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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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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은자주]이 글을 문집에 챙겨 넣은 아들 종채의 주석도 흥미롭겨니와 사마천의 <사기>, 유학 경전의 인용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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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은자주]이 글을 문집에 챙겨 넣은 아들 종채의 주석도 흥미롭겨니와 사마천의 <사기>, 유학 경전의 인용까지 국역번역원의 꼼꼼한 주석은 연암의 사고의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篇)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뭉쳐진 두루마리 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아들 종채(宗采)가 삼가 쓰다.

[주D-001]뭉쳐진 두루마리 : 원문은 ‘局縛’인데, 이본들에는 ‘卷縛’으로도 되어 있으나, 뜻은 비슷하다.
[주D-002]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주D-003]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권4에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무릇 선비〔士〕란 아래로 농(農) · 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

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주D-004]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즉, 노(魯)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5]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사(士)’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士)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을 ‘사’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秦)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주D-006]송 광평(宋廣平)이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 ~ 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 ~ 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주D-007]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송(宋)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주D-008]노중련(魯仲連)이 …… 물러갔으니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

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

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주D-009]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제 5 장의 한 구절이다. 단 《시경》에는 ‘疹’ 자가 ‘殄’ 자로 되어 있다.
[주D-010]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제 3 장의 한 구절이다.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孝)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悌〕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統〕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雅〕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 이랴?

 

[주D-011]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禮)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주D-012]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는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주D-013]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素’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統’ 자, ‘본디’로 번역한 ‘雅’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 요,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주D-014]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雅’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雅〕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術)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주D-015]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를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주D-016]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과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雅’ 자를 ‘바르다〔正〕’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 고 하는데,

안로(顔路) 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주D-017]안자(顔子)는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주D-018]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노(路)는 그의 자(字)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槨)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주D-019]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道)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性)과 명(命)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理)와 기(氣)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性)과 정(情)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
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註)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주D-020]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주D-021]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反’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아마도 주공(周公)의 저술인저!”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주D-022]《주례(周禮)》는 …… 저술인저 : 정현(鄭玄)은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注)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즉,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주D-023]왕망(王莽)은 …… 그르쳤다 :
한(漢)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주D-024]중니(仲尼)가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를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5]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6]내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 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D-027]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주D-028]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칭찬을 들은 이는 오직 안로(顔路)의 아들 안자(顔子)일 것이다. 안자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D-029]중니(仲尼)의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를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30]《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善)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역(易)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

라고 했으니 말이다.

 

[주D-031]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
 이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주D-032]대숙(大叔) : 누구의 자(字)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주D-033]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주D-034]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주D-035]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런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상(喪)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喪)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 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일찍이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의 상을 만나면 탄식하고, 조문을 가야 할지 주저되는 경우를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알게 된 사람이면 탄식한다.

 

[주D-036]기공(朞功)의 …… 경우 : 상기(喪期)가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喪)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 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 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주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주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에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구성의  첫머리에 편명의 번역후 원제(原題)의 음독이 나옵니다

예)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渡江錄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열하일기의 구성(김혈조[25] 번역본 기준)[26
  • 머리말(열하일기서)
  •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에 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 말을 빠르게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일신수필):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일을 쓴 기록.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관내정사):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이 나온다.
  •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막북행정록): 북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 태학관에 머물며(태학유관록):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 15일간의 기록.
  •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환연도중록):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 열하에서 만난 친구들(경개록):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 라마교(티베트 불교)에 대한 문답(황교문답):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 반선의 내력(반선시말):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 반선을 만나다(찰십륜포):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 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 사행과 관현된 문건들(행재잡록): 조선과 청나라 황실 사이에 주고 받던 외교문서와 외교문서를 쓴 내력을 옮겨 적은 기록.
  •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심세편):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망양록):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 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 이야기.
  • 곡정과 나눈 필담(곡정필담): 중국 지식인 곡정과 장장 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 피서 산장의 기행문들(산장잡기): 열하(熱河)의 피서 산장에서 쓴 기행록 9편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 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 피서 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 피서 산장에서 쓴 시화 보충(피서록 보유): 삼한총서본의 열하피서록 내용을 김혈조 번역본에서 추가했다.
  •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27]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 북경의 유교 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 적바림[28] 모음 (앙엽기):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요법을 적은 기록.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당시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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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는(熱河) 중국어로 러허(중국어 정체자: 熱河, 병음: Rèhé)라고 하는 청나라의 지역 이름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청더(承德, 승덕)이며, 최종 목적지는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으로 불리는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이 조선 정조 때에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1]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 발견되었다.[2]

도강록[편집]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편집]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편집]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편집]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편집]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태학유관록[편집]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편집]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

환연도중록[편집]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

금료소초[편집]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

옥갑야화[편집]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고전소설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편집]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편집]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이다.

앙엽기[편집]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편집]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편집]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편집]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편집]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편집]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편집]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편집]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편집]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편집]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다.

산장잡기[편집]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편집]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그렇고 그렇다는 이야기다라고 말할수 없지 않고 그렇다.

 

 

https://www.youtube.com/watch?v=QKEcMafZ758 

 

 

https://www.youtube.com/watch?v=f1H_YkRW7LY 

 

 

 

https://www.youtube.com/watch?v=S4nTsJ8dnSc 

 

 

https://kydong77.tistory.com/17760

 

EBS 열하일기 1부- 그대 길을 아는가/EBS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viGyOUCGKw https://namu.wiki/w/%EC%9E%90%EA%B8%88%EC%84%B1 자금성 - 나무위키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7761

 

EBS 열하일기 2부-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자금성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DlXz9pOofk https://www.youtube.com/watch?v=4MqmcyyPDJg 청나라 해설 동영상/건융제-사고전서 편찬 https://www.youtube.com/watch?v=z9EFFo8sg2Y EBS 열하일..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7762?category=563867 

 

EBS 열하일기 3부-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EBS 열하일기 3부는 북경에서 고북구를 거쳐 열하까지의 경로와 열하에 대한 설명이다. 8월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머문 열하의 피서산장은 말이 피서산장이지 그 실상은 조정의 행정을 수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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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규수 작품]

《과정록》(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연암소설 포스트 정리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http://kydong77.tistory.com/5411

 

박지원 년보

http://kydong77.tistory.com/8093

 

[주]특기사항을 표시하여 다시 읽어본다.

연암 박지원 년보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EC%97%B0%EB%B3%B4

 

박지원/ 방경각외전 자서

http://kydong77.tistory.com/8092

 

이가원/열하일기 해제

http://kydong77.tistory.com/2356

 

연암소설

①初期九傳; 경각외전 (放璚閣外傳) 自序(연암집 권8)

방경각외전에는 단편소설 9편 수록

 

마장전,

http://kydong77.tistory.com/7940

 

예덕선생전,

http://kydong77.tistory.com/7937

 

민옹전,

http://kydong77.tistory.com/7936

 

광문자전,

http://kydong77.tistory.com/7935

 

양반전,

http://kydong77.tistory.com/8091

http://kydong77.tistory.com/7934

 

김신선전,

http://kydong77.tistory.com/7933

 

우상전

http://kydong77.tistory.com/7932

 

(역학대도전,봉산학자전 二篇은 焚失)

http://kydong77.tistory.com/7931

 

②中期二篇;(연암집 권11~15, 別集 熱河日記 수록)

호질(권12 關內程史),

http://kydong77.tistory.com/8090

 

호질 후지

http://kydong77.tistory.com/7963

호질 김택영 발문

http://kydong77.tistory.com/7962

 

허생전(권14,玉匣夜話)

http://kydong77.tistory.com/8089

 

옥갑야화

http://kydong77.tistory.com/7961

 

허생후지1

http://kydong77.tistory.com/7960

 

.허생후지[진덕재야화] Ⅱ

http://kydong77.tistory.com/7959

 

③後期一篇; 열녀함양박씨전(권1, 연상각선본)

http://kydong77.tistory.com/7930

 

박지원/ 회우록서

http://kydong77.tistory.com/7939

 

박지원/ 原士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http://kydong77.tistory.com/7938

 http://kydong77.tistory.com/17758 /재수록

 

[추가]

위키백과

박지원 (1737년)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EC%97%B0%EB%B3%B4

이 문서는 연암 박지원 연보이다.[1]

목차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8093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목차

    1 생애
  •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다.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자신이 청나라일본을 다녀오고 그 당시 본 장면과 풍경을 그대로 기술하였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부덕이나 현모양처임을 강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어린 시절 자신이 누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누나의 화장품에 물을 타서 장난친 일 등을 기록하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과 각종 글을 발표하였고,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지었다.
  • 1791년(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간 연암 박지원이 부임 첫날 지역 터줏대감들과 술자리에 앉았다.[8] 토호들은 그에게 놀이나 하나 하자며 엉뚱하게도 글짓기 경연(競演)을 시작한다. 벌칙은 술, 운자(韻字)는 '지'였다. "술술 잘 넘어가는 안의 막걸리/안주도 좋아라. 황석산 멧돼지." "촌사람 섣불리 보지 마소/ 안의 사람들 정말 무섭지" "아무리 짝사랑이라도 목은 왜 매나/ 벗겨나 보든지 한 번 대어나 보고 죽지[8]" 그를 보기좋게 길들이려던 토호들은 오히려 그에게 골탕을 먹었다고 한다.

    안의현감 부임 직후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5] 1792년 다시 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하며 남공철(南公轍)을 다시 보내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다. 이에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는데 정조가 그의 편지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

    1796년 지방관 임기 만료로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이때 친구 유언호(兪彦鎬)의 부음을 듣고 그의 장레를 치루었으며, 한성부 계산동에 벽돌로 초당을 짓고 총계서숙(叢桂書塾[9])이라 이름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총계서숙은 그가 죽은 뒤에도 1830년대에까지 북학파 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하였다.

    1796년 제용감주부, 의금부도사, 의릉령(懿陵令)이 되고, 1797년(정조 21년) 7월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1793년 정조는 그에게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고 하교하였다. 박지원은 정조의 거듭된 경고에 이에 '답남직각공철서 (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왕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글로써 만든 과거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덕무가 죽자, 정조는 그에게 지시하여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 행장 (炯菴行狀)'을 썼다. 그해 이덕무의 유고집을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 2 사상과 신념
  • 3 문학 세계
  • 4 인물평
  • 5 가족 관계
  • 6 주요 저서와 관련서
  • 7 평가
  • 8 기타
  • 9 함께 보기
  • 10 참고 자료
  • 11 각주
  • 12 바깥고리

참고 자료[편집]

  •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게. 2006년. ISBN 89-7199-237-9
  • 최정동,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푸른역사. 2005년. ISBN 89-91510-10-8
  • 김지용, 《연암 박지원의 이상과 그 문학》. 명문당. 2005년.
  • 박수밀,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태학사. 2005년.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년.
  • 이현식, 《박지원 산문의 논리와 미학》. 이회문화사. 2002년.
  • 김혈조, 《박지원의 산문문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년.
  •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 조선조 근대화의 기수》. 한양대학교출판부. 2000년.
  • 강혜선, 《박지원 산문의 고문 변용 양상》. 태학사. 1999년.
  •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비. 1990년.
  • 간호윤, 《개를 키우지 마라》. 경인문화사, 2005년.
  • 김영동, 《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88년.
  • 김영동, 증보《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93년.

 

[포스트 추가분]



박지원,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0) 04:31:39

연암소설 포스트 재정리  (0) 02:15:59

선비의 길 - 연암 박지원의 초탈  (1) 2018.04.18

열하일기 3부 /[동영상]  (0) 2018.04.17

열하일기 2부 /[동영상]  (0) 2018.04.16

열하일기 1부 /[동영상]  (1) 2018.04.15

 

선비의 길 - 연암 박지원의 초탈

www.youtube.com/watch?v=srtH2SjQzu4

 

 

열하일기 3부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mqCYD70PcI

동영상 35분 이후에는 서점과 골동품점이 몰려 있는 유리창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유리창은 중국 각지의 지식인들도 관광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모여 살아 이덕무는 연행시 필담으로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

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들과 사귀었고 귀국 후에도 서신을 교환하며

그들과 랜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지구설, 지동설 등에 대한 견해도 영정조 시절 북학파들에 의해 조선에 전달되었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서양 오랑개들의 상주의나 서양의 지식은 그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이덕무 《입연기(入燕記)》 1778년 연행

1778년(정조 2년)에는 당시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나라에서 기균(紀均)·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과 교류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5%EB%AC%B4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1778년 포함 4 차례 연행

 1750년 11월 5일 ~ 1815년[1] 4월 25일)는 조선 후기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2]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8년 청나라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던 농본억말(農本抑末)과 같은 상업 억제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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