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이 묘표는 정인보 선생의 이송의 고문에 대한 찬양을 하느라 그의 글을 인용한 글을 덧붙여 길어졌다. 그는 이송의 고문 예찬하고, 칭찬일색인 연암에 대해서도 "탕일하고 기이한 데가" 보인다고 고문복고운동을 펼친 정조처럼 말했다. 운영자는 한문을 잘 모르지만 근세 한문학의 일인자라면 무애 양주동 선생조차 위당 선생을 제일로 치니 뭐라고 토를 달순 없는 노릇이다. 용서가 허락된다면, 이미 그 시대에 사실주의의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는 북학파들의 연행문이 나오면서 고문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점이다. 위당 선생이 이송의 고문을 예찬한 것은 어쩌면 운을 맞춰가며 간결과 생략을 요체로 하는 고문시대를 자신으로 마감해야 하는 안타까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이칭 - 무백(茂伯), 고청(孤靑), 노초(老樵), 서림(西林)

아래 논문 참조

백진우 -老樵 李淞의 『老樵集』과 「湛軒洪德保墓表」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44768

이송이 남긴 자필 문집 『老樵集』(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내용을 개괄하고, 이 저술로부터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송의 생애를 재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홍대용을 위해 지어준 墓表 「湛軒洪德保墓表」가 기존에 정인보와 같은 걸출한 평론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실에서 착안하여 조선후기 한문학사에서 『노초집』이 갖는 의미, 그리고 그의 비지문의 산문사적 의의를 점검해보고자 하였다.

이송,담헌홍덕보묘표/ 발췌

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이송의 묘표는 3쪽 정도이고, 나머지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논평과 명문 발췌이다.

[묘표 중에서]

아! 슬프다. 덕보가 일찌기 나와 담론한 것과 그가 간직했던 마음, 그리고 그 소행 등을 다 진술할 수는 없으나 그 학문이 오로지 平實을 숭상하고 과월하고 교격한 것이 없으며, 세속 선비들이 이론만 숭상하고 實行實用을 전연 방치함에 대해 일찍부터 민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고금 인물들의 正邪 是非를 논함에 그 抑揚取捨한 것은 전배들의 定案밖에 뛰어난 것들이 많았다. 그가 지니 大心이야말로 공평하게 보고 이것 저것 다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으니, 大道에 돌아가 뾰족하고 작고 좁고 사사로운 것을 버리는 것은 진실로 지금 세상에 있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며, 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이런 道가 보급되었으면 한다.

[정인보 선생의 西林 이송의 고문 인용과 논평]

이하는 담헌집을 해설하고 이 글을 부록란에 덧붙인 위당 정인보 선생의 논평이다.

인보가 난곡 李丈 댁에 가서 이월암참봉집을 보니, 구나말에 서림 이송이 월암을 곡한 제문이 붙어 있다. 그 제문의 문사가 심히 고상하였고 그 아래에는 대연(이면백의 호)의 기록한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참봉군이 본래는 西林을 알지 못했는데 羅烈이 정릉의 令이 되어 참봉군을 초청함에 참봉군이 그 直所에 이르렀는데, 이때 西林도 마침 와서 같이 잤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다시 소식이 서로 끊겼고 참봉군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또한 서림이 참봉군을 곡한 제문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승지인 강인(표암의 아들)이 일찌기 서림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참봉군에 대한 말이 나오니, 서림은 이 제문의 초를 내어 보였다. 강인이 빌어서 자기집에 가져가려고 청하자, 서림이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마침내 암송하여 돌아가서 기록하여 두었노라."

하였다.

(... 중략 ... )

서림의 글이 과연 이렇게도 귀한 것인가! 1개월 후에 영선이 이 묘표의 글을 가지고 왔기에 인보는 읽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 이 글이야말로 바로 소위 고문의 전아한 것을 훌륭히다한 글이다."고 하였다.

연암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蕩逸(탕일)하며 奇異한 데가 보이지마는 醇實(순실)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 때 담헌을 아는 면 같은 것이 서림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 뿐더러 그 홀로 아는 데 이르러서는 염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뿐이겠는가!

(... 중략 ... )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西林의 詩文은 비록 이것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農巖 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참고]

농암 이현보 신도비 [聾巖李賢輔神道碑]

 

 

 

 

 

위 그림 오는쪽은 홍대용이 만든 망원경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

한문 원문은 아래책 참조.

박지원 연암집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경인문화사,1974, p.51. 

박지원 연암집 1/3책,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계명문화사, 1986, pp.201-204.

 

번역문은 아래 책 참조.

박지원저 홍기문역,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보리, 2004, pp.396-399.

홍대용,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69-372.

[참조]

*이송,담헌홍덕보묘표, 국역 담헌서4, 민족문화추진회, pp.372-378.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

https://ww6798.blog.me/221277054020

덕보(德保)가 별세한 지 3일이 되던 날 손님 중에서 연사(年使 해마다 가는 동지사(冬至使) 를 말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이가 있는데,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통과하게 된다. 삼하 에는 덕보의 친구가 있는데, 성명은 손유의(孫有義)로 호(號)는 용주(蓉洲)이다. 지난해 내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던 길에 용주를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써 놓게 되어서 거기에 덕보가 우리 나라 남쪽 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까지를 갖추 말하고 또 가져간 토산물 몇 가지를 놓아 두어 정의를 표하고 돌아왔었다. 용주가 그 편지를 펴 보면 응당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을 알았을 것이리라.

그래서 손님 가는 편에 그에게 부고하기를, “건륭(乾隆) 계묘년(1783, 정조 7) 모월 모일에,

조선 사람 박지원(朴趾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용주(蓉洲) 족하(足下)에게 아룁니다. 내 나라 전직 영천 군수(榮川郡守) 홍담헌(洪湛軒), 이름은 대용(大容), 자(字)는 덕보(德保)가 금년 10월 23일 유시(酉時)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에 아무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말을 못하더니, 얼마 뒤에 곧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요, 아들 원(薳)은 통곡 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와 손수 글을 올려 부고를 하지 못하고 또 양자강(揚子江) 이남은 인편의 계제가 없었습니다. 부디 비옵건대, 이를 대신하시어 오중(吳中)에 부고하여,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의 별세한 날을 알게 하여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됨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하여, 손님을 보내고 나서, 손수 항주(杭州) 사람들의 서화(書畫)와 편지, 그리고 시문 (詩文) 등을 점검하니 모두 10권이었다.

이것을 빈소(殯所) 곁에 진설해 놓고 구(柩)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노니,

“아! 슬프다. 덕보는 통달하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미하며, 더욱 율력(律曆)에 장기가 있어 혼의(渾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思慮)가 깊고 골독(汨篤: 한 가지의 일에 정신을 씀)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機智)가 있었도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地球)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 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 학설이 묘미하고 현오(玄奧)하였다. 다만 저서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 만년에 있어서는 더욱 지구가 돈다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세상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찍이 스스로 과거할 것을 그만두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서 한가히 앉아 명향(名香)을 태우고 거문고와 비파를 두드리면서 ‘나는 장차 아무 욕심없이 고요히 자희(自喜)의 태도로 마음을 세속 밖에 놀게 하겠노라’ 하는 것만 보았지, 특히 덕보는 서물(庶物)을 종합정리하여 체계있게 분석하였으므로, 방부(邦賦)를 맡고 절역(絶域)에 사신 갈 만하며, 통어(統禦)의 기략(奇略)이 있었다는 것은 모른다. 그런데, 그는 홀로 혁혁(赫赫)하게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했던 까닭에 겨우 몇 군의 원을 지내면서 부서(簿書)를 조심하고 기회(期會)에 앞서 일을 잘 처리함으로써, 하부 관리들은 할 일이 없고 백성들은 잘 순화되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언젠가 그는 그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갈 때 따라가 유리창(琉璃廠)에서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 균(潘庭筠) 등을 만났다. 세 사람은 다 집이 전당(錢塘)에 있는데 그들은 모두 문장ㆍ예술의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交遊)한 이들도 모두 해내(海內 중국 전토를 가리킴)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大儒)라 하여 추복(推服)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언(言)은 모두 경지(經旨)ㆍ천인 성명(天人性命)ㆍ고금 출처 대의(古今出處大義)에 대한 변석 (辨析)이었는데 굉사(宏肆)하고 준걸(儁傑)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었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황천(黃泉)에서 서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생시에 학문에 더욱 면려하기를〉 맹세하자’ 하였다. 〈덕보〉는 엄성과 특히 뜻이 맞았으니 그에게 풍간(諷諫)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엄성은 크게 깨달아 이에 뜻을 결단하였다. 그 후 남쪽으로 돌아간 뒤 몇 해 만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반정균은 덕보에게 부고를 하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哀辭 제문)를 짓고 향폐(香幣)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이 대상(大祥)이었다. 대상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西湖)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르기를 ‘명감(冥感)의 이른 바다.’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嚴果)가 분향 치전(致奠)하고 애사를 읽어 초헌(初獻)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앙(昻)은 〈덕보〉를 백부라고 써서 그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 왔는데, 전전(轉轉)하여 9년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影幀)이 있었다. 엄성은 민(閩)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吳下)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성하게 전하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 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하였으니 이에 대한 사실은 주문조(朱文藻)란 사람이 편지를 하여 그 형상을 말해 주었다.

아! 슬프다. 그가 생존하였을 때 낙락(落落)한 것이 마치 왕고(往古)의 기적(奇蹟)과 같았으니, 그래서 지극한 성품의 좋은 벗이 있어 그의 이름을 반드시 널리 전하려고 함이라. 비단 그 이름이 강남(江南)에만 두루 전해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내가 묘지(墓誌)를 하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썩지 않을 것이다.”

고(考 돌아간 아버지)는 휘(諱)가 역(櫟)인데 목사(牧使)요, 조고(祖考)는 휘가 용조(龍祚)인데 대사간(大司諫)이요, 증조고(曾祖考)는 휘가 숙(潚)인데 참판(叅判)이다. 그리고 모(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군수 방(枋)의 딸이다.

덕보는 영종(英宗) 신해년(1731, 영조 7)에 나서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이어서 돈녕부 참봉(敦寧府叅奉)으로 옮겼으며, 세손 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에 고쳐 제수되었고, 그 다음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승진되었다가 나중에는 종 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전직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승진하여 수년 만에 어머니의 늙으심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딸이요, 자녀로는 1남 3녀를 낳았으니, 사위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이다. 그 해 12월 8일 청주(淸州) 아무 좌향의 둔덕에 장사하다.

[출처] 홍덕보묘지명-홍대용을 향한 박지원의 존경|작성자 ww6798

[참고] 연행은 연암보다 10년 앞섰지만, 담헌은 국적이나 연령을 초월하여 師友면 연령에 개의치 않았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여신념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신염재와 같이 지어서 박연암 지원에게 주다-홍대용(洪大容)

국역 담헌서1,민추. pp.388-389.

原隰饒黍稻(원습요서도) : 들판에 기장과 벼 풍년이고
邊圉息戰爭(변어식전쟁) : 변방엔 전쟁이 끝났는가 하오
喬木有餘蔭(교목유여음) : 키 큰 나무에는 남은 소리 짙어 있고
丹帷列俊英(단유렬준영) : 단유에는 뛰어난 선비 줄지어 앉았오
四民各有業(사민각유업) : 사농공상 백성들 모두 직업을 가졌으니
王化日淸明(왕화일청명) : 왕의 교화가 나날이 말고 밝아진다오
瑣瑣側陋子(쇄쇄측루자) : 자질구레하고 미천한 자까지도
慚愧停筆耕(참괴정필경) : 붓을 팽개치고는 것 부끄러워하오
守分以全身(수분이전신) : 분수 지켜서 몸 온전히 하여
邱壑寄餘生(구학기여생) : 산골에서 여생을 마치자오
安危稷契在(안위직계재) : 나라의 안위에 직설같은 신하가 있는데
豈敢忘周京(기감망주경) : 어찌 감히 주나라 서울을 잊겠소
飽暖思恩澤(포난사은택) :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으며 임금 은택 바라고
嘯歌頌昇平(소가송승평) :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태평성세나 송축하네
素乏經濟姿(소핍경제자) : 본래 경제의 토대가 결핍되어
匪擬高尙情(비의고상정) : 고상한 뜻 가지려고 하지 않았소
雨露雖均布(우로수균포) : 비와 이슬의 혜택 고르게 편다 하여도
梧棘異枯榮(오극이고영) : 오동나무와 가시나무는 영고성쇠 다르다오
但願隆皇道(단원륭황도) : 다만 내 소원은 황도가 융성하여
唐虞同弟兄(당우동제형) : 요임금 순임금이 세운 당과 우와 견주었으면
長從由光蹟(장종유광적) : 허유ㆍ무광의 자취 쫓아서
終偸逸民名(종투일민명) : 마침내 일민의 이름 훔치려 한다오

https://www.youtube.com/watch?v=1qqmoEnYQHA

건곤일초정주인(乾坤一草亭主人)-홍대용(洪大容)

국역 담헌서1,민추. pp.384-389.

추호(秋毫)를 크다 하고 태산을 작다 함은 莊周의 과격한 말이로다. 지금 내가 건곤을 봄을 한낱 草亭처럼 여기니, 나도 장차 장주씨의 학문을 할 참인가? 30년 동안 성인의 글을 읽었던 나인데, 어찌 儒에서 도망하여 墨에로 들소냐? 말세에 살며 화란을 겪저 하니, 눈의 현란함과 마음의 아픔이 극심하어서라.

아! 物我가 이뤄졌는지 않은지도 모르는데, 귀천 영욕인들 논해 무엇하랴? 잠시 살다 죽는 것은 蜉蝣(부유:하루살이)의 생애보다 못하도다. 아서라, 내 뜻대로 즐기며 이 정자에 누워서 이 몸을 조물에 맡기려 하노라.

買宅深巷裏(매댁심항리) : 깊은 마을 골목에 집 샀으니
西園一草盧(서원일초로) : 서쪽 동산 한 채의 초갓집이라
雖無山泉賞(수무산천상) : 볼 만한 산과 샘 없어도
林壑頗淸虛(림학파청허) : 촘촘한 숲의 골짜기 깨끗하구나
繁陰翳崩岸(번음예붕안) : 짙은 그늘은 무너진 언덕 가리고
幽草遍層除(유초편층제) : 우거진 풀은 층계 끝을 둘렀구나
門無長者轍(문무장자철) : 문 앞엔 어른의 수레 없으나
床有遠方書(상유원방서) : 책상엔 원방의 서적 쌓여있구나
永懷先師訓(영회선사훈) : 선사의 교훈 길이 생각하니
日與世人疏(일여세인소) : 날로 세상 사람과 멀어지는구나
無競免積毁(무경면적훼) : 경쟁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고
不才絶虛譽(불재절허예) : 재주없으니 헛된 명예 있겠는가
好友時叩門(호우시고문) : 좋은 친구 수시로 찾아오면
壺酒有嘉蔬(호주유가소) : 아름다운 산나물 술안주 있다오
淸琴嚮危欄(청금향위란) : 높은 헌함에 비껴 서서 거문고 타니
中曲且悲噓(중곡차비허) : 곡조 속의 슬픈 감상 그 누가 알리오
棄置固天放(기치고천방) : 불우함은 진정 하늘이 버림인가
素心或虛徐(소심혹허서) : 본래의 마음이 혹 태연해지려나
憂樂無了時(우악무료시) : 근심과 즐거움 다할 때는 없나니
物性奈如予(물성내여여) : 물성이 나에게는 어찌할 생각인가

 

증원현천귀전사이수1(贈元玄川歸田舍二首1)-홍대용(洪大容)
원 현천이 전사로 돌아갈 준 두 편의 시

국역 담헌서1,민추. pp.396-398.

微月翳禁林(미월예금림) : 금원의 숲엔 달빛 희미하고
商籟嚮園墟(상뢰향원허) : 옛 동산엔 가을 바람 서늘하다
寂寂窮巷士(적적궁항사) : 쓸쓸한 시골 선비
暖暖守室廬(난난수실려) : 침침한 빈 집 지킨다
永懷玄川子(영회현천자) : 영원히 마음에 있는 현천자도
心與世俗踈(심여세속소) : 마음은 세속을 멀리 하는구나
揮手仕官徑(휘수사관경) : 손 흔들어 벼슬길 거절하고
抗志雲水居(항지운수거) : 뜻을 거슬러 운수 따라 사는구나
松郵有脚春(송우유각춘) : 송라찰방 때에는 봄볓이 있었고
海槎行秘書(해사행비서) : 일본에 사신 갈 땐 비서 노릇도 하였다
才難不其然(재난불기연) : 인재 얻기 어렵다더니 그렇지 않은가
國士歸樵漁(국사귀초어) : 이런 국사가 시골로 돌아간다네
余亦思長住(여역사장주) : 나 또한 은거할 생각 있으니
西湖策蹇驢(서호책건려) : 서호로 나귀 채찍질 하려하노라

 

증원현천귀전사이수2(贈元玄川歸田舍二首2)-홍대용(洪大容)
원 현천이 전사로 돌아갈 준 두 편의 시

銀海漭無垠(은해망무은) : 은빛 바다 끝이 없는데
島夷有名都(도이유명도) : 섬 오랑캐에는 이름난 도읍 있도다
磅礴富士山(방박부사산) : 부사산은 높이 솟고
宏濶琵琶湖(굉활비파호) : 비파호는 광활하기도 하다
伊藤旣鳳擧(이등기봉거) : 이등은 이미 고관이었고
徂徠亦鴻儒(조래역홍유) : 조래 또한 큰 선비였도다
四海皆天民(사해개천민) : 사해 모두 하늘이 낸 백성이니
賢俊非一途(현준비일도) : 뛰어난 재주 한 길만 있는 것 아니니라
偉哉玄川翁(위재현천옹) : 위대하구나, 현천옹이여
耿介懷遠圖(경개회원도) : 고상한 자질로 먼 계획 품었도다
譚經篤倫綱(담경독륜강) : 경서를 연구하여 윤강 돈독히 하고
衛道崇孔朱(위도숭공주) : 도를 지키어 공자ㆍ주자 숭배한다
翰墨亦有神(한묵역유신) : 글짓는 일 또한 묘기가 있으니
照耀紅氍毹(조요홍구유) : 붉은 담요에 빛이 날것이다
斗南朝列侍(두남조렬시) : 아침엔 두남에게 강론하고
鶴臺夕趨隅(학대석추우) : 저녁엔 학대에게 배우리라
言貌雖異俗(언모수이속) : 말과 모습은 비록 풍속이 다르지만
氣義皆吾徒(기의개오도) : 기상과 의리는 우리와 같도다
韓人矜褊心(한인긍편심) : 우리 나라 사람은 편협한 마음 자랑하며
深文多譖誣(심문다참무) : 깊은 문장으로 속임이 많도다
偉哉玄川翁(위재현천옹) : 위대하도다, 현천옹이여
博愛遵聖謨(박애준성모) : 널리 사랑함으로써 성인의 법을 따르리라

[출처]http://cafe.daum.net/ygmui/52qe/8327?q=%EC%97%AC%EC%8B%A0%EB%85%90%EC%9E%AC%EB%B6%80%EC%A6%9D%EB%B0%95%EC%97%B0%EC%95%94%EC%A7%80%EC%9B%90

 

홍대용의 시

증원약허(贈元若虛)-홍대용(洪大容) 원약허에게 드립니다-홍대용(洪大容)愛君蘭蕙姿(애군란혜자) : 그대의 향기로운 인품을 사랑하오早悅山水音(조열산수음) : 젊어서부터 자연의 소리를 좋아했지文心述家訓(문심술가훈) : 아름다운 마음씨 가정 교육 말하고眞意見疏襟(진의견소금) : 진실한 뜻은 넓은 흉금을 보여주네長揖桃李谿(장읍도리계) : 벼슬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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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홍대용의 <抗傳尺牘>에 연암 박지원의 <회우록서>가 실려 있어 반가운 마음에 재록합니다.

국역담헌서2, 고전국역총서74, 민족문화추진회, 1974,1986.

회우록서(會友회우록서(會友錄序)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 제1권

[주C-001]회우록서(會友錄序) : 담헌(潭軒) 홍대용(洪大容 : 1731 ~ 1783)이 편찬한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 부친 서문이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항주(杭州) 출신의 선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筠) · 육비(陸飛)와 교분을 맺고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衕)에 있던 그들의 여사(旅舍)에서 수만 언(言)의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귀국한 뒤인 1766년 음력 6월 15일 엄성 · 반정균 · 육비와 나눈 필담과 그들을 만나게 된 시말 및 왕복 편지들을 3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 곧 《건정동회우록》이라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ㅁ庭筠書》 《담헌서》 외집(外集) 권1에 연암과 민백순(閔百順)이 지은 2종의 회우록서가 수록되어 있다.  *潘庭筠(清)字蘭公,一作蘭垞. 号德国园。

우리나라 36도(都)의 땅을 돌아보면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여 바닷물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이름난 산과 큰 멧부리들이 그 중앙에 서리어 있어, 들판은 백 리가 트이어 있는 곳이 드물고 고을은 천 호가 모여 있는 곳이 없으니 그 지역 자체가 벌써 편협하다 하겠다.

[주D-001]36도(都) :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동국지지(東國地誌)》에 의거하여 단군조선의 왕검성부터 고려의 개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의 왕도(王都)를 노래한 시이다. 이로 미루어 36도(都) 역시 36개의 왕도(王都)를 뜻하는 듯하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나라에 상고 이후 모두 36개 왕국의 도읍지가 있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02]천 호 :
원문은 ‘千室’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萬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의 이른바 양(楊) · 묵(墨) · 노(老) · 불(佛)이 아닌데도 의론의 유파가 넷이며, 옛날의 이른바 사(士) · 농(農) · 공(工) · 상(商)이 아닌데도 명분의 유파가 넷이다. 이것은 단지 숭상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을 뿐인데도 의론이 서로 부딪치다 보니 진(秦)과 월(越)의 거리보다 멀어진 것이요, 단지 처한 바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도 명분이 비교하고 따지는 사이에 화(華)와 이(夷)의 구분보다 엄하게 된 것이다.

[주D-003]양(楊) · 묵(墨) · 노(老) · 불(佛) :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학파, 노자(老子)의 도가(道家)와 불타(佛陀)의 불교를 말한다. 유교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하는 네가지 유파이다.
[주D-004]의론의 유파(流派)가 넷이며 :
김택영(金澤榮)의 《중편연암집(重篇燕巖集)》의 주(注)에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사색당파(四色黨派)를 말한다고 하였다.
[주D-005]명분의 유파가 넷이다 :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의 주에 사당인(四黨人), 비사당인(非四黨人), 중인(中人), 서족(庶族)을 말한다고 하였다.
[주D-006]진(秦)과 월(越) :
춘추(春秋) 시대에 진 나라는 중국의 서북에 있고 월 나라는 동남에 있어 서로 거리가 지극히 멀므로 소원한 사이를 말할 때 진월(秦越)이라 이른다.

그리하여 형적이 드러남을 꺼려서 서로 소문은 들으면서도 알고 지내지 못하며, 신분상의 위엄에 구애되어 서로 교류를 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한다. 마을도 같고 종족도 같고 언어와 의관(衣冠)도 나와 다른 것이 극히 적은데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으니 혼인이 이루어지겠으며, 감히 벗도 못 하는데 함께 도를 도모하겠는가? 이러한 몇몇 유파가 아득한 수백 년 동안 진과 월, 화와 이처럼 서로 대하면서 집을 나란히 하고 담을 잇대어 살고 있으니, 그 습속이 또 어찌 그리도 편협한가.

[주D-007]함께 도를 도모하겠는가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는 “군자는 도(道)를 도모하지 먹고 사는 문제는 도모하지 않는다.〔君子謀道 不謀食〕”고 하였고, “도가 같지 않으면 그와 더불어 도를 도모하지 못한다.〔道不同 不相爲謀〕”고 하였다.


홍군 덕보(洪君德保)가 어느 날 갑자기 한 필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서, 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너절한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항주(杭州)에서 온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틈을 엿보아 여사(旅舍)에 걸음하여 마치 옛 친구나 만난 것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D-008]홍군 덕보(洪君德保) : 덕보는 홍대용의 자(字)이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근원이며, 주자학(朱子學)과 육왕학(陸王學)의 차이며,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시기며, 출처(出處)와 영욕(榮辱)의 분별 등을 한껏 토론하였는데, 고증하고 증명함에 있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서로 충고하고 이끌어 주는 말들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지기로 허여하였다가 마침내 결의하여 형제가 되었다.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기를 여색을 탐하듯이 하고, 서로 저버리지 말자 하기를 마치 동맹을 맺기로 서약하듯 하니 그 의기가 사람을 눈물겹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주D-009]진퇴(進退)와 소장(消長) : 진퇴는 군자와 소인의 교체, 소장은 음양(陰陽)의 변화를 가리킨다. 군자가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는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는 시기이며, 군자가 진출하고 소인이 물러나는 것은 음이 쇠하고 양이 성하는 시기이다.
[주D-010]출처(出處)와 영욕(榮辱) :
출처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벼슬할 때와 은거할 때를 잘 분별해야 영예를 누리고 치욕을 면할 수 있다.


아, 우리나라와 오(吳)의 거리가 몇 만 리라 홍군이 세 선비와는 또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한마을에서 살면서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더니 지금은 만 리나 먼 나라 사람과 사귀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과 벗을 하였으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언어와 의관이 똑같아도 서로 벗하려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느닷없이 언어가 다르고 복색이 다른 속인들과 서로 마음을 허락함은 웬일인가?

[주D-011]오(吳) : 항주(杭州)가 있는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홍군이 우수 어린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내 감히 우리나라에 벗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벗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오. 실로 처지에 제한되고 습속에 구속되어 그런 것이니 마음속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소. 내 어찌 중국이 옛날 중국이 아니며 그 사람들이 선왕의 법복(法服)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가 밟던 땅이 왜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사귀는 선비들이 어찌 제(齊), 노(魯), 연(燕), 조(趙), 오(吳), 초(楚), 민(閩), 촉(蜀)의 널리 보고 멀리 노닌 선비들이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읽는 글들이 어찌 삼대(三代) 이래 사해만국(四海萬國)의 극히 많은 전적(典籍)이 아니겠소. 제도는 비록 바뀌었으나 도의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옛 중국이 아닌 지금 중국에도 그 나라의 백성으로는 살고 있을망정 그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없겠소.

[주D-012]선왕의 법복(法服) : 고대의 성왕(聖王)이 예법에 맞게 차등을 두어 제정했다는 옷을 말한다. 천자 이하 다섯 등급으로 나눈 오복(五服)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고 하였다. 청 나라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한족에게 만주족의 옷을 입도록 강제하였다.
[주D-013]극히 많은 전적(典籍) :
원문은 ‘極博之載籍’인데,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무릇 학식 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그래도 육경(六經)에서 진실을 찾는 법이다.〔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라고 한 구절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그렇다면 저들 세 사람이 나를 볼 때에도 화(華)가 아닌 이(夷)라고 차별하며 형적이 드러나고 신분의 위엄이 손상될까 꺼리는 마음이 어찌 없을 수 있겠소. 그러나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절 따위는 타파해 버리고서 진정을 토로하고 간담을 피력하니, 그 통이 매우 큰 점으로 볼 때 어찌 명성과 세리(勢利)를 좇느라 쩨쩨하고 악착스러워진 자들이겠소.”

[주D-014]그 통이 …… 때 : 원문은 “其規模之廣大”인데, 홍대용은 그의 연행록(燕行錄)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통이 크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세심한 점을 들었다. 《湛軒書 外集 卷8 燕記 沿路記略》

그러고는 드디어 세 선비와 필담한 것을 모아 세 권으로 만든 책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면서,

“그대가 서문을 써 주시오.”

하였다. 나는 다 읽고 나서 이렇게 감탄하였다.

“통달했구나, 홍군의 벗함이여! 내 지금에야 벗 사귀는 도리를 알았도다. 그가 누구를 벗하는지 살펴보고, 누구의 벗이 되는지 살펴보며, 또한 누구와 벗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내가 벗을 사귀는 방법이다.”

[담헌서 추기] 연암 박지원은 序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39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담헌서 추기] 연암의 서문 아래에

"해동 丹室居士 閔百順 順之는 찬술한다"는 찬술문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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