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조회수가 늘어나 재록합니다.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종북소선(鍾北小選), 연암집 제 7 권 별집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다 찾아 눈으로 꼭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해 보니, 천만 가지 괴기(怪奇)한 것들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고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주D-001]오리를 …… 여기니 :

다리가 짧은 오리가 다리가 긴 학을 넘어지기 쉽다고 비웃는다는 뜻이다. 부단학장(鳧短鶴長)이란 말이 있다. 《장자(莊子)》 병무(騈拇)에 “길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며, 짧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 다리를 이어 주면 걱정하고, 학은 다리가 길지만 그 다리를 자르면 슬퍼한다.”고 하였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色〕 안에 들어 있는 빛〔光〕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形〕가 있는 것치고 맵시〔態〕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美人)을 관찰해 보면 그로써 시(詩)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만약 다시 그녀에게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하는 것처럼 단정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塑像)처럼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

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

를 요염하다고 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

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

 

[주D-002]양 귀비(楊貴妃)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애첩이다. 양 귀비가 평소 치통을 앓았는데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를 그린 양귀비병치도(楊貴妃病齒圖)가 있다.


[주D-003]번희(樊姬)더러 …… 말라고 :

번희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영현(伶玄)의 애첩이었던 번통덕(樊通德)을 가리킨다. 영현이 번희에게 조비연(趙飛燕)의 고사를 이야기하자, 번희가 손으로 쪽을 감싸 쥐고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한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도 있다. 《趙飛燕外傳 附 伶玄自敍》


[주D-004]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 :

제(齊) 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가 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땅에다 깔아 놓고 애첩인 반비(潘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걸어가게 한 후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보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였다. 《南史 齊紀下 廢帝東昏侯》


[주D-005]손바닥춤〔掌舞〕 :

한 나라 때 유행한 춤으로 춤사위가 유연하고 경쾌하다. 한 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이 잘 추었다고 한다. 장상무(掌上舞) 또는 장중무(掌中舞)라고도 한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

은 자(字)가 계지(繼之)인데 시(詩)를 잘하였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해서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체를 띠고 있고 또 어느새 송명(宋明)의 시체를 띠고 있다. 송명의 시라고 말하려고 하자마자 다시 성당의 시체로 돌아간다.

 

[주D-006]종선(宗善) : 1759 ~ 1819. 연암의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서장자(庶長子)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히 푸르렀다 홀연히 붉었다 하고, 세상 사람들이 미인으로 하여금 재계하는 모습이나 소상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지며 쪽을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노인(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

에서 쓰노라.

 

[주D-007]연상각(烟湘閣) : 연암이 안의 현감(安義縣監) 시절 관아(官衙) 안에 지었다는 정각(亭閣) 중의 하나이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7944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정희"

그림을 해석하면, 내 마음은 벗님들 덕분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아! 오두막이야 썰렁하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Jyx9oAoq54E&t=150s 

 

Jose Carreras, Placido Domingo, Luciano Pavarotti

https://www.youtube.com/watch?v=0mGoYySWw_0 

 

 

https://kydong77.tistory.com/21236

 

추사 김정희, 세한도 발문& 서귀포 추사유배지/ 성읍민속마을

집앞의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kydong77.tistory.com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6533615

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원문과 번역문.

 藕船是賞 阮堂

-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주다. 완당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길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때에 해 낸 일이 아니다.  (……하략……)

이하의 편지 내용은 위 포스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병훈, 추사 적거지와 세한도

http://www.sonahmoo.com/12048

1840년 6월,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수행하여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가 되었던 연행燕行을 30년 만에 다시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년 8월 하순, 안동김씨 세력의 음모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 자제로서 승승장구하던 추사의 삶은 하루아침에 파탄에 이른다.
당시 충남 예산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의금부 금부도사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된다. 이후 추사는 6차례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또한 곤장 36대를 맞을 정도로 참담한 수모와 고초를 겪었다.
1840년 9월 초, 추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만을 건진 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약 없는 제주 유배 길을 떠났다.
1840년 9월 말, 추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으로 건너갔다. 80리길을 더 들어가 서귀포시 대정읍 송계순의 집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고 춥고 험난한 지역이었다. 추사는 얼마 후 다시 강도순의 집 사랑채에 짐을 풀었지만 집 주위에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배당하던 해에 해배에 대한 희망의 끈이었던 절친한 친구 김유근이, 또 1842년엔 부인 예안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수많은 서간에 잘 드러나듯, 기가 막히는 억울함에다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렸으며, 겨울에는 한풍이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연명해야 했다.
유배기간동안 제자인 소치 허련과 역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適 184-1865), 친구인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아왔지만 세상은 추사를 잊어갔다. 추사는 책과 서화, 제주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푸른 바다와 긴 하늘 같이 한이 끝이 없는’ 유배생활의 고독과 시름을 달랬다.

이처럼 유배지에서 외롭게 삶을 살아가는 추사에게 그나마 큰 위안은 책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여러 번 드나 든 역관으로서 귀한 중국책들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에 답하고자 1844년 59세의 추사는 서간지를 펼쳐 놓고 붓을 들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세한도다.  

세한도를 전해 받고 감격한 주1) 이상적은 그해 10월 동지사 이정응(李晸應)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서 이듬해 1845년 정월 22날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장원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 받는다. 이 자리에는 오찬 ․ 장요손 등 옹방강(*추사가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만난 금석학의 스승)의 제자 17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상적이 세한도를 꺼내 보이자, 이들은 깊은 감동과 함께 제(題)와 찬시를 쓴다. 주2)


주1)이상적이 세한도를 전해 받고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를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淸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이 글은 박철상 지음, 세한도, 문학동네, 2010, 183~184쪽에서 인용함)   

   
주2)현존하는 세한도는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 또는 제영題詠과 함께 길이 약 13m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 장권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이 죽고 그의 제자였던 이병선과 김준학,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의 소유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민규식은 경성제대 중국철학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세한도를 팔게 된다. (……하략……) 

 

[참고] 세한도 발문의 중심문장의 원문과 추사선생의 해설을 좀 더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孔子曰

공자왈,  공자가 『논어』 「자한」편에 에 이르기를,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랜 세월) 후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네.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은 것이라서,

歲寒以前一松栢也 

세한이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歲寒以後一松栢也

세한이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성인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유배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고, 유배 후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그러나 유배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칭찬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유배온 뒤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성인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단지 늦게 시드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일세.  


위의 번역 글은 강관식의 추사의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13~214쪽의 번역을 바탕으로 도병훈님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후조後凋’에 대한 해석은 말 그대로 하면 ‘늦게 시든다’이지만, 전체 문맥상 흔히 ‘늘 푸름’ 또는 ‘시들지 않는다’고 해석하며, ‘시드는 것을 뒤로 한다’는 해석도 있다. ‘(오랜 세월) 뒤에 시든다’고 해석한 것은, 원래 한자 문명권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이 없다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소나무도 언제까지 푸를 수는 없고 다만 살아 있는 동안 푸름이 지속되므로 공자도 ‘후조’라 했다는 것이다.      

 

김정희[]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금석학자. 왕희지 필법에도 능숙함.

추사() ,완당(), 예당(), 시암(), 과노(), 농장인(), 천축고선생()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완당()·예당()·시암()·과노()·농장인()·천축고선생()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세한도' 그림에서 네 그루의 소나무와 초막의 상징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으나 소나무는 물론 염량세태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리안치된 추사 자신을 찾아주던 제자인 이상적, 소치 허련과 친구인 초의선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세한도 그림에서 네 그루의 소나무와 초막의 상징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으나 소나무는 물론 염량세태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리안치된 추사 자신을 찾아주던 제자인 이상적, 소치 허련과 친구인 초의선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후기에 금속학을 개척하며 9년간의 제주 유배시절에도 서예로 자신을 가다듬으며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불굴의 위인이셨다.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 흔적은 그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호를 바꿔간 데서도 증명된다.

 

이상적(李尙迪)  

1804년(순조 4) ~ 1865년(고종 2)  

호 우선(藕船)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Christmas(크리스마스)의 뜻은 "그리스도를 위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Christ(구세주)와 mass(예배)의 합성어

 

 

https://www.youtube.com/watch?v=UPRrqigHtq0 

 

레미드 구루몽 - 낙엽

https://www.youtube.com/watch?v=3h6nRVD5iNQ

 

*시몬, 네 귀에 좋다고 낙엽 밟지 마! 낙엽은 아직 아프다니까.

 

 

자화상 찬(自寫眞贊) 

ㅡ김시습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023002&wlog_tag3=naver#csidx5cb1eef2c190ffca8ad78f9df6ab14d

*[운영자 주]

번역에 '금오산'은 운영자가 덧붙임.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금오산에서 유래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문맥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이 글의 하단에 그의 시 <將進酒>를 소개한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김시습의 '自寫眞贊'부터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기 모습에다 노년의 오만상을 찌푸린 모습까지 그렸으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모습은 노추에도 변함없다. 허나 주름 때문인가 많이 온화한 모습이다

자화상이야 서구에도 많지만 찬을 쓴다는 게 희귀한 발상이다.

贊(찬)이란 찬양, 찬미의 의미다. 자기 자랑 해 봤자 듣는이는 귓전으로 듣는다. 그래서인지  내용인즉 찬이 아니라 자기 비하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비단 필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오던 神童의 그런 호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47세 때 환속하여 재혼했으나 1년도 못견뎌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참으로 별난 천재고, 그의 삶은 별난 인생살이였다. 우리는 이를 험한 산길에 비유하여 흔히 기구하다(崎嶇--) 고 말한다.  '69다방'까지 경영했던 <날개>의 작가 이상도 그렇거니와 왜 천재들은 박복하고 불행한가? 그것이 알고 싶다.

 

김시습 년보

김시습전 -율곡 이이  (0) 2008.08.05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2582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율곡 이이(李珥), 김시습전/ 附.김시습 년보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 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kydong77.tistory.com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삼릉계곡에 금오산실을 짓고 살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중략 …)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시다.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2582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천재의 광기, 매월당집과 금오신화(심경호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HDSfozlsM3w

 

심경호 - 김시습의 시세계

1

https://www.youtube.com/watch?v=Ik4TafwYOHw&index=22&list=PLX9xXlTjdQqGijQJWRhNRvOSDQ3zljzAQ

2

https://www.youtube.com/watch?v=D-kYr9I-fvo&list=PLX9xXlTjdQqGijQJWRhNRvOSDQ3zljzAQ&index=23

3

https://www.youtube.com/watch?v=H_xpnS1rWfY&index=24&list=PLX9xXlTjdQqGijQJWRhNRvOSDQ3zljzAQ

 

앞 꼭지가 산만하여 권필과 남효온의 시비를 중심으로 한 한시 부분을 여기에도 옮겨 싣는다.

행주산성공원에서 권필의 시비를 만난 건 내게는 행운이었다.

한강 전망대 아래 현판 송강(정철)의 비석 설명이 있어 그 비를 찾다가 거대한 남효온의 사면비를 발견했다.

그분은 세조의 왕위찬탈 때 생육신의 한 분이셨다.

비의 기단석엔 생육신의 명단도 밝혔다.

되새겨 보면 생육신과 사육신의 명단은 아래 동영상의 내용과 같다.

사육신과 생육신

아래 포스트 참조./ EBS 동영상

[네이버 지식백과] 사육신과 생육신 (EBS 동영상)

生六臣

서산서원은 1703년(숙종 29)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死六臣

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박팽년(朴彭年:1417~56)·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단종 복위 꾀하며 불의에 저항하다 수레에 팔다리를 묵여 문자 그대로 사지를 찢겨 죽임을 당한 분들이 사육신이시다. 모든 이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김시습은 분연히 나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주셨다.

유가에서는 유자니 불자니 말이 많지만 생유신을 강조하다 보니 나온 말이고 그는 단연코 불자였다. 그가 34세 때 몰두했던 인귀교환설화와 <십현담요해>가 그 증거다. 유자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는 비난의 대상 1순위에 해당한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충격을받고 과거시험의 '立身揚名'을 포기하고 삼각산 사찰에서 하산하여 경주 용장사에서 승려가 되어 <금오신화>를 집필하셨다. 작품집명인 '금오'는 경주남산의 주봉을 지칭한다. 중국 구우의 <전등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인귀교환 설화를 선택한 것은 운영자의 추측으로는 자기의 시에 화답할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동시대에 최치원 같은 문재라도 만났으면 모를까. 그래서 스스로 본인이 준 시에 이상적인 혼령의 여인을 만나 화답하는 형식으로 자작할 수밖에. 이후 47세 대 속인으로 돌아와 잠시 혼인한 적도 있었지만 곧 가출하여 무량사에서 입멸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방랑의 연속이었다.

십현담의  ⑥ 還鄕曲(환향곡) 이끌렸다가  ⑦ 破還鄕曲(파환향곡)이 인생의 바른 길이라고 판단한 걸까?

알 수 없어요.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 때엔 '십현담요해'를 집필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생명의 뿌리를 회의하고 고심한 영원한 자유인이고 불자였다.

금오신화 정리  (0) 2012.08.31

용궁부연록  (0) 2011.03.14

남염부주지  (0) 2011.03.14

취유부벽정기  (0) 2011.03.14

이생규장전  (0) 2011.03.12

만복사저포기  (0) 2011.03.12


김시습전-율곡 이이  (0) 2011.03.12

 

십현담 주해서는 아래 포스트에 있다.

한룡운 - 십현담주해 & 김시습 - 학랑소  (0) 2018.08.30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언해본 발견

http://news.donga.com/3/all/20090916/8809995/1

 

[참조]

앞의 포스트가 너무 산만하고 번잡하여  전영수님의 <『十玄談要解』에 드러난 金時習의 經典 및 禪語錄에 관한 理解> 의 논문 초록을 추가하고

동안상찰의《십현담(十玄談)과  한룡운님의 <십현담주해>만 발췌하여’ 읽기 쉽게 재정리해 보았습니다.


십현담이란?

십현담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51358&cid=40942&categoryId=31543

중국 당나라의 선승(禪僧) 동안상찰(同安常察)이 조동종(曹洞宗)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偈頌).

중국 선종()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승려 동안상찰이 지은 게송으로서 《경덕전등록()》 제29권에 실려 있다.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칠언율시 형식의 10수로 지은 것인데, 각 수의 제목은 심인()·조의()·현기()·진이()·연교()·달본()·환원()·회기()·전위()·일색()이다. 

 십현담 [十玄談] (두산백과)

 

*칠언율시로 정리한 10가지 문답 자체가 선문답이네요.

http://kydong77.tistory.com/17953

동안상찰 -<십현담(十玄談)> & 한룡운 -<십현담주해>  (1) 2018.09.03

<십현담(十玄談)> 의 테마는 아래의 10가지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현묘한 담론이란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를 10가지로 요약한 것이 십현담이다.

① 心印(심인)

② 祖意(조의)

③ 玄機(현기)

④ 塵異(진이)

⑤ 佛敎(불교)

⑥ 還鄕曲(환향곡)

⑦ 破還鄕曲(파환향곡)

⑧ 廻機(회기)

⑨ 轉位歸(전위기)

⑩ 一色過後(일색과후)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7953?category=484897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권필,  감회(感懷)

黃雀何翩翩

황작하편편,  참새 왜 저리 파닥거리는가

寄巢枯葦枝

기소고위지,  마른갈대에 둥지 틀더니

江天喟然風

강천위연풍,  강가에 바람 세차게 불어오자

葦折巢仍欹

위절소잉의,  갈대 꺾이고 둥지마저 쓰러졌구나

巢破不足惜

소파부족석,  둥지 부서진 거야 아까울 것 없지만

卵破良可悲

란파량가비  알이 깨진 건 참으로 슬프구나

雄雌飛且鳴

웅자비차명  암수 날아다니며 울부짖나니

日夕無所依

일석무소의  해 저물어도 깃들 곳 없네

 君看彼黃雀

군간피황작  그대여, 저 참새를 보게나

物理因可推

물리인가추  세상 이치 미루어 알 수 있나니

結巢豈不固

결소기부고  둥지 튼 것이 어찌 단단치 않았겠는가

所託非其宜

소탁비기의  둥지 튼 곳이 마땅치 않아서지.

 
권필(1569~1612)〈감회(感懷)〉《석주집(石洲集)》

  

나무가 있는데 이름은 모른다. 백낙천을 본받아

(有木不知名 效白樂天)


有木不知名  三株互蟠結

유목부지명 삼주호반결

나무가 있는데 이름은 모른다. 세 그루가 서로 얽혀서

 陰重巧遮日 群蟻喜心空

지고편수로 음중교차일 

지대가 높아 홀로 이슬을 받고 그늘이 두터워 교묘히 볕을 가리네.

衆鳥欣葉密 兼爲魍魎宅

군의희심공 중조흔엽밀

뭇 개미들이 즐겨 구멍을 파고 새들은 잎이 빽빽한 것을 좋아한다.

百怪中夜發 有人不量力 

백괴중야발 유인부량력

또한 귀신들의 집이 되어 밤중에 온갖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

兼爲魍魎宅持斧擬剪伐 

겸위망량택  지부의전벌 

어떤 사람이 제 힘은 헤아리지 않고 도끼로 찍으려는데

爲近社壇下 欲進還股慄 

위근사단하 욕진환고률 

토지신 사당에 가까이 있어 앞으로 나가려다 멈칫 다리를 떠네.

一朝霰雪繁 天道有肅殺 

일조산설번 천도유숙살 

어느 아침 눈이 펑펑 쏟아지면 하늘은 모든 것을 죽이리니

豈若澗底松 千載自蕭瑟

기약간저송 천재자소슬

어찌 저 골짜기의 소나무는 천년을 홀로 쓸쓸히 섰을까?

 (石洲集 卷1)

 [출처] 권필의 한시|작성자 jaseodang

 

《석주집(石洲集)》 해제(解題)
 

심경호(沈慶昊)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권필은 청정한 공간을 꿈꾸지만 혼탁한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없었기에, 현실을 개조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술회>라는 제목의 영회시는 대표적인 예이다.

 

권필 - 술회(述懷)

 

朝日自何來 

조일자하래, 아침 해는 어느 곳에서 오며

夕日向何去

석일향하거,  저녁 해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一朝復一夕 

일조부일석, 아침 가고 저녁이 오는 사이

白髮遽如許 

백발거여허, 어느덧 이처럼 백발이 되었구나 

少年志氣壯

소년지기장, 소년 시절에는 지기가 씩씩해

長嘯望伊呂

장소망이려  큰 기세로 이윤이나 여망처럼 되려 했었지

方圓豈相謀 

방원기상모, 둥근 것과 모난 것이 어찌 서로 맞으리오

與世實鉏鋙  

여세실서어, 세상과 실로 뜻이 어긋났으니

始也多毁譽 

시야다훼예, 처음에는 비방과 칭찬 많았고

終焉寡儔侶 

종언과주려, 끝내는 친한 벗이 적어졌도다

況逢干戈際 
황봉간과제, 더구나 전란의 시국 만났으니
 
漂泊忍羈旅
표박인기려,  타향에서 피난하며 고생하였지

溝壑幸而免

구학행이면,  객지에서 죽음은 요행 면했지만
 
疾病固其所
질병고기소, 질병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皎皎平生心
교교평생심,  밝고 깨끗한 평소의 마음을

 
壹鬱誰與語 

일울수여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울적하여라

手掇秋菊英

수철추국영, 손으로 국화 꽃잎을 따서 

願貽高丘女 

원이고구녀, 고당의 여인에게 주고자 하지만

佳期未易得

가기미이득, 좋은 만남은 기약하기 어려워

歲暮徒延佇
세모도연저, 세모에 그저 우두커니 서성거릴 뿐.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
- 남효온 

宿江浦遽廬(숙강포거려)


紈袴飽肉者 

환고포육자 비단옷 두르고 고기반찬 배부른 자들이여

 

安知西山蕨 

안지서산궐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飛走不同穴

비주부동혈  날짐승과 길짐승은 보금자리 달리하듯

 

我獨恥干謁 

아독치간알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畎畝尋要術

견무심요술  시골에 묻혀 밭고랑을 일구며

漁舟費日月

어주비일월  뱃전의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네
人生適意耳

인생적의이  한세상 삶이야 뜻 대로면 그만이지

何用終歲 

하용종세올 어찌하여 한평생 아등바등 지낼 것인가

 

登幸州城隍堂[행주 성황당에 올라]

남효온 - 登幸州城隍堂(등행주성황당)

 

城隍堂下落花明

성황당하락화명,  성황당 아래 떨어진 꽃잎 선연한데
鴨島南頭潮水生

압도남두조수생,  압도 남쪽 언저리엔 밀물이 밀려오네
繫馬叢林坐靑草

계마총림좌청초, 수풀에 말 매고 푸른 풀 깔고 앉아
隔江聞唱午鷄聲

격강문창오계성, 강 너머 들려오는 닭 울음 듣노라
白水蓮天動我前

백수련천동아전,  하늘 잇닿은 행주강 흰 물결 내 앞에서 찰랑이고
漁舟來泊孔巖邊

어주래박공암변, 고깃배 저어온 사공 공암가에 닻 내린다
山蔬白酒登臨處

산소백주등림처.  풍광 좋은 곳에 올라 산나물로 막걸리 즐기니
病客明眸骨欲仙 

병객명모골욕선, 병든 이내몸 눈 밝아져 신선이나 되었으면.


http://cafe.daum.net/CHEONGJU/D1NN/339?q=%E7%B4%88%E8%A2%B4%E9%A3%BD%E8%82%89%E8%80%85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하는 말을 타고 가면서 시구를 1줄씩 종이에 끄적거려 수놓은 자루에 넣었다가, 밤에 이것들을 모아 불멸의 명시를 지은 귀재로 전해지고 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시를 짓기 시작했던 그는 과거시험에 쉽게 합격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將進酒 - 이하

 

琉璃鍾, 琥珀濃. 小槽酒滴眞珠紅.

유리종 호박농, 소조주적진주홍.

烹龍炮鳳玉脂泣, 羅幃綉幕圍香風.

팽룡포봉옥지읍, 나병수막위향풍.

吹龍笛, 擊鼉鼓. 皓齒歌, 細腰舞.

위용적,격타고,호치가,세요무.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황시청춘일장모, 도화난락여홍우.

勸君終日酩酊醉, 酒不到劉伶墳上土.

권군종일명정취, 주부도유령분상토.

 

유리 술잔에 호박(琥珀) 빛깔 술이 짙으니

작은 술통에는 술방울이 진주처럼 붉구나.

 

용(龍) 삶고 봉황 구워 옥 같은 기름 흐르고

 

비단 휘장과 수놓은 장막에는 향기로운 바람 에워쌌네.

 

 

용적(龍笛) 불고 악어가죽 북 치니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녀 춤 춘다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장차 저물려 하니

복사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라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 흙에는 이르지 않나니

 

[운영자 주]

* 酒德頌 - 劉伶(주덕송 - 유령)

http://blog.naver.com/kkjseoul/221349654300

 고문진보(古文眞寶)전편 -103

 

酒德頌 -劉伶(주덕송 - 유령)

 

 

有大人先生(유대인선생)은  : 대인 선생이라는 분 있어  

以天地爲一朝(이천지위일조)하며 : 천지를 하루 아침으로 여기며  

萬期爲須臾(만기위수유)하다 : 만 백년을  잠간 동안의 기간으로 삼았다  

日月爲扃牖(일월위경유)하며 : 해와 달을 빗장과 창으로 여기며 

八荒爲庭衢(팔황위정구)하다 : 광활한 천지를 뜰이나 길거리로 삼았다  

行無轍跡(행무철적)하고 : 다녀도 바퀴자국이 없고  

居無室廬(거무실려)하다 : 살아도 일정하게 사는 집 없었다  

幕天席地(막천석지)하며 : 하늘을 휘장으로 땅을 자리로 삼으며  

縱意所如(종의소여)하다 : 마음 가는 대로 따라 살았다  

止則操巵執觚(지칙조치집고)하고 : 머물러 있으면 크고 작은 술잔 잡았고  

動則挈榼提壺(동칙설합제호)하다 : 활동하면 술통과 술병을 꺼내었다  

唯酒是務(유주시무)하니 : 오직 술만이 곧 할 일이니  

焉知其餘(언지기여)리오 : 어찌 다른 것을 알겠는가?  

有貴介公子(유귀개공자)와 : 부귀한 공자와  

縉紳處士(진신처사)가 : 관리와 처사들이  

聞吾風聲(문오풍성)하고 : 소문을 듣고  

議其所以(의기소이)하여 :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따져 논하여  

乃奮袂揚衿(내분몌양금)하고 : 곧 소매를 뜰치고 옷깃을 날리며  

怒目切齒(노목절치)하며 : 눈을 부라리고 이를 갈면서  

陳設禮法(진설례법)하니 : 예법을 늘어 놓으며  

是非鋒起(시비봉기)하다 : 시비를 칼날처럼 일으켰다  

先生於是(선생어시)에 : 대인선생은 이 때에  

方捧甖承槽(방봉앵승조)하고 : 막 술단지를 들고 술통을 받들고  

銜盃漱醪(함배수료)하다 : 술잔을 입에 물고 탁주를 마셨다  

奮髥踑踞(분염기거)하며 : 수염을 털어내며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枕麴藉糟(침국자조)하다 : 누룩을 베개삼고 술찌게미를 깔개 삼았다  

無思無慮(무사무려)하여 :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어  

其樂陶陶(기락도도)하다 : 즐거움이 가득했다  

兀然而醉(올연이취)하고 : 멍하니 취해 있고  

恍爾而醒(황이이성)하여 : 흐릿하게 깨어 있어서  

靜聽不聞雷霆之聲(정청불문뢰정지성)하고

: 조용히 들어봐도 우뢰소리 들리지 않고  

熟視不見泰山之形(숙시불견태산지형)하다

: 충분히 보아도 태산의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不覺寒暑之切肌(불각한서지절기) 와:  추위와 더위가 피부에 스며듦과  

嗜慾之感情(기욕지감정)하다 : 기호와 욕심의 감정을 깨닫지 못했다.

俯觀萬物(부관만물)하니 : 만물을 굽어보니  

擾擾焉如江漢之浮萍(요요언여강한지부평)하고

: 어지러운 것이 마치 장강이나 한수에 떠있는 부평초 같고  

二豪侍側焉(이호시측언)하니 : 따지러 온 두 호걸들이 옆에 모신 듯 있었으니  

如踝蠃之螟蛉(여과라지명령)하다 : 나나니벌이 배추벌레 다루듯 하였다

 

 

심경호 교수의 해석 '천재의 광기'에 대한 운영자 단평.

'천재'는 맞지만, '광기'는 오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세계관(가치관)을 실현한 분이셨다. 재평가하면 '영원한 자유인'이셨다.

 

 Do-Re-Mi - Julie Andrews

https://www.youtube.com/watch?v=L1l1KUuTNlk

Do-Re-Mi - Julie Andrews [가사번역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b7Slk-6CYd4

https://www.youtube.com/watch?v=jITsImZdlMQ

 

에델바이스(Edelweiss)  [가사 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hX7almtjEQA

 

 

The Sound of Music (1/5)

https://www.youtube.com/watch?v=AePRD1Ud3Lw

The Sound of Music (2/5)

https://www.youtube.com/watch?v=pcj4boVT4fc 

 

The Sound of Music (3/5)

https://www.youtube.com/watch?v=DGABqdbtQnA

The Sound of Music (4/5)

https://www.youtube.com/watch?v=pLm07s8fnzM

The Sound of Music (5/5)

https://www.youtube.com/watch?v=kxjwb5cXTI0

 

 

 1:37:45 이후에  명시 <謔浪笑(학랑소)>를 자세히 설명하네요. 내일 다시 한 번 보시기로 하죠.

위 사진은 김시습 자신이 그린 자화자찬의 젊은 시절과 노년의 초상화로,

그는 관습이나 남의 시선에 구속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생을 방랑한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스님이면서도 수염을 기른 초상화에는 이맛살이 찡그려져 있다.

노년의 초상화에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게 찡그려져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치욕과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방황과 평생 동안의 방랑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로부터 비롯되었다.

마소에 팔다리를 묶어 찢어 죽인 사육신들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분도 김시습이었다.

그래서 그가 얻은 건 역사상 생육신의 한 분이라는 영예뿐이었다.

먼저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수락산의 매월정부터 올라 볼까요?

그의 자호 매월당은 그가 스님이 되어 경주 남산 용장사에 계실 때 거실의 당호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신라인처럼 매화 향기 그윽한 달밤을 그리워한 듯하다.

그는 인귀교환설화로 그림움을 달랬다.

 

아래 포스트에는 인간 김시습에 대한 경호 교수의 상세한 설명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지루해지면 동영상 하단의 시각바를 적어 놓고 여유로운 시간에 읽으면 된다.

심교수의 김시습 강연은 바른 삶을 추구하는 분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블로그의 참고글

카테고리 "한문학> 금오신화 & 전등신화"

 

천재의 광기, 매월당집과 금오신화(심경호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HDSfozlsM3w

 

매월정 사진은 아래 포스트에도 올린 바 있다.

http://kydong77.tistory.com/11872

 

매월정/수락산 04

http://kydong77.tistory.com/10062

 

매월당 김시습에 대하여는 아래 블로그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http://kydong77.tistory.com

카테고리 - 한문학> 금오신화

카테고리 - 한문학>전등신화도 인귀교환설화 이해를 위해 필독이 요구된다.

 

김시습 년보 참조

http://kydong77.tistory.com/2582

 

김시습전-율곡 이이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 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kydong77.tistory.com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에 자극받아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인귀교환설화란 산 사람[사내]과 죽은 사람의 혼령[여인]이

현실적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귀교환설화는 아래의 최치원설화다. 쌍녀분설화라고도 한다.

 

최치원설화/해괴망측한 사랑 이야기

  http://kydong77.tistory.com/8611

 

최치원설화/해괴망측한 사랑 이야기

[사진](상)런던 대영박물관 전경(前景). (하)대영박불관의 대리석 여인상 [주]최치원 설화 또는 쌍녀분 설화로 일컬어지는 이 설화는 해괴망측(駭怪罔測 )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곧, 최치

kydong77.tistory.com

 

 

김시습 년보

http://www.maewd.com/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無 雨 黃 雲]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라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김시습, <금오신화> 원문과 번역 총정리/ 김시습 년보

경주 금오산 용장사지 마애불 굥장사지 삼층석탑 茸長寺有懷(용장사 유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

kydong77.tistory.com

 

 

'한문학 > 금오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시습 - 천재의 당위론적 삶  (0) 2019.09.10
금오신화 정리/ 경주 기림사 김시습 影堂  (0) 2019.08.02
금오신화 정리  (0) 2012.08.31
김시습, 용궁부연록  (0) 2011.03.14
김시습, 남염부주지  (0) 2011.03.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