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삼당파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의 시를 일별하고 그의 제자인 허균이 쓴 <손곡산인전>을 읽어본다.

손곡蓀谷 이달李達

이달(李達) /p.315:

호는 蓀谷, 자는 益之. 박순의 문인으로 어머니가 기생인 미천한 출신. 그의 제자 許筠(1569-1618,본관 陽川)의 <蓀谷山人傳>(p.475)이 있다. 허균 남매에게 시를 가르침.

*許 曄─ 筬⋅封(荷谷)⋅楚姬(蘭雪軒,1563-1589)⋅筠(蛟山,1569-1618)

*封 이하 삼남매는 江陵 金氏 소생.

서학書鶴〉/315 *자화상적인 시

獨 鶴 望 遙 空 먼 하늘 바라보던 외로운 학 한 마리

夜 寒 擧 一 足 쌀쌀한 밤에 다리 하나 들고 서다.

西 風 苦 竹 叢 가을 바람에 대숲도 괴로운데

滿 身 秋 露 滴 온 몸이 가을 이슬에 젖었네.

〈무장도중茂長道中〉

六月長沙路 유월에 장사의 길을 가노라니

歸人觸暑行 길가는 이들도 더위 속을 간다.

孤村逢暮雨 외진 마을에서 저녁비 만나

獨坐聽流鶯 홀로 앉아 꾀고리 소리 듣는다.

在世長爲客 한 세상 길이 나그네 되어

行年已半生 내 나이 하마 오십일세.

何時竹林下 어느 때에 대숲 아래

棲息掩柴荊 사립문 닫고 살려나.

*掩(엄);가리다,닫다. 柴(시);섶,왜소한 잡목. 荊(형);굴싸리,광대사리,가시나무,매.

허균/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실기(實記)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o-seol/son-kok-san-bu-in-jeon.htm

조선 중기에 허균 ( 許筠 )이 지은 한문소설. ≪ 성소부부고 惺所覆 螺 藁 ≫ 권8 전(傳)에 들어 있다. ‘ 손곡산인 ’ 은 곧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 ( 李達 )이 강원도 원주 손곡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손곡산인전 〉 주인공 이달은 그의 어머니가 미천하였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시재(詩才)가 뛰어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시풍이 송시(宋詩)에서 당시(唐詩)로 들어가기까지 오랜 기간 수련과정이 필요했다. 이달의 성격은 매우 특이하였다. 그는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도전적인 언행을 자행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 그를 증오하거나 질투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시에 대한 재주가 뛰어나서 그의 불손한 행동을 감싸고도 남았다. 〈 손곡산인전 〉 의 구성은 이달의 생애와 외사씨(外史氏)의 평으로 되어 있다. 외사씨의 평은 곧 작자 자신의 목소리이다. 평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하는 전문학(傳文學)의 전통적 구성방법을 그대로 빌려쓰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이 너무 짧다.

그래서 사건전개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작자의 주인공에 대한 관찰과 묘사의 특이함이 특기할만하다. 이 점은 작자가 주인공의 시제자(詩弟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 손곡산인전 〉 의 주제는 주인공의 불우한 일생을 통하여 당시의 모순된 사회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작자는 적서차별에 의하여 능력은 있으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불우한 일생을 작품으로 형상화시켜 모순된 사회를 비판하려고 하였고, 불우한 한 시인의 특이한 일생을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 손곡산인전 〉 은 작자 허균의 사회개혁사상의 문학적 반영하였다. 허균의 나머지 4편의 전과 함께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모든 계열의 한문단편 형성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참고문헌 ≫

惺所覆부藁, 李朝漢文小說選(李家源, 民衆書館, 1971),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許筠의 漢文小說硏究(金武憲, 江陵敎育大學論文集 5, 1973), 許筠의 傳에 대한 考究(姜東燁, 韓國漢文學硏究 2, 1977), 許筠的思想及其文學(李家源, 東方學志 25, 198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blog.naver.com/osj1952/100008931035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실기(實記)

-허균(許筠)

蓀谷山人李達字益之(손곡산인리달자익지)

: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의 자는 익지(益之)로
雙梅堂李詹之後(쌍매당리첨지후) : 쌍매당(雙梅堂) 이첨 의 후손이다.
其母賤(기모천) : 그는 어머니가 천인(賤人)이어서
不能用於世(불능용어세) :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居于原州蓀谷(거우원주손곡) : 원주(原州)의 손곡(蓀谷)에 살면서
以自號也(이자호야) :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

達少時(달소시) : 달(達)은 젊은 시절에
於書無所不讀(어서무소불독) :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綴文甚富(철문심부) :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爲漢吏學官(위한리학관) :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有不合(유불합) :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棄去之(기거지) :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從崔孤竹慶昌(종최고죽경창) : 고죽 최경창과
白玉峯光勳遊(백옥봉광훈유) : 옥봉 백광훈을 따라 노닐며

相得懽甚(상득환심) :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結詩社(결시사) :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達方法蘇長公(달방법소장공) : 달은 한창 소장공을 본받아,
得其髓(득기수) : 그 요체를 터득하여
一操筆輒寫數百篇(일조필첩사수백편)

: 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 냈으나
皆穠贍可詠(개농섬가영) :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一日思菴相謂達曰(일일사암상위달왈)

: 하루는 사암[박순] 정승이 달에게 말해주기를
詩道當以爲唐爲正(시도당이위당위정)

: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되네.
子瞻雖豪放(자첨수호방) : 자첨[소식]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已落第二義也(이락제이의야) :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하였다.
遂抽架上太白樂府歌吟(수추가상태백악부가음)

: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ㆍ가음시(歌吟詩),
王孟近體以示之(왕맹근체이시지)

: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達矍然知正法之在是(달확연지정법지재시)

: 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遂盡捐故學(수진연고학) :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歸舊所隱蓀谷之莊(귀구소은손곡지장)

: 예전에 숨어 살던 손곡(蓀谷)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取文選太白及盛唐十二家(취문선태백급성당십이가)

: 《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
劉隨州(류수주) : 유 수주
韋左史曁伯謙唐音(위좌사기백겸당음)

: 위 좌사와 백겸의《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伏而誦之(복이송지) : 문을 닫고 외었다.


夜以繼晷(야이계귀) : 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膝不離坐席(슬불리좌석) :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凡五年(범오년) :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悅然若有悟(열연약유오) : 어렴풋이 깨우쳐짐이 있었다.
試發之詩(시발지시) : 시험삼아 시를 지었더니
則語甚淸切(칙어심청절) :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一洗舊日熊(일세구일웅) :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어졌었다.

卽倣諸家體而作長短篇及律絶句(즉방제가체이작장단편급률절구)

: 그리하여 당 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長篇)ㆍ단편(短篇) 및 율시(律詩)ㆍ절구(絶句)를 지어냈다.
鍛字聲揣律摩有不當於度(단자성췌률마유불당어도)

: 글자와 구절을 단련(鍛鍊)하고성음(聲音)과 운율(韻律)을 췌마(揣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으면
則月竄而歲改之(칙월찬이세개지)

: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凡著十餘篇(범저십여편) :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乃出而詠之諸公間(내출이영지제공간)

: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諸公嗟異之(제공차이지) : 모두 감탄해 마지 않으며 깜짝 놀랐었다.
崔白皆以爲不可及(최백개이위불가급)

: 최고죽(崔孤竹)ㆍ백옥봉(白玉峯)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고,
而霽峯荷谷一代名爲詩者(이제봉하곡일대명위시자)

: 제봉․ 하곡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皆推以爲盛唐(개추이위성당)

: 모두 성당(盛唐) 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 세웠다.

其詩淸新雅麗(기시청신아려) :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高者出入王孟高岑(고자출입왕맹고잠)

: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버금하고,
而下不失劉錢之韻(이하불실류전지운)

: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自羅麗以下(자라려이하) :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래로
爲唐詩者皆莫及焉(위당시자개막급언)

: 당시(唐詩)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寔思菴鼓舞之力(식사암고무지력)

: 정말로 사암(思菴)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而其陳涉之啓漢高乎(이기진섭지계한고호)

: 그것은 진섭이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어 준 것이라고나 할까.

達以是名動東國(달이시명동동국)

: 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貴之而捨其爲人(귀지이사기위인)

: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稱譽不替者(칭예불체자) : 칭찬해 마지 않는 분들로
詞林三四鉅公也(사림삼사거공야)

: 시문(詩文)에 뛰어난 3-4명의 거장(巨匠)들이 있었다.
而俗人之憎嫉者(이속인지증질자)

: 그러나 속인(俗人)들 중에는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比肩林立(비견림립) : 줄줄이 이어 있어,
屢加以汚衊(루가이오멸) :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덮어씌우며
寘之刑網(치지형망) :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卒莫能殺而奪其名也(졸막능살이탈기명야)

: 끝내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達貌不雅(달모불아) : 달은 용모가 아담하지 못하고
性且蕩不檢(성차탕불검) : 성품도 호탕하여 검속(檢束)하지 않았다.
又習俗禮(우습속례) : 더구나 시속(時俗)의 예법에 익숙하지도 못하여
以此忤於時(이차오어시) : 이런 것들 때문에 시류(時流)에 거슬렸었다.

而善談今古(이선담금고) : 그는 고금(古今)의 이야기를 잘했으며,
及山水佳致(급산수가치) :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喜酒(희주) : 술을 즐겨 마셨다.


能晉人書(희주능진인서) : 진(晉) 나라 사람에 가깝도록 글씨도 잘 썼다.
其中空洞無封畛(기중공동무봉진) : 그의 마음은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不事產業(불사산업) : 먹고 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서
人或以此愛之(인혹이차애지)

: 사람들 중에는 이 때문에 더 그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平生無着身地(평생무착신지) :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流離乞食於四方(류리걸식어사방)

: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며 걸식(乞食)까지 했으니,
人多賤之(인다천지) :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窮厄以老(궁액이로) : 그렇지만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갔음은,
信乎坐其詩也(신호좌기시야)

: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然其身困而不朽者存(연기신곤이불후자존)

: 그러나 그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不朽)의 명시를 남겼으니
豈肯以一時富貴(기긍이일시부귀) : 한 때의 부귀로
易此名也(역차명야) :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所著殆失盡(소저태실진) :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인데
不佞粹爲四卷以傳云(불녕수위사권이전운)

: 내가 가려서 4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하였다.

外史氏曰(외사씨왈) :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朱太史之蕃(주태사지번) : 태사(太史) 번은
嘗觀達詩(상관달시) : 일찍이 달의 시를 보았다.
讀至漫浪舞歌(독지만랑무가) : 만랑무가(漫浪舞歌)라는 시를 읽고서는
擊節嗟嘗曰(격절차상왈) : 격절차상(擊節嗟賞)하면서 이르기를
斯作去太白(사작거태백) : "이 작품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에서
亦何遠乎(역하원호) : 또한 어찌 멀리 있겠는가."했으며,
權石洲韠見其斑竹怨曰(권석주필견기반죽원왈)

: 석주(石洲) 권필도 달의 반죽원(斑竹怨)이라는 시를 보고서,
置之靑蓮集中(치지청련집중) : "청련(李太白)의 시집 속에 넣어도,
具眼者不易辨也(구안자불역변야)

: 안목(眼目) 갖춘 사람일 망정 판별하기 쉽지 않으리라."했었다.
此二人者(차이인자) : 이 두 사람이
豈妄言者耶(기망언자야) : 어찌 망언(妄言)을 할 사람이겠는가.
噫達之詩(희달지시) : 슬프다, 달의 시야말로
信奇矣哉(신기의재) : 진실로 기특했었다.

[계단식 농경지]



[주] 사변적인 宋詩를 지양하고 서정시의 본령을 회복하고자 한 세 사람의 당시 지향의 시인을 한국한문학사에서는 三唐派詩人이라 한다.

三唐派詩人

-玉峯 백광훈,孤竹 최경창, 蓀谷 이달

조선 전기에 사대부 문학이 난숙하고 세련된 경지에 들어서자 사변적이고 기교적인 송시에 밀착되었다. 그 결과 시는 자연스러운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수용하지 못하는 폐단을 낳았다. 朴淳(1523-1589)[p.320]이 당시에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며 삼당시인에 이르러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朴淳은 宋詩風을 버리고 唐詩風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삼당파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관인문학이 宋詩의 풍조를 따라 시를 모호하고 까다롭게 만드는 기교 연마에 지나치게 몰두한 것을 비판하고, 자연스러운 생활 감정과 순탄한 표현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당파시인들은 훈구파나 사림파의 규범을 위한 문학이나 方外人의 반발을 토로하고 초탈을 시도하는 문학과 달리 작품창작을 자신들의 임무로 알고 경험을 표현하는 문학을 이룩하여 문학을 일상적인 정감의 차원으로 자리잡게 했다.

崔 慶 昌(1539-1583)/p.325: 호는 孤竹, 자는 嘉運. 박순 門人. 본관은 해주. 전라도 영암 출생. 조선 중기 선조 때 낭만적 시풍의 시인으로 문과급제 후 외직을 전전하며 청백리로 뽑힘. 사랑의 정감과 하층민의 생활에 특히 관심을 갖고 시를 짓는 데서 가장 큰 보람을 찾음.

<銅雀妓詞> 양반집 소년과 기생과의 사랑.

<李少婦詞> 이별 당한 아낙네가 태아와 함께 죽음을 선택함.

∘詠史詩 /314

古郡無城郭 옛 고을이라 성곽은 무너지고

山齋有樹林 산 속 재실엔 수풀이 우거졌구나

蕭條人吏散 쓸쓸히 인걸은 간 데 없고

隔水搗寒砧 개울 건너 다듬이질 소리 더욱 추워라.

吏(리);벼슬아치,다스리다,아전. 搗(도);찧다,다듬이질하다. 砧(침);다듬이돌


〈雨雹〉 우박/p.315.

蕭條如經亂 쓸쓸하기가 난리를 격은 듯

山谷多空村 산골엔 빈 집도 많아라.

老弱服耒耕 노약자들 쟁기질하니 *耒(뢰);쟁기,따비.

辛苦良難言 그 쓰라림 참으로 말하기 어렵구나.

纔喜春苗盛 봄철 싹틀 땐 하마나 하고 기뻐했는데

夏潦又渾渾 여름 장마가 또 퍼붓는구나. *潦(료);큰 비,적시다,장마.

凉吹乾枝葉 가을 바람 불어와 가지와 잎이 마르면

螟食盡節根 멸구가 마디를다 갉아 먹는구나. *螟마디충 명

豈知凋悴餘 어찌 시들고 야윈 것이 남아나리? *凋이울 조,悴파리할 췌

迄此災逾繁 이런 재앙이 더욱 심해가는 판에 *迄이를 흘,逾넘을 유

何以供賦稅 어찌 부세(賦稅)를 바치고서

敢望具饔湌 끼니 때우기를 감히 바라리오? [饔아침밥 옹,湌=餐먹을 찬]

四隣絶昏煙 사방 이웃집들 저녁 연기 끊기고

但聞哭聲喧 다만 아이들 울음소리 시끄럽구나.

[계림]

[주] 2000년, 홍랑의 연인이었던 문인 최경창(崔慶昌․1539~1583)이 홍랑과의 인연과 시조 작성 당시 정황을 밝힌 육필 원고, 홍랑을 다시 만났다가 헤어질 때 그에게 써준 한시 2수, 근대 들어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1891~1968)가 1936년 이 자료들을 보고 고증 평가해서 쓴 발문 등이 일괄 공개됐다.


*참고자료(기사 2건)

[조선중엽] 명기 홍랑의 시조 "묏버들" 원본 첫공개/조선일보2000.11.13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011/200011130492.html

400년만에 드러난 '사대부와 기생의 비련'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011/200011130226.html

원본 사진 스캔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3/3-묏버들가려.htm


기녀 홍랑은 1573년 가을, 함경도 경성에 북평사로 온 최경창을 만나 군막에서 겨울을 함께 보낸다. 이듬해 봄 서울로 부임하는 최경창을 쌍성(함경도 영흥)에서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에 이르렀을 즈음, 때마침 날도 저문데 비마저 뿌리고 있었다. 이때 지은 시를 그는 서울의 연인에게 보내주었다.


翻方曲

折楊柳寄與千里人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爲我試向庭前種 자시는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須知一夜新生葉 밤비예 새 닙 곳 나거든

憔悴愁眉是妾身 나린가도 너기쇼셔


그리고 소식이 끊긴 채 2년 남짓. 최경창이 병을 얻어 몇달 간 누워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홍랑은 그날로 상경 길에 올라 7일을 밤낮으로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는 양계의 금(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제도)이 시행되고, 국상(명종 비 인순왕후)마저 겹친 때였다.


사람들이 이를 구실로 두 사람 사이를 헐뜯은 탓에 최경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로 홍랑을 떠나보내며 최경창은 󰡐송별󰡑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7언 절구)를 지어 주었다.


贈別 *원본 送別 [삼당집,p.171.]

玉頰雙啼出鳳城 고운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나설 적에

曉鶯千囀爲離情 새벽 꾀꼬리가 이별의 슬픔 울어주네

羅衫寶馬汀關外 비단옷에 천리마로 나루 건너니

草色迢迢送獨行 풀잎은 아득하니 날 떠나 보내누나

쌍성(함경도 영흥)에서 작별.

相看脉脈贈幽蘭 말없이 마주 보며 유란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只今雲雨暗靑山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


2년 전 이별할 때 불렀던 시조를 다시 부르지 말라는 당부와 홍랑과의 애타는 이별을 노래했다. 이렇게 헤어진 홍랑은 행여나 오시려나, 소식이마나 있을까 하는 애타는 기다림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이별한 지 3년 되던 해에 최경창이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홍랑은 그 즉시 길을 떠나 7일 밤낮을 달려 한양에 올라왔다. 당시는 양계(兩界,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한 데다, 명종(明宗)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승하한 때로 국상 중이었다. 이런 비상시에 관원이 기생과 놀았다고 하여, 이들의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고죽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결국 이듬해 여름에 홍랑은 강제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죽은 자신의 면직보다는 홍랑과의 이별이 더 가슴 아팠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고의(古意)>

-崔慶昌


덜거럭덜거럭 쌍 수레의 바퀴들은,

하루에도 천만 번씩 구른다지오.

마음은 같건만 수레는 같이 못 타,

이별한 후 세월은 많이도 변했구려.

수레바퀴는 그래도 자취를 남기지만,

그리워 그리워해도 보이진 않네.


有贈(유증)

-崔慶昌

烟雨空濛提柳垂 行舟欲發故遲遲

(연우공몽제유수), (행주욕발고지지)

莫把離情比江水 流波一去沒回期

(막파이정비강수), (유파일거몰회기)

뽀안 안개비 속에 버들은 늘어지고,

가는 배는 떠나려고 일부러 느릿느릿.

이별의 정을랑 강물에 비기지 마오,

강물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못 오는 걸.


이렇게 최경창이 써 준 이별의 아픔에 애간장만 태우는 홍랑의 발걸음에는 눈물과 두이눔만 쌓일 뿐이었다. 피천득 선생의 말마따나 “그리워 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 는 것이 인연의 끄나풀이다.


고죽은 그 뒤 벼슬길이 평탄하지 않아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다가 43세 되던 해에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제수되어 다시 홍랑과 재회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승진을 문제 삼은 조정에서 다시 성균관직강으로 벼슬명을 고쳐 제수받고 돌아오던 도중 종성객관에서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고죽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지속될 수 없었으며, 그때 차라리 재회하지 않았다면 마음이나마 덜 상처받고 그리움 속에서 늙어갔을지모를 일이다.

아래의 <홍랑을 사랑한 최경창>에 의하면 최경창 사후 홍랑은 파주로 달려와 시묘살이를 했고, 임란 때는 최경창의 시고 (詩稿)를 짊어지고 다녀 온전히 보존한 공적이 인정되어 근년 에 고죽의 후손들이 고죽의 묘를 영태리로부터 다율리의 홍랑 묘 곁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목과 달리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고죽을 사랑한 홍랑' 얘기로 후세 호사가들의 입심을 돋운다.

임희숙/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http://blog.daum.net/shs4912/15869453

홍랑을 사랑한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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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그리워해도 보이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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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블레이크 없는 임제의 거침없는 사랑

*임제 [林悌, 1549~1587]

본관 나주. 자 자순(子順). 호 백호(白湖)·겸재(謙齋). 39세 사망.

저서에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이 있다.


<황진이 추도시로 파직당하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난이

잔(盞) 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35세 때 평안도사(종6품)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지금의 개성)의황진이 묘에 들러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을 올리고 제를 지내며 위의 추도시를 읊었다하여, 부임지에 가 보니 조정으로부터 파직통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청초(靑草)', '홍안(紅顔)', '백골(白骨)'의 색채 대비가 돋보인다.


<한우와의 철부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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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세상도, 인생도 뜬 구름 같다며 뜬 구름 같이 한 세상을 살며 뜨거운 가슴의 여인 한우가 붙잡는 옷소매를 뿌리친 백호 임제 선생.

불같이 뜨거운 사랑과 일편단심으로 풀 섶의 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한 순간의 사랑을 간직한 채 님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 일생을 마친 한우.


이들이 화답했던 유명한 시조 중 임제의 <한우가>부터 소개한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당대의 풍류남아인 백호 임제(林悌)가 길을 나며 북쪽하늘이 맑음은 곧 날씨가 좋을 거라 예측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 수 밖에 없다는 말로 측은지심을 유발시키는 희극이 가볍지만은 않다.

기생 이름인 한우(寒雨)의 순수한 우리말은 곧 ‘찬비’가 되며,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게 되었다는 임제의 재치에 한우는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여 잘까 하여라


찬비 맞았으니 마땅히 언 몸을 녹여 자야지요, 하고 임제의 꽁꽁 언 손을 자기의 고운 손으로 감싸 쥐고 뜨거운 가슴에 묻게 하는 기생 한우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우리의 숨결을 일 순 멈추게 한다.


비록 이름은 찬비이지만 실제로는 뜨거운 가슴을 지녔기에 아무리 꽁꽁 언 몸이라도 포근히 녹일 수 있다는 기생 한우의 풍류와 사랑은 그 뜨거움 속에 맴도는 그 절절함과 아련함의 정성에 우리를 눈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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