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고미숙,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로 현대인 고민 해결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927.99099011823

26일 9시 30분 방송되는 JTBC ‘차이나는 클라스-질문있습니다’(이하 ‘차이나는 클라스’)에 국내 유일의 고전 평론가인 고미숙 작가가 출연한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데 고전만한 것이 없다’ ‘고전에서 현대인이 겪는 다양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등의 말을 남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고미숙 작가는 “고전의 지혜를 현대인의 삶에 연결해주는 전령사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최근 진행된 ‘차이나는 클라스’ 녹화에서 고미숙 작가는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주제로 학생들과 문답을 나눴다. 조선 후기 실학의 핵심 가치인 ‘이용후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유’이다. 고미숙 작가는 “연암의 열하일기가 그 자유의 표현이며 유목적 사유이고 현대의 노마디즘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노마디즘은 규정된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질문해야한다. 그 길위에서 열하일기가 좋은 네비게이션이 될 수 있다”라고 전했다.

고미숙 작가는 연암 박지원이 “간이 큰 사람이었다”라고 농담해 웃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열하일기’가 영화화 되면 영화배우 송강호가 어울릴 것이라며 연암의 캐릭터를 쉽게 풀어 전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kipJnSFVw 

 

 

https://www.youtube.com/watch?v=cyc3hRtra5U 

 

 

https://www.youtube.com/watch?v=D_rNXgoKRRU 

 

 

https://www.youtube.com/watch?v=eakjcBwK9I0 

 

 

북학파 박지원/ 白塔派 32세 원각사 근처로 이사 후 제자들  ㅡ  박제가, 이무, 유

https://www.youtube.com/watch?v=bnHq1Sfw3fQ 

 

 

https://kydong77.tistory.com/17389

 

고미숙,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북학파

'열하일기'에 등장한 중국 황제의 피서지 '열하'의 산장 전경. 고미숙,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kydong77.tistory.com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lKA60uhJRc 

 

 

https://www.youtube.com/watch?v=S4nTsJ8dnSc 

 

 

https://kydong77.tistory.com/17389

 

고미숙,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북학파

'열하일기'에 등장한 중국 황제의 피서지 '열하'의 산장 전경. 고미숙,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kydong77.tistory.com

 

 

[덧붙임]

열하일기, 허생전;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소설가 박지원

https://www.youtube.com/watch?v=srtH2SjQzu4 

 

https://www.youtube.com/watch?v=SHEoLn_9I9M&t=192s 

 

[연암 박지원 초상]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주수 작품]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http://kydong77.tistory.com/5411

 

박지원 년보

http://kydong77.tistory.com/8093

 

[주]특기사항을 표시하여 다시 읽어본다.

연암 박지원 년보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EC%97%B0%EB%B3%B4

 

박지원/ 방경각외전 자서

http://kydong77.tistory.com/8092

 

이가원/열하일기 해제

http://kydong77.tistory.com/2356

 

연암소설

①初期九傳; 放경閣外傳 自序(연암집 권8)

마장전,

http://kydong77.tistory.com/7940

 

예덕선생전,

http://kydong77.tistory.com/7937

 

민옹전,

http://kydong77.tistory.com/7936

 

광문자전,

http://kydong77.tistory.com/7935

 

양반전,

http://kydong77.tistory.com/8091

http://kydong77.tistory.com/7934

 

김신선전,

http://kydong77.tistory.com/7933

 

우상전

http://kydong77.tistory.com/7932

 

(역학대도전,봉산학자전 二篇은 焚失)

http://kydong77.tistory.com/7931

 

②中期二篇;(연암집 권11~15, 別集 熱河日記 수록)

호질(권12 關內程史),

http://kydong77.tistory.com/8090

 

호질 후지

http://kydong77.tistory.com/7963

호질 김택영 발문

http://kydong77.tistory.com/7962

 

허생전(권14,玉匣夜話)

http://kydong77.tistory.com/8089

 

옥갑야화

http://kydong77.tistory.com/7961

 

허생후지1

http://kydong77.tistory.com/7960

 

.허생후지[진덕재야화] Ⅱ

http://kydong77.tistory.com/7959

 

③後期一篇; 열녀함양박씨전(권1, 연상각선본)

http://kydong77.tistory.com/7930

 

박지원/ 회우록서

http://kydong77.tistory.com/7939

 

박지원/ 原士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http://kydong77.tistory.com/7938

 

[추가]

위키백과

박지원 (1737년)

이 문서는 연암 박지원 연보이다.[1]

목차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8093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목차

  • 1 생애
    • 1.1 생애 초반
    • 1.2 청년기
    • 1.3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류(서자)들을 금고하는 것은, 옛날의 법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런 법이 없으며, 예률(禮律)에서 상고해 보건대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초에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틈타 앙갚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디 개국했을 때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1백 년 뒤에 선묘(宣廟)께서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인묘(仁廟) 때에 미쳐서 또 삼조(三曹)에 허통시켰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열성조에서 고치고 변통한 성대한 뜻을 단연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선대에 조광조, 이이, 송시열이 서자들도 요직에 쓸 것을 건의했던 점을 계속 지적, 상소하여 서자들에게도 관직에 나갈 길을 줄 것과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또한 평민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환경을 지적하여 평민들에게도 과거를 보도록, 나라에서 서당에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 1.4 생애 후반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다.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자신이 청나라일본을 다녀오고 그 당시 본 장면과 풍경을 그대로 기술하였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부덕이나 현모양처임을 강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어린 시절 자신이 누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누나의 화장품에 물을 타서 장난친 일 등을 기록하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과 각종 글을 발표하였고,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지었다.

      1791년(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간 연암 박지원이 부임 첫날 지역 터줏대감들과 술자리에 앉았다.[8] 토호들은 그에게 놀이나 하나 하자며 엉뚱하게도 글짓기 경연(競演)을 시작한다. 벌칙은 술, 운자(韻字)는 '지'였다. "술술 잘 넘어가는 안의 막걸리/안주도 좋아라. 황석산 멧돼지." "촌사람 섣불리 보지 마소/ 안의 사람들 정말 무섭지" "아무리 짝사랑이라도 목은 왜 매나/ 벗겨나 보든지 한 번 대어나 보고 죽지[8]" 그를 보기좋게 길들이려던 토호들은 오히려 그에게 골탕을 먹었다고 한다.

      안의현감 부임 직후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5] 1792년 다시 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하며 남공철(南公轍)을 다시 보내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다. 이에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는데 정조가 그의 편지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

      1796년 지방관 임기 만료로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이때 친구 유언호(兪彦鎬)의 부음을 듣고 그의 장레를 치루었으며, 한성부 계산동에 벽돌로 초당을 짓고 총계서숙(叢桂書塾[9])이라 이름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총계서숙은 그가 죽은 뒤에도 1830년대에까지 북학파 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하였다.

      1796년 제용감주부, 의금부도사, 의릉령(懿陵令)이 되고, 1797년(정조 21년) 7월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1793년 정조는 그에게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고 하교하였다. 박지원은 정조의 거듭된 경고에 이에 '답남직각공철서 (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왕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글로써 만든 과거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덕무가 죽자, 정조는 그에게 지시하여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 행장 (炯菴行狀)'을 썼다. 그해 이덕무의 유고집을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 1.5 사후 영향
    • 1.6 현대
  • 2 사상과 신념
  • 3 문학 세계
  • 4 인물평
  • 5 가족 관계
  • 6 주요 저서와 관련서
  • 7 평가
  • 8 기타
  • 9 함께 보기
  • 10 참고 자료
  • 11 각주
  • 12 바깥고리

참고 자료[편집]

  •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게. 2006년. ISBN 89-7199-237-9
  • 최정동,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푸른역사. 2005년. ISBN 89-91510-10-8
  • 김지용, 《연암 박지원의 이상과 그 문학》. 명문당. 2005년.
  • 박수밀,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태학사. 2005년.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년.
  • 이현식, 《박지원 산문의 논리와 미학》. 이회문화사. 2002년.
  • 김혈조, 《박지원의 산문문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년.
  •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 조선조 근대화의 기수》. 한양대학교출판부. 2000년.
  • 강혜선, 《박지원 산문의 고문 변용 양상》. 태학사. 1999년.
  •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비. 1990년.
  • 간호윤, 《개를 키우지 마라》. 경인문화사, 2005년.
  • 김영동, 《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88년.
  • 김영동, 증보《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93년.

 

[최치원 존영]

카테고리: 한문학

한문학 (358) N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참고]

이 블로그 운영자가 정리한 금오신화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시습전 -율곡 이이

http://kydong77.tistory.com/8088

 

김시습전 -율곡 이이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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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상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7

 

김시습, 만복사저포기 上

[주]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설화를 소재로 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생시처럼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인귀교환설화라 한다. 얼마나 지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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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하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6

 

김시습, 만복사저포기 下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摴蒲記 下 2]무덤에서 사흘간 처자 환신과 지내다 1)처자 환신을 따라 개령동 처자의 집에 가다 生執女手, 經過閭閻,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犬吠於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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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 상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5

 

김시습, 이생규장전 上

[주]담장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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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 하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4

 

김시습, 이생규장전 下

[주]연애[풋사랑]-울산 농장, 결혼-홍건적의 난에 피살, 인귀교환-명수 다해 영별. 이 작품은 세 차례에 걸친 만남과 이별의 변주곡이다. 2]이생, 최랑과 이별하다 1)이생의 행동이 탄로나 울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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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3

 

김시습, 취유부벽정기

[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고시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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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상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2

 

김시습,남염부주지 上

이 작품에는 매월당이 20년에 걸친 정신적 방황에서 도출하려 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의식의 오류에 대해 염왕과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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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하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1

 

김시습, 남염부주지 下

3]염왕과의 담론 1)유불을 비교하다 生問曰(생문왈) : 박생이 물었다. 周孔瞿曇(주공구담) : "주공과 공자와 석가는 何如人也(하여인야) : 어떤 사람들입니까?" 王曰(왕왈) : 임금이 말하였다. 周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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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부연록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0

 

김시습, 용궁부연록

[주]한생이 용궁의 상량식 잔치에 초대되어 상량문 짓고, 용궁의 풍류잽이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재주를 보이며 시를 지은 후, 한생은 용궁을 두루 구경하고, 진주 두 알과 비단 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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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 / 전등신화

http://kydong77.tistory.com/5439

 

구우 / 전등신화

[은자주]전등신화의 목차를 정리해 본다. 하단에 금오신화와 연관된 작품을 적시하고 걸작을 발췌해 본다. 전등신화(剪燈新話)_구우(瞿佑) 작자소전_주릉가(周楞伽) 서문 1. 구우(瞿佑)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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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작품 요약

http://kydong77.tistory.com/5413

 

금오신화 작품 요약

금오신화 [참고]금오신화 vs 구우/전등신화 http://blog.paran.com/kydong/34822337 현존하는 5편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등 다섯편이다. 이들은 각기 소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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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2585

 

김시습

김시습(金時習)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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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http://kydong77.tistory.com/2584

 

김시습, 만복사저포기

[주]한문만 제시하면 의미를 알 수 없고, 국역만 처리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쉬워 한문을 짧게 끊고 국역으로 대역(對譯)하였다. 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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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

http://kydong77.tistory.com/2583

 

김시습, 이생규장전

[주]담장은 빈부의 세계, 서민과 귀족,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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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

http://kydong77.tistory.com/2577

 

김시습, 취유부벽정기

[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선녀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고양된 회고의 정서를 응축한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五言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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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http://kydong77.tistory.com/2576

 

김시습, 남염부주지

[주]금오신화 5작품 중 유일하게 한시를 사용하지 않은 사상소설이다. 남염부주지 -김시습 成化初, 慶州有朴生者, 以儒業自勉. 성화(成化) 초년에 경주에 박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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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부연록

http://kydong77.tistory.com/2575

 

김시습, 용궁부연록

용궁부연록 松都有天磨山. 其山高揷而峭秀, 故曰天磨山. 개성에 천마산이 있는데, 그 산이 공중에 높이 솟아 가파르므로 '천마산(天磨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中有龍湫, 名曰瓢淵, 窄而深, 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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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kydong77.tistory.com/8731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금오신화 정리

이 블로그 운영자가 정리한 금오신화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시습전 -율곡 이이 http://kydong77.tistory.com/8088 만복사저포기 상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7 만복사저포기 하 -김시습 htt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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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산비명] 外

최치원의 사산비명  (0) 2012.09.27

최치원 - 격황소서  (0) 2012.09.25

경주 초월산 숭복사 비명 /사산비명  (0) 2010.10.02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영탑비명/ 사산비명  (0) 2010.09.26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명/ 사산비명  (0) 2010.09.23

최치원의 사산비명  (0)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category/한문학/최치원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다산 정약용  (0) 2014.04.14

한문사대가  (0) 2013.12.18

장유 - 서산대사비명 병서  (0)

이정구 - 서산대사비명 병서  (0)

 

조선시대의 한문학 요약분

http://kydong77.tistory.com/3301

 

조선시대의 한문학/요약본

조선시대의 한문학 1.관각파 서거정/1 관각삼걸/1 :호음 정사룡, 소재 노수신, 지천 황정욱. 약칭 호소지(湖소芝). 16세기 한시사의 수준을 가장 높은 시인은 湖소芝로 병칭되는 湖陰 鄭士龍, 穌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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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한문학

1.관각파 서거정/1

관각삼걸/1

:호음 정사룡, 소재 노수신, 지천 황정욱. 약칭 호소지(湖소芝).

16세기 한시사의 수준을 가장 높은 시인은 湖소芝로 병칭되는

湖陰 鄭士龍, 穌齋 盧守愼, 芝川 黃廷彧이다.

 

2.방외인문학 김시습 허균/3

김시습(), 1435(세종 17)∼1493(성종 2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2650&cid=46644&categoryId=46644

 

김시습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 문인.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

terms.naver.com

허균 [許筠] (1569~161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7428&cid=46644&categoryId=46644

 

허균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

terms.naver.com

 

3.사림파 김종직 영남사림/3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김인후

 

4.해동의 강서파 /5

용재 이행, 읍취헌 박은

이행()의 시문집.용재집 [容齋集]

박은()의 문집 ≪읍취헌유고 稿

 

5.삼당파시인/5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

孤竹 崔慶昌, 玉峯 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


6.한문사대가 /7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

조선 중기 문장에 뛰어났던 월사 이정구()·상촌 신흠()·계곡 장유()·택당 이식() 등 네 사람.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

 선조·인조( ) 연간의 4가 상월계택(谿)

곧 상촌 신흠( ), 월사 이정구( ), 계곡 장유(谿 ), 택당 이식( )

 

7.후사가의 한시/8

한국 한시의 개발, 新體文

아정 이덕무,영재 유득공, 초정 박제가,강산 이서구

조선 정조() 때 실학() 관련의 네 학자.

아정·형암 이덕무( 1741~1793),

초정박제가( 1750~1815),

냉재齋  유득공 [柳得恭] (1748~?),

강산(薑山) 척재 이서구( 1754 ~1825) 등에 대하여 라 함.

법고창신의 신체문을 주창하고 실천한 연암 박지원은 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대개 서자출신인 이들과 어울림.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3301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조선시대의 한문학/요약본

조선시대의 한문학 1.관각파 서거정/1 관각삼걸/1 :호음 정사룡, 소재 노수신, 지천 황정욱. 약칭 호소지(湖소芝). 16세기 한시사의 수준을 가장 높은 시인은 湖소芝로 병칭되는 湖陰 鄭士龍, 穌齋

kydong77.tistory.com

 

[운영자注] 한자의 발명은 산문화의 주체인 동이족이라 확신한다.

이 동이족의 DNA가 없었다면 사대주의에 젖은 조선초기에 세종의 문자 발명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발음기관을 본따 아설순치후 오음에 바탕한 자음 17자와

천지인을 기반으로 모음 11자 등 자모 28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천재성을 초월하는 동이족의 문자 창제의  DNA가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http://kydong77.tistory.com/7971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1) 상나라와 한민족 下

경향신문|기사입력 2008-03-07 18:11 |최종수정2008-03-07 23:55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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