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수국에 와서-


-
이근배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바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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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행
- 이근배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단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노래여 노래여


-
이근배

1


푸른 강변에서


피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母國語)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紙燈)처럼


어두운 산하 (山河)에 피고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치는


눈 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 (神話)의 길목에


핏금진 벽(壁)은 서고


먼 산정 (山頂)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 것일까


2


차고 슬픈 자유의 저녁에


나는 달빛 목금(木琴)을 탄다


어느 날인가, 강가에서


연가 (戀歌)의 꽃잎을 따서 띄워 보내고


바위처럼 캄캄히 돌아선 시간


그 미학 (美學)의 물결 위에


영원처럼 오랜 조국을 탄주(彈奏)한다.


노래여


바람부는 세계의 내안(內岸)에서


눈물이 마른 나의 노래여


너는 알리라


저 피안의 기숡으로 배를 저어간


늙은 사공의 안부를


그 사공이 심은 비명(碑銘)의 나무와


거기 매어둔 피묻은 전설을


그리고 노래여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유역에서


풀리는 조국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내가 띄우는 배의 의미를


노래여, 슬프도록 알리라


3


밤을 대안(對岸)하여


날고 있는 후조(候鳥)


고요가 떠밀리는 야영의 기슭에서


병정의 편애(偏愛)는 잠이 든다.


그 때, 풀꽃들의 일화 (逸話)위에 떨어지는


푸른 별의 사변(思辨)


찢긴 날개로 피 흐르며


귀소(歸巢)하는 후조의 가슴에


향수는 탄흔(彈痕)처럼 박혀든다.


아, 오늘도 돌아누운 산하의


외로운 초병(哨兵)이여


시방 안개와 어둠의 벌판을 지나


늙은 사공의 등불은


어디쯤 세계의 창을 밝히는가


목마른 나무의 음성처럼


바람에 울고 있는 노래는


강물 풀리는 저 대안(對岸)의 기슭에서


떠나간 시간의 꽃으로 피는구나.

낭송창

http://sinaruter.cafe24.com/technote/print.cgi?soundbox=17&board=nang02&Count=1057868486&d=










담쟁이 넝쿨

-정의홍


학교 담벼락에 가득차 기어오른

우리의 서럽고 억센 팔들


마음 하나로는 살기 힘든 세상에

무엇으로 텅빈 마음

저들처럼 가득히 채워주랴

봄이 와도 사람들은 성난 파도

파도가 되어 일렁이고

아직도 최루탄가스가 우리의 봄빛을

앗아가는구나

우리는 버릇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이란 사랑보다 뜨거운 것

눈물만큼 뜨겁고 순수한 땅이 있다면

작은 소망의 집이라도 지을까 보다


마음 하나로는 살기 힘든 세상에

무엇으로 텅빈 마음 가득 채워주랴

우리들의 고통만큼 뻗어오른

덤쟁이넝쿨들의 손짓

저들은 누구를 향해 손짓하고

무엇을 위해 스스로 우는가

바람도 갇혀 버린 어두운 골목길

성난 빗발은

또 몇 잎의 아픔을 던지고 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담쟁이 잎들

내 어찌 저들처럼 흔들리며 살까보냐

[진달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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