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문만 제시하면 의미를 알 수 없고, 국역만 처리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쉬워

한문을 짧게 끊고 국역으로 대역(對譯)하였다.

 

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설화를 소재로 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생시처럼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인귀교환설화라 한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기에 그런 판타지를 만들어 낸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것은 최치원 설화[쌍녀분설화]이고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에도 상당수 작품이 이 설화를 사용하였다.

31세부터 용장사지 서고에 거처하던 시절 창작하였다.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시습, <금오신화> 5편 원문과 국역 총정리/ 김시습 년보

自寫眞贊[자화상 찬] -위 사진 상단. * 두번째 사진은 젊은날의 자화상. *이땅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스스로 '贊'을 붙여 자신을 예찬한다는 건 자신이 당당하게 살아온 길에

kydong77.tistory.com

 

萬福寺摴蒲記

만복사저포기: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이긴 이야기

-金時習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摴蒲記 上

-만복사에서 저포놀이하다

 

1]양생, 만복사에서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1)양생, 조실부모하고 혼자 만복사 동쪽 방에서 살다

 

南原有梁生者, 早喪父母, 未有妻室, 獨居萬福寺之東.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어버이를 잃은 데다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으므로 만복사(萬福寺)의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房外有梨花一株, 方春盛開, 如瓊樹銀堆,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마치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었다.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 조각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生每月夜, 逡巡朗吟其下. 詩曰:

양생은 달이 뜬 밤마다 나무 아래를 거닐며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一樹梨花伴寂廖,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可憐辜負月明宵.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靑年獨臥孤窓畔,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何處玉人吹鳳簫.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翡翠孤飛不作雙,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鴛鴦失侶浴晴江.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誰家有約敲碁子,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夜卜燈花愁倚窓.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吟罷, 忽空中有聲曰:

시를 다 읊고 나자 갑자기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君欲得好逑, 何憂不遂.”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걱정하느냐?"

生心憙之,

양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2)부처님과 저포놀이하여 이기다 

明日卽三月二十四日也.

그 이튿날은 마침 삼월 이십 사일이었다.

州俗燃燈於萬福寺祈福, 士女騈集, 各呈其志.

이 고을에서는 만복사에 등불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日晩梵罷人稀,

날이 저물고 법회도 끝나자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生袖摴蒲, 擲於佛前曰:

양생이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어 부처님 앞에다 던졌다. (소원을 빌었다.)

“吾今日, 與佛欲鬪蒲戱,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여 볼까 합니다.

若我負, 則設法筵以賽,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 드리겠습니다.

若不負, 則得美女, 以遂我願耳.”

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서 제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祝訖, 遂擲之, 生果勝,

빌기를 마치고 곧 저포를 던지자, 양생이 과연 이겼다.

卽跪於佛前曰:

그래서 부처 앞에 무릎은 꿇고 앉아서 말하였다.

“業已定矣, 不可誑矣.”

"인연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속이시면 안 됩니다."

遂隱於几下, 以候其約.

그는 불좌(佛座) 뒤에 숨어서 그 약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3)불전에서 배필을 구하는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俄而有一美姬, 年可十五六,

얼마 뒤에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어 보였다.

丫鬟淡飾, 儀容婥妁,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깨끗하게 차려 입었는데,

如仙姝天妃, 望之儼然,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몸가짐이 마치 하늘의 선녀 같았다. 바라볼수록 얌전하였다.

手携油甁, 添燈揷香,

그 여인은 기름병을 가지고 와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넣은 다음 향을 꽂았다.

三拜而跪, 噫而歎曰: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슬피 탄식하였다.

“人生薄命, 乃如此邪?”

"인생이 박명하다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遂出懷中狀詞, 獻於卓前. 其詞曰:

그리고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바쳤다.

 

“某州某地居住, 何氏某,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가 (외람 됨을 무릅쓰고 부처님께 아룁니다.)

竊以曩者, 邊方失禦倭寇來侵,

지난번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干戈滿目, 烽燧連年,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焚蕩室廬, 盧掠生民,

왜놈들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생민들을 노략하였으므로,

東西奔竄, 左右逋逃,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하였습니다.

親戚僮僕, 各相亂離,

우리 친척과 종들도 각기 서로 흩어졌었습니다.

妾以蒲柳弱質, 不能遠逝,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自入深閨, 終守幽貞,

깊숙한 규방에 들어 앉아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不爲行露之沾, 以避橫逆之禍,

윤리에 벗어난 행실을 저지르지 않고서 난리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父母以女子守節不爽,

저의 어버이께서도 여자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그르지 않았다고 하여,

避地僻處, 僑居草野, 已三年矣.

외진 곳으로 옮겨 초야에 붙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然而秋月春花, 傷心虛度,

가을 달밤과 꽃 피는 봄날을 아픈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고,

野雲流水, 無聊送日,

뜬구름 흐르는 물과 더불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습니다.

幽居在空谷, 歎平生之薄命,

쓸쓸한 골짜기에 외로이 머물면서 제 박명한 평생을 탄식하였고,

獨宿度良宵, 傷彩鸞之獨舞,

아름다운 밤을 혼자 지새우면서 (짝 잃은) 채란(彩鸞)의 외로운 춤을 슬퍼하였습니다.

日居月諸, 魂銷魄喪,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사라지고 흩어졌습니다.

夏日冬宵, 膽裂腸摧,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밤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까지 찢어집니다.

惟願覺皇, 曲垂憐愍,

오직 부처님께 비오니, 이 몸을 가엽게 여기시어 각별히 돌보아 주소서.

生涯前定, 業不可避,

인간의 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으며 선악의 응보를 피할 수 없으니,

賦命有緣,

제가 타고난 운명에도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早得歡娛, 無任懇禱之至.”

빨리 배필을 얻게 해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女旣投狀, 嗚咽數聲.

여인이 빌기를 마치고 나서 여러 번 흐느껴 울었다.

生於隙中, 見其姿容,

양생은 불좌 틈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고

不能定情, 突出而言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뛰쳐나가 말하였다.

“向者投狀, 爲何事也?”

"조금 전에 글을 올린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신지요?"

見女狀辭, 喜溢於面, 謂女子曰:

그는 여인이 부처님께 올린 글을 보고 얼굴에 기쁨이 흘러 넘치며 말하였다.

“子何如人也, 獨來于此?”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女曰: “妾亦人也, 夫何疑訝之有,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도 또한 사람입니다. 대체 무슨 의심이라도 나시는지요?

君但得佳匹, 不必問名姓, 若是其顚倒也.”

당신께서는 다만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되실 테니까, 반드시 이름을 묻거나 그렇게 당황하지 마십시오."

 

4)처자와 절안 판자방에서 운우지락을 나누다

 

時寺已頹落, 居僧住於一隅,

이 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殿前只有廊廡, 蕭然獨存,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고,

廊盡處, 有板房甚窄.

행랑이 끝난 곳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있었다.

生挑女而入, 女不之難,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들어왔다.

相與講歡, 一如人間.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한 가지였다.

 

將及夜半, 月上東山, 影入窓柯,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비쳤다.

忽有跫音, 女曰: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여인이 물었다.

“誰耶? 將非侍兒來耶?”

"누구냐? 시녀가 찾아온 게 아니냐?"

兒曰: “唯. 向日娘子, 行不過中門, 履不容數步,

시녀가 말하였다.

"예. 평소에는 아가씨가 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시고 서너 걸음도 걷지 않으셨는데,

昨暮偶然而出, 一何至於此極也?”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셨다가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女曰: “今日之事, 蓋非偶然,

여인이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다.

天之所助, 佛之所佑,

하느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逢一粲者, 以爲偕老也.

고운 님을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不告而娶, 雖明敎之法典,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은 비록 예법에 어그러졌지만,

式燕以遨, 亦平生之奇遇也.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평생의 기이한 인연이다.

可於茅舍, 取裀席酒果來.”

너는 집으로 가서 앉을 자리와 술안주를 가지고 오너라."

 

5)처자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시를 수작하다

 

侍兒一如其命而往,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設筵於庭, 時將四更也.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다.

鋪陳几案, 素淡無文,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이 깨끗하였으며,

而醪醴馨香, 定非人間滋味.

술에서 풍기는 향내도 정녕 인간 세상의 솜씨는 아니었다.

生雖疑怪, 談笑淸婉,

양생은 비록 의심나고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맑고 고우며

儀貌舒遲 意必貴家處子, 踰墻而出, 亦不之疑也.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하여,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잡지 못하여)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觴進, 命侍兒, 歌以侑之,

여인이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시녀에게 명하여 '노래를 불러 흥을 도우라' 하고는,

謂生曰: “兒定仍舊曲,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옛 곡조밖에 모릅니다.

請自 製一章以侑, 如何?”

저를 위하여 새 노래를 하나 지어 흥을 도우면 어떻겠습니까?"

生欣然應之曰: “諾.”

양생이 흔연히 허락하고는

乃製滿江紅一闋, 命侍兒歌之曰:

곧 「만강홍(滿江紅)」 가락으로 가사를 하나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였다.

 

惻惻春寒羅衫薄, 幾回腸斷金鴨冷.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은 아직도 얇아

몇 차례나 애태웠던가, 향로불이 꺼졌는가 하고,

晩山凝黛, 暮雲張繖.

날 저문 산은 눈썹처럼 엉기고

저녁 구름은 일산처럼 퍼졌는데,

錦帳鴛衾無與伴, 寶𨥁半倒吹龍管.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짝지을 이가 없어서

금비녀 반만 꽂은 채 퉁소를 불어 보네.

可惜許光陰易跳丸, 中情懣.

아쉬워라, 저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던가

마음 속 깊은 시름이 답답하여라.

燈無焰銀屛短, 徒收淚誰從款.

낮은 병풍 속에서 등불은 가물거리는데

나 홀로 눈물진들 그 누가 돌아보랴.

喜今宵, 鄒律一吹回暖.

기뻐라, 오늘밤에는

피리를 불어 봄이 왔으니,

破我佳城千古恨, 細歌金縷傾銀椀.

겹겹이 쌓인 천고의 한이 스러지네

「금루곡」 가락에 술잔을 기울이세.

悔昔時抱恨, 蹙眉兒眠孤館.

한스런 옛시절을 이제 와 슬퍼하니

외로운 방에서 찌푸리며 잠들었었지.

 

歌竟, 女愀然曰:

노래가 끝나자 여인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曩者蓬島, 失當時之約,

"지난번에 봉도(蓬島)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어겼지만,

今日瀟湘, 有故人之逢,

오늘 소상강(瀟湘江)에서 옛 낭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得非天幸耶.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郞若不我遐棄, 終奉巾櫛,

낭군께서 저를 멀리 버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시중을 들겠습니다.

如失我願, 永隔雲泥.”

그렇지만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겠습니다."

生聞此言, 一感一驚曰:

양생이 이 말을 듣고 한편 놀라며 한편 고맙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敢不從命?”

"어찌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겠소?"

然其態度不凡, 生熟視所爲,

그러면서도 여인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양생은 유심히 행동을 살펴보았다.

時月掛西峯, 鷄鳴荒村, 寺鐘初擊,

이때 달이 서산에 걸리자 먼 마을에서는 닭이 울고 절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曙色將暝. 女曰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말하였다.

“兒可撤席而歸” ,

"얘야. 술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隨應隨滅 不知所之.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女曰: “因緣已定, 可同携手.”

여인이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087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김시습(金時習)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1. 가계·성장기
그의 〈상유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를 비롯하여 《매월당집》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李珥)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그리고 《장릉지 莊陵誌》·《해동명신록》·
《미수기언 眉叟記言》 등의 자료에 의하면, 그의 선대는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의 아우 주원(周元)의 후손이고,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이라 한다.

증조부 윤주(允柱)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일성(日省)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선 선사장씨(仙槎張氏)라 한다.

그런데 위의 내용에서 잘못 전해진 부분이 발견된다. 그것은
김시습의 14대조는 인존(仁存)으로
《매월당집》 세계도(世系圖)에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종래에 그의 원조(遠祖)로 알려진
김연·김태현은 잘못 기록되어 전하여졌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점은 《고려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시습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지지질(生知之質)이 있었다 할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5세에 이미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뒤 13세까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 성균관대사성 김반(金泮), 별동(別洞)의 윤상(尹祥) 등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 사서(史書)와 제자서(諸子書)를 배우고 익혔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병이 들어 계모를 맞아들였다.
이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 유랑행적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김시습은 이때까지 사부학당(四部學堂)에 입학하지도 않고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본시 벼슬길에 뜻이 없었거나 아니면 문지(門地)로 보아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무인(武人)이었던 까닭에 사회적 진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송도(松都)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당시에 지은 글을 모아 24세인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을 엮었는데, 그 후지(後識)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고 적었다.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녕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여 다시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3. 시편창작활동
그러나 그해 다시 효녕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圓覺寺)의 낙성회(落成會)에서 찬시(讚詩)를 바친 점 등으로 미루어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茸長寺)이며, 그 집의 당호가 ‘매월당’이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에 이르는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 遊金鰲錄》에 남겼다.

집구시(集句詩)인 〈산거백영 山居百詠〉도 이때(1468)에 지은 작품이다. 그동안
세조예종바뀌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 關東日錄》에 있는 100여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4. 인생편력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도(浮圖)에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 東峯自畵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참고문헌]

梅月堂集
梅月堂集解題(崔珍源,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3)
韓國儒學史略(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6)
金時習硏究(鄭炳昱,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篇, 1958)
金時習의 佛敎觀(鄭鉒東, 慶北大學校論文集 6, 1962)
金時習의 鬼神觀과 道敎觀(鄭鉒東, 趙潤濟博士回甲紀念論文集, 新雅社, 1964)
金時習의 文集과 著述(鄭鉒東, 慶北大學校語文論集 2, 1964)
金時習攷(林憲道, 人物韓國史, 博友社, 1965)
金時習(鄭炳昱,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金時習論(閔丙秀, 韓國文學作家論, 螢雪出版社, 1977)
梅月堂의 詩世界(閔丙秀, 서울大學校人文論叢 3, 1978)
金時習의 政治思想의 形成過程(金鎔坤, 韓國學報 18, 一志社, 1980)

[이미지]


[주]다음에 소개할 민속촌 '세외도원(世外桃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모델로 하였다.

이미 이 블로그의운영자가 앞에서 소개했던 <도화원기>에 독음을 달아 다시 소개한다.

http://blog.paran.com/kydong/27720232

 

도화원기 桃花源記 - 陶淵明

<『陶淵明集』 卷6>

 

[은자주]도화원은 이상향이다. 영국소설에서도 유사한 구성을 가진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결국 그곳을 다시 찾지 못한 것은 이상향이 환상이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진태원중, 무릉인포어위업,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A.D 377-397년), 무릉(武陵)에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緣溪行, 忘路之遠近. 

연계행, 망로지원근.

어느 날 시내를 따라 가다가 어디쯤인지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忽逢桃花林, 

홀봉도화림,

배는 어느새 복숭아꽃 숲을 지나고 있었다.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협안수백보, 중무잡수,

강 양쪽 언덕을 끼고수백보를 가는 동안, 도중에 잡목은 보이지 않았고

 

芳草鮮美, 落英繽紛. 

방초선미, 락영빈분.

향기 드높은 꽃들이 선연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으며 꽃잎들은어지러이 날리며 떨어지고 있어

 

漁人甚異之, 

어인심이지,

어부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復前行, 欲窮其林. 

부전행, 욕궁기림.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숲이 끝나려는 곳에

 

林盡水源, 便得一山,

림진수원, 편득일산,

숲이 다하자 수원(水源)이 있었고 그곳에 산이 하나 막아섰다.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산유소구, 방불약유광.

거기에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便捨船從口入.

편사선종구입.

문득, 어부는 배를 버리고 동굴입구로 들어갔다.

 

初極狹, 纔通人,

초극협, 재통인,

들어갈 때는 구멍이 아주 좁아 겨우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하더니,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부행수십보, 활연개랑.

다시 몇 십 발자국 나서자 시야가 훤하게 트여왔다.

 

土地平曠, 屋舍儼然, 

토지평광, 옥사엄연,

너른 들판에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有良田美池桑竹之屬, 

유량전미지상죽지속,

기름진 전답이며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나 대나무 등속이 눈에 들어왔다.

 

阡陌交通, 鷄犬相聞.

천맥교통, 계견상문.

옛날의 (즉 진시황 이전의) 토지구획 그대로 개와 닭 소리가 한가로이 들리고 있었다.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기중왕래종작, 남녀의저, 실여외인,

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가며 경작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입은 옷이 모두 이국풍이었다.

 

黃髮垂髫, 竝怡然自樂. 

황발수초, 병이연자락.

기름도 바르지 않고 장식도 없는 머리를 하고, 한결같이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견어인, 내대경, 문소종래,

어부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니 집으로 초대해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낯선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아 모두들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다.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 來此絶境,

자운, “선세피진시란, 솔처자읍인, 래차절경,

자기네들은 옛적 선조들이 진(秦) 통일기의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왔는데,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불부출언. 수여외인간격.”

그 이후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바람에 외부와 격절되고 말았다고 했다.

 

問, “今是何世?” 

문, “금시하세?”

그러면서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냐고 묻기도 했다.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내부지유한, 무론위진.

진(秦) 이후 한(漢)이 선 것도, 한(漢) 이후 위진(魏晉)시대가 온 것도 알지 못했다.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歎惋.

차인일일위구언소문, 개탄완.

어부가 아는 대로 일일이 대꾸해주자 모두들 놀라며 탄식했다.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여인각부연지기가, 개출주식.

사람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 모두 술과 음식을 내주었다.

 

停數日辭去. 

정수일사거.

그렇게 며칠을 머문 후, 어부는 이제 떠나가겠다고 말했다.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차중인어운, “부족위외인도야.”

마을 사람가운데 누군가가 “ 바깥 세상에는 말하지 말아달라 ” 고 부탁했다.

 

旣出, 得其船,

기출, 득기선,

어부는 동굴을 나서서 배에 올라,

 

便扶向路, 處處志之.

편부향로, 처처지지.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곳곳에 표지를 해 두었다.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급군하, 예태수, 설여차.

고을로 돌아와 태수에게 나아가자초지종을 고했더니,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志, 遂迷不復得路.

태수즉견인수기왕, 심향소지, 수미불부득로.

태수는 사람을 보내 오던 길을 되짚어 표식을 더듬어 나가게 했으나 다시 그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남양류자기, 고상사야.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뜻이 높은 은자(隱者)이다.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문지, 흔연규왕. 미과, 심병종.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기 전에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後遂無問津者.

후수무문진자.

그 후로는 그 나루를 다시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增內(증내) 아내에게-백거이

[白居易,772~846 ]

 

*자가 樂天, 이름이 居易이나 한국에서는 자를 이름으로 통용함.

(816) 의 작자.

 

長恨歌

http://blog.paran.com/kydong/26926051

http://blog.paran.com/kydong/26926107

 

琵琶行

http://blog.paran.com/kydong/26926852

 

生爲同室親

생위동실친 살아서는 한 방에서 지내고

死爲同穴塵

사위동혈진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리라

他人尙想勉

타인상상면 다른 사람들도 부부의 도리를 지키는데

而況我與君

이황아여군 하물며 그대와 나는 더 할 나위 있겠는가?

黔婁固窮士

검루고궁사 검루는 가난한 선비였으나

妻賢忘其貧

처현망기빈 그의 현명한 처는 가난을 잊었고

沂缺一農夫

기결일농부 기결은 한낱 농부였으나

妻敬儼如賓

처경엄여빈 그의 처는 그를 귀빈처럼 공경했고

陶潛不營生

도잠불영생 도연명은 생계를 못 꾸렸으나

翟氏自찬薪

적씨자찬신 그의 부인 적씨는 스스로 살림 꾸렸고

梁鴻不肯仕

양홍불긍사 양홍은 벼슬살이 물리쳤으나

孟光甘布裙

맹광감포군 그의 처 맹광은 베옷에 만족했네

君雖不讀書

군수불독서 그대 비록 책은 읽지 못했어도

此事耳亦聞

차사이역문 귀로는 들어 알고 있으리라

至此千載後

지차천재후 천년이 지난 오늘에

傳是何如人

전시하여인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라 전하는가를.

人生未死間

인생미사간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있는 동안은

不能忘其身

불능망기신 육신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어

所須者衣食

소수자의식 배를 채우고 몸을 가리기 위해

不過飽與溫

불과포여온 먹고 입어야 하지만

蔬食足充饑

소식족충기 배고픔은 나물로 때우면 그만이지

何必膏梁珍

하필고량진 어찌 기름진 음식만 필요하며

繒絮足禦寒

증서족어한 거친 솜옷으로 추위만 막으면 되지

何必錦繡文

하필금수문 어찌 비단 옷에 무늬가 필요하겠는가?

君家有貽訓

군가유이훈 그대 집에 내려오는 가르침에도

淸白遺子孫

청백유자손 청렴결백을 자손에게 전하라 하였으니

我亦貞苦士

아역정고사 나 또한 고지식한 선비로서

與君新結婚

여군신결혼 그대와 부부가 된 이상

庶保貧與素

서보빈여소 모쪼록 가난과 소박함을 지키어

偕老同欣欣

해로동흔흔 기쁜 마음으로 부부 해로하리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