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616화 - 지혜로 화를 면한 신랑 (智郞免禍)
옛날 어느 고을에 형리 사령(刑吏使令)1)이 있었다.
1)형리 사령(刑吏使令) : 지방 관아의 형방 밑에서 명령을 받드는 관리.
그 사령이 마침 서울에서 한 대감을 모시게 되었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동안 깊이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밤중이었고,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밤이 매우 깊은 줄을 알았다.
'어떻게 한담? 밤이 매우 깊은 것 같은데..,
이 시각에 집으로 돌아가다간 필시 순라군에게 잡혀 고통을 당할 테고,
어쩐다? 어디 숨어서 밤을 지낼 곳이 없을까?'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마침 길옆 담장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옳지, 저 담장 안에 숨어 있다가 날이 밝으면 얼른 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려가 그 무너진 담장 안으로 살짝 몸을 들여놓고 앉았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그곳은 어느 양반 대갓집 후원 뜰이었다.
사령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 이 집 사람들에게 들키면
도둑으로 몰려 큰 화를 당할 터인데,
다른 곳으로 가서 숨어야겠다.'
그리하여 후원에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이기에
급히 그 위로 기어올라가, 나뭇가지 위에 웅크리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동쪽으로부터 열대여섯 살 된 대갓집 규수로 보이는 한 처녀가
후원으로 와서는 담뱃대를 물고 돌계단에 앉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건너편 서쪽에서 담장 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총각이 다가와 처녀 옆에 앉았다.
처녀와 총각은 돌계단에 앉아 껴안기도 하고 입도 맞추는 등
온갖 난잡한 장난을 하면서 한참 동안 서로 희롱하며 노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처녀가 말했다.
"이봐요, 우린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내일이면 나는 혼례식을 올리고
새신랑을 따라 시집가야 할 터인데,
그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잖아요.
새신랑을 어떻게 처치한다 해도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어요?"
그러자 총각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처녀를 껴안으면서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나에게 좋은 계책이 있으니,
내 말대로 차질 없이 시행만 하면 좋은 수가 생길 것이요."
"그게 무슨 수인데요? 어서 말해 보세요."
"잘 들어요. 내가 삼 노끈을 준비해 줄 테니,
첫날밤에 자지 않고 있다가 신랑이 잠들거든
그 음낭(陰囊)을 노끈으로 단단히 묶도록 해요.
그런 다음 끈의 한쪽을 창문 밖으로 내놓으면,
내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노끈을 힘껏 잡아당겨
죽게 할 것이요."
이에 처녀가 약속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총각은 다시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사령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통탄해 하면서,
이제 곧 날이 밝으려 하자 나무에서 내려와 살그머니
대문 있는 곳으로 돌아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보니 자신이 평소 알고 있는 한 재상의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사령은 그 이름난 재상 집 딸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새신랑을 없애려 음모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이에 사령은 하루 종일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이 모시는 대감이 불러 달려가니 다음과 같이 명령하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예물을 전해야 할 일이 있으니,
늦지 않게 내 집으로 대령하여 기다리도록 하라."
이튿날 아침 일찍 사령이 기다리고 있자
대감이 선물을 건네며 전하라고 하는데,
그 집은 바로 지난밤을 지새운 그 재상 댁이었다.
사령은 예물을 가져가서 전해 드리고,
하루 종일 그 댁에서 얼쩡거리며 혼례 절차를 구경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어두워졌다.
그래도 사령은 친척 손님처럼 보이며 그 댁에 남아 동정을 살폈다.
밤이 깊어졌을 때, 마침 신랑이 측간에 가기 위해
초롱을 들고 혼자 나오는 것이었다.
사령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생각하고
급히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리고는 말했다.
"도련님, 오늘밤에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
부디 잠들지 마시고 밤을 새우면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니, 넌 누구냐? 네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런 미치광이 소리를 하느냐?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사령은 다른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얼른 절을 하고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측간에서 돌아온 신랑은 옷을 벗고 신부와 나란히 누웠으나,
조금 전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에 무슨 곡절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는,
일부러 자는 체하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신부가 살그머니 일어나 앉더니,
손에 뭔가를 쥐고 자기의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는 것이었다.
이에 신랑이 벌떡 일어나 손을 낚아채니 삼 노끈이었는데,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도 신부는 입을 다물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이에 신랑이 계속 다그쳐 물으니,
신부는 더 이상 속이지 못하고 어떤 총각과 통정한 사실이며
죽이려 했다는 얘기를 모두 털어 놓는 것이었다.
'이 여자를 살려 두었다가는 두 집안의 치욕이 될 것이요,
소문이라도 난다면 나의 출세에도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반드시 조용히 처치함이 마땅하다.'
신랑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은 아팠지만 그대로 결행하기로 했다.
이에 곧 그 끈으로 신부의 목을 졸라 죽이고는 끈을 풀어 숨긴 다음,
신부를 이불에 말아 놓고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쳐 장인어른을 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장인 장모며 종들도 모두 달려나오자,
신랑은 이불에 싸인 신부 옆에서 통곡을 하며 말했다.
"신부가 갑자기 춥다면서 떨더니
손쓸 겨를도 없이 숨이 막혀 헐떡이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무슨 변고입니까?"
장인 장모가 놀라 딸의 몸을 펼쳐 보았으나 이미 숨을 쉬지 않았고,
별다른 상처도 없어 신랑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그 진실을 말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고 지나갔다.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신랑은 그 동안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참판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하루는 초헌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 보니,
낡은 도포에 헌 갓을 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길가에 서 있었다.
이에 참판은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앞으로 불러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반가운 듯이 말을 건넸다.
"이 사람아, 그 동안 보이지 않더니 어찌 되었기에 이리도 초라한 모습인가?
자네는 내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자네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네."
참판은 이렇게 말하고는 하인을 불러 이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우리 집안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네.
여러 해 동안 못 보다가 오늘 우연히 길에서 만났으니,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잘 대접하도록 하게.
내 곧 일을 마치고 돌아갈 것이니 속히 모시고 가게."
이 사람은 영문을 몰라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하인을 따라 참판의 집으로 와서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참판은 이 사람을 조용히 불렀다.
"자네는 나를 알아보겠는가? 자네가 아니었으면 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자네는 내 은인이니라.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늘 생각해 왔는데,
오늘 천행으로 만나게 되어 기쁘도다."
참판이 이와 같이 은인이라고 하면서 환대하니
이 사람은,
"소인 본시 형리 사령으로 시골을 떠돌며 7,8년을 살았사옵니다.
그러는 사이 무슨 일로 수차례 서울에 들리기는 하였사오나
실로 대감을 뵌 적은 없사오며,
더구나 은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말씀이옵니다."
하면서 의문을 표하고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곧 참판은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는 옛날 혼례를 치르던
그 첫날밤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 사람은 너무나 감격해 하면서 아뢰었다.
"소인 비록 세월은 오래되었지만 그 당시 일을 어찌 잊겠사옵니까?
당시 신랑이 위태롭게 생각되어 알려 드린 것이었는데,
그 때의 신랑이 바로 대감이라니 뜻밖의 말씀에
정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사옵니다. 소인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참판은 다시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을 자신의 문하에 두고 재산을 늘려주면서 잘 돌봐 주니,
이 사람은 여생을 평안하게 보냈더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