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금오신화의 <용궁부연록>의 구성은 이 작품과 일치한다.

 

1.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용궁의 경사스런 잔치에 참석하다

 

至正甲申歲,潮州士人餘善文,於所居白晝閑坐。

지정 갑신년에 조주의 선비 여선문은 대낮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忽有力士二人,黃巾繡襖,自外而入。

홀연 역사 두 사람이 누런 두건에 수놓은 저고리를 입고 밖으로부터 들어왔다.

致敬於前曰:“廣利王奉邀。”

앞에 와서 공손히 말하기를,

"광리왕께서 찾으십니다."

善文驚曰:“廣利洋海之神,善文塵世之士。幽顯路殊,安得相及?”

선문이 놀라서 말하기를,

"광리왕은 바다의 신이고 나는 속세의 선비라

서로 사는 곳이 다른데 어찌 서로 마주할 수 있겠소?"

二人曰:“君但請行,毋用辭阻!”

두사람이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그냥 가시기만 하소서. 사양하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遂與之偕出南門外,見大紅船泊於江滸。

마침내 함께 남문 밖으로 나가 강 어귀에 커다란 붉은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登船,有兩黃龍挾之而行。

배에 오르니 양쪽에 황룡이 있어 호위해 갔다.

速如風雨,瞬息已至,止於門下。

비바람처럼 빠르게 나아가 순식간에 도착해 문 아래에 이르렀다.

二人入報。

두 사람이 들어가 보고했다.

頃之,請入。

곧 들어오라고 했다.

廣利降階而接,

광리왕은 계단을 내려오며 영접했다.

曰:“久仰聲華。坐屈冠蓋,幸勿見訝。”

"오랜 동안 그대의 높은 명성을 우르러 왔는데

내 거처에서 인사드림을 행여 달리 보시지 마시오."

遂延之上階,與之對坐。

마침내 연의 맨 윗 계단으로 올라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善文局蹐退遜。

선문이 종종걸음으로 황송하여 물러나려했다.

廣利曰:“君居陽界,寡人處水府。不相統攝,可毋辭也。”

광리왕이 말했다.

"그대는 양계에 살고 있고 과인은 수부에서 지내니

서로 통하는 바가 없기에 그렇게 사양할 필요는 없소."

善文曰:“大王貴重,仆乃一介寒儒,敢當盛禮!”固辭。

선문이 말하기를,

"대왕은 귀중하시지만 소인은 일개 한미한 서생인데 성대한 예우를 감당할 수 있으리오." 하고 고사하였다.

廣利左右有二臣,曰黿參軍、鱉主簿者,

광리왕의 좌우에 두 신하가 있었는데 원참군과 별주부였다.

趨出奏曰:“客言是也,王可從其所請。不宜自損威德,有失觀視。”

그들이 성큼 나와 아뢰었다.

"손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왕께서 그 소청을 따르심이 가합니다.

스스로 위덕을 손상하고 체통을 잃으심은 옳지 않습니다."

廣利乃居中而坐,別設一榻於右,命善文坐。

광리왕은 자기 의자에 앉았고 따로 한 의자를 오른편에 설치하여 선문을 앉게 하였다.

乃言曰:“敝居僻陋,蛟鱷之與鄰,魚蟹之與居;

無以昭示神威,闡揚帝命。

이에 말하기를,

"우리 사는 곳은 누추합니다. 상어 악어와 더불어 이웃해 있고 물고기 새우와 함께 삽니다. 밝게 신위로써 보일 수도 옥황상제의 명을 천양할 수도 없습니다.

今欲別構一殿,命名靈德。

이제 따로 한 전각을 만들고 싶어 지시를 했는데 이름을 영덕전으로 붙였습니다.

工匠已舉,木石鹹具,所乏者惟上梁文爾。

장인들이 이미 착수를 하여 나무와 돌들은 다 구비했는데 빠진 것은 오직 상량문입니다.

側聞君子負不世之才,蘊濟時之略;故特奉邀至此,幸為寡人製之。”

옆에서 듣기로 군자께서는 세상에 없는 재주를 갖고 시대를 뛰어넘는 책략을 쌓았다기에

특별히 받들어 모셔 여기에 이르렀으니 과인을 위해 상량문을 지어주기 바라오."

即命近侍取白玉之硯,捧文犀之管,並鮫綃丈許,置善文前。

곧 가까이 있는 내시에게 명하여 백옥 벼루를 가져오게 하고 문서를 받드는데 무소뿔 대롱에 교소의 비단 한 폭과 함께 선문의 앞에 펼쳐놓았다.

善文俯首聽命,一揮而就,文不加點。

其詞曰:

선문이 고개를 숙이면서 청해온 명을 받드니 일필휘지하니 글자에 점 하나도 더하지 않고 써내려 갔다.

그 사는 이러했다.

 

伏以天壤之間,海為最大;

人物之內,神為最靈。

엎드려 생각컨대

천지간에 바다가 제일 크고,

인간과 사물간에 신이 제일 신령하도다.

既屬香火之依歸,可乏廟堂之壯麗!

이미 향화의 귀의함이 있는데

묘당의 장려함이 모자라서야 되겠는가!

是用重營寶殿,新揭華名。

이에 좋은 집을 다시 짓고,

새로 좋은 이름을 붙이노라.

掛龍骨以為梁,靈光耀日;

緝魚鱗而作瓦,瑞氣蟠空。

용의 뼈를 걸어 들보를 삼으니,

신령스러운 빛이 해에 빛나고,

고기의 비늘로 기와를 만드니

상서로운 기운이 반공에 서렸구나.

列明珠白璧之簾櫳;接青雀黃龍之舸艦。

瑣窗啟而海色在戶,繡闥開而雲影臨軒。

명주와 백옥을 엮은 창문은 벌여 있고,

푸른 공작과 황룡을 그린 함선이 대어 있네.

자잘한 문양의 창을 여니 바다색이 문에 비치고

화려한 궁문을 여니 구름의 그림자는 추녀의 안으로 밀려오네.

雨順風調,鎮南溟八千餘裏;

天高地厚,垂後世億萬斯年。

비는 순하게 내리고 바람은 고르게 불어

진남의 명부는 팔천여 리에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워

후세의 억만 년을 드리우리라.

通江漢之朝宗,受溪湖之獻納。

장강과 한수가 종묘에 흘러 들고,

시내와 호수의 물결도 받아들이네.

天吳紫鳳,紛紜而到;

鬼國羅刹,次第而來。

해신인 천오(天吳)와 자색 봉황

어지럽게 내려오고

귀신 나라의 나찰들이

차례로 내려오사

巋然若魯靈光,美哉如漢景福。

험한 기세는 노나라 영광전(靈光殿) 같고,

미려함은 한나라 경복궁(景福宮) 같다.

控蠻荊而引甌越,永壯宏規;

叫閶闔而呈琅玕,宜興善頌。

만형을 제어하고 구월을 이끄니,

광대한 그 규모는 길이 영구하리라.

창합문에 소리쳐 천제께 낭간을 바치오니

마땅히 좋은 칭송이 일어나리라.

遂為短唱,助舉修梁:

여기 노래지어

상량에 바치노라.

拋梁東,方丈蓬萊指顧中。

笑看扶桑三百尺,金雞啼罷日輪紅。

들보 동쪽에 바치노라.

방장 봉래는 지척이요.

웃으며 삼백척의 부상 땅을 보네.

금계 울음 그치고 둥근 해는 붉도다.

拋梁西,弱水流沙路不迷。

後夜瑤池王母降,一雙青鳥向人啼。

들보 서쪽에 바치노라.

서쪽은 약수, 유사의 땅, 길은 분명하네.

한 밤중에도 요지에는 왕모 내려오시어

한 쌍의 청조(靑鳥)는 소식 알려 우는구나.

拋梁南,巨浸漫漫萬族涵。

要識封疆寬幾許?大鵬飛盡水如藍。

들보 남쪽에 바치노라.

끝없는 큰 가람 넘치는 물굽이

뉘라서 알리요, 경계가 어디메뇨?

대붕이 날아서 끝닿은 곳, 쪽빛 물결 다한 곳이네.

拋梁北,眾星絢爛環辰極。

遙瞻何處是中原?一發青山浮翠色。

들보 북쪽에 바치노라.

별들은 반짝반짝 북극성(北極星)을 둘러 있네.

북극성 잠들고, 중원이 어디메뇨.

아득한 푸른 산에 비취색만 아른거리네.

拋梁上,乘龍夜去陪天仗。

袖中奏罷一封書,盡與蒼生除禍瘴。

들보 위에 바치노라.

용을 타고 밤새도록 천제 앞에 가리라.

소매 속에 간직한 아뢰올 글월엔

창생의 온갖 재난 보살피라는 그 말씀.

拋梁下,水族紛綸承德化。

清曉頻聞讚拜聲,江神河伯朝靈駕。

들보 아래에 바치노라.

그 많은 수족(水族)들마저 성덕(聖德)을 입었구나!

맑은 새벽 부산하게 참배(參拜) 소리 들리니,

강의 신과 하백이 영가(靈駕)로 조회하네.

伏願上梁之後,

萬族歸仁,百靈仰德。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한 연후

온 누리가 대왕의 어진 인덕에 귀의하고,

만 겨레가 용왕님의 어진 덕에 귀의하고

온갖 신령이 용왕님의 선덕을 우러르게 하소서.

珠宮貝闕,應天上之三光,

袞衣繡裳,備人間之五福。

진주와 보패로 이룬 궁궐은

해와 달과 별빛에 맞서고,

곤룡의는 인간의 오복을 갖추게 하시라.

 

書罷,進呈。

廣利大喜。卜日落成,

發使詣東西北三海,請其王赴慶殿之會。

글을 끝내고 나아가 올렸다.

광리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낙성식 날을 받고

동서북 세 바다로 사신을 보내어

그 왕들을 낙성 축하연에 초대하였다.

翌日,三神皆至,從者千乘萬騎,

神蛟毒蜃,踴躍後先;

長鯨大鯤,奔馳左右。

이튿날 삼신들이 모두 왔다.

따라오는 종자들이 천승 만기며

신룡과 독신들이 위무 당당히 앞뒤에 섰고,

긴 고래와 대곤이 좌우를 벌려섰다.

魚頭鬼麵之卒,執旌旄而操戈戟者,

又不知其幾多也。

물고기 대가리에 귀신 얼굴의 병사들이

정모를 꼰아잡고 창극을 거머쥔 자가

얼마나 많은 지 헤아릴 수 없었다.

是日,廣利頂通天之冠,禦絳紗之袍,

秉碧玉之圭,趨迎於門,其禮甚肅。

이날 광리왕은 통천관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고

벽옥장을 짚고 문에서 영접하는데 그 예가 매우 엄숙하였다.

三神亦各盛其冠冕,嚴其劍珮,威儀極儼恪。

삼신 또한 각자 그 관면이 성대하였고

그 차고 있는 칼도 엄중했으며

위엄스런 의식이 지극히 엄각하였다.

但所服之袍,各隨其方而色不同焉。

다만 옷과 도포가

각기 그 지방에 따라 색이 다를 뿐이었다.

敘暄涼畢,揖讓而坐。

차례대로 소개가 끝나자 서로 읍을 하고 앉았다.

善文亦以白衣,坐於殿角。

선문 또한 흰 옷을 입은 채 전각 한 모퉁이에 앉았다.

方欲與三神敘禮,

忽東海廣淵王座後有一從臣,鐵冠而長鬛者,號赤鯇公,

이제 삼신과 차례로 예를 올렸다.

홀연 동해 광연왕의 자리 뒤에 수행 신하가 하나 있었는데

철관에 긴 지느러미가 있어서 적완공이라 부르는 자였다.

躍出廣利前而請曰:

광리왕 앞으로 뛰쳐나와서 청하기를,

“今茲貴殿落成,特為三王而設斯會。

雖江漢之長,川澤之君,鹹不得預度,其禮可謂嚴矣。

彼白衣而末坐者為何人斯?乃敢於此唐突也!”

“지금은 귀 대궐의 낙성식이라 특히 삼왕을 모셔서 이런 연회를 열었습니다.

비록 강한의 수장이며 천택의 군주라도

다 자리에 앉지 못할 정도로 그 예의가 엄중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저 흰옷 입고 말석에 앉은 자는 누구이기에 감히 이 자리에 당돌합니까?”

廣利曰:“此乃潮陽秀士餘君善文也。

吾構靈德殿,請其作上梁文,故留之在此爾。”

광리왕이 말하기를,

"저분은 양계의 뛰어난 선비인 여선문입니다.

내 영덕전을 짓는데 청해서 상량문을 짓게 하였으므로

여기에 저처럼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廣淵遽言曰:“文士在座,汝烏得多言?姑退!”

광연왕이 급히 말하기를,

"문사께서 여기 계시는데 너는 어찌 그리 말이 많으냐, 물러 가라."

赤鯇公乃赧然而下。

적완공이 얼굴을 붉히며 내려갔다.

已而,酒進樂作,有美女二十人,搖明璫,曳輕裾,

於筵前舞淩波之隊,歌淩波之詞。曰:

이어 술잔이 올라오고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미녀 20인이 있어 밝은 구슬을 흔들며 소매를 가볍게 떨치며

무대 앞으로 나와 능파의 대열로 춤을 추는데

능파의 가사로 노래하였다. 가사는 이러하였다.

 

若有人兮波之中,折楊柳兮采芙蓉。

振瑤環兮瓊珮,璆鏘鳴兮玲瓏。

파도 가운데에 누가 있는가

수양버들과 부용꽃 꺾었어라.

차고 있는 패와 옥고리 흔들어라.

쩔렁쩔렁 울림은 영롱하구나.

衣翩翩兮若驚鴻,身矯矯兮如遊龍。

輕塵生兮羅襪,斜日照兮芳容。

옷자락 펄럭임은 놀란 기러기 같고

교교한 몸 놀림은 용의 유희 같구나.

버선 끝에서 가벼운 먼지 일어나니

기우는 햇살에 용모는 꽃답도다.

蹇獨立兮西複東,羌可遇兮不可從。

忽飄然而長往,禦泠泠之輕風。

한 발로 서서 서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다시 오니

강족 아니면 따를 수 없네.

갑자기 회오리바람처럼 멀리 갔다가

냉랭하고 가볍게 바람 재우네.

 

舞竟,複有歌童四十輩,

倚新妝,飄香袖,

於庭下舞采蓮之隊,歌采蓮之曲。曰:

춤이 끝나자 다시 가동 40 명이 나와

새로운 단장을 하고 향수 소매를 떨치며

뜰 아래로 내려와 채련(연을 채취함)의 대열을 하고 춤을 추는데

채련가를 불렀다.

 

桂棹兮蘭舟,泛波光兮遠遊。

捐予玦兮別浦,解予珮兮芳洲。

계수나무 노의 난초 배여,

파도 빛에 두둥실 멀리도 갔네.

내 패옥을 끊어 포구와 이별하고

내 패옥을 버려 포구에 새기네.

波搖搖兮舟不定,折荷花兮斷荷柄。

露何為兮沾裳?風何為兮吹鬢?

파도 일렁일렁 배는 정처없고,

연꽃 꺾으려니 연 가지 부러지네.

치마를 적시는 이슬은 어찌할꼬?

귀밑머리에 부는 저 바람은 어찌할꼬?

棹歌起兮彩袖揮,翡翠散兮鴛鴦飛。

張蓮葉兮為蓋,緝藕絲兮為衣。

노젓는 노래 시작하며 수 놓은 소매 휘젓고,

비취 빛 흩어지니 원앙 또한 날아가네.

긴 연꽃 잎은 덮개로 쓰고,

연뿌리 실 뽑아 옷 만드세.

日欲落兮風更急,微煙生兮淡月出。

早歸來兮難久留,對芳華兮樂不可以終極。

해 떨어지려 하니 바람은 급히 바뀌고

실 연기 일어나니 엷은 달님 나오는구나.

일찍 돌아오고 싶어도 오래 머물기 어렵고,

대하며 화려한 이름 남기려하나 즐거움이 종내 그 끝까지 갈 수는 없나니.

 

二舞既畢,

然後擊靈鼉之鼓,吹玉龍之笛,

眾樂畢陳,觥籌交錯。

두 춤이 끝나자

그런 후에 영타(신령스런 악어 가죽으로 만든 북)의 북을 치고

옥룡의 피리를 부는데

모든 악기가 함께 늘여서 굉주를 서로 교차시켰다.

於是東西北三神,共捧一觥,

致善文前,曰:

이에 동서북 삼심이 같이 하나의 광을 받들고

선문의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吾等僻處遐陬,不聞典禮。

今日之會,獲睹盛儀。

而又幸遇大君子在座,光采倍增。

우리들은 후미진 한 쪽 귀퉁이에서 사는데

책에 쓰여진 예의를 몰랐습니다.

오늘의 만남으로 성대한 의식을 보게 되었고

또 다행히 크신 군자를 앉은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었으니

광채가 배나 증가하였습니다.

願為一詩以記之,使流傳於龍宮水府,

抑亦一勝事也。不知可乎?”

원컨대 한 수 시를 지어 용궁 수부에 전해지도록 해 주시면

우러러 봄에 한 층 좋은 일이되겠습니다.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善文不可辭,遂獻水宮慶會詩二十韻:

선문은 사양하지 않고 드디어 수궁경회시 20운을 바쳤다.

 

帝德乾坤大,神功嶺海安。

淵宮開棟宇,水路息波瀾。

제의 덕은 하늘과 땅에 크고,

신의 공덕은 산과 바다에 편안하도다.

연궁은 동우를 열고

수로는 파란 속에 쉬는 구나.

列爵王侯貴,分符地界寬。

威靈聞赫奕,事業保全完。

열작과 왕후는 귀하나

떨어진 귀신 땅의 경계는 닫혀있네.

위령은 혁혁하게 들리고

사업은 완전하게 보전되리.

南極常通奏,炎方永授官。

登堂朝玉帛,設宴會衣冠。

남극으로는 늘 소원이 통하고

염방은 늘 관작을 주고

조정에 오를 때는 옥백이요,

연회를 열 때는 의관이라.

鳳舞三簷蓋,龍馱七寶鞍。

傳書雙鯉躍,扶輦六鼇蟠。

봉은 춤을 추며 삼 층 처마를 덮고

용을 타려고 칠보 안장 올렸네.

책을 전하기 위해서는 두 마리 잉어가 뛰고,

수레를 끌기 위해 큰 바다거북이 엎드려 있네.

王母調金鼎,天妃捧玉盤。

杯凝紅琥珀,袖拂碧琅玕。

서왕모는 금정을 조절하고,

천비는 옥쟁반을 받들며

술잔을 부딧히니 붉은 호박이요,

소매를 떨치니 푸른 낭간이로다.

座上湘靈舞,頻將錦瑟彈。

曲終漢女至,忙把翠旗看。

자리 위에서는 상령무를 추고,

빠른 곡조로 금슬을 연주하네.

곡조 끝나니 한녀가 와서

황급히 푸른색 깃발을 보여주네.

瑞霧迷珠箔,祥煙繞畫欄。

屏開雲母瑩,簾卷水晶寒。

상서로운 안개가 주박을 아른거리게 하고,

상서로운 연무는 난간을 그림처럼 두르고 있다.

운모 병풍 황홀하고

수정 주렴은 차가워라.

共飲三危露,同餐九轉丹。

良辰宜酩酊,樂事稱盤桓。

삼위의 이슬을 잔에 붓고,

구전단을 먹어보세.

임아, 이 좋은 밤에 취합시다.

즐거운 이 밤은 다시 안 오리니.

異味充喉舌,靈光照肺肝。

渾如到兜率,又似夢邯鄲。

진미는 혀와 목에 가득하고,

신령한 빛은 폐부에 빛나리라.

도솔천에 이르렀는가,

또 한단의 꿈이런가.

獻酢陪高會,歌呼得盡歡。

題詩傳勝事,春色滿毫端。

이름 높은 모임에 잔을 올리세,

흥이 다할 때까지 노래 부르세.

이 좋은 일들을 시로 지으니,

봄빛이 붓 끝에 가득하도다.

 

詩進,座間大悅。

已而日落鹹池,月生東穀,

諸神大醉。

시를 올리자 좌중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이미 해는 연못 너머로 지고 달이 동쪽 골짜기로 올라오니

모든 신들이 다 크게 취했다.

傾扶而出,各歸其國。

車馬駢闐之聲,猶逾時不絕。

비틀거리며 나아가 각자 그 나라로 돌아가는데,

마차들의 요란스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明日,廣利特設一宴,以謝善文。

이튿날 광리왕은 특별히 또 연회를 열어

선문에게 사례를 하였다.

宴罷,以玻璃盤盛照夜之珠十,

通天之犀二,為潤筆之資。

잔치가 끝나자 파려의 쟁반에 빛나는 야광주 열 개와

통천하는 무소뿔 둘로 재료를 해서 붓을 만들어 주었다.

複命二使送之還郡。

다시 두 사신에게 명하여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善文到家,攜所得於波斯寶肆鬻焉,

獲財億萬計,遂為富族。

선문이 집에 도착하여 물속에서 얻은 보배들을 끌러보니

억만금의 재물을 얻어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後亦不以功名為意,

棄家修道,遍遊名山,

不知所終。

뒤에 공명에는 뜻을 두지는 않았다가

집을 버리고 수도를 하려 명산을 돌아다녔는데

생을 마친 일은 알지 못한다.

 

 

전등신화 목록

 

서문(序文)

1. 구우(瞿佑)의 전등신화서(剪燈新話序)

2. 능운한(凌雲翰)의 전등신화서(剪燈新話序)

3. 오식(吳植)의 전등신화인(剪燈新話序引)

4. 김면(金冕)의 전등신화발(剪燈新話跋)

5. 계형(桂衡)의 전등신화시(剪燈新話詩) 병서(幷序)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 권지상(卷之上)

1.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 경사스런 수궁의 잔치 모임

2. 삼산복지지(三山福地誌) - 복받은 삼산의 땅

3. 화전봉고인기(華亭逢故人記) - 화정에서 만난 옛친구

4. 금봉채기(金鳳釵記) - 금 봉황비녀 이야기

5. 연방루기(聯芳樓記) - 연방루에서 나눈 사랑 이야기

6. 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 - 영호생의 저승 꿈 이야기

7. 천태방은록(天台訪隱錄) - 천태산의 은자 이야기

8. 등목취유취경원기(등穆醉遊聚景園記) - 등목의 취경원기

9. 모란등기(牡丹燈記) - 모란등기

10. 위당기우기(渭塘奇遇記) - 위당의 기이한 만남

11. 부귀발적사지(富貴發跡司志) - 부귀와 저승 이야기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 권지하(卷之下)

12. 영주야묘기(永州野廟記) - 영주의 야묘기

13. 신양동기(申陽洞記) - 신양동 이야기

14. 애경전(愛卿傳) - 애경의 사랑 이야기

15. 취취전(翠翠傳) - 취취의 슬픈 사랑 이야기

16. 용당영회록(龍堂靈會錄) - 용당의 귀신 모임

17. 태허사법전(太虛司法傳) - 태허전 판사 이야기

18. 수문사인전(修文舍人傳) - 수문 사인 이야기

19. 감호야범기(鑑湖夜泛記) - 감호의 뱃놀이

20. 녹의인전(綠衣人傳) - 푸른옷 여인전

 

附錄

21. 추향정기(秋香亭記)- 추향정기

22.기매기(寄梅記) - 기매전

: "계천몽감록(桂遷夢感錄)", "요공자전(姚公子傳)" 등 8편

 

후기(後記)ㆍ발문(跋文)

1. 호자앙(胡子昻)의 전등신화권후기(剪燈新話卷後紀)

2. 안벽언(晏壁彦)의 추향정기발(秋香亭記跋)

3. 당악(唐岳)의 전등신화권후지(剪燈新話卷後志)

4. 구우(瞿佑)의 중교전등신화후서(重校剪燈新話後序)

5. 구우(瞿佑)의 제전등록후(題剪燈錄後) 절구(絶句) 4수

6. 임기(林기)의 전등신화구해발(剪燈新話句解跋)

7. 윤춘년(尹春年)의 제주전등신화후(題注剪燈新話後)

 

[피서산장 & 포탈라궁]

《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운영자 주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1917년 6월 1일 ~ 2000년 11월 9일)

《연암소설연구(燕巖小說硏究)》(1966)로 박사학위 받음. 연암연구의 개척자.

이 열하일기(熱河日記) 26편은, 조선 정조왕(正祖王) 때 수많은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서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거성(鉅星)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1737~1805)의 명저이다.

그는 정조왕 4년, 곧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청(淸)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ㆍ북평(北平)ㆍ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일계(一系)의 학자들이 존명사상(尊明思想)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山川)ㆍ풍토(風土)와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艶慕)하였는데, 급기야 그 숙원(宿願)이 이루어져 그들의 통도(通都)ㆍ요새(要塞)를 신력(身歷)하고는 더욱 자신이 만만하여, 모든 역사(歷史)ㆍ지리(地理)ㆍ풍속(風俗)ㆍ습상(習尙)ㆍ고거(攷據)ㆍ건설(建設)ㆍ인물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ㆍ문학ㆍ예술ㆍ고동(古董)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관상(觀賞)은 오로지 승지(勝地)ㆍ명찰(名刹)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그 호화찬란한 재료의 구사와 웅려동탕한 문장의 표현이 실로 조선의 일대를 통틀어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독점하였으며, 그 가치로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수록(隨錄)》,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등과 함께 추숭(推崇)되었으나, 특히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결코 삼가(三家)의 추급(追及)할 바 아니었다.

그리고 본서는 애초부터 명확한 정본(定本)이 없는 동시에 당시의 판본(版本)이 없었으며, 다만 수많은 전사본(傳寫本)이 유행되었으므로, 그 편제(編制)의 이동(異同)이 없지 않음도 사실이었다. 이제 이 역주본(譯註本)은 연암의 수사본(手寫本), 또는 수택본(手澤本)을 근거로 삼고, 그 중의 누락된 부분은 몇십 종의 제본(諸本)을 상세히 대조하여 보충하되, 일일이 주석(註釋)에서 표시하였고, 또 최근에 발견된 원저(原著)의 세 편 중에서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와 양매시화(楊梅詩話) 두 편은 적소(適所)에 추가하였으며, 다만 열하일기 보유(補遺) 한 편은 편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뒷날에 정리 추가하기로 하였다.

1.도강록(渡江錄)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는 책문(柵門) 안을 들어서자 곧, 그들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건설에 심취(心醉)하였다. 주로 성제(城制)와 벽돌을 쓰는 것이 실리임을 역설했다.

2.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에는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談)ㆍ상루필담(商樓筆談)ㆍ고동록(古董錄) 등이 가장 재미로운 기사이다.

3.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지(兵站地)를 달리는 9일 동안의 기록이다. 거제(車制)ㆍ희대(戲臺)ㆍ시사(市肆)ㆍ점사(店舍)ㆍ교량(橋梁) 등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그 서문 가운데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대한 논평이 독자의 흥미를 이끌었다.

4.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11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 중에서,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을 죽이네.”라는 이야기와 우암(尤菴)의 화상에 절하던 이야기 등 기사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호질(虎叱)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허생(許生)과 함께 가장 득의작(得意作)이었다. 남주인공 북곽 선생(北郭先生)과 여주인공 동리자(東里子)를 등장시켜서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그 하나는 유학대가(儒學大家)요, 또 하나는 정절부인(貞節夫人)으로 가장하여, 사회를 속이며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러한 정상을 알게 된 호랑이는 북곽 선생을 꾸짖었다. 사람이 호랑이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은 것이다. 이는 곧 호랑이를 인격화함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5.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연경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열하의 요해를 역설한 것이 모두 당시 열하의 정세를 잘 관찰한 논평이었고, 열하로 떠날 때의 이별의 한을 서술한 한 토막의 문장은 특히 애처롭기 짝이 없어, 후세의 독자로 하여금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6.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대체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연암은 그의 지우(摯友)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다시금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주로 교량(橋梁)ㆍ도로(道路)ㆍ방호(防湖)ㆍ방하(防河)ㆍ탁타(槖駝)ㆍ선제(船制) 등에 대한 논평이다.

8.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던 6일 동안에 그들의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다.

9.심세편(審勢編)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하였다. 역시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이다.

10.망양록(忘羊錄)

윤가전ㆍ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모든 견해를 교환한 기록이다. 이 편이 다른 본에는 대체로 행재잡록(行在雜錄)의 다음에 있었고, 또 연암이 비록 이 편을 혹정필담(鵠汀筆談)의다음에 두었으나, 심세편(審勢編)의 말단에 명확히 “망양록과 혹정필담을 열차(閱次)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으로 보아서, 이것이 연암 최후의 수정임을 인정하겠다.

11.혹정필담(鵠汀筆談)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다. 곧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ㆍ역법(曆法)ㆍ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12.찰십륜포(札什倫布)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한 기록이다.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13.반선시말(班禪始末)

청(淸) 황제가 반선에게 대한 정책(政策)을 논하였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었다.

14.황교문답(黃敎問答)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ㆍ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그것은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었으며, 또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 지옥(地獄)의 설에 대한 논평이다. 말단에는 또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15.피서록(避暑錄)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을 때의 기록이다. 주로 동중(東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그 말단에는 최근에 연암 후손에 의하여 발견된 피서록 수고본을 추보하였으니, 곧 ‘삼한(三韓) 부인 반발(盤髮)’ 이하의 몇 칙(則)이다.

16.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학자들과 문답한 한시화(漢詩話)이다. 이 편은 각본(各本)에 모두 일서(逸書)로 되었었는데, 최근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추보(追補)하였다. 그 책의 첫 장에 ‘원본중낙루등입차(元本中落漏謄入次)’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음으로 보아서, 당시에 옮겨 써 넣으려던 것이 우연히 누락된 것인 듯싶다. 그래서 다만 다른 편 중에 거듭된 부분과 본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넣지 않았다.

17.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이다. 주로 가사(歌辭)ㆍ향시(鄕試)ㆍ서적(書籍)ㆍ언해(諺解)ㆍ양금(洋琴) 등에 대한 잡록(雜錄)이다.

18.옥갑야화(玉匣夜話)

일재본(一齋本)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되어 있다. 홍순언(洪純彥)ㆍ정세태(鄭世泰)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허생(許生)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다. 허생이 실존적인 인물인지, 또는 가상적인 인물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서울 묵적골에 살고 있던 한 불우한 서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속유(俗儒)들의 위학(僞學)과는 달리하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재벌로 이름높은 변씨(卞氏)의 돈을 빌려, 바다 가운데 한 빈 섬을 발견하고 떠돌이 도적을 몰아넣어 이상적인국가를 건설한 것은, 곧 수호(水滸)의 양산박(梁山泊)과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율도국(硉島國) 등 천고의 기인(奇人)ㆍ기사(奇事)를 재연출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여지없이 풍자하는 동시에, 이완(李浣)에게 세 가지의 당면한 대책(大策)을 제시하였으니, 이는 실로 북벌책의 정반대인 북학(北學)의 이론이었다. 연암은 일생을 통하여 그 소매(笑罵)와 비타(悲咤)의 일체를 모두 이 한 편에 붙여서 유감없이 표현하였던 것이다.

19.행재잡록(行在雜錄)

청(淸)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淸)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20.금료소초(金蓼少鈔)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이다. 연암집에서는 이 편을 ‘보유’라 하였으나, 열하일기의 제본(諸本)에는 원전의 한 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를 좇았다.

21.환희기(幻戲記)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하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22.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 산장에서 여러 가지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ㆍ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ㆍ상기(象記) 등이 가장 비장(悲壯)하고도 기휼(奇譎)하다.

23.구외이문(口外異聞)

고북구(古北口) 밖에서의 이문을 적은 것이다.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24.황도기략(黃圖紀略)

황성(皇城)의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38종의 문관(門館)ㆍ전각(殿閣)ㆍ도지(島池)ㆍ점포(店舖)ㆍ기물(器物) 등의 기록이다.

25.알성퇴술(謁聖退述)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26.앙엽기(盎葉記)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기까지 20개의 명소를 역람한 기록이다.

이는 실로 진고(振古)에 없는 명저이요, 거작이다. 연암이 귀국하던 날 이 책을 내어 남에게 보이니, 모두 책상을 치면서 ‘기재 기재’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를 싫어하던 도배들은 이를 ‘노호지고(虜號之藁)’라 배격하였으니, 이는 곧 ‘되놈의 연호를 쓴 초고’라는 뜻이다. 이제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志銘) 중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로 한다.

“내 일찍이 연암 박미중(朴美仲)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碧梧桐館)에 모였을 적에, 청장(靑莊) 이무관(李懋官)과 정유(貞蕤) 박차수(朴次修)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과 차수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아마 이제부터 고문(古文)이 진흥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옵니다.’ 한다.

*운영자 주

산여(山如) 박남수(朴南壽)

박차수(朴次) 박제가(齊家)

청장(靑莊) : 이덕무(李德)

 

연암이 취한 어조로, ‘네가 무엇을 안단 말야.’ 하고는, 다시금 계속했다. 산여 역시 취한 기분에 촛불을 잡고 그 초고를 불살라 버리려 하였다. 나는 급히 만류하였다.

연암은 곧 몸을 돌이켜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무관은 거미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차수는 병풍에다가 초서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썼다. 나는 연암에게, ‘이 글씨와 그림이 극히 묘하니, 연암이 마땅히 그 밑에 발(跋)을 써서 삼절(三絕)이 되게 하시오.’ 하여 그 노염을 풀려고 하였으나, 연암은 짐짓 노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서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더니, ‘산여야 이 앞으로 오라. 내 이 세상에 불우한 지 오랜지라, 문장을 빌려 불평을 토로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내 어찌 이를 기뻐서 하겠느냐. 산여와 원평(元平) 같은 이는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문장을 공부하더라도 아예 나를 본받지 말고 정학(正學)을 진흥시킴으로써 임무를 삼아, 다른 날 국가에 쓸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이제 마땅히 제군을 위해서 벌을 받으련다.’ 하고는, 커다란 술잔을 기울여 다시금 마시고 무관과 차수에게도 마시기를 권하여, 드디어 크게 취하고 기뻐하였다.”

이로 보아, 연암은 일시의 후배들에 대하여서도 이 글을 서슴지 않고 자랑하였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는 또 자기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열하일기》만이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던 것이다.

1968년 4월 15일



109.

백대붕(白大鵬)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우리 중형과

승지(承旨) 심희수(沈喜壽)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秋天生薄陰

추천생박음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華岳影沈沈

화악영침침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라는 시는 우리 중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백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白大鵬)은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다. 심희수(沈喜壽)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

는 일송(一松)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10. 맺음말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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