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謂兩班.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양반'이라고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五更常起 點硫燃脂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目視鼻端 會踵支尻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東萊博議 誦如氷瓢.
"동래박의"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忍饑耐寒, 口不說貧
叩齒彈腦 細嗽嚥津 *嗽(수):기침.
굶주림과 추위를 인내하며 입에는 가난이라는 말을 담지 않는다.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袖刷毳冠 拂塵生派.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盥無擦拳 潄口無過. *潄(수):양치질하다.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長聲喚婢 緩步曳履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手毋執錢 不問米價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暑毋跣襪 飯毋徒髻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食毋先羹 歠毋流聲*歠(철):마시다.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下箸毋舂 毋餌生葱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嘬(최):물다. *窳(유):비뚤다.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忿毋搏妻 怒毋踢器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毋拳毆兒女 毋罵死奴僕. *毆(구):때리다.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죽일놈의 종놈이라고 꾸짖지 말아야 한다.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叱牛馬 毋辱鬻主.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病毋招巫 祭不齋僧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에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爐不煮手 語不齒唾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毋屠牛 毋賭錢.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도박도 하지 말아야 한다.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양반의 규범에 한 가지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城主 旌善郡守 押. 座首別監 證署.”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於是 通引搨印 *搨(탑):박다, 베끼다.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錯落聲中嚴鼓 斗縱參橫.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戶長讀旣畢.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양반이 겨우 이것뿐입니가?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 지나치게 재산을 몰수합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제2문권-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
於是 乃更作券曰,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維天生民 其民維四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焉.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橐. *橐(탁):전대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進士三十 乃筮初任 猶爲名蔭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은자주] 연암도 쉰 살에 음관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지체 높은 음관을 잘 섬기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희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됩니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室珥治妓 庭穀鳴鶴.
방안의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窮士居鄕 猶能武斷.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무력을 마음대로 단행할 수 있다.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1) 양반가사의 표기문자가 국한문혼용체이며 한자를 즐겨 쓰는 데 비해 규방가사는 한글을 주로 쓰고 있다. 2) 양반가사의 명칭은 ‘가사(歌辭 · 歌詞)’ · ‘별곡(別曲)’ · ‘곡(曲)’ · ‘사(詞)’ · ‘가(歌)’ 등으로 다양하고 제목 또한 이에 준하는 데 비해 규방가사의 명칭은 ‘가사’ 또는 ‘두루마리’이며, 제목은 거의가 ’○○○가라’는 접미사 ‘라’를 붙인다. 3) 양반가사의 구성은 입체적인 면과 단일형을 취하는 데 비해 규방가사의 구성은 평면적인 면과 복합형을 많이 보인다. 4) 양반가사는 4음보에 3 · 4조가 우세한 것도 있지만 규방가사는 4음보에 4 · 4조가 정제일관(整齊一貫)된 것이 우세하다. 5) 양반가사는 민요형식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규방가사는 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6) 양반가사는 소설 · 내간(内簡) · 제문을 흡수하지 않았으나 규방가사는 이들을 흡수하였다. 내간 · 제문 등도 4 · 4조를 읊는 형식이 바로 그것인데 특히 제문의 경우는 서두의 항용구인 ‘유세차……감소고우’까지는 산문의 형식을 취하나 그 다음부터 분문에 가서는 4 · 4조로 된 가사형식을 원용하고 말미에 ‘상향’ 두 자만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7) 양반가사의 많은 작품들이 시조의 종장형식을 답습하고 서두구(序頭句)에는 전형이 없으며 발문이 없는 데 비해, 규방가사는 서두구와 종결형식과 발문에 독특한 것이 있다. 먼저 서두구를 보면 ‘어와세상 사람들아 이내말삼 드러보소.’와 같은 호소청유형, ‘어화 애달할 샤이 내 신세 애달할샤 이 내 신세 애달할샤 사 건곤부모 졍한 후의 녀 되엿도다.”와 같은 여신인과형(女身因果形), ‘이 때는 어느 땐고 고 삼월춘풍 조흔 때라.’와 같은 계절형. ‘산아산아 일월산아 영남 에 솟은 산아.’와 같은 민요형 등의 전형을 보인다. 다음으로 종결형식은 4 · 4조 그대로 연장되다가 끝나며, 불교적인 것은 ‘나무아미타불’로 끝난다. 전형적인 규방가사들의 끝에는 일정한 형식의 발문이 붙어 있다. 8) 그 체제와 보존형식도 양반가사와는 달리 두루마리 형식으로 필사하여 둥글둥글하게 말아두는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규방가사의 내용은 각양각색이나, 그 주제와 소재는 거의가 양반부녀들의 생활주변에서 얻은 것이다. 엄격한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해서 주제와 소재를 택하였기에 교훈적인 것이 원류를 이루며, 속박된 여성생활의 고민과 정서를 호소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문물제도 · 인심 · 풍속, 자연에의 관조, 가문의 기쁨, 놀이의 행락 등이 아류를 이룬다.
내용을 유형별로 나누어보면
1) 시집갈 또는 시집간 딸이 지켜야 할 내용을 노래한 <계녀가> · <규행가>와 같은 계녀교훈류(誡女敎訓類),
*심경호 교수는 '천재의 광기'란 제목으로 동영상을 올렸지만, 국법이나 자신에게 닥칠 위협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렬(車裂)당한 사육신들의 시신을 노량진 언덕에 거둔 것이나 은둔과 방랑으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도, 죽는 날까지 "How to live?"의 문제를 고심한 자취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시습이야말로 만해 한룡운 선생의 선범(先範)이었다. 승려의 길을 선택하여 同安常察의 <十玄談> 을 주해한 것까지도. 두 분은 삶의 본질을 간파하고 그 역사적 행위의 정당한 평가까지 확보한 천재들이셨다.
이런 취지의 시각에서 글제목을 <천재의 당위론적 삶>으로 바꾸었다. 그분들은 예견되는 앞날의 고통과 고난애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의로운 삶을 선택했다. 통치자들의 위협도 감내해 가면서.....
그들이 名詩를 남긴 것은 다름 아닌 삶의 진정성 표출에 있다고 하겠다. 만해 선생이 당시 유행하던 3음보 형식을 버리고 산문시를 쓴 것도 그 초점은 진정성의 전달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의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겠지만.
번역에 '금오산'은 운영자가 덧붙임.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금오산에서 유래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문맥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이 글의 하단에 그의 시 <將進酒>를 소개한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김시습의 '自寫眞贊'부터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기 모습에다 노년의 오만상을 찌푸린 모습까지 그렸으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모습은 노추에도 변함없다. 허나 주름 때문인가 많이 온화한 모습이다
자화상이야 서구에도 많지만 찬을 쓴다는 게 희귀한 발상이다.
贊(찬)이란 찬양, 찬미의 의미다. 자기 자랑 해 봤자 듣는이는 귓전으로 듣는다. 그래서인지 내용인즉 찬이 아니라 자기 비하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비단 필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오던 神童의 그런 호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47세 때 환속하여 재혼했으나 1년도 못견뎌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참으로 별난 천재고, 그의 삶은 별난 인생살이였다. 우리는 이를 험한 산길에 비유하여 흔히 기구하다(崎嶇--) 고 말한다. '69다방'까지 경영했던 <날개>의 작가 이상도 그렇거니와 왜 천재들은 박복하고 불행한가? 그것이 알고 싶다.
Partirono le rondini dal mio paese freddo e senza sole 제비들이 떠났습니다 차갑고 태양이 없는 나의 나라에서 Cercando primavere di viole, nidi d’amore e di felicità. 오랑캐 꽃들이 피는 봄을 찾아서, 그리고 사랑과 행복의 둥지를 찾아서.
La mia piccola rondine partì 나의 어여쁜 제비는 떠났습니다 Senza lasciarmi un bacio senza un addio partì. 나에게 한 번의 입맞춤도 남기지 않고, 작별의 인사도 없이 떠났습니다.
Non ti scordar di me, la vita mia è legata a te 나를 잊지 말거라, 나의 삶은 너와 연결이 되어 있단다 Io t’amo sempre più, nel sogno mio rimani tu. 나는 너를 여전히 더욱 사랑한다, 나의 꿈 속에 너는 남아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