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선녀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고양된 회고의 정서를 응축한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五言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고시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 등이 이 작품의 근간을 형성한다.
서사구조는 이 회고시를 말하기 위한 간단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매월당이 자기 시재(詩才)를 뽐내기 위해 지은 것인가? 취했다니 할 말이 없지만 서사성은 위의 두 작품에 비해 현저히 뒤진다. 아래의 <용궁부연록>도 갈등의 서사구조는 없으니 이 작품과 동궤의 작품으로 보면 된다.
다만 신선세계라는 픽션, 기씨녀를 기자조선의 후예로 설정하여 신선이 된 내력과 기자조선에 대한 회고의 서술, 그녀와 의 만남 등의 허구는 매월당의 꿈의 표백이라 보아 상상력의 측면에서 그의 수월성이 인정된다.
전에 올린 것이나 시에 독음을 첨가하였다.
醉遊浮碧亭記
취유부벽정기, 취하여 부벽정에서 노닐다
-김시습(金時習)
1]개성 상인 홍생이 부벽정에 올라 시를 짓다
平壤, 古朝鮮國也.
평양, 고조선국야.
평양은 고조선의 서울이었다.
周武王克商, 訪箕子, 陣洪範九疇之法,
주무왕극상,방기자, 진홍범구주지법,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방문하자,
기자가「홍범(洪範)」구주(九疇)의 법을 일러주었다.
武王封于此地, 而不臣也.
무왕봉우차지,이불신야.
무왕이 기자를 이 땅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其勝地, 則錦繡山, 鳳凰臺, 綾羅島, 麒麟窟, 朝天石, 楸南墟, 皆古跡,
기승지, 칙금수산, 봉황대, 릉라도, 기린굴, 조천석, 추남허, 개고적,
이곳의 명승지로는 금수산․ 봉황대․ 능라도․ 기린굴․ 조천석․ 추남허 등이 있는데, 모두 고적이다.
而永明寺浮碧亭, 其一也.
이영명사부벽정, 기일야.
영명사의 부벽정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永明寺, 卽東明王九梯宮也.
영명사, 즉동명왕구제궁야.
영명사 자리는 바로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터이다.
在郭外東北卄里,
재곽외동북입리,
이 절은 성밖에서 동북쪽으로 이십 리 되는 곳이 있다.
俯瞰長江, 遠矚平原,
부감장강, 원촉평원,
긴 강을 내려다보고 평원을 멀리 바라보며
一望無際, 眞勝境也.
일망무제, 진승경야.
아득하기 그지없으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畵舸商舶, 晩泊于大同門外之柳磯,
화가상박, 만박우대동문외지류기,
그림 그린 놀잇배와 장삿배들이 날 저물 무렵 대동문 밖에 있는 유기에 닿아
留則必泝流而上, 縱觀于此, 極歡而旋.
류칙필소류이상, 종관우차, 극환이선.
머물게 되면, 사람들은 으레 강물을 따라 올라와서 이곳을 마음대로 구경하며 실컷 즐기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亭之南, 有鍊石層梯,
정지남, 유련석층제, 부벽정 남쪽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사닥다리가 있다.
左曰靑雲梯, 右曰白雲梯, 刻之于石,
좌왈청운제, 우왈백운제, 각지우석,
왼편에는 청운제, 오른편에는 백운제라고 돌에다 글자를 새겨
立華柱, 以爲好事者玩.
립화주, 이위호사자완.
화주(華柱)를 세워 놓았으므로, 호사자(好事者)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天順初, 松京有富室洪生,
천순초, 송경유부실홍생,
천순(天順) 초년에 개성에 홍생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年少美姿容, 有風度, 又善屬文.
년소미자용, 유풍도, 우선속문.
그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풍도가 있었으며, 또한 글을 잘 지었다.
値中秋望, 與同伴, 抱布貿絲于箕城,
치중추망, 여동반, 포포무사우기성,
그가 한가윗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평양에 베를 안고 와서 실을 바꾸었다.
泊舟艤岸. 城中名娼, 皆出闉闍, 而目成焉.
박주의안. 성중명창, 개출인도, 이목성언.
그런 뒤에 배를 강가에 대자, 성안의 이름난 기생들이 모두 성문 밖으로 나와서 홍생에게 추파를 던졌다.
城中有故友李生, 設宴以慰生,
성중유고우리생, 설연이위생,
성안에 이생이라는 옛 친구가 살았는데, 잔치를 베풀어 홍생을 환영하였다.
酣醉回舟, 夜凉無寐,
감취회주, 야량무매,
홍생은 술이 취하자 배로 돌아갔지만 밤이 서늘하고 잠도 오지 않아서,
忽憶張繼楓橋夜泊之詩,
홀억장계풍교야박지시,
문득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不勝淸興, 乘小艇, 載月打槳而上,
불승청흥, 승소정, 재월타장이상,
그래서 맑은 흥취를 견디지 못해 작은 배를 타고는, 달빛을 싣고 노를 저어서 올라갔다.
期興盡而返, 至則浮碧亭下也.
기흥진이반, 지칙부벽정하야.
흥취가 다하면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올라가다가, 이르고 보니 부벽정 아래였다.
繫纜蘆叢, 躡梯而登,
계람로총, 섭제이등,
홍생을 뱃줄을 갈대 숲에 매어 두고,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憑軒一望, 朗吟淸嘯,
빙헌일망,랑음청소,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며, 맑은 소리로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時月色如海, 波光如練,
시월색여해, 파광여련,
그때 달빛은 바다처럼 넓게 비치고 물결을 흰 비단처럼 고운데,
雁呌汀沙, 鶴驚松露,
안규정사, 학경송로,
기러기는 모래밭에서 울고 학은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에 놀라서 푸드덕거렸다.
凜然如登淸虛紫府也.
름연여등청허자부야.
마치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계신 곳에라도 오른 것처럼 기상이 서늘해졌다.
顧視故都, 烟籠粉堞, 浪打孤城,
고시고도, 연롱분첩, 랑타고성,
한편 옛 서울을 돌아보니 하얀 성가퀴에는 안개가 끼어 있고, 외로운 성 밑에는 물결만 부딪칠 뿐이었다.
有麥秀殷墟之歎, 乃作詩六首曰:
유맥수은허지탄, 내작시륙수왈:
「맥수은허」의 탄식이 저절로 나와, 이내 시 여섯 수를 지어 읊었다.
不堪吟上浿江亭,
불감음상패강정, 부벽정에 올라 감개를 읊조리니
嗚咽江流腸斷聲.
오연강류장단성.흐느끼는 강물 소리 애끊는 듯하여라.
故國已銷龍虎氣,
고국이소룡호기, 용 같고 호랑이 같던 고국의 기상은 이미 없어졌건만
荒城猶帶鳳凰形.
황성유대봉황형. 황폐한 옛성은 지금까지도 봉황 모습 그대로일세.
汀沙月白迷歸雁,
정사월백미귀안, 모래밭에 달빛이 희니 기러기는 갈 길을 잃고
庭草烟收點露螢.
정초연수점로형. 풀밭에는 연기가 걷혀 반딧불만 날고 있네.
風景蕭條人事換,
풍경소조인사환, 사람 세상에 바뀌고 보니 풍경마저 쓸쓸해져
寒山寺裏聽鐘鳴.
한산사리청종명. 한산사 깊은 곳에서 종소리만 들려 오네.
帝宮秋草冷凄凄,
제궁추초냉처처, 임금 계시던 궁궐에는 가을 풀만 쓸쓸하고
回磴雲遮徑轉迷.
회등운차경전미. 구름 낀 돌층계는 길마저 아득해라.
妓館故基荒薺合,
기관고기황제합, 청루 옛터에는 냉이풀만 우거졌는데
女墻殘月夜烏啼.
녀장잔월야오제. 담 넘어 희미한 달 보며 까마귀만 우짖네.
風流勝事成塵土,
풍류승사성진토, 풍류롭던 옛일은 티끌이 되었고
寂寞空城蔓蒺藜.
적막공성만질려. 적막한 빈 궁성엔 찔레만 덮였구나.
唯有江波依舊咽,
유유강파의구연, 오직 강물만이 옛날 그대로 울며 울며
滔滔流向海門西.
도도류향해문서. 도도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누나.
浿江之水碧於藍,
패강지수벽어람, 대동강 저 물결은 쪽보다도 더 푸르네.
千古興亡恨不堪.
천고흥망한불감. 천고 흥망을 한탄한들 어이하랴.
金井水枯垂薜荔,
금정수고수벽려, 우물에는 물이 말라 담쟁이만 드리웠고
石壇苔蝕擁檉楠.
석단태식옹정남. 돌 단에는 이끼가 끼어 능수버들만 늘어졌네.
異鄕風月詩千首,
리향풍월시천수, 타향의 풍월을 천수나 읊고 보니
故國情懷酒半酣.
고국정회주반감. 고국의 정희에 술이 더욱 취하여라.
月白依軒眠不得,
월백의헌면불득, 달빛이 난간에 밝아 졸음조차 오지 않는데
夜深香桂落毿毿.
야심향계락삼삼. 밤 깊어지며 계화 향기가 살며시 떨어지네.
中秋月色正嬋娟,
중추월색정선연, 오늘이 한가위라 달빛은 곱기만 한데
一望孤城一悵然.
일망고성일창연. 외로운 옛성은 볼수록 서글퍼라.
箕子廟庭喬木老,
기자묘정교목로,기자묘(箕子廟) 뜨락에는 교목이 늙어 있고
檀君祠壁女蘿緣.
단군사벽녀라연 단군사(檀君祠) 벽 위에는 담쟁이가 얽히었네.
英雄寂寞今何在,
영웅적막금하재, 영웅은 적막하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草樹依稀問幾年.
초수의희문기년. 풀과 나무만 희미하니 몇 해나 되었던가?
唯有昔時端正月,
유유석시단정월, 오직 그 옛날의 둥근 달만 남아 있어
淸光流彩照衣邊.
청광류채조의변. 맑은 빛이 흘러나와 이 내 옷깃을 비추네.
月出東山烏鵲飛,
월출동산오작비, 동산에 달이 뜨자 까막까치 흩어져 날고
夜深寒露襲人衣.
야심한로습인의. 밤 깊어지자 찬이슬이 나의 옷을 적시네.
千年文物衣冠盡,
천년문물의관진, 문물은 천년이라 옛 모습 간 데 없건만
萬古山河城郭非.
만고산하성곽비. 만고의 강산에 성곽은 허물어졌네.
聖帝朝天今不返,
성제조천금불반, 하늘에 오른 성제(聖帝)께선 돌아오지 않으시니
閑談落世竟誰依.
한담락세경수의. 인간에 남긴 이야기를 무엇으로 증거하랴.
金轝麟馬無行迹,
금여린마무행적, 황금수레에 기린 말도 이제는 자취 없어
輦路草荒僧獨歸.
련로초황승독귀. 연로(輦路)에는 풀 우거지고 스님만이 홀로 가네.
庭草秋寒玉露凋,
정초추한옥로조, 찬이슬이 내리자 뜰의 풀이 다 시드는데
靑雲橋對白雲橋.
청운교대백운교. 청운교와 백운교는 마주보고 서 있구나.
隋家士卒隨鳴瀨,
수가사졸수명뢰, 수나라 대군의 넋이 여울에서 울어예니
帝子精靈化怨蜩.
제자정령화원조. 임금의 정령(精靈)이 가을 매미 되었던가.
馳道烟埋香輦絶,
치도연매향련절, 한길에는 연기만 낀 채 수레 소리도 끊어졌는데
行宮松偃暮鐘搖.
행궁송언모종요. 소나무 우거진 행궁(行宮)에는 저녁 종소리만 들리네.
登高作賦誰同賞,
등고작부수동상, 누각에 올라 시를 읊어도 그 누가 함께 즐길 건가
月白風淸興未消.
월백풍청흥미소. 달 밝고 바람도 맑아 시흥이 시들지 않네.
2]기씨의 딸과 조우하다
1)선녀 기씨의 딸이 찾아와 시를 지어 전하다
生吟罷, 撫掌起舞踟躕.
생음파, 무장기무지주. 홍생은 읊기를 마친 뒤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일어나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每吟一句, 歔欷數聲,
매음일구, 허희수성, 한 구절을 읊을 떄마다 흐느껴 울었다.
雖無扣舷吹簫, 唱和之樂, 中情感慨,
수무구현취소, 창화지락, 중정감개,
바로 뱃전을 두드리고 퉁소를 불며 서로 화답하는 즐거움은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느꺼워하였다.
足以舞幽壑之潛蛟, 泣孤舟之嫠婦也.
족이무유학지잠교, 읍고주지리부야.
그래서 깊은 구렁에 잠긴 용도 따라서 춤추게 할 만하였고, 외로운 배에 있는 과부도 울릴 만하였다.
吟盡欲返, 夜已三更矣.
음진욕반, 야이삼갱의.
시 읊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밤은 벌써 삼경이나 되었다.
忽有跫音, 自西而至者.
홀유공음, 자서이지자.
이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왔다.
生意謂寺僧聞聲, 驚訝而來.
생의위사승문성, 경아이래.
홍생은 마음 속으로 "절의 스님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찾아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坐以待之, 見則一美娥也.
좌이대지, 견칙일미아야.
앉아서 기다렸는데 나타나고 보니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丫鬟隨侍左右,
아환수시좌우, 두 시녀가 좌우에서 따르며 모셨는데,
一執玉柄拂, 一執輕羅扇,
일집옥병불, 일집경라선,
한 여인은 옥자루가 달린 불자(拂子)를 잡았고, 다른 한 시녀는 비단 부채를 들고 있었다.
威儀整齊, 狀如貴家處子.
위의정제, 상여귀가처자.
여인은 위엄이 있고도 단정하여, 마치 귀족집 처녀 같았다.
生下階, 而避之于墻隙, 以觀其所爲.
생하계, 이피지우장극, 이관기소위.
홍생은 뜰 아래로 내려가 담 틈으로 비켜서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娥倚于南軒, 看月微吟,
아의우남헌, 간월미음,
여인은 남쪽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달빛을 보며 작은 소리로 시를 읊었는데,
風流態度, 儼然有序.
풍류태도, 엄연유서.
풍류와 몸가짐이 엄연하여 범절이 있었다.
侍兒捧雲錦茵席以進,
시아봉운금인석이진,시녀가 비단방석을 펴자,
改容就坐, 琅然言曰:
개용취좌, 랑연언왈:
여인이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에 앉아 낭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此間有哦詩者, 今在何處?
“차간유아시자, 금재하처?
"여기서 방금 시를 읊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소?
我非花月之妖, 步蓮之姝,
아비화월지요, 보련지주,
나는 꽃이나 달의 요물도 아니고, 연꽃 위를 거니는 주희도 아니라오.
幸値今夕, 長空萬里, 天闊雲收,
행치금석, 장공만리, 천활운수,
다행히도 오늘처럼 아름다운 밤을 맞고 보니, 만리장공 넓은 하늘에는 구름도 걷히었소.
冰輪飛而銀河淡, 桂子落而瓊樓寒,
빙륜비이은하담, 계자락이경루한,
달이 높이 뜨고 은하수는 맑은데다, 계수나무 열매가 떨어지고 백옥루는 차갑기에,
一觴一脉, 暢敍幽情,
일상일맥, 창서유정,
한잔 술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심정을 유쾌히 풀어 볼까 하였소.
如此良夜何?”
여차량야하?”이렇게 좋은 밤을 어찌 그대로 보내겠소?"
生一恐一喜,
생일공일희, 홍생이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였다.
踟躕不已, 作小謦咳聲.
지주불이, 작소경해성. 그래서 어찌할까 머뭇거리다가 가늘게 기침소리를 내었다.
侍兒尋聲而來, 請曰:
시아심성이래, 청왈:
시녀가 기침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와서 청하였다.
“主母奉邀.”
“주모봉요.” "저희 아가씨께서 모시고 오라 하였습니다."
生踧踖而進, 且拜且跪.
생축적이진, 차배차궤. 홍생이 조심스럽게 나아가서 절하고 꿇어앉았다.
娥亦不之甚敬, 但曰:
아역불지심경, 단왈: 여인도 또한 별로 어려워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子亦登此.”
“자역등차.”"그대로 이리 올라오시오."
侍兒以短屛乍掩, 只半面相看,
시아이단병사엄, 지반면상간,
시녀가 낮은 병풍으로 잠깐 앞을 가리었으므로, 그들은 얼굴을 서로 반만 보았다.
從容言曰:
종용언왈: 여인이 조용히 말하였다.
“子之所吟者, 何語也? 爲我陳之.”
“자지소음자, 하어야? 위아진지.”
"그대가 조금 전에 읊은 시는 무슨 뜻이오? 나에게 외어 주시오."
生一一以誦. 娥笑曰:
생일일이송. 아소왈: 홍생이 그 시를 하나하나 외어 주자, 여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子亦可與言詩者也.”
“자역가여언시자야.”
"그대는 나와 함께 시에 대하여 이야기할 만하오."
卽命侍兒, 進酒一行,
즉명시아, 진주일행,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여 술을 한차례 권하였는데,
殽饌不似人間,
효찬불사인간, 차려 놓은 음식이 인간세상의 것과 같지 않았다.
試啖堅硬莫吃, 酒又苦不能啜.
시담견경막흘, 주우고불능철.
먹으려 해도 굳고 딱딱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 술맛도 또한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娥莞爾曰:
아완이왈: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俗士, 那知白玉醴紅虯脯乎?”
“속사, 나지백옥례홍규포호?”
"속세의 선비가 어찌 백옥례(白玉醴)와 홍규포(紅虯脯)를 알겠소."
命侍兒曰:
명시아왈: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였다.
“汝速去神護寺, 乞僧飯小許來.”
“여속거신호사, 걸승반소허래.”
"너 빨리 신호사에 가서 절밥을 조금만 얻어 오너라."
兒承命而往, 須臾得來,
아승명이왕, 수유득래,
시녀가 시키는 대로 가서 곧 절밥을 얻어 왔다.
卽飯也. 又無下飯,
즉반야. 우무하반,
그러나 밥뿐이었고, 반찬이 또한 없었다.
又命侍兒曰:
우명시아왈: 그래서 다시 시녀에게 명하였다.
“汝去酒巖, 乞饌來.”
“여거주암, 걸찬래.”
"얘야. 주암(酒巖)에 가서 반찬도 얻어 오너라."
須臾, 得鯉炙而來. 生啗之.
수유, 득리자이래. 생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녀가 잉어구이를 얻어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 음식들을 먹었다.
啗訖, 娥已依生詩, 以和其意,
담흘, 아이의생시, 이화기의,
그가 음식을 먹고 나자, 여인이 이미 홍생은 시에 따라 그 뜻에 화답하였다.
寫於桂箋, 使侍兒, 投于生前.
사어계전, 사시아, 투우생전.
향기로운 종이에 시를 써서 시녀로 하여금 홍생에게 주도록 하였다.
其詩曰
기시왈: 그 시에 읊었다.
東亭今夜月明多,
동정금야월명다, 부벽정 오늘밤에 달빛 더욱 밝은데
淸話其如感慨何.
청화기여감개하. 맑은 이야기에 감회가 어떻던가?
樹色依稀靑蓋展,
수색의희청개전, 어렴풋한 나무 빛은 일산처럼 펼쳐졌고
江流瀲瀲練裙拖.
강류렴렴련군타. 넘치는 저 강물은 비단치마를 둘렀네.
光陰忽盡若飛鳥,
광음홀진약비조, 세월은 나는 새처럼 어느새 지나갔고
世事屢驚如逝波.
세사루경여서파. 세상일도 자주 변해 흘러가 버린 물 같아라.
此夕情懷誰了得,
차석정회수료득, 오늘밤의 정회를 그 누가 알아주랴
數聲鐘磬出烟蘿.
수성종경출연라. 깊은 숲에서 종소리만 이따금 들려 오네.
故城南望浿江分,
고성남망패강분, 옛성에 올라 보니 대동강이 어디런가
水碧沙明呌雁群.
수벽사명규안군. 푸른 물결 밝은 모래밭에 기러기 떼가 울며 가네.
麟駕不來龍已去,
린가불래룡이거, 기린 수레는 오지 않고 님도 벌써 가셨으니
鳳吹曾斷土爲墳.
봉취증단토위분. 봉피리 소리 끊어졌고 흙무덤만 남았어라.
睛嵐欲雨詩圓就,
정람욕우시원취, 갠 산에 비가 오려나, 내 시를 벌써 이뤄졌는데
野寺無人酒半醺.
야사무인주반훈. 들판 절에는 사람도 없어 나 혼자 술에 취하였네.
忍看銅駝沒荊棘,
인간동타몰형극, 숲 속에 자빠진 동타(銅駝)를 내 차마 보지 못하니
千年蹤跡化浮雲.
천년종적화부운. 천년의 옛 자취가 뜬구름 되었어라.
草根咽咽泣寒螿,
초근열열읍한장, 풀뿌리 차갑다고 쓰르라미 울어대네.
一上高亭思渺茫.
일상고정사묘망. 높은 정자에 올라 보니 생각조차 아득해라.
斷雨殘雲傷往事,
단우잔운상왕사, 비 그치고 구름 끼니 지나간 일이 가슴아픈데
落花流水感時光.
락화류수감시광. 떨어진 꽃 흐르는 물에 세월이 느껴지네.
波添秋氣潮聲壯,
파첨추기조성장, 가을이라 밀물소리 더더욱 비장한데다
樓蘸江心月色凉.
루잠강심월색량. 물에 잠긴 저 누각엔 달빛마저 처량해라.
此是昔年文物地,
차시석년문물지, 이곳이 그 옛날엔 문물이 번성했었지
荒城疎樹惱人腸.
황성소수뇌인장. 황폐한 성 늙은 나무가 남의 애를 끊는구나.
錦繡山前錦繡堆,
금수산전금수퇴, 금수산 언덕 앞에 금수가 쌓여 있어
江楓掩映古城隈.
강풍엄영고성외. 강가의 단풍들이 옛성을 비쳐 주네.
丁東何處秋砧苦,
정동하처추침고, 어디서 또닥또닥 다듬이소리가 들려 오나?
欸乃一聲漁艇回.
애내일성어정회. 뱃노래 한 가락에 고깃배가 돌아오네.
老樹倚巖緣薜荔,
로수의암연벽려, 바위에 기댄 고목에는 담쟁이가 얽혀 있고
斷碑橫草惹莓苔.
단비횡초야매태. 풀 속에 쓰러진 비석에는 이끼가 끼었구나.
凭欄無語傷前事,
빙란무어상전사, 말없이 난간에 기대어 지난 일을 생각하니
月色波聲摠是哀.
월색파성총시애. 달빛과 파도소리까지 모두가 슬프기만 해라.
幾介疎星點玉京,
기개소성점옥경, 별들이 드문드문 하늘에 널렸는데
銀河淸淺月分明.
은하청천월분명. 은하수 맑고 옅어 달빛 더욱 밝았구나.
方知好事皆虛事,
방지호사개허사, 이제야 알겠으니 모두가 허사로다
難卜他生遇此生.
난복타생우차생.저승을 기약키 어려우니 이승에서 만나 보세.
醽醁一樽宜取醉,
령록일준의취취, 술 한잔 가득 부어 취해 본들 어떠랴
風塵三尺莫嬰情.
풍진삼척막영정. 풍진 세상에 삼척검을 마음에다 둘 텐가?
英雄萬古成塵土,
영웅만고성진토, 만고의 영웅들도 티끌이 되었으니
世上空餘身後名.
세상공여신후명. 세상에 남는 것은 죽은 뒤의 이름뿐일세.
夜何知其夜向闌,
야하지기야향란, 이 밤이 어찌 되었나, 밤은 이미 깊어졌네.
女墻殘月正團團.
녀장잔월정단단. 담 위에 걸린 달이 이제는 둥글어졌네.
君今自是兩塵隔,
군금자시량진격, 그대와 지금부터 세속 인연을 벗었으니
遇我却賭千日歡.
우아각도천일환. 한없는 즐거움을 나와 함께 누려 보세.
江上瓊樓人欲散,
강상경루인욕산, 강가의 누각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階前玉樹露初溥.
계전옥수로초부. 뜰 앞의 나무에는 찬이슬이 내리네.
欲知此後相逢處,
욕지차후상봉처, 이 뒤에 다시 한 번 만날 때를 알고 싶다니
桃熟蓬丘碧海乾.
도숙봉구벽해건. 봉래산에 복숭아 익고 푸른 바다도 말라야 한다네.
生得詩且喜,
생득시차희, 홍생은 시를 받아 보고 기뻐하였다.
2)기씨녀가 기자조선의 후예로신선이 된 내력, 기자조선에 대한 회고를 서술하다
猶恐其返也, 欲以談話留之.
유공기반야, 욕이담화류지.
그러나 그가 돌아갈까 봐 염려되어, 이야기를 하면서 붙잡으려고 하였다.
問曰:
문왈: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不敢聞姓氏族譜.”
“불감문성씨족보.”
"송구스럽지만 당신의 성씨와 족보를 듣고 싶습니다."
娥噫而答曰:
아희이답왈: 여인이 한숨을 쉬더니 대답하였다.
“弱質, 殷王之裔, 箕氏之女.
“약질, 은왕지예, 기씨지녀.
"나는 은나라 임금의 후손이며 기씨의 딸이라오.
我先祖, 實封于此,
아선조, 실봉우차, 나의 선조(기자)께서 실로 이 땅에 봉해지자
禮樂典刑, 悉遵湯訓, 以八條敎民,
례락전형, 실준탕훈, 이팔조교민,
예법과 정치제도를 모두 탕왕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고,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으로써 백성을 가르쳤으므로,
文物鮮華, 千有餘年.
문물선화, 천유여년.
문물이 천년이나 빛나게 되었었소.
一旦天步艱難, 灾患奄至,
일단천보간난, 재환엄지,
갑자기 나라의 운수가 곤경에 빠지고 환난이 문득 닥쳐와,
先考敗績匹夫之手, 遂失宗社.
선고패적필부지수, 수실종사.
나의 선친(준왕)께서 필부(匹夫)의 손에 실패하여 드디어 종묘 사직을 잃으셨소.
衛瞞乘時, 竊其寶位, 而朝鮮之業墜矣.
위만승시, 절기보위, 이조선지업추의.
위만(衛滿)이 이 틈을 타서 보위(寶位)를 훔쳤으므로, 우리 조선의 왕업은 끊어지고 말았소.
弱質顚蹶狼藉, 欲守貞節, 待死而已.
약질전궐랑자, 욕수정절, 대사이이.
나는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기로 다짐하고 죽기만 기다렸을 뿐인데,
忽有神人撫我曰:
홀유신인무아왈: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소.
‘我亦此國之鼻祖也.
‘아역차국지비조야.
'나는 본래 이 나라의 시조인데,
享國之後, 入于海島,
향국지후, 입우해도,
나라를 잘 다스린 뒤에 바다 섬에 들어가
爲仙不死者, 已數千年,
위선불사자, 이수천년,
죽지 않는 선인(仙人)이 된 지가 벌써 수천 년이나 되었다.
汝能隨我紫府玄都, 逍遙娛樂乎?’
여능수아자부현도, 소요오락호?’
너도 나를 따라 하늘나라 궁궐에 올라가 즐겁게 노니는 것이 어떻겠느냐?'
余曰:’諾.’
여왈: ‘락.’ 내가 응낙하자
遂提携引我, 至于所居,
수제휴인아, 지우소거,
그 분이 마침내 나를 이끌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作別館以待之, 餌我以玄洲不死之藥.
작별관이대지, 이아이현주불사지약.
별당을 지어 나를 머물게 하고, 나에게 현주(玄洲)의 불사약을 주셨소.
服之累月, 忽覺身輕氣健,
복지루월, 홀각신경기건,
그 약을 먹고 몇 달이 지나자 홀연히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건장해지더니,
磔磔然, 如有換骨焉.
책책연, 여유환골언.
날개가 달려 신선이 된 것 같았소,
自是以後, 逍遙九垓,
자시이후, 소요구해,
그때부터 하늘에 높이 떠서
儻佯六合, 洞天福地,
당양륙합, 동천복지,
천지 사방을 오가며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찾아
十洲三島, 無不遊覽.
십주삼도, 무불유람.
십주(十洲)와 삼도(三島)를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소.
一日, 秋天晃朗, 玉宇澄明, 月色如水,
일일, 추천황랑, 옥우징명, 월색여수,
하루는 가을 하늘이 활짝 개고 하늘나라가 밝은데다 달빛이 물처럼 맑았소.
仰視蟾桂, 飄然有遐擧之志.
앙시섬계, 표연유하거지지.
달을 쳐다보니 갑자기 먼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소.
遂登月窟, 入廣寒淸虛之府,
수등월굴, 입광한청허지부,
그래서 달나라에 올라가서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에 들어가
拜嫦娥於水晶宮裏. 嫦娥以我貞靜能文, 誘我曰:
배항아어수정궁리. 항아이아정정능문, 유아왈:
수정궁으로 항아를 방문하였더니, 항아가 나더러 절개가 곧고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하면서 이렇게 달래었소.
‘下土仙境, 雖云福地, 皆是風塵,
‘하토선경, 수운복지, 개시풍진,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을 비록 복지(福地)라고는 하지만, 모두 풍진(風塵)의 땅이다.
豈如履靑冥驂白鸞, 挹淸香於丹桂,
개여리청명참백란, 읍청향어란계,
하늘나라에 올라와서 흰 난새를 타고 계수나무 아래에서 맑은 향내를 맡으며,
服寒光於碧落, 遨遊玉京,
복한광어벽락, 오유옥경,
푸른 하늘에서 달빛을 띠고 옥경(玉京)에서 즐겁게 놀거나
遊泳銀河之勝也?’
유영은하지승야?’
은하수에서 목욕하는 것보다야 낫겠느냐?'
卽命爲香案侍兒, 周旋左右, 其樂不勝可言.
즉명위향안시아, 주선좌우, 기락불승가언.
그리고는 나를 향안(香案) 받드는 시녀로 삼아 자기 곁에 있도록 하여 주었는데, 그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소.
忽於今宵, 作鄕井念,
홀어금소, 작향정념,
그러다가 오늘 저녁에 갑자기 고국 생각이 나서,
下顧蜉蝣, 臨睨故鄕,
하고부유, 림예고향,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고향땅을 굽어보았소.
物是人非, 皓月掩烟塵之色,
물시인비, 호월엄연진지색,
산천은 옛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달라졌고, 밝은 달빛이 연기와 티끌들을 가려 주었으며,
白露洗塊蘇之累, 辭下淸宵, 冉冉一降,
백로세괴소지루, 사하청소, 염염일강,
맑은 이슬이 대지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씻어 놓았기에, 옥경을 잠시 하직하고 살며시 내려와 보았소.
拜于祖墓, 又欲一玩江亭, 以暢情懷.
배우조묘, 우욕일완강정, 이창정회.
조상님의 산소에 절하고는, 부벽정이나 구경하면서 회포를 풀어 볼까 해서 이리로 왔었소.
適逢文士, 一喜一赧,
적봉문사, 일희일난,
마침 글 잘 하는 선비를 만나고 보니, 한편 기쁘고도 한편 부끄럽소.
輒依瓊琚之章, 敢展駑鈍之筆,
첩의경거지장, 감전노둔지필,
더군다나 그대의 뛰어난 시에다 노둔한 붓을 펼쳐 화답하였으니,
非敢能言, 聊以敍情耳.”
비감능언, 료이서정이.”
감히 시라고 한 게 아니라 회포를 대강 펼쳤을 뿐이오."
3]홍생은 기씨의 딸에게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시를 청해 받다
生再拜稽首曰:
생재배계수왈:
홍생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下土愚昧, 甘與草木同腐,
“하토우매, 감여초목동부,
"아래 세상의 우매한 사람이야 초목과 함께 썩는 것이 마땅합니다.
豈意與王孫天女, 敢望唱和乎?”
개의여왕손천녀, 감망창화호?”
(이 나라의) 왕손이신 선녀를 모시고 시를 주고받게 될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生卽於席前, 一覽而記. 又俯伏曰:
생즉어석전, 일람이기. 우부복왈:
홍생은 그 자리에서 한 번 읽어 본 시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엎드려서 말하였다.
“愚昧宿障深厚, 不能大嚼仙羞,
“우매숙장심후, 불능대작선수,
"우매한 이 사람은 전세에 지은 죄가 많아서 신선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만,
何幸粗知字畵,
하행조지자화,
다행히도 글자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稍解雲謠, 眞一奇也.
초해운요, 진일기야.
그래서 선녀께서 지으신 시도 조금은 이해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四美難具, 請復以江亭秋夜玩月爲題,
사미난구, 청복이강정추야완월위제,
사미(四美)를 갖추기가 어려운데 (이제 이 네 가지가 다 갖추어졌으니),
이번에는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로 제목을 삼아서
押四十韻, 敎我.”
압사십운, 교아.”
사십 운(韻)의 시를 지어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佳人頷之, 濡筆一揮,
가인함지, 유필일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적셔 한번에 죽 내리썼다.
雲煙相軋, 走書卽賦曰:
운연상알, 주서즉부왈:
구름과 연기가 서로 얽힌 듯하였다. 붓을 달려서 곧바로 지었다.
그 시에 읊었다.
[은자주]읽기 편하도록 연(聯)을 만들었으나 실제는 고시(古詩)여서
80구가 이어져 있다.
月白江亭夜,
월백강정야, 부벽정 달 밝은 밤에
長空玉露流.
장공옥로류. 먼 하늘에서 맑은 이슬이 내렸네
淸光蘸河漢,
청광잠하한, 맑은 빛은 은하수에 빛나고
灝氣被梧楸.
호기피오추. 서늘한 기운은 오동잎에 서려 있네.
皎潔三千界,
교결삼천계, 눈부시게 깨끗한 삼천리에
嬋娟十二樓.
선연십이루. 십이루(十二樓)가 아름다워라.
纖雲無半點,
섬운무반점, 가녀린 구름에는 반 점 티끌도 없는데
輕颯拭雙眸.
경삽식쌍모. 가벼운 바람이 눈앞을 스치네.
瀲灩隨流水,
렴염수류수, 넘실넘실 넘치며 흐르는 물에
依稀送去舟.
의희송거주. 아물아물 떠나는 배를 보내네.
能窺蓬戶隙,
능규봉호극, 배 안에서 창 틈으로 엿보니
偏映荻花洲.
편영적화주. 갈대꽃이 물가를 비추는구나.
似聽霓裳奏,
사청예상주, 「예상곡」이 들리는 건가
如看玉斧修.
여간옥부수. 옥도끼로 다듬은 건가.
蚌珠胚貝闕,
방주배패궐, 진주조개로 집을 지어
犀暈倒閻浮.
서운도염부. 염부주(炎浮洲)에 비치는구나.
願與知微翫,
원여지미완, 지미(知微)와 달구경하고
常從公遠遊.
상종공원유. 공원(公遠)을 따르며 놀아 보세나.
芒寒驚魏鵲,
망한경위작, 달빛이 차갑자 위나라 까치가 놀라고
影射喘吳牛.
영사천오우. 오나라 소는 그림자보고 헐떡이네.
隱隱靑山郭,
은은청산곽, 은은한 달빛이 푸른 산을 두르고
團團碧海陬.
단단벽해추. 둥근 달이 푸른 바다에 떴는데,
共君開鑰匙,
공군개약시, 그대와 함께 창을 열어 젖히고
乘興上簾鉤.
승흥상렴구.흥겨워 주렴을 걷어올리네.
李子停盃日,
리자정배일, 이자(李子)는 술잔을 멈추었고
吳生斫桂秋.
오생작계추. 오생(吳生)은 계수나무를 찍었지.
素屛光粲爛,
소병광찬란, 흰 병풍이 빛도 찬란한데
紈幄細雕鎪.
환악세조수. 아로새긴 채색 휘장이 쳐져 있네.
寶鏡磨初掛,
보경마초괘, 보배로운 거울을 닦아 내어 처음 걸고
永輪駕不留.
영륜가불류. 얼음 바퀴 구르던 것도 멈추지 아니하네.
金波何穆穆,
금파하목목, 금물결은 어이 그리도 아름다우며
銀漏正悠悠.
은루정유유. 은하수는 어이 그리도 유장한지,
拔劍妖蟆斫,
발검요마작 요사스런 두꺼비는 칼을 뽑아 없애고
張羅㕙兎罦.
장라준토부.교활한 옥토끼는 그물을 펼쳐 잡아 보세.
天衢新雨霽,
천구신우제, 먼 하늘에는 비가 처음 개고
石逕淡煙收.
석경담연수. 돌길에는 맑은 연기가 걷혔는데,
檻壓千章木,
함압천장목, 난간은 숲 사이에 솟았고
階臨萬丈湫.
계림만장추. 섬돌에선 만 길 못을 굽어보네.
關河誰失路,
관하수실로, 머나먼 곳에서 그 누가 길을 잃었나?
鄕國幸逢儔.
향국행봉주. 고향 나라 옛 친구를 다행히도 만났네.
桃李相投報,
도리상투보, 복사꽃과 오얏꽃을 서로 주고받으며
罍觴可獻酬.
뢰상가헌수. 잔에 가득 부어 술도 주고받았네.
好詩爭刻燭,
호시쟁각촉,초에다 금을 그어 다투어 시를 짓고
美酒剩添籌.
미주잉첨주.가지를 더해 가며 취토록 마셔 보세.
爐爆烏銀片,
로폭오은편, 화로 속에선 까만 숯불이 튀고
鐺翻蟹眼漚.
당번해안구. 노구솥에선 보글보글 거품이 이네.
龍涎飛睡鴨,
룡연비수압, 오리 향로에선 용연향(龍涎香)이 풍겨 오고
瓊液滿癭甌.
경액만영구. 커다란 잔 속에는 술이 가득해라.
鳴鶴孤松驚,
명학고송경, 외로운 소나무에선 학이 울고
啼螿四壁愁.
제장사벽수. 네 벽에선 귀뚜라미가 우는구나.
胡床殷瘦話,
호상은수화, 호상에서 은호와 유량이 이야기하고
晉渚謝遠遊.
진저사원유. 진저(晉渚)에서 사령운이 혜원과 노닐었었지.
彷彿荒城在,
방불황성재, 어렴풋이 거친 성터에
簫森草樹稠.
소삼초수조. 쓸쓸하게 초목만 우거져,
靑楓搖湛湛,
청풍요담담, 단풍잎은 하늘하늘 떨어지고
黃葦冷颼颼
황위랭수수 누런 갈대는 차갑게 사각거리네..
仙鏡乾坤闊,
선경건곤활, 선경이라 하늘과 땅이 넓기만 한데
塵閒甲子遒.
진한갑자주. 티끌 세상엔 세월도 빠르구나.
故宮禾黍穗,
고궁화서수, 옛 궁궐엔 벼와 기장이 여물었고
野廟梓桑樛.
야묘재상규. 사당에는 가래나무와 뽕나무가 늘어졌네.
芳臭遺殘碣,
방취유잔갈, 남은 자취는 빗돌 뿐이던가
興亡問泛鷗.
흥망문범구. 흥망을 갈매기에게나 물어 보리라.
纖阿常仄滿,
섬아상측만, 달님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니
累塊幾蜉蝣.
루괴기부유. 인생이란 하루살이 같아라.
行殿爲僧舍,
행전위승사, 궁궐은 절간이 되고
前王葬虎丘.
전왕장호구. 옛날의 임금들은 세상 떠났네.
螢燐隔幔小,
형린격만소, 반딧불이 휘장에 가려 사라지자
鬼火傍林幽.
귀화방림유. 도깨비불이 깊은 숲에서 나타나네.
弔古多垂淚,
조고다수루, 옛날일 생각하면 눈물만 떨어지고
傷今自買憂.
상금자매우. 지금 세상 생각하면 저절로 시름겨우니,
檀君餘木覓,
단군여목멱, 단군의 옛터는 목멱산만 남았고
箕邑只溝婁.
기읍지구루. 기자의 서울도 실개천뿐일세.
窟有麒麟跡,
굴유기린적, 굴속에는 기린의 자취가 있고
原逢肅愼鍭.
원봉숙신후. 들판에는 숙신(肅愼)의 화살만 남았는데,
蘭香還紫府,
란향환자부, 난향(蘭香)이 자부(紫府)로 돌아가자
織女駕蒼虯.
직녀가창규. 직녀도 용을 타고 떠나가네.
文士停花筆,
문사정화필, 글 짓는 선비는 붓을 놓고
仙娥罷坎堠.
선아파감후. 선녀도 공후를 멈추었네.
曲終人欲散,
곡종인욕산, 노래를 마치고 사람들 흩어지려니
風靜櫓聲柔.
풍정노성유. 고요한 바람에 노 젓는 소리만 들려 오네.
寫訖, 擲筆凌空而逝, 莫測所之.
사흘, 척필릉공이서, 막측소지.
여인은 쓰기를 마친 뒤에 공중에 높이 솟아 가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將歸, 使侍兒傳命曰:
장귀, 사시아전명왈:
여인이 돌아가면서 시녀를 시켜 홍색에게 말을 전하였다.
“帝命有嚴, 將驂白鸞,
“제명유엄, 장참백란,
"옥황상제의 명이 엄하셔서 나는 이제 흰 난새를 타고 돌아가겠소.
淸話未盡, 愴我中情.”
청화미진, 창아중정.”
맑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기에 내 속마음이 아주 섭섭하오."
4]홍생은 견우성 종사관에 임명되는 꿈을 꾸고 이승을 하직하다
俄而, 回飇捲地, 吹倒生座,
아이, 회표권지, 취도생좌,
얼마 뒤에 회오리바람에 불어와 땅을 휘감더니 홍생이 앉았던 자리도 걷고
掠詩而去, 亦不知所之.
략시이거 ,역불지소지.
여인의 시도 앗아가 버렸는데, 이 시도 또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蓋不使異話, 傳播人間也.
개불사리화,전파인간야.
이상한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전하여 퍼뜨리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生惺然而立, 藐爾而思, 似夢非夢, 似眞非眞.
생성연이립,막이이사,사몽비몽,사진비진.
홍생은 조용히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었다.
倚闌注想, 盡記其語,
의란주상,진기기어,
난간에 기대서서 정신을 모으고는 여인이 하였던 말들을 모두 기록하였다.
因念奇遇, 而未盡情款. 乃追懷以吟曰:
인념기우, 이미진정관. 내추회이음왈:
그는 기이하게 만났지만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다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여, 조금 전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시를 읊었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租稅)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사 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世宗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 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 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 치운(崔致雲: 본관 강릉(江陵).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
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 1450-1467)의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ㆍ현릉(顯陵: 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 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 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 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시ㆍ서ㆍ역ㆍ예기ㆍ주례ㆍ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ㆍ월ㆍ운ㆍ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ㆍ음양유현(陰陽幽顯: 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 존심 양성)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ㆍ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워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 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 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벼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禾]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玩賞) 할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으례 기쁜 빛을 하고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 있길래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명경(名卿: 이름있는 공경) 김 수온(金守溫)과 서 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 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상찬(賞讚)되었다.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藍縷)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백죽립(白竹笠)를 쓰고서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초軒: 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을 보고서 상주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百代)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 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 앉아서 죽음)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책)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 순임금)께서 오교(五敎: 오륜)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맨 앞에 위하고 죄가 3천 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사승(嗣承)하여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 불교와 노장)에 침체(沈滯)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추원(追遠)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사곡(邪曲)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詭辯)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동(市童)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 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종실(宗室: 왕족)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 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
효온이,
"동봉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중이 머리를 깎아 눈썹과 같게 한 것)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자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장참(長鑱: 긴 자루가 달린 가래. 농기구의 한 가지)을 만들어 영출(笭朮: 茯笭과 蒼朮)이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공(王恭)의 학창을 매만지려 합니다. 낙백(落魄)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요,
천년 후에 나의 속뜻(素志)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요."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두라고 일렀다.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 불교의 화장)하고 그 뼈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이자(李자)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것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기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방(標榜)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懦弱)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기피(忌避)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ㆍ경(卿)을 매도(罵倒)해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해설】
이이(李珥)가 지은 전(傳).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이다.
작자의 문집인 <율곡집> 권14∼16 ‘잡저’에 실려 있는 그의 유일한 ‘전(傳)’이다.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전>의 내용은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의 손양(遜讓)과 세조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특히,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그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지적하였다. <김시습전> 중에서 학문과 문학적 재능에 대하여 세밀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더러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 등도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ㆍ남효온(南孝溫)ㆍ정창손(鄭昌孫)ㆍ유자한(柳自漢)과의 일화는 대체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안씨(安氏)를 취하여 가정을 이루었던 사실과 오늘날 이자(李秕)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에 의하여 그의 시문집이 전하게 된 내력을 밝혔다.
말미에는 이이 자신의 김시습에 대한 평을 기록하고 있다.
<김시습전>은 전통적인 전의 양식에 충실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일화로 남는 김시습의 행적 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설화로 유전하는 그의 일생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위하여 엄격한 비평적 안목에 의하여 그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 곡조 따위가 맑고 가벼움)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義)를 세우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사람들은 겁장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한 말은 그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한 평가일 것이다.
또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불우한 삶을 영위하였던 한 인물에 대한 올바른 기록을 전이라는 양식을 빌려 쓴 하나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