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幷序

*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한다.

(본문 중에서)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계곡 장유 선생의 작품이다.

<동사열전> '30.청허존자'편에는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이 비명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선생집 제13권

비명(碑銘)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淸虛堂大師碑銘 幷序

청허당대사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賜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幷序

유명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병서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로 나의 집을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려조(麗朝,고려)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 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해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촉(咐囑)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는지를 내가 장차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 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 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던 것이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그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 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未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

[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  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임)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唯政)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그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諸佛之心

제불지심 부처의 심인(심인)

祖師傳之 

조사전지 조사가 전하였고

祖師之傳

조사지전 조사의 의발(衣鉢)

淸虛延之

청허연지 청허가 받들었네

淸虛之學 

청허지학 청허의 경지

得乎天全

득호천전,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一絲不罣

일사불괘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如魚在淵

여어재연 연못 속의 물고기라

半偈徹聞

반게철문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嘿契聖心

묵계성심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宸翰寵賁

신한총분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光動叢林

광동총림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遘難奮義

구난분의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贊我中興

찬아중흥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錫號國一

석호국일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莫之與京

막지여경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緣盡而逝

연진이서,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殺活自由

살활자유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隱見無累

은견무루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世出世間

세출세간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兩盡能事

량진능사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緣盡而逝

연진이서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譬彼薪火

비피신화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茫茫三界

망망삼계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誰渠誰我 

수거수아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幻化雖滅 

환화수멸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非幻自如

비환자여 곡두 아닌 당체(당체)는 원래가 여여(여여)한 법

 名山石龕

명산석감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永閟玄珠 

영비현주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睠玆靈區

권자령구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實惟覺場 

실유각장 실로 깨달음의 도량(도장)이라 할 만한데

鑱珉紀蹟 

참민기적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昭眎無疆 

소시무강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이정구 - 서산대사비명 병서, 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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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 - 서산대사비명 병서, 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월사 이정구 선생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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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지서 금천의 서쪽

薩水之濱 

살수지빈 살수의 물가에

淑氣亭毒 

숙기정독 맑은 기운이 모여

乃降眞人 

내항진인 이에 진인이 탄생했어라

屳婆抱送 

선파포송 신선 노파가 안아 보냈고

釋老提携 

석로제휴 불가 노인이 손을 잡아 인도했지

天開寶光 

천개보광 하늘은 보광을 열었고

帝借金鎞 

제차금비 상제는 금비를 주었어라

靈符妙契 

령부묘계 신비한 꿈의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수골초범 준수한 골상이 범상치 않았으니

蚌珠出海 

방주출해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龍鏡發函

룡경발함 용경이 상자에서 나온 듯하여라

失怙無依 

실호무의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부급 천리 먼 한양으로 공부하러 가서

淹貫諸家 

엄관제가 제자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卓然自立 

탁연자립 학문을 쌓아 우뚝 자립하였지

乃超覺路

내초각로 그러다 불교의 길로 들어서더니

遂登法席

수등법석 마침내 스승으로 법석에 오르니

祖月重輝 

조월중휘 조사의 달빛이 다시금 비침에

群昏一廓

군혼일곽 중생의 어리석음이 한바탕 걷혔지

餘事詩聲 

여사시성 도 닦는 여가에 지은 시의 명성이

上徹楓宸 

상철풍신 위로 대궐에 계신 임금께 들렸으니

殊恩異渥 

수은손악, 그 남달리 우악한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몸은 비록 암혈에 묻혀 살아도

忠不忘君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였네

遇難一呼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려여운 의병의 무리 구름처럼 모였지

協助天戈 

협조천과 이에 중국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빙장령우 부처의 영험에 의지하였나니

驅除腥穢 

구제성예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복아환우 우리의 강토에 행복을 주었어라

出而濟世 

출이제세 나가서 세상을 구제함에는

名動華夷 

명동화이 그 명성이 화이에 진동하였고

入而修定 

입이수정 들어와서 선정(선정)을 닦음에는

法闡宗師 

법천종사 종사로서 진리를 천명하였도다

在掌靈珠 

재장령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명주

虛明自玩 

허명자완 그 허명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당래영욕 외부에서 오는 덧없는 영욕은

如夢一幻 

여몽일환 한바탕 꿈과 허깨비처럼 여겼지

瞻彼妙香 

첨피묘향 멀리 저 묘향산과

與夫金剛 

여부금강 금강산을 보니

寔唯淨界 

식유정계 이야말로 청정한 세계라

宜我法王 

의아법왕 우리 법왕이 거주하실 곳이지

來往諸天 

래왕제천 이에 제천을 내왕하니

百靈護持 

백령호지 온갖 신령들이 호위하였네

乘化返眞 

승화반진 세연이 다해 입적하니

去又何之 

거우하지 떠나서 또 어디로 갔는고

功紀人間 

공기인간 공적은 인간 세상에 기록되었고

道在山中 

도재산중 도는 산중에 남아 있어라

一片貞珉 

일편정민 이 한 조각 비석이여

萬古英風 

만고영풍 만고에 영명한 풍모로다

[금강산 서산대사비]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월사 이정구 선생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백화암에 부도와 비를 각각 세웠는데 구조물들의 형태는 두 절의 것이 서로 다르나 비문은 둘 다 당시의 이름난 문필가 이정구가 쓴 것으로서 내용이 같다.(같은 시기에 세웠던 묘향산 보현사의 비와 부도는 지난 한국전쟁(6.25)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음).

 

월사집 제45권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

비(碑)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유명조선국사국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 병서

 

나는 불교의 교설(敎說)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 불설(佛說)을 즐겨 말하지 않으니, 짐짓 불교를 배척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장으로 허명을 얻어 문병(文柄)을 잡은 지 30여 년이라 승려들이 나의 명성을 좇아 시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날마다 나의 집에 이르렀다. 그래서 식견이 높거나 시를 잘 짓는 승려를 만나면 흔연히 응접하였으니, 이 역시 짐짓 불교를 좋아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이미 휴정(休靜) 스님의 명성을 들었고 그의 시가 세상에 많이 전송(傳誦)되었기에 늘 한번 만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송운(松雲) 유정(惟政)은 바로 스님의 전법 사문(傳法沙門)이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경성(京城)으로 자주 나를 방문했었고, 내가 연산(燕山)에 갈 때에는 그가 청천강(淸川江) 가에서 나에게 증별의 시를 주면서 스님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밤낮이 다하도록 하였었다. 이때 스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터라 아득히 그 청향(淸香)을 생각하는 마음만 때로 가슴속에 오갔다.

하루는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집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세 승려가 밖에서 공경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불러오게 하여 보니 바로 스님의 제자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확흘(矱仡)이었다. 이들이 상자 속에서 책을 꺼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청허당(淸虛堂)의 유고입니다.” 하고는 이어 두 손을 모아 예(禮)를 갖추고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도업(道業)은 후세에 길이 전할 만합니다. 그러나 운산(雲山)이 깊고 적막하니, 세월이 오래가면 더욱 민멸(泯滅)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문도(門徒)가 기재한 바로써 행장을 만든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재숙(齋宿)하고 봉함(封緘)하여 천리 길을 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원컨대 상공(相公)의 글을 받아 비석에 새겨 우리 스승을 불후(不朽)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는 무(無)로써 유(有)를 삼고 허(虛)로써 실(實)을 삼으니, 보존하길 기다려 보존되는 것이 아니요 민멸하길 기다려 민멸되는 것이 아니니 누가 썩어 없어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불후하게 할 수 있겠소. 우리 부자(夫子)는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스님의 도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하니, 세 승려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도는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니, 감히 구차히 같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으면서 다른 것도 있고 다르면서 같은 것도 있으니, 가섭(迦葉)의 정전(正傳)으로 홀로 종풍(宗風)을 천명(闡明)하는 것은 진실로 같으면서 다른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어찌 다르면서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상공은 다른 것을 다르다 하고 같은 것을 같다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 스님이 생전에 늘 상공의 풍모를 흠모하셨으니, 은연중에 공과 뜻이 계합하여 명감(冥感)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거듭거듭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해가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탄식하며 “불교에서 스승에게 전심(專心)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건대, 스님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고 자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인데 묘향산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란 호도 쓴다. 속성(俗姓)은 완산 최씨(完山崔氏)이며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인 현감(縣監) 김우(金禹)가 연산조(燕山朝)에 득죄(得罪)하여 안릉(安陵)에 귀양 가서 살았기에 그 후대는 안주(安州) 사람이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시주(詩酒)를 즐기며 살았다. 모친 김씨(金氏)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속에 한 노파가 와서 “사내아이를 배태(胚胎)했기에 마님을 위해 축하하러 왔습니다.” 하였는데 그 이듬해 경진년(1520, 중종15) 3월에 과연 스님이 탄생하였다.

스님이 3세 때 부친이 등석(燈夕)에 술 취하여 누워 있노라니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을 뵈러 왔습니다.” 하고 두 손으로 아이를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운 뒤 아이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으로 지으십시오.” 하였다. 그 노인은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훌쩍 사라졌다. 이 때문에 스님의 아명(兒名)을 운학이라 불렀다.

스님은 어릴 때 아이들과 놀 때 혹 돌을 세워 불상을 삼고 혹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곤 하였다. 조금 성장하자 풍신(風神)이 영수(英秀)하고 학문에 힘써 나태하지 않았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기에 고을 원님이 귀여워하였다.

9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10세 때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니, 스님은 외로운 몸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원님이 스님을 데리고 경성(京城)으로 가서 성균관(成均館)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성균관에서 스님은 울울하여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同學) 몇 사람과 남쪽으로 가서 두류산을 유람하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서(經書)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늘 일찍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겼고 더욱 사생(死生)의 이치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홀연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알고 드디어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설법을 듣고 숭인장로(崇仁長老)의 아래에서 삭발하였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다.

하루는 스님이 탄식하며 “내가 출가한 본의가 어찌 여기에 있으리오.” 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 반납하고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삼몽사(三夢詞)〉를 지었는데, 그 시에,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님에게 제 꿈 얘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손님은 주인에게 제 꿈 얘기를 하네

今說二夢客

  지금 두 꿈 얘기를 하는 나그네도

亦是夢中人

 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어라. 하고,

 

향로봉(香鑪峯)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萬國都城如垤蟻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千家豪傑若醯鷄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아라

一窓明月淸虛枕 

창에 가득 밝은 달빛을 베고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 

무한한 솔바람 소리 곡조도 많아라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명성과 재능을 감추고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으니, 도를 물으러 오는 이들이 날로 많아졌다.

기축년(1589, 선조22)의 옥사(獄事) 때 요승(妖僧) 무업(無業)이 무고하여 스님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공사(供辭)가 명백하고 개절(凱切)하니, 선묘(宣廟)가 스님의 억울한 정상을 알고 즉시 석방하는 한편 스님의 시고(詩稿)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탄상(歎賞)하였으며, 어필로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고 시를 읊어 바치게 하였다. 스님이 즉시 절구(絶句)를 바치니 선묘가 역시 어제(御製) 절구 한 수를 내리고 은상(恩賞)을 매우 후하게 주고 위로하여 산으로 돌려보냈다.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여 용만(龍灣)에 머무르니, 스님은 즉시 장검을 비껴들고 진알(進謁)하였다. 이에 선묘가 하교(下敎)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와 같은데 그대가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배명(拜命)하고 말하기를, “국내의 승려들 중 늙고 병들어 군대에 편입할 수 없는 자들은 신이 명령하여 자기 절에서 분향 축원하여 신명의 도움을 빌게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신이 모두 통솔하여 군진(軍陣)에 달려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의롭게 여겨 스님을 팔도십륙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는 한편 지방관들에게 유시(諭示)하여 스님을 예우하게 하였다.

이에 송운(松雲)은 7백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일어났으며, 처영(處英)은 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일어났으며, 스님은 문도(門徒) 및 스스로 모인 승려 1천 5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하여 도합 5천여 명의 승군(僧軍)이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모여 중국 군사와 선후하여 성세(聲勢)를 도왔으며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서 죽이고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이에 중국 군사가 드디어 평양을 탈환하고 송도(松都)를 수복하자 경성의 적들이 밤중에 도주하였다. 스님은 용사 백 명을 보내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게 했다. 명(明)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汝松)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는데 그중에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함에 충성이 해를 꿰뚫으니, 경앙(敬仰)해 마지않는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 주었는데, 그 시에,

無意圖功利 

공리를 도모할 뜻 없이

專心學道仙 

오로지 전심하여 도만 닦더니

今聞王事急 

이제 왕사가

위급하단 말 듣고

摠攝下山嶺 

총섭이 산을 내려오셨구려.

하였다.

중국 제장(諸將)들도 다투어 서찰과 선물을 보내왔다. 적이 퇴각하자 스님은 아뢰기를,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까워 근력이 다했으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은 도총섭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묘향산의 처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니, 선묘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扶宗樹敎)란 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스님은 의(義)와 도(道)는 더욱 높아지고 명성은 더욱 무거워져 두류산, 풍악산, 묘향산 등을 왕래하매 제자가 1천여 명이 되었으며 이 중 출세(出世)한 제자가 70여 명이었다.

갑진년(1604, 선조37)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菴)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분향(焚香)하고 설법한 뒤 자신의 영정(影幀) 뒤에 쓰기를,

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저 사람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에는 내가 저 사람이로구나

하고, 송운과 처영에게 부치는 서찰을 쓴 다음 가부좌를 한 채 서거(逝去)하니,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7세였다.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여 21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제자 원준(圓峻)ㆍ인영(印英) 등이 다비(茶毗)하여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舍利) 세 개를 얻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 봉안하였으며, 또 영골 한 조각을 제자 유정ㆍ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으로 모시고 가서 신주(神珠) 몇 개와 함께 유점사(崳岾寺) 북쪽에 부도(浮屠)로 모셨다.

우리 동방은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고,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것이 실로 임제(臨濟)의 정파(正派)인데 서산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 한다.

스님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각각 한 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아, 스님의 도의 천심(淺深)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만 스님의 유고는 내가 이미 다 읽어 보았다. 시(詩)를 보매 스님의 자득(自得)한 뜻을 알 수 있고, 문(文)을 보매 스님의 높은 조예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조어(措語)가 혹 아순(雅馴)하지 않은 곳도 있으나 글자마다 살아 있고 구절마다 비동(飛動)하여 흡사 고검(古劍)이 칼집에서 나오매 서늘한 바람이 이는 듯하다. 왕왕 개원(開元)ㆍ대력(大曆)의 시와 매우 비슷한 것도 있으니, 불가(佛家)의 혜휴(惠休)ㆍ도림(道林)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환난을 만나서도 그 조수(操守)를 잃지 않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니, 임금이 시고를 자청해서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한 영광과 어필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내려 준 것은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던 각별한 권애(眷愛)였다. 그리고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모아 중국 군사를 도와 삼도(三都)를 수복하고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고는 곧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옷깃을 떨치며 산으로 돌아갔으니, 그 출처(出處)의 절개는 고인(古人)에 비겨도 손색이 없다.

대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들 당시의 임금에게 지우를 입고 공명(功名)을 세워 스스로 현달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재능을 품고도 펼치지 못하고 종신토록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그런데 스님은 일개 치의(緇衣)의 신분으로 성명이 대궐에 알려지고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선문(禪門)에서 이러한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을 줄 누가 생각했으랴. 이와 같은 분의 명(銘)을 쓰니, 나의 붓에 부끄럽지 않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지서 금천의 서쪽

薩水之濱 

살수지빈 살수의 물가에

淑氣亭毒 

숙기정독 맑은 기운이 모여

乃降眞人 

내항진인 이에 진인이 탄생했어라

屳婆抱送 

선파포송 신선 노파가 안아 보냈고

釋老提携 

석로제휴 불가 노인이 손을 잡아 인도했지

天開寶光 

천개보광 하늘은 보광을 열었고

帝借金鎞 

제차금비 상제는 금비를 주었어라

靈符妙契 

령부묘계 신비한 꿈의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수골초범 준수한 골상이 범상치 않았으니

蚌珠出海 

방주출해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龍鏡發函

룡경발함 용경이 상자에서 나온 듯하여라

失怙無依 

실호무의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부급 천리 먼 한양으로 공부하러 가서

淹貫諸家 

엄관제가 제자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卓然自立 

탁연자립 학문을 쌓아 우뚝 자립하였지

乃超覺路

내초각로 그러다 불교의 길로 들어서더니

遂登法席

수등법석 마침내 스승으로 법석에 오르니

祖月重輝 

조월중휘 조사의 달빛이 다시금 비침에

群昏一廓

군혼일곽 중생의 어리석음이 한바탕 걷혔지

餘事詩聲 

여사시성 도 닦는 여가에 지은 시의 명성이

上徹楓宸 

상철풍신 위로 대궐에 계신 임금께 들렸으니 

殊恩異渥 

수은리악, 그 남달리 우악(우뚝한)한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요천춘,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신수암혈, 몸은 비록 암혈에 묻혀 살아도

忠不忘君

충불망군,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였네

遇難一呼

우난일호,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려여운 의병의 무리 구름처럼 모였지

協助天戈 

협조천과 이에 중국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빙장령우 부처의 영험에 의지하였나니

驅除腥穢 

구제성예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복아환우 우리의 강토에 행복을 주었어라

出而濟世 

출이제세 나가서 세상을 구제함에는

名動華夷 

명동화이 그 명성이 화이에 진동하였고

入而修定 

입이수정 들어와서 선정(선정)을 닦음에는

法闡宗師 

법천종사 종사로서 진리를 천명하였도다

在掌靈珠 

재장령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명주

虛明自玩 

허명자완 그 허명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당래영욕 외부에서 오는 덧없는 영욕은

如夢一幻 

여몽일환 한바탕 꿈과 허깨비처럼 여겼지

瞻彼妙香 

첨피묘향 멀리 저 묘향산과

與夫金剛 

여부금강 금강산을 보니

寔唯淨界 

식유정계 이야말로 청정한 세계라

宜我法王 

의아법왕 우리 법왕이 거주하실 곳이지

來往諸天 

래왕제천 이에 제천을 내왕하니

百靈護持 

백령호지 온갖 신령들이 호위하였네

乘化返眞 

승화반진 세연이 다해 입적하니

去又何之 

거우하지 떠나서 또 어디로 갔는고

功紀人間 

공기인간 공적은 인간 세상에 기록되었고

道在山中 

도재산중 도는 산중에 남아 있어라

一片貞珉 

일편정민 이 한 조각 비석이여

萬古英風 

만고영풍 만고에 영명한 풍모로다.

 

이정귀(또는 이정구, 李廷龜, 1564년1635년)/ 비문 지음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A%B5%AC_(1564%EB%85%84) 

 

이정구 (1564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정귀(또는 이정구, 李廷龜, 1564년∼163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시호는

ko.wikipedia.org

 

[금강산 서산대사비]

 

諸佛之心 부처의 심인(心印)

祖師傳之 조사가 전하였고

祖師之傳 조사의 의발(衣鉢)

淸虛延之 청허가 받들었네

淸虛之學 청허의 경지

得乎天全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一絲不罣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如魚在淵 연못 속의 물고기라

半偈徹聞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嘿契聖心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宸翰寵賁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光動叢林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遘難奮義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贊我中興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錫號國一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莫之與京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殺活自由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隱見無累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世出世間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兩盡能事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緣盡而逝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譬彼薪火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茫茫三界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誰渠誰我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幻化雖滅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非幻自如 곡두 아닌 당체(當體)는 원래가 여여(如如)한 법

名山石龕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永閟玄珠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睠玆靈區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實惟覺場 실로 깨달음의 도량(道場)이라 할 만한데

鑱珉紀蹟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昭眎無疆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청허당집 권1은 한시 작품집이고

 권2  書의 첫 작품으로 <上完山盧府尹書>이 실려 있다.

서산대사 휴정의 자서전적 편지글인 이 서한은 

《동사열전》30. 청허존자에서는 물론 월사 이정귀와 계곡 장유의 휴정존자의 비명병서에서도 그대로 또는 발췌하여 인용되고 있다.

국문 번역본을 발췌해 본다.

[  ] 속에 생애를 요약함. 또는 연령을 표기한 것은 운영자가 전후 문맥으로 추정한 나이다.

 

休靜,淸虛堂集 제2권, 書.

상완산노부윤서(上完山盧府尹書).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

 

우러러 사모하옵던 차에 마침 주신 편지를 받고 물으신 뜻을 다 잘 알았습니다.

소자의 선조의 행적과 소자의 젊은 때의 행적과 집을 떠난 인연과 운수(雲水)의 행적을 하나하나 숨기지 말라 하시고 자세한 일까지 거듭거듭 물어주시니 어찌 잠자코 있겠습니까? 이제 간략히 삼몽록(三夢錄:삼대의 기록)을 올리오니 잘 살피소서.

그 기록에 소자의 아버지의 시조는 본이 완산최씨이옵고, 어머니 시조의 본은 한남김씨이옵니다.

[중략]

소자 불행하여 나이 겨우 아홉 살에 갑자기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도 한 봄을 지나 아버지마저 이어 돌아가시니 백년의 생계가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아 천지가 망극하여 여막에 엎드려 슬퍼하고 또 슬퍼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버지 친구분이 옛집터에 두어칸 서당을 마련하고 5-6명 또래를 모아 공부하게 하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 스승을 가리어 공부하고,한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고 더욱 분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마침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서 호남의 원으로 가시게 되어 곧 동학 몇 사람과 함께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스승은 부임한 지 몇 달만에 갑자기 불천(不天)의 근심을 만나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반 년간 두류산을 유람하다.]

하루는 한 노숙이 나를 찾아와,

“그대를 보니 기골이 맑고 빼어나 결코 보통사람이 아니다. 듯을 심공급제(心空及第)에 돌리고 세상의 명리를 좇는 뜻을 아주 끊어라. 서생의 업이란 아무리 온종일을 애쓴다 해도 백년 동안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빈 이름뿐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저는 “어던 것을 심공급제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노숙은 한참 동안 눈을 껌벅이다가, “아는가?”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말하기 어려우니라.” 하며,

전등록, 염송,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반야경 등 수십 권의 경론을 내보이면서,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점차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내 영관대사에게 저를 부탁했습니다.

대사는 저를 한 번 보시고 기특히 여겼습니다.

저는 이로부터 3년을 공부하되 하루도 부지런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말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판단하는 것이 한결같아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여러 동학들은 각기 서울로 돌아가고 저만 홀로 선방에 머물면서 앉아서 여러 경전을 더듬었으나 더욱 이름과 상에 얽매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답답함만 더하였습니다.

[18세]

그러던 하룻밤,

갑자기 문자를 떠난 오묘한 이치를 얻고,

 

 

忽聞杜宇啼牕外 홀문두우제창외

滿眼春山畵故鄕 만안춘산화고향

갑자기 창 밖에서 우는 두견의 소리 들으니

눈에 가득찬 봄 산은 고향의 그림일세

라고 읊었습니다.

 

또 하루는,

 

汲水歸來忽四首 급수귀래홀사수

靑山無數白雲衆 청산무수백운중

물길어 돌아오다 문득 고개 돌리니

푸른 산은 무수히 흰 구름 속에 있네.

라고 읊었습니다.

 

[두류 5년- 23세]

[암자 3년- 26세]

[27세]

하루는 용성의 벗을 찾아 성촌을 지나다가 한낮의 닭소리를 듣고 두 게송을 희롱으로 읊었습니다. 즉,

 

머리는 희었어도 마음은 희지 않다고

옛 사람은 일찍이 말했네.

이제 한 닭소리 들으니

장부의 해야 할 일이 끝났네.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古人曾漏洩  고인증누설

今聽一聲鷄  금청일성계

丈夫能事畢  장부능사필

-[過鳳城聞午鷄]

 

홀연히 불교의 근원을 깨닫고 보니

화두마다 다만 이것뿐이로다.

만천금의 대장경이

원래 하나의 빈 종이였었네.

忽得自家底  홀득자가저

頭頭只此爾  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  만천금보장

元是一空紙  원시일공지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내 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오년(1546,26세) 가을, 문득 여러 곳으로 유행할 뜻이 생겨

표주박 하나와 한 줄의 누더기로 멀리 관동의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내고,

또 풍악산에 들어가 미륵봉을 찾고,

구연동에서 한 여름과 향로봉에서 한 여름을 머물렀으며,

성불, 영은, 영대의 여러암자에서 각각 한 여름을 결제했습니다.

또 함일각으로 옮겨 한 가을을 지냈습니다.

그동안 굶주리기도 하고 혹은 추운 일도 많았으나 7-8년을 깨닫지 못하고

꿈속에서 지냈으니 그때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성조에서 양조를 부활하므로 외인의 청을 억지로 좇아 한 여름을 대선이란 이름을 얻었고, 두 여름 동안 주지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석 달 동안 전법사란 이름을 얻었으며, 석 달 동안 교판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삼년 동안 선판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혹 괴롭기도 하고 영화롭기도 한 일이 많았으나 역시 5-6년을 깨닫지 못하고 꿈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하루는 문득 처음 발심했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곧 인수를 버리고 한 가지 청려장을 짚고 금강산의 천석 사이로 들어가 반 년을 지냈습니다.

또 두류산으로 가서 내은적암에서 삼년을 지냈으며,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삼년을 지냈습니다.

또 관동으로 나아가 태백산, 오대산, 풍악산의 세 산을 다시 밟은 뒤에

멀리 관서를 향했습니다.

그곳 묘향산의 보현사 관음전과 내원암, 영운, 백운, 심경, 금선, 법왕 등의 여러 대와 그리고 망망한 천지와 허다한 산수를 떠돌아다닌 한 몸은 기러기의 털과 같고 바람과 구름이 일정한 곳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소자의 행적도 또한 이뿐이옵니다.

[중략]

아, 이 하나의 붓으로 지난 자취를 늘어놓은 것도 하나의 꿈입니다.

삼가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연령을 추정해 보면 이 글에서는 43세까지의 자신의 삶의 궤적을 정리하였다.

 

 

 

 

임종게 (臨終偈)가  <청허당집> 에도 들어 있는 걸 보면 대사의 작품이 맞다.

임종게는 그 승려를 논의할 때 그가 살아온 인생을 집약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동사열전> '30.청허존자'에서  臨終偈 를 빠뜨린 것은 두구두고 의문으로 남는다.

 

 

휴정, 청허당집 淸虛堂集,배규범역 ,지만지고금천음 ,2011,p.190.

 

임종게 臨終偈

千思萬思量

(천사만사량)    천 가지 만 가지 생각들이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붉은 화로의 한 점 눈과 같네

泥牛水上行

(니우수상행)  진흙소가 물 위를 걸어가니

大地虛空裂

(대지허공열)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진다

 

휴정, 청허당집 淸虛堂集, 박경훈역,동국대역경원,1987,p.121.

임종게 臨終偈

 

 

 

 

이 시를 재해석해 본다.

 

千思萬思量

(천사만사량) 천 생각, 만 가지 헤아림이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붉은 화로의 한 점 눈이로다

泥牛水上行

(니우수상행)  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 위를 가나니

大地虛空裂

(대지허공열) 대지는 허공을 찢누나.

 

천만 가지 생각들이란

붉은 화롯불 위에서 잠깐 사이에 녹아 사라지는 한 점 눈꽃이로다

진흙으로 빚은 소가 물 위를 걸어가면 물 속에 녹아 사라지듯이

대지와 허공도 나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천지도 사라지는데 개체의 존재야 일러 무삼하리오? 

영원한 것은 내 마음 속의 佛性, 부처님의 깨달음밖에 없다.]

 

참고로  제4구는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해석이지만

주어를 대지(大地)로 보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지도 허공중에 흩어진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면 제3,4구의 번역은

"진흙소가 물 속을 걸으면 물에 녹아 사라지듯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지도 허공중에 흩어진다."가 된다.

 

<동사강목> ' 30.청허존자'편에 의거하면

서산대사께서 자화상에 쓴 마지막 게송은 아래 두 구의 자찬(自讚)시였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팔십 년 전에는 자화상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자화상이로다

 

(살아 있을 적에는 자화상이 나이더니

죽음에 임하고 보니 나는 자화상으로 남게 되는구나)

**죽음에 임하고 보니 나라는 존재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자화상만 남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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