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 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백합 - 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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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참나리 - 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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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은자주]

키가 크고 큰 눈에 흰 얼굴, 사진 속의그가 그립다.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승을 떠났다.

1960년대 갈비탕이 50원, 야경비가 20원 하던 시절.

고궁에서 '음탕' 한 단어만 보고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질타한다.

지나쳐도 상관없는 극명한 자아비판이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시인을 괴롭힌다.

세상사람들이 경험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것들을 환기하는 것,

그것이 시의 역할이고, 문학의 일거리인지도 모른다.

‘적다’는 ‘작다’의 잘못임.

[클레마티스 -들꽃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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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은자주]풀은 민초(民草), 민중의 상징이고, 바람은 풀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창작 당시에는 군사독재권력이라 보면 된다. 풀은 쓰러지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인권, 민주에 대한 풀의 꿈은 역사를 바꾼다. 그것이 핏자국으로 얼룩진 세계사이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미당은 <자화상>에서 청춘의 피튀기는 고뇌, 시쓰기의 고뇌를 이렇게 노래했거니.

 

[수국 - 들꽃수목원] +두운, 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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