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입구에서 2.5km쯤 나오는 길 왼쪽에 허브농원이 있다. 전에는 허브만 있었는데 야생화 간판도 내걸엇다. 철지난 장미덩굴에는 꽃잎이 작은 장미화가 아직도 피고 있었고, 원추리, 창포, 땅바닥에 붙은 야생화들이 무더위에 혀를 빼물었다. 거기 귀족의 클레마티스도 있었다. 그늘을 드리워 '길손의 기쁨'이라는 별명을 지닌 클레마티스가 기중 반가웠다.

자화상(自畵像)

-미당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미당 선생이 23세 때(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출전:<시건설> (1939), <화사집>(남만서고, 1941)

[클레마티스 -허브농원]

















 

 

[주]칠월입니다. 이육사의 <청포도> 첫구가 생각납니다. 이육사의 <청포도> 를, 이육사 선생을 회억합니다. 국난 수준의 경제상황인 현실을 생각하면 나라일을 자기 문제로 고심하고 실천하신 육사 선생의 지고지순한 영혼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청포도>에서 근사하게 해방을 맞이하고 싶은 가상적, 그러나 확신에 찬 심정을 노래했다면 <절정>은 절박한 현실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자아화하여 그 초극의지를 표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역에서도 ‘궁즉통(窮則通)’이라 했잖아요.두 작품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1927년(24세)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블로그로 소통하는 지인 여러분들 건강한 여름나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http://264.pe.kr/board/index.php?doc=html/264.html

 

이육사(李陸史, 1904-1944)

1904년 음력 4월 4일-1944년 1월16일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
절정<絶頂>'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1926년조선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된 후 발발한 6.10만세사건후 북경에 갑니다.

1927년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67282

이육사(李陸史)가 지은 시. 〈광야 曠野〉·〈청포도 靑葡萄〉 등과 함께 대표작의 하나로 1940년 1월호 ≪문장 文章≫지에 발표되었다. 2행 4연으로, 모두 8행으로 되어 있는 자유시이다. 그 네 개의 연은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한시의 구성법을 따르고 있다. 율격은 한 시행(詩行)이 거의 3음보격으로 각 시행의 음절수도 비슷한 정형성을 보이고 있으나, 자유시의 범주에 포괄된다 하겠다.

이 작품은 전체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의 2연은 시인이 처한 상황의 설정이고, 뒤의 2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시인의 의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운 계절’로 표상된 시간적 배경과 시의 화자(話者)가 쫓겨온 시적 공간, 곧 북방의 하늘도 지쳐 끝난 고원(高原)이라 함은 공간적 광활성을 나타내면서도 더 갈 수 없는 단애(斷崖)의 강박관념으로 ‘서릿발 칼날진’과 같은 위급한 곳을 표상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을 곳조차 없이 위급한 극한 상황에 이른 화자는 눈을 감고 환상의 ‘무지개’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매운 계절’에서 ‘겨울’까지 이어지는 시상의 이음새가 구김살 없이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점을 이 시의 탁월성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북방으로 쫓겨간 것은 시인 자신이지만, 그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민족 전체의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이 시의 핵심적인 종련(終聯)의 ‘강철로 된 무지개’에 대한 해석은 ‘비극적 황홀’이니, ‘황홀한 미래의 약속’이니, 또는 ‘절망적 죽음의 극한경(極限境)의 미화’이니 하여 분분하지만, 죽음과 같은 비극적 초월, 자기 삶의 부정을 통한 자기 변혁밖에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現代詩의 解釋과 鑑賞(文德守, 二友出版社, 1982)
≪참고문헌≫ 韓國代表詩評說(鄭漢模·金載弘 編, 文學世界社, 1983)
≪참고문헌≫ 李陸史全集(金0xCC53東 編, 새문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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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미를 추구한 주인장의 매력에 이끌려 일주일 뒤에 다시 들린 이 집에는 접시꽃이 나를 맞았다. 앞 꼭지에 있는 집의 대문간에 서서 우리나라 어디에나 산재한 접시꽃이 비시시 웃고 있었다. 주돈이의 <애련설>을 보면, 도연명은은일의 곷으로국화를 홀로 사랑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당나라 이세민 이후로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연꽃을 좋아하는 심경을 고백하엿다.

중국 육조시대 진(晉)나라 도연명이,

採菊東籬下동쪽울타리아래서국화를꺾다가
悠然見南山유연히남산을바라보네.

를 읊은 이후로 국화는 오상고절( 傲霜孤節)의 상징으로 한자문화권의 상류계층 사람들에게 선호도 높은 꽃이 되어 사군자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주로 조화로 사용되다 보니 인기 없는 꽃이 되었다. 보랏빛만 하더라도 한때 서울시에서 시내버스 빛깔로 사용했지만 이것 역시 바이올릿빛이 서양의 초상집 분위기 운운하여 요즈음은 그런 색상의 버스가 많지는 않다. 개인의 가치관과 선호도가 얼마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영향을 받는가 하는 데 대한 극명한 사례라 하겠다.

최치원이 접시꽃을 소외당한 꽃이라니 국화와 모란을 사랑한 중국인들, 중국문화 특히 유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불교의 논리에 맞먹는 논리를 개발한 송대 성리학의 개조 주염계 선생이 생각난다. 아이러닉한 것은 석가가 개발한, 염화미소(捻華微笑)의 상징물인 연꽃을 사랑한 것이라 생각한다.

열두 살에 당나라에 유학한 최지원은 <秋夜雨中(추야우중)>에서 비오는 날 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 앞에 앉아 만리길을 달려가는 향수를 노래하기도 했지만, <촉규화<에서는 길가의 접시꽃을 보고는 이방인의 소외감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도종환은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생명의 연대감으로 승화시켜 <접시꽃 당신>에 담았다. 두 시를 함께 감상해 본다.

<蜀葵花> *접시꽃-자신의 신세

寂寞慌田側 적막한 거친 땅 곁에

繁花壓柔枝 번성한 꽃이 약한 가지 누르네.

香輕梅雨歇 매화에 비 개니 향기도 가벼워라

影帶麥風欹 보리밭 스쳐온 바람 그림자 드리운다.

車馬誰見賞 수레나 말 탄 사람 뉘라서 보아주리?

蜂蝶從相窺 벌이나 나비만이 한갓 서로 엿보네.

自慚生地賤 태어난 땅 천한 것 스스로 부끄러워

堪恨人棄遺 남에게서 버림받고도 그 한을 견디누나.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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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금 후 알려진 북쪽 시인에 백석과 이용악이 있다. 남쪽 시인들은 애송시로 백석의 아래의 시를 꼽았다. 그것도 서정주, 김춘수, 김수영을 제치고 애송시 부문 1위에 올랐다고 한다.

http://news.empas.com/show.tsp/cp_ch/20080130n24754/?kw=%B9%DA%BD%C3%BA%C0+%B9%DA%BD%C3%BA%C0+%7B%B9%DA%BD%C3+%BA%C0%7D+%7B%7D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 석(白石)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혹은 스스로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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