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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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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1. 가을 8 15일 신유(辛酉)

2. 16일 임술(壬戌)

3. 17일 계해(癸亥)

4. 18일 갑자(甲子)

5. 19일 을축(乙丑)

6. 20일 병인(丙寅)

 

 

 

가을 8 15일 신유(辛酉)

 

 

날씨가 맑고 잠깐 서늘하였다.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되,

 

이제 우리의 사정은 마땅히 연경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나, 예부에서는 우리나라 사신을 경유하지 않고 가만히 정문(呈文)의 사연을 고쳤다니, 이는 비단 눈앞의 일이 해괴할 뿐 아니라, 이를 그대로 두고 변명하지 않는다면 장래의 폐단이 클 것인즉, 마땅히 다시 예부에 글을 제출하여 그들이 몰래 고친 것을 밝힌 연후에 길을 떠나야겠다.”

하고는, 곧 역관에게 시켜서 예부에 글을 제출하니,제독(提督)이 크게 두려워했는데, 대개 덕상서(德尙書)에게 먼저 통했던 때문이다. 상서 등도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위협을 더하되,

 

이 일에 대한 허물을 장차 우리 예부에다 넘기고자 하는 거냐. 예부에서 죄를 얻는다면 너희 사신인들 좋겠는가. 그리고 너희들 전주(轉奏)한 정문이야말로 사연이 모호하여 전연 성의를 표한 실상이 없었으나, 내 실로 너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도로 꾸며 진달해서 그 영광스럽고 감격한 뜻을 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도리어 이렇게 한단 말이냐. 이는 실로 제독의 과오가 더 크겠지.”

하고는, 정문을 떼어 보지도 않고 물리쳤다. 사신이 그제야 제독을 맞이하여 예부에 대한 모든 사정을 상세히 물은즉, 그 이야기가 몹시 장황해서 알아듣기 어려워 한참 동안을 머엉하고만 말았을 뿐이다. 그리고 예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곧 길 떠날 것을 재촉하되,

 

사신 일행의 떠나는 시간을 적어서 곧 위에다 아뢰겠다.”

하니, 이다지 떠나기를 재촉함은 대개 다시 글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다. 이에 대한 일은 행재잡록(行在雜錄) 중에 상세히 보인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길을 떠났다. 해가 벌써 점심나절이 지났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저 뽕나무 아래에 사흘 밤을 묵은 일도 오히려 추억에 남았다는데, 하물며 나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님을 모시고 엿새 밤을 지난 것임에랴. 또 더군다나 그 자고 나온 곳이 신선하고 화려하여 저절로 잊히지 않는다. 내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進士) 하나도 이루지 못했은즉, 비록 국학(國學)에 몸을 수양하고자 한들 얻을 수 없음도 사실이거늘,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머나먼 변새 밖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어 마치 나에게만 고유한 일인 것같이 생각되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선비 중에 능히 멀리 이 중국의 한복판에서 놀아 본 이로서 신라의 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이나 고려의 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과 같은 이도 비록 서촉(西蜀)강남(江南)의 땅을 두루 밟았으나, 새북(塞北)에야말로 이를 길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이로부터 천백년(千百年) 뒤일지라도 몇 사람이나 다시 이곳에 걸음을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는데, 나의 이번 걸음에는 기정(沂鄭)영빈(潁濱)의 수레 자국과 말 발자국이 모두 선하게 눈앞에 벌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아무런 질정(質定)된 일이 없음이 어찌 이러할 줄이야 알았으리오.

광인점(廣仁店)삼분구(三坌口)를 거쳐 쌍탑산(雙塔山)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한 번 바라본즉, 참으로 기절(奇絶)하기 짝이 없다. 바위들은 결과 빛이 마치 우리나라 동선관(洞仙館)의 사인암(舍人巖 바위 이름)과 같고, 높이 솟은 탑의 모습은 금강산(金剛山)의 증명탑(證明塔)과 같이 뾰족하게 둘이 마주 섰는데, 아래위의 넓이가 똑같아서 남에게 의지할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짝짐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는 채, 정직 단엄하고 교려 웅특(巧麗雄特)하여 햇빛과 구름 기운이 마치 비단처럼 찬란할 뿐이다. 난하(灤河)를 건너서 하둔(河屯)에서 묵었다. 이날 모두 4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C-001]가을 8 : ‘수택본에는 이 한 구절이 탈락되었다.

[D-001]저 뽕나무 ……  : 불교에서 인연설을 설명할 때에 쓰는 고사.

[D-002]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 : 우리나라 한문학의 문을 연 초조(初祖). 고운은 호요, 치원은 이름.

[D-003]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 : 고려의 저명한 정치가문학가. 익재는 호요, 제현은 이름이며, 자는 중사(仲思). 그의 시와 사()는 우리나라 몇천 년 이래의 제일이다.

[D-004]동선관(洞仙館) : 황해도 동선령(洞仙嶺)에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6일 임술(壬戌)

 

 

개다.

아침에 일찍 길을 떠나 왕가영(王家營)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黃舖嶺)을 지날 제, 나이 스무 남은 살 된 어떤 귀족 청년 하나가 붉은 보석과 푸른 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검은 말을 탄 채 달려가는데, 그 앞에 한 사람이 가고 뒤에 따른 자가 기병 30여 명이나 되며, 모두들 금안(金鞍)준마(駿馬)에 의관의 차림이 선명하고도 화려하고, 혹은 화살을 지기도 하고, 혹은 조총(鳥銃)을 메기도 하고, 혹은 다창(茶鎗)을 받들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로를 들고서 번개처럼 달리면서도 벽제(辟除) 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데, 다만 말굽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 구종군에게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친 조카 예왕(豫王)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뒤에는 태평거가 따라가는데, 힘센 노새 세 필로 멍에를 짓고는 초록빛 천으로 겉을 가리고 사면엔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며, 그 위에는 파란 실그물로 얽고 네 모서리에는 술을 드리웠다. 대체 귀족들이 탄 가마나 수레는 모두 이런 것들로 꾸며서 그 계급을 표시하였다. 그 수레 속은 마치 보일 듯하나 뵈지는 않고, 다만 여인의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얼마 아니 되어 노새가 멎고 오줌을 흘리는 순간, 우리의 말도 오줌을 눈다. 수레 속으로부터 여인이 북쪽 차창을 열고 다투어 가며 얼굴을 내미는데, 아름답게 뭉친 머리에는 구름이 얽힌 듯, 귀를 꿴 구슬들은 별이 흔들리듯 노란꽃과 파란 줄구슬이 꿈인 듯이 얽히어, 예쁘고도 화려함이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와 같은데, 잠자코 창을 닫고 선뜻 가버린다. 그들은 모두 셋인데, 예왕을 모시는 궁녀(宮女)라 한다.마권자(馬圈子)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 날에는 8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7일 계해(癸亥)

 

 

개고 따뜻하다.

새벽에 길을 떠나 청석령(靑石嶺)을 지날 제, 때마침 황제가 계주(薊州)동릉(東陵)에 거둥하게 되었으므로, 벌써 도로와 교량을 닦되 한가운데에는 치도(馳道)를 쌓고, 각 고을에서 미리 역군을 징발하여 높은 데는 깎고 깊은 곳은 메우되, 맷돌로 다지고 흙손으로 바른 듯 마치 베[]를 펴놓은 듯싶고, 표목을 세웠으되 조금 굽은 것도 없고 기운 것도 없으며, 치도의 넓이는 두 길이요 좌우의 협로(夾路)는 각기 한 길 남짓 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주 나라 가는 길이 숫돌처럼 바르구나 / 周道如砥

라 하였더니, 이제 이 길이 숫돌처럼 되었으니 그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흙을 메고 물을 지는 이들이 가는 곳마다 떼를 이루어서, 허물어지면 곧 흙으로 보수하되, 한 번 말굽이 지나간 곳이면 벌써 흙손질하고는, 나무를 새끼로 어긋나게 묶어 치도 위로 다니는 자들을 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무를 거꾸러뜨리며 놋줄을 끊어 버리고는 가버린다. 나는 곧 마부에게 타일러 치도 밑으로 가게 했다. 이는 감히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마는, 역시 차마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길 한편에는 반드시 두어 걸음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높이는 어깨에 닿을 정도이고, 넓이는 대략 여섯 자쯤 되는데, 마치 성()에 치첩(雉堞)이 있는 듯싶으며, 교량치고는 난간이 없는 게 없고, 돌난간에는 천록(天祿 상상적으로 생긴 짐승)이나 사자 모양을 앉혔는데, 모두들 입을 열어 생동하는 듯싶고, 나무 난간인즉 단청이 눈부시다. 물이 넓은 곳엔 나무쪽을 짜서 광주리처럼 만들되 둘레는 거의 한 칸, 길이는 한 길쯤 되게 해서, 물가의 자갈을 채워 물속에 굳게 꽂아서 다리 기둥을 만들었고, 난하(灤河)나 조하(潮河)에는 모두 수십 척의 큰 배를 띄워서 부교(浮橋)로 삼았다.

아침밥을 삼간방(三間房)에서 먹을 제 우리 일행이 점방에 들렀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예왕(豫王)이 관왕묘에 들렀으므로, 우리가 든 점방과 아래위 사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점방에 흩어져 떡고기차 따위들을 사서 먹곤 한다. 내가 우연히 관왕묘를 구경하기 위하여 걸어서 들어간즉, 문에는 지키는 자도 없이 뜰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아무런 사람 하나도 없이 괴괴하였다. 나는 애당초 예왕이 그 속에 머무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뜰 가운데에는 석류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낮은 솔은 용이 서린 듯이 굼틀굼틀한다. 내가 그 곳을 바장이며 두루 구경하고 섬돌을 디디고 마루턱으로 오르려는 즈음에, 어떤 한 아름다운 청년이 모자를 벗은 채 맨머리로 문밖으로 쫓아나와 나를 보고 웃으며 맞이하되,

 

씬쿠[辛苦].”

하니, 이 말은 대체로 나를 위로하는 뜻이다. 나는,

 

하오아[好阿].”

하고 답하였다. 이는 곧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부(安否)를 묻는 인사의 말이다.

그 섬돌 위에는 아로새긴 난간이 있고, 난간 아래에는 교의 둘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붉은 탁자를 놓고는, 나에게 줘이줘(坐着)”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앉기를 청함이다. 혹은 칭춰(請坐) 칭줘라고도 하고, 혹은 줘저 줘저라고 거듭 부르기도 하려니와, “() 칭 칭을 잇달아 내기도 하니, 이는 정중하고도 간곡함을 표함이다. 그리고 길가에 오면서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마다 주인들은 모두 그렇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는 대개 손님을 접대하는 예식이다. 그리고 그 청년이 모자를 벗고 사복(私服)을 입었으므로, 나는 애초에 그가 주승(主僧)이 아닌가 하였는데, 급기야 상세히 살펴본즉, 그가 곧 예왕인 듯하다. 나는 그래도 아는 척하지 않고 심상하게 봐 버리고, 그도 역시 교만하고 고귀한 서슬을 보이지 않으나, 붉은 빛이 얼굴에 부풀어올랐음을 보아서 아침 술을 많이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곧 손수 술 두 잔을 따라서 나에게 권한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기울였다. 그는 나더러,

 

만주 말을 할 줄 아셔요.”

하고 묻기에, 나는,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별안간 난간 밑을 향해서 한번 토하자, 술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진다. 문안을 돌아보며,

 

량아(凉阿 시원하다).”

한다. 웬 늙은 환시[老閹] 하나가 방안에서 담비 갖옷[貂裘] 한 벌을 갖고 나오더니, 손으로 나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하기에, 나는 곧 일어서서 나오며 난간 머리를 돌아본즉, 그는 오히려 난간에 비켜 앉았다. 그의 행동은 몹시 경박하고 얼굴은 유달리 창백하여, 조금도 위엄이 없이 마치 시정배의 아들 같았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떠나서 몇십 리를 나아갔다. 뒤에 백여 명이나 되는 말탄 사냥꾼이 멀리 산 밑을 바라보며 달린다. 독수리를 안은 자 10여 명이 산골에 흩어져 갔다. 한 사람은 큰 독수리를 안았는데, 독수리의 다리는 마치 사냥개 뒷다리처럼 살지고, 누런 비늘이 정강이에 번쩍인다. 검은 가죽으로 머리를 싸매고 눈을 가렸으며, 그 남은 것들도 모두 눈을 가렸으니, 이는 그것들이 행여나 물건이 눈에 뜨이면 함부로 퍼덕이다가 다리에 생채기를 내거나 또는 위협을 느낄까 보아서 그런 것이고, 또는 그렇게 해야만 눈 정기를 기르는 동시에 사나운 성질을 그대로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아서 담뱃대를 털어 담뱃불을 붙였다. 그 중 활과 살을 몸에 두른 자 하나가 역시 말에서 내려 담배를 넣더니 불을 청한다. 나는 그제야 그에게 말을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조카 예왕께옵서, 열다섯 살 되는 황손과 또 열한 살 되는 황손 둘을 데리고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사냥하시는 것이옵니다.”

하기에, 나는,

 

그럼, 소득이 얼마나 되우.”

하였더니, 그는,

 

사흘 동안에 겨우 독수리 한 마리를 얻었답니다.”

한다. 그 즈음에 별안간 옥수숫대 꺾이는 소리가 나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말 탄 이 하나가 나는 듯이 밭 가운데로부터 달려 나오는데, 화살을 힘껏 버틴 채 안장 위에 엎드려 달리되 그의 희디흰 얼굴은 눈인양 눈부신다. 담배 태우던 자가 그를 가리키며,

 

저이가 열한 살에 드는 황손입니다.”

한다.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쫓아 달렸는데, 토끼는 달리다가 모래 위에 넘어져 누워서 네 발을 모은다. 말을 빨리 달려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토끼는 다시 일어나 산 밑으로 달음질친다. 그제야 백여 명이 달려가 에워싸니, 아득한 평원에 티끌이 공중을 가리고 총소리가 진동하더니, 별안간 에워쌌던 것을 풀고 가버릴 제 티끌 그림자 속에 일단(一團)의 무엇이 감돌더니 아득히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토끼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말 달리는 법에 있어서는 어른이나 아이를 불구하고 모두 타고난 천재들이다.

대개 책문으로부터 연산관(連山關)에 이르기까지 높은 뫼와 험한 재가 많고 숲이 울밀하여 가끔 새들이 지저귀더니, 요동에서 연경까지 2천 리 사이에는, 공중에는 나는 새가 끊이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장마지고 날씨가 찌는 듯하나, 벌레나 뱀이 숲속에 다니는 것도 보지 못하였거니와, 개구리 소리도, 두꺼비 뛰노는 것도 보이지 않으며, 벼가 한창 누럴 때이지만 참새 한 마리가 내리지 않고, 물가 모래톱 근방에도 물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이제묘(夷齊廟) 앞 난하(灤河)에서 비로소 두 쌍의 갈매기를 보았다. 그리고 까마귀까치솔개 따위는 흔히 도시 중에 모여듦에도 불구하고, 이 연경에선 역시 드물게 보이니 결코 우리나라 그것들의 공중을 가리고 나는 것과는 같지 않음을 느꼈다. 애초에는 이러한 변새의 수렵(狩獵) 지역에는 반드시 금수가 많으리라 생각하였더니, 이제 이곳의 모든 산은 갈수록 초목이 없고 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서, 비로소 호인들이 사냥으로써 생명을 유지함이 이와 같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어느 곳에서 사냥을 하겠는지, 짐승들을 이렇게 절종시켰음은 이치에 맞는 일인지, 또는 짐승들이 별도로 도피할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겠다.

강희 황제가 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오대산(五臺山)에 놀러 갔을 때 범이 숲속에서 뛰어나오매, 황제가 친히 쏘아서 죽였다. 그 때 산서(山西) 도어사(都御史) 목이새(穆爾賽)와 안찰사(按察使) 고이강(庫爾康)이 황제에게 여쭈어 그 땅 이름을 석호천(射虎川)이라 하고, 범의 가죽은 대문수원(大文殊院)에 간직하여 이제까지 전하고 있으며, 그는 또 친히 화살 서른 개를 쏘아서 토끼 스물아홉 마리를 잡았고, 그가 송정(松亭)에서 사냥할 때에 큰 범 세 마리를 쏘아 죽였는데, 모두들 그림을 그려서 민간에서 서로 팔고 사니, 이는 실로 신기한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여러 공자(公子)들이 사냥할 때 재빨리 달리는 것을 구경한즉, 대체로 그들의 가법(家法)이 그러함을 알겠다. 만일 그 때 옥수수밭 속에서 범 한 마리가 뛰어나왔더라면, 비단 그가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 리의 길을 멀리 온 나로 하여금 한 번 유쾌하게 했을 것인데, 이제 그렇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성 밖에 다다르니, 뫼에 잇달아서 성을 쌓았으므로 높낮이와 굽이가 생겼고 그 요충지(要衝地)에는 속이 텅 빈 돈대를 세웠는데, 높이는 예닐곱 발, 너비는 열네댓 발이나 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요충지에는 4, 50걸음 만에 돈대가 하나씩 있고, 조용한 곳에는 2백 걸음 만에 돈대 하나씩을 두었으며, 돈대마다 백총(百總 현대의 소위(少尉)에 해당)이 지키고, 열 돈대를 천총(千總 중위에 해당)이 지키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1, 2() 사이마다 방울 소리가 들린다. 만일 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좌우에서 횃불을 들어 서로 나누어 전하매, 수백 리 사이에도 모두 재빨리 알아채고 예비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척 남궁(戚南宮)이 끼쳐 준 책략이라 한다.

옛날 육국(六國) 때에도 역시 장성이 있었다. ()의 이목(李牧)이 흉노(匈奴)를 크게 깨뜨려 10여만 명의 기병을 죽이고 첨람(襜襤)을 전멸시키며, 임호(林胡)누번(樓煩) 등을 깨뜨리고 장성을 쌓되, ()와 음산(陰山)으로부터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 문을 만들어 운중(雲中)안문(雁門)대군(代郡)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고, ()은 의거(義渠 감숙성 지방에 있던 부족)를 멸한 뒤에 비로소 농서(隴西)북지(北地)상군(上郡) 등지에다 장성을 쌓아서 호족을 막았으며, ()은 또 동호(東胡)를 깨뜨려서 천 리를 넓히고 역시 장성을 쌓되,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동(遼東)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다. 그리하여 진조 세 나라가 모두 저 세 곳에 새문을 둔 지가 오래고, 각기 장성을 쌓았으되 그 실에 있어서는 서로 잇달리어 북서에 뻗은 것이 벌써 만 리나 되었더니, ()이 천하를 통일하고 천자가 되자 곧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되 지세를 따라 험한 곳을 이용하여 변새지를 눌러서, 임조(臨洮)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 리에 뻗었으니, 생각하건대 몽염이 옛성을 모두 증수(增修)한 것이었던가. 또는 연조의 옛 성터에다 새로 쌓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겠다. 몽염의 말에,

 

이 성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까지 잇달렸다.”

하였으니, 이 성이 만여 리에 뻗은 그 사이에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겠고, 또 사마천(司馬遷)이 북변(北邊)에 가서 몽염이 쌓은 장성을 보매 그 역정(驛亭)과 돈대가 모두 산을 끊고 골을 메운 것을 보고 그가 가벼이 백성의 힘을 허비하였음을 책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성은 정말 몽염이 쌓은 것으로, 조의 옛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으며, 벽돌은 모두 한 기계에서 찍어 낸 것으로서 두껍고 얇음이나 크고 작은 것이 조금도 차이가 없고, 성 밑 돈대는 돌을 다듬어서 쌓았으되 땅 밑에 포갠 것이 다섯이요, 땅 위에 포갠 것이 셋이라 한다. 그 돈대는 가끔 무너진 곳이 있었다. 그 높이는 댓 길쯤 되나, 흙을 섞지 않고 오로지 벽돌에 석회를 발랐는데, 종이를 가린 듯이 얇아서, 겨우 벽돌을 이어붙인 것이 마치 나무에 아교를 합친 듯싶다. 성의 안팎이 대패로 깎은 듯하되, 아래는 넓고 위는 좁아서 비록 대포(大礮)와 충차(衝車)라도 갑자기 깨뜨리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대개 그 바깥 벽돌은 비록 이지러졌으나, 그 속에 쌓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담결핵(痰結核)을 다스리는 데에는 천년 묵은 석회에다가 초를 타서 떡을 만들어 붙이곤 한다. 묵고 오래 된 석회로는 장성이 으뜸이었으므로, 으레 사신이 오가는 편에 이를 구했던 것이다. 내 일찍이 젊었을 때 주먹만큼 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고 결코 그 참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겠다. 길가의 모든 성의 제도는 모두들 장성과 다름없으니, 어디에서 주먹처럼 큰 석회를 얻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일부러 새외로 멀리 돌아서 구득하였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길가의 무너진 성 밑을 지나다가 주운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고북구(古北口)에 들렀다. 내 저번에 새문을 나갈 때에는 마침 밤이 깊어서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와 반대로 대낮이므로 수역과 더불어 잠깐 모래 벌판에 쉬다가 곧 첫째 관()으로 들어섰다. 말 수천 필이 관문이 메도록 서 있고, 둘째 관문을 들어갔더니 군졸 4, 50명이 칼을 차고 삑 둘러섰고, 또 두 사람이 의자를 맞대고 앉았다. 나는 수역과 함께 말에서 내려 조용히 걸었다. 그 둘은 기쁜 얼굴로 재빨리 앞에 와서 몸을 굽히며 읍하고 위안의 말을 간곡히 보내는데, 그 하나는 머리에 수정관(水晶冠)을 썼고, 또 하나는 산호관(珊瑚冠)을 썼다. 그들은 모두 수비하는 참장(叅將)이라 한다.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945)에 거란주(契丹主) 덕광(德光)이 침입하여 호북구(虎北口)로 돌아오다가, ()이 태주(泰州)를 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군사를 통틀어서 남쪽으로 내려갈 제, 거란주가 수레 속에서 철요기(鐵鷂騎)의 기병(騎兵)에게 명령을 하고 말에서 내려 진군(晉軍)의 녹각(鹿角)을 빼고 들어갔었다. 대개 장성(長城)을 둘러 구()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 무려 몇백이나 되었는데, 태원(太原 산서성에 있다) 분수(汾水)의 북에 역시 호북구라는 지명이 있으니, 그때 덕광(德光)의 군사가 기양(祈陽)으로부터 북으로 향해 갔던 바, 그 길이 아니고 보니 유주(幽州)단주(檀州)의 호북이 곧 이 관()이리라 생각된다. ()의 선조에 호()라는 휘()가 있으므로, 당에서 호()를 고쳐 고북구라 하였다. 송인(宋人)이 지은 사료행정록(使遼行程錄)에 이르기를,

 

단주(檀州)로부터 북으로 80리를 지나고, 거기에서 또 80리를 가서 호북구관(虎北口關)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단주의 고북구 역시 호북구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 선화(宣和) 3(1121)에 금인(金人)이 요병을 고북구에서 깨뜨렸고, 가정(嘉定) 2(1209)에 몽고(蒙古)가 금()에 침입하여 고북구에 이르매 금인은 물러가서 거용관(居庸關)을 지켰으며, ()의 치화(致和) 원년(1328)에 태정제(泰定帝 야손철목이(也孫鐵木爾))의 아들 아속길팔(阿速吉八)이 상도(上都 찰합이(察哈爾)다륜현(多倫縣))에서 임금이 되어 군대를 보냈는데, ()를 나누어 연()의 철첩목아(鐵帖木兒)와 대도(大都 북경)에서 싸울 때에 탈탈목아(脫脫木兒)는 고북구를 지키다가 상도의 군대와 더불어 의흥(宜興)에서 싸웠고, ()의 홍무(洪武) 22(1389)에 연왕(燕王)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고북구로 나가서 내안불화(乃顔不花)를 이도(迤都)에서 쳤고, 영락(永樂) 8(1410)에는 고북구 소관(小關)의 어귀와 대관(大關)의 바깥 문을 메워서 겨우 사람 하나 말 한 필을 용납하게 되었다는데, 이제 이 관은 다섯 겹이나 되는 문이 있으나 아무런 메운 흔적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대개 이 관은 천고의 전쟁을 치른 마당이므로, 천하가 한 번 어지러우면 곧 백골(白骨)이 뫼처럼 포개어지게 되니, 이야말로 진실로 이른바 호북구였다. 이제 태평이 계속된 지 1백여 년이나 되어서 네 경내(境內)에 병혁(兵革)의 어지러움을 보지 못하였을뿐더러, 삼과 뽕나무가 빽빽이 서 있으며, 개와 닭 울음이 멀리 들리어, 이와 같이 풍족한 휴양(休養)과 생식(生息)이야말로 한()() 이후로는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그들은 무슨 덕화(德化)를 베풀었기에 이 경지에 이르렀을까. 그러나 그 높음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허물어짐은 이치가 으레 그러한 것인만큼, 이곳 백성이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은즉, 아아, 앞으로 다가올 토붕(土崩)와해(瓦解)도 걱정이 아닐 수 없구려.

이 관()은 대개 뫼 위에 자리잡아, 비록 수많은 묏봉우리가 삥 둘렀으나 큰 사막이 오히려 눈앞에 보인다. 금사(金史)를 상고하면,

 

정우(貞祐) 2(1214)에 물이 넘쳐 흘러, 고북구의 쇠로 만든 관문을 허물어 버렸다.”

하였으니, 대개 되놈들이 중국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의 나라가 상류(上流)에 웅거하여 형세가 병 목을 거꾸로 달아 놓은 것처럼 된 까닭이다. 내 어렸을 때에 어떤 어른이 백곤(伯鯀)의 홍수(洪水)를 메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변증(辨證)한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중국에 커다란 근심 두 가지가 있으니, 곧 하()와 호()이다. 대개 백곤의 재주나 힘이나 인격이나 슬기 그 어느 것이나 저 되놈이 멋대로 날뛸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그는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소개(疏開)하고 항산(恒山)과 대군(代郡)을 파서 구주(九州)의 물을 이끌어 사막에 끌어 대고는, 중국으로 하여금 도리어 그 상류에 웅거하여 되놈[]을 견제하기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악(四岳) 역시 그의 제안을 옳게 여겨 한 번 시험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시험해 보고 말 것이다.’가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요()는 비록 물을 거꾸로 따냄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건마는, 백곤의 변론이 몹시 강력하므로 반박을 하지 못하였으며, ()도 물의 역행이 마땅한 일이 아님을 알았지마는, 백곤의 재주와 슬기가 심히 뛰어났으므로 감히 간하지도 못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명령을 어기고 화합을 깨뜨린다.’가 곧 그것이었던 것이다. 대개 백곤의 사람됨이 사납고도 꼿꼿하였을뿐더러, 제 마음대로 의견을 주장하되, 오로지 되놈으로써 중국 만세의 걱정을 삼아, 저 높은 데까지도 물에 잠길 것은 눈앞의 둘째 일로 보고서, 지형도 측량하지 않고 공비도 아낌 없이 기어코 거꾸로 개울을 파서 거슬러 흐르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물이 거슬러 행함을 강수(洚水)라 하므로, ‘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라는 말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개울도 치고 구덩이도 파려니와, 소개도 하고 씻어 내기도 하는 도중에 지세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흙이 저절로 메워지게 되었으니, 이가 이른바, ‘백곤이 홍수를 메웠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처럼 커다란 물을 메워서 스스로 죄과를 범하였으며, 또 당시의 사악과 십이목(十二牧)은 어찌하여 한 목구멍에서 나다시피 그를 역천(力薦)하였으며, 또 요로서도 어떻게 차마 9년 동안이나 두고 보면서 그가 패할 것을 기다렸을까. 아아, 백곤이 만일 이 공업을 이룩하였더라면, 중국이 되놈을 막는 것이나 하()를 막는 계책이 한꺼번에 이룩되어 만세를 두고 힘을 입히는 동시에, 그의 커다란 공로와 거룩한 사업이 당연히 우()의 우위에 올랐을 것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 지형을 살펴본즉, 이는 맹랑한 말이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시에 이르기를,

 

황하수 깊은 물이 하늘 높이 내리는 듯 / 黃河之水天上來

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지형이 서편이 높아서 황하가 마치 하늘 위로 내려 흐르는 듯싶다는 것이다.

관내(關內) 점방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벽 위에 황제의 어필 칠절(七絶) 한 수가 붙어 있었다. 이는 공민(孔敏)에게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남으로 순행하고는 곧장 열하로 돌아올 제, 모든 공씨(孔氏)가 나와서 배알하기에 황제가 이 시를 읊어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공씨의 문장(門長) 공민이 이에 발()을 달았는데, 황제의 은악(恩渥)과 영총(榮寵)을 극도로 포장하였을뿐더러, 벌써 돌에 새겨 널리 찍어서 이 점주(店主)에게 한 벌을 주고 갔다 한다.

그 시는 비록 변변하지 못하나 글씨는 묘하게 썼다. 점주가 나에게 이를 사라고 조르기에 시험조로 그 값을 물었더니, 그는 돈 서른 냥을 부른다. 식사가 끝난 뒤 곧 떠나서 셋째 관문에 들어갔다. 양편 벼랑에 석벽이 깎은 듯이 높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는 차 한 대가 지나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래에는 깊은 시내와 커다란 바위가 더덕더덕하였다. 기공(沂公) 왕증(王曾)과 정공(鄭公) 부필(富弼)이 일찍이 거란에 사신갈 제 역시 이 길을 경유하였으므로, 그의 행정록(行程錄) 중에,

 

고북구는 양편에 준험한 석벽이 있고, 그 사이에는 길이 났으되, 겨우 수레를 용납할 만하다.”

하였음을 보아서 그가 이곳으로 지나간 것을 알 수 있겠다. 한 소사(蕭寺)에서 쉴 때, 거기에 영빈(潁濱)소철(蘇轍)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어지런 뫼가 둘렀으니 갈 곳 없음 의아하더니 / 亂山環合疑無路

가는 길 얽힌 채 시내 곁을 둘러 있네 / 小徑縈回長傍溪

꿈속에 잠긴 듯이 서촉 길을 헤매니 / 彷佛夢中尋蜀道

흥주에서 동편 골이 봉주에선 서라네 / 興州東谷鳳州西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소철이 그의 형 소식(蘇軾)을 대신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예부 상서(禮部尙書)의 직을 대리하여 거란에 사신갔으므로, 그의 관반(館伴)시독학사(侍讀學士)왕사동(王師同)이 능히 소순(蘇洵)소식의 글과 소철의 복령부(茯苓賦)를 외었다.”

하였으니, 이 시는 곧 문정공(文定公 소철의 시호)이 사신으로 갈 때에 이곳으로 지나치다가 쓴 것이리라. 살고 있는 중은 겨우 둘뿐이고, 난간 밑에는 바야흐로 오미자(五味子) 두어 섬을 말리고 있기에, 내 우연히 두어 낱을 주워서 입에 넣었다. 한 중이 주시(注視)하더니, 별안간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며 호통하는데, 그의 행동이 몹시 흉패(凶悖)하였다. 나는 곧 일어서서 난간 가로 비켜 섰다.

마침 마두(馬頭) 춘택(春宅)이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섰다가, 그 꼴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줄곧 앞으로 다가서며,

 

우리 영감께옵서 더운 날씨에 찬물 생각이 나셔서, 이 자리에 가득 찬 것들 중에서 불과 몇 알 아니 되는 것을 씹어 침을 돋우려 함이거늘, 너같이 양심 없는 이 까까중놈아, 하늘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물에도 깊은 물이 있거늘, 이 당나귀처럼 높낮이도 분간하지 못하고 얕은 것과 깊은 것도 측량한 줄 모르는 이런 무례한 놈,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꾸짖는다. 중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입가에는 흰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어깻죽지를 기웃거리면서 까치걸음으로 앞으로 나서서,

 

너희들 영감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 하늘 높다 하나 너나 두려워하지, 나는 두려울 게 없어. 제 아무리 관노야(關老爺)가 현령(顯靈)하고 태세(太歲)가 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난 그가 두려울 게 없어.”

한다. 춘택이 곧 그에게 뺨 한 대를 치고 이어서 수없이 우리나라의 무리한 욕지거리를 더한다. 중이 그제야 뺨을 손으로 가리고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린다. 나는 목청을 높여 춘택에게 요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춘택은 오히려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곧장 그 자리에서 싸워 죽이고 말 기세였다. 한 중은 부엌문에 서서 웃음을 머금은 채 편을 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말리지도 않는다. 춘택은 또 한 주먹으로 그를 두들겨 엎고는,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萬歲爺 황제를 높여서 하는 말) 앞에 여쭙는다면, 네놈의 대가리를 쪼개 버리든지, 그렇지 않다면 이 절을 소탕하여 깨끗이 평지를 만들겠어, 이놈.”

하며 호통친다. 중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너희 영감 말이야, 공짜로 오미자를 훔치고, 또 네놈을 시켜 사발처럼 모진 주먹을 보내니, 이게 무슨 도리야.”

하며 꾸짖으나, 그의 기색은 차차 죽어 간다. 춘택은 더욱 기를 내어,

 

무슨 공짜야, 기껏해야 한 말이 되겠느냐, 한 되가 되겠느냐. 그까짓 눈꼽처럼 작은 한 알 때문에 우리 영감님의 높으신 위신을 깎았단 말이냐. 만세야께옵서 만일 이 일을 아신다면 너같은 까까중놈의 대가리통을 대번에 쪼개 버릴 거야. 그리고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께 여쭙는다면, 네놈이 우리 영감은 두렵지 않다지마는 만세야도 두렵지 않단 말이냐.”

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제야 중이 기가 죽어서 다시 앙갚음의 말도 내지 못한다. 춘택은 또 무수히 욕지거리를 하는데, 세력을 피며 걸핏하면 만세야를 팔아 댄다.

이때에는 응당 만세야의 두 귀가 가려웠으리라 생각된다. 대개 춘택이 말끝마다 황제를 일컬으니, 그가 헛 세력을 믿고 성세를 과장하는 꼴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절도(絶倒)하게 할 일이다. 그 중은 진짜 그를 두려워하여, 만세야라는 석 자를 듣자 마치 뇌성이나 귀신을 본 것처럼 떨 뿐이었다.

그제야 춘택이 벽돌 하나를 뽑아서 중에게 던지려 한다. 두 중은 별안간 웃음을 지으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가, 곧 산사(山楂 아가위) 두 낱을 갖고 와서 오히려 웃는 얼굴로 바치며 청심환을 요구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러한 짓은 청심환을 얻기 위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씨를 따져 본다면, 실로 나쁘다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곧 청심환 한 알을 주었더니, 중은 머리를 무수히 조아리곤 한다. 그 염치 없는 일이 심하였다. 대체 산사는 살구처럼 굵기는 하지마는, 몹시 시금털털하여 먹을 수 없었다.

옛 성인은 남의 물건을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는 것을 심히 삼갔으니, 말하기를,

 

만일 옳은 일이 아니라면, 비록 한낱 지푸라기라도 함부로 남에게 주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받지도 않는 거야.”

하였던 것이다. 대체 한 낱의 지푸라기로 말한다면, 천하에 지극히 작고도 가벼운 물건이어서, 족히 만물 중에서 손꼽을 존재조차 없겠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사양하고 받는다든지 취하고 준다든지 하는 순간을 논할 나위가 될까보냐. 그러나 성인(聖人)은 이와 같이 엄청나게 심한 말씀을 하여 마치 이에 커다란 염치와 의리가 존재하는 듯 말하였음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이 오미자로 인하여 일어난 일을 체험하고 나서, 비로소 성인의 한낱 지푸라기를 이끈 말씀이 과연 지나치게 심함이 아님을 깨달았으니, 아아,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 두어 낱의 오미자는 실로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물건이건마는 저 완패(頑悖)한 중이 나에게 무례(無禮)한 행위를 한 것은 가위 횡역(橫逆)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다투기 시작하여서 주먹다짐에까지 이르렀을뿐더러 바야흐로 그들이 싸울 때에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제각기 생사를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두어 낱의 오미자일망정 재화가 산더미처럼 높았던 만큼 이는 결코 천하에 지극히 가늘고도 가벼운 물건이라 얕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옛날 춘추(春秋) 전국(戰國) 때에 종리(鍾離)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초()의 여인과 뽕 따기를 다투다가 종말에는 두 나라의 전쟁을 일으켰던 일이 연상된다.

이제 그를 이 일에 비한다면, 두어 낱의 오미자가 벌써 성인이 이른바 한낱의 지푸라기보다 많았을뿐더러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초의 여인이 뽕 따기 다툼과 다름 없음을 보아서, 만일 이때에 그들이 싸우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변이 생겼더라면, 어찌 군사를 일으켜 문책할 일이 없었을 것을 누가 예측하겠느냐.

내 일찍이 학문이 추솔하고도 얕아서 애초에 갓을 바로잡고 들메 끈을 매는 혐의를 삼가지 못하여 스스로 공짜로 오미자를 먹었다는 모욕을 취하였으니, 어찌 부끄럽고도 두려움을 이루 말할 수 있으리오.

길가에서 빈 차가 열하로 달려가는 것이 날마다 몇천 몇만인지 모를 만큼 많았으니, 이는 황제가 장차 준화(遵化) 역주(易州) 등지에 거둥하는 까닭으로 짐바리를 실으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몇천의 탁타(槖駝)가 떼를 지어 물건을 싣고 나온다. 이놈들은 대체 한결같이 크고 작은 놈이 없이 모두 엷은 흰 빛에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짧은 털에 머리는 말과 다름 없으나 작은 눈매는 양과 같고, 꼬리는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 그리고 다닐 때에는 반드시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쳐들되 마치 나는 해오라기처럼 생겼고, 무릎에는 두 마디가 생겼으며, 발은 두 쪽으로 쪼개졌고, 걸음은 학처럼, 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옛날 가서한(哥舒翰)이 서하(西河)에 머무르고 있을 제, 그 주사관(奏事官)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마다 흰 탁타를 타고 하루에 5백 리를 달린 일도 있거니와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년에 부언경(苻彦卿)이 거란 철요(鐵鷂)의 군사를 크게 깨치매 거란 임금이 해차(奚車)를 타고 달아날 제 뒤에 적병이 급하게 쫓아오기에 덕광(德光)이 탁타 한 마리를 잡아 그를 태워서 달아났다 하였는데, 이제 탁타의 걸음걸이를 보건대, 몹시 더디고도 둔하니 뒤에 쫓아오는 적군에게 포로를 면하기 어려울 듯싶다. 혹시나 그놈들 중에서도 석계륜(石季倫)의 소와 같이 잘 달리는 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려 태조(太祖) 때에 거란이 탁타 40마리를 바쳤으나, 태조는 거란이 워낙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다리 밑에 매어놓은 지 10여일 만에 모두 굶어 죽었으니, 거란은 비록 무도한 나라라 할지라도 탁타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대체 탁타는 하루에 소금 몇 말과 꼴 열 단쯤을 먹기는 일쑤인 만큼 나라에서 세운 목장이 몹시 빈곤할뿐더러 꼬마 목노(牧奴)가 그를 기르기가 어려움은 물론이요, 또는 그를 이용하여 물건을 싣고자 하여도 도시의 건물마저 낮고 좁으며 문과 거리가 더욱 비좁아서 그를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실로 이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도 그 다리 이름을 탁타교라 하여 개성(開城)유수부(留守府)에서 3리쯤 가서 있는데, 다리 곁에 돌을 세워 탁타교(橐駝橋)라 새겼으나, 토인(土人)들은 탁타교라 부르지 않고 모두 약대다리(若大多利)라 한다. 이는 사투리로 약대는 탁타, 교량은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또 와전되어 야다리(野多利)라 부르는 것이 일쑤이다.

내 처음 개성에 놀러 갔을 때 탁타교를 물었으나,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아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사투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함부로 되었음이 이와 같구려. 이날 80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동릉(東陵) : 청 능묘의 총칭. 세조의 효릉(孝陵), 성조의 경릉(景陵), 고종의 유릉(裕陵), 문종의 정릉(定陵), 목종의 혜릉(惠陵)이 모두 이어 있다.

[D-002]척남궁(戚南宮) : 명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남궁은 봉호인 듯하고, 자는 원경(元敬).

[D-003]이목(李牧) : 전국 시대의 명장. 염파(廉頗)와 같이 치는 명장.

[D-004]첨람(襜襤) …… 누번(樓煩) : 전국 때 조() 곧 지금의 산서성 서북에 있던 부족.

[D-005]석진(石晉) : 오대 때의 후진(後晉). 석은 그의 성.

[D-006]철요기(鐵鷂騎) : 거란의 기병대 이름인 듯하다.

[D-007]녹각(鹿角) : 군대에서 쓰는 나무로 만든 방어물(防禦物)의 일종.

[D-008]백곤(伯鯀) : 하우씨(夏禹氏)의 아버지로서 9년의 홍수를 맡아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귀양살이를 당한 사람.

[D-009]사악(四岳) : ()의 때에 있었다는 사방 산악을 맡은 책임자.

[D-010]시험해 …… 것이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1]명령을 …… 깨뜨린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2]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 : 맹자(孟子)의 고자편(告子篇)에서 나온 한 구절.

[D-013]백곤이 …… 메웠다 : 서경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4]황하수 ……  : 이태백집(李太白集) 장진주(將進酒).

[D-015]소철(蘇轍) : 송의 문학가. 연빈은 호요, 철은 이름이며, 자는 자유(子由). 소식은 아우.

[D-016]소순(蘇洵) : 송의 문학가. 순은 이름. 자는 명윤(明允)이요, 호는 노천(老泉)이며, 소식의 아버지.

[D-017]관노야(關老爺) : 관우(關羽)의 혼령. 노야는 높여서 하는 말.

[D-018]태세(太歲) …… 들었다 : ()이 들었다는 말.

[D-019]옛날 ……  : 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D-020]갓을 …… 혐의 : 일명씨가 지은 군자행(君子行) 중에, “오이밭에서는 들메 끈을 매지 말 것이요, 오얏나무 밭에서는 갓을 바로잡지 말 것이다.” 했는데, 군자는 혐의로운 일을 애당초 하지 않는다는 뜻.

[D-021]가서한(哥舒翰) : 당 현종 때 장수로서 서장 지방에 공을 세웠다.

[D-022]석계륜(石季倫) : 중국 고대 춘추 시대 진()의 부호 석숭(石崇). 계륜은 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8일 갑자(甲子)

 

 

아침에는 개더니 늦게 가는 비가 잠시 내렸으나, 곧 멎고 오후에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어 소낙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떠나서 차화장(車花莊)사자교(獅子橋)를 지났는데, 행궁(行宮)이 있었다. 목가곡(穆家谷)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 떠나서 석자령(石子嶺)을 지나 밀운(密雲)에 이르매, 청실(淸室)의 모든 왕과 보국공(輔國公 황실로서 봉작을 받은 자)과 수없는 관원이 북경으로 돌아가는 자가 길에 잇달았다. 백하(白河)에 이르매, 나루에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시끄럽게 다투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건너주기가 어려우므로 바야흐로 부교(浮橋)를 매는 것이다. 모든 배들은 대개 돌을 운반하는 것이었고 사람을 건너주는 배는 다만 한 척이 있을 뿐이다. 앞서 이곳을 지날 때에는 군기(軍機)가 나와 맞이하고 낭중(郞中)은 건너는 일을 감독하고 황문(黃門)은 길을 인도하였으며,제독과 통관들의 기세가 당당하여 물가에서 채찍을 들어 친히 지휘하였으되, 그야말로 산하(山河)를 움직일 지경이더니, 이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 근신(近臣)의 호송도 없거니와 황제 또한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사신들이 부처님 뵙기를 꺼려한 까닭으로 이러한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면,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다름을 나는 느꼈다. 대개 저 백하(白河)는 그저께 건너던 물이었으며 모래 언덕은 전날 발을 멈춘 곳이었고, 제독의 수중에 가진 채찍이나 물 위에 떠 노는 배까지도 올 때의 것들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은 입을 다물고 통관마저 머리를 숙였을 뿐이었으며, 저 강산은 아무런 변함이 없건만 세태의 염량(炎凉)은 완연히 눈앞에 떠오른다.

아아 슬프도다. 대개 시세의 믿지 못할 것이 이러하구려. 그리고 세력이 있는 곳에는 모두들 달음질쳐서 따르곤 하였으나, 눈 한번 끔벅할 사이에 시세는 옮겨지고, 일은 식어져서 전연 빙자할 곳 없이 되어 마치 저 진흙에 빠진 소가 바다로 들어가는 듯이 얼음산이 햇빛을 만나 녹듯이 천고의 모든 일이 거의 이와 다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보냐. 이렇게 생각하는 차에 별안간 어지러운 구름이 공중을 덮으면서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오히려 갈 때에 비하여 그처럼 가공할 위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만 갈 때나 올 때가 모두 이러함을 보아서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는 없겠다. 옛 역사를 더듬어 보건대,

 

()의 천순(天順) 7(1463)에 밀운(密雲)회유현(懷柔縣)에 홍수가 나서 백하가 몇 길이나 불어 올라 밀운의 군기고(軍機庫)와 문서방(文書房)이 표류되었다.”

하였으니, 아마 이곳은 옛 전쟁터로서 맹풍(盲風)괴우(怪雨)가 일기 일쑤여서 분노한 번개와 우레와 그 침울한 원혼이 오히려 풀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길을 지나오는 곳마다 그들의 배는 제도가 한결같지 않았음은 물론 이 백하의 배는 마치 우리나라의 나룻배와 비슷하면서 어떤 것에는 톱으로 배 한 허리를 에워서 몇 채를 노끈으로 묶어 하나를 만든 것이 있었다. 그 꼴이 하나만으로서도 이상한데 거기다 셋을 연결한 것은 더욱 그러함을 느꼈다.

글자를 만드는 데는 상형(象形)이 가장 많았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배 주() 자의 변에는 도()니 첩()이니 작()이니 항()이니 맹()이니 정()이니 함()이니 몽()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그 꼴을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 가지마다 모두 그렇거늘,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배는 걸오(傑傲)니 나룻배는 날오(捏傲)니 커다란 배는 만장이(漫藏伊)니 곡식을 실은 배는 송풍배(松風排)니 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출범(出帆)할 때에는 당돌이(唐突伊) 상류에 뜰 때에는 물우배(物遇排)라 하였고, 또 관서(關西)에서는 배를 마상이(馬上伊)라 일컫는다. 그 제도는 비록 각기 같지 않으나, 다만 선()의 한 글자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요, 또 비록 도()()()() 등의 글자를 차용(借用)하였으나, 그 이름과 실물은 맞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사오십 필의 기병이 회오리바람처럼 달려온다. 그 기세가 퍽이나 사나워 우리나라의 피로하고 잔약한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들은 한꺼번에 배에 오른다. 가장 뒤에 따르는 기병 하나가 팔에는 푸른 매를 끼고 채찍을 드날려 단번에 배에 뛰어오르려다가 말의 뒷굽이 미끄러져 안장채를 맨 채 물속에 떨어지자 한 번 덤벙거리며 다시 솟구쳐 일어서려다가 할 수 없이 가라앉아 힘없이 몸을 굴려 이윽고 물 위에 솟아 지친 몸을 이끌고 배에 오른다. 그리고 매는 마치 기름 항아리에 던져진 나방과 같고, 말은 오줌에 빠진 쥐와 같았을뿐더러 그 고운 옷과 화려한 채찍이 애처롭게도 물망울져 몸둘 곳이 없음에도 오히려 말만을 채찍질하자 매는 더욱 놀라 날곤 한다. 대개 제몸을 과장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갚음이 즉시에 이르고 마는 것을 보아서 족히 경계하여야 함을 느꼈다. 물을 건넌 뒤에 그를 따르는 기병에게 물었더니, 그는 말 등에서 몸을 갸우뚱하면서 채찍으로써 진흙 위에다가,

 

그이는 사천장군(四川將軍)이랍니다. 나이가 늙어서 용맹이 줄었답니다.”

한다. 부마장(駙馬莊)에 이르러서 묵었다. 객점은 그 성 밑에 있고 성은 곧 회유현(懷柔縣)이다. 밤에 문을 나서 뒷간으로 향하였다. 때마침 그들은 20, 30명씩 또는 4백여 명씩 한 곳에 몰려 달릴 제 한 대열마다 등불 하나가 앞을 인도한다. 그들은 아마 모두 귀족인 듯싶다. 그리하여 수레와 말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다. 이날 모두 65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9일 을축(乙丑)

 

 

개었다 가끔 비가 뿌리다가 늦어서 갰으나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새벽에 회유현을 떠나 남석교(南石橋)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비로소 홍시(紅柹)를 맛보았다. 그 꼴을 보니 네 골이 졌는데다 또 턱이 생긴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이른바 반시(盤柹)와 다름없으나, 다만 달고 연하기 짝이 없고 또 물이 많았다. 이 감은 계주(薊州)의 반산(盤山)에서 나는데, 그곳 울창한 숲이 모두 감대추 따위라 한다. 임구(林溝)를 지나 청하(淸河)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곳에는 곧 한길이 나옴을 보아서 갈 때의 길이 아님을 알았다. 길에 한 묘우(廟宇)에 들렀다. 강희 황제의 어필로,

 

좌성 우불(左聖右佛)”

이라 쓰여 있으니, 좌성은 곧 관운장(關雲長)을 말함이다. 그리고 좌우의 주련(柱聯)에는 그의 도덕과 학문을 높이 찬양하였다. 대개 그들이 관공(關公)을 숭봉한 것은 명() 초기의 일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을 휘하여 패관(稗官) 기서(奇書) 들까지도 모두 관모(關某)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명()()의 즈음에는 공이(公移)와 부첩(簿牒)까지도 관성(關聖)이니 관부자(關夫子)니 하고 높여 불렀다. 그 그릇됨과 야비함을 그대로 좇아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를 학문하는 이로 높여 왔던 것이다. 대개 소위 학문이란 삼가 생각함과, 밝게 변증(辨證)함과, 상세히 물음과, 널리 배움을 이름이다. 그리하여 한갓 덕성(德性)만을 높임에 그쳐서는 아니 되므로 문학(問學)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옛날 하우씨(夏禹氏)가 아름다운 경고에 절하고 촌음(寸陰)을 아낀 것이나, 안자(顔子)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마음이 추솔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였은즉, 학문의 극치(極致)에 이르러서도 객()된 기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기(客氣)를 온전히 제거함에 있어서의 제몸의 사욕(私慾)을 누르며 잃어버렸던 것을 예법의 행동 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대체 라는 것이 벌써 사욕에 지나지 않으니, 만일 일호라도 그 사욕이 몸에 따르면 성인은 반드시 그를 마치 원수나 도적처럼 간주하여 기어코 끊어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는,

 

()을 쳐서 기어코 이겨야 하겠다.”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또,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쳐서 3년 만에 이겼다.”

하였으니, 전쟁을 3년 동안이나 이끌어 가면서도 반드시 이기고 만다는 것은 실로 싸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제몸의 사욕이 이긴 뒤에서야 비로소 예법으로 돌아올 것이니, 이 돌아온다는 말은 일호라도 미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함이다. 예를 들면 저 해와 달이 때로는 다 먹혔다가 다시 그 둥근 형태로 돌아올 수 있고, 또 잃었던 물건을 도로 추심(推尋)하면 그 무게가 조금도 감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결코 슬기와 어짊과 용맹의 세 달덕(達德)을 갖추지 않는 이로서는 이 학문이란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관공(關公)과 같은 정의와 용맹이야말로 자기의 사욕을 이기기 전에 벌써 예법에 돌아온 분이겠지만, 다만 이제 그를 학문한 분으로 일컫는 것은 다만 그가 춘추(春秋)에 밝았던 까닭이리라.

그리하여 그가 일찍이 오()()의 참적(僭賊)을 엄격히 배격했던바, 그가 어찌 스스로 망녕되게 높여 준 ()’라는 칭호를 마음 편히 차지할까 보냐. 그의 영혼이 천추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런 따위의 명분에 어긋난 일을 받지 않을 것이요, 만일 그의 영혼이 이미 사라졌다면 이렇게 아첨해 본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리고 그들 오경박사(五經博士) 역시 성현의 후예로서 이어받는 것이었으므로, 동야씨(東野氏 주공(周公)의 후예)공씨(孔氏 공자의 후예)를 비롯하여 안씨(顔氏 안회(顔回)의 후예)증씨(曾氏 증참(曾參)의 후예)맹씨(孟氏 맹가(孟軻)의 후예) 등은 으레 모두 성인의 후예니 현인의 후예니 하였고, 관씨(關氏 관우의 후예)의 박사(博士) 역시 성인의 후예라 하여 동야씨공씨의 사이에 참렬시켰으니 심히 부당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전( 운남성(雲南省))에 문묘(文廟)가 있는데 왕희지(王羲之)를 주로 모셨으니, 이는 그를 서성(書聖)이니 필종(筆宗)이니 하여 높였음에 그릇됨을 깨닫지 못함이다.

성도(聖道)가 더욱 멀고 오랑캐들이 바꾸어 가며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제각기 제 방법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바른 학문이 아득히 끄나풀처럼 끊어지지 않을 뿐인즉, 어찌 천년 후의 사람들이 저 수호전(水滸傳)으로써 정사(正史)를 삼지 않을 줄 알리오. 혹은 이르기를,

 

남만(南蠻)북적(北狄)이 줄곧 중국의 임금 노릇을 한다면, 왕 우군(王右軍)을 문묘에 주사(主祀)함도 가할 것이며, 수호전으로써 정사(正史)를 삼는다 하더라도 아니 될 것 없을 것인 동시에, 비록 공()()을 내쫓아 버리고 석가(釋迦)를 들여 모신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을 거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고 일어섰다. 연경으로 돌아가는 관원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아졌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빈 차가 열하로 향하는 것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마부나 역군들 중에 일찍이 서산(西山)에 가본 자는 멀리 서남쪽에 둘려 있는 돌산을 가리키며,

 

이게 곧 서산이야.”

한다. 구름 속에 출몰하는 천백(千百)의 봉우리가 보일락말락하고 산 위에는 흰 탑이 뾰족뾰족 공중에 솟았으며 병풍처럼 둘린 산들은 그림폭에 푸른 빛이 뜨는 듯이 얽히었다. 그들 둘이 서로 수작하는 말을 들어본즉,

 

저 수정궁(水晶宮)봉황대(鳳凰臺)황학루(黃鶴樓) 등에 붙어 있는 그림이 모두 이를 모방해 그린 거야.”

한다. 강 남쪽에 넓은 호수(湖水)가 열리고 흰 돌을 깎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수기(繡綺)니 어대(魚帒)니 십칠(十七)이니 하는 다리들이 모두 넓이 수십 보에 길이 백여 길이었으며, 굼틀굼틀 무지개처럼 누웠으며 좌우에는 돌 난간이 둘려 있는데, 용을 그린 배와 비단으로 꾸민 돛이 다리 밑에 출몰한다. 이는 40리나 되는 먼 곳의 물을 이끌어서 호수를 만들었으며 폭포가 돌 틈에서 뿜으니, 이가 곧 옥천(玉泉)이다. 황제가 강남(江南)에 거둥할 때나 또는 막북(漠北)에 머물 적에도 반드시 이곳을 거치며 이 샘물을 마신다 한다. 이 샘의 물맛이 천하에 첫째이므로 연경의 팔경(八景) 중에 옥천수홍(玉泉垂紅)이 그 하나라 한다. 마부 취만(翠萬)은 이미 다섯 차례나 왔고, 역졸 산이(山伊)는 두 번이나 구경하였다 하므로, 곧 둘과 서산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삼가 …… 배움 : 중용(中庸)에 나오는 몇 구절.

[D-002]문학(問學) : ()의 철학가 육구연(陸九淵)은 존덕성(尊德性)을 주장하였고, 주희(朱熹)는 도문학(道問學)을 주장하였다.

[D-003]고종(高宗) : ()을 중흥시킨 임금 무정(武丁). 고종은 묘호.

[D-004]오경박사(五經博士) : 한 무제(漢武帝) 때 실시한 유학. 오경에 능통한 학자에게 준 학위 혹은 관직.

[D-005]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 우군은 그의 벼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0일 병인(丙寅)

 

 

개다.

새벽에는 잠깐 비가 뿌렸으나 곧 멎고 일기가 약간 서늘하다.

아침에 떠나 20여 리를 가서 덕승문(德勝門)에 이르렀다. 이 문의 제도는 조양(朝陽)정양(正陽) 등 아홉 문과 다름없을뿐더러 흙탕이 심하여, 만일 그 가운데에 한 번 빠진다면 솟아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 수천 마리가 길에 빽빽하게 몰려드는데, 다만 몇 명의 목동(牧童)이 앞에서 이끌 뿐이다.

덕승문은 곧 원()의 건덕문(建德門)인데, ()의 홍무(洪武) 원년(1368)에 대장군(大將軍)서달(徐達)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문 밖 8리 되는 곳에 토성(土城)의 옛 터가 있으니, 이는 원대에 쌓았던 것이다. 정통(正統) 14(1449) 10월 기미에 먀선(乜先  로도 쓴다)이 상황(上皇 현존한 황제의 아버지를 말함. 당시는 명 영종(明英宗))을 모시고, 토성에 올라 통정사참의(通政司叅議)왕복(王復)을 좌통정(左通政)으로 삼고, 중서사인(中書舍人)조영(趙榮)을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으로 삼아서 상황을 토성에 나와 뵙게 하였으니 곧 이곳이었다. 그리고 명사(明史)를 상고하면,

 

먀선이 상황을 끼고 자형관(紫荊關)을 깨뜨리고 줄곧 경사(京師)를 엿볼 제 병부상서(兵部尙書)우겸(于謙)이 석형(石亨)과 더불어 부총병(副摠兵)범광무(范廣武)를 거느리고 덕승문 밖에 진을 벌여 먀선을 막을 제, 병부의 사무를 시랑(侍郞)오녕(吳寧)에게 맡기고, 모든 성문을 닫고 친히 싸움을 독려하되, ‘싸움에 임하여 장수가 군졸을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그 장수를 벨 것이요, 군사로서 장수를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후대(後隊)가 전대(前隊)를 죽일 것이다.’ 하고 호통쳤다. 이에 장수와 군졸들이 각기 반드시 죽을 것을 짐작하고 그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경신(庚申)에 적군(敵軍)이 덕승문을 엿보기에 우겸이 석형으로 하여금 빈 집 속에 군사를 매복하고는 기병 몇에게 시켜 적을 꾀었다. 이에 적이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접근하자 복병이 일어나 먀선의 아우 발라(孛羅)가 포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 지 닷새 만에 먀선이 가끔 도전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또 싸워도 이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화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상황을 모시고 북으로 떠났다.”

하였으니, 이제 이 문 밖의 여염이나, 시전이 번화하고 화려함이 정양문 밖과 다름없고 또 승평(昇平)한 지 날이 오래되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에서 묵었다. 역관비장과 일행 중의 하인들이 모두 길 왼편에서 대기하다가 말에서 내려 다투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 그러나 다만 내원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 그는 멀리 나와 맞이하기 위하여 홀로 먼저 밥을 먹고 동문으로 잘못 가버렸으므로 서로 어긋났다 한다. 창대가 장복을 보더니, 그 사이 서로 떠났던 괴로움을 말하기 전에 대뜸,

 

너 별상금(別賞金) 얼마나 갖고 왔니.”

하자, 장복 역시 안부하기 전에 얼굴에 가득찬 웃음으로,

 

, 상금이 몇 냥이더냐.”

하며 반문한다. 창대는,

 

천 냥이야, 의당 너와 반분해야지.”

한다. 장복은 또,

 

, 황제를 뵈었니.”

하자, 창대는,

 

뵈었고 말고. 황제 말이야, 그 눈은 호랑이, 그 코는 화롯덩이 같고, 옷을 벗은 채 발가숭이로 앉아 있데그려.”

한다. 장복은 또,

 

그의 쓴 것은 무엇이던.”

하매, 창대는,

 

황금 투구를 썼지 뭐야. 그리고 나를 부르더니 커다란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넌 서방님을 잘 모시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왔다니, 기특도 하이 하데그려. 그리고 상사님껜 일품 각로(一品閣老), 부사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높여 주데그려.”

한다. 이는 모두 거짓말 아닌 것이 없으나 비단 장복이 이에 속았을 뿐 아니라, 하인들 중에 제법 사리를 아는 자치고도 믿지 않는 이 없었다. 변군(卞君)과 조 판사(趙判事)가 나와 환영한다. 곧 서로 이끌고 길 곁 주루(酒樓)에 올랐다. 파란 기에 옛 시 두 구를 썼다.

 

서로 만나 의기 높아 님과 함께 마시려니 / 相逢意氣爲君飮

높은 다락 수양 밑에 말을 매고 오르려네 / 繫馬高樓垂柳邊

이제 수양버들에 말을 매고 높은 다락에 올라 술을 마시매, 더욱 고인의 시 읊음이 즉사(即事)를 묘사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참된 뜻이 완연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이 다락은 아래위 모두 마흔 칸에 아로새긴 난간과 그림 기둥에 단청이 눈부시고 분벽(粉壁)사창(紗窓)이 아득히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고금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또 술자리에서 읊은 아름다운 시구가 많이 붙어 있었다. 이는 대개 조신(朝臣)들이 공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또는 해내의 명사들이 석양(夕陽)에 모여들어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많을 제, 술이 취한 뒤 시 읊기는 물론이요, 글씨와 그림의 고하를 논평하여 온 저녁을 묵으면서 다투어 그 아름다운 시구와 글씨그림을 남기기를 날마다 이러하였으나, 어제 남긴 것이 오늘 다 팔리곤 한다. 이런 일을 술집에서 몹시 부러워하므로 서로 다투어서 그 교의탁자그릇골동 들을 사치하게 벌여놓을뿐더러 온갖 화초를 줄지어 놓아 시의 자료로 이바지하였으며, 좋은 먹과 아름다운 종이, 보배로운 벼루, 부드러운 붓들은 으레 그 가운데에 갖추어 있었다. 옛날 양무구(楊無咎)가 어떤 기생집에 들렀을 제, 짧은 바람벽 위에 절지매(折枝梅) 한 폭을 그려 붙였더니, 오가는 사대부들이 이를 감상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집을 찾아 들었으므로, 그 기생의 문호가 더욱 번영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 그림을 도적에게 잃어버리자 찾아드는 수레와 말이 점차 적어졌다 하였고, 또 장 일인(張逸人)은 일찍이 최씨(崔氏)의 주로(酒罏),

 

무릉성 깊은 곳에 최씨 집 아름다운 술 / 武陵城裏崔家酒

이 인간에 없을 것이 하늘 위나 있었던고 / 地上應無天上有

구름인 양 이 내 몸이 한 말 그냥 마시고서 / 雲遊道士飮一斗

백운 깊은 저 동구에 취한 채 누웠다오 / 醉臥白雲深洞口

라는, 시 한 절을 썼으므로 손님이 더욱 많이 찾아들었다 한다. 대개 중국의 명사와 대부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함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여씨(呂氏)의 가훈(家訓) 중에서 다방과 술집에 나들며 거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 마시는 것을 연하여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할 수 없는 독음(毒飮)이었으나, 그 소위 술집이란 모두 항아리 구멍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얽은 문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흔히들 길 왼편 소각문(小角門)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체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들어서 단 것이 반드시 술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의 시중에 나타난 파란 기()는 모두 실상이 아니었으니, 나는 여태까지 술집 등마루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술 배는 너무나 커서 반드시 커다란 사발에 술을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꺼번에 기울이곤 한다. 이는 무작정 술을 뱃속에 따르는 것이요, 마시는 것은 아닐 것이며 배 불리기 위함이요, 취미를 돋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번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고, 취하면 문득 주정을 하게 되고 주정이 나면 문득 서로 격투를 시작하여, 술집의 항아리와 사발들을 남김없이 차 깨뜨려 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소위 풍류(風流)문아(文雅)의 모임이라는 참된 취지가 아랑곳없을뿐더러 도리어 중국의 술 마심이야 아무런 배불릴 것이 없음을 비난하는 것이 일쑤이다. 이제 이런 술집을 압록강 동편에 옮겨 본다 하더라도 하루저녁을 참지 못하여 벌써 그 보배로운 그릇과 골동을 두들겨 깨고, 아름다운 화초를 꺾고 밟아 버릴 것이 가장 아까운 일이리라 생각된다. 그 실례 하나를 들어 보면, 이주민(李朱民)은 풍류문아를 지닌 선비로서 한평생 중국을 기갈(饑渴)처럼 연모하였지마는, 유독 술마심에 있어서는 중국의 옛법을 기뻐하지 않아 술잔의 대소와 술의 청탁을 헤아리지 않고, 손결에 닿으면 곧 기울여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따르곤 하면, 친구들은 이를 복주(覆酒 술을 엎어 버린다는 뜻)’라 하여 아학(雅謔)을 삼곤 하였다. 이번 걸음에 그가 같이 오기로 되었으나, 어떤 이가,

 

그는 주정을 부려서 가까이할 수 없겠어요.”

하고, 고자질하였다. 그러나 내 일찍이 그와 함께 10년 동안을 마셨으되, 얼굴에 단풍 빛 오른 적이나 입에 감거품 게워 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이 마실수록 더욱 얌전해지고, 다만 그의 술 엎는 방법이 조금 결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민은 늘,

 

옛날 두자미(杜子美)도 술을 엎었다오. 그의 시에 이르기를, ‘아이야, 이리 나오너라 장중배를 엎으련다[呼兒且覆掌中杯]’라고 하였으니, 이건 입을 벌리고 누워 아이들로 하여금 술을 입에다 엎는 게 아니겠어.”

하고, 증거를 댄다. 그러면 온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허리를 꺾곤 하였다. 이제 만리 타향에서 별안간 친구의 옛 일이 기억에 떠오른다. 알지 못하겠다, 주민이 이날 이 시간에 어느 집 술 자리에 앉아서 왼손으로써 잔 잡고, 다시 이 만리 타향에 노니는 나를 생각할런지.

갈 때에 들렀던 객관을 다시 찾았다. 바람벽 위에 붙었던 몇 폭의 주련(柱聯)과 좌우(座右)에 머물러 둔 생황(笙簧)철금(鐵金) 등이 모두 무양하였으니, 옛 시에,

 

병주를 바라보며 나의 고향 이곳이요 / 却望幷州是故鄕

가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조 주부(趙主簿) 명위(明渭)가 자기 방에 기이한 구경이 있다 하기에 나는 곧 그와 함께 가 보았다. 문 앞에 화초 십여 분(十餘盆)을 진열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 알 수 없겠고, 흰 유리 항아리의 높이는 두 자쯤이고 침향(沈香)으로 만든 가산(假山)의 높이 역시 두 자쯤 되어보이고, 석웅황(石雄黃)으로 만든 필산(筆山 붓을 꽂는 도구의 일종)의 높이는 한 자 넘고, 또 청강석(靑剛石) 필산이 있어 대추나무로 밑받침을 했는데 저절로 괴강성(魁罡星)의 무늬가 이룩되었을뿐더러 흑단(黑檀)으로 다리를 달았다. 그 값은 화은(花銀) 30냥이라 한다. 또 기서(奇書) 몇십 종이 있는데,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 포정박(鮑廷博)의 편)》ㆍ《격치경원(格致鏡源 청 진원룡(陳元龍)의 저()) 등은 모두 값이 지나치게 비쌌다.

대개 조군(趙君)은 이십여 차나 연행(燕行)을 하였으므로, 북경이 제집처럼 되었고, 또 한어(漢語)에 매우 익숙할뿐더러 물건을 매매할 때에도 심한 에누리를 하지 않는 까닭으로 단골 손님이 많아서 그가 거처하는 방에 그들을 진열하여 청상(淸賞)에 이바지함이 예사이다. 연전 창성위(昌城尉)황인점(黃仁點)이다. 가 정사로 왔을 때 건어호동(乾魚衚衕)에 있는 조선관(朝鮮館)에 화재가 나서 예비했던 장사치들의 모든 물건이 모두 재가 됐는데, 조군의 방어가 더욱 심하였다. 이는 매매된 물건을 제외하고도 불에 탄 것들이 모두 희귀한 골동과 서책이어서 그 가격을 따진다면 3천 냥의 거액이었으며, 그는 모두 융복사(隆福寺)나 유리창(琉璃廠) 중에서 옮겨 온 물건이다. 모든 단골 손님이 조군의 방을 빌려서 진열한 것이어서 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은 앞에서 겪은 일을 경계하지 않고 이제 또 이 방을 빌려 진열하되, 조금도 전과 다름없게 하여 조군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이에서 족히 중국 풍속이 결코 악착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겠다.

밤에 태학관에서 묵었다. 여러 역관이 모두 내 방에 모여들었다. 약간의 주찬이 있었으나, 행역(行役)한 나머지 전혀 입맛을 잃었다. 모든 사람이 내 곁에 놓인 봇짐을 흘겨보곤 한다. 아마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아무런 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갖고 왔던 붓과 벼루가 있을 뿐, 그 두툼하게 보인 것이 모두 필담(筆談)난초(亂草)로 된 유람할 때의 일기(日記)에 지나지 않는다.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석연히 웃음을 지으며,

 

난 괴이하게 여겼어, 갈 때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이제 돌아올 젠 짐이 어찌 이렇게 부풀었어.”

하고, 장복 역시 창대더러,

 

별상금(別賞金)은 어디다 두었어?”

하며,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서로 …… 오르려네 : 당시(唐詩).

[D-002]양무구(楊無咎) : 청의 양무구(楊无咎)인 듯하나 불명.

[D-003]장 일인(張逸人) : 이름은 미상. 일인은 은사(隱士).

[D-004]주로(酒罏) : 술항아리. 혹은 흙을 돋우어서 술 항아리를 두는 곳.

[D-005]여씨(呂氏)의 가훈(家訓) : 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의 가훈. 가훈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훈계하는 글.

[D-006]이주민(李朱民) : 연암의 친우. 주민은 자인 듯하나 이름은 미상.

[D-007]병주를 …… 이곳이요 : 당 시인 가도(賈島)의 시구로서, 고향을 떠나 병주에서 살다가 거기에서 또 여행을 하고 보니, 제이의 고향인 병주를 원 고향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D-008]석웅황(石雄黃) : 유화물(硫化物)로 만든 광석(礦石).

[D-009]화은(花銀) : 청에서 사용하던 은화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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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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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1. 가을 8 9일 을묘(乙卯)

2. 10일 병진(丙辰)

3. 11일 정사(丁巳)

4. 12일 무오(戊午)

5. 13일 기미(己未)

6. 14일 경신(庚申)

 

 

 

가을 8 9일 을묘(乙卯)

 

 

사시(巳時)에 태학(太學)에 들었다. 사시 이전의 일은 이미 길에서 적었고, 사시 이후의 것은 관()에 머무른 일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날 몹시 더웠다. 말에서 내려 곧 후당(後堂)으로 들어섰다. 한 노인이 모자를 벗고 교의에 걸터앉았다가 나를 보고 교의에서 내려,

 

수고하십니다.”

하며 맞이한다. 나도 읍하여 답례하고 좌정한 뒤, 노인이 내게,

 

벼슬이 몇 품()이나 되시는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선비의 몸입니다. 귀국에 관광차로 삼종형(三從兄) 대대인(大大人)을 따라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정사를 대대인이라 하고, 부사를 얼대인[乙大人]’이라 하니, []은 둘째라는 의미였다. 그는 또 나에게 성명을 묻기에 써 보이니,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의 존명(尊名)과 관직과 품계(品階)?”

하고 묻기에, 나는,

 

명함은 □□□(박명원(朴明源))이요, 일품(一品), 부마(駙馬), 내대신(內大臣)이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께선 한림(翰林) 출신이십니까?”

하므로, 나는,

 

아니어요.”

하였다. 노인이 붉은 명함 한 장을 내어 보이며,

 

저는 이와 같습니다.”

한다. 오른편에 가는 글씨로,

 

통봉대부(通奉大夫 종삼품(從三品)) 대리시경(大理寺卿) 치사(致仕) 윤가전(尹嘉銓).”

이라 씌어 있다. 나는,

 

()이 이미 공사(公事)를 그만두셨다면 무슨 일로 멀리 변새 밖에 나오셨나요?”

하였더니,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었답니다.”

한다. 또 한 사람이,

 

저 역시 조선 사람이올시다. 천명(賤名)은 기풍액(奇豊額)이옵고, 경인년(庚寅年 1770)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현재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로 근무 중입니다.”

한다. 윤공(尹公),

 

이제 사해(四海)가 한 집안이라, 문을 나서면 모두 동포 형제가 아니옵니까. 고려의 박인량(朴寅亮)이 혹시 존문(尊門)의 명망 높은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하기에 나는,

 

아닙니다. 주죽타(朱竹坨) 채풍록(採風錄) 중에 나타난 ( 박미(朴瀰))라는 어른이 저의 5대조(代祖)랍니다.”

했더니, 기공(奇公),

 

과연 문망(文望)이 높으신 상경(上卿)이시구려.”

하고, 윤공은 또,

 

왕어양(王漁洋) 지북우담(池北偶談) 중에 그 어른의 시문(詩文)을 상세히 실었습니다. 이른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등지고,말과 소도 상관이 없는 곳이었는데, 이제 하늘이 주신 연분이 공교로워 이곳 새북(塞北)에서 평수(萍水)의 종적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책에 나오는 어른의 후손이구려.”

한다. 좌중에 있던 한 사람이 감탄하는 어조로,

 

그의 시를 읊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의 인품을 몰랐다니 될 일입니까.”

한다. 기공은,

 

비록 옛 어른은 가셨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전형(典刑)은 남아 있지 않소.”

하며, 이어서,

 

귀국의 연사(年事)는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유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가을이 아직 멀었으므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올 때엔 우순풍조(雨順風調)하였습죠.”

하였다. 좌중(座中)에 또 한 사람은 성명이 왕민호(王民皥)라는 거인(擧人)이다. 그는,

 

조선은 땅이 얼마나 너릅니까.”

한다. 나는,

 

옛날 기록에는 5천 리라 하였지만, 단군의 조선은 당요(唐堯)와 한 때였고, 기자(箕子)의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희발(姬發)) 때에 봉한 나라였으며, 위만(衛滿)의 조선은 진() 때에 연()의 백성들을 이끌고 피란왔기에 모두들 부분적으로 한 쪽만을 점유하였으니, 땅이 5천 리가 다 차지 못하였을 것이며, 전조(前朝) 때엔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합하여 고려가 되었으니, 동서가 천 리요 남북이 3천 리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조선의 민물(民物)과 요속(謠俗)을 적은 것이 실지와 달라서, 모두 기자위만 때의 조선이요, 오늘의 조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쓴 이가 대체로 외국 일은 간략하게 하므로, 한갓 옛날의 기록을 좇을 따름이었으나, 그 토풍(土風)과 국속(國俗)이란 제각기 시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로지 유교(儒敎)를 숭상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中華)를 본받았으므로, 예로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이름이 있었으며, 나라의 규모라든가 사대부(士大夫)의 행신범절이 전혀 조송(趙宋)과 다름없습니다.”

했더니, 왕군(王君),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할 만하구려.”

하고, 윤공은,

 

아아, 찬란하게도 태사(太師)의 유풍(遺風)이 남았으니 가히 존경할 만하구려.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영존선공(令尊先公)께서는 어째서 소전(小傳)이 없었는지요.”

하기에, 나는,

 

비단 우리 선인(先人)의 자호와 관작이 빠졌을 뿐만 아니고, 그 중 소전이 있다는 이도 대개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저의 5대조의 휘()는 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분서(汾西)라 하여, 문집 네 권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있고, ()의 만력(萬曆) 때 어른이시며, 소경왕(昭敬王)의 부마(駙馬)로 금양군(錦陽君)이요,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라 합니다.”

했다. 윤공은 이를 품속에 거둬 넣으며,

 

이것으로 빠진 곳을 보충하여야죠.”

하고, 왕 거인(王擧人),

 

여느 잘못된 곳도 바로잡아 주셔야죠.”

하고, 기공도,

 

옳습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한다. 나는,

 

나는 본디 기억력이 분명하지 못해서 책을 놓고 고증(攷證)했으면 좋겠습니다.”

했다. 기공이 왕 거인을 돌아보며 무어라 수작하고, 윤공 역시 서로 이야기한 끝에, 이윽고 왕 거인이 곧 명시종(明詩綜)’이란 석 자를 써서,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자, 한 청년이 앞에 와 절한다. 왕 거인이 그 종이쪽지를 주니, 청년이 받아 들고 재빨리 어디로 가버린다. 아마 다른 곳에 빌리러 보냄인 듯하다. 그 청년이 곧 돌아와 꿇어앉아서,

 

없습니다.”

한다. 기공이 또 한 사람을 불러 그 종이쪽지를 주자, 곧 돌아와서 무어라 말하니 왕 거인은,

 

새외(塞外)엔 워낙 책점이 없더군요.”

한다. 나는,

 

우리나라 이달(李達)이란 이가 있는데, 그의 호는 손곡(蓀谷)입니다. 이에 이달의 시()를 싣고, 또 따로 손곡의 시를 실었으니, 이는 그의 호를 보고서 딴 사람의 성명으로 잘못 알고 나누어 실은 모양입니다.”

했더니, 세 사람이 크게 웃고 서로 돌아보며,

 

옳아, 그렇구먼요. 치이(鴟夷)나 도주(淘朱)가 애초에 한 사람 범려(范蠡)이거든요.”

한다. 윤공이 갑자기 바삐 일어서면서 붉은 명함 석 장과 자기가 지은 구여송(九如頌)을 내어 주며,

 

선생의 수고를 빌려 영형(令兄) 대인께 뵈옵고자 하옵니다.”

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며,

 

윤대인(尹大人)께서 방금 조정에 나가시니 후일 다시 만납시다.”

한다. 윤공은 이미 모복(帽服)을 갖추어, 조주(朝珠)를 걸고, 나를 따라 나와서 정사의 방 앞에 이르렀다. 아까 문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아득히 그가 이곳에 들를 것을 몰랐었다. 대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윤공이 방금 조정에 나간다 하였을 뿐, 윤공의 명함 내놓는 것이 그같이 간솔하기로, 곧 나를 따라올 줄은 나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사는 밤낮으로 시달린 나머지 겨우 눈을 붙이었고, 부사와 서장관은 내가 소개할 바 아니며, 더욱이 우리나라 대부들은 생()으로 존귀한 체함이 대단하여, 중국 사람을 보면 만인(滿人)한인(漢人)의 구분도 없이 모두 휩쓸어 되놈으로 보고, 한갓 마음만 도도한 체하는 것이 애초부터 몸에 밴 습속이 되어 버렸다. 그가 어떠한 호인(胡人)이며 무슨 지체인지 알기 전에 벌써 그를 반겨 맞이할 리도 없거니와, 비록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필시 견양(犬羊)과 같이 푸대접할 것이며, 또한 나를 불긴하게 여길 것이다. 윤공이 뜰에 서서 기다리므로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내가 그제야 정사에게 들어가 말하였다. 정사는,

 

나 혼자서 만날 수는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한다. 나는 몹시 늙은 손님이 뜰에 오래 서 있음을 딱하게 여겨서 나가,

 

정사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먼 길을 오시느라 매우 피로하시므로 삼가 맞이하지 못하오니, 다른 날에 몸소 나아가 사례하려 하옵니다.”

하였다. 윤공은 곧,

 

그렇습니까.”

하고 한 번 읍하고 나가는데, 그 기색을 살펴보니 매우 머쓱한 모양이었으며, 표연히 가마를 타고 가버렸다. 그 가마 차림의 휘황찬란한 품이 참으로 귀인이 타는 것이다. 종자(從者) 10여 명이 모두 비단옷에 수놓은 안장을 하고 가마를 호위하고 가는데, 향내 바람이 멀리 풍기곤 한다.

통관이 당번한 역관에게,

 

귀국에서도 부처를 존경하는지요. 국내의 절은 얼마나 있죠?”.

하므로, 수역이 들어와 사신에게 여쭙되,

 

통관의 이 말은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닌 듯하오니 무어라 대답하오리까.”

한다. 삼사가 의논하여 수역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디 부처를 숭배하지 않았으므로, 시골엔 혹 절이 있으나 서울이나 도회에는 없는 거요.”

하고 대답하게 지시하였다. 조금 뒤에 군기장경(軍機章京) 소림(素林)이 관중(館中)에 왔으므로, 삼사가 캉[]에 내려 동면으로 앉았다. 이는 지세를 따른 것이었다. 소림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입으로 전달한다.

 

조선 정사는 이품(二品) 끝의 반열(班列)에 서라.”

이는 진하(陳賀)하는 날의 조정에서의 좌차(座次)를 미리 일러 줌인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라 한다. 그리고 소림은 나는 듯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또 예부(禮部)에서 관중에 말을 전해 왔다.

 

사신의 우반(右班)에 오름은 전례에 없는 은전(恩典)인즉, 의당 황감하옵다는 인사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 뜻으로 예부에 글월을 내면 곧 황제께 올리겠소.”

사신은 곧,

 

배신(陪臣)이 사신으로 와서 비록 황제의 지극하신 은총을 입사와 황감하기 그지없사오나, 사사로이 사례함은 도리에 어긋남일까 하오니 어떠하오리까.”

했더니, 예부에서,

 

무엇이 해롭겠소.”

하고 잇달아 독촉이 빗발치듯 한다. 황제는 나이가 높고 또 재위(在位)한 지 오래여서 권세가 한 손에 있고, 총명이 쇠하지 않았으며 기혈이 더욱 왕성하였다. 그러나 해내가 태평하고 임금의 자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시새우고 사납고 엄하고 가혹한 일이 많을뿐더러, 기쁘고 성냄이 절도가 없으므로 조정에 선 신하들은 모두 그때그때 잘 꾸며대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오로지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시의(時義)에 맞는 일인 줄로 알아, 이제 예부에서 정문(呈文)을 이다지 재촉하는 것도 대체로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일로서, 그들의 거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지시가 오로지 예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당번 역관의 말이,

 

전년 심양에 사신갔을 때도 글월을 올려서 사례한 일이 있사온즉, 이번 일도 그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하오이다.”

한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서로 의논하여 글월을 만들어서 예부에 보내어, 곧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예부에서 또 내일 오경(五更)에 궐내에 들어가서 황은(皇恩)을 사례하게 하니, 이는 이품과 삼품으로 우반(右班)에 참하(叅賀)하게 된 은혜를 사례하라 함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다시 윤공(尹公)의 우소(寓所)를 찾았더니, 왕군(王君)은 이미 다른 방으로 옮겨 갔고, 기공(奇公)은 중당(中堂)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윤공과 더불어 기공의 처소에서 이야기하였다. 윤공은 얌전하고도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아까는 몹시 바빠서 이야기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시종의 빠지고 잘못된 곳을 들려 주셔서 선배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여 주시오.”

한다. 나는,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은 바다 저 한 편 구석에서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도록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는, 반딧불처럼 나부끼고 버섯처럼 말라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詩篇)으로써 큰 나라의 책에 실리게 됨은 실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나, 우물에 떨어진 모수(毛遂)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하던 진공(陳公)이 있다는 것은 불행히도 너무 지나친가 봅니다. 우리나라 선유(先儒) 중에 이선생 이()라는 어른이 있으니, 그의 호는 율곡(栗谷)이요, 또 이 상공(李相公) 정귀(廷龜)라는 이가 있으니, 그의 호는 월사(月沙)인데, 시종에는 이정귀의 호가 율곡이라 잘못 적혔고, 월산대군(月山大君)은 공자(公子)인데, 그의 이름이 ()’이므로 여자인 줄로 잘못 알았으며, 허봉(許篈)의 누이동생 허씨(許氏)는 호가 난설헌(蘭雪軒)인데, 그 소전(小傳)에는 여관(女冠 여도사(女道士))이라 하였으니, 우리나라엔 본디 도관(道觀)’이니 여관이니 하는 것이 없으며, 또 그의 호를 경번당(景樊堂)이라 하였으나, 이는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허씨가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었는데, 김성립의 얼굴이 오종종하게 못생겼으므로 그 벗들이 그를 놀리어 그 아내가 두번천(杜樊川)을 연모한다 하여 조롱한 것입니다. 대개 규중(閨中)의 음영(吟詠)이 본시 아름답지 못한 일인데, 더욱이 두번천을 연모한다고 유전(流傳)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까.”

했다. 기 두 분이 모두 크게 웃었다. 문 밖에 아이놈들이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고 모두 늘어서서 따라 웃는다. 이는 이른바 웃음소리만 듣고 따라 웃는다는 격이다. 알지 못하겠노라, 그들의 웃음이 무슨 일인지. 나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영돌(永突)이 찾아왔으므로 일어서 나오니, 두 사람이 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여 주었다. 때마침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담 너머 장군부(將軍府)에서는 이미 초경(初更) 넉 점을 치는 야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상방(上房)에 들어가니 하인들이 휘장 밖에 누워 코를 골고 정사도 이미 잠들었다. 짧은 병풍 하나를 격하여 나의 잠자리를 보아 놓았다. 일행 상하가 닷새 밤을 꼬박 새운 끝이므로 이제 깊이 잠든 모양이다. 정사 머리맡에 술병 둘이 있기에 흔들어 보니, 하나는 비고 하나는 차 있었다. 달이 이처럼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으리. 마침내 가만히 잔에 가득 부어 기울이고, 불을 불어 꺼버리고서 방에서 나왔다. 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할할하는 소리가 담 밖에서 들린다. 이는 낙타가 장군부(將軍府)에서 우는 소리였다. 드디어 명륜당(明倫堂)으로 나왔다. 나와 본즉, 제독과 통관의 무리가 각기 탁자를 끌어다 둘을 한데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잠들었다. 제 비록 되놈이기로 무식함도 심하다. 그 누워 자는 자리인즉, 곧 선성(先聖)선현(先賢)께 석전(釋奠)이나 석채(釋菜)를 거행할 때 쓰는 탁자인데, 어찌 감히 이를 침상으로 대용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차마 누워 잘 수 있으랴. 그 탁자들은 모두 붉은 칠을 하였는데 백여 개가 있었다.

오른편 행각에 들어가니, 역관 세 사람과 비장 네 사람이 한 구들에 누워 자는데 목덜미와 정강이를 서로 걸치고 아랫도리는 가리지도 않았다. 천둥소리처럼 코를 골지 않는 자가 없는데, 혹은 병을 거꾸러뜨려 물이 쏟아지는 소리요, 혹은 나무를 켜는데 톱니가 긁히는 소리였으며, 혹은 혀를 끌끌 차며 사람을 꾸짖는 시늉이요, 혹은 꽁꽁거려 남을 원망하는 정경이다. 만리 길을 함께 고생하고 와서 자나 먹으나 떠남이 없으매, 그 정분이야말로 친형제와 다름없이 사생을 같이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잠든 모습을 볼 때엔 한 자리에 꿈이 다르고, 그의 간담(肝膽)은 초()()처럼 먼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담뱃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 소리가 표범 소리인양 장군부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야경 치는 소리가 마치 깊은 산중 접동새 소리같이 울렸다. 뜰 가운데를 거닐며, 혹은 달려도 보고 혹은 발자국을 크게 떼어 보기도 해서 그림자와 서로 희롱하였다. 명륜당 뒤의 늙은 나무들은 그늘이 짙고, 서늘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서 잎마다 구슬을 드리운 듯, 구슬마다 달빛이 어리었다. 달 밖에서 또 삼경의 두 점을 쳤다. 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이런 때에는 어찌 우리 일행만이 모두 잠들었으랴. 도독부(都督府)의 장군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곧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베개에 머리가 저절로 닿았다.

 

 

[C-001]가을 : 이 위에 경자(庚子)’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나, ‘박영철본에 의하여 삭제하였다.

[D-001]얼대인[乙大人] …… 의미였다 : 이 부분은 주설루본에 의거하였다. ‘박영철본에는 얼대인[二大人]’으로 되었다.

[D-002]대리시경(大理寺卿) : 최고 법원장(法院長)에 해당하는 벼슬.

[D-003]박인량(朴寅亮) : 고려 문종(文宗) 때 문장가로서, 송에 사신으로 가 문장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므로, 송에서 그의 문집을 출판하기까지 하였다.

[D-004]주죽타(朱竹坨) : 주이준(朱彛尊). 죽타는 호.

[D-005]왕어양(王漁洋) : 어양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D-006]제비와 …… 등지고 : 두 후조(候鳥)가 남북의 추향이 다름을 일렀다.

[D-007]말과 …… 곳이었는데 : 좌전(左傳), “풍마우(風馬牛)가 서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풍은 주(), “암수가 서로 유인함이다.” 하였으니, 이는 초자(楚子)가 제후(齊侯)에게 보낸 말로써, 제와 초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

[D-008]그의 …… 일입니까 :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句節).

[D-009]조송(趙宋)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성인 조()를 붙여서 다른 송과 구별하였다.

[D-010]태사(太師) : 기자(箕子)가 일찍이 은의 태사 벼슬에 있었다.

[D-011]시종(詩綜) :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의 저.

[D-012]소경왕(昭敬王) : 조선 선조(宣祖)의 시호.

[D-013]이달(李達) : 조선 중종(中宗) 때 시인. 자는 익지(益之).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三唐)의 시파를 이룩하였다.

[D-014]구여송(九如頌) : 구여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편(天保篇)에 나오는 아홉 가지의 축복, 곧 여산(如山)여부(如阜)여강(如岡)여릉(如陵)여천방지(如川方至)여월항(如月恒)여일승(如日升)여남산수(如南山壽)여송백무(如松柏茂).

[D-015]배신(陪臣) : 제후(諸侯)의 대부가 천자를 대하여 스스로 일컫는 말.

[D-016]사사로이 …… 하오니 : 인신(人臣)은 외교(外交)가 없다는 의미.

[D-017]모수(毛遂) : 모수는 전국 때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식객(食客)으로, ()에 유세(遊說)하여 진()을 물리친 변사(辯士).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우물에 빠졌다 한다.

[D-018]진공(陳公) : 진공은 곧 한()의 명사 진번(陳蕃). 자는 유자(孺子). 그가 일찍이 재명(才名)이 있어서 좌객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이가 있었다.

[D-019]이선생 이() : 이이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정치 이론가. 자는 숙헌(叔獻).

[D-020]이상공(李相公) 정귀(廷龜) : 이정귀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문학가. 자는 성징(聖徵).

[D-021]월산대군(月山大君) : 조선 성종(成宗)의 형. 월산은 봉호. 자는 자미(子美).

[D-022]허봉(許篈) : 조선 선조 때 문학가. 자는 미숙(美叔). 허균(許筠)의 형.

[D-023]허씨(許氏) : 조선의 탁월한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D-024]두번천(杜樊川) : ()의 풍류 미남으로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 번천은 호요, 자는 목지(牧之).

[D-025]두번천을 …… 않으리까 : 허씨의 호 경번은 번천을 연모한 것이 아니라 옛 선녀(仙女) 번부인(樊夫人)을 연모한 것이다. 연암이 이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음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D-026]웃음소리만 …… 웃는다 : 우리나라 속담.

[D-027]역관 세 사람 : 홍명복조달동윤갑종.

[D-028]비장 네 사람 : 주명신정창준이서귀조시학.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0일 병진(丙辰)

 

 

개다.

영돌이 나를 깨웠다. 당번 역관과 통관이 모두 문 밖에 모이어, 연방 때가 늦었다고 재촉한다. 나는 겨우 눈을 붙였다가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야경 소리가 아직도 들려 온다. 노곤한 몸에 달콤한 졸음으로 꼼짝하기 싫은데, 아침 죽이 머리맡에 놓여 있다. 억지로 일어나서 따라가 보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가 있다. 등불 빛에 좌우의 시전(市廛)이 보이나, 연경보다는 어림없고 심양요동에도 미칠 수 없었다.

() 밖에 이르렀으나, 날이 오히려 새지 않았으므로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큰 묘당에 들어 쉬게 하였다. 이는 지난해 새로 세운 관제묘(關帝廟)이다. 중첩된 누각과 깊은 전당, 굽은 행각, 겹친 곁채들의 조각이 공교롭고 단청이 어리어리하다. 중들이 모여들어 서로 다투어 구경하고 있다. () 안에는 이곳저곳에 연경의 벼슬아치들이 와서 머물러 있고, 왕자(王子)들도 이 속에 많이 와 붙여 있다 한다.

당번 역관이 와서,

 

어제 예부에서 알린 것은 다만 정사와 부사의 사은(謝恩)만을 말하였으니, 이는 대저 황제가 명을 내려 정사부사만을 우반(右班)에 승참(陞叅)하게 함이며, 따라서 그 은혜를 사례하는 것이므로 서장관은 사은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한다. 이에 서장관은 관제묘에 머물고, 정사와 부사는 궐내로 들어갈 제 나도 따라 들어갔다. 모든 전각에는 단청을 꾸미지 않았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편액을 붙였는데, 오른편 곁채에 예부 조방(朝房)이 있어서 통관이 이에 인도한다. 한인(漢人) 상서(尙書) 조수선(曹秀先)이 교의에서 내려와 정사의 손을 잡고 매우 반기는 뜻을 보이며,

 

대인(大人)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손을 들고 사양하여 주인이 먼저 앉기를 청하였으나, 조공(曹公) 역시 손을 들어 연방,

 

대인께서 먼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굳이 사양하기 4, 5차에 이르렀으나, 조공은 더욱 사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정사와 부사가 할 수 없이 먼저 캉[]에 올라앉았다. 그런 다음에야 조공이 비로소 교의에 걸터앉아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사신의 의관 그의 모복(帽服)에 비기면 가위 풍채로운 선인(仙人)이라 할 수 있겠으나, 말이 통하지 못하고 행지(行止)가 서툴러서 수어 수작이 저절로 뻣뻣하고 서먹하여, 저네들의 세련되고 은근한 솜씨에 비기면 그 생경(生硬)함이 도리어 중후한 태도를 갖게 된다. 정사는,

 

서장관의 거취(去就)는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더니, 조공(曹公),

 

오늘 사은엔 함께 할 것이 아니고, 후일 하반(賀班)에는 함께 나와도 좋겠습니다.”

하고는 곧 일어선다. 통관이 또,

 

만인(滿人) 상서(尙書) 덕보(德甫)가 들어옵니다.”

하기에, 사신이 문에 나와서 맞아 읍하니, 덕보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발을 멈추어,

 

행리(行李) 무양(無恙)하신지요. 어제 황상께서 내리신 각별한 은총을 잘 아시는지요.”

하므로, 사신은,

 

황은(皇恩)이 거룩하와 영광이 그지없소.”

하였다. 덕보는 웃으면서 무어라 지껄였으나, 그 말소리가 목에 걸리는 듯 꺽꺽하여 ()’인지 ()’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대개 만주 사람들의 말은 이 따위가 일쑤이다. 그도 말을 마치고 곧 가버린다. 내옹관(內饔官)이 찬() 세 그릇을 내어 왔는데, 설기와 돼지고기 적과 과실 들이다. 떡과 과실은 누런 쟁반에 담고, 돼지고기는 은쟁반에 담았다. 예부낭중(禮部郞中)이 곁에 있다가,

 

이는 황제의 아침 찬에서 세 그릇 물려 온 것이오.”

한다. 얼마 안 되어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전문 밖에 나아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고 돌아온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와서 읍하며,

 

이번 황은(皇恩)이야말로 망극하오이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은 의당 예단(禮單)을 더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러면, 사신과 종관(從官)에게도 두 번째로 상품이 내릴 것이리다.”

한다. 그는 곧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 아숙(阿肅)인데, 만주 사람이었다. 사신은 조방(朝房)에 다시 들고, 나는 먼저 나왔다. 대궐 밖에는 수레와 말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말은 모두 담을 향하여 즐비하게 늘어섰으되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들어 세운 것 같았다. 문 밖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데, 지껄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황자(皇子)가 오시는 거요.”

한다. 한 사람이 말을 탄 채 궐내로 들어가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가 소위 황륙자(皇六子) 영용(永瑢)이다. 흰 얼굴에 얽은 자욱이 낭자하고, 콧날은 낮고 작으나 볼이 몹시 넓으며, 흰 눈에 눈자위가 세 거풀 지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떡 벌어져서 체격이 건장하긴 하나, 전혀 귀기(貴氣)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글을 잘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지금 사고전서(四庫全書) 총재관(總裁官)이며, 민망(民望)이 그에게 쏠린다 한다. 내 일찍이 강녀묘(姜女廟)에 들어갔을 때, 그 벽 위에 황삼자(皇三子)와 황오자(皇五子)의 시()를 깊이 간직한 것을 보았다. 황오자의 호는 등금거사(藤琴居士)라 하며, 시가 몹시 쓸쓸하고 글씨마저 가냘파서, 재주는 있으나 황왕가(皇王家)의 부하고 귀한 기상이란 엿볼 수 없었다. 그리고, 등금거사는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의 생질이요, ()은 상명(祥明)의 종손(從孫)이다. 상명의 조부는 본시 의주(義州)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갔으며, 상명은 벼슬이 예부 상서에 이르렀고, 옹정(雍正) 때 사람이다. ()의 누이동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귀비(貴妃)가 되어 총애를 받았었다. 건륭제의 뜻은 다섯째 아들에게 뒷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연전에 일찍 죽어 버리고 지금은 영용이 총애를 독차지하여서, 지난해에 서장(西藏)에 가서 반선(班禪)을 맞아 왔다 한다. 그 죽은 아들이 읊은 시()는 뜻이 몹시 스산하고, 그 남은 아들의 것도 귀기(貴氣)가 전혀 없으니,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다.

가산(嘉山) 사람 득룡(得龍)은 마두로 연경에 드나든 지 40년이어서 중국말에 능숙하였다. 이 날 많은 사람 중에서 멀리 나를 부르기에 사람들을 밀치고 가보니, 마침 한 늙은 몽고왕(蒙古王)과 서로 손잡고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몽고왕은 모자에 홍보석(紅寶石)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나이는 여든 하나요, 키가 거의 한 길[6]이나 되는 장신인데,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 길이는 한 자 남짓한데, 검은 바탕에 회백색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체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무런 보잘것이 없어 마치 금방 거꾸러지려는 썩은 나무등걸 같은데, 전신의 원기(元氣)가 모두 입으로 나오는 듯하다. 그 늙은 모양이 이러하니, 그가 설사 묵돌(冒頓)일지라도 두려울 것이 못 된다. 따른 자가 수십 명이건만 부축하지도 않는다. 또 한 몽고왕이 있는데, 건장하고 기운이 세어 보이기에 득룡과 함께 가서 말을 붙이니, 그는 내 갓을 가리키며 무엇인지 묻고는 말도 채 알아듣지 못한 사이에 가마를 타고 휭 가버린다.

득룡이 그들 귀인(貴人)마다 찾아가서 읍하고 말을 붙이니, 모두 읍으로 답례하며 대꾸하여 준다. 득룡이 나더러도 저와 같이 해 보라 하나, 내 처음 배워서 어색할뿐더러, 또 관화(官話)가 서툴러서 어찌할 수 없었다. 곧 관제묘에 들어간즉, 사신이 이미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드디어 함께 관()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후당(後堂)으로 들어갔다.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가 나와 맞는다. 왕 거인의 호는 혹정(鵠汀)이었으며, 산동도사(山東都司) 학성(郝成)과 한 구들에 거처한다. ()의 자는 지정(志亭)이요, 호는 장성(長城)이라 한다. 혹정이 우리나라 과거제도를 물으면서,

 

어떠한 문자로 무슨 글을 지어 바치는지요.”

하기에, 나는 약간 그 대략을 일러 주었다. 그는 또 혼인에 대한 예식을 묻기에, 나는,

 

()()()()는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가례는 주부자(朱夫子)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므로, 중국에서도 반드시 이것만을 좇지는 않습니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의 아름다운 점 몇 가지를 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는,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았으나, 역시 네 가지 좋은 점이 있답니다. 온 나라 풍속이 유교(儒敎)를 숭상함이 첫째요, 땅에 황하(黃河)처럼 큰 수해의 걱정이 없음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다른 나라에서 빌리지 않음이 셋째요,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 넷째 좋은 일입니다.”

하였다. 지정(志亭)이 혹정을 돌아보며 서로 무어라 중얼중얼하더니, 이윽고 혹정은,

 

진실로 좋은 나라이구려.”

하고, 지정은,

 

여자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니, 온 나라가 모두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온 나라의 미천한 농사백성이나 하인들까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사족(士族)이라 하면, 비록 아무리 가난하고 또 삼종(三從)의 길이 이미 끊어졌다 하더라도, 평생 과부의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기품이 비복하천에게까지도 미쳐서, 저절로 풍속을 이룬 지 4백 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금령(禁令)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별로 드러난 금령은 없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중국에서도 이 풍속이 막심한 폐단을 이루어서, 어떤 이는 납채(納采)만 하고 초례(醮禮)를 이루지 않았다거나, 성례만 하고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아니하였는데도, 불행히 사고가 있으면 평생토록 과부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데, 이런 건 오히려 나은 편이고, 심지어는 세의(世誼)가 두터운 집 사이면 아이가 뱃속에 들었을 때 이미 언약한다거나, 또는 더벅머리 때 부모끼리 말이 있었다가 불행하면,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서 같이 따라 합장되기를 구하니, 이는 예()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므로, 군자(君子)들은 그런 것을 시분(尸奔)이라 기롱하기까지도 하고, 또는 절음(節淫)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국법(國法)으로 이를 엄격히 단속하여 그 부모에게 죄를 주기로 하였으나, 마침내 습속을 이루었으며, 동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유식한 집안에서는 여자가 성년(成年)이 된 뒤에 비로소 혼인을 말하니, 이는 요즈음 일입니다.”

한다. 나는,

 

유계외전(留溪外傳)에 보면, 효자가 간()을 내어서 그 어버이의 병을 낫게 한 일이 있으며, 조희건(趙希乾 명말의 저명한 효자)은 가슴을 뻐개고 염통을 꺼내다가 잘못 그 창자에 한 자 남짓 생채기를 내면서 이를 끊어 삶아서 그 어머니의 병을 고쳤으나, 나중에 그 상처가 아물어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하니, 이를 본다면 손가락을 끊었다든지 똥을 맛보았다 함은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캐내었다거나 얼음 구멍에서 잉어[鯉魚]를 잡았다거나 하는 일들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이런 일이 많습죠.”

하고, 지정은,

 

최근에도 산서(山西)에서 어떤 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웠다는데, 그 일인즉 이상하더군요.”

하고, 혹정은 또,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 구멍에서 잉어를 잡은 일이 진실이라면, 이는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해진 것이지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지정은 또,

 

육수부(陸秀夫)가 임금을 업고 바다에 들어간 것과, 장세걸(張世傑 송말의 충신)이 향을 피워 배가 뒤집히기를 원한 것과, 방효유(方孝孺)가 그 십족(十族)의 멸함을 달갑게 받은 것과, 철현(鐵鉉)이 기름을 튀게 하여 사람을 데게 한 것 같음은 모두 범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마음에 쾌하달 것이 못 되니, 뒷세상의 충신(忠臣)과 열사(烈士)가 되는 것도 그 역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하고, 혹정은,

 

천지가 개벽한 지 오래여서, 뛰어나게 쾌한 일이 아니면 이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남화노선(南華老仙 장주(莊周))의 말에, ‘한숨지으면서 효도를 말하는 것이 된다.’ 함은 이를 두고 말함이었지요.”

한다. 나는,

 

아까 왕() 선생께서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하다고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단술을 고아서 소주를 만든다면 전내기 술[]을 말할 수 없을 것이요, 입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다시는 매운 맛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만일 깊이 꼬집고 캐어 말한다면, 절의(節義)를 배척하는 의론이 세상에 다시 일고 말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또,

 

그렇습니다. 귀국 부인의 의관 제도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대강 저고리치마와 또 머리의 쪽찌는 법을 이야기하고, 원삼(圓衫)당의(唐衣) 같은 것은 탁자 위에 그 제도를 대충 그려서 보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좋다 하였다. 지정은,

 

달리 약속한 곳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곧 돌아올 터이니, 선생께서 조금 더 앉아 계십시오.”

하고는 이내 일어나 버린다. 혹정은 지정을 극도로 칭찬하여,

 

그는 무인(武人)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넉넉하여 당세에 드문 사람입니다. 지금 사품(四品) 병관(兵官)이거든요.”

하고, 그는 또,

 

귀국 부인도 역시 발을 묶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아뇨, 중국 여자들의 활굽정이처럼 생긴 신은 차마 볼 수 없더군요. 휘뚱거리며 땅을 디디고 가는 꼴이, 마치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이게 무슨 꼴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이로 인하여 도륙을 당하였음은 가히 세운(世運)을 짐작할 수 있으리다. 전조(前朝) 명대(明代)엔 그 죄가 부모에게 미쳤고, 본조(本朝)에 와서도 이에 대한 금령(禁令)이 몹시 엄격하였으나, 끝끝내 이를 막을 수 없음은 대개 남자는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어요.”

한다. 나는,

 

모양이 흉하고 걸음이 불편한데, 왜 하필이면 그걸 합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만주 계집들과 한가지로 보일까봐 그런 게죠.”

하고는 곧 붓으로 지워 버리고 그는 또 이어서,

 

죽어도 고치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삼하통주 사이에서, 늙은 거지 여인이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발을 싸맨 채 말을 따라오면서 구걸하는데, 마치 오리가 배불리 먹은 것처럼 뒤뚱뒤뚱 넘어질 듯하니, 내 보기에는 도리어 만주 여자보다도 흉하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니까 삼액(三厄)이라 하였습죠.”

한다. 나는,

 

삼액이란 무슨 말씀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남당(南唐) 때 장소랑(張宵娘)이 송궁(宋宮)에 사로잡혀 왔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그 작은 발이 뾰족한 게 보기 좋다 하여, 다투어서 헝겊으로 발을 팽팽하게 싸매어, 마침내 풍속이 이룩되었답니다. ()의 시절엔 중국 여자들이 발을 싸맴으로써 스스로 표적을 삼았으며, ()에 이르러선 이를 금했으나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나 만주 계집들이 중국 여자들의 발 싸맨 것을 비웃어 회음(誨淫)이라 하지만, 이는 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것이 족액(足厄)이오. 홍무(洪武) 때에 고 황제(高皇帝)가 가만히 신락관(神樂觀 도관(道觀)의 이름)에 거둥하여, 한 도사(道士)가 실로 망건(網巾)을 떠서 머리칼을 싸매는 것이 보기에 편리할 듯해서, 이를 빌려 거울 앞에서 써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제도를 천하에 명령하였답니다. 그 뒤부터 말 갈기로써 실을 대신하여 꼭 졸라매어서 자국이 낭자하게 났으며,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 함은 그 앞이 높고 뒤가 낮아서 흡사 범이 쭈그리고 앉은 것 같음을 이름이었고, 또 수건(囚巾)이라 함은 당시에도 벌써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의 두액(頭額)이 모두 그물 속에 갇혔다 함이었으니, 대개 불편히 여긴 이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고는 붓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이게, 두액(頭厄)이 아니어요.”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그의 이마를 가리켜,

 

이 번쩍번쩍하는 건 무슨 액()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별안간 슬픈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곧 천하두액(天下頭額) 이하의 글자를 모두 까맣게 지워 버리었다. 그리고 그는 또,

 

이 담배는 만력(萬曆) 말년에 양절(兩浙 절동(浙東)절서(浙西))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하고 취하여 넘어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毒草)입니다.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 갈아서 이문(利文)이 좋은 곡식과 다름없고, 부인이며 어린아이들까지도 즐겨 피우지 않는 이가 없을뿐더러, 그 좋아하는 정도가 저 기름진 고기나 또는 차나 밥을 능가하더군요. 쇠끝과 불이 함께 입을 뜸질하니, 이 또한 세운(世運)이지요. 이보다 더한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께서도 이것을 즐기시는 편이지요.”

한다. 나는,

 

.”

하자, 혹정은 또,

 

저는 이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 번 시험삼아 피어 보았더니, 곧 취하여 쓰러질 것 같고 구역질이 나서 죽을 뻔했습지요. 이야말로 구액(口厄)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아마 귀국에서도 사람마다 이를 피우겠죠.”

한다. 나는,

 

. 그러나, 부형이나 존장 앞에서는 감히 피우지 못합니다.”

하였다. 혹정은,

 

그럴 터이죠. 독한 연기를 피움이 남의 앞에서 불공(不恭)한 일이거든, 하물며 부형 앞에서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비단 그래서 그럴 뿐만 아니라, 입에 긴 대를 물고 어른 앞에 나아감은 몹시 거만스럽고 무례하기 때문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그럼, 토종(土種)입니까. 혹은 중국서 사가는 것입니까?”

한다. 나는,

 

만력 연간에 일본(日本)으로부터 들어와서,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다름없답니다. ()이 아직 만주(滿州)에 있을 때에,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들어갔으며, 그 씨는 본시 일본으로부터 왔으므로 남초(南草)라 이른답니다.”

하였다. 혹정은,

 

이는 본시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서양(西洋) 배편으로 온 것입니다. 서양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 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서, 이것으로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하였다죠. 사람은 비장(脾臟)이 토()에 속하였으므로, 허랭(虛冷)해서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기고, 그것이 입에까지 번지면 당장에 죽는답니다. 이에 불로써 벌레를 쳐서, ()을 이기고 토()를 도와 장기(瘴氣)를 이겨 내고 습기를 덜어서 신효를 거두었으므로, 영초(靈草)라 일렀답니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남령초(南靈草)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 신효함이 이와 같다면, 수백 년 동안에 온 세상이 다 함께 즐겨 피우는 것도 역시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가봐요. 선생의 이른바 세운이라 하심이 실로 좋은 말씀입니다. 만일 이 풀이 아니었더라면, 천하 사람이 모두 입창으로 죽었을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나이 예순에 아직 입병이란 없고,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대체로 허황하여 이익을 낚는 데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곧이 듣겠습니까.”

한다. 이윽고 지정이 돌아와서, 혹정의 필담 중에,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그거 아주 독하지요.”

하고는 서로 웃었다. 나는 이에 하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전갈하기를,

 

서번(西番)의 성승(聖僧)에게 가보지 않겠느냐.”

하매, 사신은,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중국과 다름없이 보시니, 중국의 인사(人士)와는 스스럼없이 오가도 무방하지만, 여느 외국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법이오.”

하였다. 군기 대신이 가버린 뒤, 사신들은 얼굴에 수심을 띠었고, 당번 역관들은 황황히 분주하여 마치 숙취(宿醉)가 덜 깬 사람 같았다. 그리고 비장들은 공연히 성을 내어서,

 

황제의 일 괴악하거든. 반드시 망할 거야, 반드시 망하지. 오랑캐니까 그렇지. 명 나라 때야 어디 이런 일이 있었나.”

하고, 수역(首譯)은 백망(百忙) 중에서도 비장을 향하여,

 

춘추(春秋) 대의를 논할 때가 아닐세.”

하고 핀잔주었다. 얼마 아니 되어 군기 대신이 또 말을 달려와서 황제의 명령을 거듭 전갈하기를,

 

이는 중국 사람과 마찬가지니 즉시 가보라.”

한다. 이에 사신이 서로 의논하여, 혹은,

 

가보는 것은 결코 중난(重難)한 일이야.”

하고, 또는,

 

글을 예부에 보내어 이치로 따지자.”

하고, 당번 역관은 말끝마다,

 

, .”

할 뿐이었다. 나는 본시 한산한 몸으로서 구경할 뿐, 사행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간섭이 없었으려니와, 또 이때껏 내게 묻는 일도 없었다. 이때 내 마음속으로 하도 희한하여,

 

이는 참으로 좋은 기회이다.”

하고는, 또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무수히 권주(圈朱)를 치며,

 

좋은 제목(題目)이다. 이런 때 사신이 만일 소장을 올린다면, 그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떨치어서 크게 우리나라를 빛내리로다.”

하고, 또 스스로 묻기를,

 

그렇다고 군사를 낼 것인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이건 사신의 허물이니, 어찌 그 나라에 노여움을 옮길 것인가. 그러나, 사신이 그 빌미로 진( 운남의 별칭)( 귀주의 별칭)이니 운남(雲南)귀주(貴州)니 하는 곳으로 귀양살이가는 것쯤이야 하는 수 없는 일일 테지. 그리되면 내 혼자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서촉(西蜀)과 강남(江南)의 땅을 내 곧 밟게 되리로다. 강남은 오히려 가깝되, 저 교주(交州 안남 하내(安南河內))니 광주(廣州 광동(廣東))니 하는 곳은 연경에서 만여 리 길이나 된다니, 내 구경이 이처럼 난만(爛漫)하여지리.”

하고, 하도 마음속으로 기뻐서 곧 밖으로 뛰어나가 동상(東廂) 밑에 서서 이동(二同)건량(乾糧)의 마두 이름 을 불러 내어,

 

얼른 술을 사오려무나. 너는 돈일랑 아끼지 말아라. 내 이제부터 너와 이별이다.”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갔으나, 아직껏 의논이 정하여지지 않았는데, 예부의 독촉이 성화(星火) 같아서 비록 하원길(夏原吉)의 위풍(威風)일지라도 배겨 낼 수 없으므로, 안장과 말을 정돈하는 사이에 저절로 늦어져서 해가 이미 기울었다. 낮이 지나면서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행재소의 대궐문을 거쳐 성을 돌아서 서북으로 향해 반도 못 갔을 무렵에, 별안간 황제의 명령이 내렸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다른 날을 기다리라.”

이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되돌아섰다.

소위 성승(聖僧)이란 서번의 승왕(僧王)인데, 호는 반선불(班禪佛)이요, 또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들은 거개 그를 존신(尊信)해서 활불(活佛)이라 일컫는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마흔두 대 전신(轉身)이라 하며, 전신(前身)은 중국에서 많이 태어났고, 나이는 지금 마흔셋이오.”

한다. 지난 오월 스무날에 열하로 맞아 와서, 따로 궁궐을 짓고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그의 하인들이 많아서, 이곳에 들어온 뒤에 점차 떨어져 남았으나, 그를 따라온 자가 그래도 수천 명이 넘으며, 그들은 모두 비밀히 병장기를 감추고 있건만 황제만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한다. 이는 공연히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자 하는 말인 듯싶다. 또 거리의 아이들이 부르는 황화요(黃花謠)는 이를 두고 말함이라 한다. 그리고 그 시()는 욱리자(郁離子)가 지은 것이다.

 

붉은 꽃 다 지고 누런 꽃 피는구나 / 紅花落盡黃花發

붉은 꽃이란 붉은 모자를 가리킴이었고, 몽고와 서번은 모두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이름이었다. 또 한 노래에,

 

원래는 옛 물건이니 누가 정말 주인인고 / 元是古物誰是主

라 하였으니, 이 두 노래를 보건대 모두 몽고를 두고 부름이다. 몽고는 방금 마흔여덟 부가 강하고, 그 중 토번(吐番)이 가장 사납다. 토번은 서북의 호족(胡族)이었으며, 몽고의 별부(別部)로서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였다.

박보수(朴寶樹)가 예부에 가서 일을 탐문하고 와 하는 말이,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는 예()를 알건만 사신은 예를 모르네그려.’ 하더군요.”

하고는 보수와 통관들이 모두 가슴팍을 치고 울면서,

 

우리들은 죽습네그려.”

하나, 이는 통관 무리들이 일쑤 잘하는 버릇이라 한다. 비록 털끝만한 작은 일일지라도, 황제의 명령이라면 문득 죽는다고 야로를 하기가 일쑤인데, 하물며 중로에서 돌아가라 함은 마음에 언짢음을 뜻함에랴. 또 예부에서 전하는 말 중,

 

()를 모르네.”

라는 구절은 곧 불평을 띤 말인즉, 통관들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도 공연한 공갈만은 아니겠으나, 그 거조가 흉측하고 왈패스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요절하게 한다. 우리나라 역관들도 두렵긴 할 테지만, 조금도 까딱하지 않았다.

저녁에 예부에서 알려 오기를,

 

내일 식후에나 모레 아침결에 황제께서 사신을 만나보실 테니, 일찍 서둘러서 늦지 말라.”

한다. 저녁 뒤에 윤형산(尹亨山)을 찾았다. 마침 홀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가, 손수 담아 불을 붙여서 내게 권하고는,

 

영형 대인께서 귀중하신 몸 안녕하십니까?”

한다. 나는,

 

황제 덕택에 별고는 없으시답니다.”

하였더니, 그는 또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묻기에 나는,

 

이는 열수(冽水) 지방의 방언(方言)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공(尹公)은 또,

 

귀국에 악경(樂經)이 있다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는 중에 기공(奇公)이 와서 악경이란 글자를 보고는 역시,

 

귀국에 또 안부자(顔夫子 안회(顔回))가 지은 책이 있으나, 중국에 오는 사신(使臣)이 이 두 책을 지니고 오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지 못한다 하니, 정말 그렇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계신데 안회(顔回)가 어찌 책을 지었으리까. 또 진() ()》ㆍ《()를 불살랐으니 어찌 악경만이 빠졌을 수 있으리까.”

하였더니, 기공은,

 

참 그럴 터이죠.”

한다. 나는 또,

 

중국은 문명(文明)이 집중되는 곳이니, 만일 우리나라에 참으로 이 두 가지 책이 있어서 가져 오려는 자가 있었다면, 이는 모든 신령이 두호할 일이거늘, 어찌 강물을 잘 건너지 못하였으리까.”

하였다. 윤공은,

 

옳은 말씀이어요. 고려지(高麗志)가 일본(日本)에서 나왔으니까요.”

하기에, 나는,

 

고려지라니, 몇 권이나 됩디까?”

하였더니, 윤공은,

 

난완(蘭畹) 무공련(武公璉)이 초() 청정쇄어(蜻蜓瑣語)에 고려서목(高麗書目)이 있습디다.”

한다. 기공이 나를 이끌고 나와서 달을 구경하는데, 이때 달빛이 낮같이 밝았다. 나는,

 

달 속에 만일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달에서 땅을 바라보는 이 있어서, 그 난간(欄干) 밑에 비겨 서서 우리와 함께 땅의 빛이 달에 가득함을 구경할 터이죠.”

하였더니, 기공이 난간을 치면서 기이한 말이라 일컬었다.

 

 

[C-001]병진(丙辰) :  병진 두 글자는 일재본에 의하여 추록했는데, 다른 여러 본에는 탈락되었다.

[D-001]조방(朝房) : 조회하러 들어갈 때의 대기실.

[D-002]조수선(曹秀先) : 당시 예부 상서. 자는 빙지(氷持), 호는 지산(地山).

[D-003]덕보(德甫) : 소작락덕보(素綽絡德保). ()는 보()의 그릇된 것이다. 자는 중용(仲容).

[D-004]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무릎을 꿇고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중국 최대의 경례.

[D-005]반선(班禪) : 서장의 국교인 라마교의 교주요, 최고 통치자. 다음 반선시말(班禪始末)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D-006]혹정(鵠汀)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었으나, 이제 원음을 따랐다.

[D-007]학성(郝成)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으나, 이에서는 원음을 좇았다.

[D-008]삼종(三從) : 의례(儀禮)에 나오는 말.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을 따르는 것.

[D-009]시분(尸奔) : 시체를 따라서 음분(淫奔)하는 것.

[D-010]절음(節淫) : 절개를 구실로 한 서방질.

[D-011]똥을 맛보았다 : 남북조 시대 유검루(庾黔婁)의 고사.

[D-012]눈 속에서 …… 캐내었다 : 맹종(孟宗)의 고사.

[D-013]잉어[鯉魚]를 잡았다 : 왕상(王祥)의 고사.

[D-014]육수부(陸秀夫) ……  : 송말의 충신. 최후에 애산(厓山)에서 임금을 업고 바다로 들어갔다.

[D-015]방효유(方孝孺) …… 받은 것 : 명초의 학자. 자는 희직(希直). 연왕(燕王)의 즉위조서(卽位詔書)의 기안을 거부하고는, 온 집안이 학살당했다.

[D-016]철현(鐵鉉) …… 한 것 : 명초의 명장. 연왕에게 사로잡혀서 악형을 당했다.

[D-017]원삼(圓衫) :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연두색 길에 자주색 깃을 달고 색동을 달아 지었다.

[D-018]당의(唐衣) : 역시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거죽은 초록빛, 안은 다홍빛이고,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며, 앞은 짧고 뒤는 길게 지었다.

[D-019]남자는 …… 말라 : 청초에 한족이 만족에 대하여 십부종(十不從)을 부르짖었는데, 그 열 가지의 첫째가 곧, “남자는 그들을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D-020]남당(南唐) : 오대 때 남경에 수도를 정했던 나라.

[D-021]장소랑(張宵娘) : 남당 후주(後主)의 궁인. 초승달같이 작은 발로 금련(金蓮) 위에서 춤추어서 후주의 마음을 고혹하게 하였으나, 남당이 망하매 송에게 사로잡히었다.

[D-022]회음(誨淫) : 그 발의 좁은 것으로 모든 사내들의 음탕한 생각을 맹동시킬 수 있다는 것. 역경(易經), “여인이 얼굴을 곱게 차림은 음란을 지도하는 것이다.” 하였다.

[D-023]서번(西番)의 성승(聖僧) : 라마교 승려. 서번은 티베트를 중심한 중앙아시아 지방을 총칭해 부르는 지명. ‘은 다른 본에 으로 된 것이 있으나 그릇되었다.

[D-024]하원길(夏原吉) : 명의 홍무 때 명신. 다섯 조정을 역사(歷事)하였으며, 대신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D-025]전신(轉身) : 라마교에서 말하는 전생(轉生). 반선이 죽는 순간 국내 다른 집에서 아기로 다시 태어나면, 그 아기를 찾아 길러서 후계자로 삼는다 한다.

[D-026]욱리자(郁離子) : 명 유기(劉基)의 별호. 이내 그의 저서의 이름이 되었다.

[D-027]() : ‘()’ 원 나라라는 의미로도 통한다.

[D-028]계림유사(鷄林類事) : () 손목(孫穆)이 우리나라 고사(故事)를 적은 책. 계림은 경주(慶州)의 고호.

[D-029]공자가 …… 지었으리까 : 논어에 나오는 안회의, “선생님이 계시니 제가 어찌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해학조로 이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사(丁巳)

 

 

개다.

새벽에 사신이 궐내로 들어갔다. 덕상서(德尙書)가 사신과 인사를 나눈 뒤에,

 

내일은 의당 만나보시겠다는 명령이 내릴 것이나, 오늘 역시 반드시 없으리라고는 기필할 수 없겠은즉, 잠깐 조방(朝房)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한다. 사신이 모두 조방에 들어간즉, 황제가 또 어찬(御饌) 세 그릇을 내리었는데, 그 내용은 어제 것과 같았다. 나는 궐문 밖에 나가서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하였다. 어제 아침보다 더 분답하여 검은 티끌이 공중에 가득하며, 길가 다방(茶房)과 주점(酒店)에 수레와 말이 들끓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속이 헛헛하여 혼자 사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 젊은 중이 준마(駿馬)를 타고서 흑단(黑緞)으로 만든 방관(方冠)을 쓰고 공단으로 지은 도포(道袍)를 입었는데, 얼굴도 아름답고 의관의 차림도 말쑥한 품이, 중인 것이 아까웠다.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치다가, 아주 큰 노새를 타고 오는 한 사람과 만나 말 위에서 서로 손잡고 반기더니, 중이 별안간 성낸 빛을 띠었다. 그러다가 둘이 다 목소리를 높이더니 마침내 말 위에서 서로 때리었다. 중이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또 한 손으로 머리를 팬다. 노새 탄 자는 몸을 기울이며 약간 비키더니, 모자가 떨어져서 목에 걸렸다. 그 역시 몸이 건장하고 머리와 수염이 약간 희끗희끗한데, 그 기색을 살피니 중에게 조금 꿀리는 모양이다. 둘이 서로 붙안은 채 안장에서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처음엔 노새 탔던 자가 중을 가로탔으나, 나중에는 중이 뒤쳐서 위에 올랐다. 제각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 서로 때릴 수는 없고, 다만 얼굴에 침을 뱉을 뿐이다. 노새와 말은 마주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굴러갈 뿐, 에워싸 구경하는 사람도 없고, 풀어 말리는 자도 없었다. 서로 쳐다보고 내려다보면서 헐떡헐떡할 뿐이다.

한 과일점에 들렀다. 마침 새로 난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노전(老錢 중국의 엽전(葉錢)) 일백(一陌) 열여섯 닢이 우리나라 한 돈에 해당된다. 으로 배 두 개를 사가지고 나오니, 맞은편 술집의 깃대가 헌함 앞에 펄럭이고, 은호(銀壺)주병(酒甁)이 처마 밖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푸른 난간이 공중에 걸쳤고, 금빛 현판은 햇빛에 어린다. 좌우의 푸른 술기[酒旗]에는,

 

신선의 옥패 소리 이곳에 머물렀고 / 神仙留玉佩

공경의 금초구는 끌러서 주는구나 / 公卿解金貂

라 씌어 있다. 다락 밑에는 수레와 말이 몇이 놓여 있고, 다락 위에선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벌과 모기 떼 같았다. 나는 발걸음 가는 대로 다락 위로 올라가니, 계단이 열둘이었다. 탁자를 사이에 놓고 교의에 앉아 혹은 서넛, 혹은 대여섯 사람들이 끼리끼리 둘러앉았는데, 모두 몽고나 회자(回子)들이요, 무려 수십 패였다. 몽고 사람의 머리에 쓴 것은 마치 우리나라 쟁반 같고, 모자가 없으며, 그 위에는 양털로 꾸몄는데 누렇게 물들였다. 혹은 갓을 쓴 자도 없지 않으나, 그 모양은 우리나라 전립(氊笠)과 같은데, 혹은 등()으로 하고, 혹은 가죽으로 하여 안팎에 금을 칠하고, 혹은 오색 빛깔로 구름무늬 같은 것을 그렸다. 모두 누런 웃옷에 붉은 바지를 입었고, 회자는 대체로 붉은 옷을 입었으나, 또한 검은 옷도 많았다. 붉은 전()으로 고깔을 만들어 썼으나, 모자가 너무 길어서 다만 앞뒤에 차양을 달았을 뿐, 그 모양이 마치 돌돌 말린 연잎이 물 속에서 갓 나온 것 같고, 또 약을 가는 쇠 연[鐵硏]과 같이 두 끝이 뾰족하여 가볍고 부박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가 쓴 갓은 전립(氈笠) 이른바 갓이란 벙거지이다. 과 같은데 은으로 술을 새기고 꼭지에 공작 깃을 꽂았으며, 턱을 수정 끈으로 매었으니, 두 오랑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만주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중국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다락 위에 없었다. 두 오랑캐들의 생김생김이 사납고도 더러워서,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나, 이미 술을 청했는지라 그 중 한 좋은 교의를 골라서 앉았다. 술심부름꾼이 와서,

 

몇 냥()어치 술을 마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술 무게를 달아 파는 것이다. 나는,

 

넉 냥만 쳐 오려무나.”

하고 가르쳐 주었다. 심부름꾼이 가서 술을 데우려 하기에, 나는,

 

데워선 못 써. 찬 것 그대로 달아 와.”

했더니, 술심부름꾼이 웃으면서 부어 와서 먼저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벌여 놓으므로,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술잔을 가져 와.”

하여, 모두 부어서 대번에 다 들이켰다. 뭇 되놈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내가 쾌하게 마시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얌전하여서, 비록 한여름에라도 반드시 데워 먹을뿐더러, 심지어 소로(燒露 소주)라도 끓이며, 술잔은 은행 알만한데도 오히려 이빨에 대어서 조금씩 마시고, 탁자 위에 남겨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마시며, 단번에 쭈욱 기울이는 법이 없고, 되놈들도 이와 같아서, 세속에서 이른바 큰 종지나 사발에 따라 마시는 일은 아주 없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단숨에 마신 것은, 이것으로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담한 척하려 함이니, 이는 실로 겁쟁이 짓이요, 용기가 아니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랄 때 여러 되가 이미 3()쯤 놀랐는데, 단번에 마시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도리어 저쪽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주머니에서 8푼을 꺼내어 심부름꾼에게 술값을 치러 주고 나오려는데, 여러 되가 모두 교의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 중 한 사람이 제 자리를 비워서 나를 붙들어 앉힌다. 저희는 호의로 하는 것이나, 나는 벌써 등에 땀이 배었다. 내 어릴 때 하인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술 먹는 것을 보았는데, 그 주령(酒令) 중에,

 

자기 집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 본 적 없이 나이 일흔에 생남하고 보니, 등이 땀에 젖었구려.”

라는 구절이 있었다. 내 성미가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므로, 사흘 동안 허리가 시큰거렸다. 오늘 아침에 만 리 변새에서 문득 뭇 되놈과 더불어 술을 마시매, 만일 주령을 세운다면 정말,

 

등에 땀이 솟는다.”

하여야 의당할 것이리라. 한 되놈이 일어나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그릇에 남은 차()를 난간 밖에 버리고는, 그 석잔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켜고, 몸을 돌려 한 번 읍한 뒤 큰 걸음으로 층층대를 내려오는데, 머리끝이 으쓱하여 무엇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와서 길 가운데 서서 위층을 쳐다보니,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내 말을 하는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오니 점심때가 아직 멀었기에 윤형산(尹亨山)의 처소에 들렀더니, 조정에 나가고 없었다. 다시 기 안찰(奇按察)을 찾았으나, 역시 없었다.

또 왕혹정(王鵠汀)을 찾았더니, 혹정이 구정시집서(毬亭詩集序) 한 수()를 내어 보이는데, 글도 그리 잘 되지 못하였고, 또 전편이 오로지 강희 황제와 지금 황제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을 기술한 것으로, 그들을 요순처럼 높인 것이 지나치게 번거롭다. 미처 다 읽기 전에 창대가 와서,

 

아까 황제께서 사신을 불러 보시고, 또 활불(活佛)을 가보라 하십니다.”

한다. 나는 밥을 재촉하여 먹고 의주 비장(義州裨將)과 함께 궐내에 들어가서 사신을 찾았으나, 이미 반선(班禪)의 처소로 가고 없었다. 곧 궐문을 나오니, 황륙자(皇六子)가 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문 밖에 매어 두고, 구종들과 더불어 바쁜 걸음으로 들어간다. 어제는 말을 탄 채 그대로 들어가더니, 오늘은 말에서 내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궁성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드니, 서북쪽 일대의 궁관(宮觀)과 사찰(寺刹)들이 면면이 눈에 들어온다. 혹은 너덧 층 누각도 있으니, 이는 이른바,

 

상강에 배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들 제 / 帆隨湘轉

형산 아홉 봉우리 그 얼굴 다 뵈누나 / 望衡九面

가 곧 이를 이름이리라. 군포(軍舖)가 있는 곳마다 숙위(宿衛)하는 장정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다가, 내가 혼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고 서로 다투어 서북쪽을 멀리 가리켜 준다. 그제서야 내를 끼고 가니, 물가에 흰 군막이 수천이나 있는데, 모두 수자리 사는 몽고병이었다. 또 북녘으로 눈을 돌려 멀리 하늘 가를 바라본즉, 두 눈이 별안간 어지러워진다. 반공에 우뚝 황금건물[金屋]이 솟았는데, 구름 속에 들어가 햇빛에 눈이 부신 까닭이다. 강에는 거의 1()나 되는 다리가 놓였으며, 난간을 꾸민 단청이 서로 어리었고, 몇 사람이 그 위로 다니는 것이 아련히 그림 같다. 이 다리를 건너고자 하니, 모래 위로 사람이 급히 오면서 손을 휘젓는 것이, 건너지 말라는 것 같다. 마음은 몹시 바빠서 말을 곧장 채찍질하였으나, 오히려 더딘 것 같으므로 마침내 말에서 내려 강을 따라 올라가니, 돌다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에 문을 들어서니, 기이한 바위와 이상한 돌들이 층층으로 쌓였고, 그 솜씨의 교묘함은 사람 아닌 귀신의 수법인 듯싶다.

사신과 당번 역관은, 궐내에서 바로 왔으므로 내게 미처 알리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기던 차에 내가 나타난 것이 뜻밖이어서, 모두들 내게 구경 벽()이 심하다고 조롱한다.

연경의 숲 사이에도 자주다홍초록파랑 등 여러 빛깔의 기와로 이은 집이 드러나 보이고, 더러는 정각(亭閣) 꼭대기에 금빛 호로병을 세운 것은 있었으나, 지붕 위에 금기와를 올린 것은 못 보았다. 이제 이 전(殿)에 덮은 기와가 비록 순금인지 도금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2층 대전(大殿)이 둘, 다락 하나, 문 셋이었고, 그 나머지 정각은 여러 빛깔로 된 유리기와인데, 이에 비기면 무색하여 보잘것이 없었다.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는 가끔 캐어서 고연(古硏)으로 쓰나, 이는 가마에 구운 것이요,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기와는 어느 때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詩人)이 이른바,

 

옥섬돌에 금지붕이여.”

하고 떠들던 것이 정말 오늘 내가 보는 것과 같음인지, 그 일이 사전(史傳) 중에 나타난 것으로는,

 

한 성제(漢成帝)가 소의(昭儀)를 위하여 집을 짓는데, 그 체()를 모두 구리로 하여 황금을 입히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가 이에 주()를 내어,

 

()란 문지방이니, 구리를 그 위에 입히고, 게다가 또 금을 입히었다.”

하였고, 또 사전에 이르기를,

 

바람벽 가운데엔 가끔 황금항(黃金缸)을 해 박고는, 남전산(藍田山)에서 나는 옥과 진주와 비취(翡翠)의 날개로 하였다.”

하였는데, 복건은 이르기를,

 

()이란 벽 가운데 가로지르는 것이다.”

하였고, 진작(晉灼),

 

금환(金環)으로 꾸민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영인(伶人) ()이나 반맹견(班孟堅)의 무리가 몇 번이나 힘껏 황금(黃金)이란 글자를 되풀이하여, 천 년 뒤에 한번 책을 펼치면 오히려 눈부시고 휘황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은 벽이나 문지방에 금칠한 정도임을 보고, 역사를 쓰는 이들이 지나치게 과장했을 뿐이리라. 참으로 소의(昭儀)의 자매(姉妹)에게 이 집을 보였던들, 반드시 몸부림치며 침대에 쓰러져 울고 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성제(成帝)가 화려하게 하고 싶어하였더라도, 안창(安昌)무양(武陽)의 무리가 모두 유자(儒者)인지라, 반드시 옛 경서를 이끌어 붙여서 이를 반대했을 것인즉, 성제의 역량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었고, 또 설혹 그 뜻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반맹견의 필력(筆力)으로써 과연 어떻게 포장(舖張)하였을까. 알지 못하겠다. 대뜸,

 

금전(金殿)이 어리어리하구나.”

하지 않았겠느냐. 필시 이를 지워 버렸을 것이요, ,

 

금궐(金闕)이 하늘 높이 솟았다.”

고 하였겠지. 그러고 나서는 한번 읊어 보고 또 지워 버렸을 것이요, ,

 

“2층 대궐을 세우고 기와에 황금을 칠했다.”

하였거나, 또는,

 

임금께서 황금전(黃金殿)을 세웠다.”

라 하였을까. 비록 양한(兩漢) 때 문장이라 하였지만, 그는 늘 작은 제목을 커다랗게 과장하니, 이는 천고 작가(作家)들에게 끼친 한()이 아닐 수 없겠다. 예를 들면, 저 궁실을 잘 그린다고 하더라도 궁실에는 사면이 있고 또 안팎이 있으며, 또 덧놓이고 겹친 곳도 없지 않다. 이에 비록 서양의 그림이 제아무리 교묘하단들, 다만 한 면을 그렸으니 남은 세 면은 그릴 수 없을 것이요, 밖은 그려도 속은 그릴 수 없으며, 복전(複殿)첩사(疊榭)와 회랑(回廊)중각(重閣)은 단지 그 날아갈 듯한 처마와 아련한 대마루를 모사했을 뿐이요, 그 파고 새김이 섬세하여 털끝 같으니, 그림으로는 이를 그려 낼 수 없는 것이 곧 천고 화가(畵家)가 끼친 한이리라. 그러므로, 우리 공부자께서 이미 이 두 가지에 대하여 탄식하시되,

 

글월은 말을 다할 수 없고, 그림은 뜻을 다할 수 없다.”

하였던 것이다. 천하에 사관(寺觀)이 만을 헤아리지만, 금을 입힌 것은 다만 산서(山西) 오대산(五臺山)의 금각사(金閣寺)가 있을 뿐이다. 당 대종(唐代宗 이예(李豫)) 대력(大曆) 2(767)에 왕진(王縉)이 정승이 되어, 중서성(中書省) 부첩(符牒)을 내려서 오대산의 중 수십 명을 사방에 흩어 보내어 시주(施主)를 모아 이를 짓게 하되, 구리쇠로 기와를 굽고 금을 입히어서 그 비용이 여러 만금인데, 그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이제 이 기와 역시 구리쇠로 굽고 금을 씌웠을 것이다.

내가 요양의 거리에서 잠시 쉴 제, 모두들 다투어,

 

황금, 갖고 오셨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오.”

하였더니, 그들은 모두 비웃는다. 심양산해관영평통주를 지나칠 때에도 모두들 금을 묻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가 번번이 처음같이 대답하면, 그들은 문득 제 모자 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게, 조선 금이라오.”

한다. 연암(燕巖)에 있는 우리 집이 송도(松都)에 가까워서 가끔 그 곳에 드나들었는데, 송도는 곧 연상(燕商 연경에 드나드는 장사치)을 기르는 곳이었으므로, 해마다 칠팔월서부터 시월까지의 사이에 금값이 폭등하여, 한 푼쭝에 엽전으로 마흔다섯 닢, 또는 쉰 닢씩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을 쓸 곳이 별로 없으며, 문무(文武) 이품(二品) 이상의 금관자나 금띠로 말하더라도, 늘 만드는 것이 아니요, 흔히들 서로 빌려쓰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가락지나 머리꽂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인즉, 금은 천하기가 흙이나 다름없을 것이어늘, 그 귀함이 이러함은 어인 까닭일까.

내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박천(博川) 땅에 이르러 말을 길 옆에 세우고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일 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가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모두 8~9세 되는 사내와 계집아이들을 데리고 마치 흉년에 유리하여 가는 것 같기에 이상히 여겨서 물은즉,

 

성천(成川) 금광으로 가는 것이옵니다.”

한다. 그 기계를 보니, 나무 바가지 하나, 포대 하나, 끌 하나일 뿐인데, 끌로 파내어 포대에 담으며 바가지로 이는 것이다. 온종일 흙 한 포대만 일면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을 수 있으며,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더욱 잘 파서일뿐더러, 눈이 밝아서 금을 잘 얻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 종일 하면 금을 얼마나 얻는 거요.”

하였더니, 그들은,

 

그건 재수에 달렸지요. 혹은 하루에 여남은 알을 얻는 일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서너 알에 그치며, 재수가 트이면 삽시에 부자가 된답니다.”

한다.

 

그럼, 그 알이 어떻게 생겼던고.”

하였더니,

 

거의 피 낱알만합지요.”

한다. 이는 농사짓기보다 이익이 나으니,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어서,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되므로, 비단 농사꾼들 태반이 농장을 떠나 이에 모여들 뿐 아니라, 사방의 건달패와 놈팽이들이 달려와 저절로 부락이 이루어져 무려 십여만 명이 들끓고, 쌀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물건이 모여들어, 술과 밥이며 떡과 엿 같은 것을 파는 장사들이 산골에 가득 차 있다 한다.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 그 금이 어디로 가며, 그 캐낸 금이 많은데도 그 값이 더욱 오름이 무슨 까닭일까. 이제 이 기와에 물들인 것이 우리나라 금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청초의 세폐(歲幣)에 제일 먼저 금을 면제하였음은, 토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간상배가 법을 어기고 가만히 이를 팔다가, 혹시 이것이 청의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면, 비단 사단이 생길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이미 황금으로 지붕을 칠하였으니 우리나라에 금광을 열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 위의 작은 정각의 창호는 모두 우리나라 종이로 도배하였다. 창 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고, 혹은 교의탁자향로화병 등이 모두 운치 있어 보인다. 사신들이 하인들을 문 밖에 남겨 두고서 함부로 들어오지 말도록 엄명하였는데, 조금 뒤에 모두 기어올라왔다. 역관과 통관들이 크게 놀라서 꾸짖어 도로 나가게 하자, 그들은,

 

저희들이 감히 함부로 들어왔겠습니까. 문지기가 오히려 저희들이 들어가지 않을까 저어하는 듯이 인도해서 올라온 것이옵니다.”

한다. 찰십륜포(札什倫布)와 반선시말(班禪始末)의 기록이 따로 있다.

정사가 말하기를, 아침나절 사찬(賜饌)이 있은 뒤 조금 지나서 인대(引對)하겠다는 명령이 내려서, 통관이 인도하여 정문 앞에 이르렀더니, 그 동쪽 협문에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섰거나 혹은 앉아 있었다. 덕상서와 낭중 몇 사람이 와서, 사신의 출입을 주선하는 절차를 지휘하고 갔다. 이윽고 군기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대의 나라에도 사찰이 있으며, 또 관제묘도 있는지?”

하고 묻더니, 얼마 아니 되어 황제가 정문으로 해서 문 안의 벽돌을 깔아 놓은 위에 나앉았다. 교의와 탁자도 내오지 않고, 다만 평상에 누런 보료를 깔았으며, 좌우의 시위는 모두 누런 옷을 입었는데, 그 중에서 칼을 찬 자는 서너 쌍에 불과하고, 누런 일산을 받들고 선 자는 두 쌍이다.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하다. 먼저 회자(回子)의 태자가 앞으로 나와 몇 마디 아뢰고 물러간 뒤에, 사신과 세 통사(通事)를 나오라 하매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는 무릎이 땅에 닿을 뿐, 뒤를 붙이고 앉은 것은 아니다. 황제가,

 

국왕(國王)께서 평안하신가?”

하고 물으니, 사신은 공손히,

 

평안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또,

 

만주말을 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매, 상통사(上通事) 윤갑종(尹甲宗),

 

약간 아옵니다.”

하고 만주말로 대답하였더니, 황제가 좌우를 돌아보며 기뻐하며 웃었다. 황제는 모난 얼굴에 희맑으면서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수염이 반쯤 희고, 나이는 예순쯤 된 듯싶다. 애연히 춘풍화기를 지녔다. 사신이 반열(班列)에 물러서자, 무사 예닐곱이 차례로 들어와 활을 쏘는데, 살 하나를 쏘고는 반드시 꿇어앉아서 고함을 친다. 그리하여 과녁을 맞힌 자가 두 명인데, 그 과녁은 마치 우리나라의, 풀로 만든 과녁과 같으면서 한복판에 짐승 한 마리를 그렸다. 활쏘기가 끝나자 황제가 곧 돌아갈 제, 내시들은 모두 물러가고 사신도 역시 물러갔다. 문 하나를 채 못 나와서 군기(軍機)가 와서,

 

사신은 곧장 찰십륜포(札什倫布)로 가서 반선(班禪) 액이덕니(額爾德尼)를 뵈라.”

하고 황제의 전갈을 내린다. 옛 역사를 상고하건대, 서번(西番)은 멀리 사천(四川)운남(雲南)의 밖에 있는데, 이른바 서장(西藏)의 땅이다. 대체로 변방에 있어서, 중국과 거리가 더욱 멀었다. 강희 59(1720)에 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이 납장한(拉藏汗)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성지(城地)를 점령하여, 묘당을 헐어 버리고 번승(番僧)을 해산시켰다. 그래서 도통(都統) 연신(延信)을 평역장군(平逆將軍)으로, 갈이필(噶爾弼)을 정서장군(定西將軍)으로 삼고는, 장병(將兵)을 거느리고 새로 봉한 달라이라마[達賴刺麻]를 보내어 서장 일대를 평정한 뒤에, 황교(黃敎 라마교의 별칭)를 진흥시켰다 한다. 소위 황교라는 것이 무슨 도()인 줄은 알 수 없겠으나, 대개 몽고 제부(諸部)가 숭배하는 교이므로, 서장이 혹시 침략의 걱정이 있으면, 강희 황제 때부터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영하(寧夏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지명)까지 이르러 장수를 보내서 구원하여 동란을 진정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건륭 을미(1775)에 삭락목(索諾木)이 금천(金川)에서 반기를 들었을 제, 황제가 서장 길이 막힐까보아 두려워해서 아계(阿桂)를 정서장군으로, 풍승액(豊昇額)명량(明亮)을 부장(副將)으로, 해란찰(海蘭察)서상(舒常)을 참찬(叅贊)으로, 복강안(福康安)규림(奎林) 등을 영대(領隊)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쳐서 평정하였으니, 이 역시 서장을 위함이다. 대개 서장의 땅은 황제가 친히 보호하는 곳이요, 그 사람은 천자가 스승으로 섬긴다. 또 황()으로 그 교의 이름을 지은 것은, 혹시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를 숭배함이 아닌가 싶었다.

서장 사람들의 옷과 갓은 모두 누르므로, 몽고 사람이 이를 본받아서 역시 누런 빛을 숭상한다. 그렇다면 황제의 시기함과 사나움이 어찌 유독 이 황화요(黃花謠)를 꺼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서승(西僧)의 이름이 아니라, 서번 땅에서도 이런 이름이 있으니, 괴이하고도 황당(荒唐)하여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운 일이다. 사신은 비록 억지로 나아가 반선(班禪)을 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품었으며, 당번 역관인즉 오히려 일이 날까보아 급급히 미봉(彌縫)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았고, 하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번승과 황제를 욕하고 비방하였다. 왜냐하면, 만국의 공통된 군주로서 한 가지의 거조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태학(太學)에 돌아오매, 중국의 사대부들은 모두 내가 반선을 만나 보았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였거니와, 또한 그 도술(道術)의 신통(神通)함을 극구 칭찬하지 않는 자 없었으니, 그들의 희세(希世) 부회(傅會)의 기풍이 이러하였다. 대개 예로부터 세도의 승침(昇沈)이나 인심의 선악이, 모두 윗사람으로부터 인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학지정(郝志亭)의 집에서 잠시 술을 마셨다. 이날 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수작한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에 싣기로 한다.

 

 

[D-001]한 성제(漢成帝) …… 입히었다 :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소의(昭儀)는 궁녀의 벼슬 이름으로, 당시의 소의는 곧 조비연(趙飛燕) 자매(姊妹)를 가리킨다.

[D-002]안사고(顔師古) : 당 태종(唐太宗) 때의 학자. 한서의 주석을 냈다.

[D-003]바람벽 …… 하였다 : 한서에 나오는 말이다.

[D-004]복건(服虔) : 전한 말기의 학자. 자는 자신(子愼).

[D-005]진작(晉灼) : ()의 학자. 한서음의(漢書音義)를 지었다.

[D-006]영인(伶人) () : 영인의 이름인데, 시대는 미상. 영인은 악관(樂官) 혹은 배우.

[D-007]반맹견(班孟堅) :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 맹견은 자.

[D-008]안창(安昌) : 성제의 스승 안창후 장우(張禹).

[D-009]무양(武陽) : 성제 때의 재상 무양후 설선(薛宣).

[D-010]글월은 …… 없다 :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서 나온 구절.

[D-011]왕진(王縉) : 당의 시인 왕유(王維)의 아우. 자는 하경(夏卿). 대종 때 정승으로 불교를 독신하였다.

[D-012]찰십륜포(札什倫布) : 반선 라마 활불이 살고 있는 곳.

[D-013]액이덕니(額爾德尼) : 반선의 이름.

[D-014]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 : 신강 지방에 있던 준갈이(準噶而) 부족의 장수.

[D-015]납장한(拉藏汗) : 몽고 부족의 추장. 청해고시한(靑海固始汗)의 손자.

[D-016]삭락목(索諾木) : 건륭 때 대금천(大金川)의 토사(土司).

[D-017]금천(金川) : 사천성(四川省) 서북 변경에 있는 물 이름.

[D-018]아계(阿桂) : 아극돈(阿克敦)의 아들. 자는 광정(廣廷).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오(戊午)

 

 

개다.

새벽에 사신이 조반(朝班)에 들어가 광대(廣大)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몹시 졸음이 오므로, 이내 누워서 편안히 잤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천천히 걸어서 궐내에 들어간즉, 사신은 조회에 참여한 지 이미 오래고, 당번 역관 및 모든 비장은 뒤에 떨어져 궁문 밖 낮은 언덕 위에 머물러 있으며, 통관들 역시 이곳에 앉아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음악 소리가 담장 안 가까이 새어 나오기에 좁은 문틈으로 엿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을 돌아 여남은 걸음을 가서 작은 일각문(一角門)이 있는데, 한 쪽은 열려 있고 또 한 쪽은 닫혀 있다. 내가 조금 들어가서 보려 한즉, 군졸 몇이 말리며 문 밖에서 바라보기만을 허용한다. 문 안 사람들은 모두 문을 등진 채 즐비하게 섰는데, 조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마치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듯하였으며, 엿보려고 하여도 작은 틈도 없기에 다만 그들 머리 사이 빈 곳으로 바라본즉, 은은히 한 더미 푸른 뫼에 솔과 잣나무가 울창한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 별안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또 채삼(彩衫)에 수포(繡袍)를 입은 자가,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바르고 허리 이상이 사람들 머리 위로 헌걸차게 솟았으니, 아마 초헌(貂軒)을 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대(舞臺)의 거리는 멀지 않으나 그늘지고 깊숙하여 마치 꿈속에 성찬(盛饌)을 만난 것처럼 먹어도 맛을 알 방법이 없었다. 문지기가 담배를 달라기에 곧 내어 주었다. 또 한 사람이 내가 오랫동안 발꿈치를 들고 선 것을 보고는 걸상[]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게 하기에,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문지방을 짚고 섰었다. 출연하는 자들은 모두 한인(漢人)의 의관(衣冠)으로 차렸으며, 4, 5백 명이 함께 몰려들었다가 또 물러서면서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내가 디디고 선 걸상은 마치 횃대를 탄 오리처럼 되어 오래 서 있기 어렵기에, 돌아나와 작은 언덕의 나무 그늘 밑에 앉았다. 이 날은 몹시 더웠으나, 구경꾼들은 빽빽하게 둘러서 있었다. 그들 중에 수정꼭지를 여러 개 단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어떤 관원(官員)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 청년이 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한다. 그 청년이 잠시 발을 멈추고 종자(從者)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돌아보는 모습이 몹시 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잠자코 있었다. 두 군졸이 채찍을 갖고 와서 사람을 몰아내니, 회자(回子) 하나가 앉았다가 성내며 일어나서 두 군졸의 뺨을 치고 한주먹으로 때려 눕혔다. 청년 관원은 눈을 흘기면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다. 남들에게 물은즉, 수정꼭지 단 자는 곧 호부상서(戶部尙書)화신(和珅)이라 한다.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다만 덕기가 없으며,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한다. 그는 애초 난의사(鑾儀司)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불과 대여섯 해 사이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 복융안(福融安)과 함께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이시요(李侍堯)가 해명(海明)의 뇌물 먹은 것을 적발하여 우민중(于敏中 청 건륭 때의 고관)의 집을 몰수하고 아계(阿桂)를 내친 것이 모두 화신의 힘이었는데, 이런 일은 모두 올봄과 여름 사이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함부로 눈을 뜨고 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이제 여섯 살 나는 딸을 화신의 어린 자식에게 약혼시켰는데, 황제의 나이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노염이 잦으므로 좌우에게 매질하기가 일쑤였으나, 그가 이 어린 딸을 가장 사랑했으므로,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이 번번이 이 어린 딸을 껴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는다. 그러면 황제가 노염을 그친다 한다.

이날 조회 반열에는 차와 음식이 세 차례나 내렸다. 사신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떡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누런 것과 흰 것 두 층으로 괴었는데, 네모가 반듯하였으며, 그 빛은 마치 누런 밀랍(蜜蠟)과 같았다. 단단하고 가늘고도 매끄러워 칼이 잘 들지 않았으며, 그 위층이 더욱 옥처럼 윤기가 나고 기름기가 흘렀으며, 떡 위에는 한 선관(仙官)을 만들어 세웠는데 수염과 눈썹이 생동하는 듯 도포와 홀()이 화려했고, 그 좌우에는 또 선동(仙童)을 세웠는데 그 조각이 몹시 기묘하였다. 이들은 대개 밀가루에다 사탕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 땅에 묻는 허수아비를 만드는 것도 옳지 않다 하였거늘, 하물며 이 인조(人造) 사람을 어찌 차마 먹을 수 있겠는가. 사탕 여남은 가지를 곁들여 담은 것이 한 그릇, 또 양고기가 한 그릇이다. 또 조정 진신(縉紳)들에게 채색 비단과 수놓은 주머니 등을 주었는데, 사신에게는 채단이 다섯 필, 주머니가 여섯 쌍, 담뱃대가 하나이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각기 조금씩 줄여 차등이 있었다.

이날 저녁에는 구름이 끼어 달빛이 흐리었다.

 

 

[D-001]화신(和珅) : 만인. 성은 유호록(鈕祜祿)이요, 자는 치재(致齋).

[D-002]난의사(鑾儀司) : 황제의 거둥 때에 필요한 사무와 의장(儀仗)을 맡은 관서.

[D-003]구문(九門) : 황성의 각 성문을 지키는 장군.

[D-004]복융안(福融安) : 복강안(福康安)의 잘못인 듯하다.

[D-005]이시요(李侍堯) : 청의 건륭 때에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먹기를 좋아하였다.

[D-006]땅에 …… 않다 : 맹자(孟子)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 4에서 맹자가 공자의 말씀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공자께서 처음 나무 허수아비[]를 만든 자는 그 자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례에 썼기 때문입니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미(己未)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마침내 쾌청하였다.

사신이 만수절 하반(賀班)에 참가하러 오경(五更)에 대궐로 들어갔다. 나는 포근히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조용히 걸어서 대궐 밑에 이르렀다. 누런 보가 덮인 걸방짐 일곱을 권문 앞에 두고 쉰다. 짐 속에는 옥으로 만든 그릇과 골동이 담겨 있고, 또 보통 사람만큼 커다란 금부처 하나를 앉혀 놓았으니, 이들은 모두 호부상서 화신이 진상한 것이라 한다. 이 날도 음식을 세 차례나 내리고, 또 사신에게 백자(白瓷)로 만든 차호(茶壺) 하나, 차종(茶鐘)()까지 갖추어 한 벌, 실로 뜬 빈랑(檳榔) 주머니 하나, 칼 하나, 자양(紫陽)에서 만든 주석 차호 하나씩을 주었고, 또 저녁에 작은 황문(黃門 환시(宦侍))이 와서 모난 주석 항아리 하나를 내렸다. 통관이,

 

이건 차().”

하고 설명해 주자, 황문은 곧 달려가 버린다. 누런 비단으로 항아리 마개를 봉했기에, 떼고 본즉 빛이 누르면서도 약간 붉어 술과 같았다. 서장관이,

 

이건, 정말 황봉주(黃封酒).”

한다. 맛이 달고 향내가 풍겨 술 기운이란 전혀 없었다. 다 따르자, 여지(荔支) 여남은 개가 떠오른다. 모두들,

 

이건, 여지로 빚은 것이야.”

하고 각기 한 잔씩 마시고는,

 

참 좋은 술이구려.”

한다. 비장과 역관들에게 찻잔이 이르니 마시지 않는 자도 있거니와, 대번에 들이키는 이가 없다. 이는 너무 지나치게 취할까 보아서 그런 것이다. 통관들이 목을 내밀며 침을 흘린다. 수역이 남은 것을 얻어서 주었더니 돌려가며 맛보고는,

 

아름다운 궁중 술이야.”

하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윽고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취했어, 취했구먼.”

한다. 이날 밤에 기공(奇公)을 찾았을 때 한 잔을 따라서 보였더니, 기공은,

 

이건 술이 아닌 여지즙(荔支汁)이랍니다.”

하며 깔깔대고는, 곧 소주 대여섯 잔을 내어 거기다가 타니, 맑은 빛깔 매운 맛에 이상한 향내가 배로 풍긴다. 이는 대개 여지 향내가 술 기운을 얻어서 더욱 은은한 향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까 꿀물을 마시고 향내를 논한 것이나 여지즙을 맛보고 취함을 말하는 것이, 곧 종 소리를 듣고서 해를 측량함이나 매실나무를 바라보고 갈증을 푸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날 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기공과 함께 명륜당(明倫堂)으로 나가 난간 밑을 거닐었다. 나는 달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달의 몸뚱이는 언제나 둥글어 햇빛을 빙 둘러 받고 보니, 이 때문에 지구(地球)에서 본 달이 찼다가 기울었다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저녁 저 달을 온 세계가 한가지로 본다면, 보는 장소에 따라서 달은 살지고 여위며 깊고 옅음이 있지 않을까. 별은 달보다 크고, 해는 땅덩이보다 크되, 보기에는 그와 달라 보이는 것이 멀고 가까운 까닭이 아닐까. 만약에 이것이 참말이라면, 해와 땅과 달 등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별들로 보임이 아닐까. 별에서 땅을 볼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땅의 한 줄이 해와 달을 함께 꿰어서 반짝반짝하는 세 낱이 마치 저 하고(河鼓)와 같지 않겠는가. 땅껍질에 붙어 있는 가지가지의 만물은 어떤 것이고 모양이 모두 둥글둥글할 뿐, 하나도 네모진 것은 볼 수가 없는데, 다만 방죽(方竹)과 익모초(益母草) 줄기가 네모졌지마는, 이것 역시 네모 반듯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은즉, 네모 반듯한 물건은 과연 찾을 수 없거늘, 무엇 때문에 땅에 대해서만 네모난 물건이라고들 하였을까. 만일에 땅덩어리를 네모졌다고 하면, 저 월식(月蝕)을 할 때에 달을 검게 먹어 들어가는 변두리가 왜 활등처럼 둥글게 보일까. 땅덩이가 네모지다고 우기는 자는 무어나 방정(方正)해야 된다는 대의(大義)에 입각해서 물체(物體)를 이해시키려 함이요, 땅덩이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자는 실제에 뵈는 형태를 믿고 다른 뜻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아서, 땅덩이란 실제 물체는 둥글고, 대의로 말한다면 모나다는 것이 아닐까.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도는 궤도가 해는 크고 달은 작으며, 도는 속도가 늦고 빠름이 없어 한 해와 한 달은 일정한 도수에 맞거늘, 해와 달이 땅을 둘러싸고 왼편으로 돈다는 말은 우물 속에서 보는 지식이 아닐까. 땅덩이의 본바탕이란 둥글둥글 허공에 걸려, 사방도 없고 아래위도 없이 마치 쐐기 돌 듯 돌다가 햇빛을 처음 받은 곳을 날이 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더 돌아, 처음에 해와 마주 대하는 데는 차차 어긋나 가며 멀어져서, 오정도 되고 해가 기울기도 하여 밤과 낮이 되는 것이 아닐까. 비유해 말하자면, 창구멍이 뚫어진 곳으로부터 햇살이 새어 콩 낱알만하게 비친다고 하자. 창 아래는 맷돌을 햇살 비치는 자리에 놓고, 바로 햇살 비치는 자리에 먹으로써 표를 해 두고는, 그 다음에 맷돌을 돌리고 보면 먹 자국은 햇살 비치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 서로 떨어져 사이가 멀어져 갈 것인가. 맷돌짝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햇살 비치는 자리와 먹 자국은 잠시 마주 포개어졌다가는 또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니, 지구가 한 바퀴 돌아 하루가 되는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닐까. 또 등불 앞에 놓인 물레를 가만히 두고 보면, 물레바퀴가 돌 적에는 물레바퀴의 군데군데가 등불 빛을 받고 있으나, 그렇다고 등불이 물레바퀴를 돌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리라. 지구의 밝고 어두운 이치도 역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면 해와 달은 애초부터 뜨고 지는 것이 아니요, 또 오가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땅이 움직여 돌지를 않고 언제나 한 자리에 박혀 있다고 너무 믿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 아닐까. 명백한 이론을 찾지 못하면, 이 땅의 춘동을 가리켜 그 방위를 따라 노는 것이라고 해 버렸으니, 결국 논다는 것은 나가고 물러서고 하는 것을 말함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미 논다고 할 바엔 차라리 돈다고 함이 어떨까. 저 착각을 한 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땅덩이가 돌 때는 땅 위에 실렸던 일체 물건들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기울어져 떨어질 터이라고. 만일에 쏟아져 떨어진다면 어느 땅에 떨어질 것인가. 만일에 그렇다면, 저 허공에 달린 별들과 은하(銀河)는 기운을 따라 돌아가면서 무엇 때문에 떨어져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덩이진 물건이, 어째서 썩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견딜 것인가. 땅덩이 거죽에 생물들이 붙어서 살 때는, 공과 같은 물체의 표면에다 발을 붙이고 어디서나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비겨 본다면, 수많은 개미와 벌들이 혹시는 꼿꼿이 선 바람벽에 기어가기도 하고, 혹은 천장에 붙어서 사는 것을 누가 바람벽에 가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이며, 누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인가. 지금도 이 땅덩이 밑에는 역시 바다가 있을 터인데, 만일에 땅 거죽에 붙어 사는 생물들이 아니 떨어지는가 의심을 한다면, 땅 밑 바다는 누가 둑을 쌓아 두었다고 물이 아니 쏟아지고 그대로 있을 것인가. 저 하늘에 총총한 별들은 그 크기가 얼마씩이나 될 것이며, 역시 거죽 껍질은 지구나 다름없지 않을까. 별도 껍데기가 있을진대 생물이 붙어 살 터이니, 역시 그러할까. 만일에 생물이 있다면, 따로 또 세상을 배판해 놓고 새끼까지 쳐가면서 살지나 않을는지. 지구는 둥글게 생겨 원래 음양이 없을 터인데, 해로부터 불기운을 받고 달로부터 물기운을 얻어, 흡사 살림꾼이 동쪽 이웃에서 불을 빌리고 서쪽 집에서 물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매, 한 쪽은 불이요 또 한 쪽은 물이라 하여 이를 소위 음양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억지로 오행(五行)이라 이름붙여 저마다 서로 상생한다 하고 서로 상극한다고 하나, 큰 바다에 풍랑이 일 때에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현상은 무슨 까닭이라 할까.얼음 속에는 누에가 살고, 불 속에는 쥐가 살고, 물 속에는 고기가 살아서, 저들 각종 생물들은 어디나 붙여 있는 곳을 제각기 땅이라 한다. 만일에 달 속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어떤 두 명의 달세계의 사람이 난간 머리에 마주 서서 달빛 아닌 땅빛의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속삭이지 아니한다고 누가 증명할 것이랴.”

기공은 껄껄대며,

 

참 기이한 이야기요.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처음 말했지마는 땅덩이가 돈단 말은 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이 학설은 선생이 터득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으신 것인가요.”

한다. 나는,

 

사람의 일도 모르는 터에 하늘 일을 어찌 알겠소. 나는 본디 도수(度數)의 학()에 어두우니까요. 비록 칠원옹(漆園翁 장주(莊周)의 별칭)의 깊은 생각으로서도 아득한 우주에 관한 지식은 덮어 두고 해설을 하지 않았더군요. 이것은 실로 내가 터득한 지식이 아니라 귀동냥이랍니다. 우리 친구에 홍대용(洪大容)이라는 사람이 있어 호는 담헌(湛軒)인데, 그의 학문은 좁지 않아서 일찍이 나와 함께 달구경을 하면서 장남 삼아 이런 이야기를 터뜨렸답니다. 대체로 황당하여 종잡기 어려우나 비록 성지(聖智)를 지닌 이라도 이 학설을 깨뜨리기는 어려울까 합니다.”

하였더니, 기공은 크게 웃으며,

 

남의 꿈속 길을 동행할 수야 없지요. 당신의 친구 되시는 담헌 선생(湛軒先生)께서는 이에 관한 저서가 몇 권이나 됩니까.”

한다. 다는,

 

아직 저서는 없나 봅니다. 선배 되시는 김석문(金錫文)이란 분이 있어서 일찍이 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을 말했는데, 그 친구가 특히 장난 말 삼아 이 학설을 부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실제로 보아 얻은 것이 이렇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일찍이 남더러 꼭 이것을 믿어 달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 역시 오늘 밤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말을 한바탕 늘어놓고 보니, 그 친구를 만나본 듯도 합니다.”

했다. 대개 여천(麗川)은 한인(漢人)과는 다르기 때문에, 담헌이 일찍이 항주(杭州) 인사들과 섞여 논 옛 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기공은 또 나에게,

 

김석문 선생이 지은 시() 중에서 아름다운 것 몇 구만 들려 주실 수 없을까요.”

하기에, 나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구가 있다는 것은 못 들었습니다.”

했다. 기공은 나를 이끌고 자기 방으로 들었다. 벌써 촛불을 네 자루나 켜 놓고, 큰 교자상에 음식을 잘 차려 두었다. 특별히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향고(香糕) 세 그릇, 각색 사탕 세 그릇, 용안육(龍眼肉)여지(荔支)낙화생(落花生)매실(梅實) 서너 그릇, 거위오리 들을 주둥이와 발이 달린 채로, 또 통돼지를 껍질만 벗겨서 용안육여지대추마늘후추호도살구씨수박씨 등을 섞어 쪄서 떡같이 만들었는데, 맛은 달고 매끄러우면서도 너무 짜서 먹기는 어려웠다. 떡이나 과실들은 모두 자 넘어 높이 괴었다. 이윽고 다 물리고는, 다시 채소와 과실만 각기 두 접시씩 차리고, 소주 한 주전자로 시름시름 따라 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들을 하였다.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 중에 실려 있다. 닭이 두 홰째나 울어서 자리를 파하고 숙소에 돌아와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인들이 벌써 일어나라고 깨운다.

 

 

[D-001]종 소리를 …… 측량함 : 출전 미상.

[D-002]매실나무를 …… 푸는 것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고사. 즉 행군 중 군사들이 갈증을 느끼자 조조가 저 고개를 넘으면 매실나무가 있다고 말하여 군사들이 그 말에 입에 침이 돌아 갈증을 풀었다.

[D-003]하고(河鼓) : 견우성(牽牛星)의 북쪽에 있는 삼태성(三台星).

[D-004]방죽(方竹) : 네모진 대나무. 중국에서 난다.

[D-005] …… 할까 : 옛사람들은 바다에 풍랑이 심할 때 일광(日光)의 반사로 일어나는 현상을 불꽃으로 보아왔다.

[D-006]얼음 속에는 누에 : 빙잠(氷蠶). 습유기(拾遺記)에서 나오는 전설.

[D-007]불 속에 쥐 : 화서(火鼠). 산해경(山海經)에서 나온 전설.

[D-008]김석문(金錫文) : 조선 숙종(肅宗) 때의 학자.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지었으며 만년에 표천 다대곡(多大谷)에 살았다.

[D-009]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 : 해와 달과 땅과의 세 개 둥근 방울이 공중에 떠서 있다는 학설.

[D-010]담헌이 …… 없었다 : 홍대용은 북경에서 항주(杭州)의 선비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나서 막역의 벗을 맺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신(庚申)

 

 

개다.

삼사는 밝기 전에 대궐에 들어가고, 홀로 실컷 자고는 아침에 일어나 윤형산(尹亨山)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다시 왕혹정(王鵠汀)을 찾아 함께 시습재(時習齋)로 들어가서 악기(樂器) 구경을 했다. 거문고나 비파는 모두 길고도 넓으며, 붉은 비단에 솜을 넣어서 주머니를 만들었고, 거죽은 붉은 털 천으로 쌌다. ()과 경()은 시렁에 달아매여 있는데 역시 두툼한 비단으로 덮었고, 비록 축어(柷敔) 같은 따위라도 다들 별스러운 비단으로 집을 만들어 넣어 두었다. 대개 거문고와 비파 등속은 그 본이 너무 크고 칠이 지나치게 두꺼웠으며, 젓대와 퉁소 등속은 궤짝 속에 넣고 단단히 채워 구경할 길이 없었다. 혹정은,

 

악기를 보관해 두기는 매우 까다로워 습기 있는 곳을 피해야 되고, 또 너무 건조한 것도 좋지 않을뿐더러, 거문고 위에 앉은 티끌은 사자학(獅子瘧)이라 하고, 거문고 줄 위의 손때는 앵무장(鸚鵡瘴)이라 하며, 생황(笙簧)의 부는 구멍에 말라 붙은 침은 봉황과(鳳凰過)라 하고, 종이나 경에 앉은 파리똥은 나화상(癩和尙)이라 한답니다.”

한다. 웬 얼굴이 곱게 생긴 청년 하나가 바쁘게 들어오더니, 눈을 부라리고 나를 보면서 내 손에 든 작은 거문고를 빼앗아 급히 집에 넣는다. 혹정은 퍽 두려워하는 얼굴로 내게 눈짓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그 청년은 별안간 웃으면서 나를 붙들고 청심환을 달라 한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면서 곧 나왔다. 그 자는 몹시 무안한 기색이다. 사실인즉, 내 허리 전대 속에는 환약 여남은 알이 있었지마는, 그의 버릇이 괘씸하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혹정에게 한 번 읍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그는 누구여요.”

하고 물었다. 혹정은

 

그는 윤대인(尹大人)을 따라서 북경에서 온 자랍니다.”

한다. 나는,

 

그가 악기에 무슨 참견을 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순히 조선 환약을 짜내기 위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고 선생을 속이려고 든 것이니, 선생은 마음에 거리끼실 것 없으시죠.”

한다. 나는 생각 없이 문 밖을 나섰다. 수백 필의 말 떼가 문 앞을 지나간다. 한 목동(牧童)이 큰 말에 올라앉아 수숫대 한 개비를 쥐고 따라간다. 또 뒤따라 소 3,40마리가 가는데, 코도 꿰지 않고 뿔도 잡아 매지 않고, 뿔은 모두 한 자 남짓씩 길며 빛깔은 푸른 것이 많았다. 또 당나귀 몇십 마리가 따라가는데, 목동이 방망이 같은 막대기를 가지고 맨 앞의 푸른 놈을 힘껏 한 대 후려갈기니까 소가 씩씩거리며 달려갈 제, 모든 소도 그 뒤를 따르는데, 마치 대오가 행진하는 듯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나절 방목하기 위하여 끌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가한 때에 다니면서 살펴보니, 집집마다 대문을 열고 말이니 나귀니 소니 양 들을 몇십 마리씩 몰아 내놓는다. 돌아와서 우리 사관 밖에 매어 둔 말의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내 일찍이 정석치(鄭石癡 석치는 호요, 자는 성백(城伯))와 이름은 철조(哲祚), 벼슬은 정언(正言)이며, 술을 잘 마시고 서화에도 능하다. 함께 우리나라 말 값의 높낮이를 이야기하다가, 내가,

 

불과 몇십 년이 안 가서 베갯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통을 말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것이야.”

하였더니, 석치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반문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아서 너덧 해를 지나면, 베개 속에서 울음을 우는 꼬마닭이 되는데, 이 놈을 침계(枕鷄)라고 부른다네. 말도 역시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맨 나중은 침마(枕馬)가 아니 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석치는 크게 웃으며,

 

우리들이 점차 더 늙어가면 새벽 잠이 자꾸만 없어지는 터에 베개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또 베개말을 탄 채 뒷간길을 가도 무방하겠군. 그러나 요즘 시속에 말 흘레붙이는 것을 대기(大忌)로 알아, 기르는 말이 수놈 암놈 할것없이 모두 동정으로 늙어 죽거든. 국내의 말이 그래도 몇만 필이나 되는데, 그 놈들에게 흘레를 안 붙이면, 기르는 말이 어떻게 번식될 것인가. 이리하여 국내에서는 해마다 말 몇만 필을 잃게 되니, 이러고는 몇십 년이 못 가 베개말이고 무어고 다 절종이 될 것이야.”

하고는 둘이 서로 웃으며 희담을 한 일이 있었다.

실상 내가 연암(燕巖)에 살 곳을 마련한 것은, 일찍부터 목축(牧畜)에 뜻을 두었던 때문이다.

연암에 자리잡으니, 첩첩산중에 양쪽이 편평한 골짜기인데다가, 수초(水草)가 매우 좋아서 마소노새나귀 등 몇백 마리를 치기에 넉넉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이라야 가장 큰 곳으로 다만 탐라(耽羅 제주도)가 있을 뿐인데, 그 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가 방목한 종자로서, 4, 5백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고 보니, 비록 애초에는 용매(龍媒 준마(駿馬))악와(渥洼 신마(神馬))와 같은 우수한 종자일지라도, 마침내는 과하(果下)관단(款段 꼬마 말의 이름)과 같은 꼬마말이 될 것은, 이치에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과하와 관단을 대궐 지키는 장사들에게까지 내주니, 고금 천하에 이런 느림뱅이와 꼬마말을 타고 적진을 향하여 달리는 꼴이 어디 있을 일인가. 이것이 첫째로 한심한 일이다. 대궐 안에서 먹이는 말로부터 장수들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산 말이란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가 요동심양 등지로부터 사서 들인 말들로서, 한 해에 새로 생기는 말이라고는 네댓 필에 지나지 않는 형편이니, 만일 요동심양 길이 끊어지는 날이면 어디에서 또 말을 얻을 것인가. 이것이 둘째로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거둥할 때 배종하는 반열에는, 백관들이 말을 많이 빌려 타기도 하고, 혹은 나귀를 타고도 임금의 뒤를 따르게 되어, 이 꼴로서는 위의를 갖추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셋째로 한심한 일이다. 문신들로서 초헌(貂軒)을 탈 수 있는 자 이상은 말을 탈 일도 없고, 또 말을 집 안에서 먹이기도 어려워서 탈 것을 없애 버리고, 자제들이 걷지 않으려고 겨우 작은 나귀나 한 마리쯤 먹이게 된다. 옛날에는 백 리의 강토에 불과한 나라라도, 대부(大夫)쯤 되면 타는 수레 열 대쯤은 가지는 법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로 말한다면 둘레가 몇천 리나 되는 나라로서, ()()급쯤 된다면 타는 수레 백 대쯤씩은 갖추어야만 할 것이거늘, 이제 우리나라 대부의 집안에서 수레 열 대는 그만두고라도 단 두 대인들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것이 넷째로 한심한 일이다. 삼영(三營)의 초관(哨官)들은 다들 백 명 졸개의 장이 되는 터에 말 한 필을 가질 형세가 못 되고 보니, 한달에도 세 번씩 치르는 훈련에는 임시로 삯말을 내어 타게 된다. 삯말을 타고 전쟁에 나간다는 소리는 아예 이웃 나라에 들릴 수 없는 창피이다. 이것이 다섯째 한심한 일이다. 서울 영문에 있는 장수들이 이러할 바에야, 팔도(八道)에 나누어 둔 기병들이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을 것은 이로써도 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 한심한 일이다.

국내에 있는 역말들이란 모두가 토산 말들로서, 그 중에서 좀 낫다는 놈이라도 한번 사신(使臣) 손님이라도 치르고 나면 죽거나 병이 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사신 손님들이 타는 쌍가마가 잔뜩 무거운데다가, 네 명의 교군(轎軍)은 으레 말에다가 몸을 싣듯이 양 옆에 붙어서 탄 사람이 까불려 흔들리지 못하도록 가마채를 붙잡고 간다. 말 등에 실린 짐이 이토록 무거우니, 말은 짐을 피하듯이 빨리 안 달릴 수 없게 되었고, 말이 달릴수록 짐은 더욱 눌려지기 때문에 말이 죽지 않으면 병이 든다는 것이다. 죽은 말이 날로 불어나니, 따라서 말 값은 뛰어오른다. 이것이 일곱째 한심한 일이다. 말 등에다 짐을 싣는다는 것은 벌써 틀려먹은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수레가 국내에서 다니지 못하고 보니, 관청에서고 민간에서고 짐이란 짐은 말 잔등이 아니고는 못 실어 나를 줄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이야 죽든 말든 많이 싣기에만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부득불 힘을 쓸 만큼 먹이를 먹인다고 더욱 여물죽을 많이 먹이게 된다. 그러므로 말 정강이가 힘을 못 쓰고 발굽은 물씬물씬해져, 한 번만 흘레를 겪으면 뒤를 못 가누게 되므로, 요즘 세속에서는 흔히 들 말이 흘레붙어 새끼 치는 것을 금한다. 이러고서야 말이 어디서 생길 것인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했으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일 맡은 관원이 목마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채찍을 잡고 나앉은 자마다 국내엔 좋은 말이 없다고 떠든다. 그래, 정말 국내엔 쓸 만한 말이 없단 말인가. 이런 한심한 일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면,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름이었던가. 무릇 생물들의 성질이란, 사람이나 다름없이 고달프면 쉬고 싶고, 답답할 때엔 시원한 데를 찾고 싶으며, 굽은 놈은 펴고 싶고, 가려우면 긁고 싶을뿐더러, 그놈들은 비록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먹는다 하더라도, 때로는 제 마음대로 편한 것을 찾고 싶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말도 반드시 이따금 굴레와 고삐를 풀어 놓아 물가 같은 시원한 곳에 놀게 해서 답답증을 풀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생물의 성질에 따라 그 뜻을 맞추어 주는 것이거늘, 우리나라에서 말 먹이는 법이란, 북띠나 굴레가 단단하지 않은가 염려하여 이것을 될수록 졸라 매어서, 빨리 몰 때에도 말은 견마 잡는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쉴 때만 해도 긁는 재미나 땅에 뒹구는 맛을 얻어 볼 수 없으며, 사람과 말 사이는 언제나 뜻이 통하지 못하여 사람은 툭하면 욕질이 일쑤요, 말은 자나깨나 사람을 상대로 살기(殺氣)가 등등하니, 이런 것이 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것이다. 또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무릇 목마른 고통은 배고픈 고통보다도 심한 법이다. 우리나라 말들은 아직껏 찬 물을 안 먹이고 있다. 말의 성질인즉, 익힌 음식을 가장 싫어하니, 이는 말에게 더운 것은 병이 되기 때문이다. 콩이나 여물죽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먹이를 짜게 하여 물을 켜도록 하려는 때문이요, 물을 켜도록 하는 것은 오줌을 잘 누도록 하기 때문이요, 오줌을 잘 누도록 하는 것은 몸에 지닌 열을 풀게 함이요, 냉수를 먹이는 것은 정강이를 굳세게 만들고 발굽이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거늘, 우리나라 말들은 삶은 콩과 끓인 죽을 먹어, 종일을 달리면 벌써 신열을 못 이겨 병이 되고, 그리하여 한 끼라도 건너뛰어 죽을 못 먹게 되면 시들부들 몸을 못 가누며 느림뱅이 걸음을 걸어 길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이것은 모두가 더운 죽을 먹인 탓이다. 이보다도 군마가 되고 보면 더운 죽을 먹인다는 것은 더욱 실책이다. 이것을 일러서 말 먹이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무엇을 가리켜 종자를 잘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이란, 어떻든 커야지 작은 종자는 못 쓰는 법이요, 건장해야지 약해선 못 쓰며, 준수해야만 되지 노둔해서는 못 쓰는 법이다. 말에다가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달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마는,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의 보통 집안 일도 치러 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나라의 무비(武備)와 군용(軍容)을 돌보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꼴인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도 군사를 치러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로 보아 우리와 청국(淸國) 두 나라는 태평으로 지나는 사이, 암놈 수놈 아울러 몇십 필쯤 청구한다 해서 저 큰 나라에서 이것쯤을 아끼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외국으로부터 말을 구해 들여, 이것을 사사로 기른다는 것이 좀 혐의쩍어 보인다면, 해마다 드나드는 사신들 편에 가만히 사들일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근교에 널찍한 수초(水草) 좋은 땅을 골라, 10년 동안을 두고 새끼를 쳐 가면서 점차로 탐라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군데에 목장을 퍼뜨려 종자를 개량해야 할 것이며, 또 새끼를 치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반드시 주례(周禮)와 월령(月令)으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이니, 주례에는 대개 말을 먹이는 데 수놈이 4분의 1을 차지한다 하였는데, 그 주석(注釋)에는, 그의 비위에 알맞게 하고 싶어함이니 생물은 기질이 같으면 마음도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정 사농(鄭司農)은 이르기를, ‘4분의 1이라는 말은 암놈 세 마리에 수놈 한 마리를 끼운다는 말이다.’ 했다. 월령에 보면, 늦은 봄 삼월쯤 되어 종마(種馬)와 종우(種牛)를 암놈 있는 목장에다 풀어 놓는다 하였는데, 진혜전(秦蕙田)은 말하기를, ‘말 먹이는 사람이 종마를 교대하여 부리되 그 몸을 너무 피로하지 않게 하여 기운과 혈기를 안정되게 할 것이요, 또 말을 맡은 관리는 반드시 여름에는 수놈을 치워 두어야 한다.’ 하였다. 암말이 새끼를 뱄을 때에는 수놈이 암놈 곁에 못 가도록 하는 것을 말 번식시키는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모두, 옛 임금들이 때를 맞춰서 생물을 길러 생물의 제 특성을 살린다는 뜻이다. 이제 중국에서는, 매년 봄날이 화창하고 풀들이 푸릇푸릇 돋을 때 수놈 목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내놓아 흘레를 붙이면, 수놈 임자는 흘레의 대가로 닷 돈씩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말이나 노새 새끼를 낳을 때 수놈으로 준수한 놈을 낳으면, 또 다시 닷 돈을 받는다. 낳은 새끼가 신통하지 못하거나 털빛이 좋지 못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때는, 아비말은 반드시 불알을 까버려 쉽게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종자를 특별히 크고 성질이 길들이기 좋은 것으로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장을 감독하는 관리들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덮어놓고 토산말로만 종자를 받기 때문에, 낳으면 낳을수록 종자는 자꾸만 작아지게 되어, 필경은 똥통이나 나뭇짐 한 짐도 변변히 견디지 못할 만큼 되었으니, 하물며 한 나라의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할 수 있으랴. 이런 것이 곧 좋은 종자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관직에 있는 자가 목마에 무식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른 것인가. 우리나라 벼슬하는 양반들은 일반 허드렛일은 알려고도 않으려는 버릇들이 있어서, 옛날 어디서는 여럿이들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마부에게, 말에게 콩을 좀 더 주라는 말을 한 마디 했다가, 사람이 좀스럽다고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좌랑(佐郞))에게 버림을 받은 일까지 있었고, 요즘은 어떤 학사가 평소에 말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 말을 잘 고르는 법이 백락(伯樂)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옛적에는 양고기 잘 굽는 도위(都尉)가 있다더니, 지금 세상에는 말 잘 다루는 학사가 있네 그려.’ 하며 비방하여,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한 나라의 큰 정책으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로 삼아 하인들의 손에만 맡겨 두고 있으니, 비록 그 직책은 감목(監牧)이라고는 하지마는 사람은 유품(流品)이어서, 목마의 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이것은 실로 능력이 없다기보다도 배우기를 사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들어서, 관원들이 목마에 무식하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옛날 당()의 초기(初期), 암컷 수컷이 섞인 말 3천 필을 적수(赤水)의 언덕에서 몰아 내어 농우(隴右 감숙성의 서쪽)에다 옮기고는, 태복(太僕 목축을 맡은 고관) 장만세(張萬歲 당 태종 때 저명한 목축가)로 하여금 감목하게 하였다. 정관(貞觀)으로부터 인덕(麟德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까지 이르는 동안에 말은 70만 필로 번식되었는데, 무후(武后) 때는 말이 줄어들었으나, 당 명황(唐明皇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아직도 24만 필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왕모중(王毛仲)장경순(張景順) 등으로 한구사(閑廐使)를 삼아 여남은 해 동안을 먹인 결과, 43만 마리로 불었다. 개원(開元) 13(725)에는 명황이 동쪽으로 가서 태산(泰山)에 제사할 제, 말 몇만 필을 털빛에 따라 대열을 지어 놓은 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비단필처럼 보였다고 하니, 이것은 담당한 관직에 적당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말을 좋아하고 말을 잘 먹일 줄 아는 자를 얻어 목마하는 행정을 맡긴다면, 비록 말 잘 치는 학사라는 기롱을 들을망정, 태복 벼슬감으로서는 맞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와서,

 

연암 박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다. 기공의 심부름하는 이가 나를 가리켜 준다.

그는 곧 내게 읍하면서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 마치 옛 벗을 만나는 듯하였다. 그는,

 

저는 바로 광동(廣東) 안찰사(按察使) 왕노야(汪老爺)의 청지기온데, 우리 댁 노야께옵서 그저께 선생님을 만나뵙고는 퍽도 기뻐하시와, 내일 정오쯤은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시면서, 절강(浙江)에서 만든 부채에 금칠로 서화 그린 것을 올리겠다고 하십디다.”

한다. 나는,

 

전일은 왕공(汪公)의 과분한 사랑을 입고서도 아무런 대접을 못했는데, 먼저 귀한 선물까지 받는다는 것은 도리어 당치 않은가 하오.”

했더니, 그는,

 

제가 이번에 갖고 온 것은 아닙니다. 노야께서 오실 적에 몸소 지니고 오시겠답니다. 명일 정오 선생님께서는 부디 다른 데 출입하시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약속하지요. 그런데 댁은 고향이 어디고, 성함은 뉘신지요.”

하였더니, 그는,

 

저는 강소(江蘇) 사람이요, 성은 누(), 이름은 일왕(一旺)이며, 호는 원우(鴛圩)라 한답니다. 일찍이 왕노야를 좇아서 광동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귀국을 떠나신 지가 몇 해나 되셨는지요.”

한다. 나는,

 

금년 오월에 고국을 떠났습죠.”

하였더니, (),

 

우리 광동에 비하면, 오히려 문 밖이나 다름없군요.”

하고는, 그는 또,

 

귀국 황제의 연호(年號)는 무어라 부릅니까?”

한다. 나는

 

무슨 말씀이오.”

하고 되물었더니, 누는,

 

황제의 기원 연호 말이외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는 중국의 기원을 쓰고 보니, 어찌 따로이 연호가 있겠소. 금년이 곧 건륭 45년이죠.”

하였더니, 누는,

 

귀국의 임금은 중국과 대등한 천자가 아니옵니까?”

한다. 나는,

 

만국이 한 천자를 받들고, 천지가 모두 대청(大淸)이요, 해와 달이 다 건륭인가봅니다.”

하였더니, 누는,

 

그러시다면 관영(寬永)이니 상평(常平)이니 하는 연호는 어디에서 난 것이옵니까?”

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였더니, 누는,

 

제가 바다에서 표류해 온 귀국의 배에서 보았는데, 관영통보(寬永通寶)라는 돈을 잔뜩 실었습디다.”

한다. 나는,

 

그건, 일본(日本) 사람들이 참칭한 연호요, 우리나라의 것은 아니오.”

하였더니, 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행동거지라든지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얼굴만 풍후하고 맑은 듯하나, 어딘지 무식해 보인다.

당초 그의 묻는 바가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돈이란 워낙 금물인데도, 그가 묻는 까닭은 금물(禁物)이라고 해서 물은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를 정말 천자가 있는 나라로만 알았기 때문에 시방의 연호까지도 물었던 것이요, 그가,

 

귀국 황제.”

하고 묻는 그 한 마디 말에 벌써 그의 무식을 알 수 있겠고, 또 비록 관영이니 상평이니 하는 것들을 우리나라 연호로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못 쓸 것을 쓰는 것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또 우리나라의 표류한 배가 돈을 실었다손 치더라도 그리 이상해할 일도 아니지마는, 관영통보를 한 배나 가득 실었을 리야 어디 있을 것인가. 그는 필시 관영통보를 구경하고 또 상평통보를 구경했던 것이 뒤범벅이 되어, 모두 우리나라 돈인 줄만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책력을 쓰는 줄도 몰랐고, 돈을 보고는 우리나라에도 연호가 있는 줄만 알았던 모양으로, 특별히 다른 의심을 갖고 내 속을 떠 보려고 물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누가 차를 다 마시자,

 

내일은 부디 다른 데 출입을 말아 주셔요.”

하고 거듭 부탁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즉, 그는 곰곰 섭섭해하는 빛을 보이면서 한 번 읍하고 가버린다. 나는 수역을 보고,

 

돈을 금하는 것은 대관절 무슨 까닭이오?”

하고 물었더니, 수역은,

 

별반 약조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중국 돈을 쓰는 것을 금했고, 또 작은 나라로서 돈을 따로 지어 쓴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하기에, 나는,

 

옛날 제 태공(齊太公 여상(呂尙)의 봉호)이 경중(輕重) 구부(九府)를 두었지마는, ()의 천자가 이를 금한 적이 없었고, 또 돈을 근래에 와서 쓰기 시작하기는 숙종(肅宗 이돈(李燉)) 경신년(庚申年 1680)이니까, 올해는 벌써 101년이나 지났은즉, ()의 초기에 두 나라가 맺은 약조에도 이런 금법이 들지 않았던 것 같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세종(世宗 이도(李祹)) 때 돈을 한번 지어서 한 7, 8년 동안이나 쓰다가는, 민간에서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저폐(楮幣)를 쓰게 되었고, 인조(仁祖 이종(李倧)) 때 와서 두 번째로 돈을 지었다가 진작 말았으나, 모두 민간에서 불편하다 해서 그랬던 것이지, ()을 두려워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제 북도 지방은 돈을 금하고 무명을 돈으로 삼아 쓰고 있으니, 국경이 가깝다 해서 그런 것이요, 관서(關西) 지방으로는 의주로부터 압록강 가의 여러 고을까지 아직 한 번도 돈을 금한 적이 없으니, 이것도 알쏭달쏭하여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표류된 배가 지닌 돈을 금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수역은,

 

그렇습니다. 지금도 역원(譯院 통역을 맡은 기관)에서는 몇 해를 두고 임시 변법으로 중국 돈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나라 은()은 자꾸만 귀해지고 중국 물건 값은 날로 비싸지니, 이로써 역원의 손해는 막심하지요. 은 한 냥으로 중국 돈 7()를 바꾸고 보니, 만일 중국 돈을 통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만들 수고도 없이 돈은 저절로 헐해질 것이요, 이익은 막대해질 것입니다.”

한다. 주 주부(周主簿)가 있다가,

 

조선통보(朝鮮通寶)는 한()의 오수전(五銖錢)보다도 더 잘 되었을뿐더러, 돈 중에는 가장 오래된 돈이기 때문에, 귀신이 붙어 점치는 돈으로 쓴다죠.”

하기에, 나는,

 

오래 돼서 귀신이 붙다니.”

하였더니, (),

 

이 돈은 기자(箕子) 때 돈으로, 중국 사람들이 보면 의당히 커다란 보물로 삼을 텐데, 애석도 하이, 이걸 못 갖고 와서.”

한다. 나는,

 

이건, 세종 때 지은 돈이야. 기자 때에 해자(楷子)가 어디 있었어. () 동유(董逌)의 전보(錢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돈이 네 가지 실렸는데, 삼한중보(三韓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만 실렸지 조선통보는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돈이 오랜 적 돈이 아닌 것을 알 것이네.”

하고 설명해 주었다.

오후에는 세 분의 사신이 대성전(大成殿)에 배알하였다. 주자(朱子)의 석차를 높여 십철(十哲)의 아랫자리에 모셔 두었다. 위패(位牌)는 모두 번들번들한 붉은 칠을 하고 금자로 썼는데, 옆에는 만주글자로 썼다. 대성문(大成門) 바깥벽에는 검은 빗돌을 둘러 세우고, 강희옹정과 지금 황제의 훈시와 친히 지은 학규(學規)를 새겨 두었으며, 마당에 세운 빗돌은 작년에 세웠다는데, 역시 황제가 세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성전 뜰에는 한 길 남짓 되는 향정(香鼎)을 두었는데, 아로새긴 솜씨는 말할 수 없이 정교했다. 전각 안에는 위패 앞마다 작은 향로 한 개씩을 두었는데, 모두 건륭(乾隆) 기해제(己亥製)라 새겨져 있다. 위패 앞마다 붉은 운문단(雲紋緞) 휘장을 드리웠고, 양쪽 행랑채 안 위패들 앞에 차려 놓은 것도 본전의 내용과 다름없이 장엄하고도 화려한 품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삼사는 돌아와 각기 청심환 몇 알과 부채 몇 자루씩을 추 거인(鄒擧人) 사시(舍是)와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에게 보냈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 6 20일에 명()의 칙사(勅使) 노유령(盧有齡)이 우리나라로 나왔는데, 그는 바로 환관(宦官)이다. 그는 24일에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참배를 하면서 참렬했던 유생들에게, 백금 오십 냥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이제 우리 사신들이 큰 나라에 와서 성묘(聖廟)를 배알하면서 공부하는 두 명 거인에게, 겨우 변변하지도 못한 환약과 부채 따위를 선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몸소 두 선비가 있는 숙소를 찾아서,

 

창졸간에 나선 나그네의 처지라,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어 변변하지 못한 환약과 부채를 올린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두 거인은 허리를 굽히고 사례를 한다.

 

주인된 도리로 인도한 것이 무슨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토록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니 충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저녁을 치른 뒤에, 왕혹정(王鵠汀)이 학도 아이를 시켜 붉은 종이 편지 쪽지를 한 장 보내 왔다. 그 사연에는,

 

왕민호는 삼가 연암 박 노선생(朴老先生)님께 부탁을 드리나이다. 수고스러우시겠사오나 여기 천은(天銀) 두 냥을 보내오니, 청심환 한 알만 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뜻이다. 나는 보내온 은을 곧 돌려 보내면서 진짜 청심환 두 알을 보냈다.

저녁 으스름녘에, 황제로부터 사신은 황성(皇城)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행은 부산하게 밤이 이슥하도록 길 떠날 치장을 차렸다. 밤에 기려천(奇麗川)과 작별하였다. 여천은,

 

“18일에 열하를 출발하여 25일에는 북경에 도착해서, 26, 7, 8 사흘 동안은 두루 작별 인사를 다니고, 9 6일에는 선산에 성묘를 갔다가 9일에는 집으로 돌아와, 11일에는 귀주(貴州)로 떠날 터인데, 떠나는 전날은 집에서 기다릴 터이니 꼭 왕림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응락하고, 다시 왕혹정에게 작별차로 들렀다. 혹정은 눈물을 지으면서,

 

이 밤에 길이 이별을 하면, 또 뵈올 기약이 없겠소이다. 더구나 다가올 밝은 달밤에는 그 심회를 어찌하오리까.”

한다. 이는 전일, 추석날 달밤에 명륜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학지정(郝志亭)의 처소를 찾았더니, 지정은 다른 곳에 자러 나가고 없어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또 윤형산(尹亨山)에게 들렀더니, 형산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나이 늙고 보니, 이제야 아침 이슬이나 다름없나 봅니다. 선생은 아직 좋은 나이로, 또 다시 연경 걸음이 계시게 된다면 응당 오늘 밤 생각을 하실 거외다.”

하고는 술잔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서,

 

달 아래 이 이별을 하고 보니, 다른 날 만 리 밖에 계신 선생이 그리울 적엔 저 달을 보고 선생을 대하는 듯하리다. 보아하니, 선생은 술도 잘 자시고, 또 한창 시절에 호색하실 테라, 이제부턴 부디 몸조심하시와 수련의 길을 찾도록 하시옵소서. 저는 18일에 연경으로 돌아갈 테니, 선생이 만일 그 때까지 귀국하시지 않으셨거든, 다시 한 번 찾아 주십시오. 동단패루(東單牌樓) 둘째 골목[衚衕] 둘째 집 대문 위에 대경(大卿 대리시경(大理寺卿)) 편액이 붙어 있는 것이 곧 저의 집이올시다.”

한다. 그리고는 서로 악수하고 하직하였다.

 

 

[D-001]축어(柷敔) : 풍류를 시작하거나 그칠 때 치는 나무로 만든 악기.

[D-002]초헌(貂軒) : 종이품(從二品) 이상 문관이 타던 외바퀴 달린 가마.

[D-003]삼영(三營) : 훈련원(訓鍊院)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합칭. 삼군영(三軍營)삼군문.

[D-004]주례(周禮) :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주공(周公)이 지었다 전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D-005]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한 편명으로 매달마다 정치적 행사에 관한 요강을 적어 놓은 것.

[D-006]정 사농(鄭司農) : 후한(後漢)의 명신 정중(鄭衆). 사농은 그의 벼슬. 주례의 해석이 있다.

[D-007]진혜전(秦蕙田) : 청의 건륭 때 저명한 학자. 경술(經術)과 독행(篤行)으로 이름났다. 자는 수봉(樹峯). 호는 미경(味經)

[D-008]양고기 …… 도위(都尉) : 후한 때 유현(劉玄)의 고사. 벼슬을 몹시 남발하여 양의 염통 요리를 하는 자는 도위를 주었고, 양의 머리로 요리를 잘하는 자에게는 관내후(關內侯)를 주었다.

[D-009]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 무조(武曌).

[D-010]왕모중(王毛仲) : 고려(高麗) 사람으로 당 현종 때의 유명한 목축가.

[D-011]관영(寬永) : 일본 후수미(後水尾)명정(明正) 천황 때의 연호(1624~1643).

[D-012]상평(常平) :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 인조(仁祖) 11년에 처음 지었고, 숙종(肅宗) 때 두 번째 지었던 엽전.

[D-013]구부(九府) : 모든 재물과 돈을 관리하는 아홉 곳의 관부.

[D-014]저폐(楮幣) : 지폐(紙幣). 한 장에 쌀 서 되.

[D-015]오수전(五銖錢) : 한 무제(漢武帝) 때 삼수전(三銖錢)이 지나치게 가볍다 해서 새로 지은 돈.

[D-016]동유(董逌) : 북송 말년의 학자. 자는 언원(彦遠).

[D-017]십철(十哲) : 공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계로(季路)자유(子游)자하(子夏).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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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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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1.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2. 가을 8 5일 신해(辛亥)

3. 6일 임자(壬子)

4. 7일 계축(癸丑)

5. 8일 갑인(甲寅)

6. 9일 을묘(乙卯)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를 승격시켜 부()로 삼았으니 곧 연경의 동북 4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 시대에 요양(要陽)백단(白檀)의 두 현()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안락(安樂) 두 군()의 변계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에 소속시켰고, ()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에 소속시켰으며, ()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이때까지 열하의 연혁(沿革)이다. 이제 청()이 천하를 통일하고는 비로소 열하라 이름하였으니 실로 장성 밖의 요해의 땅이었다. 강희 황제 때로부터 늘 여름이면 이곳에 거둥하여 더위를 피하였다. 그의 궁전들은 채색이나 아로새김도 없이 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서적을 읽고 때로는 임천(林泉)을 거닐며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는 짐짓 평민이 되어 보겠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 실상은 이곳이 험한 요새이어서 몽고의 목구멍을 막는 동시에 북쪽 변새 깊숙한 곳이었으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 하였으나, 실상인즉 천자 스스로 북호(北胡)를 막음이었다. 이는 마치 원대(元代)에 해마다 풀이 푸르면 수도를 떠났다가, 풀이 마르면 남으로 돌아옴과 같음이다. 대체로 천자가 북쪽 가까이 머물러 있어서 자주 순행하여 거둥을 하면, 북방의 모든 호족들이 함부로 남으로 내려와서 말을 놓아 먹이지 못할 것이므로 천자의 오고 감을 늘 풀의 푸름과 마름으로써 시기를 정하였으니, 이 피서라는 이름도 역시 이를 이름이었다. 올 봄에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였다가 바로 북쪽 열하로 온 것이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은 해로 더하고 달로 늘어서, 그 화려하고 튼튼하고 웅장함이 저 창춘원(暢春苑)이라든가 서산원(西山苑) 들보다도 지나치다. 뿐만 아니라 그 산수의 경치도 오히려 연경보다 나으므로 해마다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며, 애초에는 외적을 막기 위했던 곳이 도리어 방탕한 놀이터로 발전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사신이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명을 받아서 밤낮 없이 달려 닷새 만에야 겨우 다달았으니, 그 노정을 짐작하건대 4백여 리뿐이 아닐 것이다. 열하에 와서 산동 도사(都司) 혁성(郝成)과 함께 이정의 원근을 논할 제 그도 역시 열하에 처음 온 모양이다. 그의 말이,

 

대개 구외(口外)에서 북경이 7백여 리이나, 강희 황제 이후로 해마다 이곳에 피서하여 석왕(碩王 황제의 아들)액부(額駙)와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닷새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마련되었는데, 길에 빠른 여울, 사나운 큰물, 높은 고개, 험한 언덕이 많아서 모두들 그 험하고도 먼 곳으로의 발섭(跋涉)을 꺼리므로 강희 황제가 일부러 참( 차참(車站))을 줄여 4백여 리를 만든 것이지 그 실은 7백 리나 됩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늘 말을 달려와서 일을 품하므로, 막북(漠北)을 문앞처럼 여기고 몸이 안장 위에 떠날 겨를이 없으니, 이는 성군(聖君)이 편안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랍니다.”

하니, 그의 말이 근사한 듯싶다. 그리고 고염무(顧炎武) 창평산수기(昌平山水記),

 

고북구역(古北口驛)으로부터 북으로 56리를 가서 청송(靑松)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고성(古城)이라 하는 곳이 한 참이며,  60리를 가서 회령(灰嶺)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난하(灤河)라 하여 한 참이다.”

하였으니, 이제 난하를 건너서 열하까지 40리인즉, 고북구(古北口)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2 56리이다. 이를 보더라도 벌써 56리가 열하지에 기록된 것보다 많다.

구외(口外)의 노정(路程)이 서로 이렇게 어긋나니 장성 안이야 더욱 그러할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제 이 걸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일뿐더러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달려와서 마치 소경이 걷는 것이나 꿈결에 지나치는 것 같아서, 역참이며 돈대를 일행 중에 아무도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열하지를 상고하니 4 20리라 하였은즉, 그를 좇을 수밖에 없다.

 

 

[C-001]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 이 소제는 다른 본에는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열하지(熱河志) : 열하의 지지(地志)이니, 건륭 42년에 고종의 칙명에 의하여 엮었다.

[D-002]액부(額駙) : 부마(駙馬)의 만주어. 예를 들면 화석공주(和碩公主)에 장가든 사람을 화석액부(和碩額駙)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가을 8 5일 신해(辛亥)

 

 

개고 덥다.

아침 사시(巳時)에 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를 따라 연경으로부터 열하 길을 떠날 때 부사 서장관과 역관 세 사람, 비장 네 사람, 또 하인들, 모두 일흔넷이고, 말이 모두 쉰다섯 필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서관(西館)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애당초 책문을 들어선 뒤로, 길에서 자주 비를 만나고 물이 막히어 통원보(通遠堡)에서는 앉아서 5~6일을 허비했으므로 정사가 밤낮으로 근심하였다. 나는 때마침 그 건너편 구들에 묵었으므로 비 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곧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그리하여 휘장을 넘어 나에게 말로,

 

천하 일은 알 수 없는 것일세. 만일 우리 일행을 열하까지 오라고 하는 일이 있다면 날짜가 모자랄 것인즉, 그때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설사 열하로 가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만수절(萬壽節 황제의 탄일)은 대어 가야 할 것인데, 다시 심양과 요양의 사이에서 비에 막히는 일이 있다면, 이야말로 속담(俗談)에 밤새도록 가도 문에 닿지 못하였다는 격이 아니겠는가.”

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밝은 날 백방으로 물 건널 계책을 세울 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말리면, 그는 곧,

 

나는 나랏일로 왔으니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는 내 직분이라, 또한 어찌하리.”

한다. 이로부터 아무도 감히 물이 많아서 건너지 못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때마침 더위가 심하고, 또 이곳에는 비오지 않은 날에도 마른 땅이 갑자기 물바다를 이루는 일이 일쑤이니, 이는 모두 저 천리 밖에서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면 모두 몸이 떨리고 앞이 캄캄하여, 낯빛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가만히 잠깐 동안 목숨을 빌지 않은 자 없었으며, 그리하여 저쪽편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보며 축하의 말들을 나누되 마치 죽을 고비를 겪고 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하였으나, 다시 앞 물이 지나간 물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서 서로 돌보며 생각이 막연할 뿐이었다. 그러면 정사는,

 

제군들은 걱정마소. 이 역시 왕령(王靈)이 도우시리.”

하고는, 불과 몇 리도 못 가서 다시 물을 건너게 되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여덟 번이나 건너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쉴 참을 뛰어가며 쉴 새 없이 달렸으므로 말이 많이 더위에 쓰러지고, 사람 역시 모두 더위를 먹어서 토하고 싸게 되면, 문득 사신을 원망하되,

 

열하 갈 일이야 만무할 텐데 이렇듯 한 더위에 쉴 참을 뛰어감은 전례에 없는 일이에요.”

하며, 투덜거리고, 혹은,

 

나랏일이 아무리 중하다손 정사께선 늙고 또 쇠약하신 분이 이렇게 몸을 가벼이 하시다가 만일 덧나시기나 하면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거요.”

하고, 또는,

 

지나치게 서두르면 도리어 더딘 법이라오.”

하고, 또는,

 

앞서 장계군(長溪君)이 진향사(進香使)로 왔을 때 책문 밖에서 물이 막혀 침상(寢牀)을 쪼개어서 밥 지으며 열이레를 묵었어도 쉴 참을 뛰어가는 일은 없었다오.”

하고, 옛 일까지 끌어대곤 하였다. 그리하여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닿아서 사신은 곧 예부(禮部)에 가서 표문과 자문(咨文)을 바치고 서관에서 나흘을 묵었으나 별다른 지시가 없으므로 그제야 모두들,

 

과연 아무런 염려는 없나보다. 사신이 매양 우리 말을 곧이 안 들으시더니 글쎄 그런 것을. 아무튼 일이야 우리들이 잘 알지. 참대로 왔어도 열사흗날 만수절에야 넉넉히 대어 올 것을.”

하며, 빈정거리었다. 그리하여 더욱 열하는 염에도 두지 않았으며, 사신도 차츰 열하로 갈 걱정을 놓기 시작하였다.

초나흗날, 나는 구경 나갔다가 저녁 때 취하여 돌아와서 이내 곤히 잠들어서 밤중에야 잠깐 깨었다. 남들은 벌써 깊이 잠들었고 목이 몹시 마르기에 상방(上房)에 가서 물을 찾았다. 방안에는 촛불을 밝혔는데, 정사가 내 오는 기척을 듣고는 불러서,

 

아까 잠깐 졸았더니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는데 행리(行李)가 역력하데그려.”

하시기에, 나는,

 

길 뜨신 뒤로 열하가 늘 생각에 떠올랐으므로 이제 비록 편안히 계시어도 오히려 꿈에 오르는가 보지요.”

하며 대답하고, 물을 마시고 돌아와서 이불에 들어 곧 코를 골았다. 꿈결에 별안간 여러 사람의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쓰러지듯이 요란스레 들리므로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하루 종일 나가 돌아다니다가 밤에 돌아와 누우면 매양 관문(館門)이 깊이 잠긴 것을 생각할 제 마음이 울적하여 여러 가지 망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는 곧 옛날 원 순제(元順帝)가 북으로 도망갈 제 그제야 고려의 사신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신은 관을 나서서야 비로소 명 나라의 군대가 온 천하를 점령한 줄 알았고, 가정(嘉靖) 때에는 엄답(俺答 달단(韃靼)의 추장)이 갑자기 수도를 에워싼 일이 있다고 한다. 어젯밤에 내가 변군내원과 이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 이제 저렇듯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큰 변고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듯싶다. 급히 옷을 주워 입을 제 시대(時大)가 달려 와서,

 

이제 곧 열하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한다. 그제야 내원과 변군도 놀라 깨어서,

 

관에 불이 났소.”

하기에, 나는 짐짓 장난으로,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騎兵)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오.”

했더니, 변군들이 놀라서,

 

아이고.”

한다. 내가 곧 바삐 상방으로 간즉 온 관이 물끓듯 한다.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박보수(朴寶秀)서종현(徐宗顯) 등이 달려와서 모두 황급하여 얼굴빛을 잃고서 혹은 제 가슴을 두드리고 혹은 제 뺨을 치며 혹은 제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외치고 울면서,

 

이제야 카이카이[開開].”

한다. ‘카이카이는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었다. 또 펄펄 뛰며,

 

아까운 목숨 달아난다.”

한다.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나 그 하는 짓거리는 몹시 흉측하고 왈패스러웠다. 이는 대체로 황제가 날로 조선 사신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주문(奏文)을 받아 보고는, 예부가 조선 사신을 행재소(行在所)로 보낼 것인가 또는 아니 보낼 것인가를 품하지 않고서, 다만 표문만 올렸음을 노하여 감봉(減俸) 처분을 내렸으므로, 상서(尙書) 이하 연경에 있는 예부의 관원들이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다만 얼른 짐을 꾸리고 인원을 줄이어서 빨리 떠나도록 독촉할 따름이었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상방에 모여서 데리고 갈 비장을 뽑는데, 정사는 주 주부 명신(命新), 부사는 정 진사 창후(昌後), 이 낭청(李郎廳) 서귀(瑞龜)를 지명하고, 서장관은 조 낭청(趙郞廳) 시학(時學)을 데리고 수역 홍 첨추(洪僉樞) 명복(命福)과 조 판사(趙判事) 달동(達東), 윤 판사(尹判事) 갑종(甲宗)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나는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첫째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곤이 가시지 않은 데다가 다시 먼 길을 떠남은 실로 견딜 수 없는 노릇이요, 둘째는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황경(皇京) 구경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전례에 황제가 우리나라 사행을 각별히 생각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분부한 특별 은전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십중팔구는 바로 돌려보낼 염려가 없지 않다 하고 내가 주저하던 차에, 정사가 나더러,

 

자네가 만 리 연경을 멀다 않고 온 것은 널리 구경하고자 함이거늘, 이제 열하는 앞서 온 사람들의 보지 못한 곳일뿐더러 돌아간 뒤에 열하가 어떻더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고. 그리고 연경은, 온 사람치고는 다 본 바이지만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꼭 가야만 할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드디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정사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나의 성명은 단자(單子) 속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별상(別賞)이 있을까 보아서 피혐(避嫌)한 것이었다.

그제야 인마를 점고(點考)할 때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 아니하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나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을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변군과 노 참봉(盧叅奉) 이점(以漸), 정 진사(鄭進士) (), 건량 판사(乾糧判事) 조학동(趙學東) 등은 관문 밖에서 손 잡고 서로 작별할 제 여러 역관들도 다투어 와서 손을 잡으며 무사히 다녀 오기를 빌었다. 남아 있고 떠나고 하는 이 마당에 자못 처연함을 금치 못하였으니, 이는 함께 외국에 와서 또 다시 외국에서 헤어지게 되는 만큼 인정이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마두들이 다투어 빈과(蘋果)와 배를 사서 드리므로 각기 한 개씩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첨운패루(瞻雲牌樓) 앞까지 이르러서 말 머리에서 절하고 작별할 때, 각기,

 

귀중하신 몸 조심하소서.”

하고는, 눈물을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안문(地安門)에 드니, 지붕은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문안 좌우에는 시전이 번화장려하여, 이른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 어깨가 서로 스치고 땀은 비 같으며, 소매는 천막을 이루었다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었다. 문을 나서서 다시 꼬부라져 북으로 자금성(紫禁城)을 끼고 돌아 7~8리를 갔다. 자금성은 높이가 두 길이며 밑바닥을 돌로 깔고 벽돌로 쌓아 올리고, 누런 기와를 이고 주홍빛 석회를 칠했는데, 벽은 마치 대패로 민 듯하고 그 윤기가 왜칠(倭漆)한 것 같았다. 길 가운데 대여섯 발 되는 높은 돈대가 있고 그 위에는 삼층 다락이 있는데, 그 제도는 정양문루(正陽門樓)보다도 훌륭하고 돈대 밑에는 붉은 난간을 둘렀으며 문이 있으나 모두 잠기었고 병졸들이 지키고 섰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곧 종루(鍾樓)입니다.”

한다. 거기에서 30~40리를 가서 동직문(東直門)을 나서니 내원이 따라와서 슬피 작별하여 가고,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즉 또 창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이 만 리를 짝지어 와서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니, 인정이 그렇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내 말 등에서 생각하기를,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生離別)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대개 저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자한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 믿음 있는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정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 피로 맺은 벗과 마음 통하는 친구들이 그의 역책(易簀)할 때에 마지막 교훈을 받들거나 또는 궤석(几席)에 기대어 말명(末命)을 받을 즈음, 서로 손을 잡고 눈물 지며 뒷일을 정녕히 부탁함은 이 천하의 부자부부군신붕우가 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이 세상 사람의 인자와 효도, 믿음과 아름다움, 정의와 충성, 혈성(血誠)과 지기(知己)에 솟아나온 정리는 한결같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마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사람마다 한결같이 솟는 정이라면 이 일은 곧 천하의 순리일 것이다. 그 순리를 행함에 있어서는 삼년(三年) 동안을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말라 하였고, 또는 구원(九原)에서 다시 살려 일으켰으면 함에 불과하였고, 살아 남은 자의 괴로움을 논한다면 부모를 따라서 죽으려는 이, 아들을 여의고 눈이 먼 이, ()을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이, 거문고 시위를 끊은 이, 숯을 머금고 벙어리 된 이, 슬피 울어 성()을 무너뜨린 이 들도 있거니와, 나랏일을 위하여 몸이 망쳐져 죽은 뒤에야 만 이도 없지 않으나 모두 죽은 이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인즉, 역시 그들에게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고에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는 반드시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임금)과 왕경략(王景略 부견의 승상), 당 태종(唐太宗)과 위 문정(魏文貞 당 태종 때의 직신인 위징(魏徵)의 시호)이라 일컬으나 나는 아직 경략을 위하여 눈이 멀고 문정을 위하여 시위를 끊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오히려 무덤의 풀이 어울리기 전에 그 채찍을 던지고 그 비()를 넘어뜨려 구원(九原)에 깊이 간직한 사람에게 부끄러울 바가 있었은즉, 이로써 보면 살아 남은 자로서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 이도 없지 않으리라. 또 세상 사람이 흔히들 사생의 즈음에 대하여 너그럽게 위안하는 말로,

순리(順理)로 지냄이 옳지.”

한다. 그 순리로 지낸다는 말은 곧 이치를 따르라는 말이다. 만일 그 이치를 따를 줄 안다면 이 세상에는 벌써 괴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별의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의 괴로움보다 더함이 없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이별에 있어서는 벌써 그 땅이 그 괴로움을 돋우는 것이니, 그 땅이란 정자(亭子)도 아니며, 누각(樓閣)도 아니며, 산도 아니며 들판도 아니요, 다만 물을 만나야만 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 물이란 반드시 큰 것으로 강과 바다거나 또는 작은 것으로 도랑과 개천이어야 됨은 아니고, 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모두 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고에 이별하는 자 무한히 많건마는 유독 저 하량(河梁)을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결코 소무(蘇武)이릉(李陵)만이 천하의 유정(有情)한 사람이 아니건만 특히 그 하량이란 곳이 이별하는 지역으로 알맞았던 것이며, 그 이별이 그 지역을 얻었으니 괴로움이 가장 심한 것이다. 저 하량은 내가 아노니, 아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으며, 잔잔하지도 않고 거세지도 않은 그 물결이 돌을 이끌어 안고 흐느껴 우는 듯하며, 바람도 불지 않는, 비도 내리지 않는, 음산하지도 않는, 볕도 쪼이지 않는, 그 햇볕이 땅을 감돌아 어슴프레 해미 끼고 하수 위의 다리는 오랜 세월에 곧장 허물어지려 하고, 물 가의 나무는 늙어서 가지 없이 고목이 되려 하고, 물 언덕 모래톱은 앉았다 섰다 할 수 있고, 물 속에는 물새가 있어 떴다 잠겼다 노닐며, 이 가운데 사람은 넷도 아니요, 셋도 아님에도 서로 묵묵히 말없는 이 이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별부(別賦)에 이르기를,

말 없이 마음 아픔 / 黯然銷魂

이별에서 더할쏜가 / 唯別而已

하였으니, 어찌 그 표현이 이렇게 멋이 없을까. 천하의 어떤 이별치고 누가 말없지 않는 이 있으며, 마음 아프지 않는 이가 있으리오. 이는 다만 한 개의 별() 자에 대한 전주(箋注)에 지나지 않을 말이니 그다지 괴로움이 될 것이 없으리라. 특히 이별하는 일 없이 이별하는 마음을 지닌 자는 천고에 오직 시남료(市南僚)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르기를,

그대를 보내러 갔던 이가 저 아득한 강둑으로부터 돌아오니, 그대의 모습은 이로부터 멀어졌구나.”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의 애끊을 만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곧 물에 다다라서 이별함이니 그야말로 이별이 땅을 얻은 까닭이다. 옛날 유우석(劉禹錫)이 상수(湘水) 가에서 유종원(柳宗元)과 헤어졌다가 그 뒤 5년 만에 우석이 옛길로부터 계령(桂嶺)을 나와 다시 앞서 이별하던 곳에 이르러 시를 읊어서 유()를 슬퍼하기를,

내 말은 구슬피 숲 가린 채 울건마는 / 我馬暎林嘶

임 싣고 감돈 배는 산 너머 아득하구나 / 君帆轉山滅

하였으니, 천고의 귀양살이꾼이 무한히 많건마는 이것이 가장 괴롭게 여겨짐은 오로지 물가에서 이별한 까닭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곳이라 살아서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리 심한 괴로움을 겪은 일은 없으나, 다만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때가 가장 괴로운 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악부(大樂府) 중에 이른바 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이 있으니 우리 시골 말로는 배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 곡조가 몹시 구슬퍼서 애끊는 듯하다. 자리 위에 그림배를 놓고 동기(童妓) 한 쌍을 뽑아서 소교(小校)로 꾸미되, 붉은 옷을 입히고, 주립(朱笠)패영(貝纓)에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엔 채찍을 쥐고,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는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생들이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들을 입은 채 일제히 어부사(漁父辭)를 부르며 음악이 반주(伴奏)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동기가 소교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배 떠나는 포를 놓으라고 창한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닻 들자 배 떠난다 / 碇擧兮船離

이제 가면 언제 오리 / 此時去兮何時來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 萬頃蒼波去似回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눈물지을 때이다. 이제 장복은 어버이와 아들의 친함도 아니요, 임금과 신하의 의도 아니요, 남편과 아내의 정도 아니요, 동창과 친구의 사귐도 아니거늘, 그 살아서 헤어지는 괴로움이 이러한즉, 이는 그 이별하는 땅이 오로지 강이나 바다, 또는 저 하수의 다리에서만이 이러함은 아니었으리라. 실로 이국이나 타향치고서 이별에 알맞은 땅이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리라. 아아, 슬프외다.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께서 심양에 계시올 때 당시 신료(臣僚)들이 머물고 떠날 즈음이나 사신의 오가는 무렵이면 그 심회 어떠하였으리. 임금이 욕되매 신하된 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 경지면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일지니, 그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가며, 어떻게 참고 보내며 어떻게 참고 놓았겠는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통곡할 때였던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비록 이나 벼룩 같은 미천한 신민(臣民)이건마는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시험조로 한번 생각해 볼 때에도 오히려 정신이 싸늘하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 것 같거늘,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즈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걸림이 많고 혐의 또한 깊어서, 눈물을 참고 소리를 머금으며, 얼굴엔 슬픈 표정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떨어져서 머무른 여러 신하가 아득히 떠나가는 이들의 행색을 바라볼 제 저 요동의 넓은 들판은 가이 없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아득한데, 사람은 팥낱처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서, 시력이 다하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마지막이 하늘에 닿도록 아련하게 지경이 없으니, 해가 저물어 관문을 닫을 때에 그 간장이 어떠하리. 이런 이별일진대 어찌 반드시 물가만이 이에 알맞은 땅이 되리오. 정자도 좋고, 누각도 좋고, 산도 좋고, 들판도 좋을지니, 어찌 반드시 저 흐느껴 우는 물결과 어슴프레 해미 낀 햇볕만이 우리의 괴로운 심정을 자아낼 것이며, 또 하필이면 저 무너지려는 다리, 오똑한 망가진 고목만이 우리 이별의 마당이 될 것인가.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비록 저 그림 기둥에 현란스러운 문지방과 푸른 봄철에 밝은 날씨라도 모두들 우리를 위한 애끓는 이별의 땅이 될 수 있겠고, 또는 우리를 위한 가슴치고 통곡할 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를 만나서는 제가 비록 돌부처라도 머리를 돌릴 것이요, 쇠로 된 간장일지라도 다 녹고 말 것이니, 이는 또 우리나라에서 정사(情死)함에 제일 알맞은 때일 것이리라.”

하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20여 리를 갔다. 성문 밖은 꽤 쓸쓸한 편이어서 산천이 눈에 드는 것이 없다.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수레바퀴를 쫓아간다는 것이 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벌써 수십 리나 돌림길을 걸었다.

양편에 옥수수가 하늘에 닿을 듯 아득하여 길은 함() 속에 든 것 같은데, 웅덩이에 고인 물에 무릎이 빠진다. 물이 가끔 스며 흐르도록 구덩이를 파 놓았는데 물이 그 위를 덮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길을 따라 소경처럼 용을 쓰고 앞으로 나아간즉, 밤이 벌써 깊었다. 손가장(孫家庄)에서 저녁을 먹고 머물다. 동직문(東直門)은 그 지름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십 리 돌림길을 걸었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건륭 45년 경자라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를 따르지 않았다.

[D-001]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 : 사은사(謝恩使)와 진하사(進賀使)를 겸한 정사. 곧 박명원을 말한다.

[D-002]밤새도록 …… 못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많이 유행되는 말.

[D-003]별상(別賞) : 청의 황제가 유상(有賞) 종인(從人)에 주는 상사(賞賜).

[D-004]수레바퀴가 …… 이루었다 : 전국 때 제()의 수도 임치(臨淄)의 번화함을 설명한 말. 사기(史記)에 나온다.

[D-005]역책(易簀) : 공자의 제자 증참(曾參)이 운명할 때에 제자를 시켜 자리를 바꿨으므로, 스승의 운명을 역책이라 한다.

[D-006]삼년(三年) …… 말라 : 논어에 나오는 말.

[D-007]구원(九原)에서 ……  :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문자(趙文子)의 말.

[D-008]살아 ……  : 효경(孝經)에 나오는 실사.

[D-009]아들을 ……  : 복상(卜商) 즉 자하(子夏)의 고사.

[D-010]() ……  :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장주(莊周)의 고사. 아내가 죽으매 분을 두들기며 노래하였다.

[D-011]거문고 ……  : 종자기(鍾子期)가 죽으매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고 뜯지 않았다.

[D-012]숯을 ……  : 예양(豫讓)이 그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숯을 머금어 벙어리가 되었다.

[D-013]슬피 ……  : 기량(杞梁)이 죽으매 그 아내가 울어서 성을 무너뜨렸다.

[D-014]나라 ……  : 제갈량(諸葛亮) 출사표(出師表)에서 나온 구절.

[D-015]무덤의 …… 던지고 : 부견이 처음에는 왕맹을 써서 국세가 크게 떨치고 강북을 통일했으나,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남으로 진()을 치다가 패하여 나라가 망했다.

[D-016]() …… 있었은즉 : 위징이 죽은 뒤에 당 태종이 몹시 슬퍼하였으나, 고구려 정벌을 반대했다 하여 나중에는 그 묘비(墓碑)를 넘어뜨리었다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를 뉘우쳐서 다시 세웠다.

[D-017]하량(河梁) : 북방 오랑캐 땅에 있는 하수의 다리. 소무와 이릉이 이에서 작별할 때에, 이릉이 소무에게 읊어 준 시가 천고에 비장강개하기 짝이 없었다.

[D-018]소무(蘇武) : 한 무제(漢武帝)의 명신으로서 흉노(匈奴)에게 사절로 갔었는데, 그들에게 억류당하였다가 10년 만에 돌아왔다.

[D-019]이릉(李陵) : 한 무제의 명장이요,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흉노를 치다가 실패하여 흉노에게 머물고 있었다.

[D-020]별부(別賦) : 남북조(南北朝) 때 유명한 문학가 강엄(江淹)이 이별의 슬픔을 묘사한 작품 이름.

[D-021]시남료(市南僚) : 장주(莊周) 남화경(南華經) 중에 나오는 사람.

[D-022]유우석(劉禹錫) : ()의 문학가. 자는 몽득(夢得).

[D-023]유종원(柳宗元) : 당의 문학가. 자는 자후(子厚). 일찍이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좌천되었다.

[D-024]대악부(大樂府) : 소악부(小樂府)에 비하여 장형(長型)이다.

[D-025]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 :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지었다 한다.

[D-026]소교(小校) : 군교(軍校)를 따라서 죄인을 잡는 사령(使令).

[D-027]어부사(漁父辭) : 중국 굴평(屈平)이 지은 것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우리나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것인 듯싶다.

[D-028] …… 돌아오소 : 이것이 곧 배따라기곡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일 임자(壬子)

 

 

아침에 갰다가 차츰 덥더니 낮에는 크게 비바람치며 천둥과 번개를 치다가, 저녁 나절에 개다.

새벽에 길을 떠나다. 역정(驛亭) 표목에 순의현계(順義縣界)라 쓰였고, 또 수십 리를 가니 표목에 회유현계(懷柔縣界)라 쓰였는데, 그 현성(縣城)은 길에서 십여 리 혹은 7~8리 떨어져 있다 한다.

()의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연간에 말갈(靺鞨 당 때의 만주족 칭호)이 고구려와 싸워서 지자 그 부장(部將 추장과 같음) 돌지계(突地稽)가 팔부(八部)를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그 부락을 통틀어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새로이 순주(順州)를 두어서 이에 수용하였더니, 당 태종(唐太宗) 때에 오류성(五柳城)을 주치(州治)로 하고 돌리극한(突利可汗 동돌궐(東突厥)의 추장)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아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주를 도독(都督)하게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는 탄한주(彈汗州)를 두었고,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이후로는 귀화현(歸化縣)이라 고쳤으며,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묘호) 때 주덕위(周德威)가 유수광(劉守光)을 쳐서 순주를 점령하였다 하니, 생각하건대 순의(順義)회유(懷柔) 두 고을의 땅이 곧 옛날의 순주인 듯싶다. 우란산(牛欄山)이 그 서북 삼백 리에 뻗쳐 있는데, 옛 늙은이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옛날에는 금소[金牛]가 그 골짜기에서 나오고 선인(仙人)이 이를 타고 노닐었다 하며, 돌이 마치 구유처럼 생긴 것이 있어서 이름을 음우지(飮牛池)라 하고, 이 뫼를 또한 영적산(靈蹟山)이라 부른다.”

한다. 그 산 동쪽에서는 조하(潮河)가 백하(白河)와 합하며 동북에 호로산(狐奴山)이 있고, 또 서북엔 도산(桃山)의 다섯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이 마치 손가락을 세운 것 같다. 다시 수십 리를 가서 백하를 건너는데 백하의 근원은 새문(塞門) 밖에서 흘러 나와 석당령(石塘嶺)에서 장성을 뚫고, 황화(黃花)의 진천(鎭川), 창평(昌平)의 유하(楡河) 등 새문 밖의 모든 물과 합하여 밀운성(密雲城) 밑으로 지나간다. ()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일찍이 수리(水利)에 능한 자를 뽑아서 둑을 내고 논을 풀어 해마다 곡식 백여만 섬을 거두었더니 뒤에 명()의 태감(太監) 조길상(曹吉祥)이 몰수한 땅으로 국영 농장을 삼자, 세민(細民)들이 이로 말미암아 업을 잃고, 백하의 수리도 마침내 폐지되었다. ()의 알리불(斡離不)이 순주에 들어와서 곽약사(郭藥師)를 백하에서 깨뜨렸다 하니 곧 이곳이다. 물살이 세고 빛이 탁하니, 이는 대체 새외(塞外)의 물은 모두 누런 빛이다. 다만 작은 배 두 척밖에 없는데, 모래톱에 다투어 건너려는 자의 수레가 수백 대요, 인마가 수없이 서 있다. 올 때 길에서 본즉, 막대를 가로 질러서 누런 궤() 수십 개를 나르고 있는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넓적하고 혹은 길쭉하고 혹은 높다란 것들이다. 여기에는 모두 옥그릇을 실었는데 회자국(回子國 회교국)에서 조공 바치는 것이었으며 북경에서 짐꾼을 세내어서 나르고 회자 너덧 사람이 이를 거느리고 가는 판이다. 그 생김새는 벼슬아치인 듯하며 그 중 한 사람은 회자국의 태자(太子)라 하는데, 그 몰골이 웅건하고 사나워 보인다. 누런 궤짝을 배 속에 메어다 놓고 방금 삿대를 저어서 언덕에서 떠나려 할 순간에 주방(廚房)과 구인(驅人 말몰이꾼)들이 펄쩍 배에 뛰어 올라 말을 포개어 놓은 궤짝 위에 세웠다. 배는 이미 길을 떠났고 언덕에 있는 회자는 놀라서 소리 치고 발을 구르나 주방과 구인들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먼저 건너려고만 한다. 내가 수역에게 말하니 수역이 크게 놀라서,

 

빨리 내려.”

호령하고, 회자들 역시 어지러이 지껄여 대면서 배를 돌리게 하여 그 궤짝을 모두 메어 내렸으나 한 마디도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중류(中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조각 검은 구름이 생겨 거센 바람을 품고 남에서부터 굴러 오더니 삽시간에 모래를 날리고 티끌을 자아올려 연기와 안개처럼 하늘을 덮어서 지척을 분변하지 못할 지경이다. 배를 내려서 하늘을 쳐다본즉, 검으락푸르락하고 여러 겹 구름이 주름잡듯 하였는데, 독기를 품은 듯 노염을 피는 듯 번갯불이 그 사이에 얽히어서 올올이 번쩍이는 금실이 천 송이 만 떨기를 이루었으며, 벽력과 천둥이 휘감고 겹겹이 싸여서 마치 검은 용이라도 뛰어 나올 듯싶다. 밀운성을 바라보니 겨우 몇 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채찍을 날려서 빨리 말을 몰았으나, 바람과 우레가 더욱 급하여지고 빗발이 비껴치는 것이 마치 사나운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듯하여 형세가 지탱할 수 없으므로, 재빨리 길가 낡은 사당에 뛰어 들었다. 그 동편 월랑(月廊)에 두 사람이 책상을 사이에 놓고 교의에 걸터 앉아서 바삐 문서(文書)를 다루고 있으니, 이는 밀운 역리(驛吏)가 오가는 역말들을 적는 것이었다. 하나는 한자(漢字)로 쓰고 또 하나는 만주 글자로 번역하는데, 그 중에서 내 눈에 얼핏 조선(朝鮮)이란 글자가 보이기에 들여다보니, ,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 있는 병부(兵部)로부터 조선 사신들에게 건장한 말을 주어서 험난함이 없게 하며, 또는 그들 행리(行吏)의 필수품을 공급하라.”

는 내용이다. 이윽고 사신이 비를 피하여 뒤이어서 들어왔으므로 내 수역을 끌어서 그 종이를 보이매 수역이 사신에게로 가져 갔다. 이에 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저희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오가는 문서를 장부와 견주어 맞춰볼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문서에 이른바 건장한 말이란 찾아볼 곳도 없거니와 설령 그 말을 준다 한들 모두 몹시 날세고 건장해서 불과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니, 이는 그들의 이른바 비체법(飛遞法)이다. 길에서 역말의 달리는 것을 보니, 앞에서 선창하기를 노래하듯 하면 뒤에서 응하기를 마치 범을 쫓는 듯이 하는데,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시내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 날뛰며 달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북 치는 듯 소낙비가 퍼붓는 듯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쥐처럼 잔약한 과하마(果下馬) 따위를 견마 잡히고 부축하여서도 오히려 떨어질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렇게 날뛰는 역말이야 누가 능히 탈 수 있겠는가. 만일 황제의 명령으로 억지로 이를 타게 한다 해도 도리어 걱정거리일 것이다. 대개 황제가 근신(近臣)을 보내어서 우리 사신을 영접 두호하게 한 것이 방금 이곳을 지나쳤는데 길이 서로 어긋난 모양이다.

비가 좀 멎기에 곧 길을 떠났다. 밀운성 밖을 감돌아서 7~8리를 갔다. 별안간 건장한 호인(胡人) 몇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가지 마시오. 앞으로 5리쯤에 시냇물이 크게 불어서 우리도 모두 되돌아오는 길이오.”

하고, 또 채찍을 이마에까지 들어 보이며,

 

이마만큼 높으니 당신네들 두 날개가 돋쳤나요.”

한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낯빛을 잃고 모두 길 가운데서 말을 내려 섰으나,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질어서 잠시 쉴 곳도 없다. 그제야 통관과 우리 역관들을 시켜서 물을 가보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와서,

 

물 높이가 두어 발이나 되어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한다. 버드나무 그늘이 촘촘하고 바람결이 몹시 서늘한데 하인들의 홑옷이 모두 젖어서 덜덜 떨지 않는 자가 없다. 비가 잠깐 개자 길 왼편 버드나무 밖에 새로 지은 조그만 행전(行殿)이 보이므로 곧 말을 달려 그리로 들어가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대개 연경으로부터 길가에 삼십 리마다 반드시 행궁(行宮)이 하나씩 있어서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까지도 다 갖추어 있다. 그러나 이 성 밖에 이미 행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십 리도 못 되는 이곳에 또 이 집을 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제도의 거대하고 사치함과 현란한 품이 여느 대목 따위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 아닌 듯싶으나 다만 내 몸이 춥고 배가 주려서 두루 구경할 경황이 없었다.

때마침 해는 홍라산(紅螺山)에 지는데 온 산 봉우리 겹겹이 쌓인 푸른 빛이 한덩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아계(丫髻)서곡(黍谷)조왕(曹王)의 여러 산이 금빛 구름과 수은 안개 사이에 삥 둘러섰다. 삼국지(三國志),

 

조조(曹操)가 백단(白檀)을 거쳐 오환(烏桓)을 유성(柳城)에서 쳐부셨으므로 지금까지 그 산 이름을 조왕(曹王)이라 하였다.”

는 것이 곧 이를 이름이었고, 유향(劉向) 별록(別錄)에는,

 

()에 서곡(黍谷)이란 땅이 있으나 추워서 오곡(五穀)이 나지 않더니 추연(鄒衍)이 율()을 불어서 온기(溫氣)가 생기었다.”

하였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북쪽으로 한곡(寒谷)을 지나쳤다.”

하였으니, 곧 이곳을 이름이다. 내 어렸을 때 과체시(科體詩 과거 볼 때 짓는 시체(詩體))를 짓다가 서곡의 취율(吹律)을 써서 고실(古實)을 삼았더니 이제 눈으로 바로 그 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역관이 제독(提督)과 통관과 더불어 의논하되,

 

이제 이미 앞으로 물을 건널 수 없고 물러나도 밥 지을 곳이 없는데 해가 또한 저무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오림포(烏林哺),

 

여기는 밀운성에서 겨우 5리밖에 안 되는 곳이니 사세가 부득불 도로 성으로 들어가서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다. 오림포는 나이가 70이 넘어서 그 중 춥고 주림을 못 견디는 모양이다. 대개 새북(塞北) 길을 제독 이하의 여러 사람이 전에 가본 일이 없으므로, 길도 모르고 해는 저물어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어지자 그 아득히 갈 바를 모름이 우리와 다름이 없다. 내 먼저 밀운성에 이르렀는데 길가의 물이 벌써 말 배에 닿았다. 성문에서 말을 세우고 일행을 기다려서 함께 들어가니, 뜻밖에 쌍등쌍촛불을 들고 와서 맞이하는 이가 있고, 또 기병(騎兵) 10여 명이 앞에 와서 환영하는 듯이 보이었다. 이는 곧 밀운 지현(知縣)이 몸소 와서 맞이함이다. 통관이 먼저 가서 주선한 것이 불과 몇 마디 말이 끝나기 전인데 이처럼 그 거행이 재빠르다. 중국의 법이 비록 왕자(王子)나 공주(公主)의 행차라도 민가(民家)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그 사관은 반드시 점방이 아니면 사당이다. 이제 이 고을에서 우리 일행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관묘(關廟)인데, 지현은 문까지 와서 곧 돌아가고 관묘인즉 인마를 들일 수는 있으나 사신이 거접할 곳은 없었다. 이때 밤이 이미 깊어서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었으므로, 오림포가 백 번 천 번 두드리고 부르고 한 끝에 겨우 나와서 응대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소씨(蘇氏)의 집이었다. 이 고을 아전으로서 집이 훌륭하기가 행궁이나 다름없다. 그 주인은 이미 죽고 다만 열여덟 살 나는 아들이 있는데, 눈매가 청수하여 속세의 풍상(風霜)을 겪지 않은 사람 같다. 정사가 불러서 청심환 한 개를 주니 그는 무수히 절하나 몹시 놀라서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이에 마침 잠이 들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사람 지껄이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가 요란한데 모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요, 급기야 문을 열자 벌떼처럼 뜰에 가득 찬 사람들이 이 어디 사람들인가. 이른바 조선 사람이라고는 이곳에 온 일이 없으므로 북로(北路)에서는 처음 보니, 그들은 아마 안남(安南) 사람인지 일본(日本)유구(琉球)섬라(暹羅)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쓴 모자는 둥근 테가 몹시 넓어서 머리 위에 검은 우산을 받은 것 같으니, 이는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갓일까 이상하다.” 했을 것이며, 그 입은 도포는 소매가 몹시 넓어서 너풀거리는 품이 마치 춤추는 듯하니, 이 또한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옷이랴, 이상한지고.” 했을 것이요, 그 말소리도 혹은 남남(喃喃)’ 하고 혹은 니니(呢呢)’ 또는 각각(閣閣)’ 하니 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 “이 무슨 소리랴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처음 본다면 비록 주공(周公)의 의관(衣冠)이라도 오히려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제도가 몹시 크고 고색이 창연할까보냐. 그리고 사신 이하의 복장이 모두들 달라서 역관들의 복장, 비장들의 복장, 군뢰들의 복장이 각기 따로따로 되어 있고, 역졸(驛卒)마두배는 맨발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는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옷은 해져서 엉덩이를 가리지 못하였으며, 왁자하게 지껄이며 대령하는 소리는 너무도 길게 빼니 이 모두 처음이라. “이 무슨 예법이랴. 이상하고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한 나라 사람이 함께 온 것을 모르고 아마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 들이 함께 제 집에 들어온 줄로 알았을 것이니, 어찌 놀랍고 떨리지 아니하리오. 이는 비록 백주에라도 넋을 잃을 것이거늘 하물며 아닌밤중이리오. 비록 깨어 앉았어도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잠결에서리오. 또 더군다나 열여덟 살 약관(弱冠)의 어린 사내이겠는가. 비록 세상 일을 싫도록 겪은 여든 살 노인일지라도 필시 놀라서 와들와들 떨며 졸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관이 와서,

 

밀운 지현이 밥 한 동이와 채소과실 다섯 쟁반, 돼지거위오리고기 다섯 쟁반, 술 다섯 병을 보내왔고, 또 땔나무와 말먹이도 보내왔습니다.”

한다. 정사는,

 

그래, 땔나무나 말먹이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마는, 밥과 고기 들은 주방이 있으니 남에게 폐를 끼칠 게 있겠어.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부사님과 서장관 나리께 여쭈어 결정짓는 게 옳을 거야.”

하였다. 수역은,

 

이곳을 들어오면 동팔참(東八站)으로부터 으레 공궤(供饋)가 있는 법이랍니다. 다만 이렇게 익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제 이곳에 도로 오게 된 것은 비록 뜻밖의 일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저들이 지주(地主)의 체면으로서 이를 제공하였은즉 무슨 이유로 그를 물리칠 수 있사오리까.”

한다. 이러한 차에 부사와 서장관이 들어와서,

 

이건 황제의 명령도 없은즉 어찌 받을 수 있겠어요. 마땅히 돌려보냄이 옳겠습니다.”

한다. 정사도,

 

그렇겠소.”

하고는, 곧 명령을 내려 그를 받기 어려운 뜻을 밝히게 하였다. 이제 여남은 인부들이 끽 소리도 없이 다시 지고 가버렸다. 서장관이 또 하인들에게,

 

만일 한 줌의 땔나무나 말먹이를 받는다면 반드시 무거운 매를 내릴 거야.”

하고, 엄격히 단속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서 조달동(趙達東)이 와서,

 

군기 대신(軍機大臣) 복차산(福次山)이 당도하였답니다.”

하고 여쭙는다. 대개 황제가 특히 군기 대신을 파견하여 사신을 맞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바른 길로 덕승문(德勝門)에 들어가자 우리의 일행은 벌써 동편 바른 문을 통과하였으므로 서로 어긋나게 된 것이다. 복차산은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뒤를 쫓아 온 것이다. 그는,

 

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시오니 반드시 초아흐렛날 아침 일찍 열하에 도달하여 주시오.”

하며, 두세 번 거듭 부탁하고 가버린다. 군기(軍機)란 마치 한()의 시중(侍中)과 같아서 늘 황제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황제가 군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군기가 하나하나를 의정대신(議政大臣)에게 전달하곤 한다. 그가 비록 계급은 낮으나 황제에게 가까운 직책을 맡았으므로 대신(大臣)’이라 일컬었다. 복차산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쯤 되는데 키는 거의 한 길쯤이고 허리가 날씬하고 눈매가 가늘어서 매우 풍치가 있어 보이었다. 그는 말이 끝난 뒤에 화고(花糕) 하나를 먹고는 곧 말을 달리며 떠나버렸다.

그리고 벽돌이 깔린 대청이 넓고도 통창하였으며 탁자 위의 모든 물건은 위치가 정돈되었다. 하얀 유리 그릇에 불수감(佛手柑) 세 개를 담았는데 맑은 향내가 코를 찌른다. 10여 개의 교의는 모두 무늬 있는 나무로 꾸몄으며, 서편 바람벽 밑에는 등자리와 꽃방석양털보료 등이 깔려 있고, 구들 위에는 붉은 털방석을 깔았으되 길이나 너비가 알맞게 되어 있고, 침대 위에 깔린 자리는 말총으로 쌍룡을 수놓았으되 오색이 찬란하였다. 두 하인이 그 위에 누워 있음을 보고 시대를 시켜 깨웠으나 곧 일어나지 않자 시대가 크게 호통하여 쫓아버렸다. 나는 이때 하도 피로하기에 잠깐 그 위에 누웠더니 별안간 온 몸이 가려워 견디기 어렵기에 한 번 긁자 굶주린 이들이 더덕더덕하였다. 곧 일어나 옷을 털고 나서,

 

밥이 이미 익었느냐.”

하고, 물었다. 시대는,

 

애초부터 밥을 지은 일이 없답니다.”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대체로 이때는 밤이 곧 닭울 녘이어서 한 그릇 물이나 한 움큼 땔나무도 사올 곳이 없으니, 비록 저 사자(獅子) 어금니같이 흰 쌀과 높게 쌓인 은이 있다 하더라도 밥을 익힐 길은 없었다. 그리고 부사의 주방은 낮에 벌써 비 내리기 전에 시내를 건넜으므로 영돌(永突) 상방의 건량고(乾糧庫) 지기이다. 이 부사와 서장관의 주방을 겸하였으나 밥을 지을 기약은 아득하였다. 하인들이 모두 춥고 굶주려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나는 그들을 채찍으로 갈겨 깨웠으나 일어났다가 곧 쓰러지곤 한다. 하는 수 없어서 몸소 주방에 들어가 살펴본즉 영돌이 홀로 앉아 공중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뽑는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종아리에 고삐를 맨 채 뻗고 누워 코를 곤다. 마침 간신히 수숫대 한 움큼을 얻어서 밥을 지으려 했으나 한 가마솥의 쌀에 반 통도 못 되는 물을 부었으니 결코 끓을 리 없거니와 도리어 가소로운 일일 뿐이다. 이윽고 밥을 받아 본즉 물이 쌀에 스며들지 못 하였으니 그 생()과 숙()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 숟갈을 들지 못한 채 정사와 함께 술 한 잔씩을 마시고 곧 길을 떠났다. 이때 닭은 서너 홰를 쳤다. 창대가 어제 백하를 건너다 말굽에 밟혀서 발굽철이 깊이 들어 쓰리고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으나, 그의 대신으로 견마잡을 자도 없어서 일이 극히 낭패스러웠다. 그렇다 해서 촌보를 옮기지 못하는 그를 중도에다 떨어뜨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비록 잔인하기 짝이 없으나 하는 수 없이 기어서라도 뒤를 따라 오게 하고 스스로 고삐를 잡고 성을 나섰다. 사나운 물결이 길을 휩쓸고 간 나머지 어지러운 돌이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손에는 등불 하나를 가졌으나 거센 새벽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동북쪽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별빛만을 바라보며 전진하였다. 앞 시냇가에 이른즉, 물은 이미 물러갔으나 아직 말 배꼽에 닿았다. 창대는 몹시 춥고 주린데다 발병이 나고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채 또 차가운 물을 건너게 되어 그저 걱정되기 짝이 없었다.

 

 

[D-001]돌지계(突地稽) : 수 문제(隋文帝) 때 말갈의 추장으로, 수 나라에 귀화하여 순주 도독(順州都督)이 되었다.

[D-002]주덕위(周德威) : 후당의 명장. 자는 진원(鎭遠).

[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난신(亂臣) 패자(悖子).

[D-004]조길상(曹吉祥) : 명 영종(明英宗) 때의 사례 태감(司禮太監)으로, 삼대영(三大營)을 총독하여 석형(石亨)과 더불어 위복(威福)을 누리었으나, 나중에 반란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D-005]알리불(斡離不) : 금 태조(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둘째 아들.

[D-006]곽약사(郭藥師) : ()가 망할 때 원군(怨軍)의 괴수.

[D-007]과하마(果下馬) : 과실나무 가지 밑을 타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중에 나오는 한반도의 말.

[D-008]행전(行殿) : 군주가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 거처하는 곳. 행재소(行在所). 행궁(行宮).

[D-009]삼국지(三國志) : ()의 진수(陳壽)가 지은 위()()() 삼국의 역사.

[D-010]유향(劉向) : ()의 종실(宗室)로서 저명한 학자.

[D-011]추연(鄒衍) : 전국 시대 제()의 음양가(陰陽家). 퉁소를 불어서 추운 날씨가 따뜻해지게 하였다.

[D-012]불수감(佛手柑) : 중국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등지에서 자라는 상록관목의 과실. 곧 귤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일 계축(癸丑)

 

 

아침에 비가 조금 뿌리다가 곧 개다.

목가곡(穆家谷)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남천문(南天門)을 나섰다. 성은 큰 재 마루턱에 있고 그 후미진 곳에 문을 내었는데 이름은 신성(新城)이다. 옛날 오호(五胡) 때 석호(石虎 후조(後趙)의 임금)가 단요(段遼)를 추격하자 단요가 모용황(慕容皩 북연(北燕)의 임금)과 함께 도로 반격하여 석호의 장수 마추(麻秋)를 쳐서 죽인 곳이 곧 이곳이었다.

이로부터 잇달아 높은 고개를 넘게 되어 오르막은 많으나 내리막이 적어지는 것을 보아 지세가 점차 높아짐을 알겠고 물결은 더욱 사나웠다. 창대가 이곳에 이르자 통증을 견디지 못하여 부사의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하소연하고 또 서장관에게도 호소하였다 한다. 이때에 나는 먼저 고북하(古北河)에 이르렀으므로 부사와 서장관이 이르러 창대의 딱하고 민망스러운 꼴을 얘기하면서, 나에게 달리 구처(區處)할 좋은 꾀를 생각해 보기를 권하였으나 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창대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따라 왔다. 이는 중로에서 말을 얻어 타고 온 모양이다. 곧 돈 2백 닢과 청심환 다섯 알을 주어서 나귀를 세내어 뒤를 따르게 하였다.

드디어 냇물을 건넜다. 이 물의 또 하나의 이름은 광형하(廣硎河)였으니 이곳이 곧 백하의 상류였다. 물세가 변방에 이를수록 더욱 사나우므로 건너기를 다투는 거마들이 모두 웅기중기 서서 배 오기를 기다린다. 제독과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손수 채찍을 휘두르면서 이미 배에 오른 사람들까지도 몰아쳐 내리게 하고는 우리 일행을 먼저 건너 주게 하였다.

저녁 나절에 석갑성(石匣城) 밖에서 밥을 지었다. 이 성의 서쪽에 갑()처럼 생긴 돌이 있다 하여 역() 이름까지도 석갑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옛날 유수광(劉守光)이 도망왔다가 사로잡힌 데가 곧 이곳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곧 떠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산길은 심한 굴곡이 거듭되었다. 왕기공(王沂公)이 일찍이 거란(契丹)에 올린 서한 중에,

 

금구전(金溝淀)에 이르러 산을 감돌아 들어 오르고 또 오르되 이표(里標)나 척후(斥堠)도 없으므로 말이 달리는 시간을 따져서 대체로 90리쯤 가서 고북관(古北館)에 이르렀습니다.”

고 하였다는데, 이제 벌써 금구전은 어디인지를 알 길이 없을뿐더러 새북의 노정이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하여는 옛사람도 역시 아리송한 모양이다.

때마침 대추가 반쯤 익었는데 마을마다 대추나무로 울타리가 이룩되었으며, 혹은 대추나무 밭이 보여 마치 우리나라의 청산(靑山)보은(報恩)과 같았고, 대추는 모두 한 줌이 넘을 만큼 컸다. 그리고 밤나무 역시 숲을 이루었으나 밤톨이 극히 자잘하여 겨우 우리나라 상주(尙州)의 것과 비슷하였다. 옛날 소진(蘇秦)이 연 문공(燕文公)을 유세하던 말 중에,

 

()의 북쪽에 밤과 대추의 생산지가 있는데 천부(天府)’라 이른답니다.”

하였으니, 아마 이는 고북구(古北口)를 두고 이른 듯싶다.

마을 거리를 지날 때마다 남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나이 조금 지긋한 여인치고 혹이 목에 달리지 않은 자 없는데, 큰 것은 거의 뒤웅박처럼 되었고, 더러는 서넛이 주렁주렁 달린 이가 없지 않아서 대개 열에 7~8은 모두 그러하였고, 젊은 계집애들과 얼굴 고운 여인은 흰 분을 발랐으나 목에 달린 뒤웅박처럼 생긴 혹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중에도 늙은이는 가끔 커다란 혹이 달렸다. 옛 말에,

 

()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가 누렇고, 험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목에 혹이 달린다.”

하였고, ,

 

안읍(安邑)은 진()의 땅으로, 대추가 잘 되므로 그들은 단 것을 많이 먹어서 이가 모두 누렇다.”

하였으나, 이제 이곳에는 대추나무밭이 이룩되었으나 여인들의 하얀 이가 마치 박씨를 쪼개 세운 듯하니 이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의방(醫方)에 이르기를,

 

산협(山峽)의 물은 흔히들 급히 내리흐르므로 오래도록 마시면 혹이 많이 생긴다.”

하였으니, 이제 이곳 사람들의 혹이 많음은 험한 곳에 살고 있는 까닭이겠지마는, 유독 여인에게 많이 볼 수 있음은 어인 일인지 알 길이 없겠다.

잠시 성안에서 말을 쉬었다. 시전(市廛)과 거리가 제법 번화하긴 하였으나 집집마다 문이 닫혔으며, 문밖에는 양각등(羊角燈)을 달아 오롱조롱 별빛과 함께 오르내리곤 한다. 때는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두루 구경하지 못하고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 곧 나섰다. 어두운 가운데 군졸 수백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아마 검색하려고 지키고 있는 듯싶다. 세 겹의 관문(關門)을 나와서 곧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쓰려고,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 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 속에서 꺼내어 성 밑에 벌여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關內)에서 잠시 술 마실 때 몇 잔을 남겨서 안장에 매달아 밤 샐 때까지를 준비한 일이 있기에, 이를 모두 쏟아 밝은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요 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때를 만난 가을에다 닭이 울려는 새벽이었으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일까보냐. 이에서 또 한 고개에 올랐다. 초승달은 이미 졌는데, 시냇물 소리는 더욱 요란히 들렸으며, 어지러운 봉우리는 우중충하여 언덕마다 범이 나올 듯 구석마다 도적이 숨은 듯할뿐더러, 때로는 우수수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나부낀다. 따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물가에 다다르니 길이 끊어지고 물이 넓어서 아득히 갈 곳을 찾을 수 없는데 다만 너덧 허물어진 집들이 언덕을 의지하여 서 있었다. 제독이 달려가서 말에서 내려 손수 문을 두드리며 백천 번 거듭 그 주인을 불러 호통쳤다. 그는 그제야 대답하며 문을 나와 자기 집 앞에서 곧 건너기를 가르쳐 준다.  5백 닢으로 그를 품사서 정사의 가마 앞을 인도하게 하여 마침내 물을 건넜다. 대개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는데 물 속에는 돌에 이끼가 끼어서 몹시 미끄러우며, 물이 말 배에 넘실거려 다리를 옹송그리고, 발을 모아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안장을 꽉 잡고, 끌어 주는 이도 부축해 주는 이도 없건마는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내 이에 비로소 말을 다루는 데는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汗衫) 역시 길므로 그것에 두 손이 휘감겨서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드날리려 할 때 모두 거추장스러움이 첫째 위태로움이다. 그런 형편이므로 부득이 딴 사람으로 하여금 견마를 잡히게 되니, 온 나라의 말이 벌써 병신이 되어 버린다. 이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제멋대로 달릴 수 없음이 둘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길에 나서면 그 조심함이 사람보다 더하거늘 사람과 말이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므로 마부(馬夫) 자신이 편한 땅을 디디고 말을 늘 위태한 곳으로 몰아넣으므로 말이 피하려는 곳을 사람이 억지로 디디게 하고, 말이 디디고 싶어하는 곳에서 사람이 억지로 밀어버리니, 말이 되받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항상 사람에게 노여운 마음을 품은 까닭이니, 이는 셋째의 위태로움이다. 말이 한 눈은 이미 사람에게 가려졌고 남은 또 한 눈으로 사람의 눈치를 살피노라고 온전히 길만 보고 걷기 어려우므로 잘 넘어지기 일쑤이니, 이는 말의 허물이 아닌데도 채찍을 함부로 내리치니 이는 넷째 위태로움이다. 우리나라 안장과 뱃대끈의 제도는 워낙 둔하고 무거운데 더군다나 끈과 띠가 너무 많이 얽히었다. 말이 이미 등에 한 사람을 싣고 입에 또 한 사람이 걸려 있으니, 이는 말 한 필이 두 필의 힘을 쓰는 것이라 힘에 겨워서 쓰러지게 되니 이는 다섯째 위태로움이다. 사람이 몸을 씀에도 바른편이 왼편보다 나음을 보아서 말 역시 그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오른 귀가 사람에 눌리어 아픔을 참을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목을 비틀어서 사람과 함께 한 옆으로 걸으며 채찍을 피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곧 말이 그 목을 비틀어서 옆으로 걷는 것을 사납고도 날랜 자태라 하여 기뻐하기는 하나 실은 말의 본정이 아니니 이는 여섯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채찍을 늘 받아 오니 그 바른편 다리만이 짝지게 아플 것임에도 불구하고 탄 사람은 무심히 안장을 버티고 앉아 있고, 견마잡이는 갑자기 채찍질하므로 몸을 뒤쳐서 사람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도리어 말을 책망하나, 이 역시 말의 본의가 아니니 이는 일곱째 위태로움이다. 문무를 막론하고 벼슬이 높으면 반드시 좌견(左牽)을 잡히니 이는 무슨 법인지, 우견(右牽)이 이미 좋지 않거늘 하물며 좌견이며, 짧은 고삐도 불가한데 하물며 긴 고삐이겠는가. 사삿집의 출입에는 혹시 위의를 갖출 법도 하거니와 심지어 임금의 어가를 모시는 신하로서 다섯 길이나 되는 긴 고삐로써 위엄을 보이려 함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는 문관(文官)도 불가한데 하물며 영문(營門)으로 나아가는 무장(武將)이겠는가. 이는 이른바 스스로 얽을 줄을 찬다는 겪이니 이 곧 여덟째 위태로움이다. 무장이 입는 옷을 철릭[帖裹]이라 하는데 이는 곧 군복이다. 세상에 어찌 명색이 군복이면서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넓단 말인가. 이제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이 모두 넓은 소매와 긴 한삼 때문이거늘,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움에 편안히 지내려 하니 아아, 슬프구나. 이는 설사 백락(伯樂)으로 바른편에 견마잡히고 조보(造父)로 왼편에 따른다 한들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둔다면 비록 준마(駿馬)가 여덟 필일지라도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옛날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진칠 때 멀리 숲 사이에서 연기가 오름을 바라보고는 군관 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그 군관이 좌우로 쌍견(雙牽)을 잡히고 거들먹거리고 가다가 뜻밖에 다리 밑에서 왜병 둘이 내달아 말의 배를 칼로 베고 군관의 목을 베어가 버렸다. 만력 임진년 왜구가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은 어진 정승인데, 그가 징비록(懲比錄)을 지을 때에 이 일을 기록하여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 잘못된 습속을 그런 난리와 어려움을 겪고도 고치지 못하였으니, 심하구나, 습속의 고치기 어려움이여. 내 이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만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어서 견마잡히지 않는 보람이 이와 같구나. 수역이 주부더러 하는 말이,

 

옛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제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라고 하지 않소. 정말 우리들 오늘 밤 일이 그러하구려.”

한다. 나는 곧,

 

그게 위태롭긴 위태로운 일이지만 위태로움을 잘 아는 것이라곤 할 수 없소.”

했다. 그 둘은,

 

어째서 그렇단 말씀이오.”

한다. 나는,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줄 아는 것이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오.”

하고는,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따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D-001]오호(五胡) : 북방의 다섯 개 종족, 곧 흉노(匈奴)()선비(鮮卑)()()이 중국 내부에 들어와서 집권하던 시대.

[D-002]왕기공(王沂公) : 송의 문학가 왕증(王曾). 기공은 봉호.

[D-003]연 문공(燕文公) : 전국시대 연의 임금. 소진의 말을 들어서 6국을 연합하여 종장(從長)이 되었다.

[D-004]여남은 …… 썼다 : 그 제자(題字) 산장잡기(山莊襍記)중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실렸다.

[D-005]한삼(汗衫) : 소매 끝에 붙여 드리우는 흰 헝겊.

[D-006]백락(伯樂) : () 나라 때 말을 잘 다루던 사람.

[D-007]조보(造父) :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八駿)을 잘 길들인 사람.

[D-008]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 : 임진왜란 당시에 영상까지 지낸 저명한 정치가. 서애는 호요, 자는 이현(而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일 갑인(甲寅)

 

 

개다.

새벽에 반간방(半間房)에서 밥 지어 먹고, 삼간방(三間房)에서 잠깐 쉬었다. 가끔 산기슭에 화려한 사당과 절들이 보이는데 혹은 아흔아홉 층의 백탑(白塔)이 있다. 그 탑과 사당을 지은 자리를 살펴보아도 아무런 아름다운 경개가 없는 혹은 산등성이 또는 물이 흘러 떨어지는 곳에 거만의 돈을 허비하였음은 대체 무슨 뜻인지. 이런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 제작의 웅장함과 조각의 공교로움과 단청의 찬란함이 모두 똑같은 수법이어서 하나만 보면 다른 것은 모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일일이 기록할 것조차 없겠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지니 사방에서 조공(朝貢)이 모여들어서, 수레낙타 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울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창대가 별안간 말 앞에 나타나 절한다. 몹시 반가웠다. 제 혼자 뒤떨어질 때 고개 위에서 통곡하자 부사와 서장관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겨 말을 멈추고 주방에게,

 

혹시 짐이 가벼운 수레가 있어 저를 태울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으나 하인들이,

 

없소이다.”

하고 대답하므로, 민망하게 여기고 지나갔을 뿐이더니 또 제독이 이르매 더욱 서럽게 울부짖으니, 제독이 말에서 내려 위로하고 그 곳에 머물러 있다가 지나가는 수레를 세내어 타고 오게 하였다. 어제는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니 제독이 친히 먹기를 권하고 오늘은 제독이 자기가 그 수레를 타고 자기가 탔던 나귀를 창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에 따라 올 수 있었다. 그 나귀가 매우 날쌔어 다만 귓가에 바람 소리가 일 뿐이었다 하기에 나는,

 

그 나귀는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제독이 저더러 이르기를, ‘네 먼저 타고 가서 공자(公子)를 따르되 만일 길에서 내리고 싶거든 지나가는 수레 뒤에 나귀를 매어 두라. 그러면 내가 뒤에 가면서 찾을 테니 염려 말라.’ 하더이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50리를 달려 고개 위에서 수레 수십 바리가 지나가기에 나귀에서 내려 맨 나중 수레 뒤에 매어 주었습니다. 차부가 묻기에 멀리 고개 남쪽 지나 온 길을 가리켜 보였더니 차부[車人]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이다.”

한다. 제독의 마음씨가 매우 아름다우니 고마운 일이다. 그의 벼슬은 회동사역관 예부정찬사낭중 홍려시소경(會同四譯官禮部精饌司郞中鴻臚寺少卿)이요, 그 직품은 정사품(正四品) 중헌대부(中憲大夫)였으며, 그 나이는 이미 60에 가까웠다. 그러나 외국의 한 마부를 위하여 이토록 극진한 마음씨를 보임은 비록 우리 일행을 보호함이 직책이라 하겠지만, 그 처신의 간략함과 직무에 충실함이 가히 대국의 풍도를 엿볼 수 있겠다. 창대의 발병이 조금 나아서 견마를 잡고 갈 수 있게 되었음은,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哈喇河)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 가는 수많은 수레가 길을 재촉하면서 달린다. 나는 서장관과 고삐를 나란히 하며 가는데, 산골짝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두세 마디 들려 온다. 그 많은 수레가 모두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싶다. 아아, 굉장하구나. 따로 만방진공기(萬方進貢記)〉 〈산장잡기 속에 들어 있다. ‘수택본에는 없다. 를 썼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나흘 밤낮을 눈을 붙이지 못하여 하인들이 가다가 발길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조는 것이었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 혹시 눈을 뻔히 뜨고 물건을 보나, 벌써 이상한 꿈에 잠기고, 혹은 남더러 말에서 떨어질라 일깨워 주면서도, 내 자신은 안장에서 기울어지고는 한다. 포근포근 잠이 엉기고 아롱아롱 꿈이 짙을 때는, 지극한 낙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온 몸이 날아갈 듯하고 두뇌가 맑아져서, 그 견줄 곳 없는 묘한 경지야말로 취리(醉裏)의 건곤이요, 몽중(夢中)의 산하(山河)였다. 또 때는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를 뽑고, 태공에 흩어진 꽃봉오리가 어지러이 떨어지며, 그 아늑한 마음은 도교(道敎)의 내관(內觀 묵상(黙想))과 같고, 놀라서 깰 때는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와 다름없었다. 팔십일난(八十一難)이 삽시간에 걷히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잠깐에 지나간다. 이런 때엔, 비록 추녀가 몇 자가 넘는 화려한 고대광실에 석 자를 괸 큰 상을 받고 예쁜 계집 수백 명이 모시고 있는 즐거움이나,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한 구들목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노니는 그 재미와는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길가에 돌을 가리키며,

 

, 장차 우리 연암(燕巖)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 선생(希夷先生)보다 하루를 이길 것이고 코 고는 소리가 우레 같아 천하의 영웅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놓치고, 미인으로 하여금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돌과 같으리라.”

하다가 한번 꾸벅하면서 깨니, 이 또한 꿈이었다. 그리고 창대도 가면서 이야기하기에, 나 역시 대꾸하다가 가만히 살펴보니, 헛소리를 자주한다. 대개 제가 여러 날 동안 주린 끝에 다시 크게 추위에 떨다가 학질에 걸린 듯 인사를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에 밤은 이미 이경(二更) 즈음이다. 마침 수역과 동행하였는데, 그의 마부도 역시 벌벌 떨고 크게 앓으므로 함께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앞 참() 5리밖에 남지 않았다 하므로, 병든 두 마부를 각기 말에 싣고, 흰 담요를 꺼내어 창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띠로 꼭꼭 묶어서 수역의 마두더러 부축하여 먼저 가게 하고, 수역과 더불어 걸어서 참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이곳에는 행궁이 있고 여염과 시전이 극히 번화하였으나, 그 참의 이름은 잊었다. 아마 화유구(樺楡溝)인 듯싶다. 객점에 이르니 곧 밥을 내어 왔으나, 심신이 피로하여 수저가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혀는 백 근인 양 움직이기조차 거북하다. 상에 가득한 소채나 적구이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무지개처럼 뻗쳤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 이에 청심환 한 개로써 소주와 바꾸어 마시니, 술맛이 또한 좋아서, 마시자 곧 훈훈히 취하여 퇴연(頹然)히 베개를 이끌어 잠들었다.

 

 

[D-001]팔십일난(八十一難) : 중생(衆生)이 도를 통하기에 여든한 가지의 장애가 있다. 불가에서 나온 말.

[D-002]사백사병(四百四病) : ()()()()이 각기 일백여덟 가지의 병이 있다 한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나온 말.

[D-003]장주(莊周) …… 노니는 : 남화경(南華經)에서 나온 몇 구절.

[D-004]희이 선생(希夷先生) : 송의 은사 진단(陳摶). 희이는 호요, 자는 도남(圖南). 그는 한 번 잠들면 천 날씩 오래 잤다 한다.

[D-005]천하의 …… 놓치고 :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함께 영웅을 논하다가, 조조가 자기를 영웅이라 지적할 때 유비는 수저를 떨어뜨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9일 을묘(乙卯)

 

 

개다.

아침나절 사시(巳時)에 열하에 들어 태학(太學)에 머물렀다. 그 날 닭울 녘에 먼저 떠나서 수역과 동행하였다. 길에서 난하(灤河)가 건너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수역이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난하의 소식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니레 기다려야 한번 얻어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강가에 이르니, 거마가 구름처럼 모인 것이 무려 천이며 만인데, 물은 넓고 거세어서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행궁 앞이 제일 물살이 세다. 난하는 독석구(獨石口)에서 나와 옛 흥주(興州)의 지경을 거쳐 북예(北隸)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경(水經) ()에 이르기를,

 

유수(濡水)는 어융진(禦戎鎭)에 나와서 사야(沙野)를 거치며 굽이굽이 돌아서 1 5백 리쯤 흘러 장성에 든다.”

하였다. 겨우 작은 배 너덧 척이 있었다. 사람은 많고 배는 작으므로 건너기 어려운 것이다. 말 탄 사람들은 모두 옅은 물결을 골라서 건너지만, 수레는 그리할 수 없었다. 석갑(石匣)에서 가마 탄 자 하나를 만났다. 따르는 사람이 10여 기요, 네 사람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5리에 한 번씩 교대하는데, 말 탄 사람이 내려서 서로 바꾸어 메곤 하였다.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데, 병부 시랑(兵部侍郞)의 행차라 한다. 가마는 녹색 우단(羽緞)으로 가리고 삼면에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나, 탄 사람은 늘 깊이 들어앉았으므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모자를 벗어 창 한 구석에 걸어 놓고 종일토록 책을 읽고 있다. 어제는 종자(從者)를 부르니까 종자가 갑() 속에서 책 하나를 꺼내어 바쳤는데, 그 제목은 오자연원록(五子淵源錄)이었다. 창 안에서 손을 내밀어 이를 받는데, 그 팔뚝이나 손가락이 옥같이 희었다. 또 창 안에서 이아익(爾雅翼 송 나안(羅顔)의 저) 한 권을 내준다. 그 목소리나 손길이 모두 여인 같다. 이곳에 이르자 가마에서 내리고, 가마 안의 책을 꺼내어 종자들이 나누어 품 속에 간직하며, 그 사람은 다시 말을 타는데, 참으로 미남자였다. 미목이 시원하고 몇 줄기 흰 윗수염이 듬성듬성하다. 가마는 휘장을 걷고, 종자를 태웠던 말들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모자에 푸른 새깃을 꽂은 사람이 언덕 위에 서서 채찍을 들어 지휘하여 먼저 우리 일행을 건너게 하는데, 비록 짐짝에다 진공(進貢)’이니 상용(上用 황제의 어용(御用))’이니 하는 글자를 쓴 기()를 꽂은 것이라도 먼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혹시 먼저 뛰어오른 자의 차림새가 관원인 듯하여도, 반드시 채찍으로 몰아 내어 버린다. 이는 곧 행재 낭중(行在郞中)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 건너는 일을 간검하는 자이다. 다만 쌍교(雙橋) 넷이 있어 그 크기가 집채만한데, 바로 배 안으로 메고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무거운 산을 들어서 알[]을 누르는 듯싶다. 그러하므로, 낭중들도 채찍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날카로운 위세를 피하곤 한다. 그 가마꾼들의 눈에는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물도 없을뿐더러, 사람도 뜨이지 아니하고 외국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만 그가 멘 가마만이 있을 뿐이니, 알지 못하겠노라. 그 가운데 어떠한 보물이 들었건대, 가마꾼이 그처럼 세를 쓸까.

강을 건너 10여 리를 가니, 환관(宦官) 셋이 와서 박보수(朴寶樹)와 더불어 말머리를 대고 몇 마디 수작하고는, 곧 말을 돌려 가버린다. 또 한 내시가 오림포(烏林哺)와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림포가 가끔 낯빛을 변하고 놀라워하는 기색을 보일 때, 박보수와 서종현(徐宗顯)이 말을 달려서 옆을 가면 오림포가 손짓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비밀한 이야기인 듯싶다. 그 내시 역시 말을 달려 가 버린다.

한 산모롱이를 지나치니, 언덕 위에 돌을 깎아 세운 듯한 봉우리가 탑처럼 마주 서 있어서, 하늘의 기교한 솜씨를 보이는 듯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된다. 그리하여 쌍탑산(雙塔山)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연달아 내시가 와서, 사행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고 간다. 예부에서 태학에 들라는 뜻을 먼저 알리러 왔다.

며칠 동안 산골 길을 다니다가 열하에 들어가니, 궁궐이 장려하고 좌우에 시전이 10리에 뻗쳐 실로 새북(塞北)의 한 큰 도회이다. 바로 서쪽에 봉추산(捧捶山)의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마치 다듬잇돌과 방망이 같은 것이 높이 백여 길이요, 꼿꼿이 하늘에 솟아서 석양이 옆으로 비치어 찬란한 금빛을 뿜고 있다. 강희 황제가 이를 경추산(磬捶山)’이라 고쳐 이름지었다 한다. 열하성(熱河城)은 높이 세 길이 넘고, 둘레가 30리이다. 강희 52(1713)에 돌을 섞어서 얼음 무늬로 쌓아올리니, 이는 이른바 가요문(哥窰紋)이었다. 인가의 담도 모두 이 법으로 하였다. 성 위에 비록 방첩(防堞)을 쌓긴 하였으나 여느 담과 다름이 없으며 지나온 여러 고을의 성곽(城郭)만도 오히려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삼십육경(三十六景)이 있다 한다. 한 나라의 옛 요양(要陽)백단(白檀)활염(滑鹽) 세 고을의 땅이니, 한 경제(漢景帝)가 이광(李廣)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려 백단에서 깃발을 멈추라.”

한 것이 곧 이곳을 이름이다.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활염(滑鹽)의 허물어진 성을 고쳐 쌓았는데, 세속 사람들은 이를 대흥주(大興州)’라 일렀고, 명 나라 상우춘(常遇春)이 먀속(乜速 ()의 명장)을 전녕(全寧)으로 몰아서 깨뜨리고 대흥주로 나아가 머물렀다 함은 곧 이곳이다.

지난해에 태학(太學)을 새로 지었는데, 그 제도는 연경과 다름없었다.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이 모두 겹처마에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오른편 담 밖에 있으며, () 앞 행각(行閣)에는 일수재(日修齋)시습재(時習齋) 등의 편액이 붙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수업재(修業齋) 등이 있었다. 뒤에는 벽돌로 쌓은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서, 그 오른편엔 정사가 들고 왼편엔 부사가 들었다. 그리고 서장관은 행각 별재(別齋)에 들고 비장과 역관은 한 재실에 모두 들었으며 두 주방은 진덕재에 나누어 들었다. 대성전 뒤와 좌우에 둘려 있는 별당(別堂)별재 들은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 많고도 또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우리 주방으로 인해 많이 그슬리고 더럽혀졌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로 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를 썼다.

 

 

[D-001]삼십육경(三十六景) : 피서록(避暑錄) 첫머리에 상세히 적혀 있다.

[D-002]이광(李廣) : 북방 흉노족과 70여 회를 싸워서 이긴 한의 명장.

[D-003]아보기(阿保機) : 요 태조(遼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D-004]상우춘(常遇春) : 명 태조(明太祖) 때의 명상(名相).

[D-005]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 : 일문(逸文)이 되었다. ‘박영철본 권지 십오(卷之 十五) 끝 보유(補遺) 중에도 열하태학기(熱河太學記)라는 편목(篇目)이 남아 있으나, 역시 일문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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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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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40리다.

 

1. 가을 7 24일 경자(庚子)

2. 25일 신축(辛丑)

3. 열상화보(冽上畵譜)

4. 26일 임인(壬寅)

5. 이제묘기(夷齊廟記)

6.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7. 석호석기(射虎石記)

8. 27일 계묘(癸卯)

9. 28일 갑진(甲辰)

10. 호질(虎叱)

11. 호질후지(虎叱後識)

12. 29일 을사(乙巳)

13. 30일 병오(丙午)

14. 8 1일 정미(丁未)

15. 동악묘기(東嶽廟記)

16. 2일 무신(戊申)

17. 3일 기유(己酉)

18. 4일 경술(庚戌)

 

 

 

가을 7 24일 경자(庚子)

 

 

개다.

홍화포에서 떠나 범가장(范家庄)까지 2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범가장에서 양하제(楊河堤)까지 3, 대리영(大理營) 7, 왕가령(王家嶺) 3, 봉황점(鳳凰店) 2, 망해점(望海店) 8, 심하역(深河驛) 5, 고포대(高舖臺) 8, 왕가포(王家舖) 2, 마붕포(馬棚舖) 7, 유관(楡關) 3, 모두 48리이다. 이날에는 68리를 걸었다. 유관(楡關)에서 묵다. 유관은 혹은 유관(渝關)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임유현(臨渝縣)이다.

관내(關內)의 풍기는 관동에 비하여 아주 달라서 산천이 밝고 아름다우며 굽이굽이 그림 같다. 홍화포로부터 비로소 돈대가 있어 5리에 하나, 10리에 하나씩인데, 그 제도는 네모지고 바르며, 높이는 다섯 길 그 위에 집 3칸을 짓고, 곁에는 세 길 되는 깃대를 세웠으며, 돈대 밑에 다시 집 5칸을 지었다. 담 위에는 활집살통과 표창(熛鎗)화포(火砲) 등을 그려 붙였고, 집 앞에는 도()()()()을 늘어 꽂았으며, 무릇 봉화 드는 것과 망보는 일들에 관한 여러 가지 조목을 써서 벽에 둘러 붙였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성상 4년 경자 청 건륭 45이라는 원주(原註)가 있으나,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5일 신축(辛丑)

 

 

개다.

유관에서 떠나 영가장(營家庄)까지 3, 상백석포(上白石舖) 2, 하백석포(下白石舖) 3, 오가장(吳家庄) 3, 무령현(撫寧縣) 9, 양장하(羊腸河) 2, 오리포(午哩舖) 3, 노가장(蘆家庄) 2, 시리포(時哩舖) 3, 노봉구(蘆峯口) 5, 다붕암(茶棚菴) 5, 음마하(飮馬河) 3, 배음보(背陰堡) 3,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배음보에서 쌍망점(雙望店)까지 8, 요참(要站) 5, 달자영(㺚子營) 3, 부락령(部落嶺) 6, 노룡새(盧龍塞) 3, 여조(驢槽) 13, 누택원(漏澤園) 3, 영평부(永平府) 2, 모두 43리이다. 이날 89리를 걸었다. 영평부에서 잤다.

무령현을 지나자 산천이 더욱 명랑(明朗)한 기운을 띠고, 성안 거리에는 집집마다 금편(金篇)옥음(玉音)이요, 패루가 곳곳이 휘황찬란하다. 길 오른편 한 문 앞에 부사와 서장관의 하인들이 가마를 멎고 있다. 이는 곧 서 진사(徐進士) 학년(鶴年)의 집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지금 이 집에서 구경을 하고 있다 하기에 나도 말에서 내려 들어가니, 그 집이 사치스럽고 그릇들의 진기함이 과연 전날 듣던 바와 다름없다. 학년은 십여 년 전에 죽고, 두 아들이 있어서 맏은 조분(苕芬)이요, 둘째는 조신(苕信)인데, 조신은 제법 문필(文筆)에 능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꾸미는 데 서사원(書寫員)으로 뽑혀서 방금 북경에 가 있고, 조분만이 집에 있긴 하나 문필이 매우 짧다. 당에 가득히 과친왕(果親王 청 세종의 일곱째 아들)아극돈(阿克敦 청 고종 때의 명신. 문장가)우민중(于敏中 청 고종 때의 학자. 정치가)악이태(鄂爾泰 청 태종 때의 명신)황삼자(皇三子 이름은 홍시(弘時))황오자(皇五子 이름은 홍서(弘書).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등의 시()를 새겨 걸었다. 그들은 모두 흥경 제관(祭官)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고 시를 남기고 간 것이다. 우민중과 아극돈은 다 해내(海內)의 명필이라 일컫건만 과친왕(果親王)에 비해 여간 손색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침실 문설주 위에 백하(白下) 윤 판서(尹判書) ()의 칠언 절구 한 수를 새겨 걸었고, 문 밖 설주 위에는 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가 윤()의 시를 차운(次韻)한 것을 새겨 걸었다. 윤공(尹公)은 우리나라의 명필이라, 한 점 한 획이 옛법 아닌 것이 없어, 그 천재의 화려하고 고운 품이 마치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같고, 먹빛이 짙고 연함과 획의 살찌고 여윈 것이 알맞게 섞이었으나, 이제 그들의 글씨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지 않음은 어인 까닭일까. 대개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익힘에는 옛날 사람의 참된 필적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본뜬 것이 기껏해야 금석문자(金石文字)에 지나지 않으니, ‘금석이란 다만 고인의 글씨에 대하여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 그지없이 오묘(奧妙)한 그 붓 놀림의 신운(神韻)은 벌써 선천(先天)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본 글씨의 체세(體勢)에는 방불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뼈대가 뻣뻣해져서 전혀 필의(筆意)가 엿보이지 않으며, 그 먹빛이 짙을 때에는 묵저(墨猪)처럼 되고, 마를 때는 고등(枯藤)처럼 되니, 이는 다름 아니라 금석에 새긴 획이 습성에 젖어 있고 또 종이와 붓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서 옛날부터 고려의 백추지(白硾紙 백지를 다듬질한 것)낭모필(狼毛筆)을 일컬었다 하나, 이는 특히 외국의 진기한 물건이라 해서 그런 것이지 실지로 쓰고 그리기에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종이도 먹빛을 잘 받고 붓길이 순순히 풀려남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반드시 단단하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은 것만이 덕()이 됨은 아니리라. 서위(徐渭)가 말하기를,

 

고려 종이는 그림에는 맞지 않고 다만 돈[]처럼 두꺼운 게 좀 낫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별로 좋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종이는 애초에 다듬지 않으면 결이 거칠어서 쓰기 힘들고, 다듬이질을 지나치게 하면 지면이 너무 빳빳해지므로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딱딱하여서 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종이가 중국만 못하다 함이요, 붓은 부드럽고 날씬하고 고르고 순하여 팔과 함께 잘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요, 뻣뻣하고 강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좋은 붓이라면 반드시 호주(湖州)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오로지 양호(羊毫)를 써서 다른 털을 섞지 아니한다. 양털은 다른 털에 비하여 가장 부드러우므로 부서지지 않고, 종이에 닿으면 먹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이 마치 효자(孝子)가 어버이의 뜻을 말하기 전에 벌써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른바 낭모필(狼毛筆)’이란 더욱 잘못인 것이, 이리가 무슨 짐승인지도 알지 못하고 어찌 그 꼬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곧 족제비의 속명(俗名) ()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광() 자에서 녹() 변을 떼고 또 광() 자에서 엄(广)을 버리면 황() 자가 되므로 이를 황필(黃筆)’이라 한다. 이는 늘 굳세며 억세고 뻣뻣하여 부서질 염려가 있어 마치 동서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내닫는 철없는 아이 같다. 그러므로 우리 붓이 중국 것만 못하다 함이다. 종이와 붓이 이러한 데다가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 벼루에 해주(海州)의 후칠(厚漆)먹을 갈아서 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를 체첩(體帖)으로 본받으니, 이 아무리 삼절법(三折法 세 번 붓을 꺾는 서법)을 쓰더라도 여윈 뼈대가 메마르다. 아이들의 습자에 쓰는 분판(粉版)이란 또 무엇들인지.

그 후당(後堂)이 매우 조용하고 깨끗하여 세간의 잡된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강진향(降眞香 열대산 향나무로 만든 향)으로 만든 와탑(臥榻)이 있는데, 탑 위에 진열해 놓은 것들은 여러 사람이 지닐 수 없는 진기(珍奇)한 물건들이었고, 시렁 위에 놓인 서화(書畵)는 그야말로 금권(錦卷)옥축(玉軸)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었다.

정사부사의 비장들이 함부로 어지러이 뽑아서 무어라 떠들면서 빙 둘러서 펼쳐 보는 품이 마치 조보(朝報)를 펴보듯, 피륙을 말라 재는 듯이 접었다 꺾었다 하고, 함부로 날뛰는 양은 성을 무너뜨리고 전진을 떨어뜨리며, 적장을 베고 적기(敵旗)를 꺾어뜨리는 듯한 기세이다. 더구나 구경할 마음만이 바빠서 그 긴 것을 다 펴 보기 어려운즉,

 

공연히 펴기 시작했네그려.”

하고 도리어 만든 공장(工匠)을 탄하여,

 

이렇게 긴 축()을 무엇에 쓴단 말야. 병풍도 안 되겠고 족자도 못 만들 것을.”

하고 투덜거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는 그림을 모르네만, 그림이야 주홍빛 나는 까마귀가 가장 좋데그려.”

한다. 그리고 보니 환현(桓玄 ()의 서화 애호가) 같은 사람은 자기 집에 손님이 와도 혹시나 붙여둔 서화를 더럽힐까 하여 기름과자를 대접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참말 명사(名士)라 아니할 수 없겠다. 서편 벽 밑에서 별안간 군대가 행진하는 듯이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라서 돌아다 보니 여러 사람이 정()()()() 등의 고동(古董)을 제멋대로 들추는 것이다. 나는 하도 민망하여 바삐 문을 나섰다. 그 아래 윗집이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기에, 장복만 데리고 이집저집을 들렀으나 모두 주인이 없었다. 한 집에 이르니, 담 밑에 자죽(紫竹) 수십 대가 자라고 축대 아래에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서 있으며, 그 서쪽에는 두어 이랑 되는 모난 못이 있되, 흰 돌로 난간을 만들어 못 가를 둘렀다. 못 가운데는 대여섯 자루 연밥이 떠 있고, 난간 가까이 거위 새끼 세 마리가 노닌다. 당 가운데는 주렴을 깊게 드리우고 주렴 속에는 뭇 사람의 지껄이고 웃는 소리가 와아 하고 들린다. 나는 곧 못 가에 이르러 잠깐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온 당 안이 잠잠하여 쥐죽은 듯하고 주렴 너머로 엿보는 것이 어른거린다. 나는 못 가를 배회하면서 당 안을 향하여 연거푸 기침을 보냈더니, 이윽고 한 동자가 당 뒤를 둘러 나오며 멀찌감치 서서 읍을 하고 소리를 높여,

 

노장(老丈)께서는 무엇하러 여기를 오셨습니까?”

한다. 장복은,

 

너희집 어른이 어디 계시관대 멀리서 오신 손님을 맞이하지 않느냐?”

하니, 동자는,

 

아버지는 아까 일가 어른 이공(李公)과 함께 고려에서 온 양반들의 사관을 찾아 그들의 태의관(太醫官)을 만나러 가셔서 아직껏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하기에, 나는,

 

너희 댁에서 의원을 찾을 때는 필시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게로군. 내가 곧 태의관이고 이미 이곳까지 온 김이니 진찰해 보아도 좋고, 또 진짜 청심환도 있으니 네 곧 가서 너의 아버지를 모셔 오너라.”

하였으나, 동자는 들은 체도 않고 옷을 빌려서 거위새끼를 몰아 새초롱에 넣고, 난간에 세워 둔 낚싯대를 집어서 못 가운데 꺾어진 연잎을 끌어내어 우산처럼 들고 주척대며 가버린다. 주렴 안에는 일여덟 사람이 있는 듯한데, 무어라고 소곤소곤하고는 또 입을 막고 가만히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이켜 나오는데 장복을 돌아보니 그 귀밑의 사마귀가 요즘 더 커진 듯싶다. 조 주부(趙主簿) 명회(明會)와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령의 풍속이 좋지 못하군.”

하였더니, 조는,

 

무령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귀찮은 손님으로 친답니다. 서학년은 성품이 본래 손님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처음으로 백하(白下) 윤공(尹公)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며, 그가 간직했던 서화를 내어 보였던 것이, 그 뒤로부터 무령현 서 진사(徐進士)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회자하여 해마다 사행(使行)이 반드시 찾아 들른 것이 마침내 준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고을에 서씨집보다 더 나은 집들이 많고 또 손님을 좋아하는 주인도 다 학년만 못지 않으나, 공교로이 윤공이 먼저 학년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가진 것이 우리나라 재상도 당할 수 없음을 보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기리어서, 그 뒤로부터 역관들이 으레 서씨집으로 찾아 들게 됨은 역시 다시 다른 집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사행은 반드시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는 까닭에 비록 두어 길 되는 문호(門戶)를 드나들 때에도 반드시 소리를 갖추어 알리고, 또 한 군데 몰리어 당에 오르면 물러나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대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년의 집에서도 그 접대가 차츰 전과 같지 못하던 것이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들이 조선 손님을 아주 귀찮게 여기어서, 우리 사행이 올 무렵이면 좋은 그릇은 갈무리고 너저분한 것들만 벌여 놓아서 겨우 이때까지의 준례를 지킬 뿐이랍니다. 이제 그 옆집에서 피하고 숨은 것도 학년의 집처럼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자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윤공이 돌아온 뒤에 되놈의 새끼에게 재주를 팔았다 하여 탄핵을 입은 것은 대개 이 시()를 지은 까닭이다. 당시 언론(言論)의 지나침이 이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산세는 맑은 기운이 서리었다. 태항산(太行山)이 서쪽으로 쫓아와서 연경(燕京)을 껴안은 듯하고, 의무려산이 동으로 달려서 후진(後鎭)이 되어 용이 나는 듯 봉이 춤추듯이 각산(角山)에 이르러 뭉툭 잘리어 산해관이 되었다. 관에 들어서자 뭇 산들은 더욱 대막(大漠)의 억세고 거친 기세를 벗어나서 남으로 탁트인 국면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부드럽다. 창려(昌黎)에 이르자 모든 바닷가 고을들의 산기는 더욱 아름다웠다.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 창려현(昌黎縣) 서쪽 20리 되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조조(曹操 위 무제(魏武帝)) (),

 

동으로 갈석에 다다라 / 東臨碣石

아득한 저 바다 구경코저 / 以觀滄海

라 함은 곧 이를 말함이다. 이 고을에는 한 문공(韓文公)과 한상(韓湘)의 사당이 있다. 당서(唐書) 본전(本傳 한유전(韓愈傳))에는 문공을 등주(鄧州) 남양인(南陽人)이라 하였고, 광여기(廣輿記 () 육응양(陸應陽)의 저)에는 곧 창려인(昌黎人)이라 하였으며, ()의 원풍(元豊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 문공을 창려백(昌黎伯)으로 봉하였고, 원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곳에다 사당을 세워서 지금도 문공의 소상(塑像)이 있다 한다. 내 평생에 문공을 몽상(夢想) 중에 그리워했으므로 여러 사람더러 함께 가 보자고 하였으나 응하는 이가 없으니, 이는 20리나 길을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가기도 어려우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는 길에 동악묘(東嶽廟)에 들렀다. 뜰에 비석 다섯이 있고 전각 위에는 금자(金字) 동악대제(東嶽大帝)’라 써 붙였고, 그 가운데에는 금신(金神) 둘을 앉혔는데, 모두 단정히 손을 모으고 홀()을 잡았다. 후전(後殿) 제도도 전전과 같은데, 여상(女像) 셋을 앉혔고 이름을 낭랑묘(娘娘廟)’라 한다. 머리에는 모두 면류관을 썼다.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니, 성 밖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성을 둘러싸서 그 지형이 평양과 흡사하나 시원하게 툭 트인 것은 평양보다 더 낫다. 다만 대동강과 같이 맑은 물이 없을 뿐이다. 세인들의 전하는 말에,

 

김 학사(金學士) 황원(黃元 고려 예종 때의 문장가)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서,

긴 성 저 한 편에는 용용히 흐르는 강물이요 / 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 大野東頭點點山

의 두 구()를 읊고는 아무리 끙끙거려도 시상(詩想)이 메말라서 그 다음을 잇지 못한 채 통곡(痛哭)하고 누를 내려오고 말았다.”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논평하기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그 뒤 천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을 지냈건만 다시 한 구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이것이 좋은 글귀가 아니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용용(溶溶)’은 대강(大江)의 형세를 표현함에는 부족하고, ‘동두(東頭)’점점(點點)’의 산이란 그 거리가 40리에 불과한데 어찌 대야(大野)라 이를 수 있으리오. 이제 이 글귀를 연광정(練光亭)의 주련(柱聯)으로 붙였으나, 만일 중국의 사신이 이 정자에 올라가서 읽어 본다면 반드시 대야의 글자를 웃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영평성루(永平城樓)는 그야말로,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라고 할 만하다. 혹은 이르기를,

 

영평도 역시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땅이다.”

하나, 이는 잘못이다. 영평은 곧 한()의 우북평(右北平)이요, ()의 노룡새(盧龍塞)이다. 옛날에는 아주 궁벽한 땅이었던 것이 요()() 때로부터 북경에 가까이 있어서 거리와 점포의 번영함이 다른 곳보다 더하고, 진사(進士)의 패액(牌額)이 무령에 비기어 훨씬 많다. 영평부 앞 원문(轅門 병영 앞에 세운 문) 고지우북평(古之右北平)’이라 써 붙였다.

어두워진 뒤에 정 진사(鄭進士)와 함께 조용히 거닐다가 우연히 한 집에 드니, 마침 등불을 켜놓고 고려진공도(高麗進貢圖 조선 사행을 그린 그림)를 새기는 중이다. 지나온 길의 바람벽에 흔히 이 그림을 붙인 것을 보았는데, 모두 너절한 그림에다 추하게 찍어 내어 괴상스럽고 가소롭다. 그 그림에 홍포(紅袍)를 떨쳐 입은 것은 서장관이요, 몇십 년 전에는 당하관(堂下官)이 홍포를 입더니, 이제는 푸른 것으로 변했다. 흑립(黑笠)을 쓴 건 역관이요, 얼굴이 흡사 중과 같으면서 입에 담뱃대를 문 것은 전배(前排)의 비장이요, 곱슬수염에 고리눈은 군뢰(軍牢)이다. 이제 여기서 새기는 것도 추악하기 그지없어서 얼굴이 모두 원숭이처럼 되었다. () 가운데에 세 사람이 있으나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자가 못 된다. 탁자 위에 돌병풍[硏屛]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두 자 남짓, 너비는 한 자쯤 되는 화반석(花斑石)이다. 강산(江山)수목(樹木)누대(樓臺)인물(人物) 등을 그려 새겼으되, 모두 돌 무늬를 따라 천연스럽게 빛깔을 내어 그 미묘한 품이 신경(神境)에 들 지경이다. 강진향(降眞香)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세웠다.

이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란 자가 화첩(畵帖)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겉장에는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되 먹똥이 거듭 앉아 비눌지고 더할나위 없이 해져서,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건만 호생(胡生)의 거조를 보니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이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여닫는 데도 오직 깍듯이 한다. 정군(鄭君)이 침침한 눈으로 두 손에 이를 움켜 쥐고 책장을 풍우처럼 재빨리 넘기니, 호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정군이 다 보고는 획 집어 던지면서,

 

겸재(謙齋)나 현재(玄齋)가 모두 되놈의 호이구먼.”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아니 보아도 잘 알 일이지.”

하고, 호생더러,

 

당신은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하고 물으니, 그는,

 

아까 초저녁 때 귀국 김 상공(金相公)이 우리 점포에 오셔서 팔고 갔소. 김 상공은 믿음직한 사람이옵고 또 나와는 정분이 자별하여 친형제나 다름 없습니다. 문은(紋銀 품질이 우수한 은) 3 5푼으로 샀으니 만일 장황(裝潢)을 고쳐 놓으면 7냥은 실히 가리다. 다만 그린 이의 관지(款識)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이를 일일이 고증해서 적어 주시옵소서.”

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붉은 주사 한 홀()을 꺼내어 패물로 주며, 화자(畵者)의 소전(小傳)을 간곡히 부탁한다. 주인도 주과를 내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화 권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도 흔히들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아무 성 어떠한 사람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이 책 가운데도 간단한 두 글자씩 된 별호(別號)가 적혀 있기는 하나 분명하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군이 겸재현재를 되놈이라 한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다. 정군은 한어(漢語)가 서투른데다 또 이가 성기어서 달걀 볶음을 매우 좋아하므로, 책문에 들어온 뒤로 늘 하는 한어라고는 다만 초란(炒卵)’뿐인데, 그나마 혹시 말할 때 잘못 비어질까,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을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초란 하고 불러 보아서 그 혀끝이 돌아가는가를 잘 가늠하므로, () 초란공(炒卵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광대놀음에 탈쓴 것을 초란(俏亂)’이라 부르는데, 중국말로 계란볶음이라는 초란과 발음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곧 가서 한 쟁반을 지져 가지고 왔다.

그러나 행적이 마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한바탕 웃고 나서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값을 치르려 하니, 주인이 도리어 몹시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어요.”

하고 자못 노여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나는 곧 대강 그림 옆에 적힌 별호(別號)를 상고하여 그들의 성명을 적어서 사례하였다.

 

 

[D-001]사고전서(四庫全書) : 청의 건륭 37년에 시작해서 천하의 서적을 모아, 16 8천여 책을 경()()()()의 네 종류로 나눠 정리한 것이다.

[D-002]백하(白下) …… () : 조선 숙종(肅宗) 때의 서예가. 백하는 호요, 순은 이름. 자는 중화.

[D-003]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 : 조선 영조(英祖) 때 사람. 명채는 이름.

[D-004]서위(徐渭) : ()의 저명한 예술가. 시문과 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자는 문장(文長).

[D-005]마간석(馬肝石) : 경상북도 안동 독천(禿川)이라는 냇물 속에서 나는 유명한 벼룻돌.

[D-006]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 : 왕희지는 진()의 서예가. 중국의 대표적 명필. 희지는 이름, 자는 일소(逸少). 필진도서는 왕희지가 짓고 쓴 유명한 필첩.

[D-007]분판(粉版) : 종이가 귀하므로, 널판에다 분을 칠하고 기름을 먹여서 종이로 대용하였다.

[D-008]한 문공(韓文公) : ()의 저명한 문학가 한유(韓愈). 문공은 시호. 자는 퇴지(退之).

[D-009]한상(韓湘) : 한유의 조카. 그의 자는 청부(淸夫).

[D-010]겸재(謙齋) : 조선 숙종 때 저명한 화원(畫員) 정선(鄭歚)의 호. 자는 원백(元伯).

[D-011]현재(玄齋) : 겸재의 제자인 화원 심사정(沈師正)의 호. 자는 이숙(頤叔).

[D-012]김 상공(金相公) : ‘상공은 애초에는 정승이라는 의미지마는, 여기서는 상인들끼리 서로 높여서 하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열상화보(冽上畵譜)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충암(冲菴 ).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이요, () 가정(嘉靖)때 사람이다.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김식(金埴).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경윤(李慶胤)은 학림정(鶴林正)이다.

녹죽도(綠竹圖), 탄은(灘隱 ).

이정(李霆)의 자는 중섭(仲燮)이요, 석양정(石陽正)이니, 익주군(益州君)의 지자(枝子)이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노안도(蘆雁圖)

이징(李澄)의 자는 자함(子涵)이요, 호는 허주재(虛舟齋), 학림정(鶴林正)의 아들이다.

노선결기도(老仙結綦圖), 연담(蓮潭 ).

김명국(金鳴國)이니, () 천계(天啓) 연간 사람이다.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공재(恭齋 ).

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이니, 강희(康熙) 연간 사람이다.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겸재(謙齋 ).

정선(鄭歚)의 자는 원백(元伯)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겹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

산수도(山水圖)

네 폭인데, 겸재.

사시도(四時圖)

여덟 폭인데, 겸재.

대은암도(大隱巖圖)

겸재. 이 위의 것은 모두 정선(鄭歚)’원백(元伯)’이라는 소인(小印)이 있다.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종보(宗甫).

조영석(趙榮祏)의 자는 종보요, 호는 관아재(觀我齋),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진재(眞宰 ).

김윤겸(金允謙)의 자는 극양(克讓)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금강도(金剛圖), 현재(玄齋 ).

심사정(沈師正)의 자는 이숙(頤叔)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

여덟 폭인데, 현재. ‘심사정사인(沈師正私印)’ 현재(玄齋)’라는 소인이 있다.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의 자는 경백(敬伯)이니, 공재(恭齋)의 아들이다.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羣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이상은 모두 낙서의 윤덕희사인(尹德熙私印)’ 낙서(駱西)’라는 소인이 있다.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수운(峀雲 ).

유덕장(柳德章). ‘수운사인(峀雲私印)’이 있다.

설죽도(雪竹圖)

수운(峀雲)’이란 두 글자와 수운(峀雲)’의 인이 있다.

검선도(劒仙圖), 인상(麟祥).

이인상(李麟祥)의 자는 원령(元靈)이요,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니, ‘이인상(李麟祥)’의 인이 있다.

송석도(松石圖), 원령.

인상(麟祥)’이란 인과 기미삼월삼일(己未三月三日)’이란 소지(小識)가 있다.

난죽도(蘭竹圖), 표암(豹菴 ).

강세황(姜世晃)의 자는 광지(光之), ‘표암광지(豹菴光之)’의 인이 있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연객(烟客).

허필(許佖)의 자는 여정(汝正)이니, ‘연객(烟客)’이라는 소인이 있다.

 

[D-001]김정 …… 사람이다 : 이와 같은, 연암의 적은 그림에 대한 모든 해설은, ‘박영철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별행(別行) 대자(大字)로 하였다. 다음의 것도 모두 이에 따랐다.

[D-002]김식(金埴) : 조선 선조(宣祖) 때 화가. 자는 중후(仲厚), 또는 치온(致溫)이요, 호는 퇴촌.

[D-003]이경윤(李慶胤) : 조선 인조(仁祖) 때의 종실(宗室). 학림정은 봉호요, 자는 계길(季吉)이며, 호는 낙촌(駱村).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6일 임인(壬寅)

 

 

개다. 오후에 우레 일고 비바람이 몹시 불었으나 곧 멈추었다.

영평부에서 청룡하(靑龍河)까지 1, 남허장(南墟庄) 2, 압자하(鴨子河) 7, 범가점(范家店) 3, 난하(灤河) 2, 이제묘(夷齊廟) 1, 모두 1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묘에서 망부대(望夫臺)까지 5, 안하점(安河店) 8, 적홍포(赤紅舖) 7, 야계타(野雞坨) 5, 사하보(沙河堡) 8, 조장(棗庄) 10, 사하역(沙河驛) 2, 모두 45리이다. 이날 61리를 가서 사하역 성 밖에서 잤다.

이날 아침 일찍 영평부를 떠날 때 새벽 바람이 선선하였다. 성 밖의 강가에 장이 섰는데, 온갖 물건이 거리에 꽉 찼고 수레와 말이 즐비하였다. 장판에 들어가서 능금 두 개를 사노라니 옆에 대상자를 멘 자가 있어서 상자를 여니 수정합(水晶盒) 다섯이 나오고, 합마다 뱀 한 마리씩 들었다. 뱀은 모두 그 합 속에 도사리고 있는데 머리 내민 것이 마치 솥뚜껑에 꼭지 달린 듯이 한복판에 솟아 있고 두 눈이 반들반들하다. 검은 놈이 한 마리, 흰 놈이 하나, 초록색이 둘, 빨간 놈이 하나, 모두가 합 밖에서 환히 들여다 보이긴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분간하기 어렵기에 물어보니,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대개 이를 악창(惡瘡)에 쓰면 기이한 효과가 난다 한다. 또 다람쥐 놀리는 자, 토끼 놀리는 자, 곰 놀리는 자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는데 모두 비렁뱅이들이다.

곰은 크기가 개만 한데 칼춤도 추고 창춤도 추며, 사람처럼 서서 다니기도 하고, 절도 하며 꿇어앉기도 하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여 사람이 시키는 대로 온갖 시늉을 다하나, 꼴이 몹시 흉악하고 그 민첩함도 원숭이보다 못하다. 토끼와 다람쥐놀이는 더욱 재롱스럽고 또 사람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긴 하나 길이 바빠서 상세히 구경하지 못하였다.

도사(道士) 둘과 동자 하나가 장판에 비럭질하며 다니는데 운관(雲冠 도사 관의 일종)을 쓰고 하대(霞帶 도사 띠의 일종)를 띠고 눈매가 청수한데, 손으로 영저(鈴杵)를 흔들며 입으론 주문(呪文)을 외고, 그 행동이 괴특하여 사람인가 귀신인가 의심스럽다.

여자 셋이 바야흐로 길차림을 차리고 말을 타고 달린다.

배로 청룡하(靑龍河)와 난하(灤河)를 건넜다. 따로 이제묘기(夷齊廟記)’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고죽성기(孤竹城記)’가 있다.

이제묘에서 먼저 떠나서 야계타(野雞坨)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 점 바람기도 없더니, ()()()()의 여러 사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야기하며 가는데, 손등에 갑자기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함께 선듯하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는 없었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며 창대(昌大)의 모자 챙을 쳐서 그 소리가 탕하고, 또 노군의 갓 위에도 떨어졌다. 그제야 모두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해 옆에 바둑돌만 한 작은 구름장이 나타나고 은은히 맷돌가는 소리가 나더니, 삽시간에 사면 지평선(地平線)에 각기 자그마한 구름이 일되 마치 까마귀 머리 같고 그 빛은 유난히 독해 보인다. 그리고 해 곁에 검은 구름이 이미 해 둘레의 반쯤을 가렸고, 한 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이내 해는 구름 속에 가리고 그 속에서 천둥하는 소리가 마치 바둑판을 밀어치는 듯 명주를 찢는 듯하다. 수많은 버들이 다 어둠침침하여 잎마다 번갯불이 번쩍인다.

여럿이 일제히 채찍을 날려 길을 재촉하나 등 뒤에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고, 산이 미친 듯 뒤집히는 듯, 성낸 나무가 부르짖는 듯하여 하인들은 손발이 떨리어, 급히 우장을 꺼내려 하나 얼른 부대끈이 풀리지 않는다. 바람천둥번개가 가로 휘몰아쳐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듯 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하여 할 수 없이 멀머리를 모아서 삥 둘러 섰는데 하인들은 모두 얼굴을 말갈기 밑에 가리고 섰다.

가끔 번갯불에 비치는 데 보니, 노군이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조금 뒤에 비바람이 좀 멎자 서로 바라보니 얼굴이 모두 흙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양편에 있는 집들이 보이는데 불과 40~50보밖에 안 되는 곳에 두고서도 비가 막 쏟아질 때에는 피할 줄 알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조금만 더했더라면 거의 숨막혀 죽을 뻔했군.”

한다. ()에 들어가서 잠깐 쉬려니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과 햇빛이 산뜻하였다. 간단히 술잔을 나누고는 곧 떠났다. 길에서 부사를 만나서,

 

어디서 비를 피하셨소.”

하고 물었더니, 부사는,

 

가마문이 바람에 떨어졌기 때문에 빗발이 가로 들이쳐서 한데 선 것이나 다름 없었소. 빗방울 크기가 주발(酒鉢)만큼 하니 대국은 빗방울조차 무섭소그려.”

한다. 나는 계함더러,

 

나는 오늘에야 더욱 사전(史傳 역사에서 전하는 기록)을 믿지 않으우.”

하였더니, 정 진사가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서면서,

 

무슨 말씀이오?”

하기에, 나는,

 

항우(項羽)가 아무리 노하여 고함친다 하더라도 어찌 이 우레 소리를 당할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史記)에 적천후(赤泉侯)의 인마가 모두 놀라서 수리(數里)를 물러섰다 하였으니, 이는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오. 항우가 비록 눈을 부릅떴다 하기로서니 이 번갯불만 못했을 터인즉, 여마동(呂馬童 한의 장수)이 말에서 떨어졌다 함은 더욱 못 믿을 일이오.”

하니, 여럿이 모두 크게 웃었다.

 

 

[D-001]영저(鈴杵) : 중이 가지는 악기(樂器)의 일종. 송 태종(宋太宗) 때 인도(印度)에서 왔다 하였다.

[D-002]이제묘기 …… 고죽성기(孤竹城記) : 모든 본에 다 보이지 않으니 의심되는 일이다.

[D-003]적천후(赤泉侯) : ()의 장수 양무(楊武)의 봉호. 항우가 죽을 때 그 시체를 찢어서 가진 다섯 장수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제묘기(夷齊廟記)

 

 

난하(灤河)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首陽山)’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이 있으니 고죽성(孤竹城)’이라 한다. 성문에는 현인구리(賢人舊里)’라 써 붙였고, 문 오른편 비석에는 효자충신(孝子忠臣)’이요, 왼편 비에는 지금칭성(至今稱聖)’이라 새겼으며, 묘문(廟門) 앞 비석에는 천지강상(天地綱常)’이요, 문 남쪽 비에는 고금사표(古今師表)’라 하였다. 그리고 문 위에는 상고일민(上古逸民)’이란 현판이 걸렸고, 문 안에 비석 셋, 뜰 가운데 비석 둘, 섬돌 좌우에 비석 넷이 있으니, 모두 명()() 때의 어제(御製)들이다.

뜰에는 고송(古松) 수십 그루가 서 있고, 섬돌 가에는 흰 돌로 난간을 둘렀다. 가운데에 큰 전각이 있어 고현인전(古賢人殿)’이라 하고, 전각 속에 곤룡포면류관을 갖추고 홀을 들고 섰는 것이 곧 백이(伯夷)숙제(叔齊)이다.

전 문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라 써 붙였고, 전 안에는 큰 글자로 만세표준(萬世標準)’이라 쓴 것은 강희제의 글씨요,  윤상사범(倫常師範)’이라 한 것은 옹정제의 글씨이다. 전 가운데 간직한 보기(寶器)들은 만력(萬曆) 때 물건이 많다. 그 주련(柱聯)에는,

 

인을 찾아서 인을 행했으니 만고의 맑은 바람 고죽국이요 / 求仁得仁萬古淸風孤竹國

몹씀으로 몹씀을 바꿨다 하니 천추의 외론 절개 수양산이로다 / 以暴易暴千秋孤節首陽山

하였고, 뜰에 두 문이 있으니 동쪽에는 염완(廉頑)’이요, 서쪽에는 입나(立懦)’라 하였으며, 또 작은 문 둘이 있으니 왼편은 관천(盥薦)’이요, 오른편은 재명(齊明)’이라 하였고, 그 문을 나서면 당()이 있어 읍손(揖遜)’이라 하였으며, 비석이 있는데 이는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다. 비 뒤에 대()가 있어 청풍(淸風)’이라 하고, 문 둘이 있어 하나는 고도풍진(高蹈風塵)’이요, 또 하나는 대관환우(大觀寰宇)’라 새겨 붙였으며, 대 위에는 각()이 있어 재수지미(在水之湄)’라 하였고, 그 주련(柱聯)에는,

 

뫼들은 인자처럼 고요하고 / 山如仁者靜

바람은 성인인 양 맑디맑다 / 風似聖人淸

하였고, ,

 

가산 가수는 고죽나라에 / 佳山佳水孤竹國

난형 난제의 성인 나시다 / 難兄難弟古聖人

라고 한 것이 있다. 대 위에 문 둘이 있어 하나는 백대산두(百代山斗)’, 또 하나는 만고운소(萬古雲霄)’라 하였다. ()의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 때에 백이에게는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 숙제에게는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이란 시호를 주었다. 중국에서 수양산(首陽山)이라 하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으니, 하동(河東)의 포판(蒲坂)인 화산(華山)의 북쪽 하곡(河曲)의 어름에 산이 있어 수양이라 하였고, 혹은 농서(隴西)에도 있다 하며, 혹은 낙양(洛陽) 동북쪽에도 있다 하고, 또 언사(偃師) 서북쪽에도 이제묘가 있다 하며, 또는 요양(遼陽)에도 수양산이 있다 하여, 모든 전기(傳記)에 나타났다. 그러나 맹자(孟子)에는,

 

백이가 주왕(紂王)을 피하여 북해(北海) 가에 살았다.”

하였고, 우리나라 해주(海州)에도 수양산이 있어서 백이숙제를 제사지내나, 이는 중국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자(箕子)가 동으로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주()의 판도 안에 살기 싫어함이요, 백이도 차마 주의 곡식을 먹을 수 없음인즉, 혹은 그가 기자를 따라와서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고 백이숙제는 해주에 살지나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대련(大連)소련(少連)이 해주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를 무엇으로 고증할 수 있을까.

문과 담장에 당()() 역대의 치제문(致祭文)을 많이 새겨 놓은 것을 보아서는 이 묘가 영평에 있은 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홍무(洪武) 초년에 영평부 성 동북쪽 언덕에 옮겨 세웠다가 경태(景泰 명 경종(明景宗)의 연호) 연간에 다시 이곳에 세웠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어 그 제도는 강녀묘북진묘의 행궁과 같으나 지키는 자가 금하므로 그 내용을 구경하지 못하였다.

 

 

[D-001]백이(伯夷)숙제(叔齊) : ()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는 형, 숙제는 아우로 어버이가 죽자 서로 자리를 사양하였고, 주 무왕이 은을 칠 때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D-002]인을 …… 하니 : 백이숙제의 채미가(采薇歌) 중에서 나오는 구절.

[D-003]뫼들은 …… 고요하고 : 논어(論語), “인자(仁者)는 뫼를 사랑한다.” 하였다.

[D-004]바람은 …… 맑디맑다 : 논어, “백이는 성인 중의 맑은 이다.” 하였다.

[D-005]하곡(河曲) :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또 동으로 굽이치는 곳.

[D-006]주왕(紂王) : ()의 말왕(末王). 중국 고대의 대표적 폭군.

[D-007]대련(大連)소련(少連) : 예기(禮記) 중에 나오는 인물. 이들 형제는 동이(東夷)의 아들로서, 상주질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난하는 장성 북쪽 개평(開平)에서 처음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서 천안현(遷安縣) 지경을 거쳐 노룡새(盧龍塞)에 이르러 칠하(漆河)와 합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낙정현(樂亭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요동요서에 ()’라고 이름한 물 치고는 모두 흐린 것인데, 다만 이 난하만이 고죽사(孤竹祠 고죽군(孤竹君)의 사당) 밑에 이르러 깊게 고여서 호수가 되어 그 맑은 빛이 거울 같다. 고죽성은 영평부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

 

우북평(右北平) 영지(令支)에 고죽성이 있다.”

하였고, 그 주(),

 

백이숙제의 본국(本國)이다.”

하였다. 난하의 남쪽 기슭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청풍루(淸風樓)가 있는데, 누 아래 강물이 더욱 맑으며 강 한복판에 작은 섬이 있고, 섬 가운데 돌을 병풍처럼 쌓고 그 앞에 고죽군(孤竹君)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아래 배를 띄우니, 물 맑고 모래 희며, 들 넓고 숲 깊숙한데, 물가에 수십 호 되는 집이 모두 그림자가 호수 속에 박혔고, 고기잡이 배 서너 척이 한창 그물을 사당 밑에 치고 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중류에 대여섯 길 되는 돌봉우리가 있어 이름은 지주(砥柱)’라 하는데, 기암괴석이 삑 둘러싸서 우뚝우뚝 서 있으며, 교청새뜸부기 같은 물새 떼 수십 마리가 모래 위에 늘어 앉아 깃을 다듬고 있다.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이 경치를 돌아보고 기뻐하면서,

 

강산이 그림 같으오.”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흔히들 흡사하다느니 같다느니 유사하다느니, 닮았다느니 똑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같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을 성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거요. 옛사람이 강(양자강(揚子江))에서 나는 요주(瑤柱)를 여지(荔支 남방에서 나는 과실)와 같다 하고, 서호(西湖)를 서자(西子 서시(西施))와 같다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다시 말하기를, 담채(淡菜 조개의 일종)는 용안(龍眼 용안수(龍眼樹)의 열매)과 같고, 전당(錢塘)은 비연(飛燕)과 같다 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소.”

 

[D-001]요주(瑤柱) : 조개의 일종. 껍질이 엷고 길게 생겼으며, 줄이 방사선으로 났다.

[D-002]서호(西湖) :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호수.

[D-003]전당(錢塘) : 항주에 있는 경치 좋은 호수.

[D-004]비연(飛燕) :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 몸이 나는 제비처럼 가볍다 하여 붙인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호석기(射虎石記)

 

 

영평부에서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가파른 언덕에 드러난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보면 빛깔이 희고, 그 밑에는 비석이 있어 한비장군석호처(漢飛將軍射虎處)’라 새겨 있다. 나는, “청의 건륭 45년 가을 7 26일에 조선인(朝鮮人) 아무아무는 이를 구경하다.”라고 썼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7일 계묘(癸卯)

 

 

개다. 아침에 잠깐 서늘하였으나 낮에는 몹시 더웠다.

사하역(沙河驛)에서 홍묘(紅廟)까지 5, 마포영(馬舖營) 5, 칠가령(七家嶺) 5, 신점포(新店舖) 5, 건초하(乾草河) 5, 왕가점(王家店) 5, 장가장(張家莊) 5, 연화지(蓮花池) 10, 진자점(榛子店) 5,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진자점에서 연돈산(烟墩山)까지 10, 백초와(白草漥) 6, 철성감(鐵城坎) 4, 우란산포(牛欄山舖) 4, 판교(板橋) 6, 풍윤현(豐潤縣) 20, 모두 50리이다. 이날 1백 리를 가서 풍윤성 밖에 묵었다.

어제 이제묘 안에서 점심 먹을 때 고사리 넣은 닭찜이 나왔는데, 맛이 매우 좋고 또 길에서 변변한 음식을 먹지 못한 끝이라 별안간 입맛이 당기는 대로 달게 먹었으나, 그것이 구례(舊例)인 줄은 몰랐다. 오후에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서 겉은 춥고 속은 막히어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고 가슴에 그득히 체하여, 한번 트림을 하면 고사리 냄새가 목을 찌르는 듯하여 생강차를 마셔도 속이 오히려 편하지 않았다.

 

이 한창 가을에 철 아닌 고사리를 주방(廚房)은 어디서 구해 왔는고.”

하고 물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묘에서 점심 참을 대는 것이 준례가 되어 있사오며, 또 사시를 막론하고 여기서는 반드시 고사리를 먹는 법이옵기에 주방이 우리나라에서 마른 고사리를 미리 준비해 가져와 여기에서 국을 끓여서 일행을 먹이는 것이 이젠 벌써 하나의 고사(故事)로 되었답니다. 10여 년 전에 건량청(乾糧廳)이 이를 잊어버리고는 갖고 오지 않아서 이곳에 이르자 궐공(闕供)되었으므로, 건량관(乾糧官)이 서장관에게 매를 맞고 물 가에 앉아서 통곡하면서 푸념하기를, ‘백이숙제, 백이숙제야. 나하고 무슨 원수냐. 나하고 무슨 원수냐.’ 라고 하였답니다. 소인(小人)의 소견으로는 고사리가 고기만 못하며, 또 듣자온즉 백이들은 고사리를 뜯어 먹고 굶어죽었다 하오니, 고사리는 참 사람 죽이는 독물인가 하옵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잡았다. 태휘(太輝)란 자는 노 참봉의 마두(馬頭)인데 초행일뿐더러 위인이 경망해서, 조장(棗庄)을 지나다가 대추나무가 비바람에 꺾이어 담 밖에 넘어진 것을 보고는, 그 풋열매를 따 먹고 배앓이로 설사가 멎지 않아서, 한창 속이 허하고 몸이 달고 마음이 답답하고 목이 타는 듯하다가, 급기야 고사리독이 사람 죽인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몸부림치면서,

 

아이고, 백이숙채(熟菜 삶은 나물)가 사람 죽이네. 백이숙채가 사람 죽인다.”

하니, 숙제(叔齊)와 숙채(熟菜)가 음이 서로 비슷한지라, 또한 당에 가득한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내 일찍이 백문(白門 서울 부근의 지명)에 살 때이었다. 때마침 숭정(崇禎) 기원(紀元)  137, 세 돌째 맞이한 갑신년(甲申年)이며, 3 19일은 곧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순사(殉社 국가와 함께 죽음)한 날이다. 시골 선생님이 동리 아이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서(城西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송씨(宋氏)의 셋방살이 집에 찾아가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에 절하고, 초구(貂裘)를 내어서 어루만지며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성 밑에 이르러서 팔을 뽐내며 서쪽을 향하여,

 

되놈.”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이에 여수(旅酬)를 벌이되 고사리나물을 차렸다. 이때 마침 주금(酒禁)이 내렸으므로 꿀물로서 술을 대용하여 그림 놓은 자기주발에 담았으니, 그 주발의 관지(款識)에는 대명(大明) 성화(成化)에 만든 것이다라고 새겼다. 여수하는 자가 꿀물을 따를 때면 반드시 머리를 숙여 주발을 들여다보곤 한다. 이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잊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서로 시()를 읊었다. 그 중 한 동자(童子)가 쓰기를,

 

무왕도 만약 패해서 죽었다면 / 武王若敗崩

아득한 천 년 뒤에 주왕에겐 역적이 되올 것을 / 千載爲紂賊

여망이 어이하여 백이를 구하고도 / 望乃扶夷去

역적을 옹호했다 하여 벌을 받지 않았던고 / 何不爲護逆

춘추의 큰 의리를 이제껏 떠들건만 / 今日春秋義

되놈으로 간주하면 되놈의 역적일 걸 / 胡看爲胡賊

하였다.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 선생님이 섭섭한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아이들은 불가불 일찍부터 춘추를 읽혀야 돼. 아직 그게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므로 이 따위의 괴상한 말들을 하는 게야. 어디 한번 즉경(卽景)이나 읊어 보아라.”

하자, 또 한 동자가 짓기를,

 

고사리 캐고 캔들 배 부르단 거짓말이 / 採薇不眞飽

백이도 나중에는 주려서 죽었다오 / 伯夷終餓死

꿀물이 몹시 달아 술보다 나을지니 / 蜜水甘過酒

이것 마시자 죽는다면 그 아니 원통하리 / 飮此亡則寃

하였다. 선생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어어, 이게 또 무슨 괴상한 수작이여.”

하니, 만좌의 사람들이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한 지도 어언간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때의 늙은이들도 다 가버린 오늘날에 다시 백이의 고사리로 이런 말썽이 생겨서, 타향(他鄕)의 풍등(風燈) 아래에서 옛 이야기를 하다보니 끝내 잠을 잃고야 말았다.

새벽에 떠나 길에서 상여(喪轝)를 만났다. 널 위에 흰 수탉을 놓았는데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다. 연이어 상여를 만났으나 모두 닭을 놓았으니 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라 한다.

길 곁에 넓이 수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연꽃은 벌써 지고 사람들이 각기 조그마한 배를 타고 들어가서, 마름연밥연근 같은 것을 캐고 있었다. 돼지 수십 마리를 몰고 가는 이가 있는데, 그 모는 법이 마소 다루는 것과 같다. 길 가 백여 리 사이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수없이 많이 자빠져 있다. 이는 어제 비바람에 쓰러진 것이다.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렀다. 이 점은 본래 기생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강희 황제가 일찍이 천하의 창기를 엄금하여 양자강(揚子江)판교(板橋) 같은 곳의 창루(娼樓)기관(妓館) 들이 모두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곳만이 남아 있어서 그를 양한적(養閒的)’이라 이름하는데 얼굴이 그럴싸하고 음악도 곧잘 한다. 재봉(再鳳)과 상삼(象三)이 후당(後堂)으로 들어가며 나를 보고는 빙긋 웃음을 띤다. 나도 그 뜻을 짐작하고 가만히 그 뒤를 밟아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본즉 상삼이 벌써 한 여인을 끼고 앉았다. 이는 전부터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청년 둘이 의자에 마주 걸터앉아서 비파를 타고 한 여인은 의자 위에서 봉() 부리에 금고리를 물린 저를 불고 있는데, 부리에는 금고리가 달렸고 금고리에는 붉은 수술을 드리웠다. 재봉은 그 아래에 서서 손으로 수술을 어루만지고 있고, 또 한 여인은 주렴을 걷고 나오더니 손에 박자 판을 들고 재봉을 부축하여 앉히려 하였으나 재봉은 듣지 않았다. 한 늙은이가 주렴을 걷고 서서 재봉을 향하여,

 

안녕하시오.”

한다. 나는 곧 밖에서 큰 기침 한번을 내며 가래침을 뱉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란다. 상삼과 재봉이 서로 보고 웃으며 곧 일어나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내가 문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안녕들 하시오.”

했더니, 늙은이와 두 젊은이가 일제히 일어나서 웃으며,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답하니, 세 양한적도 모두들,

 

천복(千福)을 누리시옵소서.”

한다. 재봉은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유사사(柳絲絲)랍니다. 병신년(丙申年)에 이곳을 지날 때 나이 스물넷에 그야말로 일색이었던 것이 이제 5년 동안에 얼굴이 아주 그냥 망가져서 보잘것없이 되었습니다그려.”

한다. 상삼은,

 

유사사는 일찍이 열네 살부터 소리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하고, 검은 웃옷에 주홍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요청(幺靑)이고 올해에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작년부터 이곳에 와 있는 산동 여자입니다.”

한다. 나는 검은 저고리에 초록치마를 입은 그 중 제일 앳되보이는 여인을 가리켰더니, 상삼은,

 

그는 처음 보는 여인이어서 이름이나 나이를 모르겠습니다.”

한다. 세 기생이 모두들 특별한 자색은 없으나 대체로 당화(唐畵) 미인도(美人圖) 중에서 보이는 여인과 같았다. 그 늙은이는 곧 관() 주인이고, 두 청년은 모두 산동에 온 장사치들이다. 나는 상삼에게 눈짓하여 그들에게 음악을 아뢰도록 했더니, 상삼이 그 청년을 보고 무어라고 하자 한 청년은 노래하고 요청은 홀로 박자판을 치며 소리를 맞추어 합창할 때, 다른 기생들은 모두 부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한다. 한 청년이 자리를 옮겨, 나더러,

 

알아 들으시는지요?”

하기에, 나는,

 

잘 모르네.”

하였더니, 그는 글로 써서 보이며,

 

이 사곡(詞曲) 계생초(雞生草)’라 부르고, 가사는,

전조에 낳은 장수 모두들 영웅이라 / 前朝出了英雄尉

도원의 의를 맺어 그 성은 유장을 / 桃園結義劉關張

그 셋이 뜻이 맞아 제갈량을 군사 삼고 / 他三人請了軍師諸葛亮

신야와 박망파를 불사라 버리고선 / 火燒新野博望屯

상양성을 또 깨뜨렸네 / 炮打上陽城

노천을 원망하건대 주유를 낳았으니, 제갈량이 또 웬일고 / 怨老天旣生瑜又生亮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글은 제법 아는 모양이나 얼굴은 못생겼다. 그는 스스로 소개하기를,

 

저는 신성(新城)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성은 왕()이요, 이름은 용표(龍標)라 합니다.”

한다. 나는,

 

자네가 혹시 왕서초(王西燋) 사록(士祿) 선생의 후손되시는 이인가?”

했더니, 그는,

 

아니올시다. 저희는 민가(民家) 출신으로서 장사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또 한 곡조를 부를 때 모든 기생들이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비파를 뜯고, 또는 봉저[鳳笛]를 불어서 소리를 맞춘다. 왕용표는,

 

공자(公子)께선 이를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모르네. 이건 무슨 사()라 하나.”

했더니, 용표는 글로 써 보이기를,

 

이 곡조는 답사행(踏莎行)’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그 가사는,

세월은 문틈의 말달리기 티끌이나 곧 아지랑이 / 日月隙駒塵埃野馬

동으로 흐른 강물 쉴 줄 모르누나 / 東流不盡江河瀉

명리를 다투던 건 예로부터 헤어보니 / 向來爭奪名利人

백년이 채 못 되어 몇몇이나 남았던고 / 百歲幾個長存者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유사사는 그 뒤를 이어서,

고기잡이 나무꾼의 싸늘한 이야기가 / 漁樵冷話

옳고 그름 예 있으니 춘추만 못잖으리 / 是非不在春秋下

술 부어 마시면서 시구를 길이 읊어 / 自斟自飮自長吟

알아 줄 이 적다고 한탄하지 마소서 / 不須贊嘆知音寡

라고 부르는데, 그 소리가 사뭇 구슬퍼서 남의 창자를 에이는 듯싶고, 참으로 들보의 티끌이 저절로 나부낀다. 상삼이 다시 이어서 창()하기를 청하니,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채소 사는지요, 더 달라게.”

한다. 그 청년은 손수 비파를 뜯으면서 유사사더러 노래 계속하기를 권한다. 그 소리는 더욱 보드랍고 아리땁다. 왕용표는 또 글을 써서 보이었다.

 

이 곡조는 서강월(西江月)’이라 하며, 가사는,

쓰르라미 울음소리 세월이 바쁘구나 / 蟪蛄忍忍甲子

모기가 날아들 제 산천이 어지러라 / 蚊擾擾山河

거센 바람 소낙비가 밤 사이 지나가고 / 疾風暴雨夜來過

그제야 눈 떠보니 한 낱도 없구나 / 轉眼都無一個

라고 한 것입니다.”

하고, 요청은 곧 그 뒤를 이어서 창()을 하였다.

 

항아리 속 빚은 술을 다하도록 마시고서 / 且盡尊中美酒

달 아래 높은 노래 고요히 들어 보소 / 閑聽月下高歌

공명이랑 부귀마저 마침내 그 무언고 / 功名富貴竟如何

닥쳐 오는 뒷일일랑 그 아예 묻지 마오 / 莫問收場結果

그 소리는 매우 거세어서 유사사의 가냘픔만 못하였다. 나는 그제야 곧 일어서서 나올 때 재봉 역시 뒤를 따랐다. 재봉이 나에게 말하기를,

 

상삼이 관주(館主)에게 은() 두 냥, 대구어(大口魚) 한 마리, 부채 한 자루를 주었답니다.”

한다. 이곳에서 식암(息菴) 김공(金公 식암은 김석주(金錫冑)의 호)이 보았다는 계문란(季文蘭)의 시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은 피서록(避暑錄)중에 보인다.

연로(沿路) 수천 리 사이에 부녀들의 말소리들은 모두 연연(燕燕)앵앵(鶯鶯)이고 하나도 거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리따운 님이시여 있는 곳을 몰랐더니 / 不識佳人何處在

눈썹 그리는 그 소리 주렴 넘어 들리는 듯 / 隔簾疑是畵眉聲

이 곧 그것이었다.

나는 한번 그들의 앳된 노래소리를 듣고 싶어 했더니, 이제 그 부르는 사곡(詞曲)의 의미는 짐작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성음(聲音)은 분변하지 못할뿐더러, 더욱이 그 곡조를 알지 못하므로 차라리 듣지 않았을 때 여운(餘韻)을 지니고 있느니만 같지 못했다.

저녁 나절에 풍윤성(豊潤城) 아래에 이르다. 주인 집 뒷문이 해자를 향해서 열리고 문 앞엔 몇 그루 실버들이 가렸다. 정사(正使),

 

지난 정유년(丁酉年 1777) 봄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일찍이 이 집에 머물면서 서장관 신형중(申亨重) 이름은 사운(思運)이다 과 함께 이 버드나무 밑에서 한담한 일이 있었다.”

하고, 가마에서 내려 곧 뒷문 밖에 자리를 펴게 하고 모든 비장들과 잠깐 술을 나눴다. 그 해자의 넓이는 십여 보나 되는데 버들 그늘이 짙어서 땅 위에 치렁치렁 드리우고 물가에 남실남실 잠기었다. () 위엔 3층 높은 다락이 구름 위에 솟아 보일락말락한다.

드디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성에 들어가 다락에 올라 구경할 제, 그 이름은 문창루(文昌樓)’라 하였는데 문창성군(文昌星君 별 이름을 딴 귀신 이름)을 모셨다 한다.

길에서 초인(楚人) 임고(林皐)를 만나 함께 호형항(胡逈恒)의 집에 가서 촛불을 밝히고, 차수(次修 박제가(朴齊家)의 자)가 쓴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의 자)의 시()를 구경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오기로 약속할 제,

 

혹 성문이 닫히지나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곧 닫겠지만 반 시간도 못 되어 다시 연답니다.”

하고 답한다. 저녁 뒤에 촛불을 들고 다시 가보니 성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때 우리를 따라 온 하인들은 더부룩한 맨머리로 거리에 삑삑하게 쏘다니며 말먹이 풀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와 임() 두 사람이 반기며 나와서 맞이한다. 방안엔 벌써 주안상을 차려 놓았다. 그는,

 

이형암(李炯菴 형암은 이덕무의 일호(一號))과 박초정(朴楚亭 초정은 박제가의 호)이 모두 잘 지내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모두 편하지요.”

하였더니, 임생(林生),

 

()과 이() 그 두 분은 참으로 인품이 맑고 재주가 높은 선비지요.”

하기에, 나는,

 

그들은 모두 나의 문생(門生)이지만 그 변변하지 않은 글 재주를 이다지 칭찬할 게야 뭐 있겠소.”

하였더니, 임생은,

 

옛말에 정승의 문하엔 정승이 나고 장수의 문하엔 장수가 난다더니 과연 헛된 말이 아니군요.”

하고, 그는 또,

 

형암초정 두 분이 일찍이 무술년(戊戌年 1778) 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때 이곳을 지나다 하룻밤 쉬어 갔습니다.”

한다. 임과 호 그 둘이 비록 정성껏 대접하는 셈이나 전연 글을 모르고 게다가 호생(胡生)은 얼굴마저 단아하지 못하여 시정배의 모습을 면치 못했고, 임생은 긴 수염에 장자(長子)의 풍도가 없진 않으나, 다만 수작하는 사이에 장사치들의 행투가 바이 가시지 못했다. 호생은 내게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를 주고, 임생 역시 그림 부채 한 자루를 선사하기에 각기 부채 한 자루와 청심환 한 개씩을 주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술을 몇 잔 하였다. 그 곁에는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있어서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밤이어서 다른 골동품은 구경하지 못할 것이므로, 나는 곧장 일어서면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기를 약속했다. 임생이 문에 나와 전송하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와 호생이 선사한 민강(閩薑 복건산(福建産) 생강)국다(菊茶)귤병(橘餠 귤 말린 것) 등을 내어서 장복으로 하여금 푸욱 달여 소주에 타서 두어 잔을 마시니 그 맛이 유달리 좋았다.

성 밖에 사성묘(四聖廟)가 있고 옹성(甕城) 안에 백의암(白衣菴)이 있으며, 앞 네거리엔 패루(牌樓) 둘이 있고, 초루(譙樓)에는 관제(關帝)의 소상을 모셨다.

 

 

[D-001]건량청(乾糧廳) : 먼 길을 가는 데 마른 양식을 준비하는 부서.

[D-002]초구(貂裘) : 초피 두루막. 효종의 하사품인데, 북벌 곧 청을 칠 때 요()()의 풍설(風雪)에 입으라 하였다.

[D-003]여수(旅酬) : 제사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는 일종의 음복놀이.

[D-004]여수하는 …… 한다 : ‘대명성화(大明成化)’라는 글자를 새겼으므로, 대명을 잊지 않음이 곧 춘추의 대의라는 것이다.

[D-005]여망이 …… 구하고도 : 백이숙제가, 무왕이 주왕을 치려 함을 말렸을 때, 무왕의 좌우가 모두 그를 죽이려 하자, 여망(呂望)이 홀로 그를 의사(義士)라 하여 놓아주었다.

[D-006] : 중국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에 나오는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등의 결의형제의 고사(故事).

[D-007]주유(周瑜) : 주유가 죽을 때에, “하늘이 이왕 주유를 낳았으니 어찌 또 제갈량을 낳았을꼬.” 하며 비탄하였다.

[D-008]신성(新城) : 직례성(直隷省) 무극현(無極縣)에 있는 지명.

[D-009]고기잡이 …… 못잖으리 : 초동과 어부의 쑥덕공론이 춘추대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이론만 못하지 않다는 말.

[D-010]들보의 …… 나부낀다 : 유향(劉向) 별록(別錄), “우공(虞公)이 맑은 새벽에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가 들보 위의 티끌을 움직였다.” 하였다.

[D-011]연연(燕燕)앵앵(鶯鶯) : 둘 다 유명한 기생의 이름.

[D-012]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 황태후의 탄일 열흘 전에 황제가 향을 바치는 예식.

[D-013]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 : 고송(古松) 밑을 거니는 선인을 그린 것.

[D-014]초루(譙樓) : 먼 적진(敵陣)을 바라보기 위하여 세운 문 위의 높은 누각.

[D-015]관제(關帝) : ‘수택본에는 관공(關公)’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8일 갑진(甲辰)

 

 

아침에 갰다가 오후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으나 우세(雨勢)는 앞서 야계타에서 만난 것만 못했다.

풍윤성(豊潤城)에서 새벽에 떠나 고려보(高麗堡)까지 10, 사하포(沙河舖) 10, 조가장(趙家庄) 2, 장가장(蔣家庄) 1, 환향하(還香河) 1리인데, 환향하의 일명은 어하교(魚河橋)였고, 거기에서 민가포(閔家舖) 1, 노고장(盧姑庄) 4, 이가장(李家庄) 3, 사류하(沙流河) 8리를 가서 점심을 먹으니 모두 40리였고, 또 사류하로부터 양수교(亮水橋)까지 10, 양가장(良家庄) 5, 입리포(廿里舖) 5, 시오리둔(十五里屯) 5, 동팔리포(東八里舖) 7, 용읍암(龍泣菴) 1, 옥전현(玉田縣) 7, 모두 40리인데 이날에는 80리를 가서 옥전성(玉田城) 밖에서 잤다. 옥전은 옛 이름이 유주(幽州), 무종국(無終國)이 이에 있었는데 곧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이다. 정의(正義 당 공영달(孔穎達)이 지은 경전 주석서)에 이르기를,

 

소공은 애초에 무종에 봉했다가 나중엔 계주(薊州)로 옮겼다.”

하였고, 시서(詩序)에는,

 

부풍(扶風) 옹현(雍縣) 남쪽에 소공정(召公亭)이 있으니, 이곳이 곧 소공의 채읍(采邑 식읍(食邑))이다.”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앞서 정축년(丁丑年 병자호란 다음 해, 1637)에 잡혀 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관동 천여 리에 무논이라고는 없던 것이 다만 이곳만은 논벼를 심고, 그 떡이나 엿 같은 물건이 본국(本國)의 풍속을 많이 지녔다. 그리고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들의 사 먹는 주식치고는 값을 받지 않는 일도 없지 않았고, 그 여인들도 내외하지 아니하며, 말이 고국 이야기에 미칠 때에는 눈물을 짓는 이도 많았다. 그러므로 하인들이 이를 기화로 여겨서 마구잡이로 주식을 토색질해서 먹는 일이 많을뿐더러, 따로이 그릇이며 의복 등속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으며, 또 주인이 본국의 옛 정의를 생각하여 심하게 지키지 않으면 그 틈을 타서 도둑질하므로, 그들은 더욱 우리나라 사람들을 꺼려서 사행이 지날 때마다 주식을 감추고 즐겨 팔지 않으며, 간곡히 청하면 그제야 팔되 비싼 값을 달라 하고 혹은 값을 먼저 받곤 한다. 그럴수록 하인들은 백방으로 속여서 그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상극이 되어 마치 원수 보듯 하며 이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일제히 한 목소리로,

 

너희 놈들, 조선 사람의 자손이 아니냐. 너희 할아비가 지나가시는데 어찌 나와서 절하질 않느냐.”

하고 욕지거리를 하면, 이곳 사람들도 역시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리어 이곳 풍속이 극도로 나쁘다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길에서 소낙비를 만났다. 비를 피하느라고 한 점포에 들었더니 차를 내어 오고 대접이 좋았다. 비가 한동안 멎지 않고 천둥 소리가 드높아진다. 그 점포의 앞마루가 제법 넓고 뜰도 백여 보나 되는데, 마루 위에는 늙고 젊은 여인 다섯이 바야흐로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드는데 머리엔 다 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엔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주인이 몸을 기울여 이 광경을 내다보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교의에서 벌떡 뛰어내려 팔을 걷고 철석하고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은,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한다.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둥이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한다. 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주인은 오히려 분이 풀리지 않아서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갔다. 그제야 말몰이꾼이 몸을 돌이켜 왝 소리를 내며 한 번 그의 가슴을 움켜잡고 치니, 주인이 흙탕 속에 나가 넘어지는 것을 다시 앙가슴을 한 번 걷어차고 달아나버렸다. 주인이 꿈쩍도 하지 못하고 마치 죽은 듯하더니, 이윽고 일어나서 아픔을 못 이겨 비틀거리며 걸어오는데,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으나 분풀이할 곳이 없어서 씨근거리면서 도로 돌아와, 곱지 않은 눈시울로 나를 보는데 입으로 말은 못하나 풍세가 매우 사납다. 나는 그럴수록 넌지시 눈을 내리뜨고 사색을 가다듬어 늠름히 범하지 못할 기세를 보인 후에, 이윽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주인더러,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봅니다만 다시 마음에 두지 마시지요.”

했더니, 주인이 곧 노염을 풀고 웃으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선생, 다신 그 말씀 마십시다.”

한다. 우세(雨勢)가 점차 드높고 오래 앉았으니 몹시 답답하였다. 주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8, 9세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를 데리고 나와서 내게 절을 시킨다. 아이 생김새가 한악(悍惡)해 보인다. 주인이 웃으며,

 

이게 제 셋째 딸년입니다. 전 사내아이를 두지 못했답니다. 선생께선 보아 하니 너그러우신 어른이시니까 성심껏 이 아이를 선생께 바치오니, 수양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도 웃으며,

 

실로 주인의 후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마는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나로 말하면 외국 사람으로 이번에 한번 왔다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즉, 잠깐 동안 맺은 인연이 나중에 서로 생각하는 괴로움만 남길지니 이는 한갓 부질없는 일이오.”

했더니, 주인은 그래도 굳이 수양아비가 되어 달라 하나 나 역시 굳이 사양했다. 만일 한 번 수양딸을 삼으면 돌아갈 때 으레 연경의 좋은 물건을 사다 주어서 정표를 삼아야 하니, 이는 실로 마두(馬頭)들의 사이에 항용이 있는 일이라 한다. 괴롭고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잠시 멎고 산들바람이 일기에 곧 일어나 문을 나가니 주인이 문까지 나와서 읍하고 작별하는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청심환 한 개를 내주었더니, 그는 두세 번 사양하기를 마지않는다. 이곳 여인들은 발에 검은 신을 신었으니 대체 기하(旗下 만주 사람)들인 듯싶다.

용읍암(龍泣菴)에 이르니 그 앞 큰 나무 밑에 건달패 여남은 명이 더위를 피하는데, 도끼를 돌리는 자도 있거니와, 비파 타고 저[] 불며 서유기(西遊記)놀음을 하는 판이었다.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이르니 무종산(無終山)이 있다. 혹은 이르기를,

 

연 소왕(燕昭王)의 사당이 이곳에 있었다.”

한다. 성중에 들어가서 한 점포를 조용히 구경하고 있는 즈음에 어디서인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므로, 곧 정 진사와 함께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낭각 아래에 젊은이 대여섯이 늘어 앉아서, 혹은 저와 피리를 불며 혹은 현악(絃樂)을 타는 이도 있다. 방 가운데에는 한 사람이 교의 위에 단정히 앉았다가 우리를 보고 일어나 읍하는데, 얼굴이 제법 단아하고 나이는 쉰 남짓해 보이며 수염이 희끗희끗하다.

이름을 써 보이니 그는 머리를 끄덕일 뿐 성명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네 쪽 벽엔 이름난 사람들의 서화가 가득 걸리었다. 주인이 일어나 작은 감실(龕室)을 여니, 그 속에 주먹 만한 옥으로 새긴 부처가 들어 있고 부처 뒤에는 관음상(觀音像)을 그린 조그마한 장자(障子)를 걸었는데, 그 화제(畵題)에는,

 

태창(泰昌) 원년(元年 1620) 춘삼월(春三月)에 제양(除陽) 구침(邱琛)은 쓰다.”

라고 씌었다. 주인이 부처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한 뒤에 감실문을 닫고 도로 교의 위에 앉더니, 그 성명을 글씨로 써 보인다.

 

전 심유붕(沈由朋)입니다. 소주(蘇州)에 살고 있으며, 자는 기하(箕霞), 호는 거천(巨川)이며, 나이는 마흔여섯입니다.”

그는 매우 말수가 적으며 조용한 기상을 지녔다. 나는 곧 그를 하직하고 일어나 문을 나오려는 즈음에, 얼핏 보니 탁자 위에 구리를 녹여서 사슴을 만든 것이 있는데, 푸른 빛이 속속들이 스민 듯하고 높이는 한 자 남짓 되며 또 두어 자 남짓한 연병(硏屛)에 국화를 그렸고, 그 겉에는 유리를 붙였는데 솜씨가 매우 기교하였으며, 서쪽 바람벽 밑에 푸른 꽃항아리가 있고 게다가 벽도화(碧桃花) 한 가지를 꽂았는데, 검은 왕나비 한 마리가 그 위에 앉았기에 애초에는 만든 것이려니 하였더니, 상세히 본즉 비취 바탕에 금무늬가 진짜 나비로서 꽃잎 위에 다리를 붙여서 말라버린 지 벌써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벽 위에 한 편의 기문(奇文)이 걸려 있는데, 백로지(白鷺紙)에다 가늘게 써서 격자(格子)를 만들어 가로 붙인 것이 한 폭 벽에 가득하였다. 글씨 역시 정미롭기에 그 밑에 다가서서 한 번 읽어 본즉, 가히 절세(絶世)의 기이한 글이라 이르겠다.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저 벽 위에 걸린 글은 어떤 사람이 지은 거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어떤 이가 지은 것인지를 모릅니다.”

한다. 정군은,

 

이는 아마 근세(近世)의 작품인 듯싶은데, 혹시 주인 선생께서 지으신 게 아닙니까?”

하니, 심유붕은,

 

저는 글을 한 줄도 모른답니다. 지은이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즉, 대체 한()이 있는 줄도 모르는 놈이 어찌 위()인지 진()인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그럼, 이게 어디에서 났단 말씀이오.”

했더니, 심은,

 

며칠 앞서 계주(薊州) 장에서 사온 것입죠.”

한다. 나는,

 

베껴 가도 좋습니까?”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끄떡이며,

 

관계없습니다.”

한다. 종이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저녁 뒤에 정군과 함께 간즉 방 안에는 벌써 촛불 두 자루를 켜 놓았다. 내가 벽 가까이 가서 격자를 풀어 내리려 하였더니, 심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불러서 내려 준다. 나는 다시,

 

이게 선생이 지으신 게 아니오.”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는 거짓이 없기가 마치 저 밝은 촛불과 같답니다. 전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은 삼가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그제야 정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에서 쓰기 시작하게 하고 나는 처음부터 베껴 내려가는 판이었다. 심은,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

하기에, 나는,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야.”

하고 말을 마쳤다. 사관에 돌아와 불을 밝히고 다시 훑어 본즉,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것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서 전혀 맥이 닿지 않으므로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해서 한 편을 만들었다.

 

 

[D-001]시서(詩序) :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이 지은 시경(詩經) 각 편의 해제.

[D-002]마두(馬頭) : 역마(驛馬)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

[D-003]연 소왕(燕昭王) : 전국 시대 연()의 임금. 소왕은 시호요, 이름은 평().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虎叱)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비위(狒胃)는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 짐승 이름)도 범을 잡아먹고, ()도 범을 잡아먹고, 오색 사자(五色獅子)는 범을 큰 나무 선 산꼭대기에서 잡아먹고, 자백(玆白)도 범을 잡아먹고, 표견(䶂犬)은 날며 범과 표범을 잡아먹고, 황요(黃要)는 범과 표범의 염통을 꺼내어 먹고, () 뼈가 없다. 은 범과 표범에게 일부러 삼켜졌다가 그 뱃속에서 간을 뜯어먹고, 추이(酋耳)는 범을 만나기만 하면 곧 찢어서 먹고, 범이 맹용(猛㺎 짐승 이름)을 만나면 눈을 감은 채로 감히 뜨질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맹용을 두려워하지 않되 범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아서는 범의 위풍이 몹시 엄함을 알 수 있겠구나.

범이 개를 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조화를 부리게 된다. 그리고 범이 한 번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倀鬼)가 굴각(屈閣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 살면서, 범을 남의 집 부엌으로 이끌어 들여서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이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나서, 밤중이라도 밥을 지으려 하게 되며, 두 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이올(彛兀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광대뼈에 붙어 살며, 높은 데 올라가서 사냥꾼의 행동을 살피되, 만일 깊은 골짜기에 함정(陷穽)이나 묻힌 화살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틀을 벗겨 놓으며, 범이 세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육혼(鬻渾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살되 그가 평소에 알던 친구들 이름을 자꾸만 불러댄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을 모아 놓고 분부를 내리되,

 

오늘도 벌써 해가 저무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취한단 말이냐.”

한다. 굴각은,

 

제가 진작 점쳐 보았더니 뿔 가진 것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검은 머리한 것이, [] 위에 발자국이 비틀비틀 성긴 걸음을 하며 뒤통수에 꼬리가 붙어서 꽁무니를 못 감추는 그런 놈입니다.”

하고, 이올은,

 

저 동문(東門)에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의원(醫員)’이라 한답니다. 그는 입에 온갖 풀을 머금어서 살과 고기가 향기롭고, 서문(西門)에도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무당(巫堂)’이라 한답니다. 그는 온갖 귀신에게 아양부려 날마다 목욕재계해서 고기가 깨끗하온즉, 이 두 가지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잡수시죠.”

했다. 그제야 범이 수염을 거스리고 낯빛을 붉히며,

 

에에, ‘()’란 것은 ()’인만큼 저도 의심나는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해서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고, ‘()’ ()’인만큼 귀신을 속이고 인민들을 유혹하여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뭇 사람의 노여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화하여 금잠(金蠶)이 되었으니,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했다. 이에 육혼은 또,

 

저 숲속(유림(儒林))에 살코기가 있사온데 그는 인자한 염통과 의기(義氣)로운 쓸개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순결한 지조를 품었으며, ()은 머리 위에 이고 있고, ()는 신처럼 꿰고 다닌답니다. 뿐 아니라 그는 입으로 백가(百家)의 말들을 외며 마음속으로는 만물의 이치를 통했으니, 그의 이름은 석덕지유(碩德之儒 높은 덕망을 지닌 유학자)’라 하옵니다. 등살이 오붓하고 몸집이 기름져서 오미(五味)를 갖추어 지녔답니다.”

한다. 범이 그제야 눈썹을 치켜 세우고 침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싱긋 웃으면서,

 

()이 이를 좀 상세히 듣고자 한다.”

하였다. 모든 창귀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범에게 추천한다.

 

일음(一陰)일양(一陽)을 도()라 하옵는데, 저 유()가 이를 꿰뚫으며,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육기(六氣)가 서로 이끌어 주옵는데, 저 유가 이를 조화시키나니, 먹어서 이보다 맛좋은 것이 없으리다.”

범이 이 말을 듣자 문득 추연(愀然)히 낯빛을 붉히며 기쁘지 않은 어조로서,

 

아니다. 저 음()과 양()이란 것은 한 기운에서의 죽고 삶에 불과하거늘, 그들이 둘로 나뉘었으니 그 고기가 잡()될 것이요, 오행은 각기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이제 그들은 구태여 자()()로 갈라서 심지어는 짜고 신맛들에 이르기까지 분배(分配)시켰으니 그 맛이 순()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는 제각기 행하는 것이어서 남이 이끌어 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이제 그들은 망녕되이 재성(財成)보상(輔相)이라 일컬어서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그것을 먹는다면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하였다.

때마침 정()의 어느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척하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한 글이 1만 권이요, 또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敷衍)해서 책을 엮은 것이 1 5천 권이나 되므로, 천자(天子)가 그의 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동리자(東里子)라는 얼굴 예쁜 청춘과부 하나가 살고 있었다. 천자는 그의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여,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守節)하는 과부였으나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성()을 지녔다. 어느 날 밤 그 아들 다섯 놈이 서로 노래처럼 된 말로서,

 

강 북편에 닭 울음 소리 / 水北雞鳴

강 남쪽엔 별이 반짝이네 / 水南明星

방 안 소리 자아하니 / 室中有聲

북곽선생 어인 일고 / 何其甚似北郭先生也

하고는 성 다른 형제 다섯이 번갈아서 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동리자가 북곽선생께 청하기를,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연모하였답니다. 오늘 밤엔 선생님의 글 읽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하옵니다.”

한다. 그제야 북곽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서 시() 한 장()을 읊었다.

 

병풍에는 원앙새요 반짝반짝 반딧불을 / 鴛鴦在屛耿耿流螢

가마솥과 세발솥은 무얼 본떠 만들었나 / 維鬵維錡云誰之型

흥이라 / 興也

그 꼴을 본 다섯 아들은 서로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과부의 문엔 함부로 들지 않는다.’ 하였는데 북곽선생은 어진이라서 그런 일 없을 거야.”

나는 듣자 하니, 이 고을 성문이 헐어서 여우가 구멍을 내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들은즉,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환생(幻生)하여 능히 사람 시늉을 할 수 있다 하니, 그놈이 필시 북곽선생으로 둔갑한 것일게다.”

하고, 다시 서로 의논하되,

 

나는 듣건대, 여우의 갓을 얻는 자는 천금의 장자가 되고, 여우의 신을 얻는 자는 대낮의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여우의 꼬리를 얻는 자는 남을 잘 괴어서 누구라도 그를 기뻐한다 하니, 우리 저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눠 갖는 게 어떨꼬.”

하고, 이에 다섯 아들이 함께 어미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선생이 크게 놀라서 뺑소니를 칠 제 남들이 행여 제 얼굴을 알아볼까 해서 한 다리를 비틀어서 목덜미에 얹고 도깨비처럼 춤추고 귀신처럼 웃으며 문밖으로 나와서 들이뛰어 가다가 벌판 구덩이에 빠지니 그 속에는 똥이 가뜩 채워져 있었다. 간신히 휘어잡고 기어 올라서 목을 내밀고 바라본즉 범이 어흥하며 길을 가로막았다. 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역질하고 코를 싸 쥐고 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에퀴이, 그 선비 구리도다.”

한다. 북곽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여쭈되,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 지극하시지요.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제왕(帝王)은 그 걸음을 배우며,남의 아들 된 이는 그 효성을 본받고,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며 그 거룩하신 이름은 신룡(神龍)과 짝이 되어 한 분은 바람을, 또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시니, 저 같은 하토(下土)의 천한 신하 감히 하풍(下風)에 있습니다.”

한다. 범은 이 말을 듣자 꾸짖는다.

 

에에, 앞에 가까이 오질 말렸다. 앞서 내 들은즉, ‘()’란 것은 ()’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모든 나쁜 이름을 모아서 망녕되이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듣겠느냐. 대개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 너희들의 천만 가지의 말이 모두 오상(五常)을 떠나지 않으며 경계나 권면이 언제나 사강(四綱)에 있긴 하나, 저 도회지나 큰 고을에 코 베이고 발 잘리고 얼굴에 먹바늘을 뜨고 다니는 것들은 모두 오륜(五倫)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람이란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줄이며 먹바늘이며 도끼며 톱 따위를 공급하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그 나쁜 짓들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는 본래 이러한 악독한 형벌이 없으니,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사람보다 어질지 아니하냐. 그리고 범은 나무와 푸새를 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강술 같은 좋지 못한 것을 즐기지 않고, 새끼나 기르는 것 같은 자잘구레한 것도 차마 먹지 않는다. 그리고는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에 나가면 마소를 사냥하되, 아직 구복(口腹)의 누()를 입거나 음식의 송사를 일으키거나 한 일은 없으니, 범의 도()야말로 어찌 광명 정대하지 아니하냐.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으면 너희들 사람은 범을 미워하지 않다가도, 범이 만일 마소를 먹는다면 사람들은 원수라고 떠들어대니, 이것은 아마 노루와 사슴은 사람에게 은혜로움이 없지만, 저 마소는 너희들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들은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기지 않고도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하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너희를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 주어야 되겠는가. 대개 제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하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장수되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제압하여 꿀을 약탈하고, 심한 자는 개미 알을 젓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그 잔인하고도 박덕함이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를 말하며 성()을 논하면서 툭하면 하늘을 일컬으나,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으로써 논한다면 범과 메뚜기누에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요, 또 그 선악으로써 따진다면 뻔뻔스레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하의 큰 도()가 아니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큰 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범은 아직 표범을 먹지 않음은 실로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범이 노루나 사슴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마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마소를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사람을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관중(關中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이 크게 가물었을 때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몇만 명이요, 그 앞서 산동(山東)에 큰물이 났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역시 몇만 명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로 잡아먹음이 많기야 어찌 저 춘추 전국 시대만 하였으랴. 춘추 그 때엔 명색이나마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를 갚는다고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에 그들의 피는 천리를 물들였고 죽어 자빠진 시체는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선 물이나 가뭄의 걱정을 모르므로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원수와 은혜를 모두 잊고 지내므로 다른 물건에게 미움을 입지 않고, 천명을 알고 그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혹하지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지녀서 천명을 다하므로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범이 착하고도 성스러운 것이다. 그뿐일까. 그 한 곳의 아롱진 것을 엿보더라도 족히 그 문()을 온 천하에 보일 수 있겠고, 척촌의 병장기(兵仗器) 하나 지니지 않고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만을 쓰는 것은 이로써 무()를 천하에 빛내는 것이었다. 범과 원숭이를 그릇에 그린 것은 효()를 천하에 넓히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한번 사냥하여 까마귀솔개참개구리말개미 따위와 함께 그 대궁[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니, 그 인()이야말로 이루 다 쓸 수 없겠고, 고자질하는 자는 먹지 않으며, 병폐한 자도 먹지 않고, 상제된 자도 먹지 않으니, 그 의()야말로 이루 쓸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저 틀과 함정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저 새 그물과 작은 노루 그물과 물고기 그물과 큰 물고기 그물과 수레 그물과 삼태 그물 따위들을 만들었으니, 이는 애당초 그물을 뜬 자야말로 뚜렷이 천하에 화근을 퍼뜨린 놈일 것이다. 게다가 큰 바늘이니, 쥘 창이니, 날 없는 창이니, 도끼니, 세모난 창이니, 한 길 여덟 자 창이니, 뾰족 창이니, 작은 칼이니, 긴 창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고, 또 화포(火礮)란 것이 있어서 터뜨린다면 소리가 화산(華山)을 무너뜨릴 듯 그 불 기운은 음양을 누설하여 그 무서움이 우레보다 더하거늘, 이러고도 그 못된 꾀를 마음껏 부리지 못하여서 이제는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날을 만들되, 끝은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다 담그었다가 세로 가로로 멋대로 치고 찌르되, 그 굽음은 세모창 같고, 날카로움은 작은 칼 같고, 열쌤은 긴 칼 같고, 갈라짐은 가지창 같고, 곧음은 살 같고, 팽팽하기는 활 같아서, 이 병장기가 한 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들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라니,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뉘라서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느냐.”

한다. 북곽선생이 자리를 떠나 한참 엎드렸다가 일어나 엉거주춤하더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에 이르기를 비록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욕재계를 한다면 상제(上帝)라도 섬길 수 있다 하였사오니, 이 하토(下土)에 살고 있는 천신(賤臣)이 감히 하풍(下風)에 섭니다.”

하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되, 오래도록 아무런 분부가 없으므로 실로 황송키도 하고 적이 두렵기도 해서,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쳐다본즉 동녘이 밝았는데, 범은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마침 아침에 밭갈러 온 농부가,

 

선생님, 무슨 일로 이 꼭두새벽에 벌판에다 대고 절은 웬 절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북곽선생은,

 

내 일찍이 들으니

하늘이 높다 하되 / 謂天蓋高

머리 어찌 안 굽히며 / 不敢不跼

땅이 비록 두텁단들 / 謂地蓋厚

얕디디지 않을쏘냐 / 不敢不蹐

하였네그려.”

하고는 말 끝을 흐려 버렸다.

 

 

[D-001]비위(狒胃) : 짐승 이름. 비비(狒狒)의 일종.

[D-002]() : 말과 같은 짐승인데, 산해경(山海經), “몸은 희고 꼬리는 검으며 외뿔에 범처럼 생겼으며, 어금니와 발톱을 가졌고,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3]오색 사자(五色獅子) : 호회(虎薈), “누런 털에 오색이 찬란하고, 꼴은 사자와 같다.” 하였다.

[D-004]자백(玆白) : 급총궐서(汲冢闕書), “꼴이 말 같으며, 톱니가 날카로워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5]표견(䶂犬) : 거수국(渠搜國)에 있는 개. 일명은 노견(露犬)인데, 날아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6]황요(黃要) : 개의 일종. 표범과 비슷하고, 허리 이상은 누르고 이하는 검으며, 작은 놈은 청요(靑要)라 하는데, ()는 요()와 같다.

[D-007]() : 범의 입에 들어가도 범이 물지 못한다. 그러면 범의 뱃속에서부터 먹어 나온다.

[D-008]추이(酋耳) : 범의 일종. 크고 꼬리가 길다 한다.

[D-009] …… 놈입니다 : 사람을 가리킨다.

[D-010]금잠(金蠶) : 박물지(博物志), “남방 사람이 금잠을 기르는데, 촉금(蜀錦)을 먹이고, 그 똥을 음식 속에 넣으면 독이 있다.” 하였다.

[D-011]육기(六氣) : ()()()()()().

[D-012]재성(財成)보상(輔相) : 역경(易經), “천지의 도를 마련해 이룩하며, 천지의 의()를 도와 준다.” 하였다.

[D-013]구경(九經) :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좌전(春秋左傳)》ㆍ《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

[D-014]가마솥과 …… 만들었나 : 발 없는 가마솥과 세발솥은 그 모형이 다 다르다. 이로써 성 다른 다섯 아들에게 비하였다. 대체 다섯 아이들이 성도 다르고 얼굴도 같지 않으니, 이는 어떤 잡놈들과 관계해서 이런 것들을 낳았다는 의미.

[D-015]흥이라[興也] : 육의(六義)의 하나. 먼저 어떤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원앙새를 먼저 이끌어서 남녀의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D-016]여우의 꼬리 : 꼬리라 하였지마는, 사실은 샅을 일컬었다.

[D-017]대인(大人) …… 본받고 : 역경(易經)에 나오는 구절.

[D-018]제왕(帝王) …… 배우며 : 송사(宋史) 태조기(太祖紀)에 나오는 말.

[D-019]남의 …… 본받고 : 서경(書經) 채침(蔡沈)의 주()에 나오는 말.

[D-020]장수는 …… 취하며 : 무관직에는 범호() 자를 많이들 쓴다. 예를 들면 촉한(蜀漢) 때의 오호대장(五虎大將)과 같은 것.

[D-021]신룡(神龍) …… 일으키시니 : 역경에 나오는 말.

[D-022]오상(五常) :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

[D-023]사강(四綱) : ()()()().

[D-024]돈을 …… 부르고 : 옛날 돈이 구멍이 났으므로 공방형(孔方兄)이라 하였고, 또는 돈을 가형(家兄)이라 한 이도 없지 않았다. () 나라 노포(魯褒) 전신론(錢神論)에 나오는 말들.

[D-025]장수되기 ……  : 전국 때 명장 오기(吳起)의 고사.

[D-026]개미 …… 제사하니 : 예기 내칙편(內則篇)에 나오는 일.

[D-027]고자질하는 …… 않으니 : 이 세 가지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나라 재래로부터 내려오는 속담.

[D-028]보드라운 …… 지경이라니 : 붓으로 문자를 써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는 비유. 옛날 창힐(倉頡)이 한자(漢子)를 처음 짓자, 귀신이 밤에 울었다 하였다.

[D-029]아무리 …… 있다 :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나오는 한 구절.

[D-030]하늘이 …… 않을쏘냐 : 시경(詩經)에 나오는 글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후지(虎叱後識)

 

 

연암씨(燕巖氏) 가로되,

 

이 편()이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대체로 근세 중국 사람이 비분(悲憤)함을 참지 못해서 지은 글일 것이다. 요즘 와서 세운(世運)이 긴 밤처럼 어두워짐에 따라 오랑캐의 화()가 사나운 짐승보다도 더 심하며, 선비들 중에 염치를 모르는 자는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아서 시세에 호미(狐媚)하니, 이는 바로 남의 묘혈(墓穴)을 파는 유학자(儒學者)로서 시랑 같은 짐승으로도 오히려 먹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닐는가 싶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본즉, 말이 많이들 이치에 어긋나서 저 거협(胠篋)도척(盜跖)과 뜻이 같다. 그러나 온 천하의 뜻있는 선비가 어찌 하룬들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청()이 천하의 주인이 된 지 겨우 네 대째건마는 그들은 모두 문무가 겸전하고 수고(壽考)를 길이 누렸으며, 승평을 노래한 지 백 년 동안에 온 누리가 고요하니, 이는 한()() 때에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편안히 터를 닦고 모든 건설하는 뜻을 볼 때에 이 또한 하느님의 배치(配置)한 명리(命吏 제왕을 일컬음)가 아닐 수 없겠다. 옛날 어느 학자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諄諄)히 명령하신다는 말씀을 의심하여 성인(맹자)에게 질문했더니, 그 성인은 똑똑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하느님은 말씀으로 하진 않으시고 모든 실천과 사실로서 표시하는 거야.’

하셨으니, 소자(小子) 일찍이 이 글을 읽다가 이곳에 이르러선 퍽 의심스러웠다. 이제 나는 감히 묻노니,

하느님께선 모든 실천과 사실로써 그의 의사를 표시하실진대, 저 오랑캐의 제도로써 중국의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은 천하의 커다란 모욕인만큼 저 인민들의 원통함이 그 어떠하며,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들의 닦은 덕()에 따라 다른 것이니, 백신(百神)은 그 어떤 냄새를 응감할 것인가.”

요컨대, 사람으로서 보면 중화(中華)와 이적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마는 하늘로서 본다면 은()의 우관(冔冠)이나 주()의 면류(冕旒)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하였거니, 어찌 반드시 청인(淸人)들의 홍모(紅帽)만을 의심하리오. 이에 천정(天定)인중(人衆)의 설()이 그 사이에 유행되고는, 사람과 하늘의 서로 조화되는 이()는 도리어 한 걸음 물러서서 기()에게 명령을 받게 되며, 또 이런 문제로써 옛 성인의 말씀에 체험하여도 맞지 않으면 문득 이르기를,

이건, 천지의 기수(氣數)가 이런 것이야.’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기수의 소치라 이르고 말 것인가. 아아, 슬프다. ()의 왕택(王澤)이 끊인 지 벌써 오래여서 중원의 선비들이 그 머리를 고친(치발(薙髮)) 지도 백 년의 요원한 세월이 흘렀으되,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실(明室)을 생각함은 무슨 까닭인고. 이는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함이다. 그러나 청이 저를 위한 계책도 역시 허술하다 하리로다. 그는 전대(前代) 오랑캐 출신의 말주(末主)들이 항상 중화의 풍속과 제도를 본받다가 쇠망했음을 징계하여 철비(鐵碑)를 새겨서 전정(箭亭 파수 보는 곳)에 묻었으나, 그들 평소에 하고 버리는 말 가운데에는 언제나 스스로 그의 옷과 벙거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오히려 다시 강약의 형세에만 마음을 두니 그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저 문왕(文王)처럼 깊은 꾀와 무왕(武王) 같은 높은 공렬로도 오히려 말주(은의 주왕(紂王))의 쇠퇴함을 구해 내지 못했거늘, 하물며 구구(區區)하게 저 의관 제도의 하찮은 것을 고집해선 무엇할 것인가. 그들의 옷과 벙거지가 진정 싸움에 경편하다면 저 북적(北狄)이나 서융(西戎)의 그것인들 아니될 이유는 없을 것인즉, 그들은 의당 힘껏 저 서북쪽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도리어 중국의 옛 습속을 따르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에 홀로 강한 체할 것이어늘, 이제 온 천하의 인민들을 모두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는 홀로 호령하되,

잠깐 너희들의 수치를 참으면 우리를 따라 강하게 될지어다.’

하나, 나는 그 강하다는 것이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의관 제도만으로 강함이 된다면, 저 신시(新市)녹림(綠林) 사이에 그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또는 그 머리 수건을 노란 빛깔로 고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했던 도적놈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리라. 가령 어리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한번 일어나서 그들이 씌워 주었던 벙거지를 벗어서 땅에 팽개친다면, 청 황제(淸皇帝)는 벌써 천하를 앉은 자리에서 잃어버리게 될지니, 지난날 이를 믿고서 스스로 강하다고 뽐내던 것이 도리어 망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그 빗돌을 새겨 묻어서 후세에 경계한 일이야말로 어찌 부질없는 짓이 아니리오. 이 편은 애초엔 제목(題目)이 없으므로 이제 그 글 중에 호질(虎叱)’이란 두 글자를 따서 제목을 삼아 두어 저 중원의 혼란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C-001]호질후지(虎叱後識) : 다른 에는 이 소제가 없었던 것을, 이제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거협(胠篋)도척(盜跖) : 모두 장자의 편명. 남화경(南華經) 외물편(外物篇)에 나오는 말.

[D-002]옛날 …… 거야 : 맹자 만장편에 나오는 구절. 여기서 어느 학자란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을 말함.

[D-003]소자(小子) : 연암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서 한 말.

[D-004]천정(天定) …… () : 귀잠지(歸潛志),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늘도 막아 낼 수 없고,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 하였다.

[D-005]신시(新市)녹림(綠林) : 이 둘은 모두 당시의 소위 유적(流賊)이 출몰하는 근거지.

[D-006]눈썹을 …… 물들이거나 : 적미적(赤眉賊). 서한(西漢) 말년의 유적.

[D-007]머리 …… 고쳐서 : 동한(東漢) 말기의 황건적(黃巾賊).

[D-008]도적놈 : 옛날 지배 계급의 역사에서는, 정의를 들고 일어서서 항쟁하는 농민들은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9일 을사(乙巳)

 

 

개다.

옥전현(玉田縣)에서 새벽에 떠나 서팔리보(西八里堡)까지 8, 오리둔(五里屯) 7, 채정교(釆亭橋) 5, 대고수점(大枯樹店) 10, 소고수점(小枯樹店) 2, 봉산점(蠭山店) 3, 별산점(鱉山店) 12, 송가장(宋家庄)을 구경하고 모두 47리를 가서 점심 먹고, 또 별산점에서 이리점(二里店)까지 2, 현교(現橋) 5, 삼가방(三家坊) 2, 동오리교(東五里橋) 16리인데, 이 다리의 일명은 용지하(龍池河) 어양교(漁陽橋)라 한다. 거기에서 계주성(薊州城)까지 5, 서오리교(西五里橋) 5, 방균점(邦囷店) 15, 모두 50리이다. 이날 95리를 가서 방균점에서 묵었다.

산 오목한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몇 백 년 동안을 잎이 피어나지 않으나 가지나 줄기가 썩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고수(枯樹)’라 일컫는다. 송가장의 성 둘레는 2, ()의 천계(天啓) 연간에 송씨(宋氏)들이 쌓은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외랑(外郞)이란 서리(胥吏 아전(衙前))의 별칭(別稱)인데, 송씨가 이 지방의 큰 성바지여서 그 일족이 몇 백 명이요, 살림이 모두 넉넉하여 명청이 교체될 즈음에 저희들끼리 이 성을 쌓아서 겨레들을 모아 지키었다. 성 가운데엔 대()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각기 여남은 길이나 되고 문 위엔 다락을 세웠고, 집 뒤에는 네 층 높은 다락이 있고, 맨 꼭대기엔 금부처를 모셨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눈앞이 시원스레 트이었다. 청인(淸人)이 처음 이곳을 들어올 때 온 문중을 모아서 성을 사수하였고, 천하의 대세가 정한 뒤에도 곧 나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청인이 이를 미워하여 해마다 은() 1천 냥을 벌로 받치게 하였더니, 강희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 대신으로 말먹이 풀 1천 단씩을 내게 하였다.

성중에는 아직도 큰 집 여남은 채가 모두 송씨들이며 노비들도 오히려 오륙백 명이나 된다 한다.

계주(薊州) 성안엔 인물들이 번화하니 실로 북경 동쪽의 거진(巨鎭)답다. 산 위엔 안녹산(安祿山)의 사당이 있고 성중엔 돌로 세운 패루 셋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금자(金字)로 대사성(大司成)이라 새기고, 그 아래엔 국자좨주(國子祭酒 국자감(國子監)의 벼슬 이름)  삼대고증(三代誥贈)’이라고 나란히 써서 붙였다. 이곳의 술맛은 관동에서 으뜸이라 하므로 한 주루(酒樓)에 들어가 여러 사람과 함께 흉금을 터놓고 한번 취토록 마셨다. 독락사(獨樂寺)에 들어간즉, 정전(正殿)의 제액(題額)은 자비사(慈悲寺)였고, 그 뒤엔 2층 다락이 서 있는데 그 가운데엔 아홉 길이나 되는 금부처를 세웠고, 그 머리 위엔 작은 금부처 수십 개를 앉히었다. 다락 밑엔 한 부처를 누인 채 비단 이불을 덮어 두었는데, 그 다락의 현판엔 관음지각(觀音之閣)’이라 하고, 그 왼편엔 조그마한 글자로 태백(太白)’이라 써 붙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저기 이불 덮은 채 누운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이백(李白)이 취해서 자는 소상(塑像)입니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긴 하나 굳게 잠그고는 구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객관에 돌아온즉, 문밖엔 장사치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말과 나귀에다 서책서화골동 등을 실었고, 곰을 놀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구경했다. 그러나 뱀 놀리는 자 범 놀리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나 벌써 흩어져 버렸으므로 미처 보지 못해서 한스러운 일이다. 앵무새를 파는 자가 있으나 날이 저물어서 그 털빛을 상세히 볼 수 없으므로 막 등불을 찾아 오는 동안에 그 자가 그만 가버려서 더욱 유감이었다.

 

 

[D-001]안녹산(安祿山) : 본래 당 나라 때의 잡호(雜胡)로서, 당 현종(唐玄宗) 때 양귀비의 눈에 들어 몇 개 절도사(節度使)를 겸임했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계자 문제로 아들 경서(慶緖)에게 시해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0일 병오(丙午)

 

 

개다.

방균점(邦囷店)에서 별산장(別山庄)까지 2, 곡가장(曲家庄) 2, 용만자(龍灣子) 3, 일류하(一柳河) 2, 현곡자(現曲子) 2, 호리장(胡李庄) 10, 백간점(白幹店) 2, 단가점(段家店) 2, 호타하(滹沱河) 5, 삼하현(三河縣) 5, 동서조림(東西棗林) 5,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 먹고, 조림에서 백부도장(白浮屠庄)까지 6, 신점(新店) 6, 황친점(皇親店) 6, 하점(夏店) 6, 유하점(柳河店) 5, 마이핍(馬已乏) 6, 연교보(烟橋堡) 7, 모두 41리이다. 이날 84리를 가서 연교보에서 묵었다.

계주는 옛날 어양(漁陽)이다. 그 북에 반산(盤山)이 있는데 위태로이 솟은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하고, 봉우리마다 위가 퍼지고 아래가 가늘어서 그 꼴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산이란 이름을 얻었고, 또 일명 오룡산(五龍山)이라고도 한다. 내 앞서 원중랑(袁中郞) 반산기(盤山記)를 읽다가 기승(奇勝)한 곳이 많음을 알았더니, 이제 기어코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함께 갈 사람이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그 산이 비록 가파로우나 몇백 리를 웅장(雄壯)하게 서려 있을뿐더러 겉은 바위가 입혔지만, 속은 살찐 흙이어서 과실 나무들이 극히 많으므로 연경(燕京)에서 날마다 소비하는 대추배 등속이 모두 이곳에서 나는 것이라 한다.

어양교(漁陽橋)에 다다르니 길 왼편에 양귀비(楊貴妃)의 사당이 있어서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안녹산의 사당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천하에 돈 있는 자가 아무리 많다손 치더라도 하필이면 이런 추잡한 사람들의 사당을 지어서 명복(冥福)을 빈단 말인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무리 복을 구한단들 사곡해선 안 되리라 / 求福不回

하였으니, 이런 것이야말로 돈만 헛되이 버렸다 하겠다. 혹은 이르기를,

 

성인(공자)도 정() 나라() 나라의 음시(淫詩)를 뽑아버리지 않아서 후세 사람의 경계를 삼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계주 금병산(錦屛山) 석벽에는 양웅(揚雄)이 반교운(潘巧雲)을 베는 상()도 있다.”

고 변명한다. 백간점에서 구경하러 온 수재(秀才) 하나를 만나서 서로 이야기할 제 그는,

 

안녹산 역시 명사랍니다. 그가 앵두를 두고 읊은 시에,

앵두 알 한 광주리 / 櫻桃一籃子

파랑 노랑이 반씩일세 / 半靑一半黃

절반은 회왕(안녹산의 아들)에게 / 一半寄懷王

절반은 주지(안녹산의 스승)에 나눠 보내고저 / 一半寄周摯

하였기에, 어떤 이가 청하기를,

당신의 주지(周摯) 구를 회왕(懷王) 구와 바꾸었으면 운()이 맞지 않겠소.’

하였더니, 녹산은 크게 노하여,

그게 무슨 말야. 주지로 하여금 우리 집 아이 위에 누르게 한단 말이야.’

했으니, 이 정도의 시인을 어찌 사당이 없고야 배기겠소.”

하고는,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지나는 길에 향림사(香林寺)에 들어갔다. 불전(佛殿)에는 향림암(香林菴)’이라 씌어 있고 그 위에는 금자로서 향림법계(香林法界)’라 씌었으니, 이는 강희 황제의 글씨이다. 순치(順治 청 세조(世祖)의 연호)의 아우 누이가 청상과부로서 여승이 되어 이 암자에 있다가 나이 아흔이 넘어서 죽었다 한다. 그리고 이 암자에는 모두 비구니(比丘尼)만이 살고 있었다. 뜰 가운데에는 줄기가 흰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나무 껍질의 비늘도 푸른 채 희다. 암자 동편에는 작은 탑 다섯이 있고 그 좌우에는 역시 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푸른 빛이 뜰에 가득 차고, 바람 소리가 마치 물결처럼 서늘함을 돕는다. 그러고 보니 백간점이라는 이름도 아마 흰 줄기 소나무에서 말미암은 듯싶다.

차츰 연경이 가까워지자 거마 울리는 소리가 메마른 하늘에 우레 소리인 듯하고, 길 양편에는 모두 부호가들의 무덤인데, 담을 둘러서 마치 여염집같이 즐비하고 담 밖에는 하수를 이끌어 해자를 만들었고, 문 앞의 돌다리는 모두 무지개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가끔 돌로 패루(牌樓)를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해자 가의 갈대 사이엔 때로 콩깍지만 한 작은 배가 매여 있고, 다리 아래에는 여기저기 고기 그물을 쳐놓았다. 담 안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가끔 기왓골이나 처마 끝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지붕 위의 호리병 박 꼭대기가 솟아 오르기도 하였다.

점방에서 잠깐 쉬노라니 울 밖에 예쁜 아이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노래하며 가는데, 비단저고리에 수놓은 바지를 입고 옥같이 맑은 얼굴에 살결이 눈처럼 희다.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피리를 불며, 혹은 비파를 뜯고, 나란히 서서 천천히 노래한다. 모두들 곱고도 아름다운 치장이다. 이들은 모두 연경의 거지들로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멀리서 온 장사치들에게 하룻밤 베개를 같이하고 몇백 냥의 돈을 받는 일이 있다 한다.

길 옆에 삿자리를 걸쳐서 햇빛을 가리고 군데군데 놀이 하는 곳을 만들었는데, 삼국지(三國志)를 연출(演出)하는 자, 수호전(水滸傳)을 연출하는 자, 서상기(西廂記)를 연출하는 자가 있어서, 높은 소리로 그 사()를 부르고 음악이 이에 따른다. 온갖 장난감들을 벌여놓고 파는데 모두들 어린이들의 일시적 장난감이었지만, 그 재료가 희귀한 것일뿐더러 만든 솜씨가 하나도 교묘하지 않은 게 없으며, 어떤 것은 손만 거쳐도 깨질 물건인데도 그 수공은 몇 냥이나 좋이 된다. 탁자 위에는 관공(關公)의 상을 몇만 개나 별여놓았는데 칼을 가로 잡고 말을 탔으나 그 크기는 겨우 두어 치밖에 안 되며, 모두 종이로 만들어 교묘하기 짝이 없다. 이는 아이들 장난감인데 이렇게 많음을 보니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도 황홀찬란한 것들을 많이 보았는지라 이목과 정신이 함께 피로할 지경이었다.

배로 호타하를 건너서 삼하현 성중에 들어가 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의 댁을 찾았더니, 용주는 벌써 달포 전에 산서(山西)에 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은 성 동편 관왕묘(關王廟) 곁으로 대여섯 칸 초가집이니 그의 가난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손 심부름하는 아이도 없이 주렴 너머로 부인의 목소리가 마치 연연(燕燕)앵앵(鶯鶯)처럼 아름답다. 그는,

 

저희 집 주인께선 어떤 글방 훈장으로 맞이되어 산서 지방에 가시고는 제 홀로 딸년 하나 데리고 살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조선서 멀리 오신 선생님께서 이런 누지(陋地)에 왕림하셨는데도 공손히 맞아들이지 못하여 죄송하옵니다.”

하고는 또 사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제야 담헌(湛軒 홍대용의 호)의 편지와 정표를 내어 주렴 앞에 놓고 나온다. 담이 허물어진 곳에 나이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계집애 하나가 섰는데, 그 흰 얼굴에 조촐한 목덜미, 아마 용주의 따님인 듯싶다.

삼하현은 옛날 임후(臨昫)이다.

 

 

[D-001]원중랑(袁中郞) : 명의 저명한 문학가. 원굉도(袁宏道). 중랑은 그의 자.

[D-002]양웅(揚雄) …… () : 중국 고전 소설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양웅이, 그의 애인 반교운이 행실이 부정하다고 하여 금병산에서 찔러 죽였다.

[D-003]당신의 …… 않겠소 : 그 두 글귀를 바꾸면 황() 자와 왕() 자가 같은 양() 운이 된다.

[D-004]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 : 연암의 친구 홍대용(洪大容)이 전년에 왔을 때에 깊이 사귀었던 학자. 용주는 호요, 유의는 이름.

[D-005]마치 …… 아름답다 : 이 부분은 다른 본에는 모두, “몹시 분명하지 않다.”로 되었으나, ‘다백운루본을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 1일 정미(丁未)

 

 

아침엔 개고 찌는 듯 덮다가 오후에는 비가 오다 멎다 했고, 밤엔 큰비가 우레치며 내리다.

연교보에서 새벽에 떠나서 사고장(師姑庄)까지 5, 등가장(鄧家庄) 3, 호가장(胡家庄) 4, 습가장(習家庄) 3, 노하(潞河) 4, 통주(通州) 2, 영통교(永通橋) 8, 양가갑(楊家閘) 3, 관가장(關家庄) 3, 모두 35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거기에서 다시 삼간방(三間房)까지 3, 정부장(定府庄) 3, 대왕장(大王庄) 3, 태평장(太平庄) 3, 홍문(紅門) 3, 시리보(是里堡) 3, 파리보(巴里堡) 2, 신교(新橋) 6, 동악묘(東岳廟) 1, 조양문(朝陽門) 1, 서관(西館)에 드니 모두 27리이다. 이날 모두 62리를 걸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연경까지 모두 33() 2 30리였다.

새벽에 연교보를 떠나 변()() 여러 사람과 먼저 갔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날이 벌써 밝아지는데 별안간 우레 같은 소리가 우렁차게 공중을 울린다. 이는 노하(潞河)의 배 속에서 나는 포성이라 한다. 아침노을이 어린 곳으로 멀리 바라본즉, 돛대들이 총총히 늘어선 갈대 같고, 버드나무 위에는 뗏목과 풀뿌리 따위가 많이 걸렸는데, 이는 한 열흘 전에 연경에 큰비가 내려서 노하가 넘치어 민가 몇만 호를 쓸어가고, 물에 휩쓸린 사람과 짐승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다. 내 이제 말 위에서 담뱃대를 쥔 채 팔을 뻗쳐서 버드나무 위의 물 찬 흔적을 가늠해 본즉, 땅에서 두서너 길 됨직하다. 물가에 다다르니 물이 넓고도 맑으며 배가 빽빽이 들어선 것이 장성(長城)의 웅대함과 견줄 만하고 큰 배 십만 척에 모두 용()을 그렸는데, 호북(湖北)의 전운사(轉運使 운수(運輸)를 맡은 벼슬 이름)가 어제 호북의 곡식 3백만 석을 싣고 왔다 한다. 한 배에 올라가서 그 대략의 제도를 구경하니, 배 길이는 모두 여남은 발이나 되고 쇠못으로 장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널빤지를 깔아서 층 집을 세웠으며 곡물들은 모두 선창 속에 그냥 쏟아 넣었다.

집은 모두 아로새긴 난간, 그림 기둥, 아롱진 들창, 수놓은 지게문으로 꾸미어, 그 제도가 뭍의 건물과 다름없이 밑은 창고이고 위에는 다락으로 되었으며, 그 패액(牌額)주련(柱聯)장유(帳帷)서화(書畵) 등이 모두 아득히 신선의 세계였다. 지붕에는 쌍돛을 높이 세웠는데 돛은 가는 등()으로 엮어 몇 폭이나 되고, 온 배에 연분(鉛粉)을 기름에 타서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노란 칠을 입혔으므로 한 방울 물도 스며들지 않으니 비가 내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이다.

선기(船旗)에는 절강(浙江)’이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배 이름이 크게 씌었으며, 물을 따라 1백 리를 내려오는 사이에 배들은 마치 대밭처럼 빽빽하게 들어 섰으되, 남으로 직고해(直沽海)에 줄곧 통하여 천진위(天津衛)를 거쳐 장가만(張家灣)에 모이게 된다. 그리하여 천하의 선운(船運)들이 모두 통주(通州)에 모여들게 되니, 만일 노하의 선박들을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수도의 장관(壯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삼사(三使)와 함께 한 배에 오르니, 그 양쪽에는 채색 난간을 두르고 그 앞에는 휘장을 드리우고 창을 세워서 문을 만들고, 양편에는 온갖 의장(儀仗)기치(旗幟)도창(刀鎗)검극(劒戟)봉인(鋒刃) 등을 세웠는데 모두 나무로 만들었고, 방 안에는 관() 하나가 놓이고 그 앞에는 교의와 탁자가 늘어 놓였으며 탁자 위에는 온갖 제기(祭器)를 벌여 놓았다. 상주는 푸른 들창 아래에 걸터앉았는데 몸에는 무명 옷을 입었고 머리는 깎지 않아서 두어 치나 자란 것이 마치 중과 같은 모양이다.

남과 수작을 즐기지 않고 앞에는 의례(儀禮) 한 권을 놓았다. 부사가 그 앞으로 다가서서 읍하니 상주가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이마를 조아리며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다가 다시 교의에 앉는다. 부사가 나더러 그와 필담(筆談)하여 보라 하기에 나는 그제야 부사의 성명과 관함을 써 보이었더니, 상주 역시 머리를 조아리며 쓰되,

 

저의 성은 진()이요, 이름은 경()이옵고, 가계(家系)는 호북(湖北)이옵니다. 선친(先親)께옵서 북경에 벼슬하여 한림원(韓林院) 수찬(修撰)을 지내시고 금년 칠월 구일에 세상을 버리시자, 임금께옵서 토지(土地)와 돌아갈 배를 내리시옵기에 고향으로 유해(遺骸)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상복이 몸에 있으므로 손님을 접대하질 못하와 죄송합니다.”

한다. 부사가 글씨로 그의 나이를 물었으나 진경은 대답하지 않는다. 부사가 또 글씨로,

 

중국서는 누구든지 모두 삼년상(三年喪)을 치르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진경은,

 

성인께옵서 인정을 따라 예를 제정하였사온즉 저같이 불초한 자도 힘껏 따르고자 하옵지요.”

한다. 부사는,

 

상제(喪制)는 모두들 주자(朱子)의 학설을 따르는가요?”

했더니, 진경은,

 

그렇습니다.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시호)을 따르지요.”

한다. 창 밖에 아롱진 대 난간이 사창에 비치어 영롱하고, 옆 배에서 흘러나오는 풍류 소리가 소란하며, 갈매기 날고 내와 구름 끼고 누대(樓臺)의 아름다움이 모두 선창에 어리고 흰 모래톱 아득한 언덕에는 바람을 안은 돛들이 나타났다 꺼졌다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슬며시 이것이 곧 부가(浮家)범택(泛宅)들인 줄로 알고도 마치 저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 화려한 방안에 몸을 담고서, 강호(江湖) 경물(景物)의 아름다운 낙()을 겹누르는 듯싶었다. 부사가 몸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저야말로 월파정(月波亭) 상주라고 이르겠군.”

하기에, 나 역시 가만히 웃었다.

정사가 사람을 보내어 구경할 것이 있으니 얼른 오라 하기에 곧 부사와 함께 일어날 제, 등 뒤에 무엇이 툭하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본즉, 부사의 비장 이서구(李瑞龜)가 넘어져서 겸연쩍은 듯이 웃고 있다. 대개 배 위에 깐 널빤지가 얼음처럼 미끄러워 발 붙이기가 힘들다. 부사가 쩔쩔매자 좌우로 부축하고 가다가 이를 돌아다본다는 것이 그만 옆의 사람들까지 함께 쿵하고 넘어졌다.

휘장 안에서 네 사람이 한창 투전을 하고 있기에 나는 들여다보았으나 모두 만주 글자여서 도시 알 수 없다, 혹은,

 

이것의 이름은 마조(馬吊)랍니다.”

한다. 깊숙한 곳에 탁자를 늘어놓고 그 위에 준()()()() 등의 그릇을 진열했는데 모두 기이하게 생긴 물건들이다. 또 한 문을 나선즉, 정사와 서장관이 널빤지에 앉아서 선창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안이 곧 주방(廚房)인데, 흰 베로 머리를 감싼 늙은 부인 둘이 가마솥에 녹두나물미나리 등속을 삶아서 다시 찬물에 헹구고 있고, 또 나이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처녀 하나가 있는데 아리따운 얼굴이 견줄 데 없다. 낯선 손님을 보고도 조금도 수줍은 태가 없이 찬찬하고 다소곳이 제 맡은 일만 하고 있는데, 고운 깁옷의 주름은 안개처럼 어른어른하고 하얀 팔목은 연뿌린양 민듯하다. 아마 진씨(秦氏)의 차환(叉鬟)으로서 아침상을 보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 양편에는 파초선(芭蕉扇)을 두루 꽂았는데 한림(翰林)’지주(知州)’정당(正堂)’포정사(布政使)’라 썼으니, 이는 모두 죽은 이의 이력들이었다.

강 가운데에는 이곳저곳 뱃놀이가 한창이다. 작은 배에 혹은 붉은 일산을 펴고, 혹은 푸른 휘장을 두르고는 삼삼오오(三三五五) 서로 짝을 지어 각기 다리 짧은 교의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평상 위에도 앉아서 책권이며 그림축이며 향로며 차도구들을 벌여 놓았고, 혹은 봉생(鳳笙)이나 용관(龍管)을 불고, 혹은 평상에 의지하여 글씨와 그림도 치고, 더러는 술 마시며 시 읊기도 하는데, 그들이 반드시 모두가 고인(高人)운사(韻士)들은 아니겠지만, 그윽하게 아취가 있어 보인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오른즉, 수레와 말이 길을 막아서 다닐 수가 없다.

동문에서 서문까지 줄곧 5리 사이에 외바퀴 수레 몇 만 채가 꽉 차서 몸 돌릴 곳이 없다. 말에서 내려 한 점방으로 들어가니 기려하고 번창함이 벌써 성경(盛京)산해관 따위에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길이 비좁아 간신히 조금씩 나아가 본즉, 시문(市門)의 현판에는 만수운집(萬艘雲集)’이라 하였고, 한길 위에 이층 높은 누()를 세우고는 성문구천(聲聞九天)’이라 써붙였다. 성 밖에는 창고 셋이 있는데 그 제도를 성곽과 같이 해서, 지붕은 기와로 이었고 그 위에는 공기창을 내어서 나쁜 기운을 내보내게 하고, 벽에도 곁 구멍을 뚫어서 습기가 가시게 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창고를 둘러 해자[]를 만들었다.

영통교(永通橋)에 이르렀는데, 이 다리는 일명 팔리교(八里橋)라 한다. 길이가 수백 발, 너비는 여남은 발이요, 무지개 문의 높이도 여남은 발이나 되는데, 좌우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는 사자 몇백 마리를 앉혔는데, 그 새김의 정미로움이 마치 도장(圖章) 꼭대기의 가는 무늬와 같았다. 다리 밑에 선박들은 줄곧 조양문(朝陽門 북경의 동북문) 밖에 닿아서 다시 작은 배로써 물문을 열고 태창(太倉)에 끌어들인다 한다.

통주에서 연경까지 40리 사이는 돌을 깎아서 길에 깔았다. 쇠 수레바퀴가 서로 맞닿는 소리가 더욱 커서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아찔하게 한다. 길가 양편에는 모두 무덤인데 담이 잇달고 나무가 울창하여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대왕장(大王庄)에 이르러서 잠깐 쉬고 곧 떠났다. 길 왼편에 돌 패루 세 칸이 있기에 말에서 내려 그 만든 양을 보니, 이는 곧 퉁국유(佟國維 청 강희 때의 충신)의 무덤이었다. 패루에는 그의 벼슬들을 나란히 새겨 붙였고, 윗층에는 여러 가지 조칙을 새겼다. 곧 다리를 건너 문 안에 들어서니 좌우에 여덟모난 화표주(華表柱 망주석)를 세우고 그 위에는 돌 사자를 새겼다. 가운데에는 길을 쌓아 올려서 층대 높이가 한 발이나 되며, 길 좌우에는 늙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섰고, 3층 돌대를 쌓고 그 위에 큰 비석 열셋을 세웠는데, 모두 퉁씨(佟氏) 삼대의 훈벌(勳閥)을 표창한 조칙(詔勅)들이다. 퉁국유의 일명은 융과다(隆科多)라고도 하며 그 아내는 하사례씨(何奢禮氏)이다. 북쪽 담 밑에 봉분 여섯이 나란히 있는데, 띠를 입히지 않고 밑은 둥글고 위는 뾰족하게 석회로 번질번질하게 발랐다. 누런 기와로 이은 집 수십 칸이 있는데 단청이 이미 우중충하며, 층계는 무너지고 채색한 주렴은 해졌는데, 집 안에는 박쥐똥이 가득할 뿐 텅 비고 괴괴하여 지키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깊은 산중의 낡은 절과 같다. 매우 괴이한 일이다.

아마도 훈벌이 혁혁하였던 집안이었으나 이제는 자손이 없어서 그런 것인 듯싶다.

동악묘(東嶽廟)에 이르러 심양에 들어갈 때처럼 삼사가 옷을 갈아입고 반열을 정돈하였다. 이때 통역관 오림포(烏林哺)서종현(徐宗顯)박보수(朴寶秀) 등이 벌써 그 가운데에 와서 기다린다. 그들은 모두 망포(蟒袍)수보(繡補 청 관리의 예복)에다 목에는 조주(朝珠)를 걸고, 말을 타고 앞을 인도하여 조양문에 이르니, 그 제도는 산해관과 다름없으나 다만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검은 먼지가 공중에 자욱하니 수레에 물통을 싣고 곳곳마다 길바닥에 물을 뿌린다.

사신은 곧장 예부(禮部)를 찾아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치러 갔다. 나는 그와 헤어져서 조명회와 함께 먼저 사관으로 갔다. 순치(順治) 초년에 조선 사신의 사관을 옥하(玉河) 서쪽 기슭에다 세우고 옥하관(玉河館)이라 일컬었더니, 그 뒤에 악라사(鄂羅斯)가 점령한 바 되었다. 악라사는 이른바 대비달자(大鼻㺚子)인데 하도 사나우므로 청인도 그들을 누를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회동관(會同館)을 건어호동(乾魚衚衕)에다 세우니, 이는 곧 도통(都統) 만비(滿丕)의 집이었다. 만비가 도륙당할 때에 집안 사람이 많이 자결하였으므로 그 집에 귀매(鬼魅)가 많았다 한다. 혹은 우리나라 별사(別使 임시 사행(使行))와 동지사가 한꺼번에 맞부딪치면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되었다. 연전에 별사가 먼저 건어호동에 들었으므로 금성위(錦城尉)가 마침 동지사로 와서 서관에 머문 일도 있었다. 지난해 건어호동에 있는 회동관이 불타 버리고 여태까지 다시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번 걸음에도 서관에 옮겨 들게 되었다.

아아, 슬프다. 옛 역사에 이르기를,

 

문자(文字)가 생기기 전엔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를 상고할 수 없다.”

하였으나, 문자가 생긴 이후 21() 3천여 년 동안에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술법으로 하였을 것인가. 이는 곧 그들의 이른바 유정(惟精)유일(惟一)이란 심법(心法)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하를 다스림에는 요()순씨(舜氏)가 있음을 알고, 홍수를 다스림에는 하우씨(夏禹氏)가 있음을 알며, 정전(井田) 제도를 마련함엔 주공씨(周公氏)가 있음을 알고, 학문의 선전엔 공자씨(孔子氏)가 있음을 알고, 재정과 세금을 골고루 마련함엔 관중씨(管仲氏)가 있음을 알았을 뿐이다. 나는 알지 못하겠구나. 그 밖에 또 다시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머리를 짜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심력을 기울였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총기를 다했던고. 뿐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벌써 저 21 3천여 년 동안 문자(文字)가 창조되기 전에 이를 기초(起草)하고 이를 빛내고 이를 수정하였던고. 생각하건대, 이러한 여러 성인이 그 생각과 그 심력과 그 총기를 다 기울여서 기초하고 빛내고 수정하였으니, 그들은 장차 이것으로써 자기의 사리(私利)를 취하려 하였음일까, 아니면 길이길이 만세를 두고 모든 백성들과 그 행복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음일까.

그리하여,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의 심술(心術)이 같지 못하고 사업(事業)이 각기 다르면 이를 곧 우인(愚人)’이라 지목하였을뿐더러, 그를 일찍이 집과 나라를 망친 자라고 시종 헐뜯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마음의 음탕함과 귀와 눈의 영리함이 도리어 성인을 능가하므로, 더욱이 후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그의 몸을 배격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공훈을 본받고, 또 겉으로는 그 사람을 욕하면서도 속으론 그 이익점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온갖 기이한 기술과 음탕한 솜씨가 날로 부풀어오른 법이다.

보라, 대개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민 자는 이른바 걸()()가 아니었으며, 산을 허물어 골을 메우고 만 리의 장성을 쌓은 자는 이른바 몽염(蒙恬)이 아니었으며, 천하에 곧은 도로를 닦은 자는 이른바 진 시황(秦始皇)이 아니었으며, 천하의 일이 법()이 아니고는 아니 된다 해서 드디어 나무를 옮겨 보기도 하고, 또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까지 간섭하여 그 제도를 통일시킨 자는 이른바 상앙(商鞅)이 아니었던가. 대개 이 네댓 사람들은 그의 역량과 재주와 정신기백과 계획과 시설이 족히 천지를 움직일 만하였던 만큼, 애초에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이 우주 사이에서 나란히 설 수 있으련마는, 불행히 서계(書契 문자(文字))가 이미 이룩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와 이익의 누림은 오로지 뒷사람에게로 돌아가고, 그 몸은 화단(禍端)이 되어 길이 우부의 이름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더욱 알지 못하겠구나.  21() 3천여 년의 사이에는 몇 명의 걸주와, 몇 명의 몽염과, 몇 명의 진 시황과, 몇 명의 상앙이 있어서, 그 서계가 이룩된 이후의 것을 본받았던 것인가. 서계가 이룩된 뒷일이 그러하니, 서계가 이룩되기 전의 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를 아는가 하면, 옛날에 진시황이 육국(六國)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阿房宮)의 전전(前殿)을 크게 지었으니, 본뜬다는 것은 저 환쟁이들의 이른바 모사(摹寫)가 곧 그것이다. 육국의 선비들이 그들의 임금을 유세(遊說)할 때에는 모두 걸주를 욕하지 않은 이가 없었건마는, 그 실에 있어서는 앞서 이른바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몄다는 것이 마침내는 족히 저 장화대(章華臺 전국 초()의 누각)와 황금대(黃金臺 전국 때 연 소왕(燕昭王)의 궁전)의 부본이 되는 동시에, 장화대황금대는 역시 아방궁의 윤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항우(項羽)가 이에 한번 불질러서 곧 평지의 재가 되고 만 것은 족히 뒷세상의 토목(土木) 공사(工事)만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한 거울이 되었음직하다. 그 본심은 이왕 내가 이에 살지 못할 바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차지함을 싫어했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다면 저 팽성(彭城)의 도시 또한 아방궁이 될 것이었으나, 다만 미처 하지 못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 한 고조의 궁궐)을 크게 공사할 때에, 한 고제(漢高帝 고제는 유방의 묘호)는 귀와 눈이 없지는 않았건마는, 짐짓 모르는 체하다가 궁궐이 다 이룩된 뒤에는 도리어 소하를 꾸지람하였으니, 이 꾸지람이 실로 옳다면 어째서 소하를 당장 죽여 저자에 조리돌리지 않았으며, 또 궁궐을 불질러 태워 버리지 아니하였던고. 이로써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앞서 육국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의 전전을 지은 것은 곧 미앙궁을 위하여 터를 닦은 것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내 이제 조양문에 들어서자, 곧 저 요순의 이른바 유정유일의 마음씨가 이러하고, 하우씨의 홍수 다스림이 이러하고, 주공의 정전이 이러하고, 공자의 학문이 이러하고, 관중의 이재(理財)가 이러하였음이 눈에 선하게 띄었으며, 주가 옥과 구슬로 궁궐을 세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몽염이 산을 허물어서 골을 메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진 시황이 곧은 길을 닦은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상앙이 제도를 통일시킨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성인이 일찍이 율()()()() 등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둥근 것은 그림쇠에 맞도록, 모난 것은 곡척(曲尺)에 맞도록 하고, 곧은 것은 먹줄에 맞추었기에, 천하에 퍼지자 천하가 이를 좇고, 주에게 주어도 걸주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높은 언덕에 넘실거리는 홍수를 다스릴 제, 그 삼태기에 삽질하는 번거로움과 부착(斧鑿)의 날카로움과, 기술자의 교묘함과 역부의 많음이, 어찌 뫼를 헐고 골을 메워 만 리의 장성을 쌓음에 그치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천하의 밭이란 밭은 죄다 금을 그어 정전의 제도를 만들면서, 그 밭두둑과 도랑 사이에는 수레 몇 채가 달릴 수 있도록 마련하였은즉, 그 곧고 바름이 어찌 천 리의 한길을 닦음만 못하였으며, 성인이 일찍이 그 문인(門人)의 물음에 대답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셨으나, 이는 다만 말로만 하였을 뿐 몸소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들이 반드시 그 학문이 성인보다 나은 것이 아니로되 곧 이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어찌 중화(中華)의 민족만이 그러하리오. 이적(夷狄)의 출신으로서 중원의 임금이 된 자치고, 일찍이 도()를 물려받아서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의식(衣食)이 넉넉한 뒤에야 예절을 지킬 수 있다 하였은즉, 후세의 임금들 중에 그 나라를 튼튼히 하고 그 군사를 굳세게 하고자 한 자가, 차라리 각박하고 인정머리 없다는 이름을 무릅쓸지언정, 어찌 그 자신을 위해서 사리를 탐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또 그 심술의 위험미묘한 때를 논하여 본다든지, 혹은 그 사업을 공사(公私)의 사이에서 분간한다면, 저들에게 곧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 공리(功利)의 효과를 누림에 있어서는, 비록 그 방법이 이적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모아서 행하는 데 있어서는 역시 정일을 본받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이른바 재지와 역량이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다 함이 오늘날의 중국을 이룩한 것이며, 21 3천여 년 동안의 모든 제도를 이에서 가히 상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라 이름을 ()’이라 하고, 수도를 순천부(順天府)’라 하니, 천문으로 보면 기()() 두 별의 사이였고, 지리로 말한다면 우공(禹貢)에서 이른바 기주(冀州)의 터전으로서, 고양씨(高陽氏 오제(五帝)의 하나인 전욱(顓頊))는 유릉(幽陵)이라 하였고, 도당씨(陶唐氏 ())는 유도(幽都), ()는 유주(幽州), ()()은 기주(冀州), ()은 상곡(上谷)어양(漁陽)이라 하였으며, ()의 초기엔 연국(燕國)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나누어서 탁군(涿郡)이라 했고, 또 고쳐서 광양(廣陽)이라 하였으며, ()()에서는 범양(范陽)이라 하였고, ()는 남경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고쳐서 석진부(析津府)라 하였으며, ()은 연산부(燕山府)라 하였고, ()은 연경(燕京)이라 했다가 곧 중도(中都)라 고쳤으며, ()은 대도(大都)라 하였고, ()의 초년엔 북평부(北平府)라 하였다가, 태종 황제(太宗皇帝 청 태조의 8)가 이에 수도를 옮기고 순천부(順天府)라 고쳤더니, 이제 청()은 이내 이곳에 수도를 세웠다. 그 성 둘레는 40, 왼쪽에 창해(滄海)가 둘리고, 오른편에는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북으로 거용관(居庸關)을 베고, 남으로는 하수(河水)제수(濟水)가 옷깃처럼 되어 있다. 성문의 정남은 정양(正陽), 오른편은 숭문(崇文), 왼편은 선무(宣武), 동남은 제화(齊化), 동북은 조양(朝陽), 서남은 평택(平澤), 서북은 서직(西直), 북동은 덕승(德勝), 북서는 안정(安定)이고, 외성(外城)에 문이 일곱 있으며, 자금성(紫禁城 황제가 거처하는 궁성)에는 문이 셋 있고, 궁성(宮城) 17리인데 문이 넷이며, 그 전전(前殿)을 태화(太和)라 하여 오로지 한 사람만이 살고 있으니,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그 종족은 여진(女眞) 만주부(滿洲部), 그 위()는 천자(天子), 그 호()는 황제(皇帝)이고, 그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그가 자신을 일컬을 때는 ()’이라 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를 높여서 폐하(陛下)’라 하며, 말씀을 내면 ()’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이라 하며, 그 갓은 홍모(紅帽)이고, 그 옷은 마제수(馬蹄袖)이며, 그는 국통(國統)을 이은 지 벌써 네 대였고, 연호(年號)를 세워 건륭(乾隆)’이라 한다. 이 글을 쓴 자가 누구인가 하면 조선에서 온 박지원(朴趾源)이고, 쓴 때가 언젠가 하면 건륭 45년 가을 8월 초하루이다.

 

 

[D-001]2 30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2 49.

[D-002]노하(潞河) : 통주(通州)에서 천진(天津)까지 이르는 운하.

[D-003]월파정(月波亭) 상주 :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던 말인데, 황주(黃州) 월파정에 놀러 온 풍류적인 상주(喪主).

[D-004]마조(馬吊) : 투전 40장을 가지고 노는 중국의 놀음감.

[D-005]조주(朝珠) : 청의 제도에 5() 이상과 한림(翰林)중서(中書) 등이 가슴에 달게 된 1 8개의 구슬.

[D-006]회동관(會同館) :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 나중에는 사린관(四隣館)과 합쳐서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 하였다.

[D-007]만비(滿丕) : 청 강희 때의 외교관. 아라사와 조약을 맺을 때에도 참가하였다.

[D-008]21() : () 이전 21()의 소위 정사(正史) 21()라 하였다.

[D-009]유정(惟精)유일(惟一) : 서경(書經), “인심(人心)은 오직 정미고, 도심(道心)은 오직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 몇 구절에 동방 천고 성인의 정신이 표현되었다.

[D-010]하우씨(夏禹氏) : 9년 동안 치수 사업에 공적이 많아서 순()의 선양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D-011]정전(井田) 제도 : 중국 고대의 농촌 경리에 적용하던 일종의 토지 제도.

[D-012]관중씨(管仲氏) : 전국 제()의 정치가. 특히 경제에 밝았다. ()은 그의 자요, 이름은 이오(夷吾).

[D-013]몽염(蒙恬) : ()의 유명한 장수. 진 시황을 도와서 장성을 쌓아 흉노(匈奴)를 물리쳤다.

[D-014]도로를 …… 아니었으며 : 진 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에, 함곡관(函谷關)을 중심으로 하여 각처에 곧은 길을 냈다.

[D-015]상앙(商鞅) : 진의 정치가. 그는 법치(法治)를 주장하여 처음 법을 행할 때에, 나무 기둥을 남문에 세우고 그것을 북문까지 옮기면 상금을 준다 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었다. 마침내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서 부국 강병하였으나, 지나치게 가혹한 법을 만들었으므로 나중에는 실패하였다.

[D-016]육국(六國) : 전국 때의 진()을 제외한 초()()()()()().

[D-017]아방궁(阿房宮) : 중국 진 시황이 지은 궁전 이름. 그 뒤 항적(項籍)이 관중에 들어와서 이 궁을 불살랐으나,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D-018]소하(蕭何) : ()의 관리로서, 한 고제(漢高帝)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재상이 되었다.

[D-019]모르는 …… 꾸지람하였으니 : 사기(史記)에 나오는 한 고제와 소하의 고사.

[D-020]의식(衣食) …… 하였은즉 : 관이오(管夷吾) 관자(管子)에 나오는 구절.

[D-021]마제수(馬蹄袖) : 만인(滿人) 옷의 소매 모양을 형용하여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악묘기(東嶽廟記)

 

 

동악묘는 조양문 밖 1리에 있다. 그 건물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여태까지 보던 중 처음이다. 성경의 궁궐도 이에 비기면 어림없었다. 묘문(廟門)의 건너편에는 두 패루가 섰는데 파란 유리벽돌과 초록빛 유리벽돌로 쌓았다.

그 찬란하고 휘황함이 앞서 본 돌집을 능가한다. 이 사당은 원()의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연간에 비로소 세웠고, ()의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대에 더 넓혔다. 그 가운데에는 인성제(仁聖帝 동악태제(東嶽太帝)의 별칭)병령공(炳靈公 동악태제의 셋째 아들)사명군(司命君 사람의 목숨을 맡은 귀신)과 네 승상(丞相 태제를 모신 네 정승)의 소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원()의 소문관(昭文館) 태학사(太學士) 정봉대부(正奉大夫) 비서감경(秘書監卿) 유원(劉元 원의 저명한 조각가)이 만든 소상으로서, 유원은 그 만드는 교묘한 법이 천하에 짝이 없었다.

요즘 청의 강희 경진(1700) 3월에 불이 나서 전(殿)()와 함께 사당 가운데 있던 모든 소상이 다 불타 버리고, 다만 양편의 도원(道院)만 남아 있었다. 강희 황제는 특히 내탕금(內帑金 황제의 사용금)을 내리고, 아울러 내외의 대소 관원들에게 명하여 비용을 돕게 하고, 유친왕(裕親王)으로 하여금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비로소 이룩하자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고, 옹정 황제와 지금 황제 역시 내탕금을 내어 이를 수리하였다.

그 제일전(第一殿)에는 영소화육(靈昭化育)’이라 써 붙였는데, 동악태제가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었고, 모신 제신(諸神)은 왼편에 문(), 오른편에 무()가 늘어섰다.

() 앞에는 몇 섬들이 쇠항아리를 놓아서, 심지 네 개에 불을 댕겨 둔 채 철망(鐵網)을 둘렀다. 그리고 등불 앞에는 한 길이나 되는 쇠화로를 놓고 침향(沈香)을 태웠다. 그리하여 검은 등에 푸른 불꽃이 번뜩이고, 전자(篆字)처럼 얽힌 연기가 푸르며, 술을 드리운 휘장에는 쇠풍경이 댕그랑 울리는데, 전각은 침침해서 꿈속 같다. 그 제이전(第二殿)에는 여상(女像) 셋이 앉았는데, 역시 구슬로 꾸민 술을 드리웠고, 양편에서 모신 자도 모두 여선(女仙)들이다.

그 제삼전(第三殿)에는 무슨 신()을 본뜬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낭무(廊廡)에는 72() 36()을 벌여놓은 것이 기괴하여 천태만상이었다. () 위에 놓인 값진 모든 그릇들은 거의 송()() 시대의 관지(款識)가 많고, 뜰 가운데에는 큰 비석 1백여 개가 섰는데, 조맹부(趙孟頫)가 쓴 것이 많고, 또 그 아우 세연(世延)과 우집(虞集)이 쓴 것도 있었다. 동서의 제일항(第一行)에 선 비석은 모두 누런 기와로 덮고, 그 위에는 고루(鼓樓)를 설치했는데, 동쪽의 것은 별음(鼈音)’이라 하고, 서쪽의 것은 경음(鯨音)’이라 하였다.

 

 

[C-001]동악묘기(東嶽廟記) : 다른 본에는 모두 관내정사의 편말에 있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여기로 옮겼다.

[D-001]조맹부(趙孟頫) : 원의 저명한 서예가. 맹부는 이름이요, 자는 자앙(子昂).

[D-002]우집(虞集) : 원의 문학가. 집은 이름이요, 자는 백생(伯生).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일 무신(戊申)

 

 

개다.

간밤에 뇌성 벽력과 함께 내린 비를 겪고서, 아직 수리하지 못한 객관의 창호지가 떨어졌으므로, 새벽에 찬바람이 들어와서, 감기가 조금 들고 입맛을 잃었다.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모두들 모여드니, 이들은 예부(禮部)호부(戶部)의 낭중(郞中 낭관)과 광록시(光祿寺)의 관원이었다. 쌀과 팥 대여섯 수레와 돼지거위채소 등속이 바깥 뜰에 가득히 찼다. 그 부()의 관원이 교의를 나란히 하여 앉았는데, 아무도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다.

정사에게는 날마다 관()의 찬()으로 거위 한 마리, 닭 세 마리, 돼지고기 다섯 근, 생선 세 마리, 우유 한 병, 두부 세 근, 백면(白麪) 두 근, 황주(黃酒) 여섯 항아리, 엄채(醃菜 김치) 세 근, 다엽(茶葉) 넉 냥, 오이지 넉 냥, 소금 두 냥, 청장(淸醬) 여섯 냥, 감장(甘醬) 여덟 냥, () 열 냥, 향유(香油) 한 냥, 화초(花椒 산초) 한 돈, 등유(燈油) 세 병, 납초 석 자루, 내수유(奶酥油 우유로 만든 낙농 제품) 석 냥, 세분(細粉) 근 반, 생강 닷 냥, 마늘 열 뿌리, 빈과(蘋果 능금) 열다섯 개, 배 열다섯 개, 감 열다섯 개, 말린 대추 한 근, 포도 한 근, 사과 열다섯 개, 소주 한 병, 쌀 두 되, 나무 서른 근, 또 사흘마다 몽고양(蒙古羊) 한 마리씩을 준다.

그리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날마다 두 사람 어울러서 양() 한 마리, 거위 각기 한 마리, 닭 각기 한 마리, 생선 각기 한 마리, 우유 어울러서 한 병, 고기 어울러 세 근, 백면 각기 두 근, 두부 각기 두 근, 엄채 각기 세 근, 화초 각기 한 돈, 다엽 각기 한 냥, 소금 각기 한 냥, 청장 각기 여섯 냥, 감장 각기 여섯 냥, 초 각기 열 냥, 황주 각기 여섯 항아리, 오이지각기 넉 냥, 향유 각기 한 냥, 등유 각기 한 종지, 쌀 각기 두 되, 빈과 어울러 열다섯 개, 사과 어울러 열다섯 개, 배 어울러 열다섯 개, 포도 어울러 닷 근, 말린 대추 어울러 닷 근, 그 밖의 과실은 닷새 만에 한 번씩 준다. 부사에게는 날마다 나무 열일곱 근, 서장관에게는 열닷 근씩을 준다.

그리고 대통관(大通官) 3명과 압물관(押物官) 24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닭 한 마리, 고기 두 근, 백면 한 근, 엄채 한 근, 두부 한 근, 황주 두 항아리, 화초(花椒) 닷 푼(), 다엽 닷 돈, 청장 두 냥, 감장 넉 냥, 향유 너 돈, 등유 한 종지,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한 근씩을 주고, 또 득상(得賞) 종인(從人) 30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근 반, 백면 반 근, 엄채 두 냥, 소금 한 냥, 등유 어울러 여섯 종지, 황주 어울러 여섯 항아리,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고, 무상(無賞) 종인 2 21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반 근, 엄채 넉 냥, 초 두 냥,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었다.

 

 

[D-001]광록시(光祿寺) : 식량(食糧)과 찬품(饌品)의 제절을 맡은 관부.

[D-002]득상(得賞) 종인(從人) : 상을 탈 자격을 지닌 수행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일 기유(己酉)

 

 

개다.

해 뜬 뒤에 비로소 관문(館門)을 연다. 나는 곧 시대장복과 함께 관을 떠나 첨운패루(瞻雲牌樓) 밑까지 걸어와서 태평거 하나를 세내었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아까 주방(廚房)에서 하룻동안 쓸 것을 주기에, 시대로 하여금 돈으로 바꾸어서 차에 실으니, () 두 냥이 돈 2 2백 닢이었다. 시대는 오른편에, 장복은 뒤에 태우고는 빨리 달려서 선무문(宣武門)에 이르니, 그 제도가 조양문과 같다. 왼편은 상방(象房 코끼리를 기르는 곳)이요, 오른편은 천주당(天主堂)이다. 문으로 나와 오른편으로 굽어서 유리창(琉璃廠)에 들어간즉, 첫 거리에 오류거(五柳居)라는 세 글자의 간판이 붙었다. 이는 곧 도옥(屠鈺)의 책사이다. 지난해에 무관(懋官)들이 이 책사에서 책을 많이 샀다 해서 퍽 흥미 있게 오류거를 이야기하더니, 이제 이곳을 지나고 보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싶다. 그리고 무관이 나를 떠나보낼 때에 또 말하기를,

 

만일 당원항(唐鴛港) 낙우(樂宇) 을 찾으려거든, 먼저 선월루(先月樓)에 가서 그 남쪽 조그만 거리로 돌아들면 둘째 번 대문이 곧 당씨(唐氏)의 댁이랍니다.”

하였다. 곧 차를 몰아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이르러 우연히 육일루(六一樓)에 올랐다가 유황포(兪黃圃) 세기(世奇) 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할 제, 서문포(徐文圃) () 와 진립재(陳立齋) 정훈(庭訓) 등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담한 선비이기에 날을 골라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수레를 돌려 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길가에 금자로 선월루(先月樓)’라 쓴 것이 별안간 수레 앞에 눈부시게 보인다. 이 역시 책사이다. 곧 수레에서 내려 두 하인과 함께 당씨(唐氏)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치 익숙한 곳을 찾듯이 했다. 문 앞에 하인 셋이 나오더니,

 

대감께선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나가셨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어느 때쯤이나 돌아오실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묘시(卯時)에 나가셔서 유시(酉時)면 돌아오십니다.”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잠깐 외관(外館)에 올라 땀을 들이시지요.”

하기에 곧 따라가니, 옹졸한 학구(學究) 한 사람이 나와 맞이한다. 그의 성은 주()라고 기억되나 이름은 잊어버렸다. 앞서 듣건대, 원항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들 잘났다더니, 이제 두 아이가 방에서 나와 공손히 읍하는 것을 보니, 묻지 않아도 원항의 아들임이 틀림없기에 나는 그 두 아이의 나이를 물었더니, 맏이는 열셋, 다음은 열하나였다. 나는 곧,

 

형의 이름은 장우(張友), 아우의 이름은 장요(張瑤)가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둘이 함께,

 

예에, 그렇습니다. 어른께선 어찌 아시옵니까?”

한다. 나는,

 

너희들이 글 잘 읽는다 하여 이름이 해외(海外)에까지 들리기에.”

하였다. 조금 뒤에 그 집 하인이 파초잎 모양으로 생긴 흰 주석 쟁반을 받들고 나와서 더운 차 한 그릇, 빈과(蘋果) 세 개, 양매탕(楊梅湯) 한 그릇을 은근히 권한다. 그리고 하인이 그 집 늙은 마나님의 말씀을 전갈하되,

 

지난해 조선 어른 두 분이 가끔 제 집에 놀러 오셨는데, 지금도 평안하신지요. 만일 청심환 가지고 오신 게 있으시면 한 두 개 주십시오.”

한다. 나는,

 

마침 지니고 온 것이 없사오니, 뒷날 다시 올 때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답을 전했다. 앞서 듣기에, 당씨의 늙은 마나님은 늘 동락산방(東絡山房)에 있으며, 나이가 여든이 넘어도 근력이 오히려 좋다더니, 이제 하인이 멀리 손으로 가리키며,

 

노마나님이 방금 중문에 나오셔서, 귀국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경하시고 계십니다.”

한다. 나는 바로 보기가 겸연쩍어서 못 본 체하고는, 붉은 종이로 만든 중머리 부채 두 자루와 여러 가지 빛깔의 시전지(詩箋紙)를 내어 장우와 장요에게 나눠 주고, 열흘 안으로 다시 오리라 약속하고 곧 일어나 문을 나섰다. 돌아보니 마나님이 오히려 중문에 섰고 아환(丫鬟) 둘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학발(鶴髮)이 그 머리를 덮었으나 몸이 웅건해 보이고, 아직도 화장과 보물 꾸미개를 폐하지 않았다. 두 하인의 말이,

 

아까 당씨의 여러 하인이 우리들을 좌우로 에워싸서 뜰 가운데에 세워 놓고, 늙은 마나님이 우리 옷을 벗겨서 그 제도를 보겠다 하므로, 소인들이 황공하여 감히 바로 치어다보지 못하고, ‘날이 더워서 입은 것이 단지 홑적삼뿐입니다.’ 하니, 그는 돌려 세워 보기도 하고 모로 세워 보기도 하고는, 다시 여러 하인을 시켜 깃고대도련을 들추어보고, 술과 먹을 것을 내어다 먹입디다. 소인들의 의복이 이렇게 남루해서 부끄러워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돌아오는 길에 회자관(回子館 이슬람 교당)에 들러 구경하였다.

 

 

[D-001]천주당(天主堂) : 당시 북경에는 네 천주당이 있었는데, 연암이 찾아간 곳은 곧 선무문 안 서천주당(西天主堂)이었다.

[D-002]유리창(琉璃廠) : 북경성 남부에 있는 거리. 본래는 해왕촌(海王村)이었으나, 유리가마가 있으므로 이름지었다. 명 때부터 서화와 골동의 저자로 유명하였다.

[D-003]오류거(五柳居) : 유리창의 서문 가까이 있는 서사(書肆). 주인 도정상(陶正祥)은 서지학(書誌學)에 밝아서,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에 강남(江南)의 희서(稀書)를 많이 바쳤다.

[D-004]도옥(屠鈺) : 이문조(李文藻) 유리창서사기(琉璃廠書肆記)에는, 오류거의 주인이 도씨(陶氏)’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4일 경술(庚戌)

 

 

개다. 더위가 심하여 삼복(三伏)이나 다름 없었다.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와서 유리창을 지나면서,

 

이 창()이 모두 몇 칸이나 되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어떤 이가,

 

모두 27만 칸이나 된답니다.”

하고 답한다. 대개 정양문에서부터 가로 뻗어 선무문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거리가 모두들 유리창이었고, 국내와 국외의 모든 보화가 이에 쌓였다.

내 그제야 한 누() 위에 올라서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진실로 저를 아는 사람 하나를 만났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이다. 아아, 인정은 대체 제 몸을 알고자 하되 이를 알지 못하면, 때로는 커다란 바보나 또는 미치광이처럼 되어서, 저 아닌 남이 되어 저를 보아야만 저도 비로소 다른 물건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 곳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이 방법을 지녔으므로 세상을 버리고도 아무런 고민이 없으며, 외로이 서 있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운 뜻을 품지 않는 이라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담(老耼 노자(老子))도 역시, ‘나를 알아 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이다.’ 하였으니, 이렇듯이 남이 나를 몰라 보았으면 하여, 혹은 그의 의복을 바꾸기도 하려니와, 혹은 그 얼굴을 못 알아보게 하고, 혹은 그 성명을 갈아 버린다. 이는 곧 성()()과 현()() 들이 세상을 한 개의 노리개로 보아서, 비록 천자의 자리를 준다 하더라도 그의 즐거움과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러한 때에 천하에 혹시 한 사람만이라도 저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의 자취는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에 있어서는, 천하에 단지 한 사람만이라도 그를 알아 주는 이가 없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 미복(微服)으로 강구(康衢)에서 놀았으나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늙은이가 나타났고, 석가(釋迦)가 얼굴을 달리 하였으나 아난(阿難 석가의 으뜸가는 제자)이 그를 알았고, 태백(太伯)은 몸에 그림을 떠서 놓아 남만(南蠻)으로 도피하였으나 중옹(仲雍)이 뒤를 따랐고, 예양(豫讓)은 몸에 칠을 하였으나 그 벗이 알았고, 삼려대부(三閭大夫)는 얼굴이 파리했을 때에 어부(漁夫)가 알았고, 치이자(鴟夷子 범려(范蠡)의 호)가 오호(五湖)에 뜰 때 서시(西施)가 따랐고, 장록(張祿)은 객관에서 가만히 걸을 때 수가(須賈)를 만났고, 장자방(張子房)은 이교(圯橋 다리 이름)에서 조용히 걸을 때 황석공(黃石公)을 만났다. 이제 내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섰으니, 그 옷과 갓은 천하에 모르는 바이요,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에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潘南 연암의 관향)의 박()은 천하에 일찍이 듣지 못하던 성일지라도, 내 이에서 성()도 되고 불()도 되고 현()도 되고 호()도 되어, 그 미침이 기자(箕子)나 접여(接輿)와 같기로, 장차 그 누가 와서 이 천하의 지락(至樂)을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묻기를, ‘공자께서 송()을 지나갈 때에 무슨 관()을 쓰셨을까.’ 하기에, 나는, ‘아마 우물과 창고와 평상과 거문고가 벌여 있고, 그는 앞에 있었던 것이 별안간 뒤에 있었을 것이며, 또 물고기 가죽이나 표범 무늬처럼 별의별 변덕이 많았을 테니, 누가 그 참된 모습을 알 수 있으리오.’ 하고는 껄껄 웃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기를, ‘선생님께서 계시니 회()가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공자가 천하의 지기(知己)를 논한다면 오직 안자(顔子 안회를 높여 부르는 말) 한 사람이 있었을 따름일 것이다.”

 

[D-001]격양가(擊壤歌) : 요가 미복으로 큰 거리를 미행하였을 때에, 격양하던 농부가 찬송의 노래를 불렀다.

[D-002]태백(太伯) : ()의 왕자로서, 그 자리를 아우에게 양보하여 남만으로 도피하였다.

[D-003]중옹(仲雍) : 태백의 아우, 곧 우중(虞仲). 태백이 자기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함을 보고 자기도 뒤를 따랐다.

[D-004]예양(豫讓) : 전국 때 지백(智伯)의 신하. 지백이 죽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몸에 옻칠을 하고 입에 숯을 머금어서 문둥이와 벙어리로 행세하였을 때, 그의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벗 중에는 아는 이가 있었다.

[D-005]삼려대부(三閭大夫) : 전국 초()의 정치가이며, 문학가 굴평(屈平). 삼려대부는 벼슬. 자는 원(), 또는 영균(靈均). 그가 정계에서 추방된 뒤에 어부사(漁父辭)를 지었는데, 그 중에 어부와 문답한 말이 있다.

[D-006]장록(張祿) : 전국 때 진()의 정치가 범저(范雎)의 변성명.

[D-007]수가(須賈) : 전국 때 위()의 고관. 일찍이 범저를 박대했는데, ()에 사신갔을 때에 범저를 만나서 그의 궁곤을 측은히 여겨 선물을 주었으나, 실은 그때 범저는 이미 진의 승상이 되었는데 궁곤을 가장하여 수가를 속였다.

[D-008]장자방(張子房) …… 만났다 : 자방은 장량(張良)의 자. 황석공은 장량에게 비서(秘書)를 전해 준 도사. 장량이 창해(滄海)의 역사(力士)로 하여금 진시황을 저격(狙擊)하게 하고는 조용히 이 다리에서 걸을 때, 황석공이 비서(秘書)를 주었다.

[D-009]그 미침이 …… 같기로 : 세상에 뜻을 잃고 미친 척하고 산 사람. () 말의 기자는 거짓 미쳐서 종이 되었고, 접여는 전국 초()의 광사(狂士) 육통(陸通).

[D-010]공자께서 ……  : 공자가 일찍이 송의 광() 땅 사람에게 습격을 당해서 미복으로 지나갔다.

[D-011]우물과 …… 거문고 : 맹자(孟子)에 나오는 순()과 상()의 고사. 여기서는, 이 네 가지는 학자의 일상생활에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D-012]그는 …… 것이며 :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공자의 학문이 변화 무궁하여 포착할 수 없음을 찬송한 말로, 논어에 실렸다.

[D-013]물고기 …… 테니 : 역경 군자는 표변(豹變)한다.” 하였다.

[D-014]선생님께서 …… 있겠습니까 : 이 한 구절은, 공자가 미복으로 송을 지나치다가 안회가 뒤처졌던 것을 죽은 줄만 알았다고 하였을 때에 안회가 답한 말인데, 논어에 실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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