鍾北小選自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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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北小選自序(종북소선자서)/ 박지원

鍾北小選自序 아아! 포희씨礈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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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포희씨礈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 돌의 초록빛과 새깃의 비취빛 등 그 문심文心은 변치 않았다. 솥의 발과 호리병의 허리, 해의 둘레, 달의 활 모양은 자체字體가 아직도 온전하다. 그 바람과 구름, 우레와 번개 및 비와 눈, 서리와 이슬, 그리고 새와 물고기와 짐승과 벌레와, 웃고 울고 소리내고 울부짖는 것들의 성색정경聲色情境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그런 까닭에 《역易》을 읽지 않고는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포희씨礈犧氏가 《역》을 지음은 우러러 관찰하고 굽어 살펴보아 홀수와 짝수를 더하고 갑절로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하여 그림이 되었다. 창힐씨蒼綖氏가 글자를 만든 것 또한 정情을 곡진히 하고 형形을 다하여 전주轉注하고 가차假借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하여 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글에 소리[聲]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를 내가 그 모습은 못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글에 빛깔[色]이 있는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잘 나와 있다. "비단옷에 홑옷 덧입고, 비단 치마에 홑치마 덧입었네. 衣錦啷衣, 裳錦啷裳"라고 하였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트레머리 얹을 필요가 없네. 珒髮如雲, 不屑痂也"라고 하였다.무엇을 일러 정情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무엇을 일러 경境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먼데 있는 물에는 물결이 없고, 먼데 있는 산에는 나무가 없으며, 먼데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그 말하는 것은 가리키는 데 있고, 듣는 것은 손을 맞잡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중에서

[출처] 鍾北小選自序(종북소선자서)/ 박지원 |작성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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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玩亭記(소완정기)/ 박지원

素玩亭記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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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素玩亭記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지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가? 앞을 보자면 뒤를 잃게 되고, 왼편을 돌아보면 오른편을 놓치고 말지.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허공이 서로 맞닿기 때문일 뿐이야. 차라리 몸을 방밖에 두어 창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아 한 눈의 전일함으로 온 방안의 물건을 다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約`, 즉 요약함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로군요."

내가 또 말했다.

"자네가 이미 `약約`의 도를 알았네그려. 또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비춤을 가지고 자네를 가르쳐도 괜찮겠는가? 대저 해라는 것은 태양이니, 사해를 덮어 씌워 만물을 기르는 것일세. 젖은 곳을 비추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 빛을 받으면 환하게 되지. 그렇지만 능히 나무를 사르거나 쇠를 녹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빛이 두루 퍼져서 정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에 두루 비치는 것을 거두어, 좁은 틈으로 빛을 들여 모아서, 둥근 유리알에 이를 받아, 그 정채로운 빛을 콩알만하게 만들면, 처음에는 내리쬐어 반짝반짝 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타오르는 것은 어째서겠나? 빛이 전일하여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한데 모여 하나가 되기 때문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제게 오悟, 즉 깨달음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또 말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일세. 그럴진대 본시 바싹 가로막고 보아 한 방 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장을 봄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한 것이야. 공자께서 그 문장을 봄을 크게 여겨 이를 이어 말씀하시기를, `편안히 거처할 때는 그 말을 익힌다[玩]`고 하셨지. 대저 익힌다 함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음미하여 그 맛을 얻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얻으며,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 정채로움을 얻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서 눈으로 이를 전일하게하고, 유리알로 받아 마음으로 이를 깨닫는다고 하세. 비록 그러나 방과 창이 텅비지 않고는 밝은 빛을 받을 수가 없고, 유리알이 비지 않으면 정기를 모을 수가 없을 것이네. 대저 뜻을 밝히는 도리는 진실로 비움에 있나니, 물건을 받음이 담박하여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네. 이것이 자네가 바탕을 익히겠다는[素玩] 까닭인가?"

낙서가 말하였다.

"제가 장차 벽에 붙이렵니다. 써주십시오."

드디어 그를 위해 써주었다.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중에서

[출처] 素玩亭記(소완정기)/ 박지원 |작성자

 

 

[注]연암의 아래글 조회수가 많아 이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의 주석을 보면 연암선생의 박학다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명문장은 그의 독서량에 뿌리를 둔 지식에서 연원함을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훈민정음은 <과농소초>에 표기한 명사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유길준의 국한문혼용체 <서유견문>(1895)이 나오기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세계적 문자인 한문을 고집했으니까요. 그는 고문에서 벗어난 사실적 문장인 신체문 때문에 정조로부터 근신까지 당하던 시기였으니 한글 표기가 불가능했던 시기라는 측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글쓰기뿐만 아니라 성격도 참으로 괴팍하다(@乖愎--)(까다롭고 별나다)고 할 수 있겠네요.

https://kydong77.tistory.com/18189

박지원 -능양시집서/ 괴이함에 대하여 (0) 2019.03.21

 

소완정(素玩亭)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화답하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주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 ~ 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記)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號)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주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郡)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풀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주D-002]
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느릿느릿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주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주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贊)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吾爲我似楊氏 오위아사양씨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兼愛似墨氏 겸애사묵씨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屢空似顔氏 루공사안씨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尸居似老氏 시거사로씨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주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道)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주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曠達似莊氏 광달사장씨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參禪似釋氏 참선사석씨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不恭似柳下惠 불공사류하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飮酒似劉伶 음주사류령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劉伶)과 같고
寄食似韓信 기식사한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善睡似陳搏 선수사진박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주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주D-011]술을 …… 같고 :
유령(劉伶)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주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 ~ 989)은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皷琴似子桑 고금사자상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著書似揚雄 저서사양웅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自比似孔明 자비사공명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吾殆其聖矣乎 오태기성의호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주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戶’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는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郞)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은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齊)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燕)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但長遜曹交 단장손조교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廉讓於陵 렴양어릉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慚愧慚愧 참괴참괴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주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주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旣’ 자가 ‘已’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20]장괴애(張乖崖)가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蜀)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어르신은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기(記)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자(童子) 때부터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당시 나의 집에는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했으며,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다시는 지난날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에 기(記)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주D-021]
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已’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47?category=563867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참조]

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⑤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418

[한정주=역사평론가] ‘소완정(素玩亭)’이라 이름 붙인 서재에다가 책을 가득 쌓아놓은 채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살지만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형국에 처하고 만 제자 이서구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친 박지원의 ‘소완정기(素玩亭記)’ 또한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한 훌륭한 실마리가 된다.

“이낙서(李洛瑞: 이서구)가 책을 쌓아둔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고 이름 붙여 편액을 걸고 내개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닐지만 사람의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의 책은 마룻대까지 가득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둘러보아도 책이 아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구만. 아무리 동중서(董仲舒: 한나라의 대학자)의 학문에 몰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화(張華: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의 기억력에 도움 받고 동방삭(한나라의 경술가)의 암송 능력을 빌려온다고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네. 그렇게 되어서야 쓰겠는가?’

[--- 하략---]

[注]연암의 아래글 조회수가 많아 이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의 주석을 보면 연암선생의 박학다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명문장은 그의 독서량에 뿌리를 둔 지식에서 연원함을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훈민정음은 <과농소초>에 표기한 명사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유길준의 국한문혼용체 <서유견문>(1895)이 나오기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세계적 문자인 한문을 고집했으니까요. 그는 고문에서 벗어난 사실적 문장인 신체문 때문에 정조로부터 근신까지 당하던 시기였으니 한글 표기가 불가능했던 시기라는 측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글쓰기뿐만 아니라 성격도 참으로 괴팍하다(@乖愎--)(까다롭고 별나다)고 할 수 있겠네요.

https://kydong77.tistory.com/18189

박지원 -능양시집서/ 괴이함에 대하여 (0) 2019.03.21

 

소완정(素玩亭)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화답하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주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 ~ 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記)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號)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주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郡)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풀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주D-002]
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느릿느릿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주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주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贊)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吾爲我似楊氏 오위아사양씨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兼愛似墨氏 겸애사묵씨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屢空似顔氏 루공사안씨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尸居似老氏 시거사로씨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주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道)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주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曠達似莊氏 광달사장씨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參禪似釋氏 참선사석씨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不恭似柳下惠 불공사류하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飮酒似劉伶 음주사류령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劉伶)과 같고
寄食似韓信 기식사한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善睡似陳搏 선수사진박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주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주D-011]술을 …… 같고 :
유령(劉伶)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주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 ~ 989)은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皷琴似子桑 고금사자상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著書似揚雄 저서사양웅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自比似孔明 자비사공명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吾殆其聖矣乎 오태기성의호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주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戶’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는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郞)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은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齊)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燕)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但長遜曹交 단장손조교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廉讓於陵 렴양어릉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慚愧慚愧 참괴참괴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주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주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旣’ 자가 ‘已’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20]장괴애(張乖崖)가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蜀)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어르신은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기(記)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자(童子) 때부터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당시 나의 집에는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했으며,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다시는 지난날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에 기(記)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주D-021]
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已’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47?category=563867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참조]

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⑤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418

[한정주=역사평론가] ‘소완정(素玩亭)’이라 이름 붙인 서재에다가 책을 가득 쌓아놓은 채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살지만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형국에 처하고 만 제자 이서구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친 박지원의 ‘소완정기(素玩亭記)’ 또한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한 훌륭한 실마리가 된다.

“이낙서(李洛瑞: 이서구)가 책을 쌓아둔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고 이름 붙여 편액을 걸고 내개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닐지만 사람의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의 책은 마룻대까지 가득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둘러보아도 책이 아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구만. 아무리 동중서(董仲舒: 한나라의 대학자)의 학문에 몰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화(張華: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의 기억력에 도움 받고 동방삭(한나라의 경술가)의 암송 능력을 빌려온다고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네. 그렇게 되어서야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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