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悲歌)

-마종하


푸른 물에 떠 있는 구름이 울리네.

나를 흔들어 울리네.

물의 기류가 켜켜이 쌓이는

이 길게 뻗친 공간, 냇가에서

나는 잠긴 채 하늘을 보네.

저 포플러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바람,

나의 눈은 어리둥절 떠 있네.

왜 모든 것이 그리 막막하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며

흐리멍덩한 웃음 속에

눈알을 묻고 사는 일이며

이 정신 나간 시대에

나는 물 머금은 개천의

자갈 바닥이나 들여다 보며

온 몸에 햇빛이나 칠해 보네.

칠하면 칠할수록 살갗은 벗겨지고

벗겨지면 없어지는 몸.

바람은 물 위를 흐른다.

하늘 한가운데 걸리어 퍼지고

간간이 빛나는 눈물이나 떨구며

구름처럼 풀려 가는 몸.

울음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수국 1- 한택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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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문의: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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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노향림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홀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스피겔리아 -한택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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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이야기

-노향림

억센 사투리로 진도가 내 고향인디, 어허,

소리꾼은 내처 불렀던 신명을 모두 버렸다.

제 영혼의 등받이마저 버리고 보니

내심 날아갈 것 같았다.


그 한 몸의 생계가 될까 하고 스스로 산 속에

입산하듯 들어가 벌을 치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 풀벌레 날갯짓 소리를 몇 벌씩

껴입었다 벗었다 했다.

다 해진 풀섭의 누더기도 기워 주었다.


아카시아, 싸리꽃, 꿀을 튜브처럼 짜 넣은

벌집을 털어내다 그는 그만 화상을 입었다.

벙벙해진 얼굴로 너와집도 함께 곰삭았다.


잠 못든 신새벽이 마비된 그의 망각을 간지렵혔다.

바람 한점 없이 평온한 진도벌이 이불이 되어

그의 곁에 눕기 시작했다.

목이 쉬어 피를 토해 낼 때까지 날마다 그가 앉은

벼랑이 등뼈 곧추세우고 기다렸다.


그의 득음에 멀리 진도가 고수가 되어 장단 맞추었다.

어허, 진도가 어디간디, 바로 여기지

아암 그렇고 말고, 산봉우리는 모두 바다가 되었제.

이제 바다는 산봉우리가 되는 것이여.

장단을 맞춘 산봉우리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서 화답하기 시작했다.

[연못 -들꽃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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