외면만 보고 얼핏 무왕을 성인이 아니라고 배척했으나, 이것은 소자첨의 공부가 거칠기 때문입니다. 《논어(論語)》에는 문왕의 지극한 덕을 찬양하여,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도 오히려 은(殷)을 섬겼다고 했는데, 그 집주(集注 주희 저)에 보면, ‘형(荊)ㆍ양(梁)ㆍ예(豫)ㆍ서(徐)ㆍ양(楊) 등의 여러 고을은 주(周)로 돌아가서, 은의 주왕(紂王)에게 속한 땅은 다만 청(靑)ㆍ연(兗)ㆍ기(冀) 등 세 고을뿐이다.’ 했으나, 이는 잘못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하의 3분의 2라 함은 삼국시대 촉한(蜀漢)과 오(吳)ㆍ위(魏)와 같이 서로 정치(鼎峙)함과 같지 않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우(虞)ㆍ예(芮)가 송사를 단념하고 물러간 것과 마찬가지로, 3분의 2가 되는 천하의 인심이 주(周)로 돌아갔다는 것일 것입니다. 왕망(王莽)이나 조조(曺操) 같은 자들은, 정말 천하의 3분의 2가 되는 땅을 점령하고서는 종주국(宗主國)을 섬기는 예절을 폐기하였지만, 문왕은 진실로 3분의 2가 되는 천하의 인심을 얻고서도 자기란 존재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주왕의 죄악을 꼬집어 보지도 않아서, 마치 자제들이 부형 앞에 하듯이 자기 몸을 굽혀 스스로 신하의 도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설자(說者 주희를 말한다)의 말과 같이 정말로 9주(州) 가운데 6주의 땅을 차지하고, 그 세력은 능히 은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할 만하였으나, 일부러 신하의 도리를 지켜 공손하게 몸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의 말과 같다면, 조조 같은 주 문왕을 무엇으로써 지극한 덕이 있었다 하겠습니까. 3분의 2란, 많은 수를 쪼갠 것이요, 그의 지극한 덕행이란, 바로 문왕이 시비를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 같은 점을 말한 것이니, 후세에서 말하는 소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 돌아온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란 말이 문왕을 두고 한 말입니다. 주자가 그를 무왕보다 낫게 쳐 준 것도 바로 이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볼 때 거북의 등에 털이나 난 듯, 토끼 머리에 뿔이나 돋은 듯이 이상하게 보고서, 세상 일을 가지고 이리저리 큰일을 만들어 보려고 떠드는 자들은, 저 뱁새의 둥지나 하수를 마시는 물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도 이러한 학문이 없지 않고 보니, 공자의 태백에 대한 평가도 그리 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상 태백은 머리를 하늘로 두고 발을 땅에 붙인 한 개의 평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태왕이야말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사기(史記)》에는 오자서(伍子胥 오(吳)의 정치가 오원(伍員). 자서는 자)를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하였고, 장주(莊周)는 은(殷)의 탕왕(湯王)을 뱃심좋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했더군요.”
하고 말하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어질고도 사람을 죽일 줄 알고, 예절을 지키면서도 무력을 쓸 줄 알며, 지혜가 있으면서도 물을 줄 알고, 용맹이 있으면서도 머리를 숙일 줄 알며, 신의가 있으면서도 변할 줄 아는 것을 가리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 합니다. 성정이 그렇지 않고서는 역시 혁신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또 반란을 바로잡지도 못할 것입니다. 대체로 창업(創業)을 이룩하는 자는 갖은 풍상을 겪지 않고서는 하늘을 맑히고 땅을 평정하지 못합니다. 천지의 기운이 뒤바뀔 때는 바람과 서리와 우레와 우박이 없이는 해[歲]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10월은 곧 천지 자연이 한 번 뒤집히는 시절이니 어찌 무서운 변화가 없겠습니까. 주공은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기술하여 한 편의 신도비(神道碑 죽은 사람의 사행을 기록한 비(碑))를 지었으니, 그 비문에,
영롱한 저 중추월을 님과 함께 구경하였지마는 / 玲瓏共玩中秋月
뉘라서 간밤에는 빗발이 창을 두들겼다 하는고(작자 미상) / 誰道前宵雨打窓
했습니다. 후세에서 참으로 태왕이 천하를 얻는 데 무심했다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또,
점검이 취해서 전연 알지 못했네(작자 미상) / 點檢醉睡渾不知
라는 말이 어찌 백정이 칼을 갈면서 염불을 함과 다름이 있을 것이며,
침대 밖에 남이 자는 것 허용치 않는데 / 不容榻外他人睡
군막에서 몸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서야 되겠는가(작자 미상) / 肯自營中醉似泥
하였음도 역시 이를 말한 것입니다. 태백의 지극한 덕은 천하를 양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양보한다는 말은 공자가 장래 일을 거꾸로 말씀한 것이요, 그의 지극한 덕이야말로 참으로 백성들이 이렇다고 칭찬해 낼 수 없는 점일 것입니다. 이는 바보가 아니면 귀머거리이니, 그는 전혀 은(殷)의 왕실에 어떠한 악한 천자가 태어날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요, 또 자기 집안에 어떠한 거룩한 성덕(聖德)을 지닌 아이(문왕)가 태어날 것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큰 천치가 아니면 바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니, 말하자면 우리 태백이 천하의 형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우리 태백의 이른바 백성들이 이렇다고 칭찬해 낼 수 없는 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자가 그를 문왕보다도 높이 여긴 것도 이 까닭으로서, 《춘추전(春秋傳 좌전(左傳))》에서는 이르기를, 태백은 태왕의 말을 듣지 않아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태왕이 이런 것을 가지고 숙덕거리며 모의를 했는데 태백은 이것을 간절히 간(諫)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천하로 하여금 이 같은 태백의 행동을 지극한 덕이라고 쳐 준다면, 태왕의 일이야말로 도리어 난처할 것인즉, 이렇기 때문에 제가 말한 하늘로 머리 두고 땅에 발을 디딘 평범한 인물이란 이를 말함입니다. 전에 제가 이른바 백이ㆍ숙제 이전에는 태백ㆍ중옹이 있었다는 말은 다만 《논어》의 집주를 좇아서 한 말이요, 지금 한 말과는 뜻이 다릅니다.”
한다. 나는 다시,
“백이ㆍ숙제의 뒤에는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있었다고 한다면, 선생은 또한 장차 관숙ㆍ채숙의 덕을 태백에게 비하려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내가 말씀한 본지(本旨)는 이와 다릅니다. 다만 한(漢)의 국가를 창립한 것이 광명정대하다는 것을 밝혔을 따름이요, 관숙ㆍ채숙에게 도리어 지극한 덕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관숙ㆍ채숙은 은(殷)의 왕실에의 충신이며 문왕의 효자들이라고 일컫는 이가 있으나, 이것이 아무리 꼬부라진 학자들이 세상에 아첨하는 데 분개하고, 썩은 선비들이 함부로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미워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입론(立論)을 어찌 어그러진 이론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사람들이 남의 고금 성패의 자취만을 보고, 의리를 굽히고 의리 위에 다른 의리를 덮어 씌워서, 추켜 세울 때는 하늘 위에까지 올려놓고 억누를 때는 땅속까지 파묻는 것을 개탄한 것입니다. 우리 선비들도 역시 종횡(縱橫)하는 습관이 없지 않으니, 억양함이 너무 심한 것도 역시 한낱 종횡입니다. 한(漢)의 건평(建平 한(漢)의 연호)ㆍ원시(元始 한(漢)의 연호) 시절에 왕망은 신야(新野)의 밭을 받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대궐 앞을 떠나지 않고 황제에게 왕망을 칭송하는 글을 올린 자가 전후 48만 7천 5백 72명이요, 제후와 왕공과 열후(列侯)와 종실(宗室)들은 안한공(安漢公 왕망이 자칭한 봉호)에게 구석(九錫)을 내릴 것을 머리를 조아려 황제에게 무수히 청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정으로 의논한다면, 적의(翟義)ㆍ진풍(陳豐) 같은 사람들은 어찌 주(周) 때의 주공이 모반한다고 유언을 퍼뜨린 관숙ㆍ채숙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관숙ㆍ채숙이 성공하여 당시 주공에 대하여 왕법(王法)을 행할 공안(公案)이 성립되었던들, 비록 천수관음(千手觀音)이 있다 하더라도 주공을 역모죄로부터 구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왕안석(王安石)의 시(詩)에,
가령 당년에 그 몸이 죽었더라면 / 假使當年身便死
한평생 참과 거짓을 뉘라서 알았으랴 / 一生眞僞有誰知
라고, 읊었지마는 그가 쉽게 죽지 않고 보니 성인인지 도적인지를 당장에 판단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의(天意)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그것은 형공(荊公 왕안석의 봉호)의 시가 아니라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의 자)이 지은 것입니다. 주의 왕실은 원래 변고가 많은 집안이요, 주공은 또 비방을 많이 받는 성인입니다. 말[斗]을 쪼개고, 저울을 꺾고, 도적을 풀어놓는다(《남화경》에 나오는 말)는 말은 좀 괴상한 이론이지만, 실로 백대의 폐단이 되는 근원을 밝게 비춰 준 말입니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은 뒤에 말씀하기를, ‘나의 공적을 아는 것도 《춘추》이며 나의 죄과를 아는 것도 《춘추》이다.’(《논어》에 나오는 말)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주공의 제작한 제도들도 장래에 어떤 화근이 되리라고 스스로 상심했을 것입니다. 근세에 먹을 만드는 자는 모두들 담성규(詹成圭 청(淸)의 제묵가)를 본떠서 만들고, 바늘을 만드는 자는 대체로 이공도(李公道 청(淸)의 제침가)의 이름을 빌리는 것과 같습니다. 당 태종(唐太宗)은 제 환공(齊桓公) 노릇을 한 번 해 보고자 하여 갑자기 관이오(管夷吾)와 같은 인물을 구하려 하였을 때에, 위징(魏徵)은 천하의 간사한 인물로서 그 앞에 소리를 응하여 ‘예이’ 하고 긴 대답을 하며 나타나 얼굴을 마주 대고 딱 버티고 서서, ‘관중(管仲)이 여기 왔습니다.’ 하고 나선 셈입니다. 이런 때 누가 묻기를, ‘너 관중은 어째서 공자(公子) 규(糾)와 함께 죽지 아니하였는가.’ 한다면 위징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성인이 나에게 죽지 말라고 허락하였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또 묻기를, ‘어떤 성인이 너를 살려 주더냐.’ 하면, 위징은 노 나라의 공 부자인데, 그는 다문박식한데다가 지공혈성(至公血誠)을 지닌 성인으로서 만세에 사표가 되어, 말 한 마디 땅에 떨어져도 금이 되고 돌이 되어,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고 세상에 세워서 어긋남이 없으며, 이후 백대의 성인을 기다려도 틀림이 없을 것이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공자가, ‘어찌 너를 죽지 말라고 허락했을 것인가.’ 하고 물으면, 위징은 소리를 높여 긴 소리로 읊기를, ‘어찌 성명 없는 평범한 지아비와 지어미의 신의를 지키는 버릇과 같이 개울 속에서 목매어 죽어, 아무도 알 바 없는 신세가 되리요 했으니, 이것이 어찌 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나를 죽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리요.’ 할 것이니, 이것은 비단 위징이 스스로 해석하였을 뿐 아니라, 실은 당 태종에게 붙어서 아첨으로 한평생을 지낸 수단이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그 동네의 보정(保正)으로 하여금 그의 네 이웃에다 통문이라도 돌렸다면 하후영녀(夏侯令女)가 아마도 귀를 베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위징에게 소백(小白 제 환공의 이름)은 형이요 규(糾)는 아우가 아닌가. 또 관중은 규의 올바른 신하도 못 되지 않았던가 하고 물어 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위징은 진왕(秦王 이세민이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 세민(世民)과 함께 모두 당(唐)의 태자인 건성(建成)의 부하였습니다. 위징의 신분은 원래 도사(道士)로서 허망한 도를 믿었습니다. 그의 십점소(十漸疏)는 아주 친절하게 깨우치는 것 같지마는,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천고에 중보(仲父 관중)가 죽을 리가 전혀 없으니, 정관천자(貞觀天子 당(唐) 태종. 정관은 그의 연호)도 모름지기 나 같은 시골뜨기를 죽일 까닭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리이다.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가 거간꾼이나 장사치의 노름으로 상하 없이 공리(功利)만 추구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고금의 성패에 있어 한 개의 단안(斷案)이었습니다. 성패라는 두 글자는 선비들의 입으로는 형용 못할 글자였으며, 오히려 제후(諸侯)의 집에 인의가 붙여 있을 뿐이요, 《제범(帝範)》의 한 편 글은 다만 요(堯)를 본뜨고 순(舜)을 꾸몄을 뿐입니다. 우리 선비들이 말하는 바 천명(天命)이란 것은 기수(氣數)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기수란 것은 역시 성패의 행적만을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항상 말하듯이 하늘이 임금의 지위를 주고 인심이 저절로 돌아온다는 말은 한낱 거짓말이니, 예로부터 역리로 취하여 순리로 지키는 자 어느 누구를 천명이 돌봐주지 않았으며, 후직(后稷 중국 고대에 농사를 관장하던 관리)의 농사짓는 법으로 사람들이 지극한 도움을 받는 바에야 어느 귀신이 제향(祭享)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편안하고 보니 날마다 한(漢)의 백성들이 왕망의 공덕을 찬송함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우(虞)의 귀신이 진(晉)이 주는 음식이라고 토했다(《좌전》에서 나온 구절)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혹정의 이 말은 속으로 무엇을 지목하는 점이 있는 것이요, 그저 역대를 평범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매양 청(淸)의 창건한 것이 정당하다고 말끝마다 외고 있으나 그래도 이야기할 때는 때때로 자기의 본정을 탄로했으니, 특히 역대 왕조의 역순과 성패의 자취를 빌려서 이리저리 자기의 회포를 표시한 것이다.
한다. 나는 다시,
“다만 운수로만 미룬다면 세상에 손댈 데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천명이란 말을 자주 하지 않았으니, 이는 세상을 위하여 가르침을 세우는 데는 이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바람이 등왕각으로 보내고 / 時來風送滕王閣
운이 가면 천복비에 벼락이 친다네 / 運去雷轟薦福碑
라 하였으니, 세상 일이란 도시 때가 오고 운이 가고에 있나 봅니다.”
하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소위 운수가 터진 인재(人才)는 하늘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세상을 교화하는 것으로 본다면 비록 순리라고 할 것도 천의(天意)로서 보면 도리어 흠이 되고 반대로 어그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마는,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이에게는 왕패(王霸)가 거짓말로 얼음이 굳게 얼었다고 하였으나 하늘은 그 거짓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고, 지성을 들여 기도를 하더라도 반드시 원대로 들어주는 것이 없건마는, 나라가 망할 적에는 장세걸(張世傑 송(宋)의 충신)이 분향을 하면서 하늘에 빌던 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것은 제때에 우는 닭 울음인데,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의 봉호)이 호구(虎口)를 벗어나게 하려 하여, 한 사람이 울음 소리를 내자 닭이란 닭은 모조리 따라서 울었습니다. 천하에 틀림없는 것은 조수[潮汐] 같은 것이 없지마는, 송(宋)의 왕조가 더 버티지 못하게 되니, 전당(錢塘)의 조수(潮水)가 사흘 동안을 들지 않았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귀신의 조화조차 거짓과 진실이 서로 엇갈리며 성실과 휼계가 함께 씌어져, 어느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될 때에도 하늘은 반드시 즐겨한 바 아니지만 자기만을 공교로이 도와주는 것 같고, 또 어느 사람이 천하를 잃게 될 때에도 하늘은 반드시 미워하지 않건마는, 잔인하고 흉악하기가 깊은 원수에게 하듯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우리나라 패륵(貝勒) 박락(博洛)이 군사를 거느리고 절강(浙江) 군사를 강 언덕으로 옮기는데 이때도 조수가 연일 들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또 묻기를,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섭정왕(攝政王)은 누구를 이른 것입니까.”
하니, 혹정은,
“이는 예친왕(睿親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휘(諱)는 다이곤(多爾袞)인데 우리 청(淸)의 주공(周公)이지요. 순치(順治) 원년(1644년) 4월에 ‘예친왕’이란 왕호를 주고 황제 앞에서도 수레를 타고 일산을 받을 수 있는 특전을 내렸습니다. 성경(盛京)으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영원(寧遠)을 향하여 진군할 때에 이자성(李自成)이 벌써 북경을 점령하게 되자, 평서백(平西伯) 오삼계(吳三桂)는 우리 군사를 맞아서 산해관으로 들어오게 하여 원수를 갚고 흉적을 물리쳤습니다. 예친왕이 관민들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흉적만 잡을 뿐이요 백성은 살해하지 않고 함께 태평을 누리겠다는 뜻을 발표하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5월에 예친왕이 조양문으로 나가는데 그가 탄 연(輦)은 명(明)의 노부(鹵簿 천자가 거둥할 때 쓰는 의례)의 절차를 차리고 명의 문무 백관의 조회를 무영전(武英殿)에서 받았습니다.”
한다. 나는 또,
“이때는 천하를 도시 예친왕이 얻은 셈인데 어찌해서 자신이 천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런 까닭에 우리 청조(淸朝)의 주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의 형편으로서도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할 내력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친왕(親王)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영용하고 호걸스러웠습니다. 우리 세조(世祖)는 9월에 북경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밖으로는 강 왼편이 평정되지 못했으나 안으로는 종실(宗室)의 어진 신하들이 보좌(補佐)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당시의 여러 친왕들 중에는 공덕으로 보아 섭정왕(攝政王) 같은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열성실록(列聖實錄)》이 아직도 국내외에 두루 퍼지지 못했으니 응당 선생께서 모르실 것입니다. 명이 망한 뒤에 복왕(福王 명(明)의 신종(神宗)의 손자)은 강녕(江寧)에서 ‘천자’라 일컫고 연호를 고쳐 ‘홍광(弘光)’이라 하였습니다. 순치(順治) 2년(1645년) 5월에 예친왕(睿親王)은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내려가 이긴 기세로 강을 건너 강녕까지 바로 이르렀습니다. 복왕은 무호(蕪湖)로 달아나 숨었다가 6월에 총병(總兵) 전웅(田雄)과 마득공(馬得功)에게 잡혀서 항복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예친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다탁(多鐸)이라고 하는데, 그의 영무(英武)스러운 점은 예친왕(睿親王)에 못지 않을 것입니다. 영친왕(英親王)의 이름은 아제격(阿濟格)으로 이자성을 추격하여 토벌했고, 숙친왕(肅親王)은 장헌충(張獻忠 명(明)의 역신)을 손수 쏘아 죽여서 통쾌하게 여러 사람의 설분을 했습니다. 숙친왕의 이름은 호격(豪格)인데 모두가 하늘이 세운 것이니 누가 감히 당해낼 것입니까.”
한다. 나는 또,
“복왕(福王)이 만일 마사영(馬士英 명(明)의 역신)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사가법(史可法 명(明)의 충신) 같은 어진 사람들을 믿었던들, 강남(江南)의 땅을 어찌 대대로 지켜내지 못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이 위연(喟然)히 탄식하고 하는 말이,
“하늘이 폐한 것인데 누가 다시 일으켜 주겠습니까. 그의 행적을 보면 전날의 유왕(幽王 주(周)의 폭군)ㆍ여왕(厲王 한(漢)의 폭군)ㆍ환제(桓帝 한(漢)의 용주(庸主))ㆍ영제(靈帝 한(漢)의 용주(庸主)) 등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예친왕(睿親王)은 사가법에게 보낸 글 속에 《춘추(春秋)》의 대의를 이끌어 임금이 죽임을 당했는데, 역적을 토벌하지 않고 새 임금을 세운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책망하며 또 말하기를, 역적이 쳐들어 와서 나라의 부모를 죽였건만 중국의 신민들은 활촉 한 개도 쏘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정은 묵은 혐의를 없애버리고 군대를 갖추어 흉적을 소탕하여 천하를 위하여 임금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먼저 예절을 갖추어 회종(懷宗)과 황후를 장사지냈고 국가가 수도로 정한 북경은 이자성으로부터 얻은 것이요, 명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아니니 마땅히 존칭을 깎아버리고 번국(藩國)이 되어 길이 복을 누릴 것이니, 그리하면 조정으로서는 우빈(虞賓)으로 대접할 것이라 하였더니, 사가법의 답장에는, 국가는 없어지고 임금은 죽으니 사직(社稷)이 중한지라 금상(今上)을 맞아 임금으로 세우니, 혹정이 자기 스스로 주를 내기를, 명의 복왕(福王)이라 하였다. 실로 하늘이 준 바요, 인심이 귀순하였습니다. 전하(殿下)가 수도에 들자, 우리 황제ㆍ황후를 위하여 발상(發喪)을 하고 복을 입게 되니, 무릇 대명(大明)의 신자된 자로서 누가 감격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하지 않으리요. 그런데 이에 《춘추》를 이끌어 내어 정통(正統)의 대의를 모르는 자와 같이 힐책을 하려 하니, 장차 무엇으로 인심이 거칠어져 가는 것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왕망(王莽)이 한(漢)의 제위를 빼앗았을 때 광무(光武)가 중흥하였고, 조비(曹丕)가 산양(山陽 한(漢) 헌제(獻帝)의 폐위된 뒤의 봉호)을 폐하자 소열(昭烈)이 제위를 밟게 되었고, 회제(懷帝 진(晉)의 임금)ㆍ민제(愍帝 진(晉)의 임금)가 북방으로 달아나자 원제(元帝 진(晉)의 임금)가 대를 이었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몽진(蒙塵)하자 강왕(康王 남송의 임금)이 위를 이었으니, 이는 모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전에 국가의 위호를 바로잡은 것으로서 주자도 강목(綱目) 속에 이것을 커다랗게 쓰고 그르다고 배척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황제(건륭 황제)가 친히 쓴 글 한 편 속에 그 시비를 바로잡았고, 또 황제가 비정(批定)한 《통감집람(通鑑輯覽)》은 극히 공평하고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북왕이 조금이나마 뜻을 분발하여 무언가 해 보려고 하였으면 송 고종(宋高宗)처럼 남쪽으로 건너가서 한 쪽에서라도 편안히 있었을 것인데, 드디어 마(馬 마사영(馬士英))ㆍ완(阮 명(明)의 역신 완대무(阮大錻)) 같은 간당(奸黨)을 임용해서 옳고 그른 일이 거꾸로 되어 버렸는데, 비록 사가법이 혼자서 애써 고충(孤忠)을 기울여 보아도, 한 나무로 큰 집을 떠받들 수 없는 격이 되고 보니 황제의 이 유고(諭告)야말로 가히 천지와 더불어 같이 크다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패하고 흥하는 일에 운수가 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을 어찌할 것입니까.”
했다. 나는 다시,
“사가법의 편지에는 또 귀국은 일찍이 명으로부터 봉호(封號)를 받게 되고 나도 역시 스스로 주를 내기를, 귀국의 두 글자는 원서(原書)에는 지금 청(淸)을 말함이라고 했다. 이제 난역(亂逆)을 몰아 쫓아 없앴으니 가위 대의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강토를 규정함으로써 덕을 끝까지 다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런 것을 일컬어 의리로써 시작했다가 이해로써 끝을 낸다는 것이다 했으니, 이 글이야말로 일월과 더불어 밝은 빛을 다툴 만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깜짝 놀라면서,
“공(公)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글을 읽어 보셨습니까.” 이 두 편 글은 모두 이현석(李玄錫)의 《명사강목(明史綱目)》에 실려 있는 바 혹정의 짐작으로는 나를 외국인이라 하여 응당 명ㆍ청 사이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사가법의 답서를 모두 말한 뒤 그 하단(下段)에, 일찍이 봉호(封號)를 받았다는 등의 말에 주석(註釋)을 달았다. 그의 뜻으로는 섭정왕이 관내(關內)에 들어온 일을 국가끼리 서로 재난을 구해주듯 했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그 글을 외운즉 혹정은 내가 이 글을 갖추어 아는 것에 놀란 것이다.
한다. 나는 또,
“사공(史公)의 이 글도 역시 금서(禁書)에 드는가요.”
하고 묻자, 혹정은,
“금서가 아닙니다. 황제가 손수 여러 편 글을 편찬하면서 이 글을 뽑아 실었습니다. 우리 청조(淸朝)의 관대하고도 숨기지 않은 점은 전대에도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한다. 나는 또,
“이 두 글은 어느 편이 의리가 옳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빙그레 웃으면서,
“서로들 《춘추(春秋)》를 이끌어서 말했으나 그 《춘추》도 썩은 지 벌써 오래인지라, 모두들 하늘의 명수(命數)라 하니,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는 것(《맹자》에 나온 말)을 누가 들었나요.”
하고는, 이내 지워 버린다. 나는 또,
“예친왕(睿親王)이 죽은 뒤에 무엇 때문에 그 집 재산이 모두 몰수되었나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손을 흔들면서,
“말을 하자면 길어집니다. 이는 치효(鴟梟)의 시(詩)를 짓게 된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일컫기를, 금등(金縢)은 근세의 축문(祝文)과 같은 것으로 태워서 땅에 묻는 법인데,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금등에 간수하였다(《이정전서(二程全書)》에 나오는 말) 하여, 공교롭게도 주공의 고사(故事)에 맞추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신비(李宸妃)의 수은(水銀) 염습도 역시 한 가지 금등이 될 것입니다. 화림(華林)에서 나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공(公)을 위해서 우는 것입니까, 사(私)를 위해서 우는 것입니까. 대체로 세상을 교화하기 위한 언론이란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저마다 제 들은 것을 제일이라 하여 이를 정당화시킵니다. 송의 사대부들은 이학(理學)을 말하기 좋아하지만 그 중에는 마음을 불교(佛敎)에 붙이는 자도 있고 도교(道敎)를 궁행(躬行)하는 자도 있어, 21대의 전사(全史)는 모두가 연의(演義)한 것이요, 13경(經)의 주소(注疏)는 태반이 억지로 모은 글이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은 대개가 모두 우언(寓言)입니다. 이같이 구구하게 얻은 지식이란 위로는 임금에게도 바칠 수 없고, 아래로 자손들에게도 가히 전할 수 없으며, 옆으로 동창(同窓)들에게 억지로 변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해상(海上)으로부터 오신 이인(異人 연암을 가리킨다)을 만났으니, 죽는 날까지 또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며 어찌 나의 충성인들 솟구치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산연(潸然)히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크게 웃더니,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 요부는 자)는 매사에 사주(四柱)를 풀이하는 식으로 하였으니 정말 몹시도 막힌 사람이지요.”
한다. 나는,
“이를테면 분(盆)을 사면서 그것이 성한지 깨졌는지를 점쳤다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과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와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伯)와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 등 그의 학술이란 아무런 활기(活機)가 없고 정밀한 듯하면서도 거칠었기 때문에 주자는 그를 장자방(張子房)에게 따를 수 없다(《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고, 또 그의 학문에는 간웅(姦雄)의 수단이 있어서 장주(莊周)보다 10배나 못하다(《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주자의 밝은 안목 앞에는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 주자는 장주를 평하여 그가 이치의 본질을 말한 것은 매우 좋은 의논이요, 그의 명분(名分)과 의리는 후세의 유학자들이 미치지 못할 바라(《주자대전》에 나오는 말) 하였으니, 이는 주자의 공변되고 밝은 점입니다.”
한다. 나는 다시,
“천지간에 가득찬 만사와 만물이 주자의 감정(勘定)이 아니면 위조물을 면하지 못했을 테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그러면 주자의 뒤에 난 자는 모두 흙이나 나무로 빚어 놓은 형해(形骸)랍디까. 주자야말로 진량(陳亮 송(宋)의 학자)의 말을 지나치게 듣고 보니 당중우(唐仲友 송(宋)의 학자)는 너무 혹독한 탄핵을 당했던 것이며(주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통서(通書 주돈이 (周敦頤) 저)》를 잘못 해석하고는 사국(史局)의 주장을 반대하는 글을 꾸며대어 속이는 감이 있었으니, 소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통서(通書)》에 나오는 구절)는 구절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만큼 한 붓으로 흐려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말하기를,
“귀국의 문교(文敎)는 사해에 퍼져 우리나라도 동쪽으로 미쳐 오는 교화를 입고 있지마는 중국과 외국이 다르고 보니, 국가를 창건하는 규모라든지 전수하는 심법(心法) 같은 것은 얻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저로서는 글자가 같은 땅에 사는 터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나라를 세우는 규모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오제(五帝)는 음악이 모두 다르고 삼왕(三王)은 예절이 모두 다르니 하(夏)는 충성을 숭상하고 은(殷)은 질박(質朴)한 것을 숭상하며, 주(周)는 문명(文明)을 숭상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혹정은,
“그 원인을 살펴 본다면 비록 백세 동안이라도 그 손익(損益)을 알 수 있을 것(《논어》에 나오는 말)이니, 옛날 사람은 천하를 두고 금항아리에 비했지마는 오늘의 금항아리는 잘 익은 수박과 같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금항아리는 흠집이 나지 않지만, 수박은 깨어지기 쉬울 걸요.”
하였더니, 혹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니지요. 수박이란 겉은 푸르고 속은 누르며, 씨가 많고 맛이 시원하여 말하자면 천하를 천하 속에 간직함 셈입니다. 전조(前朝) 때 반란 사건을 증험해 보건대 빈민(貧民)을 구제하는 정책도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어 밖으로는 삼왕(三王)을 겸하고, 안으로는 이교(二敎 유불(儒佛))를 펴서 천하의 사대부를 몰아다가 문교와 명분 속에 모아 두었으므로 하찮은 백성들은 저마다 본래의 직분을 지켰습니다. 전대에 있어서 근본을 강하게 하고 지엽(枝葉)을 약하게 하는 정책이란 큰 도시를 점령하고 호걸들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든 전(田)ㆍ굴(屈)ㆍ소씨(昭氏)를 관중(關中)으로 옮길 뿐이었고, 그들을 어루만져 안도시키는 수단을 몰랐지만, 오늘의 청조(淸朝)는 문모(文謨)와 무열(武烈)이 정비되어 전대보다 훨씬 훌륭하고 유학을 떠받들어 오로지 중국 땅에 퍼져 은연중 호걸들의 온당치 않은 마음을 녹이고, 봉지(封地)를 넓혀 외번(外藩)들에게 두루 나누어 오랑캐들의 겸병(兼幷)하는 세력을 쪼개고, 만주(滿洲)를 억눌러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맡김으로써 황제의 근본되는 기지를 튼튼히 하고, 치수(治水)하는 공사를 자주 착수하여 천하에 별별 야릇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서 놀고 먹는 무리들을 위로(慰勞)하면서 삼가 몸을 바로잡아 황제의 행정(行政)을 할 뿐이니 세상일이 어찌 인위적인 사려(思慮)로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요ㆍ순은 의상(衣裳)만을 드리우고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진 것은 자연의 섭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대개 천하를 차지하고 통치를 할 때에는 백성이란 따라오게 하면 되는 것이지 일일이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논어》에 나오는 말), 이는 요ㆍ순의 뜻인데 공자가 부연하였고, 진인(秦人 진 시황(秦始皇))이 실천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이것은 기이한 의논이군요. 그 말을 들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니, 혹정은,
“밭 갈고 샘 파는 것이 분수를 따를 뿐이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말은, 요(堯)가 미복(微服)으로 강구(康衢)에 나가서 들었을 때 속으로 슬며시 기뻐했던 점이요, 공자가 위(衛)로부터 노(魯)에 돌아와 시(詩)ㆍ서(書)를 산정(刪正)하고 예(禮)ㆍ악(樂)을 바로잡은 것은 당시 세상 형편으로는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봉건(封建)을 깨우치고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시ㆍ서를 불사르며 선비들을 산 채로 파묻은 노릇은 천하를 통일하는 천자로서 크게 한 번 함직한 일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제왕들은 자기의 덕을 요ㆍ순에게 비하면 기뻐하고 진 시황에게 비하면 성화를 내지만, 요ㆍ순을 배운 자가 있단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 시황의 사업을 계승하고 또 발전시키면서 한 시대의 천자로서 천하에 명(命)을 내려서 이것은 요ㆍ순의 사업이니 이를 실천할 것이요, 이것은 망한 진의 사업이니 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니 13경과 21사의 어디를 뒤져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재상(宰相)을 소하(蕭何)나 조참(曺參)에게 비하면 감당할 수 없다고 표정을 하면서도 상앙(商鞅)이나 이사(李斯)에게 비하면 잡아 먹으려 들지만 소하ㆍ조참과 방현령(房玄齡 당(唐)의 명상(名相))ㆍ두여회(杜如晦 당(唐)의 명상(名相)) 등은 한때 이름 높은 재상으로 쳐주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상앙이나 이사의 죄인들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상앙이나 이사 같은 자들은 오히려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막아 아래 위가 서로 믿게 되었지만, 그들의 공렬(功烈)을 저토록 적게 평가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학문이 유학이 아니라는 데 있는 것뿐입니다. 소하ㆍ조참은 원래 죄를 줄 만한 학문을 가지지 않아 겨우 자기 몸만 빠져 죄를 면했을 뿐입니다. 대체로 임금에게 잘 보이면 백성에게 인심을 잃고, 백성의 마음에 맞게 하면 임금에게 의심을 사는 법이니, 한 시대의 임금을 도와서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렁을 매어 두고 난간을 막아 두어 손 한 번만 실수하면 넘어져서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하였다.
윤형산(尹亨山)은 반중(班中)으로부터 나와서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소로 왔다. 나와 혹정은 모두 의자에서 내려서 윤공에게 공손히 읍을 하였더니, 윤공은 바쁘게 나를 붙들어 의자에 앉히고 품속으로부터 담배통을 꺼내서 보이는데 그것은 붉은 만호(㻴瑚)로 만든 것이다. 윤공은 또 품속에서 누런 보자기로 싼 색다른 비단 두 필을 꺼내어 나에게 보이는데 혹정은 연달아 황제께서 주신 것을 축하한다. 윤공의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해 보인다. 그 한 가지는 아청빛 우단(羽緞)에 복숭아꽃을 수놓은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고동색 운문단(雲紋緞)에 금실로 신선과 부처를 수놓은 것이다. 이때 형산(亨山)은 바쁘게 우리가 이야기한 초지(草紙)를 훑어 보더니 곧 붓을 들어 쓰기를,
“건문 황제(建文皇帝)가 대궐 안에서 자기 명에 죽었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일이 없는데 왕 선생(王先生)이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한다. 혹정은,
“의심나는 것을 전하는 것도 역사가(歷史家)의 한 체제이지요.”
한다. 나는,
“오량(吳亮)이 산적을 던졌던 고사는 어째서 참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혹정은,
“진실로 전배(前輩)들의 길고 짧은 변론들이 많지만 꼭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이 만일 참말일 때에는 어찌 천고에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백룡암(白龍菴)의 고사(출처 미상)도 비록 이락와피(籬落臥被 갈현(葛玄)의 신선전(神仙傳)에서 나온 이야기)와 같은 글에 들지만, 역시 이것도 망사대(望思臺 당(唐) 무제가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지었다) 내력과 같은 것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낱낱의 붓끝마다 솟아 오른 피는 / 筆筆心頭血
한 점만 떨어져도 천지에 물드누나(작자 미상) / 一落染天地”
나는 다시,
“사중빈(史仲彬 미상)의 《치신록(致身錄)》도 역시 후세 사람들의 모방해 지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 책에는,
패물만 쓸쓸히 혼과 함께 달밤에 돌아왔네 / 環佩空歸月夜魂
해마다 접동새는 동청수에 우지지네 / 年年杜宇哭冬靑
라고 읊었는데, 이는 애태우는 사람들의 괴로운 실정일 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어제 왕 선생의 말에 한(漢)의 창업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덕이 없었으므로 능히 예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호령을 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우레같이 움직이고 바람처럼 행할 때는, 그 어진 소리가 미치는 곳에 사방 억조의 백성들도 모두 그 득실을 판단해 낼 수 있지만, 그들의 안방에서 벌어지는 사생활로서 은밀한 행동과 조그마한 행실쯤은 바깥 사랑방에서 알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진 종실(宗室)에 하간헌왕(河間獻王) 같은 이가 있어 이 같은 사실을 노래로 읊어 서술하고, 또 묘하게 능히 음률을 살핀 뒤에야 그 덕행(德行)에 맞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금슬(琴瑟)이 맞으니 사시가 평화롭고 율려(律呂)가 골라서 만물이 통합된다는 것입니다. 한(漢)의 악가(樂歌)로서는 안세(安世)ㆍ방중(房中)이 가장 근사하다고 하지만, 혼자 한 환관(宦官)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미앙궁(未央宮)의 서까래를 쳐다보고 헤아린다는 것은 옛날 원수(元首)가 좀스럽다는 노래(《서경》에 나온다)와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라는 씩씩한 모습이 땅에 떨어진 셈입니다. 심지어 벽양(辟陽)의 수치는 바깥 세상에도 숨기기 어려운 일이요, 인체(人彘)의 혹독한 것은 신인(神人)이 모두 분개할 노릇인즉 조단(造端)의 시초라 할지라도 이 같은 꼴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희(薄姬)는 위왕(魏王) 표(豹)의 미인이요, 효 경제(孝景帝)의 왕 황후(王皇后)는 금왕손(金王孫)으로부터 빼앗은 계집이요, 음려화(陰麗華)에게 자나깨나 사모하던 지저분한 일들이 있지마는 누가 이것을 노래로 지어 읊었겠습니까. 이러한 왕실(王室)의 지친에는 하간헌왕만한 이가 없고 보니, 관저(關雎)의 교화나 이강(釐降)의 아름다움같이 읊을 바도 못 되었으니, 이러므로 풍류는 풍류대로 덕행은 덕행대로 따로 떨어진 것을 알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백등(白登)의 기이한 계교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혹정은,
“그 계교란 비밀이라 세상에는 얻어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그 기이한 꾀란 것은 적의 성 아래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이 아닐까요. 일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비밀에 붙였습니까.”
하고 물으니, 윤공은 크게 웃으면서,
“먼저 사람들이 하지 못하던 말을 하시는군요.”
한다. 나는,
“그 당시 묵돌(冒頓)은 응당 구슬을 입에 물고 관(棺)을 등에다 지는 허다한 절차를 몰랐겠지요.”
하였더니, 혹정은,
“옛날부터 중국은 오랑캐에게 성공한 일이 없어 강거(康居)가 항복을 하고 힐리(頡利)가 당(唐)의 궁정에 와서 춤을 춘 것은 울고 싶던 차에 지쳤음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또,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만승(萬乘)의 자리야말로 참으로 괴로운 것이니, 한 고조가 환관의 다리를 베고 집 천정을 쳐다볼 때야 8년 동안 경영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물이 말라들매 이[齒]가 찬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응당 천하 일이 도무지 계륵(鷄肋) 같을 뿐이었겠지요.”
하니, 형산은,
“재상도 또한 그러하니 술과 계집과 재물에 지쳐날 때에, 젊어서 오색 찬란한 구름 속에서 자기의 이름을 불렀을 때(과거의 창방)를 회상해 본다면 과연 어떠한 심사였겠습니까.”
한다. 이에 혹정은,
“영감님은 영수 가에 밭뙈기나 장만하고 저술(著述)이나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하니, 형산은 크게 웃으면서,
“눈앞에 급급(汲汲)한 것은 모두 죽은 뒤 일을 계획하는 것이니 누에가 늙으면 저절로 꼬치를 짓는 것이요, 사람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자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한다. 나는 또,
“혹정은 아직도 과거를 단념하지 않고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혹정은,
“이미 등우(鄧禹 후한 때의 장군)와 마찬가지로 남의 적막함을 웃었습니다.(단념했다는 뜻) 선생은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혹정은,
“백두(白頭)로 과거를 본다는 것은 선비의 수치입니다.”
한다. 이때 형산은 붓을 잡고 무엇을 쓰려다가 혼자서 크게 웃으면서 혹정에게 무슨 말을 하니 혹정 역시 크게 웃는다. 나는,
“두 선생이 그렇게도 웃으실 적에는 응당 절기(絶奇)한 일이 있는 거지요. 저는 그 까닭을 모르니 배를 쥐고 두 분의 즐거움을 도와 드릴 수 없습니다그려.”
하였더니, 둘이서는 더욱 크게 웃는 것이다. 형산은,
“강희(康熙) 기묘년(1699년) 과거에 1백 2세 된 거자(擧子)가 있었습니다. 성은 황이요 이름은 장(章)인데 광주(廣州) 불산(佛山)에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번 과거에 급제를 못할 때는 오는 임오년(1702년) 과거에 올 것이요, 그때 또 급제를 못할 때는 을유년(1705년) 곧 내 나이 1백 8세 될 때에는 꼭 급제를 할 터이니, 그땐 그나마 허다한 사업을 하여 국가를 위하겠다 하였답니다.”
하여, 나도 또한 절도(絶倒)함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다시,
“그 황장(黃章)이란 사람은 과연 을유년 과거에 급제를 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면서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혹정은,
“그가 급제를 못할 때는 세상의 결함(缺陷)을 넉넉히 알 수 있겠지만, 만일 급제를 했다면 도리어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일이지요.”
했다. 형산이 말하기를,
“선생은 오시는 길에 일찍 천산(千山)을 유람하셨는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천산은 1백여 리를 돌아야 가게 되고, 또 여정이 바빴기 때문에 다만 하늘 밖에 있는 두어 점 산봉우리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였다. 형산은 다시,
“노복(老僕)은 일찍이 무인년(1758년)에 강향(降香) 행차 때 의무려(醫巫閭)까지 갔더니 귀국 인사들의 성명이 먹글씨로 씌어져 있습디다.”
하기에, 나는,
“그 성명이 누구이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모두 6, 7명 되었지만 누구였는지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한다. 내가 또,
“우리나라 선배(先輩) 김창업(金昌業)의 자는 대유(大有)요, 호는 노가재(老稼齋)인데, 일찍이 강희(康熙) 계사년(1713년)에 천산을 유람하였으니 의무려산에도 응당 제명(題名)한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형산은,
“천산은 저도 한 번 구경할 인연이 없었는데 혹시 가재(稼齋) 김공(金公)은 좋은 시구(詩句)를 지은 것이 있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문집이 몇 권 있지만 아름다운 글귀는 한두 구절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김가재는 역시 창춘원(暢春苑)에서 이용촌 선생(李榕村先生)을 만났다는데 그는 당시 각로(閣老)였지요.”
했다. 형산은,
“용촌 선생은 강희 계사 연간에는 필시 남쪽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어떻게 서로 만났단 말이요.”
하고 묻기에, 나는 다시,
“용촌 선생의 휘가 이광지(李光地)였지요.”
하고 물으니, 두 사람은 모두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인다.
형산이,
나는 아교를 달여서 해와 달을 붙여 두련다(사공도(司空圖)의 시) / 癡欲煎膠黏日月
라는 시를 읊는다. 이때 해는 이미 저물어 방안이 침침하였으므로 촛불을 켜놓았다. 나는,
인간의 촛불이란 켤 것이 무엇 있나 / 不須人間費膏燭
해와 달 이 두 빛이 이 천지를 쌍으로 밝혀다오 / 雙懸日月照乾坤
하고 읊었다. 혹정이 손을 흔들면서 먹으로 ‘쌍현일월(雙懸日月)’이란 네 글자를 지워 버렸으니, 대개 일ㆍ월을 쌍으로 쓰면 명(明)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마침 ‘점교(粘膠)’라는 글귀에 대(對)를 맞추어 쓴 것인데, 그는 ‘쌍현일월’을 자못 꺼리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어제 성묘(聖廟)에 배알했을 때 보니 주자를 전상에 올려 모셨으니, 이렇다면 11철(哲)이 되는 셈인데 언제부터 올려 모셨나요.”
하고 물으니, 형산은,
“강희 시절에 올려 모신 것인데, 10철은 원래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적당한 정론(定論)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때 진(陳)ㆍ채(蔡) 사이에서 함께 난을 만났을 뿐인데, 당(唐)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아무도 감히 다른 의논을 내놓지 못했지요. 유약(有若 공자의 제자)에 대한 말이 네 번이나 《논어(論語)》에 보이는데, 그가 성인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자하(子夏 복상(卜商)의 자)ㆍ자장(子張 전손사(顓孫師)의 자)의 무리들은 심지어 공자를 섬기던 예로 섬기려고 했으니 그가 어질다는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요, 공서적(公西赤 공자의 제자)은 예악(禮樂)에 뜻을 두어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질이 있었으니, 역시 재아(宰我 재여(宰予). 재아는 그의 자. 자아(子我))와 염구(冉求)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염구ㆍ재아의 언행(言行)은 여러 가지 사전(史傳)을 증험하지 않고, 《논어》에 나온 것만 상고하더라도 그 우열(優劣)은 가히 한 가지로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유약과 공서적 두 분은 전상으로 올려 모시고 염구와 재아를 무중(廡中)으로 고쳐 모셔야 한다고 선배 정단간(鄭端簡 미상)ㆍ왕이상(王貽上 왕사진(王士稹). 이상은 자)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상은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있을 때 글을 갖추어 이를 개정하고자 하다가 사람들에게 정지당하고 글이 올려지지 못했으니, 이야말로 만세의 공론이라 할만한 것으로 사류(士流)들이 지금껏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한다. 형산은 다시 묻기를,
“박 선생(朴先生)은 지금 저술한 책이 몇 권이나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시집을 중국에 가지고 오신 것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평생에 학식(學殖)이 노무(鹵莽)해서 일찍이 몇 권 책도 저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더니, 형산은,
“비록 주공(周公) 같은 아름다운 재주가 있더라도 만일에 교만하고 인색하면 말할 거리도 못 되지요. 선생이 만일 …… ” 이 다음은 미처 글씨를 쓰기 전에 기풍액(奇豐額)이 들어와서 나에게 황제가 하사한 담배통을 보이므로 드디어 자리를 파하여 일어섰다.
하였다.
내가 입은 흰 모시옷은 해가 저물자 좀 서늘하였다. 이때 달이 추녀 끝에 걸렸는데 뜰에서 서로 산보할 때 형산이 내 옷을 만지면서,
“좌중이 맑은 기운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내가 혹정과 이야기한 것이 제일 많았는데, 엿새 동안을 창문을 대하여 밤을 새워가면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능히 조용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굉유(宏儒)요 괴걸(魁傑)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종횡 반복이 많았다. 내가 우리 서울을 떠나서 8일 만에 황주(黃州)에 이르렀는데, 말 위에서 혼자 생각하기를,
“학식이 본래 없는 나로서 이번 중국에 들어가 만일 큰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질문을 하여 그를 애먹여 볼까.”
하고, 드디어 옛날 들은 지식 중에서 ‘지전설(地轉說)’이라든가 ‘월세계(月世界)’ 이야기를 찾아내어,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 위에 앉은 채 졸면서도 누누(累累) 수십만 마디의 말을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글자 아닌 글을 쓰고 하늘에 소리 없는 글을 읽어가면서 하루에 몇 권의 책을 꾸몄다. 이것이 말은 비록 이치에 닿지 않더라도 이치는 역시 따라 붙일 만하였지만, 말타기에도 더 피로했거니와 붓과 벼루도 들 사이가 없었다. 기이한 생각도 밤이 지나면 사충(沙蟲)과 원학(猿鶴)처럼 변천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이튿날 다시 높은 산을 쳐다보면 뜻밖의 기이한 봉우리가 떠오르고, 또 바람 돛을 따라서 포개었다가 퍼졌다 한다. 이야말로 먼 길에 좋은 길동무가 되고 멀리 가는 데 지극히 즐거운 자료가 되었다. 열하(熱河)에 들어간 뒤에 먼저 이 이야기를 가지고 기 안찰사(奇按察使) 풍액(豐額)에게 소개했더니, 풍액도 수긍은 했으나 전혀 이해는 못하였고, 혹정과 지정은 역시 분명히 알아듣지 못했으나 혹정은 이 학설을 그렇게 틀렸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개 혹정은 문답하는 데 민첩하여 종이를 잡으면 문득 수천 마디의 말을 내려 써서 종횡으로 떠벌리고, 천고의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을 손에 닿는 대로 들춰내어 아름다운 구와 묘한 게(偈)가 입만 열면 선듯선듯 만들어지지만, 모두 조리에 닿고 맥락이 어지럽지 않았다. 더러는 동쪽을 가리키다가 서쪽을 치고, 때로는 자기 말을 고집하되 견(堅)을 백(白)이라 하여 나를 치켜 올리고 억눌러서 나로 하여금 말을 꺼내게 했으니, 굉장히 박식하고 말을 좋아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거늘 백두(白頭)인 채 궁한 처지로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려 하니 정말 슬픈 일이다. 연경(燕京)에 들어간 뒤에도 사람들과 더불어 필담(筆談)을 해 보면 모두 능란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또 그들이 지었다는 모든 문편(文篇)들을 보면 필담보다 손색이 있었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글 짓는 사람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알았으니, 중국은 바로 문자(文字)로써 말을 삼고 있으므로 경ㆍ사ㆍ자ㆍ집이 모두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성어(成語)였다. 그 기억력이 남과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억지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벌써 그 고정(故情)을 잃어버리고 글과 말이 판이하게 두 가지 물건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글을 짓는 자는 서어(齟齬)해서 틀리기 쉬운 옛날 글자를 가지고, 다시 알기 어려운 사투리를 번역하고 나면 그 글 뜻은 캄캄해지고 말이 모호하게 되는 것이 이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국인(國人)들에게 두루 이 이야기를 하자 많이들 그렇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족히 개탄할 뿐이로다. 엄계우옥(罨溪雨屋)에서 심심풀이로 이를 쓰다.
[주D-001]젓가락 …… 바빴으랴 : 장량(張良)이 한왕(漢王)의 밥상 앞에서, “젓가락을 빌려 주시면 천하의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주D-002]안기생(安期生) : 진(秦)의 방사(方士). 그가 오이 만한 대추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주D-003]위왕(魏王) : 전국 때 위의 임금. 그가 닷 섬들이 큰 바가지를 얻었으나, 너무 커서 쓸 데가 없었다. 《남화경》에 나오는 말.
[주D-004]마고(麻姑) : 선녀의 이름. 손톱이 길어서 등을 긁기에 좋다는 전설이 있다.
[주D-005]항아낭랑(姮娥娘娘) : 달 속에 선약을 찧고 있다는 전설 중의 선녀.
[주D-006]미진(微塵) : 일체 물질에 공통하여 존재하는 물질의 최초의 단위를 의미하였다.
[주D-007]티끌이 …… 침울하여 : 화학적 변화와 같은 현상을 의미한다.
[주D-008]직방(職方) :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은 관원.《주례(周禮)》에 나오는 말.
[주D-009]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 : 전국 때 제(齊)의 청렴하기로 저명한 사람.
[주D-010]영연(泠然) : 다른 본에 흔히들 ‘냉연(冷然)’으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주D-011]중유씨(仲由氏) : 중유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의 성명. 그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맹있기로 이름이 높았다.
[주D-012]그의 …… 않소이다 : 자는 병여(炳如)요, 호는 대곡(大谷).
[주D-013]일곱 …… 듯이 : 당(唐)의 시인 노동(盧仝)이 지은 시의 ‘칠완다흘부득(七碗茶吃不得)’이라는 구절에서 나왔는데, 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주D-014]큰 못에 …… 구멍 : 《남화경》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구절인데 지극히 작다는 말.
[주D-015]별이 …… 설 : 옛날 중국을 9주(州)로 나누어서 분야를 설정하였다.
[주D-016]칠정(七政) : 해와 달과 화ㆍ수ㆍ목ㆍ금ㆍ토의 오성(五星).
[주D-017]송 경공 …… 물러가고 : 전국 때 송 경공이 형혹성이 비치었음을 보고 걱정을 했으나 천문가의 권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임금다운 말 세 마디를 하였으므로 형혹성이 물러갔다는 고사.
[주D-018]객성 …… 범하였다 : 동한 때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친구로서 함께 자면서 천자의 몸에다 발을 얹었더니, 태사가 “객성이 자미성을 범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
[주D-019]이(理) :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불변의 원리.
[주D-020]기(氣) :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후천적 현상.
[주D-021]삶아 먹은 …… 갔다 한들 : 정(鄭) 나라의 공손교(公孫僑)가 남으로부터 잉어를 선사받고 차마 먹기가 어려워서, 하인을 시켜 그 잉어를 물에 놓으라 하였더니, 하인이 잉어를 삶아 먹고는 양양히 자유롭게 가더라고 보고하였다. 맹가(孟軻)는 이 일을 논평하기를, “군자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은 방법으로 속일 수 있다.” 하였다.
[주D-022]군(君) : 삼군(三君)을 가리킨 것으로 동한(東漢) 때 두무(竇武)ㆍ유숙(劉淑)ㆍ진번(陳蕃)이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서(黨錮傳序)에 나온다.
[주D-023]고(顧) : 팔고(八顧)를 가리킨 것으로 덕행(德行)으로써 사람을 이끌 수 있는 분 8명이니, 동한 때의 곽태(郭泰)ㆍ종자(宗慈)ㆍ파숙(巴肅)ㆍ하복(夏馥)ㆍ범방(范滂)ㆍ윤훈(尹勳)ㆍ채연(蔡衍)ㆍ양척(羊陟)이다. 《후한서》 당고전서에 나온다.
[주D-024]주(廚) : 8주(廚)를 가리킨 것으로 재물로써 남의 급한 일을 구출할 수 있는 분 8명이니, 동한 때의 도상(度尙)ㆍ장막(張邈)ㆍ왕고(王考)ㆍ유유(劉儒)ㆍ호모반(胡母班)ㆍ진주(秦周)ㆍ번무(蕃撫)ㆍ왕장(王章)이다. 역시 《후한서》 당고전서에 나온다.
[주D-025]최호(崔浩) : 후위(後魏)의 학자로, 《국서(國書)》라는 책을 저술하여 《사기》를 비방하였으므로 피살되었다.
[주D-026]왕통이 …… 않았습니다 : 조광윤이 천자가 된 뒤에 그의 아들에게 왕통을 계승하게 하고자 했으나, 둘째 아우 태종에게 빼앗긴 것을 가리킨 말.
[주D-027]태종 …… 못했던 : 태종이 조카들을 모두 죽인 것을 말한다. 평소에 태조는 태종을 지극히 사랑하여 태종이 병으로 뜸을 뜰 때에 쑥을 갈라 떠서 형제가 서로 아픔을 나누었다 한다.
[주D-028]촛불 그림자 사건 : 역사에는, “태조가 병석에 누웠을 때, 태종이 좌우를 물리치고 무슨 말을 하는데 잘 들을 수 없었고, 멀리서 보니 촛불 그림자 아래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도끼를 마룻바닥에 던지면서 큰 소리로 ‘잘하여라.’는 말을 한 마디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라고 써 있는데, 이로써 후세에서는 이 기록을 보고 태종이 태조를 죽였다고 하며 ‘촛불 그림자 사건’이라 한다.
[주D-029]진경(陳經) : 명(明)의 역사학자. ‘박영철본’에는 진경(陳牼)으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주D-030]개원(改元)한 것 : 그의 원년의 일년 동안에 ‘태평(太平)’과 ‘흥국(興國)’의 두 연호를 썼다.
[주D-031]정미 …… 것 : 정미는 송 태종의 아우인데 피살되고, 덕소는 태종의 아들인데 자살하였다.
[주D-032]여불위의 사건 : 여불위가 자기의 애인 한단(邯鄲) 계집이 태기가 있음을 알고 장양왕(莊襄王)에게 바친 뒤에 아들을 낳은 것이 곧 진 시황이라고 세상에서 전하였다.
[주D-033]이미 …… 것입니까 : 송이 북방의 호족인 금(金)에게 패하여 휘종과 흠종이 포로가 된 뒤에 항복을 하고 공목을 조카뻘 되는 나라라 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주D-034]석진(石晉) : 오대 때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나라. 석경당은 당을 치기 위하여 거란에게 구원병을 청하면서 아비의 예로 모실 것을 약속하였다.
[주D-035]답답한 일이었습니다 : 남송(南宋) 때의 성리학(性理學)을 지적한 것이다.
[주D-036]천하 …… 것 : 후한 때 고봉(高鳳)의 고사.
[주D-037]형산은 …… 하였다 : 이 부분은 다른 본에는 없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주D-038]군사 …… 짓누나 :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을 슬퍼하는 시 중의 두 귀.
[주D-039]제 환공(齊桓公) : 전국 때 제(齊)의 임금 소백(小白). 환공은 시호. 당시 오패(五霸) 중에서 가장 이름 높았다.
[주D-040]마외역(馬嵬驛) : 섬서성에 있는 지명.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만나서 피란하는 도중에 이곳에 이르러서 군사들의 요청에 의하여 양귀비를 죽였다.
[주D-041]이 부인 …… 남았겠습니까 : 한 무제의 애인으로서 그가 죽은 뒤 문제가 그를 다시 한 번 보기를 원하여 방사의 말에 의하여 그의 혼령을 접견하였다는 고사.
[주D-042]꿈속에 …… 있고 : 은(殷)의 고종(高宗)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꿈꾸어 얻은 고사.
[주D-043]점을 …… 있어서 : 주 문왕(周文王)이 여상(呂尙)을 얻은 고사.
[주D-044]문제 …… 것입니다 : 가의가 문제에게 상소한 글 중에서 나온 구절. 통곡할 일이 한 가지요, 눈물지을 일이 두 가지요, 긴 한숨 쉴 일이 여섯 가지라 하였다.
[주D-045]양(梁) …… 찔렀고 : 원앙이 곧은 말을 잘 하였으므로, 당시 여러 종실 중의 하나인 양왕(梁王)에게 피살되었다.
[주D-046]하(河) …… 것 : 배도가 조정에서 곧은 말을 잘 하였으므로, 그를 싫어하던 자가 많았다.
[주D-047]말 위에서 …… 얻으면 : 한 고조(漢高祖)가 숙손통(叔孫通)에게 하였던 말. 자기가 직접 말등에서 천하를 쟁취했다는 말이다.
[주D-048]천하 …… 일인바 : 임금이 신하의 충언을 듣지 않고 독재함에 반발한 말인데, 《사기(史記)》에 나온다.
[주D-049]한 자를 …… 것입니다 : 《맹자(孟子)》 등문공 하편에 나오는 구절.
[주D-050]오패(五霸) : 전국 때의 제환(齊桓)ㆍ진문(晉文)ㆍ진목(秦穆)ㆍ송양(宋襄)ㆍ초장(楚莊).
[주D-051]흑룡강 …… 것입니다 : 청 때에는 죄인을 흔히들 흑룡강 지방으로 귀양보냈으므로, 이를 꼬집은 말.
[주D-052]먼저 …… 것이지요 : 유방과 항적이 진(秦)에 쳐들어갈 때에,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가 그곳의 임금이 된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
[주D-053]문성장군 …… 것입니다 : 문성장군은 한 무제가 신선을 좋아하고 죽은 애인 이 부인(李夫人)을 연모하기에, 이 부인을 보여 준다고 술법으로 무제를 홀리다가 영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자이다. 뒤에 오리장군(五利將軍)이란 자가 역시 방술로 무제를 꾀면서 죽은 문성장군을 애도할 때에, 무제는 거짓으로 문성장군은 말의 간을 먹고 죽었다고 조롱하였다.
[주D-054]진상(陳相) : 전국 송의 학자. 진량(陳良)의 제자로서, 등(藤)에 갔다가 허행을 보고서 전에 배운 학문을 버리고 허행을 좇았다. 최초의 북학자(北學者).
[주D-055]이는 …… 삼사술(三駟術) : 전기(田基)라는 장수가 제 위왕(齊威王)과 경마를 하는데, 언제나 졌으므로 손무자에게 이기는 법을 물었을 때에, 손무자가 상ㆍ중ㆍ하급의 말 중에서 제일 나쁜 말을 먼저 내어놓는 법으로부터 재미없는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 내었다가, 중간에 중요한 이야기로 주의를 환기시킨 일종의 화술(話術).
[주D-056]궁중(宮中) …… 공격하라 : 이 말들은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 중에서 나온 구절.
[주D-057]그러나 …… 아닐까요 :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서, 사천 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한의 종실이며 유비와 동성인 유장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주D-058]유종(劉琮) : 유표의 아들. 유표가 죽은 뒤 유종이 형주를 조조에게 바쳤다.
[주D-059]그 당시의 …… 묻고 : 현덕은 조조와 영웅을 논하다가, 우레가 일자 수저를 땅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주D-060]급할 때는 …… 도망쳤으니 : 하비(下邳)의 전쟁에 패하여 두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도주한 것을 말한다.
[주D-061]선주(先主) : 유비(劉備)를 그의 아들 후주에 비겨서 선주라 하였다.
[주D-062]동림당(東林黨) : 명의 만력 연간에, 고헌성(顧憲成)이 고반룡(高攀龍)과 함께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맺은 유당(儒黨).
[주D-063]백금 …… 죄이겠습니까 : 백금은 주공의 아들. 주공은 어린 조카 성왕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자기의 아들 백금에게 매질하였다 한다.
[주D-064]한 가지 일 …… 것은 : 제갈량을 존경하여 유비까지 떠받들었다는 의미이다.
[주D-065]공명을 …… 것은 : 두보(杜甫)가 제갈량을 칭찬한 시구 중에서 나온 말.
[주D-066]옹치(雝齒) : 한 고조의 장수. 한 고조가 천하를 정하고 공신을 녹정할 때, 평소에 가장 미워하던 옹치를 제일 먼저 공신으로 봉하여 모든 장수들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켰다.
[주D-067]가 태부(賈太傅) : 가의(賈誼). 태부는 그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로 귀양갔었기 때문이다.
[주D-068]항우 …… 않았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고사.
[주D-069]종 유수(宗留守) : 송의 충신 종택(宗澤). 유수는 그가 동경(東京)의 유수로 있었을 때, 임금에게 하수를 건너자고 20여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듣지 않으므로 분개해서 병을 얻어 죽을 때에, “하수를 건너십시다.” 하고 세 번 고함을 쳤다 한다.
[주D-070]나도 …… 하겠다 : 《맹자》 만장편(萬章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
[주D-071]이탁오(李卓吾) : 명의 저명한 사상가 이지(李贄). 탁오는 자요, 처음 이름은 재지(載贄). 가려운 병을 얻어서 머리를 깎고 파직을 당하였으며, 남녀의 공학을 실시하였다.
[주D-072]쾌설(快說) : 그의 저서 《전가보(傳家寶)》 사집(四集) 백여 종 중에 있는 글인 듯싶다.
[주D-073]승국(勝國) : 현존한 나라의 직전에 있던 나라. 현존한 나라가 그를 이겼다는 뜻. 청이 명을 이를 때 하는 말.
[주D-074]하간헌왕(河間獻王)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유덕(劉德). 하간은 봉호요, 헌은 시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學)을 처음 제창하였다.
[주D-075]검문 …… 되었습니다 : 안록산의 난리에, 현종은 아들 숙종이 그 아버지도 모르게 임금이 되고, 현종을 퇴위시켜 감금하다시피 하며, 현종이 두통이 난다고 철사로 머리를 동여매고 실상 제명에 죽지 못한 반면에, 명 혜제는 그의 숙부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에게 위를 빼앗겼으나 오히려 제명에 죽었다는 의미이다. 원종(元宗)은 청 성조(淸聖祖) 현엽(玄燁)의 현(玄)자를 기휘하여 당 현종(唐玄宗)을 원종(元宗)으로 고쳤다.
[주D-076]장양제(張良娣) : 당(唐) 숙종(肅宗)의 황후. 양제는 봉호. 장씨가 이보국을 처치할 것을 태자인 대종(代宗)에게 부탁한 것이 탄로나서, 숙종이 죽은 뒤에 이보국이 장씨를 때려죽였다.
[주D-077]천순 …… 일입니다 : 북방족과 전쟁하는 중에, 황제의 위를 차지한 아우 경제(景帝)를 폐하고 8년 만에 다시 황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명은 왕통의 명분이 바로섰음을 증명한다는 의미이다.
[주D-078]술잔을 …… 욕 : 진(晉)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이 유요(劉曜)에게 항복하여, 청의(靑衣)를 입고 술잔을 돌렸다.
[주D-079]동쪽으로 …… 것은 : 《맹자》 고자(告子)에 나오는 구절로서, 맹자가 고자(告子)와 문답하였던 말.
[주D-080]고공(古公) : 주 문왕의 조부 단보(亶父). 고공은 봉호.
[주D-081]이것은 …… 않습니다 : 태왕이 맏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문왕을 위하여 끝의 아들에게 위를 전했기 때문에, 태백은 아버지의 처리에 불평을 품은 듯이 아우 하나를 데리고 멀리 출가를 한 부자 사이의 충돌이 있는 듯함이라는 말.
[주D-082]태백 …… 것이며 : 맏아들인 자기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는 것.
[주D-083]태왕 …… 것입니다 : 왕위를 계승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것.
[주D-084]형(荊) …… 양(楊) : 중국 고대 행정 구역의 9주(州) 중에 5주의 이름들이다.
[주D-085]우(虞) …… 것입니다 : 주 문왕 때에, 우와 예라는 두 나라가 땅 시비를 하여 판결을 하고자 문왕을 찾아갔다가, 주(周)에서는 백성들이 밭두렁을 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일을 보고, 자신들이 부끄러워서 되돌아와 서로 다투던 땅을 양보하였다고 전한다.
[주D-086]뱁새의 둥지 : 뱁새가 숲 속에 둥지를 지어도 고작 가지 하나를 차지하는 정도라고 한 장자(莊子)의 말을 인용한 것임.
[주D-087]하수를 마시는 물쥐 : 물쥐가 하수를 마셔봤자 고작 작은 배를 채우는 정도라고 한 장자의 말을 인용한 것임.
[주D-088]점검이 …… 것이며 : 송 태조 조광윤이 천자가 되기 전에 점검(點檢)이라는 군직으로 군막 속에 누워 술에 취해서 자는 동안에 부하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조광윤은 술에 취해서 이 일을 전연 몰랐다 함을 풍자한 것이다.
[주D-089]침대 …… 것입니다 : 조광윤이 임금이 된 뒤 아직 서북 변방을 평정하지 못한 것을, 자기의 침대 곁에 남의 소리를 듣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조보(趙普)와 이야기하는 중에 말했다.
[주D-090]구석(九錫) : 국가의 최고 훈업의 표창으로 아홉 가지의 선물을 내리는 것.
[주D-091]적의(翟義)ㆍ진풍(陳豐) : 두 사람은 한(漢)의 장수로서 왕망이 모반할 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주D-092]근세에 …… 같습니다 : 모두 주공과 공자를 떠멘다는 의미이다.
[주D-093]위징(魏徵) …… 간사한 인물 : 위징은 본시 당 태종의 형인 건성(建成)의 부하로서 후일의 태종이 된 이세민을 죽여 없애라고까지 권고한 일이 있었으나, 뒤에 당 태종이 황제가 되자 이 원한을 덮어 두고 그를 등용하여 유일의 협조자가 되었다.
[주D-094]너 관중 …… 아니하였는가 : 관중은 애초에 제 환공의 아우 규(糾)의 부하로서, 제 환공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그 뒤 규가 죽은 뒤에 도리어 제 환공을 도와서 대업을 이룩하였다.
[주D-095]어찌 …… 되리요 : 공자가 관중이 공자 규와 함께 죽지 않았음을 옳다고 변명하여 한 말.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주D-096]하후영녀 …… 것입니다 : 조위(曹魏) 때 열녀(烈女). 하후는 성이요, 영녀는 이름. 개가하지 않기 위하여 처음에는 머리를 깎고, 다음에는 두 귀를 베었다.
[주D-097]《제범(帝範)》 : 당 태종이 지은 책으로 제왕들이 지킬 도리를 서술하였다.
[주D-098]때가 …… 보내고 : 등왕각은 강서성에 있는 유명한 정각. 당의 문학가 왕발(王勃)이 등왕각에서 열리는 문회(文會)에 닿기가 어려웠을 때 바람이 배를 휘몰아서 마당(馬當)에서부터 남창(南昌)까지 하루에 도달하여, ‘등왕각시서(騰王閣詩序)’를 짓고서 이름을 드날렸다.
[주D-099]운이 …… 친다네 : 범중엄이 요주(饒州)에 있을 때에 어떤 서생 하나가 가난에 시달려서 천복사 비문을 박아서 팔려고 하니, 범중엄이 천본을 박을 종이와 먹을 준비하였는데, 하루저녁에 벼락이 천복비를 쳐서 부수었다.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 나온 이야기.
[주D-100]왕패(王霸) :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수. 자는 원백(元泊). 어떤 본에는 후패(侯霸)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주D-101]하늘은 …… 따라 주었고 : 광무제가 왕랑(王郞)의 군사를 피하여 호타하(滬沱河)로 향할 때 왕패로 하여금 물을 건널 수 있겠는가를 보게 하였다. 왕패는 거짓으로 얼음이 얼었다 하였더니 군사가 그곳에 이르자 얼음이 과연 얼었으며, 건너자 곧 풀어졌다 하였다.
[주D-102]나라가 …… 들어맞았습니다 : 장세걸이 몽고군에게 몰려 남해로 쫓겨 가면서도 송의 왕통을 유지하고자 혈육을 두 번이나 추대했으나 다 죽고, 세걸은 필경 경애(瓊崖)로 도망가는 길에 또 모진 태풍을 만나 하늘을 향하여 분향하면서 외치기를, 또 한 번 더 조씨의 왕통을 세워 보겠는데 하늘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거든 내가 탄 배를 엎어달라고 했더니, 말대로 바람이 당장에 배를 엎어버려서 세걸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한다.
[주D-103]세상에서 …… 울었습니다 : 맹상군이 진(秦)에 갔을 때 소왕(昭王)이 죽일 것을 알고 밤중에 도망하여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으나, 관문을 열 시간이 안 되었으므로 그의 문객 하나가 닭울음 소리를 내자 여러 닭이 다 울어서 관문이 열렸다 한다.
[주D-104]천하에 …… 않았습니다 : 송말에 원(元)의 군사와 싸울 때 전당의 조수가 뜻밖에 사흘 동안이나 들지 않아서 송에게 불리하였다.
[주D-105]성경(盛京) …… 물리쳤습니다 : 이자성 때문에 자살한 숭정 황제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
[주D-106]예친왕 …… 책망하며 : 숭정제를 자살하게 한 이자성을 토벌치 않았다는 의미다.
[주D-107]치효(鴟梟)의 시 : 《시경(詩經)》의 장명(章名). 주공이 주의 동쪽 나라에 있을 때, 모반을 한다는 풍문을 지어낸 자들이 있으매, 주공 자신이 치효라는 새에 의탁하여 성왕에 대한 충성심을 읊은 것이다.
[주D-108]금등(金縢)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무왕이 병이 들었을 때 주공은 자기 몸을 희생하였다고 제관이 되어 축문을 지어 읽고는 그것을 금등으로 된 궤짝 속에 간직해 두었더니, 그 뒤에 주공을 모함하는 소문이 돌자 동도에 피신해 있을 동안 성왕은 궤짝 속에 든 축문을 내어 읽어 보고, 주공의 애매함을 알고서 주공을 다시 맞아들였다.
[주D-109]이신비 …… 것입니다 : 이신비는 본시 송 진종 황후의 시비로서 진종의 꾀임을 받아 아들을 낳은 것이 곧 인종이었으므로 황후는 그를 자기의 아들로 삼고, 이신비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하여 비빈 중에 두었더니 이신비가 급질로 죽자, 이 내용을 안 어느 신하가 황후가 모르게 황후의 예식으로 수은 염습을 하였던바, 황후가 죽은 뒤에 인종은 그가 자기의 생모임을 알고 통곡을 하면서 관을 쪼개어 보니 산 사람같이 황후 복색을 하고 있었다 하였다.
[주D-110]화림 …… 것입니까 : 진 혜제(晉惠帝)가 화림원(華林園)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고 좌우에서 이 개구리의 울음이 관을 위한 것인가 사를 위한 것인가 하였을 때, 시중 가윤(賈胤)이 대답하기를, 관지에 있는 놈은 관을 위할 것이요, 사지에 있는 놈은 사를 위해 울 것입니다 하였다.
[주D-111]모든 …… 소씨(昭氏)를 : 전씨는 제(齊)의 이름 높은 성이요, 굴씨와 소씨는 초(楚)의 이름 높은 성이다.
[주D-112]오량(吳亮) : 네 사람의 같은 이름이 있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주D-113]혼자 …… 것 : 젊은 환관과 추잡한 생활을 한 한 고조(漢高祖)를 가리킨 것이다.
[주D-114]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 한 고조가 자기 출신 고향인 풍패(豐沛)에 갔을 때 부른 대풍가(大風歌)의 한 구절.
[주D-115]벽양 …… 일이요 : 심이기(審食其)의 봉호. 그는 미남자로서 한 고조의 총애를 받고 여후(呂后)와 불의의 관계가 있었다 한다.
[주D-116]인체 …… 노릇인즉 : 여후가 한 고조의 애희 척부인(戚夫人)을 질투하여 고조가 죽은 뒤에 그의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빼며 귀를 벤 뒤 벙어리를 만들어 뒷간에 두고 사람돼지라 하였다.
[주D-117]박희 …… 미인이요 : 위왕 표가 포로가 되자 한 고조는 그의 애희 박희를 빼앗아서 문제(文帝)를 낳았다.
[주D-118]효 경제 …… 계집이요 : 왕 황후는 애초에 연왕(燕王) 장다(藏茶)의 손녀인 장아(藏兒)의 맏딸로서 장아의 첫 남편인 왕중(王仲)의 딸인데, 처음에는 금왕손에게 시집을 보냈다가 장아가 점을 치니 그 딸이 귀하게 되겠다 하여 금왕손으로부터 빼앗아 궁녀로 바쳐서 경제의 왕후까지 되었다 한다.
[주D-119]음려화 …… 일들이 : 후한 광무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음려화의 인물 잘난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여자를 얻는다면 음려화를 얻을 것이요, 벼슬을 할진댄 집금오(執金吾)가 되련다고 맹세를 하였다가 뒤에 음려화를 취했다.
[주D-120]관저(關雎) : 《시경(詩經)》의 장명(章名). 주희의 주석에 의하면 어진 후비의 덕을 찬송한 노래라 하였다.
[주D-121]이강(釐降) : 요(堯)의 두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낸 고사. ‘이’는 행장을 꾸림이요, ‘강’은 하가(下嫁)의 뜻이다.
[주D-122]백등 …… 계교 : 한 고조가 산서성에 있는 백등이란 산에서 흉노(匈奴) 묵돌(冒頓)에게 칠일 동안을 포위당했을 때 모사 진평(陳平)의 말을 좇아 묵돌에게 미인계를 써서 포위에서 벗어났다는 기사가 있으나 그 내용은 창피해서 한의 역사에 밝혀지지 않았다.
[주D-123]그 당시 …… 몰랐겠지요 : 옛날 전쟁에 져서 항복할 때는 죽은 사람의 시늉을 차리던 의식.
[주D-124]강거 …… 힐리(頡利) : 강거와 힐리는 신강성의 북부에 있던 고대 흉노족의 나라 이름.
[주D-125]계륵(鷄肋) : 닭의 뼈. 버리면 아깝고 먹어도 맛이 없다. 조위(曹魏) 때 문학가 양수(楊脩)의 말이다.
[주D-126]강향(降香) : 황제가 봉산(封山)할 때에 향을 하사하는 의식.
[주D-127]좌중이 …… 하였다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가하였다.
[주D-128]기이한 …… 못하는데 : 군자는 원숭이와 학으로 변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로 변하였다는 말. 《포박자(抱朴子)》에 나오는 말.
[주D-129]동쪽을 …… 치고 : 간사한 꾀를 쓴다는 말. 《通典 兵6》
[주D-130]엄계우옥(罨溪雨屋) : 엄계의 비가 내리는 서옥(書屋). 엄계는 곧 연암에 있는 엄화계(罨畫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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